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이맘때면 김장 담그기가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집안 행사다. 11월의 주부들의 인사는 “김장은 했느냐”, “올해는 배추 몇 포기나 할 것이냐”이다. 나도 해마다 그런 인사를 받지만 대답은 한결같다. “전 김장하지 않아요.”결혼한 지 42년째다. 김장을 딱 두 번 했다. 아, 올케들이 와서 한 것까지 치면 세 번이다.젊었을 적, 한 5년 시어머님과 함께 살았다. 모시고 살았다기보다 얹혀살았다는 표현이 맞다. 시간강사로 학교에 다니면서 학위공부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어렸다. 어머님께서 전적으로 살림 맡아주시고, 아이들이 제법 클 때까지 돌봐주셨다. 큰살림을 척척하셨던 어머님이셨다. 친척 중에 잔치가 있으면 메밀묵을 쒀서, 혹은 유과를 만들어 보내시곤 하셨다. 김장철, 이른 아침에 눈 뜨면 배추 100포기가 마당 한켠 수돗가에 쌓여 있었다. 저녁에 거들어야지 생각하고 퇴근 후에 돌아오면 이미 버무려놓으셨다. 일손 빠르신 어머님 덕분에 나는 겨우내 김장독에서 물에 둥둥 뜬 김치를 건지느라 애를 먹었다.그즈음 한해, 어린 마음에 객기를 부렸다. 그래도 명색이 며느리인 내가 김장을 해야지 싶었다. 한식요리책을 사서 김치 파트를 열심히 공부했다. 비늘김치, 호박김치, 개성보쌈김치 등 맛있고 특색있어 보이는 김치 몇 가지를 멋부리듯 만들었다. 결과는 실패. 한 달쯤 후 어머님께선 늦은 김장을 다시 하셨다.김치냉장고가 처음 나올 때였다. 김장하자던 남편에게 김치냉장고를 사주면 하겠다고 했더니 남편은 바로 사들였다. 그 해 또 한 번의 김장을 한 게 내 인생 김장 역사의 전부다. 10년 전 이맘때, 친정엄마가 돌아가셨다. 엄마를 모셨던 오빠는 청주에 살았다. 고향 가까운 대구에서 장례를 모시자며 형제간 합의했고 우리 집에서 모든 상을 치렀다. 장례 후 삼우재까지 지내려 삼남매와 올케들이 모두 집에 있었다. 이참에 김장이나 하자며 큰 올케가 주도해서 집엔 갑자기 김장 풍경이 펼쳐졌다.내가 김장하지 않아도 우리 집엔 맛있는 김장김치가 해마다 넘쳐났다. 큰집과 작은집 형님들이 직접 농사지은 배추로 담근 김치와 쨍한 맛의 동치미는 겨우내 식탁에 올라 우리 식구를 감동시켰다. 올케도 김장을 하면 해마다 보내주었다. 싱싱한 명태를 넣은 김치는 감칠맛이 그만이었다. 이웃에 사는 친구도 김장하는 날이면 김장체험하라며 부르곤 했다. 그리고는 한 통 가득 김장을 나눠주었다. 대학교 은사님의 사모님도 김장철이면 일부러 전화를 주셨다. “이 교수 올해도 김장 안했지. 그럴 줄 알고 좀 더 담았으니 가져가시게.” 이렇게 동서표, 올케표, 친구표에 사모님표까지 다양한 김치가 넘쳤다.최근에는 김장할 줄 모르는 내 처지를 아시는 청도의 어르신은 직접 아파트에 가져다 두시고 안동의 한 어르신은 택배로 보내주신다. 올해는 안사돈께서 귀하게 담근 배추김치에 고들빼기김치며 들깨김치까지 보내시니 황송하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세상에 나같이 김치복, 아니 인복 많은 이는 다시 또 없을 거다.
2023-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