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대단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니 가을걷이라 할 것은 없다. 풀이 자라도록 버려두기엔 넓은 터가 아까웠다. 온갖 풀들은 일주일만 눈길을 안 주면 기세등등 자란다. 풀을 이기기엔 꽃만 한 게 없다. 또 잘만 자라주면 더없이 아름다울 것. 봄날 며칠을 고생하며 풀과 씨름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백일홍꽃씨를 잔뜩 흩뿌렸었다. 6월 초부터 꽃 피우기 시작한 백일홍은 10월 말까지 일록달록 피어있었다. 100일 붉게 피는 꽃이라 백일홍일 텐데 거의 다섯 달을 핀 셈이다.
백일홍 덕분에 지난 여름이 참 즐거웠다. 매주 바뀌는 꽃밭 풍경은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까웠다. 사진을 찍어 여기저기 퍼나르며 마구 자랑을 해댔다. 찍은 꽃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바꾸었다. 첫날 핀 한 송이 꽃, 일주일 지난 후 제법 어우러진 꽃밭, 동네 모든 나비가 우리집에 온 듯 나비에게 아낌없이 꿀물을 내어주는 꽃, 비오는 날 빗소리에 취해 흐드러진 꽃 등등의 사진을 본 친척과 지인들이 찬탄하며 답장을 주었다.
‘꽃멍하러 오세요.’ 꽃밭으로의 초대 러시가 시작되었다. 서울의 손녀들이 왔다. 대구의 손주들과 합해, 꽃밭에서 나비를 좇으며 놀았다. 조용하던 육신사 골목이 청량한 애들 소리에 모처럼 시끌시끌해졌다. 꽃이 좋다는 후배는 꽃멍만 했다. 한여름 태풍을 뚫고 오신 지인들은 하룻밤을 같이 지내며 회포를 풀었다. 백일홍꽃밭을 배경으로 그네에 앉아 온갖 포즈의 사진을 따로 또 같이 찍었다. SNS의 프로필 사진을 바꾼 분도 있었다. 90이 넘으신 외삼촌 내외도 모처럼 모실 수 있었던 것도 백일홍 덕분이었다. 백일홍이 저렇게 흐드러진 것은 80평생 처음 본다며 감탄하시는 청도의 어르신을 모시고 왔으며 꽃구경하러 집에 들어오세요. 팻말도 붙여놓았다.
지난 10월, 퇴직 후로는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학회에 모처럼 참가했다. 학회 후 간담회에서 이런저런 얘기 중에 하빈 묘골이 친정이라는 교수님이 말했다. “지난 여름 모처럼 친정엘 갔는데 꽃밭을 예쁘게 가꾼 집이 있는 거예요. 너무 예뻐서 주인이 안 계시는 걸 알면서도 마당 안으로 들어가서 백일홍 구경을 실컷 했답니다.” 내가 주인장이며 내가 가꾼 꽃밭이라는 대답에 기이한 인연도 있다며 크게 웃은 일도 있었다.
올해의 꽃은 단연 백일홍. 앞으론 이 꽃 저 꽃 고민 말자. 이제 우리 집을 백일홍 꽃집으로 하자. 남편과 합의했다. 그러려면 꽃씨를 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
주말마다 꽃씨를 채취했다. 시들어 마른 꽃씨를 가위로 따 모았다. 그때까지도 색을 버리지 않은 꽃은 그대로 두었다. 갑자기 추위가 닥치자 조바심이 났다. 과연 꽃들은 다 졌고 누렇게 변해있었다. 남편은 대궁이를 뽑아 눕히고 난 쭈그리고 앉아 꽃씨를 땄다. 그렇게 하루종일 백일홍 가을걷이를 했다. 산처럼 쌓인 대궁이를 어쩌나 고민하다가 마당 한켠에 모아 발효액을 넣어 비닐을 덮어 둘 참이다. 내년에 퇴비로 쓸 수 있을까 해서다. 어쩌면 그 두엄더미에서도 백일홍이 피지 않을까 고운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