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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어(Spare)

경북매일
등록일 2025-06-04 18:15 게재일 2025-06-05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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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스페어는 영어이지만 우리 일상에서도 종종 사용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있는 단어다. 급한 경우에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예비로 준비하여 두는 같은 종류의 물품을 이른다. 볼링에서는 남은 핀을 그 다음에 모두 쓰러뜨리면 스페어 처리라고 한다. 스페어 타이어(spare tire)는 자동차의 펑크에 대비한 예비 타이어다. 어떤 단어이든 간에 여분이나 예비용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외래어로 그대로 쓰고 있어 익숙한 말이다.

그런데 이 스페어라는 단어를 다소 생경한 의미로 사용한 책을 최근에 읽었다.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즐겨 본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지만, 특히 서양 왕실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일부러 찾아보고, 본 걸 또 볼 정도로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영국 왕실 배경 영화는 시대를 가리지 않을 정도로 즐긴다. 좋아하는 영화를 역사로 확인하려고 종종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기도 한다.

그러던 중에 포착된 책이 바로 영국의 둘째 왕자 해리가 쓴 ‘스페어(Spare)’였다. ‘예비용 왕자에서 내 삶의 주체가 되기까지’라는 부제가 붙어있었고 책 소개글에 이렇게 적혀있다. “형은 나보다 두 살 위인 데다 왕위 계승자였고, 반면에 나는 ‘예비용(spare)’이었으니까.” 스페어라는 말은 그가 태어난 날, 그의 아버지이자 현 영국의 국왕인 찰스가 한 말이기도 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그 자체로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고 고결한 것이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심지어 미물이라 할지라도. 따라서 어느 누군가의 탄생도 여분일 수 없고, 예비용일 수는 없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예비용이라니, 그것도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니 정말 말이 되는 말인가. 아들의 탄생을 기뻐하고 아내의 수고로움에 대한 고마움을 표해야 할 그 순간 뱉은 말이라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충격이었다.

평소 찰스가 왕자였을 때도, 그의 결혼 전 갖가지 추문과 행실에도, 다이애나와의 결혼과 이혼, 다이애나비의 충격적 죽음 이후 지금의 왕비와의 연애사와 결혼에 이르는 온갖 뉴스를 접할 때도 밉상이었던 그였는데, 속물적 근성의 그를 철저히 경멸하기로 작정한 것은 바로 이 책 때문이었다. 책을 소개하면서 저자가 처음으로 전하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여실하고 주저없이 솔직한 태도로 삶의 여정을 기록한 기념비적인 책이며, 통찰과 고백, 자기성찰, 그리고 힘겨운 삶 속에서도 슬픔을 넘어서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깨달음으로 가득한 향연이라고 야단을 떨었지만 아직 40살도 채 되지 않은 남자의 삶이 뭐 그리 성찰적이겠는가. 단지 그가 특별한 신분의 왕자의 삶을 살아 세간의 관심이 힘들었고, 누구나 다 겪는 방황의 시기를 어머니의 죽음으로 더 특별히 겪었을 것이라는 정도의 내용은 뭐 그다지 감동을 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나는 그가 태어나면서 규정된 ‘예비용(spare)’의 삶을 어찌 살아내었는지에만 관심이 쏠렸고, 그것이 안쓰러웠을 뿐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의 삶도 예비용은 없다. 온전히 그만의 삶이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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