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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하고 천천히”

등록일 2025-12-23 16:36 게재일 2025-12-2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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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알람 소리에 깬다. 그러나 눈을 뜨지도 않고 몸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누운 채로 양손을 양쪽 귓속에 넣어 위아래로 당긴다. 뒷목에서 어깨까지 훑듯이 마시지 한 후 발끝 마주치기 30번. 이명 치료에 좋다는 운동이다. 그렇게 하면 몇 분 후 눈이 떠진다. 일어나 주방으로 가서 제일 먼저 물을 마신다. 공복에 마시면 좋다는 게 왜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다. 들기름도 먹어 보고, 미지근한 음양수도 마시다가 최근엔 거기에 소금을 조금 타서 먹으라고 해서 아예 정수기 옆에 작은 소금통을 가져다 놓았다. 이조차도 자주 잊으니 아직 몸에 배려면 멀었다. 두유기에 콩을 계량해 넣어 버튼을 누르면 32분 후에 두유가 만들어질 거다. 그 사이 다시 방으로 가서 TV를 켜기도 한다. 아니면 냉장고에서 몇 가지 채소를 꺼내 씻고 썰고, 빵 한 조각을 에어프라이어에 넣으면 아침 식사 준비는 거의 다 된 셈이다. 그즈음 로봇청소기가 청소를 시작한다고 예고를 한 후 돌아다니기 시작하고, 나는 남편을 부른다. 은퇴하고 4년 정도 지나니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일들은 이렇게 어느 정도 정돈이 된 듯한 루틴이다.

4년 전, 은퇴 후의 삶을 꽤나 거창하게 계획했다. 버킷리스트를 만들었고, 메모해 두고 실행하려고 애썼다. 주위에도 알리고 칼럼까지도 썼다. 스스로의 다짐을 공표하여 실천력을 높이려는 얄팍한 의도였겠다. 가끔씩 메모를 체크해 보기도 하는데, 실천한 것도 많고, 변경한 것도 있고, 추가한 것도 있으나 포기한 것도 있다. 계획은 계획일 뿐이니 스스로 변명하고 위안하면 토닥인다. 인생이 목표를 정하고 아등바등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성취도 좋고 만족감도 짜릿하긴 하다. 그러나 거창하지도 별스럽지도 않은 매일의 일상을 충실히 사는 것, 매일매일의 아침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순간순간의 평온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일본의 93세 할머니의 하루를 손자가 찍어 올린 유튜브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고 이불 털고 점심 만들어 먹고 밭에서 일하고 피아노 연습을 하고 또 저녁을 만들어 먹고 잠자리에 드는 기노에 할머니의 하루는 마치 할머니 자신을 위한 경건한 의례 같았다. 할머니의 일상에서 감명을 받은 건 자신의 삶에 대한 최고의 예의라는 인상 때문이었다.

작년 이맘때쯤 쓴 좌우명이 생각난다. “여전히 나답게 살자.” 아마도 ‘나다운 나’에 집중하는 한 해를 살아보자고 한 다짐이었다. 매사에 열심히 살며 충실하자는 의미였을 텐데, 이제 일 년 지나 되돌아보니 글쎄다 싶다. 어떤 제안도 부탁도 거절하지 않고, 새로운 계획도 즉흥적인 약속에도 몸을 사리지 않았다. 겹친 일정을 조정하고 헤쳐 나가면서 야릇한 쾌감마저 느꼈다. 성취도 있었으나 그러다 보니 몸에 부쳤는지 난치성 이명을 얻게 되었다. 얻은 만큼 잃었다. ‘여전히 나답게’ 살았을진 몰라도 나를 위한 삶은 아니었음을 깊이 뉘우친다.

“단순하고 천천히.” 내년을 위한 새로운 좌우명으로 정했다. 그렇게 일 년을 살아보자. 나의 일상을 바지런한 기노에 할머니처럼 충만하게 꽉 채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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