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묘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처음 신라에 불법을 전하겠다는 아도에게 그의 어머니 고도령이 일러 준 칠처가람 중의 하나일 정도로 중요한 절이었다. “신라에는 부처 이전에 이미 일곱 군데의 절터가 있다. 흥륜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영묘사, 사천왕사, 담엄사이며,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를 곳이다. 네가 그곳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하고 선양하면 석존의 제사가 동방으로 향해올 것이다.”
영묘사는 선덕여왕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선덕여왕이 창건했을 뿐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첫째는 ‘선덕왕지기삼사’ 에피소드다. 어느 겨울날 영묘사 옥문지에 개구리가 많이 모여 삼사일을 울었다. 겨울에 개구리가 우는 것이 이상하다고 여긴 사람들이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듣자마자 이렇게 명령을 내렸다. “각간 알천과 필탄은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으로 가라. 그곳에 적병이 숨어있을 것이다.” 여왕의 지시로 여근곡에 숨어있던 백제 군사 5백 명을 모두 없앨 수 있었다.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의 하나로 거론되는 일화다.
또 하나는 ‘지귀설화’다. 선덕여왕은 영묘사(靈廟寺)에 자주 행차하였다. 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윗대 조령과 당시 삼국전쟁의 영령들을 모신 절이기 때문이었다. 혜공이라는 신이한 능력을 가진 스님이 영묘사의 화재를 미리 알고 새끼줄을 가져와 금당과 좌우 경루, 남문의 회랑에 둘러 묶고 3일 후에 풀라고 당부한다. 3일 뒤 선덕여왕이 행차하시고, 지귀의 가슴에서 불이 나서 그 탑을 태웠으나 오직 줄을 묶은 곳만은 면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이 이야기는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광범위하게 유통되어 전승되었고, 고려시대 ‘수이전’, 조선의 ‘대동운부군옥’에 심화요탑이라는 제목의 설화로 전하고 있다. 지귀는 선덕여왕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그를 짝사랑을 하였고 상사병으로 몸이 점점 여위어 갔다. 그러한 지귀의 소문은 널리 퍼졌고 소문을 듣고 지귀를 불렀다. 어리석은 지귀는 탑 밑에서 여왕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다. 여왕이 자신의 팔찌를 빼어 지귀의 가슴에 놓고 돌아가셨다. 잠에서 깬 지귀는 그 팔찌를 보고는 여왕이 다녀갔음을 알았다. 이에 사모의 정과 자신의 어리석음에 불귀신으로 변해 버렸다.
영묘사는 신라의 위대한 조각가인 양지가 장육존상을 만들었으며, 이때 성안의 남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라 도왔다고 했으며 사람들은 신라 향가 ‘풍요’를 불렀다고 했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슬픔 많은 우리 무리여 공덕 닦으러 오다.”
그러나 현재 영묘사는 경주의 지도에 없다. 칠처가람 중 절이나 절터로라도 남아있는 다른 절과는 달리 영묘사는 흥륜사에 가야만 그 흔적을 더듬을 수 있다. 몇 년전 흥륜사 주변에서 영묘사(靈廟寺)라고 적힌 기와 조각도 나왔고, 여기서 발굴된 ‘신라인의 미소’라 불리는 기와에도 명문이 있다. 현재 흥륜사는 사적 ‘경주 흥륜사지’로 지정돼 있으나 학계와 지역에서는 흥륜사지가 사실은 ‘영묘사지’라는 설이 힘을 얻고 있다.
며칠전 선덕여왕경모회에서 찾은 흥륜사 경내엔 마침 절터 발굴 중이었다. 영묘사가 제 자리에서 제 이름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