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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보다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도쿄 변두리의 허름한 이층집. 이른 새벽 노인의 빗질 소리에 깬 주인공은 어슴프레 푸른 창문을 보고 벌떡 일어난다. 이부자리를 개고 양치와 면도를 한 뒤 보랏빛 조명의 테라스에서 키우는 분재에 정성스레 물을 준다. 의식처럼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현관 입구에 가지런히 둔 자동차 열쇠와 카메라를 챙기고, 동전을 몇 개 집어 문을 나서면서 바로 쳐다보는 하늘에 엷은 미소를 짓는다. 집 앞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하나 사서 자동차에 올라 카세트에 올드팝 테이프를 넣고 출근길에 오른다. 중년의 남자, 그는 도쿄 공중화장실 청소부다. 과묵한 성격의 주인공은 화장실 청소부란 직분에 더없이 충실하다. 수많은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정성껏 청소하고 점심땐 공원이나 신사의 벤치에서 샌드위치와 우유로 점심을 때우면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카메라로 촬영한다. 퇴근 후에는 자전거를 타고 목욕탕에서 하루의 피로를 빡빡 씻고, 단골 식당에서 술 한 잔을 곁들여 저녁을 먹고 돌아와 책을 읽다 잠든다. 일주일에 하루는 코인세탁소에서 청소복을 빨고, 헌책방에 들러 책을 사거나, 사진관에 가서 필름을 맡기고, 인화된 사진을 찾고, 또 하나의 필름을 사서 카메라에 넣는다. 철없는 동료청소부와 그의 애인, 화장실에서 만난 아이나 외국인 여성이나 취객, 단골식당 주인이나 또 다른 단골술집의 여사장, 단골 헌책방 여주인, 점심때 공원의 옆 벤치에 앉아 역시 샌드위치를 먹는 여성은 모두 그의 일상의 오브제이며, 그의 하루 루틴은 완벽하다 못해 단단하다. 영화는 그의 이런 일상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어느날 퇴근하니 외삼촌을 찾아온 조카가 계단에 앉아있다. 이제 무슨 사건이 나나보다. 드디어 그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변화가 생기나 보다 기대했지만 아니었다. 조카에게 침실을 내주고 좁은 창고방에서 자는 것 외엔 바뀌는 게 없다. 오히려 조카가 그의 일상에 스며든다. 함께 화장실 청소에 나선 조카는 그와 같이 공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고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목욕탕에도 같이 가고, 삼촌의 책을 읽으며 잠든다. 여동생이 조카를 데려가자 끝. 사춘기 소녀 조카의 가출도 그의 일상을 흔들지 못했다. 단 하루 동료청소부가 일을 관두자 두 배 늘어난 일로 피곤한 하루, 컵라면으로 저녁을 때우지만 신입이 오자 그의 루틴은 다시 탄성을 찾는다. 이정희 교수가 꼭 보라고 추천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그저 사건 하나 없이 반복되는 주인공의 일상을 보여준다. 다큐멘터리보다 더 심심한 스토리지만 오히려 울림이 크다. 무겁고 험하고 슬픈 사건들로 넘쳐나는 뉴스를 외면한 지 달포가 다 돼간다. TV에서 뉴스를 피하려니 자연 영화를 찾게 되었고, 지난여름부터 별렀던 영화를 하필 지금 봤다. 주인공의 심심하고 충실한 나날은 그가 정성껏 닦아놓은 화장실의 거울만큼 빛나고 변기만큼 정갈하다. 그의 흑백 사진 속 나뭇잎 같은 무채색의 일상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가를 깨닫게 된다. 비행기 추락 속보가 일요일 아침을 삼켜버린 후 TV에는 슬픔이 넘치니 새해 복 많이 받으란 인사가 송구하다. 소소하되 행복하고 충만하되 무탈한 일상은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것인가.

2025-01-01

나답게 살자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나이 들면 무엇보다도 외롭고 쓸쓸함이 가장 무섭다고들 했다. 고독력도 힘이라지만 그건 정신력이 강한 자의 얘기일 뿐 평범한 사람에겐 외로움이 가장 힘들 거라고 했다. 반드시 정기적인 만남으로 누구라도 만나 인간관계를 두텁게 해야 즐거운 노후가 될 것이라는 충고들이 많았다. 난 절대로 외로운 노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작은 모임을 만들고자 애썼고 마음 통하는 분들을 만날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되었다. 손주들 영어학원에서 매일 만나 정든 ‘할매’들과 매월 둘째 화요일-그래서 모임 이름도 ‘이화회’다-마다 만난 지 벌써 햇수로 3년째다. 점심 먹고 차 한 잔 나누며 시간가는 줄 모르는 수다는 늘 즐겁고 유쾌하다. ‘도보문화산책’은 처음 경주산책에서 시작했다. 몇 년 넘자, 공간은 경주를 넘어 전국으로 확대되고 문화적 범위와 관심사도 미술, 카페 등으로 확장되었다. 전공이 다양한 5명의 구성원들로 대화의 주제는 크고 넓고 수준은 높다. 내방가사를 중심에 두고 만나는 모임도 몇 있다. 안동의 ‘내방가사전승보존회’는 출입한 지 벌써 30년이 가깝고,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지만 한결같이 예절바른 어르신들의 손은 잡을 때마다 애틋하고 정답다. 역시 내방가사를 인연으로 만나 서로가 서로의 스승이며 제자 관계로 얽힌 세 명의 ‘흰머리소녀’도 햇수로 거의 20년이 다 되어간다. 검은 머리의 40~50대에 만나 모두 흰머리의 60대를 훌쩍 넘었다. ‘내방가사 세자매’는 내방가사가 주된 관심사였고 서예에서 가사에서 논문까지 오직 내방가사에 대한 얘기지만 그 사이 자매애까지 생겼다. ‘선덕여왕경모회’는 경주의 내로라하는 여성 리더들이 선덕여왕을 중심으로 모인 제법 큰 여성단체인데, 격월의 정기모임은 품격이 높다. 매월 셋째 주 일요일, 사촌언니를 따라 ‘108기도순례’에 참가한 지도 반년이 넘었다. 이 정도면 성공적 노후 준비 아닌가. 벌써 한해가 저문다. 이 나이쯤 되면 그날이 그날이고, 그 달이 그달 같고, 그해가 그해 같다. 별 큰 일 없이 그저 그런 평화롭고 고요한 일상이 고맙고, 나날이 맞는 새 날이 행복할 따름이긴 하다. 그럼에도 그저 그런 날에다 방점을 찍고 싶고, 별난 이벤트로 새롭고 특별한 날을 만들기를 즐기는 나였다. 그러니 이즈음을 그냥 슴슴하게 지내는 건, 가고 오는 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마침 모임마다 송년회를 하자는 뜻을 비치니 얼마나 반가운지. 지난 달 중순부터 슬슬 송년모임을 하나씩 치렀다. 평소와는 좀 멋진 식당에서 특별한 음식을 먹고 따뜻한 이벤트도 하면서 작은 선물이라도 교환했다. 지난 주 있었던 ‘선덕여왕경모회’송년모임에서였다. 한 회원이 고맙게도 나무트레이를 만드는 체험프로그램을 준비해 주셨다. 작은 종이를 나누어주면서 각자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고 읽으라 했다. 모두들 자신을 사랑한다고, 덕분에 행복했다며 자신을 격려하였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적고 읽었다. ‘여전히 나답게 살자.’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나다움이 뭐지? 자신감? 격려? 긍정?’ 이제 생각해 보니 이는 내가 나에게 던진 커다란 화두 같다. 내년엔 이 숙제 같은 화두 ‘나다운 나’에 집중해 보아야겠다.

2024-12-25

안민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노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임금은 아버지요/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신다면/백성들이 임금의 사랑을 알 것입니다./열심히 사는 백성들을/배불리 먹여 다스린다면/‘내가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랴?’라고 백성들이 말한다면/나라가 유지될 줄 아실 것입니다./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처신한다면/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향가 중의 하나인 ‘안민가(安民歌)’다. 제목처럼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비책을 노래하고 있다. 경덕왕 24년(745년) 3월 3일에 왕이 신하들과 함께 월성 남쪽에 행차서 훌륭한 고승을 찾으라 했다. 그가 바로 충담사(忠談師)였다. 충성스러운 말을 하는 스승이라는 이름이다. 충담사가 유명한 시인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던 왕은 자신을 위한 노래를 부탁했고 충담사는 즉석에서 ‘안민가’를 지어올렸다. ‘안민가’는 왕과 신하와 백성의 관계는 혈연관계와 같다고 비유했다. 왕은 아버지요, 신하는 어머니요, 백성은 자녀와 같다. 집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이들이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자기 본분을 다하면 가정이 잘 유지된다. 나라도 이와 같으니 왕과 신하와 백성이 서로가 맡은 바 책무를 제대로만 다한다면 나라가 태평해질 것이요, 백성이 배부르면 나라를 떠날 일이 없을 것이다. 왕에 대한 따끔한 정치적 충언(忠言)이다. 이 노래는 현재 임금과 신하와 백성 각자가 제 역할을 못하여, 상호간 사랑과 신뢰가 무너졌고, 악정에 시달린 백성이 나라를 떠나려 하고 있으니 결국 나라가 태평하지 못함을 반증한다. 따라서 임금에게 그 책임을 묻고, 올바른 정치를 권고하는 뼈아픈 충간(忠諫)이다. 임금이 원한 임금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임금이 해야 할 일을 주문하는 눈물어린 충담(忠談)이다. 경덕왕이 죽기 1년 전이었다. 경덕왕 말년은 귀족들이 두 파로 대립된 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시대였다. 왕은 당시 정치상의 비리를 과감하게 청산하지 못했고, 의욕적인 중앙집권화 정책은 귀족세력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로 돌아갔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이 경덕왕과 충담사의 만남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고승 충담사를 왕이 불러서 ‘안민가’를 짓게 했고 이를 통해서 귀족세력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안민가’가 질타하는 대상은 귀족세력이 아니라 경덕왕이라는 것이다.‘안민가’는 왕에게 올리는 충언이고 그 핵심은 마지막 구절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니라.”에 있다고 본다. 이는 경덕왕의 치세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답지 못하고, 백성답지 못해서 나라가 태평하지 못하다”라는 현실의 역설적 증언이며, 결국 경덕왕의 치세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이라는 해석이다. ‘안민가’는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 오늘의 상황에 딱 맞아떨어지는 노래라는 점에 소름끼치도록 놀랍다. 무소불위의 대통령, 정쟁에만 몰두한 국회에 넌덜머리가 난 국민은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 온 국민이 불안에 떨고 우울감에 빠진 혼란의 이 시점에 충성스러운 이야기를 해 줄 이, 이 시대의 충담사는 어디에 있는가.

2024-12-18

삶과 길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나의 버킷리스트 중 일순위인 한국어해외봉사를 하려면 한국어교원 자격증 취득이 필요했다. 국어교사자격증도 있고, 국문과 대학교수 25년 경력이 있어도 외국인 대상 한국어교수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예전엔 국어교사 경력으로 대체인정해주었는데 법이 더 엄격해졌다. 자격증 취득을 위해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을 찾아 검색했다. 원격평생학습 학점은행제가 가장 적당해 진흥원격평생교육원에 상담했다. 대부분의 사이버대학에서는 2년이 꼬박 소요된다는데 1년 반만에 가능하다기에 2026년 취득 목적으로 2주째 열공 중이다. 매주 개설되는 과목을 15주 동안 수강하고 쪽지시험, 중간고사, 기말고사도 치고, 과제 제출도 해야 한다. 강의 신청하면 먼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상담사의 말이 있었다. 뭐 어려우랴 쓰면 되지 들어갔더니 좌우명, 취미, 각오를 적으라 했다. 좌우명이라…. 여태껏 좌우명을 따로 정해 둔 적이 없어 잠시 머뭇거렸다. 문득 20대부터 평생을 가르치는 직업에 있다가 7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또 공부하려고 컴퓨터 앞에 있는 내가 보였다. 그래서 이렇게 적어 넣었다. ‘삶은 영원한 배움의 연속이다.’ 지난 일요일 손주 둘을 데리고 영화관엘 갔다. 직장에 육아에 늘 잠이 모자란 아들과 며느리가 주말에 몰아서라도 잠자게 하고 싶었다. 나도 그러지 않았던가. 바깥놀이를 하기엔 추운 날씨라 생각하다 떠오른 게 영화였다. 마침 애들이 볼 만한 영화 ‘모아나2’가 상영 중이었다. 작년만 해도 혼자서 둘을 데리고 극장 가는 게 힘에 부쳤는데, 이젠 아니다. 영화관 입구 도착하자 나는 아들이 예매해 준 표를 키오스크에서 출력했다. 손주들은 또 다른 키오스크에 다가가 각자 원하는 팝콘과 음료를 능숙하게 선택했고 나는 카드만 넣어주면 되었다. 번호표를 뽑고는 기다렸다가 자기 번호를 부르면 찾아가는 것도 자연스럽다.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자리를 찾아 앉고, 앉자마자 좌우 팔걸이에 음료와 팝콘을 세팅하고는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며 간식을 먹고, 가운데 앉은 내 양쪽에서 팝콘을 번갈아 내 입에 넣어주는 것까지 뭐 하나 나무랄 일이 없다. 애니메이션 영화 ‘모아나2’는 여주인공 모아나가 리더가 되어 온갖 저주와 시련을 견디고 헤쳐 모험하는 무용담이다. 손주들은 금방 영화에 몰입했다. 우스운 장면에서는 유달리 크게 웃고, 어떤 장면에서는 주인공을 도와주려고 간섭하고 실패하면 탄식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영화 얘기를 나눴다. 의외로 세세한 장면들을 기억하고 복선으로 장치된 그림이나 벽화 따위를 말하는데 놀라웠다.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한 어떤 장면들은 설명해 주기도 했다. 특히 작중 인물들의 대사들을 또렷이 기억하는 게 신기했다. 손자는 ‘길을 헤매도 괜찮아.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으니까.’라고 말한 마녀의 말을 기억한다고 했다. 손녀는 마우이도 ‘언제나 길은 있어’라고 말했다며 우겼다. 둘 다 옳은 말이다. 난 3000년 나이의 마우이가 ‘인생은 실패하고 배우고 죽는 거야’라고 말하는데 며칠 전 내가 썼던 좌우명과 유사해 살짝 소름 돋았다. 그래 우리의 삶은 길의 연속이지. 배움이라는 길.

2024-12-11

손자의 도시락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요즘 초등학교에선 소풍이나 운동회라는 행사가 없어진 것 같다. 학년별로 과학관이나 테마파크로 가는 체험활동이라는 프로그램이 대신하는가 보다. 손주들이 학교 가면 소풍도 따라가고 운동회도 꼭 가봐야지 기대했는데 많이 아쉬웠다. 체험활동 가는 손자에게 도시락이라도 싸주고 싶었다. 손사래를 치며 말리는 며느리를 설득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내가 바빠 손수 만든 김밥을 싸주지 못한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 밤늦게야 집에 오니 다음날이 소풍이라는 거였다. 미안한 마음에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며 오히려 역정을 냈다. 새벽에 문 여는 김밥집이 있다는 이웃의 정보를 얻어 김밥을 사 도시락으로 넣어준 적이 있다. 아직도 그날이 생각날 정도로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날의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손자에게라도 갚고 싶다. SNS에서 예쁜 도시락을 폭풍 검색해서 하나 골랐다. 문어유부초밥 만들기. 유부초밥에 토핑으로 비엔나소시지를 문어 모양으로 만들어 얹는 거였다. 이거다. 김밥 만들기보다 오히려 간단하고 예쁘고 귀여워 손자가 좋아할 것 같았다. 필요한 재료를 메모해서 남편과 함께 마트에 장보러 갔다. 소시지, 유부초밥세트, 검은깨, 치즈 등과 작고 동그란 구멍을 낼만한 도구도 샀다. 소풍날 늦지 않게 가져다주려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겠다 싶어 장봐온 재료로 미리 연습을 했다. 동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어렵지 않을 것 같았는데 웬걸, 만만치 않았다. 소시지가 커서인지 문어 다리 모양은 너무 뭉툭해서 볼품없었다. 문어 눈이 될 검은깨 박기가 제일 어려웠다. 파스타면에 올리고당을 묻히면 쉽다는데, 면은 부러지고 깨는 튀어나온다. 입 모양으로는 치즈에 빨대로 도넛 모양 구멍을 내는데 자꾸 갈라진다. 아무리 연습해도 모양이 나질 않았다. 더 작은 소시지와 도구가 필요했다. 24시간 영업하는 식자재마트에 달려갔다. 다시 사온 소시지는 좀 나았다. 영상 속의 문어와 근사한 모양이 나온다. 소시지 두 봉지 중 연습용으로 한 봉지를 다 쓸 정도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밥을 미리 안쳐두고 잠시 눈을 부쳤다. 서너 시간 잤나, 새벽 5시 알람에 눈을 떴다. 간밤의 연습대로 문어유부초밥 만들기에 돌입했다. 문어 다리 모양은 얼추 나왔는데, 눈이 될 검은 깨박기는 여전히 어려워 잘 박히지 않았다. 구멍이 작으면 들어가지 않고 더 크게 뚫으면 연방 튀어나오고야 만다. 이러다간 안되겠다 싶어 손톱으로 껍질을 뜯어 손가락으로 깨를 쑤셔박는다.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영 진도가 나질 않는다. 초조한 맘에 손은 더 무디고 더뎌진다. 문어유부초밥만으로 도시락을 다 채우기엔 시간이 모자라겠다 싶었다. 집 부근 김밥집에 전화해 달걀꼬마김밥을 주문했다. 등교 시간 전에 맞춰 겨우 가져다줄 수 있었다. 며칠 후 만난 손자에게 도시락 맛있었냐고 물었다. 응 맛있었어. 그런데 도시락을 열었더니 문어 눈은 없어지고 입도 떨어지고 까만 김띠도 풀어졌어. 그래도 딱 한 개는 괜찮았어. 애들이 모두 보고 와~~ 했어. 헛수고는 아니었겠지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2024-11-27

사계절 모기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이라는 전래동화가 있다. 아들이 서당에 갔다 돌아와 보니 어머니가 죽어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꽁지 닷 발 주둥이 닷 발 되는 괴물이 어머니를 해코지했다고 알려줬다. 아들은 복수를 결심하고 괴물을 찾아 길을 떠난다. 가는 길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서 힘든 일을 해주는 대가로 괴물이 살고 있는 장소를 찾아낸다. 괴물의 집에 숨어 있다가 부엌으로 유인하여 솥 안에 가두고 불을 때어 태워 죽인다. 이 괴물이 죽은 재가 변해 주둥이가 길고 꼬리도 긴 모기가 되었다는 모기의 유래담이다. 베트남의 ‘모기의 기원담’은 또 다르다. 남편의 지극한 사랑을 배신한 부인이 결국 벌을 받아 모기가 된다는 얘기다. 저승까지 함께 가기로 약속한 부부가 결혼 후 오래지 않아 부인이 죽자 망연자실한 남편이 매일 세 번씩 아내의 시체를 안으며 환생을 기원한다. 갸륵한 남편을 위해 부처님은 죽은 아내의 입술에 세 방울의 피를 떨어뜨려 아내를 소생시킨다. 그러나 소생한 아내는 재물에 눈이 멀어 남편을 배신하고 세 방울의 피를 돌려준 뒤 남편을 떨쳐낼 요량이었지만 피를 뽑아낸 후 깨어나지 못한다. 부처님은 아내를 모기로 변신시켜 살게 했다. 또 어떤 나라에는 사냥꾼이 사람들을 괴롭히는 괴물을 해치우고 불로 태우자 괴물의 재가 모기로 변해 사냥꾼을 괴롭혔다는 우화도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상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 어느 때부터 모기는 인간을 괴롭혀온 괴물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모기와의 전쟁이 시작되고, 이 전쟁은 ‘모기의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處暑)가 되면 한시름 놓게 된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지금이 11월, 절기상으로는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는 소설(小雪)이 내일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모기는 윙윙대며 기승이다. 한여름에나 피우던 모기향을 아직도 켠다. 손주들이 온다고 하면 미리 방안에 모기약을 쳐야 한다. 유난히 모기에 취약한 나는 이 가을과 겨울의 사이, 매일 밤 모기에 물린 손과 발, 팔과 다리, 목과 등, 심지어 얼굴에까지 약을 바르며 긁어대고 산다. 그러고 보니 한여름엔 오히려 모기가 없었던 듯싶다. 더위를 피한 저녁과 새벽녘에 풀을 뽑을 때만 영락없이 독한 풀모기에 물렸을지언정 정작 방안에선 모기에 그다지 물리지 않았다. 폭염이 유난히 길었던 올 여름이었으나 정작 30도 이상의 폭염엔 모기도 너무 더워서 날지 못한다고 한다. 대신 따뜻한 가을이 길어지면서 모기 활동기가 늘어났단다. 낮 기온이 13도 이상 되면 모기들이 흡혈활동을 하는데, 11월의 지난주까지도 낮 기온이 20도 가까웠다. 해마다 11월에 치러지는 수능일, 이젠 ‘수능한파’가 아니라 ‘수능모기’를 걱정해야 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앞으로는 1월 기온 평균 기온이 10도 이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연중 모기가 활동할 수 있고, 이는 한여름만이 아니라 사계절 내내 모기와 싸워야 한다는 얘기다. 이 또한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위기 탓이라고 하니 옛이야기 속의 괴물모기 뿐 아니라 지금의 이 모기도 인간이 자초한 것이긴 하다.

2024-11-20

내방가사의 세계기록유산적 가치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세계기록유산(MoW)은 유물이 진품으로서 해당 기록물의 소멸이나 약화가 전 인류 유산을 빈곤하게 만들 정도로 독특하며 대체 불가능한 기록물임을 입증해야 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가치는 세계사적 중요성이다. 세계적 가치는 시간, 장소, 사람, 대상과 주제, 형태와 양식 측면의 가치를 입증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 조건 외에 추가적으로 희귀성, 완전성, 위협요소의 유무 및 보존 관리 계획의 기재도 명시하도록 되어 있다. 내방가사는 위의 등재 기준을 충족하고 그 기록유산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2년 11월 16일,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MoWCAP)에 등재되었다. 내방가사는 종이에 기록된 필사류 원본으로, 개별 문서, 두루마리 또는 선장본(codex)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두루마리본의 경우 10m가 넘는 기록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20m가 넘는 형태의 기록물도 있다. 통일된 유형이 없는 유일본들로, 직접 붓으로 필사한 원본들이다. 내방가사는 1794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여성들이 공동으로 창작하고 낭송하여 기록한 여성들만의 문학 장르이다. 내방가사는 개인에서 집단 창작의 형태로 넘어갈 때 남길 수 있는 다양한 기록물의 형태적 전형성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낭송과 필사 등의 재창작 과정을 통해 내용상 유사한 작품들이 다수 존재하지만, 이 역시 내방가사의 가치를 드러내는 중요한 특징이다. 내방가사는 18세기에서 20세기, 남성 중심주의가 주류였던 시대, 여성들이 그들의 주요 문자인 한글을 사용하여 여성들만의 생각과 삶을 주체적으로 표현한 여성 집단 활동의 결과이다. 또한 20세기 동아시아의 압축적인 역사변혁기에 대한 여성들만의 사회적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이다. 더불어 내방가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창제 원리가 밝혀져 있는 문자인 한글로 기록된 문학 장르이다. 한글로만 창작된 내방가사는 창제된 문자가 한국어의 특징에 맞는 문자로 창작되는 문학 장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방가사를 통해 우리는 창제된 문자가 어떠한 활용 단계를 거쳐 한 사회의 공식 문자가 되는지 추적할 수 있다. 내방가사는 여성 개개인의 주체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집단적 문학 활동’을 통해 여성들 스스로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교육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겼다. 전승의 필요에 따라 입으로 낭송하고, 또 필요에 따라 함께 베끼고 기록하며, 새롭게 내용을 만들어갔던,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집단 창작’의 결과물이다. 어떤 내방가사는 사회와 국가 구성원으로서 그들의 역할과 시대적 사명까지 함께 공유하는 노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내방가사는 한글 서체 미학 관점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낭송, 받아쓰고 베껴 쓰는 과정 등을 반복하면서 지속적으로 필사되었다. 이러한 필사는 여성들의 서체 훈련 과정이기도 했고, 서예사 측면에서 다양한 한글 서체로 발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는 여러 종류의 민간 서체 발굴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 동시에, 현재 한글의 사용 폭을 넓히기 위한 폰트 개발이나 새로운 디자인에 활용될 수 있는 원형 콘텐츠로서 가능성도 높다.

2024-11-13

나의 기울어진 독서벽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노벨상을 받은 한강의 열풍은 침체기의 늪에 빠진 우리 독서계를 순식간에 휘저었다. 서점가엔 그의 소설이 동이 나고 인쇄소에선 밤을 새워 그의 책들을 찍어내는데도 예약 없인 사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광풍 같은 열정은 정말 못말리겠다 싶은 생각도 하면서도 나 역시 그 대열에 끼지 않으면 왠지 애국자가 아닐 것 같았다. 바쁠 거 없어, 이 바람이 어지간히 숙지막하면 사야지 하면서도 괜히 조바심이 났다. 은퇴 후엔 책을 사지 않으리라는 강한 결심을 하고 주로 집 가까운 공공도서관에서 대출카드를 만들어 두고 책을 빌려보던 나였다. 도서관 검색을 해 봤더니 역시나 한강의 책들은 모조리 대출되었다. 예전 ‘채식주의자’를 미국의 지인에게 주고 온 것을 살짝 후회했다. 이정희 교수께서 세 권의 그의 책을 가지고 있다시길래 나중에 빌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남편이 종종 가기를 즐기는 경주 라한호텔에 있는 경주산책이라는 서점에 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직원에게 한강의 소설 없죠? 라고 물었다. 있다며 그가 가리키는 곳, 서점 입구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곳에 한강의 작품들이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게 아닌가. 워낙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서점이라 아직도 팔리지 않은 책이 있구나 생각하면서, 혹시나 다른 사람이 눈치챌까 괜스레 좌우를 살폈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얼른 집어들었다. 나온 지 며칠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새 책이었다. 무려 128쇄, 28쇄나 되었다. 하여튼 책을 들고 집으로 오면서 마침내 나도 애국자(?)가 된 듯 설레며 책 읽을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이 책들은 ‘채식주의자’와 같이 불편해하지 말고 잘 읽어야지 결심을 곱씹었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로 밝힌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규범들을 시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쓰인 그의 소설은 잘 읽혀지지 않았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가기가 쉽지 않았다. 서사로 읽는 보통 소설과 달리 술술 읽혀지지 않은데다가 시 감상하듯 읽어도 만만치 않고 하염없이 더뎠다. 책 뒷면의 “읽는 쪽에서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다고 각오한 사람조차 휘청거리게 만든다”, “시적 초혼과 산문적 증언을 동시에 감행하는 거의 원망스러울 만큼 정확한 표현으로 읽는 이를 고통스럽게 한다”는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말에 동의하면서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위안을 받을 정도였다. 그래도 두 권을 머리맡에 두고, 마치 어려운 숙제하듯이 번갈아 읽고 있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소설의 주된 테마로 삼은 소설가로 박완서가 떠올랐다. 박완서는 자전적인 체험을 소설로 쓴 ‘나목’을 비롯한 대부분의 소설이 작가의 인생과 가족사를 바꿀 정도로 가장 강렬한 경험이었던 6·25를 바탕으로 했다. 뿐만 아니라, 분단국가로서의 현실, 가부장적 가정 구도, 전후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반공주의, 여성, 중산층 등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 아래 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날카롭고 예리하게 관찰한 작품들이 많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배경으로 한 ‘그 남자의 집’을 책장에서 꺼내와서는 단숨에 다 읽었다.

2024-11-06

사찰 순례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매월 3번째 일요일이면, 사찰 순례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 채비를 서두른다. 7월부터였으니 이번 달까지 4번째였다. 사촌언니가 몇 년째 다녔던 ‘청계사 108기도순례’팀에 나를 넣어주어 가게 되었다. 언니가 보여준 일정표에는 일 년 계획이 미리 짜여져 있었고, 전국 팔도를 망라했다. 낮이 긴 여름에는 대구에서 먼 곳인 전남 해남, 강원 동해나 금강산, 충남 계룡산, 경기 화성, 전북 완산으로, 해가 짧아지면 경남 밀양, 충북 영동, 경북 경주였다. 그렇게나 많은 절이 있다는 데에 한 번 놀라고, 내가 가보지 못하고 모르는 절 또한 많은 거에 두 번 놀랐다. 우리나라엔 1만7141개의 사찰이 있고, 그 중 전통사찰은 982개소라는 정보를 검색해 찾아 보기도 했다. 나는 불교도이긴 해서 새해엔 팔공산 거조암을 찾는 루틴이 있고, 일 년 한두 번 108기도하는 정도였다. 기도보다는 역사문화 답사 목적의 사찰기행이 훨씬 많았다. 나의 첫 동참인 7월 일정은 강원도 금강산 건봉사, 화암사였다. 금강산은 북한 쪽에 있는 산인데 우리 땅에도 금강산이 있다니 호기심이 컸다. 미리 검색해보니 강원도 고성에 있으며 우리나라 동해안의 최북단이자 금강산의 최남단에 있는 절이었다. 장마 끝이라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였고, 가는 동안 보게 된 강이나 작은 시내조차도 싯누런 큰물이 넘실대고 있었다. 대구에서 거의 5시간 가까이 소요되는 먼 곳이었다. 관광버스 두 대에 꽉 찬 동반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여신도들이었다. 절에 도착하면 그들은 모두 곧바로 대웅전, 극락전, 삼성당을 차례로 찾아들어가 정성껏 절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나는 삼배 정도만 하고는 절의 역사와 문화재를 찾아 기웃거렸다. 건봉사에는 사명당의승병기념관과 만해 한용운기념관이 있어 그곳에서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화암사는 절 이름대로 우리나라 구비설화의 대표적 화제(話題)인 쌀바위 전설이 있는 절이었으며, 과연 절 건너 야트막한 산 위엔 매우 큰 쌀바위가 있었다. 50년 국문학을 공부했지만, 몰랐다. 이제야 이런 인연으로 이곳엘 올 수 있다니, 몰라서 부끄러웠고,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세상엔 정말 배우고 공부해야 할 곳이 너무나 많다. 공부한답시고 안다고 나섰다간 큰일 날 뻔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첫 시작의 강렬함은 이후의 일정엔 되도록 빠지지 않는 열정을 키웠다. 더구나 먼 여행의 동반들이 재밌고 좋았다. 차 안에선 각자 챙겨온 간식들이 좌석의 앞뒤로, 옆으로 넘나들며 나누어지기 바빴다. 내가 가져간 과일 몇 개를 나누어 덜면 가벼워질 줄 알았던 가방이 더욱 무거워지는 따뜻한 마법. 얼마 되지 않은 동참금을 내면 아침과 점심을 실하게 먹고-강원도는 멀다며 저녁식사까지 챙겨주었다- 먼 길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어디 있으랴. 남편에게 자랑했더니 남자도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 기억엔 남자는 없더라며 손사래를 쳤다. 팔공산 갓바위에 종종 올라 열심히 기도하시는 안사돈께 말씀드려 한 번 동행한 적은 있다.

2024-10-30

나의 삼국유사와 선덕여왕릉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대학원에 다닐 때였으니까 45년 전, 1979년이다. 햇수를 꼽아보니 아득한 세월이다. 한문원전강독 교재가 삼국유사였다. 삼국유사(5권 9편)에는 짧거나 긴 139개의 이야기가 있다. 5명의 학생이 매 주 두 명씩 돌아가면서 원문을 해석해서 읽고 발표하는 식의 수업이었는데 한 사람 당 4~5개 정도의 기사를 선택했는데 나는 주로 여성이 주인공인 기사들을 골랐다. 그 중 하나인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는 당에서 보낸 모란꽃씨가 향기가 없으리라는 것, 영묘사의 개구리 우는 것으로 백제군의 침입을 알아차린 일,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낭산 남쪽 도리천에 묻으라는 이 세 가지 얘기로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찬탄하는 이야기이다. 선덕여왕과의 첫 인연이었다. 한 학기 수업이 끝날 즈음, 삼국유사를 들고 경주 가서 그 현장을 찾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으나 그때뿐, 삼국유사는 잊혀졌다. 표지가 너덜거리는 낡은 책은 서가 한구석에 틀어박혔다. 석사 후 바로 결혼했고, 몇 년 늦게 박사과정을 했다. 육아와 집안일에 출강에 박사과정은 무척 벅찼다. 박사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자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다. 그저 ‘먹고 자고’가 소망일뿐이었다. 논문 쓰느라 소홀했던 아이들에게 온전히 나를 쏟기로 했으나 무위도식했던 나날이었다. 무료하게 방바닥을 뒹굴던 어느 날 책장 속 낡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삼국유사였다. 벌떡 일어나 책을 꺼내드니 깨알같이 주석을 달아놓은 부분이 펼쳐졌다. 동시에 그 옛날 꿈꾸었던 욕망이 떠올랐다. 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네…. 대강 옷 걸쳐입고 그 낡은 책 하나만 달랑 들고 차에 시동 걸어 무작정 경주로 달렸다. 경주에 들어서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대학교 때 답사, 그 후론 온 적이 없었고, 게다가 지금은 혼자다. 막막해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조수석에 얹혀 같이 온 삼국유사를 펼치니 딱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 그래 여기부터 시작하자. 표지판이 제대로 있었던지 모르겠다. 어찌어찌 사천왕사지 부근까지 갔다. 풀숲을 헤치고 기찻길을 가로 건넜다. 제멋대로 자란 풀이 우거진 조붓한 길옆으로는 키 큰 소나무가 완강히 버티고 있는 무덤들이 으스스했다. 무서움을 이기며 한참을 오르자 저 위 커다랗게 빛나는 왕릉이 보였다. 좁고 컴컴한 소나무숲을 지나서였는지 유난히 밝은 빛이 능 위에 쏟아졌다. 내 기억 속의 선덕여왕릉은 언제나 형광색 연둣빛으로 눈부시다. 선덕여왕릉을 시작으로 2년 넘게 경주에서 삼국유사 현장을 누볐다. 책을 쓰신 일연스님의 걸음걸음에 내 발자국이 닿아서였을까 1996년 경주에 개교하는 위덕대 교수가 되었다. 삼국유사 덕분이라 했더니 남편이 그 낡은 책에 하드양장의 표지를 입혀 삼국유사라고 금박으로 새겨 선물해 주었다. 25년 동안 위덕대에선 ‘경주의 삼국유사 현장기행’ 개발에 매진했다. 선덕여왕을 주제로 한 ‘여왕 코스’를 넣어 숱한 답사객들을 안내했다. 그 옛날 대학원생으로 선덕여왕님을 만났던 내가 지금은 선덕여왕경모회장이 되어 능제를 모시는 초헌관으로 뵙는다. 오는 10월 27일, 17번째 선덕여왕릉제의례가 선덕여왕릉에서 거행된다.

2024-10-23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미안함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속보〕노벨문학상에 소설가 한강… 한국 작가 최초 수상.” 지난 주 10일 저녁, TV를 무심히 보고 있는데, 자막으로 뜬 뉴스 속보를 보고 화들짝 놀라면서 나도 몰래 크게 손뼉을 쳤다. 옆에 있는 손자가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더니, 저도 일단 같이 박수를 쳐준다. 그러면서 묻는다. 할머니 왜? 할머니 왜요? 우리나라의 한강이라는 소설가가 세계에서 가장 큰 상을 받는대. 우리나라 소설가가, 그것도 여성이, 또 그것도 젊은 나이의 소설가가…. 흥분된 마음에 믿기지가 않아 스마트폰으로 검색 확인했다. 몇 개의 속보가 같은 문장으로 떴다. 그 속보 아래에 생전 해보지도 않은 댓글을 달았다. “오늘 같이 기쁜 날이 또 있을까요?” 그날 밤 위덕대 이정희 교수와도 문학을 전공하는 교수로서의 기쁨을 문자를 주고받으며 설레는 밤을 잠 못 이루며 보냈다. 오늘은 아주 오랜만에, 정말 몇 년만에 형님이 전화를 주셨다. 올해 85세의 손윗시누님이시다. 깜짝 놀라 받으니 하시는 말씀이다. “한강 소설가가 노벨상을 받는다니 참 얼마나 훌륭하고 장한 일인지, 자네도 좋제? 문학 공부하는 자네가 생각나서 전화해 보네….” 이렇게 우리나라 모든 사람이 모처럼의 기쁜 소식에 한마음이 되었나 싶다. 누군가는 벼락같다고 하고, 누군가는 지구가 흔들렸다고 하고 심지어 아버지인 한승원 작가는 “세상이 꼭 발칵 뒤집어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무어라 더 표현할 말이 없을 정도로 기쁘고 떨린 가슴이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진정이 안 된다. 온 나라가 한강을 알고 많은 세계인이 그의 소설을 읽으려 할 것이니 어찌 흥분되지 않으랴. 그러면서도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 얽힌 작은 에피소드를 떠올리니 몹시 무안해진다. 2017년 여름, 미국의 브링검영대학교에 초빙교수로 가게 되었다. 연구 비자를 얻기 위해서는 미국대사관에서 면접을 봐야했다. 나는 영어를 잘 못해 비자를 못 받을까 조마조마했다. 대기실엔 2~30명이 넘는 면접 대기자가 있었고, 여러 칸의 창구 너머엔 남녀 면접관들이 있었다. 여성면접관과 얘기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 내 이름이 불렸고, 바람대로 여성면접관 앞으로 갈 수 있었다. 인사하고, 내가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미리 얘기했다. 그녀는 웃으면서, 전공을 물었다. 한국문학, 고전문학이라고 대답했더니 그녀는 대뜸 ‘채식주의자(The Vegetarian)’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이지? 당황해서 되물었고, 한강의 소설을 얘기하는 걸로 곧 알아차렸다. 2016년, 영국에서 맨부커 국제상을 수상한 그 책을 아는 것 같았다. 그즈음 나는 책을 사긴 했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 다 읽진 못한 상태였다. 어깨를 으쓱하며 몇 페이지만 읽었고 그 이유는 재미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요란하게 손을 저어가며 꽤나 많은 얘기를 했다. 다는 못 알아들었지만 분명히 들린 말, 똑똑히 기억하는 말은 “불편했어요.(uncomfortable!)” 나도 그렇다고 냉큼 대답하며 마주 웃었다. ‘채식주의자’는 미국에 가져가서 다 읽은 후 거기에 사는 한국인 소설가에게 선물로 주었다. 갖고 있을 걸 그랬나 싶다.

2024-10-16

지구온난화와 환경미화원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더워도 너무 더웠다. 장장 40여 일 가까운 열대야를 기록하며 푹푹 찐 여름이었다. 마치 동남아 여행을 갔을 때, 공항에서 바깥으로 나서면 훅 끼치던 열기와 같은 무더위를 매일 겪어야 했던 여름이었다. 예년 같았으면 한여름 열흘 정도밖에 켜지 않았던 에어컨을 24시간 풀가동했다. 두 개의 선풍기도 꺼지는 시간이 없었다. 결국 10년도 더 된 선풍기 하나는 모터 과열로 고장이 나 버렸다. 더위를 잘 견디는 나는 여름나기가 겨울추위보다 더 수월했다. 여름철 더위 안부를 들으면 대답이 정해져 있었다. 뭐 그리 덥지 않다고. 거의 에어컨이 있는 실내, 차안, 집에서 지내니, 더울 틈이 없다. 잠시 에어컨 없는 데로 나와 이동할 때는 따뜻하다고 느낀다며 여름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더위보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인 나는 여름보다 겨울이 더 싫었다. 내복을 챙겨 입고 옷을 켜켜이 껴입어야 하는 겨울보다는 차라리 여름이 더 좋다는 나였다. 실제로 땀 빨빨 흘리는 여름이 추위에 덜덜 떠는 겨울보다 나았다. 그렇게 더위를 잘 이기는 나였으나 올해는 아니었다. 글쎄, 나이가 들면서 체질이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치더라도 정말 버텨내기 어려운 폭염이었다. 폭염의 원인은 기후변화로 인한 기온상승이요, 그 주원인은 지구온난화라고 한다. 2021년 6월 IPCC 보고서에 따르면 인간 활동에 의해서만 200년만에 1.1도가 상승했다고 한다. 인간이 자초한 일이니 인간이 풀 수밖에 없다. 지구를 지켜야겠기에 일상생활에서 작은 변화를 감행했다. 내가 불편해지면 지구가 편하다니 감수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세탁할 때 세탁망을 활용하면 미세섬유를 걸러내 수질오염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하니 더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식기세척기는 물을 절약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식기세척기는 9~12L의 물을 소비하는 반면, 손 설거지는 최대 40L의 물을 사용한다니 편리함보다 환경을 위해 식기세척기를 자주 쓰기로 한다. 일주일치 식단을 미리 계획하고, 한 주 동안 먹을 음식을 미리 요리해 소분해 둔다. 일요일 저녁에 일주일치 야채샐러드를 만들어 두면 육류보다 더 건강한 채소 식단도 챙기면서 냉장고도 비우고 음식물쓰레기도 줄인다. 당장은 어렵지만 조만간 자동차도 하나 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가까운 거리는 걷고, 혼자 이동할 때는 자가용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습관으로 나를 길들이기로 한다. 탄소포인트제에 동참하려 테라스에 작은 태양광발전시스템 설치도 해뒀다. 얼마나 에너지가 절약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저 실천해보는 뿌듯함도 있다. 폭염이, 기후변화가, 지구온난화가 나의 일상을 이렇게나 바꾸었다. 지구온난화는 손녀의 장래 희망까지 바꾸었다. 얼마 전이었다. 린이 환경미화원이 될 거라고 말했다. 평소 아픈 사람 병 고쳐주는 의사가 될 거라면서, 할머니 허리도, 다리도 아프지 않게 해주고, 주름도 펴 줄 거라던 린이었다. 커서 의사가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라던 린이었다. 왜 꿈이 바뀌었냐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백번 지당하다. “지구가 안 아파야 사람이 살지요. 사람보다 지구가 더 중요해요. 그러니 지구를 지키는 환경미화원이 될래요.”

2024-10-09

내방가사 세 자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역시나 내방가사가 인연이 된 또 하나의 모임이 있다. 그러고 보니 내방가사는 평생이다시피 내 인생을 바쳐온 연구 과제였고 성취였지만 소중하고 귀한 인간관계의 훌륭한 매개이기도 한 셈이다. 작년 봄, 대구한글서예협회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정중하고도 예의바른 여성의 전화를 받았다. 경상도 억양도 아니었다. 매년 대구한글서예협회전을 개최하는데, 2023년의 주제를 내방가사로 하고 싶다는 취지의 말씀이었다. 좋은 기획에 귀가 솔깃했다. 당장 만나 얘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곁에 있던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한글과 관련 있으니 함께 만나자고 했다. 집 부근의 카페에서 만난 최민경 회장님은 단정한 올림머리에 기품있게 성장을 해 오셨다. ‘합쇼체’의 극존대어를 일상으로 쓰고, 예의가 몸에 밴 천상 서예인이셨다. 2022년 세계기록유산 아태 목록에 등재된 내방가사가 여성의 한글문학이니 한글서예전에 마침맞춤이라는 제안은 훌륭했다. 경북도한글문화콘텐츠민간위원장이었던 남편은 그 자리에서 바로 한국국학진흥원에 연락해서 가능한 지원을 통해 전시를 유치하라고 권했다. 남편의 권유를 받아들인 한국국학진흥원은 한글날을 기념해서 유네스코에 등재된 내방가사 작품을 선별하여 한글 서예로 옮겨 써 전시하는 걸로 정했다. 그렇게 해서 한국국학진흥원 훈민정음 사업단의 담당연구원 박혜민 박사를 만났다. 나직나직한 말투에 다소곳한 그이는 아이디어는 풍부하고 일에는 빈틈이 없는 학자였다. 셋이 처음 만났지만 일에 관한 한 어찌 그리 손발이 척척 맞는지, 신기했다. 서예 작품 제작을 담당하는 최 회장님, 원본을 제공하고, 행정적 지원을 책임진 박 연구원의 역할에 보태 나는 약간의 자문을 하는 정도였다. 회원들과 함께 수차례 회의했고 그때마다 만난 우리 셋은 자매같이 정이 들었다. 대구한글서예협회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 경북대 도서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릴레이특강도 했다. 경북도청에서 한 한글날 기념 전시는 세상에 둘도 없이 멋지고 웅장하기까지 했다. 모든 행사는 끝났지만 우리의 만남은 끝낼 수가 없었다. 나는 최 회장님께 서예를 배우러 다니기 시작했다. 은퇴 후 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서예였다. 박 연구원은 최 회장님의 권유로 천주교 신자가 되어 세례를 받았다. 또한 최 회장님이 발굴 소개한 내방가사 작품으로 훌륭한 논문을 써서 발표했다. 서로가 서로의 스승이자 멘토로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작년 말 송년을 겸한 자리에서 우리의 만남을 지속적으로 잇자고 합의하고 우리 서로 자매가 되면 어떻겠냐고 내가 제안했다. 그렇게 ‘내방가사 세 자매’모임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아직 우린 서로 언니 동생이라 호칭하지 못한다. 처음 만나 부른 사회적 호칭이 워낙 견고했던 탓도 있지만, 셋의 관계가 다시 스승의 역할로 얽힌 때문이다. 하긴 예전엔 가족끼리도 사회적 역할에 따른 호명을 한 예가 있으니 뭐, 어떠랴. 호칭이야 어떻든 그리우면 이따끔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자매애 그 이상 아니겠는가. 나와 최 회장님은 매주 만나고, 그때마다 박 연구원과도 연락하고 만날 날을 기약한다. 어쨌든 이 좋은 인연을 이을 수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2024-09-18

흰머리 소녀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내방가사를 인연으로 세 사람이 만났다. 20년도 더 전이었다. 영남대학교 사회교육원에서 지역 특화수업을 개설한다며 ‘경북의 여성문학인 내방가사’강의 요청을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 위덕대에 국문학과가 없어 교양국어와 작문강의만 하였던 터라 전공강의에 목말라하던 때였다. 그때 그렇게 만나 여태껏 인연을 이어온 귀한 분들이다. 유복혜 선생님은 청도에서 오셨다.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오실 때가 많았다. 강의를 얼마나 진지하고 성실히 들으시는지 강의하는 내가 송구할 지경이었다. 하회가 친정이라 어릴 적 듣고 자란 내방가사가 낯설지 않았기에 더욱 그러신 듯했다. 집안의 안어른들 암송하신 가사를 이제야 이론으로 배우게 되었으니 남다른 감회가 있으신가 보였다. 기억력도 뛰어나 녹음해 들려드린 가사를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외시는 걸 보고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연배가 나보다도 십수 년이나 윗길이신데도 여리여리한 소녀감성이 있어 별호가 흰머리 소녀라 했다. 유 선생님의 학구열은 훗날 위덕대 2014학번 성인학습자로 입학하여 졸업하신 걸로 증명되었다. 무려 공로상까지 받으셨다. 이솔희 선생은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조시인이었다. 수강자 중에선 나이가 어렸지만 나와는 오륙년 정도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여선지 이해도가 빨랐다. 시작 활동을 하면서도 전공공부 계속할 뜻을 비치더니 결국 경북대 대학원에 진학해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 유 선생님은 나를 스승이라며 꼬박꼬박 대접하시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부드러우면서 강하고,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한없이 배려적이지만 무례는 용서하지 않으시는 심성은 닮지 않을 수 없는 내 인생의 스승이시다. 이솔희 선생은 대학 강의와 다양한 문화기관의 사회 강좌도 열심이다. 줌으로 문학치료 강의를 하길래 유 선생님과 함께 신청해 배운 적도 있다. 최근 유튜브로 멀티단장시조를 매일 올리는 부지런함을 보면서 이 분 재능의 끝은 어디일까 생각한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으로 받들 만한 사람이 있다.‘그 중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은 기꺼이 따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학습을 통해 바꿔라’는 말이 이어진다. 논어 속 공자님 말씀이다. 우리는 셋 중 어느 한 사람이 스승이 아니라 셋이 서로 스승이다. 처음엔 내방가사에 대한 내 알량한 지식으로 두 분의 선생으로 만났지만 20년을 동행하면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 되어, 서로를 스승으로 삼아 기꺼이 따르는 사이다. 노자의 도덕경에서는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고 했으니 셋은 완성의 숫자다. 우리는 셋이어서 부족함이 없고 더 이상 필요치 않다. 해가 바뀌면 만나고 싶고 계절이 바뀌면 그리워진다. 만나면 고담준론에 행복하고 즐거움에 웃음소리도 맑고 높다. 이보다 더 좋은 동행이 또 어디 있으랴. 우리 모두 우아하게 늙되 마음만은 소녀같이 사시는 유 선생님을 닮자며 선생님의 별호를 우리 모임의 이름으로 삼았다. 흰머리 소녀.

2024-09-11

힘을 빼자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힘 빼시고, 힘 빼시고” 매일 오후 8시부터 50분간 하루 10번 이상은 듣는 말이다. 버킷리스트에 있어 작심하고 3월초부터 시작한 수영이었다. 두어 달 쉬고 7월 초부터 다시 시작했다.초등학생부터 나같이 나이 많은 사람까지 성별 나이 구분 없이 열대여섯 명 남짓 한 그룹이 되어 하는 수업이다.강사님은 모든 수강생들에게 이렇게 깍듯이 존댓말을 쓴다. 내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어깨의 힘을 빼라는 말이다. 자꾸 몸이 가라앉는 게 어깨에 힘을 주기 때문이란다. 그러고 보니 남들은 잘도 떠서 레인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단숨에 가는데, 난 거의 불가능하다.그 이유가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 때문이란다. 내 딴엔 힘을 뺀 것 같은데 아닌가 보다. 작심하고 어깨의 힘을 빼면 잠시 둥둥 뜬 듯하지만 곧 다시 가라앉으며 물을 먹고 콧속이 찡해지고 따가워진다. 원래 앞자리 썩 나서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 수업에선 앞자리는 커녕 자진하여 맨 뒷자리로 가 꼴찌를 자처하며 다른 수강생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다. 처음 수강신청을 할 땐 예전에 잠깐 했던 수영실력을 믿었다. 몸이 기억하리라. 그런데 영 아니었다.30대에 잠시 배웠던 수영을 몸은 절대 기억하지 못했다. 10대 때 바닷가에 살며 배운 수영도 전혀 도움이 안 되었다. 자진유급해서 초급반을 두 달이나 했는데도 수영 실력은 영 제자리인 것이 바로 힘빼기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이었다. 늙어 힘이 없고, 근육이 없고, 숨가쁨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몇 주 전의 파리 올림픽 중계를 볼 때마다 종종 들리는 말도 ‘힘을 빼야 해요”였다. 양궁선수의 화살이 잠시 과녁의 가운데서 멀어지면, 사격선수의 총알이 중앙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수직벽을 타고 오르던 클라이밍 선수가 맥없이 떨어지면 해설위원은 영락없이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고 했다.양궁선수가 정확한 겨냥을 하려면 어깨의 힘을 빼야 한다는데, 저 무거운 양궁을 든 어깨의 힘을 어찌 빼라는 건지…. 선수들도 저럴진대 수영초보자인 내가 물속에서 어깨 힘이 들어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지 않나 위안한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힘을 빼라는 건, 마음의 무게, 마음의 힘을 빼라는 것임을. 정작 나는 물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까봐 긴장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물에 절대 빠지지 않으니 믿으라고 했지만 난 몇 번 빠졌고, 허우적거렸고, 물을 먹었다.그러니 힘을 빼라는 말은 바로 몸의 긴장을 풀라는 말인 동시에 마음 속 긴장도 절대 갖지 말고 즐겨라.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를 가져라. 의심하지 말고 어깨의 힘을 빼면 가라앉지 않을 걸 믿어라. 믿어라. 그런 뜻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힘을 빼야 할 것은 어깨만이 아니다. 내 삶과 살림에서도 무게와 힘을 빼야 한다. 목과 어깨에 힘을 주는 힘자랑은 쓸모없는 허세요, 허망한 욕심이요,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다. 내 마음의 힘을 빼 더 낮은 곳에서 겸손해지자. 살림에서도 힘을 빼 최소함의 행복을 누리자. 그러나 지금은 어깨의 힘을 빼자. 그리하여 물 위에 둥둥 떠서 수영실력을 늘여 볼 일이다.

2024-09-04

양념딸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나는 여형제가 없다. 위로 세 살 터울의 오빠, 아래로 연년생인 남동생 가운데다. 엄마는 종종 남들에게 나를 가리켜 양념딸이라고 했다. 양념은 음식 맛을 돋우기 위해 쓰는 참기름, 들기름, 깨소금, 간장, 소금, 파, 마늘 등등의 온갖 식재료를 일컫는다. 음식은 원재료도 좋아야 하지만 맛깔나게 하는 건 무릇 갖은 양념들이다. 왜 양념딸이지? 궁금했지만, 재미없고 무심한 아들들만 있는 것보단 하나 있는 딸이 마치 양념과 같은 역할을 하는 걸로 미루어 짐작했다. 알고 보니, 양념딸은 고명딸의 사투리이고, 아들 여럿 있는 집의 외딸이라는 의미였다. 그럼 고명딸의 고명은 무엇인가. 음식의 모양과 빛깔을 돋보이게 하고 맛을 더하기 위해 음식 위에 얹거나 뿌리는 것, 음식에 꼭 필요한 게 아니어도 음식을 더 예쁘고 맛있어 보이게 치장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떡국 위에 얹는 노란색, 하얀색 달걀지단과 붉은 소고기 꾸미, 까만색의 김과 같은 색색의 웃기나, 감주 위에 동동 띄워 얹는 잣과 같은 것, 곧 서양요리의 토핑이 바로 고명이다. 양념이든 고명이든 간에 음식을 맛나고 돋보이게 하는 것이듯, 양념딸이나 고명딸은 아들 많은 집에 양념처럼 맛내고, 고명처럼 예쁘게 얹힌 하나뿐인 딸이라는 뜻이니 고마운 치사가 아닌가. 실제로 아버지와 엄마는 하나뿐인 딸을 무던히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고 지지해 주셨다. 아들과 딸을 전혀 차별하지 않는 두 분이셨다.어느 날 엄마에게서 그걸 절실히 깨닫게 한 얘기를 들었다. 예전 내가 초중등학교 다니던 시절엔 귀한 흰쌀밥 대신 보리밥을 주로 해먹었다. 미리 한 번 삶은 보리쌀을 밥솥 맨 밑에 깔고 그 위에 흰쌀을 한줌 넣어 지은 밥이다. 밥을 푸는 순서에 따라 흰쌀이 좀더 섞였다. 엄마는 아버지 밥을 먼저 푸고 난 뒤, 3남매 도시락밥을 펐다. 그 다음엔, 얼마 남지 않은 흰쌀과 보리쌀을 모조리 두루 섞었다. 그 순간 누구 밥을 먼저 푸나 항상 고민했다는 엄마. 맏아들 밥을 먼저 푸려니 양념딸이 걸리고, 딸 밥 먼저 푸려니 막내아들이 밟혔다는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는 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뜨거워졌다. 훗날 이 얘기를 남동생에게 했더니, 금시초문이라면서도 누나가 우리 삼남매 중 항상 우선이었어. 가난했지만 누나가 해 달라는 건 거의 다 해줬잖아. 우리집은 남아선호가 아니라 여자우대였어 한다. 그런가? 그렇다. 확실히 그랬던 것 같다. 양성평등 부모님 덕에 난 매사에 남자애들과 겨뤄도 앞장섰고, 당당한 사회생활도 그 덕이었다. 그러나 내가 우리집에서 제대로 양념이나 고명의 역할을 했는진 모르겠다.당시 여형제 많은 친구와 이종들이 있었다. 아들 보기 위해 딸을 줄줄이 낳은 게 확실한 이모님이 계셨다. 이종사촌들은 그 남동생을 귀히 아끼고 극진히도 보살폈다. 맏딸로 여동생만 넷을 둔 내 친구는 6학년 때 어머니가 남동생을 낳았다며 신나게 자랑했었다. 어쨌든 여형제 많은 이종사촌이나 친구가 부러웠다. 아무래도 오빠나 남동생보다는 여형제가 더 다정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언니나 여동생이 없어 외로웠던 나는 최근 사촌언니들과 가끔 만나 언니의 살가운 온정을 느끼며, 언니 없는 설움을 푼다.

2024-08-21

손주들의 좌우명(座右銘)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방학이라 서울에서 내려온 손녀 둘과 대구의 손주 둘, 합해 넷이서 함께 할 프로그램을 찾던 중에 모두의 집이 있는 육신사 마을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있어 일찌감치 신청해 두었다. 지난 토요일, 한국인성예절교육원에서 주관하는 ‘가족과 함께 묘골(육신사) 시간여행을 맛보다’라는 체험 프로그램에 손주 넷과 함께 참여했다.미리 본 일정표를 보니 다소 빡빡했다. 4학년 윤은 괜찮겠지만 나머지 1~2학년 아이들이 버거워할까 걱정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한복을 단정하게 입은 선생님들이 친절히 지도하는 선비체험, 승경도놀이, 민화문자도 그리기, 연 만들기 등은 아이들이 시간을 잊을 정도로 흥미로워했다. 워낙 사촌 끼리 사이좋기도 한 아이들은 매 시간 모든 프로그램을 진지하게 들으면서 웃고 즐기고 재미있어해 덩달아 나도 흐뭇했다.마지막 프로그램은 가훈 만들기였다. 가족들이 상의해서 가훈을 만들어 발표도 하고 액자에 끼워 집에 가져갈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학생들은 가훈 대신 좌우명을 써 보라며, 자신의 자리 오른쪽에 써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문구라고 설명했다. 막내 린이 해맑게도 묻는다. 왜 오른쪽에 붙여요? 왼쪽에 붙이면 안돼요? 가까이 두란 뜻이니 왼쪽에 붙여도 돼. 웃으며 대답하신 선생님은 미리 연습할 종이 하나씩을 나누어 주신다. 애들이 과연 좌우명을 생각해 쓸 수 있을까 싶은 마음에 나는 미리 내가 갖고 있던 가훈을 아이들에게 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웬걸? 아이들은 자기들의 좌우명을 생각해서 거침없이 적는다.‘한길로 가는 사람은 철창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4학년 윤의 좌우명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할수록 자유롭고 나중에 이룰 수 있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는 대답이다. 듣고 보니 비유도 절묘하다. 우리는 ‘한 우물을 파라’고 배웠는데 요즘은 이 말이 맞겠네요. 선생님과 눈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비겁하면 죽고 용감하면 산다.’ 2학년 손자 건의 좌우명은 승경도 시간에 들었던 이순신 장군 얘기를 들어서 생각한 걸까? 아, 물론 건이 또래의 남자아이라면 비겁은 악덕이요, 용감해야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걸지 모른다. 예전에 났으면 아주 훌륭하고 멋진 장군이 되었을 거라는 선생님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한다. ‘착한 사람은 천국 가고 나쁜 사람은 지옥 간다.’며 쓴 은이. 기독교계 유치원을 2년이나 다닌 티를 낸다. ‘착한’, ‘천국’, ‘나쁜’, ‘지옥’을 굵게 써 제법 캘리그라피 디자인을 했다. 글자 ‘나쁜’에는 악마의 뿔을 두 개 달아 더 크게 경계했다. 막내 린은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어두컴컴한 길로 간다.’라고 정성스럽게 쓴다. 책을 열심히 읽고 속담도 제법 많이 아는 린이라, 어디서 본 문구냐고 물었더니 제가 스스로 생각해낸 거란다. 배우지 않으면 왜 어두운 길로 가는데? 공부를 안하면 아무 것도 모르니까 어둡고 답답하지. 공부를 많이 해야 잘 보이고 환하지. 할머니는 그것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그래, 이 할미는 오늘도 너희들에게서 많이 배운다.

2024-08-07

일상을 이벤트같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일정을 적어두고, 달력에 빈칸이 있으면 왠지 불안했다. 해야 할 일을 놓친 건 아닌가 자책까지 했다. 학교 강의시간표를 기본으로 학회 발표, 교내외 각종 회의 등 요청이 있으면 되도록 참여했다. 거절할 줄 모르는 이상한 사람이 나였다. 그러다 보니 나의 시간은 많지 않았고 자연 가족은 희생해야 했다. 매년 남편과 아들의 생일에 팥밥과 미역국을 식탁에 올렸으나 외식하고 선물이나 하는 정도였다. 가족 대신 일 중심으로 살면서 이게 맞나 의심 한 번 없었다. 온갖 이벤트를 만들어 학교를 위해 헌신했다. 그렇게 일벌레로 살았다.정년을 몇 년 앞두고, 서서히 은퇴 후의 삶을 계획하자, 비로소 가족이 눈에 밟히고 가슴으로 들어왔다. 습관은 버리지 못하는가 보았다. 달력에 빼곡하게 뭔가를 적어두는 버릇은 여전해서 수첩과 종이달력이 아닐 뿐, 휴대폰의 달력에 가족들의 생일을 먼저 표시했다. 그 사이 네 명의 가족은 열 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친정식구, 사촌언니들, 안사돈, 오랜 친구들의 생일까지도 색깔을 달리해서 표시해 두고 인사라도 하려 애썼다.가족들의 생일파티를 가장 먼저 챙겼다. 서울의 큰아들네는 선물이나 축하문자로밖에 못할 때가 많지만, 누구든 생일 앞뒤로 대구에 오면 꼭 챙겼다. 외식으로 때우는 대신 집에서 파티를 준비했다. 이벤트 무대를 학교에서 집으로 옮긴 격이다. 그렇게 요 몇 년, 해마다 손주들의 생일파티를 기획했다. 미리미리 준비하는 이벤트 과정이 있을 뿐 뭐 별 건 없다. 손주들의 식성에 맞는 음식과 생일상을 화려하게 장식해 줄 폼 나는 음식을 장만했다. 색감 풍부한 어린이용 생일상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고 흉내냈다. 준비하면서 즐겁고, 손주들의 웃음소리에 행복하고 사진으로 남아 흐뭇한 이벤트가 바로 손주들의 생일파티였다.작년엔 아들과 며느리 생일을 집에서 준비했다. 마침 내외의 생일이 하루 사이인지라 한 번 장식을 해두면 두 번 쓸 수 있어 더 편하다. 손주들과 함께 하는 이벤트로 기획(?)했다. 미리 장만한 음식들을 접시에 담고, 상 위에 올리고, 상차림을 하는 모든 과정에 저희들이 함께해서 즐기도록 했다. 포스트잇에 문구를 맘대로 쓰라고 했다. 아빠, 엄마, 사랑, 해요, 건, 린 ♡. 이렇게 한 장씩 써서 미리 달아놓은 풍선과 가랜드에 붙인다. 미리 준비해 둔 꽃과 케이크를 아빠 엄마에게 주라고 했다. 노래를 부르며, 케이크를 전달하고, 꽃다발 전달 후 둘이 붙어서서 머리 위 큰 하트를 만드는 퍼포먼스를 해서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다. 저희끼리 미리 연습한 듯, 이벤트 즐기는 할머니의 유전자를 받은 게 아닌가 싶다.특별한 날만 하는 게 이벤트가 아니라는 게 요즈음 드는 생각이다. 손주들과 함께 있으면 일상이 이벤트다. 해마다 자라고, 다달이 다르고, 나날이 새로워서 행복하니 이것이 이벤트다. 지금은 방학이벤트가 성업 중이다. 극장, 어린이세상, 교통랜드를 거쳤고, 오늘은 박물관으로 간다. 며칠 후 서울 손녀들이 오면 더 큰 이벤트가 있어야 할 것. 우리가 사는 육신사 일원에서 행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묘골 시간여행을 맛보다’라는 체험행사에 참여할까 일찌감치 예약해두었다.

2024-07-31

이벤트 만들기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지난 달 경주시가 2025년 제3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이펙) 정상회의 개최 도시로 최종 선정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접하자 28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1996년, 위덕대학교 개교 원년, 3월에 개교하고 5월경이었다. 신생학교를 알릴 홍보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던 중이었다. 그 해 설립되어 태국의 방콕에서 열렸던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Asia-Europe Meeting: ASEM, 아셈)가 제3회 회의를 대한민국에서 개최하기로 결정, 경주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아셈 유치 경쟁을 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무릎을 탁 쳤다. 이것이로다. 위덕대가 있는 경주시를 위한 일이면서, 학교도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당시 위덕대에는 학생은 1학년 400명밖에 없었으나 학생회와 동아리도 있었다. 학생회장 등 지도동아리 학생들은 선배가 없어 심심하던 차였다. 시민과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아셈유치서명운동을 하쟀더니 좋다며 신나했다. 서명지를 만들어, 일단 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을 상대로 워밍업을 했다. 반응이 좋자 학생들은 더욱더 신났다. 수업 없는 주말엔 경주 시내로 나가자며 뜻을 모았다. 마침 5월이라 관광객과 특히 단체 수학여행단이 많이 오는 때였다. 전국의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위덕대 홍보로도 안성맞춤이었다. 가장 많은 관광객이 오는 대릉원과 불국사를 홍보 장소로 정해서 2팀으로 나누었다. 홍보용 현수막도 만들었다. 학생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 홍보 덕에 제법 많은 서명을 받아냈다. 이틀째, 지역 신문사에서 취재를 나왔고, 월요일 아침 신문 1면에 꽤 큰 사진과 함께 기사가 실렸다. 1차 목적을 달성한 것 같아 학생들과 환호했다. 1주일간의 운동으로 약 2000명 정도의 시민과 관광객의 서명을 얻는 성과를 거뒀다. 서명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학생들과 논의 후, 경주시에 전달하기로 결정했다. 학생 대표 몇몇과 함께 경주시장님을 찾아 전달식을 가졌다. 이 행사 또한 경주시에서 보도자료를 배포,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다. 학교 홍보를 위한 우리의 의도는 100% 달성하였지만 아셈회의 경주 유치는 실패, 2000년 아셈회의는 서울에서 개최되었다.이 행사로 광고비 없는 학교 홍보가 가능할 거란 예상은 적중했다. 그 후 위덕대에 재직했던 25년 동안 참 많은 이벤트와 행사를 벌였고, 이를 방송과 신문 등 각종 매체에 알리는 홍보역을 자처했다. 그 중 기억하는 이벤트는 ‘더사랑한데이’였다. 2009년 겨울, 종강 무렵이었다. 교수회의 중에 기말고사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교수들이 밥 한 끼 해먹이자 제안했다. 방송사에서 프로그램으로 만들기로 해서 일은 커졌지만 기쁘게 동참하신 교수들과 함께 김밥과 주먹밥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나눠 준 이 행사는 그 후 매 학기말에 열리는 학교의 전통이 되었다. 2014년부터 성인학습자들이 많이 입학했다. 그들에게 재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고맙데이’를 제안했다. 나이 상관없이 함께 공부하고 도와주는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전달하는 작은 파티였다. 이 또한 위덕대 평생학습자 날의 시초가 됐다.

2024-07-24

방과 후 수업 참관기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손주들의 방과 후 수업을 참관했다. 아이들이 수업을 파한 후 매일 방과 후 수업을 듣는 걸 알고 있었다. 엄마 대신 할머니라도 가면 손주들이 좋아하겠지. 보내준 시간표를 보니 두 아이의 수업이 달라 남편과 함께 갔다. 손자의 바둑 수업엔 내가, 손녀의 방송댄스 수업엔 남편이 가기로 하고, 중간 휴식 시간 서로 연락을 해 교실을 바꾸기로 했다.안내된 교실로 들어가니 20명이 좀 넘는 1, 2학년 학생들이 있었다. 교실 뒤에 마련된 자그마한 학생용 의자에 앉았다. 쉼없는 선생님의 주의와 훈계에도 불구하고 수업은 쉬 안정되지 않았다. 주목하지 않고 옆자리의 친구와 떠드는 아이, 무슨 용무인지 몰라도 자꾸 선생님께 가는 아이, 번쩍 손을 들어 선생님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아이, 화장실을 가겠다고 선생님께 가서 귓속말을 하는 아이 등등….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칠판의 바둑판을 이용해 수업을 계속하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짝끼리 대국하는 시간이 되자 교실은 비로소 조용해졌고 책상 사이로 다니는 선생님의 훈수가 가능해졌다. 후에 들으니 바둑 수업은 주의력이 없어 산만하고 집중력이 약한 아이들의 학부모가 신청한 경우가 많단다.그날 이후 금요일까지 모든 방과 후 수업 참관을 자처했다. 창의수학, 미술, 농구, 실험과학, 바이올린 등 모두 7과목의 수업을 참관했다. 아이들의 외할머니와 동행했다.대부분의 수업이 한 반 약 20명 전후의 학생들이었고, 10명 내외의 학부모, 주로 엄마들이 왔는데, 우리 손주들은 할머니라도 반겨했기에 간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도무지 통제가 안 되는 조무래기들을 데리고도 수업을 이어가는 선생님들의 수고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참관기를 쓰면서 선생님의 노고에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그러나 그렇지 않은 수업도 있었다. 개인적 지도가 필수적인 악기 수업의 경우, 20명이 넘는 수업은 애당초 무리였다. 학생들의 개인차도 있을 건데다, 3개월을 넘게 수강한 학생과 1개월이 채 안된 학생들이 섞여있었다. 학생의 수업 빈도 노출이 다르면 개인차는 더 클 거였다. 학생마다 진도가 다르니 수업의 질이 좋을 리 없었고, 학생들의 수업 만족도 역시 좋을 리 없을 건 불본 듯했다.며느리에게 참관기를 피드백해주면서 얘기를 나눴다. 방과 후 수업은 학교의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난 후에 실시하는 프로그램이다. 공교육의 역할을 늘리고 사교육을 억제하는 정책이니 교육비는 과연 쌌다. 프로그램이 다양해서 저학년에겐 비교적 선호되는 제도인가 보았다. 더구나 우리 손주들 같이 맞벌이 부모의 아이들이라면 방과 후의 학원 순례를 줄이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았다.문제는 수업의 질이다. 이왕지사 하는 거라면 수업의 질도 담보되면 더 좋지 않을까. 수업의 성격에 따라 학생 수를 조정하는 유연성도 필요하다. 아무리 실력있는 교사라도 한꺼번에 많은 학생을 상대하기엔 버거울 거였다. 참관 후 내린 결론 하나. 이번 여름방학부터 바이올린은 반드시 학원에 보내기로 하자.

2024-07-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