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영화감독 데뷔를 위한 시나리오를 쓴다면서도 잠만 잔다. 낮 12시가 넘어 일어나서 밥을 차려 먹은 후에도 노트북에 다가가기가 힘들다. 평소 잘하지 않던 방청소를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히 청소하고 하릴없이 선풍기를 분해해서 깨끗이 닦는다. 더 이상 할 일이 눈에 띄지 않으면 그제서야 노트북 앞에 앉는다. 노트북을 켜고도 글자 폰트만 매만지다가 시간을 다 보낸다. 낮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밤이면 친구들과 술자리. 그러기를 며칠째 반복하고 나서야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극한직업’의 영화감독 이병헌이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힘내세요, 병헌씨’의 첫 부분이다. 어쩜 나랑 저리도 똑같을까 공감하면서 피식 웃었다.
논문 마감일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하는 습관이 있었다. 평소 어질러진 연구실을 대청소하는 일이다. 책장에 마구 꽂힌 책들을 장르별로 가지런히 챙긴다. 누워있는 책들도 일으켜 세운 후 물걸레로 책장의 먼지를 깨끗이 닦는다. 심지어 책상의 방향을 다시 바꿀 때도 있다. 넓지도 않은 연구실에서 그것은 거의 대공사에 가깝지만 강행한다. 창문 쪽으로 놓인 책상을 입구 쪽으로 틀어 돌려놓거나, 혹은 좌우를 완전히 바꾸기도 한다. 좁은 공간에서 그렇게 낑낑대며 책상을 옮기고 나면 컴퓨터며 프린터 등의 부속품들도 자리를 바꾸게 되고 전선을 뺐다 꽂는 등 꽤나 작업시간이 걸린다. 책장 가까이 한 켠으로 배치되었던 소파의 위치도 연구실 가운데로 옮겨 보는 등 지치지 않고 일을 키우고 벌인다. 바닥 청소까지 멀끔하게 하고 난 후 재정리된 연구실을 휙 둘러보면서 잠시 만족감을 느낀다. 아차 할 일이 있었지 그제야 깨닫고 책상 앞으로 다가가 컴퓨터를 켠다. 더 이상 피할 데가 없다. 이제부터 논문을 쓰자며 또 밤샘이다. 자주 이런 일을 벌이니 영리한 조교는 잘도 알아챈다. 교수님 논문 쓰셔야 되죠?
작년 11월부터 한국어교사 자격증을 위해 인터넷 수강을 한다. 매주 8과목씩 15주를 듣는다. 수강하기만도 벅찬데 쪽지시험과 과제 제출도 만만찮다. 무엇보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두 번의 시험이 가장 큰 스트레스다. 욕심 내지 말고 설렁설렁해서 80% 정도 성적이면 된다며 마음먹었으나 그렇지 않았다. 비록 오픈북 형식이지만 시험은 시험이다. 시험일이 다가오자 긴장되고, 들었던 강의를 다시 들으며 시험공부라는 걸 하게 된다.
시험일이 닥치자 예전의 습관이 도졌다. 시험 친다고 컴퓨터를 켜 놓고는 책상 주변을 청소한다. 둘러보니 책장 정리가 필요하다. 이 방 저 방 흩어져 함부로 섞여있는 책들을 옮긴다. 내 책과 남편 책, 손주들의 책들이 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주방으로 가 그릇장을 활짝 열어젖혀 잠시 멍하게 바라보다가 두 손 걷어붙이고 모두 꺼내 일을 벌인다. 화장실 바닥을 박박 문지른 후 대대적으로 물청소를 한다.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까지 하고 나서야 젖은 손을 털면서 컴퓨터로 돌아온다. 아침에 켜 둔 컴퓨터 모니터엔 ‘장시간 사용하지 않아서 로그아웃되었습니다.’라는 사인이 떠 있다. 깊은 밤이다. 밤을 꼬박 새워 시험을 치고 나니 새벽 창밖이 푸르다. 예전 연구실의 창밖 풍경과 어쩜 저리도 똑같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