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아버지의 기일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등록일 2025-05-07 18:46 게재일 2025-05-08 18면
스크랩버튼
Second alt text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부처님오신날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기일이기도 했다. 벚꽃이 눈부신 화창한 봄날 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다급한 오빠의 연락을 받고 10개월 큰아들을 들어업고 버스를 탔다. 그 전해부터 간경변 진단을 받고 일 년을 못 버티실 것이며, 입원도 필요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우리 형제들은 모두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 끈을 놓지 못한 엄마는 집에서 온갖 좋다는 것은 모두 만들어 아버지를 극진히 간호하시는 터였다. 어디서 굼벵이를 잡아오고, 기와솔을 뜯어 달여 잡수시게 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기겁하며 말렸지만 엄마의 고집을 어쩔 수 없다는 오빠의 푸념을 전화로 듣곤 했다. 대학 다니던 동생이 벌써 와 앙상한 아버지 곁에서 손을 잡고 망연해하고 있었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내일이 사월 초파일이라 절에 기도 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그 또한 이해했다. 평소에도 초하루 보름이면 그 바쁜 와중에도 목욕재계하고 절에 다니던 엄마였다. 엄마 따라 절엘 가보곤 했던 나는 부처님 앞에서 무아지경 땀조차 흘리며 108배를 올리던 엄마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엄마 대신 우리 삼남매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와 밤을 새다시피했다. 엄마가 만들어 둔 조약도 드시게 하고, 정신은 말짱하신 아버지와 얘기도 나눴던 것 같다. 이튿날 아침 사월초파일이었다. 

간밤 비교적 말짱한 정신의 아버지를 보자 우리들은 안심했다. 동생은 내일 등교를 위해 나갔고, 나는 잠시 옆방으로 가서 아이와 함께 잠이 들었다. 오빠도 아버지 곁에서 쪽잠에 들었다고 했다. 절에서 돌아온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혼몽했던 나는 다시 깊은 잠을 잤던 것 같다. 오빠와 엄마의 다급한 소리에 깨서 안방으로 달려갔더니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쉬고 계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56살의 젊은 나이에 부처님오신날 부처님 곁으로 가셨다. 43년 전이었다.

어제 오빠가 절에 아버지와 엄마의 등을 보내왔다. 몇 년 전부터 절에서 재를 지내고 등을 다는 것으로 매년 지내던 제사를 대신한 오빠였다. 40년 넘게 아버지의 제사를 지극히 모시던 오빠였다. 몇 번의 중한 수술로 건강이 좋지 않게 되자 삼 남매가 수의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조차도 오빠는 미안해했다. 사람이 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그 중 가장 힘든 고통은 병고(病苦)라는 생각이다. 병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본 날, 또 그 아버지를 지극한 효심으로 제사 받들던 오빠가 늙고 병든 몸으로 절에 가서 울음을 참는 심정으로 흰 등을 다는 날, 부처님오신날은 우리 삼 남매에겐 애달픈 날이기도 하다.

매년 정초, 온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공양을 올리는 거조암엘 간다. 초파일 전날, 거조암에 손주 넷을 데리고 가서 오백나한에게 백 원 공양을 올리게 했다. 한 바구니 묵직한 동전을 조금씩 나눠주면서 각자 소원을 빌라고 했다. 소원은 모르겠고, 각양각색의 나한상 앞 쟁반에 동전을 하나씩 떨구는 게 그저 신나는 모양새다. 그럼 어떠랴. 조용하고 정숙해야 할 법당이지만 아이들의 모습이 흐뭇한 보살님도 용서해 주신다. 바구니를 들고 따라다니면서 나는 아버지와 엄마의 극락왕생을 축수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병고에 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이정옥의 신황금기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