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TV에서 치매를 앓는 팔순 노모를 돌보는 갸륵한 딸과 사위의 이야기를 봤다. 예쁜 치매를 앓고 있다고는 하지만 가족들에게는 한없는 희생을 요구하는 할머니가 가엾고 가족들이 안타까웠다. 젊었을 땐 총명했다는데도 치매로 고생하는 그 할머니를 보면서 나의 일이십 년 후를 생각하니 심히 걱정스럽다. 심각한 건망증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하는 몇 건의 건망증을 떠올리면 실소를 금치 못한다. 연구실에서 퇴근 준비 중 전화를 받았다.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기면서도 내내 통화 중이었다. 3층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계단에서 누군가를 만나 목례를 하면서도 주차장에 와서도 계속 통화 중이었다. 차를 타려다가 문득 핸드폰을 챙기지 않았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차에 가방을 던져 놓고 다시 연구실로 뛰다시피 올라갔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 “이 교수님 왜 그렇게 숨차하세요?” “아, 제가 퇴근하려 내려왔더니 핸드폰을 두고 온 것 같아서 다시 연구실로 올라가고 있어요.” “저랑 지금 통화 중이시잖아요...”
며칠 후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며 동료 교수에게 이 일화를 얘기했다. 치매가 아닌가 걱정이라고 했더니, “지금 젓가락을 들고 계시면서 젓가락을 찾는다면 건망증이요, 그걸로 글씨를 쓰려고 하신다면 치매”라며 안심하라는 동료의 말씀에 안도했다. 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퇴식구에 식판을 들여놓은 후 컵을 들고 식수대가 아닌 벽걸이 냅킨박스에 갖다대고 있는 나를 보더니 “건망증이 아니라 치매일 것도 같은데요...”
별로 덤벙대는 성격도 아닌데 왜 그런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메모벽이 생겼다. 연구실 탁상달력에도, 문에도 달력을 걸어두고 이중삼중 메모를 해 두었고, 다이어리에도 메모해 두고 어떤 일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지금은 달력이나 다이어리 대신 핸드폰의 메모장에 거의 모든 것을 항상 메모한다. 약속은 물론,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장단기 계획 등 모든 것을 메모한다. 달력에도 빠짐없이 기록한다. 빽빽한 달력이 일하는 사람 못지않을 정도다, 이 모든 것은 건망증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그 덕에 약속이나 계획을 놓치는 법은 잘 없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종종 건망증으로 곤욕을 치른다. 곰솥을 불 위에 올려두고 나가 솥도 태워 온 집안을 역한 사골 탄내로 채운 적도 있었다. 어쩌다 휴대폰을 냉동실에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며칠을 찾은 적도 있었으니 심각한 지경이다.
그래서 내 생활방식을 좀 바꾸기로 했다. 좀 있다가 해야지 생각하면 바로 잊을 것이니 뭐든 생각날 때 바로 실행하기다. 의식의 흐름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들기름 한 숟가락 먹기를 잊고 안 먹는다. 참기름을 음식에 넣다가 들기름이 생각나면 바로 냉장고로 가서 꺼내 먹는 식이다. 동선은 꼬이고 일의 맥락은 좀 없어도 덜 놓치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도 매일 꼭꼭 챙겨먹지는 못한다. 기름을 쓰지 않을 땐 잊으니까.
휴대폰을 어디에 둔지 몰라 이 방 저 방 헤매고 다니다가 결국 남편에게 전화해 달라고 했더니 식탁 위에 있더라며 가르쳐준다. 이 글을 쓰던 중이었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