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코로나19가 다 망쳤다. 은퇴 후의 찬란한 삶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심혈을 기울여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그 또한 아름답고 원대하다. 그러나 모두 이룰 수 있는 리스트라고 벅차게 짰다. 25년간 몸담았던 학교엔 할 만큼 했다. 자타가 공인한 바였다. 조금의 후회도 미련도 없으니 이젠 내 몸과 마음 모두 나를 위해 쓸 것이다.우선 한 나이라도 젊을 때 전공을 살려 해외봉사를 할 것이다. 코이카에 입회해두고 일정을 수시로 확인했다. 한국어강사 전문가그룹을 선발할 때 신청하고자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그 봉사를 2년 한 후엔 해외여행을 할 것이었다. 지인과 친척 동생이 있는 미국, 독일, 일본, 제자가 있는 베트남과 네팔에서도 언제 올 거냐는 성화가 빗발같지만 순서를 기다리라고 간신히 주저앉힌 상태였다. 어느 곳이든 한 번 가면 한 달 이상씩 살기를 할 거라면 협박을 해도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태세다. 그 계획조차도 구체적으로 짜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리스트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독일에선 튀빙겐을 거점으로 해서 오스트리아, 스위스 헝가리까지, 일본에선 시코쿠 오헨로 108순례길, 네팔에서는 4월의 트레킹, 이런 식이다.엄청 바쁘게 살긴 했지만 게으른 천성 탓에 몸을 돌보지 못함을 반성하며, 몸만들기 프로그램도 오지게 짜봤다. 요가배우기, 필라테스배우기, 실내클라이밍 도전, 자전거 타기, 하루 5천 보 이상 걷기, 차 팔고 대중교통 이용하기….해외 봉사 실행되기 전, 틈을 봐서 국내 봉사도 가능하면 해 봐야겠다. 가정복지관도 기웃거려 보고, 지역 주민센터나 문화센터에서 자원봉사할 것을 찾기 위해 집으로 다달이 배달돼 오는 구청소식지를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오히려 배울 정보들이 더 많았다. 재봉, 그림, 서예, 피아노도 쳐볼까….그래도 공부가 체질인데 공부 계획도 세웠다. 이참에 천자문 쓰기 1년 완성, 오래전 잠시 배우다 만 일본어기초, 영어회화기초도 배워야지, 외국여행을 위해서도 유용할 테니, 그보다 먼저 한국사능력시험도 도전할 거야…. 제일 먼저 수험서를 두 권이나 사고, 유튜브에 한능검 채널도 구독했다.무엇보다도 난 온전히 할머니 역할을 하고 싶었다. 바빠 이따끔 얼굴 보고 밥 먹는 할머니 말고, 최소 일주일에 하루이틀을 데리고 자고 보살펴 주는 할머니, 내가 직장 다닐 때 내 아이들을 할머니께 맡겨두고 잠시 망중한을 즐겼던 때를 생각하며 며느리에게 숨구멍을 주고 싶기도 했다.실제 주위의 많은 이들이 나의 은퇴 후가 궁금한지 더러 물었다.“퇴직후에도 뭔가 더 하실 거지요?” “아뇨. 할매만 할 거에요. 사회에서는 잊혀진 여자가 되고 싶어요.”이렇게 격정적으로 할머니이고 싶었다.그러고도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다면 딱 좋은 거, 밤새워 영화를 보면 될 것이었다. 비싸지 않은 영화채널을 구독해 두고 장르별로, 국가별로, 감독별로, 배우별로 묶어 보아도 좋을 것이었다.이렇게 연도별, 순서별로 짜놓은 나의 찬란한 버킷리스트 24개가 전면 수정될 지경이 온 것이었다. 코로나19때문이었다.
2023-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