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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녹색 스웨터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며칠 전 옷장 정리를 했다. 작년까지는 철지난 겨울옷을 넣고 봄옷을 꺼내는 수준이었지만 올핸 과감한 정리를 해 보기로 했다. 최근 유행하는 미니멀라이프까진 아니더라도 안 입는 옷은 눈 딱 감고 버려야겠다고 굳게 마음 다졌다. 작년 안 입었던 옷, 작아 못 입는 옷을 추리고 분류하다가 문득 든 생각. 평소 회색, 감색, 검은색의 무채색 옷을 많이 입는 나였다. 그런데 진초록 블라우스와 면 블라우스, 초록색 긴 치마, 큰 체크무늬 녹색 셔츠, 잔 체크무늬 연록색 셔츠, 쑥색 원피스, 연두색 니트, 녹색 가죽자켓, 검푸른 롱패팅까지 녹색의 옷 참 많다. 내가 이렇게 녹색 계열의 옷을 많이 입었었나 갸웃거리다가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소환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초봄, 수학여행 때 엄마가 사준 녹색 스웨터.집안 형편이 유족했던 3학년 때까지는 옷도 많았다. 철철이 옷 해 입힐 형편이 안 될 정도로 급격히 기울어진 가세 탓에 나는 3학년 때의 옷을 6학년 때까지 입었다. 6학년 어느 날 아침 전교 조회 시간이었다. 천 명이 훨씬 넘는 전교생이 넓은 운동장에 길게 줄 서서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듣는 지루한 시간이었다. 갑자기 6학년 6반 이정옥을 부르는 확성기의 소리에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친구들이 너라며 눈짓하길래 엉겁결에 뛰어나갔다. 조회대 위에 올랐다. 무슨 표창장을 받았다. 그때의 내 심경은 영예로운 상장을 받는 기쁨도 자랑도 아니었다. 오로지 내 옷, 소매 짧은 보라색 옷의 팔 뒤꿈치를 넓적한 갈색 천으로 볼품없이 기운 옷에 대한 부끄러움이었다. 전교생이 모두 내 팔꿈치만 보는 것 같아 수치심만 가득했다. 전교생의 박수 소리도 비웃음으로 들렸다. 내려와 제자리로 와서도, 교실에서도 내내 부끄러워 슬펐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3년 내내 그렇게 기운 옷을 입거나 소매 짧아 내복이 삐죽 나온 옷을 입은 나를, 최근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생도 기억할 정도로 난 가난한 아이였다.수학여행을 하루 앞둔 날 저녁, 엄마가 시장의 옷가게로 나를 데려갔다. 수학여행비도 어렵게 마련해 줬을 엄마였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엄마의 과감한 결심에 다소 의아해했지만 새 옷 입을 생각에 그저 신났다. 당시 유행하는 옷이 내 눈에 띄었다. 친구들이 많이 입고 있는 세련된 패턴의 스웨터였다. 엄마가 그걸 사주면 좋겠다고 기대했다. 그러나 암말도 하지 않았다. 새 옷이면 됐지 유행은 언감생심이었다. 엄마가 신중에 신중을 기한 끝에 사준 옷은 녹색 스웨터였다. 목 부분이 흰색 레이스 처리된, 다소 심심한 패턴이지만 엄마가 골라 준 눈물겨운 옷이었다. 엄마는 내친김에 바지까지 골라 주었다. 3년을 입어 구멍이 크게 난 무릎에 더 크게 덧댄 천으로 기운 바지를 입고도 군말없는 딸을 보며 엄마의 가슴은 얼마나 찢어졌을까. 자꾸 눈가가 스멀거린다. 엄마가 옷을 고른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딸에게 어울리는 색깔? 옷의 가격? 옷장의 녹색 옷들을 보니, 아, 난 지금껏 녹색 스웨터를 골라 입힌 엄마의 안목과 선택을 무한정 신뢰하고 있었나 보다. 내일은 초록의 긴치마에 연록색 잔체크셔츠를 입어볼까 싶다.

2023-05-03

풀을 뽑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봄 되자 제 먼저 알고 새싹으로 내민 풀들이 마당 여기저기 그득했다. 쑥, 민들레, 봄까치꽃, 광대나물, 냉이, 망초대…. 풀을 뽑으며 풀이름을 검색해서 이름을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 잡초는 아니었다. 이 풀들은 나물이기도 하고 약초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제멋대로 자라게 해두기엔 사람 사는 집꼴이 아니었다. 작년 여름 사람을 사서 두어 번 풀을 베었어도 돌아서면 또다시 무성히 자란 풀들이었다. 예초기도 샀지만 자랄 때마다 베기엔 너무 번거롭고 성가실 것이다. 어떤 이는 제초제를 뿌리라고 했으나 손주들이 와서 놀 집인데 싶어 꺼림칙했다. 크게 자라기 전 어린싹일 때 뽑으면 쉬울 거라 생각했다. 풀 없는 너른 옆마당에 백일홍씨를 잔뜩 뿌려 한여름 내내, 최소 100일을 꽃대궐로 만들고 싶은 열망도 컸다. 환상이고 오산이었다.이틀을 작정하고 풀뽑기에 들어갔다. 앉아서 호미로 파내기도 하고, 서서 쇠스랑으로 찍어내 보기도 했지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김매듯 고랑을 만들며 앞으로 또는 뒤로 자세를 바꾸어도 보면서 풀을 뽑았다. 어린 풀들은 완강히 버텼다. 어린 풀이지만 그 뿌리는 깊고 힘셌다. 하기야 몇 년째 그 자리에서 견고하게 뿌리 내리고 줄기 뽑아 꽃 피우고 온 마당과 길섶에 마음대로 씨를 흩날려 퍼트렸던 풀들이 아닌가.망초대가 정말 가당찮았다. 망초대는 얕되 넓게 뿌리 내리는 풀이다. 가는 실뭉치가 엉긴 것 같은 뿌리는 질기고 견고했다. 뿌리를 뽑으면 묵직한 흙덩이가 딸려 나온다. 풀을 뽑는 게 아니라 땅의 거죽을 벗긴다고 할 정도였다. 망초대를 캐낸 곳엔 영락없이 움푹 팬 구덩이가 생겼다. 흙을 털어 던져 무더기를 이룬 곳에서 또 연노란 싹을 올리는 질긴 생명력이란...나는 각색 풀들과 타협하기로 했다. 쑥과 민들레의 뿌리는 깊고 길었다. 파내기가 쉽잖았다. 쑥은 캐어 쑥국을 끓여먹으리라 생각하며 뽑았다. 며칠 후 쑥은 또 무성히 자랐지만 좀 쉽게 뽑혔다. 뿌리 깊고 튼튼한 민들레는 벌써 노란꽃을 피워대고 있었다. 나비도 이따금 앉는 걸 캐내기 안쓰러웠다. 담 밑 한 귀퉁이에 모아주었더니 더욱 샛노란 빛으로 민들레밭을 이룬다, 살려두면 홀씨 날려 마당 어디든지 퍼트릴 텐데 싶어도 우선은 살려두자.뒷담벼락 따라 제법 예쁜 자줏빛 꽃을 피우는 광대나물은 과감하게 캐냈다. 예쁜 꽃이라며 남편이 몇 삽 떠서 화분에 심길래 미안함을 덜었다. 이른 봄부터 연보라색 작은 꽃을 피운 봄까치꽃도 이곳저곳 만만찮게 많다. 뽑아도 뽑아도 끝없어서 이 역시 담벼락 한켠에 흙 묻은 채로 던져 모아주었더니 생글거리며 또 연보라꽃을 피운다. 수돗가에 잔뜩 모여 잘디잔 흰 꽃을 피워낸 냉이는 캐지 않고 냉이꽃밭으로 두기로 했다. 여러 날 걸친 풀뽑기가 힘에 부치기도 하려니와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꽃이라 생각하기로 했다.사흘에 걸쳐 풀을 뽑았다. 아니 풀들을 재배치했다는 게 옳다. 그러고도 풀들이 내어 준 너른 빈터엔 백일홍씨를 잔뜩 뿌려 주었다. 꽃대궐이 환상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2023-04-19

또 한 마리 강아지 아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손주들은 나를 아키 할머니라 부른다. 원래 손주들 집에 있다가 우리집으로 온 강아지 아키 때문이다. 아들이 결혼 전 동물보호센터에서 아기때 입양한 후 10년을 기른 갈색 푸들, 그래서 이름도 아키(일본어로 가을)라 지어 잘 지낸 놈이었다. 몇 년 전 고양이가 들어오게 되는 사정이 생겼다. 아키가 베란다로만 숨어 나오지 않았다 한다. 우리집에 데려올 때 울며불며 이별을 서러워하던 손주들이었다. 집이 가까우니 자주 보러오면 된다고 겨우겨우 달래느라 진땀깨나 흘렸다. 아키가 온 후론 할머니 집에 오는 걸 아키집에 간다고 하며 좋아하더니 급기야 우리 부부는 아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버렸다. 뭐 어떠랴….아키는 까도녀 베리를 배려해 뭐든 스스로 기꺼이 이순위를 자처한다. 먹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 곁자리조차도 베리보다 후순위다. 순위매김을 해야 다툼이 없다지만 아키는 스스로 양보하는 것이 제 몸에 익숙한 듯보인다. 산책할 땐 어쩜 그리도 보폭을 잘 맞추는지, 한두 발자국 걷고는 쳐다보며 눈을 맞추고, 몇 발자국 걸은 후 또 올려다 쳐다본다. 집안에서도 늘 나만 따라다닌다. 나는 종종 그런 아키를 다정아키라고 부르곤 한다. 잠잘 때도 내 곁에 오려고 틈만 나면 침대에 올라 내 발치에 자리를 잡곤 한다. 거실로 쫓으면 제 전용 의자에 올라누워 세상 불쌍한 포즈로 잠을 청하곤 하는 아키다. 우리가 소파에 자리 잡으면 베리가 먼저 제 자리를 정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빈 옆자리로 말없이 와 앉는다. 차를 탈 때도 그렇다. 같이 뒷자리에 앉히면 베리는 어김없이 냉큼 앞자리의 조수석으로 뛰어와 내 무릎에 앉는다. 베리가 부러운가 낑낑대던 아키는 이내 잠잠해진다. 말없이 얌전히 쓸쓸하고 고독한 뒷자리의 시간을 혼자서 감내한다.베리가 아픈 후엔 베리에 대한 배려가 더 애틋해졌다. 베리의 기저귀를 갈 때면 안쓰러운 듯 가까이 와서 냄새 맡고 몸을 핥아준다. 까칠한 베리도 싫지 않은 듯 몸을 내어주는 것 같다. 베리가 입원했을 땐 식음을 전폐하여 병원에 면회다녀온 후에야 식욕을 되찾은 정말 다정도 병인 아키였다. 그런 아키가 지난 주 몹시 화가 났다. 실제 화가 난 건진 모르겠으나 난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 모두의 집에 가서 풀뽑고 꽃씨 뿌린다고 하루를 머물다 왔다. 이름을 불러도 꼼짝않고 반기지를 않았다. 늙은 베리는 그렇다치고 아키가 이상했다. 고개를 외로 꼬고 쳐다보질 않아 몸에 이상이 생겼나 걱정했다. 지난밤 돌아오지 않은 걸 후회할 정도였다.아키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내 발치께에 뉘였다. 밤새 같이 잤다. 이튿날 아침 아키는 평소의 발랄함을 되찾았다. 잠에서 깨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덥석 안긴다. 앞다리를 어깨에 얹고 얼굴엔 제 얼굴을 갖다대어 마구마구 혀를 내민다. 눈을 마주치고 짧은 꼬리를 격렬히 흔든다. 역시 다정한 아키는, 정에 약한 아키는, 그놈의 정 때문에 마음 상해 삐쳤던 거였다. 그 후로는 모두의 집에 갈 때마다 둘 다 데려간다. 비록 뒷자리의 고독일지언정 함께 있는 것이 아키에겐 더 좋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2023-04-05

우리집 강아지 베리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지난 겨울 베리가 많이 아팠다. 남편이 데리고 병원 다녀오더니 방광암이 의심된다는 거였다. 약물로 치료하되 나을 기약을 할 수 없단다. 힘겨워하는 베리를 안고 며칠 밤을 같이 지샜다. 얼마 못갈 것같아 울며 장례식장을 알아보고 영정사진도 찍어야 하나 아득해하며 또 울었다. 힘든 약물치료보단 좋아하는 것 실컷 먹이며 여생을 보내게 하자 결정했다. 사람 나이로 치면 90 아닌가. 노령견에게 좋다는 저지방 사료에, 황태와 닭을 푹 고아 갈아 먹였다. 사골국물에 사료를 말아 먹이기도 했다. 마룻바닥엔 매트를 깔았다. 기저귀도 채웠다. 그렇게 정성을 쏟으며 겨울을 났더니 많이 나아졌다. 아직도 기저귀를 차고 있고 기저귀가 벗겨지면 집안 곳곳에 오줌스팟을 만들긴 하지만 이보다 더 고마울 수가 없다. 코끝이 반들거리는 걸 보고는 건강해진 것 같아 안도해한다.11년전, 4살의 베리가 왔을 때는 그야말로 까도녀였다. 까칠하고 도도하고 세련된 미니핀. 눈썹 위, 발목 부분의 노란 색을 제외하곤 온몸이 윤기나는 짧고 검은 털의 베리는 매력적인 도시여자같이 예뻤다. 유기견인 강아지를 보호하던 아들이 동물보호센터에 보낼 수 없다며 데려왔다. 똑똑하고 깔끔하여 배변 문제로 속 한 번 썩이지 않았다. 뭐든 너무 잘 먹는 게 단 하나 흠이었다. 처음 올 때 날씬하던 몸매는 2년만에 마치 까만 베개같았다. 산책 때 사람들이 뚱뚱하다고 입대면 미니핀 아니고 미니픽이에요 할 정도였다. 다이어트하면서 체중계를 내오면서 “몸무게”라면 달랑 올라앉았다.그 식탐이 문제가 되었다. 아무거나 먹고는 탈이 낫고, 어김없이 응급실행. 병력도 화려하다. 입원 4번, 수술은 두 차례나 했다.첫 기억은 지금도 아찔하다. 비 오는 밤, 학교에서 늦게 돌아온 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베리가 토하고 비틀댄다며 남편이 걱정했다. 119로 전화했더니 강아지는 안된단다. 남편이 아는 수의과 교수에게 전화해서 큰 병원으로 갔다. 병원 가는 차 안에서 내내 울었다. 장장 4시간의 검사에 치료를 한 후, 위기를 넘겼다고 해서 한시름 놓았다.그 후에도 몇 차례 응급실을 찾았고 비용도 만만찮았다. 우린 종종 천만 베리라고 한다. 병원비가 천만 원 이상 든 때문이었다.작년 여름, 또 한밤중에 병원을 찾았다. 췌장염으로 열흘이나 입원하였다. 코로나 시국이라 면회도 못해 전화로 상태를 전해 듣곤 하던 때였다. 우리집엔 베리말고 아키라는 갈색 푸들이 한 마리 더 있다. 5년전 베리 친구 삼는다고 아들이 키우던 애를 데려와 같이 놀던 베프다. 베리가 없자 아키가 식음을 전폐하고 시름겨워했다. 아무것도 먹질 않고 베리의 담요에 엎드려 꼼짝 않는다. 베리가 그리워 그러는 것 같았다. 병원에 전화하여 상황을 얘기하고 면회를 간청했다. 병원 측의 배려로 입원실 대신, 병원 뜰에서 둘은 상봉했다. 어쩜 그리도 애틋할까. 서로 몸을 부비며 즐거워하는 걸 지켜보는 우리 부부가 더 감격해했다. 집에 온 아키는 사료를 폭풍흡입했다. 90 노인 수발들 듯하는 요즘이지만 베리가 잘 먹고 신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뿐, 닥치지 않은 일은 미리 생각하지 않으려한다.

2023-03-22

모두의 집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모두의 집에 봄채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남편은 홍매실, 청매실, 자두, 사과, 샤인머스켓, 블루베리 등의 과일나무를 잔뜩 사서 집안 곳곳에 심었다. 난 올망졸망한 다육이를 30개나 들였다. 화분에 옮겨 심었으나 밤이면 영하로 내려가는 추위를 못 이길까 염려되어 방안에 모셔두고 있다. 엔간히 따뜻해지면 댓돌 옆에 가지런히 내놓을 참이다. 마당 뜨락 한켠에 심을 꽃은 무엇으로 할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 꽃잔디, 채송화, 패랭이와 같이 땅에 납작 엎드려 피는 잘디잔 꽃이 이쁜 걸로 구상 중이다. 우물이 있는 경사진 너른 터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쉽게 심고 가꾸기 좋은 종류를 폭풍검색. 처음엔 청보리를 심으려 했다. 다 자란 후의 뒷처리가 힘들다니 패스. 유채꽃은 비교적 수월하고, 3월 초에 씨 뿌리면 5월초부터 노란 꽃을 즐길 수 있단다. 바로 꽃씨를 주문하고 심는 법을 찾아 숙지했다. 심기 1~2주 전 미리 땅을 한 번 갈아엎은 뒤 퇴비를 뿌려 주란다. 지난주 이틀을 잡초 뿌리를 뽑고, 돌을 가려내었다. 제대로 할지 걱정이지만 일단 씨는 뿌려봐야지.작년 6월, 육신사가 있는 달성 하빈의 이 집을 얻었다. 삼성의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부인 박두을 여사의 생가였다. 처음 소개받았을 땐, 순천박씨 집성촌인 이곳에 타성받이로 와 사는 것에 주저했다. 높은 기와담장이 있는 주위의 다른 집과는 달리 울타리도 대문도 없는 한데집이라 다소 휑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마루에 걸터앉아 앞의 산을 바라보는 탁 트인 시야가 시원했다. 비 오는 날, 기와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에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 패는 마당이 예뻤다. 아파트살이가 슬슬 싫증나던 참이기도 하고, 한창 흙장난하며 놀고 싶어할 손주들을 위해서도 좋을 듯 싶었다.며칠 뒤 손자를 데리고 왔다. 무작정 들어온 집이 누구집이냐고 묻길래 네 집이라고 했다. 내 집 아닌데 하더니 그럼 ‘모두의 집’이라고 하면 어때요? 제안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나와 동생의 집. 그리하여 이 집은 ‘모두의 집’이 되었고 이름 대로 정말 우리 가족 포함한 모두의 집이 되었다. 서울의 손녀들도 하루를 묵더니 떠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모두의 집이니 언제든 올 수 있다며 겨우 달랬다.울도 담도 대문도 없으니 지나가는 사람 누구나 들어와도 되니 모두의 집이기도 했다. 모두의 집이니 누구든지 와서 묵어도 좋다고 지인들에게 광고했다. 육신사의 내력과 동네 자랑도 했다. 내친김에 육신사와 남평문씨본리세거지, 상화기념관을 엮어 ‘대구명문가기행’이라는 프로그램도 짜서 뿌렸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며칠을 묵었다. 또 아름다운 동행이라 이름한 성인학습자동기들도 다녀가고, 기업체모임도 가졌다. 함께 여행지산책을 하는 지인들, 코로나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외가쪽 동기간 모임도 밤새워했다. 손주 친구도 초대하여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이제 모두의 집에 봄꽃이 환하게 피면 모두가 와서 즐겼으면 좋겠다. 육신사를 찾는 관광객들의 포토존이 되어도 좋겠다는 야심찬 바램으로 열심히 봄단장을 할 일이다.

2023-03-08

할매카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지난 주 손자의 유치원 졸업식이 있었다. 10명의 원생에 축하하러 온 학부모와 조부모가 족히 50명은 더 돼보였다. 우리만 해도 아들 내외, 우리 부부, 외조부모까지 여섯이나 됐으니….작년 이맘때쯤이었다. 통원버스가 집 부근으로 오지 않는 유치원에 다닐 손자의 등하원을 고민하는 아들내외에게 선뜻 내가 맡겠다고 했다. 은퇴해 다소 한가하니 이참에 손자랑 시간을 보내도 좋을 듯싶었다. 매일 아침 등원과 오후 2시경의 하원을 도맡았다. 집이 가까운 데 있어 평소 자주 보던 사이지만 최소 1년간 매일 보게 됐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않으랴 설렐 정도였다. 제일 먼저 차에 카시트를 얹고, 간식바구니를 마련해서 과자를 채웠다. 지인이 선물해 준 차량용 트레이와 쓰레기통도 장착했다. 승용차로 10분 내외의 거리였다. 그 짧은 시간에도 다정다감한 손자는 유치원에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나와 같은 할머니들이 두 분 더 계셨다. 특히 하원할 때 아주 잠시, 약 10분 정도 만나는 분들이었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다 정이 들었다. 맘카페라는 단어가 갑자기 떠올랐다. 초등학교나 유치원의 엄마들이 지역 육아정보 공유를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가 점차 규모가 커진 인터넷 커뮤니티가 됐다는 정보를 귀동냥했던 터였다. 우리도 맘카페같이 할매카페 하나 만들까요? 농담 삼아 한 이야기에 모두 동의했다. 매일이다시피 만나 어느 정도 친목이 생겼기에 쉬웠다. 우린 할맘 (할mom)은 아니었다. 할맘은 부모를 대신해 전적으로 손주를 돌보는 할머니라는데, 우린 그렇게까진 아니었다. 그저 맞벌이하는 자녀의 조력자로 손주를 돌봐주러 잠시 시간 내는 그저 할매 노릇인 거였다. 그렇다고 절대 소홀할 일은 아니어서 부득이한 경우엔 할배들이 대신했다. 일 년간 아이들 친외가의 조부모를 모두 뵌 것 같다.할매카페는 맘카페와 같이 인터넷으로 뭔가를 도모할 일은 결코 없기에 우린 오프라인에서 만나고 즐겼다. 그래도 맘카페 흉내는 냈다. 아침에 아이들 등원시킨 후 근처 브런치 맛집을 찾아 브런치를 즐기는 것으로 첫 시작을 했다. 수다의 재료는 무궁무진해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오전 10시에 들어간 카페에 오후 2시까지 있기가 죄스러울 정도였다.내가 독감에 걸려 일주일을 쉰 적이 있었다. 문자로 문안도 하시더니 일주일 후 다시 뵙자 병치레하여 힘들었을 테니 따뜻한 칼국수를 사주시겠단다. 칼국수 맛집을 수배했다. 칼국수 대신 병 끝에 먹으면 좋다는 찹쌀수제비로 몸을 데우고 커피를 마시며 서너 시간 이야기를 나누니 오랜 친구에 진배없었다. 나잇대가 비슷하고 동시대의 경험치가 있어서인지 공감하고 감동하고 때로는 파안대소하는 얘기가 끝이 없었다.손주들 졸업이 다가오자 우리의 만남도 끝날 것이 아쉬웠다. 애들은 졸업하지만 우리끼리 한 달에 한 번씩이라도 만날까요? 물론 다같이 찬성. 할매카페의 다음 모임은 3월 둘째 화요일이다.

2023-02-22

정초, 거조암에 가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올해는 예쁜 후배랑 갔다. 언제든 어디든 동행을 청하면 항상 선선하다. 일하는 이 불러내 미안하다 싶다가도 거조암의 오백나한을 꼭 보여주고픈 마음이 컸다. 이미 잡혔던 약속을 취소하고 한달음에 집까지 와서 나를 차에 태운다. 작년까진 늘 남편과 함께였다. 설 연휴를 보내고, 정월대보름 전에 꼭 하루를 비워 오백나한을 뵈러 간 지 여러 해째다.집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평탄하고 넓은 길을 지나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조금만 오르면 도착하는 한적한 길 끝에 일주문이 다소 생뚱맞게 서있다. 영산루를 머리에 얹고 가파른 계단을 지나면 정갈하고 말간 마당에 얌전한 삼층석탑이 있다. 탑 뒤에 영산전이 튼실하게 앉아있다. 단청 화려하고 삼면이 문으로만 되어있는 여느 절들과 달리 장식없는 흙벽이다. 동서로 길쭉한 전각 한가운데 여닫문이 있고, 창문이 좌우로 4개 달려있다. 단정하고 고졸하다 싶은데 무려 국보다. 영산전 안에 나한상이 오밀조밀 빽빽이 좌정해있다. 오백나한은 500위가 아니고 실은 526위라 한다. 흰 회를 얇게 바른 얼굴과 몸에 알록달록 채색을 한 석조상들이다. 하나하나 그렇게 다채로울 수가 없고 자세나 표정이 하나도 같은 이가 없다. 진지한 모범생은 가끔 보이고 대부분이 앉음새도, 표정도 익살스럽다. 입고 있는 옷색이며 들고 있는 물건도 가지가지다. 수염이 있는 이, 없는 이, 수염의 모양도 같은 이가 없다. 모자 쓴 이도 있고, 껄껄껄 웃거나, 미소짓거나, 하품하거나, 곁눈질하거나, 옆 친구와 속삭이는 이, 경전, 염주, 목탁에 포도, 귤 같은 과일을 가진 이, 호랑이나 사슴 등의 동물을 안고 있는 이도 있다. 심지어 거꾸로 물구나무 서있는 나한상이라니.법당에 들어서면서 6만원의 보시금을 백원짜리 동전으로 바꾼 돈바구니를 얻는다. 삼존불에 삼배한 후 번호대로 화살표를 따라 나한의 명호를 입속으로 부르며 앞앞이 놓인 쟁반에 동전 하나 놓고 합장례를 한다. 추워서 손은 곱고, 동전 육백 개의 무게가 만만찮지만 면면이 다른 나한상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주황색 법의를 입고 왼무릎을 세우고 손을 소매 속에 감춘 불소소존자 옆에 연두색 법의의 견유변존자가 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 화장존자는 왼손으로 목탁을 쥐고 오른손 다섯 손가락을 모두 입에 넣어있고 그 옆 광명존자는 염주를 두 손으로 다소곳이 쥐고 있다. 둘 다 수염이 없는 걸로 봐서 젊은이신가 모르겠다. 두 손을 모두 큰 입 속에 넣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성무진존자는 앞섶도 열어젖혀 둥근 배속살을 다 보인다. 도리천존자는 귀가 어두우신가 오른손을 귀 뒤에 대고 옆얼굴을 하고 있다. 보시금을 바꿔준 보살님은 한가지 소원만 외라고 했다. 나한들의 표정을 보고 명호를 부르다 보면 그 소원은 까맣게 잊힌다. 그들의 공부방에 나도 함께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돈바구니가 가벼워지고 번호가 높아질 무렵이면 그저 환희심만 가득해진다. 함께 간 후배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이 나한상을 캐릭터로 개발하면 어떨지 제안해 본다. 151개나 되는 포켓몬스터에 비할 바가 아니지 않을까.

2023-02-08

우리집 설날 풍경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이번 설에도 우리는 모두 호텔에서 만났고 헤어졌다. 올해는 대구의 자연휴양림을 겸한 한적한 호텔을 찾았다. 방 셋을 예약해 두었다. 나와 남편 둘에다가, 서울 큰아들네 4명과 대구의 작은아들네 4명 모두 합하면 10명이다. 세배는 모두 우리 방에 와서 하고, 새해 덕담 나눈 후 아침 조식을 하러 갔다. 여유롭고 느긋하고 무엇보다도 며느리와 손주들이 좋아해서 이런 명절 지내기를 정한 나 자신이 뿌듯하기까지 하다.30년 전 시어머니 장례 후, 제사를 누가 모실지 남편과 시숙 3형제분이 숙의를 하셨다. 그 일이 상의할 문제인가마는 맏형님네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신 상태였고, 둘째 형님은 모태신앙으로 기독교를 믿는 분이셨다. 형제 중 막내인 남편은 선뜻 내가 모실게요 말하기에 내 눈치가 보였던 모양이었다. 이 사람도 집에서 노는 사람이 아니잖느냐고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있던 나는 흔연히 내가 모시고 싶다고 얘기했다. 직장 다닌다는 핑계로 어머님께 아이들을 맡겼고, 기쁘게 우리 아이 둘을 키워 주셨던 분이었다. 제사를 모시면 그 보답이 될까 싶은 생각이었다. 또한, 친정어머니가 제사 지내고 어른 모시는 큰집이 얼마나 좋은가를 자주 얘기했으며 평소 그 소임을 감당하시는 큰어머니를 매우 부러워하셨다. 당시 36살밖에 안된 나는 비록 막내지만 제사를 지내면 친정어머니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큰집 행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가 보다. 예전 조선시대에는 윤회봉사라고 해서 아들딸 구분 없이 자녀들이 조상들의 제사를 나누어 모셨던 적이 있었다. 반드시 맏이만 제사 의무를 질 필요는 없다는 얕은 지식도 나의 결정에 한몫했다.100일 동안 매일 아침저녁 상식을 차려 올리는 100일 탈상을 했고, 초하루 보름엔 삭망을 지내는 풍습을 따랐다. 매년 설과 추석의 두 차례 차례와 기제사도 나름 정성껏 준비하고 모셨다. 그렇게 25년을 제사를 지냈다.두 형제가 3년 간격으로 차례로 결혼을 하고, 또 연년이 4명의 손주가 태어나자 명절 풍경이 갑자기 왁자해졌다. 시숙들 식구와 함께 모이면 15명이나 되니 와, 이건 보통일이 아니라는 현실감에 새로운 모색을 할 시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직장 다니는 두 며느리에게 명절증후군 따위 경험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야 뭐, 옛날 시속 숭상하고 잘하든 못하든 내가 자발적으로 맡은 일이었지만, 나의 며느리들에게까지 물려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5년전 추석 차례 지낸 후, 가족회의를 하자고 했다. 그리곤 내 생각을 얘기했다. 어쩌면 나의 일방적 선언, 또는 통보였다고 하는 게 더 맞다. 기제사는 우리 두 내외가 힘닿는 대로 모시겠다. 명절엔 차례 대신 성묘를 하겠으며, 아이들과는 이 귀한 연휴엔 가족 여행을 계획하겠다고 했다. 손주들이 더 크면 어려울 일이기에 내년부터 바로 시행할 거라고 했다. 시숙께서 그동안 고생했다는 치하도 곁들여 흔쾌히 두말없이 동의해 주셨다.그리고는 우리는 해마다 두 번의 정기적인 가족여행을 준비하여 경주, 부산, 여수 등지에서 만나고 명절을 보낸다.

2023-01-25

은퇴 후 버킷리스트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코로나19가 다 망쳤다. 은퇴 후의 찬란한 삶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심혈을 기울여 버킷리스트를 작성했다. 그 또한 아름답고 원대하다. 그러나 모두 이룰 수 있는 리스트라고 벅차게 짰다. 25년간 몸담았던 학교엔 할 만큼 했다. 자타가 공인한 바였다. 조금의 후회도 미련도 없으니 이젠 내 몸과 마음 모두 나를 위해 쓸 것이다.우선 한 나이라도 젊을 때 전공을 살려 해외봉사를 할 것이다. 코이카에 입회해두고 일정을 수시로 확인했다. 한국어강사 전문가그룹을 선발할 때 신청하고자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그 봉사를 2년 한 후엔 해외여행을 할 것이었다. 지인과 친척 동생이 있는 미국, 독일, 일본, 제자가 있는 베트남과 네팔에서도 언제 올 거냐는 성화가 빗발같지만 순서를 기다리라고 간신히 주저앉힌 상태였다. 어느 곳이든 한 번 가면 한 달 이상씩 살기를 할 거라면 협박을 해도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태세다. 그 계획조차도 구체적으로 짜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리스트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독일에선 튀빙겐을 거점으로 해서 오스트리아, 스위스 헝가리까지, 일본에선 시코쿠 오헨로 108순례길, 네팔에서는 4월의 트레킹, 이런 식이다.엄청 바쁘게 살긴 했지만 게으른 천성 탓에 몸을 돌보지 못함을 반성하며, 몸만들기 프로그램도 오지게 짜봤다. 요가배우기, 필라테스배우기, 실내클라이밍 도전, 자전거 타기, 하루 5천 보 이상 걷기, 차 팔고 대중교통 이용하기….해외 봉사 실행되기 전, 틈을 봐서 국내 봉사도 가능하면 해 봐야겠다. 가정복지관도 기웃거려 보고, 지역 주민센터나 문화센터에서 자원봉사할 것을 찾기 위해 집으로 다달이 배달돼 오는 구청소식지를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오히려 배울 정보들이 더 많았다. 재봉, 그림, 서예, 피아노도 쳐볼까….그래도 공부가 체질인데 공부 계획도 세웠다. 이참에 천자문 쓰기 1년 완성, 오래전 잠시 배우다 만 일본어기초, 영어회화기초도 배워야지, 외국여행을 위해서도 유용할 테니, 그보다 먼저 한국사능력시험도 도전할 거야…. 제일 먼저 수험서를 두 권이나 사고, 유튜브에 한능검 채널도 구독했다.무엇보다도 난 온전히 할머니 역할을 하고 싶었다. 바빠 이따끔 얼굴 보고 밥 먹는 할머니 말고, 최소 일주일에 하루이틀을 데리고 자고 보살펴 주는 할머니, 내가 직장 다닐 때 내 아이들을 할머니께 맡겨두고 잠시 망중한을 즐겼던 때를 생각하며 며느리에게 숨구멍을 주고 싶기도 했다.실제 주위의 많은 이들이 나의 은퇴 후가 궁금한지 더러 물었다.“퇴직후에도 뭔가 더 하실 거지요?” “아뇨. 할매만 할 거에요. 사회에서는 잊혀진 여자가 되고 싶어요.”이렇게 격정적으로 할머니이고 싶었다.그러고도 남는 시간을 주체할 수 없다면 딱 좋은 거, 밤새워 영화를 보면 될 것이었다. 비싸지 않은 영화채널을 구독해 두고 장르별로, 국가별로, 감독별로, 배우별로 묶어 보아도 좋을 것이었다.이렇게 연도별, 순서별로 짜놓은 나의 찬란한 버킷리스트 24개가 전면 수정될 지경이 온 것이었다. 코로나19때문이었다.

2023-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