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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2

등록일 2023-08-09 15:58 게재일 2023-08-1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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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된장찌개를 끓이다가 황급히 불을 껐다. 텃밭에 가서 대파를 찾았다. 풀숲 더미를 뒤져 간신히 하나를 찾았다. 쑤욱 뽑아 뿌리를 털고 그 자리에서 흙 묻은 겉껍질을 깠다. 가까이 있는 수돗가에서 씻어 들어오면서 대충 비틀어 잘랐다. 제법 실하게 큰 고추 몇 개도 땄다. 한 개는 된장에 썰어 넣고 몇 개는 쌈장에 찍어 먹어도 좋겠다.

한 달여 전, 안사돈께서 파 모종이 있으니 심겠냐고 전화주셨다. 작년에 들깨와 마를 심어주셔서 잘 키운 적이 있었다. 나도 한참을 못 간 터라며 같이 심으러 가는 게 어떠시냐고 여쭈었다. 흔쾌히 동행하셨다. 오랜만의 집엔 무성히 자란 풀이 반겼다. 풀에 뒤덮인 텃밭이 부끄러워 막무가내 엎드려 풀을 쥐어뜯어 뽑았다. 풀 속에 숨어 있는 오이와 가지는 새끼손가락만한 열매를 겨우 맺고는 노랗게 비틀려 있었다. 큰형님이 주신 호박 모종은 꽃도 피우지 못한 채였다. 딸기 모종을 살 땐 손주들에게 직접 따게 해야지 꿈도 야무졌다. 그러나 토마토와는 달리 딸기는 어찌된 노릇인지 열매가 달리는 듯하다간 지고 달린 열매조차도 볼품없는 데다가 흙에 묻어 맥없이 잎만 뻗치고 자라있었다. 제법 이파리 성성하여 향기로운 맛을 줬던 고수와 청겨자조차 키가 자랄 대로 자라 꽃을 피우고 있고, 싱싱하여 아름답기까지 했던 상추마저도 잎색은 바래고 대신 상춧대를 높이 올려 꽃을 달고 있었다. 잎채소들은 한창 자랐을 때 더 자주 더 많이 따 먹었어야 했다. 예뻐서 아끼느라 먹을 시기를 놓친 거였다. 고추도 먹을 만큼 크게 자란 것이 대견스러워 따지 않았더니 며칠 후엔 발갛게 익는 거였다. 더욱 이뻐 두고두고 감상(?)하려 했는데, 그만 갈라지고 썩어버리는 게 아닌가. 주인 잘못 만나 제 구실을 못한 채소들에게 미안함이란….

안사돈도 같이 풀을 뽑으시면서 제초제를 뿌리지 않으면 잡초를 막을 수 없다고 하신다. 약을 치지 않으려면 비닐로 멀칭이라도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다. 가져오신 파는 마침 집에 있는 검은 비닐자투리를 땅 위에 덮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심었다. 그렇게 안사돈께서 소중히 심어주신 파였다. 멀칭 덕에 다른 곳보단 잡초가 훨씬 덜했고 텃밭 중에서도 가장 먼저 물을 주며 정성을 더했더니 제법 꼿꼿하게 자라주었다. 그러나 꽤 오랜 장맛비엔 속절없었다. 기승을 부리며 자란 풀더미에 가려있는 가엾은 파에 미안함마저 들었다. 농사는 주인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자란다던데, 자주 오지 못한 내 탓이 크다며 자책할 밖에….

한해의 배움이 크다. 내년 텃밭을 일굴 때는 올해의 실패를 지혜로 삼아야겠다. 유기농퇴비를 듬뿍 섞어 땅심을 도와준다. 골을 파서 두둑을 크게 만들어 올리고 모종과 씨앗은 두둑에 심는다.-나는 골에다가 모종을 심었었다.- 아, 밭두둑엔 미리 넓은 멀칭비닐을 덮어 두어야지. 무엇보다도 내 발자국소리를 더 자주 듣게 해 주리라. 예쁜 모종과 씨앗에게 더 이상 미안하고 부끄러운 주인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도 된장에 송송 썰어넣은 파향과 고추향은 달디달았다. 갓 딴 고추를 쌈장에 찍어 한 입 베어 무니 서걱! 소리가 싱그러웠다. 이게 바로 텃밭의 맛이로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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