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예쁜 옷을 잘도 만드셨다. 자잘한 꽃무늬가 있는 무명천을 떠서 종이로 본을 만들어 소매 풍성한 원피스를 입혀서는 이리저리 돌아보라던 기억이 생생하다. 한 살 아래 남동생의 옷도 척척 만들어 입혔다. 마치 사립학교 교복을 닮은 흰색 깃을 단 그 옷을 단정히 입은 동생의 사진이 아직도 있다. 엄마의 손재봉틀은 혼수로 장만해온 거라고 들었다. 방바닥에 앉아 오른손으로는 손잡이를 돌리며 왼손으로 천을 박음질하는 엄마의 솜씨는 어린 내 눈에는 신기였다. 반짇고리에 있는 색색의 천들을 이어 조각보를 만들기도 했던 엄마의 바느질은 그저 우아한 취미였고, 우리들의 옷을 손수 지어 줄 수 있는 기쁨이었다. 그때까지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풍비박산되자 엄마의 재봉틀은 생계수단이 되었다. 이웃 누군가의 옷을 지어주기 시작했다. 크고 멋진 기와집에서 옮긴 작은 방 한 칸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엄마는 밤새도록 재봉틀을 돌렸다. 단 하루 치의 먹을 것이라도 나올 곳은 엄마의 재봉틀뿐이었다. 엄마의 솜씨는 입소문을 타고 번졌고, 일감이 많아질수록 엄마의 밤샘일은 늘었다. 그래도 다섯 식구 입에 풀칠하고, 삼 남매 학교 치레는 만만치 않았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엄마는 큰맘 먹고 손틀을 발틀로 바꾸었다. 그리고 일터를 방안에서 난전으로 바꿨다. 부끄러움을 떨치고 세상으로 나갔다.
매서운 바닷바람, 거친 바닷사람, 그리고 따가운 햇빛에 훤히 노출된 엄마, 그리고 엄마의 재봉틀 덕에 우리는 산골짜기 초가집에서 시내로 이사할 수 있었다. 학교와 좀더 가깝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엄마의 바느질 솜씨는 삯바느질에서 옷 수선으로 바뀌어도 솜씨가 뛰어났던지 주변의 같은 업종의 아주머니들에게서 시샘과 부러움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엄마는 그만큼 더욱 고달팠다. 밤이면 퉁퉁 부은 발을 주무르며 끙끙 앓았다.
그때까지 거친 세파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두 분이었다. 사업 실패 이후 아버지는 포기하셨던 듯 무력해지셨으나 엄마는 강하게 맞섰다. 부잣집 마님의 취미였던 솜씨좋은 바느질을 생계수단으로 삼을 정도로 엄마는 악착같고 독한 가장이 되어 있었다. 온전히 엄마의 뒤에서 무기력했던 아버지는 엄마 대신 집안일을 좀 거드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엄마의 일터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처음엔 엄마의 일을 보조하셨던 것 같다. 그러다가 엄마의 일을 배워 엄마의 재봉틀 옆에 아버지의 재봉틀을 하나 더 두고 같이 일을 하셨다. 그렇게 두 분은 참으로 열심히 일하셨다.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중학교부터 큰 도시로 유학할 수 있었다. 주말엔 셋이 번갈아 내려가 두 분의 일을 거들곤 했다. 무서우리만치 뜨거운 두 분의 교육열에 보답하듯 우리도 치열하게 공부해서 보답하려고 애썼다. 엄마의 교육열만큼이나 뜨겁게 일했던 엄마의 낡은 재봉틀은 오빠가 잘 간직하고 있다. 며칠 후 엄마의 기일에 가면 엄마 보듯 만져보고 쓰다듬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