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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방치농법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3주 정도 비웠던 모두의 집에 들어간 순간, 와…. 말문이 턱 막혔다. 우물 부근엔 내 키보다 더 자란 뽀얀 개망초꽃이 뒤덮었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마당도 마치 풀밭 같아 주인없는 폐가 느낌이었다. 작년 백일홍이 찬란했던 꽃밭터도 개망초꽃밭이 되어 있었다. 이를 어쩌나. 풀밭을 그대로 두나, 꽃밭을 만들기엔 너무 힘들고 시간도 늦었지 않을까 머릿속을 굴렸지만 답이 안 나왔다.그러나 텃밭은 그렇지 않았다. 3월과 4월에 흙을 일구고 풀을 뽑고 퇴비를 섞어 찰진 텃밭을 일구었다. 작년 기승부리며 자란 풀 때문에 채소 재미가 적었기에 미리 대비한다고 검은 비닐을 사서 멀칭도 해두었다. 오일장 서는 곳마다 가서 사와 심은 채소 모종들은 키높이를 맞추어 심었다. 가장자리엔 키가 높이 클 토마토와 방울토마토, 그 앞줄엔 쑥갓과 고추모종을 나란히 심었다.양배추, 오이와 콜라비는 앞쪽으로 몇 포기씩 줄을 맞추어 깔아주었다. 호박과 옥수수와 들깨는 담장 저켠으로 좀더 멀찍이 심었다. 자주 물 주러 가서 오목조목 자라는 모습을 즐기고, 하얀 고추꽃, 노란 오이꽃과 호박꽃을 흐뭇하게 보면서 왠지 큰 수확을 할 것 같은 기분좋은 예감도 있었다. 양배춧잎, 콜라비잎, 들깻잎과 쑥갓을 따서 쌈 싸먹는 재미를 누리다가 5월 중순부터 거의 3주를 못 갔다. 미처 세우지 못한 고춧대를 아들에게 부탁했고 아들은 약속을 지켰고 사진까지 보내줬다. 그 덕분에 조롱조롱 맺혀있는 연두색 고추가 감탄스러울 정도로 많이 열렸다. 누렇게 달린 늙은 오이와 꼬부라진 오이가 여럿 뒹굴고, 그 옆엔 새끼손가락만한 오이가 꽃까지 단 채 여럿 맺혀있었다.애기 머리통만큼 큰 자색 콜라비도 실하게 자라있었다. 자라다 무게를 못 이겨 흙 위에서 뒹굴고 있는 토마토는 잎 속에 붉고 푸른 열매를 감추고 있고, 익어 터져버린 열매가 땅 위에 그득했다. 마치 하얀 마가렛꽃처럼 앙증맞고 예쁘게 꽃 핀 쑥갓은 해맑게 생글거리고 있었다. 양배추는 넓고 푸른 잎마다 벌레들이 구멍을 내어 멀쩡한 게 없었다. 양배추에 농약을 심하게 친다더니 과연 그렇겠구나.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땅을 덮은 검은 비닐의 작은 틈을 비집고 나온 풀들과 엉겨있었다. 풀을 뽑아주지 못한 터에 이 사달이 난 거였다.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잎 사이를 비집고 방울토마토를 땄다. 다 자란 고추를 골라 따고, 늙은 오이와 젊은 오이도 비틀어 따고, 콜라비도 그 중 큰 놈을 하나 골라 뿌리째 뽑았다. 호박더미를 뒤지니 애호박도 숨어있어 두어 개 건졌다. 향기로운 들깻잎도 잎 넓은 것으로 몇 장 땄다. 순식간에 바구니 두 개가 그득했다. 고마워라 고마워라 감탄하면서 미안해하면서 수확한 채소들이 엄청났다.방치농법이란 말을 듣고 옳다구나 바로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수확물이 생기니 딱이다 싶은 말이었다. 더 알아보니 자연농법이란 게 있다. 자연이 짓고 인간은 시중드는 농법이라고 한다. 게으른 농법이 아니라 예사농사보다 품이 더 많이 들 것 같았다. 난 그저 방치를 최소화해서 싱싱한 밥상을 차려준 채소들에게 고마움의 예를 갖출 정도의 위인일 뿐이다.

2024-07-10

선거홍보판과 그라피티 독일여행기(下)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마침 우리가 갔던 때가 유럽의회 의원선거기간이었던가 보았다. 독일의 튀빙겐, 슈튜트가르트, 뮌헨,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와 비엔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도 선거홍보판이 거리 곳곳에 붙어있었다. 처음엔 하나같이 웃는 얼굴의 그 사진이 무엇인지 몰랐다. 동생이 선거홍보판이라고 했다. 모조지 2절 정도 크기의 빳빳한 종이에 선거에 출마한 사람의 얼굴이 크게 박혀있고, 당명과 당의 선거구호가 쓰여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홍보판이 길가 가로등에 묶여 있었고, 어떤 곳엔 가로수 밑둥에 네 면으로 둘러 묶어붙인 것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현수막에 비해 훨씬 사이즈가 적었다. 평소에도 우리의 현수막을 도시의 흉물로 여겨 보기 싫어하는 나였기에 유럽의 홍보판은 훨씬 간소해서 도시의 미관을 그다지 해치지도 않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몇 년 전 미국에서의 경험도 비슷했다. 어떤 집의 정원에 사람의 얼굴이 크게 박힌 피켓이 꽂혀져 있어 매우 궁금해했다가 그것이 선거홍보판이라는 걸 알고 놀란 적이 있었다. 개인의 정원에 저렇게 꽂아도 되는지, 허락을 받고 꽂은 것인지 궁금해 하는 내게 돌아온 대답은 더욱 놀라웠다. 그 정원의 주인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자의 피켓을 자발적으로 꽂는다는 거였다. 선거는 겉으로는 조용하고 깨끗하게, 그러나 속으로는 치열하게 치러지는 것 같다는 인상을 두 대륙에서 받았다. 우리의 선거홍보물을 ‘도시의 붕대’라고 불리는 현수막에서 저런 좀 더 자그마한 부착물로 바꿀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귀국 후 유럽의회 선거 후의 판세를 분석하는 뉴스기사를 봤다. 우리가 버스를 탈 때마다 봤던 튀빙겐의 그 환한 미소의 여성 후보는 당선되었을까 궁금하긴 하다.그러나 그 아름다운 도시의 미관을 심히 거슬리게 하는 것도 있었다. 그라피티(graffiti)였다. 그라피티를 사전에서 찾아보니 길거리 여기저기 벽면에 낙서처럼 그리거나 페인트를 분무기로 내뿜어서 그리는 그림이라고 한다. 공공장소의 벽면뿐만 아니라, 상가의 벽면, 대학 건물, 지하철역 벽면과 지하철과 기차의 표면에도 빈틈만 있으면 낙서가 그려져 있었다. 주로 검은색의 페인트로 크고 작은 글씨를 쓰거나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린 정도여서 그라피티를 예술이라 명명해야 한다면 이는 그림이 아닌 낙서였다. 어느 도시 건 어떤 건물이든 분별없이, 가차없이, 빼꼼한 데 없이, 함부로 휘갈겨 놓은 거니, 낙서였다. 독일의 그 고풍스러운 거리, 아기자기하고 예쁜 건물, 비엔나의 오래되고 아늑한 골목의 작은 가게 벽에까지 그려진 낙서엔 화가 치솟을 정도였다. 그라피티를 운운할 때면 예술이냐 범죄냐로 시작한다. 우리나라는 물론 대부분의 국가에선 엄연한 범죄로 규정하고 있다. 얼마 전 경복궁의 담장을 훼손한 낙서로 온 국민이 분노한 적도 있지 않은가. 최근에는 그라피티를 거리의 예술로 대접하여 공공장소의 개성있는 벽화로, 또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그라피티까지도 있다고 들었다. 또는 사회정치적 메시지로도 인정하고 21세기의 문화현상으로 여기는 추세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 현장을 목도해보니 예술로 용인하긴 힘들었다.

2024-07-03

“만져봐야 알지” 독일여행기(中)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외사촌이 사는 튀빙겐에 거처를 정해두고 인근 도시를 다니면서 늘 기차를 탔다. 낮의 기찻길 차창 밖은 전형적인 독일 시골 풍경이었다. 멀리 비스듬하게 야트막한 언덕은 모두 포도밭이라고 동생이 얘기해 주었다. 가까운 둔덕도 온통 푸르렀다. 남편이 저기 있는 건 무엇이냐고 물었고 동생은 들판, 초원, 평원이라고 대답했다. 남편의 물음은 거기 푸른 들판에 심은 작물을 묻는 것이었고, 동생은 잘 모른다고 말했다. 남편의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났다. 슈트트가르트에서 튀빙겐으로 오는 길이었다. 셋이 서로 마주앉아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느 역에선가 웬 남성이 양해를 구하더니 남편 옆 빈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한국어로 얘기하고 있는 우리에게 그가 어디서 왔느냐며 불쑥 영어로 말을 걸었다. 한국이라고 하자 그럴 줄 알았단다. 놀라는 우리에게 남편의 휴대폰을 슬쩍 봤더니 한글이 보여서였다며 웃었다.이참에 남편은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던지 차창 밖의 푸른 들판을 가리키며 무엇이냐고 물었고, 동생이 유창한 독일어로 묻고 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주먹 진 왼손의 새끼손가락부터 차례로 펼쳐가며 열심히 설명하고 동생은 들으면서 크게 웃었다. 아마도 몇 가지의 작물 후보를 꼽는가보다 생각하며 동생의 통역을 기다렸다. “밀인지, 보리인지, 귀리인지 모른다. 만져보면 알 수 있는데…. 잘 모르겠다.” 맞는 말이긴 하다. 가까이 가서 보거나 직접 만져봐 알 수 있다는 그의 대답은 지극히 정확했다. 우리는 그의 말에 크게 동의하면서도 그 말이 왠지 몹시도 우스웠다. 그렇게 얘기의 물꼬를 튼 김에 우리는 튀빙겐에 도착할 때까지 유쾌한 수다를 나눴다. 그와 헤어진 후에도 우리는 그의 대답을 곱씹고 흉내내며 웃고 또 웃었다.며칠 후 비오는 저녁이었다. 동생이 평소 자주 가는 산책길 옆에 저런 밭이 있다며 가서 직접 만져보자고 했다. 엄청나게 크게 펼쳐져 있는 밭엔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두 가지 작물이 있었다. 가까이 가서 만져 봐도 별무소득이었다. 농촌에 산 적이 없는 우리였다. 네이버 렌즈로 사진을 찍어 검색했더니 보리라고 했다. 그 옆 밭도 보리란다. 아직도 정확한 답을 못 찾은 우리는, 만져봐도 모르겠다며 깔깔댔다. 마침 거대한 트랙터를 몰고 오는 농부가 있었다. 동생은 손짓으로 차를 세웠다. 트랙터의 굉음까지 멈추고 얘기를 나누는 동생을 지켜보면서 나는 궁금증에 조바심이 났다. 그와 헤어진 후 동생은 나를 밭 가까이 데려갔다. 이건 밀이고 저건 보리래. 그런데 왜 웃었느냐는 내 물음에 동생은 대답했다. “밀은 빵을 만드는 거고, 보리는 맥주를 만드는 거래. 저기 보리밭은 자기 건데, 맥주를 만드는 게 아니고, 소를 먹이는 거래. 그렇다고 소가 취하지는 않는대. 아마도 우리가 밀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나 봐.” 드디어 농부를 만나 우리의 의문을 풀었고, 남편에게 밀과 보리라는 명쾌한 답을 전했다. 독일에서 만난 두 명의 남성은 독일인답게 진지해서 유쾌했다.그 후 여행 내내 셋 중 누군가가 무엇에 대해 물으면 먼저 이렇게 대답했다. “만져봐야 알지….”

2024-06-26

걷고 보고 듣다 독일 여행기(上)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퇴직하자마자 곧바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여행을 계획했으나 코로나가 발목을 잡았다. 코로나 끝날 무렵엔 2년간 유치원을 다니는 연년생 손자와 손녀의 등하원을 돕느라 또 미뤘다. 지난 3월로 막내 린이가 학교에 가게 되자 이젠 나의 ‘은퇴 후 버킷리스트’ 제일 위쪽에 있는 이 여행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독일에 외사촌 동생이 살고 있었다. 20년도 훨씬 전에 음악공부를 위해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음악치료를 더 공부해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동생이다. 휴가 때마다 귀국하면 반드시 만나서 웃음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친동생 같이 살가운 사이다. ‘네가 있을 때 독일살이 하고 싶다.’며 만날 때마다 버릇처럼 말했더니, 반색을 하며 오라고 했는데, 앞서의 사정으로 미뤄진 지 4년이나 지났다. 동생은 해마다 휴가계획을 잡으면서 나의 독일행을 먼저 확인하곤 했다. 이번 여행은 작년 11월에 동생이 2024년 휴가 계획을 세우며 잡은 일정이었다. 더는 미룰 수가 없다에 합의하면서 우리는 신나게 여행계획을 잡기 시작했다. 여러 곳을 점찍듯 둘러보는 패키지여행은 싫다. 대신 며칠씩 한곳에 머물기. 이왕지사 먼 길 가는데 독일만 가기는 좀 아까우니, 주변국가의 도시도 몇 군데 둘러보기. 우리 내외 나이가 있으니 너무 많이 걷지는 말자. 이상이 나의 요구 조건. 남편은 독일의 시인과 문학과 철학에 관심을 갖고 관련 책을 사서 탐독하더니, 그들의 흔적들을 찾고 싶단다. 동생은 음악 전공자다운 이벤트를 제안했고 나도 대찬성. 두 편의 오페라와 한 번의 연주회가 추가되었다. 우리의 요구와 동생의 제안으로 세상에 둘도 없을 멋진 일정이 되었다. 2주를 훌쩍 넘는 비교적 긴 일정이었다.동생이 사는 독일 남부의 작은 도시 튀빙겐에서 며칠을 머물며 독일살이를 하는 것으로 우리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동생은 아파트를 빌려놓았고,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나와 남편의 교통카드까지 발급해 두었다.걷지 말기는 애시당초 제외였다. 또한 걸어야 보였다. 우리는 하루 평균 1만5000보 이상 걸었다. 2만6000보까지 걸었던 날도 있었다. 매일 만보기의 기록개신을 확인하면서 놀라고 대견해 했다. 밤이면 잠에 골아 떨어졌고 이튿날 또 멀쩡해졌다. 스스로 회복탄력성이 있다고 믿었던 나는 즐겁게 걸었다. 남편은 좀 힘들어했지만 잘 참아주었다. 덕분에 우린 도착한 날 밤에 딱 한 번만 택시를 탔을 뿐이었고, 모두 뿌듯해했다.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대부분의 도시는 고풍스러운 언덕 위의 성, 서양 미술양식의 성당과 교회, 그리고 아름다운 마을 풍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자세히 보고 즐기며 만끽했다.또 하나, 동생이 추천한 음악 프로그램은 충만했고, 여운은 길었다. 뮌헨오케스트라의 ‘토스카’와 비엔나오케스트라의 ‘투란토트’, 비엔나모차르트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내가 직접 보고 듣게 되다니, 기대 이상 상상 이상의 귀호강이었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생각난다. 나의 이번 여행은 ‘걷고 보고 들어라’였다.

2024-06-19

다시, 뜨개질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예전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때, 잠시의 여유 시간이 나면 뜨개질을 하곤 했다. 어느 여름방학 땐 굵은 실로 소파덮개를 짜기도 했다. 그 즈음 지역신문에 정기칼럼을 연재 중이어서 ‘뜨개질’을 제목으로 한 글을 게재하였고, 몇 년 전 펴낸 수필집 ‘고비에 말을 걸다’에 싣기도 했다.또 어느 겨울엔 긴 목도리를 짜서 식구들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한 적도 있다. 솜씨는 없으니 패턴도 없는 민무늬, 그저 짜기 쉬운 걸로 길게만 짜면 되는 것이었다. 남편, 큰아들, 작은아들 차례로 목도리를 짜서 목에 휘감아주었다. 아들들은 고맙게도 결혼 후인 지금도 그 목도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엄마가 짜 준 것이라고 며느리에게 말했던지 버리지 않고 소중히 여기는 것 같아 내심 흐뭇했다.나도 노랗고 포근한 느낌의 실로 목도리를 만들어 감고 다녔다. 학교의 친한 교수가 탐을 내어 선뜻 드리고, 다시 하나 더 짠 기억도 있다. 손주들이 넷이나 되고 막내 린이 걸음마를 떨 때쯤엔 민소매 원피스나 셔츠를 짰다. 첫 손녀 윤에게는 분홍원피스, 은에게는 연두색, 린에게는 노란 원피스를 짜 주었다. 손자인 건에게는 하늘색 민소매 셔츠를 입혔다. 그 역시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며느리들에게 미리 사이즈를 물어 적당히 맞추면 될 정도로 쉬운 뜨개질이었다. 다 짠 옷을 보내자마자 곧바로 입혀 사진 찍어 보내주니 그걸로 만족했다. 뜨개실이 부드럽지 않고 다소 거친 감이 있어선지 아이들이 입기를 꺼려했다는 후일담을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옷들은 어디로 갔는지도 궁금치도 않다. 그저 내 손으로 손주들의 옷을 짜면서 애들에게 입혀 보는 설렘을 즐기는 것으로 족했다.그리고 한동안 뜨개질을 잊었다. 바빴던가 보았다. 2년 동안의 유치원 다니던 손주들이 학교에 가자 쉬는 틈이 많아졌다. 문득 뜨개질이 떠올랐다. 집중해서 할 일이 없을 땐, 손이 심심하다. 무료하게 TV라도 보는 시간이 되면 특히 더 생각이 났다.마침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타고 여행할 계획도 있어 결국 뜨개방을 찾았다. 여행은 설레고 좋지만 비행기를 타는 게 항상 두렵고 지겹고 고역이다. 책도 읽고, 작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퍼즐을 가지고 간 적도 있지만 시간은 더디 흐르고 몸은 고되고 힘들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뜨개질이었다. 14시간이나 걸리는 비행시간을 마냥 견뎌야 할 것인데, 뜨개질이 시간 죽이기에는 최고의 소일거리가 될 것이다. 실을 사고, 적당한 소품으로 손가방을 골랐다.미리 연습 삼아 하나를 짰더니 한 3일만에 가방 하나를 완성했다. 코바늘로 짜는 거라 사이즈와 패턴도 넣고 내 맘 대로 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또 풀어도 될 것이니 심심풀이로는 제격이다. 선물로도 괜찮을 것 같아 짜투리 실로 휴대폰 케이스도 두어 개 짜봤다.문득 중학교 때 생각이 난다. 아마 가정 시간에 코바늘 뜨개질을 배웠을 것이다. 스승의 날, 선생님께 드리려 만년필 케이스를 짰다. 담임선생님께는 분홍과 연두의 색으로 둥글게 말려 올라가는 줄무늬로, 작년도 담임선생님께는 흰색과 파란색으로 무늬를 짜 넣은 자그마한 만년필 케이스를 짜 드렸다. 예뻤던 여선생님들이셨는데, 어디서 무얼하고 계실까.

2024-06-12

뿌리와 날개(下)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독일의 문학가 괴테는 식물을 유심히 관찰했다. 식물이 서로 반대인 두 방향으로 성장한다. 한쪽은 중력에 이끌려 땅 속으로 파고들며, 다른 한쪽은 반중력으로 허공으로 치뻗는다는 것을 신비롭다고 했다. 괴테라고 하면 우리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파우스트’를 쓴 독일의 대문호로 기억한다. 그러나 그의 직업은 이보다 훨씬 더 많고 다양하다. 시인, 극작가, 소설가, 연극감독, 철학자는 물론, 자연 과학자였으며, 바이마르공국의 재상이었으니 정치가이기도 하였다.괴테는 식물들을 세심히 관찰하고 날마다 스케치하면서 꽃과 잎과 뿌리가 변화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점에서 괴테는 디테일의 끝판왕인 셈이다. 그 결과 자연과학자였으며 미술가이기도 하였다. 세밀하게 식물을 스케치하여 관찰한 결과를 ‘식물변형론’으로 썼고, 이탈리아 여행에서 기행문 ‘이탈리아 여행’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자연의 색을 감탄한 나머지 ‘색채론’을 집필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과학자로 끝나면 괴테가 아니다. 식물을 깊이 관찰한 결과를 조상과, 가정과, 아이들의 교육에까지 생각을 확장했다. 그래서 남긴 그의 명언이 있다.‘우리가 아이에게 줄 유산은 단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뿌리이고 다른 하나는 날개이다.’뿌리는 식물의 밑동으로서 보통 땅속에 묻히거나 물체에 박혀 수분과 양분을 줄기를 지탱하는 작용을 하는 기관이다. 사물이나 현상의 근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의미로 쓰는 단어이기도 하다. 괴테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는 ‘뿌리론’이 우리나라 문학작품에도 있었다. 조선 초기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고 집현전 학자들에게 지시하여 창작한 한글시가인 용비어천가의 2장이다.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니 꽃 피고 열매가 많으니라.” 깊은 뿌리를 내린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 기초가 튼튼한 나라여야 꽃 피고 열매 맺듯 안정되고 번창할 것이라는 비유의 절창이다. 영원무궁한 조선의 미래 발전을 위해서는 나무의 깊은 뿌리같이 조선의 초석이 튼튼해야 한다는 노래이다.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가 힘차고 튼실할 것이고, 꽃이 탐스럽고 향기로울 것이며, 단단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이 자명하다. 아이들에게 뿌리는 조상이자, 부모이자, 가정일 터. 그러니 조상과 부모와 가정의 역할은 튼튼한 뿌리가 되어 아이들이 스스로 힘차고 올곧게 자랄 수 있도록 해 줄 뿐이다.그러면 날개는 무엇일까. 날개는 새나 곤충처럼 허공을 나는 동물의 양쪽에 붙어있는 기관이다. 이는 땅 속에서 땅속으로 내리뻗는 뿌리와 다르게 기댈 곳 없는 공중을 날기 위해 생긴 것이다. 또한 날개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면서 돋거나 자라는 것이니, 뿌리와 달리 스스로의 힘으로 생기는 것이다. 조상과 부모가 날개를 준다는 것은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을 때까지 격려와 지원과 응원을 아낌없이 주면 되는 것이다. 괴테는 식물을 깊이 관찰하면서 동시에 성찰하는 교육철학자가 되었다. 역시 괴테는 괴테다.

2024-05-29

뿌리와 날개1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오랜만에 간 모두의 집에는 텃밭과 꽃밭엔 물론, 마당에도 풀이 잔뜩 자라있었다. 모자를 챙겨쓰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신발을 장화로 바꿔 입을 겨를 없이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대로 풀을 뽑는다.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몸을 구부려 풀을 뽑다가 억세지도 않은 것 같은 풀줄기에 스친 손바닥이 아렸다. 그제야 장갑을 찾으러 툇마루에 올라 걸터앉았다. 한 10여분이나 되었을까. 잠깐 사이에 이마며 뒷덜미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잠시 숨을 몰아본다. 연장을 쓰지 않고 손으로 쥐어뜯으니 풀은 뿌리째 뽑히지 않았다. 이제껏 한 일은 도로아미타불. 다시 호미를 찾아 본격적으로 마당으로 나선다. 사람 사는 집이라면 최소한 마당에만은 풀이 없어야 한다. 몇 주 동안 집을 돌보지 못한 부끄러움을 삼키며 개망초 줄기를 움켜쥐어 뽑고, 뿌리를 캐낸다. 주저앉은 채 온 마당을 돌아가며 크게 자란 풀을 대강 감추었다. 댓돌 아래 꽃밭엔 연분홍 메꽃이 보라색 초롱이 무더기져 피어 있다. 지난 달 꽃씨를 뿌린 자리엔 연한 떡잎들이 오종종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꽃모종 가까이의 풀까지 없애고서야 허리를 폈다.텃밭은 그나마 풀이 덜 자랐다. 채소 모종을 심으면서 비닐을 꼼꼼히 깔아준 덕분이다. 대신 채소들은 무성히 자랐다. 오롱조롱 빨간 딸기를 맺고 있는 딸기 모종을 뒤져 딸기를 따 입에 넣으니 달다. 다시 하나 더 따려고 보니 벌레가 주위에 가득하니 있다가 부산스럽게 흩어진다. 달디단 딸기향에 모여들었나 보다. 그래 익은 딸기는 너희들 먹어라. 그 옆자리에 심은 토마토는 지지대를 세워주지 않아선지 옆으로 넓게 퍼져 있다. 줄기 아래엔 토마토가 제법 달려 있다. 내일 꼭 다시 와서 토마토와 고추에 지지대를 세워주어 하늘 보고 쑥쑥 커서 맘껏 열매 맺도록 해야겠다.자주색 콜라비의 단단하고 둥근 줄기가 땅 위에 솟아 있는 걸 봤다. 우리가 먹는 부위가 뿌리가 아니라 줄기임을 알았다. 며칠 전 남편이 케일잎이 많이 컸더라며 따오길래 그런 줄 알았더니 실은 콜라비잎이었다. 꽤 큰 콜라비 하나를 뽑았더니 둥근 줄기 아래에 무뿌리같이 생긴 뿌리가 있다. 그 옆에 심은 오이 무더기도 뒤적여보니 제법 굵은 오이도 두어 개 달려 땄다.마당과 텃밭을 대강 돌보고서야 집 앞 우물가 꽃밭을 둘러본다. 토끼풀이 무성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며 포기한 곳에 어디서 꽃씨가 날아와서 자리를 잡았나 노란 코스모스가 한창이고 고혹적으로 붉은 꽃양귀비도 적당히 섞여있어 돌보지 않은 주인장을 무색케 한다. 고맙기도 해라. 작년 심은 장미 두 그루는 담장을 기어올라 바싹 붙어 꽤나 많은 붉은 꽃을 매달고 있다. 보리수나무엔 빨간 열매가 튼실하다. 블루베리도 열매를 맺었고, 손자의 석류도 꽃망울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올해는 꼭 석류를 보여주고 싶다.무심히 풀을 뽑는다. 가끔은 도 닦듯이 풀 뽑는다는 옛 친구의 말을 새기면서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풀을 뽑는다. 보기 싫고 성가시니, 텃밭의 채소를 방해하므로 뽑을 뿐이다. 성찰할 틈도 겨를도 없다. 그러나 천재적 사상가는 달랐다.

2024-05-22

손주들과 포항나들이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어디로 놀러갈까 물으면 손주들은 십중팔구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대구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 포항을 자주 가게 된다. 포항은 바다뿐 아니라 의외로 즐길 거리가 쏠쏠하다. 지난달 내내 주말마다 손주들과 포항엘 갔다 왔다. 예전 아이들이 더 어렸을 적엔 해수욕장의 모래장난 정도였다. 몇 년 전 생긴 스페이스워크도 흥미로워 했다. 최근엔 줄이 길어 포기하고 멀리서 보는 야경으로 대신했다. 포항의 핫스팟 죽도시장은 갈 수 없었다. 손주들과의 포항행에서 죽도시장을 끼울 수 있는 건, 손자 건이 생선회에 입문한 이후였다. 포항여행의 선택지가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우리 부부와 아들내외, 그리고 손주 둘을 데리고 오후 느지막하게 출발하여 회만 먹으러 포항에 간 적도 있다. 송도바닷가에 새로 생긴 수협활어회센터가 조용하고 주차장도 넓은데다가 싱싱한 회를 취향껏 골라 먹을 수 있어서 꽤 괜찮았다.몇 주 전엔 우리 부부가 손주 둘을 데리고 조손동행 포항을 다녀왔다. 손주들에겐 죽도시장은 시장이라기보다 아쿠아리움일 수도 있는 곳이었다. 가게의 수족관을 들여다보고 물속에 손을 집어넣으려 해서 상인들에겐 다소 난처했지만 구경하는 아이들을 말릴 수도 없었다. 횟집골목을 누비며 수족관에서 헤엄치고 큰 대야에서 펄떡이는 살아있는 물고기를 실컷 구경하고 나서야 단골식당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싸고 맛있는 회를 먹고, 전통시장 홍보행사기간이었던가 전통시장상품권을 되받아 얻어서 건어물과 주전부리도 살 수 있는 행운도 누렸다.죽도시장 건너편에 있는 포항함체험관에 가서는 배 안 곳곳을 오르내리고 누비며 즐거워했다. 손녀 린은 뱃전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더니 느닷없이 애국가를 불렀다. 학교 입학해서 배운 모양이었다.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지켜보았다. 진지한 표정과 꼿꼿한 자세로 4절까지 부르는 아이를 보며 나도 어느새 덩달아 엄숙해지고 말았다. 다소 날씨가 쌀쌀한지라 바닷가의 모래장난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고 남편의 제안으로 장기읍성엘 올랐다. 건은 한눈에 들어오는 성벽을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만리장성 아니냐며, 성 둘레를 완전히 한 바퀴 돌자고 했다. 조심하기를 당부하며 성벽 위를 조손이 손잡고 걸었다. 린은 할아버지와 손잡고 걸으며 “에효, 세상은 넓고도 힘들다”를 연발하며 숨차했다. 곳곳에서 사진을 찍으라며 포즈를 잡을 땐 천상 여자애다.지난 주 토요일, 건을 데리고 포항엘 갔을 땐 영일대해수욕장의 영일대를 보여주고 싶었다. 바다 위에 옛날 궁궐 같은 집이 있다고 했더니 용궁이냐며 꼭 보고 싶다고 했다. 정작 누각엔 한 번 오르내리는 것으로 흥미를 못 느낀 듯했다. 오히려 영일대 가다가 만난 마술버스킹 공연을 보며 신나고 우스워했다. 마술사가 벗어놓은 모자에 꼭 돈을 넣어주고 싶다고 해서 거금 만원을 지갑에서 꺼냈다.어제 건이 로봇과학 책을 보더니 로봇박물관에서 실제로 로봇을 보고 싶단다. 검색했더니 포항에 로보라이프뮤지엄이 있었다. 바로 가자고 하는 걸 겨우 주저앉혔다. 오는 주말에 가기로 예약했다. 아이들에게 포항은 꽤나 다양한 흥밋거리의 도시다.

2024-05-15

어버이날, 엄마를 부르다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5월 8일이 예전엔 어머니날이었다. 그날이 되면 아침 일찍 학교 가기 전, 엄마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었다. 언감생심 생화는 꿈도 못 꿀 시절이었다. 빨간 색종이로 접어 만든 보잘 것 없는 카네이션을 엄마는 하루 종일 왼쪽 가슴에 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시며 아버지는 왜 아버지날은 없나 하셨다. 전국의 많은 아버지들이 그런 불평을 하셨나, 그 원성이 통했나,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1973년부터는 어머니날이 어버이날이 되었다. 한 송이의 카네이션을 더 만들어 아버지께도 달아드렸으니, 아버지는 소원을 푸셨을까. 아버지의 가슴 꽃도 그날 종일 왼쪽 가슴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어버이날이지만 그래도 아버지보다는 엄마가 더 사무침은 나 혼자만의 마음인지 모르겠다.귀가 어두운 엄마였다. 엄마가 꽤나 젊었을 때부터 귀가 어두워졌다는데, 그 연유에는 다양한 설이 있었다. 외가댁의 유전이라는 설도 있고, 나를 낳은 후 산후조리를 잘못해서라는 설도 있고, 사업 실패해 경제력이 없어진 아버지 대신으로 30대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라는 설도 있었다. 세 가지 설 중 한 가지가 나와 관계된 거라, 왠지 귀 어두운 엄마에게 일말의 잘못을 했다는 미안함을 늘 가지고 있었던 나의 유년이었다. 커서는 돈 벌어서 엄마의 귀를 반드시 내가 고쳐주리라는 결심이자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대학 졸업 후 엄마를 이비인후과에 모시고 갔고, 당시의 의학으로는 절대 고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수술 대신 보청기를 맞춰드렸다. 그 후 보청기를 바꾸고 수리하고 배터리를 공급하는 것으로 미안함을 덜려 애썼다. 보청기를 했음에도 소리를 크게 내지 않으면 잘 듣지 못한 엄마였다. 대신 엄마와 말하려면 손으로 엄마의 손목이나 팔을 툭툭 쳐서 내게 눈길을 돌리게 한 후 소리 없는 입모양으로 말을 전한다. 그리고 손짓과 과장된 표정으로 얘기하는 것이 큰소리를 내는 것보다 더 통하기가 쉬웠다. 모녀지간에 긴한 속엣말을 할 수 없으니 엄마도 나도 서로 많이 답답해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편지였다. 엄마가 내게 더 많은 편지를 썼고, 나의 편지와 답장은 아주 이따끔이었다. 게을러서이기도 했지만 편지를 쓰려 종이 위에 ‘엄마’를 쓰면 먼저 눈물이 났기 때문에 접었던 기억이 많다. 대학 4학년 11월, 전국적으로 큰 규모의 학생운동으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렸다. 학교를 가지 못했으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취 중이었기 때문에 집에도 가지 못했다. 그 무렵 라디오에서 편지를 공모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평상시 잘 쓰지 않던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제목이 ‘엄마가 듣지 못할 편지’였지 싶다. 몇 달 후 당선되었다는 연락과 함께 부상으로 보내준 법랑냄비세트를 받았다. 라디오로 들은 나의 편지는 꽤나 눈물샘을 자극했던 것 같은데, 편지를 쓴 나는 들으며 울었으나 정작 엄마는 끝내 듣지 못한 편지였다.엄마를 소리내어 부른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지금도 자그맣게 입을 오므리고 입모양을 만들어 엄마…. 라고 소리낼라치면 눈이 먼저 답한다. 눈가가 스멀거리고 촉촉해지려 한다.

2024-05-08

경북도민행복대학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경북도민행복대학은 경북인재평생교육진흥원의 사업 중 하나다. 나이, 학력, 직업에 상관없이 경북도민이면 누구나 사는 지역 가까운 캠퍼스에서 평생학습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2021년, 경북인재평생교육원이 출발하던 해부터 지속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경북도민의 학습력을 높이고 행복한 학습공동체 문화 조성을 위한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명예도민학사, 명예도민석사 및 명예도민박사과정까지 있는데, 그 중 명예도민학사는 경북도내 19개 시·군의 대학이나 평생학습원 등에서 운영되고 있다.교육내용도 매우 다채롭다. 지역학으로서의 경북학을 중심으로 한 공통영역과 인문학, 사회·경제, 생활·환경, 문화·예술의 4대 특화영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주 1회 2시간, 30주를 수업하며 출석 70% 이상에 사회참여활동 5시간을 수료하면 명예도민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명예도민석사과정 입학 자격을 얻는 시스템이다.4년 전, 은퇴하던 해, 경북인재평생교육진흥원으로부터 강사풀 등록지원 요청을 받았고, 그 후 여러 시·군의 캠퍼스에서 강의 요청이 있었다. 내게 성인학습자 대상 강의는 낯설지 않다. 위덕대는 학령기 학생의 입학생 부족 상황을 대비해 2014년부터 성인학습자 학생을 대대적으로 모집했다. 내가 은퇴한 이후 현재도 활발하게 평생학습사업을 하고 있다. 위덕대는 일찍이 성인학습자를 위한 기본 제도를 마련, 평생학습처를 만들었고 국가지원사업인 평생학습사업단에 선정되어 3년간 추진하기도 했다. 당시 나는 평생교육원장, 평생학습처장과 평생학습사업단장을 수행하기도 했다. 평생학습에 대한 나의 관심과 열정은 재직 중 한국복지사이버대에서 평생교육사 자격증을 취득할 정도였다.성인학습자들은 학령기 학생과 똑같은 학사일정을 소화하고 법정 학점을 이수해야 졸업이 가능한 만큼 처음 14명 정도의 입학생 중 4년 후 학사모를 쓴 분들은 그 절반도 안 될 정도였다. 입학 당시 60세가 훨씬 넘은 분들이 햇수로 4년 총 8학기를 무사히 마쳐 졸업식날 학사모를 쓸 때의 광경은 지금도 눈물날 정도로 벅찬 감격이었다. 그들 중 학교생활을 정말 보람있게 하셨던 세 분은 졸업 후에도 해마다 스승의 날 즈음 연락하시고 함께 식사자리를 만드신다.며칠 전 김천의 경북보건대학교의 도민행복대학에 출강했다. 이 대학엔 4년째 출강 중이다. 해마다 다른 얼굴들을 만나지만 강의에 대한 열의나 태도는 다르지 않다. 30여 명 되는 수강생들은 한결같이 진지하고 꼿꼿한 자세로 경청하신다. 2시간의 강의에 조는 분이 한 분도 없을 정도다. 남성 수강생도 더러 계시지만 여성분들이 압도적으로 많기에 ‘경북 내방가사’ 강의는 특히 보람있다. 강의 도중 잠시 쉬는 시간에는 반장이 이런저런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토론을 하는 모습이 여느 대학의 강의실과 다를 바 없다. 동아리 활동도 하고 봉사일정도 공유하는 것 같았다. 만학의 즐거움을 누리는 어르신들이 보기에 좋고, 나는 그들에게 강의하는 것이 즐겁다. 무엇보다 도민들에게 이런 기회를 펼쳐 준 기관과 대학에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2024-05-01

치매예방을 위하여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사후 시신기증서를 썼다. 2000년 어느 봄날이었다. 죽으면 없어질 몸이다. 땅에 묻기 전, 불 속에서 타기 전, 의대생들의 공부에 도구로 쓰이는 것이 더 유용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내 몸이 공부용으로 쓰일 것이라 생각하니 더 귀하게 여기게 되었다. 되도록 온전히 그들에게 넘겨주기 위해선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되도록 내 몸의 병력도 제대로 기록해 두어야 할 것 같아서 수술할 일 있을 땐, 가능한 한 시신기증한 병원에서 했다.그때 아들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서명을 받으면서 동시에 유언 비슷한 얘기도 남겼다.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으니 나의 무덤을 만들지 말라.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으니 제사를 지내지 마라. 만약 죽기 전에 내가 스스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거나 스스로 판단을 못하게 된다면 지체없이 시설에 맡겨라.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아픈 노부모를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모시는 것은 더구나 상상도 하지 못하던 때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난 24년 전에 오늘날에는 당연시되는 노후나 사후의 문화를 예견했나 싶기도 하다.당시 15살의 아들은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엄마가 보고 싶으면 갈 수 있는 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명절이나 제사 때라도 가족이 모이면 좋지 않아요? 눈 깜빡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는 네 마음속에 있다고 생각해라. 가족들이 모이면 그 때 어디 놀러라도 가렴. 그 곳이 외국이라면 그날 아침을 먹기 전에 잠시 생각해주면 되겠네. 아들은 볼멘소리를 툭 던진다. 난 제사음식이 맛있단 말이에요. 그러자 난 목소리의 톤을 더 높여 말했다. 그럼 네가 만들어 먹든가….그 당시 실제로 내가 가장 우려한 것은 사후의 일들이 아니었다. 늙어 죽지 않은 채 스스로 판단력을 잃고 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치매라는 큰 병이 가장 무서웠고, 지금도 그렇다. 평소에 깜빡깜빡하는 건망증이 자라 치매가 될까 끔찍하고 두렵다. 50대 일찍 돌아가신 선친도 84세에 돌아가신 어머니도 초롱초롱한 기억력을 가지셨기에 가족력으로는 무결하지만, 내가 부모님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한다면 어찌 장담하랴.평소 치매예방에 좋다는 처방을 들으면 반드시 시도해 본다. 무엇보다 책읽기를 게을리하지 않으려 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머리맡에 책과 신문을 두고 읽으셨다. TV 보기 대신 두뇌운동에 좋다는 놀잇감을 찾아본다.예전에 주말신문에 꼭 있었던 십자말풀이를 즐겨했는데 최근 그와 유사한 모바일게임을 발견했다. 제목조차도 어쩌면 ‘치매야 잘가라’인 것이, 딱 내가 찾던 치매 예방게임이었다. 구독을 해두고 알림 설정까지 해 두고 ‘좋아요’도 누른 후 게임을 즐기고 있다. 무의미한 글자를 가로세로 24자 정도 나열해두고, 상하좌우 또는 대각선으로 세 글자 또는 네 글자의 유의미한 단어를 조합해 찾는 게임이다. 휴대폰을 많이 보는 것도 유해하다 싶으면 퍼즐을 다시 찾는다. 한 번 빠지면 밤을 새워 문제지만 취미로 즐길 만큼 자주 한다. 이런 노력이 헛되지 않아 치매예방이 되기만 하면 더없이 좋으련만….

2024-04-24

학습루틴 만들기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작심삼일은 오랜 나의 루틴이었다. 매년 새해가 시작되면 새 다이어리를 얻어 새로운 계획을 야심차게 적지만 한 달을 채 못 넘기고 끝이다. 새 계획을 적어 벽에도 붙여두지만 작심삼일이다. 계획이 구체적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아예 못 지킬 계획을 세웠을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며칠 못가 흐지부지된 것만은 확실하다. 까짓 3일만에 다시 작심삼일하면 되지라며 뻔뻔한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바쁜 일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모면하고자 하지만 끈기가 없는 성격 탓을 자책하면서도 좀처럼 고치지 못한 채 살았다.그런 내가 달라졌다. 지난달 첫날부터 시작한 수영과 서예공부를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잘 실행하고 있다. 일단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시간 없어 못한다는 핑계를 쓸 수가 없다. 무엇보다 나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내어 오랫동안 나의 단점으로 꼽았던 작심삼일 징크스를 깨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수영은 30년 전에도 한 번 시도한 적 있으나 약 석 달 정도 다니고 그만두었다. 수영 시간 앞뒤로 챙길 게 많아 번거롭다는 핑계거리가 있었지만 끈기 부족 탓이 더 컸다. 퇴직 후에 다시 시작해보리라 했으나 코로나로 수영장이 문을 닫아 시작하지 못했다. 최근 집 부근의 수영장이 재개장해서 곧바로 등록했다. 수영을 평생 할 운동으로 꼽겠다는 의지로 매일반으로 등록했다. 옛날 배운 적이 있어 몸이 기억할 것이고, 쉽게 잘할 수 있으리라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한 달 이상을 초급반에서 물 먹고 숨가쁘긴 하지만 결석 않는 것이 최우선 목표다.붓글씨 공부 역시 나의 은퇴 후 버킷리스트였다. 마침 대구한글서예협회장이신 최민경 교수님을 만난 고마운 인연으로 작년 7월부터 한글서예를 배우게 되었으나 2주만에 중단했다. 예의 그 못된 버르장머리, 작심삼일이 발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손녀 유치원 등하원, 허리 통증 등 이런저런 핑계가 생겨 버렸다. 그러나 3월부터 작심하고 시작하였다. 1주일 두 시간 공부하고, 집에서 매일 한 장씩의 숙제를 꼬박꼬박 챙기는 습관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배우고 익힌다는 뜻의 학습(學習)은 논어의 첫 문장 학이시습(學而時習)에서 나온 말이다. 학습의 반대어는 학문이나 기예를 가르친다는 뜻의 교수(敎授)다. 대학에서 전문학술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학습보다 교수하면서 40여 년을 살았다. 물론 가르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여야 했지만 학습이 목적이지는 않았다.오로지 나의 몸을 위한 수영을 학습하고, 나의 글쓰기 기량을 위한 학습을 해보니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습(習), 익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국 런던대 심리학과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좋은 습관이 드는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66일이라고 한다. 물론 개인차가 상당하여 자기관리를 잘하는 사람은 18일만에, 못하는 사람은 254일이나 걸린다고 한다. 이제 시작한 지 달 반이 지났고 아직은 순항 중이다. 내가 평균에 드는 사람이면 좋겠다. 66일이 지나 수영과 서예가 좋은 습관이 되어 평생 가면 더 좋겠다는 간절함이 있다. 작심삼일은 훌쩍 지났으니 왠지 조짐은 좋다.

2024-04-17

오일장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작년 봄부터 모두의 집에 나무며 꽃을 심고, 텃밭을 가꾸면서 오일장을 자주 가게 되었다. 달성군에만 해도 규모가 큰 오일장이 몇 있고, 인근의 군 단위 지역의 오일장도 꽤나 크게 열려서 가볼 만하다. 오일장날을 메모해 두고 장을 찾아다니는 재미를 누린다. 인터넷에 전국오일장 앱도 있어 다운 받아 두었다. 현풍 장은 5일과 10일, 화원 장은 1일과 6일, 인근 성주 장은 2일과 7일이고, 4일과 9일엔 고령 장이 선다. 작년부터 남편은 주로 꽃나무와 연장을 둘러보고 사는 재미에 오일장에 푹 빠진 듯했다. 미리 날짜를 검색해 두고는 작정하고 오일장을 찾아가서는 나무 몇 그루를 사오곤 했다. 그렇게 사서 모두의 집에 심은 나무가 10여 그루는 넘을 것이다. 올봄 들어서는 모두의 집보다 이사한 아파트의 베란다에 둘 나무를 수집하듯 사오니 더 이상 둘 곳 없이 빼곡하다. 이 장 저 장 다니며 나무 구경하고 흥정하고 상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같다. 남편이 장을 보는 것이 내겐 낯설지가 않다. 어릴 적 외할아버지와 몇 년 전 영양고택 어르신이 제삿장을 보는 걸 익히 본 적 있기 때문이다.나는 텃밭에 심을 채소 모종에 관심이 있다. 이맘때쯤 심을 모종의 가짓수는 얼마나 많고 또 심고 싶은 채소도 많아 골라와 심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년엔 방울토마토, 오이, 가지, 고추와 상추는 기본으로 심고, 명이나물, 고수, 청겨자를 심었다. 더러는 따 먹었으나 오이와 가지는 손가락 정도로 열매 맺는 걸 봤을 뿐이다. 거름을 하지 않은 탓이 컸다. 올해는 작년같은 실패를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주 고령 장에 가서 살충제와 영양제가 섞인 비료를 사와 미리 뿌리고, 검은 비닐로 덮어 텃밭을 손질해 두었다. 며칠 후 현풍장이 서는 날, 채소 모종을 잔뜩 사올 참이다. 현풍 장에 채소 모종이 가장 많다는 걸, 이 장 저 장 다녀 본 한 해의 미립으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장엔 간식거리도 많은데 듬뿍듬뿍 쥐어주는 맛보기를 얻어먹기도 뭣해 이것저것 사게 된다. 유과보다 거칠게 만든 넓적한 과즐이며, 돼지감자 튀김도 먹을 만하다. 화원 장에선 거창농장에서 바로 나왔다는 달걀을 보면 무조건 사야 한다. 값도 싸거니와 싱싱한 게 꽤 오래 냉장고에 두어도 노른자가 유독 짙고 탱글탱글하다.장보는 재미만큼이나 쏠쏠한 것이 장터음식이다. 현풍장과 성주장은 수구레국밥이 유명하다. 수구레는 소가죽 껍질과 고기 사이의 부산물이라는데, 그걸로 끓인 국이라고 했다. 값비싼 소고기를 못 먹는 서민들이 싸게 먹을 수 있었던 국밥이다. 가게 앞에 늘어있는 커다란 국솥에서 허옇게 오르는 김 사이로 식당으로 들어가서 국밥을 시켜 먹어 봤다. 쫄깃하게 씹히는 맛이 있다는데 난 살짝 구린내 나는 그 맛이 역해 두 번 다시 먹지는 않았다. 그래도 고령 장의 뒷고기는 싸고 맛있다. 장터 길가에 함부로 놓여있는 둥근 양철식탁, 그 가운데 벌겋게 달아오른 연탄불 위에 석쇠를 얹고 구워 먹는 뒷고기를 작년 처음 먹어 보고 푹 빠졌다. 고령 장을 갈 때마다 찾게 되는 뒷고기 식당에 앉아 연탄가스 냄새를 맡으며 고기를 굽고 있으면 마치 장돌뱅이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한다.

2024-04-10

꽃대궐 아파트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봄꽃 개화달력이 올해는 안 맞았나보다. 지구온난화로 해마다 개화시기가 빨라진다며 일찍이 정한 전국의 벚꽃축제가 꽃 없는 축제로 치러졌다는 소식이다. 봄 같잖게 추웠고 꽃샘추위와 잦은 봄비로 햇빛에 민감한 벚꽃이 더디 핀단다. 대구에서도 유명한 수성못의 벚꽃도 영 시원찮다. 지난 주말에야 핀 벚꽃이 듬성듬성 예쁘지 않은 모양새다. 한꺼번에 화르륵 펴서 찬란하고 눈부시다가 일주일도 안되어 난분분 훨훨 날아 떨어져야 벚꽃인데 피다 만 듯 보기에 안타깝다.수성못 남켠에 오래된 아파트가 있다. 내가 이사왔을 때 이미 20년 가까이 된 아파트였다. 여기서 봄을 지낸 지 30년도 넘었으니 50년을 훌쩍 지난 낡은 아파트였다. 그런데 이 낡은 아파트의 봄은 동요 ‘고향의 봄’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봄이다. 높은 성채의 담과도 같은 도로변 석벽엔 치렁치렁 노란 개나리로 뒤덮여 있고, 그 담 위로는 목련이 줄지어 있다. 아파트 들어서서 오르면 벚꽃 터널을 지난다. 봄이면 으레 피는 꽃들인데 무슨 대수랴 싶지만 나무들의 크기가 보통이 아니다. 50여 년 전에 비록 묘목이라도 최소 아파트의 나이보다 더 오래되었을 아름드리 큰 목련나무와 벚꽃나무의 아우라는 정말 압도적이다.내 나이 30대에 이사 와서 또 그만큼의 세월을 살며 늙었다. 10대의 아이들이 자라 일가를 이루어 떠날 동안, 아파트도 나만큼이나 노쇠하고 녹슬고 삐걱거리며 낡아졌다. 그러나 나무들은 해마다 겉껍질을 벗으며 더 자랐고 더 커지고 더 단단하고 더 굵어졌다. 4층 높이의 아파트보다 훨씬 더 큰 목련이 매단 꽃송이는 밤에 보면 마치 서양 궁전 볼룸의 커다란 샹들리에를 연상시킨다. 어린 손자는 두 손을 마주 모아쥐고 손가락을 위로 펼친 모양으로 꽃 흉내를 낸다. 벚꽃은 몽글몽글하게 한데모여 탐스러운 여느 벚꽃과 다르다. 가지를 축축 길게 늘어뜨려 불빛 축제 때나 봄직한 루미나리에 터널을 연출한다. 벚꽃송이를 가까이에서 본 손자는 엄지와 검지를 동그랗게 붙여모아 꽃모양을 만들어 보인다. 바람이 불어 꽃잎이 떨어지는 풍경은 어떤 멜로드라마의 CG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로 낭만적이다. 떨어진 꽃잎이 만들어준 핑크 꽃길을 밟기 아까워하면서 또 며칠을 더 즐기는 봄꽃풍경이다.30년만 지나면 재건축이나 재개발을 하는 요즘이다. 이 아파트도 당연히 그런 논의가 오고간 지 한참되었으나 지지부진한 모양새로 또 몇 번의 봄을 지내고 있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에 정떼지 못하는 어떤 사연들이 있는지는 나는 모르겠다. 나무가 오래 살면 영험이 깃든다 했으니 저 나무들은 잘 알리라. 시뻘건 녹물에 벌레가 제집인 줄 아는 집, 겨울엔 몹시 추운 이 아파트의 불편함을 저 나무들은 잘 알리라. 사람이 늙고 병들면 갈 준비를 해야하듯, 사람이 지어 깃들어 살던 집도 낡고 허물면 떠나야 할 때가 됨을 잘 알리라. 이 아파트가 마땅히 헐리더라도 찬란하게 꽃을 피워주는 저 거대하고 당당한 나무들은 그냥 그대로 오래오래 살면 좋겠다. 자연이 만들어 낸 나무의 기운은 오랠수록 장대하니 외경심마저 든다. 이사를 나왔어도 봄을 제대로 즐기려 꽃대궐을 찾았다. 사진 찍는 젊은이들이 여럿 보인다.

2024-04-03

화전놀이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3월 들어서도 겨울과 봄이 서로 줄다리기를 했다. 겨울은 3월의 폭설로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으나 결국 꽃피우는 봄이 이겼다. 매화,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가 차례를 지킬 겨를 없다는 듯 앞다투어 피워댄다. 꽃구경을 유혹하는 상춘(賞春)의 계절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은 눈으로만 하는 봄구경에 만족하지 못했다. 온몸으로 뱃속까지 봄을 느끼고 싶어 입맛으로 즐기는 상춘(嘗春)을 감행했다. 그 절정이 바로 화전놀이였다. 화전놀이는 꽃피는 봄날 마을 부근 경치 좋은 곳에 가서 꽃을 보며 놀고,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지져 먹고 노는 여성놀이이다.한국향토문화대전에서 화전놀이를 찾으면 저 북의 강원도 강릉에서부터 경기도 양주, 서울 도봉, 대구, 전북 남원, 전남 광주, 부산, 제주 서귀포까지 전국적으로 즐긴 전통적인 봄놀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화전놀이의 전통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시작했다.‘삼국유사’에는 “해마다 봄철이면 김유신 집안의 모든 여성들이 재매곡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에는 온갖 꽃이 피고, 특히 송화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만화방창 가운데서 벌인 잔치엔 온갖 꽃지짐 또한 질펀했으리라 짐작된다.‘교남지’에는 신라의 궁인들이 봄놀이를 하면서 꽃을 꺾은 데서 비롯하였다는 경주 화절현(花折峴)이라는 고개를 소개하기도 했다.이렇듯 이미 신라시대에 모습을 갖춘 화전놀이의 전통은 조선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이 이어졌다. 집안의 여성들, 특히 시집온 며느리들이 함께 모여 장막을 세우고 참꽃으로 지짐을 지져 먹으며, 음주가무를 즐겼다는 기록이 많다. 남성들도 낭만적인 화전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남성들의 화전놀이는 부정기적인 봄맞이 풍류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여성들의 화전놀이와는 구별된다. 또 남성들에게는 가벼운 여가 활동이었으나 여성들에게는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공식적인 집단나들이였다는 점에서도 문화적 의미에 차이가 있다.역사도 깊고 전국적으로 보편적이었던 화전놀이지만 경북의 경우는 특별하다. 조선 후기부터 화전놀이와 내방가사가 만나 화전가가 창작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현재까지도 경북 여성들은 화전놀이의 과정과 소회를 담은 화전가를 짓고 즐겼다. 화전가의 창작과 낭송이 화전놀이의 중요한 내용으로 자리를 잡음으로써 경북 여성들의 화전놀이는 남성들의 화전놀이, 그 이전 시기 여성들의 화전놀이, 음주가무로 풍물을 즐기는 다른 지역의 화전놀이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게 되었다. 경북 여성들은 놀이날이 되면 미리 준비한 음식과 조리도구 외에 반드시 지필묵(紙筆墨)을 챙긴다. 현장에서 화전가를 지을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2009년 청도 비슬산에서 류복혜 선생님이 이끄는 영남화전놀이보존회에서 전통에 가까운 화전놀이를 펼쳤다. 안동의 내방가사보존회원인 안어르신들을 모셨더니 우아하고 품격있게 화전가를 읊으셨다. 2018년, 경주 양동마을에서 벌인 화전놀이에서도 그들은 내방가사를 거침없이 낭송하셨다. 오는 3월 30일, 대구 가창 한천서원에서 화전대회를 한다고 한다. 팀을 나누어 화전을 예쁘게 지진 팀의 우열을 가리는 모양인데, 화전놀이의 현대적 변용이요, 전통놀이를 잇는 새로운 형태인 셈이다.

2024-03-27

‘자기만의 방’으로 돌아온 책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은 영국의 여성작가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수필집이다. 그녀가 1928년에 영국의 두 개의 여자대학교에서 한 강의를 기본으로 1929년에 출간한 책이다.여성의 지적 생활이나 사회적 역량은 경제적인 뒷받침과 자기만의 독립적 공간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향후 백년 후면 여성의 지위는 놀라울 정도로 발전할 것이며, 사회적·문화적·경제적으로 남녀가 평등한 세상이 도래할 것도 예견했다. 그녀 사후 80여 년이 지난 지금 과연 우리는 그녀의 예언대로 되어있는가.한 평자는 이렇게 얘기했다. “시대가 바뀌어 여성의 지위는 많이 향상되었으나 지금도 자기만의 방을 애타게 갈구하는 여성, 그 방을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는 여성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1993년, 박사 학위를 받은 이듬해, 여성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 대구가톨릭대 대학원 여성학과에 입학했다. 영미여성소설론 수업 때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버지니아의 통찰력과 예지력과 용기있는 목소리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덕에 나는 페미니즘과 양성평등에 제대로 눈을 떴다.그로부터 2년 후인 1996년, 위덕대 교수로 임용이 되면서 나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공간, ‘자기만의 방’인 연구실을 얻는 동시에 버지니아가 말한 ‘지적 자유의 물적’ 토대인 급여생활자가 되었다. 그녀의 예언인 100년보다 더 빠른 68년만에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경제적인 능력을 획득했다. 임용 당시 나는 나를 사회적 인격으로 가능하게 한 위덕대를 위해 뼈를 묻어도 좋겠다는 다짐을 했고, 정말 열심히 강의와 연구와 봉사를 하는, 사회적으로 충실한 삶을 살았다.나의 연구실, ‘자기만의 방’은 무엇으로 채울까 고민할 필요없이 출입문과 창문을 제외한 벽과 천장까지 가득 빼곡하게 책으로 메워졌다. 25년이나 지나자 책은 책장마다 이중으로 꽂힐 수밖에 없을 정도로 넘쳤다.2020년 12월, 25년간의 학교생활이 끝날 즈음 저 책을 어쩌나 걱정되었다. 집엔 이미 남편의 책들로 가득했다. 대학 도서관에 기증한 1만권의 책을 덜어내고도 방방마다 넘쳤다. 나보다 2년 먼저 퇴직한 남편은 서재를 마련했지만, 난 그럴 여력이 없었다. 그때 마침 의성에 사는 지인의 연락을 받았다. 그가 사는 시골마을에 작은도서관이 생겼는데, 책이 없다는 것이었다.마침맞게 서로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접점이 생겼다. 그 많은 책을 싣고 가다가 트럭의 타이어가 터졌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다.잠시 헤어지자 생각했던 나의 책들은 4년 동안이나 의성에 가 있었다. 가끔 필요한 책이 있으면 의성까지 가서 가지고 오곤 하면서 책들에게 한없는 미안함이 있었다.지난 달 이사하면서 여분의 방이 생기자 남편의 첫마디가 “당신 책 가져오자”였다. 10개의 책장을 새로 사들였고 이사까지 남편이 주도해주었다. 그렇게 나의 책들은 무사히 돌아와 나의 ‘자기만의 방’에 안착했다. 잠 오지 않는 밤이나 일찍 잠 깬 새벽에 책으로 둘러싸인 방으로 가서 돌아온 나의 책 냄새를 즐긴다. 제자리를 찾은 책들이 기뻐하며 수런거리는 소리도 듣는다.

2024-03-20

추억의 맛, 시금장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여남은 살쯤이었을 것이다. 막내이모가 결혼하던 겨울이었다. 외갓집 마당에서 올린 혼례식은 끝나도 당일로 돌아가지 않고 며칠을 더 묵는 손님들이 많이 있었다. 자연 잔치분위기는 며칠 더 이어졌다. 나도 아예 방학 내내 있을 참이었다. 어린 손이어도 외할머니와 외숙모의 부엌일도 거들고 심부름을 곧잘 하면서 밥값을 했다. 나의 큰 소임 중의 하나는 상차림이었다. 열 개도 훨씬 넘는 작은 개다리소반을 마루에 쭉 나열해 두고는 독상을 차리는 것이었다. 상마다 수저를 놓고, 작은 종지 같은 반찬그릇에 일일이 반찬을 덜어 담았다. 일은 어렵지 않았으나 추위가 문제였다. 밥상을 행주로 닦으면 금방 살얼음이 끼었고, 수저는 손가락에 쩍쩍 달라붙곤 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는 발도 몹시 시렸다. 발가락을 구부려 바닥에 닿는 면을 최소화해 종종걸음하며 반찬을 담았다. 문어숙회를 찍어 먹을 초고추장도 담고, 각색전 옆에 둘 깨소금간장도 덜어담았다. 그 중에 시금장이 있었다. 작은 단지에 담겨있는 시금장은 된장보다는 색깔이 거무튀튀하고 살짝 묽었다. 그 장을 한 숟가락씩 떠서 작은 종지에 덜어담았다.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비주얼이라 맛보고 싶지 않았다. 시금장은 소스가 아니라 그대로 반찬이었다.대학생이었을 때 큰집에서 시금장을 다시 봤다. 어릴 때 봤던 거라 눈에는 익숙하나 맛은 본 적이 없어 쭈뼛거리고 있었다. 온 식구들이 모두 맛난 반찬 같이 시금장을 먹는 것을 보고 용기를 냈다. 부드러운 단맛과 꼬들꼬들 씹히는 무말랭이의 식감도 섞인 오묘한 풍미였다. 첫 맛임에도 진작 먹어 본 듯도 한 익숙한 맛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까지 처마 밑에 매달려 있던 깨주메기가 없어졌다. 고운 보리등겨 가루를 물로 반죽해 뭉쳐서 납작하게 눌러 가운데 구멍을 뚫어 도넛 모양으로 만든 깨주메기를 새끼나 나무 꼬챙이에 끼워 건조시켰다. 다 마르면 불에 구운 깨주메기는 처마 밑에 매달아 두었다가 시금장을 만든다고 했다. 장 만드는 과정은 못 봤지만 며칠 전까지 있던 바로 그것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시금장의 맛을 안 알게 된 나는 결혼 후에도 시어머니의 솜씨로 만든 시금장을 종종 먹었고, 어른들은 젊은이가 시금장을 잘 먹는다며 대견해 하셨다.외할머니, 외숙모, 큰어머니, 시어머니 돌아가신 후로는 시금장을 먹지 못했다. 언젠가 안강 장날 시금장을 판다길래 사 먹었더니 옛날의 그 맛이 아니었다. 또 경주의 한 식당에서 단골에게만 조금씩 준다는 시금장을 얻어먹어 봤는데 감질났다. 인터넷에서 시금장을 검색하면 팔기는 하나 맛에 실망할까 선뜻 구매할 용기가 안 섰다.며칠 전 큰형님과 통화할 일이 생겼다. 마침 자네 주려고 시금장 좀 담아 놨네 하시는 형님의 말씀에 나도 모르게 타다닥 손뼉을 쳤다. 목소리의 톤도 절로 높아졌다. 정말요? 직접 담으셨어요? 와 맛있겠네요. 과연 예전 먹었던 바로 그 맛의 시금장이었다. 남편은 살짝 거부감 드는 비주얼 때문에 근처에 놓지도 못하게 한다. 매 끼마다 간장종지에 한 숟가락 듬뿍 떠서 내 쪽에 감추듯 두고 아껴아껴 먹는다.

2024-03-13

주간계획표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매년 3월과 8월,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시간표를 만드는 일이다. 네모난 표에 여러 개의 칸을 만든다. 구획된 칸 안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9시부터 야간 9시 30분까지, 한 학기 동안 수업할 강의명과 강의실까지 상세히 적어 넣은 시간표다. 매주 책임져 강의해야할 시간은 보통 9시간인데 많으면 주 12시간이 넘기도 한다.강의의 종류는 서너 종류가 때론 버겁기도 하다. 그럼에도 강의시간을 피해 적당한 시간을 잡아 학생과의 면담 가능시간도 반드시 정해 넣는다. 내가 연구실에 없을 때 찾아오는 학생들을 위해서 연락처도 꼭 적어둔다. 석 장을 프린트해서 연구실 바깥문에다가 붙이고, 내가 앉은자리에서 시선이 닿는 바로 앞 벽에도 붙인다. 하나는 집에 가져가 냉장고에 붙여놓는다. 이렇게 25년 동안 시간표를 한 해 두 번씩 만들던 습관은 나의 머리와 몸에 깊이 배어있었나 보다. 3월이 시작되자 시간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실은 2월경부터 조바심이 났다.코로나로 인해 은퇴 후의 버킷리스트를 거의 실행하지 못했다. 코로나를 벗어났어도 마찬가지였다. 2년 동안 손주들의 유치원 등하원 지원을 해주면서 버킷리스트는 자연 유예될 수밖에 없었다. 지난 2월 23일자로 손녀가 유치원을 졸업하는 날, 드디어 나만의 시간표를 만들 수 있겠다며 생각하자 유예해 두었던 버킷리스트가 떠오르는 것이었다. 목록을 꺼내 살폈다. 우선 건강을 위해 꾸준히 해야 할 것들을 찬찬히 훑었다. 요가, 필라테스, 실내클라이밍, 자전거 타기…. 주위의 강한 권유가 있어 수영을 선택하고, 마침 코로나로 문 닫았다 재단장하여 문 연 집 가까운 수영장을 바로 찾았다. 적당한 시간을 정하고는 매일 가야하는 빡빡한 일정을 만들어 버렸다. 처음엔 혹사일지 몰라도 몸에 배면 괜찮겠지 마음을 다잡는다.또 하나는 한글서예를 배우는 것이었다. 서예는 실은 작년 7월 시작했다. 그러나 손주들의 일정이 우선인지라 시간 빼기가 쉽지 않았다. 또는 손주 등하원 지원이 쉬운 일이 아니었던지 종종 허리를 다치거나 감기를 앓는 등, 몸이 이기지 못할 경우가 생기자 자주 빠지게 되었다. 아예 해를 넘겨 좀더 자유로운 때를 기다려 미루기로 했던 거였다. 재도전으로 결심을 굳혔고, 집에도 연습 공간을 만들 여건이 되자 3월 1일부터 바로 시작하였다. 이제 매일 저녁 한 시간의 수영과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부터 세 시간 정도의 한글서예 시간이 확정되었다. 그러고도 메워야할 시간표의 빈 칸이 남아있다. 급히 먹는 밥에 체할라 우선 2개 과목으로부터 준비운동을 본다. 새 시간표에 적응하여 여유로워지면 내일배움카드로 유튜브아카데미도 등록할 참이다. 명절이나 가족 모임이 있으면 일정계획을 세우고, 음식리스트를 작성하고, 맛집을 찾는 등 계획표를 만들곤 하는 나를 본 며느리가 말했다. 어머니는 MBTI가 J형인 거 같아요. 맞다. 난 정보를 수집하고 세부계획 짜서 실행하는 조직적인 성향인 ISFJ이다. 그런 성격이 다분하기도 하지만 실은 25년을 정해진 강의시간표에 맞춰 산 경험과 이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2024-03-06

이불 빨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이사한 김에 이불을 빨았다. 몇 년전부터 흰 시트의 오리털이불만 고집하는 남편 때문에 잔잔한 꽃무늬가 있거나 색깔 있는 이불들은 거의 버리고 없다. 흰 이불의 껍데기를 벗겨 세탁기에 넣어 빨고 삶고 건조기로 돌려 말리기만 하면 되니 빨래가 쉽다. 속통도 건조기의 이불털기나 살균 기능으로 돌린 후 뜨거운 채로 꺼내 손바닥으로 탁탁 쳐서 부풀리면 다시 뽀송뽀송해진다. 따끈한 햇빛과 바깥바람을 쏘여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지 꽤 오래 된 듯하다.50년도 더 전이었다. 우리 삼남매는 모두 큰 도시로 가 자취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원래 살던 읍내에도 중고등학교가 있으나 교육열이 넘쳤던 부모님의 판단에서였다. 주말이면 셋 중 한 명이 번갈아 일주일치 반찬을 가지러 집에 갔다. 차비 문제도 있지만 주말에도 공부하라는 오빠의 엄한 단속에 나와 남동생은 엄마가 보고 싶고 집밥이 그리워도 참을 도리밖에 없었다.중학교 2학년쯤 화창한 봄날이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 나는 이웃의 친구를 찾았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집안일을 도우다 곧 대도시의 공장에 취직할 거라는 친구였다. 친구는 같이 강으로 가서 빨래를 하자고 했다. 빨래를 집에서 하지 않고 어디를 가냐는 내 말에 큰 빨래는 강에서 하면 더 좋다며, 소풍같이 바람도 쐴 수 있다고 했다. 못 가게 하는 엄마를 졸라 거죽에 빨간 깃을 댄 겨울이불의 광목호청을 뜯어 양철함지박에 담았다. 빨래방망이와 비누를 챙기고, 양은도시락에 밥과 김치도 야무지게 쌌다.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친구 따라 한참을 걸어 간 강가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적당하게 넓적하고 평평한 돌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물에 적신 이불호청은 열서너 살의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웠다. 그렇게 큰 빨래를 해 본 적도 없었다. 능숙하고 요령있는 친구를 힐끗거리며 낑낑대니 친구가 많이 도와주었다.빨래터 한쪽엔 불을 피워 커다란 드럼통에 빨래를 삶아주는 사람이 있었다. 약간의 돈을 주면 되나 보았다. 알 턱이 없었던 나는 친구의 도움으로 빨래까지 삶을 수 있었다. 빨래를 가져다주면 물이 펄펄 끓는 드럼통에 넣어 기다란 막대기로 휘휘 저으며 푹푹 삶았다. 건져 함지박에 담아주면 물가로 가져가 방망이로 탕탕 두들겨 비눗기를 뺐다. 어쩌면 양잿물이었는지도 모른다. 보얗게 흰 호청을 친구랑 맞잡고 둘둘 말아 짜서 자갈이 깔린 강가로 나간다. 많은 빨래들 틈에 자리를 봐서 빨래를 펴두고 돌멩이로 네 귀퉁이를 눌러 이불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까지 꼼꼼한 친구를 따라했다.빨래가 마를 동안 쨍쨍한 땡볕 아래 따끈한 돌밭에 앉아 싸간 도시락을 먹으며 한참을 친구랑 수다를 떨었다. 나는 학교 얘기, 외국인 영어선생님 얘기를, 친구는 곧 취직할 공장이 있는 대도시의 삶에 대해 꿈꾸듯 얘기하였다. 뜨거운 돌멩이 덕에 빨래는 쉬 말랐다. 네모반듯하게 개어 함지박에 담았다. 머리에 이고 돌아오면서도 한껏 물오른 우리의 수다는 끝나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코피를 쏟아 엄마 속을 태웠다.

2024-02-28

빗자루에 대한 단상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빗자루는 먼지나 쓰레기를 쓸어 내는 청소도구인데 본말은 ‘비’다. 엄밀히 말하면 빗자루는 ‘비’의 ‘자루’이고 청소 도구는‘비’가 맞지만 ‘비’에는 마땅히 자루가 있어야 하니 ‘비’를 그냥 빗자루라고 부른다. 예전 방을 청소할 때는 당연히 빗자루를 써서 먼지를 한켠으로 모아 쓰레받기에 담고, 걸레질을 했다. 진공청소기가 나오기 전의 청소 풍경이다. 진공청소기도 진화하여 긴 줄이 달린 굉음 큰 유선청소기에서 시작하였고 이젠 무선청소기가 대세다. 물걸레질은 물론, 스스로 움직이며 구석구석 청소하는 로봇청소기까지 있으니 요즘 아이가 빗자루를 알까. 빗자루를 청소도구가 아니라 마녀의 교통수단으로나 알고 있을 거다.며칠 전 이사를 하면서 청소를 하게 되었다. 유선청소기, 무선청소기에 물걸레청소기도 있었으나 하나같이 마뜩찮았다. 그것들은 구석과 틈새에 켜켜이 쌓인 먼지와 쓰레기를 대충 치우는 정도였다. 알뜰살뜰한 청소에는 역부족이었다. 쓰레잘비라는 신박한 빗자루가 있어 사용해봐도 뻣뻣한 게 마음대로 청소되는 느낌이 없었다. 빗자루가 없을까? 차 트렁크에 눈 올 때 쓰려고 사둔 짧은 빗자루가 보였다. 바닥에 앉은자리 모양새로 엉덩이를 밀면서 먼지를 쓰니 이것만한 게 없다 싶었다.예전 방에서 쓰던 빗자루는 예쁘기까지 했다. 빗자루의 목을 청홍색실로 묶기도 하고 왕골끈으로 매듭묶어 치장도 했다. 방빗자루는 벼의 줄기를 길게 묶어 마디마디를 조인 비였다. 자루 부분은 단단히 조여 묶었고 아랫도리의 쓸 부분은 부챗살처럼 퍼져 아름답기까지 했다. 부엌에서는 수수비를 썼고, 댑싸리나 대나무를 통째로 묶어 만든 길고 커다란 마당비도 집집마다 하나씩은 있었다. 방빗자루는 진공청소기에 밀려 거의 사라졌지만 마당비는 절간의 너른 마당이나 학교 운동장, 군대 생활관 등에서는 아직도 많이 쓰인다. 다만 재질이 싸리나무나 대나무에서 플라스틱으로 바뀌어졌을 뿐이다.꿩의 긴 꽁지깃을 모아서 맨 장목비가 있었다. 알록달록한 꿩의 깃도 아름답지만 손잡이나 깃을 모아 묶는 색색의 끈도 멋스러웠다. 빗자루라기보다는 벽에 걸어두는 장식품 같기도 했다. 외할아버지 방에서 자주 봤던 개꼬리비도 있다. 꼬리가 긴 개의 꼬리만을 잘라 안의 것을 발라내고 나무심을 박아서 맨 비인데, 외할아버지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이불을 거두고는 개꼬리비를 들고 무릎걸음으로 방을 돌며 비질을 하셨다. 폭신한 털이 보들보들 예쁘다고 손바닥으로 쓸어보다가 개꼬리라는 걸 알고는 기겁을 한 기억이 있다. 오래 쓰면 털이 닳아서 꼬리 속의 거죽이 다 드러나 보였다.서양의 비는 나무막대 끝에 마른 풀을 단 빗자루였다. 긴 나무막대가 있으니 마녀가 하늘을 날 때 요긴하게 탈 수 있었을 것이다. 보통 빗자루의 나무막대기 중간에 걸터앉아 타는데. 막대기와 볏부분에 걸터앉아 방석삼아 타는 경우도 있고, 스케이트보드 타듯 두 발로 서서 타기도 한다. 현대에는 청소기가 빗자루의 기능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청소기나 로봇청소기를 타고 다닐 수도 있겠다. 로봇청소기를 타는 고양이를 본 적도 있다.

2024-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