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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준비

등록일 2025-02-19 19:24 게재일 2025-02-2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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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여행 짐 싸기가 어려운 게 아니다. 미리미리 메모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챙겨 바구니에 던져두면 된다. 갈아입을 옷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가 챙겨 넣어둔다. 떠나기 전날 종류별로 파우치에 넣어 큰 가방에 넣는 일쯤이야 뭐 그리 힘들 일도 없다.

여행 준비보다 나의 부재에 대비한 준비가 더 많다. 곰탕 끓이는 정도는 아니다. 여행 일수 만큼 남편의 아침식사로 야채샐러드, 두유, 찐계란을 밀프랩해서 냉장고에 가지런히 넣어 두면 된다. 원래 외식을 즐기기도 하고 혼자서도 잘 사 먹는 좋은 습관이 있는 남편이다. 평소에도 하루 한 끼의 아침 준비로 참 수월하긴 한 편이니, 구태여 신경 쓰는 것은 내 최소한의 정성을 표하는 셈이긴 하다.

집안 청소도 중요한 여행 준비 중의 하나다. 나의 빈자리에서 발견될 허술한 구석이 걱정되기도 해서 남편의 행동반경 외의 안방과 주방, 앞뒤 베란다 등에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 꼼꼼히 쓸고 닦는다. 청소를 미리 당겨서 한다는 심정으로 정리하니 이게 여행 준비가 맞나 갸우뚱할 때도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여행이든 최종정착지는 집이다. 그렇지 않다면 여행이 아니라 방랑이요, 가출일 거다. 내가 돌아왔을 때 말쑥한 집이면 더 좋지 않겠는가. 물론 그 사이 남편이 많이 어질러도 어쩌랴마는….

여행 준비의 오랜 습관 중 하나는 손톱 정리다. 손톱에 이런저런 색으로 입히는 것을 매니큐어-잘못된 영어라고 했다-라고 했다. 요즘은 네일 케어라고 하던데, 뭐 둘 다 영어식 표현이라 좋은 우리말로 순화하면 좋겠다 싶긴 하다.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여름방학 때 손톱에 빨간 봉숭아꽃물을 들인 채로 개학해서 학교 갔다가 그 도발적인 빨간색에 지레 부끄러워 손가락을 오므려 못 폈던 기억이 있다.

예전엔 매니큐어를 미용실에서 했다. 미용실 바구니엔 오만가지 색의 매니큐어가 그득하니 넘쳤다. 장난 같이 발라보기도 하다가 서비스를 받고 싶으면 플라스틱 대야에 비눗물을 따끈하게 데워줬다. 그 물에 손가락을 담가 손톱을 불린 뒤에 큐티클을 제거하곤 했다. 빨간 손톱칠을 하고 싶다는 충동이 가끔씩 일면 방학을 기다렸다. 수업이 없으니 어떠랴 싶었다. 한 해 여름, 빨갛고 뾰족한 긴 손톱으로 학교엘 갔다가 정교님을 만나 교수답지 않다며 힐책을 들은 적이 있어, 다시는 하지 않았다. 다만 퇴직하고 나면 내 맘대로 하리라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마냥 하지는 않았다. 며느리가 어버이날 선물로 네일아트를 예약해 주어 으리번쩍한 손톱으로 호사를 한 기억 정도. 다만 여행 계획이 잡히면 왠지 손톱 정리를 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여행이 많은 해는 제법 오랫동안 손톱이 화려했다. 지난 달 베트남여행 때는 며느리가 권해 쨍하게 붉은 와인색으로 도발했다. 한 달 남짓 되었고, 와인색 손톱이 반 이상 남아있지만 또 다른 여행이니까 다시 손질해야지. 이번엔 점잖은 색으로 골랐다. 올리브색이라고 하는데, 손녀는 아보카도 같다고 한다. 여행이 일상의 일탈이듯 손톱을 꾸미는 게 내겐 가벼운 일탈인 듯하다. 손톱정리가 나의 여행 준비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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