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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와의 소꿉놀이

등록일 2024-01-03 19:50 게재일 2024-01-04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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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이정옥위덕대 명예교수

린이는 할머니 집에서 잘래 하면서 집에 가기 싫다고 하는 손녀다. 나도 바라는 바이긴 하지만 평소 바쁜 아이들의 일상 때문에 쉽지 않다. 아침에 유치원에 갔다 오후에 학원에서 피아노며 미술을 배운다. 저녁에 두 손주를 데리고 집에 와서 저녁밥을 해 먹이면 아빠엄마가 퇴근 후 데리고 간다. 숙제도 있을 테고 씻고 잠자기에도 여력이 없다. 여간 빡빡한 게 아니다. 주말엔 저희 4가족이 완전체로 살아야 할 거라 싶어 서로 연락하지 않는다. 며칠전 모처럼 집에 데려와 잤다. 유치원 방학 덕분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만나지만 같이 자는 건 오랜만이다. 책도 읽고 수다도 떨며 기분좋게 잠들었는데 밤에 기침을 좀 하더니 목이 간지럽단다. 저희 집보다 다소 추운 집 탓인가 걱정스럽다. 오랜만에 같이 잘 수 있어서 좋았는데 아프면 어쩌나 신경이 쓰였다. 병원에 갈래? 좋단다. 손녀는 병원에 가는 걸 좋아한다. 그 이유를 잘 안다. 어릴 땐 막대사탕 얻는 재미였다. 울며 진료실을 나오면서도 사탕을 챙겨 쥐었다. 그러나 이젠 간호사가 줘도 사탕은 받지 않는다. 대신 약국에 들어가면 눈이 반짝인다. 장난감코너에 몸과 눈이 먼저 간다. 아빠엄마는 턱도 없을 걸, 할머니와 할아버진 뭐든 잘 사준다는 걸 잘 안다. 그깟 5천원 남짓의 것, 두말 않고 사주니 병원길은 장난감 사러 가는 길인 셈이다. 작은 소꿉놀이세트를 골라 계산대에 올린다. 할머니랑 소꿉놀이 하고 싶어.

포장을 여니 투명 원형 통 속에 다소 조악하고 작은 동물인형이 다섯 개 들어있다. 제 눈엔 예쁜가 보다. 할머닌 뭐가 이뻐? 선심쓰듯 날 보고 하나를 고르란다. 그건 할머니, 그리고 나머진 각각 아빠, 엄마, 오빠, 이모라 하기로 한다. 유성펜으로 인형 밑에 제가 이르는 대로 적었다. 원형통도 버리는 게 아니었다. 각각 밥, 국물, 반찬, 죽이란다. 또 적었다. 포장지도 쓸모가 있었다. 침대와 아기침대로 정했다. 그 역시 글씨로 적었다. 헷갈리지 않아야지 싶었다. 밥도 먹이고 잠도 재우면서 같이 웃으며 얘기하고 떠들었다. 빈 종이상자를 주니 놀이터를 만든다. 펜으로 화장실과 출입문과 미끄럼대를 그린다. 교실도 만든다. 창문을 그리고 책상 몇 개와 사물함과, 꽃도 군데군데 그렸다. 인형들을 데리고 놀이터도 갔다가 교실에 가서 공부도 했다. 그리고 돌아와 밥 먹이고 잠을 재웠다.

이튿날 눈 뜨자마자 또 놀잔다. 밥 먹을까 하면서 밥, 죽, 국물을 챙겼더니 오늘은 수영장에 놀러간단다. 수영장 그릴 빈 상자를 주어야 하나. 그런데 놀이터가 수영장이란다. 밥, 국물, 죽, 반찬이라고 쓴 원형통은 보트이자 튜브고, 침대는 수영장의 코치가 앉는 곳이란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잘못한 것을. 난 한 번 정한 역할과 구실과 장소와 용도는 고정된 것이라 생각했고. 펜으로 적었더니 아니었다. 린이의 상상 속에서는 작은 원통은 때론 그릇이고 때론 보트다. 상상의 공간에서는 놀이터가 호수로, 교실이 운동장이 될 수도 있음을 난 몰랐다. 그러고 보니 어제 교실에서 공부하고 놀이터에서 논 건 가족이 아니라 모두 친구들이었구나. 소꿉놀이는 그렇게 하는 거였다. 내가 틀렸고 손녀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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