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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얼거리는 사람, 부유하는 말들

이희정 시인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말을 많이 한 날은 마음이 켕긴다후환이라는 말 참 두렵다 말이 없는 사람은분노를 감춘 사람말을 쟁여두면 병이 온다기괴와 기형으로 달변은 앙금을 남기지거짓말을 복용한 날은 손톱을 깎는다안경을 닦고 책갈피를 문지른다 나를 베어 문 웃음이일생의 말들을 훑으며 지나간다뻥 뚫린 폐점처럼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중독자의 눈빛으로 말은 병든 난간에 앉아지나가는 얼굴들을 쬔다입을 열면 죄가 툭 튀어나올 것 같아큼큼거리며 모자를 고쳐 쓴다 ―정병근, ‘중얼거리는 사람(여우난골, 2023)’ 중 ‘말의 신사’ 전문 시인만큼 언어에 대해 민감한 촉수를 가진 이가 있을까. 정병근 시인의 신작 시집 ‘중얼거리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닿지 못해 제 몸속을 떠돌아다니며 부유(浮游)하는 말들을 담고 있다. 시인은 “근사한 말이 어디 있나 // 말을 많이 한 날은 마음이 켕긴다.”며 자문자답의 방식으로 중얼거리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모으고 있다. 그러면서 생각한다,“말이 없는 사람은 / 분노를 감춘 사람”이라고. 말은 마음을 품고 있다. 하여 “말을 쟁여두면 병이 온다 // 기괴와 기형으로”. 또한 말은 대단히 모순적이다. “달변은 앙금을 남기지”, “나를 베어 문 웃음이 // 일생의 말들을 훑으며 지나간다 // 뻥 뚫린 폐점처럼” 달변이 거짓에 가까운 것이라면 차라리 말문을 닫아야 할까.육체노동이 줄어든 자리를 감정노동과 정신노동으로 메우고 있는 현대인들의 마음은 시들고 아플 때가 많다. 최근 미디어 속 유명인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이 공황장애, 우울장애 등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표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언어는 공명하지 못한 채 떠다닌다. 시인은 “병든 난간”에 앉아 지나가는 얼굴들, 즉 말(言)들을 쬐고 있다. “입을 열면 죄가 툭 튀어나올 것 같”다면서 “큼큼거리며 모자를 고쳐 쓰”는 것으로 말로 말 많은 세태를 적시하기도 한다. 자칫하면 말은 죄악의 원흉이 되기 쉽다. 우리는 ‘차단’이라는 단호한 말을 쓰지 않고도 ‘신사적’인 침묵으로 타인을 외면하기도 한다. 이렇듯 해도 탈, 하지 않아도 탈인 말은 이율배반적이다. 말하기의 5원소 중에 ‘침묵’이 들어간다는 사실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자책한다. 한순간의 말실수로 모든 것이 날아가는 일은 허다하여 ‘세치 혀에 재갈 물리라’는 금언도 있지 않은가. 사람에 따라 말보다 글을, 글보다 말을 더 잘하는 식의 표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결국 모든 것은 말로 시작된다. 구어든 문어든 발화하는 순간 말도 글처럼 발표(publish)되는 것이다. 시인의 말, 신문의 말, 드라마 속 배우의 말, 잡지의 말, 논문의 말, 유튜브의 말이 모두 다르다. 다르다는 것은 기능과 취향만의 문제일까.오래전 작은 아이가 막 글을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중사공이 뭐예요?” 거대한 풍력 발전기 진입로에 세워진 안내 문구 ‘공사 중’을 그렇게 읽은 것이다. 당시에는 아이가 글을 역방향으로 읽은 사실보다 홀로 글을 깨쳤다는 사실에만 환호했었다. ‘공사 중’이든 ‘중사공’이든 때때로 우리는 말이나 행동에 자기검열의 팻말을 걸어 두고 싶을 때가 있다. 슬며시 몸속 깊이 묻어둔 침묵이라는 원소를 불러내 ‘공사 중’의 잠행 시간을 가져보아야 할까. 그 대상이 사람이든 사회이든 생각하는 마음 없이 말과 글이 생겨날 순 없으니 ‘중얼거림’은 기저음(基底音)처럼 시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입은 상처는 병을 물고 생을 흘리듯 말을 훑으며 떠다닌다. 누군가에게 ‘차단’된 혀들은 이렇듯 실소를 물고 부유(浮游)한다. 언어라는 기호는 마음을 표현하는 가장 훌륭한 연장이면서도 가장 불안전한 수단이기도 하다. 정병근 시인에게 언어의 재현은 사상의 배포가 아니라 사유에 대한 의심이기에 말의 신사는 없다.“입을 열면 죄가 툭 튀어나올 것 같아 큼큼거리며 모자를 고쳐 쓴다.”

2023-04-30

42억 아시아의 꿈과 희망이 예천에서 달린다

김학동 예천군수 예천군은 42억 아시아의 꿈과 희망을 품고 달릴 국제대회 개최 준비로 분주하다.오는 6월 4일부터 7일까지 4일간 예천스타디움에서 ‘제20회 예천아시아 U20육상경기선수권대회’가 열린다.이번 대회는 2년마다 20세 이하 선수들이 기량을 겨루는 무대로 아시아 45개국에서 선수, 코치 등 1천500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국제대회이다.우리나라에서는 예천군에서 최초로 개최된다. 그것도 대도시가 아닌 군 지역에서 대규모 국제대회를 유치했다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예천군은 대회 40여 일 앞두고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기 위해 잰걸음을 하고 있다.전국 대다수 도시가 인구 감소와 지역경제 침체 등으로 지역소멸이라는 난제에 빠져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예천군은 신도시 건설에 따른 인구 증가와 각종 투자유치 외에도 중장기 스포츠마케팅 계획을 체계적으로 추진해 돌파구를 찾고 있다.흔히, ‘굴뚝 없는 산업’이라 불리는 관광산업 못지않게 스포츠산업은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는 동력으로 크게 작용하고 있다.예천군은 군 단위의 소도시이기는 하지만 스포츠 분야에서는 어느 도시에 뒤지지 않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닌 곳이다. 명실상부한 활의 고장으로서 2명의 궁장 보유자를 배출했다.육상분야에서는 사계절 전천후 육상훈련이 가능한 예천육상실내훈련장 및 경북육상실내훈련장을 중심으로 경사로 훈련장, 모래사장 훈련장 등을 벨트화하여 최고의 육상훈련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이같은 스포츠 인프라로 인해 예천군에는 각종 대회와 전지훈련을 위해 9만여 명의 양궁·육상 선수들이 찾고 있다.예천군은 아시아 육상의 미래를 책임질 재목을 발굴하는 최고 권위의 U20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해 우리나라를 넘어 아시아 육상의 중심도시로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할 기회이다.예천군은 대회 유치가 확정된 뒤 전담 TF팀을 구성·운영해 오고 있다. 대회조직위원회를 설치하고 하부조직을 기획운영팀과 홍보지원팀으로 나눠 차근차근 대회를 준비해왔다.자원봉사자와 운영요원 모집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며 모집된 900명의 자원봉사자는 선수단 통역, 안내, 시설 운영 보조 등에 힘을 보탠다. 50여 명의 운영요원도 선발해 별도의 강습을 통해 역량을 강화한 뒤 경기장 내 심판을 보조하는 역할로 현장에 투입할 계획이다.행정적 지원뿐만 아니라 신속하게 재정을 투입해 시설 개보수에만 총 95억 원의 예산을 집행하는 등 대회 준비에 공을 들이고 있다. 53억 원으로 예천스타디움 구조 변경 공사를 끝냈고, 18억 원의 예산이 투입된 전광판 설치도 완료했다. 현재 진행 중인 조명타워 설치와 경기장 도색 작업도 조만간 마무리할 예정이다.국제대회의 핵심은 원활한 대회 운영이다. 이미 국제 수준의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예천군은 매년 5~6차례 열리는 전국규모의 육상대회를 다년간 개최해오며 충분한 노하우를 축적해 왔다.특히, ‘2011년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당시 대회 개최에 참여했던 다수의 관계자가 이번 대회 운영에 참여하는 만큼 세계적 수준으로 치러질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예천군은 육상메카로 자리매김하며 쌓아온 노하우에 글로벌 역량을 더해 선수들이 최고의 컨디션으로 기록향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 치의 오차 없는 완벽한 무대를 제공할 계획이다.예천군에서는 양궁 유니버시아드나 군인 체육대회의 종목별 양궁 경기를 개최한 적은 있지만, 단일 종목 국제대회를 치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이번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냄으로써 세계 수준의 육상대회 개최 역량을 과시해 볼 참이다. 작은 규모의 기초자치단체가 대규모 국제대회를 치러낼 수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육상도시의 명성을 아시아 전역에 각인시켜줄 기회로 삼을 계획이다. 나아가 국내에서 개최하는 국제대회로 침체일로를 걷고 있는 대한민국 육상에 희망을 밝혀 주는 계기를 마련할 생각이다.이번 대회는 단순히 하나의 대회를 치르는 게 아니라 5만6천여 군민 모두가 글로벌 마인드를 갖게 되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모든 역량을 총결집해 세계적인 스포츠 도시로 발돋움하는 소중한 기회로 삼겠다.

2023-04-30

아이를 죽이는 교육

김규종 경북대 교수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어린이날은 일 년에 단 하루 있는 어린이 ‘해방의 날’이다. 한국의 어린이들이 공부에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혹사당하고 있는지를 보다 못한 유엔이 나서서 어린이들에게 휴식과 놀이를 권고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지구촌에서 이토록 가혹하게 어린이들을 공부로 닦달하는 두 나라가 있으니, 인도와 한국이다.교육에 관한 대표 저서로 사람들은 장 자크 루소의 ‘에밀’을 꼽는다. 당연한 일이다. 1762년에 출간된 ‘에밀’은 260년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시의성과 설득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에밀’이 출간된 해에 조선의 영조는 27살 먹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굶겨 죽였다. 문명과 야만의 지극한 대비가 선연하다.‘에밀’이 출간되기 7년 전인 1755년에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기막힌 통찰을 선보인다. 학문은 무위에서 예술은 사치에서 나왔다고 일갈한 것이다. 그 문장을 읽던 순간 온몸을 관통(貫通)하는 전율에 잠시 눈을 감아야 했다. 농업혁명으로 촉발된 잉여(剩餘) 농산물이 불러온 계급과 문명 그리고 국가의 탄생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변화시켰던가!훗날 출간된 ‘사회계약론’이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이론적 기반이 되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유럽 제국주의가 남미의 은을 약탈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유럽의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여 계몽주의를 가능하게 하고, 마침내 산업혁명과 정치혁명까지 일어나 유럽은 그야말로 근대를 일구는 첨병으로 세계사를 쥐락펴락하지 않았던가!‘에밀’을 읽다 보면 수능시험 하나로 귀결되는 우리의 초중등 교육의 야만적이고 살인적인 경쟁교육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어린이들을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참혹하고 처절한 교육 아닌 교육이 교육의 탈을 쓰고 주인 행세하는 나라! 어린이를 타고난 본성에 따라 교육해야 인간답게 아이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루소가 살아있다면 뭐라 할 것인가?!노예처럼 공부만 하는 아이는 불행하다고 외치면서 루소는 미래 행복을 위해 시작하는 교육은 야만이라 못 박는다. 대학입시 하나만 보고 초등에서부터 선행학습으로 달려가는 이 나라의 21세기 극성 엄마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는 18세기 ‘에밀’. 어린이를 천재 혹은 수재로 만들고 싶어 안달 난 숱한 엄마들에게 경종을 울리면서 루소는 말한다.“어린 시절 지나친 독서는 아이에게 재앙이다. 호기심으로 글자를 익히게 하고, 아이의 어휘를 아이에게 맞는 수준으로 제한하라. 아이는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사고해야 한다.”공부 잘하는 자식을 선전하고 과시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힌 엄마의 과욕이 아이를 정신적·육체적 예비 장애인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참혹한 현실! 자기의 말을 노예처럼 순종해야 착하다고 머리 쓰다듬는 엄마는 미래에 자식이 남들에게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루소는 질책한다. 당신이 아이를 위한다는 구실로 강요하는 살인적인 교육을 그만두지 않으면 아이는 평생 고통받을 것이다. 이제는 제발이지 멈출 때다.

2023-04-30

아메리칸 파이

우정구 논설위원 한국인에게 가장 한국적 음식은 김치나 된장과 같은 숙성음식이다. 미국인에게 가장 미국적인 음식은 무얼까? 단연코 아메리칸 파이다. 그중에서도 애플파이다. 아메리칸 파이는 미국 어느 곳에서나 즐겨 맛볼 수 있는 미 국민의 디저트다. 요리 방법도 지역따라 각양각색이다. 아메리칸 파이 축제도 많이 열려 미국 여행 때는 반드시 먹어 봐야 할 음식이다.미국 숙어에 ‘as American, as apple pie’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아주 미국적’이라는 뜻이다. 아메리칸 파이를 미국의 상징처럼 표현한 대목이다.윤석열 대통령이 백악관 만찬에서 그의 학창시절 애창곡 ‘아메리칸 파이’를 불러 화제다. 아메리칸 파이는 ‘빈센트’ 등의 히트곡으로 국내서도 잘 알려진 미국의 싱어송라이터인 돈 맥클린(77)이 작곡한 곡이다.인기 절정인 가수들이 1959년 다음 순회공연을 위해 경비행기를 타고 가다 추락사한 것에 영감을 얻어 작곡한 이 곡은 ‘그날 음악은 죽었다(the day the music died)’라는 가사로 국내서도 잘 알려져 있다.원작자 맥클린은 백악관 국빈만찬에 초대를 받았지만 콘서트 투어 중이어서 참석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윤 대통령의 노래를 듣고 “내년에 한국에 가서 함께 노래할까 한다”고 화답했다고 외신은 전한다.윤 대통령의 노래 선곡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가장 미국적인 이미지의 아메리칸 파이였다는 것은 절묘한 측면이 있다. 외국인이 아리랑 노래를 우리말로 불러 한국인에게 감흥을 안겨주는 것과 같이 윤 대통령이 즉석에서 부른 이 노래가 양국간의 정서적 친밀감을 더 높여주었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음악이나 예술이 갖는 마술같은 효과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4-30

합법과 정의 사이

유영희 작가 2년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모범택시’가 얼마전 시즌 2로 돌아와서 시청자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모범택시’의 인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드라마에서 다룬 사건이 모두 실제 있었던 사건이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 사건 중에는 제대로 심판하지 못한 사건도 있어서 시청자들에게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준 셈이다.4월 27일 진통 끝에 간호법과 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특히 이번 의료법 개정안은 최근 종영한 드라마 ‘모범택시 2’ 내용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눈에 띈다. 모범택시 9화와 10화에서는 의사 안영숙이 손이 떨려 수술을 못하게 되자 의료기기 영업사원에게 대리로 수술을 시키다가 걸려서 면허가 정지되었지만 6개월 후 재교부받아 다시 같은 의료 사고가 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의료사고에 대해 안영숙이 적절한 처벌을 받지 않고 다시 병원을 차리려고 하자 모범택시 팀이 단죄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에피소드는 의사가 반복적으로 범법을 저질러도 면허가 유지되는 점을 악용한 사례를 고발하고 있다.게다가 현행 의료법은 허위진단서 작성이나 허위 진료비 청구와 같은 의료 행위와 관련된 일부 범죄에 대해서만 의료인 결격사유로 보고 있어서 일정 기간 자격 제한을 하지만, 강력범죄나 성범죄 경우는 아예 결격사유로 보지 않아 그런 죄를 지어도 바로 의사로 복귀할 수 있어서 논란이 많은 상황이었다.그래서 이번 의료법 개정안은 의료인이 결격사유에 제한을 두지 않고 ‘모든 범죄’로 넓혀서 선고유예를 포함하여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면허를 취소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렇다고 금고형 한 번에 영원히 면허를 취소하는 것은 아니고 금고 이상의 형으로 면허 금지되었다가 재교부 받은 후 다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10년간 재교부를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현재 변호사 법무사 회계사는 모든 범죄에 대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으면 결격사유가 된다. 그런데 이런 개정안에 대해 의사협회에서는 의사들의 의료행위를 위축시킬 수 있고 과잉 입법의 여지가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이런 뉴스를 보면서 어떻게 드라마와 현실이 이렇게 다를까 의문이 생긴다. 시청자들은 안영숙이 심각한 범법 행위를 저질러도 계속 병원을 운영할 수 있는 현행 의료법에 공분했지만, 현실에서는 범죄를 저지른 의료인을, 그것도 두 번째 면허 정지를 받고서야 10년 금지하는 조항이 부당하다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을 보면, 이 괴리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한편으로는 택시 기사 김도기의 활약이 판타지에 가까운 영웅적인 모습이라 이런 방식이 오히려 현실의 합법적 해결을 외면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제대로 심판받지 못한 사건이 해결되기 어렵다면, 드라마에서만이라도 응징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모범택시 2 블랙썬 에피소드에서 김용민 기자가 김도기의 해결 방식에 대해 ‘합법은 아니지만 정의로웠다’는 대사가 나온다. 합법과 정의가 일치하는 사회는 언제쯤 올까?

2023-04-30

혁신의 모멘텀은 무엇인가

정상철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혁신은 조직의 힘으로 움직이는 속성이 있고 오랜 습관화 된 편함을 바꾸는 것이기에 저항이 따르고 우호적이기 어려운 일이다. 편함에 변화를 주면 더 편함에 이르는 것을 사람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피하려 한다. 혁신은 치아 교정원리처럼 들어간 치아와 나온 치아를 바로잡고 철사로 묶어 3년을 보내고 보조경을 끼워 1년 반을 보내야 제 위치에 자리잡고 흐트러지지 않는다. 일하는 사고 일하는 방법을 체질화 하려면 치아교정원리처럼 많은 시간이 걸리는 셈이다.최근 필자가 컨설팅 하고 있는 P사의 지원 부서에 혁신의 전문성을 갖춘 임원이 부임했다. 혁신활동의 지침이 남다르고 부서 혁신의 동력을 걸며 함께 활동하는 조직분위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일에 영혼을 불어 넣어라, 문제의 본질을 보고 원인을 규명하라. 스토리를 만들어야 역사가 된다. 질문의 리더십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라. 개선 후 작업표준화하라’ 등 현장에 생각이 서고 있다.가뭄의 단비처럼 좋은 현상이고 현장 개선력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기업의 혁신활동은 대내외 변화에 맞는 방향설정과 현황 분석 후 목표를 정하고 실행계획을 수립하여 조직 전체가 공감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 혁신의 모멘텀은 무엇인가. 조직적 요소와 기능적 요소로 구분한다. 조직적 요소는 조직구조, 분위기, 문화, 리더십 등이 있고, 기능적 요소는 기업역량, 기술개발, 경영전략, 혁신전략 등에 따라 모멘텀은 달라진다. 혁신은 조직의 힘으로 움직이지만 조직은 인사가 동력이 된다. 인사는 조직내부의 혁신을 촉진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는 데 4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추진한다.첫째, 다양성과 포용성이다. 다양한 배경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다른 아이디어와 관점을 얘기한다. 인사는 이러한 다양성을 유지하고 관리하며 다양성을 존중하고 포용하는 문화를 조성함으로써 혁신을 촉진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인재육성과 성장이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갖춘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것은 조직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 인사는 인재육성과 성장을 촉진하는 프로세스를 구축하고 조직내에서 인재를 발굴하고 장려함으로써 혁신을 촉진 할 수 있다. 셋째, 학습과 개발이다.혁신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로 이뤄진다. 인사는 학습과 개발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직원들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을 적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넷째, 조직문화이다. 조직문화는 혁신을 촉진하거나 반대로 억누를 수 있다. 인사는 조직문화를 조율하고 조정하여야 한다. 위의 4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인사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혁신의 모멘텀을 갖는 것이다. 혁신이 지속성을 가지고 진화 발전하는 길은 인사와 연계하는 활동이 되어야 하며, 제도화, 시스템화 시켜 모든 직원들의 생각과 행동이 습관화로 나타나 영속적인 기업의 일하는 문화로 가야 한다.글로벌 선진기업 도요타자동차는 개인의 성장비전을 직속 상사가 제시하며, 일과 개선의 강한 모멘텀이 되고 있고, 개인도 꿈을 갖고 도전하는 것이 조직의 혁신 모멘텀이 되는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인사가 행위의 단초가 된다.

2023-04-30

기록과 보존 안 하는 한국 사회

서의호포스텍 명예교수·산업경영공학 최근 시니어 테니스 대회에 고문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본부석의 경기대진표에는 한 번 지면 탈락하는 토너멘트의 경기결과가 표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누가 이겼는지만 표시하고 스코어가 표시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풍경이었다. 경기진행자는 모든 다른 시니어 대회도 그렇게 한다고 전한다.미국에서 오랫동안 동호인 테니스 대회에 참가하면서 스코어 표시를 안 하는 대회를 본 적이 없다. 한국에서도 과거 필자가 진행한 대회는 그렇게 한 적이 없었는데 가벼운 충격이 다가왔다.스코어가 표시되지 않으면 어떻게 경기가 진행되었는지 알 길이 없고 승자 패자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비상식적인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게 ‘기록과 보존을 안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이다.그런데 돌이켜 보면 포스텍에서 28년간 테니스 동아리 지도 교수를 하면서 매년 거행되는 각종 대회의 결과를 잘 보존하라고 했건만 잘 보존되는 걸 보기 힘들었다. 결국, 일부는 지도 교수가 기록 보존했지만, 학생들도 그런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 같지 않았다.하긴 국가적 차원에서의 청와대 기록이나 정부 기록도 잘 보관되지 않아 전 정부의 기록들을 참고하지 못하고 새로운 정책을 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또 정부가 바뀔 때마다 전 정부의 부서를 폐기하고 생소한 새로운 부서를 만든다. 다행히 이번 정부는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아 다행이다.몇 년 전 포항 역사의 상징 포항 기차의 역사(驛舍)는 결국 무참히 부서졌다. 그 부서진 역사 위로 차가 달리지만 허탈감은 너무 심했다. 특히 해병대 출신의 전역 장병들의 가슴은 휑하니 뚫렸다는 소문이다.눈물과 기쁨, 그리고 오랜 역사를 간직한 포항역이었다. 일본시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해 해방과 함께 건축된 포항역사는 거의 100년 가까운 포항의 산증인이다.필자는 10년 전 2013년 여름 두달 간 드레스덴이라는 옛 동독의 명품도시에서 드레스덴공과대학교 총장의 초청으로 방문 연구를 한 적이 있다.그곳엔 아주 유명한 프라우엔교회 (Frauenkirche)가 있다. 이 교회는 300년 전 지어졌는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전쟁이 끝난 후 드레스덴 시민들은 언젠가 재건축될 것을 생각하며 무너진 프라우엔교회의 돌에 번호를 매겨 보관했고, 독일 태생의 한 과학자가 노벨상 수상 기금을 모두 기부해 어린 시절 프라우엔 교회의 기억을 되살리며 10여 년 전 완전 재건축에 성공했다고 한다.그에 반하여 한국에서는 옛 건물들과 유적지들은 사라지고 있다.서울의 종로2가에 있던 역사적 보존가치가 높은 화신백화점 건물이 사라진 건 큰 충격이었다. 일제시대에 건축되어 옛 건축미를 가지고 있던 그곳은 초현대 건물로 바뀌었다. 중앙청 건물은 일제의 잔재라고 하여 폭파시키고 해체하였다. 단성사 국도극장 등 보존가치가 높은 건물들이 이젠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파리나 런던, 바르셀로나나 리스본 등 유럽은 도시 전체가 하나의 박물관으로 형성되어 있다. 옛 건물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이러한 유럽의 오랜 도시들뿐만 아니라 역사가 일천하다는 미국의 워싱턴 필라델피아 등도 방문해 보면 옛날 건물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그러한 역사적 건물들이 관광자원뿐만 아니라 국민들의 자부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치욕의 역사적 건물, 부서진 역사적 건물도 원형 그대로 보존하여 후세들에게 교훈으로 삼고 있다.심지어 중동의 사우디아라비아의 상업도시의 중심 젯다를 방문했을 때, 젯다의 옛마을을 보존하고 있었다. 젯다의 ‘올드타운’이라는 옛마을을 재건축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며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모습이었다.급격히 발달하는 나라이지만 사우디는 국격으로는 한국에 뒤지는 나라이다. 그런데도 젯다의 옛마을은 비록 세련되게 보존은 하지 못했지만, 옛모습 그대로 놔둔 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역사적 가치란 무엇인가. 반드시 건물이 고풍스럽고 멋있어야 하는가. 그냥 오랫동안 거기에 있던 건물이라면 그건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이다. 그 건물의 초석은 그 시대의 것이고 건축양식은 좋든 싫든 그 시절 것이다.진행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폐철도 공원 조성 시 축소된 모형을 건립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런 모형이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왜 한국은 역사를 무시하고 부수고 없애는 것일까 그리고 기록을 보존하지 않는 것일까?서울의 성냥갑처럼 서 있는 아파트촌을 보면 어지러워지기까지 한다. 요즘은 각 지역도 마찬가지로 황폐해지고 있다. 그냥 부수고 없애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걸 좋아한다.기록도 하지 않고 옛것을 무시한다. 역사는 무시당하고 있다. ‘기록과 보존을 안 하는 한국사회’ 언제까지 이럴 것인가?

2023-04-30

안전체험관 불공정한 결정은 포항시민에 큰 재난

양만재포항지역사회복지연구소 소장 모든 경쟁은 성과를 올리는 장점도 있지만 과열에 따른 지나친 비용증대로 부작용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경북도 소방본부가 도내 시군 대상 경북 안전체험관 부지 공모를 통해 안전체험관을 선정한다는 발표가 있었다.포항, 구미, 영주 등 여러 시군 자치단체들이 유치 경쟁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했다. 다음달 2일까지 마감을 앞두고 시군의 경쟁 열기가 고조되고 있으니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유치경쟁 과열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최근 언론 보도를 종합해 보면 포항은 지난 2017년 11월 15일 규모 5.4의 사상 초유의 지진이 발생해 큰 피해를 입었다. 지열발전 관련 국책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촉발지진으로 판명났다.포항시는 지진 피해 복구 및 지진과 같은 재난으로부터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됐다. 이에 포항시는 20만명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 국민청원을 신청하는 한편, 정부와 국회를 지속적으로 설득해 ‘포항지진피해구제법’을 제정했다. 이 법 제23조에 지진 피해지역 주민을 위한 안전교육시설 설치 근거가 명시되어 있다.포항시는 행정안전부 및 경북도에 경북 안전체험관 건립을 5년 간 지속 건의했다. 2019년 4월에는 경북도 재난안전실장 주관으로 경북도 소방본부와 포항시 관계자가 참여한 가운데 경북 안전체험관 건립을 논의했다. 그 결과 경북 안전체험관 건립 예산 확보는 도 재난안전실, 운영은 소방본부, 부지 제공은 포항시가 담당하기로 합의했다.포항시는 지진피해가 극심했던 포항시 흥해읍 마산리 일원으로 부지를 확정하는 공문까지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포항시는 행정안전부의 국민안전체험관 건립예산 확보시점까지 시기를 기다려 왔다.그런데 경북도가 느닷없이 안전체험관을 공모를 통해 건립한다는 발표가 나자 포항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형국에 크게 실망을 했다.좌절감과 실망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모라는 발표에 여타 시군들이 당근을 제시하면서 경쟁대열에 참여한다는 메시지가 나오고 있다.구미시는 에코랜드 일대 부지를 제공하기로 하고, 도내에서 학령인구가 가장 많다는 점을 내세웠다. 영주시는 순흥면 일대 코레일 연수원 일원의 부지를 제공할 것이며, 낙후된 북부권 균형개발 차원에서 경북 안전체험관의 영주 건립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그 외에도 안동시, 상주시, 영천시, 경산시 등 10여개 이상 시군이 유치에 나섰다.기후위기로 인한 지진, 태풍, 홍수 등의 자연재난과 각종 사회재난, 안전사고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내 시군이 안전체험 시설의 확충, 유치는 두말할 나위 없이 환영해야 할 일이다. 더욱이 여타 대도시와 광역자치단체에서는 안전체험관이 있지만 경북도는 없으니 말이다.기후변화 현상으로 재해의 피해가 가중되고 있다. 기후 변화와 기상 이변 하나의 요인만 재난을 일으키는 경우가 드물다. 지역사회의 안전인프라시설의 취약성과 지역민들의 재난 대응 역량 부족 즉 안전 교육에 부재에 따른 교육취약성 등이 결합할 때 가중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안전체험관의 존재는 현대 사회의 필수적인 시설이라 할 수 있다.하지만 안전체험관이 도내 한 곳에 설립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 도내 시군이 유치 경쟁 과열 양상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것이다. 공모라는 방식은 경쟁현실의 불가피성과 경쟁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과열경쟁의 부작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당초 경북 안전체험관 건립 논의의 중심에 섰던 경북도의 재난안전실이 아닌 왜 소방본부가 공모에 나섰는가 하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공모 경쟁 과열의 진원지가 아닌가 싶다.이미 공모를 하겠다고 선언한 만큼 누굴 탓하고 책임을 전가한들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점이다. 과열된 경쟁에 따른 도내 시군민들 간의 불필요한 갈등 유발과 행정력 낭비가 발생하지 않도록 부지 선정에 필요한 원칙과 기준을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안전체험관의 운영에 따른 교육효과성, 도내 시군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교통편의성, 대형재난 발생에 따른 피해주민의 고통을 덜어 줄 재난의 역사성, 안전체험관 운영에 따른 수익성과 지속가능성, 안전사고 사전예방 효과와 사고대응 증대에 필요한 기술과 정보를 제공할 전문 교육인프라를 갖춘 회복탄력성 등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포항시민들은 2017년 11월 발생한 5.4 촉발지진에 따른 수천억원의 피해를 당했고, 지난해에는 힌남노 태풍이라는 자연재난에다 사회재난을 연이어 겪었다. 자연 재난의 위력을 고통스럽게 체험한 시민들이다. 행정안전부와 경북도는 안전체험관 건립에 따른 불공정한 결정으로 포항 시민들에게 참담한 고통을 또 추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2023-04-30

인간의 오만이 부른 전염병

홍석봉 대구지사장 사람과 동물에 공통으로 전염되는 바이러스에 인간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코로나19’로 인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은 상상을 초월한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코로나19’가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끝은 보이지 않는다. 대중교통의 마스크 해제 40일이 됐다. 아직도 하루 1만4천 명대의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최근 다시 증가 추세를 보인다. 서방은 대유행이 끝났다며 ‘풍토병’을 선언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감염자가 계속 발생, 국민들의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여기에 ‘엠폭스(원숭이 두창)’가 덮쳤다. 엠폭스는 1958년 실험실 사육 원숭이에서 처음 발견됐다. 1970년 콩고에서 인체감염 첫 사례가 보고됐다. 2022년 유행 전까지는 서부아프리카 등 열대우림지역의 풍토병이었다.지난해 5월 이후 유럽과 북미 등을 중심으로 환자와 발생지역이 크게 늘었다. 3월 말까지 전세계 110개 나라에 8만6천여 명의 엠폭스 확진자가 발생했다. 우리나라도 27일 현재 40명의 확진자가 나왔다. 엠폭스는 피부·성접촉 등을 통해 전파된다.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급성 발열 발진성 질환으로 인수공통 전염병이다.인수공통 전염병이란 동물과 사람 사이에 상호 전파가 가능한 전염병을 말한다.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한 ‘페스트’가 대표적이다. ‘코로나19’와 ‘사스’, ‘메르스’도 인수공통 전염병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야생동물이 숙주라는 주장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가금류와 개, 고양이 등에서도 발견됐다.세균 질환은 항생제로 치료할 수 있다. 반면 바이러스 감염은 바이러스 스스로 변이, 치료가 어렵다. 바이러스의 특성상 치료약 개발때까지는 특별한 방법이 없어 더욱 골치다.보통 다른 생물간에는 서로 질병을 옮기지 않는다. 하지만 변이가 가능한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은 예외다. 사스나 메르스처럼 동물에게는 특별한 질병을 일으키지 않지만, 인간에겐 치명적이다. 박쥐의 바이러스가 중간숙주를 감염시키고 사람에게 옮아가 사스와 메르스처럼 전 세계를 위협하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광견병도 광견병에 걸린 가축이나 예방접종을 않은 반려동물이 사람을 물거나 할퀸 자리에 바이러스가 침입, 감염되는 대표적인 인수공통 감염병의 하나다. WHO에 따르면, 인간의 신흥 전염병의 75%가 인수공통 전염병이다.인수공통 전염병은 인구증가, 환경 파괴, 지구온난화, 반려동물과 가축의 영향을 받는다. 서구화된 생활습관과 청결한 환경이 되레 독이 될 수 있다. 인간의 면역력을 떨어뜨려 치명적인 질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엠폭스는 위험성이 낮다고 하지만 앞으로 어떤 전염병이 인류를 위협할 지 알 수 없다. 지구촌 시대에 새로운 인수공통 전염병의 출현은 인류에 재앙이 될 수 있다.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인수공통 전염병이다. 현재의 의학 발전 속도라면 조만간 바이러스로부터 안전한 세상이 올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오만과 이기심이 새로운 바이러스를 부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2023-04-27

음주운전 시동 잠금장치법

우정구 논설위원 얼마 전 대전의 한 스쿨존에서 일어난 대낮 음주운전 사고로 9살 초등생이 숨지면서 음주운전자에 대한 사회적 비난 여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법원이 먼저 나서 스쿨존 교통사고에 대한 양형기준을 신설하고, 오는 7월부터 스쿨존에서 음주운전으로 어린이를 숨지게 하면 최대 26년형을 선고토록 하겠다고 밝혔다.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가 날 때마다 관련법을 만들어 처벌기준을 강화했지만 가중처벌을 받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난해 헌법재판소는 재범 음주운전자의 처벌을 강화한 이른바 윤창호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시동 잠금장치에 대한 언급을 했다.헌재는 “음주치료나 음주운전 방지장치 도입과 같은 비형벌적 수단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다”며 “시동 잠금장치 부착을 우선 검토하라”는 의견을 냈던 것이다.음주운전 방지 시동 잠금장치는 술을 마신 운전자가 차량에 시동을 걸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다. 운전자가 시동을 걸기 위해선 잠금 측정부에 숨을 불어넣어 혈중알코올 농도를 측정해 통과해야 시동이 걸린다.1986년 미국이 처음 도입했고 지금은 캐나다, 호주 등에서도 활용된다. 음주운전 전력이 있거나 통근버스 등 특별히 음주운전 시 피해가 큰 차량에 부착토록 한다. 일부 연구결과에 의하면 시동 잠금장치 설치로 음주운전 사망자가 절반가량 줄었다는 보고도 있다.여당이 음주운전 사고를 줄이기 위해 음주운전 방지 시동 잠금장치 설치를 의무화하는 법안 추진에 나서기로 했다. 이와 관련한 법안은 그동안 여러 번 나왔으나 비용과 설치 대상자 선정을 두고 갑론을박이 오가 법제화까지는 못갔다. 이번 국회에서 시동 잠금장치법이 빛을 볼지는 두고볼 일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4-27

가짜 미술품 소동

홍석봉 대구지사장 지난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이 10·26 사태 후 김재규의 헌납재산에 들어 있던 고(故)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하며 진위 논란이 일었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위작(僞作) 소동 사례다.‘미인도’는 이후 30년 가까이 진위 논란이 계속됐다. ‘미인도’ 논란은 지난 2016년 검찰이 ‘진품’이라고 결론내리면서 마무리됐다. ‘어떻게 자기 자식을 몰라보느냐’고 말하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했던 천 화백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인도’ 논란은 은밀한 거래 과정에서 발생한 소동이라는 것이 미술계의 중론이다. 세금을 피하려다 보니 나타난 부작용이었다. ‘소’작품으로 유명한 이중섭의 경우 한때 진품보다 위작이 더 많았다고 한다.외국에서도 위작 논란은 비일비재하다. 1936년 ‘빛의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엠마우스에서의 만찬’을 당대 최고 권위자가 극찬했지만 위작으로 밝혀졌다. 지난 2021년엔 일본의 주요 백화점에서 판매된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가짜로 판명돼 일본 사회가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위작은 미술계의 영원한 숙제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은 그 수량이 한정돼 있다. 하지만 구입하려는 사람은 많다. 이 틈을 파고들어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위작이다.위작은 구분이 힘들다. 전문가도 속기 십상이다. 대체로 감정가들은 진품과 위작을 구별할 때 안목감정, 기록감정, 과학감정 과정을 거친다. 웬만하면 이 3단계 과정에서 위작은 대부분 걸러진다고 한다. 대구미술관 소장품 중 일부 작품이 가짜로 드러나 시끄럽다. 작품선정과 가치평가 심의위원회도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의문이다. 사법당국의 수사가 필요해 보인다. /홍석봉 (대구지사장)

2023-04-26

아, 독도는!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2차 세계대전을 실질적으로 마감하면서 연합국들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이다. 미국, 영국, 소련 등 48개국이 서명하고 1952년 4월 28일에 공표되었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대한민국과 북한은 어느 쪽이 한반도를 대표하는지 불분명하여 초대받지도 못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제2조 이 한 줄에 ‘독도’가 들어있지 않다 하여, 일본은 아직껏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중이다. 독도가 일본 땅으로 ‘남은’ 증거라는 것이다. 저 조항의 해석은 물론 조약이 대한민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한다.신한일어업협정. IMF사태 한 가운데였던 1998년에 체결되어 다음해에 발표된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어업협정이다. 양국 간에 ‘중간수역’을 설정하여 두 나라의 국민과 어선이 상대국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문제는, 엄연히 대한민국의 영토여야 할 독도가 중간수역에 포함되어 두 나라가 함께 관리하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영토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설정하지 않고 중간수역에 빠진 꼴이 된 것이다. 이후 일본이 대한민국 영토 독도의 영유권적 지위를 흔들 수 있는 빌미를 남긴 셈이다. 중간수역에 떨어진 독도의 운명은 누가 돌아보는가. 우리가 독도를 생각하며 다분히 정서적이며 감정적인 ‘독도는 우리땅’을 부르고 있을 때, 일본이 조직적인 논리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들을 모으며 국제적 분쟁거리로 독도문제를 준비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한국전쟁의 소용돌이와 IMF사태의 어려움을 기억하는 일에도 몸서리를 치겠지만, 그런 와중에 ‘우리땅 독도’의 운명이 위태로울 움직임들이 있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뿌리깊은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우리의 섬 독도’의 운명을 흔들 수 없음을 체계적으로 조리있게 세계만방에 고해야 하지 않을까. 신한일어업협정은 그야말로 어업에 관한 나라 간의 약속으로 대한민국 독도의 영토적 지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도 분명히 해야하지 않겠는가. 대한민국의 목소리가 적절하게 반영되지 않는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나 지극히 지엽적인 어업을 대상으로 하는 신한일어업협정이 대한민국 영토 독도의 영유권적 지위를 침탈할 수 없음을 세계만방에 천명해아 한다.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국익의 관점에서 상생과 협력의 정신을 살려가되, 우리의 땅 독도의 지위를 들먹이는 행태는 단호하게 막아야 한다. 중앙정부는 물론, 경북도와 울릉군 등에서 펼칠 다양한 독도 관련 정책과 이벤트도 추후 있을지도 모르는 국제적 갈등에 미리 대비한다는 점에서 소홀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독도는 우리땅!’을 끊임없는 다짐과 구호로 간직하면서 우리는 보다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논거와 실효적인 수호논리를 확보해야 한다. 독도는 누가 뭐라 해도 대한민국의 영토가 아닌가.

2023-04-26

대학의 위기와 교육의 목적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지난 4월 10일 교육부의 ‘인문사회 융합인재양성사업’ 보도 자료가 배포되었다. 이 사업은 3~5개 대학으로 연합체를 만들어서 5개 대주제(디지털/환경/위험사회/인구구조/글로벌·문화)에 맞는 융합 교육과정 개발을 목표로 하며, 지역 대학 위기 상황을 고려하여 비수권 대학이 연합체의 40% 이상이 되도록 규정했다. 연합체의 대학에 150억을 지원하는, 인문사회 영역 지원 사업으로는 상당히 큰 규모이다.사업 공고가 나오자 대학 간 눈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학교 차원의 TF팀이 꾸려지고 단과대학을 중심으로 합종연횡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4월 10일 공고가 나고 불과 2주 만에 신청을 마감하는 일정이지만, 24시간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던 연구자들의 몸이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당연히 주제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방향성을 토의할 시간은 없다. 본 신청까지 아직 한 달이 남았다지만, 최소 세 개 대학의 여섯 학과가 충분한 협의를 거쳐서 어떤 결과를 도출하기에는 촉박한 일정이다.지역 대학은 글로컬 사업의 여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던져진 이 사업으로 더욱 분주하다. 글로컬 사업이 추구하는 학과 간 혹은 학교와 지역 간 칸막이를 없애는 문제의식과 연합체를 구성하여 학교 간 전공 간 칸막이를 제거한다는 이 사업의 취지는 동일하다. 정부는 지역 대학의 위기, 나아가 대학의 위기를 다양한 층위에 포진해 있는 칸막이를 치워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융합’의 문제의식이 대학가에 등장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100억이 넘는 예산을 가지고 속도전으로 밀고 나오는 경우는 처음이다. 정부는 지역 대학의 위기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문제가 하나 더 추가되어서 속도를 높이는 것일까. 최근 정부의 교육 정책이 지역 대학의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교수·연구자들의 연대와 고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장은 그 연대체에 힘을 실으며 함께 나가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하지만 이번 정부의 정책은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액수의 돈을 노골적으로 가시화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사업을 기획한 정부의 의도가 무엇인지, 사업 이후에 우리 지역과 우리 대학에 어떤 일이 펼쳐질지를 질문하지 않고, 눈앞의 숫자에 몸을 움직이려는 사람들이 있다. 대학의 위기가 일상화된 지금, 유례없는 돈이 투입되는 사업에 작은 과실 하나라도 따 먹으려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이를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생활인으로서 교수, 연구자들의 심리와 이 시대 대학의 존재 이유를 생각하면, 오히려 정부에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이라는 글로컬 사업의 방향성이 암시하듯, 이 제도는 돈 중심의 사고를 더욱 확장하는 것에 기여할 가능성이 크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기관이듯, 대학의 논리도 돈 중심으로 변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닌 사회가 이미 도착한 것인가. 이런 시대에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2023-04-26

허리가 아파서 꼼짝을 못하겠어요

나선택포항 행복한의원장 “재채기 하다가 허리를 뜨끔했는데 꼼짝을 못하겠어요.” “바닥에 있는 물건 집다가 삐끗했는데 움직일 때마다 허리가 아파요.” 이런 일로 한의원에 내원하는 환자가 많다. 생각해보면 이게 허리를 다칠 만한 일인가 싶은 경우가 많다. 무거운 물건을 들거나 옮기다가 다쳤다면 쉽게 이해라도 될텐데 말이다. 이렇게 별거 아닌 이유로 급성 요통이 오는 것은 평소 허리에 좋지 않은 생활습관 때문에 허리 근육과 인대에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허리의 피로를 줄이기 위해서는 걷거나 누워 있는 것이 좋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것이 가장 나쁘다. 등받이가 없는 바닥이나 의자에 오래 앉는 것도 아주 나쁘다. 앉은 자세는 허리 근육에 과도한 긴장을 주고 배의 압력을 증가시켜 디스크 내의 압력을 높이고 디스크의 노화를 촉진한다. 장시간 앉아 있어야 할 경우 허리를 꼿꼿하게 펴야 하는데, 이 자세가 힘들 때는 일어서서 허리를 구부리고 펴기를 수차례 하고 2∼3분간 걸은 후 다시 바른 자세로 앉아야 한다.허리 부상을 막기 위해서는 허리에 무리를 주는 생활습관을 교정하고 평소 꾸준한 허리 운동으로 허리 근육을 단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허리를 굽히면서 물건을 들어 올릴 때 삐끗하면서 허리 근육을 다치는 경우가 많다. 허리를 꼿꼿이 펴고 한발을 내민 상태에서 무릎과 고관절을 굽혀 물건을 드는데, 이때 물건을 배에 밀착시키는 것이 좋다.평소 허리에 좋지 않은 운동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척추는 전후좌우로 움직일 때보다 회전할 때 더 큰 압박을 받는다. 통쾌한 스윙이 매력적인 골프는 척추에 큰 부담을 주는 운동이다. 가만히 서 있을 때 척추에 가는 부담이 100이라면 스윙할 때의 부담은 220이다. 더구나 중년에는 근육의 탄력이 떨어져 허리 통증이 생기기 쉽다.이렇게 허리 부상을 막기 위한 노력을 했음에도 허리가 아프거나, 하는 일이 바빠서 허리 건강을 돌볼 겨를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한약 처방을 복용하는 것이 상당히 도움이 된다. 동의보감에는 십종요통이라 하여 허리의 통증을 증상과 원인에 따라 10가지로 구분하고 각각에 맞는 효과적인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그 중에는 스트레스나 긴장이 많아져서 생기는 기요통(氣腰痛), 만성적으로 위장이나 대장 등의 소화기가 나빠서 오는 식적요통(食積腰痛), 노화 또는 신장의 기능이 약해지고 호르몬 분비가 부족해져서 오는 신허요통(腎虛腰痛) 같은 것도 있다. 이 경우는 양방에 가서 검사하면 원인 불명의 만성 요통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데, 한의사의 정확한 변증을 통해 한약을 투여하면 오래 앓던 요통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허리가 아파서 꼼짝 못하는 경우에 디스크가 터진 것이 아닌지 걱정한다. 하지만, 요통 환자의 90프로 이상은 ‘비특이성 요통’ 즉, 디스크와는 상관없이 근육이나 인대에서 오는 통증이다. 가까운 한의원을 내원하여 허리디스크를 가려낼 수 있는 이학적 테스트를 해보고, 만일 문제가 발견되면 양방의 전문병원으로 가는 것이 훨씬 시간이나 비용 면에서 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다.

2023-04-26

철쭉

정미영 수필가 매년 우리 집 철쭉은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피어났다. 그런데 올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계절을 알리는 전령사였는데, 물기 없는 수피가 까칠하고 버석거렸다. 말라 헐거워진 흙 아래에 묻혀 있는 뿌리에도 물이 사라졌을까, 걱정되었다.꽃이 피었다가 이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 때 푸른 물 정기를 맘껏 받아들여 연초록 잎을 돋우고 꽃불을 환히 밝혔던 시절을 떠올리니 괜스레 측은했다. 서둘러 화분에 물을 주었다. 몸피 가득 물을 머금어 회생하면 좋으련만.내가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고 아픔을 살폈어야 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웃자란 부분은 가지를 쳐줬어야 했는데, 한 동안 마음을 쓰지 못했다. 더군다나 다른 화분은 거실에 놓았는데 홀로 햇빛이 들지 않는 현관에 두었다. 나는 혹여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 환하게 밝혀진 꽃등을 보고 감탄하면 신나게 철쭉을 자랑하려고 했다. 그런데 오히려 꽃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수척한 철쭉의 모습에서 예전에 가르쳤던 제자의 얼굴이 겹쳐졌다. 며칠 전, 부모님과 상의를 하지 않고 대학교를 휴학했단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선배나 동창들과 부대끼면서 인생을 가치 있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상을 해보았다고 했다. 나는 제자의 속사정을 들어보기 위해 만났다. 제자의 안색이 밝지 않았다. 철쭉이 제자리에 놓이지 못해 야윈 것처럼 제자도 사회에서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지 못할까 걱정하느라 나날이 메말라갔나 보다. 가벼운 바람에도 날아갈듯이 흔들리면서 중심을 잃을 것처럼 위태롭게 보였다.제자를 만나고 돌아온 날이었다. 제자의 어머니가 많이 속상하다고 내게 토로했다. 대학 합격만을 바라보며 앞만 보고 성실하게 공부해 왔던 제자가 아니었던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했으니 순리대로 학과 공부를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순조로울 것 같던 대학 생활이 삐걱거리자, 그의 어머니는 못마땅하다고 말했다. 나는 제자의 어머니 마음도 헤아려졌다.늦게까지 강의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 너머로 군 입대 신청을 했다는 제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왜 이렇게 성급하게 결정을 했느냐, 부모님과 상의를 하고 내린 결정이었냐, 제자를 향한 내 질문이 쏟아졌다.현재로서는 생활에 대한 긍정적인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학, 자신이 원하는 학과에 들어갔어도, 선배들의 전공 취업률이 낮다는 점에서 좌절을 맛보았다고 했다. 불안감이 여러 날에 걸쳐 제자의 온몸을 휘감고 점점 농도 짙게 물들인 탓인지, 자신감이 점차 약해졌나 보다.어디 제자만의 문제일까?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청년들의 취업 고민이 더욱 가중되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밤이 늘수록 그들의 몸안 깊숙이 외로움이 자리 잡았을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아프다.얼마 전부터 철쭉이 새순을 피웠다. 가지 끝에서 손톱만한 연두색 잎들이 돋더니, 어느새 줄기를 다시 내고 꽃대를 밀어 올렸다. 물기 머금은 줄기는 생기가 넘쳤고, 꽃대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애써 담담한 척했으나 철쭉이 끝내 살아나지 못할까봐 그 동안 내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힘을 내어 꽃까지 피우라고, 오며가며 말했더니 기특하게도 꽃망울을 맺었다. 하루아침에 꽃불이 일지는 않겠지만 군데군데 꽃망울이 귀엽게 돋아났다.생명 있는 것은 누군가의 관심이 있어야 기운을 낸다. 철쭉의 마음을 헤아려 물을 적당히 주고 볕도 알맞게 쬐어주었더니, 화사함을 유지했다. 우리네 인생에서도 상대방의 관심은 무엇보다 긴요하다. 그것은 삶에서 부단히 만나게 되는 가시밭길을 잘 건너가게 도움을 주는 고갱이가 될 수 있으리라.앞으로는 제자가 소울(疏鬱)할 수 있도록 자주 안부를 물어봐야겠다.

2023-04-26

정유(丁酉)

육십갑자 중 서른네 번째는 정유(丁酉)다. 천간(天干)의 정화(丁火)는 촛불이나 별에 비유되며, 지지(地支)의 유금(酉金)은 잘 제련된 금속에 해당된다. 동물로는 닭이다.정유일주는 천을귀인과 문창귀인을 깔고 있어 옛날부터 사랑을 많이 받던 일주다. 다정다감하며 인간미가 넘친다. 심성이 착하고 봉사심이 있어 주변을 밝게 만들기에 인기가 있다. 온순하고 섬세한데다 아름다운 용모도 가졌다. 예술적 재능과 미적 감각이 뛰어나고, 멋쟁이들도 많다. 모방도 잘하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편이다.단점으로는 분위기에 약하고 귀가 얇은 편이라 잘 속는다. 맑은 기운을 그릇되게 사용하면 오히려 극심하게 추해지는 경향이 있다. 순수하고 고귀한 힘은 고귀하게 쓸 때 그 빛이 제대로 발휘된다. 무엇보다 많은 복을 타고난 정유는 남에게 먼저 베풀 때 그 복이 배로 되돌아온다고 한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적어도 정유에게는 헛말이 아닌 듯하다.남자의 경우는 잘생기고 키가 훤칠한 경우가 많고, 이목구비가 큼직하여 시원한 호남형이다. 배우자 복이 있지만, 바람을 피울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여자는 분위기가 발랄하고 산뜻하여 소년을 연상케 하는 느낌으로 매력적이다. 시댁이 부자이거나, 남편이 사업 수완이 좋아 기본적으로 배우자 복이 많다.문창귀인이 있어 총명한 편이다. 지혜가 있고, 문장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귀인 타입으로 만인에게 호감을 준다. 재주만 믿고 남을 불신하는 단점이 있으니 항상 겸손한 자세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특히 모임에 참석하면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며 생기가 넘쳐난다. 미남 미녀에다 말도 잘하고, 호소력이 넘친다. 어디를 가도 이성의 관심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유는 다재다능하고 융통성도 있어서 재능과 수완을 겸비했다.1950년대 박인환(1926∼1956) 시인은 최고의 멋쟁이 댄디보이였다. 큰 키에 미남이었고, 재치와 시적 재능을 겸비했다. 여름에도 정장을 했으며, 많은 여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또한 책방 마리서사를 열어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의 발상지 역할을 했다.1956년 이른 봄 탤런트 최불암 모친이 운영하는 명동의 술집 은성에서 박인환은 즉석에서 시를 쓰고, 이진섭은 곡을 붙이고, 나애심은 노래를 불렀다. ‘세월이 가면’이다. 3월 17일 늘 좋아했던 이상 시인의 추모의 밤에 너무 과하게 마신 술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0세였다. ‘목마와 숙녀’란 시는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난다. 그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목마를 타고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그가 평생 심취한 스물일곱에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처럼 짧은 생을 살았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최고의 미남 시인으로 백석, 임화, 박인환을 꼽았다.매끄러운 만남과 대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유머다. 그러므로 유머를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윤활유라고 말한다. 그만큼 요즘은 누구랄 것도 없이 유머 있고 재미있는 사람에게 호감을 나타낸다. 재치 있는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요즘 매력적인 사람이다.정유일주의 유금(酉金)은 해가 서산에 저물 때 정화(丁火)의 불빛이 유금 보석에 반사되어 어둠을 밝혀주니 등대 같은 천을귀인이 된다. 유(酉)는 동물로는 닭이다. 닭 중에서도 ‘기유(己酉)’가 덕이 있는 스타일이라면, ‘정유(丁酉)’는 용맹 스타일의 솔선수범형이다. 그래서 ‘거친 세상의 다리’라고도 하고, ‘일몰의 등대 또는 가로등’이라 한다.정유는 그렇게 대범하기에 희생정신이 높다. 자신만의 독특한 내공이 있기에 해가 저물 때 등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름 한가락 하는 기술이 있어 아랫사람과 주변사람을 잘 챙겨주고픈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자신이 모든 면에서 수준급 이상으로 돋보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노는 것도 엄청 좋아한다.사마천 ‘사기’에 ‘삼년불비우불명(三年不飛又不鳴)’이란 고사가 있다. 춘추오패 중 한 사람이었던 초나라 장왕은 즉위하자, 신하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 과인에게 간하는 자는 누구든지 사형에 처할 것이다!” 장왕은 3년 동안 국정을 돌보지 않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았다.마침내 충신 오거는 죽을 각오를 하고 우회적으로 간언을 했다. “신이 수수께끼를 하나 낼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해 보시오.” “큰 새가 한 마리 있사온데, 3년 동안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사옵니다. 이 새가 어떤 새입니까?” “3년이나 날지도 울지도 않았으나, 한 번 날면 하늘에 오를 것이고, 한 번 울면 온 세상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오. 그대의 뜻은 잘 알았으니 물러가시오.”그러나 장왕의 주색잡기와 방탕함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보다 못한 대부 소종이 나섰다. 장왕은 화를 내며 소종을 꾸짖었다. “그대는 내 말을 못 알아들은 모양이요?” “알고 있사옵니다. 국정에 전념하신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알았소. 물러가시오.” 류대창 명리연구자 장왕은 그날부터 주색과 향락을 멈추고 정무를 보기 시작했다. 먼저 한 일은 간신과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충신과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였다. 목숨을 걸고 간언했던 오거와 소종은 높은 관직을 내리고 중책을 맡겼다. 3년간의 방탕한 생활은 옥석을 가려내기 위한 술수였다. 나라는 안정되었고, 백성의 생활도 윤택해졌다. 백성들은 몹시 기뻐하며 장왕과 충신들을 칭송했다.두꺼비나 개구리나 온갖 벌레들이 밤낮없이 울어 입이 마르고 혀가 지칠 지경이 되어도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장닭은 새벽에 길게 한 번 울어 제쳐 온 세상을 잠에서 깨운다. 말을 많이 하면 무엇이 좋아지는가? 중요한 것은 적절한 시기에 그 상황에 맞는 말을 하는 것이다.누구든지 한 가지의 능력은 가지고 있다. 하나의 능력은 오직 그만의 것이다. 그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충분히 살려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한 가지 능력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힘만으로 능력을 찾아내는 사람도 있고, 세상의 반응을 살피며 자신의 능력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모색하는 사람도 있다. 틀림없는 사실은 어떠한 경우라도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고 과감하게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자신만의 한 가지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2023-04-26

지옥이 된 도시

유튜브에서 펜타닐에 중독된 사람들이 좀비처럼 흐느적대는 필라델피아 켄싱턴 거리를 봤다. 펜타닐은 헤로인보다 50배 이상 강력한 마약인데, 원래 말기 암 환자가 고통을 덜기 위해 쓰는 진통제라고 한다. 몇 해 전부터 미국 사회에 조용히 확산되더니 이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가 돼 버렸다. 펜타닐은 강력한 뇌 손상을 일으키고, 중추신경을 파괴한다. 이 마약에 중독되면 허리를 펴지 못하고 방향감각을 상실해 제자리를 맴돈다.생지옥이나 마찬가지인 살풍경 너머로 익숙한 배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2019년 10월, 필라델피아에서 영화 ‘Rocky’의 흔적을 찾아 하루 종일 걸었다. 영화 속 록키의 비좁고 냄새나는 아파트, 트레이너 미키의 체육관, 거리의 아카펠라 싱어들이 노래를 부르던 모퉁이가 모두 켄싱턴에 있다. 그곳이 미국 동부 최대의 마약 시장인 줄도 모르고, 몰라서 용감한 건지 아니면 언뜻 험악해 보이는 거리의 인상에도 객기를 부린 건지 홍대 거리 걷듯 혼자 휘적휘적 걸어 다녔다.며칠 뒤 밴쿠버에 가선 현지 지인 부부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아, 숙소가 있는 웨스트엔드에서 약속 장소까지 한 시간 남짓 걸어가는 동안 이스트 헤이스팅 스트리트와 차이나타운을 관통했다. 걸어서 왔다고 하니 부부가 놀랐다. 밴쿠버에서 가장 위험한 우범지대를 지나왔다는 것이다. 하긴, 지나는 길에 경찰로부터 소지품을 검사 당하는 사람들을 여럿 보긴 했다.필라델피아에서도 밴쿠버에서도 자칫 험한 일을 겪을 뻔했다. 지금 다시 걸어 다니라면 안할 것 같다. 겨우 4년이 지났는데, 나이 든 것이다. 미 동부 최대 마약시장과 살인, 강도, 총기 사고가 빈번한 밴쿠버 우범지대를 쏘다니며 위험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은 것은 강심장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성이라는 데서 어떤 안정감 같은 걸 얻은 까닭일 테다. 아니면 여행이라는 행위 자체가 사람을 쉽게 낭만과 환상에 취하게 해 현실감각을 둔화시킨 탓인 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다 어리석다. 그저 운이 좋아 아무 일 없었다.그런데 사람이 좀비가 되어 버린 도시는 그냥 우범지대가 아니다. 우범지대나 치안부재 같은 말은 인간 이성이 인간을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나 쓴다. 유튜브 영상 속에 펼쳐진 지옥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고장 난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느릿느릿 경련하는 사람들 모습 아래 ‘참혹한 인간 추락의 거리’라는 자막이 섬뜩하다. 그 자신이 알코올중독에 시달리다 자살한 헤밍웨이의 문장을 생각하는 새벽이다.“인간은 파멸할 수는 있어도 패배하지는 않는다”고. 글쎄, 이제는 파멸과 패배가 다르지 않은 세상인 듯하다. 펜타닐에 중독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노상방뇨를 해 켄싱턴 거리에는 소변 웅덩이가 곳곳에 생길 정도라고 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나라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유명 연예인들의 마약 범죄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서울 강남의 클럽에서는 암암리에 마약이 거래돼 강간, 강도, 불법촬영 등에 이용되기도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젊은 세대에서 마약 중독으로 치료를 받은 환자가 5년 사이 2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얼마 전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생들에게 ‘마약 음료’가 배포되는 사건이 있었다. 또 며칠 전에는 호텔과 클럽 등에서 필로폰을 투약하고 집단 환각 파티를 벌인 남성 60명이 검거되는 일도 있었다. 더는 마약 청정국이 아닌 것이다. 사회적인 불안감과 시민들의 요구에 비해 마약사범 처벌은 솜방망이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켄싱턴의 악몽이 서울에 펼쳐지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다.필라델피아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다. 미국인들의 개척정신과 자유의식은 이곳 독립기념관과 ‘자유의 종’을 뿌리로 한다. 뉴욕, 워싱턴, 보스턴과 함께 손꼽히는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그런 도시가 지금 마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중이다. 4년 전 가을, 미스트 같은 가을비를 맞으며 걸었던 필라델피아 켄싱턴 거리는 신시가지에 비해 쇠락해 스산했지만, 크고 근사한 명소나 세련된 현대식 건물들, 화려한 다운타운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정감과 투박한 온기가 있었다. 마약상들이 판치는 우범지대라지만 그곳에도 사람이 산다. 사람이 사람으로 계속 살 수 있을까? 그 지옥이 우리의 일상으로까지 전염될까 두렵다.

2023-04-25

일상 속 낭만 더하기

낭만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정확히 말하자면 낭만을 지향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실은 그 전까진 낭만은 현실적이지 못한 것, 지나치게 감정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낭만이란 어린이의 허무맹랑한 상상력에 가까우며 오히려 현실을 지나치게 부정하고 외면하는 이들이 꿈꾸는 꿈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지난날의 나는 삶을 비관적인 것으로 대했다. 때때로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 좋지 않은 일이 더 큰 크기로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늘 다가올 불행에 대처하기 위해 겸손한 태도도 생을 대했다. 좋은 운이 찾아와도 차분함을 유지하려 불운 쪽으로 몸을 기울였고, 불운이 찾아올 때는 고통이 지나갈 때까지 슬픔으로 깊게 잠겼다.실은 나는 우울감을 쉽게 느끼는 본성을 지녔지만, 우울에서 금방 빠져 나와 다시금 씩씩하게 살아가는 편이다. 우울 속을 옅게 부유하다 다시 수면 바깥으로 나와 유유자적 수면 위를 헤엄치는 쪽이라고 해야 할까.과연 인간은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인간의 이면을 보며 무기력하게 방바닥을 기어 다니다가도 바깥 산책을 하면 금방 눈을 반짝이고 만다. 대가 없는 친절과 배려, 그리고 오랜 기간 묵묵히 선을 지향하는 이들을 마주하면, 그래 세상엔 좋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이라고 고갤 끄덕이며 다시금 용기를 얻는다.하지만 작년 한 해의 나는 지나치게 무기력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부터 모든 의욕을 잃었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도 너무 많은 신경과 노력을 쏟아버린 탓일까. 쓸쓸하게 타 버린 성냥처럼 또 다른 쓸모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망해했다.도피와 외면을 일삼다 결국 아무것도 모르겠는 상황이 와버렸을 땐, 내가 택해버린 건 잠이었다. 하루 온종일 잠의 뿌리를 내리는 동안 나를 질타하는 이도 회피하는 이도 있었으나 나를 깨우기 위해 현관문을 두드리는 이가 있었다. 자주 집에 찾아와 잠을 깨우고 밥을 먹이고 산책을 하며 심심한 농담과 함께 주말 약속을 잡던 고마운 사람이다.나의 우울은 같은 크기를 지닌 우울이 나를 알아보고 진정 나를 이해해줄 수 있으며, 슬픔은 슬픔을 구원할 수 있다 여겼으나 실은 슬픔은 아무것도 구원할 수 없다.외려 깊은 슬픔은 옆에 있는 이를 슬픔의 늪으로 깊게 끌고 들어갈 뿐이다. 슬픔에 처한 타인의 심정을 공감하고 헤아릴 순 있겠으나, 타인이 지닌 슬픔은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두드려 나를 깨우던 이에게도 타인을 절대 구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외로움만을 안겨줄 뿐, 그렇게 계속 실패로 기록되는 관계는 머지않아 단절된다. 마치 정해진 공식처럼.외로움은 정신적 고통이 지속되는 일이고 깊고 복잡할수록 타인에게 이해 받고 회복될 수 없다는 걸 안 순간 한결 삶이 편해졌다. 외로움은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겪는 고행이자 의무로 여기니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와 낭만에 대해 오히려 시선이 갔다. 삶을 무턱대고 비관하기보단 유연하게 대처하며 세상의 긍정적이고 밝은 면도 궁금해졌다고 해야 할까.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요즘은 일상의 낭만을 더하는 데에 기쁨을 느끼고 있다. 쓸모없을수록 의미 또한 부재할수록 좋다. 꽃 한 다발을 사서 책상 위에 올려두는 것, 작은 꽃의 이름을 익히는 것, 서점에서 즉흥적으로 골라온 시집을 사서 읽는 것,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의 여행 계획을 짜는 것, 계절마다 제철 음식을 먹기 위한 일정을 짜는 것, 프로틴 쿠키나 그릭 요거트 바 만들기 등 크고 작은 이벤트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동안 일상은 더 디테일해졌고 행복으로 가까워졌다.4일 전에 사온 꽃이 금방 머리를 숙여 시든다고 하더라도, 도무지 시를 이해할 수 없더라도, 제철음식을 먹기 위해 많은 시간과 돈, 수고가 들더라도 마음의 결은 더 촘촘해지고 부드러워진다.5월에는 놀이공원을 갈 것이고 6월엔 오사카와 교토 여행을 간다. 주말에는 다시 러닝을 하면서 몸에 좋은 음식을 만들어 먹기 위한 레시피를 뒤적인다. 이 모든 걸 즐기기 위해선 또 일을 해야 한다. 건강히 일하며 일상의 낭만을 계속해서 발견하고 누리는 삶, 이렇게 적어 놓고 나니 현재 나의 모습이 꽤 마음에 드는 것 같다.

2023-04-25

깡통전세도 걱정

우정구 논설위원 세입자의 보증금을 떼어먹는 전세 사기가 전국적으로 기승이다. 인천에서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 사기 피해자가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서 정부가 긴급히 특별법 제정에 나섰지만 사회적 파장을 가라앉히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다.정부의 특별법으로 전세 사기 피해주택을 LH가 매입하고 피해자에게 우선 임대해 주기로 했지만 전세사기 범죄에 대한 예방책이 없는 한 근본 해결책은 아니다. 올 들어 주택도시보증공사에 신고된 전세보증 사고는 역대 최다급으로 집계되고 있다. 전세시장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깡그리 무너질까 우려될 정도다.특히 지금처럼 집값과 전세값이 급락하면 깡통전세라는 또다른 문제로 비화될 소지가 많다. 깡통전세란 집주인의 주택담보 대출금액과 전세금을 합친 금액이 집값에 육박해 시장침체로 집값이 떨어지면 세입자가 전세금을 떼일 우려가 있는 주택을 말한다. 통상 주택담보 대출금액과 전세금을 합친 금액이 집값의 70%를 넘어서면 깡통전세로 본다.2013년 주택산업연구원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집값은 하락하고 전세금만 오르는 상황이 지속될 경우 향후 2년내 깡통전세로 내몰릴 수 있는 가구가 수도권만 19만 가구로 추정된 바있다.최근 주택금융연구원은 집값이 10∼20% 하락하면 올 하반기부터 경북의 공동주택 40% 이상이, 대구는 30% 이상이 깡통전세로 전락할 수 있다는 예측을 내놓았다.최근 일부에서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해 떨어진 전세값 만큼 세입자에게 역월세를 주는 편법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오락가락하면서 전세사기가 양산됐는데, 자칫 깡통전세사태가 나올까 두렵다. 정부의 부동산 안정화 대책이 서둘러 나와야겠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04-25

수도권 중심론자의 ‘예타면제’ 시비

심충택 논설위원 최근 홍준표 대구시장과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이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 것을 지켜보면서, 수도권 중심론자의 이기적인 사고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설전은 지난 14일 윤 전 의원이 CBS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지역에 다 공항을 만들면 어마어마한 투자가 필요하다. 전에 무안공항에서 동네 주민이 고추 말리는 사진도 봤는데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말한데서 비롯됐다. 듣기에 따라서는, 바로 이날 국회 상임위를 통과한 TK신공항 특별법을 비꼬는 투로 해석됐다. 이에 홍 시장은 “국토균형발전이라는 국가적 과제를 안고 출발하는 신공항을 비아냥대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며 윤 전 의원을 직격했다. 홍 시장은 TK신공항 없이는 대구·경북의 미래가 없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두사람간 설전의 쟁점은 ‘예타’다. 윤 전 의원은 “총선이 다가오면서 예타 기준을 완화하는 여야협치로 전국이 총선 공사판이 될 우려가 있다”며 비아냥댔다. 누가 들어도 대구·경북과 부산, 광주 신공항건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국회 기획재정위는 지난 17일 전체회의에서 대규모 재정사업의 예타면제 기준을 대폭 완화하는 내용의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처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수도권 보수언론이 중심이 돼 예타면제 기준 완화에 대해 집중적인 비판기사를 쓰자, 국민의힘이 갑자기 법안처리에 제동을 건 상태다.예타는 지난 1999년 예산낭비를 줄이는 차원에서 도입됐다. 예타는 사업의 경제성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본심사인 타당성조사는 기술적인 문제에 중점을 둔다. 경제성 분석에서는 ‘비용 대비 편익(B/C)’을 따진다. 자연적 돈과 사람이 몰려 있는 비수도권이 유리하다.과거에도 수도권언론은 사회간접자본(SOC) 예타면제 논란이 있을 때마다 ’세금 낭비·선심성 사업‘이라며 정부를 압박했다. 예타지수는 그 속성상 인구나 경제력이 집중된 곳일수록 높게 나오게 돼 있다. 수도권에서는 도로나 전철건설 등을 위한 예타가 수월하게 진행되지만, 비수도권 SOC건설은 예타면제 없이는 거의 사업이 불가능하다. 예타가 수도권 일극주의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 재정법시행령에도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국가 정책적 사업에 대해서는 예타 면제를 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국회가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심사하면서 예타면제의 기준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기준이 분명하지 않을 경우 차별과 특혜 논란으로 지역 간 갈등이 심각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때 명확한 기준 없이 광역단체별로 1개의 SOC사업에 예타를 면제해 주겠다고 발표했다가, 지자체간에 큰 혼란이 발생한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당시 각 지자체가 SOC사업을 따내기 위해 경쟁적으로 권력실세들에게 줄을 대는 사태가 발생했다. 윤희숙 전 의원을 비롯한 수도권 정치인들은 국가균형발전이 시대적 과제임을 꼭 명심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예타와 상관없이 공기업 지방 이전을 단행해 비수도권 지역민들로부터 두고두고 칭송을 받지 않는가.

2023-04-25

AI 진리전쟁

전재영 한동대 교수·AI융합교육원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역사에 대해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역사란 인쇄된 종이 조각에 불과한 것. 중요한 것은 역사를 만드는 일이지, 역사를 쓰는 일이 아니다.”그가 정확하게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역사를 만드는 일 만큼, 역사를 쓰는 일은 예전에도 중요했고, 앞으로 어쩌면 더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껏 불러왔던 역사라는 것이, 이제는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데이터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데이터는 인간의 단순한 질문에서부터 철학, 종교, 윤리 등 모든 분야의 심오한 질문들에 응답할 수 있는 AI 개발을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지금 ChatGPT에게 낙태나 이민자 문제 등에 관한 질문을 하면, 매우 중립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런 답이 가능한 것은, 사회적 이슈가 될 법한 내용들은 ChatGPT를 만든 OpenAI가 검열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작년 11월 ChatGPT가 처음 나왔을 때의 편향된 답과는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잘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여기서 좀 더 깊게 생각해 볼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검열 작업이 누구의 생각을 바탕으로 되었냐는 것이다. 위키피디아의 글들은 전 세계 흩어져 있는 많은 사람들이 협업을 통해 검열을 하지만, ChatGPT에 행해진 검열은 한 조직의 생각에만 기반을 둔 검열이기 때문이다.우리는 구글 검색을 할 때, 일일이 링크를 눌러보며 내가 찾는 것과 가장 가까운 검색결과를 분별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을 전부 건너뛰고, 바로 답을 줄 수 있는 ChatGPT가 구글을 대체할 것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구글의 독점이 딱히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구글 검색을 하는 동안은, 우리가 검색 결과를 추려내는 일종의 검열자 역할을 스스로 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최소한 진리를 강요받지는 않았다. 아니 최소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인지를 스스로 판단해 볼 수 있는 선택의 여지는 우리에게 주어졌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선택권을 잃어버리는 중이다.OpenAI는 계속 중립을 유지할 것이라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회사는 인공지능 기술이 어느 한 대기업이나 한 국가에 속하는 것을 원치 않는 몇몇에 의해 세워진 비영리회사로 시작했었는데, 이제는 몇 억 달러를 마이크로소프트로부터 공급받는 하청업체가 되어 버렸다.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을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을 쫓아내고 공화국을 세운 동물들은 7계명을 작성했고, 그 중 하나는 “동물을 죽이면 안 된다”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물이 죽임을 당했는데, 원래 계명은 이미 소리 소문 없이 “이유 없이 동물을 죽이면 안 된다”로 수정되어 있었고, 어느 누구도 원래 계명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 했기에, 그 죽임은 이유 있는 죽임으로 합리화 된 채 그냥 그렇게 마무리 된다.위키피디아가 시작한지 20년이 지났다. 이제는 위키피디아에 있는 문서들에 대해 진리를 판가름하려 드는 일반인은 거의 없다. 동물농장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이제 진리전쟁을 준비해야만 하는가?

2023-04-25

포항 수도산을 거닐며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모처럼의 여유로운 휴일 아침,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길숲을 따라 걸었다. 폐선된 철도부지에 도시숲을 조성하던 중 분출된 천연가스에 불이 붙어 ‘불의 정원’이 된 불꽃은 6년째 계속 타오르고 있고, 양학동으로 이어지는 비탈진 주말농장 터에는 시민들의 문화·전시·휴양을 만끽할 수 있는 ‘포항철길숲 시민광장’ 조성공사가 한창이다. 줄곧 자전거로만 달리던 철길숲을 한가로이 걸으니 이것저것 보이는 것도 많고, 주변의 상가나 식당 등 달라진 곳도 더러 보인다. 그렇게 한시간여 걸어서 이른 곳은 포항시 북구 덕수·우창·중앙·용흥동 일부지역에 위치한 덕수공원이다.수도산 자락에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6·25전몰군경 충혼탑과 반공순국청년동지위령비, 모갈거사(茅葛居士) 순절 사적비 등 호국·보훈시설과 충절·공덕비가 있는 덕수공원은, 관음사 등 3개의 사찰과 포항시 당산(祠堂)을 비롯, 호국감사둘레길·운동시설 등이 조성돼 철길숲과 연결되는 시민들의 행락, 휴식처이다. 산이라기 보다는 78m의 낮은 구릉같이 보이는 수도산을 처음에는 백산(白山)·서산(西山)·모갈산 등으로 불리다가, 일제시대인 1923~1926년에 걸쳐 산마루에 완공된 저수조(貯水槽) 등의 상수도 시설로 인해 현재는 수도산(水道山)이라 불리우고 있다.40년 이상 포항지역에 살면서 차를 타고 서산터널을 통행하거나 수도산 주변을 수없이 지나치면서도 덕수공원과 수도산을 제대로 둘러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긴,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급행열차 같은 일상의 틈바구니에 놓치고 챙기지 못한 일들이 어디 산책이나 산행뿐이랴. 가끔씩 여유롭게 주변을 찾아 문화재나 유적지를 답사하며 자연을 벗삼다 보면,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이 한결 새롭게 깊은 울림으로 스며들텐데 말이다. 그래서 떠남과 스밈은 고금동서와 만나 사유하고 교감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수도산의 중턱쯤에는 회백색의 콘크리트 육각형 구조물로 일제시대의 건물양식을 띤 돔 형태의 뾰족한 지붕으로 마감된 당시의 배수지가 그대로 남아 있다. 10여㎞ 정도 떨어진 도음산 학천계곡에서 물을 끌어와 고지대의 상수도 시설에 물을 채운 후 당시 중앙동, 덕수동 일대 300여 가구에 급수를 해줬다 하며, 물의 덕은 커서 그 지경이 없다는 뜻의 ‘수덕무강(水德无疆)’ 글씨가 건물에 새겨져 있지만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자는 훼손된 상태다.초록의 향연이 굽이치고 있는 수도산 일대는 도심 속의 쉼터 같이 아늑하게 다가왔다. 그다지 높지도, 힘겹지도 않은 둘레길을 따라 걸으니 군데군데 아파트 숲과 주택가가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고, 멀리 영일만의 푸른 바다와 포스코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경이 시원스레 펼쳐졌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문화적인 유적이 있고 전망 좋은 경치를 조망할 수 있다니, 공원에서 느껴지는 호젓함보다는 테마가 주는 정겨움으로 위안과 안도감을 주는 편한 곳이 아닐 수 없었다.몇일 간 심했던 미세먼지가 사라지니 개운하기만 하다. 어쩌면 ‘수도산’ 같은 명칭의 일제 잔재가 미세먼지 마냥 찜찜하게 여겨짐은 필자만의 과민일까, 기우일까?

2023-04-25

우리가 책을 볼 때, 책은 우리를 본다

우리 세대에서 가장 통찰력 있는 이미지 비평가 중 하나인 존 버거는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하는 질문을 통해, 동물원에서 인간이 동물을 관찰하는 것에 담겨 있는 의미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인간은 동물원 안에 갇힌 동물들을 보러가지만, 정작 그곳에 진정한 동물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원에서 우리는 인간과 친밀한 동물의 모습을 보러가지만, 그것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동물원 속의 동물과 인간의 구별된 모습에 불과하다. 인간의 시선을 통해 만들어낸 구경이라는 행위의 가치는 제도의 한계를 벗어나 그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동물원의 쇠창살 너머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동물의 이미지를 발견하지만, 그 너머로 우리를 바라보는 동물의 시선은 그야말로 우리가 상상하는 그대로의 것일 뿐이다.우리가 책을 통해 세상을, 그리고 타인을 바라보는 것 역시 어쩌면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한때 인간의 문학은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미니어처로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다시 세상을 바꾸는 도구로 여겨지기까지 했지만, 정작 그 문학 속에 진정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이미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세상이 들어 있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내 손이 닿는 영역 저 바깥에 존재하는 타인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 가끔 진정한 타인을 만난다고 생각하지만, 그 속에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하고 친밀한 타인만 존재한다.우리가 동물원을 벗어나서야 동물의 진짜 동물성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진정한 세상이나 낯선 타인이란 책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눈에 들어올 수 있는 대상일지도 모른다. 동물원이 아니고서야 동물을 보기 어려운 것처럼, 문학이나 책이 아니고서야 세계나 타인의 모습을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 속에 진정한 그것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동물원’은 과연 인간이 ‘나’를 벗어나 진정한 세계를 발견하고, 저 바깥의 타인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을 보여준 가장 고전적인 우화이다. 이 희곡은 오래 전 가족을 떠난 톰이 자기를 소개하고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톰의 어머니인 아만다 윙필드는 먼 나라를 동경하여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꾸려가면서 현실을 부정하고 빛났던 과거를 동경한다. 하지만 아만다는 과거와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아들인 톰과 로라의 삶에 끊임없이 간섭한다. 아만다에게 있어 현실이란 그저 부정의 대상일 뿐이고, 그 시선은 현실 너머의 빛나는 과거를 향해 있을 뿐이다.이 가족 드라마 속에서 ‘유리동물원’이라는 제목은 로라가 집착하듯 모으고 있는 유리로 된 동물들을 가리키는 것이면서, 또 아만다가 가족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 그녀가 생각하는 가족의 모습이기도 하다. 로라는 자기가 모으던 ‘유리동물원’을 깨뜨리고 만 짐과의 사랑을 통해 현실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정작 로라가 마주친 현실은 허위와 거짓으로 가득차 있었다. 유리동물원 속 모든 가족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으며, 환상에서 벗어나 실제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가족의 환상을 떠나는 방법밖엔 없었던 것이다. 세계대전이 아직 한창이던 1944년 극작가인 테네시 윌리엄스는 당시 미국인들이 갖고 있던 가족에 대한 환상과 실제 사이를 폭로하는 작품을 썼던 것이다.우리는 동물원에서 동물을 보고, 책을 통해 세상을 본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은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우리의 시선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책을 덮고 난 뒤 저기 있는 비어있는 실제의 현실을 만나는 것까지가 독서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04-24

영천 임고서원, 정몽주의 숨결

영천에 가면 고려말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337~1392년)를 모시는 임고서원(臨皐書院)이 있다. 1600년경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은 이 서원은 해가 좋은 날, 맑은 공기를 폐부에 녹여가며 한나절 산책하기에 딱 좋은 풍광과 정취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서원의 입구에는 수령이 500년이 넘은 웅장하고 풍성한 은행나무가 반갑게 사람들을 맞이한다. 그 근처에 정몽주의 단심가와 그의 어머니가 지었다는 백로가가 새겨진 독특한 모양의 기념비가 보인다. 그 옆에는 서원으로 들어서는 계단이 있다. 임고서원은 현재 신서원과 구서원으로 나뉜다. 왼쪽에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몇몇의 건물이 구서원이며, 오른쪽에 큰 마당을 중심으로 시원하게 서 있는 건물들이 신서원이다. 근처의 ‘포은이 물고기가 아니라 용을 낚는다’고 이름 붙인 조룡대(조옹대)와 용연, 상징적인 선죽교와 포은박물관, 지역문화와 연계가 높은 충효문화수련원, 산책로가 모두 서원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다.임고서원은 1553년 경상도 관찰사 정언각(鄭彦慤·1498∼1556년)이 건의하고, 노수·김응생·정윤량·정거 등이 함께 창설을 계획하여 그 1년 뒤인 명종 9년에 창건되었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소수서원(紹修書院·1543년)의 건립 때처럼 퇴계 이황의 의견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고서원은 ‘조선왕조실록’에 사액서원이 되는 과정을 5번이나 기록할 정도로 조정의 관심을 받았으며, 소수서원(안향)·문헌서원(최충)·남계서원(정여창)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남의 대표적인 서원이 되었다.사액서원이 된다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면서 나라가 인정한 위상이다. 왕이 하사한 사서오경과 많은 위전을 보유하여 지방문화의 최전방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직지사·인각사·환성사·운부사 등의 토지에서 세금을 수조할 수 있었으며, 생선과 소금과 노비를 통해 경제적인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수입의 안정은 서원의 운영을 원활하게 하여 그 영향력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임고서원의 영남을 아우르는 영향력은 목판이 아닌 목활자를 소유하고 있어 지방의 관공서에 빌려주었다는 기록이나 임진왜란 이후에 다시 사액서원이 되었다는 기록이나 ‘심원록(尋院錄)’에 적힌 방대한 방문자 이름만 살펴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심원록’에 의하면, 주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가 많이 방문했으며, 종종 기호학파에서도 방문했다.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모두 방문 기록이 많은 이유는 기축옥사(己丑獄事·1589년)로 인해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임진왜란 전에는 퇴계학파만의 서원이 아니라 영남 전체를 아우르는 서원이었다. 하지만 임고서원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완전히 화재에 소실되어 8년간 향사도 못 지내고 불타버린 옛터에 겨우 한 칸의 초가집을 마련하고서야 정몽주의 영정을 모시는 수모를 겪는다. 1600년 이원익에 의해 새로 짓게 되면서, 선조 36년(1603년)에 현재의 위치에서 다시 사액을 받는다. 이후 서원철폐령(고종 8년, 1871년)으로 문을 닫았다가 1965년에 이르러서야 정몽주 위패만 모시고 다시 서원을 복원하였다.정몽주와 충은 뗄 수 없는 단어다. 하지만 그는 조선을 위한 충신은 아니었고, 쓰러져 가던 고려의 중흥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가 조선에서도 ‘만고의 충신’이 되었던 이유는 태종의 추앙과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년)의 극찬이 있어서이다. 정몽주와 죽음의 대척점에 서 있던 태종의 이러한 행위는 성리학을 빠르게 정착시키기는 방편도 되었지만 ‘다른 길을 걷는 자에 대한 존경’이라는 옛 선비들의 기상을 드러낸 부분이기도 하다.포은은 효로서도 유명하다. 19세에 부친상으로 3년 움막 생활을 하고, 24세에 장원급제를 하나 29세에 모친상으로 3년간 시묘살이를 한다. 1389년 그의 효행을 기리며 유허비가 세워졌다. 조선 성종때 경상감사 손순효(孫舜孝·1427~1497년)는 꿈속에서 백발노인의 “내가 이곳에 묻혀있는데 꺼내주면 좋겠다”는 말을 듣고 인근을 수색한다. 그는 유실되었던 포은의 유허비를 찾아 다시 세웠다. 유허비는 복원된 정몽주 생가 인근에서 찾아볼 수 있다.현재의 임고서원은 교육기관이자 의례의 장소이자 지역 문화의 중심이었던 옛 역할을 일부 수행하며, 문화재 보존과 관광으로 인한 지역의 활성에도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소극적인 활동이 주를 이루며 지역 문화의 최전방에 있던 활발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영천만의 콘텐츠로 삼기에는 경기 지역에 포은과 관련된 행사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각 지역만의 콘텐츠여야만 할까. 포은은 유명인이라 모르는 사람이 없고 그와 관련된 역사적 장소는 전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각 지역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는 관광 상품과 체험형 콘텐츠를 개발한다면, 전국이 연계된 문화상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해가 좋은 봄날, 푸른 새싹이 돋아 싱그러운 임고서원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포은 정몽주의 숨결을 되짚어본다.◇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최정화 스토리텔러

2023-04-24

부유한 국가, 불행한 국민

변창구대구가톨릭대 교수·국제정치학 유엔이 최근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WHR) 2023’에 따르면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OECD 38개국 중 35위로서 최하위권이며, 조사대상 137개국 가운데 57위다. 세계 10위의 경제력, 1인당 GDP 3만3천 달러의 부유한 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불행이다.행복이란 “일상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심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은 ‘삶의 질적 만족도’에 대한 개인의 ‘주관적 평가’이다.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은 물질적 조건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가치관, 사회적 신뢰도, 정부의 청렴도, 사회적 관계 등 정신적 요인들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그렇다면 한국인들은 풍요 속에서 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 양극화와 빈부격차로 상대적 박탈감이 크고, 소득·교육·기회의 불평등에 따른 빈곤의 대물림이 심각하다.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경쟁문화는 동물의 세계와 같다. OECD국가들 가운데 최악의 자살률·우울증·노인빈곤율·사회적 고립도 등은 불행의 증표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 0.78%는 청년들의 삶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음을 반증한다.반면에 행복지수 6년 연속 1위인 핀란드 국민들의 삶은 다르다. 핀란드는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밸(work-life balance)’이 제도화된 나라다. 연간 30일의 유급휴가, 출산에 따른 유급육아휴직은 부모 각각 160일이 보장되고, 노인·장애인·신생아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안전망이 완벽하다. 물론 여기에는 엄청난 재정이 필요하고, 그들은 높은 세율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다.특히 핀란드인들의 행복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요인은 ‘신뢰’이다. 정부와 정치에 대한 높은 신뢰, 공동체에 대한 높은 상호신뢰가 행복한 삶을 만들어주었다. 정치인들의 청렴한 삶은 사회적 신뢰를 조성했고, 대화와 타협의 선진정치문화는 국민통합에 기여했다. 우리 정치인들의 행태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이제 한국이 가야할 길은 분명하다. 우리의 행복은 ‘정부와 개인’의 차원에서 ‘물질과 정신’이 동시에 개선되어야 제고될 수 있다. 정부차원에서는 국민신뢰 회복, 소득양극화 해소, 사회안전망 확충이 시급하다. 행복한 나라는 구성원들 간 행복격차가 작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원의 강화와 ‘워라밸’의 제도화 역시 중요하다. 나아가 행복을 위한 올바른 가치관교육, 즉 개인적·물질적 가치 못지않게 사회적·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전인교육’이 절실하다.개인차원에서는 ‘행복할 수 있는 인생관과 가치관’이 요구된다. 행복은 외적·물질적 조건보다는 내적·정신적 성숙에 더욱 좌우된다. 행복은 돈·권력·명예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소득이 일정수준을 지나면 더 이상 행복은 증가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돈·권력·명예와 관련하여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함으로써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바로 ‘내 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2023-04-24

주목받는 공유 숙박

홍석봉 대구지사장 에어비앤비(Airbnb)는 200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명의 집 주인이 세 명의 숙박객을 맞은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2022년 말 현재 전 세계 거의 모든 국가에서 이용하는 세계 최대의 공유 숙박 서비스가 됐다. 자신의 방이나 집, 별장 등 사람이 지낼 수 있는 모든 공간을 빌릴 수 있다.국내에서는 2013년 1월 정식 오픈했다. 한국지사를 설립하고 국내에 숙소 1만3천여 곳을 확보했다.지난해 말 기준, 에어비앤비는 220개국, 10만 개 도시에서 660만 개의 숙소를 갖추고 14억 차례의 체크인 횟수를 기록했다. 15년 만에 달성한 기록이다.최근 서울의 한 에어비앤비 숙박업소에서 중국인 커플이 예약을 취소해주지 않는다며 120t의 수돗물과 평소 5배가 넘는 가스를 사용하고 출국, 민폐 사례로 언론 조명을 받았다.대구시는 최근 민관합동 단속을 벌여 공유 숙박 플랫폼을 이용한 무신고 숙박업소 3곳을 고발했다. 지자체 마다 합동 단속이 한창이다. 현행법상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숙박업은 외국인 관광 도시민박업, 한옥 체험업과 농촌민박업에만 제한적으로 허용된다. 영업 신고를 않고 공유 숙박 플랫폼 등을 통해 빌라 등에서 숙박업을 하다간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에어비앤비는 외국에서 숙소에 몰래카메라가 설치됐다거나 성범죄 피해 등 이용객들의 주의보가 잇따르지만 이미 대세가 됐다.공유 경제를 기반으로 한 시장은 매년 커지고 있다. 학계 등에서 공유 숙박 플랫폼의 법제화가 논의됐지만 법 개정은 감감무소식이다. 공유 숙박과 기존 숙박 업체가 공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 우버에 이어 공유 숙박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4-24

인공지능과 조화를 기대하며

김규인 수필가 과학기술의 발달은 휴대전화를 손에 들리고, 인터넷세상은 그들이 올리는 정보의 바다로 만들었다. 기하급수적으로 쏟아지는 정보를 처리하고자 사람들은 더 빠르고 용량이 큰 시스템을 원했다. 이렇게 인공지능(AI)에 대한 요구는 커졌고 이제는 어디서나 ChatGPT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하다.ChatGPT는 일상에 관한 단순한 질문에서 전문적인 분야에 관한 질문까지 능숙하게 대답한 답변이 매스컴을 통해 소개된다. 기대 이상의 놀라운 대답에 감탄도 하지만 엉뚱하거나 틀린 대답이 나올 때도 실망하기보다 미래 발전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더 크다. 머지않아 우리 삶의 중심에 우뚝 자리 잡을 것 같다.그도 그럴 것이 책 한 권을 7시간 만에 쓰고, 그가 쓴 글이 문학대회에서 수상하고 인공지능 관련 주식은 실적 관계없이 연일 오름세를 지속한다. 선진국에서는 미래의 먹거리로 인정하여 이에 대한 투자를 늘리며 인공지능 관련 기업체에서는 계획을 세우고 조직을 확대 개편하며 돈을 투자한다. 세계는 지금 인공지능으로 인하여 일어날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찬다.우려의 목소리도 조심스럽게 일어난다. 애플은 어린이와 청소년의 무분별한 사용을 걱정하며 ChatGPT를 17세 이상만 쓰게 하자며 앱 등록을 거부했다. 또한, 전쟁에 이용되는 것을 우려하여 인공지능이 사람 목숨을 결정하는 허용 범위, 인공지능 무기체계에서 자율성의 범위, 그 결과 책임에 대한 고민도 이루어진다. 유럽의회에서는 인공지능 기술을 통제하기 위한 정상회담의 필요성도 제안한다.인공지능의 등장으로 값싼 노동력이 필요한 자본주의로 인해 자신의 밥줄을 걱정하는 일반시민들의 근심도 늘어난다. 나아가 기술 발달이 인공지능을 가진 살상 로봇의 개발을 부추기면 인류의 미래는 암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인공지능을 활용하는데 인간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는 대원칙이 개발에 앞서 필요하다.인공지능이 뛰어나다고 하여도 인간의 속마음은 알 수가 없으며 인터넷이 닿을 수 없는 정보는 답하지 못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ChatGPT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만능이 아니라는 말이다. 인공지능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답을 말하였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얻은 정보를 기반으로 정리하여 답할 뿐이다.그런데도 인공지능이 현대 산업 판도를 바꿀 게임 체인저로 등장할 가능성은 크다. IDC 등 평가 기관에서 인공지능 시장 전망을 밝게 본다. 매년 급속하게 성장하는 큰 시장은 우리를 유혹한다. 하지만 경제 외적인 면에서 아직 가보지 않은 미래이기에 기대와 불안한 마음이 함께하는 것 또한 숨길 수 없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어느 때보다 신뢰성, 공정성, 안전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존엄성마저 헤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어떤 일이라도 인공지능이 일의 결정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없다.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도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할 수는 없다. 생활에 폭넓게 쓰일수록 인간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 서로 보완하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조화로운 삶을 기대하는 이유이다.

2023-04-24

‘에어 조단’의 추억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6학년이 되자 농구화를 신고 등교하는 친구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스포츠는 단연 농구였다. ‘슬램덩크’와 ‘마지막 승부’, 그리고 기아자동차, 연세대, 고려대 등이 활약하던 농구대잔치의 영향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NBA(북미 프로농구 리그)의 인기 때문이었다.학교 앞 문방구에 가면 NBA 스티커와 수집책을 팔았다. 밀봉된 팩에 NBA 선수 스티커가 무작위로 들어 있고, 그것을 수집책에 붙여서 모을 수 있었다. 그 조잡한 인쇄 품질로 미루어 볼 때 정식 발매된 것이 아니라 이문에 밝은 누군가가 해적판으로 만들어 유통시켰던 것 같다. 수집책에는 선수 이름과 빈 칸이 있어서 모든 스티커를 모으면 이동식 농구대를 받을 수 있었다. 농구대를 놓을 만큼 넓은 마당을 가진 아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우리는 그 스티커 모으기에 열광했다. 샤킬 오닐, 찰스 바클리, 하킴 올라주원처럼 유명한 선수들의 스티커는 희귀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것은 마이클 조던이었다. 마이클 조던 단 한 명을 채우지 못해 매일같이 문방구를 들락거리며 용돈을 탕진하는 아이가 한둘이 아니었고, 나 또한 그중 하나였다.중학생이 된 기념으로 외할머니가 ‘에어 조단’ 농구화를 사 주셨다. 그때는 ‘조던’이 아니라 ‘조단’이라고 불렀다.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아티스’ 운동화를 졸업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나이키 농구화는 유년기에서 청소년기로 넘어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 그렇게 재미있던 미니카와 팽이치기가 점차 시들해지고, 빈 농구대를 찾아 이 학교에서 저 학교로, 이 공원에서 저 공원으로 방황하는 날이 늘어났다. 물론 ‘에어 조단’이 마이클 조던의 농구 실력까지 부여해주는 것은 아니라서 내 슛은 림을 빗나가기 일쑤였다.최근 개봉한 영화 ‘에어’는 나이키의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 농구화인 ‘에어 조던’ 시리즈의 탄생과정을 다룬다. 1984년, 업계 최하위였던 나이키는 브랜드를 대표할 새 모델을 찾는 과정에서 NBA 루키였던 마이클 조던을 주목한다. 예산 부족으로 경쟁 업체들에 밀리는 상황이었지만, 나이키의 스카우터는 조던에게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단 한 명의 선수를 위한 농구화 라인업을 제안해 계약을 성사시킨다.이 영화를 즐기는 방법은 다양하다. 1980년대 미국발 대중문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당대의 다채로운 풍경들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것이다. 하나의 상품에 불과한 농구화에 스토리를 부여하여 레거시(legacy·유산)로 만들어 내는 미국 문화의 힘이 경이롭기도 하다. 스카우터 소니 바카로(맷 데이먼 분)를 중심으로 한 ‘에어 조던’ 팀의 활약상도 흥미롭다. 영화가 재현하는 나이키의 개방적인 기업 문화는 모든 직장인들의 꿈일 것이다.무엇보다도 나에게 있어 이 영화는 ‘에어 조단’을 신고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기억을 소환하게 해 주었다. 우리는 나이키 농구화처럼 현대적인 것들이 신화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독자 여러분의 ‘현대의 신화’는 어떤 것들인지 이야기를 듣고 싶다.

2023-04-24

‘환동해 중심의 가까운 섬’으로 도약하는 울릉도

남한권 울릉군수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거나’ 유치환 시인의 시 울릉도의 첫 시행이다. 귀중한 국토의 일부로서 울릉도가 지니고 있는 상징성을 잘 드러내주는 명시이다. 하지만 지금 울릉도는 ‘환동해 중심의 가까운 섬’으로 도약하기 위해 발 빠른 행보를 하고 있다.첫 행보는 울릉도 독도 지원 특별법이다. 울릉도 독도는 지정학적 특수한 위상과 더불어 환동해 중심이자 지역 자원의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정책적이고 실질적 지원이 미흡한 상황이다. 일본의 영토 분쟁과 더불어 최근 북한의 무력 도발과 지역민들의 정주여건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경북 시장군수협의회는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결의문까지 채택하고 오늘 9월 입법을 목표로 종횡무진 활약 중에 있어 울진군민들의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올해 초 눈 축제를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발전가능성과 겨울 관광거리가 전무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젠 사시사철 관광상품을 발굴하고 기존의 관광상품을 더 발전시켜 나아갈 계기가 마련됐다. 또 제4의 섬의 날 행사는 울릉군에서 열리는 첫 번째 국가 기념행사로 8월 8일부터 15일까지 8일간 진행될 예정이다. 이 행사를 통해 섬 주민들 간 화합의 장을 마련하고, 울릉도 독도의 가치와 중요성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릴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또한 지역특산물을 단순히 운송 판매에 그치지 않고 연구 개발해서 고부가 가치의 제품을 개발해서 상품화를 시도하고, 기술을 민간에 이전, 울릉군의 농업경쟁력 강화와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기반을 조성하고 있다.지역의 성장 동력이 주민들에게서 나온다고 할 때, 현재 울릉은 인구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위기상황이다. 특히 전반적인 정주여건의 열악함이 인구유출과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점이다.정주여건은 관광객들에게는 편의성으로 체감되며, 주민들과 이전을 고민하는 잠재적인 주민들에게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중요조건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인구 증가를 위해서는 정주여건 전반을 향상시켜나가야 한다.우선 의료 분야를 살펴보면, 울릉도 내부의 의료 역량을 높이는 것과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는 상태의 응급 환자 이송 체계를 더욱 상시적이고 신속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 과제이다.이에 지난 1월 보건복지부와 해군본부를 차례로 방문해 도서벽지인 지역사정을 고려해 의사가 없는 진료과목에 공보의를 배정해 줄 것과 울릉도에 주둔하는 해군 118전대에 의무실 설치를 건의했다. 그 일환으로 임시방편이나마 해군1함대 의무대가 울릉군민 대민진료를 발판으로 지속적인 대민진료의 계기가 됐다.하지만 관광수요가 증가하면서 울릉군의 관광객 환자수가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여서 1차 의료 인력의 확보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에 대비해 의료 인력 보충 및 의료원내의 요양시설을 입원시설로 변경해 관광객 및 주민의 간단한 봉합수술이나 입원 시 불편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이뿐만 아니라 대학병원과의 의료 협약 추진을 통해 울릉 내부의 의료 역량을 높여가기 위해 노력중이다. 교육은 울릉군내에서 초·중·고교육은 물론, 대학교육까지 높은 수준까지 받도록 하는 것이 장기적인 목표이다.울릉도 독도 특별법이 제정이 된다면 울릉고등학교에서 서울시내 유수의 대학들에 정원 외 입학이 가능해지고 교육으로 인한 인구 유출 방지는 물론이고 인구 유입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도서지역으로서 물류 문제 해결도 과제이다. 내륙과의 물류 활성화를 위해서는 비용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 본질적 원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울릉군 차원에서 주민생필품 해상운송비 보조와 농수산물 택배비 무상지원 차량 운송비 지원을 통해 울릉의 물류가 매일 유통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현실적으로 최선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농수산물의 신선도를 위해서 적기에 안정적인 수송이 이뤄지도록 1일 택배사업을 시행 중이다. 주민소득 증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하고 있다.마지막으로 울릉(사동)항과 연계해 바다를 메워 건설 중인 울릉공항건설이 순항 중이며 경북도의 2030년 외국인 관광객 300만 명이 찾도록 한다는 목표에 발맞춰 체류형, 스마트 관광 인프라 강화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 나갈 계획이다.

2023-04-23

다무포를 아시나요

야무진 꿈을 꾸었다. 이십 대였나, 삼십 대였나, 동해안 국도를 걸어서 종단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꿈은 액자 속에 흐릿하게 갇히고 현실은 형광의 도시를 누비느라 바빴다. 어쩌다 한 번씩 답답한 액자를 벗어나 빨주노초파남보 하늘을 그리고 싶다. 이런 날은 무작정 집을 나선다. 서너 시간 혼자 어슬렁거릴 곳을 찾는다.고래가 머무는 곳, 구룡포에서 호미곶으로 이어진 해파랑길 14코스인 다무포 고래마을이다. 골목이 뿜어내는 소리는 낮고 가늘다. 그 소리를 담은 집들은 모두 오수에 빠진 듯하다. 4월의 봄바람도, 방파제에 한 번씩 부딪히는 파도도, 갯바위에 앉아 꾸욱, 꾹 대는 갈매기도 풍경을 이루는 화소이다.하얀 등대가 보이는 의자에 앉는다. 등대는 바닷길에 불 밝히느라 꼿꼿한 채 서 있다. 굵은 비, 가는 비 내려도, 태풍으로 속의 것들을 다 긁어 토해낼 때도 흔들림이 없다. 따뜻해진 봄 바다 그 위로 갈매기 서넛 난다. 그래, 지금쯤 수평선 너머 고래가 떼를 지어 오고 있겠다. 4월과 5월쯤 고래 산란기에는 이곳 먼바다에 고래가 나타난다. 그 종류가 20여 종이 넘는다. 바다 향해 귀를 쭈욱 열자 멀리서 고래 소리가 다양하게 들리는 듯하다.다무포의 맑고 적당한 수온은 고래가 새끼를 낳고 회귀하기 좋은 조건이다. 해마다 이때쯤 수십 마리씩 고래는 다무포 앞바다를 찾는다. 한때 고래잡이로 마을 주민들은 넉넉한 생활을 누렸다. 그런데 1986년 국제협약에 의해 상업적인 포경이 금지되었다. 그 이후 마을 길목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사라지고 활기로 가득했던 집안도 더는 들썩이지 않았다. 이십 년의 시간이 흐른 후, 다행히 2008년 고래생태 마을로 지정되었다. 수평선 저 멀리 고래 떼가 다시 오기를 기다린다.관심이 생겼다는 것은 벌써 행동의 프로그램이 진행되었음이다. 다무포 마을의 쇠락이 멈추고 그곳에서 작은 꿈틀거림이 음쑥음쑥 자란다. 2019년 ‘포항시 도시재생 마을공동체 역량강화 사업’에 선정되어 마을은 다시 활기를 찾았다. 따가운 여름 햇볕과 함께 골목이 들썩거렸다. 마을 담벼락 곳곳에 하얀색 페인트를 입히고, 그 위에 미역 그림이 한들거린다. 미역 줄기 사이로 물고기가 춤을 추고, 거북이 한가로이 노닌다. 담벼락마다 다른 그림과 조형물은 이 곳을 찾는 이에게 다채로운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한다. 이순혜 수필가 바다에서 담벼락으로 옮겨 온 고래가 타일 속에서도 헤엄친다. 여럿이 그린 고래는 그들만의 고래로 골목을 가득 채운다. 가만 들여다보니 유치원생에서 고등학생 그리고 학부모도 참여했다. 하나씩 짚어가며 고래를 불러들인다. 그의 이름들을 부르자 어느 유치원, 어느 초등학교 몇 학년이라 쓴 명찰을 앞세우고 지느러미를 파닥거린다. 이들은 커다란 한 마리 고래가 되어 담벼락을 꽉 채운다. 포항시에 따르면 4월에서 5월 해안선을 따라 헤엄치는 고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은 동해에서 고래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오늘은 먼바다의 고래가 다무포 마을 골목에서도 만난다.나란히 어깨를 맞춘 파란 지붕 따라 골목을 걷는다. 아까부터 따라온 담벼락의 고래도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멈춘다. 누구는 이곳의 로맨틱한 풍광이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닮았다고 한다. 산토리니에는 고래가 없는데, 고래가 머무는 이곳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산토리니에 가면 다무포 마을에 가봤니? 라고 물어볼 것이다.한 번쯤 마음을 빼앗길 만한 곳을 찾는다면 이곳에 오시라. 고래가 머무는 파란 지붕과 하얀 담벼락이 있는 다무포에. 마음 한 켠에 잔잔하게 흐르는 여유를 갖고 싶다면. 따스한 봄날의 여기 풍경은 가장 빛나고 반들반들한 마음 한 곳에 저장할 만하다. 곳곳에 쉬어가기에 괜찮은 상상의 의자가 당신을 기다린다. 저 수평선 윤슬이 반짝이는 곳에 고래 한 마리가 튀어 오른다. 나는 고래 등을 타고 동해를 유람하는 꿈을 상상하겠다.

2023-0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