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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편 잃은 여인의 외로움과 고통 그려

알베르 카뮈를 창작의 세계로 이끈 `고통`(문학동네)은 프랑스 작가 앙드레 드 리쇼의 첫 장편소설이다. 1931년 발표된 이 작품은 출간 직후 프랑수아 모리아크, 조르주 베르나노스, 쥘리앵 그린 등이 참여한 `프리 뒤 프르미에 로망`(첫 소설에 수여하는 문학상) 심사위원단의 관심을 끌었으나 여성의 성적 욕망의 표현, 독일군 포로와의 육체관계 등 당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파격적인 주제를 다뤘다는 이유로 수상의 영예를 안지 못했다. 그러자 이 젊은 소설가의 탁월한 자질을 인정한 작가 조제프 델테이가 드 리쇼를 열렬히 옹호하며 논쟁을 촉발시켰고, 이로 인해 `고통`은 큰 인기를 끌었다. 앙드레 드 리쇼는 인간 존재가 자신들의 환상과 맞서는 끔찍한 상황을 섬세하게 그리고 서정적이면서도 시적으로 그려내는 데 탁월한 작가였다. 특히 인간 행위를 분석하고 등장인물의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묘사는 이 작품 `고통`에서 단연 잘 드러난다.테레즈 들롱브르는 1차 세계대전 초, 남편 들롱브르 대위가 전쟁에 동원되자 어린 아들 조르제와 함께 전쟁의 포화를 피해 프랑스 남부의 어느 조용한 마을에서 지내던 중 남편의 사망통지서를 받는다.대위가 사망한 후 테레즈는 얼마 안 있어 정신적 외로움과 더불어 육체적 고통에 시달린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테레즈는 그럴수록 아들 조르제에게 병적일 정도로 애착을 보이고, 아들이 어머니 품을 떠나는 상상만으로도 불안을 느끼면서 자신 이외의 다른 세상과 아들을 차단시키려 든다.그러던 어느 날, 테레즈가 자신의 불타오르는 욕망을 실현시킬 기회를 맞게 됐다. 포로로 잡혀와 마을에서 노동을 하던 독일군 오토와 만나게 된 것이다. 타인의 육체를 갈망하던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마다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눴다. 이 모든 일을 감지하는 아들 조르제는 어머니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사실, 어머니가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사실, 심지어 그 상대가 독일군이라는 사실에 분노하며 고통스러워한다.그러나 테레즈는 육체적 욕구에 눈이 멀어 아들의 괴로움을 보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의 시선마저 알아채지 못한 채 테레즈는 사랑에 매달리지만, 그저 육욕을 채우고 싶을 뿐이었던 오토의 마음은 점점 식어갔고 결국 테레즈에게 이별을 통보하며 슬그머니 사라져버린다. 연인에게서 버림받은 여인, 어머니에게서 버림받은 아들이 느끼는 분노와 고독은 끝내 두 모자의 삶을 비극으로 이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6-15

쫓기는 삶 탈출 방법은? `뺄셈 미학' 이야기 담아

2011년 3월1일.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 이후 전 세계는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이는 단순히 `탈원전'이나 대체에너지 사용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3·11 이후 많은 사람들이 `경제 성장'을 삶의 목표로 삼아 끊임없이 무언가 `할 일'을 만들어내는 시대, `더 빨리, 더 많이, 더 효율적으로'를 미덕으로 여기는 시대 자체를 조금씩 돌아보기 시작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경제적 풍요'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과 자손들이 그들의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해 먹고 마실 공기와 깨끗한 물, 그리고 안전한 음식임을, 그리고 이 지구가 서로 나누고 도우며 살아가는 사회임을 깨닫는 이도 하나둘 늘어가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지금과 같이 쫓기듯 사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무엇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슬로라이프' `행복의 경제학' 등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삶을 누리며 느리게 살아가자는 운동 `슬로라이프'의 제창자 쓰지 신이치는 `슬로라이프를 위한 슬로플랜'(문학동네)에서 `돈과 경제 성장'에만 초점을 맞춘 사람들의 `할 일' 리스트가 우리가 현재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한다. 가족 문제를 비롯해 소외감으로 인한 자살률 증가, 교통사고, 전쟁, 빈부격차,기업과 미디어의 횡포 등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분쟁이 모두 `시간의 문제'와 맞닿아 있으며 인간의 욕망에만 근거한 모든 `할 일'에는 결국 미래가 없다고 본다. 이 때문에 그는 우리가 시간과 화해하지 않고서는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주장하며 `할 일 리스트'로 가득 찬 바쁜 삶을 `하지 않을 일 리스트'로 치환하는 방법을, `해야 할 일'이라는 집단적 강박에 시달리는 삶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하나씩 제시한다.쓰지 신이치사진가 제시하는 `하지 않을 일 리스트'는 쓸데없는 일을 잘라내 일의 효율성을 높여 보다 많이, 보다 빨리 수행한다는 소위 `시간 관리술'이 아니다. 쓰지 신이치의 `하지 않을 일 리스트'를 만드는 것은 `할 일'만을 우선시하는 사회 속에서 `하지 않을 일'을 채워감으로써 효율과 경쟁에 치이는 삶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느끼게 되어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절대로 ~하지 않겠다”라는 식의 단정적인 표현을 쓰지 않기, 나무젓가락 쓰지 않기, 버스나 전철에 급히 올라타지 않기, 잠자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기, 내일 할 수 있는 일은 오늘 하지 않기, 자동판매기 이용하지 않기, 식사시간에 일을 들고 오지 않기, 화장실에서의 시간을 소중히 하기…. 쓰지 신이치는 이처럼 우리가 조금만 신경 쓴다면 어렵지 않게 실천할 수 있는 `하지 않을 일'을 제시한다. 그는 이런 작은 시작이야말로 할 일이 너무 많은 세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주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게 해준다고 말한다. “안녕하세요”가 점점 “바쁘신데 죄송합니다만….”으로 변해가는 현대 사회. 밥 먹듯이 야근을 하고, 몸이 별로 좋지 않은데도 출근을 하며, 유급휴가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그저 아등바등하며 어지간해서는 줄지 않는 `할 일' 리스트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신문에서도, 각종 미디어에서도 바쁘게 활동하는 사람이나 수면시간을 줄여 일의 효율을 높이는 사람을 치켜세우고, 광고를 통해 자양강장제 등을 앞다투어 판매한다. 이렇게 `할 일 리스트'에 등 떠밀리듯 살아가는 이들에게 쓰지 신이치는 `잘못된 부분'을 줄임으로써 삶의 행복을 채우는 `뺄셈의 미학'을 이야기한다.“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잘못된 부분을 줄여나가야 한다.”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에는 `좋은 것'을 늘리는 덧셈의 접근방법과 `잘못된 부분'을 줄이는 뺄셈의 접근방법이 있다.환경 문제를 예로 들자면, 이런 사업을 벌이고 저런 일을 해서 해결하자는 의견은 수도 없이 많지만, 무언가를 그만두자는 식의 주장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한다. 오히려 이를 `소극적인 발상'이라고 비난하기 일쑤다. 하지만 실제로는, `할 일'의 과잉이 만들어낸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이런저런 `할 일'을 만들어 결국 문제를 더 크게 만드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6-08

자연은 자원이 아닌 위대한 `스승'

이인식씨사진의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김영사)는 자연에게서 인류가 직면한 문제의 해답을 찾고 자연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생물영감과 생물모방과 같은 기술을 인간중심 기술에 상반되는 개념으로 `자연중심 기술'이라 이름 붙이고, 기존 과학의 틀을 벗어나 인류에게 지속 가능한 발전을 보장해줄 `자연중심 기술'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우리 주변의 생물은 대부분 수천만 또는 수억 년 동안 진화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생존을 위협하는 갖가지 도전에 슬기롭게 대처했기 때문에 살아남은 존재들이다. 이러한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본뜬다면 경제적 효율성이 뛰어남과 동시에 환경친화적인 물질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자연중심 기술의 근본 원리다.`상어 피부 수영복' 0.01초 기적 창출..우리 사회 나아갈 방향 제시대표적인 예로 흰개미 집의 신비로운 환기시스템은 냉난방 없이 건물 안의 공기를 끊임없이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한 핵심 원리를 제공했다. 공기 중의 수분을 포집해 생존에 필요한 물을 공급받는 나미브사막풍뎅이 날개 표면의 원리는 인류가 당면한 물 부족 문제의 해법을 보여주었다. 얼룩말의 줄무늬는 기계적 통풍장치 없이 표면온도를 낮추는 원리의 힌트를 주었고, 연잎 표면의 과학은 자체적 정화 기능을 갖춘 신소재 개발의 핵심 아이디어가 됐다. 또한 가느다란 거미줄이 강철보다 튼튼한 방탄물의 소재가 되는가 하면, 바닷물의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는 상어 피부 구조를 활용한 전신 수영복은 수영 선수들에게 0.01초의 기적을 이루어주기도 한다. 이와 같이 자연은 인류에게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에 기여할 수는 무한한 아이디어와 해법을 얻을 수 있다.자연의 지혜를 배우고 자연을 모방하려는 인류의 노력이 현대에 시작된 것은 아니다. 전화기는 사람의 귀를 모방했으며, 20세기 최고의 건축물로 손꼽히는 수정궁은 수련의 잎에서 영감을 얻어 설계됐고, 벨크로는 도꼬마리 씨앗에 달린 갈고리 모양의 가시를 흉내 낸 것이다. 이처럼 이 책은 생명공학에서 나노기술, 로봇공학, 집단지능까지,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자연의 메커니즘을 모방한 자연중심 기술의 역사와 현주소는 물론 인류가 직면한 수많은 위기를 해결할 경이롭고 신비한 자연의 비밀을 한눈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지금까지의 인류의 경제 성장을 이끌어온 것은 모두 인간을 위해 자연을 희생시켜 자원으로 이용하는 인간중심의 기술이었다. 이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문제가 심각해지자 덜 쓰고 덜 생산하면서 쓰레기를 줄이는 것과 동시에 기업에게 환경 파괴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게 하는 녹색경제가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그러나 녹색경제는 환경보호를 위해 소비자와 기업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 이런 이유로 녹색경제를 인구에 회자되는 것만큼 큰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경제 성장과 상충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이렇듯 한계가 분명한 녹색경제의 틀을 뛰어넘어 환경과 경제 성장이라는 상반되게 보이는 두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해법이 바로 `자연중심 기술'에 있다. 그리고 자연중심 기술을 원동력으로 녹색경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상생과 공존의 미래를 열어나갈 새로운 경제의 패러다임, 환경문제와 경제 성장이 조화되는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청색경제가 세계적인 흐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 근간이 되는 자연중심 기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이 책은 우리사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6-08

행복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진짜이유는 뭘까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상황에 맞닥뜨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성취도 하고, 인간관계도 넓어지며, 가정도 원만하게 굴러간다. 그런데 이렇듯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마음 한쪽이 허전하고, 삶이 정체된 것만 같고, 또 뭔가 부족한 것만 같을 때가 있다. 심지어 “나는 행복하지 않아”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마치 내 행복을 무언가가 자꾸 휘저어놓는 것만 같다. 왜일까? 자꾸만 뭔가를 갈망하는 이유는 뭘까? 욕심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지금의 삶이 나에게 맞지 않아서일까?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일할 때는 완벽하게 해내려고 노력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진심으로 배려하고 친절하게 대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누구든 나처럼만 살면 세상은 참 평화로울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자기 자신은 진실되지도, 남에게 그리 친절하지도 않다. 이는 `방어기제'에 의해 본심(진짜 마음)이 가려진 반쪽짜리 마음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행복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진짜 이유다.방어기제는 자아가 위협받거나 상처받을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속이거나 상황을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는 심리적 행위다. 방어기제가 있어서 우리는 느끼기 싫어하는 감정을 외면할 수 있고, 불편한 감정이나 생각을 느끼지 않으며 살 수 있다.그러나 방어기제가 우리에게 도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방어기제가 문제 상황을 모면하는 데는 도움을 주지만, 과도하게 반복적으로 사용할 경우 자신의 진짜 감정과 생각을 외면하는 것을 넘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자꾸 피하게 된다. 그 결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일에서, 사랑에서 번번이 어려움을 겪고 성취감·만족감·마음의 평화를 충분히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한 마디로, 방어기제는 마음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온전한 삶을 제한하고 행복을 가로막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6-08

사라짐에 관한 깊은 사색 담은 에세이

수포스트모더니즘의 대가 장 보드리야르의 유작 `사라짐에 대하여'(민음사)가 출간됐다.이 책은 2007년 향년 77세의 나이로 타계한 장 보드리야르가 남긴 마지막 텍스트들 가운데 하나로, 사라짐에 관한 깊은 사색을 담고 있는 짧은 에세이다. 그는 근대와 함께 시작된 인간의 잠재적 사라짐에서부터 기술과 미디어의 발달로 초래된 이미지의 범람으로 인한 모든 실재의 사라짐에 이르기까지, 사라짐에 관한 다양하고 복잡한 사유의 변주를 이 짧은 텍스트 안에서 엮어 나간다. 이미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 개념을 통해 현대 사회의 본질을 꿰뚫은 바 있는 그는 객관적 지식 습득과 기술 지배를 향해 나아가는 현대에 실제 세상과 인간은 사라졌으며 현대의 문화는 유령으로 가득 찼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사라졌지만 그가 던진 메시지는 공룡 같은 매스 미디어에 실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거대한 권력에 지배되는 이 세계를 이성적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볼 것을 여전히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다.“따라서 인간이 사라져 버린 세상에 대해 말하자. 사라짐의 문제이지 고갈, 소멸, 또는 몰살의 문제가 아니다. 자원의 고갈, 종의 멸종은 물리적 과정이거나 자연적 현상일 따름이다. 바로 거기에 차이가 있다. 인류는 분명 자연 법칙과는 아무 상관없는 특수한 사라짐의 방식을 발명한 유일 종이다. 어쩌면 사라짐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본문 중에서이 책은 장 보드리야르가 2007년 죽기 직전에 남긴 텍스트 가운데 하나인 `POURQUOI TOUT N`A-T-IL PAS DEJA DISPARU?(WHY HASN'T EVERYTHING ALREADY DISAPPEARED?)', `왜 모든 것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는가?'를 옮긴 것이다.프랑스를 대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이론가, 현대성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자, 하이테크 사회 이론가 등으로 불리는 장 보드리야르는 철학과 문학, 사회 이론, 사진, 영화, 공상과학 등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글을 통해 현대 사회를 분석하고 그 본질을 꿰뚫는 통찰을 보여 왔다. 그는 원본과 복사본, 현실과 가상 현실의 경계와 구분이 없어지고 이미지와 미디어가 지배하는 현대 소비 사회를 시뮬라시옹과 시뮬라크르 개념으로 논파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6-01

사소한 것들을 향한 따뜻한 울림 사회를 향한 시인의 목소리 담아

▲ 안도현 시인올해로 등단 28년을 맞은 시인 안도현(52)의 열번째 시집 `북항'(문학동네)이 출간됐다. 전작 `간절하게 참 철없이' 이후 4년 만에 만나는 시집이라 반가움이 크다. 총 63편의 시를 엮은 이번 시집은 안도현 시인의 시세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줄 뿐 아니라, 작금의 사회를 향한 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안도현 시인의 시집을 기다린 많은 독자들의 기대에 값한다. 따로 부를 나누지는 않았다. 다만 “어선과 여객선을 골고루 슬어놓은 북항”(`북항')처럼 시집은 63편의 시를 그 자리에 가만 띄워둔다. 시집을 여는 `시인의 말' 에서 “~ 잘 되지 않았다” “~ 여의치 않았다” “~ 형편없다”는 말로 자신을 낮추었지만 그 겸손함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일궈낸 것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시가 들어가는 자리에 제사처럼 씌인 글은 `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의 1연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적게 먹고 적게 싸는 딱정벌레의 사생활에 대하여/불꽃 향기 나는 오래된 무덤의 입구인 별들에 대하여/푸르게 얼어 있는 강물의 짱짱한 하초(下焦)에 대하여/가창오리들이 떨어뜨린 그림자에 잠시 숨어들었던 기억에 대하여”는 이번 시집의 정서를 그대로 아우르고 있다. 사소한 것들을 향한 따뜻한 울림은 안도현 시인의 시가 가진 큰 힘이다.서시인 `일기'는 시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여 이 시집에서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것들, 독자가 귀 기울여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소소한 일상을 나열하고 마지막에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라고 끝맺는 이 시는 안도현 시인의 시적 태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시는 문인들이 뽑은 2011년 최고의 시에 선정되기도 했다. “안도현의 시에는 은일자적 태도 속에서 삶의 적막을 제 집으로 삼고 다스리는 태도가 긍정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 삶의 태도는 곧 시적 태도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심사평에서도 드러나듯이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는, 어찌 보면 보잘것없는 생활을 하는 시인은, 제자리를 지키며 세상과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의 중요함을 알고 있다. 그의 시가 주는 울림의 진폭은 바로 그 경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소소한 일상과 “무엇이 더 중요하단 말인가”의 앞에 붙은 “그렇다고 해도”가 뭔가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의 속뜻은 앞에 비워진 한 행.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황현산의 말을 빌리면 “짧거나 긴 성찰의 시간”이다. 그 비워진 한 행에 담긴 의미를 찾아나서는 것은 이 시집을 읽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다.“나는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네”그렇다면 시인은 무엇을 성찰하는 것일까. 하찮을 수도 있는 일들이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는 시인은, 그러나 “어두워서 노래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어두운 것들은 반성도 없이 어두운 것이어서” 시인은 노래하지 않고, 한 줄의 침묵 속에서 혼자 성찰했을 것이다. 그 성찰의 간절함 때문에 “혀 자르고 입술 봉하고 멀리 돌아”(`그 집 뒤뜰의 사과나무')와 지금 여기, “북항”에 이른 것은 아닐는지.이 어둠을 밝힐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간직했던 내면의 `붉은 눈'일 것이다. “부엌”과 “아궁이”처럼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번지는 시인의 상상력은 말을 타고 달리는 불꽃과 말이 우는 소리로 익어가는 밥을 떠오르게 했고, “어두워지는 부엌의 이글거리는 눈”을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자신의 붉은 눈을 태우지 않”는 시절. “세상이 슬퍼도 분노하지 않”는 시인의 성찰은 여기에서 시작된다.“한 마리 짐승이 되어 크렁크렁 울자”지극히 평온한 외관 아래 그 공격성을 숨기지 않고 있는 이번 시집은 한 편 한 편의 시가 저마다 시론으로 읽히기도 하거니와, 더욱 깊어진,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너머의 시인 “안도현”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같다.“안도현의 새 시집에서 은유는 적중하기에 실패한 표적으로 자주 제시되나 시는 실패하지 않는다. 그들 실패담이 세련된 문체와 적절하고 울림 많은 리듬으로 쾌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현실의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을 하나씩, 미소한 가능성을 하나씩 확인해나가는 길의 이정표이기 때문이다. 시는 영원한 빛과 날마다 만나는 어둠으로 이루어진다”황현산(문학평론가)/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6-01

“욕망이란 화두로 사회·개인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문제 모색”

`헌법의 풍경' `불편해도 괜찮아'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종횡무진 파헤쳐온 김두식(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신작 `욕망해도 괜찮아'(창비)가 출간됐다. 제목에서 엿볼 수 있듯이 이번 책의 주제는 바로 `욕망'. 그가 기존에 펴냈던 사회과학서나 인문서가 아닌 에세이로 그동안 법, 인권 같은 어려운 주제도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내온 저자가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고 나온 것이다. 이 책은 `욕망'이라는 화두를 통해 우리 사회와 개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모색한다. 흔히 `욕망' 하면 억누르고 감춰야 할 것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저자는 욕망을 억제의 대상이 아니라 건강하게 표출하고 이해해야 할 삶의 친구로 본다. 이에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 분출되지 못한 욕망의 부작용과 일탈자에 대한 마녀사냥 식 대응, 남녀노소가 모두 욕망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 삶의 진정성 등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소재와 사회현상, 그리고 본인 스스로의 고백적인 이야기로 풀어냈다.“40대 중반에 이른 저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람입니다. 제가 매일 겪고 있는 생각의 변화는 20대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 그런 저이기에 이번 글을 통해 멘토가 아니라 여전히 자라는 과정에 있는 40대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우리 안에서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채 불타고 있는 소년 소녀의 열정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그 열정과 욕망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싶습니다. ”-`프롤로그'에서저자는 책에서 “고백이 없는 사회는 억압이 활개치기 좋은 토양”이 된다고 말한다. 숨막히는 규범에 억눌려 제때 건강하게 분출되지 못한 욕망은 대개 적절치 못한 타이밍에 비뚤어진 방식으로 터져나오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못 분출된 욕망들은 비정상적인 사회갈등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저자는 또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욕망의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면 중년이 돼 불륜을 저지르는 일탈자가 되거나 욕망을 숨긴 채 희생양을 찾아 헤매는 사냥꾼이 되기 십상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저자는 먼저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욕망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욕망의 인정'과 함께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욕망과의 공존 또는 화해'다. 어려서부터 규범을 강요받으며 자라온 우리는 대개 욕망이란 잘 숨기고 억눌러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실제로 규범을 잘 지키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는 사회구조다. 원래는 10~20대 때 건강하게 욕망을 분출한 후에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는 욕망을 잘 억제한 사람이 `훌륭한 어른'이 되고 사회지도층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욕망은 점점 더 마음속 깊숙이 숨어들어간다.그리고 욕망과 공존 또는 화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고백'이다. 사실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든 고백에는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백이 없는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감시하고 비난하는 사냥만이 존재할 뿐이다. 자신의 욕망을 고백하고, 다른 사람의 고백에 귀를 기울이는 문화는 우리 사회의 희생양 메커니즘을 깨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때문에 저자 역시 이 글을 통해 욕망의 건강한 고백을 시도하는 것이다.이 책은 저자 개인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지만, 한편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사회현상을 분석하는 글이기도 하다. `유명해지고 싶다'는 저자 개인의 오랜 욕망을 인정하는 1장에서부터 스캔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희생양 메커니즘과 중년 남성의 욕망을 살펴보는 2, 3장, 청춘들에게 욕망의 정글에서 살아남는 정신승리 비법을 전수하는 4장, 가족 이야기를 통해 중산층의 은밀한 욕망과 과도한 규범을 관찰하는 5, 6장, 몸과 살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살펴보는 7장,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믿어온 규범이 실상은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8장, 그리고 책의 전체 내용을 마무리하는 9장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들려주는 욕망과 규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는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흥미로운 분석틀이 돼 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6-01

우울한 도시의 천사를 그린 솔직한 말투가 감동으로…

지난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시단에 나와 1995년 첫 시집 `불온한 검은 피'로 쓸쓸하면서도 아름답고 세련된 언어를 구사한다는 호평을 받았던 시인 허연(47·사진). 그는 13년 후 두번째 시집 `나쁜 소년이 서 있다'를 통해 도시 화이트칼라의 자조와 우울을 내비치며 독한 자기규정과 세계 포착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최근 문학과지성 시인선`내가 원하는 천사'로 다시 돌아온 허연은 삶의 허망하고 무기력한 면면을 담담히 응시하며, 완벽한 부정성의 세계를 증언함으로써 온전한 긍정의 가능성을 찾아 나간다. 우울한 도시의 아름답지 않은 천사를 그려내는 그의 거침없고 솔직한 말투가 읽는 이의 마음속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 마을에 바람이 심하다는 건, 또 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다. 밀밭의 밀대들이 물결처럼 일렁거렸다는 뜻이기도 하고, 언덕 위 백 년 넘은 나무 하나가 흔들리는 밀밭을 쳐다봤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아이 하나가 태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김없는 일이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바람의 배경'부분일상의 상처를 이야기하면서도비탄에 빠지지 않는 건조함 유지허연의 시는 일상으로부터의 상처를 이야기하면서도 비탄에 빠지지 않는 건조함을 유지한다. 마치 폐허를 스치는 바람처럼, 수백만 년에 걸쳐 별일 아닌 듯 있어왔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생의 `지독한 슬픔'. 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밀어내버리고 세계와 동화되지 못한 개인은 더욱더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고립되는 세계. 이 난무하는 폭력을 관통하는 바람은 풍문처럼 허연의 시를 부유하며 세계의 왜곡을 증언하고 고발한다.“사라져가는 것들을 기억하는 주문겁내지 말라고내가 다 기록해놨다고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고남자는 외치지만여자는 죽어간다신전은 세워지고 있지만 여자는 여전히 죽어간다죽어가는 여자보다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남자가진화상으론 하수다”-`신전에 날이 저문다' 부분시인이 일상의 관찰과 그로 인한 속내를 진솔하게 펼쳐 보이는 이유는 어떤 삶을 반추하거나 기획하기보다는 잊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일이 하나의 삶을 값지게 이어가는 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황량한 사막에서 2천 년 전 흘렀던 강줄기를 더듬듯, 말의 무늬와 바람의 색깔과 차가운 새벽의 냄새를 기억하듯, 그의 시는 이미 없기 때문에 삶의 본질로 남을 수 있었던 것들을 찾아내고 불러온다.“나의 소혹성에서 그런 날들은 다른 날과 같았다.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소혹성의 부족들은 부재를 통해 자신의 예외적 가치를 보여준다. 살아남은 부족들은 시간을 기억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슬퍼진다. 어머니. 나의 슬픈 마다가스카르”-`나의 마다가스카르 3' 부분허연의 공화국은 이번 시집의 `마다가스카르' 연작에서 구체화된다. 아프리카 남동쪽의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 마다가스카르는 수십 만 년 동안 대륙과 괴리되어 인간의 간섭 없이 자연스러운 진화를 겪은 공간이다. 훼손되지 않은 날것의 세계이자 영원히 고립된 공간인 마다가스카르. “긍정이나 희망이 우리를 배신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한 개인의 고독한 삶을 표상하는 이름인 것이다.“그가 남긴 복제품들은 오늘도 이 장례 습관에 익숙해진다. 강력하고 조용한 저녁에 후회란 없다. 초원에서 죽음은 객관적이다. 세상이 몹시 좋았다고 짹짹대는 새들이 북회귀선을 날아간다.”-`새들이 북회귀선을 날아간다' 부분살아 있음에도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기억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일상을 기계적으로 무기력하게 반복하는 현대인의 삶을 비관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듯 허연 시의 화자는 차라리 흠집이라도 새겨진, 세계와 불화하는 기억을 갈구한다. 이처럼 삶을 너무 오래 관찰한 이 화자들은 어느 시대에서든 개인의 생은 보편의 삶이 요구하는 규칙에 매끈하게 적응하기 불가능함을, 모든 생에는 부적응의 흠집이 새겨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풍문으로 실어 전한다. 조금은 서늘하지만 담담하고 조용한 이 바람이 도시를 살아가는 독자들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위로로 다가가기를 기대해본다.“뭔가를 덮어놓은 두꺼운 비닐을 때리는 빗소리가 총소리처럼 뜨끔하다. 기억을 두들겨대는 소리에 홀려 빗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빗속에 들어가 나무처럼 서 있다.언제나 어깨가 가장 먼저 젖는다. 남들보다 좁아서 박복한 어깨가 비를 맞는다. 금서의 첫 장을 열듯, 빗방울 하나하나를 본다. 투명 구슬처럼 반짝이며 떨어지는 물방울의 마지막 순간을 본다. 자결하면서 쏟아지는 유리구슬. 핏방울이 튀듯 투명 구슬이 튄다.마당 하나 가득 깨어진 구슬로 가득하다. 나는 여전히 깨어진 구슬 한가운데 서 있다. 구슬이 나를 때린다. 뼈로 들어서는 통증. 나는 뼈아프게 서 있는 나무다. 자라지 못하는 나무다”- `자라지 않는 나무' 전문/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5-25

“몸은 자기 바깥으로서의 존재”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와 더불어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평가받는 장-뤽 낭시의 `몸'에 관한 독창적 사유를 담은 책이 문학과지성사에서 `파라디그마' 시리즈로 출간됐다. `코르푸스-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김예령 옮김)가 그것. `코르푸스(Corpus)'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 아닌 `몸'이다.그러나 이 책에서 낭시가 이야기하는 몸은 종래의 형이상학이 자기 완결적·자기 충족적이라고 생각해왔던 단독자로서의 몸이 아닌 분절화되고 밖을 향해 열려 있는, 닫혀 있지 않은 몸이다. 낭시에 따르면 몸은 끊임없이 외부에 각인되면서 열려 있는 존재다. “몸은 확장과 관련된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우리는 보통 `영혼'이나 `정신'에 상반되는 것으로 `몸'을 떠올린다. “단순히 닫히고 꽉 찬, 자체적이고 독자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낭시는 몸은 매스(덩어리)가 아니며, 따라서 그것이 저 자신으로 닫힌 것이 아니고 스스로에 의해 침투되는 것이며, 그때 몸은 자기 자신의 바깥에 있다고 말한다. 몸은 바로 “자기 바깥으로서의 존재”이다. 또한 영혼이란 “몸이 몸 저 자신에 대해 가지는 차이,”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차이이고, 이 차이가 몸을 형성”한다고 낭시는 말한다.주로 정치철학 분야에서 활발한 의견을 펼치며 `공동체'와 `소통' `접촉' 등의 주제를 독자적인 관점에서 개진해온 낭시는 이 책에서 역시 “에고 밖의 에고” “경계에서 경계로서 일어나는 세계와 나의 공동의 동요” “주체 따로 대상 따로 나뉘지 않는, 즉 주체도 대상도 아닌 채 저마다에 고유한 무게이자 저 자신의 정확한 측정으로서 저울의 양팔처럼 펼쳐지는 몸-사유의 균형”에 대해 사유한다.결론적으로 이 책에서 낭시가 시도하는 모색과 실험은 앎의 불가능성과의 접촉을 통해 비로소 열리는 어떤 사유의 가능성, 저 자신의 한계에 닿아 열림과 파열로써 개진되는 글쓰기, 그리고 언어의 경계와 얼개를 끊는 그 글쓰기의 파열을 통해 저 자신과의 결렬이라는 낯선 경험으로서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있음'의 섬광(실존). 바꿔 말해 이 책은 글쓰기=존재론=몸의 도래(창조)의 테크네라는 등식이 어떻게 성립하는가에 대한 면밀한 성찰이자 그 등식을 몸소 입증하기 위한 형성 기술의 적용물이다.몸에 관한 낭시의 사유인 `코르푸스' 외에 같은 주제로 행한 낭시의 강연 `영혼에 관하여'와 다른 곳에 수록된 `영혼의 확장', 그리고 부록 격인 `몸에 관한 58개의 지표'가 함께 묶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5-25

툭툭 내어 주는 63분의 스님 말씀 담아

여기, 시인이 만난 숨결처럼 고요한 스님 이야기가 있다. 시인 정영은 처처에서 우직하게 수행에 전념하는 스님들을 만나뵈며, 내주시는 말씀들을 글로 적고 스님의 모습과 절 안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툭툭 내주시는 스님들 말씀이 때론 눈물짓게 하고, 때론 메시지가 되어 멍한 마음을 깨우는 죽비소리처럼 다가와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시인의 바람이, 마침내 `누구도 아프지 말아라'(문학동네)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책의 특성상 시인이 만나뵈었던 모든 스님의 말씀을 담지 못한 아쉬움이 컸지만, 불교와 관계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울한 이 시대에 방황하는 청소년들부터 마음의 위로와 성찰이 필요한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위로받고, 행복한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서른 분의 스님들 말씀을 먼저 본문에 담았다. 그리고 본문 사이사이에는 게송(불교적 교리를 담은 한시의 한 형태)을 실어 옛 스님들의 인생에 대한 맑고 향기로운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유익함도 주었다. 그리고 책의 뒷부분에는 본문에 더 이상 실을 수 없었던 서른세 분 스님들의 한 구절 말씀을 담아 독자들에게 메시지가 될 만한 그 뜻을 더했다.이 책은 우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의 마음을 밝게 하고, 삶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며, 세상에 물든 아픔을 보듬어 위로해줄 것이다. 자기를 바로보지 못하고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들에게는 나를 깨우고 다독이는 죽비소리가 되며, 삶과 죽음, 집착과 미혹, 존재에 대한 인식처럼 낯설고 무거운 생각들을 친근하고 익숙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의 거울이기도 하다.책은 마치 스님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진솔한 경험이 되며, 한 줌 내주신 그 말씀들은 우리 가슴에 깊게 물들어 이 세상을 여행하는 동안 `행복'이라는 향기와 늘 동행하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5-25

가슴에 묻은 눈물겨운 이름 이제야 부르는 엄마!

`엄마`만큼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부르게 되는, 항상 부르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부르지 못한 것만 같은 그 이름, 엄마. `잘 가요 엄마`(문학동네)는 일흔셋, 노년에 접어든 작가 김주영이 등단 41년 만에 처음 부르는 사모곡이자, 내밀한 고백이다.`객주` `활빈도` `천둥소리`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화척` `홍어` `아라리 난장` `멸치`, 그리고 2010년 발표한 `빈집`까지, 등단 41년, 일흔셋의 천부적인 이야기꾼 김주영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작가생활 동안 그 걸음을 게을리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 긴 시간, 한 번도 그 이름을 올린 적은 없다. `엄마`.작가는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품고 살 수밖에 없는 그 이름을, 비로소 소리내어 부른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어머니인 동시에, 우리 시대 모든 어머니들이 살아낸 모성의 대명사이기도 하다.김주영작가길고긴 산고를 겪고, 제 젖을 물리고, 제 살을 떼어주며 우리를 키워낸 어머니. 그 촌스럽고 어리석고 못난 이름,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이다. 미련하고 바보 같은 엄마의 이야기는, 그래서, 대가 김주영의 단련된 손끝에서 더욱 미련하고 촌스럽게, 그래서 더욱 아프게 그려진다. “새벽, 불길한 예감의 전화벨소리. 어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아우의 전화다. `나`는 시큰둥하게 전화를 끊고 평소와 다르지 않게 회사로 향한다. 이튿날 새벽에야 고향에 도착한 나는 짐짓 성의 없는 태도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다. 아흔네 살의 노구는 바싹 말라 있었다. 잘 때를 제외하곤 평생 누운 모습을 보인 적 없던 어머니였다.그들은 (….) 어머니 시신을 염습대로 옮겼다. 나는 난생처음 누워 있는 어머니와 만났다. 그때까지 잠자리가 아닌 이상 누워 있는 어머니와 대면한 적은 없었다. 나에게 어머니는 그처럼 언제 어디서나 서 있는 사람이었다.그 안쓰러움 몸뚱이가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염해지고 이내 불태워진다. 아우와 함께 “한줌의 먼지”가 된 어머니를 뿌린 곳은 내 유년의 슬픈 추억이 담긴 장소. 어릴 적 추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려가면서 줄곧 뻣뻣하게 어머니를 대해온 `나`도 자꾸만 마음이 무너져온다”-본문에서소설은 엄마의 죽음을 배다른 아우에게서 전해듣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결국 제 발로 고향을 떠나 떠돌이로 살게 만든 엄마에 대한 원망을 노년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떨쳐버리지 못한 `나`는 엄마의 장례에 관해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며 회피하려고 한다. 하지만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엄마에 대한 애잔함과 미안함이 `나`로 하여금 자꾸만 흔들리게 만든다. 비록 육신은 한줌 뼛가루가 돼 흩어졌지만 당신의 마음까지 흩어져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유명을 달리하는 순간 오히려 시나브로 다가와 아련히 스민 당신. 아무렇게나 떠난 엄마지만, 결국 `나`는 엄마를 아무렇게나 떠나보내지 못한다. 장례를 치르고 아우와 함께 돌아온 `나`는 엄마가 쓰던 싸구려 비닐가방 속에서 한 번도 쓰지 않은 립스틱을 발견한다.“아우의 손이 전혀 예상치 못한 물건 하나를 집어올렸다. 그것은 놀랍게도 립스틱이었다. 아우가 뚜껑을 열고 립스틱을 위로 밀어올렸다. 빨간색 립스틱이 흡사 어머니의 영혼인 것처럼 앙증스럽게 얼굴을 내밀었다. 아우와 나는 서로 눈을 마주친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머니 립스틱 바른 모습 본 적 있어?”“본 적 없어요.”(….)어머니가 그걸 써봤든 못 써봤든 몇십 년 동안 핸드백에 립스틱을 넣고 다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어머니 역시 여자였구나, 싶은 연민이 뒤통수를 쳤다.”-본문에서어려운 살림을 챙기며 자식을 돌보느라 엄마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그 무엇, 그러나 가방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소중히 간직해왔던 그 무엇, 엄마가 엄마임을 당연하게만 여겼던 자식들은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바로 그 무엇. 엄마도 결국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아픈 이야기는 이렇게 끝없이 이어진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5-18

세무사 `오해하지 마세요` 발간

구양서씨는 산이 좋아 산에 스며든 현역 세무사로 도서출판 그루에서 발간한 `오해하지 마세요`는 어떻게 하면 오해를 풀 것인가? 오해로 인해 굴절된 인간관계를 회복하라. 우리는 사소한 오해로 인해 갈등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로 인해 인간관계가 굴절돼 힘겨운 생활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갈등을 해소해 밝은 내일을 맞이하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저자 구씨는 “우리는 상대방이 한 말이나 행동에 대해서 그 진의의 참뜻을 파악하고 난 뒤에 그에 대한 말이나 행동을 해야 한다. 그래야 오해로 인한 불상사를 예방할 수 있다”면서 “사회갈등, 이 책을 읽고 한번 생각 해 봅시다”며 가정의 화목과 원만한 사회생활을 원하면 필독할 것을 권했다.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등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가정주부, 남편, 시어머니, 부모, 자식, 맏며느리, 며느리, 장모, 스님, 신부, 목사, 종교인, 정치인, 일선 취재기자 등 언론인, 전 현직공직자, 군인(특히 훈련병), 변호사 등 전문직업인, 기업체회장 및 전 현직 회사임원, 일반 직장인, 중간관리자, 팀장, 교수, 교사, 스포츠지도자, 스포츠선수, 연예인 등…. 이 책을 읽고 한 번쯤 생각해 보면 갈등 해소의 길이 보인다. 이 책에서 그 동안의 갈등과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는 답을 찾을 수 있다. 달걀 세우기 이야기 같은 일상의 오해 사례들이 망라돼 있다. 사소한 오해로 인해 일어나는 가족 간의 갈등, 직장에서의 갈등, 사회생활에서의 갈등 등을 해소하는 길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사소한 오해로 인해 인간관계가 굴절되는 현상을 많이 목격하고 살아간다.저자는 지금도 두발과 MTB로 전국의 산하를 누비며 맑고 밝은 사회를 위한 방법론에 대해서 끊임없이 사색하고 있다./서인교기자 igseo@kbmaeil.com

2012-05-18

해학과 풍자로 그려낸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

포항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화작가 도솔세(본명 박원열)씨가 최근 우주 만물을 해학과 풍자가 넘치는 필치로 담아낸 팝 카툰 `The Story Valley`(학이사)을 펴냈다. 만화작가로서 데뷔한지 올해로 21년째인 도솔세씨는 이번에 14번째 카툰을 펴내게 됐다.도씨는 서문에서 “산골짜기 물이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샘물이 돼 산을 찾는 이에게 목을 축이고 산에 온 그 어떤 사람들과 간단한 목례를 하는 만남의 장소가 되듯이 한 작품 두어 작품 모아 작가 자신을 돌아보고 만화작가로서 마음의 매무새를 다시 바로 잡는 계기로 작품을 했다”고 말했다.또 그는 “제목 `The story valley`는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작품을 구성하고 싶어서다. 작품세계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고 싶었고 대부분의 작품의 주제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생명력”이라고 설명했다.특히 그는 이번 카툰에서 인간을 위한다는 표현으로 치유된 과학문명의 일방적인 오만함보다는 사람이 중심이 된 것에 초점을 맞췄다.사람과 자연 그리고 문명이 공존하는 건전한 의식 현상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는 이번 카툰을 72개의 주제로 그림과 글로 꾸몄다.주로 정치적인 내용을 풍자적으로 표현하는 한 컷짜리 만화. `밑그림`으로 순화 시사적 문제나 인물 등에 대한 풍자적 만화로 한 개의 컷으로 된 것들이다.도씨는 “많은 작품을 하는 작가도 아니지만 필요에 의해 또는 마지못해 해 온 작품이 14권째 책이 됐다”면서 “이번 카툰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삶의 활기를 얻었으면 좋겠다”고 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5-18

오월의 송홧가루와 삭아버린 이뿌리까지 일상의 새 감동을 예찬하다

▲ 산강 김락기 시인중견 시조시인이자 자유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산강 김락기 시인의 네 번째 작품집이자 두 번째 시집인 `고착의 자유이동`이 출간됐다. 경북 의성 출신인 김 시인은 지난 2010년 시조작품집인 `독수리는 큰 나래를 쉬이 펴지 않는다` 이후 1년 반 만에 새로운 작품들로 독자들의 마음을 두드린다.김 시인은 그동안 문단으로부터 `건강한 삶의 미학`(문무학), `관조로 꽃피운 절정의 미학`(정귀래), `어제와 내일이 만나는 곳, 지성과 감성을 겸비한 시인`(이승우), `존재의 심연을 바라볼 줄 아는 깊은 눈길`을 지녔으며(오정국), `오감으로 습득할 수 있는 영역과 오감을 뛰어넘는 형이상학적 세계를 두루 섭렵한 시인`(김준)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중견시인이다.그는 이번 작품집에서 `형이상학`의 미(美)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작품집은 제1부 `길에게 묻는다`, 제2부 `성자의 손`, 제3부 `격자창 가에 앉아`, 제4부 `잘디잔 것이 경건하다`, 제5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등 총 5부로 이뤄졌다.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시작해 그 본연의 모습을 찾아내는 시인의 고찰이 한껏 담겨 있어, 그동안 간과하고 지나쳤던 일상 속에서의 새로운 감동으로 우리를 안내한다.이승우 문학평론가는 “이번 시집에서도 산강의 화두는 여전히 `흔들림`이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는 홀로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것들, 즉 고착된 것들에게 부여되는 자유란 애초에 방관자적인 `흔들림`을 거부하기 때문”이라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러나 `어디서 보았는지 모르는` 그 광경들에 여전히 손짓하고 있는 산강의 언어는 그래서 오늘날 더욱 숙연하고 각별하다”고 산강 시인의 언어를 높이 평가했다.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시인은 오월이면 날리는 진노란 송홧가루에서부터 자그마한 휴대폰 속에 담겨진 피리 부는 소년, 그리고 삭아버린 이뿌리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그 관심 하나하나를 작품으로 승화시켜 다시 내놓았다.이수화 시인은 수록 작품인 `치아 CT 영상`에 대해 “CT 영상에 나타난 사실적인 치아의 자기모멸적인 혐오상 표현도 또한 적확하고 솔직하다. 삶의 개결성에 대한 과학적인 성찰의 미학이 성취된 보기 드문 인체 제재의 서술시”라고 평하기도 했다.시조문학과 문학세계로 시조와 시 부문에 각각 등단한 산강은 대구고와 단국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작품집으로는 시집 `바다는 외로울 때 섬을 낳는다`, 시조집 `삼라만상`, `독수리는 큰 나래를 쉬이 펴지 않는다`가 있다./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2012-05-11

80년대 데모의 기억과 향수

▲ 소설가 권여선소설가 권여선(48)은 기억에 대한 집요한 탐색을 통해 인간관계의 미세한 균열과 그로 인해 부각되는 일상의 이면을 날카롭게 파헤치는 데 탁월한 솜씨를 지닌 작가다. 첫 장편과 세권의 소설집을 통해 그가 보여준 그 서늘하고 씁쓸한 생의 진실과 마주한 독자와 평자들은 권여선이라는 이름을 한국문학의 한 특출한 성취로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등단 이후 15년 만에 두번째 장편소설 `레가토`(창비)를 써냈다. 작가의 등단작이 장편인 점을 감안하면 창비문학블로그 `창문`에 연재한 이 작품이야말로 작가로서 첫 연재작이자 본격적인 첫 장편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생생한 인물 형상화와 감탄을 자아내는 단단하고 선명한 문장,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신랄하면서도 담담한 포착 등 단편들에서 보여준 그만의 매력이 집대성된, 권여선 소설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작품이다.`레가토`는 삼십여년 전, `카타콤`이라 불리던 반지하 써클룸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보낸 인물들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당시 써클 회장이었던 박인하는 지금은 중년의 유명 정치인이 돼 있고 그 시절 철없던 신입생들은 현재 출판기획사 사장, 국문학과 교수, 국회의원 보좌관 등으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어느날 영문을 알 수 없이 실종된 동기 오정연에 대한 기억이 깊은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런 그들 앞에 어느날 오정연의 동생이라는 하연이 나타나 언니의 흔적을 수소문하면서 그들의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이 서로 얽히고 이어지기 시작한다. 소설은 각 장마다 현재와 과거의 시점을 오가며 그들의 젊은 날과 현재의 삶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진행된다. 엄혹한 시절, 학기 초 첫 `피쎄일`의 경험을 시작으로 여름의 농활과 합숙, 가을의 첫 데모를 거치며 운동권이 되는 절차를 밟아가던 그들의 청춘은 한편으로 순진하고 열정적이고 한편으로 서툴고 어리석고 맹목적인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반면 인생의 격동기를 지난 현재의 그들은 언뜻 세속적이고 안정된 삶에 접어든 듯 보이지만 여전히 젊은 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끌어안고 있거나 애써 잊으며 살아가고 있다. 과거는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죄의식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애써 환기하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든 치명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것은 오랜 세월이 지나 다른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 과거를 호출한다.소설의 제목인 `레가토`는 악보에서 음과 음 사이를 이어서 부드럽게 연주할 것을 지시하는 음악 용어다. 그것은 이 작품에서 과거와 현재를 `끊지 말고 이어서` 읽어달라는 주문으로 읽힌다. 누구에게나 잃어버렸는지도 모른 채 잃어버린 것이 있다. 그것들로 이루어진 것이 현재라는 시간이고 그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어긋난 관계들의 종합이 한 사람을 이룬다. 권여선 표 `기억 서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처럼, 인생이란 결국 그것을 발견해내는가 발견해내지 못하는가이다./윤희정기자

2012-05-11

17명 연쇄살인 사이코패스를 해부하다

`좀비―어느 살인자의 이야기`(포레)는 미국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이자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조이스 캐럴 오츠가 실존했던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제프리 다머의 이야기를 소재로 살인자의 내면을 탐구한 공포소설이다. `밀워키의 식인귀`라 불렸던 제프리 다머는 열일곱 명의 무고한 시민을 죽이고 시체를 훼손하고 전시하는 등의 악행으로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던 인물로, 수감 중이던 1994년 다른 죄수의 구타로 사망했다.자멸로 치닫는 폭력과 파괴,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증언을 넘어 인간성의 바닥을 그려내는 작가로 알려진 오츠는 이 작품에서 극단적이고 괴기스럽고 폭력적인 한 인간의 삶을 충격적으로 묘파한다. 납치해 온 사람에게 직접 뇌수술을 해서 주인에게 복종하는 착한 노예(좀비)로 만들려 했던 서른한 살의 사이코패스. 사실과 허구가 섞인 오츠의 이 공포소설은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탐욕적이고 광적인 사회, 거대한 괴물 같은 미국이라는 집단을 상징하는 문제작으로 평가받았고 1996년 브램 스토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주인공 쿠엔틴이 얼음송곳을 들고 했던 로보토미(전두엽 절제술)는 실제 1940~50년대 미국에서 자행되었던 뇌외과 시술의 하나로, 당시 이 수술을 받은 많은 환자들이 심각한 인격변이에 시달리거나 목숨을 잃었고 이후 부작용과 인권침해 논란이 일었다가 완전히 금지된 바 있다.극한으로 치닫는 소름끼치는 상상력을 우울한 내러티브에 담아낸 이 소설은 일인칭 시점의 일기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가 범행 계획을 짜면서 그려놓은 지도는 그 어떤 텍스트보다 오싹한 공포심을 환기시키며, 특정 글자를 눈에 띄게 작게 쓰거나 자신이나 타인의 이름 약자에 점 대신 줄을 긋는 등의 필기 버릇은 비정상적이고 분열된 인격을 상징하는 것처럼 의미심장하다. 독자는 그의 일기장을 읽으면서 마치 입체안경을 쓰고 살인자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심정으로 차가운 악의 우물로 빨려 들어간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5-11

우리 인간삶과 노동에 대한 연민의 눈길과 냉철한 시선

`노동자 시인`의 상징적 존재로서 끊임없는 내적 성찰과 갱신을 통해 노동시의 진경을 펼쳐온 백무산 시인의 여덟번째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창작과 비평사)`가 출간됐다. 이전 시집 `거대한 일상`에서 노동시의 품격을 한층 끌어올리며 뚜렷한 시적 성취를 보여준 백무산 시인은 2009년 오장환문학상과 임화문학예술상을 잇달아 수상하면서 문학적 성과를 높이 평가받기도 했다. 4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인간의 삶과 노동의 본질과 가치에 대한 성찰과 모색이 담긴 시편을 선보이며 부정을 껴안고 넘어서는 긍정의 시세계를 펼쳐보인다. 맑은 서정 속에 일상의 세목들을 바라보는 따듯한 연민의 눈길과 시대의 변화에 따른 현실을 꿰뚫어보는 냉철한 시선이 견결한 목소리에 실려 초심을 잃지 않는 순결한 정신을 일깨운다.“자연사박물관 유리상자 안에 오늘이 담겨 있습니다/두 아이와 마누라를 목 졸라 죽이고/사내가 한강에 몸을 던지고 있습니다/단속반에 뒤집힌 리어카에서 쏟아진 오뎅과/떡볶이 벌건 고추장물 바닥에 늙은 여자가 퍼질러 앉아 울고 있습니다/철탑 위에서 농성 중이던 노동자가/몸에 불을 붙이고 뛰어내리고 있습니다/생존의 망루에 올랐다가 불이 붙은 사람들이 절규하고 있습니다”(`자연사박물관`부분)철저한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백무산의 시는 에두르는 법 없이 직설적이고 정직하다.▲ 백무산 시인자본의 욕망과 폭력에 억눌린 채 여전히 고통스럽기만한 현실을 시적 기반으로 삼는 시인은 “자주 그렇게 소름을 돋게 하고 수시로 악몽과도 같”은(`소명`) “삶의 벼랑에 서”서(`밤 서울역`) “슬픔도 일용할 양식”으로(`너를 쬐어야 한다`) 삼으며 “낮고 어두운 곳”에서(`너를 쬐어야 한다`) “죽기살기”로(`마음이 천재지변이다`) 빠듯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시인은 또한 “이 나라 변방 깡촌 오지 변두리 벽촌 골짜기 섬마을 달동네”가 고향인 노동자들의 “그 많은 희생과 낙오에 눈을 감은 대리석의 도시”의(`탑이 꾸물거린다`) 비정함과 “범죄와 배신과 면죄와 다시 배신으로 지켜내는 체제”에(`체제`) 갇힌 우리 사회의 추악한 일면을 직시하며 자신의 `시`가 “도둑이 아니라 털린 놈이 감시를 당”하고 “도둑을 잡으러 간 자들”이 도리어 “도둑님이 되어 돌아오”는(`주인님이 다녀가셨다`) 이 “지저분한 시대”에(`땅을 딛고 일어날 뿐`) 내미는 준엄한 “레드카드가 되어야 할 거”라는(`레드카드`) 다짐을 새긴다.백무산의 시는 인간 존재와 삶의 문제와 결부된 깊이 있는 사유와 진정성이야말로 시의 생명력임을 깨닫게 한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2-05-04

자연의 四季와도 닮은 어머니의 일상과 인생

▲ 김용택 시인. 산문집 `김용택의 어머니`는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땅과 벗하고 살아온 어머니 박덕성 여사의 일생을 정리했다.오는 10월 등단 30주년을 맞는 섬진강 시인 김용택(64)이 그간 한 인물에게서 시를 베껴 썼노라 고백했다. 그가 자기 시의 원 주인이자 시원(始原)으로 꼽은 인물은, 바로 어머니. 실은 김용택의 어머니 `양글이 양반`은 이미 문단 안팎에서 입심 좋고, 삶과 생명에 대한 혜안을 지닌 `문맹의 시인`으로 입소문 짜했던 터다.김용택은 지금까지 어머니에 관해 시로, 인터뷰로, 산문 속 일화로 간간이 풀어놓긴 했지만, 책 한 권에 온전히 어머니 이야기를 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어느덧 팔순이 넘은 노모의 인생을 처음부터 고스란히 복원해보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으로 산문집`김용택의 어머니`(문학동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그래서 이 책에서 김용택은 신경림 시인도 무릎을 `탁!` 쳤다는 `용택이 엄마` 양글이 양반의 걸출한 입담과 삶의 흔적들을 담는 한편, 그간 생의 고비마다 어머니를 떠올리며 썼던 시들, 또한 `어머니에 관한 자그마한 사건기록`이라 할 만한 일기문까지를 한데 모았다. 또한 사진작가 황헌만이 눈부신 섬진강 마을의 사계 속에서 걷고 일하고 이웃들과 노니는 어머니를 계절별로 밀착 촬영한 사진들도 함께 실었다.꽃다운 처녀가 시집와서 한 집안의 새댁이 되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다가, 자녀를 낳아 수확하고 마른나무처럼 늙어가는 일생의 여정은, 마치 자연의 사계와도 닮았다. 이 책은 `제1부 봄―봄처녀, 섬진강에 시집오셨네`에서부터 `제4부 겨울―마른나무처럼, 어머니 늙어가시네`에 이르기까지 계절의 흐름을 따라 어머니의 일상과 인생을 좇는다.몸집이 작고 야무지다고 해서 본명보다 `양글이`로 더 많이 불렸던 처녀가 있다. 장차 시어머니 될 사람이 선을 보러 온 자리에서 야무지게 물을 떠다 드리고 얌전하게 뒷걸음질로 물러나 단번에 며느릿감으로 낙점받은 양글이 처녀. 방년 18세 때 꽃가마 타고 섬진강으로 시집온 이후, 호랑이 시어머니에게 눈물 빼며 시집살이를 하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지만 그 아들은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하고 오리를 기르겠다고 나섰다가 살림만 폭삭 말아먹는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아들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시인이 되면서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섬진강으로 끌어들이니, 그이가 바로 시인 김용택이다. 하지만 김용택이 어머니의 가슴을 새카맣게 태우고 온 가족이 빈궁한 살림살이 속에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믿음과 지원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았다. 어느 날 학교 기성회비를 내지 않아 집으로 돌려보내진 고등학생 김용택. 내일 꼭 내겠노라, 한 번만 봐달라 말도 못 한 숙맥 아들이 평일 대낮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꼴을 본 어머니는, 곧장 닭장에 남아 있던 영계를 쥐잡아 망태에 넣고 장에 나가 내다 판다. 한데 어떡하나. 닭 판 돈은 기성회비와 그 돈을 쥐고 김용택이 학교로 돌아갈 차비에나 빠듯이 들어맞고, 어머니가 다시 집으로 돌아갈 차비는 없다.“어매는 어치고 헐라고?”“나는 걸어갈란다.”어머니는 빈 망태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고 서 있었다.“차 간다. 어서 가거라.”김용택의 어머니는 언제나 아들에게 마지막 남은 것 하나까지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그러다보니 가진 것 없어 챙겨주지 못한 다른 자식들에 대한 회한은 깊디깊다. 본인도 생전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본 여성이기에, 딸이라는 이유로 학업을 중도 포기하게 한 딸 복숙이에 대한 안쓰러움과 미안함은 오죽했을까. 또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고 집안 형편을 생각해 군말 없이 생활전선에 나선 누이의 슬픔도 김용택의 가슴엔 고스란히 눈물겨운 풍경으로 맺혀 있다.어찌 서러운 일이 이뿐일까. 그 숱한 슬픔과 인생의 고비를 넘어 자식들을 길러내고 수굿이 노년에 이른 어머니의 삶에 그는 경탄한다. 분노와 미움과 절망과 갈등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어쩌겠냐. 사는 게 다 굽이 고비가 있고 살아갈수록 걱정은 쌓여가고 근심은 깊어지는 게 사는 것인데, 뭔 일 있으면 저러다가 또 살겠지 한다”며 세상사에 부대낀 자식들의 등을 가만가만 뚜드려주는 어머니의 위로와 수긍은 그에게 한 편의 맑은 시다.어느덧 그 자신도 환갑이 넘은 노인이 됐으나, 그는 여전히 궁금하다. 우리네 어머니는 어떻게 저런 경지에 이르렀을까. 우리 자식들의 등은 어머니가 두드려주고 다친 가슴은 어머니가 어루만져줬다지만, 지친 어머니의 등은 과연 누가 두드려주었을까.어머니의 친구는 누구였을까. 살면서 속이 썩고 하늘을 찌르는 분노가 어머니에겐들 왜 없었을까. 땅을 치며, 통곡하고 싶은 일이 왜 없었을까.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어디다가 화풀이하고 무엇을 잡고 사정하며 어떻게 그 순간을 이겨냈을까.어느 날 어머니가 들에 가셔서 해 저물 때까지 오지 않았다. 달빛 아래 어디선가 호미 소리가 들렸다. 밭 끝 저쪽에 어머니가 부지런히 밭을 매고 있었다. 몸짓이 격렬해 보였다.이 책에는 그렇게 땅과 벗하고 흙을 갈아엎으며 생각을 정리했던 어머니의 일생이, 자연의 흐름과 농가의 한해살이와 함께 그림처럼 펼쳐진다.귀가 멀어 이제 자식들이 도란도란 건네는 이야기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 어머니. 김용택과 그의 아내는 어머니의 늙음을 설워하며 울음을 삼키지만, 이제 어머니에겐 그 울음소리 조차 제대로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가슴 아파 보청기를 해드리겠다는 자식들의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다, 늙으면 세상 소리 다 들을 필요 없다”시와 글, 사진으로 어머니 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김용택의 어머니`는 사라져가는 우리 농촌의 풍광과 늙어가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헌사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5-04

유머와 감동이 있는 코믹한 모험 이야기

스웨덴의 떠오르는 작가 프리다 닐손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으로 출간됐다. 그의 작품은 스웨덴의 최고 문학상인 아우구스트 상 후보에 오르면서 문학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어린이 라디오 방송에서 꾸준히 낭송되고 있을 만큼 어린이 독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독자들이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아우구스트 상 심사 위원은 프리다 닐손을 `등줄기에 전율이 끼칠 정도로 긴장감 넘치게 글을 쓰고, 사람들을 이야기 속으로 쏙 끌어들이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작가`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이유뿐만 아니라 문장은 간결하지만 흥미진진한 전개 방식과, 가슴 따뜻한 메시지를 재치 있게 풀어 가는 솜씨 또한 독자들을 그의 책 속으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이번에 출간된`나, 단테, 그리고 백만 달러(문학과 지성사)`는 프리다 닐손의 이러한 장점이 가장 잘 나타난 작품으로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할 만큼 박진감 넘치게 이야기가 펼쳐지는 가운데 기막힌 유머와 신선한 감동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평범한 은행원이던 헬게가 이사로 승진하던 날, 은행 금고에서 백만 달러가 사라진다. 범인으로 몰린 헬게는 무작정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철퍼덕 소리와 함께 창문 아래에 썩은 야채를 모아 둔 쓰레기통으로 떨어진다. 기다렸다는 듯 쓰레기차는 헬게를 악취 나는 쓰레기장에 쏟아 놓고, 그곳에서 꼬질꼬질하고 냄새나는 생쥐 단테를 만나면서 일은 점점 꼬여만 간다. 십 년 만에 최악의 폭우가 바로 그날 내렸고, 얼음 같은 냉기는 살갗을 도려내는 듯했다. 쓰레기장의 괴물 같은 단테는 이런 최악의 상황에 놓인 헬게에게 이해득실과는 관계없이 선의를 베푼다. 그렇게 헬게는 단테의 집에 머물면서 백만 달러가 든 가방을 중심으로 티격태격, 좌충우돌 모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처음 단테를 만났을 때 겉모습 때문에 마음을 열지 않았던 헬게지만, 가식 없이 솔직하게 다가오는 단테에게 점점 마음을 열고 진정한 친구가 되는 과정을 재치와 유머가 돋보이는 코믹한 모험 이야기 안에 따뜻하게 담아냈다.이야기 전개가 잠시 한눈을 팔 시간마저 주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긴장감 역시 대단한데다 유머와 감동까지 있어 독자들은 책은 읽는 내내 스토리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책 안에 담긴 메시지를 저절로 생각해 보게 된다.예를 들어, 주인공 헬게가 은행 이사로 승진하는 날, 동료들은 물론이고 같은 이사진들도 헬게에게 잘 보이려고 갖은 애를 쓴다. 물론 헬게도 그런 상황이 싫지만은 않다. 자신이 뭔가 대단해 보이고 황홀한 기분까지 든다. 그러나 헬게가 도둑으로 몰리자 아양을 떨던 사람들은 모두 헬게에게 등을 돌리자 모든 게 끝장이란 생각이 든다. 이 장면은 인간 내면에 있는 위선과 이기적인 본성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러나 물론 작가는 무책임하지 않다. 헬게가 쓰레기장의 괴물 단테를 만나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확인하게 함으로써, 인간은 위선과 이기라는 인간 본연의 심성에 절망하지만, 이를 극복하는 힘 역시 사랑이라는 인간성에서 찾아야 함을 일깨워 준다.또한 헬게가 안락한 자기의 옛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저분한 쓰레기장이지만 마음이 통하는 친구, 단테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는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라는 철학적인 질문도 해 보게 된다. 돈과 명예가 보장되었지만, 위선과 타산이 가득한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행복을 단테가 있는 쓰레기장에서 발견한 헬게를 통해 무엇이 진정한 삶인가에 프리다 닐손 식으로 답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4-20

春心 적시는 꽃보다 아름다운 詩

삶을 바라보는 따듯한 시선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해온 `사평역`의 곽재구(58)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와온 바다(창비)`가 출간됐다.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열림원, 1999) 이후 무려 12년이 지나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오랜 시간 가슴속에서 살아숨쉬던 아련한 추억과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시편을 선보이며 더욱 섬세해진 감각과 선명한 이미지로 웅숭깊은 서정의 세계를 펼쳐보인다. 세파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순정하고 올곧은 시정신을 단련하며 벼린 시편들이 `참 맑은 물살`처럼 가슴을 적시며 잔잔한 울림 속에서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시 외에도 동화와 산문을 쓰며 10여년간 전업 작가로 살았던 시인은 2001년부터 순천대에서 시를 가르치면서 “갯길을 따라 걸어가면 비단으로 가리어진 호수”(`와온 가는 길`)가 나오는 `와온(臥溫)` 포구를 안식처로 삼았다.“해는/이곳에 와서 쉰다/전생과 후생/최초의 휴식이다//당신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다/구부정한 허리의 인간이 개펄 위를 기어와 낡고 해진 해의 발바닥을 주무른다//달은 이곳에 와/첫 치마폭을 푼다/은목서 향기 가득한 치마폭 안에 마을의 주황색 불빛이 있다//등이 하얀 거북 두마리가 불빛과 불빛 사이로 난 길을/리어카를 밀며 느릿느릿 올라간다//인간은/해와 달이 빚은 알이다//알은 알을 사랑하고/꽃과 바람과 별을 사랑하고//삼백예순날/개펄 위에 펼쳐진 그리운 노동과 음악//새벽이면/아홉마리의 순금빛 용이/인간의 마을과 바다를 껴안고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와온 바다` 전문)와온이 `안의 안식처`라면 시인이 2009년 7월부터 1년 반 동안 머물렀던 인도의 한적한 시골마을 산티니케탄은 `밖의 안식처`라 하겠다. 문청 시절 타고르에 심취했던 시인은 “해는/달 속에서 뜨고//달은 해 속에서 뜨”(`산티니케탄`)는 그곳 타고르의 고향에서 “환멸과 탄식으로 가득 찬”(`보순토바하`) 영혼을 달래며 “붉디붉은 사랑의 시 한편/이 지상에 툭 떨굴 날 부끄러이 생각해”(`붉은 시전지`)보기도 하면서 “낯선 세계에 깊숙이 몸을 담그는 체험을 통해 새로운 시를 찾아”(최두석, 해설) 나선다.“가난하지만 인간미가 살아 있는 그곳에서 시인은 자연과 더불어 아름답고 소박한 삶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인생의 순결한 가치를 깨닫는다. 십오년 동안 맨발로 살아온 열다섯살 소녀 론디니(`론디니`), 붓을 잡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화가 타판 치트라 카르 포투아(`화가`), 불가촉천민의 마을에서 연을 날리는 맨발인 아이들(`적빈 5`)…. 이들의 삶 속에 스며 있는 고결한 삶에 대한 인식을 시인은 `적빈(寂貧)`이라 명명하며, “시를 쓰고 살았다는 지상의 내 이력이 부끄럽고 부끄러웠다”(`화가`)고 고백한다.사랑과 그리움의 정서로 채색된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한 곽 시인의 시는 가슴에 젖어드는 대로 따뜻하고 편안하다. “급히 서둘거나 과장된 무리한 몸짓을 하지 않”고 “강물이 흐르듯 유연한”(민영, 추천사) 그의 시는 삶의 의미를 일깨우며 인생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힘을 불어넣어준다.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고 추억하며 “이승의 제일 맑고 시원한 호수로 소풍 가는”(`나한전 풍경`) 새로운 시간을 꿈꾸는 그의 시는 고단한 삶의 길모퉁이에 서 있는 희망의 등불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2-04-20

상실과 부재에 대한 따뜻한 그리움

임현정은 2001년 `현대시`로 등단해 시인으로 12년을 살았다. 그리고 드디어 첫 시집 `꼭 같이 사는 것처럼(문학동네)`으로 독자들을 만나게 됐다. 젊은 시인들이 등단 2, 3년 만에 첫 시집을 내고 주목을 받는 것에 비하면 아주 느린 걸음이다. 그러나 시집을 펼쳐보면 그 숙성의 시간이 시 안에서 얼마나 빛을 발하는지를, 독자들은 금세 알아차릴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수이는 이번 시집의 해설에서 “입구와 출구, 심연과 표면, 전과 후 등등이 사라진 무한 연쇄와 반복이” “타당한 질서이며 유일한 지형도롤 자리 잡는” 이 세계에서, “임현정의 시는 세계 자체를 결여한 세계에서 태어나는 마이너스 세계의 시, 존재 자체를 결여한 존재가 빚어내는 마이너스 존재의 시, `시의 시간`의 불가능성을 직시하는 시인의 빈곤한 시간을 본뜨는 마이너스 시간의 시”라고 역설한다. “증발해버린, 부재하는 시의 시간 자체를 시의 육체로 삼”아 “근원을 상실한 현대시의 운명 자체를 시화하면서 그로부터 새로운 시의 시간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고서 시인은 “소유한 적 없는 것들의 부재와 끝없는 상실의 와중에 있는 세계에서 텅 빈 `그것`을 어떻게 투명하게 응시할 수 있는가를, 그 `없는` 의미에 꼭 맞는 단어와 수사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무한한 수고가 왜 필요한 것인가를 천천히 헤아린다.” 바로 여기에서 공들인 시간의 깊이가 이 시집 안에서 어떻게 형상화되는 것인지 가늠하게 된다.끔찍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뒤틀린 세계에 존재하는 상실과 부재. 임현정이 이번 첫 시집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은 지독한 응시를 통해 그것들의 목록을 담아내는 일이다. 지금 여기 텅 빈 부재의 공간에 석고를 부어 그것들을 떠내는 일을 시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래 바라볼수록, 오래 정성을 들일수록 더욱 견고해지는 작업. 시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쥬리엣 의상실이 아니라,/ 쥬리엣의 상실”이기에 응시의 시간은 오롯이 시에 스며들어 구덩이 같은 깊이로 자리한다. 그것은 이미 없는 것이지만 임현정의 시로 인해 다시, 있는 것이 된다. 마침내 상실과 부재의 목록들이, 그 `없는` 것들이, 지금 여기 시로 다가와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임현정의 시에 깔려 있는 것은 이 세계의 빈 구멍들과 “후미진 곳”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단편적이고 단면적인 시선을 경계하면서, 세계의 불가해한 양상들을 깊이 들여다보고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그리고 조금은 애잔하다. 마른 잎이 뜨거운 물에 풀어져 모양과 향기가 되살아나는 시간. 너무나 어렵게 존재의 눈앞에 당도한 `시`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이 세계에서 임현정은 그 자체가 바로 시의 시간임을, 그것을 견디고 끝내 써내는 것이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시의 시간임을 이야기한다. _김수이 해설 `없는 가게`의 빈 의자에서 시 쓰기에서/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4-20

無心을 찾아 떠나는 아름다운 南道 절터여행

`글을 많이 쓰는 사진작가`인 이지누는 폐사지의 특별한 아름다움에 취해 전국에 산재한 폐사지를 수도 없이 찾아갔다. 이 책은 그 첫 번째 갈무리로서, 전라남도의 폐사지 아홉 곳을 답사해 길어 올린 기록이다. 모두 여덟 권으로 기획된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는 앞으로 전북, 충청, 경기, 경주, 강원, 경남, 경북으로 차례차례 이어질 것이다. 이번 책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알마)는 맑은 선풍이 맹렬했던 남도의 폐사지 풍경을 글과 사진으로 오롯이 담았다. 진도 금골산 토굴터, 장흥 탑산사터, 벌교 징광사터, 화순 운주사터, 영암 용암사터, 영암 쌍계사터, 강진 월남사터, 곡성 당동리 절터, 무안 총지사터 등 신중하게 선별한 아홉 곳의 폐사지는 하나하나 눈여겨볼 만하다.전라남도는 지역적 특성으로 인해 한반도 안에서도 독특한 불교문화의 흔적을 보여준다. 실제로 전라남도는 수차례 한반도에 새로운 사상적 기운을 불어넣었다. 나말여초에 완도 청해진을 통해 선종 불교를 받아들이는가 하면 고려시대에는 수정결사와 정혜결사 등 선종과 교종을 아우르는 결사운동의 진원지였다. 또 조선 후기에는 두륜산 대흥사를 중심으로 유교와의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러한 사상적 역동성은 불교미술의 새로움으로도 이어져 전라남도의 불교문화 전반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 흔적이 폐사지에 아련하고 신비하게 남아 있기에 저자는 첫 발걸음을 전라남도로 향한 것이다.절터는 보통의 관광지들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깊은 세월에 깎여 주변의 꽃과 돌을 닮은 석조 유물들은 그 자체로 무심(無心)을 강론하는 듯하며 동이 틀 때 햇살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돌부처는 거룩한 법열을 절로 일으킨다. 이지누 작가는 이토록 가슴을 울리는 순간을 오롯이 글과 사진으로 표현하기 위해 수십 년에 걸쳐 남도의 폐사지 아홉 곳을 여러 차례 반복해 순례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알마 펴냄, 이지누 지음, 2만2천원/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4-13

조폭에 맞선 산골주민의 혈투 해학·풍자로 가족의미 되새겨

`탁월한 이야기꾼` `해학과 풍자의 장인` `입담과 재담의 진면목` 등 성석제를 수식하는 평단의 말들은 흘러넘치도록 많았다. 한국문단 내에서 그만큼 이야기를 저글링하듯 주무르는 소설가가 또 있을까. 그의 소설은 언제고 세상을 성석제 자신만의 방향키로 조타하며 장착된 무기인 유머와 해학이 소설 곳곳에 지뢰처럼 묻혀 있어 웃음폭탄, 눈물폭탄, 시원 유쾌 발랄 후련의 폭탄이 시도 때도 없이 소설 안에서 펑펑 터진다. 그의 매혹적인 이야기에 빠져드는 날이면 반드시 날을 새우고 단숨에 성석제 전부를 따라 읽어야만 했다. 그런 그가 2003년 장편 `인간의 힘`이후 9년 만에 신작장편소설을 내놓았다.이번에 출간된 장편 `위풍당당`은 시골마을에서 빚어지는 맹랑한 소동극의 형식을 빌려 재담과 익살,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세계를 그려낸다. 동시에 그 웃음 뒤에 숨은 우리 사회가 처한 도덕적 파국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부정한 권력에 저항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충동이 소설 심층부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위풍당당`의 서사를 간단히 정리해보면 이렇다. 어느 궁벽진 강마을의 사람들이 그 마을을 접수하러 간 전국구 조폭들과 일전을 벌인다. 시골마을을 얕잡아보고 의기양양하게 쳐들어간 도시의 조폭들은 예상치 못한 기습에 속수무책으로 농락당하고 반대로 마음을 모아 위기를 돌파하는 동안 강마을 사람들의 이해와 애정은 더욱 깊어진다. 그렇다면, 이 시골마을을 도대체 왜 전국구 조폭들이 접수하려 드는 걸까.“그런데 따라오고 있다. 검정색 벤츠에 탄 사내들. 우리에서 뛰쳐나온 맹수, 끈 풀린 미친 개 같은 인간들. 시속 오 킬로미터로 걷는 새미를 시속 오 킬로미터의 속도로 따라오는, 짙은 선팅으로 시커먼 유리 속,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세 인간들”우연히 방문하게 된 강마을. 조폭들에게는 `자연산` 새미가 눈에 띄게 예뻐 보였던 것. 그 새미를 조폭 일당이 슬슬 따라가고 있던 와중 자신을 먹잇감으로 노리는 조폭들을 피하려다 그중 한 사람에게 상해를 입힌 것으로 이 전쟁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는 것. 곧 시골마을 대 조폭 간 전쟁이 벌어지게 된 시발점이 바로 그것. 쳐들어오는 쪽과 방어해야 하는 대치상황의 이야기는 수월치 않은 과정 속에서 결정되고 하나의 목표로 응집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가 피는 섞이지 않은 타인. 마을 사람 각각의 사연은 우리 사회의 숨기고픈, 감추고 싶은 치부 속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 잔인한 인생의 굴레에서 버림받았고 상처입어 그 강마을에 안착했다.그래서 강마을 사람들은 서로서로를 이해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였으며 믿었고 마을을 건설하고 재배하며 구축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믿음이 매우 당혹스런 사태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 개중에는 “무조건 깡패들 오는 반대방향으로 토껴야죠. (……) 목숨이 아까우면 도망쳐야지”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강마을을 애써 일궈온 노력, 그 강마을에까지 오게 된 구성원의 가슴 아픈 상처를 서로서로 보듬어 돋을새김하여 “그래 싸우자, 싸우자, 싸워보자. 너희와 함께 죽을 때까지 싸워보마.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뿌려줄게” 라고 `전투`에 대한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이 소설은 주어진 운명으로서의 식구가 아닌, 자신이 선택해서 한 식구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외부의 부당한 간섭과 편견에 맞서 싸우며 가까이서 부대끼다 어느 결에 서로의 세포가 닿고 혈액이 섞이며 연리지처럼 한 몸이 된 사람들, 그들에게 강 같은 평화가 함께하기를”(`작가의 말` 중에서)우리는 `위풍당당`을 읽으며 웃을 것이다. 페이지 곳곳마다 까르르, 킥킥, 큭큭거리며 불가항력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할 것이다. 성석제가 이끄는 위풍하고도 당당한 이야기의 경로를 따라다니면서 대책 없는 웃음이 터져나올 테고 그 안에 매복된 헤아릴 수 없는 해학과 익살의 축제 속에서 그저 철저히 성석제표 웃음에 지배당할 것이다. 허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그 웃음 뒤에, 포복절도할 만큼의 웃음이 사라지고 난 뒤에, 그뒤에 전해질 가슴 찡한 눈물 한 방울 또한 우리들은 거스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은 성석제 소설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하고 날을 새우게 하며 그가 제시한 소설적 현실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할 거란 걸 우리는 느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석제를 읽고, 웃고, 운다. 성석제가 돌아왔다. 진정한 이야기꾼의 일침이 시작됐다.문학동네 펴냄, 성석제 지음, 264쪽, 1만2천원/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4-13

생채기를 공유한 낯선 타인들이 만나 가족이라는 기적이 된다

한국소설의 참신한 상상력을 발굴하기 위해 창비가 제정한 창비장편소설상의 5회째 수상작인 기준영사진 장편소설 `와일드 펀치`(창비)가 출간됐다. `와일드 펀치`는 담담하고 절제된 대화들로 여백의 서사를 선보이고, 성숙한 소설적 시선으로 현대인이 실감할 수 있는 공감과 소통의 문제를 내세우면서 서사적 울림으로 확장해가는 역량을 높이 평가받았다. 2009년 등단작 `제니`로 문단에 신선한 긴장감을 불어넣었던 신예작가 기준영은 이번 첫 장편에서 여전히 개성 넘치며 한결 풍성해진 감수성으로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를 갖게 한다.`와일드 펀치`는 언뜻 뚜렷한 서사가 존재하지 않는 듯한 독특한 플롯과 분위기를 지닌 소설이다. 이야기는 중산층 부부 `강수`와 `현자`의 결혼기념일에 이 부부의 이층집으로 강수의 친한 동생 `태경`과 현자의 어린 시절 의자매 `미라`가 찾아오며 다소 갑작스레 시작된다. 등장인물들의 감각적인 대사가 돋보이는 이 소설은 이야기의 의도적 분절과 장면전환 연출로 영화적인 느낌을 준다. 인물들의 대사 속에 과거와 현재가 교차되며 `서사`가 아닌 `장면`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전개는 일견 토크쇼의 한 대목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 작품은 함축적인 대화 속에 숨겨진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독자의 소설적인 상상력을 요하며 여기에 이 소설을 읽는 남다른 재미가 있다. 첫 만남 이후 진부한 약속의 말 없이 자연스럽게 시작된 태경과 미라의 연애처럼 이 소설은 별다른 설명과 군더더기는 생략한 채 세련된 솜씨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쓸쓸하다가도 어느새 따뜻해지고 건조하다가도 한순간 서정적인 대화들은 충돌하고 때로 어긋나며 한잔의 `와일드 펀치`처럼 묘한 조화를 이룬다.한편 우연히 시작된 네 남녀의 이야기는 기댈 곳 없는 소년 `우영`이 끼어들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어느날 갑자기, 전혀 다른 과거를 안고 얽히게 된 이 인물들에게는 고된 가족사라는 공약수가 있다. 각자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부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서로의 생채기를 공유했다 멀어지고 다시 어루만지는 위안의 여정을 되풀이한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유사한 상처를 떠올림으로써 타인의 상실과 아픔에 연민을 느끼는 유대감의 형성 과정은 상당히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미라와의 인연으로 우영이 인물 관계도의 한 축에 들어오게 된 것은 우연이지만 이 소년이 강수와 태경이 공유한 아픔을 치유하는 중요한 계기로 부각되는 결말은 이들의 만남이 결코 우연만은 아님을 넌지시 암시한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외로운 소년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고 그 위로가 다시 소년을 험한 세상에서 지켜줄 울타리가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세심한 독자는 위로의 순환을 목격한다. 낯선 타인으로 만난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가족`이라는 기적이 된다. `와일드 펀치`는 정형화된 가족의 틀을 탈피한 대안적 가족서사, 익숙한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삐딱한 연애서사, 건전함을 강요하지 않는 색다른 성장서사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읽는 이에 따라 다층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근래 보기 드문 풍요로운 텍스트다. 자칫 자극적인 눈요깃감으로 그치고 말 사건의 연쇄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들이 문학을 통해 타인의 고통에 참된 애도를 체험할 수 있도록 중심을 잃지 않는 태도에서 이 작가의 믿음직한 문학적 소신이 느껴진다.창비 펴냄, 기준영 지음, 264쪽, 1만1천원/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4-13

죄의식서 벗어나 자유를 향해 여행하라

죄의식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죄의식을 측정할 수 있는 유효한 기준이 있는 걸까? 죄의식은 감정일까? 아니면 측정 가능한 상태일까? 우리는 끊임없이 괴롭히는 죄의식으로부터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모든 인간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뼈저린 후회의 말을 남기곤 한다. `내가 왜 그랬을까?` `왜 그걸 몰랐을까?` `왜 보지 못했을까?` `왜 듣지 못했을까?`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을 수 있었을까?`와 같은 내면에서 올라오는 목소리와 생생한 기억들은 우리를 잠 못 이루게 한다. 죄의식이란 명쾌하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복잡한 주제다. 논리의 영역을 넘어서며 명확하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지지도 않고 어떤 경험으로든 제한 없이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이런 어둡고 음습한 죄의식의 영역이다. 오랫동안 심리치료 전문가로 활동한 저자는 우리가 회피하려 드는 영역 어딘가에 있는 비밀스러운 곳을 들춰낸다. 또한 우리가 행동이나 생각 혹은 존재로 인해 불행하다고 느낄 때 우리 내면에 고이는 불편한 감정이 무엇인지 탐색한다.`인간은 왜 죄의식으로 고통받는가`(알마)의 저자 케럴라인 브레이지어는 죄의식의 대부분이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대감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입증된 데서 깊은 수치심을 느끼고 자신이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게 된 후에 느낄 모욕감을 견딜 수 없어 한다.완벽한 자아를 꿈꾸는 사람은 반짝반짝 빛나는 멋진 새 차처럼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데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이 모범적인 것에 미치지 못하면 불타오르는 분노 속에서 죄의식이 싹트는 것을 경험한다. 삶의 매끄러운 표면에 흠집이 생겼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죄의식은 습관이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 불완전하다는 생각을 되뇌면서 그것을 확신하고 비통함에 빠진다. 게다가 스스로에 대한 비난을 자청한다. 이러한 행동이 그 사람의 존재를 유지해주기 때문이다. 이미 저지른 잘못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없다는 안도감을 얻기 위해 죄의식에 매달리는 것이다.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기대감에서 벗어나 `평범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자신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삶의 일상적이면서도 사소한 잘못들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우리가 완벽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는 존재이며 때때로 잘못도 저지르고 비난받기도 하는 인간이기에 잘못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러한 평범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으로 죄의식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죄의식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현실을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자기방어나 자신에 대한 비난으로 확대하지 말고 아무 감정 없이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태도는 자신에 대한 비평이나 비난의 감정을 걷어냈을 때 자랄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스스로를 판단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이 책은 우리에게 죄의식을 갖지 않아야 한다거나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죄의식은 누구나 갖는 정상적인 것인데, 마음 한구석에 숨겨둔 눈물 나도록 아픈 비밀과 대면하고, 부딪히고, 결국 용서했을 때 죄의식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이 책은 `조안`이라는 열 살짜리 가상의 소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소녀가 서른한 살이 되어 다시 20여 년 전에 살았던 곳으로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를 가지고 저자는 우리 안에서 싹트는 죄의식의 본질을 짚어낸다. 또한 가상의 이야기와 분석 그리고 해설 사이를 오가는 독특한 구조를 통해 죄의식을 탐색하면서 그 특징적인 측면을 설명하고 묘사한다. 아울러 저자는 이 책에 이론적인 설명을 되도록 넣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이 해석하고 논의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4-06

현대인의 삶과 애환 멋진 한시로 풀어내

“기쁜 교분이야 오랜 사귐 새 사귐 구분이 없지만/그저 한스럽기는 일이 많아 만날 때가 잦지 않다는 것/하늘 얼고 땅 어는 게 무어 탄식할 것이랴!/술잔 들고 즐거움 함께하는 것이 곧 따뜻한 봄이거늘….” `歡交無舊亦無新 但恨事多逢不頻 天凍地氷何足嘆 含杯共是陽春 -冬日遺懷-`한시(漢詩)는 어렵고 딱딱하며 진부하다고 여기기 쉽다. 그러나 중국 문학 연구자 강성위씨사진의 세 번째 한시집`술다리(酒橋)`(푸른사상)는 이런 편견을 금새 날려 버린다.한시의 형식을 빌리기는 했지만 내용은 현대적이다. 현대인의 삶과 애환을 한시만의 독특한 멋으로 풀어냈다.표제로 쓰인 `술다리(酒橋)`는 술이 사람의 고독한 심사를 교통하게 해주는 다리라는 뜻.“인간 세상은 험한 바다/사람은 모두 외로운 섬/그대와 나 함께 술잔 띄움은/다리 하나 서로 놓는 것”(人衆皆孤島 塵환是險洋 爾我共浮杯 一橋相築造 -致藝誠-)이 `술다리`는 시인의 후배가 인터넷 동호회 카페에서 이 시집의 마지막 시편인 `致藝誠(예성에게)`를 읽고 언제 `주교(酒橋)`나 한번 놓자며 모임을 제안한 적이 있어 시집 제목으로 삼게 된 것이라고 한다.“세상일에 갈래가 많아 만남이 곧 이별/술동이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새벽닭이 운다/본디 바닷물은 짜기가 비할 바 없나니/그대여, 배 안에서 눈물 뿌리며 가지 말게나”(世事多端逢卽別 酒樽未竭曉鷄鳴 由來海水鹹無比 君莫船中灑淚行) - `喜逢故友而翌日遠別(기쁘게 옛 친구를 만났으나 이튿날 먼 이별을 하다)` 시집에는 `술을 대하고서(對酒)` 등 술에 대한 시가 많으며 그외 `겨울날에 울적한 회포를 풀다(冬日遣懷)` `봄을 맞으며 감회가 있어(迎春有感)` `꽃 핀 뒤 눈 내리는 밤에(花後雪夜)` `새 달력을 받고(新曆見贈)` `집사람이 금연을 재촉하다(妻促斷煙)` `우리 집이 싫어하는 것(吾家所嫌)` 등 일상적인 주제를 다룬 80수의 한시가 번역문과 함께 실려 있다. `봄날 아침에 들길 거니는 것/여름 한낮에 계곡에서 멱 감는것/가을 저녁에 오동나무에 걸린 달을 보는 것/겨울 밤에 소나무에 이는 바람소리 듣는 것`(春早行郊外 夏日泳溪中 秋夕望桐月 冬夜聽松風)-`四時四快(사시사철의 네 가지 즐거움)`이 시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적인 감회를 드러내면서 시 속에 하루의 현상 즉, 아침, 낮, 저녁, 밤을 춘하추동과 절묘하게 결부시켜 음양오행의 이치까지 담고 있어 운치가 더욱 우러난다.`吾家所嫌(오가소혐)`은 가족들이 싫어하는 것들을 해학적으로 그려낸다. `딸아이는 몸이 살찌는 것을 싫어하고(女息惡身肥)/나는 시구가 졸렬한 것을 싫어하는데(愚生嫌句拙)/우리 집사람은 두 부녀가(荊妻厭兩人)/걸핏하면 끼니 거르는 걸 싫어한다네.(動輒休餐)`강씨는 일상적인 소재를 시에 담아내며 한시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 이는 한시가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과의 거리를 좁히려는 몸짓이기도 하다.이런 강씨의 `술다리`에 대해 맹문재 시인(안양대 교수)은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가 인생의 무상을 노래한 것이라면 강성위의 `술다리` 시편들은 삶의 긍정을 노래한 것이다. “술잔 들고 즐거움 함께하는 것이 곧 따뜻한 봄”이라고 했듯이 자신은 물론 인연이 된 대상들을 품고 공동체의 가치를, 곧 휴머니즘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제재들을 눈물에서부터 해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면서도 참신하게 변주하고 있는 그의 시편들은 “겨울밤에 소나무에 이는 바람 소리”조차 우리에게 즐거우면서도 인정 많고 또 소중하게 들려주고 있다”고 했다.또한 김언종 교수(고려대)는 “어떻게 강성위는 일상의 곡진한 내용을 한시의 형식에 맞추어 섬세하고 굴곡 있는 감정을 한시의 격률(格律) 속에 담을 수 있었는지 표현할 수 있었을까?”라며 “그의 `晩秋訪友`와 같은 시는 당시(唐詩)에 섞어 놓으면 어느 것이 당나라 때의 시인이 지은 것인지 어느 것이 21세기의 한국인 강성위가 지은 것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4-06

현대예술 거장들에 대한 성찰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기술`(1986), `배반의 약속`(1993), `커튼`(2005)에 이어 네 번째 에세이를 펴냈다. 바로`만남`(민음사)이다. 전작들이 쿤데라 소설의 정체성, 중부 유럽 소설의 현재 위치, 나아가 소설이라는 예술 장르의 의미를 말하고자 했다면 `만남`은 쿤데라 인생에 잊지 못할 방점을 찍어 준 예술가, 혹은 예술 작품들과의 “스파크고 섬광이고 우연”인 만남들, 작품 발문을 인용하자면 그의 “성찰과의, 추억과의, 오랜 주제와의, 오랜 사랑과의 만남”들을 소개한다. 쿤데라가 경탄한 작가 베케트, 브로흐, 이오네스코, 말라파르트, 쿤데라와 교류했던 동시대를 움직였던 작가 르네 데페스트르, 카를로스 푸엔테스, 루이 아라공 뿐만 아니라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과 작곡가 야나체크 등 쿤데라와 여러 거장들과의 만남은 독자들에게 또한 강렬하고 아름다운 경험을 선사한다.`세기의 천재들` 자료에 따르면 이 천재들이란 코코 샤넬, 마리아 칼라스, 프로이트, 마리 퀴리, 빌 게이츠, 피카소, 이브 생로랑, 록펠러, 큐브릭, 토머스 에디슨 등이다. 쿤데라는 이 명부가 “매우 분명하게 현실적인 변화를 예고했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문화의 천재들을 조금의 후회도 없이 멀리 내친 것이다. “세기병과 도착증, 그리고 그 죄악과 함께 모두 명성이 더러워진 문화적 우두머리들”보다 “코코 샤넬과 그녀 드레스의 순수함”을 사람들이 선호한 것에서 쿤데라는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만남`에서 쿤데라가 주목한 화가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다. 쿤데라는 미셸 아르솅보의 제안으로 한 잡지에 베이컨에 대한 에세이를 썼고, 베이컨은 이를 읽고 “스스로를 발견한 드문 글 가운데 하나”라고 전해 왔다고 한다. `만남`에는 바로 그때의 에세이와, 훗날 덧붙인 글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쿤데라는 베이컨의 뮤즈였던 여인 헨리에터 모레스의 초상 삼부작을 보고 깊은 영감을 받았다. 쿤데라는 베이컨의 초상화가 `자아`의 한계에 대한 `질문`이라고 말한다.한편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두고는 “소설 예술의 극치인 동시에 소설의 시대에 보내는 작별 인사”라고 평한다. 뿐만 아니다. `백조의 날개`를 쓴 아이슬란드 소설가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 스페인 작가 후안 고이티솔로, 루마니아 출생 그리스 작곡가 이안니스 크세나키스 등 어쩌면 국내 독자들에게 약간은 낯설지도 모를 예술계 거장들이 쿤데라의 눈과 귀와 손을 거쳐 독자들을 매혹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4-06

무엇이 청춘을 파괴하는가 그것은 시간이라는 깡패다

지난해 퓰리처상 수상작 `깡패단의 방문`(문학동네)이 출간됐다. 지난해 `킵`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제니퍼 이건의 최고작으로, 전미비평가협회상, LA 타임스 도서상을 수상하고,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퍼블리셔스 위클리` `타임` `오프라 매거진` 등 주요 매체 25개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며 언론과 평단의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작품이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소설가로는 드물게 제니퍼 이건을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꼽기도 했다. 열세 개의 장으로 이뤄진 `깡패단의 방문`은 각각의 장이 다른 화자, 다른 시간, 다른 공간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는 레코드 레이블 대표 베니와 그의 비서 사샤를 중심으로 뻗어나가는 인간관계이자 그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다. 이야기의 시간순서를 뒤섞고, 문자메시지와 파워포인트 등 파격적인 형식을 도입하는 `깡패단의 방문`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 그리고 그것이 빚는 부조리와 비애를 그린다. 퓰리처상 위원회는 “타임워프 하듯 변모하는 문화에 따스한 호기심을 보이고, 디지털 시대에 어른이 된다는 것,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독창적으로 탐구한다”며 수상작 선정 이유를 밝혔다.제니퍼 이건은 지난해 `타임`이 선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이름을 올린 세 명의 소설가 중 하나다. 또` 깡패단의 방문`은 지난해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서 연말 결산 기획으로 작가들에게 `올해의 책`을 물었을 때 가장 많이 언급된 책이기도 했다.레코드 레이블 대표 베니와 그의 비서 사샤. 이야기는 그들의 비밀스러운 과거와 다가올 미래, 주변 사람들의 내면을 넘나든다.제목인 `깡패단의 방문`에서 `깡패단(Goon Squad)`은 원래 노동조합원들에게 부당한 폭력을 일삼으며 정당 하부조직을 부패시키는 조직을 뜻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반적인 의미의 폭력 조직을 가리키게 됐다. 최근엔 `갱(gang)`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의미가 순화돼 `패거리` `무리` 정도의 뉘앙스로도 많이 쓰인다. `깡패단의 방문`에서 퇴락한 로커 보스코가 말하듯이, 시간은 깡패다. 시간이라는 깡패는 젊은이들을 부수어버린다. 어마어마한 힘으로 그들을 계속 후려친다. 마침내 그들이 숨을 멈추는 순간까지. “언제나 오늘 같을 거야”라는 제멋대로의 낙관과 “결국 이거였던 거야”라는 쓰디쓴 회한을 오가는 소설 속 인물들은 바로 우리 자신의 끝없는 데자뷔와도 같다.`깡패단의 방문`에서 등장인물들은 록 음악 혹은 음악산업과 어떤 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있다. 록만큼 시간성에 종속되는 사례가 또 있을까. 순수성을 부르짖는 록, 특히 펑크록은 1970년대 이래 청년하위문화의 구심점이자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전복할 힘을 가진 `반문화`로 자리해왔다. 하지만 가장 쿨한 힙스터 문화로 `팔리면서` 오히려 자본주의에 포섭되고 마는 아이러니한 문화이기도 하다. 실제로 제니퍼 이건은 히피와 게이와 펑크록의 전성기였던 1970년대 말 샌프란시스코에서 십대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이건이 `깡패단의 방문`을 집필할 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미국 드라마 `소프라노스`였다. 특히 마흔이 넘으면서 `시간`에 천착하게 된 이건은 9·11 테러라는 엄청난 사건을 직접 겪었고(브루클린에서 살고 있다), 당시 읽고 있던 책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였다.이렇듯 작품 속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의 삶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는 사건은 9·11 테러다. 월드트레이드센터의 붕괴와 재건, 근미래에 쌍둥이 빌딩의 터에 조성된 메모리얼 풀(The Memorial Pools) 주변에서 열리는 콘서트까지. 초강대국 미국부터 9·11 테러로 상징되는 몰락, 그리고 새로운 재건을 꿈꾸는 근미래의 미국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이건은 개인적 삶이라는 수많은 바늘귀들을 거쳐 촘촘히 꿰어나간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3-30

우리 안의 분노와 슬픔 책의 언덕에서 불어오는 미풍과 함께 사라진다

빌 게이츠는 바쁜 일과 중에도 매일 한 시간씩, 주말에는 두세 시간씩 책을 읽는 독서광이다. 그는 “컴퓨터가 책을 대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버드대 졸업장보다 독서하는 습관이 더 소중하다”고 밝혔다. 루소는 어릴 때부터 책을 읽었는데 한 권을 다 읽지 않고서는 결코 자리를 뜨지 않았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을 나서면서 1천여권의 책을 싣고 떠났다. 링컨은 아버지의 꾸중을 들을 때에도 책을 주머니에 숨겨 넣고 틈틈이 읽었다.책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기에, 수많은 위인들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을까. `혼자 책 읽는 시간`(웅진지식하우스)의 저자 니나 상코비치는 하루에 한 권씩, 1년간 365권을 읽었다. 이렇게 책을 읽기 전, 그녀의 삶은 만신창이였다. 3년 전, 언니를 병으로 떠나보내고 그녀는 온갖 일을 하면서 슬픔을 잊으려 했지만 허무함은 커졌다. 그러던 중 400쪽이 넘는 소설 `드라큘라`를 읽고 처음으로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평소에 자신을 괴롭히던 감정들이 사라지고 책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새삼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인물들이 생의 시련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저자는 독서의 한 해를 `요양원에서 보낸 한 해`로 비유한다. 책의 언덕에서 불어오는 미풍은 우리 안에 있는 건강하지 못한 분노와 슬픔의 공기를 날려준다. 그 과정을 기록한 `혼자 책 읽는 시간`은 책이 주는 위로와 치유의 마력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 `고슴도치의 우아함`을 시작으로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미스터리를 대하는 법을 알려준 `셀프의 살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결코 버릴 기억은 없다는 것을 일깨워준 찰스 디킨스의 `귀신 들린 남자와 유령의 흥정`, 사랑하는 언니를 먼저 보냈다는 죄책감을 떨치게 해준 `우연히`, 과거의 사랑은 추억하고 지금의 사랑은 인정하게 해준 `사랑의 역사`, 세상은 예측불가능한 곳이지만 동시에 경이롭다는 사실을 알려준 폴 오스터의 `어둠 속의 남자`, 다른 세대의 경험을 가진 부모님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해준 `저격`, 슬픔을 흡수하는 방식을 일깨워준 `기억을 파는 남자`와 `이민자들`, 그리고 독서의 한 해가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던 톨스토이의 `위조쿠폰`까지, 365권은 인생이란 무엇인지 알려주는 교과서였다.인생에서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괴로운 감정을 잊기 위해 온갖 짓을 다한다. 술을 마시고, 수다를 떨고, 스스로를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고 해서 마음의 상처가 낫진 않는다.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못한 상처는 불쑥 나를 찾아와 무기력하게 만든다. 시련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무엇일까. 몽테뉴는 “어떤 슬픔도 한 시간의 독서로 풀리지 않았던 적은 내 인생에 한 번도 없었다”며 힘든 순간에는 언제나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저자가 선택한 방법도 책 읽기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녀는 책을 통해서 삶을 구원받아왔다. 베스트프렌드가 떠난 빈자리도, 실패한 연애의 아픔도 책으로 구원받았다.언니의 죽음은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시련이었다. 그래서 3년 동안은 최대한 삶으로부터 도피하려고 애썼다. 잊기 위해서 내가 아닌 다른 것들로 채웠지만, 오히려 아픔만 커질 뿐이었다. 하지만 보랏빛 독서 의자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책만 읽었던 1년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저자는 바쁜 나날에서 잠시라도 떨어져 나와 쉬는 것만으로도 뒤집어진 삶의 균형을 복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오후의 뜨개질, 나홀로 산책일 수도 있고, 퇴근 후 요가수련 혹은 저자처럼 홀로 책 읽는 시간일 수도 있다. 주어진 삶이 버겁다면 혼자, 책 읽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은 어떠한가./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3-30

인생을 맑고 향기롭게 만드는 보석 같은 이야기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끝없이 질문을 던진다. 행복이란 무엇인지,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들을 잘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사람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얻는 비결은 무엇인지…. 하지만 우리는 인생을 둘러싼 이러한 질문들 앞에서 좌절하고 슬퍼하고 방황하고 포기한다.질문은 있지만 `정답`은 없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직관적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우리는 질문을 멈춘다.질문을 대신해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과연 행복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도 바쁜 내가 성공을 꿈꾼다는 게 가당키나 한 걸까? 내 인생은 정녕 바뀔 수 있을까?`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로 전세계 수천만 독자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한 잭 캔필드와 마크 빅터 한센이 다시 독자들을 찾아왔다.`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이후 10여 년 만에 선보이는 이 책 `죽기 전에 답해야 할 101가지 질문`은 우리의 인생을 맑고 향기롭게 만들어줄 보석 같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세상 곳곳에서 자기 인생의 답을 찾아낸 사람들의 땀과 열정 그리고 감동의 이야기를 담았다.`나는 오늘 죽어가고 있는가,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과거와 이별했는지`, `원하는 삶에 가까워지고 있는지` 등 생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삶에게 묻고 삶에게 답해야 할 이야기들을 총망라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