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여울물 소리` 자음과모음 펴냄 황석영 지음, 496쪽, 1만5천원<br>봉건왕조·신분 붕괴 등 주제의식과 소재 `방대` 진정한 압축으로 풀어내<br>인터넷 연재를 통해 독자 열광적 호응 얻어
1962년 `사상계`에 `입석부근`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황석영이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동시에 그의 나이 칠십에 이르렀다. 그의 문학 인생 50년을 되돌아보면 단 한 순간도 평범했던 적이 없었다.
황석영의 발자취는 우리의 근현대사와 항상 함께해왔다. 황석영이라는 인물 자체가 격동의 시대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는 그릇인 것이다. 황석영은 당대 역사의 큰 물줄기 속에서 단 한 번도 직면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맞서며 주옥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황석영이 우리 식의 `이야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심해온 것은 그의 후반기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 출옥 이후부터이다. `오래된 정원`이 이전 산문의 습관들을 해체하는 데서 시작했다면, 그 뒤 연이어 발표한 `손님`, `심청`, `바리데기` 등은 우리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형식과 내용 모두 지금의 현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심의 흔적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르포나 신문기사 같은 사실적 자료를 바탕으로 개발독재의 사회사를 서사적 다큐멘터리로 엮은 작품이 `강남몽`이고, 1980년대가 배경이었지만 줄거리 자체를 현대적 민담으로 탄생시킨 작품이 `낯익은 세상`이다.
그리고 이제,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자신을 돌아보며 19세기의 `이야기꾼`에 대해 집필한 자전적 작품 `여울물 소리`(자음과모음)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이 작품은 이미 인터넷 연재를 통해 독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을 얻은 작품이기도 하다.
`여울물 소리`는 외세와 신문물이 들이치며 봉건적 신분 질서가 무너져가던 격변의 19세기를 배경으로 이야기꾼 `이신통`의 일생을 뒤쫓는 내용으로 동학과 이야기꾼이라는 존재를 큰 축으로 하고 있다.
19세기는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봉건왕조가 무너져가던 때로, 민중의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제국주의 외세의 개입으로 좌절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동학은 민중의 자생적 근대화 의지가 담긴 사상이었고, `이야기꾼`은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가장 잘 나타내는 존재로, 이신통을 통해 작가의 담론을 펼쳐낸다.
“내 마음 정한 곳은 당신뿐이니, 세상 끝에 가더라도 돌아올 거요”
`여울물 소리`는 19세기 격동의 시대를 담아낸 작품으로, 그 주제의식과 소재 등은 대하소설을 써도 충분할 만큼 방대하다.
이런 방대한 작업을 단 한 권으로 집필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진정한 압축의 미를 보여준다. 그만큼 밀도 있고 탄탄한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또한 동학, 전기수, 강담사, 작자 미상의 수많은 방각본 소설, 타령 등 다양한 소재들은 소설 곳곳에서 감초 같은 역할을 하며 독자들에게 독서의 재미를 선사한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화자 `박연옥`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시골 양반과 기생 첩 사이의 서녀로 태어난 연옥은 이신통에 대한 연정을 한평생 마음속에 품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리워하며 인내하는 우리네 전통적인 여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사라진 그를 찾기 위해 직접 그의 행적을 따라 길을 나설 정도로 당찬 면모를 보여준다.
소설은 연옥의 입을 통해 모자이크 벽화처럼 이신통의 행적이 드러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신통은 물론 주변인들의 태생, 성격과 이들이 겪은 일을 손바닥 보듯 훤하게 꿰뚫고 있는 연옥은 사실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에 근접한 1인칭 관찰자이다.
“갑오년에 시작된 혁명이 이제 다 끝났지요. 그러나 아주 끝나버린 것은 아니외다. 물이 말라 애를 태우던 가뭄이 지나면 어느새 골짜기와 바위틈에 숨었던 작은 물길이 모여들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비가 오고, 강물은 다시 흐르겠지요. 백성들이 저렇게 버젓이 살아 있는데 어찌 죽은 이들의 노고가 잊히겠습니까? 세상은 반드시 변할 것입니다.”(p. 467)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