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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작 보다 끝이 더 아름다웠던 사람

“장애는 불편함일 수는 있어도 불완전함은 아니다. 당신을 지배하는 생각의 장애, 마음의 장애, 영의 장애를 뛰어 넘으라. 나의 장애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희망은 이뤄진다”강영우 박사는 시작보다 끝이 더 아름다운 사람이다. 시각장애인이라는 핸디캡을 안고도 우수한 성적으로 연세대학을 졸업하고 유학길에 올라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냈다.은퇴 후에도 전 세계 장애인들 가슴에 품고 장애인 인권과 복지를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췌장암 말기라는 청청벽력 앞에서도 그는 결코 하나님을 향해, 생애에 대해 아쉬움이나 미련을 보이지 않는다. 한 평생 하나님과 함께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강 박사가 펴낸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두란노)는 지난 한 평생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또 자신과 함께, 혹은 자신보다 앞서거나 더 낮은 자세로 장애인과 소외계층들을 위해 섬김을 다한 이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는 헬랜 켈러나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와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이들도 있고, 또 잘 알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원리를 배울 수 있다. 또 저자를 비롯해 여기에 등장하는 인간 천사들의 생애와 업적을 통해 하나님이 바라시는 신앙인의 참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강영우 박사의 유고작이 된 이 책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취장암 말기, 얼마 안남은 생의 마지막 끝자락을 자신을 위해 허비하기 보단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늘도 장애인의 인권과 제도 개선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다른 이들을 소개하며 겸손히 마무리하고 있기 때문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3-23

박태준 영일만 기적·신화세계 제일 철강왕 기리다

“이 책은 그의 정신을 기억하고 전승하려는 하나의 시도이자, 고인의 유택에 바치는 특별한 꽃이다”“2011년 12월13일, 세계 제일 철강 왕 잠들다 그리고….”21일 철강왕 고(故)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100일 탈상 추도식이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렸다.고인을 그리워 하는 이들이 이날 추모집 `청암 박태준`(아시아)을 발간했다.국·영문이 함께 적힌 추모집에는 박 명예회장의 마지막 연설문과 각계 인사들의 추모사, 연구논문 등이 담겼다.1997년 초여름 고인을 처음 만나 부음을 알린 날까지 고인과 숱한 시간을 함께 보내며 그의 생애와 사상과 추억에 대한 온갖 대화를 나누었던 평전 `박태준`의 저자인 이대환 소설가는 박태준이 일으킨 기적의 정신을, 신화의 장면들을 또렷하게 보여준다.이 작가는 “전 세계에 있는 박 명예회장의 지인에게 보내고, 고인을 그리워하는 일반 시민을 위해 서점에서도 판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내가 지켜본 박태준의 최고 매력은 무엇인가? 지장, 덕장, 용장의 리더십을 두루 갖춘 그의 탁월한 능력인가? 흔히들 그것을 꼽는다. 나도 흔쾌히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최고 매력으로 꼽진 않는다. 내 시선이 포착한 그의 최고 매력은 `정신적 가치`를 가치의 최상에 두는 삶의 태도였다. 그의 삶은 늘 통속을 거부했다. 통속적 계산을 경멸하는 작가만큼 치열하게 자기 신념의 정신적 자계(磁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주인공의 요청이나 부탁이 아니었건만 작가 스스로 평전을 쓰게 만드는 그 매력을, 그는 나에게 연인의 향기처럼 풍겼다” (본문 76쪽)“포스코 착공의 장면에서 그가 일으킨 감동적인 일화는 저 유명한 `제철보국`과 `우향우`다. 어려운 단어가 아니다. 제철보국이란 포항제철을 성공시켜 나라에 보답하자는 것이며, 우향우란 오른쪽으로 돌아 나가자는 군대제식훈련의 용어이다. 그러나 둘은 박태준의 정신 속에서 짝꿍으로 맺어지자 어마어마한 정신적 무장으로 거듭나서 포스코를 `성공의 고지`로 밀어 올리는 원동력이 되었다”(본문 78쪽)“박태준은 일류국가의 밑거름이 되려는 신념을 `포스텍` 설립에도 눈부시게 발휘했다. 1985년이었다. 새로 시작한 광양제철소 건설에 들어갈 자금도 엄청난 규모였지만 그는 과감하고 단호하게 한국 최초 연구중심대학 설립을 밀어붙인다”(본문 82쪽)이 작가는 “포스코, 포스텍과 포스코의 학교들을 통해 박태준은 제철보국·교육보국 사상을 실현했다. 일류주의도 실현했다. 또한 그것은 일류국가의 토대구축에 지대한 공헌이 됐다. 과연 그의 인생을 한 문장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했다.“생존의 길을 찾아 일본으로 들어간 아버지의 뒤를 좇아 현해탄을 건너갔던 수많은 식민지 아이들 가운데, 사춘기를 벗어난 무렵에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와 빈곤에 허덕이는 신생독립국의 어른으로 성장한 다음, 유소년기에 어쩔 수없이 익혔던 일본어와 일본문화로써 가장 훌륭하고 가장 탁월하게 조국에 이바지한 인물은 박태준일것이다”이 작가는 “고인이 세계 최고 철강 회사의 회장을 지냈으면서도 포스코 주식을 한 주도 받지 않고 청빈하게 살아갔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포스코나 포스텍 등과 관련이 없는 일반 시민들조차 그를 추모하고, 지금까지도 묘소를 참배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가장 큰 이유가 그가 비리로 얼룩진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시대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현상과 그 이유는, 고인의 정신세계와 함께 체계적으로 연구되어야 마땅할 것”이라고 강조했다.“태준이즘은 가능한가.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이하 포스코)를 창업한 박태준(朴泰俊) 회장의 이름 뒤에 이즘(ism)을 붙인 `태준이즘`이라는 명명(命名)이 영국의 대처리즘, 미국의 레이거니즘처럼 가능한가. 그처럼 거부 없이 수용되고 저항 없이 소통되는 사상 유형이나 지식 체계 혹은 사고방식이나 실행모드가 될 수 있는가”-송복 (본문 135쪽)연세대 사회학과 송복 명예교수는 `특수성으로서의 태준이즘 연구`에서 `태준이즘`을 주창한다. 그는 이즘 형성의 3요소로 사상, 리더십, 업적 세 가지를 꼽으며 청암 박태준이 이에 얼마나 적합한 인물인가를 연구논문으로 밝혔다.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지만 특히 고인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서는 단순한 성과가 아니라, `대성취`라고 말한다.`누구에게나 이론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지는 대성취`를 통해 박태준의 정신은 태준이즘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3-23

한식 세계화 20년 “밥상머리교육이 미래다”

생활도자기에 대한 애정이 음식으로 연결, 세계속의 한식문화를 전파해 온 조태권 광주요그룹 회장이 그동안의 발자취를 책으로 엮어 `조태권의 문화보국`(김영사)을 발간했다.저자 조태권은 지난 20년을 한식 세계화에 `미친`시간이었다. 가업으로 광주요를 물려받은 뒤, 도자기를 알았고, 거기에 어울리는 음식을, 그리고 음식을 대접할 최고급 식당을 만들었다. 식당의 이미지를 연출할 전통 벽지를 개발하고 마지막으로 전통주를 개발했다. 그에게 한식은 단지 음식이 아닌 우리의 문화와 정체성이었다. 이런 과정의 그 이야기를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고 그 과정은 고스란히 이 책에 묻어있다.처음 한식을 전파 할 당시, 말도 안 되는 짓을 한다는 조롱을 들었던 생활 도자기 개발과 함께 찬사와 비난을 한꺼번에 받아야 했던 최초의 고급 한식당 `가온` 의 오픈 등 저자 조태권의 인생은 한식 세계화에 온전히 바쳐졌다. 지난 24년간 그가 한식 세계화에 쏟아 부은 돈은 무려 600억원에 이른다. 물려받은 가업이나 조용히 경영할 것이지 무모한 짓을 한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의 도전으로 한식에 대한 편견과 고정 관념이 깨지기 시작했고, 우리의 문화가 명품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불모지였던 한식 문화 사업에 거대한 밑그림을 그려가고 있는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나는 이 땅에 태어나 살아오면서 수많은 혜택을 누려왔다. 이제 그 혜택을 이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을 가고 있다. 문화란 이 땅의 후손들이 누리며 살아가고, 다시 그 후손에게 물려줘야 할 보물이다. 그것이 `문화보국`의 의미이다. 그걸 알기에 나의 도전은 멈추지도 지치지도 않을 것이다”저자는 책을 통해 우리에게 `한식 세계화`라는 말은 이제 식상해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말만 무성했지 구체적으로 진전된 것은 아직 없다. 나 역시 보고 배울 선례가 없었기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 내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길이 우리 민족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자존심을 회복하고, 계층 간의 격차를 줄이는 실질적인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지금 나는 내게 주어진 소명을 깊이 자각하고 있다. 다른 사람이 걷지 않은 길을 걷는다는 건 외로운 일이다. 특권인 동시에 굴레이기도 하다. 중국의 노신이 말했던가. 길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걷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고. 목표와 의지를 가지고 꾸준히 걷는 사람 뒤에 그 뜻을 이해하고 뒤따라 오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길은 만들어진다. 지난 20년간 나는 `한식 세계화`라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길을 걸어왔다. 나는 이제 한식 세계화를 우리 모두가 함께 걷는 공로(公路)로 만들고 싶다고 소개했다.책을 낸 동기에 대해 저자는 “나는 음식에도 서열이 있고 우리나라의 미래 성장동력이 되고 사람들의 의식을 개혁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인성교육과 감성교육은 밥상머리에서 이뤄지며, 그 밥상 위의 음식에 거꾸로 우리나라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진리. 그것을 알고 나자 혼자 가슴에 품고 있기에는 너무도 벅차고 절실했다. 그 절실한 깨달음이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고 밝혔다./황태진기자 tjhwang@kbmaeil.com

2012-03-23

흥행 돌풍 영화 `화차` 완역본 소설

미야베 미유키의 사회파 미스터리 걸작 `화차(문학동네)`가 새로운 번역으로 재출간 됐다. 기존 번역본에서 빠지거나 축약됐던 부분을 최대한 원문에 가깝게 되살려낸 결과 원고지 500매 정도의 분량이 추가된 완역본으로, 미야베 미유키 특유의 인간적이고 세심한 필치, 치밀한 구성력을 한층 생생하게 맛볼 수 있다.신용카드와 소비자금융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자본에 잠식당한 현대 소비사회와 크고 작은 욕망을 좇다가 예기치 못한 비극에 휘말린 사람들, 그리고 낙오된 이들을 어둠으로 삼켜버리는 비정한 도시의 현실을 그려낸 이 작품은, 거품경제가 붕괴한 직후인 90년대 초의 일본 사회상을 생생하게 표현해냄과 동시에 미스터리 소설 특유의 긴장감과 속도감, 시종 인간적인 시선을 잃지 않는 설득력 있는 묘사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제6회 야마모토 슈고로 상 수상, 주간문춘 베스트10 1위, 문예춘추 20세기 걸작 미스터리 베스트10 2위 등의 기록을 세웠고, 출간 후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으며, 2008년에는 미스터리 팬들이 직접 뽑는 작품 순위인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의 20주년 기념 총결산 앙케트에서 해외편 1위인 움베르토 에코의`장미의 이름`과 나란히 국내편 1위에 올랐다. 한국에서 변영주 감독, 이선균, 김민희, 조성하 주연으로 영화화돼 지난 8일 개봉했다.휴직중인 형사 혼마 슌스케는 어느 날 먼 친척 청년 가즈야로부터 약혼녀 세키네 쇼코를 찾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결혼을 앞두고 신용카드를 발급받으려다 심사과정에서 과거에 개인파산을 신청한 적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 의아한 것은 그녀 본인 역시 자신의 파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눈치였다는 것이다. 단순한 실종사건으로 생각하고 개인적으로 조사를 시작한 혼마는 시간이 갈수록 그녀 뒤에 또다른 여자의 그림자가 유령처럼 붙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다중채무자라는 딱지를 내버리고 타인의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살려 했던 한 여자. 대체 세키네 쇼코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녀는 왜 그렇게까지 자신의 존재를 감추려 했는가?적지 않은 분량 내내 균형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필력과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한 소비심리와 허영심에 경종을 울리는 사회적 메시지까지,`화차`는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의 한 완성형이자 뛰어난 오락성을 지닌 대중소설로 앞으로도 많은 독자를 미야베 미유키 월드로 끌어들일 것이다.문학동네 펴냄,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번역, 448쪽, 1만3천8백원/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3-16

김선우 시인 네번째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 김선우 시인생동하는 시어와 발랄한 상상력으로 아름답고 따뜻한 시세계를 보여준 김선우 시인의 네번째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가 출간됐다. 세번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를 펴내면서 “당분간 시를 떠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확하게는, 시를 청탁받고 발표하는 관행으로부터 떠나 있는 일”이라고 밝혔던 시인은 그동안 두권의 장편소설을 잇달아 발표해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이제 본업의 자리로 돌아와 5년 만에 펴내는 반가운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자연인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비루한 삶 속에서도 생의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하는 긍정의 마음을 펼쳐 보인다. 가혹한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들의 고통과 슬픔을 어루만지며 타자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애잔한 사랑의 시편들이 가슴 한켠을 촉촉이 적신다.“목련꽃을 사랑하는 이에게/목련 열매를 마저 보여주어라//꿈지럭거리며 허물 벗는 무섬증 같은//여러개의 심방을 가진 심장,/분열하는 붉은 열매를 찢고//꽃이 사뿐 날아오를 때//꽃을 기억하는 사람의/꽃이 아니라//꽃이 기억하는 열매까지/보여주어라//꽃으로 보여주어라” (`목련 열매를 가진 오후` 전문)여린 듯하면서도 당찬 목소리로 가슴을 파고드는 김선우의 시는 생명의 온기와 사랑의 정념으로 충만하다. 삶의 방식은 달라도 서로에게 기대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시인은 “야산 오솔길 벤치”에 “사흘째 잠에서 깨지 않은 채 딱딱해진” 노인을 “나흘째 경찰이 와 마대자루에 담아”(`눈많은그늘나비`)가는 비정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언제부터 사람이/사람 위에 사람 위에 사람 위에 살게 되었나”(`잘 구워진 메아리가 접시 위에 앉아 있다`) 되묻는 시인은 “구겨져도 아픔을 모르는 착한 혼(魂)들”(`구석, 구석기 홀릭`)을 감싸안으며 세상의 낮은 곳을 향하여 삶의 비극을 넘어서는 연대적 사랑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전쟁과 학살로 얼룩진 제국 시대의 그늘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하는 시인은 전세계로 시야를 넓히며 “폭탄이 쏟아지는 건너편 땅을 바라보며 신(神)을 가진 사람들이 브라보! 외”(`아무도 미워하지 않은 자의 무덤`)치는 참혹한 역사의 현장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젊은 날 그 자신도 이 땅에서의 혁명을 꿈꾸었던 시인은 영원한 혁명가 체 게바라(`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팔레스타인의 저항시인 마무드 다르위시(`그림자의 키를 재다`)의 숭고한 삶을 되새기고, 미군의 팔루자 학살과 이라크전쟁 이후 오폭과 학살로 숨진 민간인 희생자들을 “부수적 피해”로 치부하는 미국의 오만과 “죽은 사람들이 밀려드”는 묘지로 돌변한 축구장에서 “해골처럼 덜그럭거”리는 “해를 차며 아이들이 달”(`축구장 묘지`)리는 무참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비극적 현실을 한 꺼풀씩 드러낸다.에코페미니즘과 불교 사상에 닿아 있는 김선우 시인은 물질사회의 풍부함보다는 자연의 영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생태적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잿빛 도시의 검은 빌딩 숲을 벗어나 오랜 시간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며 살아온 시인은 “조그만 나뭇잎 한장 속에/일생의 나무 한그루와 비바람이 다 들어 있”(`눈 그치고 잠깐 햇살`)음을 꿰뚫어보는 예지의 눈빛으로 사물을 바라본다. 시인은 벌레가 갉아먹어 “구멍난 이파리”에서도 “누군가에게 자기를 덜어 먹인”(`허공의 내력`) 흔적을 보며 상생의 조화로운 삶의 경이로움을 느낀다.수만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올려졌다/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무한 하늘 한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별들이 움직였다/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부분)창비 펴냄,128쪽, 8천원/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3-16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답을 듣다

12억 가톨릭 신자의 수장이며 이 시대 최고의 신학자이자 지성인 베네딕토 16세(본명 요제프 라칭거). 그와 독일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페터 제발트가 대담한 내용이 책으로 출간됐다. 이는 교회 역사상 최초의 교황 대담집으로, 독일의 헤르더 출판사는 이를 “교회의 신기원”이라고 했다. 교황이 털어놓는 교회와 사회의 위기, 그 문제점에 대한 생각과 그동안 궁금했던 그에 대한 사사로운 이야기가 베일을 벗게 된 것이다. 페터 제발트는 원래 반가톨릭적인 심층 기사를 써서 명성을 날린 인물이다. 교황이 추기경으로 있었을 당시 그를 비판할 목적으로 대담을 청했는데 그는 그 대담을 계기로 가톨릭교회로 회귀했다. 그 이후 꾸준히 교황과 인연을 맺어 왔고 이번에 교황에게 청한 대담이 성사된 것이다.2005년 4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뒤를 이어 265대 교황으로 선출된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으로서 세상의 높은 존경과 주목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의 재위 5년여를 되돌아보면 순탄치만은 않았다. 가톨릭 사제의 성 추문 사건은 사회적 충격과 함께 교황에게도 큰 고민을 안겨 줬고, 홀로코스트를 부정한 윌리엄슨에 대한 파문 철회는 유다인들과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또한 레겐스부르크 대학에서의 연설은 심각한 논쟁과 이슬람교도들의 반발을 불러 사상자까지 발생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외에도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과연 교황은 어떠한 이야기를 할까? `휴식을 바랐던 고령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이 된 순간 심정은 어떠했을까?` `가톨릭교회의 최고 목자가 된 뒤로 신앙에 달라진 점이 있을까?` `교황은 여가 시간에는 수단 대신 스웨터를 입기도 할까?` `급여 통장은커녕 서류 가방 하나도 없다는데 사실일까?` `세상의 빛`(가톨릭출판사)은 총 3부로 구성됐다. 제1부`시대의 징표들`에서는 위와 같은 교황 개인에 대한 소소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성 추문 사건과 상대주의 독재, 환경 파괴와 세속주의로 인한 지구 전체에 걸친 재앙 등에 대해 교황은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낸다.특히 성 추문에 대해 교황은 이 가슴 아픈 사건을 정화의 계기로 삼아, 사제들이 서로 살펴 주고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언급하면서, 신자들에게는 참빛이신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교회 공동체에 대한 믿음을 잃지 말라고 당부한다. 교황은 또한 차별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동성애라든가 여성의 성직 서품을 허가해 달라는 요구에 대해서제2부 `교황의 직무`에서 대담자는 진정한 교황의 모습에 대한 성찰, 교회의 내적 쇄신을 위한 노력,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과 이슬람과의 대화에 대한 성과와 방향, 회칙과 교서, 훈령에 대한 설명과 그 의미, 사목 방문에서 받은 인상들에 대한 교황의 입장을 끌어낸다.그래서 특히 성 추문 피해자들을 방문하고 위로한 일, 세계 청년 대회에서 받은 감동, 유럽과 북미에서 언급되는 교회의 위기 속에서도 새롭게 일어나는 신심 운동, 아프리카 사목 방문에서는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한 교회의 노력에 대해서도 언급하게 된다.제3부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는 우리 삶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며 이를 위해 필요한 일과 교회의 역할에 대한 대답이다. 게임과 도박, 포르노 중독 같은 병, 효율성의 극대화만을 노리는 대기업, 그에 시달리는 노동자, 가족 관계의 상실로 밖으로 내몰린 아이들, 도덕적으로 무감각하게 만드는 대중매체, 과학만을 맹신하는 세태…. 우리의 가치와 척도는 방향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복음화임을 교황은 언급한다. 피임, 성체성사에 대한 배타성, 사제 독신제와 여성의 사제 서품, 동성애에 대한 입장과 교회의 쇄신,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모님의 메시지, 복음을 바탕으로 한 종말론과 최후에 대한 이야기로 대담은 마무리된다.가톨릭출판사 펴냄, 페터 제발트 대담 및 정리, 정종휴 번역/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3-16

고요한 산사에 울려 퍼지는 법문 같은 맑은 울림

장석남(47)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문학동네)가 출간됐다. 절제된 시어로 간결하고 아름다운 서정시를 쓰는 장씨는 2년 만에 펴낸 새 시집에서 비움과 느림의 삶을 추구한다.절제된 시어로 엮어낸 시들에는 고요한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스님의 나지막한 법문 소리처럼 맑은 울림이 있다.“저물면 아무도 없는 데로 가자가도 고요는 도망가지 말아라고요의 눈망울 속에 묻어둔보석의 살들-이마 눈 코깨물던 어깨,점이 번진 젖, 따뜻한 꽃까지 다 어루어서잠시 골라 앉은 바윗돌아 좀 무겁느냐?그렇게 청매빛으로다가 저문다결국 모과는 상해버렸다”-`저물녘-모과의 일`전문버릴수록 가져지고 지울수록 선명해지는 게 세상살이의 이치라면 장석남의 시는 이미 그 일가를 이루었을 터, 이번 그의 시집은 작고 더 작아져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고요`라는 구멍 속에서 홀로이 노는 한 사내를 만나게끔 한다. 무쇠 솥을 사 몰고 올 때, 그것을 꽃처럼 무겁다 할 때, 그 속에 쌀과 수수와 보리를 섞어 안친 밥을 지어 우리들을 부를 때, 그를 어찌 시라 아니할까. 시로 그리 생겨먹은 것을.그가 가진 특유의 섬세함과 유연성을 가장 정점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자부하는 60편의 시가 3부로 나누어 담긴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강박적이리만치 열과 행을 꽤나 조여서는 더는 뺄 것도, 더는 넣을 것도 없이 콤팩트한 시를 우리 앞에 선보이고 있다. “하나 둘 셋 넷 다서 여서 일굽 일굽 일굽” 하듯 그만의 특유한 말법도 살아 있으려니와 두 줄 할 것을 한 줄로, 한 줄 할 것을 한 단어로 찍어버리는 데 선수가 되어버린 그는 말을 지우는 데 더 큰 말의 그림자가 드리운다는 것을 알아버린 연유로 이렇게 씨 뿌리듯 툭툭 시를 뱉는다. 손으로 쓰는 시 그 너머에 입으로 부는 시라니. “아무 보는 이 없이 피는 꽃이 더 짙은 까닭은 아무 보는 이 없기 때문”(`물과 빛과 집을 짓는다`)이란 말인가.이른바 더, 더, 가 아니라 덜, 덜, 을 향해 가는 비움과 침묵 속 여백과 공기의 팽팽함, 그로 풍만해지는 마음의 빈자리에 더욱이 아무나 앉히는 것은 결코 아닌 채로 시인은 빈 의자를 내놓는다. 그 일에 한생을 내걸 정도로 의자 따위에 작심을 하기도 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문학동네 펴냄, 116쪽, 8천원

2012-03-02

꽃망울 터지니 詩의 꽃이 활짝 피었네

전통 서정시의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서정시인으로서 문단 안팎의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문태준(42)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먼 곳`(창비)이 출간됐다. 토속적 정서에 밀착된 탁월한 언어감각과 특이한 시풍으로 서정시학의 아름다움을 선사했던 시인은 4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이전의 시세계와는 색다른 면모와 한걸음 더 진화된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체로 거른 듯 더욱 정갈해진 시어와 티 없이 맑고 선명한 이미지에 불교적 사유의 깊이가 도드라진 감성적인 시편들이 눈길을 끈다. 사물을 바라보는 세밀한 관찰력, 느림의 삶에 대한 겸허한 성찰, 인생의 무상함을 관조하는 고요한 마음이 낮고 차분한 목소리에 실려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이곳에서의 일생(一生)은 강을 따라갔다 돌아오는 일/꿈속 마당에 큰 꽃나무가 붉더니 꽃나무는 사라지고 꿈은 벗어놓은 흐물흐물한 식은 허물이 되었다/초생(草生)을 보여주더니 마른 풀과 살얼음의 주저앉은 둥근 자리를 보여주었다/가볍고 상쾌한 유모차가 앞서 가더니 절룩이고 초라한 거지가 뒤따라왔다/새의 햇곡식 같은 아침 노래가 가슴속에 있더니 텅 빈 곡식 창고 같은 둥지를 내 머리 위에 이게 되었다/여동생을 잃고 차례로 아이를 잃고/그 구체적인 나의 세계의, 슬프고 외롭고 또 애처로운 맨몸에 상복(喪服)을 입혀주었다”(`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부분)문태준의 시는 적요로운 풍경 속에서 슬픔의 “눈물자국 같은 흐릿한 빛”(`망인(亡人)`)이 어룽진다. “슬프고 외롭고 또 애처로운”(`강을 따라갔다 돌아왔다`) 시인에게 삶은 근본적으로 편안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형편이 반 썩은 복숭아 한알처럼 되어서” 꿈을 꾸어도 꼭 “몸속으로 자꾸 벌레들이 꼬물꼬물 들어”(`꿈속의 꿈`)서는 꿈을 꾸고, “상한 정신”(`사과밭에서`)을 앓고, “작고 네모진 보자기만도 못한”(`보퉁이가 된 나여!`) 자신의 모습을 보며 시인은 쓸쓸함과 비애감에 젖는다.삶은 아름답지만 찰나이고 항상 누군가와의 이별이 예정되어 있음을 아는 시인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며 내생으로 연결되는 삶을 고요하게 바라본다. 그 원초적인 공간에서 시인은 “한번 내쉬는 큰 숨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져 무엇이든 되고 싶어하고(`공백(空白)`), “서로에게/받친 돌처럼 앉아서”(`일가(一家)`) “하늘도 흰 물새도 함께 사는 수면”(`물가`)을 그리워한다. “풀밭 속 풀잎이 되고 나니” “모든 게 수월했다”(`아래로 아래로`)고 말하는 시인은 그렇게 사물과 타인과 감응하고 한몸이 되는 교감의 순간을 보여준다.일찍이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서정시 가문의 적자(嫡子)`라고 말했듯이 문태준 시인은 서정시의 전통과 문법을 존중하며 형식의 질서를 중요하게 여긴다. 여백의 미에 담긴 섬세하면서 온화한 풍경을 펼치며 한 호흡 느린 숨결과 한 박자 느린 걸음으로 여유롭게 삶의 무늬를 돋을새김하는 그의 시에는 불협화음도 없고 과격한 비유도 보이지 않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문태준 시인 `먼 곳` 창비 펴냄, 100쪽, 8천원

2012-03-02

현대HCN 고상환 본부장 `지역채널에 특종이 떴다` 발간

케이블TV 지역채널의 취재보도 실무서가 발간돼 화제다.현대HCN 보도제작본부 고상환 본부장은 최근 `지역채널에 특종이 떴다`(커뮤니케이션 북스)는 제목으로 지역채널 취재보도 실무서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이 책은 지역사회에서 여론 형성과 사회 감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지역채널의 뉴스 보도 현장을 실무자의 시선으로 분석하고 고찰한 서적이다.매일 전국 100여개 케이블TV방송국(SO)의 지역채널을 통해 방송되고 있는 지역채널 뉴스는 지역 행정 및 의회 활동의 부조리, 예산 낭비 사례를 고발하고, 지역 주민들의 생활을 밀착 취재 보도하고 있지만, 전체 지역채널 뉴스보도 실무에 관한 내용이 책으로 발간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지역채널에 특종이 떴다`는 지역채널 뉴스 아이템 발굴 방법 및 지역뉴스의 가치와 발전방향, 지역채널 뉴스의 사례와 보완점 등을 실무자의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다.1장 `지역채널 뉴스란 무엇인가?`에서는 지역채널 뉴스 배경과 현실을, 2장 `지역채널에 나오는 우리 지역 뉴스`에서는 지역 뉴스의 사례와 저자의 의견을, 3장 `지역채널 뉴스 다시 쓰자`에서는 지역 뉴스 기사의 보완점에 대해 말한다.한국케이블TV 협회 길종섭 회장은 추천사를 통해 “케이블TV의 보도는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정보의 중심”이라며, 이 책을 계기로 “지역채널 보도·제작 분야 서적 출간이 활발하게 뒤를 이어줄 것을 기대한다”고 책에 대한 의견을 전했다.현대HCN 고상환 본부장은 “지역채널 뉴스가 실재 기능 및 역할, 지역사회에 끼친 순기능에 비해 크게 조명되고 있지 못함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책을 발간하게 되었다”며 “부족한 부분이 많이 있겠지만 후배 기자들의 활발한 평가와 보완을 기대한다”고 소회를 밝혔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2-03-02

소년, 교통사고 후 마음을 읽는 초능력자 되다

▲ 장편 소설 `원더보이`를 펴낸 김연수 작가.“나는 글을 쓰게 되어 있다, 그렇게 살게 되어 있는 사람이다”`김연수`라는 소설가에게 이제 다른 수식어는 불필요해 보인다. 그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글을 쓰게 되어 있는 사람이다.“그렇게 살게 되어 있는” 소설가 김연수가 `밤은 노래한다`(2008) 이후 사 년 만에 새 장편소설을 선보인다. 2008년 봄부터 2009년 여름까지, 청소년문예지 `풋,`에 총 4회를 연재했던 `원더보이`가 연재를 중단한 지 꼭 3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 것. 등단한 지 만 19년, 일곱번째 장편소설, 열한 권째 소설책, 열다섯 권째 단행본. 그사이에 2009년 봄부터 겨울까지 계간 `창작과비평`에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를 연재한 바 있고, 2011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계간 `자음과모음`에 장편소설 `희재`를 연재하고 있으니, 다른 속뜻을 헤아리지 않아도 이미 그는 `글을 쓰면서 살게 되어 있는 사람`이 분명한 듯하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것`을, `무엇`을 쓰는 사람일까.“세계의 모든 것은 오직 변할 뿐이다. 나도 변했고 세계도 변했다. 모든 것은 변했지만, 이 세계가 좀더 살아가기 좋은 곳으로 바뀌어야만 한다는 사실만은 변할 수 없다. 오직 그 이유로 세계는 변한다”`원더보이`는 1984년, 열다섯 살 소년의 이야기다. 정훈은 트럭에서 과일을 파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정훈이 본 마지막 아버지의 얼굴은 우주비행사처럼 밤거리의 불빛들을 향해 나아가던 그 옆모습이 된다.사고 후, 아버지는 “애국애족의 마음으로” 남파간첩의 차량을 향해 뛰어든 애국지사가 되어 있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대통령 각하 내외분을 비롯한 각계각층 모든 국민들의 간절한 기원에 힘입어” 일주일 만에 깨어난 정훈에겐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이 생긴다. 이제 정훈에게는 그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원더보이`는 성장소설이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되기로 한 것처럼 스스로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어른들도 아직 모르는 일이니까.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알게 된다. 우주에 이토록 많은 별이 있는데도 우리의 밤이 이다지도 어두운 것은, “우리의 우주가 아직은 젊고 여전히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2-02-24

존재의 형식을 빌어 슬픔을 노래하다

`문학과 사회` 제1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시인 하재연의 두번째 시집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문학과 지성사)이 출간됐다. 사물과 현상, 삶의 단면을 내밀하게 포착하는 시선과 감정적 동요가 없는, 건조하면서도 절제된 시어들은 여전하지만 이번 시집을 장악하는 정서는 지극한 슬픔이다. 이러한 슬픔의 정서가 여러 가지 존재 형식을 빌어 시 속을 소리 없이 떠다닌다. 머리를 말아 올리고 속눈썹을 붙인 인형들, 꿈속에서 여러 번 살아본 적 있는 것 같은 흔적으로만 남은 유령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해삼과 멍게 같은 동물들의 존재 형식들은 그러한 슬픔의 정서를 싣고 살아간다.이러한 슬픔의 정서, 센티멘털을 평론가 권혁웅은 “내면을 헐게 만드는 망치가 아니라 헐어버린 내면의 표현, 나아가 헐어버린 내면의 표현을 `결과`로서 담고 있는 하나의 기호”로 해석한다.`세계의 모든 해변처럼`에서는 실로 많은 일상의 배경과 사물이 등장한다. 그런 장면들 안에서 시인은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게 거한다. 음소거 된 화면 혹은 음향이 켜지지 않은 무대 같은 배경에서 그녀는 세상의 모든 면면을 조용히 그러모으면서 최소한의 감각으로 그것들을 마주한다. 그렇게 천천히 시간과 공간과 대상을 맴도는 그녀의 걸음들에는 소리가 없다.“말을 줄이는 것이 세상에 대한 조금 덜 나쁜 태도”(`인형들`)라고 말하는 그녀는 “견딜 수 있을 만큼 조금씩 살아간다”(`로맨티스트`). 어떻게 이렇게 힘을 빼고 말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대답은 금세 얻을 수 있다. 소리 없는 걸음에 더 큰 힘이 들어가는 법. 그것이 곧 세상에 대한 시인의 태도다.세계의 모든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며연인들은 작별한다.이제 정말 안녕이라는 듯이우리는 우리의 리듬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전 생애를 낭비한다.어제는 빙하처럼 얼어 있던 눈이녹아 흘러가고 있다.하양이 사라진 만큼의 대기를 나는 심호흡한다. - `4월 이야기`부분하재연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지난한 진실을 어떤 감상적 동요도 없이 똑, 똑 내뱉는다. 다만 물속에 잠겨 보일 듯 말 듯한 삶의 진실을 수면 위로 올려놓는다.그녀는 왜 그러한 평범한 진실들에 장난을 걸지 않는 걸까.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체념`의 형상을 띤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슬픔의 정서를 불러내는 세상을 향한 움직임이 된다.나의 꿈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 안에내가 없다고 슬퍼져서는 안 된다.물구나무를 서고또 물구나무를 서도내 그림자는 같은 색깔이었다.철봉은 차갑고 녹이 슬어 간다.코에서 비린내가 난다.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그림자와 비슷하게 웃어본다. - `술래 놀이` 부분하지만 이때의 체념은 타자를 존중하는 시인만의 방식이다.이러한 체념은 사실은 다름 아닌, “당신이 살아 있는 사실, 그 아름다움을 아는 이는 나 하나뿐”(「안녕, 드라큘라」)이라고 고백하는 그녀의 사랑 방식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2-24

공자와 제자들이 말하는 세상사는 이치

이남곡씨의 신간 `논어, 사람을 사랑하는 기술`(한겨레출판)은 공자와 그 제자들이 세상사는 이치, 교육, 정치, 경제, 처세,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허심탄회하게 논의한 이야기들을 묶었다.책은 논어 전문을 크게 열 가지 범주(탐구, 처세, 정치, 중도, 군자, 품성, 조직, 경제, 인생, 깨달음)로 분류하고, 10장을 다시 세부 주제별로 엮었다.`논어`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몇 가지 메시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① 여러 사람이 미워해도, 좋아해도 반드시 살핀다공자는 사람을 평가할 때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여러 사람이 미워하여도 반드시 살피며, 여러 사람이 좋아해도 반드시 살펴야 한다”즉 사람을 평가하는 데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진리를 일깨우고 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 사람은 틀렸다”라고 비난해도 `정말 그런가?` 하고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을 공자는 `필찰必察`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필찰은 뭔가 흠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선입견과 아집으로 잘못 판단하기 쉬운 것을 돌이켜보게 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뿐만 아니라, 자신을 살펴볼 때도 중요하다.② 바른 정치의 요체인 인사(人事)가 바로 인(仁)이다아무리 제도를 잘 갖춰 놓아도 그것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이상적인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여러 가지 왜곡된 형태로 변질되기 쉽다.지금의 실정을 보면 제도에 비해 사람의 의식이 뒤처지는 불균형 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진다. 물론 제도도 계속 발전시켜 가야 하겠지만, 이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이 이상 정치 실현의 중심 과제라 하겠다.이런 이유로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숙제는 의식의 진보이고, 이때 진보 의식이란 공자가 말한 덕을 가리킨다. 덕으로써 정치를 한다면 주변의 흐름이 덕을 향해 움직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순리다.③ 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라`자신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지 말라.` 이 문장을 읽다 보면 공자 같은 사상가가 왜 이렇게 극단적인 말을 했을까 의아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기가 대하기 쉬운 사람과 사귀려는 경향이 강하다.사람을 사귈 때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배우려는 자세로 사귀어야 자신의 허물을 지적 받고 그것을 고치기 쉽다. 공자는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④ 쓰이면 행하고, 안 쓰이면 간직한다세상에 `쓰임`을 구하는 이들은 이 구절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선거든 임용이든 취직이든 창업이든 뜻대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있고, 잘 나가다가도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다.이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가령 낙선한 정치인이 `이제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또 연예인이 인기가 떨어지면 `이제 대중은 이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는구나!` 하고 깨달아 현실을 제대로 본다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할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2-24

이상국 시집 `뿔을 적시며`

전통적 서정과 강원도의 토속적 정서에 뿌리를 두고 시대현실과 기울어가는 농촌공동체의 아픔과 슬픔을 담백한 어조로 노래해온 이상국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뿔을 적시며`(창비)가 출간됐다. 7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핍진한 현실인식을 견지하면서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우주적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박한 삶의 풍경을 낮은 목소리로 전한다.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따사로운 상상력과 정감 어린 묘사, 자연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정갈한 언어들이 삶의 깊고 오묘한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지나온 삶을 노래하는 이상국의 시는 애잔한 감정을 자아낸다. “대부분 상처이고 또 조잔한”(`그늘`) 삶 속에서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했던 시인의 꿈은 심상한 좌절을 맞는다. “사철나무 울타리에 몸을 감추고/누군가를 기다리던 한 소년”(`먼 배후`)이 “누구를 제대로 사랑한단 말도 못했는데//어느새 가을이 기울어서//나는 자꾸 섶이 죽을 수밖에 없”(`상강(霜降)`)다는 자조에 이르는 데서는 짐짓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시인은 마냥 서러움에 주저앉지 않고 “매일 얼어붙은 강을 내다보며”(`언 강을 내다보며`) 아직 누군가를 기다린다.“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산그늘` 전문)이상국은 바닷가 마을에서 자라나 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지만 특이하게도 `바다`보다는 주로 `땅`을 소재로 삼고 `흙`의 언어를 부리는 농경적 정서에 시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시인은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혜화역 4번 출구`)임을 자임하며, “붉은 메밀 대궁”에서 “흙의 피”를 떠올리고 “달밤에 깨를 터는”(`옥상의 가을`) 어머니를 연상하는 전형적인 농사꾼의 상상력을 보여준다.이번 시집에서 눈여겨볼 것은 국수(`국수 공양``폭설`), 장떡(`뿔을 적시며`), 라면(`라면 먹는 저녁`), 감자밥(`감자밥`), 모두부(`참 쓸쓸한 봄날`), 닭백숙(`조껍데기술을 마시다`) 등 음식을 소재로 삼은 시들이다.이러한 시편들은 우리 시사(詩史)에서 음식을 시의 소재로 즐겨 삼은 대표적 시인인 백석의 아취(雅趣)를 물씬 풍긴다. 1999년 시인이 수상했던 제1회 백석문학상의 영예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시인은 불교 용어 `공양`을 통해 먹는 일의 성스러움과 음식의 귀함을 새삼 환기한다. 그는 이천원짜리 국수 한그릇에서 “천릿길 영(嶺)을 넘어 동해까지 갈”(`국수 공양`) 기운을 얻고, 인간세의 도반의식을 깨친다.모진 세상살이의 정경 속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꿰뚫어보는 통찰력도 그러하거니와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관조하는 시인의 눈빛 또한 예사롭지 않다. 물떼새가 해안선을 따라가며 외다리로 종종걸음 치는 모습이 “마치 지구가 새 한마리를 업고 가는 것 같았다”(`다리를 위한 변명`)는 구절이나, “나뭇가지에 몸을 찢기며 떠오른 달”(`한천(寒天)`), 겨울날 “담장을 기어오르다 멈춰선 담쟁이의/시뻘건 손”(`매화 생각`),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 데서도 들으라고/소나무숲은 횃불처럼 타오르고/함성처럼 흔들린다”(`소나무숲에는`)와 같은 시구(詩句)에서 보듯 시인의 섬세한 손끝에서 가슴 시린 절경이 고요히 태어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창비 펴냄, 120쪽, 8천원

2012-02-17

`한무제 평전`

강한 개척 정신과 뛰어난 인재 관리로 세계 제국을 이룩한 한 무제의 삶과 치세를 담은 `한 무제 평전`(민음사)이 출간됐다. 한나라 제7대 황제인 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면서 활력 넘치는 개혁과 발전의 시대를 일궈냈다. 한 무제는 집권 후 무장을 강화하고 적극적으로 군대를 출병해 건국 이래 끊임없이 변경을 위협하던 흉노 세력을 약화시키고, 남월과 민월 서남이 등의 이민족을 평정해 안정적 국가 운영의 바탕을 마련했다. 또한 두 차례에 걸쳐 장건을 서역에 파견해 중국에서 중아시아와 서방 세계로 통하는 실크로드를 개척해 동서 교역과 문화 교류의 기초를 마련했다. 국내 정치 면에서도 한 무제는 과감한 정책을 통해 무제 이후 2000년간 이어진 통치 체제의 기틀을 확립한다. 이 책은 `사기`, `한서` 등 정사를 비롯해 최근의 연구 자료까지 아우르며 중국을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하게 한 무제의 치세를 세세히 재구성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황제 중 하나로 손꼽히는 한 무제의 천하 경영을 통해 현대 사회에 필요한 지도자상을 되새겨 본다.저자인 중국의 역사학자 양성민(楊生民) 전 수도사범대 교수는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 비견되는 치세를 누린 한 무제의 공적과 잘못을 마치 복기하듯이 객관적으로 재구성한다.중국 최초로 통일 제국을 탄생시킨 이는 진시황이었다. 그러나 현대까지 이어져 온 통일 중국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한 무제였다.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지도자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한 무제 또한 인재를 중시한 제왕이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통솔력 그리고 경력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능력을 바탕으로 인재를 채용하는 유연한 태도는 한 무제의 치세가 오래도록 이어지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리하여 무제 시대에는 정치가이자 경제학자 동중서, 정치가이자 교육가 공손홍, 대작`사기`를 남긴 역사가 사마천, 문학가 사마상여, 군사가 위청과 곽거병, 외교가 장건, 음악가 이연년 등 정치, 군사, 학문, 문화의 각 방면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민음사 펴냄, 양성민 지음, 심규호 번역, 840쪽, 3만5천원

2012-02-17

푸른 눈에 비친 구한말 조선이야기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외국인들의 조선 탐방기를 철저한 사료 검토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되살린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글항아리)`이 출간됐다. 이방인들에게 조선과 식민지 근대는 어떤 나라였을까?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와서 무엇을 보고 느꼈으며, 그들의 기록엔 우리의 어떤 모습이 그려져 있을까? 이번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에서는 바로 그러한 것들을 살펴보고자 했다.규장각 교양총서 제6권으로 나온 이번 책은 조선초기부터 근대시기까지 조선을 다녀간 이방인들의 여행을 다루고 있다. 세종 시기 명나라 칙사들부터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사행과 같은 국가간 사신 왕래들부터 하멜로 대표되는 표류, 학술조사 차 배를 타고 건너온 학자들의 여행까지 다양한 형태의 여행기록을 전문가들의 꼼꼼한 사료검토와 풍부한 상상력 및 관련된 도판으로 입체적으로 다뤘다.17세기 네덜란드 선원 36명의 조선 생존기를 담은 하멜(1630~1692) 일행 표류기, 유럽의 몰락한 귀족 후손에서 조선 참판으로 도약한 묄렌도르프(1848~1901)의 인생 유전, 스웨덴 동물학자 스텐 베리만(1895~1975)의 조선 생물 탐사기 등이 다양한 사진 자료들과 함께 실렸다.조선시대에는 이웃 나라 일본과 중국인조차 함부로 들어와 사는 것이 금지됐고, 합법적으로 우리 땅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의 범위도 제한돼 있었지만, 조선에 왔다 간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 꽤 있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외교와 문화 전파의 통로이기도 했던 중국의 칙사와 일본 통신사가 대표적이다.`조선왕조실록`을 꼼꼼히 독해해 명나라와 청나라 칙사들의 유형과 방문 행태, 그리고 조선 측의 접대 방식을 통시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중화 체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면, 임진왜란 직후에 굳이 한양에 입성하겠다는 일본 사신 일행에 대해 책임지고 접대하는 모습에서 과거의 적국에 대해서도 예를 다하는 조선의 문화를 발견하게 된다. 규장각은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만들어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이후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여 년을 지탱해왔다. 이후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됐고, 창설 230년이 되는 지난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의 통합을 통해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학술지 `한국문화``규장각``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한국학 자료총서`(총3권) `한국학 연구총서`(총18권) `한국학 모노그래프`(총40권) 등을 펴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글항아리 펴냄, 규장각한국학연구원, 432쪽, 2만3천800원

2012-02-17

세상과 나 자신의 도덕성 스스로 알게 하는 안내서

“선한 삶은 완벽하고 거부할 수 없는 완전한 상태라기보다 더 나은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다.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두려워하며 어디에서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지만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작정 덤비는 사람은 무모한 사람이다. 또 모든 향락을 즐기고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무절제한 사람이며, 거친 농부처럼 모든 즐거움을 거절하는 사람은 무감각한 사람이다.” 인생의 기술은 완전한 도덕적 선을 이룩하기를 바라는 비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살면서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자신의 감성을 교육하는 것이다” (179쪽)착한 사람. 어감은 좋지만 조금 바보 같은 느낌이 든다. 왜? 현재를 주도하는 세계관으로는 `착한 사람`이 그다지 훌륭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성장`을 위해 효율성을 강조하고 `이기주의`를 권장해왔다. `행복`을 `성장`과 동일선상에 놓게 하는 프레임을 만들고, 남을 밟고 올라서야 비로소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해왔다. GDP를 예로 들어보자. 현재 거의 모든 국가에서 GDP로 국가의 성공과 국민의 행복을 측정한다. 하지만 GDP로는 국민의 행복을 논할 수 없다. 이는 단지 경제학의 목표다. GDP는 훌륭한 선생님, 친절한 이웃, 좋은 사회보험, 부의 균등한 분배는 고려하지 않는다. GDP가 올라가면 삶의 질이 올라간다고? 터무니없다. 자연보호구역과 거주지 주변으로 고속도로가 개발될 때도 GDP는 상승한다. 소음 공해, 스트레스, 불만 때문에 수백만 명이 의사나 카운슬러를 방문한다고 해도 GDP는 상승한다. 국가에서 사유 주차공간을 폐지하고 그곳에 차를 세우는 모든 사람에게 돈을 요구할 때도 GDP는 상승한다. 쓰레기 더미가 넘쳐나서 새로운 쓰레기 처리장과 소각로가 필요할 때도 GDP는 상승한다. 하지만 다행히, 사람들은 오로지 `위`만을 쳐다보다가는 디스크가 올 수 있다는 간단한 상식을 깨달은 것 같다. `성장`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독재와 이기주의 사이에서 새로운 가치를 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성장의 마법에 겁먹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협력` `함께` `동반` 같은 사라져간 가치를 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적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독일 통일 이후 가장 대중적인 철학가로 평가받고 있는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신작 `내 행복에 꼭 타인의 희생이 필요할까(21세기북스)`가 나왔다.총 3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1부 `선과 악`, 2부 `이상과 현실`, 3부 `사회, 그리고 도덕` 순서로 전개된다. 구체적으로 1부에서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철학이라면 빠질 수 없는 이들의 이름부터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에 질렸다고 돌아서지 말기를 당부한다. 그리고 독자 스스로가 나는 착한 사람이고 싶은데 세상은 왜 그렇지 않을까 고민하기 시작할 즈음 2부를 시작한다. 2부에서는 인간의 편협함을 보여주는 다양한 면모를 자세히 소개한다.3부에서는 드디어 저자의 `주장`이라 생각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다고 진단한 저자는 사회를 회생시키고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 해야 할 고민, 행동, 판단에 대해 이야기한다. 국가 최고 목표를 국민의 행복으로 하는 부탄, 사업가와 경제, 진짜 성공, 시민의식, 도시와 국가의 일, 민주주의의 변화와 공공책임을 되찾는 법 등에 대한 이야기로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고 보다 행복하고 나은 삶을 사는 방법을 안내한다.저자는 다양한 방식으로 선과 악에 대해 논하고, 우리의 선택과 실행, 사회의 요구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꺼운 마음으로 글을 좇다보면 이 책을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답이자 스스로 도덕을 발견하게 하는 안내서”라고 소개한 저자의 말처럼 독자는 세상과 자신의 도덕에 대한 사색과 어렴풋한 답 또한 얻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2-10

“혁신과 창의의 본질은 혁명이 아닌 진화”

조직에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는 진취적 기상과 혁신 의지를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규모가 커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조직은 더욱 위험 회피적인 성향으로 변하게 마련이다. 또한 기업가정신을 발휘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적극적인 불굴의 의지를 굽히며 중년의 관료주의에 안주한다.잘 다듬어진 경영 공식에 중독되고 새롭고 낯선 것을 회피하며 태도와 행동이 점점 더 경직되어가는 관료주의 조직은 `어떻게 사업을 성장시킬 것인가`라는 실질적인 질문은 거의 던지지 않는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에는 상상력이 풍부한 마케팅과 연계된 성공적인 `혁신`이 포함돼야 한다.올 새해 벽두에 열린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하루 24시간, 일주일 7일도 부족한 25/8의 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창의적 혁신`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인터넷과 미디어의 범람으로 끊임없이 생산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같은 시간이라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해 기존의 제품과 서비스를 능가하는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는 기업이 경쟁우위에 서게 된다는 논리다. 이를 위해서는 조직 내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수확하고 이를 성과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세계적인 리더십 대가 존 어데어가 최근 펴낸`팀은 혼자 뛰지 않는다`(청림출판)는 혁신하고자 하는 조직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확하는 데 필요한 내부 시스템을 만들고 그 아이디어를 실제 성과로 연결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은 리더와 구성원이 조직의 창의적 혁신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담아냈다. 혁신과 창의성에 대한 이해, 혁신적인 조직의 철학과 구조 및 경영 전략, 팀 창의성의 특징과 구성원들이 서로간의 아이디어를 취합해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방법, 팀 창의성을 성장시키는 데 필요한 리더십, 그리고 창의적인 리더와 창의적인 팀원이 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알기 쉽게 풀어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2-10

애잔한 삶의 풍경과 감추어진 세계의 진실을 맑은 서정의 詩心으로 노래하다

끊임없는 시적 갱신을 통해 치열한 시정신과 문학적 열정을 보여주고 있는 이시영 시인의 열두번째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가 출간됐다.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신작 시집에서 시인은 간명한 언어에 담긴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밀도 높은 단형 서정시, 삶의 애잔한 풍경 속에 서정과 서사가 어우러진 산문시, 책의 한 대목이나 신문기사를 옮겨 적거나 재구성한 인용시 등 다양한 형식을 선보이며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삶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예리한 통찰력과, 현실과 밀착된 “서정시 본연의 깊은 내면성과 높은 심미적 완성도”(염무웅, 추천사)를 갖춘 시편들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깊은 인상과 여운을 남긴다.이전 시집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창비)에서 `인용시`라는 새로운 형식을 선보였던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그와 맥을 같이하는 작품들을 통해 어떠한 구호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사실`을 가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감추어진 세계의 진실을 드러내”(`시인의 말`)고자 한다.맑은 서정의 시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참여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인의 관심은 무척이나 너르게 표출된다. 가깝게는, 철거민 다섯명의 목숨을 앗아간 용산 참사(`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 현장에서 “두 대의 경찰 살수차를 온몸으로 막아낸” `유모차맘`(`직진`), 구제역 파동으로 1백여 마리의 소를 살처분해야 했던 한 축산농가의 비극(`고급 사료`) 등 지금-이곳의 참담한 현실을 꿰뚫어보고, 나아가 “하루 16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인도의 어린이노동자들(`어린이노동`),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유혈 진압과 “인간 사냥”이 자행되던 2011년의 리비아 사태(`2011년 2월 24일, 리비아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망원경과 도시락 등을 준비해” 가자지구의 “전쟁 현장을 구경하러” 와서는 `브라보!`를 외치는 이스라엘인들의 비정함(`아, 이런 시는 제발 그만 쓰고 싶다`) 등 전지구적으로 확장되면서 야만과 불의,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세계의 뒷모습을 상기시킨다.`은빛 호각`(2003) 이후 `인물시`의 한 전범을 보여줬던 시인은 아릿한 기억 속에서 살아숨쉬는 인물들을 다시금 불러낸다. 아침에 나갈 때마다 아내(박용길 장로)에게 “소년처럼 한쪽 눈을 찡긋했다”는 문익환 목사(`조사받다가 남산 수사관들에게서 우연히 들은 말`), 수업 대신에 학교 앞 선술집에서 오장환과 이용악 시인의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눈자위가 “촉촉이 젖어”들던 서정주 시인(`시론`), 1973년 지하신문 결심공판에서 “한마디로 좆돼부렀습니다!”라는 최후진술로 법정을 잠시 웃음바다로 만든 김남주 시인(`최후진술`),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을 때 손님에게 예의를 지키라며 소주를 달라고 했던 김지하 시인(`소주 한잔`) 등의 일화는 은근한 미소를 자아내며 이 시집을 읽는 재미와 즐거움을 더해준다.시인의 따뜻한 시선 속에 은은한 사람 냄새와 해학이 깃든 이러한 인물시편들은 한 개인의 자전을 넘어 지난 시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기도 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2-10

세 무희의 사랑과 좌절, 그리고 열정

▲ 가와바타 야스나리인도의 타고르에 이어 동양에서 두번째이자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 일본의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해 독자적인 문학 세계를 구축한 작가로 널리 알려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장편소설 `무희(舞姬)`(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당대의 사회적 상황에 대해 실천적인 행보를 하지 않았으며, 문학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이나 입장을 뚜렷하게 표현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닫던 1930년대에 본격적으로 `무용소설`들을 발표하면서 `순수한 미의 세계`를 추구하였다. 야스나리는 이후 20여 년 동안 무용을 소재로 작품을 쓰며 무용과 무용가에 대한 자신의 끝없는 애정을 드러냈다.`무용은 보이는 음악이고 움직이는 미술이며, 육체로 쓰는 시(詩)이자 연극의 정화이다`라고 말하는 야스나리에게 무용은 외적인 육체의 미를 강조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되며 아름답고 순수한 정신과 더불어 춤추는 것이 이상적인 춤이었다.`무희`는 1950년을 배경으로 전후의 혼란 속에서 세 무희의 무용과 사랑, 가정이 전쟁으로 인해 굴절되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섬세하게 그리며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용소설의 계보를 잇는다.그러나 이 소설은 탐미주의의 거장인 야스나리의 예술적 성취에만 머물러 있지 않아 여타의 그의 무용소설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이 작품은 가와바타의 무용소설의 정점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후 일본의 전통미를 중심으로 작품 세계를 전환해가는 과정에 있는 작품으로서 가와바타 문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야스나리는 풍부한 서정과 섬세한 감각뿐만 아니라 패전 후 서서히 붕괴해가는 일본 사회의 모습과 무기력한 현대인의 비극을 보여준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일본의 전통적인 아름다움, 고전의 세계, 영원성, 정신적인 것 등을 지향하는 작가의 의지와 흔적을 드러낸다.`무희`는 1950년 12월부터 1951년 3월까지 총109회에 걸쳐서 아사히신문의 연재소설로서 발표되고, 같은 해에 출판된 장편소설이다.소설의 주인공인 나미코는 젊은 시절엔 프리마 돈나를 꿈꿨지만 이루지 못하고, 그 딸인 시나코에게 무용에 대한 애정을 쏟고 있는 인물이다.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야기와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20여 년 동안 이어오고 있다. 그녀의 실제 연인은 결혼 전부터 알았던, 이미 다른 가정이 있는 남자 다케하라다. 야기와의 결혼 생활에서의 해방과 다케하라와의 새로운 사랑을 꿈꾸지만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그녀의 성격으로 인해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나미코의 딸인 시나코는 유명 발레단인 오이즈미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다. 그녀는 어머니의 재능과 예술적 소양을 물려받은, 장래가 촉망되는 무용수였으며 유럽에 유학을 갈 계획이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그 꿈이 좌절된다. 소녀 시절 자신에게 무용을 가르쳤던 선생님 가야마를 향한 동경과 연정을 품고서, 그와의 추억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나미코의 제자이자 시나코와 자매처럼 지내던 도모코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나미코 곁에서 일을 도우며 무용을 배우던, 진흙 속에 묻힌 진주 같은 무희이다. 그녀는 시나코가 입던 낡은 코트를 얻어 꿰매어 입어가면서도 밝게 생활하며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간다. 그러나 가정이 있는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 그 남자의 아이들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무용을 포기하고 유흥가 아사쿠사에 가서 스트리퍼가 된다.지금 우리의 시선에서 보면 답답하게 보일 수 있는 세 인물들은 시대와 사회에 정면으로 대항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마음으로부터 순응하지도 못하며 우유부단하게 살아왔다.가정문제뿐만 아니라 일적으로도 나미코는 무대의 꿈을 단념한 과거의 무희이고 시나코는 아직 프리마 돈나가 되지 못한 미래의 무희일 뿐이며, 소설 속에는 그녀들이 타인의 무대를 보는 것만 묘사되고 스스로의 힘을 승화시키는 무대는 그려지지 않는다.이러한 인물들이 결국은 어느 쪽으로든 자신의 선택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현대인의 비극과 극복의 아름다움은 무희나 여자의 경험을 뛰어넘은 본질적인 것으로 깊은 감동을 남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2-02

왕릉으로 해부한 조선 오백년 역사

이규원씨가 펴낸 `조선왕릉실록`(글로세움)은 조선의 왕릉을 통해 역사와 풍수를 한데 풀어낸 책이다.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단순 왕릉기행서들이 출간돼 안내서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왕릉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재미있게 스토리텔링해 역사의 이면을 보여주고, 권력과 욕망의 움직임을 통해 역사의 흐름을 읽게 하면서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역사의 산 교훈을 들려주고 있다. 조선 오백 년 역사를 왕릉을 통해 투시경처럼 들여다보았고 여기에 해박한 풍수까지 곁들여 읽을거리를 더했다는 것에 또 다른 가치가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조선왕릉 기행서이자 조선 역사서이며 조선의 풍수까지 담겨 있는, 57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조선왕릉 백과사전이다.이 책은 남한에 있는 40기의 모든 왕릉과 역사의 중요한 맥을 이어주고 있지만 소홀하기 쉬운 주변 왕족의 무덤 7기를 일일이 답사했고, 북한에 있는 제릉과 후릉, 2기를 포함 총 49기 조선왕릉의 생생한 모습을 담았다. 나름의 특색을 간직하고 있는 왕릉은 권력의 무상함과 여인의 한, 굴곡진 인생사와 역사의 흐름을 말해준다. 또한 비슷한 듯 확연히 다른 모습을 간직한 사진은 좋은 자료이자 왕릉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책은 단순한 왕릉기행서에만 만족하지 않고 역사를 스토리텔링하고 여기에 풍수까지 녹여냈다. 이외에도 왕릉 참배 시 지켜야 할 예절, 왕릉의 구조적 이해, 왕릉 풍수, 찾아가는 길 등 다양한 읽을거리도 수록했다.왕릉은 그 왕의 일생을 말해주고, 왕의 일생을 따라가면 난마같이 얽힌 조선의 역사가 보인다. 저자 이규원씨 역시 왕릉을 따라가며 조선의 역사를 하나하나 짚어냈다. `조선왕조실록`, `완산실록`, `선원보감`, `연려실기술`을 수도 없이 보며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의 역사까지 풀어냈다.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색은 오랫동안 풍수전문기자로 활동하며 풍수와 깊은 인연을 맺어온 저자는 다른 책에서 풀어내지 못한 왕릉 풍수를 풀어냈다는 것이다.조선 개국 때부터 과거시험 과목의 음양과에 포함됐던 풍수는 조선역사의 향방을 거머쥔 중요한 열쇠였다. 풍수사학자들은 조선왕릉 3대 명당 중 하나인 영릉 터에 세종대왕이 안장되면서 조선의 국운이 1백 년이나 연장됐다고 한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왕이 나온다는 천자지지의 명당 터에 아버지 묘를 이장해 아들 고종을 왕으로 만들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으로 유명한 남연군 묘가 바로 이곳이다. 모두 풍수를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역사의 한 자락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2-02

맑고 단단한 언어로 시대의 우화 풍자 그려

▲ 소설가 황정은2010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큰 주목과 기대를 모으고 있는 소설가 황정은(36)의 두번째 소설집 `파씨의 입문`(창비)이 출간됐다. 시적인 압축이 돋보이는 간결한 언어운용의 미덕이 완성도를 더했고, 폭력적인 세계를 간신히 살아내는 인물들을 감싸안는 소설적 윤리는 더욱 단단해졌다. 문학에 대한 고민과 현실에 대한 고민이 단단히 맞물려 응축된 신작이다.한국문학에서 황정은은 지금 평단과 독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젊은 작가 중 하나다. 그는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에서 독특한 상상력과 더불어 현실과 환상의 절묘한 결합으로 그 개성을 인정받았고, 첫 장편 `百의 그림자`로 단숨에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하며 `고도의 윤리성을 바탕으로 새롭고도 완성도 높은 소설미학을 구축했다`는 고평을 받았다. 그의 발표작들은 사회정치적 관심과 소설적 미학이 성공적으로 합치된 사례로 즐겨 거론되며, 편편이 소재와 소설적 관심에서 다양하고 의미 깊은 변화를 보이며 눈 밝은 독자들을 사로잡아왔다. 그런 9편의 단편이 묶인 이번 소설집 `파씨의 입문`은 그가 받는 주목이 합당함을, 나아가 그가 2010년대 한국소설을 이끌어갈 유력한 작가임을 확인해주는 증거라는 평가다.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소설은 간결하고 정제된 언어와 함축적인 대화가 먼저 눈길을 끈다. 한밤에 벌어지는 친지들 간의 갈등을 그린 소설집의 첫 단편 `야행(夜行)`부터 그렇다. 소설은 정황에 대한 구구한 설명 없이 간결한 행동 묘사와 생생한 대화만으로, 어쩌면 특별할 것도 없는 사건을 낯설고 강한 여운을 남기는 한 편의 부조리극으로 만들어낸다. 그뿐 아니라 모든 소설이 그렇다. 무심한 듯 능청스러운 듯, 간결하고 리듬감있게 흐르는 문장과 대화에 압축된 단단한 긴장감이야말로 황정은 소설의 매력이다.환상이나 기괴한 존재 없이 생활에 밀착한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들도 각별하다. `양산 펴기`는 일일 바자회에서 양산을 파는 아르바이트에 나선 주인공의 하루를 그린다. 순정하고 선한 황정은 소설의 인물이 마주하는 생활전선의 현장이 담백하고 생생하게 묘사되고, 어느덧 바자회 장소 건너편에 시위 인파가 등장해 양측의 소리가 겹쳐 울리는 장면에 이르러, 별안간 현실의 부조리가 낯선 모습으로 드러나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비애를 자아낸다.현실에 밀착한 또다른 작품 `디디의 우산`의 주인공 디디는 어렸을 때 도도의 우산을 빌려 쓰고 되돌려주지 못한 일을 오랫동안 마음의 빚으로 담아두고 있다가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도도에게 자기 우산을 빌려준다. 주인공은 그 일을 계기로 도도와 함께 생활하게 되고, 비슷비슷하게 팍팍한 현실에 짓눌려 살아가는 동기생 친구들과 어울린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무력하지만 선량한 이들이 함께 모여 웃는 장면은 서글픈 가운데서도 드물게 따뜻한 위로와 연대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장면이다.그 위로와 연대의 바탕에는 “모두의 팔이나 다리나 머리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이들에게 나눠줄 우산을 찾아 신발장을 열어보는 주인공의 마음이 있다. 황정은 소설의 온기는 그렇게 표나지 않게, 그러나 어디에나 드러나 있다. 항아리의 말을 끝내 무시하지 않고 나침반을 들고 서쪽을 찾아가는 `옹기전`의 주인공이 그렇고, 치욕을 감내하고 있는 노인의 발치에서 묘, 하고 우는 `묘씨생`의 고양이가 그러하며,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팻말을 걸고 선 시위대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는 `양산 펴기`의 화자 역시 그렇다. 이처럼 작가는 간신히, 겨우 존재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차분히 오래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사려 깊게 말을 고르며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의 언어로 완성해나간다. 그의 맑고 단단한 언어는 그 고집스러울 만큼 사려 깊음의 산물이기도 하다.마지막으로 실린 표제작 `파씨의 입문`은 결국 이 모든 것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파씨는 파씨일 뿐, 파씨로서 발생하고 부단히 파씨가 되고자 노력하면서 사라질 뿐”이라고 선언하는 주인공 파씨 혹은 작가, 언어 혹은 소설의 시작에 관한 인상적이고 매혹적인 이야기가 이 작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파씨의 입문`이란 제목은 그러므로 황정은이라는 이름의 소설세계의 선언이기도 하고 그 세계로의 초대이기도 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2-02

고요한 삶의 풍경과 싹트는 생명의 소리

삶을 바라보는 깊은 통찰력과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어가 반짝이는 선명한 이미지 묘사로 통상적인 서정시와는 다른 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온 문인수(67·사진) 시인의 여덟번째 시집 `적막 소리`(창비)가 출간됐다.불혹을 넘긴 나이에 늦깎이로 등단한 이후 미당문학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며 “황혼의 전성기”(정현종 시인)에 이른 듯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는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폐경기를 모르는 시인”이라는 젊은 시인들의 존경 어린 감탄에 걸맞게 “한편 한편 아름답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신경림`추천사`)는 빼어난 시편들을 선보인다.문인수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중심에서 비켜나 소외되어 있다. “죽은 남자를 부여잡고” “하염없는 넋두리에 빠져 있”는 미망인(`개펄`), “도심 인파 속을 홀로/온몸을 구부려” “다만 골똘히 걷는” 노인(`지팡이`), “뭉툭한 왼팔에 바구니를 걸고/성한 오른손으로 뻥튀기”를 파는 “전직 프레스공”(`파군재의 왼손`) 등. 시인은 그들이야말로 삶의 진경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라 여겨 이들의 애절한 사연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한편으로 고요한 삶의 풍경을 그려내며 그 속에서 싹트는 생명의 소리를 귀담아듣는다.“적막도 산천에 들어 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적막도 복받치는 것 넘치느라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무슨 날도 아닌데 산소엘 와서/저 소리들 시끄럽다, 거역하지 않는 것은/내가 본래 적막이었고 지금 다시/적막 속으로 계속 들어가는 중이어서 그런가,/그런가보다. 여기 적막한 어머니 아버지 무덤가에 홀로 앉아/도 터지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소주 몇잔 걸치니, 코끝이 시큰거려 냅다 코 풀고 나니,/배롱나무꽃 붉게 흐드러져 왈칵!/적막하다. 내 마음이 또 그걸 받아 그득하고 불콰하여 길게 젖어 풀리는/저 소리들, 적막이 소리를 더 많이 낸다.”(`적막 소리`부분)“비린 가난”(`햇잎`) 속에서 변두리의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손길은 부드럽기 그지없으나, 연민에 빠지지 않고 일정한 거리에서 그들의 그늘진 삶을 관찰하면서 하나의 풍경으로 형상화하여 깊은 울림을 자아낸다. 그에 못지않게 사물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또한 예사롭지 않다. “해 넘긴 달력을 떼”어낸 자리를 보며 시인은 “쌀 떨어진 것”처럼 허탈함을 느끼다가 “무슨 문이거나 뚜껑”인 것처럼 “열고 나가”거나 “쾅, 닫고 드러눕는” 곳으로 생각한다.“해 넘긴 달력을 떼자 파스 붙인 흔적 같다./네모반듯하니, 방금 대패질한/송판냄새처럼 깨끗하다./새까만 날짜들이 딱정벌레처럼 기어나가,/땅거미처럼 먹물처럼 번진 것인지/사방 벽이 거짓말같이 더럽다./그러니 아쉽다. 하루가, 한주일이, 한달이/헐어놓기만 하면 금세/쌀 떨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또 한해가 갔다./공백만 뚜렷하다./이 하얗게 바닥난 데가 결국,/무슨 문이거나 뚜껑일까./여길 열고 나가? 쾅, 닫고 드러눕는 거?//올해도 역시 한국투자증권,/새 달력을 걸어 쓰윽 덮어버리는 것이다.”(`공백이 뚜렷하다`전문)평론가 권혁웅은 “세속의 삶을 점묘하는 시인의 탁월한 문체를 문인수류(類)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단문 사이에 툭툭 던져넣는 무심한 잠언들, 구어적인 문장들의 정점에 출현하는 문어적인 요약문들, (통상의 여운이 아니라 울음을 끌고 다니는) 뒤가 깨끗이 잘려나간 결구들, 인물의 일대기마저도 장면화하여 감치는 솜씨야말로 문인수의 시가 우리 시에 소개한 새로운 문체”라고 말한다. 그의 시는 필부필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되 미학적으로는 엄격함을 추구한다. 그는 고통을 쉽게 미화하지 않는다. 가난한 삶에 대한 연민 없는 공감은 문인수의 시가 펼쳐보이는 서정의 진수다.“개펄을 걸어나오는 여자들의 동작이 몹시 지쳐 있다./한 짐씩 조개를 캔 대신 아예 입을 모두 묻어버린 것일까,/말이 없다. 소형 트럭 두 대가 여자들과 여자들의 등짐을,/개펄의 가장 무거운 부위를 싣고 사라졌다.//트럭 두 대가 꽉꽉 채워 싣고 갔지만 뻘에 바닥을 삐댄 발자국들,/그 穴들 그대로 남아/낭자하다. 생활에 대해 앞앞이 키조개처럼 달라붙은 험구,/함구다. 깜깜하게 오므린 저 여자들의 깊은 하복부다.(`만금의 낭자한 발자국들`전문)/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1-27

핑퐁외교로 죽의 장막 뚫은 키신저 그가 말하는 `以夷制夷` 중국외교

1971년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해 미중 수교의 첫 장을 연 헨리 키신저가 중국의 정치·외교사를 조명한`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민음사)가 출간됐다. 첫 방문 이후 수십 차례 중국을 오가며 중국 지도자들과 접견하고 대중국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끈 헨리 키신저는 아흔의 나이에도 여전히 날카로운 식견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중국 정상들과의 개인적 대화 기록과 최근 해제된 기밀문서들을 바탕으로, 중국과 근대 유럽 세력과의 첫 만남, 중소 연합의 형성과 와해, 한국 전쟁, 닉슨 대통령의 첫 방중, 톈안먼 사건 등 중국 현대사의 전환점이 된 여러 사건들을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그려 낸다. 나아가 문화 혁명의 물결이 잦아들고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는 현재 중국을 바라보며 앞으로 중국이 나아갈 길, 그리고 미국과 아시아 주변국들의 변화될 역학 관계에 관해서 짚어 본다.1971년 7월9일, 수십 년간 높게 둘러쳐 있던 죽(竹)의 장막을 걷고 중국 땅에 첫 발을 내디딘 헨리 키신저는 서구식 외교와는 확연히 다른 중국의 외교 스타일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때껏 지나치게 규칙에 얽매였던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의 협상 스타일을 기대했던 터라 중국의 호의와 친절, 심지어 여유작작한 방문 스케줄까지 모두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다. 곧 그는 그것이 서양, 특히 미국과는 비견될 수도 없는 장구한 역사에서 비롯된 전통적 중국 외교였음을 깨달았다.그래서`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는 이러한 중국의 전통적 외교 스타일을 파악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중국의 대외 전략은 기본적으로 방어에 있었다. 다른 주변 이민족이 뭉쳐서 중국에 도전하는 일만 없으면 되는 것이었다.이러한 뿌리 깊은 전통에서 나타난 것이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고 이것이 지금까지도 중국 외교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키신저는 분석했다. 또한 그는 어느 한쪽의 세력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리고 영웅주의적인 공적을 쌓기보다는 섬세하고 간접적인 전략으로 상대적 우위를 끈질기게 축적해 나가는 것이 중국의 스타일이며 이는 바둑(웨이치) 게임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키신저는 이러한 `이이제이,` `웨이치` 외에도`손자병법`, 공자 등의 키워드를 통해 중국 외교 전통을 만들어 낸 핵심 개념들을 짚어 내면서 국제 질서에 대한 중국의 생각은 어떠한지, 그리고 근대 이후 국제 무대에서 보인 중국의 여러 행보들은 무엇에서 기인한 것인지 밝히고자 한다.한편 키신저는 첫 방문 이후 성공적으로 미중 수교를 맺고 나서도 수십 차례 중국을 오가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덩샤오핑과 장쩌민 등 중국 현대사를 이끈 지도자들과 직접 만나 대화하고 교류했다. 키신저는 그들과의 대화를 모두 기록으로 남겼으며, 그 기록은 이 책의 중요한 원천이 됐다.2011년의 끝자락,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각국은 북한과 더불어 중국의 행보에도 촉각을 기울였다. 김정일 사망 이전에 미국에서 출간된 이 책에서도 키신저는 앞으로 대중국 정책과 전략에서 주요하게 다뤄야 할 이슈로 경제 문제와 북한 핵 문제를 꼽았다. 중국의 삼각 외교와 한국 전쟁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5장에서 키신저는 김일성의 전쟁 도발을 둘러싼 중국과 소련의 머리싸움을 세밀하게 보여 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1-27

`권력의 통제 수단` 달력을 둘러싼 숨은 이야기

`시간과 권력의 역사`(문학동네)는 “율리우스가 달력 개혁에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주일은 언제부터 7일이 되었을까?” “21세기의 시작은 2000년일까? 아니면 2001년일까?” “요일은 어째서 행성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을까?” “일본이 그레고리력을 받아들인 이유는 한 달 치 월급을 주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까?”와 같은 질문에서부터 시간을 표시해주는 달력이 얼마나 강력한 권력의 수단이었는지에 대한 문제까지 달력을 둘러싼 숨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다시 말해 단순하게 달력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달력에 접근한다.권력 통제의 수단으로 달력이 이용된 경우는 수없이 많다. 그중 대표적인 예는 기원전 2세기 고대 로마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 민회가 열릴 경우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권력자들은 장날과 민회가 열리는 날이 겹치지 않도록 날을 계속해서 구분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장날을 민회가 열릴 수 있는 파스(fas)가 아닌 네파스(nefas)로 규정해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에는 민회를 열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이 법안은 기원전 287년 제정된 호르텐시우스법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사례는 황제가 바뀔 때마다 통치에 용이하도록 수시로 발생했다.근대에 들어서도 달력을 통치 도구로 이용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1873년 일왕 정부는 단 20일의 공지 기간만 두고 그레고리력 개혁을 단행해버렸다. 다음 해 달력이 이미 인쇄 중이었는데도 말이다. 천황 정부가 개혁을 이렇게 서두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태음태양력에 따르면 1873년에 윤달이 있는데, 이때는 모든 관료에게 한 달 급료가 추가로 지급되어야 했다. 따라서 태음태양력을 따르게 되면 일본은 한 달 치 급여 지급으로 1873년의 일본 국가 재정에 큰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개혁을 통해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줄어든 12월은 달력 교체까지 단 이틀만 들어 있었기 때문에 급료를 지급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개력을 통해 재정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1-27

세상만사 마음먹기 달렸다

`마음 수업`(휴)은 오늘날 공교육 현장을 비롯한 수많은 단체의 인성교육 프로그램으로 각광받고 있는 원불교 마음공부의 핵심원리와 구체적 실천법을 밝힌 책이다. 마음공부는 안심입명의 도를 찾아 밖으로 헤매는 사람들의 시야를 안으로 돌려 자기 마음을 바라보게 하고, 마음의 원리를 깨우침으로써 스스로의 힘으로 마음병의 근원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마음공부인들 사이에서 숨은 멘토로 알려진 저자는`현대인의 마음치유`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당신 인생의 가장 큰 서원으로 삼아왔으며, 이 책은 바로 그 결실이라 할 수 있다. 마음공부의 효과는 이미 다양한 현장에서 입증됐지만, 무엇보다 10여 년간 원불교라는 거대 종단을 이끌면서 보여준 굳건한 리더십과 구체적 활동상, 다양한 시국현안에 대한 깊은 통찰, 그리고 수십 년간 당뇨와 간경화라는 양극의 병을 몸에 지닌 채 유지해온 건강과 자상한 인품으로 대변되는 저자 개인의 삶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 나의 마음이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처럼 자연계의 변화를 제외한 세상사 모든 일은 결국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달려 있다. 그 개개인의 마음, 마음들이 모여 오늘의 역사를 만들어간다. 지금까지의 모든 인류사가 그렇게 이뤄져왔다. 다시 말해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주체들이 어떤 마음을 내느냐에 따라 역사는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바뀔 수도 있다. 남북문제부터 환경문제, 우리가 코앞에 두고 있는 온갖 시국현안들도 마찬가지다.결국 나의 마음 하나를 고쳐먹는 일은 나의 흥망성쇠와 생로병사와 행·불행을 넘어 세상사까지 좌지우지하는 일생일대의 문제인 것이다.그런 이유에서 저자는 지금처럼 중요한 시국일수록 동시대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마음주권을 회복해야 하는 책임이 얼마나 막중한지 거듭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한다.이제 마음의 원리와 마음 주권을 회복하는 일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남은 것은 수행뿐이다. 절수행, 좌선수행, 위빠사나, 요가수행, 수식관, 참선수행…. 온갖 수행법이 난무하는 시대이다. 쇼핑하듯 수행현장을 기웃거리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심해지면 마음병이 수행병으로 옮아갈 조짐도 보인다.`나에게 맞는 수행방법`과 스승은 따로 있을까? 저자는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과제는 강을 건너는 것(깨달음)이며, 이때 어떤 배(수행법)를 탈 것이냐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다만 한 가지, 속세를 떠나 조용히 공부해야 한다는 인식에 대해 저자는 크게 우려한다. 결국 마음공부는 이 세상에서 더욱 잘 살기 위한 방편이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수행하지 않는 것은 운전연습을 위해 거리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수영을 배우기 위해 물가로 나가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저자는 일상 속에서 부딪치는 모든 사건과 경계를 마음공부의 소재로 삼기 때문에 일상과 수행을 구분하지 않는다.또한 영성과 육체의 동시 단련, 정기훈련과 상시훈련, 일 있을 때와 일 없을 때 등 모든 경우의 수를 세분화한 것이 마음공부의 가장 큰 특징이다. 어느 한쪽만을 고집할 때 조각인격을 낳을 수 있는 우려를 애초에 차단하여 누수가 없도록 철저히 막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어떤 수행법을 취하든, 마음공부인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할 기본기를 담고 있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1-13

`귀를 기울이면`

질펀한 서민들의 삶 담담하게 그려한국문단의 가장 공신력 있는 장편소설의 산실 `문학동네소설상`의 제17회 수상작`귀를 기울이면`(문학동네)이 출간됐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날카롭게 빛나는 문장들로 사랑받는 은희경의`새의 선물`과 전경린의`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치밀하고 발랄하고 경쾌한 필체 속에 소설쓰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녹여냈던 이해경의`그녀는 조용히 살고 있다`, `진정, 이야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또하나의 해답을 내보이며 폭발적인 서사의 힘을 보여준 천명관의`고래`, 역사에 대한 전복적인 해석과 불온한 발상, 상식을 벗어난 신선한 상상력이 돋보인 박진규의`수상한 식모들`과 김언수의`캐비닛`, 그리고 다시, 극적인 효과를 겨냥한 과장기나 포즈에 대한 유혹으로부터 초연한 서술의 품위를 보여준 김진규의`달을 먹다`, 마성적 힘이 이끄는 매혹적인 성장소설인 김기홍의`피리 부는 사나이`까지, 항상 문학의 최전선에서 세계를 향한 날카로운 펜 끝을 겨눠온 전통이 올해에도 어김없이 이어진다.`귀를 기울이면`은 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자라고 아둔한 줄로만 알았던 그 아이의 비범한 재능이 발견되는 순간, 고단한 삶을 겨우 이어가던 아이의 부모와, 전성기가 지나 폐업 직전의 프로덕션의 피디와, 고사 직전인 재래시장을 살려보려는 상인회의 총무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고 고군분투한다. 속물적 욕망에 길들어 몸살을 앓는 세계, 그 속에서 펼쳐지는 소시민들의 이 따뜻하고 현실적인 비극은 우리로 하여금 이상한 뭉클함을 자아내게 한다. 시종일관 철저히 다큐적인 서술로 삶의 부조리와 소외를 다루고 있는 이 소설은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결코 둘러말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 물질·돈으로 교환할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생활 대부분의 기준이 되어버린 사회, 어느새 그 자체로 미덕이 되어버린 `돈-경제`의 가치…. 이미 이 사회 안에, 우리 안에 익숙하게 자리잡아버린 것이기에, 제 아이를 이용해 어떻게든 가난에서 벗어나보려는 부모의 구차하기까지 한 행동들이나 모든 것들이 숫자로 환원되는 이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들은 씁쓸하기만 하다.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바보아이 일우의 귀를 통해 들려오는 어지러운 세상의 만휘군상, 권태와 습속으로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버텨나가는 현대인들의 악다구니 섞인 노래가 이제 우리들의 무뎌진 귀에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문학동네 펴냄, 조남주 지음, 328쪽, 1만2천원

2012-01-13

`검은개들의 왕`

성장의 비밀 찾아가는 세 소년의 모험이야기 거푸집처럼 일정한 틀이 고착화되고 있는 우리 청소년문학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 줄 제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검은개들의 왕`(문학동네어린이)이 출간됐다. `검은개들의 왕`은 세 소년의 모험을 통해 숨은 성장의 비밀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엄마의 죽음과 아버지의 부재로 삼촌 집에 의탁된 나. 나는 언젠가부터 두 개의 달, 즉 달의 환영을 목격하는 인물이다. 엄마가 무허가 춤 교습소를 한다는 이유로 `춤쟁이 아들`이 된 동치. 동치는 엄마에 대한 책임감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소문난 싸움꾼이 되어 버린다. 또 하나의 문제적 인물 홍두. 홍두는 하루에 똥을 세 번 누고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영험한 가스를 분출하는 `똥쟁이`다.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단둘이 사는 홍두는 선천적 소아마비로 세 손가락이 짜부라져 있다. 자신의 손가락 치료를 위해 예수님, 부처님, 성모님을 찾아다니는데도 그분들에게서 응답이 없자, 마침내 귀신에게로 눈을 돌리고 귀신 전문가의 길로 들어선다.세 소년의 공통점은 현실에서 모성의 결핍을 안고 산다는 것이다. 하지만 풍요로운 상상력으로 결핍을 채우며 망설임 없이 모험 속으로 달려 나간다. 그런 소년들에게는 포악한 검은개조차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개성 넘치는 인물 표현과 그로테스크한 장면 묘사는 이 소설의 가장 큰 강점이다. 금속 이빨을 번쩍이며 경찰복을 입고 애국가를 부르며 다니는 정신이상자 금속경찰, 색색의 천조각을 담은 보따리를 보물처럼 여기는 미친 할머니 등 생생한 인물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문학동네어린이 펴냄, 마윤제 지음, 276쪽, 1만1천원

2012-01-13

`오늘의 일본 문학:혼돈을 딛고 세계로`

패전 후 일본 현대문학의 성장과 원동력 일본 현대 문학은 1945년 일본의 패전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오늘의 일본 문학-혼돈을 딛고 세계로`(웅진지식하우스)에서는 폐허에서 고도성장을 한 시기, 문학 역시 폐허의 혼돈 속에서 어떻게 몸부림을 쳤는지 일본 현대 문학의 성장 과정을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또한 이런 시기를 거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를 배출하게 되는 원인들도 함께 유추해 볼 수 있다.1부에서는 전후 `전쟁`이라는 극적인 체험과 `패전`이라는 상실감 속에서 몸부림치는 일본 문학가들의 작품과 삶을 살펴본다.`풍요의 바다`를 쓰고 국가와 사회의 변화를 촉구하며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 문학적 행위의 연장선상에서 연인과 동반 자살한 다자이 오사무 등 시대를 극복하고자 한 작가들의 치열한 문학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2부에서는 `학생 운동`과 `경제적 성장` 이라는 모순된 키워드로 고민이 깊어지는 1960년대 일본 문학을 다룬다.`만엔원년의 풋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양심적 지식인 오에 겐자부로로 대표되는 이 시기의 일본 문학은 모순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고뇌를 담고 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부는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을 바탕으로 피어나기 시작한 대중 문학의 여러 모습들을 살펴본다. 일본의 사회파 추리 소설을 탄생시킨 마쓰모토 세이초, 역사 소설의 황금기를 연 일본 국민 작가,`료마가 간다`의 시바 료타로 등 인기 작가들의 `인생을 사는 법`이 펼쳐진다. 4부에서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나카가미 겐지, 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본 현대 문학을 만들고, 현재 이끌어 가고 있는 일본 최고의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나본다.이 책을 읽고 나면, 현재 일본의 작가들이 일본을 넘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문학적-시대적 원동력에 대해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24쪽, 3만원

2012-01-13

터키의 근현대 역사 3代 100년의 이야기

`고요한 집` 민음사 펴냄,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번역, 280쪽, 1만2천원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60)의 장편소설`고요한 집(Sessiz Ev)`(전 2권, 민음사)이 출간됐다. 이 소설은 파묵이 발표한 두 번째 소설(1983년)로 그 스스로 “내 젊은 날의 영혼이 반영된 소설”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스탄불 근교 소도시에 살고 있는 아흔 살 된 할머니의 집에서 세 남매가 보낸 일주일을 그린 이 작품은 터키에서 `마다라르 소설상`, 프랑스에서 `유럽 발견상`을 수상하면서 파묵이 처음으로 전 세계 문학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의 첫 소설`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이 토마스 만을 연상케 하는 전통적 사실주의 기법을 보였다면, 이 소설은 포크너나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모더니즘적 서술을 보여 준다. 다섯 명의 인물을 화자로 등장시키는 `다층적 서술 방식`이나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할머니의 회상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흐름 수법 등 파묵 문학이 변화되어 가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역사의 의미를 회의하는 역사학자,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된 혁명주의자 여대생, 미국에 가서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인 고등학생, 약 한 세기 동안 급변해 온 터키 역사를 목격한 할머니, 그녀와 40년 동안 기묘한 동거를 해 온 하인, 급진적 민족주의자가 되어 세상을 바꾸려 하는 십대 소년을 통해, 터키 근현대 약 100년간의 정치, 사회, 문화의 변화와 그 속에서 개인들이 겪게 된 비극을 파묵만의 스타일로 풀어냈다.오르한 파묵은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로 `밀리예트`신문 소설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했다. 1985년 발표한`하얀 성`으로는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사이에 발표한 두 번째 소설이 바로`고요한 집`이다.`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전통적인 사실주의 소설이었다면, `고요한 집`은 다층적 서술 기법이나 의식의 흐름 기법 등을 사용해 그의 문학 세계가 변화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이 소설은 파묵 특유의 문학이 무르익는`검은 책`, `내 이름은 빨강` 등으로 이어지는 변화의 단초를 보이는 작품으로 볼 수 있다.1980년 9월에 터키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는데, 이 소설은 그 두 달 전인 7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작품 전체에 정치적 긴장감이 깔려 있다. 또한 전체 32장을 각 장마다 다른 화자가 등장해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함으로써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인물들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표현되고, 지식인에서부터 하인, 90여 년 전과 현재의 이야기를 동시에 들을 수 있다. 다섯 명의 화자는 아흔이 된 할머니 파트마, 그녀의 두 손자 파룩과 메틴, 하인 레젭, 레젭의 조카 하산이다. 이들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와,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터키의 정치, 사회, 문화가 변화해 온 역사가 생생하게 증언된다.바랜 종이 더미를 읽어 나갈수록 그런 기분이 서서히 펼쳐지기 시작한다. 긴 항해를 하다가, 항해 내내 당신을 답답하게 했던 안개가 걷히고, 나무와 돌, 새 들을 품은 육지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 감탄하듯, 읽어 갈수록 펼쳐지는 종이들 사이에 서로 맞물려 있는 수백 만 개의 삶과 이야기가 갑자기 내 머리에 떠오른다.파묵은 `고요한 집`에서 약 100년에 걸친 삼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파트마와 셀라하틴, 도안과 레젭, 세 손주들과 하산이 각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셀라하틴은 루소나 볼테르 등 서양 철학자들의 이름을 입에 달고 다니는 맹목적인 서양 추종자였으며, 파트마는 남편의 뜻을 묵묵히 따르기는 하지만 “나는 동양에서 나온 첫 번째 서양인이야, 서양이 된 첫 번째 동양!”이라고 하는 그의 사상과 행동은 이해하지 않고 냉담한 태도를 취한다. 그는 서양에 비해 발전하지 못한 동양을 구제하려 하는데, 이를 위해서 그는 40년 가까이 백과사전을 집필한다. 그러나 이 기획은 완성되지 못하고, 그는 동양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실행하지는 못한 채 숨을 거둔다. 오히려 하녀에게서 두 아들을 낳음으로써 아내와 아들에게 평생 자기 대신 짊어져야 할 짐을 남기고 떠난다. 파트마는 이러한 남편 옆에서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더더욱 냉담해지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과거 속으로 침잠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1-06

아픈 청춘과 소시민을 위한 희망찬가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창비 펴냄, 김미월 지음, 260쪽, 1만1천원지난해 제29회 신동엽창작상을 수상하며 촉망받는 젊은 작가로서의 저력을 확인한 김미월(35)이 신작 소설집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창비)을 펴냈다. 소설집`서울 동굴 가이드`와 장편소설`여덟번째 방`에서 이 시대 청춘들의 아픔과 고민을 보듬어온 작가는 두번째 소설집`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에서 한층 물오른 필력과 젊은 감각, 더욱 깊어진 통찰로 독자들의 기대를 모은다. 김미월의 소설에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사람들이 등장한다.`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을 `남몰래 펼쳐보는` 이 작가의 섬세한 눈길은 남다른 온기를 머금고 있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인생이라고 해서 섣불리 보잘것없는 삶으로 재단해서는 안된다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이제는 무시당하기 일쑤인 이 작은 진리를 작가는 차분하고도 곡진한 목소리로 전한다. 표제작에서, 번번이 꿈을 포기하고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편집자 `진수`는 다니는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지도 못할뿐더러 계약을 따내기 위해 만난 유명 시인과의 술자리에서 행패를 당한다. 하지만 동갑내기면서도 자신보다 훨씬 유능한 팀장에게 거리감을 느끼던 진수가 자신의 득실은 따지지 않고 위험에 처한 팀장을 구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얼뜨기처럼 보이던 진수의 도덕적인 면모와 순수한 용기에 마음이 끌리고 만다. 마찬가지로 `정전(停電)의 시간`에서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인 공원에서 일하는 `병태`는 공기업에 다니고, 치과를 개업하고, 대형 외식업체를 경영하는 소위 `잘나가는` 친구들에 비해 턱없이 가진 것이 부족해 보인다. 그러나 세면장에 갇힌 귀뚜라미를 딱하게 여기는 마음결과, “동백꽃 한 송이가 제 그림자를 조준하며 천천히 떨어지”(187면)는 순간을 응시할 줄 아는 눈썰미는 김미월만이 찾아낼 수 있는 병태의 귀한 본모습이다. `아무도 펼쳐보지 않는 책`의 등장인물들은 어딘지 볼품없는 겉모습이지만 작가는 끈기있게 그들을 지켜보고 지지한다. 소설 속 상황과 별 다르지 않은 처지의 수많은 보통 사람들은 작가의 이러한 태도에, 언젠가 나타날 누군가도 자신을 알아보고 `펼쳐봐`주리라 희망하며 안도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2-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