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문화

모욕을 견디며 존엄을 지킨 여인들

프랑스와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세 여성의 삶을 교차시키며 내면의 강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세 여인`(문학동네)은 2009년 공쿠르상 수상작이자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는 마리 은디아이의 작품이다. 세네갈계 프랑스 작가 마리 은디아이는 등단 이래 어떤 문학적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으며, 클래식하고 섬세한 문체와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공간, 특히 작품 속에 스며 있는 기묘함으로 프란츠 카프카에 비견되기도 했다.`세 여인`은 세 편의 이야기, 세 개의 소우주 속에 담긴 세 여성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모두 아프리카 대륙과 프랑스, 더 정확히 세네갈과 프랑스 사이에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여성들이다. 오래전 가족들에게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뼛속까지 이기적인 아버지로부터,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지만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젖어 살아갈 뿐인 남편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자신을 철저히 짓밟는 한 남성으로부터, 노라와 판타 그리고 카디 뎀바, 세 여성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존엄을 지켜나간다. 뿌리깊은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변화시키고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힘은 그들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고요하고도 부드러운 내면의 힘이다. 가혹하고 불편하며 폭력적인 진실이 침묵과 조용한 성찰의 언어로 조심스레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독자들은 강인하고 굳센 세 여성이 보여주는 정신의 승리에, 모욕을 견뎌 개인의 존엄을 지켜내는 그들의 강렬한 이야기에 경탄에 찬 마음의 가벼운 떨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05

20년간 침대서 내려오지 않은 남자 이야기

“독특하고 기괴한 설정에 있어서 카프카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았는데 소설을 읽다 보면 카프카의 `변신`이 자꾸만 떠오른다.” `침대`를 번역한 정회성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런 감회를 밝히고 있다.이 책의 주인공 맬컴은 20년이 넘도록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어른이 되는 것이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평범해지는 것임을 깨달은 그는 스물다섯 번째 생일 다음 날 침대로 올라가고, 7484일 후 기중기가 침대와 한 몸이 된 그를 들어 올려 집 밖으로 옮길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대신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선택한 맬컴과, 그런 그를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의 이야기.`침대`는 성장을 거부한 남자 곁에서 성장해 가는 가족들을 그리고 있는 독특한 성장소설이다.남들과는 다른 삶을 택한 형 때문에 이름 대신 `맬컴의 동생`으로만 불리는 `나`의 이름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작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는 “나는 일부러 그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 걸 원치 않았어요. 그는 평생 맬컴의 그림자로 살아왔기 때문이죠”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나`는 부모와 사랑하는 여인의 관심을 형에게 빼앗긴 채, 그러나 끊임없이 그들의 사랑을 갈구하면서 살아간다. 평범함을 거부한 형 때문에 이름조차 잃었지만, 동시에 형 때문에 삶과 사랑을 고민하면서 특별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힘차게 박동하는 심장을 나눠 주고서 갑자기 그것을 벽에 던져 무참히 터뜨려 버린다면 그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내용이 결국 현실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면? 이런 게 진짜 삶이라면, 굳이 침대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본문 중에서)맬컴과 나의 부모, 그리고 두 형제의 연인인 루 역시 맬컴이 던져 준 인생의 숙제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방황한다. 자신이 만든 탄광의 엘리베이터 사고로 십여 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은 후 평생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아빠,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을 돌보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엄마, 가족을 떠나 버린 엄마 때문에 폐인이 된 아빠에게 돌아가기 위해 연인을 떠나야 했던 루.이 세 사람 역시 맬컴 때문에 남들과는 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되지만, 역시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게 된다.언젠가 아버지가 했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는 말을 나는 늘 곱씹는다. 그러나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음을 `침대`는 그려 낸다.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맬컴을 먹여 주고 씻겨 주고 다독여 주는 엄마는 그를 살게 하는 것일까 죽게 하는 것일까.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형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녀의 사랑이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맬컴은 마지막 날인 7천484일째에 “나는 엄마에게 누군가를 이십 년 동안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렸어. 내가 엄마를 살아 있게 한 거야”라고 말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05

희망 잃은 슬픈 존재의 가슴 어루만지다

▲ 김성규 시인선명한 언어와 유려한 이미지를 구사하며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동화적 상상력으로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쳐온 김성규 시인의 두번째 시집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창비)가 출간됐다.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폐허에 다름 아닌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과 삭막한 “세계의 적나라하고 추악한 양상들을 땀내 나는 언어로 기록해나”(조재룡, 해설)가며 부조리한 현실의 이면을 새롭게 인식하는 깊은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서정적인 목소리와 그늘진 삶의 비참한 풍경을 예민하게 포착해내는 냉정한 시선이 돋보이는 “처연한 아름다움과 절절한 울림이 있는”(송찬호, 추천사) 시편들이 불행한 삶의 고통 속에서 희망마저 잃고 살아가는 슬픈 존재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지뢰밭 가운데서/한 남자가 일직선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적도를 따라 걸어가는 중입니다/왜 적도로 가느냐고 묻자,/전쟁이 끝나 우리가 만날 수 없을 때/부서진 건물 사이를 지나/너는 왼쪽으로 걸어/나는 오른쪽으로 걸을게/서로를 찾아 헤매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면/적도를 향해 걸어가자//지뢰밭 가운데서/한 여자가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적도로 걸어가는 남과 여` 전문)김성규 시인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한 성찰보다는 “가난이 재난을 찾아가”고 “재난이 가난을 찾아내”(`해열`)는 이 세계의 비극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인다.“반쯤 쪼개진 하늘”(`수박`)에 “돼지비계처럼 떠다니는 구름과 시체의 얼굴로 부풀어오르는 달”(`동면, 폐정, 병이 최초로 발생한 곳`)과 같은 섬뜩한 풍경 속에는 재앙으로 물든 참혹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비장함마저 감돈다. “썩은 물이 흘러넘치고/뱀의 허물처럼 아이들의 꿈이 밤하늘에 떠다”(`동면, 폐정, 병이 최초로 발생한 곳`)니는 폐허의 가시밭 어느 곳에서도 희망의 불씨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올라갈 곳은 없고 오직 떨어질 일만 남”은 고통스러운 지상에 “폭풍이 언제 멈출지는 아무도”(`폭풍 속으로의 긴 여행`) 모른다. “나, 걸었지/모래 우에 발자국 남기며/길은 멀고도 먼 바다/목말라 퍼먹을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뒤를 돌아보았지/누군가의 목소리가 날 부를까/이미 지워진 발자국/되돌아갈 수 없었지/길 끝에는 새로운 길이 있다고/부스러기처럼 씨앗처럼 모래 흩날리는/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제 혼자 걷고 있었지/깨어보니/무언가 집에 놓고 왔을까/이미 지워진 발자국/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으며/목말라 퍼먹을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을까”(`유랑`전문)“두 눈을 뜨고 노래해도/고통은 바구니에 담겨지지 않”고 “두 눈을 감고 노래해도/고통의 바구니는 줄어들지 않는”(`두 눈을 감고 노래해도`) 비참한 삶 속에서 시인은 죽음과도 같은 폐허를 응시하는 시인은 어쩌면 오히려 죽음 속에서 삶의 자양분을 얻는 듯도 하다. “다시는 가지 말아야 할/그래서 갈 수 밖에 없는 길”(`눈 위에 찍힌 붉은 발자국`)을 밟아나가야 한다고 다짐하는 시인은 “밤마다 베고 자던 구름에도 세금을 매기는”(`얼음궁전`) 비정한 세상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어둠의 불꽃을 피워올린다. “내일은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내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시인은 “어둠 속/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뿔`)이며 “마귀가 불러주는 주문을/온몸으로 받아 적”(`방언(方言)`)는다.“그 소리는 모든 종말의 순간에 울려퍼진다/그 소리는 죽은 자들을 일깨우며/그 소리는 황혼의 무덤 위에서/그 소리는 근육을 터뜨리고 망치를 들어올린다/그 소리는 피 묻은 대장장이의 손으로/그 소리는 모두를 불러모으고/그 소리는 고통 없이 심장을 뚫고/그 소리는 눈먼 자들을 주저앉히며/그 소리는 분노를 녹여/그 소리는 검은 땅에 패배의 씨앗을 흩뿌린다”(`쇠나팔`부분)무릇 `시인`이라 함은 세계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불화하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자이다.김성규에게 시인이라는 존재는 “자고 일어나면 병이 깊어지는”(`해열`) “예언자”(`예언자`)이자 “위대한 마법사”(`미식가`)이며 “스스로를 형틀에 매달고 살아가려는 망명자”(`심문관`)이다.자신이 “쓴 시가 지나간 시간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것”(`혈국(血國)`)을 알고 있기에 시인은 “이제까지 쓴 것들을 다 버리고 다시 써야”(`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 한다고 자신을 다그치면서,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를 심장 속에 새겨넣”(`정원사`)고 “독을 뿜지 않기 위해 혓바닥을 입속에 말아넣”(`중독자`)으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05

프로이센 특권계층 폐해 낱낱히

오늘날 독일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하고 대담하고 야심 찬 문학가 (…) 둘도 없는 희곡작가였으며―둘도 없는 산문작가이자 소설가”(토마스 만)로 손꼽히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의 중단편소설집 `미하엘 콜하스`(창비)가 출간됐다. 이 작품집은 표제작 `미하엘 콜하스`외에 `O. 후작 부인` `칠레의 지진` `싼또도밍고 섬의 약혼` `로까르노의 거지 노파` `주워온 자식` `성 체칠리아 또는 음악의 힘` `결투` 등 클라이스트 중단편 여덟편 전체를 완역해 묶어 냈다.클라이스트 특유의 문체를 그대로 살리고자 문단 구분, 간접화법과 직접화법 등을 충실히 따라 옮기되, 잘 읽힐 수 있도록 세심하고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한 것이 이번 번역본의 특징이다.방대한 분량의 중편소설 `미하엘 콜하스`의 경우, 등장인물 및 사건전개를 설명해주는 부록을 실어 작품의 이해를 도왔으며, 본문 뒤에는 5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작가의 생애 및 수록작 각각에 대한 깊이있는 해설을 덧붙였다.`미하엘 콜하스`에 실린 클라이스트의 중단편소설들은 `소설집` 제1권(1810년, `미하엘 콜하스` `O. 후작 부인` `칠레의 지진`)과 제2권(1811년, `싼또도밍고 섬의 약혼` `로까르노의 거지 노파` `주워온 자식` `성 체칠리아 또는 음악의 힘``결투`)에 수록돼 출간됐으며, 이러한 작가의 관심사가 직간접적으로 반영됐다.`미하엘 콜하스`는 당시 프로이센의 경제 및 사법 개혁이라는 시대적 현안을 다룬다. 소설에서는 부패한 융커 계급의 특권이 선량한 시민에게 끼치는 폐해를 보여주며, 이들 특권층의 행동을 방치한다면 `미하엘 콜하스`가 일으킨 유의 혁명적 봉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하엘 콜하스는 법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자 “사회에 대한 책임” 때문에 불법체제를 응징하러 나서게 된다.어느 후작 부인이 저도 모르는 새에 임신된 아이 아버지를 찾는다는 광고를 내는 것으로 시작하는 `O. 후작 부인`은 발표 당시 큰 물의를 일으켰다. 기이한 임신의 과정이 “독일문학 사상 가장 유명한 대시(―)”로 표현되는 외설성이 그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중요한 주제는 여성의 자아 정체성 확립과 자립적 행동을 통해 19세기까지 절대적 권위를 유지해온 시민사회의 `부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이 소설은 세 문단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는 장소가 “도시-골짜기-도시”로 달라지고 시간이 “낮-밤-낮”으로 이어지며 “지진-낙원-학살”이 생겨나는 내용과 부합한다. 클라이스트의 동시대인들은 프랑스혁명을 지진에도 비유했는데, `칠레의 지진`에서도 자연재해가 기존 체제의 전복을 은유하고 있다. 클라이스트는 혁명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지만 혁명적 관점에서 사회와 도덕 비판을 시도했으며, 집단광기에 사로잡힌 군중에 맞서는 돈 페르난도를 통해 극한상황에서 인간의 가치를 입증하는 영웅적 인물을 그려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29

현대사회, 시간이 `노동의 인질` 되다

▲ 한병철 교수2012년 최고의 인문서로 꼽힌`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베를린 예술대학)의 책 `시간의 향기`(문학과지성사)가 번역·출간됐다.`시간의 향기`(2009)는 `피로사회`(2010)의 전작으로 현대사회에서 모든 시간이 노동의 인질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모든 시간은 일의 시간이고, 여가시간도 일의 시간을 준비하는 보조적 의미밖에 지나지 못한다는 것.왜 나는 늘 시간이 없고 시간에 쫓길까? 왜 시간은 그토록 빨리, 그토록 허망하게 지나가버리는 것일까? 그토록 바쁘게 지냈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까? 나는 주어진 많은 시간을 요령 있게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시간의 향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이러한 일상적 의문들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성찰이다. 또한 우리가 직면한 시간의 문제들이 결코 효율적인 시간 관리 기법 같은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흥미롭게 보여준다.한병철 교수에 따르면, 오늘의 시간은 리듬과 방향을 상실하고 원자화됨으로써 위기에 봉착해 있다. 오늘날 시간의 흐름은 자연적 순환과 같은 리듬도, 미래의 구원이나 종말, 또는 진보라는 의미 있는 방향성에서 오는 서사적 긴장감도 상실해버렸고, 그저 끝없는 현재들의 사라짐으로써 체험될 뿐이다. 그리하여 지속성의 경험은 매우 희귀한 것이 됐다. 이에 따라 개개인의 삶도 이렇게 분산된 시간 속에서 산만하게 흘러간다. 즉흥적인 시작과 중단이 반복된다. 그 과정에서 삶은 완결되지 못하고 불시에 끝나버린다.한병철 교수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근대 이래 계속 강화되어온 “활동적 삶의 절대화” 경향에서 찾는다.이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오직 일하는 자, 활동하는 자라는 사실에서 밖에는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를 자신의 의지에 복속시키고 변화시키는 노동만이 인간에게 궁극적 자유를 가져온다는 헤겔-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그 극명한 표현을 얻는다.활동적 삶의 절대화는 시간에 대한 관념에도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 시간은 어떤 리듬도 어떤 질적인 특징도 없는 양적인 단위일 뿐이며, 가능한 한 단축시켜야 할 비용일 뿐이다. 그것은 바로 “향기 없는 시간”이다. 속도에 대한 신앙은 여기서 탄생한다. 시간은 비용이기 때문에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증, 무엇이든 앞당기고자 하는 욕망이 지배적인 심리로서 자리 잡는다. 게다가 그러한 심리는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린다는 느낌을 강화한다.그렇다면 어떻게 시간의 향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한병철 교수는 활동적 삶 중심의 가치관을 사색적 삶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일한다. 나는 활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근대 이후를 지배해온 가치관이었다면, 한병철 교수는 이를 `나는 일하지 않는다, 나는 멈춘다, 고로 존재한다`로 전도시킨다.멈춤의 시간, 활동하지 않고 자기 안에 머물며 영속적 진리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 이때 인간은 진정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는 머무름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기다림을 참지 못하는 태도, 그 조급증의 문화가 `빨리 빨리`라는 개념이 되어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한국 사회에서 머무름의 기술, 멈추어 서서 사색하는 능력은 반드시 장려되어야 할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시간의 향기`의 주요 테제들은 헤겔, 마르크스, 니체, 프루스트,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 료타르 등의 사상과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서 도출된다.짧은 분량이지만 이러한 근현대 주요 사상가들에 대한 논의는 간명하게 요점을 짚어주면서도 깊이를 잃지 않는다.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보리수 꽃잎차에 담근 마들렌의 향과 맛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중국의 시계 `향인(香印)`에 대한 분석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며, 여기서 일깨워진 지속성의 감각은 하이데거의 토착성과 정주의 철학에 대한 아름다운 서술로 이어진다.한병철 교수의 저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일 철학계를 넘어서 더 넓은 독자층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주요 미디어 전체가 그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는`피로사회`부터였다.`시간의 향기`는 `피로사회`의 전작으로서 출간 당시에는 `피로사회`만큼 독일 언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입소문을 타고 꾸준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책이 됐다. (현재 독일에서 7쇄까지 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29

“이번엔 함빡 웃어 보세요”

“그 밤에 문득 나는 달에게 우리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짧은 형식의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일렁거렸다.”`문득`이라 말했지만, 이 이야기들은 작가의 마음 한구석에서 꽃피울 날을 기다렸던 것 같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글, `달이 듣고 함빡 웃을 수 있는 이야기` `달이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야기`를 엮은 짧은 소설집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문학동네)는 작가 신경숙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경쾌하고 명랑한 작품집이 아닐까 싶다.“패러독스나 농담이 던져주는 명랑함의 소중한 영향력은 나에게도 날이 갈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명랑함 없이 무엇에 의지해 끊어질 듯 팽팽하게 긴장된 삶의 순간순간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작가의 말`에서낮의 긴장을 풀고 밤의 고요 속에서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면, 그 안엔 일상의 순간순간이 전하는 소소한 기쁨과 슬픔들, 크고 작은 환희와 절망들이 달빛처럼 스며들어 있다.가만 들여다보면 그것은 곧 나와 당신의 이야기, 내 친구와 가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해내는 작가 특유의 감수성에 은근슬쩍 숨겨놓은 유머의 뇌관들로 인해 슬몃 입꼬리가 올라가다 저도 모르게 하하 소리 내어 웃게 된다. 아직 그리 깊지는 않은 밤, 문득 올려다본 서쪽 밤하늘 한켠에 새침하게 초승달이 떠 있다. 그럴 때면 문득, 누군가에게 안부인사를 전하고 싶어진다. `달 좀 봐.` 작가 역시 꼭 그랬나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29

무수한 비자림에 가려진 `인생 성찰`

지난해 출간한 장편소설 `레가토`로 제45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며 “항쟁세대의 고해성사라고 부를 만한 권여선 소설의 절정이자 한국 문학에서 기억의 윤리학이 성숙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평을 받아안은 권여선이 네번째 소설집 `비자나무 숲`(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2010년에서 2012년에 걸쳐 발표된 중단편을 모은 이 책은 `시간과 기억`에 대한 작가의 천착은 여전하지만 앞선 작품 `레가토`가 `학생운동`의 절정인 한 시기의 기억을 불러낸 것이라면, 이번 소설집은 짧고 긴 인생들 사이에서 쌓고 지워가는 기억과 망각의 깊이를 통해 삶의 심연을 가늠하게 한다. 절대 잊지 못하리라던 기억을 깨우는 잔상들을 하나씩 좇아 힘겹게 불러내지만 그 또한 실제 `사건`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젊은 날 한 시기를 동거하며 매일같이 함께 생활한 친구와 그 속에 품은 자신의 치기와 과오들을 까맣게 잊고 살아 왔음을 떠올릴 때, 우리가 인생이라는 망각의 힘에 이끌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잊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하면 섬뜩하다. 이 작품집을 통해 우리는 실로 무수한 비자림에 가려진 인생들을 성찰하고 삶이 품은 기억과 시간의 흔적을 받아들인 권여선의 해방과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22

책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 그려

▲ 정수복 작가`파리를 생각한다` `파리의 장소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등으로 이어지는 저서에서 에세이와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파리와 프로방스의 골목에 숨어 있는 `사색과 영감의 장소`들로 독자들을 이끌었던 사회학자이자 작가 정수복이 신작을 펴냈다. 그가 이번에 걸어들어간 곳은 특정 도시나 마을이 아닌 `책과 독서가들이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그에게 독서란 단지 `발`을 움직이지 않을 뿐, 언제나 `지금-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는 또다른 의미의 `산책`이었다. 그는 산책할 때마다 늘 가방 속에 책을 넣고 다녔고, 그가 산책하는 곳에는 늘 책과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그의 산문집 `책인시공`은 여러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양한 책을 읽는 각양각색의 모습을 통해 책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그려 보인다. 여기에는 이름이 잘 알려진 작가와 유명인들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자기만의 시공간에 책을 들고 등장해 고유한 풍경으로 피어난다.침대에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도서관에서, 서점에서, 거리에서, 공원에서, 그리고 아침, 한낮, 저녁, 밤 시간에 관계없이, 어려서나 청춘일 때나 늙어서나,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견디고 즐기며 자기만의 내면 공간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산책자 정수복이 문장으로 그려낸 독서가들의 초상, 그리고 사람과 책이 한곳에 아름답게 어우러진 일상의 풍경화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이 책은 `독자 권리 장전`이라는 글로 시작한다. `책 읽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 선언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17가지의 항목들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 내키는 대로,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혼자 있을 때조차 쉴 새 없이 휴대폰 벨이 울리고,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죽은 시간`으로 여기며 끝없이 삶의 여백을 지워나가는 이 세계에서, 어쩌면 아무런 방해 없이 책 읽기에 좋은 시간과 장소가 주어지길 기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는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을 `서재`로 바꾸고, 일상의 빈틈을 독서시간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 속에 숨어 있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 들을 하나하나 펼쳐 보인다.황인숙의 옥탑방, 정혜윤의 침대,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 장정일의 기차, 로쟈 이현우의 버스….이곳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공간, 혹은 책 읽기에 지독히 부적절한 공간처럼 보이지만, 비범한 독서가와 작가 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을 금세 서재로 만들어, 언제 어디서나 거리낌 없이 책을 꺼내든다. 정수복의 책이 특별한 것은 지금껏 책에 관해 이야기할 때 거의 다루지 않았던 `독서가들의 시간과 장소`가 책에 관한 논의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22

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날 눈동자가 되다

▲ 주하림 시인2009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주하림(27) 시인이 첫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창비)을 출간했다. 등단 4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생경하고 감각적인 언어와 현란한 이미지가 톡톡 튀어오르는 환상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보인다.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돋보이는 색다른 시작법은 첫 시집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주하림이 논리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꾸려놓은 감각의 세계를 목격하다보면 어느새 시인의 언어에 실려 이국 그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독특한 경험을 맛보게 된다.낯설기에 강렬한 시인의 언어는 논리보다는 감각으로, 기억보다는 인상으로 진하게 스스로를 각인시킨다.“드디어 빛 없는 세계다/나는 눈곱을 붙였다 뗐다 하며 태어난다/간지럽냐고?/너의 마음은 반은 맞히고 반은 틀린 답이다/골방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이틀에 한번 폐렴을 앓고/화분 속의 꽃들은 서서히 죽어가며 나의 안부를 묻는다/(…)/한밤중 과자 부스러기 속에서 콘돔 껍질 속에서/개미들은 전생에 벗어둔 옷을 꺼내 입고/문득 수많은 탄생들이 두려워진다/너는 입덧을 원했고/나는 적막에서 기괴하게 살다 간, 가난한 화가의 생애를 가리킨다”(`레오까디아와의 동거` 부분)어법을 염두에 두지 않는 주하림의 시는 읽기에 “불편”하다.“말 씀씀이가 재미있고 어조의 재빠른 선회에 늘 재치가 가득 있지만”(황현산, 해설) 읽어가는 것만도 쉽지 않고, 시인의 의도라거나 시의 뜻을 제대로 알아차리기는 어려운 일이다.그의 시는 기존 문법이나 논리적 사고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대 배꼽에서 시든 입술을 줍”(`입실`)는다든가 “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날 눈동자가 되”고 “안과에 찾아가 피가 뚝뚝 흐르는 무릎을 올려놓”(레드 아이)는다는 기묘한 발상은 단숨에 다가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민한 감각을 열어놓는다면 시인이 이끄는 대로 그 호흡을 따라가며, “삶, 터전이란 것에 늘 시달려야 했”(`텍스처 무비`)던 화자가 들려주는 “수수께끼 같은 소리”(`미찌꼬의 호사가들`)의 “슬픈 귀엣말”(`네덜란드식 애인`) 같은 “위험한 고백”(`위험한 고백`)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날 눈동자가 되었습니다/(…)/마을 안과에 찾아가 피가 뚝뚝 흐르는 무릎을 올려놓습니다/입이 세개인 것보다 낫지 않나요 당신은 치료를 원합니까/눈이 영영 사라지길 비나요 아니면 눈과 무릎이 조화롭게/공생하길 바라나요 이제 막 꿈틀거리는 눈을 붕대로 칭칭 감고/간호사는 그 위에 입술을 그려넣었습니다 세개의 입을 달고,/나는 계절이 지날 때까지 비난 속에 살 것임을 예감했죠”(`레드 아이`부분)다소 생경한 시 제목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주하림 시의 배경은 다분히 이국적이다. 카를 다리(체코), 말라부 해변, 프레그레소 항(멕시코), 북경, 상하이, 하얼빈(중국), 후꾸오까, 오끼나와(일본), 비벌리힐스(미국) 등 대륙을 넘나드는 시적 공간과 미도리, 미찌꼬, 깁슨, 애디, 루쏘, 이사벨, 후루미, 카와이, 채터턴, 소피 등 주로 외국 인명으로 등장하는 화자들은 마치 외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이국적 풍경과 분위기를 자아낸다.시인은 또한 일본 만화, 마니아용 영화, 서양의 고전소설 등의 한 대목을 인용하거나 소재로 삼는다. 다양한 장르의 인용에서 우리는 시인의 폭넓고 다채로운 문화적 섭렵과 남다른 취향을 엿볼 수 있다.“일요일 아침, 물에 빠져 죽고 싶다는 어린 애인의 품속에서/나는 자꾸 눈을 감았다//만국기가 펄럭이는 술집에서 나라 이름 대기 게임을 하면/가난한 나라만 떠오르고//누군가 내 팔뚝을 만지작거릴 때 이상하게 그가 동지처럼 느껴져//자주 바뀌던 애인들의 변심 무엇이어도 상관없었다//멀리 떼 지어 가는 철새들//눈부시게 흰 아침//이 세계가 나를 추방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할 것만 같은”(`몬떼비데오 광장에서`전문)“너처럼 아름다운 불면증 환자는 처음이다//뜨거운 새, 관념, 관념에 다가가는 자세/우리가 달아나려 하는 한 그것은 우리의 운명//사람들 귀에 새 부리를 걸어주었지만/처음 배운 날갯짓조차 하지 못하더군/간밤의 지긋지긋한 비가 진눈깨비로 바뀌는 순간/우리 그림자는 섹스만 해서 눈이 멀어버린 것일까/창을 조금 열고 펑펑 쏟아지는 알약을 상상하다 깊은 잠이 들었다”(`빛의 볼륨`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22

서러움의 역사와 넘어섬의 삶

시인 이성복이 `아, 입이 없는 것들` 이후 10년 만에 일곱번째 시집`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언뜻 낯설기만 한 제목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는 신라 시대 향가 `풍요(風謠, 공덕가(功德歌)`의 한 구절로, 이 여섯 글자 이두는 `오다, 서럽더라`로 풀이된다. 신라 백성들이 불상을 빚기 위해 쉼 없이 흙을 나르면서, 그 공덕으로 세상살이의 고됨과 서러움을 위안하고자 불렀던 이 노래가, 이번 시집의 들머리에 놓인 “뜻 없고 서러운 길 위의 윷말처럼, 비린내 하나 없던 물결”의 맑은 `죽지랑의 못`(`죽지랑을 그리는 노래`)과 맨 끄트머리에 놓인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바라봄만으로 큰 위안이 되었던 한 그루 `기파랑의 나무`(`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를 각각 입구와 출구로 삼은 “이성복의 풍경”(문학평론가 김현)을 바라보고 드러내는 데 긴요한 열쇠 구실을 한다.독자들은 지난 1980년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등장과 함께 이성복의 시가 충격하고 매혹한 한국문학사의 한 장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사람도 사물도 이제 더는 견디기 힘들어 보인다 싶을 때 시인이 내딛는 다음 발걸음은 의외로 가볍다. 피붙이의 죽음처럼 “고통이 극심할수록 더욱 명징해지는 정신”을 바라보듯, 극단까지 밀어붙여보고 절망의 나락을 경험한 뒤에야 갖게 되는 위안이다. 헛헛한 가슴이지만 아직 가시지 않은 온기, 더는 깊어질 수 없는 상처, 좀체 소리 날 것 같지 않은 울음이 그 안에 웅크리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15

흔적으로 남은 상처에 `희망의 싹` 틔워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작가 조경란이 5년 만에 신작 소설집 `일요일의 철학(창비)`을 출간했다. 8편의 단편이 실린 이번 작품집에는 더욱 간결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진 서사와 그 안에 단단하게 응축돼 반짝이는 상징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저마다의 깊은 고독과 상흔을 지닌 채 담담하게 살아내는 하루하루 속에서 조심스레 희망을 발견하려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절실하고 아름답게, 잔잔한 여운으로 다가온다. 올해로 등단 18년차, 그간 작가는 모두 열세권의 책을 펴내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차분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고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중견작가로 확고히 자리잡아왔다. 이제 여섯번째 소설집에 이르러 작가는 더욱 간결해진 서사와 함축적인 상징이 두드러지는 여백과 응축의 미학을 선보이며 자신의 문학세계에 한층 깊이를 더하고 있다. 단절과 고독에 처한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 묘사가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타인과 만나는 차분한 시선과 어우러져 더없이 짙은 정서적 파문을 낳는다.조경란의 소설이 만들어내는 정갈한 분위기는 극적인 사건을 이면에 감춘 채 고요하고 담담하게 그려지는 일상의 풍경에서 비롯된다. 첫 작품 `파종`에서 주인공의 가족들은 각자가 지닌 상처 때문에 서로를 깊이 상처 입혔던 시절을 지내왔다. 일본에 사는 동생이 팔을 다쳐 주인공과 아버지가 함께 동생의 집에 가서 한동안 살림을 거들게 되면서, 가족들은 낯선 타국의 공간에서 일상을 함께하며 서로 마주한다. 상처와 갈등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이들은 우연히 씨앗을 심고 그 싹을 지켜보는 과정을 함께하면서 점차 서로의 존재를 가슴에 품기 시작한다. 뜨거운 고통의 시간은 지났고 이제 상처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 흔적으로 남은 상처에는 희망의 싹이 트고 있다. 소설은 그것을 되새기고 복기하기보다 그 시간이 지난 이후의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작가는 섣불리 치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상흔과 더불어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인물들에게 예기치 않은 작은 싹을 틔워줄 뿐이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감지되는 생의 기운은 그래서 오히려 무엇보다 절실하고 진실하다. 이 정갈한 일상과 그 안에 담긴 통찰이야말로 “근래 한국 단편소설이 보여준 가장 깊고 아름다운 세계”(백지연 `해설`)일 것이다.`학습의 生`에서 생의 의지는 더욱 팽팽하고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은퇴한 고등학교 윤리교사로 이혼 후 만성적인 면역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시골에 외딴집을 얻어 고립된 생활을 꾸려가는 주인공에게 한 소년이 나타난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며 투포환 선수의 꿈을 접은 소년에게 투포환 연습을 위해 집 마당을 빌려주면서 주인공 역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지만 동네 사람들이 둘의 관계에 대해 수군거리고 주인공이 소년의 도둑질을 의심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위기를 겪게 된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 다시 마당에서 소년의 쇠공 소리가 들려오면서 주인공은 자신에게 전해지는 생의 울림을 느낀다.“공이 지면에 쿵, 부딪칠 때마다 내 몸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이 깊고 과묵한 시간과 어둠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나는 반듯하게 돌아누워 그 울림이 전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내가 사는 곳은 암흑도 사차원의 상태도 아니다. 이곳은 저 쇠공이 밀어내는 강한 힘으로 허공을 꿰뚫고 지나가는 세계다. 나는 보지 않고서도 쇠공을 던지고 줍고 다시 던지는 아이를 본다. 그 공이 날아가는 궤적도. 그것은 마치 내 힘의 크기 같아 보인다. 내가 보는 것이 현재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73면)이 생생한 감각은 `일요일의 철학`의 마지막 장면과도 상통한다. 한사코 집과 가족을 떠나 낯선 곳에서의 체류를 선택했지만 여전히 삶에 대한 막막한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주인공은 맹인 학생 루카스와 술집 바텐더 `원숭이 남자`, 그리고 그의 꼬마 아이 등과 조심스러운 교류를 나누고 인라인스케이트를 더듬더듬 연습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그곳을 떠날 날을 앞둔 어느 날, 곧게 뻗은 내리막길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멀리 앞을 내다보며, 조심스레 미끄러지듯 발을 내딛는다.이들의 절실한 몸짓은 `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와 `성냥의 시대`에서는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응시하며 타인을 이해하려는 안간힘으로 드러난다. 우울과 불안에 잠겨 생을 마감한 남편을 애도하는 `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의 주인공이나 성냥을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친 아버지의 흔적을 되짚어가는 `성냥의 시대`의 주인공의 이야기 모두, 고립을 넘어서 또다른 고립된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각각 다른 결로 그려 보인다. 숨은 상처를 억지로 헤집지 않으면서 그 공백까지 포함한 타인의 고독을 끌어안으려는 이 조심스러운 시도는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탐문으로 이어진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15

연애·인생의 쓴맛 다 안 서른 넘은 여자들 “그래도 다시 사랑 좀 해보자” 덤벼들다

다나베 세이코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사랑을 받은 연애소설 9편을 모은 베스트 컬렉션 `서른 넘어 함박눈`(포레 펴냄)이 출간됐다. 단편소설의 대가로 알려진 다나베 세이코는 200만 부 베스트셀러 `신 겐지이야기`의 저자로 일본에서는 `다나베 겐지`라는 닉네임으로도 불리는 국민작가이며, 특히 간사이 사투리 연애소설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영화와 함께 큰 사랑을 받은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서른 넘어 함박눈`은 `서른 넘은 여자들`을 테마로 쓴 구첩반상 같은 연애소설집이다.이 상 위에는 매콤한 맛, 시큼한 맛, 짭조름한 맛, 숙성된 장에서 우러나는 깊은 맛까지 각기 다른 맛을 내는 이야기가 줄줄이 올라 있다.천연덕스러운 여자와 바람기 많은 남자의 속 보이는 밀애, 둔한 여자와 게으른 남자의 기우뚱한 연애, 우악스런 여자와 부드러운 남자의 장난 같은 교제, 재미없는 남자와 아직도 사랑 타령하는 여자의 고양이 같은 사랑, 그 밖에도 지지고 볶고 헤헤거리다 투덕거리다 하는 부부 사이, 애증으로 똘똘 뭉친 일심동체 같은 모녀 사이, 뭉쳤다 헐뜯었다 하면서도 꼭 붙어 수군대는 여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열두 두름쯤 되는 삶의 자잘한 이야기들이 촘촘하게 곁들여 있다.▲ 다나베 세이코그러나 연애소설이라고 해서 달콤하고 낭만적인 전개를 기대한다면 참으로 곤란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은 희로애락에 부르르 떠는 가련하거나 다감하거나 섬세한 여인의 분위기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연애의 쓴맛, 인생의 쓴맛을 알아버린 서른 넘은 여자들이 그래도 다시 사랑 좀 해보자고 덤벼드는, 조금은 안쓰러운 실화 같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다나베 세이코의 연애소설은 뜨거운 `시작`과 절절한 `이별`보다 어중간하게 시작되고 흐지부지하다 시시하게 끝나버리는 현실적인 연애의 굴곡을 실감나게 그려내 늘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사랑이 어디 그리 흔하던가. 현실의 사랑은 그저 나뭇가지 모아 대충 피운 모닥불 같은 것이다. 낭만과 온기로 잠시 설레다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싸늘해지고 마는….회색 재가 남은 자리엔 씁쓸함과 애잔함, 아쉬움과 외로움, 그리고 원수 같은 `그 남자`에 대한 기억만이 조용히 똬리를 튼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15

가난한 삶 속 희망의 불씨 지피는 여유

▲ 함민복 시인선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천성 그리움`의 힘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삶을 노래해온 함민복(52) 시인의 신작 시집`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이 출간됐다. 지난 2005년 10년 만에 네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을 펴낸 데 이어 다시 8년 만에 선보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요즘 시단의 풍경으로 보자면 꽤나 느린 걸음이지만, “함민복의 상상력은 우리가 기꺼이 공유해야 할 사회적 자본이다”(이문재, 추천사)라는 평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세월의 무게에 값하는 70편의 수작을 담았다.부드러운 서정의 힘이 한결 돋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가난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여유로움이 배어 있는 삶의 철학과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경험에서 이끌어낸 실존론적 사유”(문혜원, 해설)의 세계관을 펼쳐 보인다. 손끝에서 놀아나는 섣부른 수사나 과장 없이 정갈한 언어에 실린 솔직하고 담백한 `삶의 목소리`로 일구어낸 시편들이 따뜻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잔잔한 울림을 선사한다.“보름달 보면 맘 금세 둥그러지고/ 그믐달에 상담하면 움푹 비워진다 //달은/마음의 숫돌//모난 맘/환하고 서럽게 다스려주는//달//그림자 내가 만난/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달`전문)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평등한 삶을 지향하는 시인의 사유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시인은 감겨 제 몸을 재고 있는 줄자(`줄자`), 살아 움직일 때보다 더 무거운 고장난 시계(`죽은 시계`), 녹이 슬어 버려진 저울(`앉은뱅이저울`)처럼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사물에 주목하면서 그것들로부터 존재론적인 사유의 바탕을 얻는다.여기서 시인은 풍경을 지우며/풍경을 그리고 건물을 지워/건물이 없던 시절을 그려놓는 안개와도 같은 시각으로 폐기된 사물에서 빛나는 사물성을 읽어내며 “보임의 세계에서 해방된”(`안개`) 사물 고유의 본성을 감지한다.“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며/당신을 읽어나갑니다//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상대를 향한 집중, 끝에, 평형,/실제 던 짐은 없으나 서로 짐 덜어 가벼워지는”(`양팔저울`부분)매일의 고달픈 일상을 힘겹게 이어나가는 현실은 세대나 계층을 불문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비애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시인 또한 그러한 삶의 남루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그는 이 남루한 삶의 풍경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가운데 그 모든 장삼이사들의 끈기 어린 의지적 면모를 살며시 들춰 보여준다.“좌판의 생선 대가리는/모두 주인을 향하고 있다//꽁지를 천천히 들어봐//꿈의 칠할이 직장 꿈이라는/쌜러리맨들의 넥타이가 참 무겁지”(`금란시장` 전문)“물이 법(法)이었는데/법이 물이라 하네//물을 보고 삶을 배워왔거늘/티끌 중생이 물을 가르치려 하네//흐르는 물의 힘을 빌리는 것과/물을 가둬 실용화하는 것은 사뭇 다르네//무용(無用)의 용(用)을 모르고/괴물강산 만든다 하니//물소리 어찌 들을 건가/새봄의 피 흐려지겠네”(`대운하망상`전문)함민복의 시는 꾸밈없는 삶의 기록이다. 시인은 삶의 어느 한 순간도 가벼이 보지 않고 소중한 의미로 받아들이며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애틋한 마음을 건네며 다가선다. 가난을 일으켜 세우는 긍정의 힘이 있기에 그의 시는 가난하면서도 따듯하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흔들린다`)며 “먼 길 걸어온 사람들 목을 축여줄 수 있”(`폐타이어 3`)기를 소망하는 그의 시는 더 나은 삶과 사회,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가 될 것이다. 메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처럼 그렇게.“뜨겁고 깊고/단호하게/순간순간을 사랑하며/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현실은 딴전/딴전이 있어/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늘 딴전이어서/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그래도 세계는/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단호하고 깊고/뜨겁게/나를 낳아주고 있으니”(`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전문)/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08

박맹호, 한국 출판 반세기를 말하다

▲ 박맹호 민음사 회장사람은 누구나 평생에 한 번쯤은 `그 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키기보다 오직 미래를 창조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은 삶 자체로서만 답할 뿐 이에 대한 답을 흔히 후세의 몫으로 넘기곤 한다. 1966년 서울 청진동 옥탑방 한 칸에서 민음사를 창립한 이래, 문학과 인문학 출판에서 많은 업적을 쌓아 마침내 한국 최대의 단행본 출판사로 키워 낸 박맹호 민음사 회장이 그 질문에 답하면서 `책`이라는 과감한 제목의 자서전을 펴낸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그동안 “각계 명사들이 지나간 이야기를 털어놓는 지면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번번이 고사해 온 터여서 더욱 그렇다.`박맹호 자서전`(민음사)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의 형식으로 씌었다. 1933년 생으로 올해 맞은 팔순이 한 계기가 됐고, 충청북도 보은의 한 마을인 비룡소에서 시작해 “책으로 쌓아 올린” 평생을 돌이키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박 회장이 답하고자 한 것은 늘 위기가 아닌 적인 없었던 한국 출판의 역사를 통해, 그 역사 속에서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던 민음사의 역정을 통해 오늘날 팽배해 있는 패배주의적 “출판 위기론”에 대한 대안적 통찰이다.이 책에는 박 회장과 책의 만남이 빚어낸 강렬한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실려 있다. 청소년 시절 그가 즐겨 읽고 감동에 빠졌던 `인간의 굴레에서`, `1984`, `밤으로의 긴 여로`, `적과 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삼국지`, `수호지` 등 동서양의 명작들은 문청 시절에는 `이런 작품을 쓰겠다`는 다짐으로, 출판 입문 이후에는 `이런 책들을 반드시 내 손으로 펴내겠다`는 형태로 가슴에 남아서, 수많은 시도 끝에 결국 40년이 흐른 뒤인 1998년에야 실현되어 최근 300권을 돌파한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의 밑거름이 됐다. 그밖에도 `한국일보` 제1회 신춘문예에 소설로 당선될 뻔했으나 독재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취소되어 운명이 바뀐 이야기, 시인 고은과 만나서 의기투합해 출판 동지이자 평생의 우정을 계속한 이야기, 김현, 김치수 등 `문학과 지성` 그룹과 함께 `세계 시인선` `오늘의 시인 총서` 등을 기획해 시집 열풍을 불러온 이야기, 정병규를 만나 그를 디자이너의 길로 이끌고 함께 한국 책 디자인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분투한 이야기, 건국 이래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이문열 평역`삼국지`를 둘러싼 이야기, 한수산, 박영한, 강석경, 하일지 등 작가들과의 인연, 김용옥, 최창조, 이강숙 등 신진 학자들과의 만남 등이 두루 실려 있어 흥미를 더한다.대한출판문화협회를 둘러싼 이야기는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낸다.그는 2005년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출협 회장에 당선돼 한국 출판의 미래를 열기 위해 분투하다가, 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대목에서는 숙연한 느낌이 든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3-03-08

딸의 죽음에 응답하는 어머니의 회상

부커 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 풍경`(민음사)가 출간됐다. 이시구로는 `떠도는 세상의 화가`로 휘트브레드 상을, `남아 있는 나날`로 부커 상을,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로 첼튼햄 상을 수상했으며 `나를 보내지 마`(2005)를 타임 선정 `100대 영문 소설` 목록에 올린 현대 영미 문학의 거장이다.`창백한 언덕 풍경`은 1982년 위니프레드 홀트비 기념상을 수상하며 “영국 문학의 새로운 사자”의 출현을 알린 이시구로의 데뷔작으로, 영국에 홀로 사는 중년의 일본 여인 에츠코가 딸의 자살을 겪은 후 과거 일본에 살던 시절 만난 모녀 사치코와 마리코를 회상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 나가사키가 배경인 이 소설에서 이시구로는 피어오르는 버섯구름 하나 없이, 폭격의 굉음이나 처절한 비명 하나 없이 원폭 투하의 비극을 그린다.원폭 후 9년이 지난 1954년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영국으로 이주한 작가는 원폭의 참상을 생생히 묘사한 일본의 소위 `원폭 문학`과 달리 담담하고 절제된 서술로 인간 내면의 상처에 집중하면서 영어로 쓰였지만 일본적 정서를 가장 정확하게 담은 소설을 탄생시켰다.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차분히 목도하며 다음에 올 희망을 말하는 이 작품은 조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22

유연과 단호 `그런데`의 세계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찰흙을 가지고 노는 일처럼 즐겁고 신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박순원 시인. 2005년 `서정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하고 시집 `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와 `주먹이 운다`를 발표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그런데 그런데`(실천문학사)가 출간됐다. 웃음과 슬픔으로 섬세하게 그려진 그의 이번 시집을 통해 독자들은 진한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나는 그런데가 좋다 그리고도 그렇고 그러나도 그저 그렇고 그러므로는 딱 질색이다 (….) 순딩이 같은 그리고는 개성이 없다 그러나는 까칠하다 그러므로는 고지식하다 그러니까는 촌스럽다 특히 끝의 두 글자 니까가 마음에 안 든다 그런데는 두루뭉술하면서도 날렵하게 빠져 다닌다 그랜저 같다 그런데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런데 말이지 천연덕스럽게 자기가 가고 싶은 쪽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그러므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 `아라비안나이트` 부분둥글어서 슬픈 세계가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 중에 하나인 `그런데`. 시인이 말하듯 `그런데`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이야기해오던 것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한 번에 들었다 놨다 할 수 있고, 한 번에 뒤집어버릴 수 있는 힘이 바로 이 `그런데`라는 말에 있다. 누군가는 불리한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런….”라고 말을 돌리고, 또 누군가는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런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때로는 “그런데 말이야” 하고 팍팍한 삶의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숨구멍을 뚫어놓는다.`그런데`라는 말은 매우 유연하게 빠져 나가면서도 뒤따라올 말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시인이 말하듯 저 유명한 `아라비안나이트`도 결국 `그런데의 세계`다.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은 “그런데”라고 말하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른 아침 아내가 배춧국을 끓인다 배추는 이른 아침부터 불려 나와 끓는 물속에서 몸을 데치고 있다 배추는 무슨 죄인가 배추는 술담배도 안 하고 정직하게 자라났을 뿐인데 배추에 눈망울이 있었다면 아내가 쉽게 배춧국을 끓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 그래 나도 눈망울을 갖자 슬픈 눈망울 그러면 이른 아침부터 불려 나가 몸이 데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_시 `이른 아침` 부분시집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여러 번 웃게 되는데 그중 한 장면이다. 시 `이른 아침`에서 시인은 슬픈 눈망울이 있다면 아침부터 배추가 끓는 물에 데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가정하며, 일찍 데쳐지지 않기 위해서 슬픈 눈망울을 짓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시인은 저 옛날 군사독재 시절 대통령을 위해 천삼백원을 내고 국가가 보조해주는 복장을 구입해 소년체전 기념 “마스게임”을 준비하면서부터(`마스게임`), 최근에 이르러서는 회사 사장에게 “말대답도 안 하고 불쌍한 척” 가만히 있는 것에서(`멧새 소리`) 본능적으로 “슬픈 눈망울”을 가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박순원 시인시인은 “주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낑낑거리며”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몸을 뒤트는” 연포탕에 든 낙지와 목줄에 묶인 강아지를 통해 읽는다. 그들의 단념을, 그 처참한 기분을,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는 풍경을 통해 스리슬쩍 그려내고 있다. 시인의 목소리에서 투사의 결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지만, 대신 투창보다 예리하게 연마된 눈빛이 서려 있다. 그 눈빛에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단호함이 있다. 시인은 재밌는 상상력으로 비천해 보이는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 모습은 웃음을 주는 동시에 슬픔을 형상화한다. 그런 사물들 중에는 “불 밝히는 일 딱 한 가지 일만 하다가 끊어지면 끊어져서 덜렁거리면 유리와 함께 버려지는”(`필라멘트`) 필라멘트, “아무것도 아니니까 (….) 뻥뻥 걷어찰 수 있는”(`축구공`) 축구공이 있다. 시인은 이처럼 사소하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들, 아무것도 아니니까 걷어찰 수 있는 것들의 고귀한 의미를 되새긴다.시인은 이번 시집에 담긴 왁자한 웃음을 통해 이 세상을 한번 실컷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그가 세상을 들었다 놓는 팔뚝에는 두꺼운 근육 대신 유쾌한 웃음이 묻어 있다. 그 웃음소리는 `그러니까`에 길들여지지 않는, `그러므로`에 순응하지 않는, `그러나`에 따귀 맞지 않는, `그리고`에 목 눌리지 않는 신비스런 힘이 있다. 시인은 그 비밀을 들려주기 위해 조용히 속삭인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22

암탉이 발견한 진주, 수탉이 꿀꺽 삼키다

2007년 `시와상상`으로 등단한 이래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시산맥` `영남동인`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송은영 시인이 등단 이후 6년 만에 첫시집 `별것 아니었다`(화남출판사)를 출간 했다. `겨울 과메기`, `등 가족`, `옷이 나를 입다`, `바다를 필사하다` 모두 4부로 나누어져 총 61편의 시를 싣고 있는 그의 이번 시집은 `그 어디에도 구원이 없는`, `정직한 땀으로 절대불가능`한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면서, 그녀만의 발랄한 시적 상상력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해 낸다.송은영 시인은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알리바바와 40명의 도적`이 득세하는 오늘의 세계와 비주류로 떠도는 타인들의 얼굴 속에서 참다운 삶과 생명의 공동체를 발견하고자 한다. 시적 반어법 또는 순진성의 아이러니를 통해 단 한 번도 중심에 서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양심마저 속일 수 없었던 자들의 정직한 윤리와 선(善)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타락한 문명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구원과 해방을 찾고 있는 그의 시집은 조악한 현실에 당당히 맞서고 전지구적인 위악(僞惡)에 늠름하게 대거리를 할 수 있는 시적 응전(應戰)의 힘을 여투고 있다. 그녀의 시는 돌출하는 현실의 악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늡늡한 사랑의 기미(機微)에 대해서도 과장하지 않고 진솔하다. 시적 수사(修辭)가 아닌 그녀만이 내뱉을 수 있는 육성이 더 아름답고 듬쑥하다는 것을 그녀의 시는 보여준다.▲ 송은영 시인임동확 시인(한신대 문창과 겸임교수)은 송 시인의 이번 시집에 대해 송은영 시인은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알리바바와 40명의 도적`이 득세하는 오늘의 세계와 비주류로 떠도는 타인들의 얼굴 속에서 참다운 삶과 생명의 공동체를 발견하고자 한다. `하릴 없이 빈둥거리는 경찰`이나 `철봉에 매달린 어른들이 아이처럼` 세상을 `내려다보`는 여유로운 반어법 또는 순진성의 아이러니를 통해 단 한번도 `중심에 서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양심`마저 `속`일수 없었던 자들의 정직한 윤리와 선(善)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중력이 없는 사이버 공간` 같은 타락한 문명 속에서 새로운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줄 `엄마`의 `젖줄`을 `심해 문어(文魚, 文語)`가 되어 찾으며 시작에 빠져있다”고 평했다. 송 시인은 “모래알처럼 많은 시인과 시들, 그 속에 내 시는 보이지도 않고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지만 그래도 나는 내 시가 좋다. 시를 쓸 때만큼은 살아 있는 것 같기 때문“이라고 전했다.“암탉들이 모이를 쪼다가 진주를 발견했다이 진주를 어떻게 할까머뭇머뭇 거리다 수탉에게 보여주었다수탉은 낼름 삼켜 버렸다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간다별것 아니었다.”-송은영 시 `별것 아니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22

최고의 `손자` 해설서, 한국판으로 출간

국내 최초로 출간되는 고문헌, 고고학의 대가 리링 베이징대 교수의 `손자` 주석 및 해설서 `전쟁은 속임수다-리링의 `손자`강의(글항아리)가 출간됐다. 국내 동양학계에서 선진시대 병법 전문 연구가 거의 없는 상황에 이 책은 의의가 깊다.리링 교수는 이 책을 통해 고대 병서라는 것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출현했으며 `손자`라는 책의 다양한 판본이 어떻게 지금의 형태로 완성돼 왔는지에 대한 형성사적 역사를 수십 쪽에 걸쳐 매우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다.금본(今本) `손자`와 고본(古本)`손자`의 체재와 내용 상의 차이점, 조조 등 역대 `손자` 주석가들의 장단점, 현대에 들어와 이뤄진 `손자` 연구, 해외에서의 `손자` 연구 등을 차례대로 읽으면서 소화할 수 있게 구성됐다.단순히 군인을 독자로 상정하고 병서를 번역한 것이 아닌, 군인에서 문인까지 이르는 독법과 손자병법 응용연구, 손자에 대한 철학적 접근 등 `손자`의 사상적 차원에 큰 의미를 두고 있고 병법 기술적 차원도 인간행동학의 차원에서 심도깊게 접근하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펼쳐지는 용병술과 전략을 통해 국가, 경제, 인간, 사회 집단의 다양한 군상과 의미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아울러 저자는 세계적 안목에서`손자`를 읽을 수 있도록 세계에서 쓰여진 많은 병서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철저하게 언급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손자` 연구를 일일이 검토하고 소개하고 있으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한 구절 한 구절 `손자`와 대비해서 그 체재상의 차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의 공통점과 차이, 구체적인 병술과 전략에서의 공통점과 차이를 매우 면밀하게 고증하고 음미하고 있다.서양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긴 주석”이라는 말이 있듯, 동양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명나라 모원의는 “`손자`가 가장 잘 쓰여진 병서이며, 그 밖의 병서는 `손자`를 주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무비지` 권1 `병결평`서문)라고 말했다.병서는 중국 고대의 유산으로 수량이 매우 많은데, 대략 계산해보더라도 선진시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4천여 종이나 된다. 이 많은 책들이 모두 `손자`에 대한 주해에 불과하다는 말은 어느 정도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손자`의 경전적 지위를 깨닫게 해주기에 충분하다.그간 학계와 재야의 적지 않은 `손자` 전문가들이 기다려온 이 책은 `손자`에 대한 완벽한 주석과 신선한 해석으로 2006년 중국의 각종 상을 휩쓸었으며 현재까지 재판을 거듭하며 “가장 많이 읽히는” `손자`해설서의 권위서로 군림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15

이 시대 진정한 치유, 여기 다 있네

1991년 `시와 시학`을 통해 등단한 복효근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따뜻한 외면`(실천문학사)이 출간됐다.그동안 시인은 `마늘촛불`, `목련꽃 브라자` 등의 시집을 통해 자연과 생명의 표면을 깊은 응시의 시선으로 읽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해왔다.이번 시집 역시 일상 속의 현상과 사물에 대한 복효근만의 세밀한 관찰력이 돋보이고 있으며, 작은 존재로부터 깨닫는 삶의 의미와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성숙해진 서정시의 언어로 펼쳐지고 있다. 각 시편들은 개체의 비의를 이끌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성찰에까지 나아가고 있다.총 4부로 구성된 63편의 시들이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마취하는 데 급급한 이 시대의 힐링 열풍에 진정한 치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정갈한 시어는 고요한 절의 둘레를 거닐듯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고 편안하다. 불교적 종교시는 아니지만 복효근의 시는 향을 사를 때 풍기는 목탁의 향을 살며시 품고 있다. 그에게 삶이란 혁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일지라도 주어진 길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따뜻한 외면`에서 이 결연한 수용의 태도는 “거친 물살에 제 살을 깎으며” “아픈 지느러미를 파닥하여야 하는”(`성(聖) 물고기`) 물고기나 “때론 3미터도 넘게 쌓인다는 눈”을 “다만 견딜 뿐”(`자작나무 숲의 자세`)인 자작나무처럼, 저마다 고단함을 인내하는 사물의 이미지로 포착되고 있다.그러나 이를 자포자기나 수동적인 자세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생을 귀하게 여기는 성찰의 결과이다. 시인은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성숙을 위해 필요한 수행의 과정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한 번 부러졌던 뼈처럼/돌은 얼음의 뼈가 되어 얼음은 더 단단해”(`얼음연못`)지듯 고통이 삶을 완성시킨다는 생의 진실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정직하게 마주하려 한다. 만남과 이별이 하나이고 탄생과 죽음이 하나이듯, 존재에게 있어서 고통은 생득적인 숙명이라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를 떨쳐내려고 몸부림치는 대신, “저마다 생이 갖고 있는 가파른 경사”(`자작나무 숲의 자세`)를 담담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시인은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아”(`타이어의 못을 뽑고`) 고통까지도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를 소망한다. 그렇기에 소쩍새, 공벌레, 바지락, 종이컵 등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들이라 할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지난날은 밑동부터 잘라 떠나보냈고 눈서리 칠 내일은 믿지 않는”(`맹목`) 자세로 `현재`를 치열하게 버텨내는 존재들에게는 마치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그에 걸맞은 숭고함이 녹아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꿈꾼대도 결국 치유되지 않을” 고통에서 “치유를 꿈꾸지 않겠다”(`타이어의 못을 뽑고`)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집의 표제시인 `따뜻한 외면`은 장애물이 있는 세계에 노출된 두 존재가 함께하는 것을 보여준다.비를 그으려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가나뭇잎 뒤에 매달려 비를 긋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나비 쪽을 외면하는늦은 오후`따뜻한 외면` 전문`비`라는 상황에 맞서서 새와 나비는 나뭇가지로 날아들고, 원래 나비를 잡아먹는 새는 현재의 어려움을 함께 맞서고 있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 외면한다.나비로부터 거리를 둔 새의 적당한 무심함은 천적관계의 공생을 잠깐 동안 가능하게 해주는데, 이는 나비에 대한 배려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외면`이라는 차가운 단어가 `무심함`을 통해 따뜻한 것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따뜻한 외면`의 시편들이 상처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포근한 온기를 가진 것은 이 때문이다.복효근의 시세계에서는 어떠한 타자의 침입도 폭력적이지 않다. 속이 죄 빠져나간 고등어에게 소금이 들어와도, 바지락 속에 작은 어린 게 한 마리가 들어앉아 있어도, 모두 “빈 내 몸에/너를 들이고/또 그렇게 빈 네 몸에/나를 들이고/비로소 둘이 하나가”(`한 손`) 되는 과정이자 결과이다. 이렇듯 타자가 나의 내면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결국 사랑의 과정이기에 그 속에서 일어나는 떨림, 그리움, 외로움까지 전부 하나로 따뜻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시인은 죽은 국화를 보고 “애초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멀리서 받아 적다`)고 말하거나, “쓸데없이 이들의 역사에 간섭을 하고 있다”(`새의 행로`)고 고백하기도 한다.마찬가지로, 존재 그대로의 본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한 방법일 수 있다는 신념이 자리한 흔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양한 개체들이 한 곳에 모여 질서를 세우고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한 비밀이기도 하다.물론 평화와 고통이 공존하는 삶을 맨발로 걷다 보면 때로는 쇠약해져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슬픔과 절망이 덮쳐오기도 한다. 특히 죽어간 이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은 노환을 앓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시편들을 통해 절절하게 묻어나온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15

이해할 수 없는 섭리 파헤치며 미지의 희망에 한발 더 다가서다

세계의 불온한 질서들을 엄숙하고도 진지하게 추궁하는 소설가 정찬이 새 소설집 `정결한 집`(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섭리들을 파헤치며 미지의 희망에 한발 더 다가선다.그의 질문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겨누다가 역사와 신화, 판타지로 뻗어나간다. 이를테면 본인의 결핍을 메우려 자식에게 초인적 역할을 기대하는 어머니와 순응 동기를 상실한 아들(`정결한 집`)이나 일제의 난징학살(`오래된 몽상`)과 같은 `현상`을 작가의 의식 깊숙한 곳에서 재구성한 `내막`으로 채워 문제의 처음과 지금을 다시 묻고, 재개발(`세이렌의 노래`)이나 부당해고(`흔들의자`)와 같은 사회적 문제를 신화-종교와 병치시켜 부조리의 원류를 추적해나가는 식이다.정찬은 시대의 화두 앞에서 에두르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시쳇말로 그의 소설은 돌직구다. 가정불화와 과도한 학벌 경쟁이 희대의 패륜을 낳았고(`정결한 집`) 개발과 발전의 미명 아래에서 사람들이 불타 죽었다(`세이렌의 노래`). 백척간두에 올라 생존권을 호소하는 노동자(`흔들의자`)와 신념에 따라 집총을 거부하는 청년의 목소리도 들린다(`녹슨 자전거`). 그런가 하면 자식의 결혼을 앞두고 빈부의 격차가 곧 신분적 질서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버지는 어느새 구경꾼이 돼 있고(`모과 냄새`) 자본의 논리가 이 시대 신전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역사상 가장 강력한 규범을 행사하고 있다(`오래된 몽상`).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일이 분명 충격적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특별한 자극을 주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운명이 자신에게 다가와 덮치지 않으면 그 형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음유시인의 갈대 펜`).그러므로 처음의 당혹감은 급속도로 반감된다. 아마 어떤 침팬지가 학술원으로부터 글을 청탁받을 만큼 인간 지능의 평균을 뛰어넘는다 해도(`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오래지 않아 익숙해질 것이다. 이 책은 `당시`의 충격을 되살리고 공유함으로써 이 지난한 운명을 우리가 함께 짊어지고 있음을 환기한다./윤희정기자

2013-02-15

가족의 의미는… 핏줄·끈끈한 애정?

▲ 소설가 고종석저널리스트, 에세이스트, 언어학자로서 여러 방면을 통해 유려한 글쓰기에 매진해온 소설가 고종석의 세번째 장편소설 `해피패밀리`(문학동네)가 출간됐다. `독고준`이후 3년 만에 펴내는 `해피 패밀리`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장 친근하고 가깝다 여겨온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 회의를 날카롭고 서늘하게 그려냈다.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 없이 평온해 보이지만 비극적인 역사를 지나온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당연하다 믿고 있는 핏줄에 대한 끈끈한 애정과 탄탄한 연대의식이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마나 허망하고 위선적인 것인지 이야기한다.소설은 출판사에서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한민형의 목소리부터 시작해 아들이 일하는 출판사의 사장인 아버지 한진규, 고등학교 역사교사이자 어머니인 민경화, 한민형의 처이자 고등학교 수학교사인 서현주, 한민형의 동생인 한영미와 한민주, 대학 후배인 이정석, 장모인 강희숙, 딸 한지현,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은 세상을 떠난 한민형의 누나 한민희까지 모두 화자로 나서 각자의 사연과 감정 들을 토로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세상에 금지된 것은 없습니다, 느닷없이 이 문장이 내 입 밖으로 중얼중얼 흘러나왔다.”현대 사회에서 가족이란 어떤 의미일까? 파편화된 개인들이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데면데면하게 피상적으로 소통하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가족이라는 명사에서 느끼는 것들, 최소한 느끼기 원하는 것들은 대개 따스하고 편안한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들이었다.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그 방식이 온전하거나 뒤틀려 있거나를 떠나 우리 서사에서 `가족`이라는 말은 `외롭다`는 말과 거리가 멀었다.그러나 `해피 패밀리`의 가족들은 철저히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가슴에 맺힌 커다란 상처를 허무주의로 메우고 있는 한민형의 모습이나, 직접 입양해온 한영미를 철저히 필요에 의해서 물건처럼 대하고 심지어 그런 태도를 아무렇지 않게 정당화시키는 어머니 민경화의 모습은 이들을 정말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되묻게 한다. “나는 사람보다 책이 좋다. 그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유년기를 되돌아보면, 책 읽는 나보다 동무들과 뛰노는 내가 더 선명히 기억된다. 아마 십대의 어느 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책을 사람보다 더 좋아하게 된 것이. 책보다는 아닐지라도, 내가 사람을 좋아하긴 하는 것일까? 선뜻 그렇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는 한 것일까? ”(한민형, 12쪽)/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08

`고목에 새싹나듯`… 인생황혼 그려

▲ 시인 황동규황동규(76) 시인의 끊이지 않는 시를 향한 열정이 열다섯번째 시집 `사는 기쁨(문학과지성사)`으로 다시 한 번 불씨를 지핀다. 이번 시집은 병들고 아픈 몸으로 짧기만 한 가을을 지나며, 다 쓰러진 소나무가 상처에서 새싹을 틔우듯, “벗어나려다 벗어나려다 못 벗어난” 사는 기쁨에 매여 있는 인생의 황혼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시집의 전체 분위기는 곳곳에서 터지는 상상력 넘치는 언어들과 상승하는 정신으로 오히려 삶의 생기가 가득하다. 물리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장기 기증`을 의뢰받는 전화 통화에 “아직 상상력 난폭하게 굴리는 고물차 다된 뇌나 건질 만할까”라고 대응하고, 산책길에서 본 쓰러져가는 소나무가 틔워낸 새싹을 보고, “이렇게도 모질게 살아야 하나?”라고 묻지만, 그것은 어떤 회한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살고 싶어 그런 거 아냐./병들어 누운 몸, 살던 곳 빼끔 내다보기지`”라고 표현함으로써 꺼져가는 삶도 생명의 진행 과정에 있음을, 살아 있는 한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상처에 아린 살들 촘촘히 짚어가며 하나씩 꿰매다 확 터지곤 하던/저 아픔의 환한 맛”이 주는 `통증`을 달게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삶의 숭고를 표현한다.“노년의 나이에도 이처럼 뛰어난 발상을 보여주는 시, 싱싱하게 살아 있는 비유적 이미지를 구사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무섭고 즐거운 존경을 불러일으킨다.그와 함께 황동규의 시는 어디까지 상승할 것인가란 의문을 떨칠 수 없게 만든다. 그의 육체는 착지점을 찾는 곡사포의 포탄처럼 땅을 향해 하강하고 있을지 모르나 그의 정신은 하강곡선을 망각한 채 여전히 상승의 포물선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시는 정점이 곧 종점이 될 것인가! 이번 시집은 이 같은 의문으로부터 필자 역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_홍정선(문학평론가)오늘은 오늘의 기쁨이 있어, “무언가 주고받으니 그냥 좋은 거다”“이제 뭘 하지? 산다는 게 도대체 뭐람”(`뭘 하지?`)이라고 되묻게 되는 정년 이후의 삶은 독서와 산책, 친구들과의 단출한 여행 등 소소한 일상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렇게 허락된 노년의 시간들은 삶에 숨겨진 신비를 새롭게 발견하게 한다. 하루는 영하의 기온 탓에 베란다 화분을 데워주려 거실 문을 열어 젖혔다가 거실 바닥에 새겨진 난초 무늬를 보고 한 폭의 묵화가 그려진 이불을 상상한다.20년 간 산 아파트 거실에서 처음 만난 그 묵화에 홀린 시인은 조용히 그 묵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누워 보고 “느낌과 상관없이 `따스하다`고 속삭인다”(`묵화(墨畵) 이불`). 그렇게 만나는 허전하면서도 따스한 감각들은 산책길마다 담아오는 조그만 새소리들이나 겨울날 망향 휴게소에서는 눈 나리는 날 자신의 앞에서 휘청 넘어지는 여인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눈송이들과 눈인사 나누기 등과 같이 날마다 새로운 체험하게 하는 설레는 순간들이다.이렇게도 새로운 삶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시인 일과를 훔쳐보노라면, 젊은 사람이 보기에도 샘이 날 정도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하루`이기 때문에 공감할 수 있다. 시간의 더께가 쌓여 무뎌지고 고요하기만 한 세상, 세월이 만든 담백한 풍경 속에서도 시인은 생의 경이를 발견하는 기쁨으로 이토록 신이 나 있다.깊은 안개 속을 걸으면무언가 앞서 가는 게 없어 좋지.발 내디딜 때생각이나 생각의 부스러기 같은 게 밟히지 않는다.(…)다 산 삶도 잠시 더 걸치고 가보자. `안개의 끝`부분“아직 술맛과 시(詩)맛이 남아 있으니”귀는 쫑긋하지 않고 눈은 반짝이지 않는다. 몸이 스스로 알아서 에너지를 아껴 쓰는 늙고 아픈 몸이지만, 산책과 여행으로 가득한 시인의 일과는 지나온 눈꽃 “두고 갈 때 가더라도 한 번 더 보고 가자”(`눈꽃`)고 마음먹거나 “기쁨은 기쁨, 슬픔은 슬픔, 분노는 분노, 그 부스러기들이/아직 들어 있는 몸이 어딘데”(`맨가을 저녁`)라며 셔츠 윗단추를 풀어 세상의 기운을 느끼기에 바쁘다.“용서 받은 것은 어둡고, 안 받은 것은 더 어”(`어둡고 더 어두운`)두울 수밖에 없는 생이지만 그러한 생이 주는 고통과 모욕에도 시인이 발견하는 이 사는 기쁨들은 “몸이여, 그대 처분에 나를 맡겨야 하지 않겠나”(`이 저녁에`)라고 읊조리게 하며 “미래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봄비에`) 가운데서도 꼭 불타는 캠프 파이어 같은 생이 아니어도 좋은, “이 세상에서 나갈 때/아직 술맛과 시(詩)맛이 남아 있는 곳에 혀나 간 신장 같은 걸/슬쩍 두고 내리지 뭐.//땅기는 등어리는 등에 붙이고 나가더라도”(`장기(臟器) 기증`)라고 말하는 시인의 하루는 탐욕 없이도 생의 충만함으로 가득하다.`법사께서는 연로하신데 어디로 가십니까?``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가는 곳 물으신다면`부분미래에도 이 거리에선무언가가 사람의 발걸음 멈추게 할 것이다.내가 없는 미래가 갑자기 그리워지려 한다.`브로드웨이 걷기`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08

감각적 언어로 삶의 본질 꿰뚫어

▲시인 김성대2005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성대 시인의 두번째 시집 `사막 식당`(창비)이 출간됐다.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인 첫 시집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더욱 농밀해진 감각적 언어와 선명한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사물의 본질과 삶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통찰력과 활달한 상상력의 세계를 선보인다.`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물옥잠` `월롱역`을 첫 시집에서 감상할 수 없었던 등단작 3편을 포함해 총 55편의 시를 수록했다. 전통 서정의 문법에 기대어 있으나 다소 낯설고 난해한 듯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뿜어내는 시편들을 접하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미지의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경이로운 체험을 가능케 한다.“속에서 열없는 팽이가 돌고 있다/흩어진 얼굴을 비워야 할 시간/속을 끼얹듯 세수를 한다/`나는 반성문에서 시작되었다`/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면서 뉘우치면서…. 어떤 거짓이 나를…. /이제 그것을 자백하자/그것을 위해 지금껏 말을 잃지 않은 것처럼/말하지 못한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식초처럼 말갛게 속을 비운 얼굴로(`본질범`부분)식물성의 언어가 돋보이는 김성대의 시는 폭넓은 사유와 어우러져 깊은 울림을 자아내며 자유로운 연상 속에서 부드럽게 흐른다.첫 시집에서 `귀 없는 토끼`라는 치명적 결함을 지닌 존재를 내세워 자기 정체성을 잃고 사라져가는 사물들과 감각이 격리되는 순간에 몰입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한결 예민해진 시선으로 “눈을 잃은 고양이”(`딸기밭`), “갈라진 손톱으로 눈알을 긁는” “색맹의 아이들”(`이안류 2`), “깊은 바다에서 울음을 멈춘 새들”(`해바라기 이데아`)과 같이 일상의 감각을 잃고 마비 증상에 시달리며 “내려앉을 곳을 잃어버린/얼굴을 앓고” “점점 근소해지”(`우기의 장례`)는 존재들에 주목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08

대구 앞산 역사·문화 스토리텔링 소설 `산(山), 대왕을 품다` 발간

대구 남구청은 6일 남구도시만들기지원센터와 함께 앞산 스토리텔링을 담은 책 `산(山), 대왕을 품다(조두진 저, 대구 남구청 펴냄, 240쪽·사진)`를 발간했다고 밝혔다.이 책은 남구청이 지난해부터 앞산을 배경으로 한`스토리텔링 사업`을 추진하면서 지역 명소인 앞산을 널리 알리고 앞산 자락길을 남구와 대구를 대표하는 문화관광 콘텐츠로 개발하기 위해 발간됐다.이 책에는 앞산 곳곳에 스며 있는 역사와 문화는 물론이고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도 이야기로 엮어 한 편의 소설로 발간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그동안 남구청은 이번 책 발간을 위해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해박한 식견을 가진 작가를 만나는 등 작가선정에 심혈을 기울였고, 구청장을 비롯한 간부공무원과 담당 공무원이 앞산의 구석구석을 답사해 직접 관련 자료를 수집하며 향토사학자 등을 통해 역사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산(山), 대왕을 품다`는 고려 태조 왕건이 927년 9월 공산(지금의 팔공산)에서 견훤의 백제군에게 대패한 후 홀로 탈출해 앞산으로 숨어드는 장면으로 이야기의 첫 장을 열고, 이후 앞산의 화전민인 어리노인과 그의 딸 호류를 통해 자연과 농사의 이치를 깨닫고 사람에 대한 참사랑을 깨우쳐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또 책 속에서 앞산의 고산골과 바위굴, 은적사와 안일사 등은 작가 특유의 날카로운 역사의식과 매력적인 문체에다 풍부한 상상력이 더해져 활력이 넘치는 공간으로 새롭게 재탄생하고 있다.남구청은 우선 홍보용으로 500권을 제작해 남구의 각 동 주민센터와 대구시·구·군, 학교 및 도서관, 대구시 문화원 등에 배부한다. 이어 이 책을 CD로 제작하고, `다큐`와 연극`천년의 문`제작을 통해 지역문화예술 진흥에도 이바지할 계획이다.임병헌 남구청장은 “`산, 대왕을 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인 작품인 만큼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한편, `산(山), 대왕을 품다`의 저자 조두진 작가는 지난 2005년 장편소설`도모유키`로 제1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한 이후`능소화`, `유이화`, `아버지의 오토바이`,`몽혼`, `북성로의 밤`등 장편소설을 꾸준히 발표해 오고 있다./김영태기자 piuskk@kbmaeil.com

2013-02-07

하루 힘든 노동을 감내한 노동자거친 살갗 속 뜨거운 피가 흐른다

▲ 시인 김광선2003년 창비 신인상을 통해 등단한 김광선(53) 시인의 신작 시집 `붉은 도마`(실천문학사)가 출간됐다.시를 노동의 생활로부터 끌어올리고 삶을 시적인 것으로 변모하고자 했던 노동시의 전통을 따르고 있는 김광선 시인은 첫 시집 `겨울 삽화`(2000)에서 노동자의 고단한 삶에 잠재돼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이를 서정적으로 시화하는 전통적인 노동시를 보여준 바 있다.시인의 고향은 전남 목포다. 세 살 때 어머니와 함께 나로도라는 섬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무척 가난했기 때문에 두 동생은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열입곱 살이 되던 해, 시인은 친구와 함께 여수로 가는 배를 탔다. 여수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통일호 열차를 탄 소년은 덜컹거리는 차량 안에서 마음속에 품은 꿈도 불안함으로 밤새 요동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세상 물정 모르는 어수룩한 섬 소년은 그렇게 도시의 노동자가 되어갔다.도시로 올라온 소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지관`을 만드는 일이었다. 지관(紙管)이란 화장지나 접착테이프 속에 들어가는 종이 대롱을 말한다. 소년은 영세한 작업장에서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노동했다. 그때부터 소년은 자신의 삶을 글이나 노래로 풀어내고 싶어졌다. 이후로 그는 유랑극단 생활도 해보고 곱창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밤에는 없는 시간을 쪼개어 책을 읽었다. 술값, 밥값을 아껴 책을 샀다. 일자리를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녀야만 했던 그는 마음속으로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남의 삶을 엿보면서 마치 자신의 삶인 양 섣불리 형상화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삶을 치열하게 살면서 그 안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삶의 방식과 요구들을 형상화해야 한다.”등단 후 그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그의 시는 삶에 천착해 있다. 거대한 도시 서울에 정착한 섬 소년은 당시 첫 월급으로 1만8천원을 받았다.산동네 허름한 쪽방에서 자취하면서 점심으로 50원짜리 빵을 사 먹었다. 아침저녁으로 라면이나 오뎅 볶음을 `신물 날 정도로` 먹었다고 한다. 지관을 만드는 공장을 떠난 그는 한 음식점에 취직하게 된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밖을 내다볼 시간도 없이 밤늦게까지 주방에서 일해야만 했다. 손은 뻘겋게 퉁퉁 불고 몸은 녹초가 되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아무렇게나 방구석에 쓰러지는 고된 생활이었다. 당시 그의 배움과 문학에 대한 희망은 거세게 흔들렸다.공장을 옮길 때마다 기술은 붙고 월급은 올라갔지만 그만큼 돈의 가치는 떨어졌다. 시인의 쳇바퀴보다 사회는 훨씬 더 빨리 돌아갔다. 노조를 꾸릴 인원도 안 되는 공원을 데리고 착취를 일삼는 사업주에 맞서 파업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규모 없는 현실을 변화시킬 방법을 모색했다. 그때 처음 일하던 식당을 떠날 때 주방 선배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식당에 한번 발을 들인 사람은 반드시 식당으로 돌아온다.”`내가 무슨 연어냐?`하지만 그는 결국 상처 입은 연어처럼 식당으로 돌아왔다.언젠가 그를 취재한 기자가 왜 하필 곱창집을 차렸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대답은 단순했다. “그 골목에 곱창집이 없어서….”였다.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데도 오직 시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내 시는 보잘것없습니다. 하지만 진정성 하나만큼은 어느 누구 못지않습니다.”김광선 시인의 시에는 하루의 힘든 노동을 감내한 노동자의 거칠고 투박한 살갗이 있고, 뜨거운 피가 흐른다. 그리고 그 뜨거운 피 속에는 한 가정을 짊어진 가장의 지친 한숨 소리도 녹아 있다. 우리는 이번 시집에 실린 그의 시들을 통해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시인이 가지는 복합적인 감정과 삶의 결들을 세밀하게 읽을 수 있다.이 시집에 실린 그의 진솔한 시들은 시인 개인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지만,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인구 비율을 차지하는 40~50대 노동자의 이야기로 귀결된다.“새라면 아마도 날개였을 것이다푸른 죽지로 힘껏 창공을 날아오르거나펄럭이며 어디고 사뿐히 내려앉을어깻죽지 들여다본 까만 필름은형광 불빛에 비춰지자말간 뼈 많이 뒤틀려 있다”`날개` 부분노동 현장에서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는 중년의 노동자는 집에 돌아와서는 고독과 싸워야 한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쉽사리 자신의 이야기나 생각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예전의 가부장적인 아버지상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그들은 소외되어 있다. 노동자로서 자본으로부터의 소외, 힘없는 가장으로서 가족들로부터의 소외, 중년 남자로서 삶과 꿈으로부터의 소외가 그들이 현재 겪고 있는 삼중고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01

섬진강 주민 일상 오롯이 담아

▲ 시인 김용택`섬진강 시인` 김용택(65)씨가 최근 산문집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전8권·문학동네)를 펴냈다.1권 `내가 살던 집터에서`, 2권 `살구꽃이 피는 마을`, 3권 `섬진강 남도 오백리` 등 소제목이 붙은 책들은 섬진강 인근 주민들의 일상을 오롯이 담아냈다.책은 1948년부터 2012년까지 섬진강 일대 한 작은 마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소개한다.저자가 글로 그려내는 굽이굽이 흐르는 강, 크고 작은 산 아래 작은 마을들을 담은 풍경화를 마주하며 그 안에 담긴 소중한 기록들을 엿볼 수 있다.`내가 살던 집터에서`는 지금 진메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옛날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과 면면, 그리고 마을 곳곳에 붙은 지명을 세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강마을 곳곳에 대한 소개, 그리고 그 마을에서 함께 살아간 이웃들의 따뜻하고도 서러운 사연이 김용택 시인의 입담과 시를 통해 구수하고 푸근하게 펼쳐진다.작가는 이 책을 통해 스스로 땅에 뿌리내리고 살았지만 희망이 되지 못한 사람들을 남기고 싶어 한다. 동시에 그가 진정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것은 비단 진메 마을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조용히 읊조린다.`내가 살던 집터에서`는 진메 마을과 사람들을 기록하고 있지만, 사실 어느 시골 마을에나 진메와 비슷한 지명과 풍경이, 비슷한 인물들과 살아가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사라져가는 고향의 풍경은 그 어디나 매한가지다. 그 유구함이 막을 내리는 순간을, 버림받은 가난한 땅을 덮친 착취와 파괴, 오염의 현장을 텅 빈 집터에 홀로 선 작가가 노래한다.책을 읽다보면 한수 형님, 풍언이 양반, 삼쇠 양반, 용수 형님, 암재 할매 등 김용택의 글 속에 숱하게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마을 사람들이 어떤 이들인지, 꽃밭등, 홍두깨날망, 우골, 각시바위, 자라바위, 뱃마당 등의 지명이 묘사하는 마을 풍경은 또 어떤지 생생히 그려질 것이다.그는 땅에 뿌리내리고 살았지만 끝내 희망을 일구지 못한 애처로운 마을 사람들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진정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것이 비단 진메 마을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조용히 읊조린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3-02-01

순례자 눈으로 그린 절터의 진면목

전국에는 5천400여 곳의 폐사지가 산재해 있다. 이미 오래전 법등이 꺼진 이들 폐사지에는 몇몇의 석조 유물들과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남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 -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충청 편)`의 저자 이지누는 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시작으로, 오랜 세월 전국의 주요 절터를 수차례 답사해왔다. 여러 장소를 찾아가기도 했지만, 특히 같은 장소라고 해도 시간대별로, 계절별로 반복해 답사함으로써 절터의 진면목을 그려내기 위해 애써왔다.더구나 충청도 절터의 경우에는 저자의 공부방이 있는 수도권 지역과 그리 멀지 않아 훌쩍 오가기를 옆집 가듯 했다. 이는 얄팍한 감상과 흔한 자료가 뒤섞인 답사 기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넓이와 깊이를 이 책에서 기대하게 한다.`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는 그렇게 온전히 저자의 머릿속에 그려진 충청도 절터들 가운데 아홉 곳을 세심하게 선별해 다뤘다. 보령 성주사터부터 책의 여정을 시작해 서산 보원사터, 당진 안국사터, 제천의 사자빈신사터와 월광사터, 충주의 미륵대원사터, 숭선사터, 청룡사터, 김생사터까지 충청도 절터의 진경을 펼쳐 보인다.저자는 때로는 시적인 감상으로, 때로는 설화와 전설과 민담으로, 때로는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사료로 절터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 또한 현장의 느낌을 실감나게 전달함으로써 독서의 흥취를 더한다.사진들은 단순한 현장 스케치가 아니라, 한컷 한컷이 글과 어우러지면서도 독자적으로 분명한 메시지를 발산한다. 이를 통해 일반인의 눈으로는 무심히 건너뛰기 쉬운 충청도 절터의 진면목을 순례자의 맑은 눈으로 또렷하게 부각시킨다.독자들은 이들 절터의 흔적을 찬찬히 더듬어봄으로써 불교의 역사.문화. 사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01

詩로 보는, 현대판 오이디푸스들 가득한 세상

1993년 데뷔 이후 13년 만에 담백한 시어들을 꼼꼼히 엮어 숙성된 첫 시집을 선보인 바 있는 서상영 시인의 두번째 시집이 출간됐다. 첫 시집을 펴내기까지의 시간보다는 빨라졌지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지나 나온 시집 `눈과 오이디푸스`(문학동네)다.또 한번의 오랜 시간의 숙성을 거듭하면서 시인의 시세계 또한 변화를 이뤘다. 과거의 작품들에서 나타난 정신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것이라는 점에서 첫 시집과 두번째 시집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나, “서상영의 시는 호흡을 토대로 삼아서 만들어진 노래다. 그는 자주 소월과 미당과 혜산을 차운(次韻)하여 시를 지었다”는 첫 시집의 권혁웅 해설과 “서정을 포기한 자리에 육두문자와 외설과 패러디가 난무하고, 대중가요와 연극적 대화가 수시로 개입하며, 말장난과 소설적 서사가 포진한다.시인지 소설인지 우화인지 연극인지 분간할 수 없다. 말하자면 집 안에서 그의 시세계는 전통적인 장르의 경계를 가뭇없이 허무는 해체와 재구성의 미학적 실험실이다”라는 이번 시집의 류신 해설의 간극에서 볼 수 있듯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이번 시집에서 주목되는 것은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오이디푸스` 신화가 서상영 시인의 시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바뀌었나 하는 데에 있다. 스스로 눈을 찌름으로써 자신을 단죄한 오이디푸스의 뉘우침은 종결된 것이 아니라는 데에서 그의 시는 출발한다.▲ 시인 서상영오이디푸스의 통곡은 신화를 뛰어넘어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낙눈이 내린다뜨거운 눈물이 얼어 하얀 꽃으로 핀다대궁도 없이, 벽 없는 허공에헛되이 몸을 부딪치며, 끝도 시작도 없이오오, 그러나 사내여그 숱한 뉘우침은 정당하단 말인가누구도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자유는 없으리-`눈과 오이디푸스` 전문현대판 오이디푸스들이 가득한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시인은 가족을 무대 위로 올린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이자 이기적이고 가부장적인, 게다가 자신의 딸을 욕망하는 아버지, 막내아들과 근친 관계에 있는 엄마, 아버지와 형을 동시에 욕망하는 누나, 결국 아버지를 배반하고 새로운 아버지로 등극하는 형. 근친상간의 야릇한 욕망으로 이루어진 이 가족은, 서로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끊임없이 갈등을 빚는다. 바야흐로 오이디푸스 근친상간 모티프의 전면적인 교정이자 전방위적 확대라 부를 만한 `신가족로맨스`가 펼쳐지는 것이다.형은 마르크스를 사랑했고 아버지는 비스마르크를 사랑했고집안은한시도 열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고어머니는 남편과 아들을 똑같이 사랑했다그래서 특이한 사랑의 방식을 택했는데부자(父子)간의 투쟁을 빌미로 바람을 피워보자는 작은 소망을 가졌다부자간의 증오가 증폭될수록 그녀의 소망도 증폭됐지만막상 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녀에게서 불륜의 꿈은 사라졌다나는 형이라는 형이상학을 통해 세상을 봤으나원체 지지리라 아버지조차 나를 동정했다누나는 아버지를 가장 사랑했고 오빠를 가장 사랑했는데그런 사실을 공공장소에서 밝혔다그때마다 아버지와 형의 싸움을 격렬해졌고엄마는 누나의 귀싸대기를 때렸다-`눈과 오이디푸스-행복한 가족` 전문 이들의 욕망이 반복되고 서로 자리를 바꾸면서 구동되던 가족 관계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형이 새로운 아버지가 됨으로써 변화를 맞는다. 하지만 그 변화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버린다.형도 결국 아버지의 부정적인 면을 고스란히 이어받고 권력자로 군림하려 하면서 가족의 비극은 또다시 반복되고 만다.아버지를 죽인 자리에 또다시 아버지가 된 오이디푸스. 계속해서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질서` 앞에 “새아버지도 헌아버지일 수밖에 없”(`눈과 오이디푸스-안녕, 발가벗은 영혼아`)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그렇다면 이러한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시인이다. 이 모든 걸 지켜본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인이다. 그의 시가 선 자리를 바라보는 것은 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시작일지도 모른다.2부의 마지막을 장식한 두 편의 시에서, 독자들이 이 불편한 가족 이야기에서 또다른 이야기가 시작됨을 짐작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나는 홀로 시를 읊네까닭 없이 권태로운 목소리로안개비에 몸을 적시며시를 읊네, 하지만나는 나의 마음을 모르네아름다움에 더욱 목이 마른 아름다움이 슬픔을 나는 용서해야만 할까-`내 마음의 실루엣` 전문그러면 시인은 지금 어느 쪽에 있는가? 시인은 집 안과 밖, 가족과 자연, 실험과 서정, 첨단과 낭만이 대치한 최전선에 있을 것이다. 경계에서 피는 꽃이 가장 위험하고 아름답다. 부디 정치와 미학의 영토가 맞닿은 국경에서 서상영 시의 꽃이 계속해서 만개하길! (….) 두 겹의 삶을 견디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이 새로운 질서를 부여받는 접점에서, 정치와 미학의 청원이 충돌하고 길항하고 교호(交互)하는 전위에서, 서상영의 시세계가 조금 더 독해지고 악해지길 소망한다.-류신, 해설 `안티 오이디푸스 시극(詩劇)`에서./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