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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신화적 흔적 존재의 흔적이 새겨진 철학의 마지막 가능성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3-04-26 00:07 게재일 2013-04-26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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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의 모비딕`  김동규 지음  문학동네 펴냄, 228쪽
신화와 이성은 원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됐다. 플라톤 이후 둘은 대립관계에 놓였고, 서양철학은 로고스의 역사로 이행했다. 신화를 지워낸 공백에 써내려간 이 역사는 어쩌면 말소의 역사요 왜곡의 역사다. 그러나 예술의 토양이 신화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예술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신화적 흔적을 가리키는 또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 흔적이 오히려 지금까지 역사를 가능하게 한 근원이라는 것, 또한 역사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심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유를 전회하며 또다른 시원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심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은 바로 이 심연 속에서 찾아야 했다. 신화의 흔적, 예술은 `존재의 흔적`이 새겨진 철학의 마지막 가능성이었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은 왜곡된 존재이해를 극복하는 수련장이었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주는 신성한 학문이었으며, 따라서 진리가 드러나는 지상의 신전이었다.

하이데거에게 실체화된 `나`는 없다. 하이데거의 `나`는 진행형의 시제 속에서 스스로 변형되면서 자신을 창작할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에 가깝다. 그런데 이 자유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흰 캔버스나 글이 쓰이지 않은 백지, 커서만 깜박이는 빈 문서파일처럼 공포와 불안을 자아내는 텅 빈 자유다.

하이데거식 미래는 끝이 존재하는 유한한 미래, 불가능성 앞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미래다. 그것은 무엇인가 `아닐 수 있는` 미래이고 `없을 수 있는` 미래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아님`으로 침윤된 가능성으로서의 미래. 결국 그것은 텅 빈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다.

하이데거는 근대적 존재이해의 절대성을 상대화하고 역사화했다. 그리고 그런 존재이해가 어떻게 우리 삶에서 파생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삶의 세계, 생활세계, 지상의 삶으로 돌아간다.

하이데거는 평생 `존재`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추적했다. 특히 예술 속에서 `존재`의 흔적을 집요하게 찾았다. `철학의 모비딕-예술, 존재, 하이데거`(문학동네)의 작가 허먼 멜빌은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을 가리켜 “진정한 의미의 얼굴”이 없는 괴물이라고 했다. “주름투성이 이마가 넓은 하늘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라고.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이름의 얼굴 없는 거대한 괴물에 맞서 초인적인 힘으로 사투를 벌인 에이해브 선장을 닮았다. 그것은 서양 문명, 그리고 이미 그 문명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우리 자신도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싸움이기도 하다. 어쩌면 싸움의 승패는 이기고 지는 결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투의 과정을 통해 성장판을 얼마만큼 열어내느냐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니체의 말처럼 “괴물과 싸울 때에는 괴물과 닮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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