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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온한 일상 이면의 허위의식 꿰뚫다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3-05-24 00:02 게재일 2013-05-24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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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세탁소` 정미경 지음 창비 펴냄, 284쪽<br>5년 만에 선보이는 네번째 소설집<br>오늘의 작가상·이상문학상 등 수상
▲ 정미경 작가

오늘의 작가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2천년대 한국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된 정미경 작가의 신작 소설집 `프랑스식 세탁소`(창비)가 출간됐다.

`프랑스식 세탁소`는 그가 5년 만에 선보이는 네번째 소설집이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7편의 단편을 통해 안온해 보이는 일상의 이면에 도사린 인간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한편 각자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삶과의 괴리 속에서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조용히 어루만진다. 때로 “설명할 수 없는 결정”(`타인의 삶`)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우리가 진정 “우리였던 순간”(`번지점프를 하다`)이 언제였는지를 사색하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삶이 작가 특유의 단단한 문장과 깊은 성찰을 통해 펼쳐진다.

정미경 작가는 1987년 신춘문예 희곡 부문으로 등단한 이후 2001년부터 본격적인 소설 창작을 시작했지만 그 이후 누구 못지않게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소설집과 장편을 오고 간 그간의 결과물들은 읽는 이에게 늘 그 완성도에 대한 신뢰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번 신작 `프랑스식 세탁소` 또한 하나같이 빼어난 완성도를 지닌 수작들로 채워져 있다.

표제작 `프랑스식 세탁소`는 복지재단 이사장인 `나`와 그가 사보에서 우연히 접한 프랑스인 요리사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나`는 자신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을 지닌 여직원 `미란`에게 묘한 호기심으로 접근하지만 재단의 비리 의혹에 연루돼 수사를 받게 되자 `나`가 가진 능력있고 도덕적인 이미지에 타격이 갈 것을 두려워하는 미란을 은연중에 자살로 몰고 간다. 그런 그에게 요리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만으로 뜨거운 삶을 살다가 그 자부심을 훼손당하자 끝내 생을 포기한 프랑스 요리사 `르와조`의 이야기는 번민과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의 안온한 삶의 궤적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에게 미란과 르와조의 순결함이나 열정 따위는 얼른 치워버리고 싶은 `바닥에 떨어진 꽃잎`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한국과 프랑스, 현실과 소설이라는 분명한 경계가 있음에도 `나`와 `르와조`의 이야기는 읽는 이의 마음을 절묘하게 하나로 휘감는다. 정미경의 소설은 진실과 거짓, 성찰과 자기기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영역에서 빛을 발한다.(한기욱, 추천사) 작가는 `프랑스식 세탁소`를 통해 우리에게 일관된 질문을 던진다. 이 치열한 욕망의 시대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 우리가 믿는 것들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작가의 사유는 그래서 비교적 차분한 소설의 톤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이야기를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긴다.

▲ 정미경 작가

첫번째 수록작 `남쪽 절`은 작가가 밝힌 바와 같이 설치작품 `남쪽 절(南寺, 미나미 테라)`을 소재로 삼았다. 철저한 어둠 속에서 한 발 한 발 내디뎌야 하는 체험에서 느끼는 낯설고 막막한 기분은 주인공 `김`의 심경에 부합한다.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어서” 1인 출판사로 독립한 뒤 살아남기 위해 그는 대필 사실을 숨겼다가 문화계에서 퇴출된 과거의 베스트셀러 작가 `백`과의 계약을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런 김에게 최소한의 신념과 이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아내는 껄끄럽기만 한 존재이며, 지옥과도 같은 용산의 투쟁도 백을 만나러 가는 길을 가로막는 짜증스러운 일일 뿐이다. 그러나 김 역시 심정에서는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해 자괴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계속 발길을 돌리게 되는 `남쪽 절`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모든 감각을 동원해 조심스레 걸어나가야 하며, 한 점의 빛이 곧 희망의 근거가 되는 가운데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의 작은 손길로 넘어지지 않게 되는 암흑이다. 이 기묘한 어둠은 현대인의 삶의 작동방식을 상징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안락한 일상의 한 꺼풀 아래에 전혀 다른 세계가 놓여 있다는 인식은 `파견 근무`와 `타인의 삶`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파견 근무`의 화자인 `강`은 지방법원 판사이다. 최고의 엘리트로서 지역 유지들과 호의호식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중독된 도박의 세계에서 점차 삶이 파탄에 이른다. 그는 애초에 믿었던 철두철미한 법의 세계마저 다분히 판사의 재량에 좌지우지되는 것이라 느끼며 끊임없이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상상만을 하게 된다. 이와 양상은 정반대이지만 `타인의 삶`의 인물들 또한 삶의 나락 앞에 놓인다. 의사인 `현규`와 결혼을 앞둔 `나`는 애인이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결심하자 어찌할 바를 모른다. 현규는 “인생의 어떤 순간에,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을 할 때가 있다”고 결연히 말하지만, 그 이면엔 모르핀 중독과 얽힌 사건이 있다. `나`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그 결정의 진정한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해설을 쓴 이소연 평론가의 말처럼, 정미경의 소설은 생에 내장돼 있는 복잡하고도 신비로운 이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운명 앞에 굴복하거나 우연에 휘청거리기도 하는 인물들을 만나게 되지만 그들이 끝내 실패하거나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나의 삶과 나의 현실을 다시금 차분히 되새기게 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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