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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단어로 써내려간 무거운 詩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3-05-03 00:40 게재일 2013-05-03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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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오은 지음  문학동네 펴냄, 180쪽
▲ 시인 오은

“말들이 징검다리고 밥이고 우주고 엄마고 바로 당신이었던 그 무렵, 낙오된 귀를 열어젖히는 한없이 낯선 소리, 에르호 에르호….”

-오은 `그 무렵, 소리들` 중에서

(`에르호`는 `나`라는 뜻을 품고 있다.)

“한국 시에서 소홀히 취급되었던 언어유희의 미학을 극단까지 몰고 간다”(시인 정재학), “스스로 생장한 언어의 힘으로 새로운 시적 규율을 만들어가는 시인”(시인 이재훈), “언어가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과 가치를 의심하고 질문하게 한다”(평론가 허윤진)는 평을 받으며, 한국 시의 또하나의 `스타일`로 자리매김한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2002년 `현대시`를 통해 만 스무 살 나이로 등단한 오은 시인의 첫 시집이었다.

그가 4년 만에 58편의 시를 들고 돌아왔다. 시인의 범상치 않은 언어감각은 여전하다. 특유의 블랙유머와 그 안에 담긴 사회·문명 비판의식은 이전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

첫 시집에서 `무엇을` 쓰느냐보다 `어떻게` `얼마나 다르게` 쓰느냐에 더 집중했다면, 이제는 그 양쪽의 균형을 더 깊이 있게 맞추었다 할 수 있겠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시,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는 확신이 담긴 시, 스스로를 무한히 긍정하면서도 자기 갱신을 위해 소중한 것을 과감히 버리는 시,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 시, 기꺼이 역치를 끌어올리는 시”(`풀리는 시, 홀리는 시-더 좋은 시에 대한 단상`, `현대시` 2013년 1월호)를 그의 두번째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문학동네)에서 만날 수 있다.

“익은 감자를 깨물고 너는 혀를 내밀었다 여기가 화장실이었다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아무도 듣길 원치 않는 비밀을 발설해버렸다 너의 시선이 분산되고 있었다 나에게로 천장으로 스르르 바깥으로 방사능이 누설되고 있었다 너의 눈빛을 기억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는 여기가 바로 화장실이라는 듯, 바지를 내리고 시원하게 노폐물을 배설했다 노폐물은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지 너의 용기에 힘껏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이 모든 일이 내년의 첫째 날에 일어났다 그날은 종일 눈이 내렸다 소문처럼 온 동네를 반나절 만에 휩싸버렸다 문득 폐가 아파와 감자를 삶기 시작했다 여기가 화장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말이 더 마려웠다” -`설` 전문

이 시집의 서시 자리에 놓인 작품이다. 말의 씨앗을 발견하고 수집해 그것을 부풀리고 변환시키는 오은 시인 특유의 `말놀이`를 잘 보여준다. `설`이라는 단어를 모티브로 해서 혀(舌), 소문과 발설(說), 누설(泄)과 배설(泄), 눈(雪), 그리고 첫날의 의미까지 엮어갔다.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는 노`폐`물(`No폐물`로 읽을 수도 있겠다), 문득 아파온 `폐`도 마찬가지다. 표기가 동일하지만 다른 의미로, 이 의미에서 저 의미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설`은 더 많은 `설`이 되어, `폐`는 더 다채로운 `폐`가 되어 무의식적인 감각과 음악적 긴장감을 더한다.

“일단 세우고 말하자. 날을. 잡은 것 같았다. 감을. 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병을. 모르는 게 약이라지만” -`날`부분

이와 같이 동음 혹은 유사음을 활용하거나 도치를 통해 시 전체에 리듬감을 주고, 익숙했던 한국어를 낯설고 신선하게 접근한 시가 곳곳에 포진해 있다. 시인은 특정한 의미로 굳어 있던 단어들을 유연하게 풀어주고 여러 갈래로 뻗어가며 일련의 `말사태`를 이룬다. 시인 김언은 이 시집 해설에서 이러한 `말놀이` 혹은 `말사태`가 어떻게 가능한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변을 샅샅이 뒤져야 하고 때로는 현장을 산산이 부수어서 그 속에서 찾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수색과 색출을 동반한 수집 작업이 극에 달하면, 최초 혼자 있는 것처럼 보였던 어떤 단어/소리/표기 들이 결코 혼자 있지 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똘똘 뭉쳐서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교양인`과 `세미나`란 단어의 뜻을 생각해본 적 있는가. 예사로 쓰이는 단어들이 가리키는 것과 실제 담고 있는 의미의 괴리를 우리는 체감하며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은 시인의 재기 넘치는 언어유희 뒤에 스민 서늘한 냉소를 만나면, 재밌고 당혹스럽고 기발하고 아이러니해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일상적으로 써버리는 단어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시인의 “놀라운 것들의 방”(`분더캄머`). 그는 지금도 그 안에서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엄습하는 것들을 사랑해//(…) //별처럼 빛나는 순간을 기다려/ 우리의 동공이, 우리의 동맥이/ 현장을 사로잡는 순간을 기다려”(`아이디어`)라 천진하게 말하며 삶의 무게, 인생의 페이소스를 진하게 우려내고 있을 것이다. 가벼운 단어로 무거운 의미를, 익숙한 언어 습관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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