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조선시대 커리어 우먼, 의녀의 세계

윤희정기자
등록일 2012-11-16 19:45 게재일 2012-11-16 11면
스크랩버튼
`의녀` 문학동네 펴냄 한희숙 지음, 140쪽<br>조선시대 처음 탄생 국가 차원 양성 시작<br>침술로 공을 세우면 천민 신분 벗을 수 있어

`팔방미인 조선 여의사`라는 부제가 붙은 `의녀`(문학동네)는 한국 의학사상 가장 특별하면서도 주목받지 못했던 존재인 의녀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이다.

의녀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처음 탄생했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천출인 까닭에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또한 높은 사람들을 시중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들에게도 냉대를 받았다. 능력보다 신분을, 일하는 여성보다 규방 여성을, 여성보다 남성을 우대하던 조선시대의 낡은 관습 때문이었다.

1장에서는 어떤 목적과 배경에서 의녀가 탄생했는지 알아본다. 의녀는 조선시대에만 존재했던 특이한 직업이다. 유교 이념에 따른 내외법(內外法) 아래 남녀 간의 신체 접촉을 금기시했던 조선 사회에서 여성은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의원(醫員)은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텔레비전 드라마 등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손목에 묶은 실로 왕실 여성을 진맥하는 의관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그래서 태종 대에 여성의 질병 치료를 위해 의녀 제도를 만들어 국가 차원에서 의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2장에서는 의녀의 교육에 대해 살펴본다. 의녀 교육은 제생원(濟生)에서 이뤄졌다. 각 지방에서 뽑혀 올라온 나이 어린 여종들은 먼저 `천자문` `효경` `정속편(正俗篇)` 등을 읽고 글을 깨우친 다음 기초 의학 과목과 산부인과 등에 대해 배웠다. 그런 다음에야 맥경(脈經)과 침구법(鍼灸法), 약 조제법을 배우는 단계로 넘어갔다. 매 과정에서는 경쟁 또한 치열했는데, 실제로 수련 과정에서 탈락하는 이들이 많았다.

세종과 세조, 성종, 중종 등은 의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3장에서는 의녀의 구체적인 역할과 활동에 대해 알아본다.

의녀는 크게 진맥, 침과 뜸, 약을 담당했다. 모든 의녀는 이 세 가지 일 모두에 얼마간 지식을 갖고 있어야 했지만 전문 분야에 따라 의녀를 맥의녀, 침의녀, 약의녀로 구분하기도 했다. 의관이라도 왕실 여성의 몸은 만질 수 없었기 때문에 왕비, 대비 등의 진맥은 의녀가 했다.

물론 주된 역할은 의원을 보조하는 것이었지만 의녀는 이렇듯 진맥 등에서 나름의 전문성을 발휘했다.

4장에서는 의녀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살펴본다. 같은 의료인으로서 어의(御醫)는 정3품, 심지어 당상관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에 견주면 의녀의 대우는 보잘것없었다. 의녀는 아예 품계가 없었다. 그러나 쌀, 보리 등으로 급료를 받았고, 조세와 요역에서 혜택을 받았다. 이는 의녀가 질병을 치료하는 기술로써 국가에 일정한 노동력을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의녀가 받을 수 있는 포상 가운데 으뜸은 바로 천민 신분을 벗을 수 있는 면천(免賤)이었다. 공에 따라 포상에도 차등이 있었는데 면천은 주로 침술로 큰 공을 세웠을 때 내려졌다. 비록 기회는 적었지만 어쨌든 의녀에게는 능력에 따른 신분 상승의 기회가 있었던 셈이다.

▲ MBC 월화드라마 `마의`에 등장한 극중 의녀들.

5장에서는 조선시대에 유명했던 의녀들에 대해 알아본다.

성종 대에는 장덕과 귀금이라는 의녀가 유명했다. 장덕은 제주도 출신으로 치통과 충치 치료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고 하고 부스럼 또한 잘 고쳤다고 한다.

성종이 제주 목사에게 의녀 장덕이 죽고 없으니 여러 아픈 곳의 벌레를 잘 고치는 사람이 있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보내라(`성종실록`권266, 성종 23년 6월 14일 계축) 하였을 정도로 유명했다. 귀금은 장덕의 기술을 물려받은 의녀라고 한다. 중종 대의 유명한 의녀로는 바로 대장금이 있다. 대장금의 `대(大)` 자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가 미지수다. 키가 컸다는 뜻인지, 의술이 뛰어났다는 뜻인지, 왕의 총애를 받았다는 뜻인지 현재로서는 밝혀낼 자료가 없다. 혹은 장금과 큰 장금, 각각 다른 두 사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대장금 또는 장금은 실록에 29년 동안 그 이름이 등장한다. 매우 오랜 세월 동안 임금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치료하고 간호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정조 대에는 기근에 굶주린 제주 백성을 구한 김만덕이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직함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의녀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6장에서는 의료 외에 의녀가 수행했던 임무에 대해 살펴본다.

의녀를 지칭하는 또다른 말로 `약방기생`이라는 것이 있다. 이 말은 연산군 이후에 생겨났는데 연산군이 연회의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 기녀와 더불어 의녀까지 동원했기 때문이다. 연산군 대에 의녀는 “의서 말고도 음악을 배워 궁궐의 잔치 때마다 화장을 하고 참가하였다”고 한다.

의녀는 수사관 역할도 했다.

범죄와 관련해 여성의 상처를 조사해 사건 담당 기관에 보고하고, 때로는 시체를 검시하기도 했다. 내외법에 따라 여성 범죄 혐의자는 의녀가 수색했다.

의녀는 또 국가의 사치 단속 활동에도 동원됐다. 혼인집에 가서 사치스러운 폐물이나 예물이 있는지 조사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친잠례(親蠶禮)에 참여해 왕비를 시중들고, 죽은 궁인의 제사 때 제문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연회에 참석하는 기녀에게 글과 시를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문화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