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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의 소환을 보는 국민의 멍든 가슴

61년 대한민국 헌정사에 또 다른 오점이 될 13년여 만의 전직 대통령 소환을 보는 국민의 가슴은 먹먹하고 참담하다. 역대 어느 정권에 비해 도덕성과 청렴성 만큼은 자부한다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를 받았다는 혐의가 인정돼 특정범죄가중처벌법(뇌물) 피의자 신분으로 30일 오후 대검찰청에 출두한다. ‘박연차 게이트’의 몸통으로 지목된 노 전 대통령으로서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벗기 위해서라도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불가피해졌다. 대검 중앙수사부는 2007년 6월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받아 권양숙 여사에게 전달한 100만 달러, 이듬해 2월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 조카사위 연철호씨에게 송금한 500만 달러 모두 노 전 대통령이 개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통령 특수활동비에서 정 전 비서관이 빼돌린 12억5천만 원에도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을 재소환하지 않는다는 방침이라 신문 강도를 높이면서 박 회장, 정 전 비서관을 대질하거나 ‘3자 대면’도 동원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증거다. 박연차의 ‘입’에 의존하던 검찰이 정치적 감각이 탁월한 율사(律士)출신 전직 대통령을 불러놓고 제대로 수사하지 못할 경우 역풍을 맞을지 모른다. 검찰의 노 전 대통령 소환은 ‘죽은 권력’에 대한 정치보복도, 망신주기도 아닌 엄연한 법 집행이라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집사’의 공금 횡령이나 권 여사의 달러 수수만 봐도 범죄 의혹이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검찰은 신문과정에서 증거로 말하되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전 대통령을 소환한 이상 직·간접적 범죄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피의자 신분인 노 전 대통령도 실체적 진실을 감춰서는 안된다. 에이브러햄 링컨을 존경한다고 했던 지도자답게 양심에 따라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해야 마땅하다.

2009-04-30

기생충족

얼마 전 서울가정법원에서는 황당한 고발사건이 하나 있었다고 한다. 서른을 넘긴 직장여성이 자신의 부모를 상대로 간섭을 하지 말 것과 100미터이내 접근을 금지해 달라는 소장을 낸 것이다. 가정폭력 등 문제가정에나 적용되는 법조항을 들어 부모를 고발한 것이다. 아마도 그녀의 부모는 과년한 딸이 돈벌이도 잘하고, 독립할 때도 되었건만 가라는 시집은 안가고 늘 부모신세만 지고 있는 것을 못 마땅히 여겨, 정 시집을 안가겠다면 밥값이라도 좀 내놓으라며 잔소리를 더러 했던 모양이고, 그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단다. 그녀로서는 자식이 독립을 선언하지 않은 한,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은 부모의 당연한 의무라고 여긴 모양이다. 물론 부모가 되어서 독립을 하지 못한 딸에게 밥값을 내 놓으라는 것은 우리의 정서로 볼 때는 야박해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녀의 이런 모습이 전적으로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치더라도, 한 지붕아래 살면서 100미터이내 접근금지를 요구한다는 것은 생각이 짧아도 한참이나 짧다. 집안이 얼마나 큰지는 모르지만 축구장보다 크지는 않을 터, 집이 부모의 소유니 부모가 대신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겠고, 당연히 자식인 딸이 100미터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결론인데, 결국은 법에 의해 자신이 독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가당착에 빠진 꼴이다. 웃기는 사건일지는 모르지만 이것이 오늘날 적지만은 않은 신세대들의 의식이라고 하니, 부모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하는 일이다.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잊고, 부모는 단지 자기를 낳아주고 양육하는 의무만 진 사람으로 착각하는 극도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결과는 아닌지. 이런 세태를 그대로 반영한 신조어를 가리켜 ‘파라싱글족’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직역하면 기생충족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 등장한 매우 생소한 말이지만 일본에서는 벌써부터 유행하고 있었던 용어라고 한다. 이 말은 영어의 기생충인 패러사이트(Parasite)와 혼자라는 싱글(Single)의 합성어다. 독립할 나이가 됐으면서도 경제적인 실익을 노려 부모 집에 그냥 얹혀살면서 자기만의 독립적인 생활을 즐기는 젊은 세대들을 말한다. 이들은 자신의 방에 컴퓨터, TV, 오디오, DVD플레이어 등을 갖추어 놓고 있으면서 가족과 한 지붕 아래 살지만 실제론 독립된 생활을 한다. 수입이 불안정하거나 적어서도 아니다. 엄연히 고액의 수입이 있어 얼마든지 독립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모에게 붙어살면서 약간의 용돈으로 생색을 내고선 숙식을 제공받고 어머니에겐 빨래며 온갖 자질구레한 잔심부름까지도 떠넘기는 얌체를 뜻하기도 한다. 부모라는 그 하나만의 이유로 독립해 나가지 않으려는 자식을 억지로 쫓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보니, 할 말을 다 못하고 마지못해 억지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애물단지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말이다. 일본에서 시작된 기생충족들이 최근엔 우리나라서도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단다. 이제는 한 시름 놓고 여생을 즐겨도 되겠다고 여겼는데, 장성한 자식들의 때늦은 뒤치다꺼리로 편 허리 다시 구부리고 새삼 고생하는 노부모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젊었을 때는 학비 대느라 허리가 휘어지도록 고생하고, 이제는 시집장가 보내 손자들 재롱도 보면서 노후를 편안히 즐길 수 있으려니 했는데, 장성한 자식들의 뒷바라지로 다시 또 새롭게 고생해야하는 노부모들의 처지가 딱해 보일 뿐이다.옛말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했다.” 가진 모든 것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고 마지막 남은 사랑도 주지 못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고 한다지만 그래도 이제는 부모의 인생을 자식들이 챙겨주어도 좋을 때다. 많은 물질을 안겨주는 것만이 효도의 길은 아니다. 부모님의 인생도 존경해주며 편안히 여생을 쉬어가며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부모님의 지난날 고생을 알아주기는커녕 도리어 주판알 튕기면서, 자신들의 실리만 따지고 결혼을 미루며, 늙은 부모를 힘들게 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니, 부모는 마냥 봉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2009-04-30

모자 애창곡 (愛唱曲)

그 사람의 애창곡을 들으면, 인생살이의 명암(明暗)을 잘 읽을 수 있다.돌아가신 어머니는 그다지 예능에는 장기가 없었지만 입담 하나는 제대로 갖춰 토속어로 비벼서 구수하게 이바구를 잘 엮어내셨다.그런 어머니가 예외로 애창곡이 한 곡 있었다.젊은 나이에 남편도 없고, 그렇다고 가진 것이라곤 빈손이 고작이었으니, 인생살이가 고단할 수 밖에 없었다.어머니는 하느님을 믿으면서, 나사로가 생전에 괄세받고 못 살았지만, 죽어서는 천국에 가서 위안받은 것을, 어머니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믿음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유일한 양식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애창곡은 찬송가 중에 있었다.어머니의 애창곡을 지난날을 떠올리며 다시 적어본다.“…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맡에 나아가 내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하고 많은 은 노래가 많았지만 위의 노래가 한생두고 어머니의 애창곡 내지 인생주제가 였다.나도 어머니의 애창곡에 많은 감동을 받으면서 파도 높은 지난 세월을, 무사히 건너왔다. 어머니는 애창곡이 찬송가 중 한 곡 이었지만, 그 어머니의 아들인 나는 애창곡이 대중가요인 ‘임’이다. ‘임’의 다른 이름은,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도 하는데, 같은 이름의 영화주제가다.‘임’은 1962년에 처음 등장해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하는 군복무중인 졸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임’을 부른 가수도, 국민소득 100불 시대, 백만 불의 아가씨라는 ‘박재란’이었다. 박재란은 뭇 남성의 애인이었지만, 나만은 그녀를 애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그녀의 남성편력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의 결벽증은 못 말린다. 아무리 가난해도 나는 젊은 남잔데, 마음속의 사랑이야 없겠는가. 아예 못 올라갈 나무로, 쳐다볼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이란 유행가를 불러, 젊음의 한(恨)을 풀 수 밖에 없었다.“….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 왜 이리 그리운지 보고 싶은지/ 못 맺을 운명 속에 몸부림치는/ 병들은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젊은 시절 나는 서울의 육군본부에서 군복무를 한 덕분에 방송국 공개홀에서 인기 절정의 요정 박재란 가수를 먼 빛으로나마 자주 볼 수 있었다.몇 해전에 60대 중반의 ‘가수 박재란’이 아닌 ‘박재란 집사’를 가까이서 봤다. 젊은 시절만이야 할까만, 박재란씨는 곱게 늙어, 청춘을 그대로 지닌 듯 했다. 몇 해 전 세상을 등진 누나가, 생전에 “동생 너는 젊은 날, 청승맞게 ‘창살 없는 감옥’만 불러댔지”하며 핀잔을 주었다.밑도 끝도 없는 가난 탓으로 사랑도 꿈도 이룰 수 없던 지난날이 얼마나 답답한 세월이었는가.임을 만날 순 없어도 ‘임’이란 박재란의 절창을 들으며 인생을 파토하지 않고 살아왔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노래의 힘만 위대한 게 아닐 것이다. 문학도 우리 인생에게 절대적인, 너무 큰 위안을 준다. 나도 더욱 좋은 글을 지어, 어렵게 세상을 사는 이들에게 조그만 힘이라도 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애창곡을 부르면서, 애송시를 읊으면서 내 앞에 가로 놓인 장애물을 헤치면서, 소원의 항구로 전진해야 한다. 인생아!

2009-04-30

둘레 ... 박용래

산은산빛이 있어 좋다먼 산 가차운 산가차운 산에버들꽃이 흩날린다먼 산에저녁해가 부시다아, 산은둘레마저 가득해 좋다- 먼 바다(창자과비평사·1984)한국문단에서 전설로 전해내려 오는 이름 ‘눈물의 시인’ 박용래. 그의 시를 읽으면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리듯, 마른 논에 물이 들어가듯, 달빛이 초가집 지붕 위로 떨어지듯 단박에 그의 깊은 서정에 우리는 감염되고 만다. 다시 박용래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그가 노래한 시의 한 구절처럼 “함부로 노(怒)한 일 뉘우쳐 진다”는 느낌이 절로 일어난다. 어쩌겠는가, 그렇다는 것이다. 시 ‘둘레’는 ‘현대문학’1960년 9월호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시는 누가 붓 한 자루를 잡고 한두 번의 붓놀림으로 쓱쓱 그려놓은 담백한 수묵화 같다. 한두 번의 붓놀림이지만 보면 볼수록 깊은 풍광(風光)이 자꾸 빛을 발하는 그림 같은 시, 박용래 시의 본 모습이 바로 이러하다. 온갖 화려한 수사도 배제한 무욕(無慾)의 “산빛이 있어 좋다”는 시구는 얼마나 좋은가, 또 시의 중간부에 가차운 산과 먼 산의 대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먼 산 가차운 산이 함께 빚어 만들어내는 커다란 풍광인 ‘둘레’를 두고 “둘레마저 가득해 좋다”라는 종결부는 또 얼마나 빛나는가. 사실 그 ‘둘레’는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살림살이 모습이고, 더 크게는 끝없는 우주 전체의 본 모습이 아니겠는가.해설이종암·시인

2009-04-30

한국ㆍ중국 도시국제화 '동행'

상주시ㆍ중국 강서성 의춘시 공무원 교환근무 상주시와 중국 강서성 의춘시는 공무원 교환근무를 추진하는 등 국제교류를 활발히 하고 있다.의춘시 봉신현에 근무하고 있는 이고표씨31·사진는 지난 15일부터 상주시에 파견 근무를 와 있고 상주시는 3월 6일 이미 모동면에 근무하는 김승구씨(51)를 파견한 바 있다.이씨는 입국과 동시에 10일간 수원에 있는 지방행정연수원에서 한국의 문화와 생활상에 대한 사전교육을 받고 27일부터 6개월 기간으로 근무에 들어갔다.상주시와 의춘시는 2005년 11월 자매결연을 한 이래 매년 대표단 상호방문, 국제행사 및 지역축제 참가, 관광 및 산업단지 벤치마킹 등 활발한 교류활동을 하면서 지방의 국제화시대에 앞장서 가고 있다.특히 양도시는 실질적인 교류를 위해 2007년부터 3년째 공무원 상호 교환근무를 해오고 있다.공무원 교환근무는 양국의 언어습득은 물론 선진행정연수, 양국 간의 문화와 생활상 이해 등으로 이어져 교류활성화의 매개체적 역할을 하고 있다.자매도시인 의춘시는 중국 강서성 서북쪽 호남성과 인접한 도시로 상주시보다 10배가 넘는 1만8천700㎢의 면적에 인구 523만명이 살고 있는 매우 큰 도시이며 중국의 6대 식량 공급기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주요 특산물로는 모시와 유채, 대나무, 목화, 목초기름 등이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중국 전통 4개 약제도시의 하나로 전통약제 생산과 가공으로 유명하다.한편 한방산업단지 조성사업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는 상주시는 의춘시에 공무원을 파견해 중국의 약초재배와 가공 분야의 교류를 증진시킴으로써 상주시가 한국 최고의 한방자원 메카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기반을 닦을 계획이다./곽인규기자 ikkwack@kbmaeil.com

2009-04-30

"체계적 교육으로 글로벌 인재 육성"

용인초등학교장 90명 1박2일간포스코교육재단 영어수업 참관 용인 지역 초등학교 교장 90명이 지난 28일 1박 2일 일정으로 포스코교육재단 산하 포항지역 3개 초등학교를 방문했다.용인교육청 주관의 교육연수 차원으로 이뤄진 이번 방문은 포스코교육재단 산하 초등학교 현장 견학과 각 학교의 특색교육에 대한 참관 형식으로 진행됐다.교장단 일행은 먼저 포항제철지곡초등학교(교장 김영종)를 방문하여 창의력 신장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운영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학생들의 창의성 수업을 참관했다.포철지초의 창의성 학습은 지난 25일 KBS-1TV ‘과학카페’ 및 지난해 8월 EBS에서도 특집으로 방영되는 등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이어 포항제철동초등학교(교장 신윤호)를 방문한 일행은 학생들의 자연관찰 및 정서함양을 위해 꾸며놓은 생태숲과 숲속교실 등을 둘러봤으며, 교내에 갖춰진 천체 관측시설을 견학하고 체험해보는 시간도 가졌다.마지막 일정으로 포항제철서초등학교(교장 김칠룡)를 방문한 교장단 일행은 국제 문화교류 및 영어교육 노하우에 대해 포철서초 김칠룡 교장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영어체험 학습실과 원어민 교사의 영어수업을 참관했다. 포철서초는 ‘국제이해교육’ 부문으로 2005년 100대 교육과정 최우수학교로 선정돼 교육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이번 연수에 참가한 용인 모현초등학교 강충호 교장은 “글로벌 인재 육성을 위한 포스코교육재단의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교육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김용운 보라초등학교 교장 역시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창의성, 독서, 영어 등의 특색교육이 아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이뤄지는 인상을 받았다”며 “이번에 보고 경험한 내용들을 우리 학교에도 꼭 적용해 볼 계획”이라고 소감을 밝혔다./권종락기자 kwonjr@kbmaeil.com

2009-04-30

일제 강점기 구룡포에 정착한 일본 어부들 이야기

조중의·권선희씨 ‘구룡포에 살았다’ 출간 “과거는 한 때 현재였고 현재는 또한 어느 미래의 과거가 된다. 그러므로 과거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해야 할 가장 원초적 사명이다.”일제강점기에 동해안 어업 전전기지인 구룡포 일대 집단촌의 생활상과 영향 등을 조명한 책이 출간됐다.소설가 조중의(CBS 포항방송 보도제작국장)씨와 시인 권선희씨가 펴낸 ‘구룡포에 살았다(아르코 간)’가 그것.‘구룡포에 살았다’는 100여년전 일본 세토내해 어부들이 구룡포로 진출한 뒤 1945년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여정을 오롯이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이국땅 구룡포에서 이뤄졌던 이들의 어업과 역사적, 문화적 전반에 걸친 한·일 양측의 생활상을 사진자료와 함께 생생히 기록했다.현재 구룡포 장안동에 남아 있는 일본인 집단촌의 흔적을 계기로 ‘그들은 왜 한반도 동남쪽 호미곶 아래 작은 포구에 짐을 풀었을까?’ ‘일본 어부들이 구룡포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구룡포 주민들에게 이들의 출현과 정착은 어떤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글은 시작된다.구룡포에서 태어나 그 시대를 살아 온 양측 세대들의 산 증언을 통해 과거를 거슬러 오르는 스토리는 한 편의 드라마다.이 책을 통해 일제강정기 이전부터 구룡포에 거주했던 일본인 어부들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 것도 큰 성과다. 그들이 구룡포에서 했던 일을 기록으로 상세히 추적해 남기게 된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무엇보다도 구룡포에 진출했던 일본인 어부들의 과거를 고스란히 찾아냄으로써, 아픈 과거의 역사를 통해 미래 지향적인 발전의 책임감을 갖게 된 것도 소중한 수확이다. 아픈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에너지를 증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당시의 상황을 명확하게 증명한 자료가 드물고 그나마 그 시대를 살았던 증인들이 3세대를 훌쩍 넘어 간데다가 모두 고령인 점을 감안하면 시기적으로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획인 셈이었다.우선 구룡포에 거주했던 일본인 후손들이 ‘구룡포회’를 조직,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져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수소문해 찾아가 인터뷰를 하고 사진, 지도, 출어사 등 자료를 구하는 한편 구룡포에 살고 있는 어른들을 대상으로 그 시절의 기억을 구술로 채록하고 글로 옮기는 작업을 수개월 간 병행했다. 저자 조중의·권선희씨는 “‘구룡포에 살았다’는 작은 포구가 지니는 소박한 과거 이야기에서 시작되지만 앞으로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 후대에 이르리라 본다. 더욱이 새로운 것을 작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잊혀져 가는 것을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와 관점을 한국이 아닌 일본인 어부들의 진출에 맞추어 풀어 간 것은 문화적 겨루기에서 이미 우월한 시각을 가졌다는 의미 또한 품고 있다”면서 “이를 매개로 구룡포는 그저 보고 지나치는 곳이 아니라 자료를 통해 삶의 의미를 새기는 곳이 될 것이다. 또한 지나간 세대는 회고를, 새로운 세대는 좀 더 깊고 다양하게 상대로의 접근을 유도하는 계기도 된 것”이라고 말했다.포항시의 예산으로 출간된 이 책은 시가 구룡포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영일만생태도시연구소에 의뢰, 두 차례 일본 현지취재와 자료 수집을 거쳐 6개월여만에 집필을 완료한 뒤 최근 한국어판 500부와 일본어판 1천500부를 출간했다. 책은 일본인가옥인 적산가옥을 중심으로 당시 구룡포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삶을 조명함에 따라 근대 역사자료와 일본인 관광객 유치 등에 적극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오는 6월초 일본 도쿄에서 일본 언론과 구룡포거주 일본인 후손, 기업인 등 200여명을 대상으로 현지 출판기념회를 갖고 관심을 고조시켜 나갈 계획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09-04-30

시와 노래가 어우러진 자리

정호승 시인 초청낭독회… 30일 위덕대 금강관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무릎과 무릎 사이에는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미안하다/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정호승 ‘미안하다’중).‘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등 주옥같은 시집의 주인공인 정호승(59·사진) 시인이 경주를 찾는다.30일 오후 2시 위덕대 금강관에서 열리는 위덕대 평생교육원(원장 이정옥) 초청 ‘지역민과 함께하는 시인 초청 낭독회’에 초청된 것. ‘詩와 노래가 있는 낭독회’를 주제로 열리는 이번 낭독회에는 ‘슬픔이 기쁨에게’ ‘포옹’ 등 국민들의 감성에 맞는 시와 에세이를 쓴 정호승 시인이 자신의 시를 직접 낭독하고 시를 가사로 해 만들어진 노래도 들려주며, 아울러 작품과 관련된 진솔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설명한다.또한 청중들이 독자의 입장에서 직접 시를 낭독하는 순서도 준비돼 있으며, 낭독한 사람에게는 저자가 직접 사인한 시집을 선물하는 이벤트도 함께 진행된다. 전국적으로 책을 읽는 분위기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즈음에 마련되는 이번 낭독회는 지역민 누구나 문학을 비롯하여 다양한 인문도서를 친근하게 접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정 시인은 지난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위령제’에 당선됐다.6·25 동란이 발생했던 1950년 1월3일 하동군에서 출생, 대구 계성중학교와 대륜고등학교를 나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주요 시집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시선집 ‘흔들리지 않는 갈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등이 있다. 문의 760-1142./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09-04-30

'50년 내공의 풍경화'

서양화가 김응곤 14번째 개인전5월18일까지 청송군 야송미술관 원로 서양화가 김응곤(76) 화백이 오는 5월18일까지 청송군립 야송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갖고 있다.수채화가로 유명한 작가는 칠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2의 전성기라 할 만큼 활발한 작업을 펼치고 있다.14번째 개인전이 되는 이번 전시회에는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제작한 수채화 10여점과 유화 50여점 등 모두 60여점이 선보인다. 풍경 화가이자 수채화가로 유명한 그의 작품을 시대별로 선별한 작품들이 한자리에 펼쳐진다.자연의 아름다움을 정직하고 진솔하게 화폭에 담아내고 있는 그는 대구에서 오랜 교직생활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유명화가들을 배출해 냈으며, 현재는 대구대 조형대학 명예교수로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 교수는 50여 년간 한결같이 ‘풍경(Land scape)’이라는 일괄된 조형요소로 자연에서 자아를 찾기 위해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그의 표현양식과 재료의 변화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우선 여행을 통해 얻어지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의 경험과 그 과정에서 내밀한 교감을 사실적 풍경화에 재현해 내었던 1960∼70년대 작품세계를 먼저 꼽을 수 있다.부산사범대학을 졸업한 이후 대구와 경북의 중등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던 시기의 작품 경향적 특징은 무엇보다 목가적 풍경에 심취해 화려한 색채보다는 모노톤 색조의 화면구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빼어난 자연경관이나 수려한 풍광(風光)보다는 우리의 산하 어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야산의 강인한 생명력이나 체득되는 감흥을 화려한 장식 없이 소박하게 표출해 내고 있다. 또한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한시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자연의 새로운 해석과 표현을 들 수 있다. 일루전(illusion)적인 요소는 무시되고, 자연의 형상들을 단순화 시키고 자유롭게 기호화함으로써 자연을 자의적이고 주관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그의 심상의 변화에서 오는 상징적 이미지를 내재하고 있다. 이밖에 1990년대부터 녹색과 푸른색 조를 즐겨 사용하는 그의 수채화 풍경작품 속에는 자연의 생명력과 에너지가 얇은 수채안료를 통해 배어 나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쉽게 발견 할 수 있는 청색과 녹색, 황색의 옅은 중성적 색조들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를 경계하는 중용의 의미로 노화백의 자아(自我)의 성찰에서 얻어진 따스함이 무덤덤하게 배어 나오고 있다. 김 화백은 현재 대구수채화회와 대구사생회 지도고문, 일요화가회 등에서 현장지도, 한국수채화협회, 한국미술협회, 대구 원로인 미술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제24회 대구시전 초대 작가상’을 수상한 바 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09-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