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애창곡을 들으면, 인생살이의 명암(明暗)을 잘 읽을 수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그다지 예능에는 장기가 없었지만 입담 하나는 제대로 갖춰 토속어로 비벼서 구수하게 이바구를 잘 엮어내셨다.
그런 어머니가 예외로 애창곡이 한 곡 있었다.
젊은 나이에 남편도 없고, 그렇다고 가진 것이라곤 빈손이 고작이었으니, 인생살이가 고단할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하느님을 믿으면서, 나사로가 생전에 괄세받고 못 살았지만, 죽어서는 천국에 가서 위안받은 것을, 어머니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믿음은 가난한 사람에게는 유일한 양식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애창곡은 찬송가 중에 있었다.
어머니의 애창곡을 지난날을 떠올리며 다시 적어본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맡에 나아가 내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하고 많은 은 노래가 많았지만 위의 노래가 한생두고 어머니의 애창곡 내지 인생주제가 였다.
나도 어머니의 애창곡에 많은 감동을 받으면서 파도 높은 지난 세월을, 무사히 건너왔다.
어머니는 애창곡이 찬송가 중 한 곡 이었지만, 그 어머니의 아들인 나는 애창곡이 대중가요인 ‘임’이다.
‘임’의 다른 이름은, ‘창살 없는 감옥’이라고도 하는데, 같은 이름의 영화주제가다.
‘임’은 1962년에 처음 등장해 창살 없는 감옥살이(?)를 하는 군복무중인 졸병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임’을 부른 가수도, 국민소득 100불 시대, 백만 불의 아가씨라는 ‘박재란’이었다. 박재란은 뭇 남성의 애인이었지만, 나만은 그녀를 애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의 남성편력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의 결벽증은 못 말린다. 아무리 가난해도 나는 젊은 남잔데, 마음속의 사랑이야 없겠는가.
아예 못 올라갈 나무로, 쳐다볼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이란 유행가를 불러, 젊음의 한(恨)을 풀 수 밖에 없었다.
“….목숨보다 더 귀한 사랑이건만/ 창살 없는 감옥인가 만날 길 없네./ 왜 이리 그리운지 보고 싶은지/ 못 맺을 운명 속에 몸부림치는/ 병들은 내 가슴에 비가 내린다….”
젊은 시절 나는 서울의 육군본부에서 군복무를 한 덕분에 방송국 공개홀에서 인기 절정의 요정 박재란 가수를 먼 빛으로나마 자주 볼 수 있었다.
몇 해전에 60대 중반의 ‘가수 박재란’이 아닌 ‘박재란 집사’를 가까이서 봤다. 젊은 시절만이야 할까만, 박재란씨는 곱게 늙어, 청춘을 그대로 지닌 듯 했다.
몇 해 전 세상을 등진 누나가, 생전에 “동생 너는 젊은 날, 청승맞게 ‘창살 없는 감옥’만 불러댔지”하며 핀잔을 주었다.
밑도 끝도 없는 가난 탓으로 사랑도 꿈도 이룰 수 없던 지난날이 얼마나 답답한 세월이었는가.
임을 만날 순 없어도 ‘임’이란 박재란의 절창을 들으며 인생을 파토하지 않고 살아왔으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노래의 힘만 위대한 게 아닐 것이다. 문학도 우리 인생에게 절대적인, 너무 큰 위안을 준다.
나도 더욱 좋은 글을 지어, 어렵게 세상을 사는 이들에게 조그만 힘이라도 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이다.
애창곡을 부르면서, 애송시를 읊으면서 내 앞에 가로 놓인 장애물을 헤치면서, 소원의 항구로 전진해야 한다. 인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