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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유당기(書遊堂記)

정미영 수필가 새뜻한 돋을볕이 어둠을 사르며 적막한 공간에 들어선다. 밤사이 아무런 움직임도, 아무런 소리도 없던 곳을 지배하던 절대 고요도 서둘러 아침에 자리를 양보하며 길을 떠난다. 여기는 어린이 도서관이다. 나는 ‘책과 노니는 집’ 즉 서유당(書遊堂)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어린이 도서관은 1979년 사직공원에 처음으로 생겼다. 1906년 평양에서 문을 연 최초의 공공도서관 ‘대동서관’이 지어진 뒤, 73년 만에 생겨났다. 어린이 도서관이라고 이름을 붙였어도 그때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을 것이다. 종이로 된 출판물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교과서나 참고서, 동화책 등을 깨끗하게 읽고 선배가 후배에게, 형이나 누나가 동생에게 물려주던 때였다. 아마도 조용히 독서하고 공부하려고 이용했던 일반 공공도서관처럼 정적(靜的)인 이미지가 강했을 것 같다. 그에 비해 요즘 어린이 도서관은 동적(動的)이다. 책과 연계해 인형극을 보여주거나 작가를 초청해 강연을 듣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고, 영화를 보는 시청각실,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동아리방도 있다. 유아실에는 책을 가지고 도미노를 쌓는 아기들도 눈에 띄고, 소리 내어 읽어 주는 부모님도 있다. 모두 따사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 이곳이야말로 책과 노니는 집이 아닐는지. 인생시계의 가을 중턱을 숨이 가쁘게 넘고 있는 나도 어린이 도서관에 자주 방문한다. 그곳에서 내가 책을 바라보는 마음은 별빛을 응시하는 것과 같다. 어두운 밤하늘을 끊임없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바라보는 어린이들처럼 나의 눈동자도 책장 앞에서 지식의 환향(還向)을 꿈꾼다. 책들은 나에게 끝없는 발견의 여정을 약속하며, 상상력의 날개를 펴주는 비밀의 문으로 느껴진다. 나의 항로가 되고 책 속의 각 페이지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나침반과 같다. 호미곶을 마주하고 있다. 유달리 소금기 실린 바람의 인자들이 몸에 들러붙는 것만 같아 내 마음이 세차게 흔들린다. 땅 속 뿌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물줄기를 찾듯, 독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도서관을 찾는다. 구룡포에 있는 폐교를 새로 단장해 개관한 바닷가 도서관이다. 운동장 벽면에 해초를 입에 물고 있는 거대한 고래 벽화가 있다. 바다가 아닌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요동친다. 정신적 빈곤에 허덕이는 나도 다시 자유를 되찾고 싶다는 열망이 고조된다. 나는 열람실을 향해 자박자박 발걸음을 옮긴다. 서가 사이에 들어서자마자 종이가 만들어지기 전, 갈대를 엮어 글자를 쓰고 그림을 그렸던 파피루스를 떠올린다. 파피루스의 후예들인 종이책과 눈인사를 나눈다. 정갈하게 정리된 서가 사이를 오가며 서너 권의 책을 꺼내 들면, 작가의 소중한 글을 제각각의 공법으로 알차게 꾸민 출판사의 노력이 표지부터 물씬 전해진다. 책을 펼치면 주옥같은 언어의 황홀경이 펼쳐진다. 인생의 세밀한 구석들을 명증하게 들추어내는 책을 들여다볼 때면, 글을 쓰고 싶은 나로서는 자극을 받는다. 나도 우리네 인생사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깊은 울림을 주는 문체를 사용해 진솔한 작품을 창작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내 글 속 청신한 문장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날아가 선명하게 돋을새김 되어 빛나면 좋으련만. 큰 창 너머로 보이는 바다를 잠시나마 무념무상 바라본다. 그러다가 ‘독서는 마음의 창문을 넓히는 여정이다.’라고 했던 노자의 말을 떠올린다. 그 창문을 열고 들어온 지식과 경험은 나의 내면을 더 넓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리고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비결이리라. 나는 지금, 내면을 넓히고 삶을 풍요롭게 하려고, 서유당(書遊堂)을 거니는 중이다. 한 손에는 책이라는 나침반을 들고서, 내 생의 지도에 나만의 항로를 그려 넣는다. ※기(記)는 한문 산문 양식으로 성현의 말씀을 인용하고, 사실을 그대로 적는 글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기록 문학이나 수필에 속한다.

2024-12-18

진전리 구판장

경주에서도 포항에서도 어정쩡한 곳에 잔뿌리 내린 세월 이마 위의 잔설 소모되어 낡았어도 그래도 정갈한 시간이 진열되어 있네 별 아니면 올려다 볼 일 없는 냇물 아니면 내려다 손 내밀 일 없는 라면 끓이듯 간편한 삶 못마땅함이 보글보글 끓는 냄비와 같은 일상 솜을 씹듯 두부 한 점 우물거리면 그래도 달래양념장 향긋함이 콧등을 짚는다 코팅 된 과자봉지처럼 빛나던 시절은 언제였는가 달콤함에 저당 잡혔든, 그렇게 부풀어만 있었던, 기실 편방(偏旁)이거나 부수적(附隨的)이었던, 하산의 의미를 총총 재촉하며 바라보는 저 널려있는 시간과 사건들이여 문득, 처연하게 찬란한 아직 남아 있는 길의 보푸라기 반짝 빛나다가 사라지는 것들의 야무진 허술함 처마에 걸린 명태코다리가 바람, 바다, 산의 울음에 건조되면서 시간을 관통한다, 상처는 스스로 여며야 한다. 진전리는 오천에서 경주 기림사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인데, 거기에 조그만 구판장이 있다. 두부와 도토리묵과 국수를 판다. 듬성듬성 등산객들이 들리는 곳이다. 뼈에 좋은 동동주를 주는데 마음에 더 특효약이다. 자궁과 같다. 느릅나무 아래 앉으면, 저승이 보인다. /이우근 이우근 포항고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문학선’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해 시집으로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빛 바른 외곽’이 있다. 박계현 포항고와 경북대 미술학과를 졸업했으며 개인전 10회를 비롯해 다수의 단체전과 초대전, 기획전, 국내외 아트페어에 참여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 회원이다.

2024-12-18

광풍의 계절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복합지형인데다 사계절이 뚜렷하기 때문에 바람의 종류도 참으로 다양하다. 봄날 남쪽에서 불어오는 온화한 바람은 만물을 소생케 하고 여름엔 열풍이 대지를 뜨겁게 달군다.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때쯤 천지를 뒤흔드는 태풍이 불기도 하고 겨울의 삭풍은 온 땅을 동토로 만들어 버린다. 오랜 세월 농경시대를 거쳐 오는 동안 그런 바람은 우리의 삶과 정서에 깊숙이 배어들어 민족적 기질이 되고 다채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동인이 되기도 했다. 우리말에는 바람에 빗댄 말들이 많다. 신바람에서부터 한 때 유행하던 춤바람, 치맛바람이 있는가 하면, 바람맞다, 바람 넣다, 바람 타다, 바람 들다, 바람 잡다 등 여러 의미로도 쓰인다. 그 중에서도 신바람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기질과 문화적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표현을 넘어 한민족의 공동체적이고 역동적인 성격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일상생활, 일, 놀이, 축제 등에서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며, 이를 통해 힘든 상황을 극복하려는 낙관적인 태도를 내포하기도 한다. 매스컴이 발달된 현대에는 바람이 ‘여론’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각종 언론이 주도하는 여론은 때로 강력한 바람이 되어 사회나 국가를 특정 방향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 특히 모바일인터넷 시대에 접어들면서 여론의 바람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되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거나 국가 체제를 위협하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일진광풍이 전역을 휩쓸고 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적 바람이다. 바람이 불면 대부분 민초들은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눕기 마련이다. 그래야 꺾이거나 뿌리 뽑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수는 자발적으로 바람에 합세하기도 한다. 그것은 거대한 세력의 일원이라는 뿌듯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정치적 바람은 항상 일방적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거센 맞바람에 부딪쳐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도 한다. 바람은 공기가 이동하면서 생기는 자연현상이다. 따뜻한 공기는 가벼워져 상승하고 차가운 공기는 무거워져 하강하는데, 이로 인해 고기압 지역과 저기압 지역이 형성된다. 공기가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바람이 발생하는데, 기압의 차이가 클수록 바람의 세기가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일정기간 바람이 불고 나면 차츰 기압차가 줄어들어 바람이 멎기 마련이다. 정치적 바람은 자연현상과는 달리 저절로 소멸되지는 않는다. 반대편에서 또 하나의 고기압권을 형성해서 맞바람을 쳐야 기세를 꺾고 막을 수가 있다. 비상계엄 선포를 빌미로 재빨리 고기압권을 형성한 왼쪽바람이 일시에 전국을 강타한 것이 작금의 사태다. 하지만 이에 대항하는 오른쪽 세력도 만만치가 않다. 양대 바람이 서로 부딪쳐 일대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국민들이 어느 편에 더 많이 가담하는가에 따라 바람의 향방이 달라지고 그 결과는 선거에서 나타난다.

2024-12-18

안민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노래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임금은 아버지요/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신다면/백성들이 임금의 사랑을 알 것입니다./열심히 사는 백성들을/배불리 먹여 다스린다면/‘내가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랴?’라고 백성들이 말한다면/나라가 유지될 줄 아실 것입니다./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처신한다면/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향가 중의 하나인 ‘안민가(安民歌)’다. 제목처럼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비책을 노래하고 있다. 경덕왕 24년(745년) 3월 3일에 왕이 신하들과 함께 월성 남쪽에 행차서 훌륭한 고승을 찾으라 했다. 그가 바로 충담사(忠談師)였다. 충성스러운 말을 하는 스승이라는 이름이다. 충담사가 유명한 시인이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던 왕은 자신을 위한 노래를 부탁했고 충담사는 즉석에서 ‘안민가’를 지어올렸다. ‘안민가’는 왕과 신하와 백성의 관계는 혈연관계와 같다고 비유했다. 왕은 아버지요, 신하는 어머니요, 백성은 자녀와 같다. 집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이들이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자기 본분을 다하면 가정이 잘 유지된다. 나라도 이와 같으니 왕과 신하와 백성이 서로가 맡은 바 책무를 제대로만 다한다면 나라가 태평해질 것이요, 백성이 배부르면 나라를 떠날 일이 없을 것이다. 왕에 대한 따끔한 정치적 충언(忠言)이다. 이 노래는 현재 임금과 신하와 백성 각자가 제 역할을 못하여, 상호간 사랑과 신뢰가 무너졌고, 악정에 시달린 백성이 나라를 떠나려 하고 있으니 결국 나라가 태평하지 못함을 반증한다. 따라서 임금에게 그 책임을 묻고, 올바른 정치를 권고하는 뼈아픈 충간(忠諫)이다. 임금이 원한 임금을 위한 노래가 아니라 임금이 해야 할 일을 주문하는 눈물어린 충담(忠談)이다. 경덕왕이 죽기 1년 전이었다. 경덕왕 말년은 귀족들이 두 파로 대립된 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시대였다. 왕은 당시 정치상의 비리를 과감하게 청산하지 못했고, 의욕적인 중앙집권화 정책은 귀족세력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로 돌아갔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이 경덕왕과 충담사의 만남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세간에 명성이 자자한 고승 충담사를 왕이 불러서 ‘안민가’를 짓게 했고 이를 통해서 귀족세력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려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안민가’가 질타하는 대상은 귀족세력이 아니라 경덕왕이라는 것이다.‘안민가’는 왕에게 올리는 충언이고 그 핵심은 마지막 구절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한다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니라.”에 있다고 본다. 이는 경덕왕의 치세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답지 못하고, 백성답지 못해서 나라가 태평하지 못하다”라는 현실의 역설적 증언이며, 결국 경덕왕의 치세가 잘못되었다는 비판이라는 해석이다. ‘안민가’는 지금으로부터 1200여 년 전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 오늘의 상황에 딱 맞아떨어지는 노래라는 점에 소름끼치도록 놀랍다. 무소불위의 대통령, 정쟁에만 몰두한 국회에 넌덜머리가 난 국민은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 온 국민이 불안에 떨고 우울감에 빠진 혼란의 이 시점에 충성스러운 이야기를 해 줄 이, 이 시대의 충담사는 어디에 있는가.

2024-12-18

위기는 새로운 성장의 기회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사람은 삶을 살아가면서 세 번의 위기가 찾아 온다고 한다. 위기는 성장과 변화의 신호이기도 하다. 두려워하기보다 새로운 기회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인생에서 더 나은 방향을 찾는 계기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위기(危機)는 95%의 위험과 5%의 기회가 함께 온다고 한다. 삶은 선택과 도전의 연속이고 5%의 희망을 향해 미래를 설계하고 도전하는 것이다. 도전하지 않는 자는 95%의 위험을 안고 주저 앉게 되고 도전하는 자는 위험의 구렁에서 벗어나 희망과 성장의 길로 향하는 것이다.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들을 보면, 경영의 위기는 필연적으로 있었고 이를 어떻게 극복하는가에 따라 전통과 기업문화의 초석이 되기도 한다. 일본 교세라(Kyocera: 교토의 세라믹)와 NTT 독점기업에 도전한 통신전문기업 KDDI를 창업하고, 일본항공JAL을 재건한 이나모리 가즈오는 ‘위기는 어려움과 고통을 의미한다. 경제 불황과 불경기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적극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로 맞서야 한다. 전 직원이 일치단결해 곤경을 돌파해야 한다. 경험에서 얻은 결론은 불황을 성장의 기회로 삼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교세라는 100여 개국에 진출한 일본의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으로 첨단 세라믹 기술을 기반으로 다양한 산업 분야에서 활약하는 기업이다. 모든 판단과 행동의 기준은 ‘인간으로서 무엇이 옳은가’이고 도덕적이고 정직한 경영을 의미한다. 아메바 경영을 추구하며, 조직을 작은 단위(아메바)로 나누어 각 단위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운영되도록 하여 책임감과 효율성을 높였다. 기술 혁신과 품질을 중시하며 세라믹 기술 발전과 반도체, 태양광, 정보기기 등 다양한 산업군에서 기술력을 인증 받고 있다. 2010년 일본 JAL은 막대한 부채와 비효율적인 경영으로 파산 신청을 했을 때 직원들의 사기진작부터 시행한 이나모리는 고객과 직원의 행복중시 경영으로 1년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하고 2012년에 재상장 하는 등 경영쇄신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열정이 기본이고, 위기 상황에서도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와 회사의 성장은 직원의 행복과 함께해야 한다는 신념이 여러 위기와 불황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매출보다 이익을 우선시 하고, 원가 절감을 통해 수익성 강화, 직원들이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문화 등의 경영 원칙이 위기 때마다 슬기롭게 이겨내는 기업 건강의 자양분 역할을 해 왔다. 최근 철강업에도 큰 위기가 오고 있다. 대내외 경영 흐름이 어렵고 경제 불황과 맞물려 철강 소비량이 급속히 줄어드는 경기 흐름은 피해 갈 수 없는 현실이 되고 있다. 불황이 올 때 흔들림 없는 버팀목은 기업 수장과 직원 모두가 하나가 되는 ‘기업문화’라 할 수 있다. 이나모리의 사람중심 경영철학과 아메바 경영을 통한 인간 존중, 일의 효율성 추구, 회사를 사랑하는 주인정신이 위기 극복의 단초가 될 것이다.

2024-12-17

플라스틱으로 신음하는 바다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바다가 요동치고 있다. 길거리로 나온 민심의 파도마냥 만리 이랑을 달려온 파도가 뭍에 가까워지면서 방파제며 갯바위, 자갈, 모래톱에 사정없이 부닥치며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육지의 안부가 궁금해 늘 가볍게 찰랑거리던 몸짓으로 다가오던 파도가 최근에는 격정을 못이긴 듯 거칠게 밀려와서 산산이 부서지는 듯하다. 파도와 물결은 바다의 숨결처럼 늘 살아있고 깨어 있는 가슴으로 출렁대다가, 때로는 무언의 신음 마냥 온몸으로 맞닥뜨리며 항변할 때가 있다. 어쩌면 플라스틱으로 몸살을 앓는 바다환경의 심각성을 고발하기 위한 일종의 항거일까? 주위를 조금만 관심있게 살피고 주의 깊게 바라보면 무엇인가 불합리하게 왜곡되고, 심각할 정도의 문제와 모순 같은 현상이 도처에 깔려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환경오염과 같은 문제로, 특히 해양환경오염에 대한 문제는 과거 수십년 전부터 제기된 이슈로 전세계가 공감하는 사안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실생활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편리함을 주는 플라스틱은, 미세플라스틱으로 장기간 분해되면서 물고기의 생태계에 영향을 미치고 결국 인간의 건강마저 위협하게 되는 환경 저해물질이다. 남한 면적의 16배 크기의 대규모로 태평양에 떠돌아다닌다는 이른바 ‘플라스틱 섬’의 실체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상아로 된 당구공의 ‘친환경’ 대체물질로 150여 년 전에 개발된 플라스틱이 현재는 기후위기, 환경오염, 생물다양성 감소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밀접해지고 쓰임새가 많아진 플라스틱이 바다와 육상을 막론하고 오염문제와 환경문제를 유발하여 삶을 위협하고 있으니 새로운 시스템을 통해 지구환경을 되돌려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더 이상 플라스틱으로부터 지구가 고통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플라스틱 오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근본적인 해결책과 실천 방안을 마련하고, 지속 가능한 협약 체결 및 강력한 제재를 추진해야 한다. 일회용 플라스틱의 생산 감축, 재사용, 포장재 줄이기, 리필재 사용 확대 등의 실천으로 플라스틱 줄이기에 적극 동참하여 오염 없는 미래를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에 대한 의미 있는 접근으로, 지난 11월 23일 한국 그린피스 주관으로 세계 16개 환경단체들과 부산 벡스코 일대에서 ‘플라스틱 생산 감축’ 촉구 행진이 열렸다. 포항에서는 포스코 해양환경지킴이봉사단 등 30여 명이 동참하여 ‘플라스틱 이제 그만(No More Plastic)’ 등의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캠페인에 합류했다. “일회용 플라스틱은 생산에 5초, 분해에 500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듯이, 매년 4억t 이상의 플라스틱을 생산하는데 세계 정부와 기업이 나서 플라스틱 재질 개선과 생산량 감축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국내 플라스틱 산업 역시 생산 감축을 기반으로 다회용기·재사용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이 바다를 살리고 환경을 지키는 해법이 아닐까 싶다.

2024-12-17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이기전(李己傳) <하편>

시월의 어느 날이었다. 희수는 전학을 갔다. 희수는 전학을 간다고 기에게 따로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희수가 결석을 했다고 이야기했고 담임선생님은 희수가 전학을 갔다고 대답했다. 그즈음 희수와 기는 짝이 아니었다. 여름방학 이후 둘은 멀어졌다. 그 해 여름, 비가 자주 그리고 많이 왔다. 여름 방학, 반 별로 야영을 가기로 되어있었다. 기의 반이 야영을 가기로 한 날 전날에 비가 왔다. 계곡마다 물이 많이 불어났다. 결국 기의 반은 학교 운동장에서 야영을 했다. 네 명씩 한 조가 되어 텐트를 쳤다. 기와 희수는 같은 조였다. 희수는 멀뚱히 서 있는 기를 끌고 와 밥 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쌀은 어떻게 씻어야 하는지, 물은 얼마나 부어야 하는지. 몇 개의 조를 합쳐 팀을 만들었고 팀별 대항전으로 게임을 하고, 캠프파이어를 했다. 그리고 취침 시간이 되었다. 그 시간에 자는 아이들은 없었다. 어두운 와중에 축구를 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몇몇은 학교를 빠져나가 오락실로 향하기도 했다. 기와 희수와 같은 조였던 다른 두 명이 그랬다. 한 명은 축구를 하러 갔고, 한 명은 오락실로 갔다. 기와 희수만이 남았다. 기는 희수에게 우리도 축구하러 가자고 이야기 했지만, 희수는 그냥 텐트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둘은 누웠다. 텐트 천장에 매달아 둔 랜턴이 이리 저리 흔들렸다. 랜턴의 빛은 기를 비추기도 했고 희수를 비추기도 했다. 운동장 바닥이라 그런가? 잠자기에 불편한데 하고 기가 생각할 즈음, 혹시 잠들었어? 하고 희수가 물었다. -저기 있잖아. 기야. -왜? -뭐 하나 물어봐도 돼? 기가 고개를 돌려 희수를 보았다. 흔들리던 랜턴의 불빛이 잠시 멈췄다. 희수의 뺨을 비췄고 하얀 희수의 뺨은 발갛게 물들었다. -기. 너. 내가 널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어떻게 할 건데? 발갛게 물든 희수를 바라보던 기는 일어나 앉았다. 랜턴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말했다. -랜턴 건전지를 갈아야 할까봐. 어두워진 것 같아. 희수가 기를 따라 일어나 앉았다. -말 돌리지 말고 대답해봐. 기수는 랜턴을 풀어 내렸다. 가방을 뒤졌다. 건전지를 꺼내 랜턴 옆에 두고는 전구가 있는 부분을 돌려 풀면서 대답했다. -니 녀석이 날 좋아하는 건 잘 알지. 그러니까 내 옆에 붙어서 따라다니지. 희수는 기의 무릎에 손을 얹었고 기의 무릎을 흔들었다. -아니. 그런 거 말구. 사랑 같은 것 말이야. 기는 랜턴의 건전지를 꺼냈다. 새로운 건전지를 넣으려는데 건전지가 손에서 자꾸 빠져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건전지를 주우려했지만 어두워서 그런지 잘 잡히지 않았다. 건전지를 찾아서 바닥을 더듬던 손에 희수의 손이 와 닿았다. 희수가 말했다. -내가 여자라면, 내가 언젠가 여자가 된다면 날 사랑해줄 수 있겠어? 다음날 둘은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영 이후 방학이 끝나는 날까지 기는 희수를 만나지 않았다. 희수가 편지를 보내고 찾아오기도 했지만 기는 희수를 만나지도 답장을 하지도 않았다. 개학을 하는 날 기는 희수 옆에 앉지 않았다. 희수가 가방을 들고 다가와 기의 옆에 앉으려 했다. 기가 희수에게 말했다. -저리 가. 쳐다보지도 가까이 오지도 말을 걸지도 마 -언제 들어도 멋진 노래이지요. 멋진 날에 멋진 노래입니다. 이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디제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사과데이가 사과를 재배하시는 분들의 영농조합이나, 사과가 유명한 지방의 지방자치단체가 처음 제안했을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찾아보니 그런 곳과는 관계가 없이 시작되었더라고요. 2002년 ‘학교폭력 대책 국민협의회’를 비롯한 시민단체가 학생, 교사, 학부모를 대상으로 화해와 용서의 운동을 벌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고 합니다. 시월에 둘(2)이 사(4)과 한다는 의미로 날짜를 정했답니다. 학교 폭력이 계기가 되었다지만 어디 학교만의 문제겠습니까? ‘나’로 인해 마음 아팠을 사람들에게 일 년에 한 번 사과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자. 그런 취지의 내용이라면 우리 모두가 동참할 수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사과 농사 하시는 분들께 도움도 되고, 기회를 놓쳐 하지 못했던 사과도 하고, 서로 마음도 풀고. 나쁜 것은 지우고 좋은 것만 남기고. 오늘은 혼자서 좀 길게 떠들었습니다. 쉬었다 가겠습니다. 노래 하나 더 들어야지요. 참. 사과를 받으신 분은 꼭 사과를 하신 분 앞에서 사과를 크게 베어 물어야 한답니다. 그래야 사과를 받아준 것이 된다 하네요. 명심하십시오. 그게 핵심입니다. 한 반에 오십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생활을 하다 보면 비밀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누가 누구와 친한지, 누구와 누구의 사이가 안 좋은지. 그리고 이런 놈도, 저런 놈도 있기 마련이다. 이런 놈들, 저런 놈들 중에 나쁜 놈들이 있었다. -어이. 희순. 희수 말고 희순 이라고 하자. 기랑 헤어졌다며. 이제 나랑 사귀자. 응. 뽀뽀도 좀 해주고. 이리 와봐. 나하고 사귀는 거다. 나쁜 놈들 중 한 녀석이 희수를 건드렸다. 희수를 자기 옆자리로 강제로 데리고 갔다. 희수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온 힘을 다해서 저항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누구도 나쁜 한 녀석과 맞서려 하지 않았다. 기 또한 뒤돌아보지 않았다. 희수를 위해 뭐라도 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기와 희수는 한데 엮일 것이 분명했다. 둘이 사랑이라도 하는 거냐. 희수가 너의 여자친구인거냐. 누군가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올까 두려웠다. 기가 희수를 외면하는 동안 희수는 나쁜 녀석의 장난감이 되었다. 그해 가을 희수는 전학을 갔다. 녀석을 피해서였다. 학교를 옮겼다고 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쁜 녀석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법이었고, 옮겨간 학교에도 나쁜 녀석들은 있었다. 희수에 대한 이야기는 금방 퍼졌고 희수는 그곳에서도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다. 기에게는 평온이 찾아왔다. 희수가 사라졌다거나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깊지 않은 계곡위로 놓인 작은 다리를 지났다. 건너편 숲 나무들 사이로 청록의 슬레이트지붕이 보였다. 다리를 지나 제법 경사진 비탈길을 올랐다. 비탈길을 넘어서자 평지가 나왔고 평지의 끝에 청록의 대문과 청록의 슬레이트지붕을 가진 단층집이 있었다. 길 끝에는 청록의 대문이, 대문옆 벽에는 망원사라 적힌 현판이 매달려 있었다. 한자가 아닌 한글 현판이었다. 망자는 무슨 망자며 원자는 무슨 원자인지, 기는 궁금했지만 대문 앞에서 머뭇거리지는 않았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청록 슬레이트지붕 아래의 허름한 법당에서 향내가 흘러나왔다. 마당 한구석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공양주가 일어서서 기 쪽으로 다가왔다. 어찌 오셨냐. 그녀가 물었고 기는 스님을 만나러 왔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먼저 부처님께 인사를 드려야 스님을 만날 수 있다고 했다. 기는 운세를 보거나 상담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공양주의 안내대로 법당에 들어갔다. 백팔 배 정도는 해야 부처님께 인사를 한 것이고 절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라고 부처님께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야 한다며 공양주는 불상 아래에 놓인 불전함을 가리켰다. 기는 백팔 배를 시작했다. 희수라면 어쩌지? 내가 기다. 이렇게 말하고 웃으며 손을 잡아야 하나. 그러면 희수가 그래 맞네. 우리 기네. 이렇게 다시 보게 되었네 하고 말하며 반길까?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을 모르오. 나는 희수가 누군지도 모르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니 찾지 마시오. 세상과 연을 끊었다며 돌아가라 말할까? 그래. 너 잘 만났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이 다 네 탓이니 책임을 져라. 왜 나만 이렇게 고생해야 하느냐. 탓을 할까? 이런 생각들이 땀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무슨 싸움 하듯 절을 하누. 보고 있는 부처님이 어지러우시겠어. 스님을 보러 왔으면 스님 볼 힘은 남겨둬야지. 부처님께 인사만 하다 갈 건가? 뒤에서 보고 있던 공양주가 기를 멈춰 세웠다. 잠시 앉아서 숨을 고른 후 기는 불전함에 지폐 몇 장을 넣었다. 불전함에 지폐를 넣는 것을 확인한 공양주가 스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공양주가 기를 불렀다. 기와 스님은 마주서서 합장을 했다. -서 계시지 말고 앉으시지요. 스님은 ‘ㄱ’자로 손가락을 구부려 오른쪽 귀 뒤 머리를 긁으며 앉았고 기는 소반을 사이에 두고 스님과 마주 앉았다. 스님은 기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텅 빈 소반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 염주를 돌리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천천히 염주 구슬이 엄지손가락을 넘어 갔다. 스님은 염주를 돌렸고 기는 그것은 보았으며, 공양주는 차를 들고 들어오다 멈춰 섰다. 염주가 세 번 돌았다. 정확히 오십 네 개의 염주 구슬이 엄지손가락을 지나갔을 때 스님이 헛기침을 했다. -아니, 스님을 보러 오셨으면 이야기를 해야지. 뭐하시나. 무슨 이야기든 해보세요. 우리 스님이 다 들어주신다니까. 공양주가 소반에 차를 내려놓으며 기에게 말했다. 기는 네 라고 짧게 대답했지만 말을 잇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채 멈춰버린 염주를 쳐다보았다. 염주를 쥔 손이 고왔다. -오늘은 제가 먼저 이야기하지요. 스님이 기의 잔에 차를 따르며 입을 열었다. 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낯이 많이 익습니다. 처사님 얼굴이. 아마도 전생에 처사님과 제가 제법 사연이 있었나 봅니다. 나쁜 인연은 아니겠네요. 이렇게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다시 만났으니까요. 하하. 아이고. 별 일이시네. 우리 스님이 먼저 이야기를 다 하시고, 옆에 있던 공양주가 방석을 가지고 와 자리를 잡았다. -부처님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저도 기억하는 전생이 딱 하나 있습니다. 전생에 저는 버섯이었습니다. 꽃을 피우고 싶어 하는 버섯이었지요. 옆에 핀 예쁜 꽃들을 보며 버섯은 왜 꽃이 피울 수 없는지 억울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 피고 지는 꽃들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꽃이 별 건가. 별과 나비가 찾아와 같이 놀아주면 그게 꽃이 아닌가. 그때부터 버섯은 자기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머리 색깔도 빨강으로 바꾸고 향기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나비 한 마리가 찾아왔지요. 버섯은 너무나 기뻐서 가지고 있던 모든 향을 뿜어내었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바람이 불어오는 척, 바람에 흔들리는 꽃인 척 몸을 흔들었지요. 하지만 버섯의 빨강 머리에 앉았던 나비는 잠시 후 버섯이 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전생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뒤에 버섯이 어찌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뒷이야기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전생인데. 옆에 앉아 있던 공양주가 하이고. 세상 살다 살다 별일이네. 별일이야. 내 앞에서는 전생이야기는 한 번도 꺼내지 않으시더니. 우리 스님한테 그런 전생이 있었어요? 하이고. 자신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하이고 하이고를 반복했다. -이제 해결되셨습니까? 꼭 자기 이야기를 해야 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술술 일이 풀려나가는 경우도 있지요. 하하. 그런데 처사님. 가지고 오신 종이가방에 든 것은 무엇입니까? 기는 아. 예. 하며 종이가방에 넣어 두었던 사과를 꺼내어 소반위에 올렸다. 공양주가 어. 사과네. 하며 스님을 쳐다보았다. 스님은 물끄러미 사과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과의 빛깔이 참 곱네요. 빨강이네요. 처사님. 빨강의 보색이 뭔지 아십니까? 기는 스님의 얼굴을 보며 대답 없이 웃었다. 공양주는 스님과 기의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스님은 공양주에게 종이를 가져다 달라 했다. -사과는 다시 저기 놓아두시고 제 글이나 하나 받아 가십시오. 우리 절에 오시는 분들에게 드리는 저의 답이지요. 스님은 글을 써내려갔다. 청산은 나를 보고…….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2-17

삶이 짐이 된 영케어러

우정구 논설위원 대구시가 최근 가족이라는 이유로 병든 부모를 돌보고 집안 일을 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청춘돌봄이(영케어러) 311명을 발굴하고 이들을 지원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영케어러(Young Carer)는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가족을 부양하는 청소년, 청년들을 이르는 말이다. 13세에서 39세 이하의 영케어러들은 대개 하루 5시간 이상을 가족 돌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그중 절반은 월 100만원 이하의 소득으로 살아간다. 일반적으로 이들 인구는 청년인구의 약 5% 정도로 추정한다. 국내에는 30만명의 영케어러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나 정확한 통계는 없다고 한다. 자신의 꿈을 키우기에도 바쁜 나이에 가족의 생계 등을 돌봐야하는 그들에게는 삶 자체가 고달픔이다. 또래의 남들처럼 여행을 간다거나 스포츠를 즐기는 일 등은 아예 상상이 안 된다. 복지의 사각지대란 복지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 중 정부의 복지 정책에 미치지 못하는 대상자를 말한다. 여러가지 사유가 있으나 소득, 가구유형, 거주지역 등의 요인에 의해 분류된다. 우리나라 복지분야 예산은 전체 예산의 3분의 1수준. 천문학적 금액이다. 많은 복지 예산을 배정하고도 복지혜택을 못받는다는 사람은 늘어만 간다. 한 통계에 의하면 복지 담당자의 약 40% 정도는 복지 사각지대가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눈부신 경제성장으로 국제적으로 한국은 잘사는 나라로 인식되지만 빈익빈 부익부 등의 문제로 여전히 복지는 우리사회의 과제다. 학업과 사회진출에 어려움을 겪는 젊은 영케어러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복지정책의 새로운 진전이라 할만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2-17

윤석열·한동훈 갈등의 비극적 결말

심충택 논설위원 점입가경으로 치닫던 윤석열·한동훈 갈등이 결국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비상계엄 선포라는 충격적인 사태를 일으킨 윤 대통령은 지금 대통령실이 아니라 관저에서 변호인단과 탄핵심판에 대비하는 신세가 됐다. 비상계엄 사태를 수사하는 공조수사본부는 그에게 내란·직권남용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해 조사를 받으라고 통보했다. 오늘 오전까지 정부과천청사에 있는 공수처 청사에 와서 조사를 받으라는 독촉이다. 공조본은 경찰청, 공수처, 국방부 수사기관이 모인 협의체다. 공조본에 빠진 검찰도 그에게 서울중앙지검으로 출석할 것을 통보했다. 계속 불응했다간, 언제 체포될지 모른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16일 사퇴했다. 그는 이날 “모든 국민께 진심으로 죄송하다. 탄핵이 아닌 이 나라의 더 나은 길을 찾아보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당 대표로 선출된 지 146일 만의 사퇴다. 지난연말 한 대표가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끊이지 않았던 ‘윤·한 갈등’이 결국 ‘탄핵소추’와 ‘실각’이라는 비극으로 끝났다. 두 사람은 검사 시절 막역한 사이로 소문나 있다. 서울대 법대 선후배 관계이며, 검찰에서도 ‘특수통’ 선후배로서 각별한 인연을 맺어왔다. 이 때문에 윤 대통령 출범 이후 한 대표는 정권핵심으로 자리잡았다. 두 사람간의 마찰은 한 대표가 비대위원장을 맡으면서 시작됐다. 발단은 김건희 여사 문제였다. 김경율 비대위원이 김 여사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한 직후, 한 대표가 “명품백 수수 의혹에 대해 윤 대통령이 입장표명을 해야한다”고 말한 게 화근이 됐다. 그 후 해병대원 사건 외압 의혹, 김경수 전 경남지사 복권 이슈, 2026학년도 의대 증원 유예 문제 등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악화됐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이 과정에서 두 사람 간 충돌을 진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계파를 형성해 싸움을 부추겼다. 지난 7월 전당대회 때는 한동훈 후보 공격을 사주한 정황이 담긴 대통령실 김대남 행정관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그 후에도 윤 대통령의 한 대표 패싱논란 등 두 사람의 갈등을 부채질하는 악재가 속출했고, 대통령 지지율은 바닥을 쳤다. 두 사람 간 충돌은 윤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후 폭발했다. 국회 탄핵소추안 표결 직전 한 대표가 탄핵 찬성 입장을 밝히고 대통령 출당을 추진하자, 친윤계는 한 대표를 향한 사퇴 압박 수위를 높였다. 결국 친한계를 포함한 선출직 최고위원 전원 사퇴로 ‘한동훈 지도부’는 붕괴됐다. 한솥밥을 먹던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불신과 반목은 결국 당을 사분오열시켰다. 리얼미터가 지난주(12∼13일) 실시한 정당 지지도 조사결과 민주당은 52.4%, 국민의힘은 25.7%를 기록했다. 양당 간 지지도 격차가 26.7% 포인트나 벌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국민의힘이 내분을 수습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다면 군소정당으로 추락할 수 있다. 조속히 당내부를 정비하고 당의 정체성을 확보해 여당으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2024-12-17

여야정 대화 테이블 절실, 국정 협의체가 해법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는 지난 16일 “한덕수 권한대행 체제는 이재명의 섭정체제가 아니다”라며 “벌써 대통령이 다 된 듯한 대통령 놀음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민주당이 이날 “한 대행이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하면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다”고 한데 대한 반응이다. 국민의힘은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양곡 관리법 등 ‘농업 4법’과 국회법·국회 증언 감정법 개정안 등 6개 법안에 대해 한 대행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해둔 상태다. 민주당은 한 대행이 만약 법률안 거부권을 행사하게 되면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압박하고 있다. 실제 내란 특검법에는 비상계엄 심의 국무회의 참석자인 한 대행과 국무위원도 ‘적극 가담 범죄 혐의자’로 해석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 이재명 대표는 “직무대행은 교과서적으로 보면 현상유지 관리가 주업무이고 현상을 변경하거나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한 대행으로선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거부권을 행사하게 되면 야권의 탄핵공세에 견디기가 힘들고, 그렇다고 행사하지 않을 경우 여당의 거센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하다. 앞으로 한 대행의 거부권 행사를 두고 정국이 소용돌이에 휩싸일 가능성이 크다. 한 대행이 국정안정을 위해 선택할 정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민주당이 최근 제안한 ‘초당적 국정 안정 협의체’ 구성이 한 해법은 될 수 있다. 이 협의체에 국민의힘과 민주당, 정부가 참여하게 되면, 일단 ‘여야정 대화테이블’이 만들어질 수 있다. 한 대행도 “여야정치권과 국회의장을 포함하는 협의체가 발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금은 여야가 서로 조기대선을 의식해 정국주도권 잡기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이 테이블에 모든 의제를 올려놓고 초당적 협의의 장을 만들 필요가 있다. 협의체 구성에 부정적인 국민의힘 권 원내대표가 오늘(18일) 민주당 이 대표와 상견례를 겸해 양자회담을 한다니, 이 자리에서 국정안정을 위한 솔로몬의 지혜가 나오길 기대한다.

2024-12-17

소상공인 계엄 직격탄… 내수경기 살려라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로 시장의 불확실성이 다소 완화됐다고 하지만 정치적 혼란은 여전히 남아 있다. 경제계 전반에서 경제와 민생회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중소기업단체, 소상공인단체, 경제인연합회 등은 “지금은 민생안정과 경제회복을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특히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은 연말연시 특수가 사라져 최악의 경기를 맞고 있다며 아우성이다. 12월은 송년모임이 많아 소상공인들이 가장 많이 기다리는 달이다. 그런데 올해는 탄핵정국으로 그런 희망이 사라졌다. 중소기업 중앙회가 소상공인·자영업자를 대상으로 계엄사태로 인한 피해 여부를 조사해 보았더니 10명 중 5명(46.9%)이 직·간접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주요 피해사례로 송년회 등 연말 회식을 취소하거나 여행객이 객실 예약을 취소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앞으로도 영업피해가 우려된다고 생각하는 소상공인들도 적지 않았다. 고물가, 고금리 등으로 1년 내내 어려운 국내경제 사정에 겨우 버텨 온 소상공인들이라 계엄사태 후 벌어지고 있는 시장 상황이 당혹스럽다. 정부 경제팀을 중심으로 경제 살리기에 나선다고 하지만 대통령 탄핵 후 정치상황은 당분간 혼란상태가 이어질 전망이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꼴이다. 그나마 각 지방자치단체장들이 현재의 엄중한 시국 상황을 직시하고 지역경기 활성화를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도 “중앙정부가 혼란스럽더라도 지방정부는 중심을 잡고 현장과 민생을 챙겨야 한다”며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공직사회가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민생대책은 모두 다 쏟아내야 한다. 탄핵사태 후 소비자들의 소비심리가 크게 움츠러든 상태다. 소비심리 위축으로 지갑을 열지 않는다. 계획한 연말연시 행사나 여행도 불안을 이유로 취소하고 있는 것이다. 소비심리가 살아날 수 있도록 정치권은 정쟁을 멈추고 경제당국은 특단 대책을 내놔야 한다.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은 지금 벼랑 끝에 선거나 다름없다.

2024-12-17

신공항 등 TK현안 흔들림 없이 추진돼야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고 대통령 권한대행체제로 전환되면서 신공항 사업을 비롯한 대구경북(TK) 주요 현안들이 추진동력 약화 등으로 대규모 차질이 우려된다. 2030년 개통을 목표로 하는 신공항 사업과 대구경북 행정통합, 2025 경주 APEC, 군부대 이전 등 대구경북 주요 현안 대부분은 중앙부처와 긴밀한 소통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행안부, 국방부 등 일부 부처 장관자리가 비고 비상시국을 이유로 지역현안에 대한 협의 채널 가동이 쉽지 않을 것으로 관측이 되고 있다. 특히 TK 현안은 윤석열 대통령이 적극 지원을 약속한 것들이 많아 대통령 탄핵 후폭풍의 영향을 직접 받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 법 제정 등 국회의 동의가 필수인데, 탄핵정국 분위기에 휩싸여 입법 절차가 제대로 진행될 지도 불투명하다. 통합신공항 사업의 경우 주호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특별법 일부개정안이 연내 국회를 통과해야 하나 현재로선 장담할 수 없다. 설사 통과된다 해도 주무부처인 행안부 장관의 공석으로 공자기금 확보 등에 대한 논의가 진척을 볼 지도 의문이다. 또 대구경북 행정통합도 적극 지원키로 약속했던 행안부의 장관 사퇴로 추진동력 약화가 우려된다. 특별법 제정이 늦어지면 2026년 특별시 출범도 장담할 수 없다. 내년 11월 개최 예정인 APEC 정상회의도 추가 예산확보를 위한 예산심의가 탄핵정국으로 미뤄지게 됐다. 또 동해 심해 가스석유 개발사업인 대왕고래 프로젝트는 20일경 1차 시추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나 예산이 전액 삭감된 상태여서 지속적인 탐사가 진행될지 불투명하다. 통합신공항과 대구경북 행정통합 등 주요 지역현안들은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는 대구와 경북의 백년대계를 준비하는 야심찬 사업이다. 정국이 혼란해도 반드시 추진돼야 하며 만약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면 기회 상실에 따른 막대한 손실을 입어야 할지도 모른다. 대구시와 경북도는 지역현안 추진에 차질이 없도록 총력을 쏟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지방행정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TK 정치권도 나서 지역현안 추진에 힘을 보태야 한다. 위기일수록 정치권의 역량 발휘가 더 필요하다.

2024-12-16

한국, 대설과 동지 사이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눈 내리는 여름이 없듯, 춥지 않은 겨울도 없다. 겨울은 매서운 바람과 차가운 바다가 외려 매력적인 계절이다. 적지 않은 이들이 겨울 낭만을 찾아 두꺼운 외투로 몸을 감싸고 동해의 해변을 걷는다. 친구와 연인, 가족과 함께. 드물게는 홀로 12월의 바닷가를 산책하는 이들도 있다. 절기는 대설(大雪)을 지나 동지(冬至)로 간다. 지금 한국은 겨울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입구에 서있다. 비단 기온만이 아니라, 사회 전 분야가 차갑게 얼어붙고 있어 많은 이들이 걱정이다. 정치는 혼란스럽고, 사회적 분위기는 우울과 분노를 오가고, 경제는 파탄 일보 직전이란 신호가 들어와 있는 상태다. 24절기 중 21번째 절기인 대설은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 태양의 황경이 255도에 도달한 때다. 대설을 맞은 날 눈이 오면 이듬해엔 풍년이 든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동지는 태양이 황경 270도 위치에 있을 때를 지칭한다. 한 해 중 밤이 가장 길어진다. 올해는 21일이 동지다. 양력으로 동지가 음력 동짓달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 무렵에 들면 노동지라고 한다. 이날은 팥죽을 먹는 풍습이 있다. 사람들의 출근길. 어깨 움츠러드는 추운 날씨를 온몸으로 느끼는 요즘이다. 그런데, 마음을 차갑게 하는 일들까지 자꾸 생긴다. 갑작스런 비상계엄 선포와 국민의 노여움, 대통령 탄핵 소추 표결을 둘러싼 갈등과 고위 장성들의 연이은 구속영장 발부…. 한 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눈보라 속 같은 이 겨울이 어서 지나고, 누구나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는 다사로운 봄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 벌써부터 간절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12-16

국힘, 집권당 구실하려면 정체성 확보가 관건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소추되고 한덕수 대통령 대행체제로 정부가 운영되면서 여야가 정국 주도권 잡기 경쟁에 나섰다. 조기대선이 시작된 분위기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지난 15일 국회·정부가 함께하는 ‘국정안정 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국정 정상화를 위해 초당적으로 협력하자는 명분이지만, 국회의원 170명을 보유한 민주당이 정국 주도권을 잡겠다는 의도다. 이 대표는 “국민의힘은 이제 여당이 아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에 대해 한덕수 대행 측은 “협력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지만, 국민의힘 반응이 좋을 리 없다. 권성동 원내대표는 “여당은 여전히 국민의힘”이라며 이 대표 제안을 거부했다. 국정안정협의체가 표면적으로는 국정운영의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로 보이지만, 국민의힘으로선 국가시스템을 민주당 중심으로 움직이겠다는 발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권 원내대표는 “탄핵소추 이후 민주당이 여당이 된 것처럼 행동하는 건 옳지 못하다”고 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지금 집권당으로서의 역량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고질적인 내분이 격화하면서 국민의힘은 스스로 여당임을 포기한 것 같다. 국민의힘은 선출직 최고위원 5명 전원이 윤 대통령 국회 탄핵소추안 가결 직후 사퇴하면서 ‘한동훈 지도부’가 출범 5개월 만에 무너졌다. 탄핵소추안 가결 책임론을 두고 친윤·비한(한동훈) 진영에선 한 대표를 향해 물병을 던지고 거친 표현을 하는 등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결국 한 대표는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대표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한 대표는 지난해 12월 당 비대위원장을 맡은 이후 중도층 민심을 잡기 위해 윤 대통령과 친윤진영에 맞서 외로운 싸움을 벌였지만, 당 장악력 확보에는 실패했다. 비대위 체제로 운영될 국민의힘이 집권당으로서 인정을 받으려면 하루빨리 정상적인 당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당분간 혼란이 불가피하겠지만, 민심에 민감한 정당으로 거듭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국민은 여당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2024-12-16

탄소중립과 청년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탄소중립은 현대 사회가 직면한 가장 중대한 과제 중 하나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지역 사회의 동참이 필수적이다. 특히, 청년 세대는 디지털 기술과 창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탄소중립 실천을 가속화 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이러한 청년들의 가능성을 적극 활용해 탄소중립 실천 문화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 2024년 출범한 ‘대구 탄소중립 청년 서포터즈’는 지역 주민과 청년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가는데 기여하고 있다. 2024년 대구광역시 ‘탄소중립 청년 서포터즈 1기’는 4월부터 12월까지 약 9개월간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탄소중립 실천 확산에 앞장섰다. 서포터즈는 친환경 소비, 에너지 절약 등 5대 실천 분야를 주제로 카드뉴스, 영상, 블로그 포스팅 등 총 215개의 콘텐츠를 제작해 시민들과 소통했다. SNS 조회수는 약 2만8000회, 공감 및 긍정적 피드백은 20000건 이상을 기록하며 탄소중립 실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성공적으로 끌어냈다. 서포터즈의 활동은 온라인 콘텐츠 제작에 국한되지 않았다. 이들은 지구의 날과 환경의 날 등 지역 행사를 직접 기획·운영하며 시민들과의 접점을 확대했다. 현장 이벤트와 부스 운영을 통해 탄소중립 실천 방법을 알리고,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활동은 청년들이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지역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주체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청년들은 탄소중립 실천의 핵심 세대다. 디지털 기술과 창의적 사고를 갖춘 MZ세대는 온·오프라인 캠페인을 통해 대중의 관심을 효과적으로 유도할 수 있다. ‘대구 탄소중립 청년 서포터즈’는 이러한 강점을 활용해 탄소중립 실천 문화 확산의 선두에 섰다. 앞으로의 과제는 청년들의 역량을 더욱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2025년 대구시는 서포터즈 운영을 확대하며, 청년들이 더 많은 시민 참여형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탄소중립 지식 콘텐츠 발굴과 온라인 챌린지 기획 등을 통해 청년들이 탄소중립 실천을 주도적으로 이끌도록 유도할 예정이다. 탄소중립은 단순히 환경 보호를 넘어, 미래세대를 위한 생존의 문제이다. 청년들은 창의성과 실천력을 바탕으로 탄소중립 실천의 주역이 될 수 있다. ‘대구 탄소중립 청년 서포터즈’의 활동은 이러한 가능성을 입증한 대표적인 사례로, 지역 주민과 청년들이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갈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실천하는 탄소중립 캠페인은 지역사회를 넘어 전 국민적 움직임으로 확산될 수 있다. 이러한 청년들의 도전을 힘껏 응원해 주면 어떨까. 그렇게 된다면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함께 나아 갈 수 있을 것이다. 내년에는 이러한 탄소중립 실천의 주역인 청년의 도전과 성과 모델을 반영해 유소년, 장년 등 좀 더 다양한 세대에도 펼쳐지기를 바란다.

2024-12-16

책을 선물하자

김규인 수필가 2024년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한강의 노벨상 시상식이 있었다. 한국인으로서도 아시아 여성으로서도 최초의 문학상 수상이다. 국내외에서 우울한 일만 가득했는데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문학의 변방이 아니라 원래 책을 열심히 읽는 문화민족임을 일깨워 준 기분 좋은 일이다. 블루 카펫 위에서 스웨덴 국왕으로부터 직접 노벨상을 받는 한강을 보면서 문화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느꼈다. 한강의 수상 연설을 통해 문학에 대한 뿌리 깊은 열정을 느꼈으며 ‘시적 산문’이라는 그의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 한강의 수상은 개인의 영광이 아니라 문화민족인 대한민국의 기쁨이다. 한강은 2015년 황순원 문학상을 시작으로 맨부커상, 메디치 외국 문학상,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특히 맨부커상 수상 이후 국내의 다른 작가들도 해외의 문학상 수상이 늘어났다.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국내 작가들에 대한 번역도 많이 늘어날 것이다. 한국문학번역원의 번역 활동도 활발하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으로 국내 문학이 해외로 많이 소개되고 특히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관심이 늘어나 글을 쓰는 사람으로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국내 출판사에서는 한강 작가의 작품집을 찍어내기에 바쁘고, 이는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가슴 뛰는 시간을 보냈다. 책을 잘 읽지 않는 요즈음에 줄을 서서 책을 사다니. 출판사도 글 쓰는 사람들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텔레비전만 켜면 나오는 정치권의 뉴스로 오랜만에 불어온 문학책을 읽는 분위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선다. 어떻게 불어온 문학 열풍인데 허무하게 사라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제주에 유배된 스승을 위해 중국에서 책을 사서 제주로 가는 험한 뱃길을 통해 책을 전달한 제자 이상적과 추사 김정희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우리는 책을 소중히 한 민족이 아닌가. 책이 없어 아버지가 직접 글을 써서 책을 만들어 자식 공부를 시켰고, 만든 책을 선물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이다.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은 젊은 시절에도 책을 선물하는 분위기는 있었다. 친구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선물하고, 자식의 장래를 위해 책을 선물하던 우리다. 그러던 우리가 경제 규모가 커지고 디지털 문명이 급격히 발달함에 따라 책은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책보다 더 비싼 선물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부모들은 휴대 전화를 선물하여 아이들에게서 책을 떼어버린다. 노벨의 나라 스웨덴에서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책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노벨 주간이 되면 책을 사는 사람들이 서점으로 몰려들고 그 덕분에 주위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우리는 그보다 더한 글을 읽는 선비 정신이 있지 않은가. 몸속에 책을 읽는 유전자가 흐르지 않는가. 가까운 이들에게 책을 선물하자. 책을 받은 사람이 다른 책을 선물하고, 온 사회에 책을 읽는 분위기를 만들자. 책으로 보다 깊이 뿌리 내린 한류를 만들자. 텔레비전에서 뭐라고 하던 문학을 가까이 하자. 한강의 문학이 한류의 새로운 주역이 되기를 희망한다.

2024-12-16

갱년기에서 벗어나기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갱년기는 다양한 증상으로 여성을 괴롭힌다. 쉽게 지나가는 사람도 있고 증상이 있더라도 몇 년 안에 회복되는 경우는 다행이다. 어떤 사람은 몇 년 혹은 십년이상 갱년기 증상으로 고통 받기도 한다. 남성 갱년기도 있다고 하나 이는 여성과는 다르다. 갱년기 증상은 여성에게만 있는 고유 질환이라 보는게 맞고 겪는 사람은 심각한 괴로움을 겪는다. 질병 또는 노화에 의해 난소기능이 감소하면 폐경과 관련된 신체적 및 심리적 변화를 겪는다. 이 폐경 전후시기를 갱년기라 말하고 시작은 40대에 접어들면서 월경이 불규칙 해지는 걸 시작이라고 본다. 증상은 수면장애와 심한 불면, 열이 훅 오르면서 땀이 나고, 어지럼증 및 두통 피부가려움 등의 신체 증상이 나타나고 정신적으론 우울감과 가슴이 답답해지는 듯한 증상들이 나타난다. 위의 모든 증상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있고 일부 증상만 나타나면서 심하지 않게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폐경 전 1~2년 후부터 증상이 나타나고 폐경이 끝난 후 4~5년 정도까지도 고생을 한다. 살면서 받은 스트레스가 심할수록 현재의 증상이 심하고 마음 편하게 살면 증상이 약한 경향성을 띈다. 선천적으로 몸이 약하고 평소에도 심장이 자주 두근거리는 사람은 스트레스와 상관없이 증상이 생긴다. 스트레스 관련으로 증상의 경중이 생기는 것은 갱년기는 화병증상과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살면서 받았던 스트레스와 현재의 스트레스가 증상의 경중에 영향을 미친다. 갱년기 증상의 경중은 내 몸의 건강 상태와 스트레스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수십년 생활의 결과로 나오는 증상이라 보면 그동안의 생활 습관을 그대로 유지 한다면 좋아지긴 힘들다. 생활습관을 바꿔야 한다. 첫째 안하던 운동을 해야 한다. 빠른 걸음으로 걷기 운동은 아주 좋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로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 답답하면 밖으로 나가서 조금 숨이 차도록 걸으면 머릿속이 편해지고 잡념이 줄어들어 자연스레 명상의 효과도 난다. 두 번째로 열이 나는 음식들을 금해야 한다. 고춧가루, 홍삼, 커피, 에너지 드링크 등 힘이 나는 식품들은 가슴에 쌓인 열을 가중 시키니 자제 하는 것이 좋다. 셋째 내가 신경 쓰는 일들은 신경 쓴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맘을 편히 가지는 연습을 하고 집에 있을 때 눈을 감고 가만히 있으면 가슴의 화가 조금씩 내려간다. 시간을 들여 꾸준한 노력을 하면 인체는 보답을 한다. 집에 치자가 있다면 차로 달여 복용을 하면 갱년기 증상에 도움이 된다. 진하게 끓여 먹지 말고 약하게 해서 차처럼 해서 먹는 것이 좋다. 청국장이나 낫또와 같은 발효 콩도 가슴의 막힌 것을 뚫어 갱년기 증상을 완하 시켜줄 수 있으니 몸에 맞는다면 식품으로 자주 먹는 것이 좋다. 음식은 천천히 골고루 꼭꼭 씹어 삼키고 절대 빨리 먹으면 안 된다. 위장이 막히면 갱년기 증상은 더 심해지기 때문에 위장에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좋다. 치료는 교감신경 항진을 줄여주는 쪽으로 처방과 함께 그에 맞는 자율신경조절 약침을 쓸 수 있다. 상부경추를 풀어 주면 머리로 가는 혈액순환과 신경전달이 원활해지므로 추나도 같이 겸해서 해주는 것이 좋다.

2024-12-16

시문학파가 토착방언으로 쓴 시의 성취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만해, 소월, 상화 등 20년대의 대표적인 근대 시인들은 그 시대의 다른 시인들에 비해 특별한 시적 성취를 이룩해 내었다고 평가된다. 그 이유로 시대 의식이 뛰어났다는 점과 토착어 지향의 시어를 사용한 것을 손꼽을 수 있다. 그들의 시작품은 서정성이나 시적 리듬을 살리기 위해 한자어를 피한 대신 토착어 지향을 뚜렷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20년대 말에서 30년대에 걸쳐 우리는 새로운 시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들에게 있어서도 토착어 지향성은 한결 두드러졌고 시의 세련성은 배가되었다. 1930년에 발간된 순수시 동인지 ‘시문학’은 박용철을 비롯하여 김영랑, 정인보, 변영로, 신석정, 이하윤 등이 그 중심적인 작가였다. 그들은 새로운 시어의 연마와 세련된 시상으로 세칭 ‘기교파’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군의 시인들이다. ‘시문학’파로 알려져 있는 시인들에게서 우리는 근대시의 세련미를 갖춘 시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김영랑이나 박용철은 순수한 토착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토속의 울림을 가진 리듬을 확보했다. ‘시문학’의 동인이었던 정지용은 현대시문학사에 매우 눈부신 시의 자취를 남겼다. 1927년에 발표된 정지용의 대표작 ‘향수’는 뛰어난 서정적 시와 노래로서 우리의 눈과 귀에 매우 익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질화로에 제가 식어지면/뷔인 밭에 봄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엷은 졸음에 겨운/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이 시에 나타나는 토착방언은 시인이 의도적으로 지향했던 고향의 그리움을 불러오는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서정적 운율을 유효하게 맞출 수 있는 의도된 방식으로 채택되었다. 시에 등장하는 토착방언은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향에 대한 추억과 신화에 대한 믿음을 환기시켜 준다. 어린 시절 자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모티브가 방언으로 나타나 한결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토착 방언은 본래 민중의 말이다. 또 외래어나 한자어처럼 어른들만의 말이 아니기 때문에 어른과 아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말이다. 방언 시어는 잃어버린 낙원, 곧 고향에 깃들어 있던 말이기 때문에 시의 모티브와 각별한 조화를 이룬다. 고향의 재발견이 토착 방언의 발견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시인의 자기동질성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정지용은 우리 현대시문학사에서 소중하고 견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정지용은 ‘문장’지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1939년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발굴하여 등단시켰다. 이로써 30년대 순수 ‘시문학의 전통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되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壁)’이라는 작품으로 등단한 미당 서정주의 토대를 마련해 준 것도 ‘시문학’ 동인들의 영향이었다. ‘시문학’파의 토착어 세련성에 대한 강력한 반발에서 시적 출발을 했다고 할 수 있는 미당 서정주조차도 처녀 시집 ‘화사집’에서는 가급적 한자어를 배제한 덕분에 한층 더 높은 시적 성취에 도달하였다. 서정주의 ‘자화상’이라는 시를 살펴보자.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외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파격적인 호소력을 가진 ‘자화상’의 첫 부분이 이렇게 토착적 고유어로 조직되어 있음에 반해서 한자어를 의도적으로 무절제하게 사용하고 있는 ‘정오의 언덕에서’, ‘웅계’, ‘문’ 등의 작품은 오히려 시적 설득력을 잃고 있음이 역력해 보인다. 훌륭한 시는 시인의 작가 의식과 함께 고양된 감정의 통합된 산물이다. 시인의 몸에서 울려나오는 시어로 꾸려낸 텍스트가 청각과 시각의 공명을 일으키는 효율적인 수단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시어로서의 방언의 효용성을 확인할 수가 있다. ‘시문학’파에서 ‘청록파’로 이어지는 서정의 시적 물결을 일으킨 일군의 근대 시인들에게 토착적인 방언은 시작(詩作)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재료였다.

2024-12-16

발칸반도 폭력의 뇌관, 한반도와 닮은 침략의 땅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의 땅으로 알려진 발칸반도는 이름만큼 수많은 침략자에 의해 짓밟힌 사연을 품고 있다. 마치 3천 번 이상 이민족 침략에 시달린 한반도와 매우 흡사하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진정 하늘이 내린 경이의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면서 동시에 수많은 신화가 살아 숨 쉬는 발칸반도다. 유럽문화의 모태이자 신들이 지배했던 땅 그리스, 작지만 자존과 감성이 충만한 나라 슬로베니아, 선남선녀들이 에너지를 발산하는 크로아티아, 힘과 저력이 넘치는 잠재적 강국 세르비아, 세 민족이 한 나라로 살아가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자칭 로마인 영광을 간직한 루마니아, 늘 힘이 넘쳐 주체할 수 없었던 불가리아, 이탈리아어로 ‘검은 산’을 불리는 험난한 산악지형의 몬테네그로, 발칸반도에 슬라브족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터전을 닦았던 알바니아, 그리고 필자의 가슴에 감동과 분노를 동시에 심어주었던 코소보도 있다. 그 이면에는 ‘세계의 화약고’란 수식어가 붙은 팽팽한 긴장이 서린 지역이란 사실이 슬프게 했다. 천몇백 년을 이어온 폭력의 과거가 씨앗이 되어 또 다른 폭력의 줄기로 굳건하게 자라고, 끝나지 않는 분쟁의 촉수가 꿈틀거리며, 종교와 민족, 역사를 따라나선 질긴 인연, 문화와 인물이 뒤섞여 도무지 풀리지 않은 엉킨 실타래 같은 반도다. 일곱 개의 국경과 맞댄 채, 여섯의 공화국이, 다섯의 민족으로, 네 개의 언어와, 셋의 종교, 그리고 두 개의 문자로 뒤섞인 채 하나의 국가를 이룩했던 구유고슬라비아 휴면계좌가 폭력의 미련을 유혹하는 땅이다. 길 잃은 역사를 따라 과거를 잊지 말자고 사람 저마다의 가슴에 붉은 기운이 요동치는 기운서린 터다. 한반도 땅 2.5배, 산이 많은 녹색의 땅,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교차점, 고대 로마제국의 첫 침략의 대상이 되었던 땅, 달마티아, 일리리아, 트라키아, 불가리아, 헬라스 등 각각의 지역에 흩어져 살던 터전이다. 더 있다. 불안한 평화를 이어가는 현재 진행형의 분쟁지역, 너무 많은 억척의 사연을 생산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품은 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제국의 포화를 고스란히 견딘 질긴 민족들이 뒤엉킨 한을 품은 땅,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 작은 산줄기 좁은 물줄기에도 슬픔과 기쁨, 환희와 아픔이 교차하는 애환의 터전, 건물 외벽의 포탄 자국이 가슴에 납덩어리처럼 붙어버린 현실, 폭력을 좋아하진 않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민족, 순진한 사람을 선동해 민족이란 이름으로 살육을 정당화하게 만든 영웅이 누워있는 땅, 그런 까닭에 그 누구도 쉬이 해결의 열쇠를 쥘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이 뿐일까? 가톨릭과 이슬람 종교분쟁의 뇌관이 여전히 작동하는 땅, 나락으로 떨어진 인격이 애국이란 이름으로 재포장 되는 곳, 이웃과의 갈등은 물론 같은 나라임에도 성격을 달리해 불운한 동거를 이어가는 이상한 나라가 있는 반도, 나의 신은 절대자요, 너의 신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정당한 사회, 복수가 정의와 미덕으로 포장된 나라,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절대자의 말을 당당하게 무시하면서도 천국에 가려는 인간이 북적대는 곳, 그래도 희망이란 기름으로 번들번들 칠한 십자가가 도서관보다 많은 세상, 비장감이 억눌러 슬프면서 비통함을 상대방 응징의 꿈으로 대체시킨 사람이 살아가는 땅이다. 동방 페르시아제국의 질긴 욕망으로 인해 입은 상처, 알렉산드로스로 시작되는 폭력 미화는 비잔티움제국으로 이어지고, 로마의 땅이 되었다가, 같은 기독교도인 십자군의 약탈, 질풍노도 훈족의 발칸 유린에 이어 이슬람 제국의 침탈, 몽골군 파죽지세의 잔혹사, 전대미문 사마르칸트 티무르의 이유 없는 살육전, 노르만족의 민족이동에는 필연적으로 따르는 폭력, 나폴레옹도 이 대열에 빠질 수 없다.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같은 하늘 아래서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원수로 돌변하는 상황은 이들 표현대로 진정 신의 뜻이었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대세르비아주의, 대슬라브주의,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소수와 인간의 욕망이 부추긴 폭거는 정의와 부정의가 아니라 피아구분조차 할 수 없었다. 20세기에 일어난 인종청소, 민족주의 이름으로 행해진 살육의 드라마는 21세기에 와서도 그 징후는 잠들 기미조차 없다. “집에 불이 나기 전에 굴뚝을 수리하고 아궁이를 고친 사람의 공로는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지만, 불 난 뒤에 수염을 거슬려가며 옷섶을 태우면서 뛰어다닌 사람의 공로만을 널리 인정하지 말라” 묵자의 말이다. 전쟁으로 공을 세운 사람만 떠받들지 말고, 평화의 시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도 가슴에 새기란 뜻이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12-16

연어 이야기

매년 10월에서 11월이면 북태평양을 회유하던 연어 떼가 산란을 위해 강원도 양양 남대천, 삼척 오십천 등으로 돌아온다. 10월 1일부터 10일까지 단 열흘간 내수면에서의 연어 포획이 허용되는데, 이 기간 동안 남대천에서는 연어를 만나려는 플라이낚시인들과 루어낚시인들이 강물에 몸을 담근 채 길게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인터넷에 올라온 연어 낚시 사진을 보면서 연어를 다룬 두 문학 작품을 떠올렸다. 고형렬의 에세이 ‘은빛 물고기’와 안도현의 ‘연어‘가 그것이다. 두 작품 모두 시인이 쓴 산문으로 연어의 생애를 소재로 삼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연어는 모천회귀(母川回歸) 한다. 하천에서 부화한 물고기가 바다로 가서 성어로 자란 다음 산란을 하러 자기가 태어난 강으로 회귀하는 현상을 말한다. 모천(母川)은 말 그대로 ‘어머니 강’이라는 뜻이다. 연어는 먼 바다로 떠났다가 자신이 태어난 강으로 돌아와서 산란 후 죽는다. 남대천, 오십천뿐만 아니라 최근엔 울산 태화강, 낙동강 하구에서도 연어가 발견됐는데, 낙동강에는 30여년 만에 연어가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은빛 물고기’는 시인인 저자가 “남대천에 연어가 돌아왔다”는 신문 기사 한 토막을 읽고는 10년 넘게 연어의 일생을 추적하며 쓴 장편 산문이다. 장편 산문이라는 겉 형식은 물론 한 편의 문학작품 안에 픽션과 논픽션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시적 은유와 잠언, 소설적 서사, 자전적 에세이, 자연과학적 사실이 공존하는 속 구조는 무척 보기 드문 것이다. 강원도 양양에서부터 캄차카반도, 아무르 강, 오호츠크 해, 베링 해로 이어지는 대자연에 대한 시적 묘사, 탄생과 성장, 죽음 등 인간의 실존적 고뇌에 대한 깊은 성찰의 언어는 우리말이 지닌 아름다움의 놀라운 진경을 보여준다. ‘연어‘ 역시 시인인 저자가 쓴 작품으로, 한 낚시전문잡지에 연어에 대한 글을 기고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집필한 소설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부제가 붙었는데, ‘어른’과 ‘동화’가 서로 충돌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동화적 내용을 지닌 소설로 보는 편이 마땅하다. 연어를 의인화하여 사랑, 연민, 외로움, 슬픔, 자기존재의 주체성 모색 등 인간 보편의 감정과 존재론적 성찰을 담아낸 ’연어‘는 1996년 초판 발행 후 지금껏 무려 100만부가 팔린 스테디셀러다. 시적인 문체와 연어의 생태에 기초한 간결하면서도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로 대중 독자의 사랑을 받았다. 지난 2019년, 러시아 아무르강으로 ‘타이멘’이라는 물고기를 잡으러 2주 동안 낚시를 다녀왔다. 하바롭스크에서 차로 비포장도로를 10시간, 보트로 물길을 2시간 달려 도착한 아무르강 정글에서 러시아 낚시꾼들과 생활하면서 ‘지구상 모든 연어의 아버지’라는, 현지인들에게 신령한 물고기로 여겨지는 타이멘 낚시에 도전했고, 성공했다. 내 생애 첫 번째 타이멘은 1m 10cm였는데, 그 녀석을 품에 안고서는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렸다. 나를 만나기 위해 이 친구가 강물처럼 노을처럼 수천만 년을 헤엄쳐 왔다는 생각이 들어 뭉클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때 2주간 전화, 인터넷 등 문명과 완전히 차단된 정글에서 지낸 시간이 마치 한 평생 같았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문명 세계에서 2주는 그저 찰나에 불과했다. 내가 살던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고, 거짓말처럼 아무 일도 없고, 가족들은 전화를 심드렁하게 받고, 공백을 염려한 일터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고…. 내게는 까마득하고 느리게만 흐르던 시간이 문명 세계에서는 쏜살 같이 흐른 것이다. 시간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이고, 모험의 세계와 일상의 세계에는 서로 다른 중력이 작용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 나는 낚시를 다녀온 게 아니라 아무르강이라는 영원의 풍경, 저 너머의 한 세상을 살다 왔구나’ 낚시를 다녀와서는 잠꼬대 같은 혼잣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연어의 생태를 다룬 문학 작품이 또 나온다면 저자는 아마 내가 될 것이다. 치어일 때 자신이 태어난 강을 떠나 드넓은 대양에서 성어로 성장하여 일생의 대부분을 보낸 뒤 산란을 위해 모천으로 돌아오는 연어의 생태에 관해서는 아직도 다 밝혀지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 많다. 미지란 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므로, 연어의 탄생부터 이동, 그리고 모천회귀와 산란, 죽음으로 이어지는 신비한 생태적 습성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훌륭한 문학적 소재이기 때문이다.

2024-12-16

어둠을 밝히는 사람들

나약한 인간으로 놓여 무엇을 읽고 쓰고... /언스플래쉬 고통은 묵히면 묵힐수록 그 크기가 배가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먹기 싫은 알약을 억지로 삼키는 것처럼 몸과 마음 모두가 불편한 그 감각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나를 지배했고 그것이 결국 죄책감이란 이름을 가진 불편함이란 걸 너무나 잘 알았다. 문제를 인식하고 정면으로 돌파하는 일은 참 어렵다. 마음이 불편하고 신경을 쓰는 것이 괴롭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 남는 일들이 혹여나 후회가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밤마다 눈을 감고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애썼으나 쉽지 않았다. 무언가 써야만 할 것 같은 데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을 때 나의 연약함이 드러났고 그 연약함 속에서 무력하게 몸을 묻으며 나날이 무언가 잘못되고 있단 감각을 도무지 지울 수 없었다. 씻겨지지 않는 오랜 얼룩, 피부 깊숙이 자리 잡은 점처럼 고통에도 무뎌지지만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결심은 선다. 그 근처를 배회하고 있을 때쯤 뒷목이 뻐근해지기 시작하더니 일종의 신호처럼 확고한 결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 길로 버스를 탔고 버스는 중간에 서울대교에 진입하진 못했지만 비교적 사람이 적은 한적한 곳에 나를 내려주었다. 이 길로 쭉 가면 서울대교를 건널 수 있을 것이란 버스 기사의 말을 되뇌이며 이미 대교를 빠져나오는 수많은 인파를 거슬러 나는 여의도로 향했다. 그곳은 축제 분위기였다. 깃발이 나부끼고 형형색색의 조명은 어둠을 밝히며 빠르게 흔들렸다. 누군가는 아이돌 응원봉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고, 흘러나오는 최신 유행곡에 맞추어 춤을 추는 이들도 있었다. 깃발을 흔드는 사람,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 셀카를 찍는 가족, 질서 유지하는 사람들, 쓰레기를 아무렇지 않게 땅에 버리는 사람,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 쓰레기를 주워 한 곳에 차곡차곡 모으는 사람들 등. 인간이라는 모습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무리 속에서 나는 얼어붙은 몸과 가빠지는 호흡을 붙잡으려 애썼고, 그때 불현 듯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소감을 떠올렸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 이유,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져온 질문이자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그 질문과 수많은 의미들. 나는 어떤 언어를 쓰고 상상하며 세계와 연결되고 있는지. 나아가 나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떤 나약한 인간으로 놓여 무엇을 읽고 쓰고 있는지. 가파르게 오르던 호흡을 잠잠히 누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8살 때 처마 밑에 비를 피하며 다른 사람을 보았고 또 다른 나를 보며 연결됨을 느꼈다면, 근래의 나는 그 환함 속에서 나와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고, 같은 노래를 들으며 연결되고 있음을 느꼈다. 이어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반대되는 위치에 서 있다는 그녀의 음성을 거듭 떠올리며 무엇을 위해 읽고 어떤 것에 시선을 맞추어야 하는지 미지의 길을 밝히는 작은 호롱불이 켜지는 장면을 포착했다.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돌아선 길, 수많은 인파 탓에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이 꽉 막혀 빠르게 걸을 수 없었다, 아주 천천히 앞사람의 보폭에 맞추어 걷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릿하게 집으로 향해 걸어왔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집으로 돌아와 깨끗한 물로 씻고 훈훈한 공기로 몸을 덥히며, 내 등 뒤를 밝히던 수많은 조명들을 떠올렸다. 뒤에서 길을 밝히던 색색의 응원봉들. 누군가가 뒤따라오며 그 응원봉을 흔들었는진 알 순 없지만, 불명확했던 모든 불안과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들이 선명해지는 동시에 조금씩 소멸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이었다. 생각을 마치자 근래 극도로 높아져갔던 초조함을 잠재울 수 있었다. 18살, 점심시간마다 도서관 문학 코너 책장에 숨던 그때를 기억한다. 활자 속에 있으면 현재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물러가는 것 같아 계속해서 손이 가는 대로 책 속에 고개를 묻던 그때. 아무도 나를 알아채지 못하고 스쳐지나가던 그 때에, 책장 맨 아래에 꽂혀 있던 소년이 온다를 기억한다. 그때의 나를 거울로 자세히 살피지 않아 어떤 모습인진 영영 알 순 없으나 환희와 열망과 결이 다른 슬픔에 사로잡혔던 감각은 생생히 기억한다. 한 사람이 가진 문을 두드려 그 속을 기어코 들어가 사건과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내가 문학을 택한 이유인 동시에 계속해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음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금 떠올려보는 감각이었다.

2024-12-16

잘못된 한 사람을 따라가면 미래가 없다

김진국 고문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14일 국회를 통과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보수 대통령이 잇달아 탄핵 심판을 받는다. 보수 유권자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다. 믿고 뽑아 놓았더니 보수 세력을 파멸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러다 차기는커녕 차차기도 기대를 접어야 할 판이다. 박 전 대통령은 가까운 사람을 너무 믿은 탓이다. 직접 돈을 착복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본인이 자초했다. 비상계엄 상황을 만들어 선포했다. 법에 정해진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계엄을 해제하지 못하도록 국회를 폐쇄하려 했다. 국회의원을 끌어내고, 정치인들을 감금하라고 지시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조국 전 의원은 12일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을 확정받았다. 가만히 있었으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사법 리스크도 심각한 상태다. 선거법 위반 사건 1심에서는 10년 동안 공직선거에 나서지 못하는 ‘1년 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이 줄줄이 이어진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이라는 엉뚱한 일을 벌여 모든 걸 망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보수인사도 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미국 검찰은 트럼프에 대한 기소를 모두 취소했다. 이런 큰일을 저질러놓고도 반성하지 않는다. 평균적인 국민 정서와는 공감하지 못한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윤 대통령 지지도는 11%였다. 85%는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보수 세력의 기반인 대구·경북만 놓고 봐도 지지도가 16%에 불과하다. 비상계엄이 내란이라는 의견이 71%, 탄핵하라는 응답도 75%였다. 대구·경북에서도 62%가 탄핵에 찬성했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12일 담화에서 하야(下野)는 없다며, 차라리 탄핵하라고 큰소리쳤다. 그러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국민 여러분과 함께 싸우겠다”라고 말했다. 국민의 85%가 잘못한다고 답하는데, 탄핵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리라고 요구하는데, 누구와 싸우겠다는 건가. 윤 대통령은 14일 저녁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뒤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고도 소송으로 이기려는 생각이 기가 막힌다. 개인적인 망상을 위해 보수 세력을 궤멸시키려는 꼴이다. 그런데도 이에 동조하고, 부추기는 정치인들은 또 뭔가. 목적이 옳으면 어떤 수단을 써도 용납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이 많다. 믿지 않아도 그렇게 합리화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참모였던 엄창록 씨를 모델로 한 ‘킹메이커’란 영화가 그런 내용이다. 잘못된 수단을 정당화할 만큼 대단한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가. 자기가 권력을 쥐는 것 아닌가. 윤 대통령은 반헌법적 친위 쿠데타로 무엇을 하려 했나. 선거를 하면 국민이 표를 줬을까. 선거가 없는 정치체제를 국민이 용납할까. 철부지 같은 망상이다. 독수독과(毒樹毒果) 이론이 있다. 판사들은 확실한 증거라도 그것을 얻는 과정이 잘못됐으면 인정하지 않는다. 목적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민주주의도 그렇다. 번거롭고 불편해도 민주적 절차를 지키지 않으면 쉽게 부서진다. 법조용어에 ‘별건(別件)수사’라는 말도 있다. 혐의를 입증하기 어려우면 수사 과정에서 알게 된 다른 혐의를 이용해 피의자를 압박하는 수사방식이다.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합리화하는 논리가 그런 식이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치’를 세우려 했다고 주장했다. 자유민주주의야말로 법을 존중해야 한다. 상대를 인정하고, 참고, 대화해야 한다. 그는 탄핵소추 뒤 담화에서 “숙의와 배려의 정치로 바뀌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헛웃음이 났다. 그가 취임 초, 아니 그 뒤 어느 한순간이라도 ‘숙의와 배려의 정치’를 했다면 사태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다. 그는 야당 정치인은 물론 여당 정치인도 피의자 보듯 했다.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한 사람에게 충성하고, 그 외 인물을 논 속의 피 취급해 모두 뽑아버리면 미래가 없다. 윤 대통령이 갑자기 보수정당 후보가 된 것은 후보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수 세력은 또 그 전철을 밟고 있다. 잘못된 길을 가는 한 사람에게 끌려다니면 미래가 없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12-15

‘이성을 잃은 권력’의 비극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한밤중에 느닷없이 선포된 비상계엄은 ‘이성을 잃은 권력’의 자폭이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역설한 바로 그 대통령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정치적 실패와 각종 의혹을 돌파하기 위한 전술이었겠지만, 어리석은 오판으로 자기무덤을 팠다. 제왕적 권력이 이성을 잃으면 자신은 물론, 국가적 불행을 초래한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범죄자 집단의 소굴”로 규정하고 의원들을 체포하려 했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으로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것이나 다름없다. ‘자해공갈소동’을 지켜보아야 했던 국민들의 심경은 참담했다. 국무회의에서 장관들의 반대와 우려도 무시하고 밀어붙였다니 기가 막힌다. 오죽하면 여당대표까지 나서서 계엄을 막겠다고 국회로 뛰어갔겠는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됨으로써 사실상 정치생명이 끝난 대통령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지만, 그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문제다. 야당은 이재명의 사법리스크를 돌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여 여당에 대한 정치공세를 강화하는 한편, 헌법재판소의 최종판결에 대비하여 집권을 위한 정치적 환경조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반면 수세에 몰린 여당은 이재명의 2심 및 대법원 판결이 조속히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을 뿐, 대통령의 직무정지에 따른 대행체제에서 국정을 효율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처럼 여야는 서로 다른 정치셈법으로 탄핵정국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하지만,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한 그 어떠한 술수도 성공할 수 없다. 특히 본의 아니게 죄인이 되어버린 여당은 정치적 위기일수록 꼼수를 버리고 정도(正道)를 가야 민심을 얻고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향후 여당의 운명은 민심을 따르느냐 아니면 탄핵이 소추된 대통령을 따르느냐에 달려 있다. 비상계엄으로 내란혐의를 받아 수사선상에 있는 대통령과 결별하지 않는다면 분노한 민심이 용서하겠는가. 어려운 때일수록 ‘생즉사(生卽死)’이고 ‘사즉생(死卽生)’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럼에도 벼랑 끝에 서 있는 여당이 반성은커녕 친윤과 친한,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싸우고 있으니 어이가 없다. 대권은 이미 물 건너갔으니 당권이나 차지하고 금배지나 한 번 더 달아보겠다는 속셈인가. 성난 민심을 겸허히 받들 생각은 하지 않고 권력에 줄서서 잔머리 굴리면 보수는 궤멸이다. 대통령이 이성을 잃고 비상계엄을 획책하는 동안 아무것도 모른 체 권력만 쫓아다닌 허수아비들이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다투는 꼴이 참으로 한심하다. 박근혜의 탄핵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분당(分黨)은 공멸’이라는 사실을 벌써 잊었다는 말인가. 물론 정치공세의 고삐를 쥔 야당의 책임도 매우 무겁다. 여야 간 극한의 정쟁이 오늘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사실은 야당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여당의 불행이 야당의 행복’이 될 수는 없으며, 윤석열에 대한 분노가 이재명에 대한 면죄부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집행권력의 독선이 ‘비상계엄이라는 괴물’을 낳았듯이, 입법권력의 힘자랑이 탄핵정국에서도 계속되면 ‘무정부상태라는 괴물’을 낳게 될 것이다. 책임 있는 야당이라면 국가위기를 정략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되며 민생 안정에 협력해야 한다. 권력은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하고 위험한 괴물이다. 괴물이 된 권력과 싸우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괴물이 된다. 정치인이 권력정치에서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일상화되어야 한다.

2024-12-15

고전에 답이 있다!

▲ 김규종경북대 교수·인문대학 살았다.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도, 생각하고 글 쓰고 사람 만나는 일도 허청허청하기만 했다.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물음만 얼굴을 내미는 것이다. “이게 뭐지?!” 2025년을 코앞에 둔 시점에 터져 나온 ‘비상계엄’이 내 삶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경북매일신문에 연재하는 아주 짧은 글 ‘파안재에서’를 서둘러 쓰고, ‘청도 인문학’ 강의자료를 블로그에 올린 게 정신 활동의 전모(全貌)다. 문자 그대로 생물적 대사(代謝)활동을 했을 뿐, 살아있는 인간으로 존재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피폐한 열이틀의 시간이 지나간다. 한강 문학에 관한 스웨덴 한림원 종신회원 엘렌 맛손의 강평을 들은 것이 고작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하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그것을 불가 (佛家)에서 가르치는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서 찾는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에서 발원하는 세 가지 극독(劇毒)이 사태의 핵심에 자리한다. 생명 활동 과정에서 존재가 대면하는 탐진치 삼독을 숙고하지 않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처참한 지경에 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탐욕은 무엇인가를 향한 억제할 수 없는 지극한 갈망에 뿌리를 대고 있다. 탐욕은 정신적·물질적·영적(靈的)인 영역에 모두 적용된다. 억제할 수 없는 지극한 탐욕은 분노로 전화(轉化)된다. 얻고자 하는 바를 관철하지 못하면, 인간은 분노의 노예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은 건강한 판단력 상실에 따른 추악한 어리석음으로 귀결(歸結)된다.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기 위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말에 나는 경악했다. 세계 전역에 문화와 문학과 예술의 첨병으로 ‘한류’를 전파하는 21세기 나의 조국에 종북세력이 있는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과 집단은 ‘반국가세력’인가?! 권력자의 수사(修辭)와 명분이 아무리 엄중해도 ‘일거에 척결’하겠다는 발상은 또 얼마나 반민주적인가?! 그와 그들은 거기 멈추지 않았다. 계엄 사령관이 발표한 ‘포고령’의 처단한다는 단어는 너무도 끔찍하게 다가온다. 본업에 복귀하지 않는 의료인과 포고령 위반자를 계엄법 제14조에 의하여 처단하겠다는 조항은 얼마나 악랄한가?!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에 근거하여 위반자들을 처단하겠다는 악마 같은 ‘포고령’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 권력자와 그에 기생(寄生)한 부역자들의 행악질은 낱낱이 밝혀지겠지만, 그것은 1980년 5월 17일 희대(稀代)의 학살자 전두환이 내건 비상계엄과 전혀 다르지 않다. 광주 시민들의 민주적인 저항을 무한폭력으로 짓밟은 그들의 잔인성을 우리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 확인한다. 왜 그들은 멈추지 않았을까?! 그것은 그들의 부패·무능·타락·패거리주의에 기초한다. 노자(老子)는 “만족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 오래 갈 수 있다”고 했다. 최소한의 교양과 독서도 없는 자의 무지와 부패, 무능과 타락이 탄핵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번 사태가 우리 어린것들의 평화롭고 행복한 미래를 위한 반면교사가 되었으면 한다.

2024-12-15

尹 대통령 탄핵…조기대선 가시화됐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지난주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재적 의원 300명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효 8표로 가결됐다. 탄핵소추안에는 ‘국민주권주의와 권력분립의 원칙 등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비상계엄’이 탄핵 사유로 적시됐다. 윤 대통령 직무는 정지됐고, 한덕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으로서 권한을 행사한다. 만약 한 총리가 야당의 탄핵소추로 직무가 정지될 땐 최상목 경제부총리가 대통령·국무총리 권한대행을 맡는다. 정치권 시선은 이제 차기 대권 구도로 쏠리게 됐다. 조기대선이 사실상 시작된 것이다. 만약 헌법재판소가 윤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게 되면, 60일 안에 대선이 치러진다. 헌재 결정 시기에 따라 이르면 내년 4월, 늦어도 내년 7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헌재는 오늘(16일) 첫 재판관 회의를 열고 사건처리 일정을 논의한다. 최악의 위기에 처한 여당에서는 한동훈 대표가 유력 대권주자로 꼽힌다. 최근 발표된 대권주자 지지도 조사에서 한 대표는 줄곧 1위를 달렸다. 주류 보수진영 주자로는 홍준표 대구시장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꼽힌다. 안철수 의원과 유승민 전 의원도 중도층 외연 확장을 내세우며 도전할 가능성이 있다. 야권에서는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독주 체제가 굳어진 분위기다. 그러나 이 대표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2심이 대선 선거일 전 유죄 판결로 나오게 되면, 이 대표 독주 체제가 붕괴할 수 있다. 김동연 경기지사와 김부겸 전 국무총리,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대안으로 거론된다. 정치권의 당면과제는 극도로 혼란해진 정국을 수습하는 것이다. 대권주자들이 앞장서서 여야협치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국가안보와 금융시장 안정, 민생위기 극복이 우선 급하다. 한미동맹 등 주요국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특히 국회권력을 장악한 민주당이 정부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하며 수권능력을 보여야 한다.

2024-12-15

비상시국, 지방정부도 民生 안정에 집중을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면서 한덕수 권한 대행체제가 시작됐다. 한 총리는 “어려운 상황에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심경을 밝히고 “이런 때일수록 국민이 불안해하거나 사회질서가 어지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이와 관련해 각 부처 공직자들에 대해서도 “제자리를 지켜 맡은 바 소임을 다할 것”을 당부했다. 한 총리 권한대행체제로 돌입하면서 국가는 사실상 비상상태다. 한 총리는 국가 안위를 보호하고 외교, 국방,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국민의 안전과 민생을 보살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수행해야 한다. 총리대행 체제가 된다고 국민이 불안해하거나 경제가 흔들리는 일 등은 없어야 한다. 여기에는 국민과 공직사회도 같은 마음으로 동참해 이를 바탕으로 국가적 위기상황을 돌파해 나가야 한다. 대구시와 경북도 등 각급 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다. 지방정부 위치에서 위기극복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중앙정부에 비해 비록 권한은 적지만 지역단위별로 할 일은 많이 있다.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권한 안에서 지역주민의 삶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빈틈없이 행정업무를 챙겨야 한다. 특히 국가적 혼란과 행정공백 등을 이유로 저소득 서민층의 생활이 어려움에 처하는 일이 없도록 잘 살펴야 한다. 또 국가적 혼란을 틈타 범죄가 날뛰거나 사회적 비리가 고개를 내미는 일도 없도록 사법기관과 협의해 사전에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 지역의 경제가 원활히 돌아갈 수 있도록 예산은 서둘러 집행하고, 경제계의 어려움을 듣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주요 지역현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피고 대응도 신속히 해나가야 한다. 특히 내년도 11월 개최될 APEC 행사준비와 관련한 예산 확보, 그리고 TK 신공항 관련법 개정과 행정통합 등 굵직한 지역현안이 국가적 관심 밖으로 밀려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국가적 위기일수록 지방자치단체가 지방의 안정을 도모하는 역량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방자치제 실시에 부합하는 일이자 더 많은 자치권한을 획득하는 길이기도 하다.

2024-12-15

미국식 네포티즘

우정구 논설위원 네포티즘(Nepotism)은 권력자가 가족이나 친척에게 관직이나 지위 등을 주는 것을 이르는 족벌주의 정치를 이르는 말이다. 조카(nephew)를 뜻하는 라틴어 네포스(nepos)에서 나온 말. 15∼16세기 교황들이 자신의 사생아를 조카로 위장시켜 특혜를 준 관행에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최근 재능도 없으면서 스타 부모의 후광으로 인기와 돈을 버는 스타 부부 2세를 두고 할리우드에서는 ‘네포베이비’라는 비아냥이 유행한다고 한다. 미국은 우리와 달리 패밀리 정치가 공공연하게 이뤄지나 언론이나 국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존 F. 케네디가는 영향력 있는 정치 가문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그의 재임 시 동생 로버트 케네디를 35세 약관의 나이에 법무부 장관에 임명해 논란을 일으켰다. 그것이 계기가 돼 네포티즘 금지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부부가 잇따라 대선후보에 나왔던 클린턴 가문이나 부자가 대통령에 오른 부시 가문 등을 보면 미국의 네포티즘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도 네포티즘 논란에 자유롭지 않다. 그는 1기 집권 때 큰딸 이방카를 백악관 고문으로 임명한 바 있다. 지난 10일에는 장남 트럼프 주니어의 약혼자 킴벌리 길포일을 그리스 주재 미국대사로 지명했다. 그는 이보다 앞서 장녀 이방카의 시아버지를 프랑스 대사로, 둘째 딸의 시아버지는 아랍중동 문제담당 고문으로 지명했다. 외신에 의하면 트럼프 2기 인선의 특징으로 충성파 기용을 들었다. 트럼프 당선인이 특혜 논란에도 믿을 수 있는 패밀리 정치를 선택한 것도 충성심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 사회와 달리 미국사회에서 용인되는 네포티즘이 온전할 것인지는 더 지켜볼 대목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2-15

심상사성(心想事成)의 기적, 명량해전

장광일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청룡의 해’ 정기를 받은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월 중순이다. 필자는 올해를 뒤돌아보며 내년 ‘청사(靑蛇)의 해’를 맞아 가족과 함께 전라도로 여행을 떠났다. 간 곳은 여수부터 진도까지 남쪽 지역이며, 주로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이번 여행은 장군의 리더십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고, 그의 지혜도 배우며 힐링도 할 수 있는 좋은 추억이었다. 특히 진도 하면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명량해전이 있었던 곳이다. 이 해전은 1597년 9월 16일 정유재란 초기에 있었던 해전으로 이순신 장군 휘하 조선 수군 12척으로 일본 수군 333척을 물리친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최고의 해전이다. 적장의 간계로 장군을 투옥한 선조, 장군을 처형하려는 조정 대신들, 끝없이 장군을 괴롭히는 원균, 어머니의 별세 소식, 5개월간의 수감생활로 온전치 못한 몸, 칠전량 전투로 궤멸한 상태의 조선군과 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장수들, 1%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최악의 조건을 딛고 대승을 거둔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정리해 본다. 어란포에서 한 어부가 왜적이 왔다는 헛소문을 퍼트리자 목을 베어 효시함으로 유언비어의 차단과 민심안정을 도모한 일, 명량해전 전 어란포 해전(8월 28일), 벽파진 해전(9월 7일)의 승리로 분위기 반전은 물론 장졸과의 신뢰를 회복한 일, 울돌목의 조수(潮水)의 흐름을 관찰하여 울돌목을 마주하는 최적의 지리(地利) 선정하고, 최선의 썰물 시간인 천시(天時)를 이용한 일,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한 사람이 길목을 잘 지키면 천 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일부강경 족구천부), 라는 말로 설득하여 전군을 통합한 일, 모두가 두려워 전선에서 2마장(약 800m) 밖으로 물러났을 때, 그의 배는 홀로 앞으로 돌진하여 현자와 총통으로 싸웠던 장군의 솔선수범이 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국의 영웅 호레이쇼 넬슨은 “평생을 두고 경모(敬慕)하는 이는 서양에서는 네덜란드의 명장 미힐 더라위터르이며, 동양에서는 조선의 명장 이순신이다, 두 장수 중 갑으로 추천한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이순신 장군이다. 인격이나 창의적 천재성이나 도저히 그를 필적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필자는 그곳에서 그를 기리며 ‘심상사성’이란 말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었다. 이 말을 풀어 쓰면 ‘마음에 생각한 것이 이루어진다.’라는 뜻으로 ‘간절히 바라고 생각하는 일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마음속으로 깊이 새기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나아간다면 어느 순간 꿈이 현실이 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최악의 전투 조건에서 “마음에 간절히 원하고 바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심상사성의 절박함으로 전쟁을 기적처럼 대승으로 이끈 장군에게서, 기업도 이 말을 새겨, 갈수록 어려운 여건이지만, 다시 한번 도전적인 경영목표를 세우고, 힘든 과정을 이겨내어 원하는 바를 이루는 을사년이 되길 기대해 본다.

2024-12-15

천명을 유지하는 법

유영희 작가 지난주에 동양의 고전 ‘대학’ 15주 강의가 끝났다. ‘대학’이 편찬된 시기는 적어도 한나라 무제 때라고 하니 2천 년 동안 살아남은 책이라 쉽게 깎아내릴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대학’은 주자가 3강령, 8조목으로 체계화한 이래로 더 유명해졌고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 사회에서 우리 문화에 깊이 뿌리박힌 데다 최근까지 중등 교육기관에서도 가르친 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3강령 8조목을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는 그 가치가 퇴색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참여한 수강생들은 ‘대학’을 처음 읽는다면서도 마지막에 가서는 이구동성으로 ‘대학’의 정치철학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발견하며 대학의 메시지에 감동했다. 그중에서 가장 수강생들의 마음을 끈 것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와 ‘천명은 영원하지 않다’라는 두 문장이었다. ‘자신를 속이지 말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진실해지라는 말인데, 말은 쉬워도 자신의 진실함을 발견하고 인정하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은 아마도 자신에게 진실할 줄을 알고 정성을 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신서로도 유용하지만 자기계발서로도 손색이 없다. ‘천명은 영원하지 않다’는 문장은 요즘 상황과 맞물려 깊은 울림을 준 것 같다. 중국 고대 흥성했던 은나라의 예를 들며, 처음 탕왕이 은나라를 세울 때는 백성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인데, 주왕의 폭정으로 백성의 마음을 잃게 되자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무왕이 백성의 마음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천명은 어느 왕조에게 영원히 주어지지 않고 오직 백성에게 부모노릇을 제대로 했을 때만 주어진다고 강조한다. 통치자를 부모에 비유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하는 논리로 생각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지금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사리사욕과 당리당략에만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의 계엄령 발동이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당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당이 무너질까봐 반대한다고 대놓고 말하고 있다. 물론, 지금의 야당도 이런 오류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 자신의 권력이 10년은 간다고 호언장담했던 인물도 있었다. 그런 오만으로 결국 정권이 바뀌었으니, 민심은 무섭도록 옳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는 국민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지만, 국민의 마음을 저버리면 천명은 언제든지 거두어진다. 이번 시민의 대통령 탄핵 시위는 천명이 거두어지는 과정이었다. 게다가 이번 시위는 놀랍도록 평화적이고 경쾌하게 진행되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상’ 같은 k-팝이 흘러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예전에 화염병을 던지는 식의 비장하고 공격적인 시위 문화는 다 극복한 것만 같다. 잠시 혼란은 두 걸음을 내딛기 위한 한 걸음 후퇴일 뿐이다. 민심이 바로 천명이다. 이런 시민이 있는 한, 우리 사회는 건강하게 발전해갈 것이다.

2024-12-15

슬픔의 광야에서

이희정 시인 내가 화나고 성나는 날은 누군가 내 발등을 질겅질겅밟습니다 내가 위로받고 싶고 등을 기대고 싶은 날은 누군가 내 오른뺨과 왼뺨을 딱딱 때립니다 내가 지치고 곤고하고 쓸쓸한 날은 지난날 분별없이 뿌린 말의 씨앗, 정의 씨앗들이 크고 작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힙니다 오 하느님, 말을 제대로 건사하길 정을 제대로 바로잡기란 철없는 마흔에 얼마나 무거운 멍에인지요 나는 내 마음에 포르말린을 뿌릴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따뜻한 피에 옥시풀을 섞을 수는 없으므로 나는 내 오관에 유한락스를 풀어 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는 더욱 없으므로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부처님이 될 수 없는 내 사지에 돌을 눌러둘 수는 없습니다 ―고정희 ‘무너지는 것들 옆에서’ 전문 (‘아름다운 사람 하나’, 문학동네) 역사는 반복되기도 한다. 우리는‘역사를’ 배울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배워야 한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반복될 때 생겨나는 것은 관계의 성질이다. 그러니까 복간본으로 만나는 고정희 시인의 숫자는 기수가 아니라 서수다. 반복되는 대비항들은 서로 대등하지 않다. 처음의 선행이 없었다면 복간은 개진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복간이 부가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고정희 시인에게서 중요한 것은 반복성인지 모른다. 반복 속에는 그리움의 내성이 있다. 이 시집의 서문에서 그리움의 마음을‘I Miss You’라고 한다면‘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라는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을 얹은 점은 이채롭다. 그렇다. 그녀에게 시는, 그 깎아지른 벼랑과 같은 생은, 무너지는 것들에 대해 혼신의 영혼을 바친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1948년 해남에서 태어나 1991년 지리산 등반 중 실족사로 43년의 생을 마감한 고정희 시인을 하나의 언어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민중 의식, 그리고 장르의 실험, 기독교 의식 등 다양한 관점에서 시인의 장력을 가늠할 수 있다. 1980년대 시인으로 수렴되는 화자는 자신의 40대를 바라보고 있다. 더욱이 “화나고 성나는 날 / 위로받고 기대고 싶은 날 / 질겅질겅 밟히고 뺨을 딱딱 맞”는 화자는 오른뺨에서 왼뺨을 내주고 화를 내는 대신 발등을 내어준다. 시인의 종교적 죄의식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여기에 이유 같은 것은 틈입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중요한 질문은 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는 정의로운가 하는 것이다. 해서 이 시에서 정의는 성서 구절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언어로 묘사된다. 시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나누는 분기점은 “포르말린”“옥시풀”“유한락스”라는 화학제의 기표일 것이다. 상처받은 마음을 표백제로 위장해 지워버리겠다는 위악보다는 “자신의 따뜻한 피”와“용량이 큰 미련”과 “정”을 헹굴 수 없다는 기의가 승하다는 사실이다. 시인에게 이 지점은 중요한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고정희의 시‘무너지는 것들 옆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로소 개진되는 이야기다. 그 선택은 최선이 아닌 최악의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건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동적인 삶을 살아온 여성이라는 화자가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자신의 분명한 마음을 드러내 보이면서 주체적으로 해낸 최고의 선택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 화자가 자기 자신이 되는 경험 속으로 무거운 멍에를 딛고 걸음을 촉진해 보는 것이다. 인생의 거친 광야에서 “내 사지에 돌을 눌러 둘 수는 없”을 테니까. “어눌한 상처들이 덧난다 해도 / 덧난 상처들로 슬픔의 광야에 이른다 해도”

2024-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