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청소년, 지역의 미래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UN은 오는 12일에 맞는 `국제 청소년의 날(International Youth Day 2017)`의 주제를 `평화를 만드는 청소년(Youth Building Peace)`으로 정하고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행사와 이벤트를 통하여 청소년들이 세계평화와 갈등해소에 주역이 될 것임을 확인하고 다짐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하나 밖에 없는 지구를 물려받아 평화와 안정을 구현해 가는 일에 청소년들의 관심과 이해, 그리고 각오와 다짐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를 위해서도 이 나라 청소년들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상황을 인식하게 하고 미래지향적으로 구상하고 계획하도록 이끄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어찌 하루를 특정해 그 날에만 마음을 쓸 일일까. 우리는 이 나라의 청소년들이 긴 안목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희망에 찬 앞날을 열어갈 뿐 아니라 사회적, 국가적으로도 소망과 결실이 가득한 내일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첫째, 모든 담론과 계획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추상적인 구호와 한 낱의 외침으로는 그 어떤 실증적인 열매를 보기 어려운 것이다. 청소년들이 실제로 활용하며 토대로 삼아 꿈과 비전을 실현해 갈 구체적인 나침반과 로드맵이 제공돼야 하며 구체적인 시설과 기획이 마련돼야 한다. 행사와 캠페인만으로는 아무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구체성이 드러나는 실체가 보이는 `청소년정책`이 필요한 것이다.둘째, 청소년정책의 기획과 입안 과정에 있어 그 주인공인 청소년들이 알아야 하고 구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제 아무리 멋진 구상과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하여도 정작 주인공들이 이를 알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일이 되는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청소년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그들의 꿈 속에는 어떤 소망들이 들어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정책의 입안단계로부터 청소년들이 폭넓게 참여하며 기획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셋째, 청소년정책은 미래를 향한 기획인 것이다. 오늘 어느 누구의 실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내일을 바라보며 지극히 미래지향적인 구상을 해야 할 것이다. 십년이 아니라 백년을 내다보는 혜안을 모아야 할 것이며 지역 뿐아니라 이 나라와 글로벌 환경의 변화를 담아내는 기획을 해야 할 것이다.지면을 빌어 청소년 당사자들에게도 몇 가닥 당부를 드린다. 여러분이 이어 가야할 21세기에는 절망과 낙담만 있는 시간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할 일이 많은 시대이며 바꾸어야 할 구석으로 차고 넘치는 시간인 것이다. 주변으로부터 들리는 그 어떤 실패감과 좌절감을 안기는 소리에 희망을 꺾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은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문제가 널려 있는 곳이며,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바로 청소년 당신이 아닌가. 오히려 세상을 더 높게 더 넓게 보며 당신이 풀어낼 바로 그 과제를 찾아보기 바라는 것이다. 21세기는 당신의 시간이며 디지털 문명은 당신의 도구인 것이다.청소년의 날은 해마다 찾아올 것이다. 이 날을 맞아 평화를 만드는 청소년을 기대함과 동시에 풍요로움과 자유로움, 그리고 정의로움도 앞당기는 여러분 청소년들을 기대하는 것이다. 당신이 있는 바로 그 자리, 우선 이 지역에서 당신이 기여할 몫을 찾아보기로 하자. 그 곳에서 당신의 손으로 바꾸어 갈 숙제를 찾든지 만들어 보시라. 지역에서 닦은 실력이 밑거름이 되어 글로벌 환경에도 써먹을 그 날이 오고야 말 터이다.구체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청소년정책을 주인공 청소년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지역이 되고, 일년 365일을 청소년이 마음껏 숨쉬고 약동하는 지역이 돼 `청소년의 날`을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되는 지역이 돼 가기를 기대해 본다. 청소년은 우리 모두의 미래이므로.

2017-08-10

축제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포항국제불빛축제가 한여름의 열기를 가득 담아 지역을 뜨겁게 달군 끝에 막을 내렸다. 축제장에서 목격한 수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모습에는 기대와 소망이 가득했다. 해를 거듭하며 새로운 모습을 가지려 노력하는 지역의 축제를 바라보면서 시민들이 가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생각 몇 가닥을 나누고자 한다. 축제를 표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카니발(carnival)은 초기 기독교 전통 가운데 금식하고 절제하며 지내야 하는 사순절 직전에 보통 사람들이 신나게 먹고 마시며 즐기는 기간을 두었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교리와 전통에 따라 시민들이 사뭇 제한되고 억압된 분위기를 만나기 전에 보통 사람들이 자유롭고 해방된 분위기를 한껏 만끽할 수 있는 며칠 동안의 기간으로 삼은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축제의 주인은 시민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고단한 삶 가운데 이렇게 만나는 축제 기간은 근심과 시름을 씻어 내리는 한바탕 놀이마당이자 열정의 분출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누리기 어려웠던 일탈과 파격이 허용되며 시민들의 상상력과 지역의 생동감을 회복하는 기간인 것이다. 그래서 축제가 지나간 후에는, 그렇게 다시 찾은 에너지를 일상에 기울이게 하여 우리의 날들이 새로운 활력을 찾도록 이끄는 것이 우리가 축제 마당을 여는 까닭일 것이다. 우리의 축제가 그런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지 한번 돌아볼 필요가 그래서 있는 것이다.축제는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높고 낮은 사람이 없으며 귀하고 덜 귀한 사람이 없다. 남자와 여자의 경계는 물론 노년과 청년을 가르는 일도 없어야 한다.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흠뻑 즐길 수 있는 마당이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축제이벤트 가운데 진행되는 `내빈` 소개와 인사는 어딘가 생경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물론, 축제가 가능하기 위해 수고한 손길들과 노력들을 십분 이해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만, 축제의 순간에는 이를 즐기려 모인 시민들에게 축제의 본모습을 한시라도 당겨 선사하는 배려가 아쉬운 것이다.축제장에 놓인 의자들은 축제가 가져야 할 자연스러움과 자유분방함을 오히려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모습으로 잔디밭이든 모래사장이든 삼삼오오 어우러지는 모습을 연출할 수는 없었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의자들이 놓인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 사이에 생기는 야릇한 이질감과 미묘한 분위기는 우리가 극복하여야 할 숙제인 것이다. 우리의 축제가 진정으로 모든 이들의 한마당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평소에는 덜 가졌거나 소외되었던 시민들이 축제 마당의 한 가운데로 초대되어 한껏 즐기는 모습을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다.올해부터는 포항문화재단이 축제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수고한 포항시와 축제위원회에도 감사한 마음이며, 새롭게 출범한 포항문화재단이 소기의 전문성을 돋보이게 하고 진정한 독립성을 확보해 해가 갈수록 의미있고 재미있는 축제를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한다. 시민들이 상상력을 발휘하고 숨겨진 기량들을 쏟아내어 시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축제를 통해 시민들의 활력이 회복될 뿐 아니라 지역의 자부심이 더욱 끌어올려지고 결속력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되는 우리 지역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딘가 예산의 낭비가 아닌지 하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면서 오히려 다음 축제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지역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축제를 멋지게 만들어 주신 모든 분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전하며 우리 지역이 축제를 통해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한층 풍요로워 질 것을 믿는다. 시민은 아직도 축제에 배가 고프다.

2017-08-03

허니문 대한민국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이제 여름절기를 모두 지나 가을이 멀지 않았다. 아직 뜨거운 늦여름 더위자락이 남았을 터이지만 계절이 바뀌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겨울, 뜨거운 열정과 분명한 소망을 담아 새로움을 향한 변화의 토대를 만들어 냈다.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 낸 역사치고 이처럼 치열하였으나 또한 이처럼 비폭력적인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지난 봄, 그 토대 위에 실제로 변화를 만들어 낼 그릇을 쓸 만해 보이도록 준비하였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지켜보며 이 나라에 실제로 변화다운 변화가 나타나는지 그래서 정말로 나라다운 나라에 살게 될 것인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누구는 이것을 `허니문(honeymoon)`이라고 부른다던가. 막 사랑의 단잠으로부터 결혼을 이루어낸 새 부부가 꿀처럼 달콤한 꿈을 꾸며 지내는 처음 몇 달. 바로 그런 신랑신부처럼, 우리는 과연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겨질 것인지 한껏 기대하면서 지내는 이즈음인 것이다. 그런데 허니문이 과연 꿀처럼 달디단 시간이기는 해도, 자칫 그리 길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도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 허니문, 밀월(蜜月)인 것이다. 한 달, 아니 그래봤자 몇 달. 달은 차고나면 반드시 기우는 법. 요즘은 신혼여행을 아예 깨버리고 헤어지는 젊은 부부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뜨거운 사랑과 열정 뿐 아니라 치밀한 준비와 노력이 함께 할 때에야 성공적인 결혼이 가능할 것임을 저 허니문은 소설 속의 복선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어떠한가. 이 나라는 오늘 과연 또 한번의 허니문을 잘 지나가고 있는가. 이미 몇 번의 좋은 기회들을 덧없이 흘려보낸 기억이 생생한 우리 국민들은 지금 지나고 있는 이 허니문이 우리를 성공적인 결혼에 이르게 할 것인지 사뭇 궁금해지는 것이다. 힘을 모아주며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잘 해주길 바라지만, 우리 시민들 각자는 지켜보면서 준비를 잘 하고 있는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지나갈 이 허니문의 끝자락에는 행복한 결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아슬아슬한 개봉박두의 심정인 것이다.최근의 일들 몇 가지만 짚어보자. 우선 저 최저임금 행진. 일단 모든 대선주자들의 공약이었음을 기억한다 하더라도, 우선 일 년쯤 해보고 평가해 보자는 대통령의 표현에는 그리 후한 믿음이 실리지 않는다. 경제적 실익은 고사하고 실패가 확인된다면 그 때는 어찌할 것인지 보다 더욱 면밀하게 분석하여야 하지 않았을까.교육을 맡은 이들에게는 특수목적고와 자율형사립고 등 기존 시스템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이다. 생각들을 모으고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 가는 일에 우리는 아직도 턱없이 못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부분인 것이다. 원자력발전에 대한 평가와 분석, 그리고 군복무기간에 대한 기준와 결정에 있어서도 사회적 담론과 합의를 만들어 내는 데에 어딘가 서툰 솜씨가 엿보이는 것이다.서툴고 어설픈 솜씨와 진행에 우리 국민은 어떻게 적절하게 반응하고 참여하며 이를 바로잡아 갈 것인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는 정부대로 국민의 목소리를 더욱 폭넓게 들어야 하며 최종결정을 만들어 가는 길을 보다 치밀하게 닦을 일이다. 결정을 먼저 하고나서 담론을 형성해 가는 일은 앞뒤가 바뀐 느낌이다.허니문. 이제 곧 반드시 끝나게 될 밀월의 끝자락에 좋은 결혼생활이 기다리고 있도록 지금 우리 모두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이 지금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분명히 보아야 한다. 한번 지나고 나면 더는 되돌리기 매우 힘들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지난 겨울과 봄, 그리고 바로 이 여름에도 역사는 국민이 만드는 것이다.

2017-07-27

청소년재단에 바란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한국의 젊은세대는 그들의 미래에 관하여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여 부모세대보다 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한다는 것이다. 한 회계법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80년에서 2000년 사이에 태어난 27개국의 밀레니엄 세대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경제낙관지수가 평균 11점이었던 데 비하여 한국의 젊은이들은 겨우 1이었다고 하며 이는 27개국 가운데 20위라는 것이다. 즉, 오늘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그들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사뭇 비관적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해 가려면 기성세대가 행복해 지는 것이 중요한 만큼, 다음 세대 즉 청년과 청소년이 행복해야 한다. 그들의 미래를 기대 가운데 준비하며 꿈과 희망을 그려갈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미래가 있는 공동체`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 조사결과는 그와는 반대로 보이는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가 무엇을 하면, 이 땅의 청소년들이 꿈을 회복하고 미래를 기대하며 오늘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지역에서 `청소년재단`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담론이 있다고 한다. 청소년들이 `미래의 주인`으로서 제 자리를 보게 하여 그들의 어깨에 드높은 긍지와 든든한 자신감을 실어주고 지역의 희망으로 자라나게 한다는 기본 취지에는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칫 이같이 좋은 생각을 가지고 태어나는 청소년재단이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의 가닥들을 짚어보고 싶다.첫째, 청소년재단은 청소년을 위한 재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소리 같지만, 타 지역의 유사한 단체들이 청소년재단을 통하여 어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일들이 더러 있는 것을 볼 때에 우리가 `청소년재단`을 시작하면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를 정돈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청소년의, 청소년에 의한,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재단이 되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태동기를 거치며 본 궤도에 오르기까지 준비과정을 통하여 어른들의 관심과 기획이 필요할 것이다. 그 준비기간을 가급적 짧게 하고 가능한 대로 청소년 본인들의 참여와 구상이 재단을 이끌어 가는 데에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둘째, 타 지역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글로벌 트렌드를 참고하면서 우리 지역의 특성에 맞는 청소년재단을 만들어 내어야 할 것이다. 청소년, 즉 다음세대를 역동적으로 길러내는 일은 모든 지역들의 관심사일 것이다. 이들 지역의 청소년재단들이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들을 적극 참고하여야 할 것이며 세계 어느 지역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청소년 개발과 육성이 구현될 수 있도록 할 일이다.셋째, 지역의 청소년정책이 주민들을 위한 정주여건 개선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이 청소년이었을 시절에만 지역에 머무르다가 성인이 되어 다른 지역을 향하여 떠나가는 일을 최소로 하는 일에 청소년재단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시민과 청소년을 위한 정주여건이 사회, 경제, 문화 어느 면에서도 타지역에 뒤지지 않도록 하는 일은 청소년정책 뿐 아니라 지역문화와 지역경제의 활성화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지역사회 그리고 지역의 청소년 관련 단체들과의 소통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꾸준히 협력적 파트너십을 만들어 간다면, 지역의 청소년들이 지역의 새로운 모습에 이끌리어 청소년재단이 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게 될 것이다. 청소년재단은 청소년에게 새로운 기회와 끝없는 가능성을 만들어 주는 텃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지역의 청소년재단이 이같은 성과를 거두게 되면, 지역은 `청소년도시`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며 청소년들은 또 하나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될 것이다. 지역의 미래는 청소년이 열어가야 하는 것이다.

2017-07-20

대추가 익어갑니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혼사를 막 치르고 이제는 우리집 식구임을 새삼 확인하는 폐백의 자리에서 시부모는 새 며느리의 치마폭에 대추와 밤을 던져주며 아들딸 많이 낳고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기원한다. 하필 왜 대추와 밤이었을까. 정석주 시인은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 알의 대추가 태풍과 천둥과 번개로 상징되는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고 겪으면서 끝내 이기고 견뎌내어 붉디붉은 빛깔을 선사하듯이, 새색시와 새신랑도 바로 그런 삶을 살아내기를 기원하면서 한 줌 대추를 던져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태풍과 천둥과 번개가 찾아오지 않는 삶이 어디 있을까. 어려움과 시련이 없는 삶을 살아내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 것인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이의 살아가는 길 위에는 시련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침, 태풍과 천둥과 번개는 주로 여름날에 만나는 손님들이 아닌가. 계절 가운데 여름은 특별히 `만들어 내는` 몇 달인 것이다. 풍요함을 빚어내는 일을 하느라 여름은 삼라만상에 태풍과 천둥과 번개를 안겨주는 것이다. 시련과 어려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면, 이들을 차라리 지혜롭게 견디고 슬기롭게 이겨내어 보다 나은 결실이 가능하도록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이 여름, 장마와 무더위가 우리에게 흐르는 땀과 지친 마음을 가져다주는 일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우쳐야 할 것인가. 지나가야 할 수많은 어려움들 가운데 이같은 모습으로 찾아온 태풍과 천둥과 번개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할 것인가. 오늘 우리가 가진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나면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인가를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 청와대가 정부조직 구성과 추경예산 문제로 어려움 투성이다. 정치권이 거짓 선거전의 후폭풍을 만나 수습에 두려움과 걱정이 한가득이다. 관세청과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들은 물론 유수한 대표기업들도 부정과 비리로 얼룩졌던 과거가 드러나면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가진 문제들을 어떻게 이겨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해 갈 것인지 모두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대추는 또한 몸을 따뜻하게 하며 심신을 젊게 해 준다고 한다. 대추에는 특별한 약성보다는 조화와 영양의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시련을 이겨낼 뿐 아니라 그런 결과 주변까지 맑고 밝게 하며 따뜻한 화합의 기운마저 보듬어 내라는 의미로 새색시는 대추를 한 아름 받아들었던 것이다. 태풍과 천둥과 번개를 이겨낼 뿐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빼어난 빛깔로 변화해 가는 모습은 대추나무에 달린 열매에서 관찰도 가능하지 않을까.청와대와 정치권도, 국가기관들과 재벌기업들도 이 여름이 몰고 온 시련과 어려움으로부터 깨우칠 일이다. 견디고 이겨낼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그 자리에서 사라져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국민들은 더 이상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만 듣지 않는다. 당신들의 모습을 어쩌면 당신 자신들보다 더욱 선명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속아줄 어리석은 국민이 이제는 없다. 밥하는 동네 아줌마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멍한 시골 노인네도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대추 한 알에서 태풍과 천둥과 번개를 찾아내었던 시인은 같은 시의 마지막 줄을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로 맺고 있다. 과연 세상은 시련과 어려움으로 가득한 곳이 아닌가. 그 같은 세상에 살아가도록 던져진 인생은 차라리 복받은 것이 아닐까. 이처럼 아픔과 고난이 가득한 세상을 한 가닥 한 가닥 바꾸어 가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당신은 어떤 대추를 거둘 것인가.

2017-07-13

장마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그동안 목이 타도록 바라던 빗줄기가 시원하다. 청청한 초록이 싱싱한 기운을 흠뻑 들이킨다. 신기하게도 장마는 한반도를 오르내리며 나름 골고루 물줄기를 대면서 오랜 가뭄에 쌓인 간절함을 거센 빗줄기로 씻어 내린다. 또 하나 신통한 것은 장마가 지나간 자리에는 백발백중 폭염이 찾아오는 것이다. 물씬 적신 대지를 익히기라도 하듯이 뜨거운 햇발이 쏟아져 내린다. 정성으로 심은 곡식들이 장마 뒤 폭염 속에 푹푹 익어가는 것이다. 장마를 통해 논밭의 농작물이든 들판의 잡초든 쑥쑥 자라는 것을 보고 옛 사람들은 `장마에는 돌도 큰다`고 하였다. 아무렴 돌이 자라겠는가 싶지만 이렇게, 자연은 소리없이 인간을 돕는다.농작물이 장마를 거치며 바라던 대로 풍성한 결실을 내려면, 장마 전에 여러 가닥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장마를 홍수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려면 치수에도 미리 손을 써야 할 것이다. 이처럼 기다리던 장마가 온다고 해서 저절로 모든 것이 좋아지는 것이 아닌 것은, 인간에게 장마를 대비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려는 것일까. 자연이 도울 테니까, 사람은 준비하라는 소리가 거의 들리는 것이다.윤흥길의 소설 `장마`는 마침 이즈음에 맞았던 한국전쟁의 모습을 여러 갈래로 그리고 있다. 준비없이 맞았던 민족의 비극이어서 그랬을까, 작가는 글 속에서 어둡고 지겨운 어려움으로 다가온 전쟁을 마침 함께 찾아왔을 긴긴 장마 빗줄기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삶의 어려움이 지나가면서 장마가 그친다는 복선에는 작가가 장마를 바라보는 시선도 보이는 것이다. 기다림의 소망이 기대만큼 열매를 거두려면, 장마가 오기 전에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그려지는 것이다. 혹 미리 준비하지 못하였다면 장마가 지나는 동안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그동안 이 나라가 겪어온 경험과 좌절을 통하여 이제는 한번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간절함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 아닐까. 수개월을 지나며 밝혔던 촛불을 그래서 누구나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가뭄을 지나며 지녔던 목마름처럼 촛불을 지나며 가졌던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장마로 다가온 빗줄기를 떠내려만 가도록 버려두지 않아야 하듯이, 희망으로 다가온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기회도 절대로 헛되이 흘려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장마가 모든 곳에 골고루 찾아오듯이, 희망도 국민 모두에게 차별없이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만 했으면, 이제는 좌우로 갈라 세우는 일이 그리 의미없다는 것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념이란 결국, 더 나은 내일을 만나기 위한 지향성과 방법론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그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은 더욱 나라다운 나라를 당기기 위한 다른 모습의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좌우로 갈라서서 생각없이 손가락질만 퍼부을 일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마음의 가닥들을 모아가면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반목과 비난으로만 아까운 날들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싶다. 다가온 장마가 뒤이을 폭염 속에 온갖 과실을 맺는 것처럼, 찾아낸 희망이 모든 이들의 열정과 함께 진정한 나라다움을 일구어 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기다림이 장마로 이어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간절함이 희망으로 이어진 것이 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장마가 결실을 이루듯이 희망이 나라다움을 찾아내기를 바란다. 장마 후 결실을 위해 무더위가 찾아오듯이, 희망과 함께 나라다움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는 열정으로 가득한 담론과 비평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목표가 `나라다움`이었음을 잊지만 않는다면, 차근차근 나아가는 일이야 거뜬히 이룰 것이다.장마를 홍수로 보내지 말 일이며, 희망을 다툼으로 까먹지 말 일이다. 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기다렸던 희망이 찾아왔다.

2017-07-06

결과, 경쟁, 이 나라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옛 말이 있었다. 서울을 가는 게 목표라면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는 뜻이었을까. 도달해야 할 결과를 위해서라면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묻지 않고 인정하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과정이 혹 정당하지 않더라도 뜻하는 바는 무조건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정말 그럴까.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선거에 나섰던 정당에서 상대 후보의 흠결을 조작하여 선거운동을 진행하였던 일이 드러났다고 한다. 이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선거에 나선 이가 가진 목표는 물론 당선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이라 해도, 그 과정에 이 정도의 거짓과 조작이 자행되고 또 작동된다면 이 나라 민주주의에 우리는 희망을 걸 수 있을까.결과지상주의.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결과로만 이야기하자는 태도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숨가쁘게 살아 오느라 목표에만 집착하였던 지난 날을 이제는 찬찬히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우리들 뿐 아니라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이제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것인지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과가 아무리 좋아 보인다 한들 과정이 정당하지 않다면 부끄러워할 줄도 아는 인성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결과지상주의를 삶의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에 진정과 정직을 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정직하여 나는 혹 손해를 보더라도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함께 살아가는 성실`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경쟁. 그것도 무한경쟁.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의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 남보다 더 잘 살기 위하여, 누구에게도 지지 않기 위하여 긴장하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남을 이기면 나는 행복하여 지는 것일까. 경쟁한다는 것이 과연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이겨내야만 하는 일일까. 빌게이츠(Bill Gates)는 `나는 남들이 아닌 나 자신과 끊임없이 경쟁하며 산다. 쉬지 않고 나를 바꾸어 가는 일에 집중한다`고 했다. 정말 그런 것이 아닐까. 남들을 이겨내는 일에 매달리기 보다, 날마다 나를 이겨내 어제보다 나은 나 자신을 만들어 가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경쟁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다른 정당을 밟고 올라서기 위하여 증거를 조작하기 보다, 자신의 정당이 가진 정책들이 국민의 마음을 끌어당기도록 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한없이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말았지만, 차리리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나라가 보다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하여 새롭게 바뀌어 갈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결과지상주의를 이제는 벗고 과정에도 진정과 정직을 심는 오늘이 되었으면 한다. 남들을 경쟁의 목표로 삼아 이겨내려 하기보다, 나 자신을 진정한 경쟁 상대로 알아 부단히 새롭게 나아가는 첫 날들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이번 일은 철저하게 살펴야 한다.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지 그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가려 국민 앞에 소상히 밝혀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 정치가 거짓과 위선의 굴레를 떨쳐내는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정치뿐 아니라 경제와 문화, 교육과 사회 전반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결과지상주의의 폐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결과가 소중한 만큼, 과정도 정당하도록 우리 모두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저 정당만 부끄럽고 말 일이 아니라, 온 나라가 함께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각자에게 물어보았으면 한다. 목표를 위하여 뛰는 당신의 그 과정을 다른 사람들도 인정할 것인지. 오늘 내가 이겨내야 할 사람은 과연 누구인지.

2017-06-29

토론과 협상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토론이란 무엇일까. 일정한 논제를 가운데 두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차이를 발견하며 그 간극을 좁혀 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 어떻게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으며 인간이 기계가 아닌 바에야 어떻게 모두 같은 마음일 수 있을까. 이처럼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조화롭게 어울리게 하여 덕스럽게 어우러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면 토론이 필수인 것이다. 당신과 나의 생각을 견주며 조율하여 일정 수준의 합의를 만들어 가면서 사회의 시스템이 적절하게 작동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민주사회 리더십의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이 보기에 그 기본이 불안하고 그 바탕이 턱없이 허술해 보인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우리 사회가 토론에 약하다는 것을 이야기할라 치면 늘 우리가 받아온 `교육`을 탓하곤 한다. 주입식 교육으로 선생은 말하고 학생은 듣기만 하는 교육방식에 문제가 있다. 주제가 무엇이 되었든 학생은 그저 읽고 들어 담기만 할 뿐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인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은 바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적 가치를 구현함에 있어 토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절감한다면 우리 교육은 어째서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라도 우리는 교육의 현장에서 이를 어떻게 바꾸어 갈 것인지 먼저 고민하여야 한다.둘째, 토론에는 늘 상대가 있다. 내 생각이 옳은 만큼 상대도 분명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진정성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는 데에 늘 인색하지 않은가. 상대의 생각을 잘 새겨 타당한 경우에는 나의 생각도 바꿀 준비와 용기가 있어야 할 터이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음을 전제하고 하는 토론은 이미 토론이 아닌 것이다. 서로 조절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토론은 시작부터 어려운 것이다. 상대의 의견에 `비판`적인 태도로 견주어 보는 일이 분명 필요하지만, 옳은 생각에는 손을 들어 주어 내 생각을 바꾸어 가는 `타협`의 태도야말로 토론에 없어서는 안 될 덕목인 것이다. 우리는 이를 변절이나 굴복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반성할 부분인 것이다.셋째, 토론의 생각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사안인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람과 사안을 혼동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정인사 또는 특정집단이 가지고 오는 생각거리는 그 내용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불문하고 모두 틀렸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 사안에 대한 대화와 협상을 어렵게만 하는 편견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다루어야 할 주제에 관하여 상대도 나름 해결방안을 가지고 나아오는 것이므로, 상대는 그 주제에 관한 한 사실상 나의 파트너인 셈이다. 사람을 이겨야 할 적수로 볼 것이 아니라, 사안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삼아 열심히 마음을 모아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사람과 사안을 잘 구분하여 사람과의 관계는 긍정적으로 살려내면서 사안에는 분석적이면서 비판적이어야 할 것이다.`이 나라를 살려내기 위하여 우리는 서로를 향해 윽박지르며 고함칠 것이 아니라, 시민의 건전한 토론을 더욱 키워가야 한다.` 미국 언론인 한 사람의 고백이라고 한다. 우리가 듣기에 저들 나라에는 토론문화가 자리잡혀 있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아직 저런 고백이 있다고 하면 진정한 토론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보다 나은 토론과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하여 우리는 누구나 `공사중`인 셈이다. 이제 그 지향점을 분명히 보게 된 이상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더는 후퇴하지 않도록 다시는 돌아가지 않도록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하며 나라의 리더쉽은 각성하여야 한다. 서로 물고 뜯을 일이 아니라, 나라를 살려야 한다.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2017-06-22

다음 세대가 살아야 한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뉴스가 어둡다. 대학교수가 가르치던 학생에게 테러를 당하였으며, 고층건물 창을 닦던 인부가 주민에 의해 생명줄이 끊겨 사망하였다. 세상이 왜 이럴까. 윤리와 도덕, 그리고 종교적 가치로 오늘 세상을 견주어 보면 이전 그 어느 시대보다 조금도 나아졌다고 부르기가 어렵게 되었다. 물론, 그 학생과 교수 간에 시빗거리가 있었을 것이며, 그 건물 외벽을 사이에 두고도 다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테러나 살인에 이르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쳤다 할 것이다.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경제적으로 이 민족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화려한 시절을 살고 있다는데, 우리 사회는 이처럼 어두운 뉴스에 날마다 시달리는 것일까? 잘 살기 위하여 달려온 끝에 이렇게 무너지는 결말을 보는 일은 세상 누구에게도 자랑이 아닌 것이다. 이를 해결할 열쇠는 무엇일까.교육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다음세대를 기르는 우리의 태도가 혹 문제는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 나라 교육의 틀을 처음 만들던 시절, 교육의 목표는 아마도 `살아남기`, `버텨내기` 또는 `이기고 올라서기`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한 평가도 모든 것에 등수를 매기고 그에 따라 우열이 판가름 났을 터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치열한 경쟁의 장이 되었으며 평가는 사실상 떨어뜨리기 위한 제도가 되고 말았던 것 아닌가. 그런데, 오늘 교육에 성공했다는 여러 다른 나라들의 사례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교육의 목표를 `경쟁`이 아니라 `협력`에 두고 있다고 한다. 어차피 함께 살아야 할 이웃들을 밟고 올라간들 그 끝에 내게 무슨 영광이 있을 것인가. 풍성한 결실을 만들기 위해 함께 애쓰며, 그런 열매도 함께 나누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누르고 올라가기보다 돌아보며 배려하기를 가르쳐야 한다.바꾸어야 할 세상은 과목별로 문제를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닥들은 모두 통합적인 어려움들인 것이다. 경제적 문제인가 하면 사회적 가닥이 얽혀 있으며 문화적인 장애물도 함께 품고 있는 것이다. 문과나 이과의 구분도 사실은 덧없는 울타리일 뿐이다. 교육에 있어 기본 소양이 어느 정도 든든하게 길러진 것을 확인한 다음, 우리는 교과운영의 틀을 조정하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터이다.암기력으로 승부하는 오래된 교육을 벗어야 할 것이며, 이해력으로 충분하다 생각하는 오류에서도 얼른 탈피하여야 한다. 암기하고 이해하는 일은 기계가 거뜬히 해내고 마는 세상이 빠르게 다가온 것이다. 이제는 뭉게뭉게 상상력으로 승부하여야 하며 새로운 세상을 그려내는 창의력으로 맞서야 한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가르칠 수 있는가는 토론거리이겠으나, 교육과 훈련의 현장에서 상상과 창의를 얼마든지 체험하고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암기한 정답을 토해내어 좋은 성적을 받는 교육은 이제 버려야 한다. 무엇을 조금 더 아는 일이 자랑이 되는 세상도 이미 아닌 것이다. 주변에 널린 문제들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가는 `문제해결형` 교육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멀쩡해 보이는 현실에서도 문제를 찾아낼 줄 아는 `비판적 사고`가 그래서 필요할 것이다. 세상의 문제들을 다른 사람의 몫으로만 생각하기보다,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찾아내어 도전하며 해결해 내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일에 가치를 두는 사람을 길러야 하며, 세상에 가득한 문제들을 찾아내어 해결해 낼 줄 아는 다음세대를 만들어 가야 한다. 배려하고 협력하는 기본 인성을 일구어야 하며 통합비판적 사고에 능숙한 문제해결형 인재를 길러야 한다.그동안 교육이 우리를 여기까지 잘 이끌어 준 일이 다행스럽지만, 이제는 새로운 교육으로 보다 나은 내일을 맞아야 한다. 다음 세대가 살아야 이 나라가 산다.

2017-06-15

미래, 현재, 과거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어느 생명보험회사의 웹사이트에서 신비한 경험을 하였다. 첫 페이지에서 나이와 키, 몸무게 등 간단한 정보를 묻는다. 그러면, 사고를 당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을 마치는 경우 어느 해 몇월 며칠에 죽을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정확한 날짜가 아니겠지만, 그런 날짜를 구체적으로 대해 본 것이 처음이었다. 동시에 드는 생각은 `아, 저런 시각이 있겠구나!` 싶은 자각이 새삼 드는 것이었다.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우리는 시간이 아득한 `과거`에서 시작하여 지금 이처럼 누리고 있는 `현재`가 되었다가 알지 못하는 `미래`가 되어 흘러간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그렇게 시간이 과거-현재-미래의 순서로만 흐른다면, 그런 시간은 나의 의지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가만히 두어도 흘러가는 시간, 그에 대하여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다만 객체가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어차피 모르는 과거였으며, 그냥 언제나 곁에 있는 현재이며, 아무 것을 하지 않아도 어차피 다가올 미래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늘 시간을 놓치며 사는 것은 혹 아닐까. 어찌어찌 흘려버린 세월에 아쉬움이 쌓이고, 갑자기 다가온 오늘에 당혹스러우며, 손님처럼 다가올 내일을 생각하면 불안하기도 한 것이다.질문이 생긴다. 과연 시간은 그렇게 흐르는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흘러가느라 사람은 정말로 시간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과거는 아득한 옛날이며 겨우 현재에 살고 있을 뿐 미래는 정말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미래는 그냥 기다려야 오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그 미래는 눈 앞에 펼쳐지지 않았을 뿐 이미 시작된 것은 아닐까 싶다. 그 미래 어느 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라져 갈 그 시간은 이미 시작되지 않았을까. 이미 시작한 그 시간이 우리를 향하여 넘실넘실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이미 시작한 시간이 `미래`이고, 우리를 향하여 한 순간 한 순간 다가와서는 `현재`가 되어 우리를 만났다가, 그 시간을 넘어 끝내 `과거`가 되어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은 미래-현재-과거의 순서로 흐르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맞는 모든 중요한 시간들은 이들을 상상하며 생각하는 순간 이미 시작되었다.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시험들이 그렇고 청년들에게는 결혼이나 취업이 그럴 것이며 장년들에게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의 순간들이 모두 그럴 것이다. 시간은 이렇게 미래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현재가 되었다가 과거가 되어 사라져 가는 것이다.시간의 순서가 이렇게 뒤바뀌고 보면, 우리가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내게로 다가오고 있는 시간에 관해서 우리는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그냥 흘려보낼 시간이 아니라 이제 맞이할 시간이 되어 신중함이 더해질 터이다. 미래는 아무렇게나 흘러올 시간이 아니라 생각깊게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어차피 다가올 내일에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빛나게 찾아올 미래를 알차게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순간 불현듯 찾아오게 할 것이 아니라, 넘실대며 다가오는 그 시간을 맞을 차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흐르는 시간에 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다가오는 시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부정적인 미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 나라의 미래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이미 시작되었으며, 우리들 개인들의 미래도 이미 어디선가 시작되었다. 나라와 개인에게 이미 시작된 그 미래에 대하여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잘 생각해 볼 일이다. 이에 어떤 준비를 하여 그 미래가 어느 모습의 현재로 다가오게 만들어 낼 것인가는 우리의 태도에 달린 것이다.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2017-06-08

소통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조금씩 나아진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소통이 아직도 문제라는 인식이 있다. 나라의 리더십에서 가정의 부모들까지 소통을 잘 하지 못해서 국민들로부터 가족들로부터 믿음을 잃어버리기 일쑤인 것이다. 왜 그러는 것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소통이란 정말 어찌 해야 하는가. 疏通.(소통) 글자가 어렵다. 어려운 것이니 쉽게 풀리지 않는다. 영어로는 Communication, 그 본래 말뜻에 `나누는 일`, `함께 하는 일` 그리고 `공동체 만들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퍽 쉬워진 느낌이다.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소통을 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서양 속담에 `입으로 망하는 사람보다 귀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내 생각을 펼치기에 분주하여 남의 생각을 듣지 않는 일을 빗대어 하는 소리일 것이다. 내 생각이 틀린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마음에 담은 생각을 정연하게 잘 표현할 일이지만, 또 다른 사람이 담고 있을 진정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말하기만 하고 듣지 않겠다는 심보는 무엇인가 함께 하기 싫다는 고집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경영의 대가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상대방이 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하였다. 소리높여 외치는 소리도 듣지 않는데, 하지 않는 소리는 도대체 어찌 들을 것인가.소통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하지 않는 소리까지 챙겨 들으려면, 소통에는 공감이 필수라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리더가 공동체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나의 생각에 진심이 담겼듯이, 상대도 간절함으로 오고 있다는 걸 어찌 모른다는 말인가. 어째서 당신 혼자만 이야기하고 남들은 듣기만 하라는 말인가. 마음과 마음이 오고 갈 때에야 공동체도 서지 않을까.편가르지 말기. 이 소리를 해서 듣는 이들이 편갈라 질 것인지 아니면 편안해 질 것인지는 말하는 사람이 안다. 털끝만큼이라도 편갈릴 생각을 나눌 터이면 극도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생각은 나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늘 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던지는 소리가 공동체에 덕이 되는지 독이 되는지 살펴야 하는 것이다.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실수가 어찌 없을 것인가. 뱉어낸 말이 의도와 다르게 공동체에 독이 되었을 때, 우리는 간혹 소통에 있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상대가 입은 상처가 보이면 다가가 위로할 일이며, 나의 표현에 실수가 있었다면 얼른 인정하고 돌아설 일이 아닐까. 당황스럽고 불편하다고 소통의 문을 닫아 버리면 거듭 실수의 늪으로 빠져들곤 하는 것이다. 소통의 진정한 승리는 저질러진 실수를 인정할 때에 거두는 것이다.조선의 왕 세종은 국사를 다루면서도 `우리가 이렇게 결정하고 결론을 내렸을 때 혹시 억울한 사람이 없겠는지 다시 한번 찾아보고 확인하라`고 했다지 않는가.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나의 생각을 관철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우리`의 생각을 정하는 일은 나만 옳아서 정리되지 않는다. 거듭 살피고 확인하여 덕이 되는 방향을 찾아보아야 한다. 일사천리로 나아가는 일만이 반드시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역사와 함께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함께 살아가는 일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으며, 민주주의는 그래서 불편한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생각을 나누게 하여 아우르며 어울리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할 터이다.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생각 한 자락을 깊이 새겨볼 일이다. `무엇인가 이야기했을 때 우리의 가장 위험한 착각은, 소통을 이미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이제 겨우 시작인데 말이다.` 소통으로 공동체를 살릴 일이다.

2017-06-01

내일이 궁금하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알파고가 또 이겼다. 기계가 인간에게 내리 패배를 안기고 있는 중이다. 이세돌이 한 판 이겼던 기억을 이제는 어쩌면 인간이 기계를 이겼던 마지막 한 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예언마저 번지고 있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을 이기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인간은 기계를 어찌 할 것인가. 기계와의 싸움은 이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만 물러설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새로움을 향하여 나아갈 것인가.4차산업혁명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에게 다가왔던 녹색성장과 창조경제가 이 나라에 즐거운 성과를 안겨주기보다 의심스러운 이력만 남기고 사라져간 기억이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 번지고 있는 저 `4차산업혁명`에 대해서도 뭐 그리 크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실제로 작년과 올해, 해를 거듭하며 전 세계의 경제지도자들이 만나 인류경제의 미래를 내다보며 지혜를 모았다는 다보스포럼에서도 화두는 `4차산업혁명`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것이 무엇인지 분명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현상적으로 새로운 물결이 이미 다가와 있으며 우리는 이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여 이렇게 높은 관심을 두는 것일까. 이전의 기술혁명과 무엇이 다르기에 두려움에 가까운 경계를 하는 것일까.`탁월함을 찾아서(In Search of Excellence.)`를 쓴 탐 피터스(Tom Peters)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앞으로 사람을 뽑을 때, 학점 4.0 이상은 절대로 선발하지 마시라. A학점 졸업생은 B학점 졸업생 아래에서 일할 것이고, B학점 졸업생은 C학점 졸업생 회사에 고용될 것이며, D학점 졸업생이 자기 이름이 붙은 빌딩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물론, 과장이 섞인 농담처럼 들리지만, 나름 경영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지혜가 담긴 생각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동안 정답을 잘 찾는 사람을 대접하여 왔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며 틀린 답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해진 길에 충실한 역군들이 그동안 수고하여 이만큼 나아왔다면, 이제는 새로운 도전과 창의에 그 길을 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재구성과 역발상으로 이전과는 다른 무엇을 만들어 낼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지 않을까. 실수와 실패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낼 기본이 없는 것이다. 차근차근 정답에 몰두하며 찾아낸 것이 오늘이었다면, 좌충우돌 우답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내일을 열어갈 것이다. 알파고를 경험한 이세돌의 선언은 그래서 놀랍다. `인간이 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인간이 만들지 않았던가. 끊임없이 더 나은 기계로 만들어 가는 일도 사람들이 해야할 것이 아닌가.그간의 산업혁명들을 통해서 인간이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발전해 왔다면, 인간과 기계가 함께 생각하고 만들어가며 하나가 되어가는 숙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모습이 어떠하든지, 결국 인간이 더 좋은 세상을 구현해 가는 또 하나의 노력이 아닐까. 특별히 놀라거나 두려워하기보다 이 파도를 어떻게 잘 타고 넘을 것인가 즐거운 창발성을 발휘할 때인 것이다. 늘 100점을 받아내는 암기력으로 승부하기보다 할 때마다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가는 상상력으로 맞설 때인 것이다.이제 겨우 시작인 것이다. 그동안 대상이요 객체였던 기계에게 이제는 인간과 함께 호흡하며 생각하는 가능성이 열렸을 뿐이다. 인터넷과 사이버 세상이 현실의 체험과 어우러지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만나서 함께 활약하는 날들이 열려가는 것이다.교육의 현장에서도 이전과는 분명히 다르게 다음 세대를 만나야 할 것이다. 일방적으로 가르칠 일은 세상에 없다. 함께 배우고 함께 만들어 가는 내일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배울 것인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내일이 궁금하다.

2017-05-25

지역을 젊게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지역에 나이든 사람들만 남고 젊은이들은 떠난다고 한다. 지역에 아이들 울음소리가 그치면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역의 내일을 맡을 `다음 세대`가 지역에 없는데 어떻게 지역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젊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만 향하는 것도 분명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어렵사리 지역까지 찾아와 몇 년을 지내면서 공부를 마친 젊은이들이 졸업과 함께 지역을 떠나가는 일이다. 지역에는 제법 괜찮은 대학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이들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은 이곳에서 그들의 삶을 펼칠 상상도 하지 않는다.그들에게 지역은 단지 그들의 내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몇 해를 견디는 `방문처`같은 곳일 뿐, 지역에서 무엇인가 꿈을 펼치고 삶을 이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졸업을 준비하면서 그들은 이미 지역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여 떠날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재학 중에도 그들의 관심 속에 지역은 없다. 분명 이 곳에 살지만, 투명인간이자 방문객이며 오래 머물기는 하지만 지나가는 통과여객일 뿐이다. 무엇인가 열심히 갈고 닦지만 그들이 배우는 무엇으로 지역에서 발휘하지 않는다. 마음이 끌리지 않는 곳에 그들의 수고를 들이지 않으며 흔적을 남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 소중한 젊은이들은 그냥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손님들인 것이다. 늘 지역에 있는 것 같아도, 해마다 신입생들이 채워지는 일이 반복될 뿐 졸업이라는 뒷문은 늘 열려있는 것이다.이렇게 젊디젊은 청년인재들을 지역에서 가르쳤다는 것만으로 지역은 위로를 삼을 것인가. 그들이 졸업 후에도 지역에 머무르게 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들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게 하여 바로 그 젊고 싱싱함으로 지역을 일으키게 하려면, 지역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젊은이들이 그냥 떠나가는 일을 두고 그들 탓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닌 듯하다. 지역이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대학은 대학대로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힘들어 하는 젊은이들로 한가득이다. 지역의 기업들이 이곳에서 공부한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할 수 없을까. 졸업생 뿐아니라 재학생들에게도 보다 전향적으로 다양한 문호를 개방하여 지역과 대학이 함께 숨쉬는 분위기를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인턴십도 있고 자유학기제도 있는데, 지역의 기업들과 대학들은 서로 오가는 일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지역의 기업도 살고 대학도 근심을 더는 상생의 마당을 펼쳐보았으면 하는 것이다.지역의 자치단체도 젊은이들이 지역을 스치듯 다녀만 가는 일이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청년 인재들이 지역에 머무는 동안 이 곳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모양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으면 한다. 교수들도 분명 좋은 통로이지만, 청년들이 지역에서 활약할 수 있으면 지역은 젊어지지 않을까. 기업들과 단체들과 대학들이 연합하여 만들어 낼 `젊은 도시`가 이미 눈에 선해 오는 것이다.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기려 하는 새 정부에게도 바란다. 국가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도 청년정책의 중요한 한 축으로, 청년인재들이 지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격려하고 유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수도권 밀집현상을 막으려 하기보다, 비수도권매력창출에 나서길 바라는 것이다. 균형있게 발전하는 일은 모든 지역이 하나같이 살 만한 곳으로 바뀌어 갈 때 가능할 것 아닌가. 지역에 젊은이들이 돌아오게 하는 일은, 지역에 이미 있는 젊은이들이 떠나지 않도록 하는 일로 시작하기로 하자.지역은 이미 젊다. 그 젊음을 유지하는 열쇠는 지역에 있는 것이다. 떠나지를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지역에 머물고 싶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들의 내일이 지역에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2017-05-18

내일은 다르게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새 대통령이 등장했다. 지난 몇 달 간 쉽지 않았던 산고를 겪고 우리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에 대하여 거는 기대가 높은가 하면 심심치 않은 우려도 있다. 그는 국민 앞에 어떤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 그는 나라 앞에 어떤 지도자로 설 것인가. 그가 오늘처럼 어려운 때에 여러 힘든 일들을 헤쳐나가야 할 것이므로, 걱정과 희망을 담아 여러 가닥 조언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약속했던 대로 국민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하고 나라의 앞길을 생각하며 모든 일에 신중해야 할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재수 취준생`이었던 처지를 늘 가슴에 담고, 국민을 위하여 온 힘을 쏟을 것이라는 간절함을 잊지 말 일이며, 나라와 민족의 미래가 날마다 나은 방향으로 움직여 가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그간의 여러 일들로 국민들의 가슴에는 상처도 있고 의심도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부터 잘 해야 할 것이다.그렇다면, 국민은 어떤가. 길고 긴 날들을 기다려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니 이제 그만일까. 선거를 통하여 지도자를 선택하였으니 이제 손을 놓고 바라보면 되는 것인가. 그동안 우리 국민은 위대하였다. 정치 형태로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우리 국민은 생활 방식으로서 민주주의를 실천하였다. 하지만, 선출된 바로 그가 고백하듯이 이제 겨우 시작인 것이다. 국민은 다시 고삐를 조이는 마음으로 대통령과 그가 하는 일들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민주적 사고와 의식이 행동을 통하여 구체화되는 경험을 이미 하였으며, 우리는 이를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몇 가지 덕목들을 생각해 보자.첫째, 열린 사고. 나만 옳다는 생각을 이제는 벗기로 하자. 나의 주장만 옳다는 독선이 우리에게 얼마나 어려운 시간을 가져다주었는지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만큼 남들의 생각에도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기로 하자. 함께 고심하고 다 같이 만들어 가는 나라로 나아가기로 하자. 협동과 타협 없이는 늘 같은 자리에 머물 뿐임을 명심하기로 하자.둘째, 참여하는 마음. 투표로 참여하였지만, 이제는 지켜보는 마음으로 참여하기로 하자. 우리는 이미 선출한 권력이 실패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한 바가 아닌가. 이제는 더 이상 권력의 오만과 독주를 방관하거나 용서하지 않기로 하자.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국민을 무서워하는 대통령과 정부가 되도록 하자. 당신들이 잘못 하는 날, 국민은 언제라도 바꾸어 낼 것임을 명심하게 하자. 투표 뿐 아니라 조언도 하고 제안도 하여, 앞에 선 이들이 긴장하게 하자.셋째, 공감과 배려. 나라와 사회가 잘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운명 공동체임을 생각하기로 하자. 추격과 경쟁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다면, 이제는 함께 잘 살아가는 공동체를 한번 만들어 보기로 하자. 지역갈등도 부끄럽고 세대갈등도 이겨내야 하지 않을까. 온갖 차별을 넘어 화합으로 일어서기로 하자. 사람이 모두 사람으로 존중받도록 하고, 다음세대 청년들을 더욱 세워 주기로 하자. 어려운 이웃들에 눈길을 돌리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로 하자. 더 이상 흩어 버리지 않도록 하고, 모으고 모아 모두 잘 어울리는 나라를 만들기로 하자.국민에게 힘이 있음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세계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대한 국민에게 손색이 없다. 더없이 높은 자긍심으로 더욱 싱싱한 나라를 만들어 내기로 하자. 이를 이루어 낼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각자임을 마음에 새기기로 하자. 대통령은 국민을 섬기고 국민은 나라를 섬기기로 하자. 대통령은 최선을 다하고 국민은 지켜보기로 하자. 대통령은 다시 실족하지 않도록 하고, 국민은 더 이상 실수하지 않도록 하자. 내일은 다르게 펼쳐야 한다.

2017-05-11

건투를 빈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만약 그 때 그 백화점에 취직했더라면, 어쩌면 평생 그 일리노이 시골 마을을 떠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마흔 번째 대통령을 지냈던 로널드 레이건의 자서전 첫 줄이다. 그의 고향 일리노이주의 딕슨이라는 동네는 지금도 인구 만오천을 겨우 헤아리는 아주 작은 마을. 고교 졸업을 눈 앞에 두었을 즈음, 마을에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몽고메리 워드` 백화점이 들어온다는 뉴스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흥분하였지만, 이를 누구보다 반겼던 이들은 마침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었던 레이건과 그의 친구들.그 가운데에도 청년 레이건은 학교 성적이 좋았을 뿐 아니라, 출중한 외모에 학교방송국 아나운서로 그리고 마을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에서 인명구조원으로 맹활약을 하였던 터이라 누가 보아도 새 백화점 신입직원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아니 그런데 어쩐 일이었을까, 동급생들이 모두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잡았지만, 그는 청천벽력처럼 낙방하고 말았던 것이다. 도무지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발생했으므로, 청년 레이건의 낙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대통령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도 한참이나 지나서 쓴 자서전 첫 줄이 이를 회상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그가 무엇이라 적었는지 다시 읽어 보자.아뿔싸, 그 때 만약 그 직장을 잡았었더라면 시골 마을에 그냥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돌아보는 마음이란다. 그 때는 깊디깊은 상처를 안고, 졸업하자마자 도망치듯 떠나 버렸던 마을이었다.하지만, 90을 넘겨 살아낸 끝에 돌이켜 보니 그 날의 실패와 좌절이 안겨 준 것은 절망의 낭떠러지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과 희망의 사다리였다는 것이 아닌가.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특별히, 이 나라 청년들의 오늘 상태는 어떠한가 묻는 것이다. `88만원 세대`는 이제는 고전인가, 이 나라 청년들 열 명 가운데 넷은 `이번 생은 망했다`며 늘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하는 모양이다.뭘 해도 되는 게 없으니, 이젠 아예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며 `다음 생을 기대하겠다`고 하니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미친 세상에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다` 고 한다. 오죽 힘이 들면 이토록 자조적일까.하지만, 정신과 의사이며 작가였던 스캇 펙은 그의 책 `가지않은 길(The Road Less Traveled)`의 첫 머리에서 지나칠 만큼 간명하게 적고 있다. `삶은 힘들다(Life is difficult.)` 문장이 놀랍게도 현재형이다. 살아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지금 이 순간이` 힘들다는 것이다.오늘이 버겁지 않은 이, 나와 보라고 하자. 이제 오늘을 사는 청년들에게 차라리 자신있게 권하고 싶다.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이 가진 상황이 어려운 것을 인정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오늘은 만만치 않은 것 또한 받아들이기로 하자. 차라리 그 어떤 상황에라도 묵묵히 최선을 던지며 저 끝에 돌아보는 흐뭇함을 누리기로 하자.대선에 나선 후보들의 생각 가운데 청년을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당신들은 오히려 의연한 젊은이들이 되기로 하자. 정답없는 세상에 내동댕이쳐 진 것으로 자조하기 보다는, 없는 정답을 만들어 가는 나만의 열정을 불태우기로 하자. 처절한 낙담으로 내려가기보다 불같은 기대로 올라가기로 하자. 어차피 이 나라는 청년들이 살려내야 한다. 어른들이라고 뾰족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는 걸 보고 있지 않은가. 사회도 바꾸고 경제도 건지며 문화도 일구어 주시라. 젊은 사자들이 포효하는 나라가 한번 되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바로 그 힘든 자리에서 이 나라의 내일을 빚어내시라. 건투를 빈다.

2017-05-04

정답은 없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영국 작가 조지 오웰(Geroge Orwell)은 미래를 다룬 그의 소설 `1984`에서, 1984년이 오면 모든 사람들은 한 가지 통일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똑같은 양식으로만 살아가게 될 것이며 이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엄격한 감시자 빅 브라더(Big Brother)의 통제 앞에 놓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으며 세상은 오히려 그 반대로 나아가는 것 아닌가. 마침 1984년에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소설 `1984`가 이야기한 어둡고 암울하며 답답한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며, 애플사(Apple Inc.)의 컴퓨터가 이를 막아낼 것이라면서 맥킨토시(McKintosh) 컴퓨터를 출시하여 성공의 서막을 열었다. 이 새로운 컴퓨터와 함께 세상은 다양하고 풍성해 질 것이며 사람들은 바야흐로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될 것이라면서. 바로 이런 선언을 했던 TV광고는 이 생각을 전하면서 컴퓨터는 아예 보여주지도 않았지만,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오웰은 왜 그렇게 생각하였으며 빅브라더를 떠올렸을까. 그는 아마도 20세기 초중반을 살면서 정답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도 그럴 것이 혼돈과 무질서 그리고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어쩌면 해결책으로서 `정답이 있는 세상`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빅브라더는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세상을 마침내 건져 올릴 기대주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 되었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재미없으며 가슴 먹먹한 세상이 되었을까. 또 우리는 얼마나 가슴 졸이며 숨쉬기조차 버거운 삶을 살고 있었을까.다행히 세상은 그렇게 흘러오지 않았으며 오늘 우리가 겪는 세상은 얼마나 풍성하고 다양한 것인가. 공교롭게도 미래학자 네이스빗(John Naisbitt)은 그의 책 `메가트렌드(Megatrends)`에서 현대인들은 양자택일을 강요받던 삶에서 다양한 선택의 폭이 허용되는 쪽으로 이미 나아가고 있다고 하였다.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다양한 선택의 폭을 경험하고 있는가. 아니 이를 인정하며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우리는 우리 사회에 무슨 정해진 정답이라도 있어야 하는 양 우리 자신들을 그 어떤 통제된 선택 안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닌가.대학에서 만나는 학생들이 더러 정답을 물어오곤 한다.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물어오는 것이다. 이들을 대하는 선배들은 어떤 답을 주어야 하는 것인가. 아마도 예전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성적을 거두어 좋은 직장 구하고 좋은 배우자 만나서 성실히 살아가는 것으로 정답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열심히 한 공부가 금세 낡은 학문이 되고 마는 것을 이미 목격하고 있으며, 좋은 직장은 아예 상상 속에 없는지도 모른다. 길이 보이지 않으며 앞이 막막해 보이는 것이다. 끊임없이 찾아보지만, 찾아야 할 정답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너무나 풍성해진 다양성의 바다 가운데 정답이 숨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틈바구니에도 번득이듯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사람들을 보라. 굳이 한사람 한사람 예를 들 것도 없이, 그들은 오히려 더욱 묵직한 그물을 들어 올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제 정답 찾기를 멈추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신, 정답이 숨어버린 다양한 지평에 차라리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가진 각자의 처지와 능력을 밑천삼아 기회의 바다에서 무엇이라도 들어 올릴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정답이라 생각한 길을 따라 곱게 쌓아온 사람들이 오히려 부끄러울 만큼 당신만의 멋진 길을 찾아내면 되지 않을까.생각해 보니 스티브 잡스는 대학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공평해진 다양성의 바다에서 자신만의 지평을 열어내었던 것이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2017-04-27

세상을 바꾼다

▲ 장규열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처음엔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구호들이 더러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외침. 교육은 미래세대를 기르는 일이므로, 긴 호흡으로 먼 앞날을 바라보며 정성으로 든든하게 가꾸어 가야 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당연하다. 적어도 백년 앞을 생각하며 오늘 우리는 다음 세대를 길러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리하고 있는지. 당신은 과연 교육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교육을 맡은 이가 바뀔 때마다 바람처럼 생겨나고 구름처럼 사라지는 교육 정책에 백년대계가 아슬아슬하다. 이번 대선에도 유력후보들이 내어놓은 교육 관련 정책 제안에 우리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또다시 그 소용돌이의 가능성에 불안불안하다. 이제라도 우리는 교육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기본부터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교육은 물론 사람을 기르는 일이며 사회에 덕이 되는 구성원으로 자라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간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라의 필요 때문이었을까, 교육의 목표를 `경쟁에서 이기는 일`로 바꾸어 놓지 않았는가. 학교에 가는 일이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일이 되고 보니, 모든 것이 힘들 수 밖에 없다. 숙제가 힘들고 시험이 힘들며, 성적이 힘들고 석차가 힘들다.배우는 일이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일이 되었으며, 서로 돌아보고 배려하는 협력은 사라졌다. 모든 과목에서 남들을 이겨야 할 뿐 아니라, 사회봉사도 음악예술도 아니 체육활동도 나를 단련해 가는 일이기 보다는 남들을 꺾고 이겨내는 일에만 골몰할 뿐이다. 학교에 가는 일이 고통이고, 선생님의 역할이 버거우며, 이를 바라보는 학부모들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남은 것은 처절한 입시 경쟁이고 본래 꿈꾸었던 `사람을 기르는 교육`은 그 어디에도 없다.그렇게 바뀌어 버린 교육의 목표를 가지고는 `즐거운 교육`을 구현할 방법이 없다. 진정으로 사람을 기르는 교육을 이루어 낼 길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심리학자 피아제(Jean Piaget)는 교육의 목표가 `지식의 양을 늘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사람을 기르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이제 우리는 훌륭한 인격체로서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에 마음을 쓰기로 하자. 남을 이겨내는 데 집중하기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기르기로 하자. 내게 돌아올 이익에도 슬기로울 터이지만, 부족한 이웃들과 나누는 일에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기르기로 하자. 배우는 과목들에도 모자라지 않아야 하지만, 지·덕·체의 균형에도 치우침이 없는 사람을 기르기로 하자.이렇게 덕스럽고 풍성한 교육이 벌어지려면, 학교는 즐거운 곳이어야 한다. 우선, 아침마다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즐겁고 가벼워야 한다. 오늘 배울 일들과 오늘 만날 친구들을 한껏 기대하며 옮기는 발걸음이 즐거워야 한다. 이들 학생들을 교실에서 반겨 이 모든 배움과 나눔에 정성을 쏟을 선생님들이 즐거워야 한다. 또한, 이들을 곁에서 바라보며 응원하고 격려하는 학부모들의 기대어린 마음이 항상 즐거워야 한다.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교육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힘센 도구`라고 하였다. 오늘 마뜩찮은 세상의 모습이 내일이면 그래도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교육 정책을 생각함에 있어 세세한 방법이나 지침도 물론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하염없이 바꾸어도, 교육을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는 진정한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교육은 경쟁을 익히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 내는 꿈이 담긴 일이다.다음 세대에 한없는 기대를 걸기로 하자. 교육이 펼쳐낼 내일에 한껏 높은 소망을 품기로 하자. 교육이 세상을 바꿀 것이므로.

2017-04-20

싸우며 자란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아이들이 싸우면 어른들은 은근히 이를 즐긴다. 다툼은 늘 아주 작은 일로부터 시작하지만 이게 슬슬 커지면서 갈등으로 번지고 급기야 어른 싸움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는 싸우면서 자란다`는 생각을 한 자락 깔고 사뭇 즐기며 지켜보는 것이다. 아마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다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실제로 쑥쑥 자라가기를 기대하는 것 아닐까.오래 전 한 조사에서, 싸움을 한 번도 안 했다는 친구들이 학교에서 19%, 집에서는 13% 밖에 안 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부모들의 30% 정도는 아이들이 싸울 때, `다치지만 않으면 두고 본다`고 했다.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 조용하게 공부만 잘 하던 친구들보다는 이리저리 치이고 내몰리며 갈등의 자리를 만들고 또 그런 자리에 섰던 친구들이 오히려 다양하고 풍성한 이야기들을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한 때, 이 나라의 온 백성을 국민총화와 일치단결로 묶으며 한 방향으로만 몰아 세웠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어디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지만, 그 시절에는 무엇에라도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일은 `위험한`일이었고 `불온한` 발상이었다. 나라의 모든 일들이 몇 안 되는 사람들의 기획과 조직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흘러가야 했던 것이다. 과연, 그래서 우리는 성공했는가. 제법 잘 사는 나라가 되었는데도 흡족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남들이 우리를 부러워도 한다는데, 정작 우리들 마음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싸우며 자라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닌 것이다. 어른도 사회도 그리고 나라도 겨루며 다투며 자라야 하는 것이다. 고여있던 물이 썩어 들어갔던 일을 우리는 이미 목격하지 않았는가. 건강하고 싱싱한 느낌들, 생각들, 의견들을 나누고 겨루는 가운데 보다 나은 방향이 보이고 더욱 행복한 결론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진화론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살펴보니,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동물은 절대로 아니지만 `다양성`과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할 줄 아는 유일한 종이었다. 미국의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대통령도 한 연설에서 `우리들 안의 다른 생각들, 다른 소망들, 다른 꿈들이 바로 우리들 모두의 힘`이라고 하였다. 소설가 마야 안젤로우(Maya Angelou)도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여러 가지 색깔이 함께 어우러질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고 하였다.실제로 그럴까. 혹 그냥 잡다하고 복잡해 지는 것은 아닐까. 자칫 혼란스럽고 어지러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이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다른 생각들이 모여서 결국 보다 든든한 사회를 만들고 나라의 저력도 다양성을 통하여 생겨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우리들 가운데 일부러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각자의 처지에 따라 바람직한 소망과 생각들을 내어놓고 다루며 혹 바로 잡아도 가면서 지금보다 더 나은 결론으로 모아갈 적에야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처음 가졌던 아슬아슬한 느낌도 이겨 내면서 우리가 가진 매듭들을 하나씩 풀어가는 지혜를 발휘했으면 한다.그간 우리에게 다툼이나 갈등이 있었다면, 이를 차라리 나은 길로 나아가기 위한 주춧돌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하자. 아직도 남아있는 골칫거리와 싸움거리가 있다면, 이를 오히려 발전의 기틀로 삼기로 하자. 아이는 어른들의 선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이들이 싸우면서 몸과 마음이 자라는 걸 믿는다면, 어른들도 겨루면서 내일의 희망을 건져 올리기로 하자.우리에게는 어설픈 이념의 다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생각의 겨룸이 있을 뿐이다. 어른도 싸우면서 자란다.

2017-04-13

우리 손에 달린 내일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4월 첫 날에 소중한 은사 한 분을 보내 드렸다. 시인이자 영문학자셨던 김종길 교수께서 남기신 시 한 편은 이렇게 권하고 있다.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좀더 착하고 슬기로운 것을/생각하라.” -`설날 아침에`나라는 과연 설날 아침을 또다시 기다리듯이, 새 지도자를 가려내기 위하여 분주한 모습이다. 마침 정파마다 각각 대통령 후보들을 찾았다고 한다. 저마다 혜안과 묘수를 가졌다고 주장하며, 하는 말마다 솔깃한 소리들 일색인 것이다. 대세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역전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위함이었는지 우리 보통 시민들은 날마다 새겨야 하지 않을까. 이 일이 진정으로 나라를 바로 섬기기 위함이며 국민을 걱정없이 살게 하려 함이라면, 정작 누군가를 가려 뽑아야 하는 국민들이 이 모든 언변과 행태 한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의 생각과 행동 가운데 참으로 `국민`이 있는지 살필 일이다.지난 겨울 동안 시민들이 만들어 낸 위대한 역사의 매듭을 잘 엮어내기 위하여,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에게서 우리는 어떤 모습을 기대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 먼저, 열려 있는가. 시민들을 향한 그의 마음과 눈이 열려 있는가. 시민의 생각을 헤아리고 그들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소신과 주장의 벽이 높은 나머지, 그들만의 세상을 펼쳐가는 일을 우리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민 사회의 아픔을 공감하고 가장 낮은 골짜기를 배려하는 지도자를 우리는 원하는 것이다. 평소에도 `소통`이 중요하겠지만, 나라가 어려움을 겪을 적에는 특별히 `열려있을 소통`을 기대하는 것이다.둘째, 함께 하는가. `민주주의`의 처음 생각은 `시민들 스스로 다스리기`를 구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믿어 맡겨진 직을 수행하는 이로서, 너른 지평의 중지를 반듯하게 모아 바른 판단을 만들어 내는 리더십을 바라는 것이다.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늘 새기면서 모든 일에 임하는 당신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 판단의 기초를 `국민의 처지`에 두고 생각을 쌓아 올리는 지도자를 만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글이 없어 나누지 못하는 `어린 백성을 어엿비 너겨` 세종은 한글을 만들지 않았던가.셋째, 희망을 말하는가. 과연 어려움으로 가득한 경제 상황이며 난관으로 에워 쌓인 국제 환경이다. 이를 다시 살려내고 이겨낼만한 철학과 지혜가 그에게 있는가.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할 수 없을 터에, 역량과 지략을 가진 인사들을 덕으로 모아낼 수 있을 것인가. 온 나라를 다시 한번 `희망을 이야기하는` 공동체로 엮어낼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에 대하여 여러 갈래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칫 어려움의 나락으로 떨어질 만한 위기의 국면에서, 나라와 시민들을 한 마음으로 서로 다독이게 하고 함께하는 영감을 불러내어 미국을 미국답게 새롭게 이끌어 낸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이제 겨우 한 달 후,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만날 것인가. 그 선택은 우리들 손에 달렸으며 선택의 기준은 분명해졌다. 국민을 향하여 항상 열려 있으며, 모든 일을 국민과 함께 나누고 만들어 내고, 날마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런 대통령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 나라가 그 간의 의기소침함을 벗고 희망의 대한민국으로 다시 솟아오르는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이제는 못 만나 뵈올 김종길 시인께서 권하는 대로, 험하고 각박한 세상을 그래도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하여 좀더 착하고 슬기로운 것을 생각하는 지도자를 만났으면 하고 또 그런 국민들이 모두 되었으면 한다. 내일은 우리 손에 달린 것 아닌가.

2017-04-06

지방, 어떻게 살릴 것인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지방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수도권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지역들이 소멸 위기에 처하여 있다고 한다. 2,30대 여성 인구합계를 65세 이상 전체 인구의 합으로 나눈 결과를 `지방소멸위험지수`라 부른다는데, 이 수치가 1 이하이면 해당 지역에 소멸의 위험이 시작된다고 한다. 실제로 계산해 보면, 경상북도는 0.64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미 들어섰으며, 전국에서 그 소멸 위험도가 가장 심각한 10개 읍면동들 가운데 경북의 지역들이 세 군데나 들어있다고 한다. 우리 도시 포항도 그 수치가 0.92로 그 위험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으로 보인다. 즉, 인구 추이로 볼 때에 우리 지역의 전반적인 쇠퇴는 이미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산업도시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온 이 지역이 지금은 왜 이러는 것일까. 이 같은 조짐을 떨쳐내고 다시 일어설 가능성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일까.`도시의 승리(Triumph of the City)`라는 책을 쓴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Edward Glaeser)는 `성공하는 도시의 비결은 건축물이나 하드웨어의 확충에 있다기 보다 인적 자본, 특별히 교육수준이 높은 젊은 인구의 확보에 있다`고 했다. 지역이 풍성해 지고 활력을 되찾는 방법으로, 청년 인구를 늘여야 하는 것은 거의 당연해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Happy City)`를 쓴 찰스 몽고메리(Charles Montgomery)도 도시가 성공을 이어가려면 사람들 사이의 행복감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이며, 특별히 젊은 인구의 증가가 도시행복감 수치와 비례한다고 했다.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 지역에는 전국적 지명도가 꽤 높은 대학들이 이미 여럿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들 청년 대학생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 지역에서 인생의 가장 찬란한 학창을 지나고 있는 젊은 대학생들은 이 지역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혹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이상한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이 지역의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나 열려 있는가. 지역의 대학생들은 재학 중에는 지역과 전혀 상관없는 `방문자`처럼 학창을 지내다가, 졸업하면 주로 수도권을 향하여 다시 `이방인`이 되어 떠나가지 않는가.물론, 그들 대학생들이 지역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을 터이다. 하지만, 지역의 필요를 잘 살펴서 이들 젊은 청년들이 섬기고 활약할 기회들을 열어 주어야 할 책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학창시절의 경험이 이어져 그들이 졸업한 후에도 지역에 남아 이 지역을 지속적으로 풍성하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런 가능성을 지닌 소중한 젊은 대학생들을 수천이나 가졌으면서도 적극적으로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도시의 청년 정책도 돌아볼 일이겠지만, 지역의 대학생들을 바라보는 지역 시민들의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 그들을 지역으로 더욱 불러내기로 하자. 지역에 관하여 배우게 하고 지역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하자. 배움의 길에 서 있는 청년 대학생들은 지역이 진정으로 부른다면 응답하지 않을 것인가.이 도시의 활력은 젊음을 불러내어 되찾기로 하자. 지역이 다시 살아나야 할 필요와 청년 대학생들의 지식과 열정이 만나게 하자. `이방인`의 모습을 벗고, 지역의 시민들과 어울리게 하자. `방문자`의 태도를 떨치고 지역의 문제들을 만나게 하자. 청년 대학생들은 체험으로 풍성하게 배울 것이며, 우리 지역은 그들과 함께 싱싱하게 살아날 것이다.

2017-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