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내일은 다르게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새 대통령이 등장했다. 지난 몇 달 간 쉽지 않았던 산고를 겪고 우리 앞에 서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에 대하여 거는 기대가 높은가 하면 심심치 않은 우려도 있다. 그는 국민 앞에 어떤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 그는 나라 앞에 어떤 지도자로 설 것인가. 그가 오늘처럼 어려운 때에 여러 힘든 일들을 헤쳐나가야 할 것이므로, 걱정과 희망을 담아 여러 가닥 조언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약속했던 대로 국민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하고 나라의 앞길을 생각하며 모든 일에 신중해야 할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재수 취준생`이었던 처지를 늘 가슴에 담고, 국민을 위하여 온 힘을 쏟을 것이라는 간절함을 잊지 말 일이며, 나라와 민족의 미래가 날마다 나은 방향으로 움직여 가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그간의 여러 일들로 국민들의 가슴에는 상처도 있고 의심도 있다. 대통령은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부터 잘 해야 할 것이다.그렇다면, 국민은 어떤가. 길고 긴 날들을 기다려 대통령이 선출되었으니 이제 그만일까. 선거를 통하여 지도자를 선택하였으니 이제 손을 놓고 바라보면 되는 것인가. 그동안 우리 국민은 위대하였다. 정치 형태로서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우리 국민은 생활 방식으로서 민주주의를 실천하였다. 하지만, 선출된 바로 그가 고백하듯이 이제 겨우 시작인 것이다. 국민은 다시 고삐를 조이는 마음으로 대통령과 그가 하는 일들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민주적 사고와 의식이 행동을 통하여 구체화되는 경험을 이미 하였으며, 우리는 이를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몇 가지 덕목들을 생각해 보자.첫째, 열린 사고. 나만 옳다는 생각을 이제는 벗기로 하자. 나의 주장만 옳다는 독선이 우리에게 얼마나 어려운 시간을 가져다주었는지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만큼 남들의 생각에도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기로 하자. 함께 고심하고 다 같이 만들어 가는 나라로 나아가기로 하자. 협동과 타협 없이는 늘 같은 자리에 머물 뿐임을 명심하기로 하자.둘째, 참여하는 마음. 투표로 참여하였지만, 이제는 지켜보는 마음으로 참여하기로 하자. 우리는 이미 선출한 권력이 실패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한 바가 아닌가. 이제는 더 이상 권력의 오만과 독주를 방관하거나 용서하지 않기로 하자.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국민을 무서워하는 대통령과 정부가 되도록 하자. 당신들이 잘못 하는 날, 국민은 언제라도 바꾸어 낼 것임을 명심하게 하자. 투표 뿐 아니라 조언도 하고 제안도 하여, 앞에 선 이들이 긴장하게 하자.셋째, 공감과 배려. 나라와 사회가 잘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운명 공동체임을 생각하기로 하자. 추격과 경쟁으로 치열하게 살아왔다면, 이제는 함께 잘 살아가는 공동체를 한번 만들어 보기로 하자. 지역갈등도 부끄럽고 세대갈등도 이겨내야 하지 않을까. 온갖 차별을 넘어 화합으로 일어서기로 하자. 사람이 모두 사람으로 존중받도록 하고, 다음세대 청년들을 더욱 세워 주기로 하자. 어려운 이웃들에 눈길을 돌리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로 하자. 더 이상 흩어 버리지 않도록 하고, 모으고 모아 모두 잘 어울리는 나라를 만들기로 하자.국민에게 힘이 있음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세계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대한 국민에게 손색이 없다. 더없이 높은 자긍심으로 더욱 싱싱한 나라를 만들어 내기로 하자. 이를 이루어 낼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각자임을 마음에 새기기로 하자. 대통령은 국민을 섬기고 국민은 나라를 섬기기로 하자. 대통령은 최선을 다하고 국민은 지켜보기로 하자. 대통령은 다시 실족하지 않도록 하고, 국민은 더 이상 실수하지 않도록 하자. 내일은 다르게 펼쳐야 한다.

2017-05-11

건투를 빈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만약 그 때 그 백화점에 취직했더라면, 어쩌면 평생 그 일리노이 시골 마을을 떠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마흔 번째 대통령을 지냈던 로널드 레이건의 자서전 첫 줄이다. 그의 고향 일리노이주의 딕슨이라는 동네는 지금도 인구 만오천을 겨우 헤아리는 아주 작은 마을. 고교 졸업을 눈 앞에 두었을 즈음, 마을에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몽고메리 워드` 백화점이 들어온다는 뉴스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흥분하였지만, 이를 누구보다 반겼던 이들은 마침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었던 레이건과 그의 친구들.그 가운데에도 청년 레이건은 학교 성적이 좋았을 뿐 아니라, 출중한 외모에 학교방송국 아나운서로 그리고 마을 한 가운데를 흐르는 강에서 인명구조원으로 맹활약을 하였던 터이라 누가 보아도 새 백화점 신입직원 자리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다.아니 그런데 어쩐 일이었을까, 동급생들이 모두 어렵지 않게 일자리를 잡았지만, 그는 청천벽력처럼 낙방하고 말았던 것이다. 도무지 벌어질 수 없는 일이 발생했으므로, 청년 레이건의 낙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대통령직을 성공적으로 마치고도 한참이나 지나서 쓴 자서전 첫 줄이 이를 회상하고 있었을까! 그런데, 그가 무엇이라 적었는지 다시 읽어 보자.아뿔싸, 그 때 만약 그 직장을 잡았었더라면 시골 마을에 그냥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돌아보는 마음이란다. 그 때는 깊디깊은 상처를 안고, 졸업하자마자 도망치듯 떠나 버렸던 마을이었다.하지만, 90을 넘겨 살아낸 끝에 돌이켜 보니 그 날의 실패와 좌절이 안겨 준 것은 절망의 낭떠러지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과 희망의 사다리였다는 것이 아닌가.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특별히, 이 나라 청년들의 오늘 상태는 어떠한가 묻는 것이다. `88만원 세대`는 이제는 고전인가, 이 나라 청년들 열 명 가운데 넷은 `이번 생은 망했다`며 늘 `현실은 시궁창`이라고 하는 모양이다.뭘 해도 되는 게 없으니, 이젠 아예 `격렬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며 `다음 생을 기대하겠다`고 하니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도울 것인가. `미친 세상에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다` 고 한다. 오죽 힘이 들면 이토록 자조적일까.하지만, 정신과 의사이며 작가였던 스캇 펙은 그의 책 `가지않은 길(The Road Less Traveled)`의 첫 머리에서 지나칠 만큼 간명하게 적고 있다. `삶은 힘들다(Life is difficult.)` 문장이 놀랍게도 현재형이다. 살아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지금 이 순간이` 힘들다는 것이다.오늘이 버겁지 않은 이, 나와 보라고 하자. 이제 오늘을 사는 청년들에게 차라리 자신있게 권하고 싶다.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이 가진 상황이 어려운 것을 인정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오늘은 만만치 않은 것 또한 받아들이기로 하자. 차라리 그 어떤 상황에라도 묵묵히 최선을 던지며 저 끝에 돌아보는 흐뭇함을 누리기로 하자.대선에 나선 후보들의 생각 가운데 청년을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당신들은 오히려 의연한 젊은이들이 되기로 하자. 정답없는 세상에 내동댕이쳐 진 것으로 자조하기 보다는, 없는 정답을 만들어 가는 나만의 열정을 불태우기로 하자. 처절한 낙담으로 내려가기보다 불같은 기대로 올라가기로 하자. 어차피 이 나라는 청년들이 살려내야 한다. 어른들이라고 뾰족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는 걸 보고 있지 않은가. 사회도 바꾸고 경제도 건지며 문화도 일구어 주시라. 젊은 사자들이 포효하는 나라가 한번 되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바로 그 힘든 자리에서 이 나라의 내일을 빚어내시라. 건투를 빈다.

2017-05-04

정답은 없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영국 작가 조지 오웰(Geroge Orwell)은 미래를 다룬 그의 소설 `1984`에서, 1984년이 오면 모든 사람들은 한 가지 통일된 방향으로만 생각하고 똑같은 양식으로만 살아가게 될 것이며 이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도록 엄격한 감시자 빅 브라더(Big Brother)의 통제 앞에 놓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으며 세상은 오히려 그 반대로 나아가는 것 아닌가. 마침 1984년에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소설 `1984`가 이야기한 어둡고 암울하며 답답한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며, 애플사(Apple Inc.)의 컴퓨터가 이를 막아낼 것이라면서 맥킨토시(McKintosh) 컴퓨터를 출시하여 성공의 서막을 열었다. 이 새로운 컴퓨터와 함께 세상은 다양하고 풍성해 질 것이며 사람들은 바야흐로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될 것이라면서. 바로 이런 선언을 했던 TV광고는 이 생각을 전하면서 컴퓨터는 아예 보여주지도 않았지만,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오웰은 왜 그렇게 생각하였으며 빅브라더를 떠올렸을까. 그는 아마도 20세기 초중반을 살면서 정답을 기다리지 않았을까. 그도 그럴 것이 혼돈과 무질서 그리고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어쩌면 해결책으로서 `정답이 있는 세상`을 기대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빅브라더는 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세상을 마침내 건져 올릴 기대주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 되었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재미없으며 가슴 먹먹한 세상이 되었을까. 또 우리는 얼마나 가슴 졸이며 숨쉬기조차 버거운 삶을 살고 있었을까.다행히 세상은 그렇게 흘러오지 않았으며 오늘 우리가 겪는 세상은 얼마나 풍성하고 다양한 것인가. 공교롭게도 미래학자 네이스빗(John Naisbitt)은 그의 책 `메가트렌드(Megatrends)`에서 현대인들은 양자택일을 강요받던 삶에서 다양한 선택의 폭이 허용되는 쪽으로 이미 나아가고 있다고 하였다.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다양한 선택의 폭을 경험하고 있는가. 아니 이를 인정하며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우리는 우리 사회에 무슨 정해진 정답이라도 있어야 하는 양 우리 자신들을 그 어떤 통제된 선택 안으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닌가.대학에서 만나는 학생들이 더러 정답을 물어오곤 한다.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할 젊은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물어오는 것이다. 이들을 대하는 선배들은 어떤 답을 주어야 하는 것인가. 아마도 예전에는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성적을 거두어 좋은 직장 구하고 좋은 배우자 만나서 성실히 살아가는 것으로 정답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열심히 한 공부가 금세 낡은 학문이 되고 마는 것을 이미 목격하고 있으며, 좋은 직장은 아예 상상 속에 없는지도 모른다. 길이 보이지 않으며 앞이 막막해 보이는 것이다. 끊임없이 찾아보지만, 찾아야 할 정답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너무나 풍성해진 다양성의 바다 가운데 정답이 숨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어려운 틈바구니에도 번득이듯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사람들을 보라. 굳이 한사람 한사람 예를 들 것도 없이, 그들은 오히려 더욱 묵직한 그물을 들어 올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제 정답 찾기를 멈추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대신, 정답이 숨어버린 다양한 지평에 차라리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가진 각자의 처지와 능력을 밑천삼아 기회의 바다에서 무엇이라도 들어 올릴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정답이라 생각한 길을 따라 곱게 쌓아온 사람들이 오히려 부끄러울 만큼 당신만의 멋진 길을 찾아내면 되지 않을까.생각해 보니 스티브 잡스는 대학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미 공평해진 다양성의 바다에서 자신만의 지평을 열어내었던 것이다. 세상에, 정답은 없다.

2017-04-27

세상을 바꾼다

▲ 장규열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처음엔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구호들이 더러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외침. 교육은 미래세대를 기르는 일이므로, 긴 호흡으로 먼 앞날을 바라보며 정성으로 든든하게 가꾸어 가야 한다는 생각은 참으로 당연하다. 적어도 백년 앞을 생각하며 오늘 우리는 다음 세대를 길러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그리하고 있는지. 당신은 과연 교육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교육을 맡은 이가 바뀔 때마다 바람처럼 생겨나고 구름처럼 사라지는 교육 정책에 백년대계가 아슬아슬하다. 이번 대선에도 유력후보들이 내어놓은 교육 관련 정책 제안에 우리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또다시 그 소용돌이의 가능성에 불안불안하다. 이제라도 우리는 교육의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기본부터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교육은 물론 사람을 기르는 일이며 사회에 덕이 되는 구성원으로 자라게 하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간 사회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나라의 필요 때문이었을까, 교육의 목표를 `경쟁에서 이기는 일`로 바꾸어 놓지 않았는가. 학교에 가는 일이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일이 되고 보니, 모든 것이 힘들 수 밖에 없다. 숙제가 힘들고 시험이 힘들며, 성적이 힘들고 석차가 힘들다.배우는 일이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일이 되었으며, 서로 돌아보고 배려하는 협력은 사라졌다. 모든 과목에서 남들을 이겨야 할 뿐 아니라, 사회봉사도 음악예술도 아니 체육활동도 나를 단련해 가는 일이기 보다는 남들을 꺾고 이겨내는 일에만 골몰할 뿐이다. 학교에 가는 일이 고통이고, 선생님의 역할이 버거우며, 이를 바라보는 학부모들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래서 남은 것은 처절한 입시 경쟁이고 본래 꿈꾸었던 `사람을 기르는 교육`은 그 어디에도 없다.그렇게 바뀌어 버린 교육의 목표를 가지고는 `즐거운 교육`을 구현할 방법이 없다. 진정으로 사람을 기르는 교육을 이루어 낼 길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심리학자 피아제(Jean Piaget)는 교육의 목표가 `지식의 양을 늘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사람을 기르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이제 우리는 훌륭한 인격체로서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에 마음을 쓰기로 하자. 남을 이겨내는 데 집중하기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기르기로 하자. 내게 돌아올 이익에도 슬기로울 터이지만, 부족한 이웃들과 나누는 일에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기르기로 하자. 배우는 과목들에도 모자라지 않아야 하지만, 지·덕·체의 균형에도 치우침이 없는 사람을 기르기로 하자.이렇게 덕스럽고 풍성한 교육이 벌어지려면, 학교는 즐거운 곳이어야 한다. 우선, 아침마다 학교로 향하는 학생들의 발걸음이 즐겁고 가벼워야 한다. 오늘 배울 일들과 오늘 만날 친구들을 한껏 기대하며 옮기는 발걸음이 즐거워야 한다. 이들 학생들을 교실에서 반겨 이 모든 배움과 나눔에 정성을 쏟을 선생님들이 즐거워야 한다. 또한, 이들을 곁에서 바라보며 응원하고 격려하는 학부모들의 기대어린 마음이 항상 즐거워야 한다.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교육이야말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힘센 도구`라고 하였다. 오늘 마뜩찮은 세상의 모습이 내일이면 그래도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교육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다.교육 정책을 생각함에 있어 세세한 방법이나 지침도 물론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하염없이 바꾸어도, 교육을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는 진정한 변화는 찾아오지 않는다. 교육은 경쟁을 익히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어 내는 꿈이 담긴 일이다.다음 세대에 한없는 기대를 걸기로 하자. 교육이 펼쳐낼 내일에 한껏 높은 소망을 품기로 하자. 교육이 세상을 바꿀 것이므로.

2017-04-20

싸우며 자란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아이들이 싸우면 어른들은 은근히 이를 즐긴다. 다툼은 늘 아주 작은 일로부터 시작하지만 이게 슬슬 커지면서 갈등으로 번지고 급기야 어른 싸움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는 싸우면서 자란다`는 생각을 한 자락 깔고 사뭇 즐기며 지켜보는 것이다. 아마도 어른들은 아이들이 다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실제로 쑥쑥 자라가기를 기대하는 것 아닐까.오래 전 한 조사에서, 싸움을 한 번도 안 했다는 친구들이 학교에서 19%, 집에서는 13% 밖에 안 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 부모들의 30% 정도는 아이들이 싸울 때, `다치지만 않으면 두고 본다`고 했다. 어른이 되어 돌아보니, 조용하게 공부만 잘 하던 친구들보다는 이리저리 치이고 내몰리며 갈등의 자리를 만들고 또 그런 자리에 섰던 친구들이 오히려 다양하고 풍성한 이야기들을 만들고 있는 것 아닌가.한 때, 이 나라의 온 백성을 국민총화와 일치단결로 묶으며 한 방향으로만 몰아 세웠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어디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리지만, 그 시절에는 무엇에라도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일은 `위험한`일이었고 `불온한` 발상이었다. 나라의 모든 일들이 몇 안 되는 사람들의 기획과 조직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흘러가야 했던 것이다. 과연, 그래서 우리는 성공했는가. 제법 잘 사는 나라가 되었는데도 흡족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남들이 우리를 부러워도 한다는데, 정작 우리들 마음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싸우며 자라는 것은 아이들만이 아닌 것이다. 어른도 사회도 그리고 나라도 겨루며 다투며 자라야 하는 것이다. 고여있던 물이 썩어 들어갔던 일을 우리는 이미 목격하지 않았는가. 건강하고 싱싱한 느낌들, 생각들, 의견들을 나누고 겨루는 가운데 보다 나은 방향이 보이고 더욱 행복한 결론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진화론자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살펴보니,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동물은 절대로 아니지만 `다양성`과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할 줄 아는 유일한 종이었다. 미국의 지미 카터(Jimmy Carter) 전 대통령도 한 연설에서 `우리들 안의 다른 생각들, 다른 소망들, 다른 꿈들이 바로 우리들 모두의 힘`이라고 하였다. 소설가 마야 안젤로우(Maya Angelou)도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여러 가지 색깔이 함께 어우러질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고 하였다.실제로 그럴까. 혹 그냥 잡다하고 복잡해 지는 것은 아닐까. 자칫 혼란스럽고 어지러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이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다른 생각들이 모여서 결국 보다 든든한 사회를 만들고 나라의 저력도 다양성을 통하여 생겨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지 않았을까. 우리들 가운데 일부러 틀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각자의 처지에 따라 바람직한 소망과 생각들을 내어놓고 다루며 혹 바로 잡아도 가면서 지금보다 더 나은 결론으로 모아갈 적에야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처음 가졌던 아슬아슬한 느낌도 이겨 내면서 우리가 가진 매듭들을 하나씩 풀어가는 지혜를 발휘했으면 한다.그간 우리에게 다툼이나 갈등이 있었다면, 이를 차라리 나은 길로 나아가기 위한 주춧돌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하자. 아직도 남아있는 골칫거리와 싸움거리가 있다면, 이를 오히려 발전의 기틀로 삼기로 하자. 아이는 어른들의 선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이들이 싸우면서 몸과 마음이 자라는 걸 믿는다면, 어른들도 겨루면서 내일의 희망을 건져 올리기로 하자.우리에게는 어설픈 이념의 다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생각의 겨룸이 있을 뿐이다. 어른도 싸우면서 자란다.

2017-04-13

우리 손에 달린 내일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4월 첫 날에 소중한 은사 한 분을 보내 드렸다. 시인이자 영문학자셨던 김종길 교수께서 남기신 시 한 편은 이렇게 권하고 있다.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그러나 세상은 살만한 곳./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좀더 착하고 슬기로운 것을/생각하라.” -`설날 아침에`나라는 과연 설날 아침을 또다시 기다리듯이, 새 지도자를 가려내기 위하여 분주한 모습이다. 마침 정파마다 각각 대통령 후보들을 찾았다고 한다. 저마다 혜안과 묘수를 가졌다고 주장하며, 하는 말마다 솔깃한 소리들 일색인 것이다. 대세를 이야기하는가 하면 역전을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무엇을 위함이었는지 우리 보통 시민들은 날마다 새겨야 하지 않을까. 이 일이 진정으로 나라를 바로 섬기기 위함이며 국민을 걱정없이 살게 하려 함이라면, 정작 누군가를 가려 뽑아야 하는 국민들이 이 모든 언변과 행태 한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의 생각과 행동 가운데 참으로 `국민`이 있는지 살필 일이다.지난 겨울 동안 시민들이 만들어 낸 위대한 역사의 매듭을 잘 엮어내기 위하여,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에게서 우리는 어떤 모습을 기대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 먼저, 열려 있는가. 시민들을 향한 그의 마음과 눈이 열려 있는가. 시민의 생각을 헤아리고 그들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소신과 주장의 벽이 높은 나머지, 그들만의 세상을 펼쳐가는 일을 우리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시민 사회의 아픔을 공감하고 가장 낮은 골짜기를 배려하는 지도자를 우리는 원하는 것이다. 평소에도 `소통`이 중요하겠지만, 나라가 어려움을 겪을 적에는 특별히 `열려있을 소통`을 기대하는 것이다.둘째, 함께 하는가. `민주주의`의 처음 생각은 `시민들 스스로 다스리기`를 구현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믿어 맡겨진 직을 수행하는 이로서, 너른 지평의 중지를 반듯하게 모아 바른 판단을 만들어 내는 리더십을 바라는 것이다.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늘 새기면서 모든 일에 임하는 당신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 판단의 기초를 `국민의 처지`에 두고 생각을 쌓아 올리는 지도자를 만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글이 없어 나누지 못하는 `어린 백성을 어엿비 너겨` 세종은 한글을 만들지 않았던가.셋째, 희망을 말하는가. 과연 어려움으로 가득한 경제 상황이며 난관으로 에워 쌓인 국제 환경이다. 이를 다시 살려내고 이겨낼만한 철학과 지혜가 그에게 있는가. 한 사람이 이 모든 일을 할 수 없을 터에, 역량과 지략을 가진 인사들을 덕으로 모아낼 수 있을 것인가. 온 나라를 다시 한번 `희망을 이야기하는` 공동체로 엮어낼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에 대하여 여러 갈래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칫 어려움의 나락으로 떨어질 만한 위기의 국면에서, 나라와 시민들을 한 마음으로 서로 다독이게 하고 함께하는 영감을 불러내어 미국을 미국답게 새롭게 이끌어 낸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이제 겨우 한 달 후,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만날 것인가. 그 선택은 우리들 손에 달렸으며 선택의 기준은 분명해졌다. 국민을 향하여 항상 열려 있으며, 모든 일을 국민과 함께 나누고 만들어 내고, 날마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그런 대통령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이 나라가 그 간의 의기소침함을 벗고 희망의 대한민국으로 다시 솟아오르는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이제는 못 만나 뵈올 김종길 시인께서 권하는 대로, 험하고 각박한 세상을 그래도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하여 좀더 착하고 슬기로운 것을 생각하는 지도자를 만났으면 하고 또 그런 국민들이 모두 되었으면 한다. 내일은 우리 손에 달린 것 아닌가.

2017-04-06

지방, 어떻게 살릴 것인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지방이 사라지고 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수도권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지역들이 소멸 위기에 처하여 있다고 한다. 2,30대 여성 인구합계를 65세 이상 전체 인구의 합으로 나눈 결과를 `지방소멸위험지수`라 부른다는데, 이 수치가 1 이하이면 해당 지역에 소멸의 위험이 시작된다고 한다. 실제로 계산해 보면, 경상북도는 0.64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이미 들어섰으며, 전국에서 그 소멸 위험도가 가장 심각한 10개 읍면동들 가운데 경북의 지역들이 세 군데나 들어있다고 한다. 우리 도시 포항도 그 수치가 0.92로 그 위험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으로 보인다. 즉, 인구 추이로 볼 때에 우리 지역의 전반적인 쇠퇴는 이미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산업도시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온 이 지역이 지금은 왜 이러는 것일까. 이 같은 조짐을 떨쳐내고 다시 일어설 가능성은 어떻게 찾아야 하는 것일까.`도시의 승리(Triumph of the City)`라는 책을 쓴 경제학자 에드워드 글레이저(Edward Glaeser)는 `성공하는 도시의 비결은 건축물이나 하드웨어의 확충에 있다기 보다 인적 자본, 특별히 교육수준이 높은 젊은 인구의 확보에 있다`고 했다. 지역이 풍성해 지고 활력을 되찾는 방법으로, 청년 인구를 늘여야 하는 것은 거의 당연해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도시에서 행복한가(Happy City)`를 쓴 찰스 몽고메리(Charles Montgomery)도 도시가 성공을 이어가려면 사람들 사이의 행복감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이며, 특별히 젊은 인구의 증가가 도시행복감 수치와 비례한다고 했다.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 지역에는 전국적 지명도가 꽤 높은 대학들이 이미 여럿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들 청년 대학생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 지역에서 인생의 가장 찬란한 학창을 지나고 있는 젊은 대학생들은 이 지역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혹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이상한 동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이 지역의 시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무엇인가 기여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나 열려 있는가. 지역의 대학생들은 재학 중에는 지역과 전혀 상관없는 `방문자`처럼 학창을 지내다가, 졸업하면 주로 수도권을 향하여 다시 `이방인`이 되어 떠나가지 않는가.물론, 그들 대학생들이 지역을 바라보는 태도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을 터이다. 하지만, 지역의 필요를 잘 살펴서 이들 젊은 청년들이 섬기고 활약할 기회들을 열어 주어야 할 책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학창시절의 경험이 이어져 그들이 졸업한 후에도 지역에 남아 이 지역을 지속적으로 풍성하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런 가능성을 지닌 소중한 젊은 대학생들을 수천이나 가졌으면서도 적극적으로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도시의 청년 정책도 돌아볼 일이겠지만, 지역의 대학생들을 바라보는 지역 시민들의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 그들을 지역으로 더욱 불러내기로 하자. 지역에 관하여 배우게 하고 지역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하자. 배움의 길에 서 있는 청년 대학생들은 지역이 진정으로 부른다면 응답하지 않을 것인가.이 도시의 활력은 젊음을 불러내어 되찾기로 하자. 지역이 다시 살아나야 할 필요와 청년 대학생들의 지식과 열정이 만나게 하자. `이방인`의 모습을 벗고, 지역의 시민들과 어울리게 하자. `방문자`의 태도를 떨치고 지역의 문제들을 만나게 하자. 청년 대학생들은 체험으로 풍성하게 배울 것이며, 우리 지역은 그들과 함께 싱싱하게 살아날 것이다.

2017-03-30

평생 배운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사람은 언제까지 배워야 하는 것일까. 여지껏 우리는 대개 만 6세에 시작하여 16년 내외의 교육과정을 거치며 어른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 초-중-고-대로 이어지는 교육모델은 충분한 것일까. 돌이켜 보면, 이 모델은 근대적 교육개념이 정리되기 시작했던 초반에 만들어 지고 각국의 사정에 따라 정착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구한말 교육개혁을 시도했던 이래 일제를 거쳐 해방 후 1951년에 이 같은 학제가 교육당국에 의해 정책적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여러 논의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 기본골격은 바뀌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오늘 대학을 나오는 청년들은 어떤 미래를 기대하고 있을까. 그들이 획득한 학사학위는 그들의 삶에 어떤 약속을 해 주는 것일까. 20대 초중반에 교육을 마친 젊은이는 그가 앞으로 살아갈 60년 정도의 삶에 대하여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무엇인가 더 배워야 할 필요가 혹 있지는 않을까. 여러 가닥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빌 게이츠는 그의 책 `The Road Ahead(미래로 가는 길)`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투자는 바로 `교육`이라고 정리하면서, 교육의 목표를 `학위를 받는 것으로부터 평생 배우는 일(Lifelong Learning)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유네스코(UNESCO)는 통합적 평생교육을 21세기 교육의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고, 산하에 평생교육원(UIL)을 두어 성인 교육에 방점을 둔 국제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독일의 모든 시민들은 이미 평생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다양한 교육적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미국은 지역의 커뮤니티 칼리지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육의 기회를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중국은 `정교한 평생교육제도의 구축`을 주요 교육정책 목표로 하여 국민 모두에 의한 평생교육을 구현하려 애쓰고 있다.우리는 어찌 하고 있는가. 지역에는 평생교육을 지원할 어떤 자원들이 있는가. 평생교육은 이제 정부 교육당국에만 의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지역의 의미있는 평생교육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지역의 대학들이 나서야 한다. 이 나라에서 지역 대학들이 해야 할 일들이 여러 갈래일 터이지만, 지역의 평생교육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관으로 이들을 꼽고 싶다. `지역협력`이라는 듣기 좋은 슬로건을 대학이 가장 슬기롭게 구현할 방법도 평생교육에 있는 것이다. 대학이 언제까지 지역에 존재하되 수도권만 바라보며 지낼 것인가. 지역 사회와 함께 호흡하고 서로 도우며 더불어 발전을 도모하는 길은 지역에서 평생교육의 지평을 열고 적극적으로 지역 시민들의 미래를 펼쳐갈 때에 가능할 것이다. 인구절벽 현상으로 대학 신입생의 숫자도 가공할 만큼 줄어들고 있지 않은가. 이제 지역의 대학이 스스로의 경쟁력을 다시 쌓아 올린다는 의미에서도 평생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인 것이다.지역의 시민들이 평생 배우는 일을 돕고, 지역에서 대학의 존재 이유를 다시 발견하며, 지역 사회와 공존의 모델을 만들어 가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하겠다. 그동안 어딘가 `이방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지역의 대학들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지역의 발전에 기여하며 함께 성장해 가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낼 열쇠는 `평생학습`에 있다.혹, 기존 대학교육이 가졌던 전문성 교육에 손상을 입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겠지만, 균형과 조율의 묘를 한껏 발휘하여 대학발전모델 창출에 오히려 덕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대학이 살고 지역도 일어나는 전환점이 보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평생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은 언제까지 20대 청년들만 가르칠 것인가. 지역의 당신은 이제 그만 배울 것인가.

2017-03-23

오른쪽, 왼쪽의 문제인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새해가 되어 무엇인가 새로움을 기대하였지만 정작 새해 첫 날 아침을 맞고 보면, 어제와 똑같은 그렇고 그런 날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적에 우리는 모두 허망하였다. 지난 주 우리에게 다가온 탄핵 소식은 그간의 기대와 바람을 얼마나 채워 주고 있는가. 이것이 그저 정치인들에게나 새로운 구도와 기대를 안겨 주는 것은 혹시 아닐까.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이 나라의 새로운 모습이 실제로 우리들 눈 앞에 펼쳐질 것인가.우리는 생각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이 나라가 풍요롭고 자유로운 땅이 되길 원한다. 어느 누구도 부당하게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함께 부지런히 살아가면서 행복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응분의 소득이 돌아가고, 소비와 투자가 모두 적절하게 이루어져서 이 나라가 나날이 발전해 가는 모습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가을 어느날 나누어진 소식은 이 나라의 돌아가는 모습이 그 같은 기대를 무참히도 배신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민들은 이 나라가 다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으로 태어나길 겨울 내내 소망하였던 것이다. `이게 나라냐`는 소리도 그래서 했을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오른쪽과 왼쪽의 문제란 말인가.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이 사회가 공평하고 공정하게 나아가는 일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아닌가.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이 읽어내려 질 적에, 우리는 물론 그 결론 즉 주문의 향배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결론 한 소절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우리는 결정문의 나머지 내용들에 그리 눈길을 주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찬찬히 다시 들여다 본 결정문의 마지막 한 문장은 놀라운 하나의 선언을 담고 있었다. `이 사건 탄핵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그렇지 아니한가. 얼마나 기다렸던 목소리인가. 비록, 판결문 끝자락에 한 재판관의 보충의견으로 적히긴 하였지만, 필자는 이 한 줄의 의미를 깊이 새겼으면 한다.우리들의 생각이 과연, 보수가 다르고 진보가 다를 소망이었다는 말인가. 길거리에서 언제 우리가 심각한 우와 좌의 다툼을 만난다는 말인가. 하루하루의 삶을 성실하게 꾸려가며 일상의 행복을 따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지금 이 나라가 가진 문제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각자의 자리를 편안하게 지키며 삶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혹, 정치인들이 본인들의 영달을 꿈꾸며 몰아가는 `이념의 과잉`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편을 갈라 표를 더 얻으려 하는지 모르지만, 편이 갈려 행복할 국민은 이 땅에 없다.새 날이 오기도 하였지만 또 잘못 하면 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통 사람들이 또한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역사는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목격하지 않았는가. 정치인들을 포함한 이 나라의 리더들이 맡겨진 권한을 국민들의 기대에 맞게 사용하는지 끊임없이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 자신은 스스로 바라던 바를 지켜내고 있는지 살펴볼 일인 것이다.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한결같음과 부지런함이 없이 성공한 혁명은 없을 터이다.새해 아침에 느꼈던 그 허망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진정 새로운 무엇을 원한다면 진지함과 수고로움을 부어 미래를 앞당기는 수밖에 없음을 이미 알고 있지 아니한가. 이는 실로,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내 나라로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성숙함으로 만들어 내고 지켜내야 하는 새로움이며 자존감인 것이다.

2017-03-16

`소통`을 어찌할 것인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나라의 안과 밖이 모두 불편하다. 병이 깊은 환자인 양, 떨치고 일어서기까지 꽤 오래 걸리지 싶다. 탄핵 정국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처입은 시민들의 마음은 이후에라도 어떻게 보듬고 세울 것인가. 큰 나라들 사이와 남과 북의 긴장 가운데 힘없이 던져진 국민들은 어느 켠이 맞는 지 가늠조차 버겁다. 하루하루의 삶마저 녹록지 않은 처지인데, 도무지 갈피를 못 잡는 나라의 모습에 들려오는 소식들마다 가슴이 철렁거린다.한 가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부분이 있다. `소통`의 가능성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는 누구도 뉴스를 만들어 전달하는 일을 독차지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뉴스를 접하고 소비하는 시민들의 삶이 참으로 많이 바뀌었다. 15세기 활자술과 종이의 발명이 소통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바꾸었겠지만, 20세기에 인류가 만난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은 그 소통의 가능성을 모든 사람에게까지 열어 주었다. 디지털 이전의 세상에도 소통의 기술이 존재했지만, 그 역할은 사실 언론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위임된 상태로 진행되었다. 힘과 돈, 조직과 능력을 가진 이들이 독과점식으로 꾸려온 소통이 완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디지털 세계는 그들 뿐 아니라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소통`의 도구들이 주어졌으며 그 주체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이름하여, `소통의 혁명`이 벌어진 것이다.이 같은 기술의 발전과 소통의 확장이 오늘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된 환경에서 어쩔 수 없는 세대 차이는 다소 있겠으나, 이제는 모든 사람이 디지털 환경에서 핸드폰과 SNS를 어려움 없이 누리게 되었다. `정보의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누구라도 그 정보를 조작하거나 독점하는 일이 앞으로는 쉽지 않을 모양이다.개인의 습관 속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 버린 디지털환경은 곧이어 오늘날 기업환경과 경제환경을 바꾸어 버렸고, 법과 제도도 바꾸어 가고 있는 중이다. 네이버와 구글, 그리고 페이스북과 카카오톡은 오늘 세대의 기본적인 생활여건이 되지 않았는가. 기술이 사람들을 바꾸고, 그 사람들과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기업들이 바뀐 다음에, 법과 제도가 응답하듯 바뀌어 간다. 교육과 문화, 미디어도 허겁지겁 변화의 물결을 맞이하고 있다. 앨빈 토플러가 예견하였던 `지식의 혁명`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도래한 모양이다.오늘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이 같은 흐름을 잘 읽어 내고 있는가. 이미 가져버린 습관이 시사하는 바와는 다르게, `소통`을 과장이나 은폐, 조작이나 독점, 눈가림이나 부풀림으로 이해하고나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할 일이다.시대는 이미 돌아가지 못할 강을 건너와 버렸다. 서양 속담이 `Honesty is the best policy.`라고 했던가. 오늘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정직성과 진정성으로 소통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소통혁명은 한 톨의 거짓도 허용하지 않는다. 보는 눈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읽어 내리는 양심들이 도처에 번득인다. 당신의 거짓과 위선은 설 자리를 이미 잃었다. 당신의 진정한 시도는 이제 빛을 발할 것이다.탄핵도 지나가고 사드도 흘러간 자리에 우리에게 남을 것은 수많은 개인들과 그 모든 개인들의 눈과 귀일 것이다. 보다 투명하고 보다 진정어린 `소통`만 남아 사람들 사이 사이를 채워 줄 터이다. 구부려 알려진 일들이 반듯해 질 것이며, 부풀려 전해진 것들이 제 자리를 잡을 것이다. 혹 당신이 이를 아직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면, 이제라도 당신의 손 위에 들려있을 핸드폰을 내려다 볼 일이다. 당신을 속일 수 있을까?기술로 다가온 `소통의 혁명`이 뜻 밖에도 `민주주의의 꿈`을 당겨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2017-03-09

새 봄에 바란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언제 벌써 삼월이다. 이즈음 학교마다 새 학기가 열리고, 새 봄이 움터 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움추렸던 겨울 나라로부터 어깨를 펴고 이제는 따사로운 봄을 맞을 채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봄들은 기다려 진다.왜 특히 올해 봄은 더 기다려 지는가. 지난 겨울, 우리 모두를 유난히 어두운 생각으로 몰아 세웠던 사건들로부터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그들이 누구였든, 우리를 힘들게 하였던 이들의 모든 그늘로부터 헤어나야 한다. 시민들의 마음을 묶어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우선 해 낼 일이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는 일도 모두의 생각을 아우르며 이루어 내야 한다. 하지만 삼월의 아침 거리에 펄럭이는 태극기마저 왠지 낯설어 보이는 것은 누구의 탓이란 말인가? 들려오는 소식들로부터 이제는 희망을 떠올려야 하고 용기를 건져 내어야 한다.자연의 봄이야 섭리에 따라 저절로 우리에게 다가 오기에,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희망의 봄과 용기의 계절은 그렇게 저절로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생각을 모야야 하고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서로 열심히 소통하고 날마다 부추겨야 할 일이다. 사람마다 다른 생각들이 마음껏 펼쳐져야 한다. 다른 생각들을 막지 말 일이며,오히려 반겨야 한다. 펼쳐진 생각들이 하나같이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나눈 생각들을 모으고 모아 지혜로 걸러낼 일이다. 오늘의 꿈을 내일의 길로 만들어야 한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 되어, 나누기도 하고 모으기도 할 일이다. 이를, 우리는 민주주의라 부른다. 시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그동안 우리는 어찌 하였는가. 누군가에게 이 나라를 맡기고 살지 아니 하였는가. 근거도 없이, 그들이 당연히 좋은 길로 이끌어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었는가. 살아가는 일상마저 그들의 결정에 넋놓고 손놓고 지내지 않았던가.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라 믿어 중요한 일들을 나몰라라 하지 않았던가. 뽑을 때만 굽신거린다고 투덜대면서도, 그 언제 그들의 다짐을 확인하였는지 별반 기억이 없다. 앞으로도 높은 기대를 가지고 뽑기야 하겠지만, 하는 일마다 매서운 눈으로 함께 살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주인이 주인되는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한다.돌아보는 마음이 있다면, 내다보는 시선도 있을 일이다. 2017년의 봄은 참으로 새로운 봄으로 만들어야 한다. 소중한 어린이들에게 더는 부끄럽지 않아야 하며, 이 땅의 젊은이들이 희망을 품고 일어 서도록 도와야 한다. 98년 전 오늘, 태극기를 들었던 그들의 마음은 분명 다음 세대를 품었을 것이다. 이 땅의 청년들에게 더는 부끄러운 나라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가득했을 것이다.다음 세대가 자라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오늘 버젓이 내 나라이면서 이처럼 부끄러웠던 기억을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 다음 세대가 마음껏 꿈꾸는 나라가 되고 청년이 활기차게 숨쉬는 나라가 되어 앞날이 끝없이 기대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2017년의 봄에는, 새 나라를 꿈꾸기로 하자. 마침 21세기는 `디지털 소통`의 시대,가 아닌가. 주저함없이 망설임없이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나누어 희망과 용기의 새 날을 앞당겨 보자. 거침없는 생각의 바다는 풍요로운 미래를 앞당길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져다 주는 세상은 이제는 없다. 우리가 만드는 세상으로 바꾸어 보자.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본래 꿈을 되찾기로 하자.새 날을 이끌어 갈 사람들도 이제는 오만과 아집의 허울을 벗어야 한다. 당신을 믿어 맡겨줄 시민들의 소망과 기대를 날마다 새겨야 한다. 당신 때문에 상처 입을 시민이 이제는 없을 터이다. 어제의 옹졸한 리더십은 설 자리가 없다. 드넓은 생각의 바다를 한없이 품는 리더들이 되어 21세기의 새로움을 실천하시라.이미 다가온 봄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 돌아보아 자랑스러운 오늘이 되게 할 일이다.

2017-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