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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밤하늘은 우주의 역사책이다

늦은 밤, 하늘을 올려다본다. 도시의 불빛이 조금만 덜한 곳으로 가면, 밤하늘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별빛은 고요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시간의 흔적이다. 천문학자 친구 하나가 이런 말을 했다. ‘밤하늘은 사실 우주의 역사책이야.’ 얼른 와닿지 않았다. 설명을 듣고는 한동안 멍해졌다. 별빛은 ‘지금’ 모습이 아니라는 것. 빛이 엄청 빠르다지만, 우주 앞에서는 그조차 한없이 느리다. 태양 빛도 지구까지 오는 데에는 8분이 걸린다. 밤하늘의 별들 가운데 어떤 것은 수백 년, 수천 년, 수만 년 전에 출발한 빛이다. 더 먼 은하의 빛은 수백만 년, 수억 년을 날아와 우리 눈에 닿는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리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를 보고 있는 셈이다. 저 별들은 이미 그 자리에 없을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폭발했거나 사라졌는데, 마지막 빛이 아직 우주를 건너오는 중인 게다. 이제는 없는 별을 올려다보며 아름답다고 감탄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기묘하다. 인간은 늘 현재 속에 산다고 믿지만, 결국은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 위에 서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젊은 날의 상처, 누군가의 친절, 오래전 들었던 말 한 마디가 우리 안에서 아직도 빛처럼 살아 도착하고 있다. 어떤 이는 세상을 떠났는데도, 남긴 말과 온기가 한참 뒤까지 누군가의 삶 속에 살아남지 않는가. 별빛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다. 그래서일까.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남기고 사는가’가 중요하게 느껴진다. 돈이나 명함이나 지위는 생각보다 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한 인간이 남긴 마음의 흔적은 의외로 오래 간다. 누군가를 위로했던 말, 손을 잡아 주었던 순간, 정직하게 살아내려 했던 태도는 먼 우주의 별빛처럼 오래 남아 다른 사람의 가슴에 오래오래 도착한다. 우주를 생각할수록 인간 세상이 조금 우습다. 끝도 없이 넓은 우주 속에서, 지구는 먼지보다 작은 존재다. 작은 지구 위에서 인간들은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속이고 전쟁까지 벌인다. 권력을 두고 다투고, 자기 욕심 때문에 남을 짓밟는다. 우주의 시간으로 보면 우리네 한평생은 잠깐 번쩍였다 사라지는 찰나가 아닌가.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낸다. 우리는 ‘지방선거’를 건너고 있다. 곧 거리마다 현수막이 걸리고, 후보들은 자신을 외치며, 유권자들은 누구를 선택할지 고민한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지만, 과정 가운데 너무 쉽게 흥분하고 너무 쉽게 미워한다. 상대를 향한 조롱과 비난이 넘치고, 눈앞의 유불리만 계산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밤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면 어떨까. 수억 년 시간을 품은 ‘우주의 역사책’ 앞에서, 인간의 권력과 욕망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자리와 이름이 영원할 것처럼 다투지만, 모두 한순간을 스쳐가는 존재들일 뿐이다. 선거에 나선 후보들도, 곁에서 돕는 이들도, 이제 곧 한 표를 행사할 유권자들도 조금 더 넓게 또 길게 보고 깊이 생각했으면 한다. 진지한 선거가 되었으면 한다. 우주의 역사책 앞에 겸허해야 한다. 밤하늘은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치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그리 거대한 존재가 아니야.’ 오늘 밤도 별들은 소리 없이 빛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5-20

우주에서, 생명은 예외다

광대하고 막막한 우주를 떠올릴 때마다 한 가지 불편한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생명’이 사실은 우주의 기본값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 이 푸른 행성이 오히려 예외이며 우주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죽음의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별과 별 사이의 거리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멀고 멀며 우주 공간은 절대영도에 가까운 냉기와 치명적인 방사선으로 가득하다는 게 아닌가. 산소도, 물도, 생명을 유지할 그 어떤 조건도 없다. 광막한 공간인 우주를 기준으로 보면, 지구 위에서 숨 쉬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는 통계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사건이다. 생명은 자연스럽고 편만한 결과가 아니라, 지극히 드물고 이상하며 예외적인 사건이다. 생명의 탄생과 진화가 얼마나 복잡하고 우연적인 조건에 의존하는지를 생각해 본다. 우주 공간에서 목격되는 항성 간의 거리, 안정된 공전궤도와 자전궤적, 거대한 행성의 움직임, 자기장과 판구조 운동까지, 경이롭고 불가사이한 현상들이 모두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벌어진다. 셀 수 없는 조건들이 동시에 맞아떨어져야만 생명은 겨우 존재한다. 어느 하나라도 어긋나면 생명은 급전직하 침묵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무엇을 오해하고 있었을까. 우리는 일상 가운데 ‘생명이 퍼져 있는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지 않았을까. 차갑게 우주를 바라보면, 생명은 퍼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고립되어 있다. 광활한 우주 속에서 지구 위의 생명은 철저히 외로운 존재다. 끝모를 우주 공간에 오직 지구에만 존재하는 온갖 생명들이 사실은 그만큼 고독하며 고립된 처지인 셈이다. 지구와 생명은, 그만큼 외롭기 때문에 특별하지 않을까. 여기 존재하는 생명들 가운데 특히 인간은 더욱 독특하다. 우주를 경이롭게 바라본다면, 인간은 겸허해 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사고한다. 그러나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물론이고 지구 전체가 하나의 미세한 예외일 뿐이다. 그런 예외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의미를 만들고, 다투고 갈등하고, 때로는 서로를 미워하고 파괴한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기적에 가까운 조건 속에서 탄생하고 살아있는 존재들이 그 특별함의 가치를 제대로 새기고 이해하지 못한 채 소모되고 스러져 간다. 질문은 다시 되돌아온다. 이처럼 먹먹해 지도록 드문 조건 속에서 존재하는 생명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살아남는 것을 넘어, 그 희귀성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책임이 아닐까. 생명은 흔한 것이 아니라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우주 가운데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특별하고 소중한 것이다. 우주는 침묵하고 있다. 침묵 속에서 오직 지구에서만 소란하다. 영겁의 시간에 비하면, 사람이 살고 가는 시간은 너무나 짧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 견주면, 지구는 얼마나 작은 곳인가. 우주의 침묵과 암흑 가운데, 처절하도록 외로운 지구는 오늘도 살아 소란스럽다. 전쟁과 살육, 차별과 혐오, 가난과 질병, 갈등과 폭력으로 특별하고 외로운 이 시간과 공간을 허비하고 있다. 지구와 인간의 이토록 특별한 조건을 인식하면서, 우리만이라도 일상과 주변을 조화롭게 만들어 보았으면 싶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4-29

중동과 한반도, 휴전인가 정전인가

한반도는 평화로운가. 우리는 오랫동안 애매한 답을 반복해 왔다. 겉으로는 총성이 멈춘 지 오래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전쟁상태. 1953년 체결된 한국전쟁 정전협정은 전투를 멈추는 합의였을 뿐, 전쟁을 끝내는 선언이 아니었다.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멈춘 상태에 서 있을 뿐이다. 한반도에는 독특한 풍경이 즐비하다. 중무장 중인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둔 경계와 감시, 언제라도 긴장이 격발될 수 있는 구조적 불안정성. ‘휴전선’이라는 익숙한 표현은 오히려 현실을 희석시킨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군사분계선’이며, 그 선은 지리적 경계가 아니라 미완의 전쟁을 상징한다. ‘정전체제’의 의미는 오늘의 국제정세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중동에서 미국, 이스라엘과 이란 간 전쟁이 펼쳐지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충돌 가능성, 에너지공급망의 위기, 군사적 충돌이 경제와 외교를 동시에 뒤흔드는 양상이 전개된다. 중동 뿐 아니라 지구상 곳곳에서 긴장과 충돌은 오늘도 쉬지않고 벌어진다. 그 점에서, 한반도는 결코 예외가 아니다. ‘정전상태’라는 점을 되살피면 그 취약함이 금방 드러난다. 전쟁이 ‘종결된’ 지역은 외교적·법적 안전장치가 존재하지만, 전쟁이 ‘중단된’ 지역은 언제든 재개될 여지를 품는다. 한반도의 평화는 제도화된 평화가 아니라, 관리되는 긴장 위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첫째, 정전 상태의 본질을 직시해야 한다. 평화에 대한 과도한 낙관도, 전쟁에 대한 과도한 공포도 모두 현실을 왜곡한다. 현재 상태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으며 ‘관리 중인 긴장’임을 기억해야 한다. 정확한 인식이 적절한 정책 전개의 출발점이다. 둘째,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라는 두 단계의 의미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에 가깝지만, 평화협정은 법적 구속력을 갖는다.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상징적 선언이 아니라, 전쟁상태를 법적으로 종결하는 제도적 장치여야 한다. 이제는 남과 북뿐 아니라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음도 냉정하게 고려해야 한다. 셋째, 억지력과 대화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병행해야 할 전략이다. 강력한 방어태세 없이 평화를 기대하는 것은 공허하며, 대화없는 군사력은 긴장을 증폭시킨다. 한반도의 현실은 이 두 요소의 균형 위에서만 관리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시간’의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70년도 넘게 버텨온 정전체제는 하나의 구조로 굳어져 간다. 변화를 불러오기 위해서는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긴 안목과 일관된 전략이 필요하다. 중동의 사례가 보여주듯, 불안정한 지역질서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 한반도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의 ‘멈춤’을 ‘종결’로 전환하려는 적극적 의지가 필요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불편한 진실을 바로 볼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항구적인 평화는 주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만드는 선택과 설계의 결과일 터이다. 머나먼 중동의 전쟁 소식은 한반도의 내일을 도모하는 일에 타산지석으로 쓰여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4-15

호르무즈의 파도와 대한민국의 선택

트럼프 대통령이 또 한 번 물러섰다. 최후통첩의 시한을 앞두고 ‘2주간 폭격 중단’이라는 시간을 벌었고, 그 대가로 이란에 호르무즈 해협 개방을 요구했다. 겉으로는 긴장완화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군사적 압박과 협상의 교차 지점에서 흔히 나타나는 전술적 후퇴다. 문제는 그 파장이 한반도에까지 미친다는 데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원유 수송량의 약 20%가 지나는 병목이다. 이곳이 흔들리면 국제 유가가 출렁이고,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 경제는 곧바로 충격을 받는다. 지금 상황은 단순한 중동 분쟁이 아니라, 글로벌 에너지 질서와 해상 통제권을 둘러싼 구조적 충돌이다. 이런 국면에서 한국의 선택 기준은 명확해야 한다. 첫째는 동맹, 둘째는 시장, 셋째는 자율성이다. 세 축을 조정하는 것은 ‘국익’이라는 균형추다. 먼저 한미동맹이다. 대한민국 안보의 핵심 축이라는 점에서 미국과의 전략적 보조를 맞추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동맹의 작동원리는 자동 개입이 아니라 선택적 협력이어야 한다. 군사행동에 대한 직접적 참여는 최대한 신중해야 하며, 대신 정보·후방 지원 등 비전투적 기여로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동맹의 신뢰는 유지하되, 불필요한 전장 개입은 피해야 한다. 둘째는 에너지시장 대응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외교적 수사보다 물리적 대비다. 비축유 확대와 수입선 다변화, 장기계약 재조정이 추진되어야 한다. 특히 중동 의존도를 낮추는 구조적 전환 없이는 위기가 반복될 때마다 경제는 같은 충격을 되풀이할 것이다. 에너지 안보는 이제 경제정책을 넘어 국가 생존전략의 일부가 되었다. 셋째는 외교적 자율성이다. 한국은 중동에서 적대 당사자가 아니다. 이 점은 오히려 자산이다.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이란을 포함한 역내 국가들과의 외교 채널을 열어두는 ‘이중 트랙’이 필요하다. 갈등의 한쪽에 깊이 묶이는 순간, 한국의 선택지는 급격히 줄어든다. 중요한 것은 원칙의 문제다. 국제정치에서 도덕은 힘을 이기지 못한다는 현실이 있지만, 힘만 좇는 외교는 결국 스스로를 소진시킨다. 한국은 분명한 기준을 가져야 한다. 원칙은 감정적 수사가 아니라 전략적 선택이어야 한다. 한국은 ‘줄타기’를 요구받고 있다. 이는 우유부단이 아니라 전략적 균형감각이다. 동맹을 지키되 종속되지 않고, 시장을 읽되 요동하지 않으며, 원칙을 말하되 무력하지 않는 진정성을 지켜야 한다. 호르무즈 해협의 파도는 멀지만, 파장은 대한민국에 가까이 있다. 파장을 피할 것인가, 읽을 것인가. 국제사회의 역학 속에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살려 국익과 국민의 일상을 지키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적 행보가 정책의 방향을 혼돈스럽게도 하지만, 국격과 국익을 지키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중심을 가져야 한다. 이란, 사우디, UAE 등 중동지역 각국의 독특한 여건들을 세심하게 분석하고 확인하여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관계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원유시장 수입선 다변화에 초점을 두면서 시장 환경에도 유연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위기임에 분명하지만, 기회로 만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4-08

청렴하지 않은 공직자는 도둑이다

선거철 후보들의 화려한 공약이 쏟아진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 도시를 바꾸겠다는 비전, 시민의 삶을 개선하겠다는 선언이 이어진다. 그런데, 유권자가 던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이 사람은 청렴한가'.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이렇게 적었다. ’백성의 삶을 책임진 자가 청렴하지 않으면, 그는 곧 백성의 도둑이다(牧民之官 不廉 卽民之盜).‘ 문장은 도덕적 훈계를 넘어 권력을 위임받은 자가 권한을 사사로이 사용하면, 그는 ’나쁜 사람‘을 넘어 ’도둑‘이라 경고한 것이다. 공직자는 자신의 재산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 시민의 삶을 위임받은 사람이다. 세금은 시민이 땀흘려 살아가는 일상에서 나오고 정책과 행정은 시민의 삶을 바꾼다. 권한을 사적으로 사용한다면 이는 비리나 일탈일 뿐 아니라 시민의 재산을 훔치는 것이다. 그래서 다산은 청렴을 미덕 정도가 아니라 공직의 존재 조건으로 본 것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그 오래된 경고를 다시 떠올린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 후보가 수사대상에 올라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법원의 판단이 내려진 것은 아니라서, 무죄추정의 원칙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물어야 한다. 공직을 맡겠다는 사람이 공식적으로 혐의의 대상이 된 상태에서, 과연 공동체의 신뢰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까. 공직은 생계를 직업에 머물지 않는다. 유권자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권한이며, 그 권한을 행사하는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평가를 전제로 한다. 공직자의 청렴은 ‘선택적 미덕’이 아니라 ‘필수적 조건’이다. 좌와 우의 문제도 아니다. 정치적 입장의 문제가 아니라, 공적권력을 다루는 최소한의 기준이어야 한다. 지방자치의 영역에서는 도덕기준이 한층 더 엄격해야 한다. 중앙권력과 달리, 지방의 권력은 시민일상의 구체적인 영역에 직접 닿아있다. 각종 인허가, 개발필요와 예산배분 등 시민의 하루하루와 맞닿은 결정들이 지역 권력자의 손을 거친다. 집행과정에서 청렴성에 대한 의심이 개입되는 순간, 공동체 전체가 흔들린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법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을 혼동한다는 데 있다. 법원은 법에 따라 유죄와 무죄를 가린다. 그러나 유권자는 그보다 더 넓은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문제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공직을 맡길 만큼 신뢰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지방 선거는 선택을 넘어 지역 공동체가 기준을 선언하는 행위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권력을 맡길 것인가, 어느 정도의 도덕성과 책임감을 요구할 것인가를 투표를 통해 드러낸다. 의혹이 제기된 상태에서도 문제의식 없이 공직을 맡긴다면, 공동체 스스로 기준을 낮추는 일이 되지 않을까. 다산의 경고는 오늘도 유효하다. 공직자가 청렴하지 않다면, 그는 단지 개인의 문제일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극심한 손해를 끼치는 존재가 된다. 그래서 ‘도둑’인 것이다. 공적권한을 사적으로 훼손하는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시민의 이익을 훔친다. 선거의 계절에 다시 묻는다. 누구에게 이 도시의 내일을 맡겨야 하나. 그 질문의 출발점과 종착역은 결국 하나다. ‘그는 청렴한가'.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4-01

공천(公薦), 어찌 해야 하는가

국민의힘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인구 50만 이상 선거구의 기초자치단체장 후보 공천을 중앙당에서 진행하고 있다. 당헌과 당규에 따라 절차를 밟았겠지만, 이 결정의 정치적 함의는 가볍지 않다. 지방자치의 본령을 어떻게 지키고 당내 민주주의의 원칙을 어느 선까지 유지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관련하여, 중앙당의 포항시장 공천과정은 포항 시민들에게 상당한 우려를 가지게 한다. 지방자치는 말 그대로 ‘지방이 스스로 다스리는’ 시스템이 아닌가. 유권자들이 일상과 직결된 문제를 가장 가까이에서 고민하고 해결하는 구조가 바로 지방자치여야 한다. 기초단체장 선거는 어느 선거보다 지역민생의 맥락과 생활의 숨결이 중요하다. 누가 후보가 되는가 하는 문제 역시 지역 주민의 판단과 참여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출발점이 중앙당의 자의적 판단으로 옮겨간다면, 우리는 지방자치의 본질을 포기하게 되는 게 아닐까. 지역 언론기관들이 진행한 수차의 여론조사에서 1, 2, 3등에 오르며 도합 40% 내외의 지지를 받았던 후보들이 공천 과정에서 모두 배제되었다. 중앙당의 컷오프를 통과한 후보 네 사람의 평균 지지율을 모두 합해도 30% 미만이다. 지역시민들의 표심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보인다. 절반에 가까운 포항지역 민심이 중앙당에 의해 소외된 결과를 빚었다. 시민들이 가진 중앙당에 대한 신뢰마저 금이 가지는 않을까. 공천이 실질적 최종선택권이 되는 구조에서, 권한이 중앙으로 집중되면, 유권자의 선택에 따른 정치적 경쟁이 사실상 제한된다. 미국은 어떨까. 공화당과 민주당은 후보를 중앙당이 정하지 않는다. 선거에서 후보는 지역의 예비선거, 프라이머리(Primary)를 통해 결정된다. 당이 특정 인물을 선호하거나 지원할 수도 있겠지만, 최종 선택은 언제나 지역 유권자의 몫이다. 지역 주민과 지역 당원이 예비후보들을 직접 경쟁에 붙여 후보를 가려낸다. 후보선택 권한이 지역공동체의 유권자들에게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이 아닌가. 중앙당이 후보를 사실상 결정하는 구조에서는 정치가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진다. 후보가 지역 유권자보다 중앙당 지도부를 더욱 의식하게 되고, 선거의 언어도 생활의 언어보다 정당의 구호에 가까워진다. 중앙당이 지역의 구체적 현실과 정서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지역은 일상과 생활의 문제로 움직이지만, 중앙정치는 정치 이슈와 권력 구도에 민감하다. 지방자치가 중앙에 예속되고, 주민의 삶과 정치 사이의 거리가 멀어진다. 지역 국회의원들이 결정과정에 개입하는 현상도 시민들이 직접 원하는 후보를 가늠해 가는 과정에 장애물이 된다. 공천관리위원회는 그 소임인 ‘공정한 관리’에 집중할 일이지 ‘공천의 결정’에 천착할 일이 아니다. 포항시민들이 당연히 담당해야 할 선별권을 중앙당이 집중적으로 행사한 일은 우리 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중앙당 권한의 남용이며 폭거라 여겨지기도 한다. 이를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는 공당으로서 국민의힘이 신중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공천은 누구의 것인가. 답변이 중앙이 아니라 지역을 향할 때, 지방자치는 이름뿐인 제도가 아니라 살아 있는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3-25

공약의 무게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의 말이 많아진다. 불현듯 등장하는 것이 ‘공약’이다. 출사표를 던진 정치인이 유권자를 향해 던지는 약속이 바로 공약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공약이 너무 가볍게 소비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듣기에는 호화롭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이거나, 제목은 근사한데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일까. 유권자들 사이에서는 ‘공약은 선거 때만 등장하는 말’이라는 냉소가 생긴다. 공약이란 본래 그런 게 아니었다. 공약은 정치인이 시민 앞에서 책임과 실천을 약속하는 정치적 계약이 아닌가. 선거가 끝난 뒤에도 정치인에게 부채처럼 계속 남아야 하는 약속이 바로 공약이다. 좋은 공약의 조건은 무엇일까. 첫째, 제목만 근사해서는 안 된다. 선거 공약이 유권자의 관심을 끌어야 하고. 주제가 선명하고 흥미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체성과 실천 가능성이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어떻게 추진할 것인지, 재정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가 설명되지 않는 공약은 끝내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도시의 미래를 말하는 공약이라면 더욱 그렇다. 거창한 계획보다 현실적인 실행계획이 전면에 제시되어야 한다. 둘째, 공약 속에서 정치인의 경험과 걸어온 길이 느껴져야 한다. 유권자는 단순한 아이디어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공약을 제시하는 정치인이 어떤 경륜을 쌓았으며 공약을 실행에 옮길 실천경로와 의지가 보여야 한다. 정치인이 살아온 시간과 현장에서의 경험이 공약 속에 녹아 있을 때에야 유권자는 비로소 그 약속을 신뢰하게 된다. 공약은 단순한 정책목록이 아니라 정치인의 삶과 역량을 보여주는 스토리여야 한다. 셋째, 공약의 결과와 혜택이 특정 집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선거에서 제시되는 공약은 유권자 모두를 향한 약속이어야 한다. 일부에게만 유리하고 다른 시민들에게 부담을 주는 정책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도시정책일수록 더욱 그렇다. 공약은 시민 누구에게나 그 장점이 고르게 전달되어야 하며, 도시공동체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공약이란 정치인의 상상력뿐 아니라 시민의 일상을 기준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시민이 실제로 겪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도시의 미래에 분명한 도움이 되어야 하며, 약속이 현실 속에서 실천될 수 있어야 한다. 공약은 날이 갈수록 더욱 화려해진다. 유권자가 알고 싶은 것은 호사스러운 언사의 뒤에 있을 진정성의 여부다. 공약이 얼마나 현실을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책임 있게 추진될 것인지를 증명해야 한다. 공약은 언변이 아니라 약속이다. 약속은 결국 실천으로 증명된다. 선거철에 쏟아지는 수다한 공약들 가운데 유권자가 주목할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그저 화려한 말인지 아니면 실천가능할 약속인지를 구분하는 일은 결국 시민의 몫이다. 민주주의는 그렇게 조금씩 단단해진다. 공약이 가벼워지면 정치에 대한 신뢰도 함께 가벼워진다. 반대로 공약이 현실과 책임 위에 세워질 때 시민과 정치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지게 마련이다. 선거는 한 번의 선택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약이 지켜지는지, 약속이 현실에서 실천되는지를 살펴보는 과정까지 포함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완성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3-18

문제는 청년 정책이다

포항 등 지방도시가 인구감소를 겪는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청년들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으로 떠나는 현상은 이제 거의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보인다. 통계는 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지역의 청년인구는 격감하고 고령인구는 증대한다.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이제는 과장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떠나면 도시는 빠르게 생기를 잃는다. 도시 소음이 사라지고 아기 울음소리가 줄어들며 학생 수 감소로 문닫는 학교가 늘어난다. 청년의 감소는 곧 도시의 미래가 공허해지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지나치게 ‘인구정책’의 틀 속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출산장려금이나 각종 지원금을 더하거나 빼는 식의 정책으로만 접근한다. 마치 인구가 행정의 계산표 위에서 움직이는 숫자인 것처럼 취급한다. 청년은 숫자가 아니다. 젊은 일상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청년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문제의 구조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도시가 그들의 필요와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면, 그들은 떠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일자리다. 안정적인 일자리와 꿈을 펼칠 기회가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 청년은 미래를 설계할 수 없다. 교육환경과 보육시스템도 중요하다. 결혼과 출산을 고려하는 세대에게 핵심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청년주거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합리적인 가격의 주택과 안정적인 정주환경이 없으면 청년은 지역에서 삶의 기반을 만들기 어렵다. 일자리와 주거, 보육과 교육, 문화와 생활환경까지 삶의 조건 전반이 수도권보다 뒤처진다면 청년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다. 질문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청년이 왜 떠나는가’가 아니라 ‘청년이 무슨 까닭으로 이 도시에 머물러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청년이 살고 싶어 하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 출발점이다. 삶의 조건을 청년의 눈높이에서 다시 설계하고, 젊은이들에게 도시의 활력과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면 도시의 흐름이 달라진다. 도시발전의 순서도 청년정책에 열쇠가 있다. 사람을 모으면 기업이 온다. 기업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인재가 모이고 활력이 살아있는 도시를 기업은 선택한다. 지방도시의 인구문제는 머리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도시의 철학과 방향의 문제다. 사람을 모으는 도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떠나가는 도시로 남을 것인가. 도시의 미래는 그 선택에 달려 있다. 사람을 모아야 기업이 온다. 청년을 모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일자리와 문화정책, 교육과 보육정책, 주거환경과 정주여건을 뿌리부터 살펴야 한다. 청년의 숨결이 함께 하지 못하면 도시는 미래를 담보할 길이 없다. 50만 미만으로 떨어진 포항의 인구수를 걱정할 게 아니라, 젊은 숨소리가 모이도록 활기를 회복해야 한다. 포스코가 아니라도 내일을 꿈꿀만한 일터가 늘어나야 하고, 아이를 낳아서 길러낼 환경이 확보되어야 하며, 재미와 웃음거리가 넘치는 거리를 조성해야 한다. 한때 신명나던 경제적 활력을 되찾아야 하고, 스토리와 콘텐츠가 풍성한 문화 저변을 불러와야 한다. 인접한 해양자원과 가까운 문화거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부분도 반성해야 한다. 포항에 젊은이가 모일 기초 여건은 존재하지 않는가. 지혜를 모아 도시를 살려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3-11

포항이 사라졌다

포항은 경상북도의 대표 도시다. 250만 경북 인구 가운데 거의 50만을 품고 있는 중심 도시다. 그러나 도시의 풍경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묘한 공백이 느껴진다. 분명 큰 도시인데, 정작 ‘도심’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과거 포항의 중심은 분명했다. 육거리 일대와 중앙상가, 죽도시장 주변이 자연스럽게 도시의 심장 역할을 했다. 사람이 모였고, 상권이 형성되었고, 도시의 기억이 쌓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중심은 점점 약해졌다. 상권은 낡아갔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새로운 주거지로 이동했다. 구도심은 천천히 힘을 잃어 갔다. 50만에 달하는 포항시민들 모두에게, 도시의 중심을 되찾는 일은 가히 전대미문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런 다음이다. 새로운 도심이 만들어졌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포항의 주거환경은 남과 북으로 빠르게 흩어졌다. 남쪽에는 이동과 효자동 일대가 커졌고, 북쪽에는 장성동과 양덕 일대의 신흥 주거지가 형성되었다. 이들 지역은 ‘주거지’일 뿐 도시의 중심은 아니다. 소위 거주 공간의 확장만 진행된 셈이다.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가고 싶어 하는 공간, 도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장소, 외부 방문객에게 ‘여기가 바로 포항이다’라고 소개할 만한 상징적 중심이 보이지 않는다. 도시에는 단순한 주거지 이상의 ‘중심 공간’이 필요하다. 사람이 모이고, 문화가 숨을 쉬며, 경제 활동이 집중되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도심이 있어야 도시가 살아 움직인다. 예를 들어 영일대 해수욕장은 분명 포항의 자랑스러운 공간이다. 바다와 해변, 야경이 아름다운 관광지다. 하지만 영일대는 관광 공간이지 도시의 중심 기능을 수행하는 도심(core downtown)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육거리 일대 역시 오랜 역사와 기억을 가진 장소지만 오늘날의 도시 규모와 기능을 감당하기에는 이미 힘이 약해졌다. 결국 지금의 포항은 구도심은 약해지고 신도시는 분산되어 있으며 도시 전체를 묶어주는 새로운 중심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도시 발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미관이나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다. 도심이 사라진 도시는 상권이 분산되고 문화가 축적되지 못하며 외부에서 도시를 기억할 상징도 만들어지기 어렵다. 이제 포항은 주거 확장을 넘어 도시중심을 다시 세우는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도심은 자연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계획과 투자, 그리고 도시 비전이 함께 작동할 때 만들어진다. 포항이 어떤 도시가 될 것인지, 어디에 도시의 심장을 다시 세울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게 시작되어야 한다. 시민이 찾아가는 도심, 외부 방문객이 기억하는 도시의 중심. 포항은 지금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구도심을 더 이상 추억의 장소로 간직하게 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도심 공간을 어떻게 새롭게 바꾸어 사람들의 발길이 흐르고 경제가 느껴지며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회복시켜야 한다. 철강도시 포항의 도심에 새로운 맥박이 뛰게 해야 한다. 구도심은 추억거리가 아니라 포항의 미래 자산이 되어야 한다. 포항이 경북 제일의 도시로 버젓이 발전해 가기 위해서도, 도심 공간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흐름을 회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3-04

포항의 선택

지방선거라지만, 누구도 이 선거를 지방행사로만 이해하지 않는다. 전국이 같은 날 투표하고, 같은 정부를 평가하며, 같은 정치뉴스에 노출된다. 지방선거는 늘 전국정치의 연장선에 선다. 지역마다 그 정치가 번역되는 언어가 다를 뿐이다. 6월 지방선거의 전국적 화두는 분명하다. 경제와 민생, 그리고 현 정부에 대한 평가다. 포항과 경북에서 이슈는 훨씬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뀐다. ‘이 도시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포항에서 ‘경제’는 숫자가 아니라 일상이다. 산업단지의 불 꺼진 공장, 텅 빈 원도심 상가, 그리고 도시를 떠나는 청년들의 선택이 그것이다. 말들은 많이 하지만, 철강 이후의 포항은 준비되고 있는가. 이차전지와 수소, 신산업이라는 말은 들어왔지만, 산업이 실제 일자리와 생활로 연결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장면만 떠올려 보자. 도심 한복판의 오래된 시설과 유휴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두고 수년째 논의만 반복되는 현실이다. 어떤 이는 개발을 말하고, 어떤 이는 이전을 말하며, 또 다른 이는 현상 유지를 택한다. 그러나 결정은 늘 미뤄졌고, 그러는 동안 도심은 늙어만 간다. 장면은 포항이 겪고 있는 문제의 축소판이다. 언사는 넘치지만 실행은 부족하고, 논의는 많지만 책임지는 결정은 없다. 균형발전이라는 말도 포항에서는 추상적일 수 없다. 인구감소는 이미 현실이고, 대학과 병원의 위축은 체감되는 불안이다. 이 상황에서 지방정부는 무엇을 했는가, 무엇을 하지 않았는가를 묻는 일이 지나치지 않다. 지방선거는 바로 질문을 공식적으로 던질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장치가 아닐까. 이번 선거에서 포항과 경북의 유권자들이 후보들에게 요구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중앙정치의 언어를 반복하는가, 아니면 지역의 문제를 자신의 행동으로 풀어내는가. 그럴듯한 비전만 나열하는가, 아니면 실행경로와 책임구조를 제시하는가. 선거가 지나간 뒤에도 실천하고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는가.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의 지침을 기다리는 하청기관이 아니다. 지역의 과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중앙과 협상하며,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정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지방선거는 포항이 그런 도시로 나아갈 수 있는지 가늠하는 시험대가 되어야 한다. 지방선거는 물론 정권에 대한 찬반을 드러내는 장이며, 동시에 지역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를 선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포항과 경북의 선택은 지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 선택은 전국 정치에 신호를 보내고, 다음 국면의 방향을 암시한다. 유권자의 한 표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긴다. 중앙을 향한 평가와 지역을 향한 결단. 두 의미를 분리하지 않고 함께 고민하는 것, 그것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포항과 경북이 반드시 보여주어야 할 정치적 책임이다. 출사표를 던진 후보들을 바라보며 시민 유권자는 냉정하게 구분해야 한다. 철을 따라 표만 구하는 정치꾼을 걸러내야 하며, 실제로 시민의 일상을 고민하며 성심으로 일하려는 일꾼을 찾아내야 한다. 지방선거는 때가 되면 돌아오는 요식행위가 아니라, 지역의 내일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회가 된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임을 입증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2-25

넘어지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새해 벽두, 우리는 멋진 장면을 목격했다. 동계올림픽 스노보드 하프파이프 결선에서 두 번씩이나 추락 후 끝내 일어선 한 선수가 결국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7미터 높이의 빙벽을 타고 올라 공중회전을 거듭하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위험하다. 작은 실수 하나로 경기는 물론 선수의 생명까지 위협받는다. 추락은 실수를 넘어 ‘끝’처럼 보였다. 선수는 끝이라 여겨진 지점에서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우리는 메달의 색깔과 개수에 반응한다. 결과 뒤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겹겹이 쌓여 있다. 새벽 훈련, 실패 반복, 부모의 희생, 부상과 재활, 낙담과 희열. 특히 대한민국 선수들의 현실은 넉넉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충분하지 않은 지원과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국제 무대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개인과 가족의 감내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시 일어난다. 넘어짐을 핑계로 삼지 않고, 오히려 추락을 발판으로 삼는다. 추락은 부상을 불렀다. 누구도 기권을 비난하지 않았을 추락이었다. 선수는 통증을 이유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선택은 한 선수의 용기를 넘어, 우리가 오랫동안 공유해 온 한 가닥 기질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어려움 앞에서 체념하지 않는 끈기, 상황을 변명으로 삼기보다 한 번 더 시도하는 태도, 끝까지 가보려는 고집과 집념. 대한민국은 숱한 굴곡과 곡절을 통과하며 그런 힘을 축적해 왔다. 위기 속에서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성향, 그것이 스포츠 현장에서 다시 확인되었다. 여기서 멈춰,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 헌신을 박수로만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극적인 장면에 환호하고 눈물을 나누지만, 정작 선수들이 겪는 구조적 어려움과 훈련 환경의 한계에는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가. 위기의 순간에 빛나는 투지를 ‘한국인의 미덕’으로만 칭송하는 사이, 그것이 반복적으로 개인의 희생 위에 세워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감동은 값지지만, 감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금메달을 확정한 뒤 ‘엄마!’를 외치며 무너져 내리던 장면이 깊게 남는다. 개인의 승리뿐 아니라, 함께 버틴 시간의 승리였다. 가족의 헌신과 지도자의 인내, 보이지 않는 땀방울이 한순간에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눈물에서 과정을 읽어야 한다. 과정이 있었기에 결과가 더욱 빛났음을 확인해야 한다.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또 다른 하프파이프를 마주한다. 넘어짐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일어설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동시에 질문해야 한다. 선수 개인의 집념에만 기대는 시스템으로 충분한가. 그들의 도전이 더 이상 ‘기적’으로 불리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 수는 없을까. 아픈 무릎으로도 가장 높은 자리에 도달했던 장면을 기억해야 한다. 선수의 투지가 개인의 희생으로만 남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2026년 우리가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새해에도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날 터이다. 누군가는 포기하고 돌아서겠지만, 우리는 기어이 이겨내는 결기를 다져야 한다. 개인이 지난한 과정을 감내하려면 사회적 고조가 상생과 협력을 지지해야 한다. 건강하게 올라서는 새해를 당겨와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2-18

빙판과 설산, 뉴스 너머 동계올림픽

뉴스의 분량과 속도는 숨이 가쁠 만큼 거세고 빠르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국제 정세가 뒤집히고, 경제 지표는 사람들의 마음을 휘젓는다. 대체로 불안과 분노, 피로와 공포를 전한다. 그런 가운데 이탈리아 밀라노-코르티나에서 동계올림픽이 진행되고 있다. 예년 같았으면 거리의 전광판이 바빠지고 포털의 첫 화면이 요란했을 텐데, 이번은 왠지 비교적 차분하다. 마치 세상의 소음에 묻혀 설원 위의 함성이 멀게만 들려오는 느낌이다. 스포츠가 차지하던 자리를 이제는 수많은 뉴스와 이슈들이 차지해 버렸다. 전쟁과 갈등, 정치현안과 경제불안이 일상화된 시대에 올림픽축제는 잠시 숨을 고르는 틈새 정도로 취급되는 듯하다. 그래도 화면을 조금만 멈춰 바라보면, 그 ‘틈’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장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빙판을 가르는 스케이트 날은 군더더기 없는 선으로 시간을 자르고, 설산 언덕을 질주하는 선수의 몸짓은 중력을 거부하는 하나의 곡선이 된다. 촌각을 가르는 승부 뒤에는 수년의 반복과 실패, 부상과 회복이 숨 쉬고 있다. 무명의 젊은 선수들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며 만들어 올리는 동작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이며 환희다. 박수는 메달 색깔이 아니라 그 과정에 먼저 가닿아야 한다는 사실을 올림픽은 조용히 숭고하게 상기시킨다. 대한민국 선수들은 아직 출발선에 서 있는 셈이다. 국가대표라는 이름을 짊어진 개인들의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훈련장을 오가며 흘렸을 땀, 남들보다 한 발 일찍 빙판에 서야 했던 새벽들,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다시 장비를 고쳐 신었던 순간들. 우리는 국기를 배경으로 선 시상대 장면만을 기억하지만, 올림픽의 진짜 이야기는 대부분은 그 이전의 드라마로 채워져 있다. 동계올림픽이 던지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속도의 대비다. 일상의 뉴스는 즉각적인 판단을 요구하지만, 스포츠는 기나긴 기다림을 전제로 한다. 한 번의 도약을 위해 수백 번의 실패가 필요하고, 4년에 꼭 한 번 무대를 위해 선수들은 오랜 시간을 견디고 견딘다. 신속한 결론에 익숙해진 사회에서 우리는 시간의 느린 리듬이 낯설다. 결과를 재촉하지 않고 과정을 지켜보는 끈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잊고 지낸 필수 감각이 아닐까. 아직 열흘 일정이 남아 있다. 많은 경기와 많은 얼굴들이 등장할 것이다. 어떤 이는 환호를 받을 것이고, 어떤 이는 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한 채 돌아설 수도 있다. 설산과 빙판에서 최선을 다하는 순간만큼은 모두에게 같은 무게를 지닌다. 그런 장면들이 세상의 소음과 잡사에 묻히지 않기를 기대한다. 복잡한 시대에 올림픽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라기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비춰주는 거울이 아닐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 실패를 딛고 서는 인내, 상대를 존중하는 용기. 이번 겨울, 대한민국 선수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도한 기대보다 차분한 응원이다. 화면 너머로 보내는 작은 박수 하나가 긴 시간을 견뎌온 이들에게 엄청나게 큰 힘이 된다. 마지막 남은 열흘, 우리가 젊은 선수들에게 힘이 되어주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2-11

해오름대교, 연결 효과는 운영이 가른다

해오름대교는 개통 전부터 포항의 새로운 상징으로 기대를 모았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남북 연결축, 도시 동선을 바꿀 핵심 인프라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며칠간 현장을 오가며 느낀 점은 이 다리가 가진 가능성과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동시에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긍정적인 변화는 분명하다. 정체만 아니라면 남단과 북단 사이 이동 시간은 과거보다 현저하게 줄어든다. 해안선을 돌아가던 동선이 단순해졌고, 일부 구간에서는 체감상 주행이 훨씬 수월해졌다는 반응도 들린다. 출퇴근과 일상 이동에서 남북 연결성이 개선됐다는 점은 이 교량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다. 하지만 개통 직후의 관찰은 동시에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저녁 6시 30분 무렵, 남단에서 교량에 진입해 북단 교차로를 통과하기까지 대략 10분이 걸렸다. 교량 전체 길이가 400미터도 채 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평균 속도는 시속 2~3킬로미터 수준이다. 초기 혼잡으로만 치부하기에는 구조적인 요인을 떠올리게 하는 수치가 아닐까. 병목의 핵심은 북단 교차로에 있다. 좌회전이 금지되면서 차량들은 교차로를 지나 약 50미터 지점에서 유턴을 해야 한다. 유턴 차선의 대기 공간은 차량 다섯 대 정도에 불과하다. 오후 2시 40분, 러시아워가 아닌 시간에도 이미 포화 상태. 출퇴근 시간대에는 직진 차로까지 정체가 번질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퇴근 시간에는 그 영향이 교량 상판을 넘어 남단 오르막 구간까지 이어졌다. 정상부에 이르기도 전에 브레이크등 행렬이 길게 늘어섰다. 이는 교량 진입부보다 출구 쪽 처리 용량이 부족해 다리 전체가 일종의 ‘대기 공간’처럼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안전 측면에서도 점검이 필요하다. 북행 정상부에서는 하행 구간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고, 남행 하향부에서는 곡선이 이어져 전방 시야가 제한된다. 제한속도인 시속 50킬로미터로 주행하다 갑작스런 정체를 만나면 급제동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황색 신호에서 가속과 급정거가 동시에 나타나는 장면도 관찰됐다. 이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사고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해오름대교의 의미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구조적으로 남북을 직선으로 잇는 새로운 축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시 교통망에는 큰 변화다. 운영이 안정되고 병목이 해소된다면 출퇴근길과 생활 이동에서 실질적인 시간 절감 효과를 낼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래서 지금이 더 중요하다. 개통 초기에 출퇴근 시간대 교통량과 유턴 수요를 면밀히 관찰하고, 유턴 대기 공간을 늘이거나 시간대별 좌회전 허용 같은 탄력적 운영은 가능한지, 교량 위 정체를 미리 알릴 안내 시스템이 필요한지를 검토해야 한다. 작은 조정 하나가 시민 체감도를 크게 바꾸고 사고 위험을 방지한다. 도시의 새 다리는 풍경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시민들의 하루하루에 얼마나 안전하고 편리하게 기능하느냐가 진짜 기준이다. 해오름대교가 포항의 새로운 명물이 되기 위해서 지금 드러난 성과와 과제를 함께 직시하고 분석하여 차분하고 냉정하게 보완하는 과정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2-04

AI와 로봇의 시대

스페이스엑스(SpaceX)와 테슬라(Tesla)의 창업자 일론머스크(Elon Musk)는 인류가 머지않아 ‘보편적 고소득 시대’에 들어설 것이라 전망했다. 최소한의 생활비를 국가가 보장하는 보편적 기본소득을 넘어, 대다수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경제 구조가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논리는 단순하다.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서 생산성이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그 결과 재화와 서비스가 넘쳐나는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희소성에 기초한 화폐경제는 약화되고, 돈의 가치 또한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뒤따른다. 공상과학 소설처럼 들리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미 변화의 조짐이 분명하다. 산업현장 곳곳에 자동화 설비가 들어서고, 사무직 업무마저 AI가 빠르게 대체하고 있다. 보통사람들도 AI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최근 현대자동차 노조가 생산라인에 로봇 도입을 강하게 반대한다는 소식은 전환기의 긴장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에서는 효율과 경쟁력을 이유로 자동화를 밀어붙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산업혁명의 역사에서 늘 반복되었던 장면이 또 한 번 펼쳐진다. 수년 내에 인간의 숫자와 맞먹는 로봇이 세상에 등장할 것이라 한다. AI는 특정 분야에서 이미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고, 활약 범위는 급격하게 확장되고 있다. 흐름이 지속된다면, 인간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 들어설지도 모른다.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인간은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노동에서 해방된 사회는 이상향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정체성의 위기를 낳을 수도 있다. 사람은 오랫동안 직업을 통해 자신을 규정해 왔다.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곧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일의 상당 부분을 기계가 대신하게 된다면, 인간의 역할과 존재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생산성이 극적으로 높아진 사회에서 그 성과가 과연 공평하게 분배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기술을 소유한 소수에게 부가 집중된다면, ‘보편적 고소득’이 아니라 오히려 극단적인 불평등이 나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도와 정책, 사회적 합의가 적절하게 뒤따르지 않으면 기술의 진보는 축복이 아니라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다. 필요한 것은 막연한 낙관도 무조건적인 공포도 아니다. 다가올 변화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교육과 복지, 경제와 노동을 어떻게 재설계할지 고민해야 한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지켜야 할 인간의 가치는 무엇인지 묻는 일도 중요하다. 타인에 대한 존중과 연대, 공동체 의식과 상생의 정신, 책임과 존엄 같은 가치는 기계화되거나 자동화될 수 없는 영역이다. AI와 로봇의 시대는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보인다. 시대의 모습이 유토피아를 당겨올지 아니면 새로운 불안과 불안정을 불러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많은 부분,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기술과 함께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는 다시 인간에게 달려있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1-28

AI와 가장 가까운 지역이 되길

AI(Artificial Intelligence·인공지능)는 더 이상 미래기술이 아니다.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처럼 어느새 우리 일상으로 다가왔다. 문제는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도시와 시민이 변화를 따라가는 속도다. AI는 이미 일하고, 쓰고, 정리하고, 판단을 돕는 도구가 되었지만, 많은 시민에게는 여전히 ‘어렵고 무서운 것’으로 남아 있다. 포항 같은 중견도시는 이 지점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서울이나 판교처럼 AI기업과 연구소가 밀집한 도시는 기술중심으로 흘러가지만, 포항은 다르다. 포항은 대학과 산업단지, 전통시장과 원도심, 고령인구와 청년세대가 한 공간에서 공존한다. AI를 ‘생활밀착기술’로 실험하기에 가장 적합한 도시다. 포항이 ‘AI 기술도시’ 정도가 아니라 ‘AI 친화도시’를 고민해야 할 때다. AI를 잘 만들어 내는 도시라기보다, AI를 잘 쓰는 시민이 많은 도시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시민이 AI를 이해하고, 활용하고, 필요할 때 도움을 받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도시의 기본 책무가 되어가고 있다. 그 출발점으로 ‘AI친화도시 포항’ 캠페인을 제안한다. 거창할 필요는 없다. ‘AI로 이런 것도 할 수 있습니다’라는 아주 생활밀착적인 사례들을 시민 앞에 보여주는 것이다. 자영업자는 메뉴설명과 홍보문구를 AI로 만들고, 농어민은 병충해 사진을 분석하고 작물과 어족 성장환경을 살피며, 노년층은 말과 글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기록한다. 공무원은 회의록과 보고서 초안을 AI의 도움으로 빠르게 정리한다. 중요한 것은 AI가 판단을 대신하기 보다 사람의 분석과 판단을 덜 힘들게 만드는 도구라는 점을 체감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AI 커뮤니티센터’ 같은 공간도 충분히 검토해 볼 만하다. 도서관과 주민센터의 중간쯤 되는 이 공간은 고가의 장비보다 ‘함께 써보는 경험’을 제공하는 곳이어야 한다. ‘이런 일에 AI를 써도 될까요?’라고 물으면, 누군가 옆에서 프롬프트를 함께 써 주는 곳. 세대와 직업을 가리지 않고 AI를 처음 만나는 시민들의 ‘연습장’이 되고 ‘시작점’이 되는 곳이다. 이 작은 공간에서 축적된 사례들은 곧 포항시민의 AI활용 적극자산이 된다. 도시행정 역시 조용히 변할 수 있다. 민원요약, 회의정리, 자료검색 등 반복적인 업무에 AI를 붙이는 것만으로도, 공무원들이 시민을 만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된다. AI는 행정을 대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행정을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보조수단이 될 터이다. 도시는 기술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기술을 다루는 방식으로 평가받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AI가 압도하는 도시보다, 시민이 AI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시. 포항이 그런 도시가 되어야 한다. 또 하나의 산업 유산이자 미래 세대에게 남기는 도시 자산이 될 것이다. AI가 존재하는 도시를 넘어, AI로 시민의 일상이 편해지는 도시, AI로 도시행정이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 ‘AI친화도시 포항’을 제안하면서, 지역이 신생기술 AI와 함께 지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 본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1-21

AI를 어찌하나

ChatGPT를 비롯한 생성형 AI(Artificial Intelligence·인공지능)가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면서, 인류는 새로운 편리함과 함께 오래된 불안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 ‘AI가 인간의 사고를 확장하는가, 아니면 잠식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기술낙관론자들은 AI를 세탁기나 청소기에 비유한다. 손빨래와 손청소에서 해방되었듯, 인간은 이제 번거로운 사고노동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럴듯하게도 들리지만, 이 비유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빨래와 청소는 인간의 본질이 아니지만, ‘생각하는 힘’은 다르다. 사고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핵심 능력이 아닌가. 최근 한국 대학가에서 벌어지는 풍경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시험과 과제에서 AI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이제 대학이 과연 필요한가’라는 질문까지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질문이 설득력을 갖는다. AI가 논문을 요약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며, 토론문까지 만들어 준다면 굳이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 다닐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를 거꾸로 본 진단이다. 대학의 위기는 AI의 등장이 아니라, 대학 스스로 무엇을 평가하고 무엇을 가르칠지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대학의 존재 이유는 처음부터 정답을 제공하는 데 있지 않았다. 질문을 만드는 지혜, 생각을 전개하는 방식, 타인의 논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수단을 훈련하는 공간이었다. 오늘의 대학강의실에서 사고의 과정이 아니라 결과물만이 평가된다면, 학생들은 생각하기보다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법을 먼저 배운다. 이는 부정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본질의 문제다. 대학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첫째, 평가방식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결과중심의 과제평가 대신에 사고의 경로와 질문의 질을 평가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AI사용 여부를 단속하기보다, AI에 어떤 질문을 던졌으며 그 답에 어떤 분석과 판단을 거쳤는지를 서술하게 해야한다. 생각의 궤적을 평가하지 않는 교육은 AI 앞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 둘째, 커리큘럼은 ‘도구사용법’이 아니라 ‘판단과 분석’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AI리터러시는 버튼 설명이 아니라, 한계인식과 오류탐지 능력을 포함해야 한다. AI가 쏟아낸 답을 검증하고 반박하는 수업이 정규과정으로 편입되어야 한다. 셋째, 대학은 다시 ‘느린 공간’이 될 용기를 가져야 한다. 효율과 속도를 숭배하는 사회에서, 깊이 생각하고 천천히 되새기는 훈련은 본질적으로 비효율적이다. 비효율을 감내하지 않는 대학은 더 이상 대학이 아니다. 침묵과 명상, 토론과 성찰, 그리고 도전과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 강의실에서 사고는 성장할 길이 없다. 대학이 아직도 필요한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대학은 필요 없다. 생각하고 성찰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학만 살아남을 터이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선택이다. 대학은 정답 공장을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질문 광장으로 거듭날 것인가. 대학이 오늘의 모습만으로는 쇠락의 길에 설 수 밖에 없다. 선택여부에 따라 대학은 오히려 부흥할 지도 모른다. 선택의 시간은 이미 시작되었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1-14

세상의 충격과 우리의 태도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국내법을 근거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체포해 간 사건은, 오늘의 국제질서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강대국이 자국법을 앞세워 타국의 영토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인식이 용인되는 순간, 국제법은 규범이 아니라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 이 장면이 주는 충격은 베네수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러시아와 중국 같은 강대국들에게 이는 불편한 경고이면서 동시에 위험한 유혹이 된다. ‘미국이 그렇게 한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논리는 언제나 국제질서를 무너뜨린다. 우크라이나와 대만은 단지 지정학적 분쟁지가 아니라, 규칙의 기반질서가 유지되는지 시험하는 최전선이 된다. 북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외국 정상의 신병이 다자국제적 합의가 아닌 일방의 법 해석으로 확보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김정은 정권으로 하여금 핵무기를 체제생존의 보증수표로 더욱 굳게 인식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비핵화 담론을 다시 한번 공허한 수사로 밀어낼 위험을 안고 있다. 이 시점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중 전략경쟁이 실체화되고 구조화되는 현실 속에서, 한국의 외교는 점점 더 좁은 외줄 위를 걷게 된다. 미국은 동맹국에 ‘가치적 연대’를 요구하고 중국은 각국에 ‘전략적 자율’을 압박한다. 두 가지 선택지 가운데 어느 한쪽의 논리에 무비판적으로 편승하는 순간, 한국은 외교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중국 방문의 성패는 정상회담의 의전이나 공동성명 문구에 있지 않다. 핵심은 한국이 국제규범과 주권존중이라는 원칙을 분명히 견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를 미국과 중국 어느 쪽에든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미국의 일방주의에 침묵하면서 중국의 힘의 외교만 경계한다면, 우리의 외교는 설득력을 잃는다. 중국의 수사에 동의하면서 미국의 압박을 무시해도 우리의 외교는 설 자리를 놓칠 수 있다. 어느 쪽에도 휘둘리지 않고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성장해 갈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강대국이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원칙과 규범이 필요하다. 법과 절차, 다자주의는 약소국의 이상이나 소망이 아니라 존재확인이자 생존전략이다. 중국을 방문한 대통령이 경제협력과 문화교류를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동시에 ‘국제질서는 힘이 아니라 상생과 공영의 원칙 위에 서야 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일관성과 상호신뢰의 출발점을 확고하게 설정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이해에 우호적으로 반응하면서, 동시에 다자외교가 빚어내는 상생과 협력의 틀에 주목해야 한다. 모두를 위한 원칙과 규범의 울타리가 작동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걸어야 할 길은 분명하다. 어느 편을 드느냐가 아니라, 어떤 원칙에 서느냐의 문제다. 원칙이 무너지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흔들리는 나라는 언제나 우리처럼 경계에 선 나라들이었다. 한국은 지난 수백 년 경험을 통하여 그 운명과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6-01-07

국민이 지킨다

2025년이 열흘 남짓 남았다. 우리는 한 해를 ‘실패한 계엄’이 남긴 상처 입은 민심과 함께 보냈다. 총과 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발상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안도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아직도 허약하다. 무너지지 않았을 뿐, 단단해졌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흔히 밖에서 들여온 제도쯤으로 여겨왔다. 교과서 속 개념이고, 헌법 조항이며, 선진국으로부터 수입해 온 이상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은 분명히 확인해 주었다. 이 땅의 민주주의는 외부에서 이식된 장치가 아니라, 우리 국민이 일상의 자리에서 벽돌처럼 하나씩 쌓아올린 구조물이었다는 것을. 광장에서, 직장에서,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공론장에서 국민은 스스로 민주주의의 기둥이 되었다. 민주주의를 위협한 쪽은 오히려 기득권 엘리트들이었다. 국가와 질서, 안보와 위기를 앞세우며 헌법의 근간을 주무르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은 언제나 거창했지만, 그 끝에는 권력의 연장이라는 낡은 목적이 놓여 있었다. 반면에 이들을 막아낸 것은 아무런 직함도, 무기도 없는 국민들이었다. 제복도 계급장도 없이, 다만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지킨 사람들이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 나라를 지켰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아득했던 길목마다, 악한들은 움켜쥔 자리에 남아 있었다. 민주주의의 건강한 전개를 방해하는 세력은 퇴장하지 않았다. 실패했을 뿐이다. 제도를 왜곡하고 여론을 호도하며 시민의 피로와 망각을 치밀하게 계산하는 방식으로 다시 기회를 엿보고 있다. 민주주의는 단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씩, 조용히, 일상 속에서 마모된다. 그래서 새해에도 우리는 신경줄을 놓을 수 없다. 민주주의는 완성 상태가 아니라 관리 대상이다. 잠시 방심하여 ‘설마’하는 사이에 균열은 벌어진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다’라는 헌법상 문장은 조문으로 남을 때 가장 위태롭다. 살아있는 규범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감시와 참여, 질문과 비판이 필요하다. 지켜냈다는 안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킨 다음에도 눈에 불을 밝히는 국민이어야 한다. 권력의 언어를 해독하고, 제도의 미세한 변화를 감지하며, 불의가 상식으로 둔갑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민주주의는 선의에 기대어 작동하지 않는다. 경계와 참여, 기억과 행동 위에서만 호흡을 이어간다. 2026년을 앞두고 우리가 다시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다. 민주주의는 누군가 지켜주는 제도가 아니라, 국민이 계속해서 감당해야 할 삶의 방식이라는 것. ‘불편한 책임’을 내려놓는 순간, 민주주의는 가장 먼저 우리를 떠난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언제나 되돌리기 어려운 후회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어느 틈에 경제적 선진국으로 올라섰듯이,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의 기준점을 제시하는 나라가 되었다. 우리 공동체가 민주와 평화의 가치를 온전히 지켜낼 것인지를 이제는 온 세상이 주목하고 있다. 해를 넘기며 우리는 각오와 다짐을 새로이 하여 나라와 국민이 공동체적 생명력을 이어가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2-17

법관의 양심, 믿을 수 있나

대한민국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적는다. 사법독립의 원칙처럼 보이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의문이 생긴다. ‘헌법과 법률’은 공개된 객관적 기준이 맞지만, ‘양심’은 개인의 내면이 아닌가. 법적 판단에 주관적 요소가 개입할 위험성을 헌법 조문이 버젓이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사회에서 사법불신은 반복되어 왔다. 정치사건, 재벌관련 사건, 권력형 비리에서 ‘판사의 양심’이 과연 공정했는가 싶은 의심이 따라붙었다. 판사도 인간이다. 학연, 지연, 이념과 무관할 수 없다. 개인의 경험과 가치가 판단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다면, 그 주관성을 어떻게 통제하고 공개하며 객관화하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양심’ 개념에는 이를 견제할 장치가 없다. 판결에는 법리만 남고, 뒤에서 작동한 양심과 가치판단에 관한 설명은 사라진다. 양심은 기록되지 않으며 검증할 방법도 없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미국은 헌법 어디에도 ‘양심’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신 판례(precedent)와 정당한 절차(due process)가 핵심이다. 판사의 판단이 개인의 내면에 의지하는 게 아니라, 공개된 판례 체계와 충돌하지 않도록 구조적 제약을 둔다. 영국은 판사의 주관 대신 합리성(reasonableness)을 외부 기준으로 요구하고, 이해관계 신고와 회피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용한다. 독일 역시 판사교육과 법리체계에서 ‘양심’을 강조하지 않고, 비례성, 기본권, 법치의 원리 등 실증적 원칙을 적용한다. 개인적 도덕감정보다 공개가능한 법리기준이 중심이 된다. 주요 법치국가들은 이렇게 ‘양심’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공개된 원칙과 구체적 절차로 사법신뢰를 확보한다. 우리 헌법 제103조의 ‘양심에 따라’는 법적인 검증 또는 견제장치가 없는 불확정적인 개념이다. 양심이라는 이상을 강조하기 전에, 그 이상을 객관적으로 보증하는 제도가 있어야 한다. 사법독립을 말하면서도 국민이 법원을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은 없다. 양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주장과 강변만 남지 않을까. 헌법의 해당 문구를 다시 살펴야 한다. 법관의 독립은 객관적 기준과 실증적 절차로 보장할 일일 뿐 내면적 자의적 양심으로 보장할 일이 아니다. 판결의 공개성과 예측 가능성도 확보해야 한다. 주요 판결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시민이 열람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판사의 이해관계 공개와 시민참여 감시 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판사가 공적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라면, 양심을 감시하는 것은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다. AI판사 도입논의가 등장한 것도 결국 같은 문제에서 비롯된다. 양심이라는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무엇을 제거하고 일관적이며 통제 가능한 수단을 확보하자는 요구다. 인공지능이 모든 판단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최종적으로 사람의 ‘양심을 믿어달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는 시대는 마감해야 한다. 양심은 개인의 내면이고, 법은 사회적 약속이다. 사법의 신뢰는 고상한 단어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이며 확인이 가능한 제도에서 나와야 한다. ‘법관의 양심’이라는 표현을 신화적 기대에서 구체적 현실로 끌어내는 작업이야말로 대한민국 사법개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2-10

고객정보 유출, 책임은 어디에?

쿠팡이 사고를 쳤다. 소비자 고객들의 소중한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름, 주소, 전화번호, 계좌내역, 심지어 자택입구 비밀번호까지 시중에 떠돌게 되었다. 정보유출이 퇴직자의 소행이었다지만, 책임의 소재를 단순히 개인에게만 떠넘길 수는 없다. 회사는 고객정보를 관리하고 보호할 책임을 지닌 주체로서, 이 같은 사고로 초래되는 모든 문제에 대해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미국이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쿠팡이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한 기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의 규제환경을 인지하고 있었을 터이다. 상응하는 소비자 보호체계를 갖추어 높은 수준의 정보보호시스템을 보유했어야 한다. 개인정보 유출은 단순한 행정실책이 아니라 기업생존을 위협하는 중대한 사건으로 여겨져야 한다. 막대한 금액의 피해 보상은 물론 주주와 소비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최고경영진이 직접 사태수습에 나서야 한다. 회사의 신뢰가 흔들리면 주가급락과 투자자 손실이라는 직접적 피해가 뒤따르기 때문에, 미국 기업이라면 기업의 사활을 걸고 대응했을 사건임에 틀림없다. 쿠팡의 대응은 전반적으로 미흡하다. 한국 사업장에서만 활동하는 기업이라는 이유로, 미국 본사는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소비자 정보가 유출되어 발생할 수 있는 사기, 금전적 피해, 심리적 불안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기업이 법적, 도덕적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소비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단순한 관리소홀의 문제가 아니라, 기업문화와 경영철학의 문제다. 한국에서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이유 중 하나는, 기업에 대한 규제와 처벌이 미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슨하기 때문이다. 개인정보보호법이 존재하지만, 현실적 강제력과 피해보상 체계는 턱없이 부족하다. 데이터 유출 시에 금융적, 평판적 피해가 단기간에 직접적으로 가시화되어 기업의 생존을 위협하므로 책임있는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쿠팡이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한 등록기업으로서 한국소비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글로벌수준의 개인정보 관리와 책임 있는 대응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퇴직자의 실수’라 치부하며 면죄부를 줄 수 없다. 고객의 개인정보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결국 소비자 대중이 짊어지게 된다. 제도적인 보완과 철저한 규제확보가 뒤따라야 한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한국소비자들이 기업에게 정당하게 요구해야 할 책임과 투명성, 그리고 대응수준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쿠팡은 고객정보 유출로 발생한 모든 문제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기업의 신뢰와 사회적 책임은 법적 의무를 넘어, 공공의 신뢰형성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부도 제도개선에 나서야 한다. 기업이 소비자를 가벼이 여기는 풍토를 일소해야 하며, 정부가 국민을 대신하여 기업으로 하여금 소비자 국민을 존중하고 개인정보를 소중하게 여기도록 이끌어야 한다. 경제환경이 예전과 비교할 때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소비자 환경이 나아지지 않고는 선진국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국민이 신뢰하고 소비하는 기업이 되어야 하며, 소비자 국민은 늘 깨어있어 경계해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