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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보내는 2024년, 반기는 2025년

장규열 고문 2024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크고 작은 일들이 이어졌고 국민 각자는 나름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었다. 2024년의 기억은 밝고 경쾌했던 기억보다는 힘들고 어두운 일들이 강하게 남아있다. 경제적 불확실성, 지구온난화와 기후위기, 국제정세의 긴장과 갈등, 사회적 갈등에 이은 계엄정국까지, 국민 모두가 한층 무거운 마음으로 한 해를 보냈어야 했다. 쉽지 않았던 365일이라도 지나간 시간은 모두에게 배움을 남긴다. 위기 속에서 기회를 발견하고 어둠 속에서 빛을 찾으려는 노력이 올해 우리를 버티게 한 힘이었다. 작지만 중요한 변화들이 있었다. 개인적인 삶의 성취와 작은 성공들, 가족과의 유대, 지역사회 안에서의 공감과 협력은 살아가는 데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2024년의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연결과 연대의 중요성이 아니었을까. 팬데믹이 남긴 여파 속에서도 경제적, 심리적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리는 서로 돌아보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소셜미디어에서 때로는 부정적인 목소리가 소란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에서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기부와 봉사, 지역공동체의 소통과 협력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우리가 아직은 따뜻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2025년을 맞으며,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할 시간이다. 2025년이 가져올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일상으로의 회복’이 아닐까. 경제난국과 탄핵정국의 뒷마무리가 남아 있지만, 이제는 국민이 다시 안정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한다. 2025년은 하루하루의 작은 기쁨과 평범한 날의 소중함을 기억하고 다시 찾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다가올 한 해는 진정한 변화와 과감한 혁신의 해가 되어야 한다. 세계적으로 기후변화와 기술발전에 대한 도전과 기회를 목격하는 이즈음에 새로운 에너지기술의 발전, 지속가능한 산업으로의 전환, 인공지능(AI)을 포함한 기술혁신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변화는 물론 부작용도 동반하지만, 우리가 기회를 현명하게 활용한다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터이다. 사회적으로 우리에게 화합과 포용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분열과 갈등의 심화와 함께 사회적 양극화가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2025년에는 부디 서로 다른 목소리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함께 나아가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격차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목표를 향해 협력할 때, 우리는 더 나은 사회와 국가를 만들어 낼 것이다. 새해를 맞아 우리는 무리한 목표를 쫓기보다 오늘의 모습을 돌아보고, 주변 이웃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며, 각자 선 자리에서 작은 긍정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목표를 세우면 어떨까. 2025년은 한 해의 기대와 노력이 튼실한 결실로 맺히는 해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희망’이라는 가치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희망은 근거없는 낙관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는 실천의 힘이 아닌가. 모든 이들에게 밝고 맑은 소식이 골고루 펼쳐지는 2025년이 되길 기대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4-12-25

비상계엄 정국, 진짜 위기는?

장규열 고문 ‘비상계엄’이란 글자만으로도 긴장이 돋는다. 나라를 관통한 계엄 상황은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미디어를 통해 전달된 모습은 의심과 불안을 동시에 키웠다. 법적 해석과 책임 공방이 이어지지만, 논란 속에 진짜 중요한 것들이 묻혀간다. 계엄이 내려진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었든, 국민은 깊은 불안에 시달린다. 밤마다 뉴스에 귀를 기울이느라 잠 못 이루는 날들이 이어졌고 공포와 혼란이 일상에 스며들었다. 그러는 가운데에도 현실의 위기들은 한 치의 양보없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 의료 대란, 언제까지 외면하는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대형 병원들의 진료 공백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으며,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환자와 가족들의 근심은 깊어만 간다. 병원을 찾았다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환자들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의대생들의 수업거부와 전공의들의 집단사직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내년에 의료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갈지 예측조차 어렵다. 의료는 나라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시스템이 아닌가. 방치한다면 그 피해는 산더미처럼 국민에게 돌아갈 뿐이다. 교육은 어떤가. 사회 전반에 걸쳐 교육시스템이 위기를 맞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이 교육격차를 심화시키고, 팬데믹 이후로 드러난 학습 공백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다. 미래를 책임져야 할 교육이 흔들리면, 피해는 수십 년 뒤 더 큰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정치권은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질적인 논의보다 상대를 비난하는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경제가 위태롭다. 물가와 환율이 국민의 일상을 위협한다. 글로벌 경제의 불안정 가운데 우리 경제도 휘청거리지만, 대비책이 보이지 않는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버티기조차 어려운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생활비가 급등하고 원자재 가격이 치솟으면서 서민들의 삶은 더욱 고단해진다. 국제정세도 불확실하다. 미국의 정권교체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한미 관계는 새로운 시험대에 올라선다.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과 긴장이 늘 있지만, 이를 적절하게 대비하는 정치권 리더십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치는 무엇을 하는가. 정치는 국민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 정치의 본질이며, 국민이 믿고 맡긴 권한의 존재 이유가 아닌가. 그럼에도 정치권은 국민의 걱정을 덜어줄 생각은 커녕 상대를 향한 비난과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 비상계엄이라는 엄중하고도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여야는 서로를 탓하며 책임 공방에만 열을 올린다. 정치는 곧 국민이다. 정치인들이 국민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정쟁에만 빠져 있는 동안 피해는 결국 국민이 짊어질 수 밖에 없다. 서로를 향해 비난하기 보다 국민의 삶을 바로잡아야 한다. 시선의 방향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서로를 노려볼 일이 아니라, 함께 국민을 바라보아야 한다.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국민이 바라는 진정한 리더십이다. 국민이 보고 있다. 정치가 해결의 중심에 서야 하고 본연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무엇이 진짜 위기이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살펴야 한다. 이제는 정치가 답을 할 시간이다.

2024-12-18

정치의 불안과 국민의 현실

장규열 고문 초등학교 때였나, 국군장병들을 위문하는 편지를 썼었다. 상투적으로 적었던 구절이 바로 ‘저희들의 하루하루를 편안하게 지켜주시는 국군 아저씨께….’가 아니었던가. 그 뜻을 이제야 새긴다. 대한민국은 편안한 밤을 잊어버렸다. 간밤에 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공연히 불안하고 마음이 쓰인다. 정치가 국민을 힘들게 한다. 최근 대한민국이 처한 현실은 국민에게 어둡고도 힘겹다. 대통령의 실책으로 촉발된 비상계엄 논란은 정치권의 혼란을 가중시켰으며, 언론은 이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을 부각시켰다. 국민의 하루하루는 정치권의 복잡한 셈법이나 첨예한 갈등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럼에도, 정치적 혼란은 국민 개개인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가는 치솟고, 경제는 침체되며, 청년들은 미래를 불안해 하고있다. 중소상공인들은 일상의 생계를 걱정하며, 직장인들은 끝없는 업무와 고용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정치권의 논쟁과 갈등은 국민에게는 사치로 보일 뿐이다. 탄핵이든 하야든, 자격정지든 혹은 조기대선이든, 국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면 어디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나. 국민에게 소중한 소통의 통로여야 할 언론 또한 문제다. 갈등을 조명하고 이념 대립을 자극하는 기사는 많지만, 국민이 필요로 하는 정보와 문제해결을 위한 진중한 논의는 태부족이다. 보통사람 국민에게 좌와 우로 나뉘어 다툴 여력이 없다. 국민이 필요로 하는 것은 정치권의 자기보호적 논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삶의 무게를 덜어줄 민생정책이다. 정부를 둘러싼 논란이 길어질수록, 정치와 국민의 간극은 더욱 벌어진다. 정치적 권력 다툼이 아닌, 국민의 삶을 중심에 두는 정치가 필요하다.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문제는 헌법적 절차와 국민적 합의에 따라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안을 찾는 것이다. 정치권과 언론이 국민의 현실을 직시할 때다. 국민은 더 이상 정치적 혼란 속에서 갈피를 잃을 까닭이 없다. 정부와 정치권은 비상계엄 논란에서 시급히 벗어나, 국민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서로를 비난하기 위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정치를 회복해야 한다. 오늘도 국민은 자신의 자리에서 힘겹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정치권이 국민의 삶에 귀 기울이고,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노력을 시작할 때, 이 어두운 현실을 넘어서는 희망의 불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책으로 비롯된 여러 어려움을 군을 동원하면서 무력으로 돌파하려 한 대통령은 나라와 국민 앞에 큰 실수를 하였다. 국민의 하루하루를 지켜야 했을 국군장병들을 정쟁의 도구로 사용하려 한 일은 용서받기 힘들다. 보통 사람의 평범한 일상이 편안하게 지켜지는 나라에 살고 싶다. 국민이 위임한 권한을 무겁게 여기며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 국민이 편해야 나라가 편하다. 국민은 저녁마다 편안하게 잠들고 싶다.

2024-12-11

어른은 누구인가

장규열 고문 ‘어른’은 나이로만 정의되지 않는다. 신체적 성장만이 아닌, 독립적 사고와 자율적 책임감, 그리고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적절한 역할수행이 ‘어른됨’의 핵심이다. 현대 사회에서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심지어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도 독립심과 자율성이 결여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문화적 특성을 반영한다.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대학 교수들이 학부모들로부터 학점에 대한 항의를 받는 일이 흔해졌다고 한다. 학생 본인이 교수와 소통하는 대신 부모가 대신 나서는 것이다. 한편, 기업에서는 신입사원의 부모가 상사에게 연락해 자녀의 부서배치 조정을 요청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현대 사회에서 흔히 관찰되는 ‘아이어른’ 현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나이로는 성인에 이르렀지만, 아직도 부모에게 의존하거나 독립적 문제해결 능력을 갖추지 못한 어른들이 증가하고 있는 터이다. ‘아이어른’ 현상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첫째, 과보호적 양육방식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부모들이 자녀를 스스로 성장하도록 돕기보다는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문화는 자녀의 독립심을 극도로 약화시킨다. 둘째, 지극히 경쟁적인 사회구조도 영향을 미친다. 취업난과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자녀가 실패를 경험하지 않도록 과도하게 개입하려는 부모들이 늘고 있다. 마지막으로, 교육제도 역시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보다는 주입식 학습에 치중하며 문제해결능력을 길러주지 못한다.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성숙한 사회를 유지하려면 개인 각자가 독립적 사고와 자율적 행동 역량을 길러야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독립심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는다. 어른은 사회적 책임을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 책임감을 회피하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못하는 미성숙함은 개인뿐 아니라 정부와 같은 사회적 조직에서도 종종 목격된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정부가 중요한 국정운영 과정에서 보인 미성숙함으로 인해 연속적인 충격을 받았다. 정부는 적절한 대비와 의사소통 없이 ‘비상계엄’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취함으로써 국민의 혼란과 불안을 초래했다. 성숙한 어른이라면 당연히 수행해야 할 책임을 방기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정부가 여러 문제를 사전에 예측하고 기획하며 대비했더라면, 이러한 대혼란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부는 명확한 대책도 없이 상황을 악화시키는 미성숙한 모습을 보여왔다. 어른다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성찰해야 할 지점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물학적 나이에만 달린 게 아니라,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타인과의 관계에서 책임을 다하는 태도를 포함한다. 개인은 스스로 독립심을 기르고 부모는 자녀를 자율적으로 성장시켜야 하며, 정부와 같은 사회조직 역시 자신의 역할과 책임을 적절하게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개인과 사회 모두 어른다움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새겨야 할 때다.

2024-12-04

법조와 AI

장규열 고문 ‘법원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모두 그렇게 말하면서도 늘 여운을 남긴다. 같은 사건을 놓고 가진 이념의 향배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고 판이하게 판단한다. 엄연한 팩트도 보는 입지에 따라 다른 게 보이고 정반대로 해석되기 일쑤다. 객관적이며 공평한 판단은 법조계에서도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실과 법리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한다지만, 우리는 사건을 맡은 판사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성향의 판결을 내려왔는지 궁금하다. ‘사실’은 벌어진 일의 실체일 것이며 ‘법리’는 이미 적혀있는 법조문을 적용하는 일이 아닌가. 쌓여있을 판례와 법조문 간의 관련성 등을 객관적이며 균형있게 참고하여 마지막 결론을 내릴 터이다. 이념과 시류, 여론과 주장에 흔들릴 위험이 있는 사람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분석이 가능할 인공지능(AI·Artifical Intelligence)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AI는 이념적 편향이나 감정적 판단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므로, 법조문과 판례를 바탕으로 객관적이며 균일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까. 방대한 판례와 법적 데이터를 빠짐없이 신속하게 분석하여 적절한 사례와 타당한 규정을 제시할 수 있어, 법조 판단의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킬 것이다. AI가 이렇게 수다한 법적 결정을 적절하게 처리할 수 있다면 법률 자문이나 변호사 비용이 내려가 보통 사람들도 쉽게 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법조에 AI를 활용함에는, 몇 가지 과제도 있다. 법적 판단은 사실 관찰과 법조문 해석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사회적이며 도덕적 관련성을 반영해야 할 때가 많다. AI가 인간적 맥락을 이해하면서 판단할 수 있을까. AI가 오판을 한다면, 책임소재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터이다. AI는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훈련될 것인데, 데이터의 편향 가능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도 문제다. 판단은 단순히 사실을 발견하고 규정을 집행할 뿐만 아니라, 사건 관련자의 인간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 어려움을 AI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아직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념적으로 극심한 편향성이 문제로 드러난 이상, 법조계가 AI를 유용한 판단도구의 하나로 도입하여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고려했으면 싶다. 다만, 사람을 완전히 대체하기보다 법조인과의 협력을 통해 공정하고 균형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현실적인 접근이 아닐까. AI는 판사, 검사, 변호사의 업무를 돕는 역할로 시작해 점진적으로 더 많은 역할을 맡게 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어 보인다. 사실판단과 법리적용보다 이념의 성향과 여론의 향배에 따라 법조의 판단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행태는 국민이 보기에 그리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법원의 최종판단이 존중되려면, 투명하고 공정한 심리와 결정과정이 보통사람들의 공감과 동의를 얻어야 할 터이다. 인간의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편견과 정치적 이념성향을 최소한으로 제어하면서 정의로우며 공명정대한 결정에 이르러야 할 터이다. AI의 장단점을 모두 고려하여 법조에 적극 활용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2024-11-27

기자와 대통령

장규열 고문 20세기를 가로지르며 백악관에서 활약했던 기자가 있었다. 헬렌 토마스(Helen Thomas). 1961년 케네디 대통령에서부터 2010년 오바마 대통령까지 열 명의 대통령을 상대하였다. 여성 저널리스트의 영역을 개척하면서 대통령에게 어려운 질문을 수없이 던지면서 언론의 자유를 지켰다. 전쟁과 인권에 관하여 분명한 태도를 견지했으며, 대통령과 정부의 투명성을 강조하였다. 여럿 대통령을 겪은 소회를 책으로 정리하였다. ‘대통령님, 들으세요.(Listen Up, Mr. President.)’ 그가 지적한 대통령이 지녀야 할 덕목의 첫째 가닥은 ‘책임과 투명성’이었다. 대통령은 국민을 향하여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하며 투명해야 한다고 하였다. 두 번째는 ‘정직과 성실’.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보다 국민에게 덕이 되어야 하며, 숨김없이 정직해야 하고 한결같이 성실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국민의 일상에 관하여 늘 관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소통’해야 함은 세 번째 덕목이었다. 대통령의 관심이 엘리트 정치권(‘Washington bubble’)에만 갇혀서는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상대해야 하는 미국의 대통령은 전쟁보다 외교에 방점을 두고 갈등상황을 해결해야 함을 네 번째 덕목으로 지적하였다. 역대 대통령들이 외교정책을 추진하면서, 군사적 개입보다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이 항상 우월한 결론에 이를 수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저널리즘의 역할과 위치를 존중하고 투명하게 소통해야 함은 다섯 번째 덕목이다. 언론과 건강하고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든든하게 지켜내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언론과 통하지 않고는 실질적으로 국민과 대화하고 소통할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경고하였다. 연속성과 역사성을 가져야 하는 대통령직을 고려할 때,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들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참고하고 현직 수행에 참고해야 함을 여섯 번째 덕목으로 삼았다. 대통령실의 전통과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치명적인 실수를 피해갈 수 있으며 백악관의 위치를 굳건하게 세워갈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일곱 번째 가닥은, 대통령이 국민의 일상을 헤아리면서 국정에 임해야 하는 ‘연민과 공감’의식이었다. 사회적 경제적 이슈들에 민감해야 하며 민생에 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다. 누구보다 대통령에게는 ‘균형감각’이 중요함을 지적하면서, 의사결정에 있어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폭넓게 청취하여 치우치지 않는 결정에 이르러야 하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다. 저널리즘의 본진이라 불리우는 미국에서 대통령실을 50년도 넘게 드나들었던 기자 헬렌 토마스가 전하는 말은 귀기울여 들을 가치가 있어 보인다. 대통령 자신에게 들으라고 언급한 여덟 덕목이지만, 언론사 소속 기자들에게도 깨우치게 하는 뜻이 깊다. 저널리즘이 민주주의를 지킨다. 권력자의 행동양식을 바르게 이끌고 투명하고 정직한 임무수행을 담보하며 국민의 일상이 편안하게 안정되려면 언론이 깨어 있어 대통령과 정부를 일깨워야 한다. 기자는 국민과 대통령을 잇는 건강한 다리여야 한다.

2024-11-20

수능 아침 생각

장규열 고문 수능날 아침. 아이들이 십대후반에 거쳐가는 통과의례 앞에 온 나라가 멈춘다. 마음은 기온보다 훨씬 춥다. 수험생은 마음이 떨리고 부모는 가슴이 아프다.‘잘 할 수 있어!’ 응원하지만, 무엇 하나 해줄 수 없는 속마음이 종일 힘들다. 실력만큼 실수없이 치르고 오기만 바랄 뿐. 정겨운 친구들이 차가운 경쟁의 대상이 되어버린 처지가 밉다. 선생님은 제자들의 이 하루가 안타깝고, 가족과 친지들도 아슬아슬하다. 온 나라가 몸살을 앓는다. 영어듣기 시험시간에 항공기 운항까지 멈추는 나라가 있을까. 수능만큼은 누구도 소홀할 수가 없다. 온 나라가 빡빡한 긴장에 빠져든다. 수능의 ‘역할’은 무엇인가. 대학수학능력시험. 수학능력을 시험한다는 데, 기본소양 인증인가 아니면 실제실력 평가인가. 대학입시 앞에 설정된 관문이지만, 실력을 평가해 줄을 세우는 도구로 삼는 일은 너무 낡은 생각이다. 대학공부를 해낼 수 있겠는지 기초적인 소양을 인증하는 정도로 그 기능을 조절해야 하지 않을까. 대학에 들어가는 방법이 이제는 너무나 다양하다. 수능 한 번의 결과로 학생의 진짜 실력을 평가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겨울로 들어가는 길목 차가운 아침에 서 있는 수능의 낡은 모습은 유효기간이 지났다. 일 년에 ‘하루’만 치르는 것도 문제가 아닌가. 컨디션이 바닥이라거나 몸이 아픈 건 용납되지 않는다. 위급상황이 발생해도 오늘을 돌아가지 못한다. 깊은 슬픔을 엄청난 비극을 당해도 오늘은 수능이다. 무조건 오늘 치른다. 딱 하루 단 한 번. 거른다면 온통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 한 해에 딱 하루 한 번만 치러야 한다는 생각은 누가 지어냈을까. 그동안 그래 왔지만 이제는 바꾸어야 한다. 교육 관련 제도를 바라보는 정책적 안목이 왜 그런지 게으르고 느슨하다. 세상은 빛보다 빠르게 바뀌어 가는데 우리 수능은 수십 년째 멈춰 서 있다. 총기넘치는 Z세대 오늘의 십대에게는 일 년에 적어도 몇 차례 기회를 더 주어야 한다. 대학이 성역인가. 고등교육을 위한 준비상태를 살핀다면서 이처럼 불필요한 긴장을 유지할 까닭이 없다. 대학운영과 대학입시에 관한 업무를 과감하게 대학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 대학입학을 위한 기본소양을 검정하는 새로운 수능은 일 년에 몇 차례 치를 수 있어야 하며, 학생이 편안하고 유연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실수를 돌아보며 수정해 가는 값진 경험도 귀하지 않을까. 일 년에 딱 하루 로또처럼 만나는 수능은 이제 막을 내리자. 딱 한 번 시험을 잘 쳤던 경험을 평생 붙들고 국민 앞에 무례하게 서 있는 이들을 목격하지 않는가. 정책과 제도는 세대와 시대에 걸맞게 바꾸어야 한다. 수능 아침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온 수험생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기울였던 노력과 수고에 보상과 결과가 합당하게 돌아오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꾸준히 실력을 쌓으며 열심히 사는 사람이 끝내 이기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한판의 경쟁’만 떠올리는 건 정상이 아니다. 일등만 대접받는 교육은 부적절하다. 교육은 과정도 결과도 모두에게 뿌듯함과 보람을 안겨주어야 한다. 대입제도와 수능시험, 대학과 대학교육은 오늘에 맞게 변화해야 한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4-11-13

왕과 대통령, 백성과 국민

장규열 고문 대통령이 국민 앞에 나서기로 하였다. 소란스러운 정국을 설명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설 터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우방 미국은 대선을 치른다.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 대한민국과 어떤 관계를 이어갈 것인지도 사뭇 관심을 끈다. 조선이 무너진 후 짧았던 대한제국을 거쳐 일제강점기를 지나 그리 심도깊은 훈련없이 우리는 민주정체를 국체로 삼았다. 그래서였을까, 산업화의 귀한 발자취를 남기면서도 우리는 본격적인 민주화에는 더디 다가섰다. 아직껏 무르익었다 말하기 힘든 민주주의의 토대는 언제 든든하고 편안하게 설 것인지, 국민은 늘 목이 마르다. 왕과 대통령은 무엇이 다른가. 그 옛적 백성과 오늘의 국민은 같은가 다른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국민의 기대와 권리가 이따금씩 외면당하고 배반당할 적에 우리는 당혹스럽다. 조선의 백성은 왕정체제의 피지배층으로 왕권에 속하는 존재였지만, 오늘날 국민은 민주체제에서 국가의 주권자로서 독립적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 백성이 피동적 종속자였다면 국민은 능동적 주체자이다. 백성은 왕의 통치 아래 보호받으면서 세금을 내고 의무를 지며 나라의 정책과 정치적 결정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고 정책과 정치적 결정에 영향을 미칠 권리를 가진다. 법 앞에 평등하고 기본적 인권이 보장될 뿐 아니라 국가는 국민을 보호의 대상일 뿐 아니라 국가의 주체로 인식한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 세습하여 권좌에 올랐던 옛적 왕의 권력은 유교이념과 천명사상으로 정당화되었다. 조정과 신하들의 자문과 조력을 받지만, 왕은 국가의 운영에 있어 무한한 최종결정권을 가졌다. 대통령은 국민이 선거를 통하여 선출하며, 권력은 국민의 선택과 민주주의 원칙에 기반한다. 대통령의 권력은 헌법과 법률에 의해 제한되고 국민에 의해 위임된다. 행정부의 수반으로 정책을 결정하지만 입법부인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하고 사법부인 법원의 판결을 존중해야 한다. 왕의 임기는 종신제였지만 대통령은 법에 따라 정해진 임기 동안에만 임무를 수행한다. 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다스리는 군주로 신성시되었지만, 대통령은 국민의 대리자로서 민주적인 권위를 가지지만 국민의 신뢰를 받아야 권위를 유지할 수 있다. 대통령의 권위는 헌법과 국민의 지지로부터 비롯한다. 국민을 향한 담화에 나서는 대통령은 국민 앞에 겸허해야 한다. 들려줄 메시지는 간결하고 분명해야 하며, 국민의 시선과 눈높이를 적절하게 헤아려 진솔하고 시의적절해야 한다. 정부에 실수나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행정부 최고위 책임자로서 분명하게 시인하고 타당하게 고쳐 갈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다양한 의견을 가진 모든 국민이 안심하고 일상에 임할 수 있도록 균형있고 사려깊은 주제 선정과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한다. 미국의 다음 대통령으로 누가 선출되더라도 담대하고 자신있게 대한민국의 국익을 지킬 대표성과 책임감이 우러나야 한다.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대변하는 대통령으로 나서야 한다. 백성이 무서워하는 왕의 모습이 아니라, 국민을 두려워하는 대통령의 참모습을 기대한다.

2024-11-06

독도, 누가 흔드나

장규열 고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2차 세계대전을 마감하면서, 연합국들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이다. 미국, 영국, 소련 등 관련국들이 참여하여 서명하고 1952년 4월에 공표되었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대한민국과 북한은 어느 쪽이 한반도를 대표하는지 불분명하다는 핑계로 초대도 받지 못하였다.‘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제2조 이 한 줄에 ‘독도’가 들어있지 않다면서, 일본은 지금껏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독도가 일본의 영토로 ‘남은’ 증거라는 것이다. 저 조항의 해석은 물론, 조약이 대한민국의 영토주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신한일어업협정. IMF사태 복판이었던 1998년에 체결되어 이듬해 발표된 대한민국과 일본 간의 어업협정이다. 협정이 양국 간에 설정한 ‘중간수역’에서는 두 나라의 국민과 어선이 상대국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문제는, 대한민국의 영토여야 할 독도가 중간수역에 들어가 두 나라가 함께 관리하는 지역처럼 되어버렸다. 영토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배타적경제수역(EEZ)을 설정하지 않고 중간수역에 빠진 꼴이 된 것이다. 일본이 대한민국 영토 독도의 영유권적 지위를 최소 절반이라도 흔들 수 있는 빌미를 남긴 셈이다. 중간수역에 떨어진 독도의 운명은 누가 돌아보는가. 우리가 독도를 생각하며 다분히 정서적이며 감상적인 ‘독도는 우리땅’을 부르고 있을 때, 일본이 조직적인 논리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들을 모으며 국제적 분쟁거리로 독도문제를 준비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전쟁의 참상과 IMF사태의 난관을 기억하는 일에도 몸서리를 치겠지만, 그 와중에 ‘우리땅 독도’의 운명이 위태로울 움직임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뿌리깊은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섬 독도’를 흔들 수 없음을 체계적으로 조리있게 세계만방에 고해야 한다. 신한일어업협정은 그야말로 어업에 관한 나라 간의 약속으로 대한민국 독도의 영토적 지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음도 분명히 짚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목소리가 적절하게 반영되지 않았던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나 지극히 지엽적인 어업을 대상으로 하는 신한일어업협정이 대한민국 영토 독도의 영유권적 지위를 침탈할 수 없음을 국제사회에 천명해아 한다. 국익의 관점에서 일본이 우리의 땅 독도의 지위를 흔드는 행태는 단호하게 막아야 한다. 일본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땅으로 가르치고 있다. 최근에는 독도를 일본땅으로 표기한 관광지도를 서울 한복판에서 배포하였다. 경상북도와 울릉군 등에서 확고한 독도 정책을 세우고 다양한 이벤트를 펼쳐 효과적으로 그들의 헛된 생각을 막아내야 한다. ‘독도는 우리땅!’을 끊임없는 다짐과 구호로 간직하면서,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논거와 실효적인 수호논리를 확보해야 한다. 일본 뿐 아니라 우리 안에도 혹 독도를 가벼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지 경계해야 할 일이다. 독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의 영토가 아닌가.

2024-10-30

갑과 을은 가짜가 아닌가

장규열 고문 누가 갑(甲)이고 누가 을(乙)인가.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만들어 갈 때, 우리에게는 늘 만나는 과제가 있다. 업무적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의 관계를 규정할 때는 특별히 그렇다. 갑의 위치에 서면 늘 앞자리에서 명령하고 주장한다. 을로 판명된 이는 늘 뒷자리에서 끌려다니면서 복종한다. 업무의 우선순위나 전문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갑과 을의 관계에 따라 모든 업무의 흐름이 결정된다. 갑을관계는 대개 조직 내외에서 직위, 연령, 경력, 사회적 지위 등에 따라 형성되며,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진다. 갑을로 표현되는 위계 중심의 관계는 전문성과 성실성보다 직위나 명목상의 위치를 우선시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자아낸다. 업무의 전문성보다 갑을관계가 우선시되는 조직에서는 의사결정의 흐름이 비효율적일 수 있다. 갑의 지시나 요구는 을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할 때가 많아 비판적 사고와 업무적 창의성을 억압한다. 을의 입장에서 전문적인 판단이나 실질적인 지식이 있더라도 갑의 의견에 반대하기가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된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질 높은 논의와 폭넓은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비합리적인 결정을 초래할 가능성이 생긴다. 갑을관계에 의존하는 업무 문화는 개인의 역량과 전문성을 무시하고 오직 외형적인 권력관계만을 우선시한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주며 각자의 성과가 적절히 평가되지 못하는 문제를 낳는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판단보다 직위나 명령에 의해 일이 진행되는 경우 결과적으로 회사나 조직 전체의 경쟁력을 저하시키게 된다. 직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갑의 입장만 존중받는다면 을의 실질적 경험이나 전문적 소견은 무시되기 쉽다. 갑을관계는 조직의 안과 밖에서 스트레스를 증대시키고, 건강한 협력문화를 저해한다. 을의 위치에 서면 상급자의 권위에 의해 자신들의 의견이 쉽게 무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건강한 소통과 발전적인 표현의 단절을 가져온다. 서로 존중하기보다 상하관계에서 오는 불균형적인 교류가 일상화되면 조직 내에서 갈등과 긴장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업무의 성격이 위계질서에 의해서만 규정될 때 조직에서 성과와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갑만 언제나 의사결정의 중심에 있다면 공정한 성과 평가나 승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업무적 능력과 실질적 성과보다 갑의 눈에 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문화에서 성실하고 유능한 구성원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된다. 조직 내에서 진정한 리더십의 부재를 초래하고, 구성원들 사이에서 불신과 불만이 커지게 된다. 관습적인 갑을관계에 의존하는 우리의 전통적 업무문화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비즈니스 환경이 더욱 복잡해지고 전문화되어 가면서 신속하고 유연한 의사결정이 요구된다. 탄탄한 업무역량과 든든한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는 수평적 관계가 요청된다. 성실성과 전문성에 기반한 업무환경은 건강한 업무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직 전체의 성과와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게 한다. 전근대적인 갑을문화를 극복하고 젊고 싱싱한 조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2024-10-23

낙하산을 폐지하라

장규열 고문 정부 기관 고위직 인사가 소위 ‘낙하산’ 관행에 따라 이루어지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들린다. 같은 생각을 가진 실력 있는 인사를 기용한다는 생각에 일부 동의한다. 하지만 들리는 소리는 그 정도가 아니다. 업무 관련 전문성이나 업태 관련 적합성과는 무관해 보이는 마구잡이식 낙하산이 내려오는 일은 어찌해야 하는지.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에서 ‘관행’으로 받아들여지는 인사 관행을 짚어보기로 한다. 첫째, 정부 행정의 전문성을 심대하게 저해한다. 고위공직자들은 국가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고 있으며, 모두 전문성과 경험을 요구하는 자리여야 한다. 그런 자리가 정치적 보은의 수단으로 전락하여 적합성과 전문성이 결여된 인사가 임명되면, 정책의 연속성이 사라지고 정책진행의 질적 저하를 초래한다. 복잡한 행정 업무와 국제관계를 다루는 자리일수록 이러한 문제는 더 큰 혼란을 불러올 것이다. 둘째, 이러한 인사는 공직사회 내 성실하게 일해 온 구성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정권에 의해 고위직에 임명된 인사가 자신의 역량과 상관없이 자리만 차지하게 되면, 공직자들은 공정한 평가와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불신을 갖게 되어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던 이들의 의욕을 꺾고 조직 내 불만과 불안정성을 가져올 터이다. 자신의 업무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헌신해 온 공직자들이 전문성과 성과를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 인사들에게 자리에서 밀려난다면 그로 인한 좌절감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장기적으로 공직사회 전반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해악이 된다. 셋째, 정치적 보은 인사는 조직문화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공직사회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집단이며 투명하고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 인사과정이 정치적 논리로 휘둘리면, 조직 내 공정성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고 내부 구성원들 사이에 건강한 경쟁 대신 불신과 갈등이 증폭될 수 밖에 없다. 상급자의 결정이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조직원들은 그 지침에 대한 신뢰를 잃고, 조직 운영 전반에 대해 회의감을 갖게 되지 않을까. 이는 조직 내 협력과 소통을 저해하고, 건강한 업무 환경을 해치는 주요 요인이 되고 말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를 떨어뜨린다. 국민들은 정부의 고위 공직자들이 공익을 위해 일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정책을 만들어 낼 것을 기대한다. 인사 과정에서 전문성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우선된다면, 국민들은 정부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일하고 있지 않다는 인식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훼손하고, 궁극적으로 정부 운영의 정당성과 안정성을 약화시킨다. 국민적 신뢰가 떨어지면, 정책 추진의 동력이 줄어들고 국가의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터이다. 인사가 만사다. 인적 구조가 건강해야 조직이 튼실하게 선다. 윗 자리를 부실하게 채우면 아랫 자리가 제대로 기능할 방법이 없다. 아무나 때우는 자리는 그 자리를 공직으로 인정해야 하는가부터 다시 물어야 한다. 무작정 낙하산을 폐지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인사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2024-10-16

넘보는가, 넘보게 하는가

장규열 고문 일본이 독도를 넘보는가 싶지만, 중국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를 훔치려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문화공정은 최근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를 둘러싼 쟁점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그들 영토 내 소수민족들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프로젝트다. 문화공정은 한국의 전통문화, 의복, 음식 등을 중국 문화라 주장하며 국제적으로 문화적 정체성과 확장성을 강화한다. 이들 공정은 한국뿐 아니라 다른 아시아 주변 국가들에도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다. 동북공정의 핵심은 고구려와 발해 역사를 중국 동북지방의 지방사로 재해석한다. 고구려는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 존재했던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걸친 고대 왕국으로, 한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 고구려를 한때 중국 영토의 일부였으며, 고구려사는 중국 소수민족의 역사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발해 역시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우리 국가로, 중국은 이를 중국의 지방 정권으로 묘사하며 역사를 왜곡한다. 중국의 주장은 한국의 고대사 정통성에 대한 심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며, 학문적·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문화공정 역시 최근 강하게 나타난다. 중국은 최근 한국의 전통음식인 돌솥비빔밥을 중국의 음식이라고 소개한 바 있으며, 한복을 중국 소수민족이 입었던 전통 의복인 ‘한푸’의 일종으로 주장한다. 이는 한국과 중국 간의 민족적 자부심이 걸린 문제로 확대되면서 양국 간 문화적 갈등을 부르고 있다. 중국은 문화적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일환으로 이같은 주장을 펼치고, 이를 통해 주변국의 문화를 자신들의 역사와 연결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중국의 이런 역사·문화 공세는 단순한 학술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외교적 문제로 발전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왜곡하고 중국의 것으로 재편하려는 중국의 시도는, 한국 국민들에게도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이는 국가적 정체성과 국민적 자존감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질 터이다.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선, 학문적 이론적 대응이 중요하다. 역사학계는 고구려와 발해의 독립적인 역사를 더욱 철저히 연구하여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역사적 진실을 바탕으로 중국의 왜곡된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필수일 것이다. 정부 차원에서도 이러한 연구를 뒷받침하는 재정적 지원이 필요하겠다. 둘째, 문화외교를 강화해야 한다. 한국은 이미 여러 방면에서 세계적인 문화강국으로 성장했지만, 전통문화에 대한 체계적인 보호와 홍보 노력이 더해져야 한다. 셋째,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적극적인 대응도 있어야 한다. 중국의 공세는 주로 온라인을 통해 퍼지고 있으므로 한국도 유튜브를 비롯한 소셜미디어를 통해 국제 여론을 주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본의 강공도 이겨내야 하지만, 중국의 끈질긴 공정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우리의 것을 지킬 의지와 결의가 확고한지 스스로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2024-10-09

관광과 평화

장규열 고문 세상은 넓다. 나라마다 독특한 분위기와 느낌이 있고, 민족마다 고유한 품성과 자태가 있다. 먹거리와 볼거리로 채워진 세상을 낱낱이 가 살필 수 있을까. 문명이 만들어낸 산업들 가운데 관광만큼 이곳저곳을 다차원적으로 넘나드는 가닥도 흔하지 않다. 경제와 사회, 문화와 산업을 가로지르며 관광이 만들어내는 유익이 상상을 넘는다. 매년 9월 27일은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가 지정한 ‘세계 관광의 날(World Tourism Day)’이다. 관광은 우선 도시 및 국가의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산업이다. 전 세계적으로 관광은 모든 일자리의 약 10퍼센트를 만들면서 각국 총생산량(GDP)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특정 도시와 국가의 경제성장에 지대한 역할을 하며, 관광지로 유명한 지역은 관광 자체가 브랜드가 되어 관광객을 유치한다. 관광은 숙박과 유흥, 음식점, 가이드, 교통, 기념품 판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자리를 제공한다. 다른 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숙련되지 않은 노동력도 쉽게 고용할 수 있어 사회 전반의 일반 고용률을 높이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다. 관광산업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관광은 경제적 수익뿐 아니라, 사회문화적 교류를 통해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다양한 국적, 인종, 문화의 관광객들이 특정 도시나 국가를 방문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문화와 전통을 배우고, 또 그들 자신만의 문화를 전파하게 한다. 관광이 빚어내는 문화적 교류는 지역 주민과 관광객 간의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고, 글로벌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데 한 몫을 한다. 관광으로 지역의 전통문화가 활성화된다. 전통 공예품이나 지역축제, 문화유산 등은 관광객의 관심을 받으면서 더욱 자라나고 발전한다. 문화적 자산이 보존되는 동시에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만들어낸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예술, 공연, 음식 등 문화개발 프로그램을 육성한다. 관광이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려면 경제성장과 더불어 환경보호를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 에코투어리즘을 통해 자연을 보존하면서 수익을 일으키거나 저탄소 교통수단을 장려하는 등의 방법으로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관광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보호하고 관광객이 환경을 존중하며 여행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정책을 도입한다. 관광이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고려할 때, 도시와 국가 경제는 장기적으로 더욱 견고해질 수 있다. 관광은 글로벌 경제 협력을 촉진하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 여러 나라와 도시들이 관광을 통해 서로 연결되고, 경제적,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진다. 유럽의 국가들은 관광으로 협력하며, 상호 간의 교류와 협업을 통해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 국가나 지역의 성장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경제적인 상생과 외교적 협력을 도모하게 할 터이다. 관광은 나라들 사이의 갈등과 불화를 치유하고 상생과 협력을 가져오기도 한다. 2024년 ‘세계 관광의 날’ 테마는 ‘관광과 평화’라고 한다. 긴장을 넘어 평화에 이르는 길을 관광으로 열어 가자는 다짐이자 권고가 아닐까. 관광은 세상을 향해 우리가 만드는 창틀이 아닌가.

2024-09-25

인공지능(AI) 교과서와 디지털 교육환경

장규열 고문 내년부터 AI디지털 교과서가 공교육에 적용된다. 세차게 불어온 온라인과 디지털혁명은 교육현장에도 거센 변화를 불러올 참이다. 교육부장관은 더할 나위 없이 자신에 찬 모습이지만 현장에서는 우려섞인 반응도 더러 들려온다. 어차피 온라인이 대세가 되어가는 이즈음에 인공지능 AI가 교육에 활용되는 일은 자연스럽다 해도, 한창 성장발달기에 있는 학생들에게 교과서를 AI로 대체하는 일이 과연 긍정적인 교육 효과로 이어질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해외 각국에도 유사한 시도와 정책이 간간이 고려되고 운용되었지만, 우리처럼 전국적인 단위로 전개되는 일은 초유의 발상이 아닌가 싶다. 우선 장점. AI교과서를 도입하면 학습의 개인화가 가능해진다. 학생 개인의 학습데이터를 분석해서 개별적인 학습스타일에 맞는 맞춤형 교육이 가능하게 된다.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극대화하고 자신의 페이스에 맞는 학습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터이다. 또한, 이에 따라 학생에게 제공할 정보와 지식 내용의 업데이트가 가능해서 종이로 만든 교과서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점도 여럿 지적된다. 기술접근성에 있어 디지털기기와 인터넷 연결이 고르게 확보되지 않으면 디지털 격차로 인한 교육의 불평등이 초래될지도 모른다. 교사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적절한 평가와 준비가 있는지도 생각 깊은 확인이 있어야 한다. 교육을 맡아 지식을 전달하고 지적발달 뿐 아니라 인성지도와 과 체력인도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할 교육의 본질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신중하게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정보의 보호와 교육관련 데이터의 보안문제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AI가 수집했을 학생 개인의 학습데이터를 누가 어떻게 관리하고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기술분야 뿐 아니라 문화적인 부분에 대한 사회 일반의 숙의와 합의가 있어야 할 터이다. 기술은 문화를 바꾼다. AI가 교육도 바꿀 모양이다. 본격적이며 전면적으로 AI디지털 교과서를 공교육에 적용하기 전에 새로운 기술을 세심하게 살피며 검토하는 사회적 노력이 요청된다. 미국에도 AI기술을 활용한 다양한 교육플랫폼들이 존재한다. 수학학습플랫폼 드림박스(Dreambox)는 학생의 수학학습패턴을 분석하고 맞춤형 수학교육에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영국에도 AI학습플랫폼 센츄리테크(CenturyTech) 등 디지털학습시스템이 여러 학교에서 시험되고 있지만 전국적인 적용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일본, 인도와 중국 등지에서도 상당한 기술적 진전을 보이면서 AI기술을 교육에 접목시키는 시도들이 있지만 모든 학생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사례는 아직 찾아보기 힘들다. 세상이 바뀌고 세대가 바뀌었다. 디지털세상의 원주민인 어린 학생들을 교육하는 일에 전통 아날로그 일변도의 교육방식은 물론 통하지 않는다. 다양한 온라인환경에 제한없이 폭넓게 노출되어 있는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쉽지않은 과제다. AI디지털 교과서를 교육에 적용하는 일도 검토해야 하지만, 온라인 교육환경을 기초부터 새롭게 쌓아올리는 일에는 생각보다 세심하게 지혜를 모아야 한다.

2024-09-18

돌려막기와 짧은 시각

장규열 고문 의료대란은 자칫 국가적 위기가 될 판이다. 당장 코앞에 닥친 추석명절을 어찌 넘길까 걱정이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다음이 더 문제다. 이미 시작된 대입 수시지원은 증원된 의대정원을 기초로 발진하였다. 내년에 의과대학 교육이 정상적으로 작동할 것인지 아무도 자신이 없다. 집단이 아니라 모두 개인적인 결정에 따라 떠나버린 전공의들은 돌아올 기약이 없다. 허리가 텅 비어버린 대학병원들은 전문의 교수들에게 모든 업무적 부담이 안겨졌다. 환자들은 본인 증상의 경중을 헤아릴 길이 없으며, 아픈 사람들이 급하면 모두 응급실로 향한다. 정부는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 탓을 하지만, 문제를 일으킨 측은 누가 보아도 정부가 아닌가. 의료대란은 짐짓 국가위기가 되어간다. 사정이 급해진 정부는 전공의들이 비운 자리에 공중보건의와 군의관을 파견하였다. 공보의는 의료환경이 낙후한 지역 마을에서 주민들의 필요를 돌보던 이들이다. 공보의가 떠나면 마을의 보건과 의료는 누가 맡아야 하는가. 이미 전국의 시골 마을에는 ‘외지로 파견된 의사선생님’이 안 계셔서 지역보건에 공백이 생겼다. 군의관은 어떤가. 국방을 맡은 부대병력을 위한 의료에 구멍이 생긴다. 정부가 풀어야 할 문제를 ‘의사 돌려막기’로 해결하려는 발상이 우선 건강하지 못하다. 간호사법을 통과시켜 의사를 도와야 할 인력으로 빈자리를 메우려 했던 일도 같은 맥락의 발상이 아니었을까.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전공의들이 상실감없이 돌아올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에 세심한 고려가 있어야 한다. 정책입안에 긴 안목이 필요하다. 의사 돌려막기를 비롯한 정부의 정책발표에는 국가의 보건정책과 의료행정을 바라보는 짧은 시각이 엿보인다. 당장 추석명절을 어떻게 넘길까 노심초사하고 있지 않은가. 국민보건은 그보다 훨씬 긴 안목을 필요로 한다. 의료임상 뿐 아니라 의학교육까지 엮이고 보니 적어도 백년은 내다보는 장기적 포석이 있어야 한다. 짧게는 내년에 의과대학에서 벌어질 교육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추석에 응급실을 찾는 국민에게 높은 의료수가를 적용하겠다는 발상도 그 시선이 짧다. 그 다음엔 어찌 하겠다는 것인지. 국민과 나라의 긴 미래를 놓고 고민하는 공직자가 보이지 않는다. 국가행정을 다루는 관료의 시각과 지평은 길고도 넓어야 한다. 의료임상의 현장과 의대교육의 체계를 겨우 본인의 임기에만 연동시키는 공무원은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나라가 잘 되고 국민이 편안하려면, 정부가 임기 5년을 훌쩍 넘는 장기적 안목과 너른 정책적 시선을 발휘해야 한다. 짧은 시선과 좁은 시야로는 국가를 순조롭게 이끌면서 국민의 마음을 평화롭게 할 도리가 없다. 정부보다 오히려 긴 안목을 지닌 국민을 납득시키고 설득해 낼 재간이 없다. 가히 국가적 위기로 치닫는 의료대란 앞에 겨우 돌려막기와 짧은 시각으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방도가 없다. 의료개혁으로 지방의료와 필수의료를 일으키려던 초심을 기억해야 한다. 당면 문제는 정면으로 응답하고 해결해 가면서 긴 시각과 넓은 시야로 오늘의 의료대란을 풀어내는 혜안을 만나고 싶다.

2024-09-11

일급의료, 돌아올 수 있을까

장규열 고문 대한민국의 의료는 일급이다. 정부는 지난 수십 년간 국민건강보험을 주축으로 의료행정체계를 잘 구축하였다. 국민들은 그리 큰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 적절한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받았다. 의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는 비교적 낮은 수가가 압박요인이었지만, 특유의 근면성과 부지런함을 토대로 무리없이 의술이 펼쳐져 왔다. 임상의료에는 각급 병원체계가 조직적으로 형성되어 동네 의원에서 대학병원까지 의료시스템이 정돈되었다. 의료교육시스템도 정상적으로 운영되면 한 해에 약 3000명 정도의 젊은 의사들이 배출되도록 정비되었다. 체계와 조직은 서로 톱니바튀처럼 빈틈없이 구성되어 있어, 어느 곳에도 무리한 행정적 압박이나 부담이 없어야 물 흐르듯 작동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번 의료대란은, 의료의 임상과 교육이 만나는 곳에 도사리고 있었던 내재적 문제가 의대정원 확대라는 외부적 충격에 의해 발화된 것으로 보인다. 전공의들은 의대교수의 지도에 따라 임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아직은 전문의가 되기 위한 교육과정에 있는 의사들이다. 이들이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면서 의료소송으로 어려움을 겪는 현장을 목도하였다. 안정적으로 이해되었던 ‘의사’라는 직업이 오늘의 MZ세대 의사들에게는 서서히 매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필수의료 영역에 전문의가 되기까지 십수년을 견디는 일이 버겁게 다가왔다. 의대만 졸업하고 ‘미용의료’로 개업하는 동료들과 사회적 성공에 성큼 다가가는 동년배들이 눈에 들어왔다. 의대정원 확대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급격한 증대결정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의료일선을 떠나기로 결단하였다. 의료의 임상과 교육의 중심에 있어야 할 전공의들이 무더기로 현장을 떠났다. 집단적 결정이 아니라 개인적 결심에 의한 탈주로 보인다. 모두 다른 꿈을 가지고 미래를 다시 설계하려는 몸부림으로 여겨진다. ‘돌아오라’는 메시지는 통하지 않는다. 의료산업의 현상을 유지하기도 어려워졌지만, 의대교육의 앞날과 의료현장의 미래를 생각하면 절망이 앞선다. 책임있는 인사들의 진솔한 사과가 필요하고 국민과 환우를 바라보며 의료산업을 원점부터 다시 논의해야 한다. 추석을 앞두고 응급의료현장이 걱정이지만, 그보다 국가단위 의료산업의 앞날이 경각에 달린 게 아닌가. 의사결정을 맡은 정부와 전문집단으로서 의료업계가 허심탄회하게 지혜를 모아야 한다. 젊은 의사들에게 어떻게 신뢰를 다시 모아줄 것인지, 구체적으로 개선해야 할 시스템과 숫자들은 어떤 것들인지, 임상과 교육의 조화는 어찌 다시 쌓을 것인지, 분명한 근거와 결정을 위한 자료들을 어떻게 선별할 것인지 등 어느 일방의 결정이 아니라 협의와 숙고를 거친 이성적인 의사결정과정을 가져야 한다. 젊은 의사들은 차가운 지성이 이끄는 대로 의술을 향한 소신과 열정을 회복하길 바란다. 전공의가 없는 의료시스템은 허리가 끊겨버린 몸통이 아니고 무엇인가. 개인의 소신을 따르면서도 집단을 향한 사회적 필요를 인식한다면 더이상 의료공백을 용납하기 어렵다. 심사숙고하되 공명정대한 길로 당당히 그리고 속히 나서주길 기대한다.

2024-09-04

고시엔, 장훈, 교토국제고

장규열 고문 장훈(張勳) 선수가 있었다. 한국인이었지만 일본 야구인들은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생애 홈런 504개와 안타 3085개를 치는 등 기록적인 선수생활을 했다. 재일한국인으로 어쩔 수 없었던 멸시와 홀대를 받으면서도, 치욕적인 한계상황에서 인내와 끈기로 자신의 분노를 실력으로 이겨내며 삭였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오사카 나니와상고에서 어렵게 어렵게 야구를 시작했던 무렵, 당시 프로선수 등용문인 고시엔(갑자원)대회에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하였다. ‘조센징’이 고시엔에 나가면 대회가 더러워진다고 놀려대는 바람에 밤새 울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장훈 선수는 이후 놀라운 성장을 거쳐 1990년 일본 ‘야구의 전당’에 입성하는 멋진 마무리를 일구었지만, 한국인으로 받았던 상흔은 늘 가슴깊이 남아있지 않았을까.고시엔(甲子園). 전 일본고등학교야구대회. 2024년 고시엔대회는 한국계 고등학교인 교토국제고(京都国際高)가 우승배를 거머쥐었다. 1947년에 한국계 고등학교로 시작하였지만, 이제는 딱히 한국학교라기보다는 일본 내 국제고 정도로 이해된다. 전교생 160명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한국학생이며 나머지는 일본인 학생들. 그럼에도, 학교의 뿌리를 간직하고자 한국말로 적힌 교가를 부른다. 고시엔대회 결승토너먼트에서 매 경기를 이기면 교가를 불렀다. 일본에서 한국말 교가가 일곱 번이나 우렁차게 흘러나왔다. 장훈 선수는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소년 장훈은 초등학교 시절 일본인 급우들에게 둘러쌓여 구타를 당하거나 싸움에 휘말리곤 하였다. 학교에서 경고를 받고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한국인은 우수하고 용감하며 성실한 민족’이라고 자랑하였다. 어머니의 높은 긍지와 세심한 격려 덕에 굽히지 않고 일본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동해바다 건너서 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로 시작하는 교토국제고 교가의 4절을 읽으면 가슴이 더욱 웅장해 진다.‘힘차게 일어나라 대한의 자손 새로운 희망 길을 나아갈 때에 불꽃같이 타는 맘 이국 땅에서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되자.’누구였을까. 척박했을 여건으로 사면초가 환경에서 학교를 짓고 두고 온 나라 대한을 생각하며 아이들을 가르쳤을 그 사람들은. 역사를 되짚다 보면 뜻이 깊었을 사람들을 수없이 만난다. 눈앞의 이익에 목이 말랐다면 절대로 할 수 없었을 일들을 누군가 해낸 덕에 오늘 세상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필자가 어렸을 적에 들은 경고가 있다. ‘한국인 개인들은 우수하지만 그들을 모으면 힘을 잃는다.’ 이도 어쩌면 일본인들이 한국사람을 비하하느라 만들어낸 표현일지도 모른다. 고시엔의 고지를 점령해 내고야 만 학생선수들의 기개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힘들어도 우리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을 살려야한다. 오늘처럼 나라 안에 뒤엉킨 문제들 앞에도 우리만의 긍지와 지혜로 돌파구를 열어내는 발걸음을 기대해 본다. 일본쯤이야 넘고도 남는 기백을 되살려야 하고, 오대양육대주로 뻣어가는 디아스포라의 정신을 일으켜야 한다.

2024-08-28

은메달과 동메달

장규열 고문 인류의 축제, 여름 올림픽이 멋지고 훌륭하게 지나갔다. 대한민국 대표단 젊은 선수들은 기대를 넘는 좋은 결과를 낳으며 개선하였다. 금, 은, 동메달을 열 셋, 아홉, 열 개씩 획득하였다.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는 물론 더없이 행복하였겠지만, 은과 동을 딴 선수들은 누가 더 기뻤을까. 언뜻 생각하기에는 높은 자리를 차지했을 2등이 낮은 3등보다 낫지 않았을까도 싶다. 하지만 정작 해당 선수들에게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미국 코넬대학이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만족도를 10점 척도로 조사하였다. 은메달리스트의 만족도는 평균 4.9점이었던 반면, 동메달 획득자는 평균 7.1점을 기록하였다. 은메달리스트는 마지막 순간에 금메달리스트에게 이기지 못한 짙은 아쉬움을 가졌으며, 동메달리스트는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 승리를 맛보며 시상대에 오른 터이다. 메달의 색깔이 결정되기 직전에 은메달 획득 선수는 졌지만, 동메달은 이긴 게 아닌가. 하마트면 마지막 시상대에 오르지 못하였겠지만, 결국 승리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메달리스트가 된 것이다.심리학이 말하는 ‘사후가정사고(Counterfactual thinking)’와도 맞닿아 있다. 사람이 어떤 일을 겪고 나서 반드시 가지게 되는 생각의 구조로서, 인생을 되돌아보거나 벌어진 일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일을 일컫는다. 그리 반갑지 않는 일을 당했을 때 사후가정사고는 안도감, 즉 부정적인 생각을 진정시키면서 긍정적인 정서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사후가정사고가 은메달리스트에게보다 동메달리스트에게 보상적 심리를 제공하는 기능을 한 결과, 보다 높은 행복감에 젖게 된다는 것이다.미국 시인 프로스트(Robert Frost)는 ‘가지 않은 길’을 노래하였다. 노란 숲속에 난 두 길을 우리는 어차피 모두 가 볼 수는 없다.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지만, 결국 한 길을 택해야 한다. 절대로 돌아올 수 없는 갈림길에서 어느 한 쪽으로든 나아가야 한다. 그런 끝에 우리는 모두 돌아보지만, 결과에 대한 감상은 드러난 등수나 점수보다는 늘 마음 속에 있다. 그 누구의 노력과 성과를 겉으로 보이는 결과로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남도 평가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우선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야 한다.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이기도 하고 결과를 딛고 계속 나아가는 힘을 기르는 길이기도 하다.올림픽을 마치고 돌아온 ‘모든’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메달리스트들은 물론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에게도 우리는 고맙고 고맙다. 대한민국이 세상과 겨루어 결코 뒤지지 않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 그대들이 자랑스럽다.영국 시인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가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던가. 젊은 선수들에게 나라 안 모습은 부끄럽지 않은가. 젊은이들이 한껏 올려준 자부심의 기대치만큼, 나라의 품격을 오늘보다 한층 올려야 할 책임이 어른들에게 있다. 다음 올림픽을 기약하며 열심히 땀을 흘릴 젊은이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나라를 나라답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낼 새 힘과 용기를 온 나라가 가져야 한다.

2024-08-21

세상의 눈으로 대한민국을 보면

장규열 고문 대한민국은 여기까지 열심히 달려왔다. 산업화에 성공해 경제성장을 이뤘으며, 민주화의 다리도 어렵사리 건너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 결과, 우리는 스스로 대견하게 여기며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국경의 의미가 거의 희미해지고 글로벌 환경이 펼쳐지는 이즈음에 밖에서는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스위스의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세계 여러 나라의 ‘인재 유치 매력도’ 순위를 발표했다. 세상의 젊은 인재들이 역량과 소양을 펼치며 일하고 싶은 나라의 등수를 매겼다.대한민국은 조사대상 63개국 가운데 49위. 우리는 선진국 문턱에 다다랐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조사에서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2022년 결과인데, 이전보다 여덟 계단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미국이 4위, 일본이 27위, 호주가 14위라 하고, 그나마 중국이 우리보다 아래쪽에 보인다.열심히 달려 왔지만, 해외의 젊은 인재들 눈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얘기다. 그 순위마저 해를 거듭하며 하향세라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여러 나라들이 인구감소를 힘들어 하는 가운데, 캐나다는 한 해 이민인구 유입 100만 명을 돌파하며 인구를 획기적으로 늘이고 있다. 비결은 ‘가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다.대한민국은 얼마나 와서 살고 싶은 나라일까. 정부는 위기를 맞은 인구정책을 다시 보면서, 양질의 이민을 끌어들일 고급인력 유도 정책을 세워야 한다. 날이 갈수록 확연해지는 글로벌 환경에서 해외 인재들을 대한민국으로 불러 들이는 정책이 필요하다. 유학 떠난 인재들이 세계시장에서 활약하는 일도 소중하지만 고국으로 다시 불러들일 만한 여건도 만들어 내야 한다.환경적 정주여건, 세금과 연금제도, 2세를 위한 교육시스템, 문화적 다양성과 경제적 안정감, 일상에서의 불편함 제거 등 인재들을 대한민국으로 끌어모을 과제들이 수두룩하다. 여기까지 경제적 집적효과에 방점을 두고 국가경쟁력을 생각해 왔다면, 이제는 보다 다각적이며 심층적인 시각에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야 한다.‘세계 10위권’ 타이틀을 세상의 마음 속에 각인하려면 우리에겐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안전과 치안이 우리의 자랑이었지만 그마저 위태로워 보이는 오늘의 현실 앞에 혹 나라의 경쟁력 관리를 위한 길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여러 사건과 사고 가운데 다소 실망하여 속을 더러 끓였지만 나라의 이미지를 다시 세울 방법을 얼른 찾아야 한다.무엇보다 젊은이들의 심장을 함께 두드릴 방도를 찾아야 한다. 좋은 생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남들의 시선에 비친 우리의 모습에 겸허해야 한다. 생각은 금방 바뀌지 않는다. 진심과 공감을 싣고 방법과 태도를 고쳐야 한다. 세계인이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이 나아지려면 나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내 생각 속의 허상만 붙들고 자만해 봐야 아무도 곱게 보지 않는다.꿈에서 깨어나 우리의 위치를 잘 봐야 하고, 거기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려야 한다.

2024-08-07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지 않는다

장규열 고문 솔직하자. 우리는 회의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결정을 앞둔 사안과 주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할 때, 관련 내용과 조건 등을 사려깊게 확인하면서 대화와 협의를 통해 의견을 조율하면서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회의가 아닌가. ‘회의’라고 이름붙인 모임에서 그런 과정이 있었는가. 별 준비없이 모인 사람들 앞에 누군가 이미 정리하고 결정한 내용을 전달하고 이를 확인하면서 형식적인 최종결정에 이르기만 할 뿐 치열한 숙고와 토론은 보이지 않는 게 우리들의 ‘회의’가 아니었는지. 담론주제에 대하여 개인들이 가진 생각이나 느낌이 없지도 않을 터인데 어째서 우리의 회의 모습은 이렇게 빈약해 진 것일까.교육환경에서 천천히 생각할 거리와 충분히 즐길 거리를 풍성하게 마련해 주지 못한 문화의 척박함을 돌아보아야 한다. 일과 경쟁으로만 내몰아 온 우리 사회의 허점과 패착을 솔직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제라도 누구라도 여유롭게 즐기고 누릴 놀이문화를 길러내야 한다. 누구에게나 탈출구가 필요하다. 누구든 삶의 긴장으로부터 다소간의 해방을 즐길 여유가 있어야 한다. 치열한 일상의 연속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새로운 환경을 만끽하는 기회가 허용되어야 한다. 경쟁의 악다구니뿐 아니라 공동체의 푸근함도 느낄만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 적자생존과 무한경쟁, 추격과 탈취의 목표만 떠오르는 곳에 여유로운 사색과 문화의 향기가 피어오르지 않는다. 견제와 긴장의 차가운 다짐을 풀고 포용과 관용의 따뜻한 가슴이 있어야 한다.경쟁적 이념구도를 극복하고 공동체의 조화로움을 구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돌아보면, 공동체적 놀이문화가 우리 문화에도 숨어있었다. ‘가무에 능한 민족’이었으며 함께 즐기는 놀거리가 우리문화 안에는 풍성하였다. ‘우리의 것’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어째서 사라졌을까. 우리의 문화적 요소들에 대한 까닭모를 열등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우리의 옛모습과 전통, 오늘 우리가 선 자리 등에 관하여 더욱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인식이 오늘보다 따뜻해져야 한다. 다툼과 질시, 경쟁과 추격의 대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서로의 모습을 긍정하고 포근하게 받아들이며 함께 즐기고 누리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줄다리기와 쥐불놀이, 숨바꼭질과 땅따먹기에는 함께 누리는 공동체가 살아 있었다. 때로는 다투고 겨룰지언정 언제나 서로를 인정하는 눈길이 숨어있었다. 의식적으로 경쟁구도를 만들어 끊임없이 다투기만 하는 비생산적인 긴장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당당히 맞서서 이기기도 지기도 하지만, 언제나 ‘함께 즐거운’ 여유가 살아나야 한다. 문화적으로 강하려면, 문화가 공동체를 지지하는 지평을 품어야 한다. 문화를 전통과 구습으로만 해석하지 말고 오늘을 사는 세대들이 모두 함께 누리는 튼실한 소재로 만들어야 한다. 문화가 일상이 되어 즐길 거리가 우리 안에서 솟아나야 한다. 건강한 지적(知的)훈련이 가능하여 치열한 토론이 가능하려면 뿌리깊은 지성이 자라날 여유부터 확보해야 한다. 회의를 회의답게 하려면 비울 공간을 찾아야 한다.

2024-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