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의 통상정책은 언제나 강압과 거래의 언어로 특징지어져 왔다. 미국산업을 살린다는 명분이지만 실제로는 동맹국들에게 일방적인 금전적 요구를 던지며 ‘수용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식의 협상방식을 고수한다. 미국이 한국에게 3500억 달러를 현금으로 내놓으라며 압박한다는 보도는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으로 읽힌다. 일본이 미국의 요구를 수락했으나, 한국은 일단 ’협상의 가치조차 없다‘며 거부했다. 그런 결과, 굵직한 한국 대기업들이 미국 내 공장건설을 중단하고 투자계획을 철회했으며 기술자와 전문인력을 본국으로 철수시키는 초강수를 두었다.
문제는 트럼프식 통상정책이 오히려 미국 산업을 취약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대량실업의 지속과 인력공백의 연장, 생산기반의 붕괴 등 미국 산업계는 다면적인 충격을 만나고 있다. 한국 기업의 철수는 첨단기술과 숙련된 노동력이 빠져나가는 구조적 공백을 의미한다. 한국이 스스로 과대평가하거나 섣부른 승리감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 자본과 기술을 국경을 넘어 이동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신뢰, 노동환경 협조와 국제적 연대 없이는 ‘기술강국’의 지위도 한순간에 취약해질 수 있다.
이번 사태는 두 가지를 드러낸다. 첫째, 트럼프식 일방주의가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준다. 초강대국이라도 동맹을 협력 파트너가 아닌 ‘강탈 대상’으로 대하면 서로 간에 신뢰를 잃고 표류할 수밖에 없다. 둘째, 한국 기업들이 보여준 ‘NO’는 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글로벌 경제질서가 일방적 압력에 쉽게 흔들리지 않음을 상징한다. 이에 더해 유엔을 방문 중인 이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한국은 일방적 압력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내며 동맹도 대등한 파트너십 위에 서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국제무대에서의 이러한 태도는 기업의 결정과 맞물려, 한국이 더 이상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는 인식을 국제적으로 드러내며 강화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우려스러운 부분은 미국 스스로 ‘신뢰 자산’을 잃어가고 있는 점이다. 초강대국의 힘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국제 사회가 미국을 믿고 따를 수 있다는 신뢰, 그 무형자산이야말로 패권의 핵심이었다. 동맹을 압박하고 거래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방식이 이어진다면, 미국의 리더십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위상이 흔들리고, 나아가 세계질서 자체가 불안정해지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마저 배제할 수 없다. 이번 상황의 의미는 승리가 아니라 강압적 산업정책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자존심에 있다. 새로운 국제 질서를 향해 어떤 가치와 원칙을 세워나갈 것인가에 달려 있다.
트럼프의 무리한 일방적 요구를 거부하는 장면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겠지만, 앞으로 대한민국과 세계가 함께 만들어 갈 신뢰와 연대의 체계야말로 국제 사회가 주목해야 할 진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유엔 무대에서 드러나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태도 또한 그 출발점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나라의 이익을 위한 국가의 결정에는 국민의 평온한 일상을 지키려는 정부의 노력이 배어있어야 한다. 느닷없는 경제위기를 불러올지도 모를 미국의 부당한 압박에는 지혜롭게 전략적으로 대응하는 게 맞다.
/장규열 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