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트럼프의 미국, 기로에 서다

미국은 ‘Make America Great Again(MAGA)’을 외치며 세계질서를 흔들고 있다. 보호무역과 자국 이익 우선을 내세운 관세강화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일부 국내 산업을 보호하고 표면적 승리를 얻은 듯 보일 수 있다. 길게 보면, 세계 곳곳에서 미국발 일방적 관세정책에 고통받는 국가들의 원성이 있고 뿌리째 흔들리는 국제질서가 있다. 미국이 쌓아온 ‘신뢰 자본’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결정적인 자산의 침식이 자리 잡고 있다. 2018년, 트럼프 행정부는 세계 각국의 철강과 알루미늄 제품에 고관세를 부과했다. 캐나다, 유럽연합, 일본 등 동맹국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미국철강업계는 환영했지만 동맹국들은 깊은 당혹감과 분노를 드러냈다. 캐나다는 보복관세로 맞섰고 유럽연합도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긴급 대응에 나섰다. 함께 가자던 오랜 파트너들이 각자도생의 태도로 돌아섰고 미국의 지도력은 도전받기 시작했다. 동북아시아의 경우는 더 복잡했다.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중국산 제품에 고율의 관세가 매겨지자, 한국과 대만, 베트남 같은 중간재 수출국들도 직격탄을 맞았다. 스마트폰과 가전, 반도체 등 첨단 제조업의 글로벌 공급망이 뒤틀렸고, 중소기업들은 무역 차질로 문을 닫았다. 한·중·미 간의 삼각무역 구조 내에서 미국의 변화무쌍한 무역정책은 외교적 마찰을 넘어 각국의 생존에 위협이 되었다. 중국은 발빠르게 대응했다. 브라질, 러시아, 동남아 국가들과의 교역을 강화하며 미국 중심의 무역의존도를 낮추었다. 미국의 관세정책은 상대국의 항복을 끌어낸 것이 아니라 ‘디커플링’을 초래했고 미국 중심의 글로벌 가치사슬은 서서히 이완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포스트-미국’ 무역 질서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무역 규범이 위기를 맞았다. 미국은 WTO 분쟁해결기구의 상소기구 판사 임명을 거부하면서 국제무역 규범의 수호자 역할을 스스로 포기했다. 다국적 규칙 기반의 질서 대신에, 국력에 의존한 양자 협상 체제가 부상했다. 무역뿐 아니라 국제 정치 전반에서 불확실성을 키우게 되었다. 세계는 갈수록 더욱 ‘미국 없는 세계질서’를 상상하게 되고 대안적 리더십을 모색하는 중이다. 흐름의 저변에는 미국이 축적해 온 ‘신뢰 자본’의 자멸이 있다. 신뢰 자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산이다. 오랜 기간 세계의 조정자이자 경찰 역할을 자임하며 쌓아온 정치적 신뢰, 경제적 예측 가능성, 국제규범의 준수자라는 이미지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은 그 자본을 스스로 갉아먹으며 소모하고 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소중한 신뢰 자산을 깎아 먹는 셈이다. 미국이 위대한 나라로 다시 서려면, 보호무역과 자국 중심의 승자 독식 전략이 아닌, 다자 협력과 신뢰 회복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관세라는 칼을 휘두를 때마다 파편은 온 세계를 향하지만, 가장 깊은 상처는 미국 자신의 리더십에 남는 법이다. 짧은 안목으로 거둔 이익이 긴 미래의 전략적 손실이 되지 않도록, 미국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 세계는 미국을 주목하고 있다. 세상의 시선이 기대와 존경일지 아니면 실망과 의심일지는 미국의 손에 달렸다. 국제관계는 멀리 넓게 보아야 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8-20

갑을문화 소멸선언

모두 ‘갑을관계’에 익숙하다. 모든 업무에서 갑은 언제나 상위의 위치를 차지하고 을은 그에 종속된다. 위계적 구조는 민간기업 사이에서 그치지 않고, 공공영역과 나아가 조직 내부의 관계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직위, 연령, 경력, 출신 배경 등 외형적인 요소가 갑과 을을 규정하며 그에 따라 업무 관계가 형성된다. 갑을 구분은 전문성이나 성실성 등 본질적 기준보다 앞서 작동한다. 파면된 전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특검의 수사 과정에서도 한 장면이 포착됐다. 피의자 측이 경찰의 신문은 거부하고 특별검사가 직접 신문하길 요구했다. ‘검찰은 갑, 경찰은 을’이라는 인식이 작동했다는 점에서 씁쓸하다. 공권력 조직 안에서 상하관계로 계급화된 문화는 기관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훼손한다. 갑을관계가 작동하는 조직에서 의사결정의 흐름은 비논리적으로 흐른다. 갑이 내리는 지시나 요구는 을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기대하고 업무구조는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을 억압한다. 을이 실질적인 지식이나 경험을 가졌더라도 감히 갑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정책이든 사업이든 수준높은 전문적 논의와 협력이 이뤄지기 어렵고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이 반복된다. 결과적으로 구성원의 역량과 전문성을 경시하게 만든다. 성실히 일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면서 조직 전체의 사기는 자연히 떨어진다. 상사의 말 한마디가 절대적 기준이 되는 환경에서는 역량보다 눈치와 충성이 더 중요하다. 실적과 성과보다는 줄을 잘 서는 것이 생존의 방식이 된다. 유능한 사람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관성과 위계에 길들여진 조직의 풍경만 남는다. 갑을위계는 스트레스의 원인이기도 하다. 상호 신뢰보다는 억압과 불신이 조직을 지배한다.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눈치를 보며 경쟁하게 되며 건강한 조직문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내부의 역학은 갈등으로 점차 무거워지고 고스란히 조직전체의 비효율로 되돌아온다. 갑을문화가 업무적 관계를 규정하면 누구의 기여가 어떻게 평가되는지도 모호해진다. 공정한 보상과 인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정한 리더십도 자리잡지 못한다. 갑을풍토에서 유능한 인재가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없어 조직은 지속적으로 활력을 잃는다. 사회는 갑을로 돌아가지 않는다. 신속하고 유연한 의사결정, 서로를 존중하는 협력시스템과 전문성을 기초로 하는 효율적 판단이 중요하다. 부당한 권위에 복종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걌다. 그럼에도 우리의 업무환경은 갑을관계를 문화적 기초로 삼는다. 바꿔야 할 것은 사람보다 시스템이다. 직위나 지위, 배경이나 학벌이 아니라 전문성과 성실성에 기반하는 관계를 형성하고 평가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누구나 자신의 위치에서 맡은 역할에 책임을 다하고 적절하게 존중받는 업무환경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정부든 기업이든 업무조직 내외부 어디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당신에게 을이었던 상대방은, 당신은 여러 여건상 할 수 없는 그 일에 최선을 던지는 전문인이 아닌가. 조직의 성격이 무엇이든 조직의 위치와 상관없이 구성원 모두의 자리에서 최상의 역량이 최고의 수준으로 발휘될 때, 관련된 조직들의 역량이 살아나고 전문성이 빛을 발할 터이다. 갑을문화는 사라져야 할 구태 중의 구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8-13

영화, 독립영화, 인디플러스

극장가에 ‘다양성’이 사라졌다. 이름난 배우, 검증된 감독, 흥행 공식에 충실한 영화들이 멀티플렉스를 독점한다. 대작 영화 한 편이 개봉하면 전국 스크린의 절반 이상을 잠식하는 ‘스크린 독과점’은 낯익은 풍경이다. 저예산 영화들이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진다. 다양성을 지우는 통에 영화산업 전체의 창의성과 생명력을 갉아먹는 구조적 병폐가 생겨버렸다. 경직된 산업구조 한복판에 끈질기게 질문을 던지는 존재가 있다. 독립영화. 대규모 자본, 물량공세 마케팅과 화려한 스타시스템과는 한참 먼 자리에서 독립영화는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못한 삶의 숨결과 세상의 맥박을 포착한다. 노년과 어린이, 장애인과 성소수자, 이주노동자와 환경 이슈 등 비주류 목소리와 소외되던 이야기가 들린다. 자본논리로는 성립되지 않을 실험과 시도들이 영화라는 그릇 안에서 호흡한다. 독립영화가 모두를 구원하겠나. 제작비는 턱없이 부족하고 상영 기회도 매우 제한적이다. 홍보력도 미흡하고 유통망도 답답하다. 관객과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서 인내와 집요함이 필요하다. 그런 자리에 영화 본연의 정신, 곧 사회와 인간을 사유하고 질문하는 예술로서의 독립영화가 살아 숨 쉰다. 독립영화는 ‘가능성’의 씨앗이다. 낯선 감독과 작가, 배우들이 실험하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한다. 봉준호, 박찬욱, 김보라, 윤단비 등 이름만 들어도 반가운 이들 역시 독립영화현장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갈고닦았다. 독립영화는 한국영화산업의 최전선이자 미래를 담보하는 인큐베이터다. 상영작 리스트를 살피면, 상업영화관의 그것에 못 따라갈 까닭이 없다. 독립영화의 가능성을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전국에 흩어진 독립영화전용관들이 실마리가 아닐까. 포항에도 소중한 공간이 있다. ‘인디플러스포항’. 수도권 집중 문화 지형에서 포항은 소외된 도시다. 영화산업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인디플러스포항’은 도시에 문화적 숨통을 던진다. 놀랄만큼 낮은 관람료 삼천오백원은 가격정책을 넘어, 넓게 열린 문화공간을 지역에 선사하겠다는 선언이다. 상영되는 영화들은 하나같이 속깊은 생각거리와 오래 남을 여운을 남긴다. 극장일 뿐 아니라 영화를 매개로 지역문화 생태계를 새롭게 짜겠다는 움직임이다. 어려움도 크다. 관객 기반이 취약하고 운영수지는 바닥이다. 전국의 독립영화관들이 하나둘 문을 닫는 상황에서 ‘인디플러스포항’이 걸어가는 길이 험난하다. 그런 판에 이 극장의 존재가치는 오히려 높다. 개별 독립영화가 만드는 파장이 소박하지만, 다른 시선, 다른 감각, 다른 세계를 향한 문을 열어젖힌다. 예술의 역할이며 영화의 본질이 아닐까. 산업은 성장을 목표로 수익을 겨냥한다. 영화는 사람의 이야기이며 세상에 던지는 질문이어야 하고 공감을 나누고 연민을 실어야 한다. 독립영화는 영화의 본질을 되새기며 최선을 다한다. 상영관 인디플러스는 영화의 다짐과 기억을 지역에서 살아있게 한다. 상업영화만큼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아도, 우리 삶의 여러 가닥과 높낮이를 돌아보게 하는 잔잔한 매력과 스토리의 벅찬 감동이 있다.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할리우드의 영광이 저물어 간다는 소식도 있다. 독립영화가 영화로의 관심을 불러 모을지 누가 알겠나. 우리가 그 문을 두드려야 하는 이유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8-06

명품 수난 시대

명품. 말이 좋아 ‘럭셔리’, 실은 골치 아픈 부담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누군가 명품을 들었다 하면, 진짜냐 가짜냐를 따지게 되는 시대. 명품이 문제일까, 그 명품을 쓰는 사람이 문제일까, 아니면 명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문제일까. 사람에 따라 이름난 브랜드 물건을 갖고 싶어하는 건 자연스러운 욕망일 수 있다. 디자인이 예쁘니까, 품질이 좋으니까, 혹은 유명인들이 들고 다니니까. 각자의 판단이며 선택이다. 문제는, 명품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이 곧 명품이 되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명품이 사람을 감당하지 못해 수난을 겪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파면당한 전직 대통령 부인의 명품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한다. 처음에는 ‘받은적 없다’고 했다가, ‘받았지만 빌렸었다’고 했었고. 이제는 ‘모조품’이란다. 결국, 공직자 재산으로 신고하지 않았거나 출입국 시 세관에 신고하지 않은 물품들이 문제가 되니, ‘ 명품이 아니고 가짜였다’는 해명이 등장했다. 웃지못할 코미디다. 이쯤되면 그 명품도 억울하겠다. 처음엔 공직자의 부적절한 수령으로 시비에 휘말리더니, 뒤늦게는 ‘그건 짝퉁’이라는 말 한 마디에 자존심이 짓밟혔다. 진품이든 모조품이든 처음에는 ‘있는 척’ 하다가, 나중엔 ‘없는 척’ 하기 위해 명품의 위신까지 끌어내렸다. 진품이든 아니든, 문제의 본질은 ‘품격’이다. ‘사람이 명품을 만드는가, 명품이 사람을 만드는가’ 하는 오래된 질문이 있다. 답은 자명하다. 아무리 값비싼 명품을 걸쳐도 품위와 진정성 없이 행동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장식물에 불과하다. 반대로 검소한 옷차림 속에서도 곧은 인품과 당당한 태도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는 이미 명품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바로 그것이 ‘사람의 품격’이다. 명품을 소지한 사람이 아니라, 명품이 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필요한 시대다. ‘가짜를 구입해서 오빠에게 선물했다가 자신이 필요해지자 오빠에게 빌려서 출국했다.’ 설명이 길다. 이렇게 발뺌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거짓과 변명으로 일관된 태도, 그것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 그에게는 그 어떤 명품을 둘러줘도 어울리지 않는다. 대통령 해외순방에서 버젓이 사용했었다는 허영과 기만에서 국민의 자존감은 여지없이 흘러내린다. 명품을 통해 자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가방과 시계, 옷과 구두, 의상과 장신구. 명품이 늘어가면서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듯한 착각. 명품은 결국 소유자의 태도와 언행에 의해 평가받는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가 명품을 걸치는 순간, 명품은 더 이상 명품일 수 없다. 명품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당신이 걸친 그 명품이 부끄럽다’고 말해야 한다. 명품의 가치는 가격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걸치는 사람의 ‘품격’에 있다. 물건보다 사람을 보아야 한다. 명품이든 무명이든 상관없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명품인간’이 아닌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한다. 명품에 휘둘리는 시대, 사람이 부끄러워지는 시간이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7-30

‘어느 편이냐’를 물어야 하나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는 순간이 있다. 무슨 말을 꺼냈다간 “아, 저 사람은 그쪽이구나” 하는 낙인이 찍힐까 봐서다. 실제로 이런 질문을 이따금씩 마주친다. “당신은 어느 편이세요?” “진보세요, 보수세요?” 마치 당신이 누구인지를 밝히려면 먼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를 밝혀야 한다는 듯이. 처음엔 단순한 정치적 호기심이겠거니 생각한다. 사실 질문에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압박이 숨어있다. 어느 쪽 성향인지 밝혀야 대화가 이어지고 성향이 다르면 말조차 섞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같은 직장에서, 한 동네 커뮤니티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이 나와 같은 편인지’가 관계의 시작점이 되어버렸다. 건강한 민주사회가 감당해야 할 정치적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 자체를 위축시키는 집단주의적 압박으로 이어진다. 갈등과 혐오가 일상의 언어 속에 침투했고, 사람들은 점점 ‘생각’을 드러내기보다 ‘입’을 닫는 쪽을 택한다.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이 말이 어느 편으로 오해받을까?’부터 계산해야 하는 세상이다. 이게 정상일까? 현상의 배경에는 한국사회의 ‘진영화’구조가 있다. 대선이 끝나면 승패와 관계없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정상이 아닌가. 이제는 대선 이후에도 진영 갈등은 오히려 격화된다. 여러 현안에 대한 입장도 자동적으로 진영에 따라 배열된다. 경제, 복지, 외교, 국방, 교육, 심지어 재난 대응에 대한 평가까지도 ‘그쪽이냐 아니면 이쪽이냐’로 나뉜다. 이념의 내용은 사라지고 태도와 감정만 남는다. 이념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느냐는 가치판단의 체계다. 지금은 정작 어떤 정책을 지지하느냐보다 ‘누가 했느냐’가 더 중요해졌다. 진보정권이 추진하면 무조건 반대하고 보수 정권이 하면 무조건 지지하거나 그 반대로 움직이는 식이다. 정치적 판단이 아닌 정체성의 표지가 되어버린 셈이다. 이같은 경향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말의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특정사안에 대해 언급할 때 상대의 성향을 먼저 가늠하려 하지 말고, 그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떤 가치관이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상대의 ‘편’을 파악하려 들기보다 ‘사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도 어느 진영에 속한다는 생각을 벗어야 한다. 의견이 매번 한 편에만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생각에 일관성이 없다는 게 아니라, 삶이 단순하지 않기에 개인의 의견도 사뭇 복잡하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언론도 역할을 해야 한다. 정치 뉴스를 전할 때 단순한 ‘편 대 편’ 구도가 아닌, 이슈 그 자체의 맥락과 내용을 깊이 있게 전해야 한다. 토론의 장을 마련하되 논리보다 감정을 자극하는 프레임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진영정치의 피로감은 정치권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민과 언론 모두가 진영적 구도를 재생산하거나 소비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점도 돌아보아야 한다. ‘어느 편이냐’는 질문은 관계를 시작하는 문이 아니라 관계를 가르는 선이다. 그 선을 흐리게 만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생각을 편안하게 인정하는 곳에서 비로소 민주주의가 작동한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7-23

여당에 주목하지만, 야당은 한참 멀었다

정당은 정치적 결사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당은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적 경쟁을 벌인다. 경쟁은 권력 쟁탈전에 머물지 않는다. 국민을 더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정책 비전의 경합이며, 더 나은 나라 운영을 위한 집권 능력의 시험대다. 유권자는 이 경합에서 신뢰할 만한 손에 나라의 운명을 맡긴다. 그렇게 정권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된다. 위임받은 정권을 경영할 위치에 서면 여당이 되고, 위임에 실패한 정당은 야당이 된다. 여당에게는 국정을 이끌 책임이 있고, 야당은 비판과 견제와 함께 대안을 제시하고 차기 정권을 준비해야 한다. 국민의 바람은 한결같다. 정권이 누구 손에 있든 국민의 일상을 평온하게 돌보아주길 바란다. 우리는 어떤가. 정치 현실은 여전히 허술하고, 무엇보다 야당의 모습이 안타깝다. 여당이 조기 대선을 통해 급하게 들어선 정권인 만큼, 정책 라인업이나 장관 후보 선임 과정이 매끄럽지 못한 틈도 보인다. 대통령의 인사권이 독립적이긴 하지만 권한은 국민의 불안을 해소하는 책임성을 동반해야 한다. 지금 여당은 국민을 설득하거나 불안을 달래기보다는, 수적 우위로 밀어붙이려는 인상을 준다. 국민의 기대만큼 잘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더 걱정스러운 쪽은 야당이다. 여당이 흔들릴수록 야당은 국민에게 신뢰받을 수 있는 대안세력의 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금 야당에게 그런 책임 의식이나 준비가 보이지 않는다. 비난은 있으나 대안이 없고 감정적인 대응은 있으나 체계적인 전략은 없다. 여당의 국정운영이 다소 일방적이라면, 야당의 대응은 지나치게 산만하다. 민주정치에서 야당은 단순한 반대자가 아니다. 국가를 운영할 능력과 도덕성을 두루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정권을 다시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을 수 있는 조건이다. 비판할 줄 아는 야당을 넘어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는 야당이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이 바라는 야당의 모습이다. 여당이 국정을 잘못 이끌 경우에 공백을 메울 신뢰할 만한 야당이 없다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여당의 실수보다 야당의 무능이 더 무서운 이유다. 야당에게는 정권 탈환을 위한 비전도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준비도 국민에게 다가서는 언어도 부족해 보인다. 여당의 정책에 반사적으로 반대할 뿐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부족하다. 여당의 무능함이 야당의 존재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야당은 여당보다 더 성실하고, 더 준비된 모습으로 국민 앞에 나서야 한다. 나라 살림은 여당이 하지만, 살림이 제대로 되는지 살피고 방향을 잡는 데는 야당의 몫이 크다. 여당이 밀어붙인다면, 야당은 정제된 언어와 설득력 있는 논리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반사적인 대응에 그치고 국민의 고통에 둔감하며 정권교체만을 외치는 현수막 구호로는 국민의 마음을 다시 얻기 어렵다. 정치의 본령은 국민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데 있다. 정권교체도 집권 경쟁도 그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여당에 기대를 걸지만, 야당이 이렇게까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나라의 더 큰 문제다. 국민은 기억한다. 어느 당이 권력을 잡았는가보다, 누가 우리의 삶을 유능하게 책임질 것인지를. /장규열 고문

2025-07-16

현수막이 정치인가

대선에서 패배한 야당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여당의 실정을 지적하고 견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정권을 다시 맡겠다는 정당이라면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지금 야당은 그같은 기본적인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있는가. 아니면, 여당과 정부가 실수라도 하기를 기다리고 있는가. 정권을 빼앗긴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짚어보아야 한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이 절박한 마음으로 정권교체를 바랐던 유권자들이 등을 돌린 까닭은 외부의 음모나 여당의 술수 탓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내세운 대통령이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으며 개혁은 지지부진하였고 소통은 닫혀 있었다. 자살골처럼 펼쳐진 비상계엄의 결과로 파면된 대통령을 만들었던 정당이 아니었던가. 야당은 실패를 인정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기회가 돌아올 것이라는 착각에 머물고 있다. 지역정치가 답답하다. 전통적인 지지기반이라 여겼던 경북에서도 민심의 변화는 뚜렷하다. 한때 지역 곳곳을 뒤덮었던 야당의 깃발이 점차 빛을 잃고 있다. 그런 중에 지역 출신 국회의원 두 명이 각각 야당의 정책위의장과 홍보위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명색이 당의 정책을 총괄하고 전국적인 메시지를 만들어내야 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정작 내어놓은 정책은 무엇이고 어떤 전략으로 국민과 소통할 것인지 청사진은 들리지 않는다. 정책위의장은 나라 살림의 대안과 방향을 제시하는 자리다. 경제, 복지, 노동, 기후, 외교, 산업구조 등 당면한 수많은 현안에 대해 어떤 철학과 로드맵을 가졌는지 지역민들은 궁금하다. 홍보위의장 역시, 현수막 축하나 SNS 게시물로 떠들썩할 일이 아니다. 야당의 메시지가 국민의 삶에 닿을 수 있도록 설계하고 감동과 공감을 끌어낼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지역에 눈에 뜨이는 건 정책도 철학도 아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는 현수막이 펄럭거릴 뿐이다. 감투는 무엇인가. 가문의 명예인가, 공천의 보증서인가, 아니면 정치경력의 한 줄을 채우기 위한 이력 소재인가. 받은 직책은 자랑이 아니라 책임이다. 중앙당 지도부에 이름을 올렸으니 나라와 지역의 미래에 대해 더 적극적 책임을 져야 하고, 지지층의 회의와 비판에는 더욱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현실은 너무나 조용하다. 지역 언론에도 이들의 입장은 소개되지 않았고 받은 책임에 대한 시민들과의 소통도 들리지 않는다. 무거운 직책을 안고 돌아왔지만, 정작 지역민들은 그들이 어떤 정치를 할 것인지 들어보지 못했다. 야당은 여당의 실수만을 기다리는 수동적 정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의 본령은 견제보다 대안이다. ‘그래도 저들이 낫지 않겠나’는 최소한의 기대마저 무너진다면, 정권 재창출은 커녕 지역에서 존립 기반조차 잃고 말 것이다. ‘언더친윤’의 가림막 뒤에 숨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정책과 소통을 보여줄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유권자 시민은 지역의 정치인이 성공하길 바란다. 나라에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며 국민이 일상을 회복하는 길에 두 정치인이 능동적으로 기여하길 바란다. 자리에 걸맞는 책임과 실천은 어디에 있는가. 현수막은 정치가 아니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7-09

목적지인가 연결점인가

최근 포항이 숙원사업으로 추진해 온 영일만대교의 예산이 정부 예산안에서 전액 삭감되었다. 지역 여론은 크게 실망했고,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강하게 반발했다. 낙후된 지역에 대한 배려가 없다며 지역균형발전의 약속을 저버렸다는 비판도 잇따랐다. 하지만, 한 걸음 물러서 이를 다른 각도에서 조망해본다. 이번 삭감은 포항의 도시 정체성을 다시 묻고 지역의 미래 전략을 재구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대전과 대구. 두 도시는 한때 지역의 중심으로서 독자적 정체성과 상징성을 가졌었다. 대전은 충청권의 교육과 행정중심지로, 대구는 경북권의 산업과 정치거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가 놓이고 이어 KTX를 비롯한 전국 고속교통망이 발전하면서 이들은 더이상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가 되어 버렸다. 수많은 사람과 물류가 스치듯 지나가지만 머무르지 않는 도시. 고속도로와 철도라는 선형적 교통망 속에서 이들 도시는 도달하는 지점이 아니라 연결하는 지점, 곧 중간 기착지로 재편되었다. 이에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던 도시의 정체성은 희미해졌고, 고유한 색깔도 사라져갔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영일만대교가 실제로 건설되어 동해축을 따라 부산에서 강릉, 서울까지 잇는 새로운 초고속 도로망이 완성될 경우, 포항 역시 같은 길을 걷지 않을까. 교통망이 ‘연결되는 지점’으로 전락한다. 물류와 관광 측면에서 일정 부분 효과는 있겠지만, ‘스쳐 지나가는 도시’에 머물게 될 경우, 대전과 대구가 겪는 위기와 정체성의 혼란은 포항에도 예외일 수 없다. 대안은 무엇인가? 포항은 수년 전에 ‘북극항로 거점항만’이라는 담대한 비전을 내걸었다. 기후변화로 북극항로가 현실화되는 시대, 동북아 물류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포항은 이 흐름 속에서 종점이 되는 지리적, 전략적 조건을 갖춘 도시다. 북극에서 내려오는 해상물류의 남단 도달지로서 영일만은 항구일 뿐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글로벌 물류 네트워크의 최종 종착점이 될 수도 있다. 도시의 정체성을 새롭게 설계하고 해운업의 공공플랫폼인 수산·해양 관련 R&D 기관과 업체를 유치하며, 항만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도시는 물리적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도시는 사람과 기억, 시간과 의미가 축적되어 만들어지는 살아있는 유기체다. 도시는 ‘어디로부터 오고 어디로 가는가’에 따라 그 운명이 갈린다. 종점이자 중심이던 도시들이 교통망 발달 이후 중심을 잃고 스쳐가는 공간이 되어버렸듯, 포항도 ‘연결’만을 추구하다 도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포항이 가진 ‘종점성’을 더욱 뚜렷하게 살리는 전략을 선택하여 미래도시로서 경쟁력을 쌓아가야 한다. 물론 영일만대교는 포항시민들의 오랜 염원이자 지역의 물류와 관광인프라에 있어 중요한 과제임은 분명하다. 공을 들여왔으므로 포기할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균형 잡힌 우선순위다. 영일만대교를 집중하여 추진하되 포항이 가진 종점적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북극항로 거점항만’ 전략에 높은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선택은 도시의 손에 달려있다. /장규열 본사 고문

2025-07-02

주체가 되지 못하면 도구가 된다

한국은 인구 4000만 명 이상 국가 중 0~14세 인구 비율이 가장 낮다. 유엔 세계 인구추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유소년 인구는 전체의 10.6%. 초고령화로 이름난 일본보다도 낮은 수치다. OECD는 한국 인구가 60년 후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라 경고했고, 세계 최저수준 출산율 0.72의 원인은 높은 사교육비, 집값 상승, 장시간 노동, 일·가정 양립의 어려움 등을 지목했다. 한국사회는 절망적 통계 앞에서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고 있는가,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는다. 프랑스는 달랐다. 최근 대학 입학 자격시험인 바칼로레아의 철학 시험에는 두 개의 질문이 등장했다. ‘우리의 미래는 기술에 달려 있는가?’, ‘진실은 언제나 설득력이 있는가?’ 정답이 없는 질문이 프랑스 학생들에게 생각하고 토론할 것을 요구한다. 기술 만능과 정보과잉 속에서 진실이 무엇인지, 인간의 미래가 어디에 달려 있는지를 묻는 질문들은 시험문제를 넘어 오늘날 인류가 품어야 할 통찰과제다. 프랑스의 교육은 지식만 주입하지 않는다. 생각의 습관을 키우는 데 목적을 둔다. 한국은 어떤가. 시험은 여전히 정답을 찾는 데 혈안이고 교사는 논술답안을 기계적으로 채점한다. 사고의 깊이를 가늠하기보다 틀리지 않는 답안지에 점수를 주고 학생은 점수로 줄을 세운다. 고교생의 글쓰기조차 ‘AI 요약 서비스’나 챗GPT에 떠맡기고, 대학입시를 통과한 뒤에도 입시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스펙 경쟁에 몰두한다. 프랑스 교사들이 ‘주체가 되지 못하면 도구가 된다’고 외칠 때, 우리는 학생들을 그저 쓸만한 도구로만 만들어 낸다. 정반대가 아닌가. MIT 미디어랩의 실험은 AI가 인간의 자율적 문제해결 능력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잘 보여준다. AI의 도움없이 스스로 글을 쓴 학생들이 뇌신경 활동이 더 활발했고 학습의 몰입도도 높았다고 한다. 한국사회는 AI기술이 ‘더 빠르고 더 정확한 정답’을 알려준다는 이유로 부작용에 눈을 감는다. 교육현장은 사라진 질문, 사라진 사고 주체, 사라진 교육철학에 침묵한다. 저출산의 근본 원인은 단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미래를 바라볼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은 아이들에게 미래를 설계할 능력을 주기보다 현재를 버티는 기술만 요구하고 가르친다. 결혼과 출산은 ‘불가능한 선택’이 되고, 아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마저 들지 않게 만든다. 사교육은 치열해지고 교육격차는 깊어지며, 부모 세대는 아이를 투자 대상으로만 여긴다. 공교육이 제 역할을 못하면 아이 낳을 이유도 사라진다. 필요한 것은 껍데기를 슬쩍 손질하는 개혁이 아니다. ‘생각과 상상의 주체를 키우는 교육의 대전환’이다. 점수 매기는 교육에서 질문 던지는 교육으로, 정답 찾는 교육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아이가 없는 사회가 아니라 미래가 없는 나라를 만나게 될 터이다. 한국사회가 진정 아이를 원한다면 아이들이 살아갈 세계를 바꾸어야 한다. 변화는 학교에서, 교사에게서, 그리고 교육철학에서 태동할 것이다. 미래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인간에게 달려있다. /장규열 본지 고문

2025-06-25

고층 아파트와 멈춰 선 제철공장

포항의 스카이라인이 달라진다. 구도심이든 신도심이든 어디를 가도 고층 아파트가 불쑥불쑥 솟아오른다. 분양홍보 현수막이 요란하고 카페 골목에는 젊은 얼굴들도 간간이 보인다. 겉보기에 포항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도시다. 그럼에도 발밑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다르다. 최근 현대제철 포항 제2공장이 조업을 중단했다. 공장은 에너지 가격 상승과 수익성 악화 속에 멈추고 말았다. 지역고용에 직결되는데도 공장 가동중단은 너무도 조용히 이뤄졌고, 조업 재개의 기약은 오리무중이다. 이는 상징적이다. 철강산업으로 뿌리내리고 성장해온 포항이 더 이상 과실을 누릴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포스코라는 ‘산업수도’의 심장 외에도 현대제철이라는 대형 플레이어가 존재하던 포항의 산업 지형에 틈이 생긴 것이다. 포항은 너무 오랫동안 철강 한 우물만 파왔다. 철강으로 번 재정이 도시 인프라를 일으켰고 지역 대학과 병원, 학교와 상권을 지탱해 왔다. 지금은 글로벌 철강 수요가 꺾이고 탄소중립 규제는 산업 자체를 흔든다. 정부가 추진하는 산업구조 전환전략은 수도권과 세종, 충청권에만 집중되는 양상이다. 현대제철의 침잠은 예사롭지 않다. 포항은 점점 ‘철강 다음’이 필요해지는 도시지만, 아직 그 해답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더욱 두려운 바는 도시의 인구구조다. 포항의 인구는 50만 아래로 떨어졌고 청년층의 유실이 멈추지 않는다. 교육과 일자리, 문화와 경제 인프라 모두가 수도권에 집중된 상황에서 지방 도시의 쇠퇴는 예정된 수순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규아파트 단지는 속속 들어서고, 부동산 개발은 활기를 띤다. 산업이 줄어드는데, 왜 주거는 늘어나는가. 개발 논리의 비틀림에서 비롯된 현상이 아닌가 우려스럽다. 도시의 미래보다 눈앞의 단기수익에 매달리는 구조가 혹 아닐까. 철강산업이 위기를 맞았지만 도시는 분양가에 집착하고 부동산개발에 열을 올린다. 대학은 지역과의 소통이나 연계가 없고 청년대학생들은 수도권만 바라본다. 새 정부가 출범했다. 이재명 정부는 지방의 균형발전과 혁신을 말하지만, 그 메시지가 지역의 현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지역에서는 변함없이 정당 간 정치싸움과 예산 따내기 공방이 계속된다. 위기를 본질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지역의 위기를 ‘철강의 일시적 부진’으로만 여긴다면 더 큰 위기가 엄습할 터이다. 포항은 산업전환과 도시 재설계라는 이중과제 앞에 섰다. 철강을 넘어서는 산업기반을 어디까지 확보하고 유치할 것인지, 그 과정에서 지역의 대학과 기업의 역할은 무엇인지, 포항이 기른 청년들은 무엇을 할 것인지 진지한 계획과 협력, 실천과 투자가 필요하다. 정부의 관심과 투자에만 턱을 괴고 기다리는 시대는 끝났다. 지자체, 기업, 대학, 시민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할 또 한 가닥은 ‘삶의 질’이다. 청년이 지역에 머물기 위해 필요한 건 일자리만이 아니다. 아이를 안심하고 키울 수 있는 교육과 돌봄, 젊은 세대가 문화를 소비하고 생산할 수 있는 공간, 노년 세대가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는 복지 시스템이 도시의 경쟁력을 만든다. 포항은 여전히 가능성이 높은 도시다. 가능성을 미래가치로 만들려면 온 도시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장규열 고문

2025-06-18

미국, 이민의 나라

미국은 이민의 나라다. 극소수 본토 인디언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미국인은 이민자들이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조차 그들의 뿌리는 다른 나라에 있다. 그런 미국이 불법체류 외국인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주위군을 투입한 데 이어 급기야 해병대까지 동원하겠다는 위협을 쏟아낸다. ‘불법체류자’라는 용어가 쉽게 사용되지만 사실 ‘서류가 미비한(undocumented)’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까다로운 조건을 갖추지 못했을 뿐 대부분은 열심히 일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시민들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 미국경제는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이민자의 희생과 노동 위에 세워진 나라다.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 노예들이 미국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 덕분에 미국은 산업과 경제를 일구었고 성장과 발전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 중국인 노동자들의 대륙횡단 철도건설, 멕시코 출신 이주노동자들의 농업 현장 점유율, 실리콘밸리의 이민자 출신 기업가들, 의료계를 지탱하는 이주 의료진, 건설현장과 서비스업계에서 이주노동자들 없이는 미국이 경제적 위기를 견디기 어려웠을 터이다. 정부와 극우 보수층이 몰아세우는 이들은 오늘도 직장에서 농장에서 가정에서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하게 일하고 있다. 그들을 몰아세우는 일이다.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는 ‘우리는 모두 이민자의 후예다’라 자랑스럽게 적는다. 미국 정부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불법체류자들을 범죄자로 낙인찍는다. 미국의 근본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불법체류자 강제추방정책에 맞선 저항이 거세다. 미국 각지 법원은 행정부의 과잉단속에 법적제동을 건다. 미국의 진보는 인종주의와 배타주의에 맞선 투쟁을 거듭해 왔다. 미국이 더 넓은 포용과 정의를 향해 나아가면서 진정한 힘을 발휘해 왔다.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군을 동원하는 모습은 6개월 전 대한민국에서 목격했던 부끄러운 광경을 떠올리게 한다. 정부는 이민자들을 미국의 위협으로 간주하며 백인 중심주의로 회귀하려 한다. 그들은 엄연한 역사적 진실을 애써 외면한다. 선량한 시민들의 합법적인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시도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한다. 군대는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미국 사회는 정부의 강경책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낸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수천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미국이 여전히 ‘이민의 나라’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미국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미국이 이민자의 기여를 부정하고 백인 중심의 폐쇄적인 사회로 돌아선다면 스스로 택하여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목소리를 내며 행동하는 미국인들은 그들의 저항과 노력이 정부의 독주를 막는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민자로 살면서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열심히 살아가는 ‘서류미비체류자’들을 범죄자로 낙인찍으며 추방하려는 일은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이 스스로 뿌리를 부정하는 일이며 오늘 사회공동체를 훼손하는 일이다. 미국이 ‘자유의 여신상’ 아래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 갈림길에 섰다. 이민의 나라 미국이 위기에 빠졌다. /장규열 고문

2025-06-11

갈라진 지도를 보며 통합을 생각한다

새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선거는 끝이 났고 결과는 분명했다. 결과보다 깊이 헤아릴 것은 선거가 남긴 판세 지형도다. 투표 결과를 지도에 올려놓는 순간, 동과 서로 뚜렷하게 갈라진 색깔이 눈에 들어온다. 지역이 갈리고 민심이 나뉘었다. 선명한 분할이 남긴 건 승패라기 보다 어디까지 멀어져 있는 가 바로 그 현실이다. 경북은 이번에도 등을 돌렸다. 새 대통령을 밀지 않았다. 낯선 일도 아니다. 반복되어온 정치의 대립구조 속에서 경북은 늘 특정한 정치세력에 무게를 실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경북의 선택은 단지 정치적 보수성이 아니라 오늘 정치가 흘러가는 방향에 대한 날카로운 거부로 보인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치는 민생과 동떨어졌고 정쟁이 일상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삶보다 진영을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지역은 소외되었고 정책은 공허했다. 경북이 보인 ‘등돌림’ 현상은 무력한 저항이자 마지막 자존심이다. 선거는 끝났다. 대통령은 결정됐고 정권은 교체됐다. 상황이 바뀌었으니 시선도 달라져야 한다. 대통령은 특정 진영의 대표가 아니라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어야 하듯, 유권자 역시 등을 돌린 채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 무작정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지역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 마음을 닫은 채 냉소에 머무르면, 변화는 늘 우리를 스쳐만 갈 터이다. 화합은 인위적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통합은 선언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돌아선 마음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돌이켜야 한다. 대통령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화해를 말하기 전에 국민의 삶을 돌아봐야 한다. 말보다 실천으로 증명해야 한다. 정치는 혐오의 무대가 아니라 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마당이다. 실증적인 변화가 느껴질 때 지역도 마음을 열기 시작할 것이다. 책임이 대통령에게만 있을까. 지역 역시 냉정한 눈으로 새로운 정부의 행보를 지켜보아야 한다. 못하면 비판하되 잘하면 지지해 주어야 한다. 중요한 기준은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일상을 중심에 둔 판단과 실천이다. 지역이 시민적 성숙을 이루어야 한다. 경북은 한때 한국 정치의 중심이었다. 산업화의 초석이었으며 보수정치의 심장이었다. 지금은 외면받고 있다는 자각이 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중심성을 회복해야 한다. ‘반대’ 일변도는 방법이 아니다. 정치의 방향성을 가늠하고 지역을 위한 비전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성숙한 정치 주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대통령은 5년마다 바뀌지만 국민은 오래 남는다. 지역의 생명 또한 길고 또 길다. 돌아앉은 마음이 돌아서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변화는, 새 대통령의 진정어린 실천과 시민의 준비된 마음이 만나는 지점에서 가능하다. 그럴 때 비로소 오늘처럼 갈라진 지형도 위에도, 다리가 놓이고 새길이 열릴 터이다. 우리 모두는 나라와 국민이 잘되기를 바라는 같은 마음으로 한 배에 타고 있지 않은가. 차이를 극복하고 일상을 회복하며 자신 있게 미래를 열어가는 대한민국의 참모습을 다시 만나고 싶다. 어려운 시점에 5년을 책임질 새 대통령의 어깨에 온 나라와 모든 국민을 살피는 진심이 실리기를 기대한다.

2025-06-04

토론인가 배틀인가

TV 토론이 유권자에게는 후보자의 자질을 가늠할 수 있는 창이며, 후보에게는 자신의 정책과 비전을 국민 앞에 펼쳐 보이는 기회다. 최근 방영된 TV 토론에서 토론 주제가 있었고 후보자 간 시간 배분도 조율된다. 그럼에도 정작 토론의 시간을 채운 것은 정책이 아니라 인신공격이었다. 후보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통 특정 후보에 대한 비난으로 채웠다. 본인의 비전이나 공약에 대한 설명은 단편적이거나 생략되기 일쑤였다. TV 화면 앞에 앉은 국민은 ‘우리가 왜 이 장면을 지켜봐야 하는지’ 회의감에 빠져들었다. 정치토론은 상대를 깎아내리는 자리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은 ‘다른 생각’의 공존이며 토론은 바로 그것을 드러내고 조율해가는 과정이다. 후보자들이 서로의 정책과 가치관을 비교하며 논리적으로 겨루는 가운데, 유권자는 각자에게 더 믿음직한 정책을 선택할 근거를 확인한다. 오늘 선거 토론은 본래의 취지를 잊어버렸다. 무엇이 문제일까. 토론문화 자체에 대한 후보자들의 바른 인식이 없다. 후보자들이 토론을 ‘전투’로 인식하여 공격과 방어로 점수를 따고 상대의 실수를 하나라도 끌어내어 그것을 확대·재생산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얼마나 명료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가인데 토론 시간을 상대방 흠집내기로만 날려버린다. 유권자의 시간을 낭비하고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결과만 낳는다. 토론의 운영방식도 문제다. 주제가 분명히 제시되었지만 무시하거나 의도적으로 비껴가며 엉뚱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후보에게 제재가 없다. 사회자는 때때로 공정한 중재자라기보다 시간 관리자 역할만 한다. 방송사의 편집방식도 갈등과 자극 위주로 흐르는 경향이다. 차분하고 논리적인 토론보다 고성과 자극적인 언행이 ‘돋보이는 전략’이 되고 만다. 토론에 대한 교육과 훈련 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다. 유권자도 정치인도 진정성 있는 대화보다 ‘말싸움’에만 몰입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회,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만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토론이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공직선거 TV토론의 규칙을 더욱 엄격히 정비해야 한다. 주제 이탈, 인신공격, 반복 발언에 대한 경고와 벌칙을 정비하고 실효적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 사회자의 적극 개입권과 진행 권한을 강화해 토론의 질을 높여야 한다. 유권자의 시선도 바뀌어야 한다. 자극적인 발언보다 성실하고 조리 정연한 설명을 평가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언론이 정책중심 보도를 강화하고 선거 토론을 예능처럼 소비하는 구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누가 이겼나’가 아니라 ‘무엇을 말했나’를 무겁게 여기는 분석과 보도가 필요하다. 정당의 책임도 크다. 후보자에게 단순한 말싸움 기술보다, 시민과 소통하는 진정어린 화법과 설득력을 장착하도록 준비시키는 노력이 요구된다. 정당 스스로 ‘네거티브 선거’를 탈피하려는 의지를 세워야 한다.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토론은 정치 이벤트가 아니다. 토론이 정치의 얼굴이어야 한다. 어떤 토론을 하느냐는 어떤 정치를 바라는가 보여주는 거울이다. 선거 토론은 배틀이 아니다. 토론이 성숙해야 정치가 숙성한다. /장규열 고문

2025-05-28

‘경쟁’을 지워라

‘누구보다 앞서야 한다.’ 한국 교육을 관통하는 명제가 아닌가. 등수로 줄 세우고 시험으로 선별하며, 일등은 존경하고 꼴찌는 무시한다. 최종 승부처는 대학입시다. 그러면서 우리는 묻지 않는다. 교육이 본래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경쟁이 교육의 본질인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교육 목표에서 ‘경쟁’을 제거했다. 나치 정권 하에서 교육이 어떻게 전체주의의 도구로 전락했는지를 처절히 겪은 뒤였다. 독일 헌법 제1조는 “인간의 존엄은 침해될 수 없으며, 이를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라고 선언한다. 독일 교육은 이 선언을 실천하는 장치다. 경쟁보다는 공동체, 효율보다는 존엄을 우선시한다. 교실은 우열을 가리는 곳이 아니라, 시민을 길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각성에서 출발한 기준이며 철학이다. 핀란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모든 학교는 평등해야 하며 어떤 학생도 소외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렸다. 시험은 고등학교 졸업 시기에 단 한 번 치러지며 평가는 절대평가 중심이다. 석차는 없다. 교사는 신뢰받는 전문가로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받고, 학생은 협력 속에서 스스로 배우는 힘을 키운다. 핀란드의 교육은 경쟁 없는 시스템으로 세계적 성취도를 자랑한다. 교육이 인간 존중 의식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원칙을 사회가 공유한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은 교육을 오랫동안 계층 상승의 사다리로 인식해왔다. 대학입시를 통한 선별 경쟁 시스템이 굳어졌다. 중학교부터 내신은 상대평가로 운영되며, 고등학교는 내신·수능·논술·면접 준비에 집중한다. ‘좋은 대학에 가야 성공한다’는 잣대가 교육의 근간을 지배하고 있다. 교육은 인간을 길러내는 공간이 아니라 선발과 배제를 위한 훈련장이 되고 말았다. 대입제도는 여러 차례 개편되면서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시·정시 비율을 조정하고 내신과 비교과의 비중을 달리하면서 ‘공정성’ 논란에 대응하지만, 정작 입시가 왜 이처럼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는 질문조차 꺼내지 않는다. 대학 서열과 연계된 입시경쟁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왜곡시키고, 사교육 의존도를 극대화했다. 강남 8학군과 지방 학교의 격차는 해마다 끝을 모르고 벌어지고 있다. 이는 교육 격차이자 기회 격차이며 급기야 사회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대학입시제도를 개선한다는 것은 단순히 전형 방식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교육의 목적을 되묻고, 그에 맞는 평가 체계를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첫째,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보장하도록, 대학입시는 획일적인 시험 중심 선발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대학 서열 구조 자체를 완화하거나 공론화함으로써, 입시에 과도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셋째, 독일이나 핀란드처럼 교육이 사회적 통합과 평등을 지향하도록 공동체적 교육 철학을 세워야 한다. 교육은 더 많은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우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 경쟁을 통해 극소수만이 살아남는 구조가 아니라, 각자의 적성과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다면적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입시제도’가 아니라, 경쟁을 덜어내는 교육 철학의 전환이다. 그것이야말로 미래를 준비하는 길이다. /장규열 고문

2025-05-21

책임없다는 정부, 대법원은 응답하라

2017년 11월 15일, 포항을 강타한 지진은 단지 한 도시의 재난이 아니었다. 당시 대학 캠퍼스에서 수업 중이던 필자는 학생들과 함께 건물 밖으로 탈출해야 했다.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이었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도시는 깊은 공포에 빠져들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 지진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정부가 추진한 지열발전소 시추작업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과학적으로 확인된 데 있었다.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정부는 지열발전소 시추 과정에서 고압수를 지하에 주입했고, 단층이 자극을 받아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사사례는 해외에도 있었고 국내 학계에서도 촉발 지진 위험이 수차례 경고된 바 있었다. 정부는 충분한 검토 없이 사업을 밀어붙였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삶을 무너뜨린 재난이 무지나 실수를 넘는 정책적 책임의 결과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포항시민들은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다. 최근 항소심 재판부는 이를 부정하며 ‘예측할 수 없었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 판단은 타당한가. 이미 유사한 지열 사업에서 지진이 유발된 사례가 있었고 국내 전문가들 또한 가능한 위험을 경고해 왔다. 전문가들의 경고가 무시된 채 사업이 강행되었다면 이는 예측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예견된 결과에 가깝지 않은가. 정부의 태도는 바뀌지 않고 있다. 시민들이 삶의 토대를 잃고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음에도 정부는 사과 한마디 없이 침묵하고 있다. 어느 책임자도 처벌받지 않았고 피해복구는 아직도 미완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가 스스로 책임을 부정하는 모습은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포항 시민들은 여전히 무너진 삶을 복구하지 못한 채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으며, 지역 경제는 장기간 침체 상태에 빠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짓는다면, 이는 포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국가인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가 국민의 삶을 인위적으로 뒤흔든 재난 앞에 ‘책임이 없다’며 뒷짐지는 모습은 모욕적이다. 법적 책임을 포함하여 도의적, 정치적 책임도 면탈할 수 없다. 정부가 연루된 인적 재해의 결과를 바로 보아야 하며 이에 관련된 책임을 분명히 감당해야 한다. 대법원의 판단만 남았다. 사건은 법리 다툼을 넘어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해 어떤 수준의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묻는 헌법적 쟁점을 내포한다. 대법원은 사건의 의미를 직시해야 한다. 상고심은 절차적 기회일 뿐 아니라 사법부가 사회적 정의를 최종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책임지지 않는 정부는 정당한 권력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책임 있는 기반 위에 서야 하며 국민의 신뢰는 책임의 이행으로부터 비롯된다. 포항지진은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정당한 질문에 적절한 응답을 끝까지 요구해야 한다. 정부의 실책에 관한 물음에 응답해야 할 시간이 이제 대법원 앞에 온 것이다. /장규열 고문

2025-05-14

대통령의 자격

대한민국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는 정권교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회적 갈등의 골은 깊고 세계질서는 급변하며 기후 위기와 인구구조의 변화는 복합적인 과제를 던지고 있다. 전환기적 시대에 국민이 요구하는 대통령은 행정가나 정치인을 넘어, 진정한 리더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두 번씩이나 대통령을 탄핵했던 불행한 역사를 쓰라린 배경으로 하면서 적어도 이번에는 선택의 결과에 후회하지 않는 투표의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내일의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첫째 덕목은 ‘청렴성과 도덕성이어야 한다. 권력의 중심에 설수록 유혹은 커지고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할 욕심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대통령은 법적 기준을 넘어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국민이 신뢰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국정을 원만하게 이끌 수 없으며 권위는 명령에서가 아니라 도덕적 정당성에서 나온다. 둘째는 공감 능력과 소통하는 태도다. 한국 사회는 지역과 세대, 성별과 사회계층 간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국민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다양한 목소리와 입장을 조율하여 대변하는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소통하고 언론과 시민사회의 비판에 열린 자세로 응답하는 지도자만이 국민통합을 이끌어 낼 터이다. 셋째, 미래지향적 비전과 정책역량은 대통령이 현상을 유지하는 관리자나 조정자 역할을 넘어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로서 반드시 긴요한 자질이다. 기후변화와 기술 발전, 안보 위협과 국익 확보 등 복합적인 글로벌과제에 대응하려면 단기적 안목보다 긴 호흡의 관점에서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역량이 필요하다. 표를 얻기 위한 공약 나열이 아니라 실행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자세가 요구된다. 대통령은 국제감각과 외교적 역량도 갖추어야 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날로 복잡해져 가며, 미중 갈등, 북핵 문제,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등은 대한민국의 미래와 직결된다. 국제사회에서 국익을 지키고 주도적 역할을 하려면 세상의 흐름을 읽는 통찰과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펼칠 리더십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국민과 함께 나아가려는 겸손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며 국정운영의 궁극적 목적은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다. 실패를 인정하고 교훈을 얻는 리더, 자신이 아닌 나라의 발전을 우위에 놓는 리더야말로 진정한 대통령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그 꽃을 제대로 피우기 위해 유권자의 안목과 결기가 중요하다. 대통령 후보의 말솜씨나 이미지에 휘둘리기 보다 어떤 가치와 철학을 가졌는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지도자인지를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결국 우리 손에 달려 있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선거 일정 동안 불꽃 같은 눈초리로 가늠해야 한다. 이번 대통령선거가 역사와 민족 앞에 드러낼 중차대한 의미를 깨우쳐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다리를 성공적으로 건너온 대한국민의 앞길이 평탄하기 위하여 자질과 역량을 갖춘 리더를 선택해야 한다. /장규열 고문

2025-05-07

어린이를 생각한 사람, 오늘 우리가 할 일

5월 5일, 우리는 ‘어린이날’을 맞는다. 아이들을 위해 행사를 벌이고 선물을 주며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간다. 이 날은 단지 어린이를 위한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그 날이 담고 있는 정신이 온 사회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방정환 선생을 새롭게 떠올리게 된다.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문학의 선구자 또는 아동 인권 운동가라는 타이틀을 넘어,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1923년 5월 1일이었다. 일제의 서슬 시퍼런 억압이 거셌지만, 3·1운동 이후 우리 사회에는 잠시나마 ‘문화정치’라는 명목으로 자치와 표현에 작은 여유가 생겼다. 많은 이들이 해외로 나가 독립을 도모하던 때에 청년 방정환은 ‘나라를 되찾은 다음은 누구의 날들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했고, 그 답으로 ‘어린이’를 들어 올렸다. 어린이를 단지 보호받아야 할 존재를 넘어, 어린이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율성과 존엄성을 가진 주체라고 생각했다. 이 땅에 되찾을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주인은 다음 세대 ‘어린이’라 믿었다. 어린이가 주눅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진정한 해방과 독립의 열매는 어린이들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나 ‘아이’ 같은 단어 대신 ‘어린이’라는 낱말을 지어내었다. 아주 작은 차이였겠지만 ‘어린이’에는 깊은 소신과 철학을 담았다.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히고 글을 쓰게 하며 목소리를 키우고자 했다. 어린이를 위한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고 ‘색동회’를 만들어 어린이 문화운동을 펼쳤다. 어른 중심의 세상에 어린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새기려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며 파격적인 시도였다. 우리는 방정환 선생이 바라던 미래를 살고 있다. 해방을 맞았고 민주주의를 실현했으며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법적으로 보호받는다. 참으로 그가 꿈꾸던 ‘어린이가 주눅들지 않는 세상’이 실현되었는지는 아직도 질문으로 남는다. 경쟁과 입시, 차별과 폭력 속에서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얼마나 안전하고 존엄하게 자라고 있을까. 새 정부가 들어선다. 정권이 바뀌고 시대의 문이 또 한번 열린다. 청년 방정환의 생각을 되새길 때다. 어린이는 가르침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 아니라 어른들의 생각을 이끄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사회는 어린이의 일상을 중심에 두고 설계되어야 하며 정책과 제도의 뿌리에는 언제나 ‘어린이를 생각하는 세상’이 자리잡아야 한다. ‘어린이날’을 하루 기념일로만 여길 게 아니라, 일 년 365일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영그는 날들로 만들어야 한다. 100년 전 방정환이 하루라도 어린이를 귀하게 생각하자 떠올렸다면, 오늘 우리는 어린이는 날마다 소망과 기대가 열리는 꿈나무로 여겨야 한다. ‘어린이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 어느 청년의 꿈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으로 어린이를 키워야 한다. 당장 투표하지 않아도 내일 나라를 이끌 기둥 ‘어린이’를 나라살림의 한 가운데에 두어야 한다. /장규열 고문

2025-04-30

글 읽을 줄 아시죠?

OECD가 ‘성인 인지능력(Survey of Adult Skills)’을 조사해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오늘날 어른들이 겪고 있는 인지능력의 변화가 흥미롭다. AI와 디지털의 변화가 눈부신 가운데, 세계적으로 문해력, 산술력과 문제해결능력 등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인들의 문해력 저하는 더욱 두드러진다. 어찌된 일일까? 문해력이 내려간다는 것은 단순히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게 아니다. 표면적으로 읽고 새기는 능력은 유지되고 있지만, 이면의 의미를 이해하고 분석하여 문맥을 파악하며 내용을 자신의 사고로 끌어오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글은 읽지만 생각하지 않는다. 정보는 접하지만 맥락은 사라진다. 기사는 보지만 분석은 하지 않는다. 문제는 역설적으로, 디지털 환경의 급격한 확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스마트폰과 SNS를 중심으로 한 정보 소비는 빠르고 피상적이며 단편적이다. 이용자는 짧은 문장과 놀라운 이미지, 요약된 해설에 익숙해지고 스크롤과 클릭으로 반복되는 표면적 정보탐색에 길들여진다. 이런 정보환경은 장문의 글을 읽고 천천히 사유하는 능력을 약화시키고 결과적으로 문해력을 감퇴시킨다. 4월 23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World Book and Copyright Day)’이었다. 책은 여전히 독해와 사유의 공간이며, 문해력의 가장 전통적이며 강력한 훈련 도구다. 독서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언어를 통해 구조화된 사고를 익히고 타인의 시선과 저작을 통해 자기 인식을 확장하는 행위다. 독서를 멀리하는 경향은 인간의 사고력과 공감능력을 점차 축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의 문해력 저하는 단지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소통의 위기이며 민주적 판단력과 비판적 사고력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경고가 아닌가. 정책과 언론, 여론과 소통의 흐름이 점점 더 자극적이고 단선적이며 감정적인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 현상은 복합적 맥락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능력의 약화를 드러낸다. 가짜뉴스를 솎아내고 의미 있는 콘텐츠를 선별하여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을 길러내는 일도 적적한 문해력이 기초를 잡아주어야 가능하다. 문해력은 개인의 삶을 위한 기술이면서 공동체의 건강성을 지탱하는 집단적 자산이다. 기술 발전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자동으로 향상시킨다는 믿음은 허구다. 오히려 문명을 유지하고 확장해왔던 기본적인 인지기술, 특히 문해력은 더욱 의식적으로 단련하고 보존해야 하는 영역이다. 아인슈타인은 ‘교육의 목적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지, 사실을 암기하게 하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다. 인간이 장착해야 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능력을 꼽은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자칫 느리고 비효율적인 듯 보이지만, 바로 그 ‘느림’은 곧 사유의 깊이와 너비를 의미한다. 세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생각은 오히려 더 깊고 넓어져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 길은 여전히 책 안에 있다.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은 단지 책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자각을 요구하는 날이다. 글을 읽을 뿐 아니라 독서를 통하여 시민의식을 높이고 시대정신을 꿰뚫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

2025-04-23

트럼프와 미국의 대학들

미국 트럼프(Trump) 정부가 대학들을 상대로 압박을 시작했다. 다양성과 포용, 평등을 중시해 온 미국 대학들의 전통적 정책에 정면으로 제동을 건 것이다. 백악관은 대학들이 인종 간 형평성을 고려한 입학정책과 인사정책 등을 수정하지 않으면, 총액 22억 달러에 이르는 연방 연구자금 지원을 중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사실상 협박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을 대표하는 사립대학인 하버드(Harvard)대학이 가장 먼저 반기를 높이 들었다. 하버드는 이러한 정부의 개입이 단순히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수준을 넘어, 미국 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져온 민주주의의 기반을 뒤흔드는 시도라고 지적했다. 대학은 특정 정치권력의 입맛에 따라 생각을 바꾸며 운영방식을 수정하는 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대학들이 지난 긴 세월동안 유지해온 핵심 가치를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 하버드대학은 “트럼프 정부의 요청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전체의 문제”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전국의 많은 대학들이 하버드의 입장에 동의하며 정부의 압박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 대학들은 어떤가.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언제쯤 학문의 자유를 이처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외부의 간섭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운영하며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된 지적 공동체로 설 수 있을까. 학문이 정치에 종속되지 않고 지식이 권력에 복무하지 않는 구조를 우리 대학은 얼마나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가. 학문의 자유는 고상한 이상이나 듣기 좋은 구호가 아니다. 사회 전체의 당당함과 직결되는 가치다. 대학이 자유롭지 못할 때, 사회에는 신박한 창의성도 존재할 수 없으며 뚜렷한 비판정신도 사라지고 긴 안목의 비전도 설 자리를 잃는다. 교육과 연구의 중심이 권력에 종속되는 순간, 사회와 공동체는 쇠퇴와 몰락의 비탈에 서게 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도 든든한 지식기반 위에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 학문의 자유는 누가 가져다주지 않는다. 누가 대신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정부나 사회가 나서서 선사하지 않는다. 대학 스스로 자유의 가치를 인식하고 지켜내기 위해 싸우며 때로는 불이익도 감수할 각오를 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하버드와 미국 대학들이 보여주는 대응은 바로 그런 태도의 실천이다. 자금이 끊기더라도 정책의 방향에 동의할 수 없다면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대학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겠다는 다짐이 아닌가. 대학은 교육기관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가 크고작은 질문을 던지는 공간이며 미래를 위한 실험공간이다. 그런 장소가 위축되거나 침묵할 때, 사회 전체는 비판적 사고를 잃고 방향감각마저 잃게 될 터이다. 학문이 자유로울 수 없다면, 사회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 한국의 대학은 학문의 자유를 얼마나 누리고 있을까.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되묻고 행동할 시간이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자유를 지킬 책임은 대학 스스로에게 있다. 학문의 자유를 지키지 못한 결과는 사회 전체가 짊어진다. 대학이 깨어야 나라가 산다.

2025-04-16

대통령이 없는 나라

장규열 고문 대통령이 없어졌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 결정은 역사의 한 장면을 강렬하게 새겼다. 최고권력자가 법의 심판을 받았고, 국민은 거리에서 침묵과 함성으로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체념과 분노 그리고 마지막 남았던 희망도 사그라진 시간이었다. 대통령이 없는 나라에서 허전함은 곧 혼란으로 남았다. 책임을 못다한 권력의 잔해들로 남았다. 대통령이 없는데도 낡은 권력과 그 잔재는 아직도 곳곳에 살아서 꿈틀거린다. 부패한 권력체계는 단순히 대통령의 퇴진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국정농단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일부 세력은 아직도 기득권을 붙들고 움직이고 있다. 경제는 멈췄고 민생은 외면되며 외교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이후, 한미 간의 대화는 자취를 감췄고, 보호무역주의적 경제공세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 관세폭탄이라는 현실 앞에 대응은 커녕 방향조차 잡지 못하는 게 아닌가. 무책임한 정권이 남긴 그림자가 깊고도 어둡다. 시대를 잘못 짚은 비상계엄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지만 국민은 지혜로왔다. 우리는 달랐다. 대통령이 사라진 날에도 아이는 학교에 가고 지하철은 정시에 달렸으며 국민은 법을 지켰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것은 대통령 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라를 지탱하는 힘은 결국 국민에게 있었다. 우리는 과도기의 한복판에 섰다. 두 달도 못미칠 권한대행 체제는 한계가 있다. 나라가 스러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정권 때문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자정능력과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의 회복탄력성 덕분이다. 그렇기에 더욱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의 책략이나 술수에 나라를 맡기지 않는다고. 잘못 사용된 군경의 위협과 ‘장난같은 게엄’이라는 터무니없는 궤변 앞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던 국민이기에 이제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자격이 있다고. 조기대선은 단지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이벤트가 아니다. 우리는 혼란의 끝에서 진짜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누구를 위한 나라를 만들 것인가.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더 이상 ‘적당히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책임질 줄 알고 공감할 줄 아는 리더를 요구해야 한다. 선택은 단지 희망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사라졌지만, 국민은 깨어 있다. 혼란 속에서도 상처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길을 찾는다.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온 세상을 향해 말을 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아니,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온 나라가 한마음이 되었다고. 온 세상이 혹 거꾸로 달린다 해도 대한민국은 국민이 자유롭고 풍요할 내일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것이라고. 국민은 많이 배웠다. 자유와 민주의 고귀함과 헌법을 지켜야 할 까닭에 관해 분명히 깨우쳤다. 주권자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는 권력자는 언제든지 버려질 것이라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경탄하는 중이다. 지난 몇 달이 모두의 위기였지만, 나라의 역사 위에는 오히려 빛나는 시간으로 새겨야 한다. 국민이 살아있어 나라가 안전하다.

2025-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