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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경쟁’을 지워라

‘누구보다 앞서야 한다.’ 한국 교육을 관통하는 명제가 아닌가. 등수로 줄 세우고 시험으로 선별하며, 일등은 존경하고 꼴찌는 무시한다. 최종 승부처는 대학입시다. 그러면서 우리는 묻지 않는다. 교육이 본래 무엇을 위한 것인가. 경쟁이 교육의 본질인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교육 목표에서 ‘경쟁’을 제거했다. 나치 정권 하에서 교육이 어떻게 전체주의의 도구로 전락했는지를 처절히 겪은 뒤였다. 독일 헌법 제1조는 “인간의 존엄은 침해될 수 없으며, 이를 보호하는 것은 국가의 책무”라고 선언한다. 독일 교육은 이 선언을 실천하는 장치다. 경쟁보다는 공동체, 효율보다는 존엄을 우선시한다. 교실은 우열을 가리는 곳이 아니라, 시민을 길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각성에서 출발한 기준이며 철학이다. 핀란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모든 학교는 평등해야 하며 어떤 학생도 소외되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렸다. 시험은 고등학교 졸업 시기에 단 한 번 치러지며 평가는 절대평가 중심이다. 석차는 없다. 교사는 신뢰받는 전문가로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받고, 학생은 협력 속에서 스스로 배우는 힘을 키운다. 핀란드의 교육은 경쟁 없는 시스템으로 세계적 성취도를 자랑한다. 교육이 인간 존중 의식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원칙을 사회가 공유한다. 우리는 어떤가. 한국은 교육을 오랫동안 계층 상승의 사다리로 인식해왔다. 대학입시를 통한 선별 경쟁 시스템이 굳어졌다. 중학교부터 내신은 상대평가로 운영되며, 고등학교는 내신·수능·논술·면접 준비에 집중한다. ‘좋은 대학에 가야 성공한다’는 잣대가 교육의 근간을 지배하고 있다. 교육은 인간을 길러내는 공간이 아니라 선발과 배제를 위한 훈련장이 되고 말았다. 대입제도는 여러 차례 개편되면서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시·정시 비율을 조정하고 내신과 비교과의 비중을 달리하면서 ‘공정성’ 논란에 대응하지만, 정작 입시가 왜 이처럼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는 질문조차 꺼내지 않는다. 대학 서열과 연계된 입시경쟁은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왜곡시키고, 사교육 의존도를 극대화했다. 강남 8학군과 지방 학교의 격차는 해마다 끝을 모르고 벌어지고 있다. 이는 교육 격차이자 기회 격차이며 급기야 사회적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대학입시제도를 개선한다는 것은 단순히 전형 방식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교육의 목적을 되묻고, 그에 맞는 평가 체계를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첫째, 고등학교 교육과정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보장하도록, 대학입시는 획일적인 시험 중심 선발에서 벗어나야 한다. 둘째, 대학 서열 구조 자체를 완화하거나 공론화함으로써, 입시에 과도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셋째, 독일이나 핀란드처럼 교육이 사회적 통합과 평등을 지향하도록 공동체적 교육 철학을 세워야 한다. 교육은 더 많은 문제를 푸는 사람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방법을 배우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 경쟁을 통해 극소수만이 살아남는 구조가 아니라, 각자의 적성과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다면적 교육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또 다른 입시제도’가 아니라, 경쟁을 덜어내는 교육 철학의 전환이다. 그것이야말로 미래를 준비하는 길이다. /장규열 고문

2025-05-21

책임없다는 정부, 대법원은 응답하라

2017년 11월 15일, 포항을 강타한 지진은 단지 한 도시의 재난이 아니었다. 당시 대학 캠퍼스에서 수업 중이던 필자는 학생들과 함께 건물 밖으로 탈출해야 했다.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이었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도시는 깊은 공포에 빠져들었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 지진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정부가 추진한 지열발전소 시추작업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과학적으로 확인된 데 있었다.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정부는 지열발전소 시추 과정에서 고압수를 지하에 주입했고, 단층이 자극을 받아 지진이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유사사례는 해외에도 있었고 국내 학계에서도 촉발 지진 위험이 수차례 경고된 바 있었다. 정부는 충분한 검토 없이 사업을 밀어붙였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삶을 무너뜨린 재난이 무지나 실수를 넘는 정책적 책임의 결과였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포항시민들은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다. 최근 항소심 재판부는 이를 부정하며 ‘예측할 수 없었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 판단은 타당한가. 이미 유사한 지열 사업에서 지진이 유발된 사례가 있었고 국내 전문가들 또한 가능한 위험을 경고해 왔다. 전문가들의 경고가 무시된 채 사업이 강행되었다면 이는 예측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예견된 결과에 가깝지 않은가. 정부의 태도는 바뀌지 않고 있다. 시민들이 삶의 토대를 잃고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음에도 정부는 사과 한마디 없이 침묵하고 있다. 어느 책임자도 처벌받지 않았고 피해복구는 아직도 미완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할 정부가 스스로 책임을 부정하는 모습은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포항 시민들은 여전히 무너진 삶을 복구하지 못한 채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으며, 지역 경제는 장기간 침체 상태에 빠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사건을 종결짓는다면, 이는 포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국가인가.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가 국민의 삶을 인위적으로 뒤흔든 재난 앞에 ‘책임이 없다’며 뒷짐지는 모습은 모욕적이다. 법적 책임을 포함하여 도의적, 정치적 책임도 면탈할 수 없다. 정부가 연루된 인적 재해의 결과를 바로 보아야 하며 이에 관련된 책임을 분명히 감당해야 한다. 대법원의 판단만 남았다. 사건은 법리 다툼을 넘어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대해 어떤 수준의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묻는 헌법적 쟁점을 내포한다. 대법원은 사건의 의미를 직시해야 한다. 상고심은 절차적 기회일 뿐 아니라 사법부가 사회적 정의를 최종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책임지지 않는 정부는 정당한 권력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책임 있는 기반 위에 서야 하며 국민의 신뢰는 책임의 이행으로부터 비롯된다. 포항지진은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정당한 질문에 적절한 응답을 끝까지 요구해야 한다. 정부의 실책에 관한 물음에 응답해야 할 시간이 이제 대법원 앞에 온 것이다. /장규열 고문

2025-05-14

대통령의 자격

대한민국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는 정권교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사회적 갈등의 골은 깊고 세계질서는 급변하며 기후 위기와 인구구조의 변화는 복합적인 과제를 던지고 있다. 전환기적 시대에 국민이 요구하는 대통령은 행정가나 정치인을 넘어, 진정한 리더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두 번씩이나 대통령을 탄핵했던 불행한 역사를 쓰라린 배경으로 하면서 적어도 이번에는 선택의 결과에 후회하지 않는 투표의 축제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가 내일의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첫째 덕목은 ‘청렴성과 도덕성이어야 한다. 권력의 중심에 설수록 유혹은 커지고 공익보다 사익을 추구할 욕심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지도자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대통령은 법적 기준을 넘어 윤리적으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국민이 신뢰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국정을 원만하게 이끌 수 없으며 권위는 명령에서가 아니라 도덕적 정당성에서 나온다. 둘째는 공감 능력과 소통하는 태도다. 한국 사회는 지역과 세대, 성별과 사회계층 간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국민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다양한 목소리와 입장을 조율하여 대변하는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소통하고 언론과 시민사회의 비판에 열린 자세로 응답하는 지도자만이 국민통합을 이끌어 낼 터이다. 셋째, 미래지향적 비전과 정책역량은 대통령이 현상을 유지하는 관리자나 조정자 역할을 넘어 국가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로서 반드시 긴요한 자질이다. 기후변화와 기술 발전, 안보 위협과 국익 확보 등 복합적인 글로벌과제에 대응하려면 단기적 안목보다 긴 호흡의 관점에서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역량이 필요하다. 표를 얻기 위한 공약 나열이 아니라 실행가능한 대안을 제시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자세가 요구된다. 대통령은 국제감각과 외교적 역량도 갖추어야 한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날로 복잡해져 가며, 미중 갈등, 북핵 문제,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 등은 대한민국의 미래와 직결된다. 국제사회에서 국익을 지키고 주도적 역할을 하려면 세상의 흐름을 읽는 통찰과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펼칠 리더십이 필요하다. 대통령은 국민과 함께 나아가려는 겸손한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며 국정운영의 궁극적 목적은 국민의 삶을 개선하는 데 있다. 실패를 인정하고 교훈을 얻는 리더, 자신이 아닌 나라의 발전을 우위에 놓는 리더야말로 진정한 대통령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그 꽃을 제대로 피우기 위해 유권자의 안목과 결기가 중요하다. 대통령 후보의 말솜씨나 이미지에 휘둘리기 보다 어떤 가치와 철학을 가졌는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지도자인지를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결국 우리 손에 달려 있다.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선거 일정 동안 불꽃 같은 눈초리로 가늠해야 한다. 이번 대통령선거가 역사와 민족 앞에 드러낼 중차대한 의미를 깨우쳐야 한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다리를 성공적으로 건너온 대한국민의 앞길이 평탄하기 위하여 자질과 역량을 갖춘 리더를 선택해야 한다. /장규열 고문

2025-05-07

어린이를 생각한 사람, 오늘 우리가 할 일

5월 5일, 우리는 ‘어린이날’을 맞는다. 아이들을 위해 행사를 벌이고 선물을 주며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나간다. 이 날은 단지 어린이를 위한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그 날이 담고 있는 정신이 온 사회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방정환 선생을 새롭게 떠올리게 된다.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문학의 선구자 또는 아동 인권 운동가라는 타이틀을 넘어, 시대를 앞서간 사상가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1923년 5월 1일이었다. 일제의 서슬 시퍼런 억압이 거셌지만, 3·1운동 이후 우리 사회에는 잠시나마 ‘문화정치’라는 명목으로 자치와 표현에 작은 여유가 생겼다. 많은 이들이 해외로 나가 독립을 도모하던 때에 청년 방정환은 ‘나라를 되찾은 다음은 누구의 날들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했고, 그 답으로 ‘어린이’를 들어 올렸다. 어린이를 단지 보호받아야 할 존재를 넘어, 어린이는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서 자율성과 존엄성을 가진 주체라고 생각했다. 이 땅에 되찾을 나라가 있다면 그 나라의 주인은 다음 세대 ‘어린이’라 믿었다. 어린이가 주눅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진정한 해방과 독립의 열매는 어린이들이 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나 ‘아이’ 같은 단어 대신 ‘어린이’라는 낱말을 지어내었다. 아주 작은 차이였겠지만 ‘어린이’에는 깊은 소신과 철학을 담았다.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히고 글을 쓰게 하며 목소리를 키우고자 했다. 어린이를 위한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고 ‘색동회’를 만들어 어린이 문화운동을 펼쳤다. 어른 중심의 세상에 어린이라는 존재의 가치를 새기려는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며 파격적인 시도였다. 우리는 방정환 선생이 바라던 미래를 살고 있다. 해방을 맞았고 민주주의를 실현했으며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법적으로 보호받는다. 참으로 그가 꿈꾸던 ‘어린이가 주눅들지 않는 세상’이 실현되었는지는 아직도 질문으로 남는다. 경쟁과 입시, 차별과 폭력 속에서 우리 사회의 아이들은 얼마나 안전하고 존엄하게 자라고 있을까. 새 정부가 들어선다. 정권이 바뀌고 시대의 문이 또 한번 열린다. 청년 방정환의 생각을 되새길 때다. 어린이는 가르침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 아니라 어른들의 생각을 이끄는 거울이 되어야 한다. 사회는 어린이의 일상을 중심에 두고 설계되어야 하며 정책과 제도의 뿌리에는 언제나 ‘어린이를 생각하는 세상’이 자리잡아야 한다. ‘어린이날’을 하루 기념일로만 여길 게 아니라, 일 년 365일을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이 영그는 날들로 만들어야 한다. 100년 전 방정환이 하루라도 어린이를 귀하게 생각하자 떠올렸다면, 오늘 우리는 어린이는 날마다 소망과 기대가 열리는 꿈나무로 여겨야 한다. ‘어린이헌장’은 이렇게 선언한다.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 어느 청년의 꿈일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으로 어린이를 키워야 한다. 당장 투표하지 않아도 내일 나라를 이끌 기둥 ‘어린이’를 나라살림의 한 가운데에 두어야 한다. /장규열 고문

2025-04-30

글 읽을 줄 아시죠?

OECD가 ‘성인 인지능력(Survey of Adult Skills)’을 조사해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오늘날 어른들이 겪고 있는 인지능력의 변화가 흥미롭다. AI와 디지털의 변화가 눈부신 가운데, 세계적으로 문해력, 산술력과 문제해결능력 등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으며 특히 한국인들의 문해력 저하는 더욱 두드러진다. 어찌된 일일까? 문해력이 내려간다는 것은 단순히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게 아니다. 표면적으로 읽고 새기는 능력은 유지되고 있지만, 이면의 의미를 이해하고 분석하여 문맥을 파악하며 내용을 자신의 사고로 끌어오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글은 읽지만 생각하지 않는다. 정보는 접하지만 맥락은 사라진다. 기사는 보지만 분석은 하지 않는다. 문제는 역설적으로, 디지털 환경의 급격한 확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스마트폰과 SNS를 중심으로 한 정보 소비는 빠르고 피상적이며 단편적이다. 이용자는 짧은 문장과 놀라운 이미지, 요약된 해설에 익숙해지고 스크롤과 클릭으로 반복되는 표면적 정보탐색에 길들여진다. 이런 정보환경은 장문의 글을 읽고 천천히 사유하는 능력을 약화시키고 결과적으로 문해력을 감퇴시킨다. 4월 23일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World Book and Copyright Day)’이었다. 책은 여전히 독해와 사유의 공간이며, 문해력의 가장 전통적이며 강력한 훈련 도구다. 독서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언어를 통해 구조화된 사고를 익히고 타인의 시선과 저작을 통해 자기 인식을 확장하는 행위다. 독서를 멀리하는 경향은 인간의 사고력과 공감능력을 점차 축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의 문해력 저하는 단지 교육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 소통의 위기이며 민주적 판단력과 비판적 사고력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경고가 아닌가. 정책과 언론, 여론과 소통의 흐름이 점점 더 자극적이고 단선적이며 감정적인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는 현상은 복합적 맥락을 해석하고 대응하는 능력의 약화를 드러낸다. 가짜뉴스를 솎아내고 의미 있는 콘텐츠를 선별하여 높은 수준의 지적 능력을 길러내는 일도 적적한 문해력이 기초를 잡아주어야 가능하다. 문해력은 개인의 삶을 위한 기술이면서 공동체의 건강성을 지탱하는 집단적 자산이다. 기술 발전이 인간의 지적 능력을 자동으로 향상시킨다는 믿음은 허구다. 오히려 문명을 유지하고 확장해왔던 기본적인 인지기술, 특히 문해력은 더욱 의식적으로 단련하고 보존해야 하는 영역이다. 아인슈타인은 ‘교육의 목적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지, 사실을 암기하게 하는 게 아니다’라고 하였다. 인간이 장착해야 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능력을 꼽은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자칫 느리고 비효율적인 듯 보이지만, 바로 그 ‘느림’은 곧 사유의 깊이와 너비를 의미한다. 세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생각은 오히려 더 깊고 넓어져야 한다. 그것이 가능한 길은 여전히 책 안에 있다.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은 단지 책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으로 남기 위한 최소한의 자각을 요구하는 날이다. 글을 읽을 뿐 아니라 독서를 통하여 시민의식을 높이고 시대정신을 꿰뚫는 지혜를 길러야 한다.

2025-04-23

트럼프와 미국의 대학들

미국 트럼프(Trump) 정부가 대학들을 상대로 압박을 시작했다. 다양성과 포용, 평등을 중시해 온 미국 대학들의 전통적 정책에 정면으로 제동을 건 것이다. 백악관은 대학들이 인종 간 형평성을 고려한 입학정책과 인사정책 등을 수정하지 않으면, 총액 22억 달러에 이르는 연방 연구자금 지원을 중단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사실상 협박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을 대표하는 사립대학인 하버드(Harvard)대학이 가장 먼저 반기를 높이 들었다. 하버드는 이러한 정부의 개입이 단순히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수준을 넘어, 미국 사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져온 민주주의의 기반을 뒤흔드는 시도라고 지적했다. 대학은 특정 정치권력의 입맛에 따라 생각을 바꾸며 운영방식을 수정하는 기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대학들이 지난 긴 세월동안 유지해온 핵심 가치를 양보할 수 없다고 했다. 하버드대학은 “트럼프 정부의 요청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전체의 문제”라고 단언했다. 실제로 전국의 많은 대학들이 하버드의 입장에 동의하며 정부의 압박에 물러서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 대학들은 어떤가. 대한민국의 대학들은 언제쯤 학문의 자유를 이처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외부의 간섭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운영하며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독립된 지적 공동체로 설 수 있을까. 학문이 정치에 종속되지 않고 지식이 권력에 복무하지 않는 구조를 우리 대학은 얼마나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가. 학문의 자유는 고상한 이상이나 듣기 좋은 구호가 아니다. 사회 전체의 당당함과 직결되는 가치다. 대학이 자유롭지 못할 때, 사회에는 신박한 창의성도 존재할 수 없으며 뚜렷한 비판정신도 사라지고 긴 안목의 비전도 설 자리를 잃는다. 교육과 연구의 중심이 권력에 종속되는 순간, 사회와 공동체는 쇠퇴와 몰락의 비탈에 서게 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도 든든한 지식기반 위에서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다. 학문의 자유는 누가 가져다주지 않는다. 누가 대신 보장해주는 것도 아니다. 정부나 사회가 나서서 선사하지 않는다. 대학 스스로 자유의 가치를 인식하고 지켜내기 위해 싸우며 때로는 불이익도 감수할 각오를 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하버드와 미국 대학들이 보여주는 대응은 바로 그런 태도의 실천이다. 자금이 끊기더라도 정책의 방향에 동의할 수 없다면 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대학이 사회적 책무를 다하겠다는 다짐이 아닌가. 대학은 교육기관에 머물지 않는다. 사회가 크고작은 질문을 던지는 공간이며 미래를 위한 실험공간이다. 그런 장소가 위축되거나 침묵할 때, 사회 전체는 비판적 사고를 잃고 방향감각마저 잃게 될 터이다. 학문이 자유로울 수 없다면, 사회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오늘 한국의 대학은 학문의 자유를 얼마나 누리고 있을까. 자유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되묻고 행동할 시간이다. 자유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야 하는 것이다. 자유를 지킬 책임은 대학 스스로에게 있다. 학문의 자유를 지키지 못한 결과는 사회 전체가 짊어진다. 대학이 깨어야 나라가 산다.

2025-04-16

대통령이 없는 나라

장규열 고문 대통령이 없어졌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인용 결정은 역사의 한 장면을 강렬하게 새겼다. 최고권력자가 법의 심판을 받았고, 국민은 거리에서 침묵과 함성으로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체념과 분노 그리고 마지막 남았던 희망도 사그라진 시간이었다. 대통령이 없는 나라에서 허전함은 곧 혼란으로 남았다. 책임을 못다한 권력의 잔해들로 남았다. 대통령이 없는데도 낡은 권력과 그 잔재는 아직도 곳곳에 살아서 꿈틀거린다. 부패한 권력체계는 단순히 대통령의 퇴진으로 마감되지 않는다. 국정농단의 진실이 밝혀졌지만 일부 세력은 아직도 기득권을 붙들고 움직이고 있다. 경제는 멈췄고 민생은 외면되며 외교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이후, 한미 간의 대화는 자취를 감췄고, 보호무역주의적 경제공세 앞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 관세폭탄이라는 현실 앞에 대응은 커녕 방향조차 잡지 못하는 게 아닌가. 무책임한 정권이 남긴 그림자가 깊고도 어둡다. 시대를 잘못 짚은 비상계엄으로 문제를 덮으려 했지만 국민은 지혜로왔다. 우리는 달랐다. 대통령이 사라진 날에도 아이는 학교에 가고 지하철은 정시에 달렸으며 국민은 법을 지켰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것은 대통령 한 사람이 아니었다. 나라를 지탱하는 힘은 결국 국민에게 있었다. 우리는 과도기의 한복판에 섰다. 두 달도 못미칠 권한대행 체제는 한계가 있다. 나라가 스러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정권 때문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자정능력과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의 회복탄력성 덕분이다. 그렇기에 더욱 분명히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의 책략이나 술수에 나라를 맡기지 않는다고. 잘못 사용된 군경의 위협과 ‘장난같은 게엄’이라는 터무니없는 궤변 앞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았던 국민이기에 이제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자격이 있다고. 조기대선은 단지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이벤트가 아니다. 우리는 혼란의 끝에서 진짜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누구를 위한 나라를 만들 것인가.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더 이상 ‘적당히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책임질 줄 알고 공감할 줄 아는 리더를 요구해야 한다. 선택은 단지 희망이 아니라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사라졌지만, 국민은 깨어 있다. 혼란 속에서도 상처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길을 찾는다.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온 세상을 향해 말을 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아니,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온 나라가 한마음이 되었다고. 온 세상이 혹 거꾸로 달린다 해도 대한민국은 국민이 자유롭고 풍요할 내일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것이라고. 국민은 많이 배웠다. 자유와 민주의 고귀함과 헌법을 지켜야 할 까닭에 관해 분명히 깨우쳤다. 주권자의 마음에 합하지 못하는 권력자는 언제든지 버려질 것이라는 스스로의 목소리에 경탄하는 중이다. 지난 몇 달이 모두의 위기였지만, 나라의 역사 위에는 오히려 빛나는 시간으로 새겨야 한다. 국민이 살아있어 나라가 안전하다.

2025-04-09

상식이 무너진 나라, 누가 구해야 하나

장규열 고문 법관이 법을 구부려 판결을 내렸다. 국민이 법을 믿을 수 있을까. 검사가 본분을 저버리고 범죄를 외면했다. 그 검사가 지킨다는 정의를 신뢰할 수 있을까. 관료가 법률을 위반하고도 파면되지 않는다. 나라의 일머리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 헌법수호를 선서한 대통령이 헌법을 가벼이 보고 국민을 힘들게 한다. 나라가 바로 설 수 있을까. 나라가 휘청인다. 법과 정의가 무너지면 국민은 절망과 불안의 나락에 떨어진다. 공인이 사익을 위해 법을 어기는 순간, 법은 더 이상 법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제멋대로 법을 해석하고 운용하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국민을 주권자라 적었던 헌법이 휴지조각이 되어버린다. 법은 나라의 기둥이지만 상식의 최소한이다.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져야 하고, 법을 집행하는 기관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법관이 권력이나 사익에 따라 판결을 달리한다면, 법을 지키는 것이 우스운 일이 되고 만다. 특정 세력에 유리한 판결이 계속된다면, 법이 신뢰를 잃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닐까. 검사는 범죄를 단죄하는 자리다. 본분을 저버리고 불법에 눈을 감으면 정의와 상식은 설 자리를 잃는다. 검사가 권력의 비리를 덮고 특정세력에게만 법의 칼을 휘두른다면 국민이 공정을 기대할 수 없다. 검찰이 정치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국민이 바라는 법치는 무너져 내린다.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법과 제도를 따라야 할 행정기관이 오히려 법을 왜곡한다면, 나라의 행정이 온당하게 돌아갈 수가 없다. 편법과 일탈이 용인되면서 그릇된 관행이 자리를 잡고 결국 법치행정은 허울만 남는다. 헌법재판소의 최종판결을 따르지 않으면서 국민에게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르라면,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정점에 선 대통령이 헌법을 어겼다면 어찌 되는가. 국민 앞에서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엄숙히 선서했던 대통령이 헌법을 무시하고 법 위에 군림하려 했다면 나라가 어디로 향하게 될까. 민주공화국의 뿌리가 흔들리고, 국정운영의 원칙이 무너지지 않을까. 대통령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누구에게 법을 지키라 요청할 수 있을까. 이런 일들이 중첩되면서 국민은 좌절과 체념을 겪는다. 냉소가 퍼지고, 불법과 비상식 일상이 되어간다. 공정한 사회를 기대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되면서 국민도 점차 불법을 용인하고 불공정을 감내하게 된다. 헌법과 법률이 있지만 작동은 멈춘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산천에 불길이 솟는다. 국민의 분노가 불길처럼 솟구쳐 오른다. 비정상이 계속되면서 상식이 사라지고 공정한 세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몰아치는 산불에는 비라도 기다린다. 불공정과 비상식에는 비마저 기대할 수가 없다. 국민이 올바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부정과 불법이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와 사회가 정상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면 주권자 국민이 깨쳐야 한다. 불법과 비리를 용인하지 않고 법과 정의를 지키려는 국민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나라를 지켜낸 위인들을 역사에서 찾지만, 실은 이름없는 국민들이 스스로 지켰다는 자각에 이르게 된다. 다시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의 역사를 구해야 한다. 나라가 역대급 기로에 섰다. 국민이 편안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국민이 깨어야 나라가 산다.

2025-03-26

사교육 공화국

장규열 고문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지식전달을 넘어, 나라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런데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한다. 최근 교육부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작년 초중고 사교육비가 29조원에 이르며 한 해 7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학생수는 8만명이나 줄었는데 사교육비는 팽창일로다. 교육이 경쟁수단으로 변질되어 학생과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을 증가시킨다. 저출산의 까닭이기도 하다. 교육이 사회적 불평등과 공동체의 와해를 부른다. 대학입시 중심의 경쟁시스템, 공교육에 대한 신뢰저하, 학벌주의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일부 엘리트층은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사교육을 활용하며, 교육이 사회적 계층을 고착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지불하는 고액의 사교육비는 가계에 큰 부담이다. 사교육을 받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며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지 못한다. 공교육의 위기는 어디서 왔을까. 교사들이 과중한 행정업무와 학습지도 밖의 업무에 시달리면서 교육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 학생은 창의적 사고와 인격형성을 위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아니라 주입식교육과 입시경쟁에 내몰린다. 교육의 본질적 가치가 지속적으로 훼손되고 있다. 교육이 무너지면서 공동체 정신이 스러진다. 이전에는 마을과 학교가 함께 학생을 돌보며 교육을 책임지는 구조였다면, 지금은 각 가정이 각자도생으로 교육문제를 해결한다. 엘리트교육을 받은 일부 계층은 사회적 책임보다 개인의 성공을 최우선시한다. 사회적 연대감을 약화시키고 공동체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사회계층 간 갈등을 초래하고 공동체 내 양극화를 부추긴다. 문제해결을 위해 교육에 공공선(public good)의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 교육이 개인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회의 발전과 공존을 위한 필수요소임을 분명히 해야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교육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 교사들에게 자율성을 부여하고 창의적 교육 방식이 자리 잡도록 지원해야 한다. 주입암기식 학습이 아니라 비판적 사고와 문제해결 능력을 기르도록 교육과정을 전면 개편해야 한다. 사교육 의존도를 낮추려면 공교육 내 보충시스템을 강화해야 한다. 방과후 프로그램의 질을 높이고 교육 수준별 학습지원을 체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경제적 형편과 관계없이 누구나 양질의 교육을 받도록 공교육 지원체계를 확대해야 한다. 교육이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도록 공동체 중심의 교육모델을 도입해야 한다. 지역사회가 학교 교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학교가 지역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하도록 재편해야 한다. 다양한 사회계층이 가진 교육적 자원을 학교공동체와 공유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사교육 팽창과 공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의 가치관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문제다. 교육이 경쟁이 아니라 공존과 연대의 수단이 되도록, 공공선을 중심에 두는 교육정책이 서야한다. 교육이 개인뿐 아니라 사회의 발전을 위한 공공재로 기능하도록 함께 고민하고 실천해야 할 때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5-03-19

한 사람을 위해 원칙을 붕괴하다니

장규열 고문 법과 원칙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흔들림없이 공정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면 안 된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법이 특정 개인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된 후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사례들이 고약하게 존재한다. 최근 법원의 판결과 검찰의 대응이 그러하다. 법원은 구속된 대통령을 석방하기 위해 법률에 명시된 ‘날(day)’이 아닌 ‘시간(hour)’을 단위로 기간을 계산했다. 법관이 정해진 법을 적용하지 않고 그 법을 다시 쓴 것이다. 사법부가 법대로 판결하지 않고 입법부가 하듯이 법을 새롭게 적었다. 이에 검찰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석방을 지휘하였다. 바꾼 법이나마 그렇게 지킬 것인가 했더니 그도 아니었다. 검찰 내부와 사법계에서 반발이 터져나오자, 검찰은 이제 다시 처음처럼 ‘날’ 단위로 계산하라고 한다. 특정인을 위한 예외적 해석으로 끝났으며 이제 다시 원칙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법 해석과 적용이 특정인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는 증거임에 분명하다. 처음부터 ‘날’ 단위로 계산해야 했다면, 왜 이 때는 ‘시간’ 단위를 적용했을까? 이제 와서 ‘날’로 돌아가는 까닭은 무엇인가? 행정 판단의 시비거리가 아니라, 법과 원칙, 사회적 신뢰의 문제다. 법이 특정 대상에 따라 차별적으로 작동하는 순간, 공정과 정의는 무너진다. 유사한 사례는 역사에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1974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사임한 후, 후임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닉슨을 사면하였다. 법과 정의의 기준을 고려하기보다 정치적 안정을 이유로 법의 엄정함을 구부렸다. 미국 사회에서 대통령 사면권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을 일으켰다. 2008년 한국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특별사면도 유사한 사례다. 정치적 상황과 타협 속에서 사면이 이루어졌고, 이후에 다시 법의 원칙을 논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법의 신뢰는 무너지고, 국민은 법 앞의 평등을 의심하게 된다. 특정인을 위한 예외가 만들어지고 나면, 이후 다시 원칙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원칙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 더욱이 이번 사안의 당사자는 ‘공정과 상식’을 기치로 걸고 당선된 대통령이다. 공정과 상식을 강조했던 사람이, 법과 원칙이 자신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할 때 침묵하는 모습은 심각한 신뢰의 위기를 초래한다. 대통령은 법과 원칙을 지키는 데 누구보다 모범을 보여야 한다, 예외적 적용의 중심에 그가 선다면 국민은 사회적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려워진다. 우리는 묻는다. 법과 원칙이 특정인을 위해 바뀌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공평한 처사인가. 이런 일이 반복될 때, 법치주의는 온전히 유지될 수 있는가. 아이들에게는 법과 원칙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법은 특정 개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일반을 위한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특정인을 위한 예외를 만들면서 법은 신뢰를 잃고 사회적 불신은 증폭된다. 공정과 상식은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모두에게 공평한 사회적 가치여야 한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2025-03-12

젤렌스키에게 배운다

장규열 고문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국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나눈 대화는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한민국도 이 사건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를 놀라고 경계하게 만들었다.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외교적 문제로만 볼 일이 아니다, 우리 입장에서 교훈을 챙기고 대비책을 고민해야 한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 전폭적으로 의존하였다. 두 대통령 사이의 대화가 공개되면서 일방의 지원이 언제든 정치적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이 분명해졌다. 뜨거운 동맹이라도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차가운 현실을 새삼 상기시켰다. 대한민국도 미국과 오랜 동맹관계를 가지지만, 미국이 항상 우리의 입장을 십분 지지해 줄 것이라고 여기는 일은 위험하다. 역사적으로도 미국은 북한과의 협상과정에서 우리와 충분한 논의없이 독자적인 결정을 내린 사례가 있다. 외교전략을 수립할 때 그들의 지원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다각적인 외교노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음이 분명해졌다. 두 지도자의 모습과 대화는 전 세계 미디어를 통해 공개되었고, 우크라이나의 외교적 입지마저 흔들게 되었다. 국가지도자의 언행은 외교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때로는 한마디의 실언이 큰 파장을 불러오기도 한다. 국제무대에서의 발언은 전 세계가 듣고 분석하는 메시지가 된다. 국제사회에서 국가의 신인도를 결정하고 경쟁력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지난 수년간 우리 지도자들이 해외정상들과의 대화에서 예기치 못한 논란을 빚었던 사례도 있다. 국가수반의 언행이 신중해야 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우크라이나는 전쟁을 겪으면서 러시아, 유럽 각국과 미국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동시에 러시아와의 관계도 고려해야 한다. 대통령들의 대화가 외부에 공개되면서, 외교적 입장은 더욱 복잡해졌다. 대한민국 역시 미·중 갈등 속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면서 중국과의 경제적 실리도 고려해야 하는 현실이다. 한쪽에 의존하는 외교정책은 위험하다. 젤렌스키와 트럼프의 대화에서 보듯이, 특정 국가에 대한 지나친 신뢰는 언제든 예상치 못한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다. 대한민국은 독립적이며 자주적인 외교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미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되, 중국, 유럽, 동남아 등 다양한 외교 파트너와 협력을 강화하며, 군사적, 경제적, 기술적 자립도를 강화해야 한다. 국제정치에서 군사적 동맹이 실제 전쟁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목격하였다.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지만, 직접적인 군사개입은 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자체적인 방위력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독자적인 방위 능력을 키워야 한다. 이번 사건을 타산지석 삼아, 외교와 군사정책을 돌아보아야 한다. 맹목적인 신뢰보다는 다각적인 외교전략을 구축하고, 자주적인 국방력과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2025-03-05

대학의 새로운 역할, 전세대 교육

장규열 고문 저출산이 한국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더 깊어진다. 여파가 대학에까지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신입생 숫자가 급감하고, 일부 대학들은 존폐의 기로에 섰다. ‘벚꽃피는 순서대로 문을 닫는다’는 표현이 현실이 되어 간다. 위기를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 대학이 그 역할과 기능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대학은 지난 세기 동안 산업화와 세계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국가발전에 기여했고, 국민의 평균적인 교육수준을 비약적으로 높였다. 고교 졸업생의 80% 이상이 대학에 간다. 저출산과 디지털혁명은 대학이 과거의 방식대로 운영될 수 없게 만들었다. 디지털환경의 변화와 AI기술의 발전은 산업과 직업의 형태를 빠르게 바꾼다. 한번 습득한 지식과 기술만으로 생업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졌다. 4차산업혁명은 누구나 여러 번 직업을 바꾸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지속적인 학습과 재교육이 필수가 되었다. 대학이 여전히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청년들만을 대상으로 교육을 제공한다면, 대학의 역할은 점점 더 축소될 터이다. 대학은 ‘젊은이들의 배움터’에서 벗어나, 전 생애에 걸쳐 학습을 지원하는 교육기관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모든 세대를 위한 평생교육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전통적인 4년제 학위중심 학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과 산업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짧은 기간에 특정 기술이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모듈형 과정과 마이크로크레덴셜(소규모 인증과정)을 적극적으로 도입해야 한다. 성인학습자들이 언제든지 돌아와 대학의 교육과정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성인학습자에게는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크다. 온라인과 대면교육을 결합한 유연한 학습방식이 필요하다. 기업과 협력해 맞춤형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직장인들이 부담없이 학습할 수 있도록 야간·주말 과정과 단기집중 과정을 운영하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기술변화로 인해 기존 직무가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등장한다. 대학은 단순히 학위수여기관이 아니라 직장인과 경력전환을 원하는 이들에게 실무중심의 재교육을 제공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AI, 데이터분석, 디지털마케팅, 헬스케어 등의 분야에서 새로운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과정 등이 필요하다. 대학이 산업과의 연계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기업과 협력하여 현장실습, 프로젝트 기반 학습(PBL), 인턴십 등을 포함한 실질적인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해 교육과 시장 간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 기업과 대학이 공동으로 학위 과정을 운영하거나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변화를 주도하지 않으면, 대학은 학령인구 감소와 함께 사라질 수도 있다. ‘전세대 학습을 본격적으로 지원하는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 대학은 더 이상 학위를 따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배움과 전세대의 성장을 지원하는 마당이어야 한다. 대학의 위기가 현실이 되었지만, 새로운 역할을 찾아간다면 넓은 기회의 터전이 펼쳐질 것이다.

2025-02-26

거짓말 사회

장규열 고문 법정은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곳이다. 판사는 증거와 법리를 바탕으로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며, 드러난 거짓과 진실을 토대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는 역할을 맡는다. 오늘날 법정에서 거짓말이 너무도 흔한 일이 되었다. 피고인과 증인뿐 아니라, 심지어 법정에 선 공직자들이 공공연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진실을 숨기고 사실을 왜곡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기반을 흔들고 있으며, 국민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 공직사회에 대한 믿음을 훼손하고 급기야는 국민들 사이의 관계마저 흔들리게 한다. ‘나쁜 사람은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통하지 않는다. 법정에서 밝혀지는 것은 범죄자의 진실이어야 한다. 법과 정의를 수호해야 할 공직자들이 오히려 거짓말을 일삼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이 속속 드러나면서 국민은 실망과 분노를 넘어 무기력감마저 느낀다. 공직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을 말하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지면, 사회 전체는 도덕적 타락과 윤리적 일탈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거짓말이 통용되는 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누구인가? 바로 ‘다음세대’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성실과 정직이 중요하다고 가르친다. 현실에서 거짓말이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본다면 그렇게 가르칠 수 있을까. 최고위 공직자들조차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거짓을 일삼고,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겠는가. 사람은 들은대로 배우기보다 보는대로 배운다. 결국 정직한 사람이 손해보는 왜곡된 사회적 타락을 배우고 말 터이다. 사회적 진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행하려면, 우리는 거짓말 문제에 대해 사회적 각성에 이르러야 한다.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문제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거짓말이 구조적으로 용인되는 문화적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법과 제도는 정직한 사람이 보호받으며 거짓말이 철저하게 배격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공직자들에게는 더 높은 윤리적 기준이 요구되어야 한다. 공직사회의 거짓말을 사회공동체에 미치는 해악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거짓말이 만연하고 진실이 손해보는 현실을 방관해서는 안 된다. 법과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 정직한 사람이 인정받고 보호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적 관심과 집단지성에 기초한 행동이다. 거짓말이 성공의 수단이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동체의 질서와 사회적 안정을 회복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철저하게 징벌하며 진실의 가치를 되새기는 사회적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누구의 책임을 따지기보다 사회에 뿌리를 내리려는 탈진실의 허위를 각성하고 거짓말을 실체를 직시해야 한다. 진실과 성실의 힘을 새롭게 강조하여 대한민국이 더이상 부끄러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단속해야 한다. 공직사회에는 거짓말이 절대로 통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하고 진실에 기초한 행정행위가 공직자윤리의 기초임을 확인해야 한다. 나라의 기반이 거짓말로 흔들리는 일을 더이상 두고만 볼 수 없는 지경이다.

2025-02-19

대한민국, 멈춰버린 나라

장규열 고문 대한민국이 멈췄다. 국가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모든 분야가 동시에 얼어붙었다. 경제는 성장동력을 상실하고, 교육은 오래도록 서있으며, 사회는 극심한 갈등과 불신으로 병들었다. 외교는 수장없는 혼란으로 방향을 잃었고, 국방은 보란듯이 중구난방이다. 세계는 빛의 속도로 바뀌어가는데, 대한민국은 따라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최근 대한민국 경제의 가장 큰 문제는 성장이 멈추었다는 점이다. 주요 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반도체와 AI 등 핵심분야도 우리만 서있는 분위기다. 반도체는 대한민국 경제의 다음 먹거리역할을 해왔으나, 글로벌 경쟁이 심화되면서 전략적 대응이 부족해 시장점유율이 위협받고 있다. AI시대를 대비해야 하는데 준비가 미흡한 것도 현실이다.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청년실업률은 여전히 높으며,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은 생존의 벼랑 위에 섰다.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과 금리의 인상, 부동산시장의 불안정성은 국민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정부가 경제위기를 극복할 뚜렷한 비전과 로드맵을 제시하지 못하는데, 세계시장에서 한국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교육의 문제는 학제개편이나 입시제도를 바꿀 필요에 그치지 않는다. 학생들은 주입식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창의적 사고를 키울 기회가 제한적이다. 대학교육의 질이 하락하고 청년들은 졸업 후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다. 기술발전과 산업변화 속에서 교육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면, 미래 세대의 경쟁력은 약화일변도에 설 터이다. AI와 디지털혁신이 글로벌 경제와 세계문화에 충격을 주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은 이를 좀처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라도 교육개혁에 대한 근본적인 각성과 고민이 필요하다. 미래산업을 이끌어갈 인재를 어떻게 양성할 것인지에 대한 긴 안목의 전략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국사회는 극심한 불신과 갈등 속에 병들어가고 있다. 정치적 양극화는 극단적인 대립을 낳으며, 세대 간 갈등, 계층 간 격차, 성별 간 반목이 점증한다.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에 닿았다. 사회안전망이 작동하지 않아 복지사각지대가 늘어나고, 출산율하락과 고령화 문제는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정부가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사회는 더욱 취약한 구조로 떨어질 것이다. 국가의 외교가 혼란에 빠졌다. 국제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외교전략이 불명료하다. 글로벌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 중요함에도, 외교정책은 갈팡질팡하며 확고한 입장을 보이지 못한다. 경제와 안보를 고려한 외교적 판단과 전략이 절실한 시점이다. 국방이 가진 심각한 문제가 눈에 보인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계속되고 있는데 동북아정세는 끝없이 불안정하다. 군 내부의 문제와 병역제도의 지속적인 논란으로 인해 안보가 취약해지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강력하고 촘촘한 안보전략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멈춰 있을 겨를이 없다.

2025-02-12

민주주의는 문화다

장규열 고문 민주주의를 국가의 정치체제나 법적 시스템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좁은 시각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규정되며, 삼권분립을 통해 작동한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정부의 운영방식이기만 하다면, 이는 외형적 발견에 불과하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제도뿐 아니라 사회적 문화로 터를 잡아야한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체제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 안에 깊이 스며들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 선언하고,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한다. 표현만으로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추상적인 개념에 멈출 위험이 있다. 민주주의가 국민의 삶과 실질적 일상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헌법이 공허한 선언을 한 꼴이 되어버린다. ‘민주주의가 문화로 자리잡는다’는 건 국민들이 민주적 가치와 태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실천하는 것을 뜻한다.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 권력자의 결정을 비판적으로 관찰하는 자세, 공적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토론에 참여하는 습관 등이 민주적 문화의 부분이 아닐까. 단순히 선거에 투표하는 일을 넘어,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길거리와 모든 일상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민주적 태도를 익히고 실천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문화로 정착된다. 민주주의를 문화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우리는 종종 민주주의를 선택가능한 여러 체제 중 하나로 이해하게 된다. 상황에 따라 민주주의가 불필요하거나 비효율적이라고 여길 수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권위주의적 체제를 선호하는 태도로 나아갈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민주적 제도를 도입했다가 권위주의로 회귀한 사례가 수다하다. 단순히 정치인들의 문제라기보다, 사회의 문화로서 민주주의가 충분히 정착되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문화로 자리잡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1979년 부마항쟁과 1980년 5·18 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에서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2016년 촛불혁명의 과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는 단번에 종결적으로 확립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제도뿐 아니라 공동체의 문화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부적절한 비상계엄같은 반민주적인 사태가 언제든 다시 벌어질 수 있다. 민주주의를 문화로 자리잡게 하려면,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토론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공동체 안에서 자율적으로 집단적으로 의사결정과정을 경험하면서 민주적 가치관과 경험치를 쌓아야 한다. 또한, 가정에서도 구성원 간 관계가 민주적이어야 한다. 권위적인 가정에서 민주적 질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언론과 미디어도 민주주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중요하다. 다양한 의견이 자연스럽게 표출될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고, 비판적 사고를 키울 수 있는 보도가 이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의지가 공동체의 문화로 뿌리내려야 한다.

2025-02-05

대통령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

장규열 고문 우리 사회에는 대통령을 마치 군주처럼 여기는 잠재의식이 남아 있다. 5000년 역사 가운데 왕조 정치가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했고, 민주주의를 직간접으로 경험한 기간은 고작 100여 년에 불과하다. 일제강점기와 군사정부를 거치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체제가 뿌리를 내린 기간은 지극히 짧다. 최근 몇 년간 우리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고통스런 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갈등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현 대통령이 대선 토론에 나설 당시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적어 화제가 되었던 일도 있었다. 이는 후보 본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대통령직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군주제적 잔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오늘 겪는 사회적 소란 속에도 대통령을 국가의 대표자라기보다 통치권력자로 여기는 경향이 뿌리깊게 깔려있다. 대통령을 뜻하는 영어표현 ‘President’는 원래 ‘앞에 선다’ 또는 ‘대표한다’는 원어적 의미를 담고있다. 그러나 한자표현 ‘대통령’에는 ‘크게 통치하는 최고명령권자’라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히 있다. 이는 대통령제의 본질을 오해하게 만들며, 군주적 이미지를 굳히는 효과를 낳고있다. 제왕적대통령제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본령을 회복하기 위하여 직함으로서 ‘대통령’의 명칭변경을 제안한다.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적 기본을 고려할 때도 ‘대통령’이라는 명칭은 행정부 수장의 역할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다. 입법부 수장을 ‘국회의장’, 사법부 수장을 ‘대법원장’으로 부르듯, 행정부의 수장에게도 더 균형잡힌 명칭이 필요하다. 예컨대 ‘행정수반’, ‘국무원장’, 또는 ‘국정총장’ 등으로 개칭하여, 대통령의 권한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통치자이기보다 제한적인 책임자임을 강조해야 할 터이다. 대통령 명칭의 변경은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직제의 개정, 관련 조직 및 법령의 정비 등 부가적인 사안들이 동반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 본질을 구현하고 대통령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시대적으로 필요하고 의미있는 과정이라 여겨진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놓고볼 때, 민주정부를 더욱 성숙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대통령’이라는 직함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히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을 넘어, 국민이 신뢰하고 맡길 수 있는 지도자를 선출하고 그가 군림하는 권력자가 아닌 국민의 대표자임을 재확인하는 길이 될 것이다.

2025-01-26

대통령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

장규열 고문 우리 사회에는 대통령을 마치 군주처럼 여기는 잠재의식이 남아 있다. 5000년 역사 가운데 왕조 정치가 압도적인 부분을 차지했고, 민주주의를 직간접으로 경험한 기간은 고작 100여 년에 불과하다. 일제강점기와 군사정부를 거치며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체제가 뿌리를 내린 기간은 지극히 짧다. 최근 몇 년간 우리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고통스런 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갈등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현 대통령이 대선 토론에 나설 당시 손바닥에 ‘임금 왕(王)’ 자를 적어 화제가 되었던 일도 있었다. 이는 후보 본인을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대통령직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군주제적 잔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오늘 겪는 사회적 소란 속에도 대통령을 국가의 대표자라기보다 통치권력자로 여기는 경향이 뿌리깊게 깔려있다. 대통령을 뜻하는 영어표현 ‘President’는 원래 ‘앞에 선다’ 또는 ‘대표한다’는 원어적 의미를 담고있다. 그러나 한자표현 ‘대통령’에는 ‘크게 통치하는 최고명령권자’라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다분히 있다. 이는 대통령제의 본질을 오해하게 만들며, 군주적 이미지를 굳히는 효과를 낳고있다. 제왕적대통령제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의 본령을 회복하기 위하여 직함으로서 ‘대통령’의 명칭변경을 제안한다. 삼권분립이라는 헌법적 기본을 고려할 때도 ‘대통령’이라는 명칭은 행정부 수장의 역할을 명확히 드러내지 못한다. 입법부 수장을 ‘국회의장’, 사법부 수장을 ‘대법원장’으로 부르듯, 행정부의 수장에게도 더 균형잡힌 명칭이 필요하다. 예컨대 ‘행정수반’, ‘국무원장’, 또는 ‘국정총장’ 등으로 개칭하여, 대통령의 권한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통치자이기보다 제한적인 책임자임을 강조해야 할 터이다. 대통령 명칭의 변경은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직제의 개정, 관련 조직 및 법령의 정비 등 부가적인 사안들이 동반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 본질을 구현하고 대통령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시대적으로 필요하고 의미있는 과정이라 여겨진다. 민족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놓고볼 때, 민주정부를 더욱 성숙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대통령’이라는 직함에 대한 논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단순히 이름을 바꾸자는 주장을 넘어, 국민이 신뢰하고 맡길 수 있는 지도자를 선출하고 그가 군림하는 권력자가 아닌 국민의 대표자임을 재확인하는 길이 될 것이다. 오늘의 혼란을 극복하고 국민의 안정적인 일상과 평온한 국정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대통령직의 본질을 재조명하고 그 역할을 재정의해야 한다. 직함변경 논의는 민주주의의 근본을 강화하고,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를 만드는 중요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다시는 국가의 지도자가 불행한 길에 서지 않도록 하는 배려도 함께 버무려 대통령 명칭 변경을 위한 국민적 공감대를 넓혀가야 한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 국민이 직접 선출하여 맡겨진 임기 동안 나라와 국민을 위하여 일해야 하는 성실한 일꾼이어야 한다.

2025-01-22

다시 시작하는 나라

장규열 고문 지난 2년 반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특기할 만한 시기였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을 자랑하던 나라가 갑작스럽게 어려움에 처하면서 많은 국민들이 나라의 방향성과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민주주의의 기본 틀이 흔들렸고 사회적 갈등과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진 이 시기는 우리에게 값비싼 교훈을 안겨주었다. 이제는,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새롭게 모색해야 할 기회가 아닌가. 대한민국은 지난 60여 년간 놀라운 경제적, 정치적 변화와 성장을 이루었다. 그랬음에도, 지난 두해 반동안 우리는 정치적 리더십의 실패와 사회적 신뢰의 붕괴를 목격했다. 우리 국민뿐 아니라 세계는 이 나라의 파행을 목도하면서 상당한 혼돈을 경험했으며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의아하게 여겼다. 지도층의 부패와 무능, 거듭되는 거짓말과 권력남용은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권 전반에 대한 회의를 품게 만들었다. 놀랍게도 공정과 정의를 내세웠던 정치인이 이를 배신했을 때 느끼는 상실감과 패배감은 국민의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안겼다. 우리는 흐르는 역사로부터 배워야 한다. 교훈을 건져올려 새로운 출발점을 마련해야 한다.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멈춰 있을 수 없으며 미래세대를 위해 우리 사회의 의식구조와 공적관념을 전면적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 정치권력의 기본은 국민의 신뢰가 아닌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투명성과 책임성을 회복해야 한다. 법치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세워야 한다. 공정한 사법 시스템과 권력의 견제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 지난 동안 우리는 극단적 대립과 분열로 인해 상처를 입었다.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공동체 의식을 복원하고, 사회적 대화를 활성화해야 한다. 소외된 계층과 낙후된 지역을 배려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불평등 해소를 위한 사회안전망을 강화하고, 경제 성장의 혜택이 공정하게 분배되도록 해야 한다. 사회적 연대의 소중함을 더욱 강화해야 하고 경제적 양극화를 극복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급격한 기술변화와 위협적인 환경위기로 기존의 경제모델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 지속가능성을 핵심으로 삼아 새로운 성장동력을 모색해야 한다. 재생에너지와 첨단기술 산업에 주목하고 투자하며 청년과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경제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국가의 미래는 교육에 달려 있다.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장려하는 교육시스템을 통해 새로운 세대가 국제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며 한국의 전통과 현대성을 융합하는 방식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우리 국민은 위기를 겪을 때마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었다. 나라가 직면한 문제가 작지 않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의지와 역량을 가진 국민이 있다는 점에서 안심이 된다. 대한민국이 나아갈 방향은 더 이상 과거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세대와 세계적 흐름을 고려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모두가 공감하는 공정한 원칙 위에서 투명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2025-01-15

어둠에서 희망을

장규열 고문 시국이 캄캄하다. 밤이 깊어 앞이 안 보인다. 대통령이 직무정지된 상황에서 나라가 길을 잃었다. 할 일은 태산인데 국가가 표류하는 중이다. 국민의 불안과 좌절이 커져가는 이때, 어디에서 길을 찾고 무엇을 바라보아야 할 터인지 혼돈스럽다. 새해를 맞이하며 여느 때 같았으면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차야 할 시기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희망은 멀리만 느껴지고 불확실과 두려움이 모두를 짓누르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위기의 순간은 새 도약의 기회가 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희망의 불씨를 되살리고 나아갈 방향을 재정비하는 일이 아닐까. 누구보다 정치와 언론이 태도와 자세를 바꾸어야 한다. 국민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념과 당략에 얽매여 갈등과 반목만 반복할 때가 아니라, 국민의 삶을 회복시키고 안정된 일상을 찾도록 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서로 다른 의견과 가치를 존중하며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 위기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국민이 지도자를 잘못 선택한 실수에서 비롯하였다. 실수를 인정하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뿐 아니라 캐나다와 미국,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 지도자의 성향이 문제로 나타난 일이 바람직하지는 않아도 없는 일은 아니다. 과거를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되짚어보며,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냉철하게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나라의 경쟁력을 지키고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변화와 혁신이 필요하다. 현상만 유지해서는 더 이상 미래를 기약할 수가 없다. 경제, 교육, 환경, 외교,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국민이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리더십을 새롭게 세워야 하고 모든 정책이 국민 일상의 질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희망은 위기 속에서 빛을 발한다.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스스로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이자 원동력이다. 새해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다. 지금이야말로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다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때가 아닌가. 사욕과 당리당략을 버리고 국민과 함께하는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를 만들어내야 한다. 최근 작고한 지미카터(Jimmy Carter) 전 미국대통령이‘우리는 그냥 마구 섞인 잡탕밥(melting pot)이 아니라 아름다운 모자이크(beautiful masaic)를 만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 다른 생각, 다른 희망, 다른 꿈이 멋지게 어우러지는 사회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더 나은 미래는 서로 다른 성향을 인정하고 함께 공존하는 신뢰와 공감의 공동체를 세울 때 비로소 가능하다. 밤이 깊어도 새벽은 온다. 짙은 밤하늘에 별빛이 두드러지듯, 어둠 가운데 희망을 발견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어지러운 혼란과 복잡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희망과 기대로 넘치는 내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이 역사 가운데 증명했듯이, 오늘의 어둠이 내일의 광채로 살아 나기를 기대한다. 역시 희망이 화두다. 어둠에서 기어이 희망을 들어올려야 한다.

2025-01-08

을사년은 포근하게

장규열 고문 뱀의 해, 2025년이 밝았다. 새해를 맞으며 모두 희망과 기대를 품는다. 지난 한 해, 나라 곳곳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만큼 을사년에는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는 마음이 한 가득이다. 2024년 내내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 단어가 있다, ‘국민’. ‘국민’은 늘 사용하면서도 그 깊이와 의미를 자주 놓치는 낱말이다. ‘국민’이라는 단어는 근대 국가의 형성과 함께 등장한 개념으로, 서구에서 발전한 국민국가 모델이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일제의 강압 속에서 독립과 자주를 외쳤던 3·1 운동에서 두드러졌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설립 과정에서 ‘국민’은 단순한 주민이 아니라 주권의식을 가진 정치적 주체로 정체성이 빛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은 국민의 주권을 분명히 한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4·19와 5·18을 거치면서 보다 든든해 졌으며 촛불혁명으로 더욱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정치가 ‘국민’을 대하는 태도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 체제를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국민의 목소리가 왜곡되거나 소수의 이해관계에 의해 침해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치인들이 선거철마다 ‘국민’을 외치지만, 정작 권력을 잡고 나서는 그 국민의 삶을 외면하는 모습은 오늘까지 이어진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는 ‘국민’이라는 단어가 정치적 수사로 변질되는 사례를 누차 목격했다.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국민’은 때로는 편가르기의 도구로, 때로는 지지층 결집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급기야 국민 스스로 정치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만들었으며, 사회적 단합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국민이 국민에게 배반당한 꼴이 아니었을까. 국민이 스스로를 바라보는 태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국민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며 생업을 이어가고 가족을 부양하며 사회를 이루어간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나타난 갈등과 분열은 국민 개인 간의 신뢰마저 약화시키는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지역, 성별, 세대, 이념의 차이가 깊어질수록 ‘국민’이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연대와 공동체 의식은 희미해져 간다. 2025년 새해에는 국민이 서로에 대한 신뢰와 연대를 회복하는 노력이 절실하게 기대된다. 정치와 언론이 꾸며낸 프레임 속에 자신을 가두기보다는 이웃과의 대화를 통해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국민’이라는 단어가 지닌 진정한 힘은 개인의 삶을 넘어 서로를 연결하고 더 나은 사회공동체를 만드는 데 있지 않을까. 새해에는 정치가 진정으로 국민을 모든 생각의 중심에 두었으면 한다. 정치적 논쟁은 치열할수록 좋다. 논쟁의 중심에 항상 국민의 삶과 미래가 자리 잡아야 한다. 120년 전 을사년을 기억한다. 국치 한일합방의 슬픈 역사를 기록했던 기억이 을사년에 있어 ‘을씨년스럽다’ 하였다. 올해 을사년은 국민이 국민을 보듬고 정치가 국민을 헤아리는 ‘포근한’ 을사년이 되었으면 한다.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