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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평생 배운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사람은 언제까지 배워야 하는 것일까. 여지껏 우리는 대개 만 6세에 시작하여 16년 내외의 교육과정을 거치며 어른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 초-중-고-대로 이어지는 교육모델은 충분한 것일까. 돌이켜 보면, 이 모델은 근대적 교육개념이 정리되기 시작했던 초반에 만들어 지고 각국의 사정에 따라 정착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구한말 교육개혁을 시도했던 이래 일제를 거쳐 해방 후 1951년에 이 같은 학제가 교육당국에 의해 정책적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여러 논의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 기본골격은 바뀌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오늘 대학을 나오는 청년들은 어떤 미래를 기대하고 있을까. 그들이 획득한 학사학위는 그들의 삶에 어떤 약속을 해 주는 것일까. 20대 초중반에 교육을 마친 젊은이는 그가 앞으로 살아갈 60년 정도의 삶에 대하여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무엇인가 더 배워야 할 필요가 혹 있지는 않을까. 여러 가닥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빌 게이츠는 그의 책 `The Road Ahead(미래로 가는 길)`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투자는 바로 `교육`이라고 정리하면서, 교육의 목표를 `학위를 받는 것으로부터 평생 배우는 일(Lifelong Learning)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유네스코(UNESCO)는 통합적 평생교육을 21세기 교육의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고, 산하에 평생교육원(UIL)을 두어 성인 교육에 방점을 둔 국제적 활동을 펼치고 있다.독일의 모든 시민들은 이미 평생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다양한 교육적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미국은 지역의 커뮤니티 칼리지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교육의 기회를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중국은 `정교한 평생교육제도의 구축`을 주요 교육정책 목표로 하여 국민 모두에 의한 평생교육을 구현하려 애쓰고 있다.우리는 어찌 하고 있는가. 지역에는 평생교육을 지원할 어떤 자원들이 있는가. 평생교육은 이제 정부 교육당국에만 의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지역의 의미있는 평생교육 시스템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지역의 대학들이 나서야 한다. 이 나라에서 지역 대학들이 해야 할 일들이 여러 갈래일 터이지만, 지역의 평생교육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관으로 이들을 꼽고 싶다. `지역협력`이라는 듣기 좋은 슬로건을 대학이 가장 슬기롭게 구현할 방법도 평생교육에 있는 것이다. 대학이 언제까지 지역에 존재하되 수도권만 바라보며 지낼 것인가. 지역 사회와 함께 호흡하고 서로 도우며 더불어 발전을 도모하는 길은 지역에서 평생교육의 지평을 열고 적극적으로 지역 시민들의 미래를 펼쳐갈 때에 가능할 것이다. 인구절벽 현상으로 대학 신입생의 숫자도 가공할 만큼 줄어들고 있지 않은가. 이제 지역의 대학이 스스로의 경쟁력을 다시 쌓아 올린다는 의미에서도 평생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인 것이다.지역의 시민들이 평생 배우는 일을 돕고, 지역에서 대학의 존재 이유를 다시 발견하며, 지역 사회와 공존의 모델을 만들어 가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하겠다. 그동안 어딘가 `이방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지역의 대학들이 이제는 적극적으로 지역의 발전에 기여하며 함께 성장해 가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낼 열쇠는 `평생학습`에 있다.혹, 기존 대학교육이 가졌던 전문성 교육에 손상을 입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겠지만, 균형과 조율의 묘를 한껏 발휘하여 대학발전모델 창출에 오히려 덕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대학이 살고 지역도 일어나는 전환점이 보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평생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은 언제까지 20대 청년들만 가르칠 것인가. 지역의 당신은 이제 그만 배울 것인가.

2017-03-23

오른쪽, 왼쪽의 문제인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새해가 되어 무엇인가 새로움을 기대하였지만 정작 새해 첫 날 아침을 맞고 보면, 어제와 똑같은 그렇고 그런 날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적에 우리는 모두 허망하였다. 지난 주 우리에게 다가온 탄핵 소식은 그간의 기대와 바람을 얼마나 채워 주고 있는가. 이것이 그저 정치인들에게나 새로운 구도와 기대를 안겨 주는 것은 혹시 아닐까.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이 나라의 새로운 모습이 실제로 우리들 눈 앞에 펼쳐질 것인가.우리는 생각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이 나라가 풍요롭고 자유로운 땅이 되길 원한다. 어느 누구도 부당하게 차별받지 않고 모두가 함께 부지런히 살아가면서 행복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응분의 소득이 돌아가고, 소비와 투자가 모두 적절하게 이루어져서 이 나라가 나날이 발전해 가는 모습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가을 어느날 나누어진 소식은 이 나라의 돌아가는 모습이 그 같은 기대를 무참히도 배신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민들은 이 나라가 다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으로 태어나길 겨울 내내 소망하였던 것이다. `이게 나라냐`는 소리도 그래서 했을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오른쪽과 왼쪽의 문제란 말인가.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이 사회가 공평하고 공정하게 나아가는 일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아닌가.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이 읽어내려 질 적에, 우리는 물론 그 결론 즉 주문의 향배에 초미의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 결론 한 소절에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우리는 결정문의 나머지 내용들에 그리 눈길을 주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찬찬히 다시 들여다 본 결정문의 마지막 한 문장은 놀라운 하나의 선언을 담고 있었다. `이 사건 탄핵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과연, 그렇지 아니한가. 얼마나 기다렸던 목소리인가. 비록, 판결문 끝자락에 한 재판관의 보충의견으로 적히긴 하였지만, 필자는 이 한 줄의 의미를 깊이 새겼으면 한다.우리들의 생각이 과연, 보수가 다르고 진보가 다를 소망이었다는 말인가. 길거리에서 언제 우리가 심각한 우와 좌의 다툼을 만난다는 말인가. 하루하루의 삶을 성실하게 꾸려가며 일상의 행복을 따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지금 이 나라가 가진 문제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각자의 자리를 편안하게 지키며 삶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혹, 정치인들이 본인들의 영달을 꿈꾸며 몰아가는 `이념의 과잉`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편을 갈라 표를 더 얻으려 하는지 모르지만, 편이 갈려 행복할 국민은 이 땅에 없다.새 날이 오기도 하였지만 또 잘못 하면 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통 사람들이 또한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역사는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목격하지 않았는가. 정치인들을 포함한 이 나라의 리더들이 맡겨진 권한을 국민들의 기대에 맞게 사용하는지 끊임없이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들 자신은 스스로 바라던 바를 지켜내고 있는지 살펴볼 일인 것이다. 사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한결같음과 부지런함이 없이 성공한 혁명은 없을 터이다.새해 아침에 느꼈던 그 허망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진정 새로운 무엇을 원한다면 진지함과 수고로움을 부어 미래를 앞당기는 수밖에 없음을 이미 알고 있지 아니한가. 이는 실로,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내 나라로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성숙함으로 만들어 내고 지켜내야 하는 새로움이며 자존감인 것이다.

2017-03-16

`소통`을 어찌할 것인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나라의 안과 밖이 모두 불편하다. 병이 깊은 환자인 양, 떨치고 일어서기까지 꽤 오래 걸리지 싶다. 탄핵 정국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처입은 시민들의 마음은 이후에라도 어떻게 보듬고 세울 것인가. 큰 나라들 사이와 남과 북의 긴장 가운데 힘없이 던져진 국민들은 어느 켠이 맞는 지 가늠조차 버겁다. 하루하루의 삶마저 녹록지 않은 처지인데, 도무지 갈피를 못 잡는 나라의 모습에 들려오는 소식들마다 가슴이 철렁거린다.한 가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부분이 있다. `소통`의 가능성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는 누구도 뉴스를 만들어 전달하는 일을 독차지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뉴스를 접하고 소비하는 시민들의 삶이 참으로 많이 바뀌었다. 15세기 활자술과 종이의 발명이 소통의 역사를 획기적으로 바꾸었겠지만, 20세기에 인류가 만난 컴퓨터와 디지털 기술은 그 소통의 가능성을 모든 사람에게까지 열어 주었다. 디지털 이전의 세상에도 소통의 기술이 존재했지만, 그 역할은 사실 언론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위임된 상태로 진행되었다. 힘과 돈, 조직과 능력을 가진 이들이 독과점식으로 꾸려온 소통이 완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디지털 세계는 그들 뿐 아니라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소통`의 도구들이 주어졌으며 그 주체가 될 수 있게 하였다. 이름하여, `소통의 혁명`이 벌어진 것이다.이 같은 기술의 발전과 소통의 확장이 오늘 우리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변화된 환경에서 어쩔 수 없는 세대 차이는 다소 있겠으나, 이제는 모든 사람이 디지털 환경에서 핸드폰과 SNS를 어려움 없이 누리게 되었다. `정보의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누구라도 그 정보를 조작하거나 독점하는 일이 앞으로는 쉽지 않을 모양이다.개인의 습관 속에 이미 깊숙이 들어와 버린 디지털환경은 곧이어 오늘날 기업환경과 경제환경을 바꾸어 버렸고, 법과 제도도 바꾸어 가고 있는 중이다. 네이버와 구글, 그리고 페이스북과 카카오톡은 오늘 세대의 기본적인 생활여건이 되지 않았는가. 기술이 사람들을 바꾸고, 그 사람들과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기업들이 바뀐 다음에, 법과 제도가 응답하듯 바뀌어 간다. 교육과 문화, 미디어도 허겁지겁 변화의 물결을 맞이하고 있다. 앨빈 토플러가 예견하였던 `지식의 혁명`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도래한 모양이다.오늘 우리의 모습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이 같은 흐름을 잘 읽어 내고 있는가. 이미 가져버린 습관이 시사하는 바와는 다르게, `소통`을 과장이나 은폐, 조작이나 독점, 눈가림이나 부풀림으로 이해하고나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할 일이다.시대는 이미 돌아가지 못할 강을 건너와 버렸다. 서양 속담이 `Honesty is the best policy.`라고 했던가. 오늘처럼 어려운 때일수록 정직성과 진정성으로 소통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소통혁명은 한 톨의 거짓도 허용하지 않는다. 보는 눈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읽어 내리는 양심들이 도처에 번득인다. 당신의 거짓과 위선은 설 자리를 이미 잃었다. 당신의 진정한 시도는 이제 빛을 발할 것이다.탄핵도 지나가고 사드도 흘러간 자리에 우리에게 남을 것은 수많은 개인들과 그 모든 개인들의 눈과 귀일 것이다. 보다 투명하고 보다 진정어린 `소통`만 남아 사람들 사이 사이를 채워 줄 터이다. 구부려 알려진 일들이 반듯해 질 것이며, 부풀려 전해진 것들이 제 자리를 잡을 것이다. 혹 당신이 이를 아직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면, 이제라도 당신의 손 위에 들려있을 핸드폰을 내려다 볼 일이다. 당신을 속일 수 있을까?기술로 다가온 `소통의 혁명`이 뜻 밖에도 `민주주의의 꿈`을 당겨주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2017-03-09

새 봄에 바란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언제 벌써 삼월이다. 이즈음 학교마다 새 학기가 열리고, 새 봄이 움터 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움추렸던 겨울 나라로부터 어깨를 펴고 이제는 따사로운 봄을 맞을 채비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봄들은 기다려 진다.왜 특히 올해 봄은 더 기다려 지는가. 지난 겨울, 우리 모두를 유난히 어두운 생각으로 몰아 세웠던 사건들로부터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그들이 누구였든, 우리를 힘들게 하였던 이들의 모든 그늘로부터 헤어나야 한다. 시민들의 마음을 묶어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우선 해 낼 일이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내는 일도 모두의 생각을 아우르며 이루어 내야 한다. 하지만 삼월의 아침 거리에 펄럭이는 태극기마저 왠지 낯설어 보이는 것은 누구의 탓이란 말인가? 들려오는 소식들로부터 이제는 희망을 떠올려야 하고 용기를 건져 내어야 한다.자연의 봄이야 섭리에 따라 저절로 우리에게 다가 오기에,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희망의 봄과 용기의 계절은 그렇게 저절로는 오지 않을 모양이다. 생각을 모야야 하고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서로 열심히 소통하고 날마다 부추겨야 할 일이다. 사람마다 다른 생각들이 마음껏 펼쳐져야 한다. 다른 생각들을 막지 말 일이며,오히려 반겨야 한다. 펼쳐진 생각들이 하나같이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나눈 생각들을 모으고 모아 지혜로 걸러낼 일이다. 오늘의 꿈을 내일의 길로 만들어야 한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이 되어, 나누기도 하고 모으기도 할 일이다. 이를, 우리는 민주주의라 부른다. 시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그동안 우리는 어찌 하였는가. 누군가에게 이 나라를 맡기고 살지 아니 하였는가. 근거도 없이, 그들이 당연히 좋은 길로 이끌어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었는가. 살아가는 일상마저 그들의 결정에 넋놓고 손놓고 지내지 않았던가. 나보다 잘난 사람들이라 믿어 중요한 일들을 나몰라라 하지 않았던가. 뽑을 때만 굽신거린다고 투덜대면서도, 그 언제 그들의 다짐을 확인하였는지 별반 기억이 없다. 앞으로도 높은 기대를 가지고 뽑기야 하겠지만, 하는 일마다 매서운 눈으로 함께 살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주인이 주인되는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한다.돌아보는 마음이 있다면, 내다보는 시선도 있을 일이다. 2017년의 봄은 참으로 새로운 봄으로 만들어야 한다. 소중한 어린이들에게 더는 부끄럽지 않아야 하며, 이 땅의 젊은이들이 희망을 품고 일어 서도록 도와야 한다. 98년 전 오늘, 태극기를 들었던 그들의 마음은 분명 다음 세대를 품었을 것이다. 이 땅의 청년들에게 더는 부끄러운 나라를 물려주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가득했을 것이다.다음 세대가 자라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 오늘 버젓이 내 나라이면서 이처럼 부끄러웠던 기억을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는 없다. 다음 세대가 마음껏 꿈꾸는 나라가 되고 청년이 활기차게 숨쉬는 나라가 되어 앞날이 끝없이 기대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2017년의 봄에는, 새 나라를 꿈꾸기로 하자. 마침 21세기는 `디지털 소통`의 시대,가 아닌가. 주저함없이 망설임없이 각자의 생각을 나누고 나누어 희망과 용기의 새 날을 앞당겨 보자. 거침없는 생각의 바다는 풍요로운 미래를 앞당길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가져다 주는 세상은 이제는 없다. 우리가 만드는 세상으로 바꾸어 보자. 그리하여, 민주주의의 본래 꿈을 되찾기로 하자.새 날을 이끌어 갈 사람들도 이제는 오만과 아집의 허울을 벗어야 한다. 당신을 믿어 맡겨줄 시민들의 소망과 기대를 날마다 새겨야 한다. 당신 때문에 상처 입을 시민이 이제는 없을 터이다. 어제의 옹졸한 리더십은 설 자리가 없다. 드넓은 생각의 바다를 한없이 품는 리더들이 되어 21세기의 새로움을 실천하시라.이미 다가온 봄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 돌아보아 자랑스러운 오늘이 되게 할 일이다.

2017-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