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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메멘토모리

장규열 한동대 교수큰 별이 졌다. 한동대학교 초대총장이었던 김영길 박사가 돌아가셨다. 불꽃같이 걸어온 발자취를 뒤로 하고, 수많은 제자들과 동지들에게 안타까움을 남기면서 이 땅에서의 소중하고 값진 삶을 마감하였다. 수다한 고난과 역경을 지치지 않는 믿음과 소망으로 뛰어넘으면서, 대학을 세우고 제자를 길러내었다. 대학이 지역과 나라, 그리고 세상을 향하여 든든한 자리를 잡도록 만들었을 뿐 아니라, 나라의 대학교육이 보다 높은 지표를 향하도록 그 길을 닦아 놓았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제자들을 향하여 ‘배워서 남주라’고 때마다 강조하였다. 가르치는 일이 ‘세상을 바꾸는 일’임을 몸으로 보여 주었으며, 배우는 일이 ‘Why not change the world?’를 지향하도록 북돋웠다.그를 보내는 자리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제자들과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그가 바꾸어 내라고 가르쳤던 그 세상에서 오늘도 땀흘려 일하다가, 그가 떠나셨다는 소식에는 세상이 무너져 내린 마음이 되어 모여 들었다. 그가 가르친 대로, 나 하나 잘 살기 위하여 살 것이 아니라 병들고 힘든 세상을 바꾸고 구하기 위하여 살아낼 것을 다짐하면서 스승을 보내드렸다. 생각을 같이 하였던 동지들과 교수들은 대학을 열면서 함께 하였던 다짐을 새롭게 하면서 그를 보내드렸다. 황량한 벌판에 학교를 세우면서 바르게 가르쳐 세상을 바꾸리라는 그 날의 각오를 그를 보내면서 다시 세웠다. 또 하나의 대학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대학’을 일으킨다는 그 처음 생각을 그의 영정을 마주하며 일깨우고 있었다.높은 뜻을 세우고 실천하였을 뿐 아니라, 그는 더할 나위없이 따뜻한 스승이었다. 시험 때면, 몰래 도서관을 돌며 학생들의 힘든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어려운 학생들의 이야기를 낱낱이 들어주며 손을 붙들고 기도하여 주었다. 학생들과 만나는 일을 가장 즐기는 총장이었으며 학생들의 하루하루가 늘 안타까운 선생이었다. 병든 세상을 향한 관심이 깊었던 만큼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세심함도 한 가득이었다. 누구보다 우수한 과학자였지만 마음에는 역사와 사회 걱정을 담고 살았다. 지역과 끊임없이 함께 호흡하고자 하였으며 세계의 맥박도 놓치지 않았다. 유엔과 유네스코 등 국제기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글로벌교육’의 새 지평을 열었다. 경쟁에 몰두해 있는 대학들 간에도 협력과 연합을 강조하여 함께 만들어 가는 대학교육을 꿈꾸기도 하였다.‘메멘토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이 생각은 누구나 죽을 운명임을 명심하고 살아야 함을 이야기했을 터.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살아가는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지, 어떤 의미를 남길 것인지, 무엇을 뒤로 하고 사라질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인생을 꽉 채워 산 사람은 언제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가신 어른 만큼 평생을 꾹꾹 채우며 살아낼 수 있을까. 당신은 오늘을 충분히 채우며 살아가고 있는가. 죽음을 기억하라는 저 생각과 함께 오늘을 채우며 살아가라는 지혜를 담은 ‘카르페디엠(Carpe Diem).’ 이 순간을 잡아라, 즉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인 바, 메멘토모리와 카르페디엠을 묶으면 죽음이 찾아올 것임을 잊지 말고 오늘을 채우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인 아닌가. 작가 오그만디노(Og Mandino)는 ‘영원히 살 것처럼 일하고, 오늘 죽을 것처럼 살라’고 하였다. 즉, 최선을 던지며 일하되 마음을 다하여 살아낼 것을 권한 게 아닌가. 한동대는 복받은 학교다. 저렇듯 뛰어난 지도자가 이끌었으며 그 뜻을 또 선명히 남기었으니, 앞으로도 무궁한 가능성을 담고 있을 터이다. 남기신 의미를 교육에 담아 세상을 바꾸어 내는 모두가 되길 기대해본다.

2019-07-03

당신의 자리

장규열 한동대 교수69년 전 오늘, 대한민국은 꺼져가는 호롱불이었다. 북의 기습남침이 개시된 지 이틀 만에 대통령은 이렇게 방송하였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 거짓말이었다. 이를 듣고 안심한 피난민들이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대통령과 각료들은 이미 서울 이남으로 피신한 후였던 데다, 한강 다리마저 폭격으로 끊어진 서울에는 시민들이 독 안의 쥐가 되어 이후 힘든 석 달을 지냈다고 한다. ‘대통령은 자신의 자리를 그렇게 버려야 했을까?’떠올리고 싶지 않은 또 한 자락 기억이 있다. 사백도 훨씬 넘는 승객들을 태운 배가 기울어 침몰하고 있는 가운데, 속옷 바람으로 탈출하는 선장의 모습을 담았던 영상. 많은 승객들이 구조되지 못하고 스러져 간 세월호 침몰사고와 관련하여 수다한 문제와 어려움이 제기되었지만, 필자를 가장 힘들게 한 질문에는 아직도 그 답을 듣지 못하였다. ‘선장은 자신의 위치를 그렇게 버려야 했는가?’ 선장에게는 ‘여객의 승선이 개시될 때부터 여객의 하선이 완료될 때까지 그 선박에서 떠나지 못한다’는 재선의무가 있고, ‘급박한 위험이 닥치면 구조에 필요한 수단을 다하여야 한다’는 조치의무가 있다. 공직을 맡은 모든 이들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할 의무와 함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수고해야 할 책임이 있다.국회는 노는 중인가. 한껏 기대하며 표를 모아 국회로 보냈더니 우리를 대신하여 국사를 맡은 이들이 국회에 없다. 학생들에게 제 자리가 교실이며 회사원들에게 사무실이 제 자리이듯이 국회의원에게는 국회가 자신의 자리가 아닌가. 수다하게 많은 나라의 법과 제도, 그리고 하나같이 어려운 과제들에 열심히 지혜를 모아서 만들고 풀어내라며 국민이 쉽지 않은 표심을 보태어 보내준 자리가 아닌가. 포항 지진과 속초 산불로 거처가 무너지고 생계가 위태롭다는데, 당신들은 당연히 있어야 할 그 자리를 그냥 저렇게 비워둘 심산인가. 경제가 어렵고 사회는 병이 깊은데 당신들은 고작 다음 공천에나 관심을 두고 오늘 나랏일은 뒷전이란 말인가. 투쟁을 하든 논의를 하든, 당신의 소중한 그 자리 국회로 돌아가 실력과 기량을 발휘해 주시라.사회학자이며 정치평론가인 스토크스 (DaShanne Stokes)는 ‘국민의 어려움을 돕지 않는 지도자는 국민이 퇴출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국회의원이 혹 권력에 취하여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해야 할 책임을 방기한다면 국민에게는 당연히 당신을 물러가게 해야 할 또 다른 책임이 있다. 미국 대통령이었던 레이건(Ronald Reagan)은 ‘(국회)의원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그들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국민이 어렵다.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돌아보아 주시라. 당신들이 마음쓰는 명분과 실리도 국민을 생각하면 답이 보인다. 국민을 위하는 명분 말고 당신에게 더 어울리는 명분이 어디 있는가. 국민이 행복해지는 실리 외에 당신은 또 다른 어떤 실리를 꾀하는가.나라를 경영하는 대통령의 자리도, 여객선을 운항하는 선장의 자리도, 국민의 뜻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의 자리도 모두 있어야 할 오늘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섬길 때 빛이 나는 법이다. 나는 오늘 내가 있어야 할 그 자리를 분명히 지키고 있는가. 내가 섬겨야 할 책임과 의무에 충실하게 복무하는가. 내일을 향한 꿈도 오늘 꾸어야 하겠지만, ‘당신의 자리’에서 오늘 기울이는 섬김과 성취가 그 내일도 열어줄 터이다.

2019-06-26

그만들 좀 하십시다

장규열한동대 교수놀라운 일이다. 어느 틈에 세계수준에 가 있는 한국인들이 있다. 손흥민과 이강인 선수가 그렇고 류현진 투수는 물론 BTS 일곱 청년들이 그렇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전에도 한국인들은 문화와 예술, 그리고 스포츠 분야에서는 이미 빼어난 기량을 표출해 왔다. 비디오아트 백남준은 앞선 감각으로 미술의 판을 흔들었으며,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 남매는 클래식 음악계를 한동안 쥐락펴락하였다. 분데스리가는 차범근 선수의 흔적을 기억하며 박지성 선수의 후광도 눈이 부시다. 김연아, 박찬호, 황영조, 조수미, 싸이 등을 거쳐 박찬욱과 봉준호 감독에 이르러 만개하고 있다. 반면, 우리 사회와 정치는 1990년대 초 구소련의 붕괴와 함께 저물어 간 이념의 잣대에 아직도 서슬이 퍼렇다. 왜 그러는 것일까? 정치와 사회도 문화나 예술처럼 변화와 발전을 보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수와 진보 또는 우와 좌로 갈라서 대결을 벌이던 이념의 분단 현상은 사실상 지구상에서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그리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지난 세기 냉전의 소용돌이만큼 첨예하게 대치하는 일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우리에게 그럴 까닭이 있다면,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분단의 현실이 아프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오천 년을 함께 살았고 (겨우) 칠십 년을 나뉘어 살았다는 대통령의 표현이 있었지만, 그 칠십 년 단절의 세월이 이처럼 뛰어넘기 힘든 철벽을 가져다주지 않았는가. 분단의 벽을 우리가 넘을 수 있을 것인지는 우리가 이를 넘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살피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우리는 정녕 분단을 해소하고 싶은 것일까? 닳아버린 표현, ‘통일’은 아직도 우리에게 소원이 맞는가? 질문은 각자에게 가능하다. 나는 통일을 바라고 있는가. 남과 북은 하나가 되어야 하는가.등 돌린 사람들이 다시 함께 하려면, 아무리 힘들어도 만나야 한다. 어색하고 거북하며 비위가 틀려고 셈법이 맞지 않아도, 꾸준히 만나 겨루고 맞추며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끝내 밀어붙여 이루어내기가 어렵고 힘들기는 운동과 음악, 미술과 문화에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가무에 능한 민족이어서 그런 분야에 일가를 이루어 왔다면, 21세기에는 소통과 화합에도 새 역사를 써 내릴 수 없을까. 예술과 문화가 주로 ‘개인’의 기량에 달린 일이었다면, 이제는 ‘집단’으로 민족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함께 모으는 기량을 발휘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나라와 백성을 위해 일한다면서, 정치인들은 명분과 실리를 따진다고 한다. 포항지진으로 집을 잃은 백성은 아직도 천막에 머문 지가 550일이 훌쩍 넘겼다. 속초를 산불이 매섭게 쓸고 간 기억도 계절을 넘긴다. 어려운 경제는 날이 갈수록 국민의 삶을 어렵게 한다. 이제 그쯤 했으면 함께 할 명분도 서로 만들어 주고 각 당의 실리도 적절히 챙길 만하지 않은가. 남북이 만나야 하듯이 당신들도 나라를 위하여 만나야 한다. 국민이 당신들을, ‘나라야 산으로 가도 철밥통 지키며 싸움만 하는 이상한 사람들’로 보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는 계시는가.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남북도 만나야 하고 여야도 만나야 한다. 해결의 가닥은 만나야 잡힌다.운동선수가 훈련에 땀을 흘리고 예술가가 혼을 불사르며 최고의 작품에 도전하듯이, 이제는 우리 정치가 걸작을 낳아주기 바랄 뿐이다. 이 땅의 백성이 가무에만 능하겠는가. 편 가르기와 패거리 정치에 능했던 만큼, 바른 정치와 선한 펼침에 몰두해 주시라. 믿고 맡긴 국민이 옛날과는 다르다. 당신의 모습에 진정이 실려있는지 국민이 알고 있다. 얼른 만나고 당장 섬겨 주시라. 국민은 오늘보다 나은 정치를 만나볼 자격이 있다.

2019-06-19

대학은 어쩌나

장규열 한동대 교수대학이 많다. 급격한 인구 고령화와 함께 저조한 출산율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그 여파는 대학의 위기로 연결되고 있다. 인구 감소에 따라 고등학교 졸업자 숫자가 가파르게 줄어들면서, 2018년부터 이미 대학모집인원에 비해 졸업생 숫자가 적게 되어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대학들이 늘어날 것으로 예견되어 왔다. 최근 국가 교육통계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21년 대학입시에서 대입정원이 고졸자 수를 9만 명이나 초과할 것이라고 한다. 어림잡아 거의 백 개쯤 되는 대학들이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경상북도는 특히 심각하여, 입학정원이 고졸자 숫자의 거의 두 배에 달할 것이라 한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인구감소 현상이야 어찌할 수 없겠지만, 대학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대학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가.우리 정부는 대학을 국가교육체계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아 교육부가 대학의 교육과정과 재정운영에 깊이 관여해 왔다. 대학으로 보면 정부가 간섭도 하고 모니터링도 하지만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으므로 이를 감수하면서 교육에 임해오고 있다. 그러는 사이, 개별 대학의 존재 이유와 독특한 개성들은 사라지고 학문의 전당이어야 하는 대학들이 거의 모두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들이 제각기 특수한 교육이념과 철학, 개성있는 학문적 특성을 살려 가면서 대학마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와 학풍, 전통과 긍지를 만들어 내는 다른 나라의 대학들과는 매우 다른 ‘대학가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추격과 모방’을 기저로 하는 개발모형에는 매우 효율적인 접근이었겠으나, 21세기 ‘창의와 혁신’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 지식정보사회에는 매우 어색한 대학 분위기인 것이다. 정부가 대학을 잊어야 한다. 이제는 손을 떼어야 한다.대학은 어찌해야 하는가. 가장 추운 겨울을 맞을 것으로 기대되는 대학의 미래는 대학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교육, 연구, 봉사 모든 면에서 다 잘 해야 하고 하나같이 평가하는 일률적 대학평가모델을 벗어내고 각자 무엇에 강한 대학이 될 것인지 결정하여야 한다. 교육에 강한 대학과 연구에 튼실한 대학은 분명히 달라야 한다. 지역사회와 호흡하겠다는 대학이 있어야 하고 평생교육에 능수능란한 대학도 만나보고 싶다. 한 가지 잣대로 모든 대학을 바라보는 사회적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대학(大學)이 ‘큰 배움’인 까닭은 총체적으로 볼 때 그만큼 다양하고 풍성한 배움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문사회와 자연이공계, 그리고 예술문화 분야에 각각 튼실하고 강한 대학들이 나와야 하고, 지역마다 그곳의 분위기에 걸맞는 대학들이 일어나야 한다. 정부의 결정에 그 운명이 좌우되는 대학은 대학이 아니다. 대학이 기댈 언덕은 없다.그 같은 변화가 하루아침에는 어려울 터이다. 하지만 정부도 대학도 이제는 변해야 하는 조짐을 읽고 이제라도 과감히 새로운 대학교육의 장을 열어가야 한다. 대학마다 핵심역량에 집중해야 하고 각자의 대학브랜딩(University Branding)에도 나서야 한다. 교육소비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잘 살펴야 하며 어떻게 특화할 것인지도 찾아내어야 한다. 대학마다 느껴지는 품격과 분위기가 달라야 하며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도 모두 달랐으면 한다. 그런 곳을 통과한 젊은이들이 제각기 갈고닦은 식견과 소신으로 미래 사회에서 만날 때에 진정한 겨룸과 속 깊은 나눔으로 우리 사회를 움직여 갈 역동성이 솟아나지 않을까. 획일성은 이제 추구할 가치가 아니다. 다양성의 늪에서 진주를 건져낼 다짐으로 우리 대학을 키워가야 한다. 따로 떼어놓고 보면 모두 다른 듯 하여도, 사회 전체를 놓고 보면 역시 이끌고 움직여 가는 그 ‘한마당’이 대학이 되어야 한다.

2019-06-12

노잼이다 노잼

장규열 한동대 교수외국인들이 한국인들에 대하여 놀라는 한 가닥이 ‘한국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발견이라고 한다. 정치가 보통 사람들을 대신하여 여러 가닥의 리더십을 발휘하고 소통과 연결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국민이 관심을 가지는 일이 자연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에 대하여 높은 수준의 개인적인 흥미를 가지고 집단적인 호기심을 발휘하곤 한다. 선거를 통해 던진 나의 그 한 표가 국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끊임없이 살피는 일은 그 자체로서 소중하다. 뽑힌 이에게 잘 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면, 뽑은 이에겐 부릅뜨고 감시할 책임이 있다. 놀랍다는 외국인에게는 당신 나라 백성에게도 그 책임이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관심과 흥미를 한껏 모은 반면, 정치에 나선 이들이 정작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중학생들에게는 꿈의 직업이 국회의원이란다. 하는 일이 없어서. 호기심을 모아 궁금하다 했더니, 돌아오는 게 끝없는 비난과 막말이라면 국민은 허망하다. 뭐라도 돕는 손길을 발휘하는가 기대했더니, 몇 달 째 논의도 아니 했다면 국민은 허탈하다. ‘경제가 문제’라고 문제를 제기했다더니, 무릎을 맞대고 토론하는 정치인은 본 기억도 아련하다. 평화로 승부한다는 쪽은 ‘우리의 소원’으로 얼마나 다가섰는지 언제 보여 줄 것인가. 지면을 새카맣게 채웠던 뜨거운 뉴스들의 끝자락이 대개 흐지부지 맺는 걸 보는 국민은 ‘혹시했다가 역시가 되는’일에 익숙할 뿐이다. 우리는 왜 맨날 똑같은 모습을 거듭 보면서도 미련인가 습관인가, 정치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까. 정치에는 하염없이 속기만 하는 국민의 처지가 처연하기 이를 데 없다. 얼마나 식상한가 우리 정치는.얼마나 신선한가. 다른 한 켠에는 우와,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마저 ‘다르고 또는 새롭고 싶어하는 몸부림이 있다’고 한다. 무엇을 해도 남들과 다르고 어제와 다르게 하겠다는 일상의 의지가 오늘의 그를 만들어 내었다. 함께 일하는 배우와 스탭을 살피고 챙기는 눈길에도 다르게 보려는 시선이 보이지 않는가. 완전히 다른 배우 송강호에게 진심을 보이며 무릎을 꿇는 그의 모습이 다르지 않은가. 어린 시절 다짐을 끝까지 밀어내어 끝내 저 자리를 차지하고 만 그의 성실과 노력에 저절로 박수가 돌아가지 않는가. 수다한 정치인들 가운데 국민과 국가를 위하여 저만큼의 한결같음을 보여주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아직도 만나보지 못했는지. 그럼에도, 봉감독은 ‘이제 시작이다’고 하였다.이제라도 정말 시작하는 마음으로 국회로 돌아가고 다시 초심을 되새겨 한반도 문제를 풀어내길 바란다. 경제도 어렵고 사회는 어지러우며 문화도 병이 들었다. 어느 틈에 마약에 물들고 성매매로 얼룩진 나라가 되어 가는가. 사정이 이런데도 말꼬리나 잡아가며 서로에게 비난 성명만 일삼는 정치집단은 국민에게 무슨 득이 될 수 있을까. 당신들 끼리 치고받는 말싸움인 줄 눈치챈 국민은 이제 재미가 없다. 노잼이다 노잼! 입으로만 국민을 섬기는 척 하는 그 언사도 이제는 모두 들켜버렸다. 다가올 선거에 던지는 또 한자락 욕심만 보일 뿐, 국민이 어떤 처지인지 당신들은 모른다.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나 계시는가. 세상은 어떻게 변해 가는지 생각이나 하느냐 묻고 싶다. 상상 속에라도 진심으로 나라와 국민을 향하여 일해주길 바란다.봉 감독이 보여 주었듯이, 우리 국민은 뛰어나다. 세상 어디에 내어 놓아 손색이 없을 이 백성을 정치가 쪼그라들게 하는 일은, 보기에도 안타깝고 듣기에도 민망하다. 초심으로 돌아가고 첫 페이지를 다시 새겨 주시라.정치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재미있는 정치를 돌려주시라.

2019-05-29

성공하여 무엇하는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놀랍고 반가운 일이 벌어졌다. 애틀란타의 작은 사립대학 모어하우스칼리지(Morehouse College)에서 졸업축하 연설을 하던 로버트 스미스(Robert F. Smith)가 올해 졸업생들의 학자금대출을 모두 갚아주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를 들은 졸업생들과 교수들은 물론 단상에 앉아있던 총장마저도 처음 듣는 이 경이로운 소식에 놀랄 뿐이었다. 약 400명에 달하는 졸업생들은 이제 졸업하면 거친 사회에 나가 바로 그 대출금을 갚아야 할 처지에 놓였던 터에, 이 소식은 그야말로 크나큰 해방감을 가지게 하였을 것이다. 그가 대신 갚아 줄 대출금은 줄잡아 5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부호라서 후배들을 위하여 선뜻 좋은 뜻을 발휘한 일이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 정도의 후의를 발휘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언론은 그가 거액을 내어놓았다는 점에만 주목하고 있지만, 그 발표 바로 앞뒤에 그가 무엇이라고 하였는지 주목하여 보자. 발표 직전에 그는 ‘졸업생 여러분에게 한 가지 도전하고 싶다’고 하였다. 졸업생들을 위하여 거액을 희사하겠다고 발표할 것이면서, 바로 그 기부행위가 당신들에게 구체적인 도전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도전이었을까. 대출금상환을 위한 기부를 실현하겠다고 말하고 나서, 그는 ‘여러분이 사회에 나가 꼭 같은 일을 다시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던지며 열심히 살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졸업생들은 물론 함성과 함께 박수로 반응하였다.오늘날 대학교육비가 천정부지로 올라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학생들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을 대출금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웠을까. 한 순간에 이를 갚아 주겠다는 선배는 얼마나 감사한 천사였을까. 기부와 함께 선배가 던진 도전의 의미를 그들은 얼마나 무겁게 받았을까.모어하우스칼리지는 미국 인권운동의 상징격인 마틴루터킹(Martin Luther King, Jr.)목사를 배출한 대학이다. 1948년에 졸업한 그가 그 유명한 ‘내게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연설을 통하여 미국흑인 인권역사를 바꿔내기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대학에서 가르친 ‘삶을 함께 나누는’ 기준이었다고 한다.‘모든 이들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신념과 소신을 가지고 노력하되, 그 모든 소득과 이익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실현하며 살아라.’ 졸업식 연설을 맺으며 그는 이 생각을 졸업생들과 함께 다시 힘주어 다짐했을 것이다. 학교와 공동체의 전통이 만들어지고 세대를 타고 흐르는 모습을 세계가 목격한 것이다. 이를 언론이 보도함에 있어 ‘돈의 크기’에만 집중한 것은 사뭇 아쉬운 부분이다.우리는 어떠한가.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에서 오히려 의미있는 기부와 뜻을 새긴 다짐이 일어나고 있는 때에 우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경제와 재정은 돈보다 높은 가치의 발현을 위하여 얼마나 수고하고 있는가. 재력이 소중한 디딤돌이 되어 도처에서 선하고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도록 우리는 가르치고 있는가. 수고와 노력을 기울여 쌓아올린 경제력을 이웃과 사회에 희망이 되도록 후하게 내어놓는 부자들을 더 자주 만나보고 싶다. 욕심으로만 쌓으면 남을 위하여 쓸 준비를 할 겨를이 없을 터이다. 벌기 전에 다짐하는 훈련도 필요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에 충실한 시스템을 신뢰하되, 어려운 이웃이 가진 가능성과 미래를 향한 도전에 믿음과 기회를 제공할 줄도 아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졸업식 연설을 마치면서, 선배 연사는 졸업생들을 모두 일으켜 세우고 서로 포옹할 것을 요청하였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내기 위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살되, 성공의 결실은 반드시 당신이 속한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사람이 되라’고 힘주어 강조하였다. 어떻게 성공할 것인가. 당신의 성공은 누구와 어떻게 나눌 것인가.

2019-05-22

벽(壁), 허물어야 하는

장규열 한동대 교수의사이며 미생물학자인 소크(Jonas Salk)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50년 후에 곤충들이 사라진다면 지구가 멸망할 것이지만, 50년 후에 인간이 사라진다면 지구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하였을까. 인간이 살아가는 이 땅을 살리기 보다 망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아니었을까. 지구와 환경을 망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이 모여 사는 공동체와 사회 구조마저 혼탁과 오염을 거듭하게 하여 황폐하게 만드는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가 망가질 뿐 아니라 함께 살아가지도 못하는 더럽고 누추한 세상을 만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구와 인류에 해가 되기보다 도움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공부는 왜 하는가. 개인이 성공에 이르는 데 물론 힘이 되겠지만 더 배우는 까닭은 배움의 총량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이 아니었을까. 전문가와 학자들은 분야마다 차고 넘치는데, 실질적인 개선과 회복에 어떤 기여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가 ‘존경받는 지성인들은 그저 권력의 이해에만 복무하는 사람들이다’라며 빈정거린 것은 지식인들이 정말로 해야 할 일들을 덜 하고 있다는 따끔한 지적이 아닌가. 개선과 변화, 진보와 혁신에 도움이 될 만한 비판과 제언에 더욱 적극적이어야 함을 꼬집은 것이다. 언론이 문제라는데, 살피며 대안을 이야기하는 학자가 보이지 않는다. 사회가 병들었는데, 몰아세우며 다그치는 전문가는 어디 갔는가. 교회와 사찰이 저 모양인데 신학교와 현인들은 무엇 하는가.전문가 집단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보통 사람들이야 바람에 휘둘릴 밖에. 이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그 소리도 틀리지 않는다. 사회와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온통 혼동스럽고 안개 속이다. 이웃과 대화가 없는가 했더니 이젠 가족과도 소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개인은 보다 똑똑해 졌는가 싶지만 사회는 보이지 않는 벽들로 한 가득이다. 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 세대격차에 함몰된 사람들, 빈부양극에 짓눌린 사람들, 양성차별에 억울한 사람들, 학벌과 지연, 격차와 차별, 혐오와 차단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모두가 서로에게 적이 되어 우리 사회에는 집단적 자폐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월이 가면 나아져야 할 터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수렁에 처박히는 느낌은 어찌해야 하는가.드러나는 생각도 덜 깊어 보이는데, 사용하는 언어마저 저열하고 비속하다. 벽을 허물어야 하는데, 표현이 거칠면 본질에서 멀어져 감정만 상할 뿐이다. 감정이 상하면 이성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가능성은 희박해 질 수 밖에. 저속한 한 마디를 뱉고 돌아서 ‘속이 시원하다’면 국민이 믿고 맡길 공복(公僕)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 동서냉전의 막바지에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부시(George Bush)는 ‘보다 친절하고 보다 부드러운 나라’가 되자고 미국인들에게 제의하였다. 악다구니 끝에 상처투성이가 되면, 이기든 지든 남는 게 없다. 선거철이 되면 똑같은 아귀다툼에 사회는 멍든 질곡을 반복할 뿐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회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잃고 부유(浮遊)할 것이 아닌가.소통이 바뀌어야 한다. 담론의 장이 넓어져야 하며 보통 사람들이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 학자와 전문가들이 토론과 담론을 이끌어 조절과 조정에 나서야 하며, 생각과 의견이 조화롭게 적극 개진되도록 부추겨야 한다. 대화와 나눔이 활발해져야 하며, 사용하는 언어는 절제와 균형을 갖춘 격을 회복하여야 한다. 친절하고 부드러워야 막힘없는 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므로.

2019-05-15

공감백배

장규열 한동대 교수편을 가르기 좋아하는 세상이다. 어쩌면 그렇게 다른 것을 집요하리만치 틀린 것으로 확신하는지 때로는 안타깝기가 도를 넘는다. 오른쪽과 왼쪽은 절대로 섞일 수가 없으며 남성과 여성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국경이 거의 의미가 없어져 간다는 21세기에 한반도 만큼 동과 서가 어울리지 못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어느 작가의 날카로운 눈은 세상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고 하였다. 존재의 가치가 내 생각을 드러나기도 전에 나의 조건으로 이미 판단되기 일쑤인 것이다. 어느 동네에서 났거나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벌써 어느 편인 것이고, 나의 성별은 나의 능력과 상관없이 나의 위치를 대개 결정하고 있다. 그런 부조리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또 웃기는 것일까.편을 가르는 잣대에 무서운 게 또 하나 있다. 나이. 어른에게 청년은 언제나 불안하고 젊은이에게 노인은 늘 어렵다. 끼워주지 못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함께 나누는 기회를 스스로 가로막고 생각을 견주기를 항상 꺼린다. 웬만하면 섞이지 않으려 하고 끼리끼리 서로를 탓하기만 한다. 온갖 사회적 담론도 같은 색깔의 무리들 안에서만 나누고 확인하며 규정하고 성토한다. 그 같은 공론의 장에서 담론은 제자리를 맴돌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벽을 허물지 않고는 다시 세울 방법이 없다. 폭 넓은 아량이 필요하고 속 깊은 배려가 절실하다. 스스로들 세운 벽 속에 갇힌 21세기 한국사회를 구출해야 한다. 이념, 성별, 지역, 나이, 아 그리고 종교. 이들 기준을 모두 동원하면 우리는 또 얼마나 좁디좁은 울타리에 갇힐 것인가.가정의 달 5월에도 가슴아픈 뉴스로 한가득이다. 마침 어린이날 새벽에 생활고에 시달린 젊은 부부가 두 아이들과 생을 마감하였다. 하필 어버이날을 앞두고 부모 앞에서 분신자살을 한 젊은이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다리에서 투신하려던 모녀를 설득 끝에 가까스로 구했다는 소식도 있다. 스승의날과 부부의날을 눈 앞에 두고도 아슬아슬할 뿐.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대립과 갈등, 반목과 질시를 거듭한 나머지 대화와 타협, 화합과 상생을 정말로 망각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어려운 젊은이들의 처지를 듣고 도울 방법이 그렇게 없을까. 힘든 가정들의 상황을 헤아려 세워줄 장치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울타리 밖 남들의 삶을 이해하고 배려할 널푼수를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일까.‘세대공감’ 한 방송프로그램의 이름이지만 세대 간 생각과 해석의 차이를 짚어보고 공감대를 넓혀가려는 의도로 읽힌다. 앞으로 세대 뿐 아니라 지역들 사이에는 다른 느낌들이 어떻게 도사리고 있는지 드러내 보았으면 한다. 같은 주제를 놓고도 혹 남성과 여성 간에는 어떤 다른 생각이 흐르고 있는지 살펴보았으면 한다. 종교들 간에 그리고 신학적 해석들 가운데 존재하는 갈등과 마찰은 무엇 때문일까. 다른 흐름과 느낌을 어떻게 조화롭게 어울리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들 다른 생각과 느낌을 안고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갈 것인가. 반목이 무관심을 키우고 무관심은 자칫 혐오를 일으킨다. 혐오와 무관심은 고립과 절망을 초래할 터이다. 극단적인 선택이 뉴스가 되는 일은 이제 그만 보았으면 한다.함께 나누고 서로 도우며 더불어 고심하면서 마음을 모으는 사회. 고립과 절망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웃을 소통과 대화로 건져 올리는 공동체. 공감하는 나 하나로부터 시작할 일이 아닌가. 남에게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탓은 그만 하여야 한다. 당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내 안의 공감능력을 백배로 끌어올려 이웃과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시라. 5월을 다시 눈부신 계절로 만들기 위하여.

2019-05-08

쓰기혁명

장규열 한동대 교수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인간의 문화와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중세의 암흑시대를 건너오고 있었던 유럽인들에게 아직도 문맹률이 95%에 달하였다. 성경을 비롯한 글로 적힌 문건들은 교회와 권력자들에게만 허용되었을 것이니, 보통 사람들이 글을 대할 필요조차 없었을 터이다. 인쇄술은 이후 르네상스 이성의 시대와 계몽의 새벽을 밝힌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성경이 누구에게나 주어졌으며 종교개혁을 통하여 신의 말씀을 직접 읽고 스스로 해석할 수도 있게 되었다. 데카르트가 인간이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이유를 분명히 했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였다. 읽을 수 있어 알게 되었고 더 알게 되므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생각을 이어 가면서 문명이 눈부신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지구상에 문맹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읽을 줄 안다는 것은 쓸 줄도 안다는 것이 아닌가. 모두 읽지만 모두 쓰지는 않는다. 왜 그랬을까. 까닭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매체 즉 미디어가 사용할 수는 있되 주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을 대신하여 기자, PD, 작가, 감독 등 생각과 이야기, 의견과 생각을 글로 적고 콘텐츠로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인 역량이 출중하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특별한 훈련과 교육, 노력과 경쟁의 산업적 구도와 제약이 있었다. 아무나 기자가 될 수 없고 누구나 언론사 또는 제작사를 경영할 수 없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는 사실상 많지 않은 전문인들이 누리는 ‘언론’의 자유로 대리되었다.세상이 다시 바뀌었다. 디지털의 습격은 상상을 넘는다. 가시적으로 늘어난 정보의 양이 우선 놀랍다. 온라인에 없는 게 없고 모든 게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더 이상 공부와 노력이 필요없어 보인다. 읽을 줄 알지만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읽지도 않는데 쓸 필요는 이제 정말로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누군가 온라인의 바다를 채우고 있기에 저렇게 콘텐츠들이 있을 터이다. 그게 누굴까. 이전의 전문인들 뿐 아니라 이제는 누구나 적을 수 있다. 전할 수 있고 퍼뜨릴 수 있다. 남의 글을 퍼 올리는 게 가능할 뿐 아니라 나의 글을 바로 올릴 수 있다. 세상이 바뀐 또 하나의 대목은 바로 여기가 아닌가. 대신 만족하던 ‘언론의 자유’를 넘어 스스로 충족하는 ‘표현의 자유’가 가능해 졌다. 이를 나는 충분히 사용하고 있는가.위험은 있다. 글쓰기 훈련이 아직 모자라는가도 싶고 무엇부터 적어야 하는지 막막하기도 하다. 혹 지켜야 하는 무엇이 없는가도 궁금하고 아무나 쓰는 일이 적절한가 의문스럽기도 하다. 가짜뉴스의 위험은 이미 보이고, 시민언론의 가능성이 펼쳐지고는 있다. 15세기 인쇄술이 많은 사람을 긴장하게 했듯이, 21세기 디지털문명은 소통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다. 그 시절 더 많이 알게 된 용기있는 사람들이 개혁의 시대를 확장했듯이,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 이야기와 담론의 단초를 드러내어야 한다.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적어내길 기다리는 일은, 빛의 속도로 변화해 가는 오늘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어설프고 어색한 표현과 문장들도 거듭 두드리며 시도하노라면 다듬어 지고 나아질 터이다.인쇄술이 읽기혁명을 가져왔다면 디지털은 쓰기혁명을 당겨주었다. 더 많이 읽는 일이 가능해 졌지만 내 손으로 쓰고 다듬어 세상을 직접 상대하며 소통하는 창문이 넓게 열렸다. 세상과 어떤 글로 나누며 소통할 것인지 오늘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남이 만들어 주는 문명을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이제는 당신이 콘텐츠로 주도하는 세상을 열어주시라. 기회는 당신 손에 있으니.

2019-05-01

책맹

장규열 한동대 교수주식으로 거부가 된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이 성공에 이른 열쇠는 ‘책읽기’였다고 한다. 디지털문명의 한 가운데인 21세기, 거의 모든 정보를 온라인으로 찾아볼 수 있으며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온갖 지식을 검색할 수 있다. 그럼에도 버핏은 ‘의미있는 지식과 뜻깊은 정보는 책을 읽지 않고는 얻어 챙길 방법이 없다’고 고집하며 독서를 통하여 평생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세상과 너끈히 겨루며 싱싱함을 유지하는 비결 또한 책읽기라고 하였다. 하루 500페이지에 달할 정도의 독서량으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섭렵하며 최첨단 정보를 기준으로 최우량 기업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그만의 비법을 유지한다고 한다.양날의 칼. ‘지식정보시대’로 일컫는 오늘. 디지털문명이 안겨준 정보의 총량은 어마어마하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온라인은 정보로 이미 차고 넘친다. 정보의 양이 많기도 하지만 정보가 진화해 가는 속도를 따라잡기도 버거울 판이다. 사이버공간의 ‘초연결사회’는 인간에게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게 하였다.그러나 과연 충분할 것인가. 컴퓨터와 영상모니터에만 심취하고 몰두하는 현대인은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만큼 정보와 지식을 챙기고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이렇게 풍성한 정보습득이 간편해진 세상에 온라인검색만으로 얻지 못하는 정보가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상태를 문맹(Illiteracy)이라 불렀었지만, 디지털시대 현대인은 문맹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름하여 책맹(Aliteracy). 글을 읽을 줄은 물론 알지만 책을 읽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 표현이다.디지털정보와 영상전달에만 의존하는 사이 굳이 책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는 일이야말로 사람을 위험한 상태에 빠뜨리게 된다. 글을 따라 읽으며 자연스럽게 체득하였던 집중력과 판단력의 저하를 초래하여 급기야는 디지털로 정보를 습득하면서도 점점 더 조급해 지고 산만해 지며 인내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그런 결과, 지식듭득과 상관이 없을 평소에도 주의력에 손상이 발생하여 균형있는 인성을 유지하는 일마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디지털중독이 가져오는 책맹현상은 위험하다. 유튜브와 게임과 SNS는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는 하였지만, 그 내용과 시야를 협소하게 하고 축소해 가는 경향성을 지닌다. 디지털의 모든 특장점을 충분히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책읽기를 통하여 개발되는 집중력과 분석력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을 터이다.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Bill Gates)도 소문난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따금씩 좋은 책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알리바바의 마윈(馬雲)은 성공에 이르는 동안에는 몰라도, 그 성공을 유지하려면 독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였다. 빛의 속도로 바뀌어 가는 세상에 간편한 도구인 온라인 접속에 더하여 지루하고 답답하기 할 독서에 몰입하는 일은 비효율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인간의 문명은 독서를 통하여 사고력과 분석력을 진전시키고 통합과 협력을 위한 인성의 개발도 지식을 넘는 지혜로 가득한 책을 읽음으로 구현하여 왔다.지난 세기 초반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아직 문맹이 존재하던 시절에 이미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인터넷과 온라인에 중독된 나머지 인간의 소중한 능력을 잃어버리는 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디지털문명을 더욱 꽃피우게 하기 위하여도 책의 가치를 다시 새겨야 하며, 읽는 일의 수고로움을 지켜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제대로 알기 위하여 읽어야 한다.

2019-04-24

불!

장규열 한동대 교수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대성당이 타고 말았다. 불을 끄고 살펴보니 뼈대는 멀쩡하다지만, 쌓아올렸던 뾰족탑이 쓰러질 때에는 나라와 백성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린 듯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유럽은 물론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도 같은 마음으로 불구경을 하고 말았다. 젊은 대통령이 이를 복원하겠다는 다짐을 발표하고 수다한 후원의 손길을 모은다지만 노트르담이 품었던 그간의 오랜 이야기는 이제 불꽃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다. 하룻밤 꿈처럼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린 그 불길이 전쟁이나 테러의 결과였다면 차라리 덜 아쉬웠을까. 그 모습을 더욱 빛나게 하려고 보수작업을 하던 중에 속절없이 불태워 버렸다고 하니, 이를 가까이서 바라본 파리 시민들은 그 마음이 어땠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릎꿇고 찬송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표하는 모습이 가슴에 와 박힌다.850년 역사라고 한다. 역사의 굴곡과 함께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기억을 담았을까. 프랑스혁명의 그늘을 견뎌 내었으며 2차 대전의 포화도 이겨냈을 터에 최첨단을 달리는 21세에 와서 그 치솟게 세워 올렸던 뾰족 첨탑이 스러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한숨과 탄식의 한순간으로만 기억할 것인가. 일년에 1천3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관광명소이기는 해도 노트르담대성당은 성당 즉 종교성을 가져야 하는 장소이다.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서있던 첨탐이 불길과 함께 스러지는 모습은 오늘 여러 모양으로 믿는 신앙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천국이든 극락이든 구원과 해탈을 기대하며 개인적인 신심을 갈고닦느라 세상과 이웃 그리고 주변과 우리들 곁에 존재하는 힘들고 어려운 모습에 눈을 감는 이들에게 던져진 경고가 혹 아닐까. 필자에게는 개인의 성취와 성공에 심취하여 무한경쟁가도를 달려가는 현대인의 바쁜 일상에 울리는 경종으로도 들린다. 세느강 건너로 불타오르는 노트르담대성당을 바라보면서 닥쳐올 위기를 실제로 만나면 함께 무릎꿇을 수 밖에 없음을 스스로 미리 보여준 일이 아니었을까. 미세먼지, 대기오염, 지구온난화, 핵위험 등 인류가 공유하는 큰 문제들 앞에는 결국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동체가 살아나지 않고는 이들 과제를 극복할 방법이 없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오해와 왜곡을 거듭해 가며 차별과 혐오를 무기삼아 내 편과 네 편을 끊임없이 가르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는 인간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한 자락 불길 앞에도 속절없을 것임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을까.한 가지 신통한 기억은 맹렬한 불길 앞에는 오른쪽과 왼쪽이 따로 보이지 않았다. 시답잖은 시빗거리가 많은 듯 하여도 정말로 중요하고 진실로 급한 일에는 이념이 다 무언가 싶게 떠오르지도 않는다. 이웃과 공동체, 사람과 사회를 정말로 세우고 살리는 일에는 보수도 필요하고 진보도 있어야 한다. 정말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치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배워야 한다. 모두에게 잔인하였던 4월의 기억 앞에 오히려 겸허하게 ‘대한민국 공동체’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깎아내리고 밀어내는 정치 대신에 격려하고 함께 더하는 정치를 만나고 싶다. 실수와 과오를 살펴 반복하지 않게 할 일이며, 성과와 성취는 더욱 살아나도록 부추겨야 할 터이다.밥도 짓고 쇠도 붙이는 불꽃이지만 한 숨 불길은 순간에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열정의 불꽃으로 세워 올리지만 무너뜨리는 불길도 분명히 보았다. 지어 올릴 때에 성실하게 열심히 해야 하지만 소중하게 지키는 일도 만만치 않음을 생생하게 보았다. 개인의 각성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필요와 할 일도 목격하였다. 잘 만들어야 하고 잘 지켜야 한다.

2019-04-17

산불과 지진

장규열 한동대 교수장래 희망이 ‘소방관’이라는 어린이들이 꽤 있다고 한다. 오늘처럼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세상에 거칠고 험한 뉴스들이 흘러넘쳐도, 화마(火魔)로부터 사람들과 재산을 지켜주는 모습이 어린이들의 눈에도 감동을 주는가 보다. 동해안을 할퀴고 지나간 산불은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와 상처를 남겼으며 정부와 지역공동체에 수다한 숙제를 안겨주었다. 계절적으로 건조한 공기와 때마침 불어오는 광풍에 급속하게 번져가는 불길을 하루 만에 막아낸 모든 이들의 수고와 헌신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지난 수년간 우리에게 여러 모양으로 학습효과를 남긴 ‘안전’을 생각하는 사회 일반의 경계심이 이번 산불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지켜내면서 시험대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이번 산불지역과 유사한 지리적 계절적 환경을 가진 여러 지역들에서 이번보다 훨씬 큰 피해를 남겼던 사례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이번에는 천만다행의 경우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소방 공무원들과 산림청 특수진화대 등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막아낸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전국 각지로부터 출동하여 강원도의 산불을 함께 막아낸 이번의 경험은 아직도 우리에게 ‘함께 호흡하는 공동체’를 이루어낼 희망의 불씨가 남아있음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더없이 경쟁적이며 필요 이상으로 다투기만 하는 세상의 모습 가운데에도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위하여 모두의 가슴과 손길을 모았던 기억을 오래오래 간직했으면 한다. 공동체를 위협하며 다가오는 위험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빈부를 구분하지 못하고 좌우를 차별하지도 않는다. 안전한 사회를 이루어 가는 일은 모두가 공평하게 안아야 하는 짐이 아닌가.‘포항지진’도 지역의 공동체가 공평하게 지혜를 발휘하여야 한다. 이를 두고 이념으로 덧칠을 하거나 진영의 정치적 이득을 생각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지역에 닥쳤던 우리 모두의 불행이며 모두에게 함께 닥쳤던 피해였음을 기억하면서 이를 어찌 함께 극복하고 새로운 지역공동체로 나아갈 것인지 생각을 모았으면 한다. 이를 잘못 다루어 자칫 갈등과 불화의 빌미가 된다면, 지진으로부터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2차 피해를 모두가 떠안을 참이다. 책임의 소재를 차분히 가려내고, 피해정도에 상응하는 적절한 보상과 배상방법을 찾아내며, 포항의 미래를 열어가는 회복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일련의 모색과 구상의 길에는 지역 공동체가 상식과 지혜를 모아 우리 지역이 이전보다 더욱 맑고 밝으며 미래지향적인 도시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보통 시민의 눈에는 산불에도 지진에도 담론을 진영의 울타리에 가둘 까닭이 없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불이 난 자리에 달려가 힘을 합친 끝에 그나마 다행스런 결과를 보지 않았던가. 지진으로 무너진 지역의 경제와 심사에 우리도 한번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 슬기로운 결과를 맞아볼 수는 없을까. 내 편과 네 편이 따로 있을 까닭이 없으며 편을 가른다 하여 더 챙길 이득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이제껏 혹 따로 앉아 생각을 모아왔다면, 이제라도 무릎을 맞대고 앉을 자리를 마련해 보면 어떨까. 지진 담론에 진영의 논리가 끼어들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의외로 소박하다. 지진도 결국 ‘안전’과 뗄 수 없는 사안이 아니었던가. 커다란 충격과 혼돈을 겪은 터이라 격한 감상과 아픈 기억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지역의 미래를 세우기에 속좁은 진영논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폭넓게 바라보고 더 멀리 내다보는 시선의 지평을 가져야 한다.산불을 막아내며 공동체 회복의 가능성을 엿본 김에 지진을 딛고 일어서는 길에서 이 지역의 ‘공동체’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지역은 내 것일 수도 없고 네 것일 수도 없다. 포항은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닌가.

2019-04-10

망친 교육, 살릴 교육

장규열 한동대 교수독일의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교육의 핵심이 ‘자기교육’에 있다고 하였다. 교육은 사람이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가족, 친구, 교사들을 만나고 타인과의 다양한 공동체적 관계를 가지지만 교육의 요체는 결국 스스로 자기도야(自己陶冶)의 길에 서도록 돕는 것이라 하였다. 교육의 성패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경험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내가 무엇을 어떻게 배우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만날 것이므로, 이를 조화롭게 받아들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교육은 ‘낯선 것과의 만남을 통하여 스스로를 도야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교육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결국 두 가지 가닥이 손에 잡힌다. ‘스스로’ 찾아가도록 돕는 일과 그런 길에서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 최근 보도에 따르면,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그들의 자녀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하여 여러 모습으로 개입하면서 부적절한 힘을 사용하여 불공정한 결과를 빚어낸 일이 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앞이 캄캄하던 기억들이 대개 있을 터이다. 사방이 적으로 막힌 듯 숨쉬기도 버겁던 나날을 어렵게 힘들게 통과하여 오늘에 이른 어른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수다한 고뇌와 난관을 지나왔기에, 오늘 여러 모양으로 삶을 이어가며 보람을 나누는 인생의 선배들이 있지 않은가.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런 수고의 의미와 결실의 기쁨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당신의 알량한 권력을 부당하게 사용하여 결국 교육을 망치고 싶은 것인가.작은 것이라도 ‘스스로’이루어가는 보람은 또 얼마나 즐거운 기억과 가슴 뿌듯한 보람을 남기는가. 두드려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듯한 그 기회의 문은, 도전하는 이의 간절함과 수고의 크기에 비례하여 반드시 열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신같이 비신사적이며 몰상식한 어른이 개입하여 그 질서를 무너뜨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신 자녀의 교육과 앞길을 망칠 뿐 아니라, 오늘도 성실하게 내일을 준비하며 공정한 겨룸을 기대하는 수많은 젊은이의 미래마저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당신은 한 마디 사과조차 없이 이 또한 지나갈 것으로 기대하며 숨죽이고 있는가.두 번째 가닥. 저렇게 하면, 당신의 자녀가 ‘타인과의 공동체적 관계’를 순조롭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시는가. 오늘 수많은 다른 젊은이들이 들이는 수고와 노력을 그들은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공유하는 시간의 기억과 함께 느끼는 공감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남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을까. 남들과 나눌 그 무엇을 상상도 못할 터에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는 공동체를 어찌 만들어 갈 것인가. 당신은 자녀의 교육을 망쳤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틀을 병들게 하였다. 당신이 가진 그 힘으로 공동체의 가능성을 깨알처럼 허물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렇게 하여 어지러워질 세상의 불공정함을 당신은 어떻게 대하려 하는가. 이쯤해서 이 땅의 청년들이 이제는 공동체를 온당하게 회복하도록 도와주실 생각은 혹 없으신가.세상은 험하고 시간은 거칠다. 내일을 기대하며 갈고닦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험하고 거친 세상과 시간을 이겨내길 기대한다. 그 이겨낸 끝에 함께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마음껏 이 땅의 부조리와 불공정을 바꾸어 주길 바란다. 당신이 이겨낸 시간은 바뀐 세상으로 보답할 것이며, 그러는 사이 당신은 누구도 몰라볼 만큼 자라있을 것이다. 교육은 사람이 ‘스스로’ 배우게 하여야 하며 ‘공동체’를 건강하게 키워내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교육이 살려야 하므로.

2019-04-03

기회인가 위기인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포항지진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 낮 수업을 위해 이동하던 중 건물 안 계단에서 맞았던 격동과 충격. 밖으로 정신없이 빠져 나오면서 목격하였던 쏟아지는 담벼락과 혼란으로 가득했던 아우성. 다른 곳에서 겪었던 지진의 기억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하였던 진동과 불안. 함께 겪어야 했던 학생들 걱정과 집에 두고 온 가족들 염려. 지진 이후 언론의 보도와 함께 모아진 전국적 관심. 연기되었던 수능. 무너진 아파트들과 아직도 그 곳에 서 있는 이재민 텐트들. 꽤 시간이 흘렀지만 포항지진의 충격과 그로부터의 회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런 지진이 ‘자연재해’가 아니었다는 공식 발표는 지역의 민심을 다시 들끓게 한다. 이를 어떻게 수용하여야 하는지 또 그에 따른 해결의 가닥은 어떻게 잡을 것인지 생각들이 봇물을 이룬다.포항지진이 ‘촉발지진’이었다는 발표를 포항의 회복과 새로운 발전 그리고 도약의 기틀로 삼아야 하며 이는 그 어느 진영논리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은 분명히 옳다. 즉, 이는 우와 좌의 문제가 절대로 아니며 포항지역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미래지향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언급하는 이의 의견 가운데 은근히 어느 진영의 주장이 실리며 상대 진영에 대한 질타가 감지되는 일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포항의 위기에 대하여 걱정하면서 사심(私心)없이 수고해 온 분들도 즐비한 가운데 정치권의 힘을 배경으로 한 주장이 지역을 덮으려 하는 일도 경계하여야 한다. 선동적 외침이 적힌 가로펼침막과 누군가 준비한다는 궐기대회도 꼭 필요한 일인지 생각이 복잡하다. 까닭없이 한 편에 설 수 없는 보통 시민은 무엇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혼돈스럽기 짝이 없다.오늘 우리의 자리를 분명히 설명하고 내일을 향한 가능한 계획이라도 누군가 조목조목 내어놓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포항이 위기를 극복해야 하며 지역의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한 자락만 붙들고 성실하게 생각하고 일하려는 이들이 없지는 않을 터에, 지역은 무슨 까닭으로 진영에 휘둘리는가. 무슨 속셈으로 함부로 편을 가르는가. 모두가 한 마음이어야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생각일 까닭은 없다. 다양하고 풍성한 생각과 의견들이 청취되고 조율되어 지역이 화합하고 소통하는 내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어느 한 가지 생각을 정해놓고서 그만을 따라가자는 주장도 시민에게는 피곤할 뿐이다. 모두 내어놓고 함께 지혜를 모으도록 서로 도울 수 없을까.정적(政敵)이었던 보수진영 정치인의 장례식에 참석한 진보진영 오바마 전 대통령이 ‘우린 서로 엄청 싸웠지만 결국은 한 편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수다한 정치적 결정과정에서 끊임없이 맞섰지만, 이루고 싶었던 일은 결국 나라와 국민이 잘 되는 일 그 한 가지였다는 고백이 아니었을까. 포항과 지역의 발전이 진정 당신의 바람이라면, 진영의 논리가 두드러지는 일은 거두어 주셨으면 한다. 지진으로 겪었던 아픔과 상처가 이념의 색깔 탓에 오히려 덧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동안 욕심 한 자락 없이 수고해 온 분들의 목소리와 의견이 더 많이 들려지도록 배려했으면 한다. 전문성과 진정성이 실린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제안들에 자리를 더 많이 내어 주어야 한다.그간 의심하며 궁금하였던 ‘지진지역’의 오명이 씻기운 것이 참으로 반갑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문제의 책임소재를 밝히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내일을 밝히는 일과 뒤섞이면 그도 어지럽다.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일은 지역의 손에 달려있다. 지역의 역량을 조화롭게 모아내어 포항이 글로벌 도시로 도약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 본다. 포항, 파이팅!

2019-03-27

이게 사회냐

장규열 한동대 교수오늘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배워 지금 내가 된 것일까? 학교에서 책으로 배우고 집에서 부모에게 익히며 친구들, 선생님들, 지인들과 전하고 나누며 새기고 다져진 결과물이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닐까. 세상의 온갖 소식들을 전달하는 미디어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언론과 미디어가 호기심과 알 권리를 채워주는 덕에 배우고 깨닫는다.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뉴스와 익힐 거리들의 의미를 전해 들으면서 배우고 깨우친다. 배우고 익혔던 대로 펼쳐지는 일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는 현실에 절망하기도 한다.바람처럼 일어나 지금도 번져가고 있는 ‘미투(Me-too)’현상은 사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 주었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성인지 감수성’의 실체를 보여 주었다. 상대가 누구든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여야 하며 상대를 그 어떤 도구로도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깨우치고 있었다. 성희롱, 성폭력 등 민감한 성적 이슈에 대하여는 지극히 조심하여야 하며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기 어려울 것임을 배우고 있었다. 이를 비웃기라도 했었을까. 버닝썬, 장자연, 김학의 사건으로 불리는 뉴스들이 알려지면서 그 모든 운동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우리에게 있어야 할 도덕적 기준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공적인 기대는 듣고 배웠던 것과는 어쩌면 이렇게 멀리 있었던 것일까.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되면 저토록 무너진 인성을 보란 듯이 발휘해도 되는 것인가. 배경 든든한 공권력도 얼마든지 내 편 만들어 바람막이로 쓸 수 있는가. 권력은 결국 자기들끼리 한 편이 되어 버리는가. 언론도 때로는 돈과 힘을 따라가는가. 아직도 여성은 남성의 폭력에 힘없이 무너지는가. 이런 판에 피해자가 궁금한 당신은 또 누구란 말인가. 지위가 높았으면 이 정도 드러나도 별 일없이 지낼 수 있는가. 등장인물 저들은 과연 공인인가 마귀인가. 대통령이 나서야 겨우 손볼 만큼 가벼운 일인가. 이런 일로 우리는 공소시효를 따져야 하는가. 이런데도, 아직 뒤에 숨어있는 당신은 누구인가.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지 고민할 일인가. 이게 이념의 오른쪽 왼쪽을 가릴 일인가. 함께 보고 있는 다음 세대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숨길 길은 없다. 그들이 무엇을 배우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는가.사람은 배운 대로 자라지 않는다. 사람은 본 대로 자란다. 하염없이 가르쳐도 한 순간에 날아간다. 앞에 선 이들이 보여준 삶의 모습은 따라오는 세대에겐 치명적이다. 예절과 격식을 배웠어도 성욕과 폭력이 앞설 터이다. 성실과 진심을 가르쳐도 힘과 돈으로 살아갈 터이다. 정직하게 살자고 하면 눈가림으로 막아설 것이다. 실력을 쌓자고 하면 폭력을 길러내지 않을까. 좋은 친구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면 권력의 실세들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면 패거리 문화건설에 집착하지 싶다. 이성을 배려하자고 하면 여성을 범할 궁리만 하고 있을까. 병든 사회를 바꾸어 보자면, 당신이나 잘하라는 빈정거림으로 돌아오지 않을까.겨우 대통령이 나서는 것으로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이 또한 지나갈 것으로 기대하는 저 냉소가 보이지 않는가. 오늘의 심대한 도전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결연히 ‘사회문제 공론화’에 나서야 한다. 미래로 당당하게 나아가기 위하여 좌도 우도 없이 모두 나서야 한다. 노인은 당신의 지혜로 앞서야 하며 청년은 당신의 패기로 나서야 한다. 못난 정권에 ‘이게 나라냐’며 일어섰던 기개를 일그러진 사회에 다시 던져야 한다.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 어떤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

2019-03-20

함께 할 수 있을까

장규열한동대 교수1992년 봄, 온 미국을 뒤흔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L.A. Riot)’. 흑인 운전자 한 사람을 단속하던 백인 경찰 네 사람이 사정없이 때렸던 영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촉발된 도시소요.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계를 망라하는 유색 인종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성찰하는 기회가 됐고, 지역의 한국교민들에게도 여러 형태의 피해를 입히며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서 거듭 경계심을 가지게 했다. 이후 법정다툼에 불려나온 피해 당사자 로드니킹(Rodney King)은 증언과정에서 이 모든 혼란과 소란에 혼란스러운 심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며 울부짖었다. “우리 그냥 좀 어울려 살 수 없겠습니까? (Can we just get along?)”그는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차별적 조건을 극복할 방법이 이렇게도 없겠냐는 그 나름대로의 안타까움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차별적 조건을 찾아내며 끊임없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해 내는 능력은 인간이라면 거의 본성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피부가 다르고 출신이 다르며, 성별이 다르고 성씨가 다르며, 혈액형이 다르고 키와 몸무게가 다르다. 겉으로도 다르고 속으로도 다르다.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며 이념이 다르고 사상도 다르다.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모습과 속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이상 어우러져 살아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흑인 피해자 한 사람의 저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가. 우리는 어울려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다르다’는 데서 출발해 ‘틀리다’는 생각에 이르면, 자칫 구별을 넘어 차별하게 되고 혐오하게 되며 배척하게 되어 폭력과 불공대천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같은 파국에 도달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절하고 조정하며 견제하고 경계하도록 우리에게는 ‘정치’라는 장치가 있다. 정치는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이기는 하지만,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일을 하도록 국민이 맡겨준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정치인들은 그렇게 하고 있는가. 정치인이 뱉어낸 말 한마디가 조정과 질서를 불러오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인들 사이의 단절과 반목의 도화선이 되어 사회 일반의 분열과 등돌림의 발화점이 된다면 그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싸움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신은 접점을 찾아내는가, 아니면 분열을 조장하는가.사회공동체가 조정과 타협을 통해 잘 굴러가도록 돕는 또 하나의 기제가 ‘언론’이다. 언론은 사실을 밝혀 알리는 일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을 하면서, 민주주의가 실제로 구현되도록 사회적 공론의 장과 대화의 마당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독자의 관심을 끌거나 충격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에 머물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기초가 될 접점을 모색하고 해결책에 접근하는 대화의 토대를 불러와야 하지 않을까. 그간 언론이 문제를 알려내는 데 기여해 왔다면, 앞으로는 해결을 이끌어내는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서구의 언론은 대안저널리즘, 지혜저널리즘, 또는 해결저널리즘 등의 표현을 써가며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고 한다. 남은 어차피 다르다. 남은 언제다 다르다. 그 다른 모습과 생각을 다른 그대로 인정하고 보듬을 수 있을 때에 민주주의로 가는 첫 걸음이 비로소 놓아지는 것이다. 다른 그대로 놓아두면 틀림없이 갈등이요 분열이었을 것을, 정치가 조정하고 언론이 담아낼 때에 대화와 타협이 가능해진다. 정치와 언론이 뿔뿔이 흩어놓는 일은 이제 그만 보았으면 한다. 정치와 언론으로 인해 다른 생각들이 더 당겨 마주 앉아야 한다.

2019-03-13

어린이교육, 내일을 연다

장규열한동대 교수3·1운동의 뜨거운 물결이 한차례 지난 후, 1920년대 초반 민족과 나라의 미래를 오히려 긴 안목에서 바르게 세워갈 길은 어린이를 바르게 기르는 데 있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소파(小波) 방정환. ‘어린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것으로 알려진 그는 어린이의 윤리적, 경제적, 민족적 독립(해방)을 주창하였으며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여야 하고 민족의 미래와 희망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적은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에는 “어린이들을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라고 권하며 어린이를 바르게 기르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하라”고 했다는 것이다.나이지리아 속담에 ‘아이를 기르는 일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It takes a whole village to raise a child.)’고 하였다. 온 가족과 이웃, 학교와 동네가 한결같은 성심과 정성을 기울여야 비로소 바른 인격체 하나가 만들어 질 수 있음을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길러내는 일을 교육이라 할 때에, 교육은 그 대상이 어릴수록 더욱 힘들고 그 뜻이 훨씬 무겁다. 어린이교육 가운데에도 유치원교육과 영유아교육에 관심이 가는 까닭도 바로 그래서일 터이다. 로버트 풀검의 베스트셀러 어린이 교육 관련 책은 제목을 아예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고 붙였다.사람은 태어난 직후부터 정신과 정서의 발달이 시작되어 첫 3년 이내에 기초적인 뇌와 신경의 발달이 역동적으로 진행되며, 생애 첫 8년 안에 자의식과 자존감, 학습태도와 정서감각, 관계형성능력과 개인적 태도형성이 모두 완성된다고 한다. 유치원교육을 통하여 이후의 학습과 성장에 필요한 준비가 거의 다 이루어지며 사람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태도와 소양이 모두 길러진다는 것이다. 향후 초중고등 교육에 임하기 전에 배움과 성장을 향한 열정의 강도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영유아교육과 어린이교육에 관하여 우리는 어떠한가. 어린이들을 길러내는 일에 저 만큼의 신중함과 한결같음이 우리에게 존재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최근 한국유치원총연합회가 영문도 모르는 어린이들을 볼모로 어른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했던 일은 사안의 내용과 그 시급함을 차치하고라도 좋지 않은 여론을 스스로 불러온 꼴이 되고 말았다. 단 하루의 혼란으로 막을 내리긴 했지만, 긴긴 방학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심대한 혼란과 불안감을 안겼을 터이다. 아이들을 앞세우기만 하면 현실에 쫓기는 어른들의 심사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었다. 그런 태도야말로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을 쳐다보지 못하고 내려다 보는 구습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라도 어린이들의 내일과 나라의 백년 앞을 내다보는 교육의 첫 마음을 되새겨 어린이교육의 소중함을 다시 세워주기를 요청하고 싶다.철학자 칸트(I. Kant)는 ‘인간은 오직 교육에 의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여러 단계의 교육 가운데 가장 무거운 소명과 책임을 느껴야 할 영유아교육과 유치원교육에 관하여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 어린 사람들을 상대로 하므로 보다 높은 기대를 걸어야 하고, 순결한 마음 밭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므로 더욱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한다. 교육이 ‘백년대계’를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 첫 걸음이 될 어린이교육이 바로서야 한다. 소명에 따라 헌신하시는 모든 선생님들이 오늘 힘내시기를 응원해 드린다. 어린이교육이 미래를 연다.

2019-03-06

건강, 돈, 그리고 행복

장규열 한동대 교수최근 발표된 건강국가지수(Health iest Country Index)에 따르면 한국은 17위에 머물렀다고 한다.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위생상태와 기대수명, 수질과 환경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였으며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싱가포르가 10위권에 들었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유럽 국가들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였으며 미주국가들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미국은 35위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1위를 차지한 스페인에서는 국민들에게 무료로 모든 1차진료를 제공하며 질병치료 보다는 질병예방, 식습관 관리와 건강환경 유지 등에 초점을 맞춘 보건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매슬로우(A. Maslow)의 ‘인간욕구 5단계’에서 가장 기초적인 욕구가 ‘생리적 욕구’임을 볼 때 건강국가지수는 이들 나라에서 국민들이 행복을 위한 기초적인 조건을 어떻게 확보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건강과 더불어 생존을 위하여 경제적인 뒷받침이 따라야 할 터이다. 건강이 제공하는 에너지와 함께 보다 나은 경제력이 삶을 지탱하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인생을 구가할 것으로 생각한다. 국가 간 경제성장의 상대적인 차이를 비교하고 정부의 성공여부를 가늠할 때에도 주로 국민총생산과 소득수준을 기준으로 평가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소득이 높으면 보다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것으로 생각한다. 여러 사회적인 문제와 갈등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부터 비롯되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어느 건강하고 부유해 보이는 부인이 남편과 아이를 향해 던지는 고성과 폭력이 담긴 동영상은 건강과 재력이 인간 행복의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였다.영국의 신경제재단(New Economics Foundation)은 생각이 다르다고 한다. 인간의 삶은 건강하고 돈이 많아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 삶을 어떻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 직접 물어보아야 하며 돌아오는 답변에 따라 정부와 관련 공동체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세기 동안 중앙정부와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경제체제는 불공정한 결과들만 만들어 온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함께 문제점을 발견하며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경제시스템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2010년 신경제재단이 발표한 ‘국가별 행복지수’는 놀랍게도 아시아의 작은 나라 ‘부탄’이 지수 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하였다. 소득수준과 성장중심 사고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사뭇 생경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최근의 사건을 접하면서 다시 들여다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건강과 돈만으로 행복해 지는 것은 일단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조금 양보하여 건강과 재력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기는 하는가 보다. 매슬로우도 이들을 일차적 욕구로 지적하였으니까. 그의 이론은 ‘5단계’를 제시하였다. 건강과 생리적 욕구를 넘어, 안전, 소속, 존중, 그리고 자아실현의 욕구들도 적절히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들 높은 수준의 욕구들은 거의 모두 그 어떤 객관적인 조건변수로 확보된다기 보다는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과 의지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와 견주어 나의 삶과 조건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묻고 답하는 가운데 결정되는 것이 ‘만족’이며 ‘행복’이라는. 그런 결과 미진한 부분이 발견되면 공동체적으로 반응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권고가 뒤따른다. 결국,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며 행복한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스스로였다는 것. 건강해 보이고 또 부유하다고 알려졌어도 어느 한 구석 행복하지는 않아 보이는 저 여인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삶은 나의 것이다. 행복은 내가 만든다.

2019-02-27

교육이 살린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우리 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우리 사회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면 볼수록, 결국 ‘교육’에 기대를 거는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다 자라버린 기성세대에게 무엇인가 새롭고 신선한 감동을 바라기보다 이제부터라도 다음 세대를 제대로 가르쳐 이 나라의 미래가 밝고 맑게 펼쳐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미래 세대를 맡아 기르는 선생님들에게 높은 기대를 거는 것이고 그들이 가꾸어낼 후손들에게 이 땅의 장래를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오늘 펼쳐지는 우리 교육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학생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경험하는 교육에 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학생들이 즐겁게 배우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배우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과연 펼쳐질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교육을 통하여 나라와 사회는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최근, 이 나라에서 교육을 받는 학생과 아동들이 그들이 받는 교육에 관하여 연구하고 정리하여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가 있다. 4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해 우리 교육현장 경험에 대하여 작성한 ‘유엔아동권리협약 이행 대한민국 아동보고서’의 내용은 이를 처음 접한 유엔 인사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터이다. 길고긴 학습시간, 틀에 가둔 듯 억압적인 학습환경, 성적과 평가에 따르는 학업스트레스, 놀 권리를 박탈당한 재미없는 학교분위기, 대학입시가 교육목표인 교육현실. 보고서의 부제목 ‘교육으로 인해 고통받는 아동’은 우리 교육현장에서 교육수혜자여야 할 학생들이 겪는 아픔과 상처를 요약해 주고 있다. 교육으로 인해 당연히 있어야 할 즐거움과 희망은 어디가고 학생들의 마음에 ‘고통’만 기억된다니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이들은 보고서의 결론으로, 교육현장에서 적절한 학습시간과 함께 휴식과 여가가 함께 주어지길 바라고, 시민적 권리와 자유가 보장되길 기대하며, 공교육이 본연의 소임과 기능을 회복하여 교육격차에 따라 당한 차별과 억압이 사라지길 원하며 교육의 목표가 대학입시가 아닌 다양한 기회와 폭넓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교육이 되어주길 희망한다고 하였다. 드라마 ‘SKY캐슬’은 실제 상황이며 이를 지혜롭게 극복할 방도를 교육계는 찾아야 한다. 보고서를 받은 유엔은 이에 대하여 한국사회를 향한 ‘권고안’을 마련하여 이행을 촉구할 것이라고 한다.우리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 성적에 따라 줄세우고 차별하는 교육을 벗어나 ‘사람을 기르는’ 교육의 소명을 회복하여야 한다. 학생들 사이에 경쟁과 반목을 조장하는 교육 분위기를 탈피하여 ‘나를 이기는’ 진정한 경쟁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실력을 길러 성공만 지향하는 교육을 넘어 소양과 기량을 길러 개인이 잘될 뿐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는 넓은 도량을 기르도록 이끌어야 한다. 국가 간 울타리가 사라져 가는 마당에 세상을 품는 ‘글로벌 시민’을 길러내야 한다. 대학입시에 성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교육을 넘어 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하는 만큼, 이웃과 더불어 조화롭게 사는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일등만 대접받는 교실을 벗어나 한 사람도 놓고가지 않는 교육을 구현해야 한다.학생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보고서를 작성했을까. 하마터면 그냥 그렇게 ‘고통’만 겪었을 일을, 이렇게라도 깨우치게 되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 학생들의 용기가 계기가 되어 우리 교육이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지적이 따끔했던 만큼, 분명히 바뀌어 갔으면 하는 것이다. 이제는, 교육으로 인해 ‘일어서는’ 아동을 만나고 싶다. 정치과 경제, 사회와 문화가 걱정을 끼치는 자리에 교육이 분명한 소망과 열쇠를 선사해 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무너진 세상을 교육이 살려야 하므로.

2019-02-20

사실과 해석

장규열한동대 교수시카고의 유력일간지 시카고트리뷴(Chicago Tribune) 본사 편집국에는 커다란 현수막에 ‘어머니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거 확인해!’ 라고 적어 걸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라도 언론사 기자는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여야 함을 강조하는 한 마디일 터이다.실제로, 일선 기자들이 취재와 보도를 위하여 기사작성에 나설 때에 상급자로부터 가장 흔하게 듣는 소리가 ‘확인했어?’인 것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그를 토대로 글을 적었는지를 묻는다. 일이 벌어진 현장에 가서 손수 확인을 하든지 아니면 믿을 만한 복수의 소스를 근거로 분명히 확인을 한 다음에야 책임있는 기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이 흔들리면 기사를 읽는 독자는 심각한 혼란에 빠질 위험에 처한다.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작 영화 ‘라쇼몽(羅生門)’은 녹음이 우거진 숲 속에서 벌어진 어느 사무라이의 죽음을 놓고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이 모두 서로 다른 증언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사실에 분명히 근거하지 아니하고 상상과 해석이 앞서고 자기 생각이 버무려 질 때에 벌어질 수 있는 혼돈과 혼란을 절묘하게 그리고 있다. 모든 담론은 움직일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을 토대로 하여야 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생각과 의견이 사실에 앞서 개진되어 두드러질 때에 토대가 되어야 할 사실은 그 힘을 잃고 진실에 이를 방도는 사라지게 된다. 그런 끝에 허무맹랑한 주장과 고집이 판을 치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에 머물 것이면 몰라도,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칠 담론의 전개가 필요한 사안들에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며 그 확인은 필수인 것이다.어느 공당의 대표가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해석이 정말로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인지 확인되어야 한다. 혹 그 사실이 객관적으로 검증되고 확인되지 않았다면 그를 토대로 한 해석은 모두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혹 ‘사실확인’에 관하여 철저하지 않은 채, 섣불리 해석으로 나아간다면 벌어질 수 있는 그 모든 오역과 오해는 어찌할 것인가. 듣자 하니, 그가 언급한 사안은 이미 여러 각도에서 확인된 바 언론과 법원 등의 검증이 이미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덜 확인된 채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되는 일이 이제는 없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이미 정리되고 정돈된 마음에 혼란과 분노를 더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현대 언론에 있어 기사작성은 이제 객관적인 사실의 기계적인 전달과 공정한 보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안과 사건에 대하여 기사와 논평은 얼마든지 기자와 저자의 양심과 양식에 따른 해석과 담론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다. 책임있는 의견의 개진과 분명한 주장의 표출도 현대 언론에게는 당연히 가능하다. 다만, 기본은 그 모든 생각과 표현이 ‘확인된 사실’에 근거한 것이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출처가 중요하고 근거가 필요하며 확인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아니면 말고’식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그래서 위험하다. 언론이든 정치든 우리 사회에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사라져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상의 자유가 물론 소중하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개진함에 있어서는 꼼꼼하고 신중한 사실의 확인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다.개인 독자로서 기사와 담론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읽고 접하는 글과 생각들이 과연 ‘사실’에 근거한 담론들이었는지 살피며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디지털문명은 현대인의 삶에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가져왔지만, 정보의 더미 속에 자칫 ‘사실확인’에 소홀하게 만드는 위험도 함께 도사리고 있다.해석에 앞서 사실을 살펴야 한다. 사실을 토대로만 해석할 일이다.

2019-0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