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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벽(壁), 허물어야 하는

장규열 한동대 교수의사이며 미생물학자인 소크(Jonas Salk)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50년 후에 곤충들이 사라진다면 지구가 멸망할 것이지만, 50년 후에 인간이 사라진다면 지구는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야기하였을까. 인간이 살아가는 이 땅을 살리기 보다 망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 아니었을까. 지구와 환경을 망치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이 모여 사는 공동체와 사회 구조마저 혼탁과 오염을 거듭하게 하여 황폐하게 만드는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가 망가질 뿐 아니라 함께 살아가지도 못하는 더럽고 누추한 세상을 만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지구와 인류에 해가 되기보다 도움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공부는 왜 하는가. 개인이 성공에 이르는 데 물론 힘이 되겠지만 더 배우는 까닭은 배움의 총량이 궁극적으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이 아니었을까. 전문가와 학자들은 분야마다 차고 넘치는데, 실질적인 개선과 회복에 어떤 기여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Noam Chomsky)가 ‘존경받는 지성인들은 그저 권력의 이해에만 복무하는 사람들이다’라며 빈정거린 것은 지식인들이 정말로 해야 할 일들을 덜 하고 있다는 따끔한 지적이 아닌가. 개선과 변화, 진보와 혁신에 도움이 될 만한 비판과 제언에 더욱 적극적이어야 함을 꼬집은 것이다. 언론이 문제라는데, 살피며 대안을 이야기하는 학자가 보이지 않는다. 사회가 병들었는데, 몰아세우며 다그치는 전문가는 어디 갔는가. 교회와 사찰이 저 모양인데 신학교와 현인들은 무엇 하는가.전문가 집단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보통 사람들이야 바람에 휘둘릴 밖에. 이 말을 들으면 그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말을 들으면 그 소리도 틀리지 않는다. 사회와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온통 혼동스럽고 안개 속이다. 이웃과 대화가 없는가 했더니 이젠 가족과도 소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개인은 보다 똑똑해 졌는가 싶지만 사회는 보이지 않는 벽들로 한 가득이다. 진영논리에 갇힌 사람들, 세대격차에 함몰된 사람들, 빈부양극에 짓눌린 사람들, 양성차별에 억울한 사람들, 학벌과 지연, 격차와 차별, 혐오와 차단으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모두가 서로에게 적이 되어 우리 사회에는 집단적 자폐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세월이 가면 나아져야 할 터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수렁에 처박히는 느낌은 어찌해야 하는가.드러나는 생각도 덜 깊어 보이는데, 사용하는 언어마저 저열하고 비속하다. 벽을 허물어야 하는데, 표현이 거칠면 본질에서 멀어져 감정만 상할 뿐이다. 감정이 상하면 이성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가능성은 희박해 질 수 밖에. 저속한 한 마디를 뱉고 돌아서 ‘속이 시원하다’면 국민이 믿고 맡길 공복(公僕)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 동서냉전의 막바지에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부시(George Bush)는 ‘보다 친절하고 보다 부드러운 나라’가 되자고 미국인들에게 제의하였다. 악다구니 끝에 상처투성이가 되면, 이기든 지든 남는 게 없다. 선거철이 되면 똑같은 아귀다툼에 사회는 멍든 질곡을 반복할 뿐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사회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잃고 부유(浮遊)할 것이 아닌가.소통이 바뀌어야 한다. 담론의 장이 넓어져야 하며 보통 사람들이 더 많이 참여해야 한다. 학자와 전문가들이 토론과 담론을 이끌어 조절과 조정에 나서야 하며, 생각과 의견이 조화롭게 적극 개진되도록 부추겨야 한다. 대화와 나눔이 활발해져야 하며, 사용하는 언어는 절제와 균형을 갖춘 격을 회복하여야 한다. 친절하고 부드러워야 막힘없는 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므로.

2019-05-15

공감백배

장규열 한동대 교수편을 가르기 좋아하는 세상이다. 어쩌면 그렇게 다른 것을 집요하리만치 틀린 것으로 확신하는지 때로는 안타깝기가 도를 넘는다. 오른쪽과 왼쪽은 절대로 섞일 수가 없으며 남성과 여성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국경이 거의 의미가 없어져 간다는 21세기에 한반도 만큼 동과 서가 어울리지 못하는 나라가 또 어디 있을까. 어느 작가의 날카로운 눈은 세상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고 하였다. 존재의 가치가 내 생각을 드러나기도 전에 나의 조건으로 이미 판단되기 일쑤인 것이다. 어느 동네에서 났거나 살고 있기 때문에 나는 벌써 어느 편인 것이고, 나의 성별은 나의 능력과 상관없이 나의 위치를 대개 결정하고 있다. 그런 부조리를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세상이 또 웃기는 것일까.편을 가르는 잣대에 무서운 게 또 하나 있다. 나이. 어른에게 청년은 언제나 불안하고 젊은이에게 노인은 늘 어렵다. 끼워주지 못하고 어울리지 않는다. 함께 나누는 기회를 스스로 가로막고 생각을 견주기를 항상 꺼린다. 웬만하면 섞이지 않으려 하고 끼리끼리 서로를 탓하기만 한다. 온갖 사회적 담론도 같은 색깔의 무리들 안에서만 나누고 확인하며 규정하고 성토한다. 그 같은 공론의 장에서 담론은 제자리를 맴돌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벽을 허물지 않고는 다시 세울 방법이 없다. 폭 넓은 아량이 필요하고 속 깊은 배려가 절실하다. 스스로들 세운 벽 속에 갇힌 21세기 한국사회를 구출해야 한다. 이념, 성별, 지역, 나이, 아 그리고 종교. 이들 기준을 모두 동원하면 우리는 또 얼마나 좁디좁은 울타리에 갇힐 것인가.가정의 달 5월에도 가슴아픈 뉴스로 한가득이다. 마침 어린이날 새벽에 생활고에 시달린 젊은 부부가 두 아이들과 생을 마감하였다. 하필 어버이날을 앞두고 부모 앞에서 분신자살을 한 젊은이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다리에서 투신하려던 모녀를 설득 끝에 가까스로 구했다는 소식도 있다. 스승의날과 부부의날을 눈 앞에 두고도 아슬아슬할 뿐.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대립과 갈등, 반목과 질시를 거듭한 나머지 대화와 타협, 화합과 상생을 정말로 망각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어려운 젊은이들의 처지를 듣고 도울 방법이 그렇게 없을까. 힘든 가정들의 상황을 헤아려 세워줄 장치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일까. 울타리 밖 남들의 삶을 이해하고 배려할 널푼수를 우리는 가질 수 없는 것일까.‘세대공감’ 한 방송프로그램의 이름이지만 세대 간 생각과 해석의 차이를 짚어보고 공감대를 넓혀가려는 의도로 읽힌다. 앞으로 세대 뿐 아니라 지역들 사이에는 다른 느낌들이 어떻게 도사리고 있는지 드러내 보았으면 한다. 같은 주제를 놓고도 혹 남성과 여성 간에는 어떤 다른 생각이 흐르고 있는지 살펴보았으면 한다. 종교들 간에 그리고 신학적 해석들 가운데 존재하는 갈등과 마찰은 무엇 때문일까. 다른 흐름과 느낌을 어떻게 조화롭게 어울리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들 다른 생각과 느낌을 안고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갈 것인가. 반목이 무관심을 키우고 무관심은 자칫 혐오를 일으킨다. 혐오와 무관심은 고립과 절망을 초래할 터이다. 극단적인 선택이 뉴스가 되는 일은 이제 그만 보았으면 한다.함께 나누고 서로 도우며 더불어 고심하면서 마음을 모으는 사회. 고립과 절망으로 무너져 내리는 이웃을 소통과 대화로 건져 올리는 공동체. 공감하는 나 하나로부터 시작할 일이 아닌가. 남에게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탓은 그만 하여야 한다. 당신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내 안의 공감능력을 백배로 끌어올려 이웃과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시라. 5월을 다시 눈부신 계절로 만들기 위하여.

2019-05-08

쓰기혁명

장규열 한동대 교수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인간의 문화와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중세의 암흑시대를 건너오고 있었던 유럽인들에게 아직도 문맹률이 95%에 달하였다. 성경을 비롯한 글로 적힌 문건들은 교회와 권력자들에게만 허용되었을 것이니, 보통 사람들이 글을 대할 필요조차 없었을 터이다. 인쇄술은 이후 르네상스 이성의 시대와 계몽의 새벽을 밝힌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성경이 누구에게나 주어졌으며 종교개혁을 통하여 신의 말씀을 직접 읽고 스스로 해석할 수도 있게 되었다. 데카르트가 인간이 ‘생각하므로 존재하는’ 이유를 분명히 했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하였다. 읽을 수 있어 알게 되었고 더 알게 되므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생각을 이어 가면서 문명이 눈부신 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지구상에 문맹은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읽을 줄 안다는 것은 쓸 줄도 안다는 것이 아닌가. 모두 읽지만 모두 쓰지는 않는다. 왜 그랬을까. 까닭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매체 즉 미디어가 사용할 수는 있되 주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을 대신하여 기자, PD, 작가, 감독 등 생각과 이야기, 의견과 생각을 글로 적고 콘텐츠로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인 역량이 출중하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특별한 훈련과 교육, 노력과 경쟁의 산업적 구도와 제약이 있었다. 아무나 기자가 될 수 없고 누구나 언론사 또는 제작사를 경영할 수 없었다. 모두가 공평하게 누려야 할 ‘표현’의 자유는 사실상 많지 않은 전문인들이 누리는 ‘언론’의 자유로 대리되었다.세상이 다시 바뀌었다. 디지털의 습격은 상상을 넘는다. 가시적으로 늘어난 정보의 양이 우선 놀랍다. 온라인에 없는 게 없고 모든 게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더 이상 공부와 노력이 필요없어 보인다. 읽을 줄 알지만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읽지도 않는데 쓸 필요는 이제 정말로 없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누군가 온라인의 바다를 채우고 있기에 저렇게 콘텐츠들이 있을 터이다. 그게 누굴까. 이전의 전문인들 뿐 아니라 이제는 누구나 적을 수 있다. 전할 수 있고 퍼뜨릴 수 있다. 남의 글을 퍼 올리는 게 가능할 뿐 아니라 나의 글을 바로 올릴 수 있다. 세상이 바뀐 또 하나의 대목은 바로 여기가 아닌가. 대신 만족하던 ‘언론의 자유’를 넘어 스스로 충족하는 ‘표현의 자유’가 가능해 졌다. 이를 나는 충분히 사용하고 있는가.위험은 있다. 글쓰기 훈련이 아직 모자라는가도 싶고 무엇부터 적어야 하는지 막막하기도 하다. 혹 지켜야 하는 무엇이 없는가도 궁금하고 아무나 쓰는 일이 적절한가 의문스럽기도 하다. 가짜뉴스의 위험은 이미 보이고, 시민언론의 가능성이 펼쳐지고는 있다. 15세기 인쇄술이 많은 사람을 긴장하게 했듯이, 21세기 디지털문명은 소통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가고 있다. 그 시절 더 많이 알게 된 용기있는 사람들이 개혁의 시대를 확장했듯이,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 느낌, 이야기와 담론의 단초를 드러내어야 한다. 누군가 나를 대신하여 적어내길 기다리는 일은, 빛의 속도로 변화해 가는 오늘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다. 어설프고 어색한 표현과 문장들도 거듭 두드리며 시도하노라면 다듬어 지고 나아질 터이다.인쇄술이 읽기혁명을 가져왔다면 디지털은 쓰기혁명을 당겨주었다. 더 많이 읽는 일이 가능해 졌지만 내 손으로 쓰고 다듬어 세상을 직접 상대하며 소통하는 창문이 넓게 열렸다. 세상과 어떤 글로 나누며 소통할 것인지 오늘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남이 만들어 주는 문명을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이제는 당신이 콘텐츠로 주도하는 세상을 열어주시라. 기회는 당신 손에 있으니.

2019-05-01

책맹

장규열 한동대 교수주식으로 거부가 된 워렌 버핏(Warren Buffett)이 성공에 이른 열쇠는 ‘책읽기’였다고 한다. 디지털문명의 한 가운데인 21세기, 거의 모든 정보를 온라인으로 찾아볼 수 있으며 손가락 하나로 세상의 온갖 지식을 검색할 수 있다. 그럼에도 버핏은 ‘의미있는 지식과 뜻깊은 정보는 책을 읽지 않고는 얻어 챙길 방법이 없다’고 고집하며 독서를 통하여 평생 배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세상과 너끈히 겨루며 싱싱함을 유지하는 비결 또한 책읽기라고 하였다. 하루 500페이지에 달할 정도의 독서량으로 다양한 종류의 책들을 섭렵하며 최첨단 정보를 기준으로 최우량 기업의 가능성을 판단하는 그만의 비법을 유지한다고 한다.양날의 칼. ‘지식정보시대’로 일컫는 오늘. 디지털문명이 안겨준 정보의 총량은 어마어마하다.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온라인은 정보로 이미 차고 넘친다. 정보의 양이 많기도 하지만 정보가 진화해 가는 속도를 따라잡기도 버거울 판이다. 사이버공간의 ‘초연결사회’는 인간에게 필요한 정보와 지식을 손쉽게 획득할 수 있게 하였다.그러나 과연 충분할 것인가. 컴퓨터와 영상모니터에만 심취하고 몰두하는 현대인은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만큼 정보와 지식을 챙기고 있는 것일까. 놀랍게도 이렇게 풍성한 정보습득이 간편해진 세상에 온라인검색만으로 얻지 못하는 정보가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상태를 문맹(Illiteracy)이라 불렀었지만, 디지털시대 현대인은 문맹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름하여 책맹(Aliteracy). 글을 읽을 줄은 물론 알지만 책을 읽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 표현이다.디지털정보와 영상전달에만 의존하는 사이 굳이 책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는 일이야말로 사람을 위험한 상태에 빠뜨리게 된다. 글을 따라 읽으며 자연스럽게 체득하였던 집중력과 판단력의 저하를 초래하여 급기야는 디지털로 정보를 습득하면서도 점점 더 조급해 지고 산만해 지며 인내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그런 결과, 지식듭득과 상관이 없을 평소에도 주의력에 손상이 발생하여 균형있는 인성을 유지하는 일마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한다. 디지털중독이 가져오는 책맹현상은 위험하다. 유튜브와 게임과 SNS는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는 하였지만, 그 내용과 시야를 협소하게 하고 축소해 가는 경향성을 지닌다. 디지털의 모든 특장점을 충분히 활용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책읽기를 통하여 개발되는 집중력과 분석력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을 터이다.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Bill Gates)도 소문난 독서광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따금씩 좋은 책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알리바바의 마윈(馬雲)은 성공에 이르는 동안에는 몰라도, 그 성공을 유지하려면 독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였다. 빛의 속도로 바뀌어 가는 세상에 간편한 도구인 온라인 접속에 더하여 지루하고 답답하기 할 독서에 몰입하는 일은 비효율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인간의 문명은 독서를 통하여 사고력과 분석력을 진전시키고 통합과 협력을 위한 인성의 개발도 지식을 넘는 지혜로 가득한 책을 읽음으로 구현하여 왔다.지난 세기 초반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아직 문맹이 존재하던 시절에 이미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인터넷과 온라인에 중독된 나머지 인간의 소중한 능력을 잃어버리는 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디지털문명을 더욱 꽃피우게 하기 위하여도 책의 가치를 다시 새겨야 하며, 읽는 일의 수고로움을 지켜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 제대로 알기 위하여 읽어야 한다.

2019-04-24

불!

장규열 한동대 교수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대성당이 타고 말았다. 불을 끄고 살펴보니 뼈대는 멀쩡하다지만, 쌓아올렸던 뾰족탑이 쓰러질 때에는 나라와 백성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린 듯 모든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유럽은 물론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도 같은 마음으로 불구경을 하고 말았다. 젊은 대통령이 이를 복원하겠다는 다짐을 발표하고 수다한 후원의 손길을 모은다지만 노트르담이 품었던 그간의 오랜 이야기는 이제 불꽃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다. 하룻밤 꿈처럼 그 모든 것을 지워버린 그 불길이 전쟁이나 테러의 결과였다면 차라리 덜 아쉬웠을까. 그 모습을 더욱 빛나게 하려고 보수작업을 하던 중에 속절없이 불태워 버렸다고 하니, 이를 가까이서 바라본 파리 시민들은 그 마음이 어땠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릎꿇고 찬송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표하는 모습이 가슴에 와 박힌다.850년 역사라고 한다. 역사의 굴곡과 함께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기억을 담았을까. 프랑스혁명의 그늘을 견뎌 내었으며 2차 대전의 포화도 이겨냈을 터에 최첨단을 달리는 21세에 와서 그 치솟게 세워 올렸던 뾰족 첨탑이 스러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한숨과 탄식의 한순간으로만 기억할 것인가. 일년에 1천3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관광명소이기는 해도 노트르담대성당은 성당 즉 종교성을 가져야 하는 장소이다. 하늘을 향해 뾰족하게 서있던 첨탐이 불길과 함께 스러지는 모습은 오늘 여러 모양으로 믿는 신앙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천국이든 극락이든 구원과 해탈을 기대하며 개인적인 신심을 갈고닦느라 세상과 이웃 그리고 주변과 우리들 곁에 존재하는 힘들고 어려운 모습에 눈을 감는 이들에게 던져진 경고가 혹 아닐까. 필자에게는 개인의 성취와 성공에 심취하여 무한경쟁가도를 달려가는 현대인의 바쁜 일상에 울리는 경종으로도 들린다. 세느강 건너로 불타오르는 노트르담대성당을 바라보면서 닥쳐올 위기를 실제로 만나면 함께 무릎꿇을 수 밖에 없음을 스스로 미리 보여준 일이 아니었을까. 미세먼지, 대기오염, 지구온난화, 핵위험 등 인류가 공유하는 큰 문제들 앞에는 결국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동체가 살아나지 않고는 이들 과제를 극복할 방법이 없을 것임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오해와 왜곡을 거듭해 가며 차별과 혐오를 무기삼아 내 편과 네 편을 끊임없이 가르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는 인간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한 자락 불길 앞에도 속절없을 것임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을까.한 가지 신통한 기억은 맹렬한 불길 앞에는 오른쪽과 왼쪽이 따로 보이지 않았다. 시답잖은 시빗거리가 많은 듯 하여도 정말로 중요하고 진실로 급한 일에는 이념이 다 무언가 싶게 떠오르지도 않는다. 이웃과 공동체, 사람과 사회를 정말로 세우고 살리는 일에는 보수도 필요하고 진보도 있어야 한다. 정말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정치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도 배워야 한다. 모두에게 잔인하였던 4월의 기억 앞에 오히려 겸허하게 ‘대한민국 공동체’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깎아내리고 밀어내는 정치 대신에 격려하고 함께 더하는 정치를 만나고 싶다. 실수와 과오를 살펴 반복하지 않게 할 일이며, 성과와 성취는 더욱 살아나도록 부추겨야 할 터이다.밥도 짓고 쇠도 붙이는 불꽃이지만 한 숨 불길은 순간에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 열정의 불꽃으로 세워 올리지만 무너뜨리는 불길도 분명히 보았다. 지어 올릴 때에 성실하게 열심히 해야 하지만 소중하게 지키는 일도 만만치 않음을 생생하게 보았다. 개인의 각성과 노력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필요와 할 일도 목격하였다. 잘 만들어야 하고 잘 지켜야 한다.

2019-04-17

산불과 지진

장규열 한동대 교수장래 희망이 ‘소방관’이라는 어린이들이 꽤 있다고 한다. 오늘처럼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세상에 거칠고 험한 뉴스들이 흘러넘쳐도, 화마(火魔)로부터 사람들과 재산을 지켜주는 모습이 어린이들의 눈에도 감동을 주는가 보다. 동해안을 할퀴고 지나간 산불은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와 상처를 남겼으며 정부와 지역공동체에 수다한 숙제를 안겨주었다. 계절적으로 건조한 공기와 때마침 불어오는 광풍에 급속하게 번져가는 불길을 하루 만에 막아낸 모든 이들의 수고와 헌신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지난 수년간 우리에게 여러 모양으로 학습효과를 남긴 ‘안전’을 생각하는 사회 일반의 경계심이 이번 산불로부터 인명과 재산을 지켜내면서 시험대에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이번 산불지역과 유사한 지리적 계절적 환경을 가진 여러 지역들에서 이번보다 훨씬 큰 피해를 남겼던 사례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이번에는 천만다행의 경우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소방 공무원들과 산림청 특수진화대 등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막아낸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전국 각지로부터 출동하여 강원도의 산불을 함께 막아낸 이번의 경험은 아직도 우리에게 ‘함께 호흡하는 공동체’를 이루어낼 희망의 불씨가 남아있음을 확인하는 계기이기도 하였다. 더없이 경쟁적이며 필요 이상으로 다투기만 하는 세상의 모습 가운데에도 어려움을 당한 이웃을 위하여 모두의 가슴과 손길을 모았던 기억을 오래오래 간직했으면 한다. 공동체를 위협하며 다가오는 위험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으며 빈부를 구분하지 못하고 좌우를 차별하지도 않는다. 안전한 사회를 이루어 가는 일은 모두가 공평하게 안아야 하는 짐이 아닌가.‘포항지진’도 지역의 공동체가 공평하게 지혜를 발휘하여야 한다. 이를 두고 이념으로 덧칠을 하거나 진영의 정치적 이득을 생각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지역에 닥쳤던 우리 모두의 불행이며 모두에게 함께 닥쳤던 피해였음을 기억하면서 이를 어찌 함께 극복하고 새로운 지역공동체로 나아갈 것인지 생각을 모았으면 한다. 이를 잘못 다루어 자칫 갈등과 불화의 빌미가 된다면, 지진으로부터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2차 피해를 모두가 떠안을 참이다. 책임의 소재를 차분히 가려내고, 피해정도에 상응하는 적절한 보상과 배상방법을 찾아내며, 포항의 미래를 열어가는 회복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일련의 모색과 구상의 길에는 지역 공동체가 상식과 지혜를 모아 우리 지역이 이전보다 더욱 맑고 밝으며 미래지향적인 도시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보통 시민의 눈에는 산불에도 지진에도 담론을 진영의 울타리에 가둘 까닭이 없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불이 난 자리에 달려가 힘을 합친 끝에 그나마 다행스런 결과를 보지 않았던가. 지진으로 무너진 지역의 경제와 심사에 우리도 한번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 슬기로운 결과를 맞아볼 수는 없을까. 내 편과 네 편이 따로 있을 까닭이 없으며 편을 가른다 하여 더 챙길 이득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이제껏 혹 따로 앉아 생각을 모아왔다면, 이제라도 무릎을 맞대고 앉을 자리를 마련해 보면 어떨까. 지진 담론에 진영의 논리가 끼어들지 말아야 하는 까닭은 의외로 소박하다. 지진도 결국 ‘안전’과 뗄 수 없는 사안이 아니었던가. 커다란 충격과 혼돈을 겪은 터이라 격한 감상과 아픈 기억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지역의 미래를 세우기에 속좁은 진영논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폭넓게 바라보고 더 멀리 내다보는 시선의 지평을 가져야 한다.산불을 막아내며 공동체 회복의 가능성을 엿본 김에 지진을 딛고 일어서는 길에서 이 지역의 ‘공동체’가 다시 살아나기를 기대해 본다. 지역은 내 것일 수도 없고 네 것일 수도 없다. 포항은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닌가.

2019-04-10

망친 교육, 살릴 교육

장규열 한동대 교수독일의 철학자 한스게오르크 가다머(Hans-Georg Gadamer)는 교육의 핵심이 ‘자기교육’에 있다고 하였다. 교육은 사람이 더 나은 사람으로 변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가족, 친구, 교사들을 만나고 타인과의 다양한 공동체적 관계를 가지지만 교육의 요체는 결국 스스로 자기도야(自己陶冶)의 길에 서도록 돕는 것이라 하였다. 교육의 성패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경험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내가 무엇을 어떻게 배우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끊임없이 새로운 세상을 만날 것이므로, 이를 조화롭게 받아들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였다. 즉, 교육은 ‘낯선 것과의 만남을 통하여 스스로를 도야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교육이 해야 하는 일에 대하여, 결국 두 가지 가닥이 손에 잡힌다. ‘스스로’ 찾아가도록 돕는 일과 그런 길에서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 최근 보도에 따르면,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그들의 자녀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하여 여러 모습으로 개입하면서 부적절한 힘을 사용하여 불공정한 결과를 빚어낸 일이 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앞이 캄캄하던 기억들이 대개 있을 터이다. 사방이 적으로 막힌 듯 숨쉬기도 버겁던 나날을 어렵게 힘들게 통과하여 오늘에 이른 어른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렇게 수다한 고뇌와 난관을 지나왔기에, 오늘 여러 모양으로 삶을 이어가며 보람을 나누는 인생의 선배들이 있지 않은가. 당신의 자녀들에게 그런 수고의 의미와 결실의 기쁨을 맛보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인가. 당신의 알량한 권력을 부당하게 사용하여 결국 교육을 망치고 싶은 것인가.작은 것이라도 ‘스스로’이루어가는 보람은 또 얼마나 즐거운 기억과 가슴 뿌듯한 보람을 남기는가. 두드려도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듯한 그 기회의 문은, 도전하는 이의 간절함과 수고의 크기에 비례하여 반드시 열리게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신같이 비신사적이며 몰상식한 어른이 개입하여 그 질서를 무너뜨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당신 자녀의 교육과 앞길을 망칠 뿐 아니라, 오늘도 성실하게 내일을 준비하며 공정한 겨룸을 기대하는 수많은 젊은이의 미래마저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당신은 한 마디 사과조차 없이 이 또한 지나갈 것으로 기대하며 숨죽이고 있는가.두 번째 가닥. 저렇게 하면, 당신의 자녀가 ‘타인과의 공동체적 관계’를 순조롭게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시는가. 오늘 수많은 다른 젊은이들이 들이는 수고와 노력을 그들은 경험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공유하는 시간의 기억과 함께 느끼는 공감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남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을까. 남들과 나눌 그 무엇을 상상도 못할 터에 함께 호흡하고 소통하는 공동체를 어찌 만들어 갈 것인가. 당신은 자녀의 교육을 망쳤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기틀을 병들게 하였다. 당신이 가진 그 힘으로 공동체의 가능성을 깨알처럼 허물고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렇게 하여 어지러워질 세상의 불공정함을 당신은 어떻게 대하려 하는가. 이쯤해서 이 땅의 청년들이 이제는 공동체를 온당하게 회복하도록 도와주실 생각은 혹 없으신가.세상은 험하고 시간은 거칠다. 내일을 기대하며 갈고닦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험하고 거친 세상과 시간을 이겨내길 기대한다. 그 이겨낸 끝에 함께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마음껏 이 땅의 부조리와 불공정을 바꾸어 주길 바란다. 당신이 이겨낸 시간은 바뀐 세상으로 보답할 것이며, 그러는 사이 당신은 누구도 몰라볼 만큼 자라있을 것이다. 교육은 사람이 ‘스스로’ 배우게 하여야 하며 ‘공동체’를 건강하게 키워내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교육이 살려야 하므로.

2019-04-03

기회인가 위기인가

장규열 한동대 교수포항지진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한 낮 수업을 위해 이동하던 중 건물 안 계단에서 맞았던 격동과 충격. 밖으로 정신없이 빠져 나오면서 목격하였던 쏟아지는 담벼락과 혼란으로 가득했던 아우성. 다른 곳에서 겪었던 지진의 기억이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강하였던 진동과 불안. 함께 겪어야 했던 학생들 걱정과 집에 두고 온 가족들 염려. 지진 이후 언론의 보도와 함께 모아진 전국적 관심. 연기되었던 수능. 무너진 아파트들과 아직도 그 곳에 서 있는 이재민 텐트들. 꽤 시간이 흘렀지만 포항지진의 충격과 그로부터의 회복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런 지진이 ‘자연재해’가 아니었다는 공식 발표는 지역의 민심을 다시 들끓게 한다. 이를 어떻게 수용하여야 하는지 또 그에 따른 해결의 가닥은 어떻게 잡을 것인지 생각들이 봇물을 이룬다.포항지진이 ‘촉발지진’이었다는 발표를 포항의 회복과 새로운 발전 그리고 도약의 기틀로 삼아야 하며 이는 그 어느 진영논리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은 분명히 옳다. 즉, 이는 우와 좌의 문제가 절대로 아니며 포항지역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미래지향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언급하는 이의 의견 가운데 은근히 어느 진영의 주장이 실리며 상대 진영에 대한 질타가 감지되는 일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포항의 위기에 대하여 걱정하면서 사심(私心)없이 수고해 온 분들도 즐비한 가운데 정치권의 힘을 배경으로 한 주장이 지역을 덮으려 하는 일도 경계하여야 한다. 선동적 외침이 적힌 가로펼침막과 누군가 준비한다는 궐기대회도 꼭 필요한 일인지 생각이 복잡하다. 까닭없이 한 편에 설 수 없는 보통 시민은 무엇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혼돈스럽기 짝이 없다.오늘 우리의 자리를 분명히 설명하고 내일을 향한 가능한 계획이라도 누군가 조목조목 내어놓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포항이 위기를 극복해야 하며 지역의 내일이 오늘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한 자락만 붙들고 성실하게 생각하고 일하려는 이들이 없지는 않을 터에, 지역은 무슨 까닭으로 진영에 휘둘리는가. 무슨 속셈으로 함부로 편을 가르는가. 모두가 한 마음이어야 하지만, 모두가 똑같은 생각일 까닭은 없다. 다양하고 풍성한 생각과 의견들이 청취되고 조율되어 지역이 화합하고 소통하는 내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어느 한 가지 생각을 정해놓고서 그만을 따라가자는 주장도 시민에게는 피곤할 뿐이다. 모두 내어놓고 함께 지혜를 모으도록 서로 도울 수 없을까.정적(政敵)이었던 보수진영 정치인의 장례식에 참석한 진보진영 오바마 전 대통령이 ‘우린 서로 엄청 싸웠지만 결국은 한 편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수다한 정치적 결정과정에서 끊임없이 맞섰지만, 이루고 싶었던 일은 결국 나라와 국민이 잘 되는 일 그 한 가지였다는 고백이 아니었을까. 포항과 지역의 발전이 진정 당신의 바람이라면, 진영의 논리가 두드러지는 일은 거두어 주셨으면 한다. 지진으로 겪었던 아픔과 상처가 이념의 색깔 탓에 오히려 덧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동안 욕심 한 자락 없이 수고해 온 분들의 목소리와 의견이 더 많이 들려지도록 배려했으면 한다. 전문성과 진정성이 실린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제안들에 자리를 더 많이 내어 주어야 한다.그간 의심하며 궁금하였던 ‘지진지역’의 오명이 씻기운 것이 참으로 반갑다. 이제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문제의 책임소재를 밝히는 일도 중요한 일이지만, 내일을 밝히는 일과 뒤섞이면 그도 어지럽다. 위기를 극복하고 미래를 여는 일은 지역의 손에 달려있다. 지역의 역량을 조화롭게 모아내어 포항이 글로벌 도시로 도약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해 본다. 포항, 파이팅!

2019-03-27

이게 사회냐

장규열 한동대 교수오늘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을까? 무엇을 누구에게 어떻게 배워 지금 내가 된 것일까? 학교에서 책으로 배우고 집에서 부모에게 익히며 친구들, 선생님들, 지인들과 전하고 나누며 새기고 다져진 결과물이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닐까. 세상의 온갖 소식들을 전달하는 미디어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언론과 미디어가 호기심과 알 권리를 채워주는 덕에 배우고 깨닫는다. 산더미처럼 쏟아지는 뉴스와 익힐 거리들의 의미를 전해 들으면서 배우고 깨우친다. 배우고 익혔던 대로 펼쳐지는 일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와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전개되는 현실에 절망하기도 한다.바람처럼 일어나 지금도 번져가고 있는 ‘미투(Me-too)’현상은 사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 주었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성인지 감수성’의 실체를 보여 주었다. 상대가 누구든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여야 하며 상대를 그 어떤 도구로도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깨우치고 있었다. 성희롱, 성폭력 등 민감한 성적 이슈에 대하여는 지극히 조심하여야 하며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기 어려울 것임을 배우고 있었다. 이를 비웃기라도 했었을까. 버닝썬, 장자연, 김학의 사건으로 불리는 뉴스들이 알려지면서 그 모든 운동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우리에게 있어야 할 도덕적 기준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공적인 기대는 듣고 배웠던 것과는 어쩌면 이렇게 멀리 있었던 것일까.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되면 저토록 무너진 인성을 보란 듯이 발휘해도 되는 것인가. 배경 든든한 공권력도 얼마든지 내 편 만들어 바람막이로 쓸 수 있는가. 권력은 결국 자기들끼리 한 편이 되어 버리는가. 언론도 때로는 돈과 힘을 따라가는가. 아직도 여성은 남성의 폭력에 힘없이 무너지는가. 이런 판에 피해자가 궁금한 당신은 또 누구란 말인가. 지위가 높았으면 이 정도 드러나도 별 일없이 지낼 수 있는가. 등장인물 저들은 과연 공인인가 마귀인가. 대통령이 나서야 겨우 손볼 만큼 가벼운 일인가. 이런 일로 우리는 공소시효를 따져야 하는가. 이런데도, 아직 뒤에 숨어있는 당신은 누구인가.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지 고민할 일인가. 이게 이념의 오른쪽 왼쪽을 가릴 일인가. 함께 보고 있는 다음 세대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숨길 길은 없다. 그들이 무엇을 배우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는가.사람은 배운 대로 자라지 않는다. 사람은 본 대로 자란다. 하염없이 가르쳐도 한 순간에 날아간다. 앞에 선 이들이 보여준 삶의 모습은 따라오는 세대에겐 치명적이다. 예절과 격식을 배웠어도 성욕과 폭력이 앞설 터이다. 성실과 진심을 가르쳐도 힘과 돈으로 살아갈 터이다. 정직하게 살자고 하면 눈가림으로 막아설 것이다. 실력을 쌓자고 하면 폭력을 길러내지 않을까. 좋은 친구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치면 권력의 실세들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더불어 잘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면 패거리 문화건설에 집착하지 싶다. 이성을 배려하자고 하면 여성을 범할 궁리만 하고 있을까. 병든 사회를 바꾸어 보자면, 당신이나 잘하라는 빈정거림으로 돌아오지 않을까.겨우 대통령이 나서는 것으로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이 또한 지나갈 것으로 기대하는 저 냉소가 보이지 않는가. 오늘의 심대한 도전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결연히 ‘사회문제 공론화’에 나서야 한다. 미래로 당당하게 나아가기 위하여 좌도 우도 없이 모두 나서야 한다. 노인은 당신의 지혜로 앞서야 하며 청년은 당신의 패기로 나서야 한다. 못난 정권에 ‘이게 나라냐’며 일어섰던 기개를 일그러진 사회에 다시 던져야 한다.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 어떤 나라를 물려줄 것인가.

2019-03-20

함께 할 수 있을까

장규열한동대 교수1992년 봄, 온 미국을 뒤흔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L.A. Riot)’. 흑인 운전자 한 사람을 단속하던 백인 경찰 네 사람이 사정없이 때렸던 영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촉발된 도시소요.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계를 망라하는 유색 인종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성찰하는 기회가 됐고, 지역의 한국교민들에게도 여러 형태의 피해를 입히며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서 거듭 경계심을 가지게 했다. 이후 법정다툼에 불려나온 피해 당사자 로드니킹(Rodney King)은 증언과정에서 이 모든 혼란과 소란에 혼란스러운 심경을 한 마디로 요약하며 울부짖었다. “우리 그냥 좀 어울려 살 수 없겠습니까? (Can we just get along?)”그는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차별적 조건을 극복할 방법이 이렇게도 없겠냐는 그 나름대로의 안타까움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차별적 조건을 찾아내며 끊임없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해 내는 능력은 인간이라면 거의 본성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피부가 다르고 출신이 다르며, 성별이 다르고 성씨가 다르며, 혈액형이 다르고 키와 몸무게가 다르다. 겉으로도 다르고 속으로도 다르다. 생각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며 이념이 다르고 사상도 다르다.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모습과 속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와 국가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이상 어우러져 살아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흑인 피해자 한 사람의 저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가. 우리는 어울려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다르다’는 데서 출발해 ‘틀리다’는 생각에 이르면, 자칫 구별을 넘어 차별하게 되고 혐오하게 되며 배척하게 되어 폭력과 불공대천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같은 파국에 도달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절하고 조정하며 견제하고 경계하도록 우리에게는 ‘정치’라는 장치가 있다. 정치는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이기는 하지만,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일을 하도록 국민이 맡겨준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 정치인들은 그렇게 하고 있는가. 정치인이 뱉어낸 말 한마디가 조정과 질서를 불러오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인들 사이의 단절과 반목의 도화선이 되어 사회 일반의 분열과 등돌림의 발화점이 된다면 그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싸움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신은 접점을 찾아내는가, 아니면 분열을 조장하는가.사회공동체가 조정과 타협을 통해 잘 굴러가도록 돕는 또 하나의 기제가 ‘언론’이다. 언론은 사실을 밝혀 알리는 일을 통해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을 하면서, 민주주의가 실제로 구현되도록 사회적 공론의 장과 대화의 마당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 독자의 관심을 끌거나 충격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에 머물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기초가 될 접점을 모색하고 해결책에 접근하는 대화의 토대를 불러와야 하지 않을까. 그간 언론이 문제를 알려내는 데 기여해 왔다면, 앞으로는 해결을 이끌어내는 일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서구의 언론은 대안저널리즘, 지혜저널리즘, 또는 해결저널리즘 등의 표현을 써가며 새로운 시도에 나섰다고 한다. 남은 어차피 다르다. 남은 언제다 다르다. 그 다른 모습과 생각을 다른 그대로 인정하고 보듬을 수 있을 때에 민주주의로 가는 첫 걸음이 비로소 놓아지는 것이다. 다른 그대로 놓아두면 틀림없이 갈등이요 분열이었을 것을, 정치가 조정하고 언론이 담아낼 때에 대화와 타협이 가능해진다. 정치와 언론이 뿔뿔이 흩어놓는 일은 이제 그만 보았으면 한다. 정치와 언론으로 인해 다른 생각들이 더 당겨 마주 앉아야 한다.

2019-03-13

어린이교육, 내일을 연다

장규열한동대 교수3·1운동의 뜨거운 물결이 한차례 지난 후, 1920년대 초반 민족과 나라의 미래를 오히려 긴 안목에서 바르게 세워갈 길은 어린이를 바르게 기르는 데 있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소파(小波) 방정환. ‘어린이’라는 표현을 처음 쓴 것으로 알려진 그는 어린이의 윤리적, 경제적, 민족적 독립(해방)을 주창하였으며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여야 하고 민족의 미래와 희망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가 적은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에는 “어린이들을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라고 권하며 어린이를 바르게 기르는 일이 무엇보다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해 어린이에게 10년을 투자하라”고 했다는 것이다.나이지리아 속담에 ‘아이를 기르는 일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It takes a whole village to raise a child.)’고 하였다. 온 가족과 이웃, 학교와 동네가 한결같은 성심과 정성을 기울여야 비로소 바른 인격체 하나가 만들어 질 수 있음을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을 길러내는 일을 교육이라 할 때에, 교육은 그 대상이 어릴수록 더욱 힘들고 그 뜻이 훨씬 무겁다. 어린이교육 가운데에도 유치원교육과 영유아교육에 관심이 가는 까닭도 바로 그래서일 터이다. 로버트 풀검의 베스트셀러 어린이 교육 관련 책은 제목을 아예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유치원에서 배웠다(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고 붙였다.사람은 태어난 직후부터 정신과 정서의 발달이 시작되어 첫 3년 이내에 기초적인 뇌와 신경의 발달이 역동적으로 진행되며, 생애 첫 8년 안에 자의식과 자존감, 학습태도와 정서감각, 관계형성능력과 개인적 태도형성이 모두 완성된다고 한다. 유치원교육을 통하여 이후의 학습과 성장에 필요한 준비가 거의 다 이루어지며 사람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태도와 소양이 모두 길러진다는 것이다. 향후 초중고등 교육에 임하기 전에 배움과 성장을 향한 열정의 강도가 바로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토록 중요한 영유아교육과 어린이교육에 관하여 우리는 어떠한가. 어린이들을 길러내는 일에 저 만큼의 신중함과 한결같음이 우리에게 존재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최근 한국유치원총연합회가 영문도 모르는 어린이들을 볼모로 어른들의 주장을 관철하려 했던 일은 사안의 내용과 그 시급함을 차치하고라도 좋지 않은 여론을 스스로 불러온 꼴이 되고 말았다. 단 하루의 혼란으로 막을 내리긴 했지만, 긴긴 방학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심대한 혼란과 불안감을 안겼을 터이다. 아이들을 앞세우기만 하면 현실에 쫓기는 어른들의 심사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면,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었다. 그런 태도야말로 어린이들과 학부모들을 쳐다보지 못하고 내려다 보는 구습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제라도 어린이들의 내일과 나라의 백년 앞을 내다보는 교육의 첫 마음을 되새겨 어린이교육의 소중함을 다시 세워주기를 요청하고 싶다.철학자 칸트(I. Kant)는 ‘인간은 오직 교육에 의해서만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여러 단계의 교육 가운데 가장 무거운 소명과 책임을 느껴야 할 영유아교육과 유치원교육에 관하여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 어린 사람들을 상대로 하므로 보다 높은 기대를 걸어야 하고, 순결한 마음 밭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므로 더욱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한다. 교육이 ‘백년대계’를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 첫 걸음이 될 어린이교육이 바로서야 한다. 소명에 따라 헌신하시는 모든 선생님들이 오늘 힘내시기를 응원해 드린다. 어린이교육이 미래를 연다.

2019-03-06

건강, 돈, 그리고 행복

장규열 한동대 교수최근 발표된 건강국가지수(Health iest Country Index)에 따르면 한국은 17위에 머물렀다고 한다.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의 위생상태와 기대수명, 수질과 환경을 종합적으로 감안하였으며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싱가포르가 10위권에 들었다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유럽 국가들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였으며 미주국가들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미국은 35위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1위를 차지한 스페인에서는 국민들에게 무료로 모든 1차진료를 제공하며 질병치료 보다는 질병예방, 식습관 관리와 건강환경 유지 등에 초점을 맞춘 보건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매슬로우(A. Maslow)의 ‘인간욕구 5단계’에서 가장 기초적인 욕구가 ‘생리적 욕구’임을 볼 때 건강국가지수는 이들 나라에서 국민들이 행복을 위한 기초적인 조건을 어떻게 확보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건강과 더불어 생존을 위하여 경제적인 뒷받침이 따라야 할 터이다. 건강이 제공하는 에너지와 함께 보다 나은 경제력이 삶을 지탱하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인생을 구가할 것으로 생각한다. 국가 간 경제성장의 상대적인 차이를 비교하고 정부의 성공여부를 가늠할 때에도 주로 국민총생산과 소득수준을 기준으로 평가하곤 한다. 일반적으로 소득이 높으면 보다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것으로 생각한다. 여러 사회적인 문제와 갈등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부터 비롯되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어느 건강하고 부유해 보이는 부인이 남편과 아이를 향해 던지는 고성과 폭력이 담긴 동영상은 건강과 재력이 인간 행복의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있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하였다.영국의 신경제재단(New Economics Foundation)은 생각이 다르다고 한다. 인간의 삶은 건강하고 돈이 많아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스스로 삶을 어떻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 직접 물어보아야 하며 돌아오는 답변에 따라 정부와 관련 공동체들이 적극적으로 반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세기 동안 중앙정부와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경제체제는 불공정한 결과들만 만들어 온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함께 문제점을 발견하며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하여 경제시스템을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2010년 신경제재단이 발표한 ‘국가별 행복지수’는 놀랍게도 아시아의 작은 나라 ‘부탄’이 지수 상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하였다. 소득수준과 성장중심 사고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사뭇 생경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최근의 사건을 접하면서 다시 들여다 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건강과 돈만으로 행복해 지는 것은 일단 아닌 것으로 보인다. 조금 양보하여 건강과 재력이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기는 하는가 보다. 매슬로우도 이들을 일차적 욕구로 지적하였으니까. 그의 이론은 ‘5단계’를 제시하였다. 건강과 생리적 욕구를 넘어, 안전, 소속, 존중, 그리고 자아실현의 욕구들도 적절히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들 높은 수준의 욕구들은 거의 모두 그 어떤 객관적인 조건변수로 확보된다기 보다는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과 의지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와 견주어 나의 삶과 조건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묻고 답하는 가운데 결정되는 것이 ‘만족’이며 ‘행복’이라는. 그런 결과 미진한 부분이 발견되면 공동체적으로 반응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권고가 뒤따른다. 결국, 삶의 주인은 나 자신이며 행복한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스스로였다는 것. 건강해 보이고 또 부유하다고 알려졌어도 어느 한 구석 행복하지는 않아 보이는 저 여인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삶은 나의 것이다. 행복은 내가 만든다.

2019-02-27

교육이 살린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우리 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우리 사회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면 볼수록, 결국 ‘교육’에 기대를 거는 수 밖에 없다고 한다. 다 자라버린 기성세대에게 무엇인가 새롭고 신선한 감동을 바라기보다 이제부터라도 다음 세대를 제대로 가르쳐 이 나라의 미래가 밝고 맑게 펼쳐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미래 세대를 맡아 기르는 선생님들에게 높은 기대를 거는 것이고 그들이 가꾸어낼 후손들에게 이 땅의 장래를 걸어보고 싶은 것이다. 오늘 펼쳐지는 우리 교육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학생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경험하는 교육에 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학생들이 즐겁게 배우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배우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과연 펼쳐질 수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교육을 통하여 나라와 사회는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최근, 이 나라에서 교육을 받는 학생과 아동들이 그들이 받는 교육에 관하여 연구하고 정리하여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가 있다. 4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해 우리 교육현장 경험에 대하여 작성한 ‘유엔아동권리협약 이행 대한민국 아동보고서’의 내용은 이를 처음 접한 유엔 인사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터이다. 길고긴 학습시간, 틀에 가둔 듯 억압적인 학습환경, 성적과 평가에 따르는 학업스트레스, 놀 권리를 박탈당한 재미없는 학교분위기, 대학입시가 교육목표인 교육현실. 보고서의 부제목 ‘교육으로 인해 고통받는 아동’은 우리 교육현장에서 교육수혜자여야 할 학생들이 겪는 아픔과 상처를 요약해 주고 있다. 교육으로 인해 당연히 있어야 할 즐거움과 희망은 어디가고 학생들의 마음에 ‘고통’만 기억된다니 이를 어찌해야 하는가.이들은 보고서의 결론으로, 교육현장에서 적절한 학습시간과 함께 휴식과 여가가 함께 주어지길 바라고, 시민적 권리와 자유가 보장되길 기대하며, 공교육이 본연의 소임과 기능을 회복하여 교육격차에 따라 당한 차별과 억압이 사라지길 원하며 교육의 목표가 대학입시가 아닌 다양한 기회와 폭넓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교육이 되어주길 희망한다고 하였다. 드라마 ‘SKY캐슬’은 실제 상황이며 이를 지혜롭게 극복할 방도를 교육계는 찾아야 한다. 보고서를 받은 유엔은 이에 대하여 한국사회를 향한 ‘권고안’을 마련하여 이행을 촉구할 것이라고 한다.우리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 성적에 따라 줄세우고 차별하는 교육을 벗어나 ‘사람을 기르는’ 교육의 소명을 회복하여야 한다. 학생들 사이에 경쟁과 반목을 조장하는 교육 분위기를 탈피하여 ‘나를 이기는’ 진정한 경쟁의 의미를 가르쳐야 한다. 실력을 길러 성공만 지향하는 교육을 넘어 소양과 기량을 길러 개인이 잘될 뿐 아니라 이웃을 돌아보는 넓은 도량을 기르도록 이끌어야 한다. 국가 간 울타리가 사라져 가는 마당에 세상을 품는 ‘글로벌 시민’을 길러내야 한다. 대학입시에 성공하는 것으로 끝나는 교육을 넘어 평생 배우고 가르치는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나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하는 만큼, 이웃과 더불어 조화롭게 사는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일등만 대접받는 교실을 벗어나 한 사람도 놓고가지 않는 교육을 구현해야 한다.학생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보고서를 작성했을까. 하마터면 그냥 그렇게 ‘고통’만 겪었을 일을, 이렇게라도 깨우치게 되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 학생들의 용기가 계기가 되어 우리 교육이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가길 기대한다. 지적이 따끔했던 만큼, 분명히 바뀌어 갔으면 하는 것이다. 이제는, 교육으로 인해 ‘일어서는’ 아동을 만나고 싶다. 정치과 경제, 사회와 문화가 걱정을 끼치는 자리에 교육이 분명한 소망과 열쇠를 선사해 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무너진 세상을 교육이 살려야 하므로.

2019-02-20

사실과 해석

장규열한동대 교수시카고의 유력일간지 시카고트리뷴(Chicago Tribune) 본사 편집국에는 커다란 현수막에 ‘어머니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거 확인해!’ 라고 적어 걸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라도 언론사 기자는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여야 함을 강조하는 한 마디일 터이다.실제로, 일선 기자들이 취재와 보도를 위하여 기사작성에 나설 때에 상급자로부터 가장 흔하게 듣는 소리가 ‘확인했어?’인 것이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하고 그를 토대로 글을 적었는지를 묻는다. 일이 벌어진 현장에 가서 손수 확인을 하든지 아니면 믿을 만한 복수의 소스를 근거로 분명히 확인을 한 다음에야 책임있는 기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이 흔들리면 기사를 읽는 독자는 심각한 혼란에 빠질 위험에 처한다.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작 영화 ‘라쇼몽(羅生門)’은 녹음이 우거진 숲 속에서 벌어진 어느 사무라이의 죽음을 놓고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이 모두 서로 다른 증언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 사건을 놓고도 사실에 분명히 근거하지 아니하고 상상과 해석이 앞서고 자기 생각이 버무려 질 때에 벌어질 수 있는 혼돈과 혼란을 절묘하게 그리고 있다. 모든 담론은 움직일 수 없는 객관적인 사실을 토대로 하여야 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생각과 의견이 사실에 앞서 개진되어 두드러질 때에 토대가 되어야 할 사실은 그 힘을 잃고 진실에 이를 방도는 사라지게 된다. 그런 끝에 허무맹랑한 주장과 고집이 판을 치게 된다. 개인적인 생각에 머물 것이면 몰라도, 사회적으로 영향을 끼칠 담론의 전개가 필요한 사안들에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며 그 확인은 필수인 것이다.어느 공당의 대표가 ‘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해석이 정말로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인지 확인되어야 한다. 혹 그 사실이 객관적으로 검증되고 확인되지 않았다면 그를 토대로 한 해석은 모두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혹 ‘사실확인’에 관하여 철저하지 않은 채, 섣불리 해석으로 나아간다면 벌어질 수 있는 그 모든 오역과 오해는 어찌할 것인가. 듣자 하니, 그가 언급한 사안은 이미 여러 각도에서 확인된 바 언론과 법원 등의 검증이 이미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덜 확인된 채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되는 일이 이제는 없었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이미 정리되고 정돈된 마음에 혼란과 분노를 더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현대 언론에 있어 기사작성은 이제 객관적인 사실의 기계적인 전달과 공정한 보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안과 사건에 대하여 기사와 논평은 얼마든지 기자와 저자의 양심과 양식에 따른 해석과 담론의 전개를 가능하게 한다. 책임있는 의견의 개진과 분명한 주장의 표출도 현대 언론에게는 당연히 가능하다. 다만, 기본은 그 모든 생각과 표현이 ‘확인된 사실’에 근거한 것이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출처가 중요하고 근거가 필요하며 확인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아니면 말고’식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그래서 위험하다. 언론이든 정치든 우리 사회에 사실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사라져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상의 자유가 물론 소중하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개진함에 있어서는 꼼꼼하고 신중한 사실의 확인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다.개인 독자로서 기사와 담론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읽고 접하는 글과 생각들이 과연 ‘사실’에 근거한 담론들이었는지 살피며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디지털문명은 현대인의 삶에 편리함과 풍요로움을 가져왔지만, 정보의 더미 속에 자칫 ‘사실확인’에 소홀하게 만드는 위험도 함께 도사리고 있다.해석에 앞서 사실을 살펴야 한다. 사실을 토대로만 해석할 일이다.

2019-02-13

설날생각

장규열한동대 교수새 해를 맞는다. 신정을 보내고 다시 맞는 설이라 낯익고 반갑다. 날마다 똑같은 날들이었을 것을, ‘새 해’라 부르며 매듭을 짓고 새롭게 시작할 생각을 어떻게 하였을까. 살아가는 동안 세파에 쌓여가는 주름과 시름을 훌훌 떠나보내고 새 날을 맞는 다짐으로 다시 시작하는 일은 얼마나 지혜로운가. 개인도 나라도 회사도 학교도 설 명절 몇 날을 보내며 새 기운을 다지고 싱싱한 각오를 새롭게 채운다.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네 삶이 기름져 가고 풍성해 지기를 모두 기원하며 새 해를 맞는다. 서로서로 다들 모든 일들이 잘 풀려가기를 소원하며 덕담을 나눈다. 나라가 잘 되고 개인이 행복하며 사업도 번창하기를. 적폐라 부르며 딛고 일어서기를 원했고 새 날이 오면 모든 게 잘 돌아갈 것으로 기대하였다. 올 한 해도 무엇이든 잘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누구나 한결같을 터이다. 하지만, 왠지 자신이 없다. 왜 그러는 것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갈수록 나아져야 하는데, 갈수록 서 있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것일까. 우리 집만 그런 것일까. 이게 나라냐 물으며 밝혔던 촛불이었는데, 바로 잡혀 모든 게 좋아졌는가 물으면 돌아오는 답들이 신통치 않다.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수많은 사람들을 묶어서 부를 적에 ‘대중’이라 표현하였다. 큰 무리의 사람들을 통칭하여 부르면서 좋은 리더 한 사람이 멋진 생각을 던지면 모두 함께 따라올 것으로 기대하였다. 실제로 한 때는 그러기도 하였다. 일치단결과 국민총화를 던지고 많은 사람들이 화답하기도 하였으니까. 하지만, 그 시절 그들이 놓쳤던 생각은 ‘민중’이었다.대중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사이에 희생하고 억눌리며 빼앗기고 힘든 백성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새기면서, 천천히 가도 모두 함께 가자는 생각으로 ‘민중’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소수의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나아져 가기를 기대하였다. 더불어 잘 살아본다는 생각이 뿌리내릴 것으로 설레기도 하였다. 다시는 소외와 차별을 겪지 않으며 함께 성과와 결실을 나누기를 꿈꾸었었다. 이끄는 리더들이 민중을 섬기며 낮은 자리로 내려올 것이었다. 덜 가진 사람들을 향한 배려와 나눔이 풍성해 질 터이었다. 보통사람들이 어깨를 펴는 날이 가까워질 것으로 기대하였다. 조급해서 그런 것일까 그런 세상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새 해는 나아질까 기대도 하고 혹 희망고문이면 어떻게 하나 우려도 된다. 이념의 방향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세상의 좋은 생각들을 폭넓게 담을만한 큰 그릇이 필요하다. 지극히 소수의 극우와 극좌를 빼고 나면, 보통 사람들은 모두 오른켠과 왼켠 사이의 어디쯤에 있다. 안보에 관해서는 지극히 보수적인 사람이 교육에 관해서는 매우 진보적일 수 있지 않은가. 아니, 그 한 사람도 한 가지 이슈에 대하여 한 때는 보수적이었다가 시류에 따라 얼마든지 진보적으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정치권이 사람들을 이념의 틀 안에 가두는 일은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그래서 쓰이는 표현이 다중(Multitude). 끈끈하고 든든한 연결고리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SNS 등의 약한 연결을 가진 사회집단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대중 또는 민중처럼 구심점을 공유하지 않으며 특정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함께 행동하면서, 개인의 특성을 인정하며 존재한다. 촛불에 동참했던 이들은 다중이 아니었을까. 적폐와 구습을 몰아내는 일에 불꽃처럼 함께 하였지만, 이제는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그러니 쉽지 않을 터이다. 평등과 자율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다중을 우리의 리더들은 어떻게 섬겨야 할까. 새 해에는, 이념으로 재단하지 말고 능력으로 증명하시라. 탕평(蕩平)과 대동(大同)은 오늘 필요한 생각이 아닌가.

2019-02-06

역사의 기억

장규열한동대 교수‘평생 누구에게도 정을 주어보지 않았어.’ 김복동 할머니가 한 인터뷰에서 토로했던 고백이었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섰던 길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경험을 했었을 것이니 어찌 그러지 않았을까. 세상에 누구를 믿으며 누구와 살가운 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그가 살아온 세상이 얼마나 미웠을까. 그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랬던 그가 한 자락 소원도 풀어보지 못하고 끝내 돌아가고 말았다. 함께 아픔을 나누었던 이들에게 마지막 남긴 한 마디가 ‘끝까지 싸워주시게.’였다고 하니, 남은 우리는 모두 숙연해 질 수밖에 없다.1970년 12월 7일, 폴란드의 무명용사 묘지를 방문했던 서독수상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예정에 없었던 이 돌발행동을 두고 시사지 슈피겔(Spiegel)은 ‘무릎꿇을 필요가 없었던 그가 정작 무릎을 꿇어야 할 용기없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무릎을 꺾었다’고 적었다. 2차대전에서 독일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나라를 대표하여 진심어린 사과를 전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지 않은가. 이후 독일 내부에도 여러 목소리가 있었겠지만 유럽 각국 간 분위기는 오늘 일본을 대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에는 여전히 전쟁과 폭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 입에는 “미국을 믿지 말고 로씨아에 속지마라. 일본은 일어난다”가 아니었던가.목포로 간 손혜원 의원 덕이었을까, 아니, 탓이었을까. 도시에 일본 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즐비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지역 구룡포에도 일본사람들이 살다간 집들이 여러 채 보존되어 ‘근대문화역사거리’가 조성되었다. 들리기로는 군산과 인천, 그리고 서울에도 유사한 건물들이 많다고 한다. 나전칠기가 목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몰라도 그보다는 저 일본식 옛 집들을 어찌 할 것인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구룡포의 옛 모습을 우리가 되새기는 의미는 무엇인가 다시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이들 옛 공간을 그저 물리적인 존재로만 바라보고 그리움과 향수를 자아내기만 할 것인가. 아니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으로부터 과거 일본의 기억을 다시 새기고 오늘 일본의 모습을 잘 살필 수 있도록 적절한 긴장과 경계심을 만들어 내는 장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견제와 균형은 국가 간에도 필요한 것이다.일본 정부와 아베 수상은 일본 내 보수여론을 결집해 가면서 ‘일본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남북과 북미가 대화와 외교를 통하여 평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일을 일본은 위험한 진보라고 본 모양이다. 과거 힘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면서 새롭게 일어설 기회를 만들어 갈 틈을 엿보는가 싶다. 일본 초계기가 우리 함정 주변을 낮게 비행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보아도 전에 없이 위협적이며 우리를 시험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한반도의 운명과 미래는 우리 안에서 너끈히 세워갈 것임을 반듯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일본은 우리에게 영원히 갚지 못할 무거운 빚이 있음을 분명히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들도 일본이 그리 진솔하지 못함을 자각하여야 한다.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이었으면 한다. 역사의 기억을 말끔히 씻을 때에 그리 될 수 있을 터이다. 역사는 상처깊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둘러보면 어두움으로부터 일어선 좋은 기억도 함께 새기고 있다. 일본에게 무릎꿇을 용기가 없다면 독일 역사에서 배우길 바라고, 어린 소녀들에게 가한 고통을 혹 잊었다면 김복동 할머니 영전에 가 보길 바란다. 우리는 일본이 남기고 간 흔적에서 역사를 기억하여야 한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

2019-01-30

대한민국과 베트남

장규열한동대 교수아시안컵 축구가 1월의 추위를 녹인다. 우승을 목표로 투혼을 불사르는 대한민국 축구팀에 높은 기대가 걸린다. 우리가 이 대회에서 우승했던 기억이 반세기가 넘는다니 이번에는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편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가 못지않게 관심을 끈다. 오늘 우리는 베트남 축구경기에도 거의 한 마음으로 응원하며 지켜보는 것이다. 박 감독의 리더십에는 성실한 준비와 냉철한 분석은 물론 넉넉한 이해와 따뜻한 감성이 엿보인다. 선수들이 감독을 거의 아버지로 여길 만큼 때로는 매섭게 그러나 언제나 정겹게 지도한다는 것이다. ‘박항서매직’이라 불릴 정도로 베트남 축구에 신명나는 기억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 해를 훌쩍 넘기며 지속되는 것으로 보아, 한국의 히딩크열기는 이미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베트남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남의 싸움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내어 대신 전쟁을 겪었던 역사의 그늘이 드리운 땅이 아닌가. 그 덕에 우리 경제가 나아졌다고 하는 소리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월남패망을 되뇌이며 색깔논리를 풀어놓기에도 이제는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베트남은 모든 외세를 물리친 위대한 기억을 간직하며 새로운 시대를 역동적으로 열어가는 나라인 것이다. 그들의 기억 가운데에는 한국군대가 저지른 잘못들도 분명히 있다. 꽝응아이(Quang Ngai)성에 서 있는 한 ‘한국군 증오비’는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우리는 이를 영원토록 뼛속깊이 새길 것이다’라고 적었다.이성(理性)의 힘으로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였던 20세기가 참혹한 전쟁들과 수많은 희생만을 남겼던 근현대의 부끄러움이 있다. 이제 펼쳐가는 21세기는 그 같은 수치(羞恥)를 반복하지 않을 것인가. 오늘도 그칠 줄 모르는 전쟁과 기근, 난민과 장벽 뉴스들은 그런 세상이 과연 올 것인지 우려하게 만든다.박항서 감독은 자신의 실력과 소양으로 성실하게 베트남 축구를 돕고 있다. 그들 축구에 승전보를 하나씩 더할 때마다 베트남 국민들에게 흥분이 쌓이고 즐거움을 더할 터이다. 그러는 사이 과거의 아픈 기억도 한 겹씩 씻기어 가기를 기대해 본다. 뼛속깊이 새겼을 만행의 상처가 조금씩이라도 벗겨졌으면 한다. 동시에 우리 정부와 국민은 베트남 전쟁 중에 우리 군이 자행한 잘못에 대해서 진중하게 되새기고 진솔하게 사과하며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는 다짐을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하여 보다 단호하게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서도 베트남 역사에 우리가 끼친 실수를 바르게 짚어야 할 것이다. 유대인학살 등에 대하여 독일이 공식적인 사과를 거듭 진지하게 하는 모습도 바로 이런 노력이 아니었을까. 대한민국과 베트남, 이제는 역사의 기억을 딛고 함께 일어서야 한다. 부끄럽고 어두운 기억을 망각하기 보다 내일을 겨냥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면서 그 기억의 의미를 새기고 살펴야 한다. 분명한 사과와 배려, 협력과 상생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 오늘 베트남은 역동성과 젊음으로 가득하여 우리 청년들에게도 함께 호흡할 여지와 가능성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경험과 걸어온 스토리도 베트남에게는 큰 교훈이 될 터이다. 박항서 감독의 실력과 진정성이 베트남에서 통하고 베트남 청년 선수들의 기백과 용기가 만난 저 ‘매직’은 앞으로 다른 여러 가닥에서 더 많이 펼쳐져야 한다. 핑퐁외교가 거대한 중국을 열었듯이, 축구 이야기가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하고 함께 열어가는 지평의 단초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앞으로 또 몇 날, 양국 대표팀이 아시안컵에서 더 오래 이겨주었으면 한다. 한국과 베트남의 국민 간 우정이 더욱 든든해지도록.

2019-01-23

나무와 숲과 미세먼지

장규열한동대 교수사람이 값없이 누리는 혜택을 이야기할 적에 늘 꼽던 ‘물과 공기’가 아니었던가. 봉이 김선달을 떠올릴 것도 없이, 이제 물은 이미 공짜가 아니다. 국내 생수시장의 규모는 곧 1조 원대에 육박할 정도로, 물은 누구나 사먹는 상품이 되었다. 그렇다면 공기는 어떤가. 수년 전 중국을 방문하면서 도심의 공기가 잿빛으로 변한 것을 보고 안타까웠더니, 이제 그런 하늘을 우리가 가지게 되었다. 문제가 심각하므로 그 까닭을 찾아 원인부터 해결하면 좋겠지만, 이제는 이미 닥친 현상에 대처하는 일에도 상황이 급하게 생겼다. 미세먼지. 홍수와 지진, 태풍과 가뭄 등 자연재해와는 다르게 미세먼지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문제가 아닌가. 기술의 진보와 산업의 발전이 초래한 대기오염이 그 주범인 것이다.문명의 발달과 생활의 도시화가 빚어낸 환경파괴와 자연붕괴가 급기야 생존의 기본이 되어야 할 공기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를 작은 분진인 미세먼지는 현대 인류에게 심각한 과제를 던진다. 특히 노인, 임산부, 어린이, 그리고 태아 등 미세먼지에 취약한 인구계층을 만들어내어 보건당국을 긴장하게 한다. 노인사망률이 급격하게 높아지는가 하면, 기형아 출산과 사산의 원인이 된다. 사람의 폐 속에까지 들어와 쌓이는 미세먼지는 각종 호흡기질환을 발생시키며 인체의 면역기능을 약화시킨다. 천식, 두통, 아토피 등의 질병들과 노년층의 인슐린 저항성을 높이게 하여 당뇨병과 심장병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미세먼지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의 발전과 함께 꾸준히 축적되어 온 인자들이 대기의 질에 악영향을 끼치면서 지속적으로 생겨온 문제라고 한다. 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면서 이루어 온 인류문명의 습속을 되짚어 보며 자연과 인간이 다시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뉴욕의 센트럴파크, 도쿄의 우에노공원, 런던의 하이드파크, 밴쿠버의 스탠리파크, 슈투트가르트의 그린유숲 등 세계 여러 도시들은 녹지공원과 도시숲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시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을 제공하면서 공기의 질을 순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최근 미세먼지 문제와 관련하여 도시에 숲을 조성하면 미세먼지 저감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 숲이 가지는 기능 가운데 대기오염물질 저감효과가 탁월하다는 것이다. 나무는 흡수, 흡착, 침강, 차단을 통해 미세먼지를 줄인다고 한다. 도시에 더 많은 녹지공간이 확보되고 숲이 만들어 질 수 있다면, 도시의 미세먼지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6년 국립산림과학원의 연구 결과, 도시에서 발생한 미세먼지의 42%는 숲이 흡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무와 숲이 미세먼지의 도전에 효과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관련하여 경북교육청이 점차적으로 ‘학교숲’을 만들어 교육환경에 숨길을 틔우고 환경보호도 돕겠다는 발상은 매우 좋은 발상으로 보인다. 미세먼지에 특별히 취약한 아동, 청소년들이 배우는 현장에 나무와 자연을 당겨놓겠다는 생각도 소중하다. 학교 담장을 콘크리트 벽보다 아예 나무을 심어 만들면 어떨까. 지역의 도시들은 어떤가. 도심의 녹지공간을 살피며 보존하기 보다는 훼손하거나 파괴한 일은 혹 없었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길게 보아 자연보호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미세먼지 저감을 위해서도 나무와 숲은 살려가면서 도시를 계획하고 도로를 조성하였으면 한다. 짧은 안목에 갇힌 물질문명에 집중하기 보다 긴 호흡으로 지구를 살리고 지역이 숨쉬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 잘라 없애고 지워버리는 일은 쉽다. 하지만, 그 바람에 날아가 버릴 우리 모두의 숨통은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나무와 숲으로 공기를 살리자. 공기도 사 마셔야 할 것인가.

2019-01-16

문화의 힘

장규열한동대 교수중국의 지도자들은 이념적으로는 공산사회주의 기본질서를 유지하면서 나라를 이끌고 일으켜 가는 정책의 방향은 글로벌 시장의 흐름과 시대적 지향성을 살펴가면서 운용해 오고 있다. 1968년에는 상업창부(商業創富)라 하여, 나라의 부를 전통적 상인 기질을 발휘하여 부강하게 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876년에는 과기창신(科技創新), 즉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나라의 위상을 한 단계 올려놓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2002년부터 문화창의(文化創意)라 외치면서 문화를 기반으로 나라의 뜻을 세우며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즉, 21세기에는 문화가 주도하는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한 것이며, 실제로 다양한 방면에서 풍성한 문화정책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경제와 정치, 국방과 외교가 나라를 운용하는 수단이지만, 문화의 그루터기가 든든해야 새로운 시대를 자신있게 열어갈 것임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혼란의 해방 정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이렇게 적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그는 그토록 어지러웠을 정치현실의 한 가운데에서 어떻게 문화를 떠올렸을까. 그리고 그것을 ‘힘’으로 표현하였을까. 김구 선생은 사람이 푯대로 삼아야 할 여러 지향점들 가운데 문화가 가장 높은 경지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 자랑할 만한 문화가 우리에게 과연 있는가. 오늘 우리는 문화를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일에 얼마가 생각을 기울이는가. 정치와 경제로만 사람의 삶이 해결되지 않으며, 국방과 외교로 지켜내는 나라의 정체성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에게만 독특하고 분명한 문화적 색깔을 찾아야 하고 길러야 한다. 우리들 스스로 이를 살피고 발견하고 우리의 것으로 다듬어 가야한다. 중국이 문화창의를 외칠 즈음에 한국도 나름 문화를 주요 정책지표의 하나로 세웠었다. 하지만, 어느 틈에 문화는 정책의 중심에서 도외시된 듯하다. 조선의 세종과 정조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문화가 나라와 사회의 한가운데 기둥이 되어 튼실하게 버틸 공간을 제공하여 줄 때에 백성의 운명과 국운이 함께 펼쳐졌던 기억이 있다. 이제라도 한 때 되새겼던 ‘문화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 문화로 강한 나라를 만들어 가는 일에 나서야 한다.지역은 어떠한가. 문화는 그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하여 빼놓을 수 없는 무엇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똑같을 것을 찾아볼 수 없을 때에 비로소 그 지역의 ‘힘있는 문화자산’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 이를 토대로 차별화도 가능하고 특성화도 시작될 것이다. 우리에게만 있어 ‘문화원형’이라 부를 만한 소재들을 발굴하여야 한다. 나라와 지역에 고유한 문화원형들을 앞으로 전개할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적극 활용할 때에 우리만의 문화의 힘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문화는 모두 옛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고루하다. 문화는 지극히 자연발생적이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언제든 자생적으로 피어나고 저절로 변화해 간다. 오늘 우리의 모습에서 남들과 다른 문화자산을 찾아야 한다.문화로 승부하고 상상력으로 승부하여야 한다. 이전과 다르고 남들과 다른 나라가 되고 지역이 되어, 문화가 힘이 되는 내일을 열어가야 한다. 어려울수록 문화를 떠올렸던 까닭을 다시 새겨보아야 한다. 문화가 힘이다.

2019-01-09

생각의 지평

장규열 한동대 교수지난 해 11월 미국의 우주탐사선 인사이트(Insight)호가 화성에 착륙하였다. 화성은 고사하고 달에도 못 가봤을 뿐 아니라, 겨우 발사체 개발의 초기단계를 지나고 있는 우리에게 ‘우주개발’ 또는 ‘우주여행’은 머나먼 이야기이다. 하지만, 달을 정복하고 화성에 도달하며 우주를 넘나드는 일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는 미국인들의 마음이 궁금하다. 당장 그 어떤 이득도 보이지 않는 일에 어쩌면 그렇게 집착하는 것인지 그리고 열광하는 것인지. 자율주행자동차 테슬라(Tesla)의 CEO인 일란 머스크(Elan Musk)는 ‘화성으로 이주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 정도면 지구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터에, 스스로 기대하기에도 70%가 넘는 사망에 이를 확률을 감수하고라도 화성에 가 살겠다고 한다. 저 무모해 보이는 도전의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우선, 생각의 끄트머리가 길다. 우리는 교육을 백년대계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길 때에는 시선의 끝이 늘 턱없이 짧다는 걸 연거푸 목격하지 않는가. 나 죽은 다음에 벌어질 일에 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인지상정이라고 여기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망가져 가는 지구와 무너져 가는 환경은 보통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낼 방법이 없다. 미래 뿐 아니라 과거를 되짚는 태도도 길어야 내가 살아있었던 시간 정도만 의미가 있다. 그러니, 오늘 적용할 교훈을 역사로부터 찾아 새기는 일에 서툴고 어색하다. 미국 언론인 스티븐 페트라넥(Stephen Petranek)은, 화성을 인간이 가서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내는 데에 대략 천 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하였다. 태연하고 진지하게, 천 년이 걸릴 일이라고 하였다. 천 년. 우리들 가운데 누구라도 천 년이 걸릴 일에 진심으로 착수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보다 길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또 하나, 생각의 테두리가 넓다. 대개 우리들은 일상에서 나 한 사람을 지탱하기에도 버거운 삶을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기껏해야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 가족과 친지 정도가 되지 않는가. 우리 사회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어려운 이웃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에는 시선이 좀처럼 가 닿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Bill Gates)는 전 세계 60억 인구 가운데 적어도 40억은 문명의 혜택을 덜 누리며 어려운 환경에 살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들이 시선을 보다 넓고 따뜻하게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배려와 관심의 테두리가 ‘나와 우리’로부터 ‘이웃과 지구’로 펼쳐질 때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지 않을까. 그런 끝에, 지구의 위기에 시선이 닿아 우주개발과 화성이주로까지 생각이 펼쳐지지 않았을까.새 해가 되었다. 그동안 가졌던 생각의 끄트머리와 그 테두리를 살펴보았으면 한ㅂ다. 다음세대를 생각하며 보다 긴 생각으로 교육의 미래를 열어갔으면 한다. 70년 분단의 역사를 올바로 극복하기 위해서 민족의 긴 미래를 품고 생각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생각의 끄트머리가 길면 길수록 더욱 든든한 내일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새 해에는 나와 내 주변 뿐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향한 시선이 살아났으면 한다. 생각의 테두리가 보다 넓어져 따뜻한 배려와 정 깊은 나눔이 살아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생각의 테두리가 넓어질 때, 이웃과 함께 온 세상과 우주를 담는 너른 시야가 생겨날 것이다.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 뿐 아니라 세계를 조화롭게 만드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새 해 2019년에는 생각지평의 끄트머리가 길어지고 그 테두리가 넓어져서 이전보다 그릇이 커지고 깊어지는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포용과 화합을 당겨오는 돼지해가 되길 기대한다.

2019-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