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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포항은 무엇인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사람은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우리는 보통, 주변의 조건과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행복은 결국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생각하기에 따라서 같은 조건을 가지고도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을 터이다. 행복이 정말로 마음에만 달렸다면, 우리는 외부 환경을 더 좋게 만들거나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그만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수고를 끊임없이 하고 있지 않은가. 왜 그러는 것일까. 이 물음에,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가 그의 책 ‘영원의 건축’에서 답하고 있다. “개인이 처한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개인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므로,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도시는 우리의 삶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현대 도시가 성공에 이르기 위하여 고심하여야 할 문제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도로와 교통, 생태와 환경, 범죄와 치안, 복지와 문화, 경제와 세수, 산업과 자연, 개발과 보존…. 이 모든 과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현대 도시를 경영하고 관리하는 일은 가히 종합예술의 경지인 것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운영하고 조절하는 일은 경영적 마인드 뿐 아니라 사회심리적인 배려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야 하는 이들 가닥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성공에 이른 도시들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그렇게 끌어모으는 것일까. 그런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까닭으로 그 곳에 사는 일에서 자부심과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금방 떠오르는 좋은 도시들에는 ‘그 한가지’가 있다. 파리에는 ‘문화적 분위기’가 있으며 뉴욕에는 ‘현대적 감각’이 있다. 싱가포르에는 ‘깨끗한 질서’가 있으며 바르셀로나에는 ‘가우디’가 있다. 카사블랑카에는 ‘이야기’가 있으며 예루살렘에는 ‘성스러움’이 있다. 우리 나라의 수도, 서울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 있다. 그렇게 다 있는 게 오히려 문제라는 생각이다. 그 한 가지로 다른 모든 것들을 꿰어낼 초점이 있어야 하는데, 서울에는 그런 게 없다. 조금씩 다 차려놓은 밥상에는 정작 먹을 게 없다. 먹고 나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조차 없다.포항은 어떤가. 아주 조금씩 또 다 있다. 이 나라의 도시들은 서로서로 보고 배워 조금씩 다 가져다 놓는 일에는 선수들이다. 이 도시만의 ‘그 한 가지’가 보이지 않는 만물상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고장의 문화는 사라지고 전통은 뭉개지며 조금씩 다 보이지만 눈에 잡히는 것은 하나도 없다.포항시는 최근 도시 행정의 난맥상이 지적되고 있다. 도시계획의 수립과 운영, 도시 주민과의 소통과 조절 등에 있어 돌아보아야 할 가닥들이 보이는 것이다. 권한과 책임의 소재를 살피고 밝혀서 적절하게 처리하고 대응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도시는 어떤 도시로 만들어 갈 것인지 ‘그 한 가지’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만들어 가야하며, 그럴 때에 도시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 한 가지’가 도시의 지향점이 되어야 하고 철학이 되어야 한다. 그 하나를 한 가운데 두고 나머지 모든 것들과 조화로움을 만들어 가야 한다. 너무 많은 주제들을 담으려 하다가 어느 것 하나도 주지 못하는 도시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 한 가지’를 찾아낸 다음, 이를 그 모든 다른 것들에도 보이도록 새겨 넣어야 한다.이 도시를 한 가지로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데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 한 가지만 이야기해야 한다. 그 하나로 포항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해야 한다. 그 하나로 포항의 시민들이 행복해야 한다.서울은 무엇인가.포항은 무엇인가.

2018-11-08

달라진 미디어, 변해가는 소비자

▲ 장규열한동대 교수미디어 환경이 변했다. 뉴스를 비롯한 다양한 콘텐츠를 신문과 잡지,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매체들이 일정한 주기를 두고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던 시절이 있었다. 디지털 소통혁명을 거치면서,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수동적으로 반응하던 미디어시대는 이제 역사가 되었다. 기자와 PD, 아나운서와 편집인들이 위기를 느낄만큼 콘텐츠의 생산과 유통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쉬워졌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통하여 디지털 미디어환경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은 이제 유튜브와 1인미디어를 통하여 스스로 자기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전세계와 직접 소통할 수도 있게 되었다. 콘텐츠 소통의 구조도 전통적인 일방향 소통이 아니라, 자유로운 피드백과 평가가 자유로운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 졌다. 새로운 미디어환경에서 주도권이 신문사나 방송국으로부터 보통 사람들에게 넘어간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콘텐츠를 어렵지 않게 만들어 유통할 수도 있게 되었다. 콘텐츠의 내용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반응하고 비평할 수 있게 된 것이다.좋아졌지만 좋아만 진 것은 아니다. 공익을 우선에 두고 전문적 미디어윤리와 공적 책임을 살펴가며 콘텐츠를 만들고 유통하던 미디어 전문가들에게는 안타깝고 불편한 상황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현실을 힘들게 바라보아야 하며, 악성 댓글이 불러오는 사회적 문제를 연일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미디어 전문인들 뿐 아니라 보통 소비자들에게도 불편함은 있다. 이념성향에 따라 같은 뉴스를 두고도 전혀 다른 보도를 접하는 일이야 어느 정도 익숙해 졌지만, 읽고 시청했던 뉴스가 ‘가짜’일지 모른다는 의혹을 접하면 사뭇 혼돈스럽기까지 하다.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얼마나 많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 생각해야 하며, 누구의 말이 진정성과 팩트를 담은 것인지 판단하여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하염없는 거짓 주장과 허위 선전의 바다에 노출될 위험이 뻔히 보이는 것이다.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여러 나라의 교육시스템을 비교하는 PISA시스템으로 학생들의 수학, 과학, 그리고 읽기 능력을 평가해 왔다. 앞으로는 각국의 교육이 어느 정도의 ‘국제경쟁력’을 가르치는지, 그리고 특히 학생들의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수준을 평가할 것이라 한다. 즉, 급변하는 미디어환경에서 다음 세대 청년들이 얼마나 적절하게 반응하며 지혜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는지를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나라들 사이 비교를 통하여 새로운 미디어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방식에 대하여 국제적으로 지혜를 모아보려는 시도로도 읽히는 것이다. 그만큼 환경이 바뀌었다. 아니 지금 이 시각에도 끊임없이 바뀌어 간다. 변화를 분석하여 긍정적인 부분은 극대화하고 부정적인 구석은 적절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우리는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교육에 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미래세대가 새로운 미디어환경에 혼돈없이 적절하게 적응하며 물밀듯 쏟아지는 다양한 콘텐츠에 지혜롭게 반응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경북교육청은 향후 정책변화 지향점을 구상하면서, 바로 이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에 주목하기로 하였다. 미래의 미디어가 보통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긍정적인 소식통과 지혜의 샘이 되려면 보통 사람들이 변하여야 한다. 미디어콘텐츠에 관하여 수동적 소비자에서 능동적 주권자로 바뀌어야 하며, 시청하고 관람하는 이용자가 아니라 참여하고 반응하는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 미디어환경의 또 다른 변화도 이제는 보통 사람들이 이끌어가야 한다. 우리네 삶이 변해 가는 데에 따라 미디어도 함께 변모하여 가지 않을까. 콘텐츠에 실릴 가치와 방향, 그리고 형식과 규모도 결국 보통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움직여 갈 것이다.

2018-11-01

답은 인성이다

▲ 장규열한동대 교수입에 담기도 흉악한 폭력이 춤을 춘다. 세상이 경악하도록 슬프거나 충격적이어야 하는 것이 뉴스의 속성이 되어 버렸다. 미디어로 전해지는 폭력 장면이 사람들의 폭력성을 부추기는지 아니면 억제하는지 아직도 논란거리다. 사건과 사고로 이어지는 언론보도를 통해 사람들이 폭력을 미워하고 멀리하게 된다는 측이 있는가 하면, 아니 그 같은 폭력에 노출되는 일이 잦을수록 사람들은 폭력에 대해 둔감해져서 오히려 더욱 폭력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즉,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거나 모방하게까지 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을까. 언론과 미디어가 보여주는 장면들이 폭력을 예방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부추기게 될 것인지. 전달되는 내용 가운데 독자 대중이 어떤 부분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디어가 취재하고 보도하면서 어떤 면을 도드라지게 알릴 것인가도 생각거리인 것이다. 우리는 연거푸 벌어지는 폭력적 살인사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하며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무슨 까닭에 이 같은 병리현상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것일까. 개인적인 폭력성향이 만들어낸 우발적 사고로 볼 것인지, 아니면 여러 구조적 과제들이 쌓여온 끝에 나타나는 사회적인 문제로 볼 것인지도 사뭇 다른 시각과 접근, 그리고 해결책으로 유도할 것이다. 청와대를 향한 청원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였다. 사람들 마음에는 폭력을 추방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심리학적으로는 충동조절장애 현상 가운데 분노조절장애라고 한다. 그 가운데 특별히 간헐적 폭발장애(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는 분노와 관련된 감정을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공격 충동이 억제되지 않아 주어진 자극의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파괴적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겨우 천원을 돌려받지 않은 까닭이 무참한 살인을 초래하였다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런 병리적 현상이 저렇게 가능하다는 것이 아닌가. 심리적 불안정과 상대적 박탈감 등이 정상적으로 조절되고 정리되지 못한 결과로는 너무나 처참하지 않은가. 어떻게든 더 이상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적인 관심과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원인으로 가당치 않아 보이는 그의 우울증 병력도 관련이 있다고는 하며, 정신을 차린 후에도 우울감과 허망함을 느낄 뿐 직접적인 죄책감은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쯤 되면, 우리에게는 이를 예방할 방법이 혹 없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무거워진다.개인적인 마음 속 어려움을 적절히 조절하고 긍정적으로 정돈하지 못하여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면,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이 도울 방법은 혹 없을까 싶다. 학생들이 학교와 가정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학교가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 학교의 상담기능을 강화하고 학생과 선생님 사이 그리고 학생들 간에 대화와 소통이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유도할 수는 없을까. 학교가 학생들의 학력을 길러 경쟁에 능한 사람을 만드는 데에만 집중하기보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훈련의 마당이 될 수는 없을까.교육의 결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야 하는데, 우리 교육은 혹 머리만 키우려 하는 것은 아닌지. 누구를 이겨 세상을 잘 살 것인가. 남들을 꺾고 올라가 행복해지는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진정한 경쟁은 결국 ‘나’를 이겨내야 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면, 내게 닥친 문제와 어려움을 조절하고 극복하는 지혜도 생겨나지 않을까. 문제는 인성이다. 온갖 지식과 재주를 다 가져도, 인성이 무너지면 그 결과는 무섭다.인성이 바로서야 사회가 산다. 폭력이 사라져야 나라가 산다.

2018-10-25

아, 유치원!

▲ 장규열한동대 교수처음엔 어리둥절했었겠지. 엄마의 치맛폭에서 늘 행복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이끌려 나가 따뜻했던 엄마의 손을 놓으며 헤어져야 하는 일은. 아빠는 기특하게 보았을까, 엄마는 부서질까 싶었을까. 겨우 혼자 걸었을까 하는데 무엇인가 배우러 보내야 하는 심정은. 유치원(幼稚園). 글자의 뜻마저 ‘어리고 또 어린 아이들의 동산.’ 그 곳에 아이들을 보낸다.친구들 사귀기, 어울려 놀기, 싸우지 않기, 때리면 안 돼, 깨끗이 치우기, 내 것과 남의 것 가리기, 밥먹기 전에 손 씻기, 화장실 물 내리기,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 인사하기, 안녕, 헤어지기, 쓰다듬기, 또 만나기, 낮잠자기, 책읽기, 노래하기, 춤추기, 그림그리기, 일기쓰기, 병아리, 잠자리, 다람쥐, 금붕어, 어 근데 다 죽더라, 웃기, 울기, 기쁨과 슬픔, 허전함과 외로움, 반가움과 놀라움, 길조심, 차조심, 사람조심. 너무나 많다. 그 때쯤 경험하고 배우고 익혔을 일들이. 그래서 누군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했을까. 그 제목 책을 쓴 로버트 풀검(Robert Fulgum)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사실은 모두 유치원에서 배운다’고 했다. 또 그는 ‘온갖 지혜는 대학원 도서관 안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유치원 모래성 위에서 익힌다’고 했다. 아슬아슬하면서도 물가에 보내는 심정으로 아이 손을 놓아주는 까닭도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유치원에서 사고가 났다. 이렇게 깊고 넓게 멍들었을 줄이야! ‘정부가 도와주느라 지원해 준 것인데, 우리 마음대로 쓰면 어떠냐’ 라든지 ‘공립도 아니고 사립인데 왠 간섭이냐’라는 반응은 엄마아빠들이 듣기엔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우리의 걱정은 ‘돈이 어디에 쓰였을까’도 있지만, 그보다 ‘돈을 그렇게 멋대로 쓰는 정신으로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었을까’인 것이다. 질문에도 답변에도 ‘아이들’이 없다. 교육을 하겠다는 것인지 돈을 벌겠다는 것인지. 정부의 고민과 대책에도 ‘관리와 통제’가 강조되고 있을 뿐 ‘교육과 가르침’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부인가 경리담당인가. 온통 관심과 이목이 ‘돈’에 몰려 있는 것이다.교육에 있어 대학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닥이 유아교육이다. 교육은 대상이 어릴수록 그 책임이 무겁다. 태어나서 다섯 살쯤에 이르기까지 인성의 기본 틀은 모두 다 자란다. 아이들은 들은 대로 배우지 않고 본 대로 배운다고 하지 않는가. 돈에 휘둘리느라 진심으로 가르치지 못하는 선생님을 아이들이 혹 눈치채지 않았을까. 어른들의 저 못난 악다구니와 아귀다툼의 심사가 혹 한 자락이라도 아이들에게 옮지 않았을까 부모들은 두렵고 무섭다. 아이들을 믿고 맡길 유치원 교육의 참모습을 혹 오늘의 유치원들이 망각하지나 않았을까 걱정인 것이다.문제를 해결하려면,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아이들’걱정으로 돌아가고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유치원은 무엇 때문에 거기 있어야 하는지, 선생님은 무얼 하러 거기 계시는지 그것만 다시 잡아올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 엄마아빠들의 마음을 다시 살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 밤새워 준비하고 종일토록 수고하는 선생님들에게 힘이 솟아야 한다. 불거진 문제를 분명히 짚은 다음, 사사로운 계산은 제발 내려놓았으면 한다. 교육을 위하여 아이들을 위하여. 엄마아빠들도 생각을 모아야 한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동안 필요할 모든 것을 배워 올 유치원에서 바로 그런 가르침이 일어나는지 잘 살펴야 한다. 잘하고 계시는 유치원들에 불필요한 피해가 없기를 바라고, 유아교육을 맡은 모든 분들이 마음을 새롭게 하고 다짐을 분명히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어릴 적 다녔던 유치원이 다시 그립다. 성당 부설 유치원의 ‘난초반’ 이수녀 선생님은 혹 아직 살아 계실까,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선생님이 보고 싶은 아침이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유아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18-10-18

도전과 응전, 변화와 적응

▲ 장규열한동대 교수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문명이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이어왔다고 하였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어려움을 겪을 때에 사회를 구성한 사람들이 지혜를 발휘하고 응집력을 형성하여 대처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 결과, 응전에 성공한 집단과 문명들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맞닥뜨린 도전적 과제를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느냐에 존폐 여부가 달렸다는 것이다. 극복하지 못하면 스러져 갈 것이며 딛고 일어선다면 생존과 발전을 이어갈 터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표현되는 디지털 기술의 습격이야말로 오늘 인류가 만난 기술적 진보임과 동시에 문명적 도전과제가 아닐까. 정보통신과 소통방식에 있어 디지털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보의 양과 그 전달되는 속도는 이전 세기에는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인 것이다.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일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언론과 미디어가 만들어 보급하여 오던 뉴스와 분석도 이제 보통사람들의 손으로 넘어오고 있는 것이다. 가짜뉴스는 그런 맥락의 끄트머리에서 발생하고 있다. 누구나 소식을 만들어 전달할 수 있고 또 보통 사람들은 별다른 방어기제 없이 수용하고 이해하며 설득된다. 게다가 사람에게는 ‘보고 싶은’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본능이 있지 않은가. 출처도 분명하지 않고 내용도 논리적이지 않으며 그 파급효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도 않을 가짜뉴스들이 창궐하고 있다. 그런 쪽에서는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들며 오히려 당당하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최근 ‘21세기를 위한 21가지 교훈들’을 쓴 유발 하라리는 ‘이제 시간이 없다’고 하였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새로운 시대에 제대로 적응할 교육 시스템을 얼른 마련하여야 하는데,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물밀 듯 다가오는 디지털기술의 공격 앞에 지금처럼 손놓고 있어서는 개인도 언론도 사회도 문명도 스러져 갈 일만 남았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그는 또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기량으로 비판적 사고능력, 소통하는 능력, 협력하는 기량, 그리고 창의성을 들고 있다. 밀려드는 정보들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분석적으로 이해하여 진실을 담고 있는 정보인지를 가늠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가르쳐야 하겠지만, 오늘을 사는 보통사람들에게도 이 ‘비판적 사고능력’은 필수 덕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전해지는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개인 각자가 보다 날카롭고 분석적인 안목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허위로 조작된 정보를 걸러내는 공적 시스템을 마련하는 한편, 개인 독자들도 새로운 정보환경에 경계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정보의 생명은 그 진실성에 있지 않은가. 거짓 정보와 조작된 내용은 이를 수용하는 시민들을 오도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적인 신뢰를 무너뜨리는 악영향을 끼치게 될 뿐이다. 새로운 정보환경에 익숙해 질 시민들이 당신이 퍼뜨린 정보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될 때, 당신의 목소리를 누가 계속 들어줄 것인가. 이는, 어느 개인의 각성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대처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를 슬기롭게 대응하지 못하면 ‘언론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무너져 우리 사회에 꼭 있어야 할 ‘소통시스템’이 와해되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을 것이다.표현의 자유는 소중하다. 소중할수록 잘 지켜야 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거짓과 허위, 기만과 조작은 표현의 자유를 위태롭게 할 뿐이다. 저지르는 이들 본인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을까. 21세기에 보다 빛나는 문명이 꽃피울 수 있도록, 디지털기술의 도전에 경계심과 정보윤리로 맞서 보기로 하자.토인비 선생은 인류가 역사를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으로 지켜왔다고 하였다. 디지털 신문명의 내일을 우리의 응전으로 넉넉하게 지켰음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가.

2018-10-11

진짜언론 가짜뉴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사회가 건강하면 모든 것이 상식에 맞고 논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반대로 사회에 병이 들면 많은 것들에 비상식이 똬리를 틀고 논리에 일탈이 생긴다. 존속살인, 학교폭력, 부부강간. 효와 예가 바로 선 집안에 어떻게 부모를 해하는 일이 가능하며, 배움의 즐거움이 가득한 학교에 어떻게 폭력이 발생하며, 사랑이 가득할 부부 사이에 강간이 말이 되는가.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는 이 같은 비상식과 탈논리가 여럿 목격되고 있다. 디지털 세상이 되어 좋아졌다 했더니, 오히려 더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비정상이 생겨나고 있다. ‘가짜뉴스.’언론이 무엇인가. 정부는 입법, 행정, 사법의 3부로 구성되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한다. 민주사회의 이런 제도적 장치가 충분하지 않다고 본 사람들이 ‘제4의 권력’으로 만들어 온 것이 ‘언론’이 아닌가. 언론을 통하여 보통 사람들이 정보를 제공받아 힘있는 이들을 견제하여, 그 결과로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이다. 언론에 거는 시민의 기대가 그렇다면, 언론이 전하는 내용은 당연히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짜뉴스’는 본질적으로 뉴스가 아니다. 언론이 아닌 것이다.수년 전부터 해외로부터 가짜뉴스에 대한 우려가 전해지더니 급기야 우리 사회에도 문제가 되었다. 최근, 가짜뉴스를 지적하며 각성을 촉구하는 보도가 있자 이에 대하여 반박하며 그렇게 알린 보도내용이 오히려 가짜라고 주장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누가 ‘진짜로 가짜냐’는 논란이 생긴 것이다. 국무총리가 ‘신문의 날’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우려를 담아 언급한 대로, 뉴스 전체가 신뢰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는 가짜뉴스를 공동체 파괴범이자 민주주의 교란범으로 지목하였다. 민주주의를 언론으로 바로 세우고자 하였더니, 그 뉴스가 가짜를 전하고 있다면 과연 민주질서는 어지러워질 수밖에. 이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 언론은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독자는 또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할 것인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OECD는 전세계 학생들의 역량을 평가함에 있어, 수학, 과학, 읽기 능력에 더하여 이제는 ‘글로벌역량’을 측정하면서 ‘미디어리터러시(Media Literacy)’능력을 함께 평가하기로 하였다. 즉, 보통 시민들이 언론 보도에 관하여 이전보다 깨어있어야 하며 그 내용의 진위에 대하여 가늠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 가짜뉴스 현상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글로벌한 과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누구나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하며 유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악용하는 이들이 있으므로, 이제는 보통 사람들이 이런 위험을 직시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시민도 언론도 슬프지만 지혜로와야 한다.독자는 기사 내용에서 인용한 출처가 분명한 지를 먼저 확인하여야 하며, 가능하면 같은 사안에 대하여 복수의 기사를 대조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의도적이며 악의적인 가짜뉴스가 번져가지 않게 하려면, 독자가 먼저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발휘하여야 한다. 정부와 힘있는 자들을 견제하라고 언론을 만들었더니, 이제는 시민들이 언론을 견제해야 하는 것이다. 가짜뉴스에 대한 경각심은 어느 곳보다 언론 사회에 더욱 클 것이다. 언론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보다 면밀히 살피면서, 초심과 본연으로 돌아가 진실만을 보도하고 가짜를 경계하는 언론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정부는 정부대로 책임을 통감하고 언론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가짜와 일탈을 제어하여야 한다.가짜뉴스 문제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상식의 문제이며 민주의식의 과제이다. 언론이 진실을 전하지 못하면 이미 언론이 아니다. 시민도 언론도 정부도 함께 경계심을 발휘하여야 한다.언론은 진실만을 말하여야 한다.언론이 살아야 민주주의가 산다.

2018-10-04

나의 목소리

▲ 장규열한동대 교수‘부러우면 지는 거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살고 있다. 부럽다는 건,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게 아닐까. 부러워할 뿐 아니라 사실은 흉내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하긴, 따라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뭘 해도 멋있는 사람이 있고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며 잘 버는 사람이 있다. 어차피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거라면, 나도 한번 그렇게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다. 비결이 궁금하고 그걸 알기만 한다면 따라 해 보고 싶다. 그런데. 따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비결이 과연 있을까?애플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어렸을 적에 주변을 둘러보고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사람들이 만들었네!’라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도 무엇인가 새로운 무엇을 스스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그래서 들었다는 것이다. 학생에 불과했던 그 자신과 하나도 다르지 않을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단순하고 평범한 생각. 그런 생각이 비범한 결과를 낳았다는 건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도 부러웠을 사람이 많았을 가운데 정작 스티브 잡스는 그만의 세계를 만들고 떠나지 않았는가.아무리 부러워도 그냥 그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다가 간다면, 우리가 여기 살아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겨우 복사본같은 인생을 살려고 태어났을까. 당신이 살고 간 자리가 그 이전과 무엇 하나 다를 게 없다면, 그거야말로 허무한 놀음이 아닐까. 내가 이곳에 있었던 덕에 무엇이라도 새로운 일이 생기고 처음 보는 사건이 벌어지며 더 나은 물건이 나타난다면. 그렇게 한번 살아볼 수 없을까.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아이돌그룹 BTS가 바람몰이를 하고 있다. 그들은 과연 남다르지 않은가. 음악을 선율과 리듬이 만드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 생각을 바꾸어 달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들은 음악인으로만 존재하기 보다, 이제 의미와 그 깊이로 세계인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당신 스스로를 사랑하자’는 메시지와 ‘당신의 목소리를 찾으시라’는 요청을 UN총회 연설에서만 아니라 그들이 만드는 음악에도 힘있게 싣고 있다. 남들이 만들어준 생각을 따라 사는 동안 힘들고 피곤했지만, 스스로의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드디어 즐겁고 의미있는 세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이를 접한 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의 젊은이들이 그들이 던지는 생각에 감동하며 크나큰 격려와 힘을 얻는다고 한다.세기의 과학자로 알려진 아인슈타인도 ‘상대성이론’이 상상력의 결과였다는 놀라운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고 치밀하게 계산한 결과로 그런 업적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마음 가는대로 느낌과 감흥을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상상력’이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물론,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정확하게 계산하는 일이 따라왔겠지만, 그것은 ‘생각의 틀’을 상상 가운데다 만들어 낸 이후에 진행된 일이라는 것이다.지난 세기는 우리에게 ‘모방과 추격’의 시간이었다. 뒤처지고 낙후한 처지에서 잘 나가는 세상을 따라잡기에 급급하였다. 이제는 상황이 바뀐 것이다. 누군가 따라갈 대상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돌아보니 이제는 우리가 끌고 가야할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경제, 사회, 문화, 정치, 그리고 국제관계. 그 어느 곳에든 우리가 설 자리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올곧게 세워야 할 책임이 이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이제는 맨 앞자리에서 ‘창의와 상상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그걸 저렇게 어린 친구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이 만든 세계’를 부러워 하고 따라가기 보다, 이제 어깨를 펴고 ‘당신의 목소리’를 찾으라는 저 요청은 바로 나에게 하는 소리가 아닐까. 세상은 ‘상상력’으로 바뀐다는 걸 이미 알았던 아인슈타인과 이제라도 ‘나의 목소리’를 찾으라는 저 일곱 청년이 던지는 생각을 오늘 한 번 되짚어 보자. 자신있게 내게로 옮겨 보기로 하자.

2018-09-27

우리는 하나인가

▲ 장규열 한동대 교수·경북교육발전기획단장남북정상이 다시 만났다. 생각보다 진전된 합의도 내어놓았다. 봄볕 아름다운 조우와 함께 기대를 모았던 가을날 만남과 결실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 뿐 아니라 미국과의 관계, 그리고 지역 평화를 위한 특별한 과제를 배경으로 만났기에 관심도 높았다. 그 어느 때 보다 기대를 높이 걸었던 것이다. 우리 대통령과 북한의 정상이 포용과 화합의 정신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시작으로 겨레가 바라는 평화의 물결이 한반도에 밀물처럼 닥치기를 바라는 것이다. 적잖은 변화가 이 땅에 기대되는 가운데 우리들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한 때 통일은 ‘우리의 소원’이었으며 대한민국에게 ‘통일은 대박’이었다. 정치권이 이에 대하여 어떤 감상을 가졌는가를 따지기 전에 우리 자신은 통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펴보았으면 싶다. 남과 북은 하나인가. 아니면 그냥 둘이어도 되는가. 이산가족 상봉이든 정상회담이든 우리는 만날 때마다 궁금하였다. 70년 분단의 세월을 극복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대로 나뉜 채로 살아도 되는지. 어째서 통일이 소원이었는지 무슨 까닭에 통일이 대박일 수 있었는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우리와 거의 같은 시기에 분단되었던 독일은 벌써 오래 전에 분단을 극복하였다. 길고 지난한 협상과 토론의 과정을 거쳐 통일을 맞이한 독일 국민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통일은 결론적으로 독일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을까. 히틀러의 아픈 기억을 2차대전의 상처로 간직한 채로, 어찌 보면 우리보다 더욱 극심한 이념의 소용돌이를 겪었던 서독과 동독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지도자들과 국민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만남들을 시도하였고 끝내 다시 합치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물론 주변 정세가 도운 바가 없지 않지만 독일 통일의 결정적 배경은 누가 뭐라 해도 그 모든 과정을 통해 ‘민족적 동질성’을 한 시도 잊지 않은 결과가 아니었을까.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본래 하나였다’는 생각으로 돌아가고 돌아간 끝에 이룬 결실이 아니었을까.우리는 어떠한가. 그 어떤 결정도 감상으로만 매듭지을 수는 없다. 구호에 매달리는 협상은 위험하다. 치밀한 이성과 정확한 예측, 그리고 정교한 분석을 따라 모든 과정을 따라가야 한다. 많은 이들의 생각을 참고해야 하며 너른 이념의 지평도 짚어 보아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역사 앞에 선 한반도와 이 민족에게 선한 결실을 안겨 줄 것인지 현명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그 어떤 정파의 정략에 휘둘리지 않도록 더 많은 사람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어야 한다.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도 폭넓게 참여하는 너른 ‘생각의 광장’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 생각 한 가운데에는 ‘우리는 하나’였음을 다지고 확인하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듣자 하니, 남과 북은 이미 여러 면에서 다르다. 같은 우리말을 다르게 표현하는가 하면, 살아가는 모습도 많이 달라졌으며, 생각하는 습관도 꽤나 멀어졌을 터이다. 경제도 문화도 정치도 사회도 그 어느 곳에 쉽게 서로 동화될 가능성이 남아 있을까. 가능성의 지평은 결국 저 ‘우리는 하나’였음을 확인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을까. 모든 어려움을 지나 하나가 되는 날, 우리는 역사 앞에 이렇게 고백해야 하지 않을까. ‘많은 언덕을 넘어왔지만,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였음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걸어 왔노라고.’ 대통령이 북으로 가는 걸음을 떼면서 ‘마음이 무겁다’고 한 까닭이 바로 또 그런 마음 탓이 아니었을까.오늘부터 이 땅에 평화가 깃들고, 오고 가는 일이 잦아지며, 크고 작게 나누는 일이 풍성하여 질 때, 이 모든 난관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물러가지 않을까. 대통령이 수고하였다. 국민도 함께 애를 태웠다. 이제는 함께 생각을 모을 때가 아닌가.전쟁보다 평화가 낫지 않은가.분단보다 통일이 좋지 않은가.

2018-09-20

지역이 살아야

▲ 장규열 한동대 교수·경북교육발전기획단장부동산이 난리다. 아니, 난리라는 모양이다. 수도권은 하루가 멀다하고 치솟는 부동산 시세에 청와대로부터 서민들까지 신경이 날카롭다. 나라를 잘못 운영한다는 핀잔을 들을까 노심초사하며, 진작에 번듯한 집을 장만하지 못한 가장들은 쏟아지는 눈총에 몸둘 바를 모른다. 온 나라의 관심사가 되었으니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문제는, 수도권 중심의 생각거리에 지역도 함께 매몰되는 데 있다. 지방 부동산은 꿈쩍도 않는데 지역 시민들은 수도권 뉴스로 날이 밝는다. 그게 어디 부동산만 그런가. 이 나라를 가득 채우는 교육과 문화, 정치와 시사, 담론과 주제들이 모조리 서울발 이야기 거리로 한가득이다. 누군가 지방은 식민지같다고 했던가. 이 나라에서 지역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고 지역에 사는 시민은 누구인가.줄잡아 5천200만 나라 인구 가운데 2천600만이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 산다. 절반이 산다니 나라의 중심이 맞다. 나라의 중앙으로 인식되는 것이 틀리지는 않겠으나, 나머지 절반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두 번째 도시 부산에 약 340만. 수도권의 3분의 1 수준인 것이다. 도시발전을 가늠하는 ‘순위/규모의 법칙(Rank-Size Rule)’은 그 비율이 약 2분의 1인 것이 좋다고 했다. 한국은 수도권 인구집중도가 과다하다는 셈이다. 참고로, 로스앤젤레스는 뉴욕의 거의 절반 수준 인구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는 국토균형발전을 시도하기도 했었고 지방분권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국가기관 지방이전 정책을 여당이 다시 만지작거린다. 이 모든 정책적 시도에도 나라의 균형있는 발전이 더딘 것은 누구의 탓일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일까.지방에서 인재를 기르는 대학이 많다. 우리 지역에는 특별히 사립대학들이 높은 수준의 교육과 그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좋은 대학들이 자리를 잡으면, 대학 뿐 아니라 초등과 중등교육이 함께 나아지고 문화 수준과 사회 분위기가 한층 좋아진다. 우리 정부는 지역에서 이미 잘 하고 있는 대학들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고 이들을 지역의 중심으로 어떻게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게 할 것인지 연구하여야 한다. 이에는 국공립과 사립의 구분을 굳이 들 필요가 없다고 본다. 학교의 설립 동기와 학문적 동력면에서 건강한 교육적 지향점과 긍정적 추진력을 확인할 수 있다면, 사학이면 어떻고 국공립이면 어떤가. 오늘 학교의 상황이 이미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성과를 많이 만들어 내고 있다면, 지역의 중심으로 더욱 발전하여 가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여러 나라들이 지역적 성장과 문화적 발전을 이끌어 낸 핵심에는 대학들이 수다하게 발견된다. 미국의 보스턴과 샌프란시스코, 영국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모두 지역 도시들에 교육적 토대를 든든히 세워 수도권이 아니었음에도 지역의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어 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우리 지역에도 높은 희망이 걸린다. 지역의 역동성은 인구의 연령층과도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청년 대학생들이 숨쉬고 활동하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도시는 활력과 생동감을 찾을 것이다. 또한, 대학은 생각하는 곳이다. 지역을 위한 담론의 지평이 대학을 통하여 넓어지게 하자. 토론의 수준이 깊어지게 하자. 그간 수도권의 소식에 묻히거나 눌린 부분이 있다면, 대학으로 하여금 지역을 위한 생각과 과제를 찾아내게 하고 연구하고 참여하게 하자. 교수들과 학생들이 지역과 함께 성장하고 배우게 하여 그들이 지역에 위치한 의미와 보람을 거두게 하자.수도권과 지역이 더불어 힘있게 나아갈 때, 나라가 건강하게 일어설 것이다. 수도권은 지역을 챙기고 지역이 수도권을 지원할 때, 온 나라에 화음이 돌아오지 않을까. 수도권의 절반과 지역의 절반이 어울려 다독일 적에 나라가 바로서지 않을까.지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18-09-13

쓴 소리

▲ 장규열한동대 교수·경북교육발전기획단장최근 작고한 미국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 매케인의 장례식에 민주당 소속 오바마 전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10년 전 치열했던 미국 대선에서 두 사람은 격렬하게 맞붙었었다. 그 후에도 보수와 진보를 대변하는 이념의 양극을 표방하며 여러 이슈에서 서로 다른 생각과 의견으로 격전을 벌였다. 그랬던 오바마 대통령이 매케인을 마지막 보내면서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같은 팀이었음을 의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념의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서 평생을 치열하게 싸워놓고 이제 와 무슨 소리인가. 다툰다고 해 봤자 죽음 앞에서야 무슨 소용이겠냐는 넋두리란 말인가. 아니, 보수든 진보든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정치에 나선 우리 모두는 결국 한 가지 바람으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었느냐는 확인과 다짐이 아니었을까. 진보의 맨 앞에 섰던 그가 엄숙하고 단호하게 인정하며 다짐하는 바, 정치는 결국 국민과 나라를 위하여 있어야 한다는 그 한 생각에 어느 보수 논객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한 팀이었다는 것. 미국 국민 모두의 마음이 얼마나 위로를 받았을까. 정치인들의 마음이 사실은 하나였다는 진정성을 확인한 국민은 얼마나 행복하였을까. 그러니 함께 참석하였던 부시 전 대통령마저 “경쟁도 다툼도 사라졌다”라고 화답하지 않았을까. 양약고구(良藥苦口).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다. 입에 쓰고 듣기 거북한 소리가 사회를 건강하고 든든하게 만들 것이라는 기대가 있는 것이다. 하기야 정치권에는 당리당략도 작동할 터이라서 모든 쓴소리를 좋은 소리로 받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 정서와 생각마저 힘들고 어렵기 시작한다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잘 하고 있는 것일까. 사회는 바라듯이 잘 움직이고 있는가. 나라는 기대처럼 나라다워졌는가. 이 가닥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살펴야 하는 것인가.무엇보다, 부족하고 힘든 것은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 개인도 국가도 일은 모두 사람이 한다. 사람이 하는 일에 완벽은 없다. 실수도 있고 모자람도 경험한다. 그러므로 쓴 소리는 당연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하여 쉬지 않고 움직이는 노력이 보여야 한다. 쓴 소리는 들어야 하고 새겨야 한다. 좋은 의도와 분명한 계획으로 나선 길에서 기대와 어긋나는 결과를 맞을 수 있다. 더러 만나는 어려움과 부족함을 국민과 진솔하게 나누고 함께 이겨내며 극복하는 슬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필요하면 다른 생각을 듣고 겸허하게 도움을 청하는 태도도 보여야 한다.사람 간에 일은 잘 풀릴 수도 있고 부족하여 답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로 그 관계를 그르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정치와 국민도 꼭 그렇지 않을까. 이념의 틀 가운데 어느 쪽에 서 있든지 당신은 끝내 국민의 편이어야 한다. 진정과 노력을 기울여 국민을 위하여 일하는 당신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 정치를 국민이 바라는 것이다. 쓴 소리를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국민의 편’에서 전하고 수용한다면 문제가 없지 않을까. 그런 진심으로 달리는 정부가 혹 실수를 한다해도 국민이 믿어주지 않을까. 얼른 일어나 다시 세우고 새롭게 펼쳐가는 기개와 노력에 오히려 박수를 보내지 않을까. 진정으로 걱정하여 쓴 소리로 격려하는 목소리에도 국민들은 오히려 찬사를 보내지 않을까. 보다 분명하고 나은 생각으로 국민을 행복하게 섬기고 말겠다는 그 진정성을 발견하고 싶지 않을까.일을 잘 하고 못 하는 것보다 꿈을 혹시 잃었을까 걱정이 된다. 권력에 취하여 초심을 혹 잃은 것은 아닐까. 바라보아야 하는 곳이 이제는 혹 국민이 아닌 것은 아닐까 우려된다. 세워준 국민을 바라보고 새롭게 달리는 당신을 기대한다. 쓴 소리도 마다않고 잘 들어 섬기는 정치를 기대한다.우리는 모두 같은 편이었다.

2018-09-06

진정한 변화

▲ 장규열한동대 교수·경북교육발전기획단장모든 것이 변한다. 어느 한 순간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이 땅 위에 없다.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바뀌며 세상이 달라진다. 21세기가 되어 디지털세계가 펼쳐지고 보니 그 변화의 속도마저 눈이 부실 지경이다.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것이 변해 가며 잠시라도 멈추어 있다가는 금방 뒤처지게 되어 버렸다. 바뀌어 가는 세상을 열심히 살펴 가면서 그 변화에 발을 맞추지 않으면 어느 틈에 도태될 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기성세대는 이 모든 변화를 따라가기도 벅찰 지경이지만, 젊은이들이라고 해서 이를 따라잡는 일이 그리 쉽지도 않아 보인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 도래했다고 하여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질 문턱에 와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인성.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해도 아직 이 땅은 갈등과 범죄에 시달리고 있다. 눈부신 변화와 발전 가운데에도 눈물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밖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익히며 따라가느라 우리는 내 안에 갖춰야 할 가치에 소홀한 것이 아닐까. 무엇을 획득하는 삶을 익히기보다 우리는 먼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무한경쟁의 아귀다툼을 떠올리기보다 더불어 잘 살아가는 공동체를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 인성바른 시민들이 우리 사회를 가득 채울 때,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하여 가는 일도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욕심과 욕망으로 세상을 채울 때 세상이 겪을 변화는 절망과 낙심으로 가득차지 않을까.창의. 4차산업혁명은 눈부신 기술의 발전과 함께 도래했다 하지만, 그것이 기술혁명만을 일컫는 것일까. 기술만 발전하면 창의와 상상력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일까. 컴퓨터, 코딩, 소프트웨어. 과학과 기술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참으로 유용한 도구가 되려면, 기술보다 앞서 충실한 콘텐츠가 있어야 한다. 그려내고 싶은 세상과 스토리가 없으면 허우대 기술만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상상력의 원천은 인문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과 역사 그리고 철학은 그래서 떠올리는 것이다. 사람과 세상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존재하며 살아가는 뜻과 의미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살피는 일이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남이 들려주지 못하는 이야기의 텃밭이 우리에게 풍성하게 생길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를 이끌 수 있지 않을까.글로벌. 세상은 이제 모두 한 덩어리가 돼 굴러가고 있다. OECD가 세계 학생들의 학력을 비교하기 위하여 수학, 과학, 읽기 능력을 평가했다. 그런데 이제부터 ‘글로벌 역량(Global Competence)’을 또 하나 필수 측정과목으로 삼는다고 한다. 왜 그러는 것일까? 이제 세상은 나만 열심히 산다고 좋아지지 않는다. 우리 나라만 발전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글로벌 환경에서 함께 어울리며 이해하고 협력하면서 만들어 가는 일을 학교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다양한 문화들과 서로 다른 환경에 대한 이해를 키워야 하며, 다른 사회와 인종들 사이에서 서로 화합하고 존경하며 협력하는 능력을 가져야 하고, 전 지구적인 이슈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해결한다는 의지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나라 안에서의 변화와 우리의 국익이 물론 중요하지만 동시에 글로벌 환경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소양이 필요한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인성, 창의, 글로벌 역량과 함께 우리는 세상의 변화를 우리가 주도해 간다는 ‘주인의식’을 가졌으면 한다. 세상이 변하고 남들이 변해가니 우리도 그에 맞추어 변화해 가자는 생각은 이미 낡은 생각이다. 진정한 변화는 남들로부터 오지 않는다. 내가 변할 때 세상이 변한다는 자신감을 키워야 한다. 언제까지 우리는, 남들의 변화를 바라보며 따라가는 변화만 추구할 것인가. 모방과 추격은 이제 그 힘을 잃었다.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길은 그 변화를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세상의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한다.

2018-08-30

2박3일

▲ 장규열한동대 교수·경북교육발전기획단장거의 코미디가 아닌가.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멀쩡한 피붙이 한 가족이었음이 분명한 것을, 어쩌다 우리는 이처럼 희한한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일까. 기나긴 세월을 헤어져 살았던 끝에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이 한 번의 조우를 한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이 운명에 우리는 길들여진 것일까. 통틀어 고작 몇 시간 상봉 끝에 우리는 따로따로 갔던 길로 터벅터벅 돌아왔던 것이다. 그리고는 또 바로 엊그제처럼 헤어져 떨어져 살아가는 일을 이어간다. 세상에, 한반도에 사는 이 백성들밖에 이처럼 기구한 헤어짐과 만남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1983년이었다. KBS가 진행했던 ‘이산가족 찾기: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전쟁이 지나간 후 30년만에 벌어진 미디어쇼로 마주한 ‘이산가족들’의 회한과 눈물은 온 국민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그 해 6월부터 11월까지 방송을 통하여 무려 1만189건의 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또 35년만에 2박3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엊그제 상봉행사에는 남과 북으로부터 200명도 채 안 되는 이산가족들이 만났다. 지금껏 30여 년동안 20차례의 상봉행사를 통해 겨우 2천여 명의 가족들이 만났다고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만남의 의미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클 것이지만, 이 땅이 품고 있는 ‘이산가족’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이다. 등록된 이산가족이 모두 13만2천124명이라 하며, 이 중 생존자가 5만6천990명. 수십년 이산의 아픔을 간직한 이 분들은 이제 모두 고령이므로, 우리는 ‘이산가족’의 문제를 더 이상 머뭇거릴 겨를이 없다. 이를 그 어떤 정치적 맥락에서 화해의 신호로 사용하는 일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 겨레의 측은지심을 담아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이박삼일. 이게 말이 되는가. 쌓이고 쌓여 끝도 없을 이야기들을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풀어놓을 것인가. 무슨 맛보기 행사도 아니고 가족들의 기다림과 목마름을 어찌 이렇게 가벼이 취급한다는 말인가. 겨우겨우 한 번 만나고 돌아서면, 차라리 이제는 다시 못 볼 약속을 해야 하는 현실. 그렇게 많은 이산가족들을 생각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주어질 확률은 거의 없을 터. 그러므로 이산가족 상봉이라기보다 ‘영구이별 확인행사’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통일이 되기 전에 다시 만날 기회는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 지금처럼 애타게 감질나게 목을 빼고 기다리는 상봉행사는 다시 살펴야 하는 것이다. 가족이 헤어져 오래 떨어져 살아야만 했던 것도 안타까운 터에 맺힌 한을 이박삼일 풀고 돌아서라는 이벤트성 행사는 이제 그만 했으면 싶다.우선,‘주소교환과 서신왕래’를 자유롭게 하자. 이미 만났던 가족들을 물론 아직 만나지 못한 가족들도 생사와 소재가 확인된다면 서로 연락하며 회포를 나누지 못할 까닭이 없다.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부분에서 민감한 부분이 없지 않겠으나 남과 북이 협력과 화합에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이와 함께 남과 북으로부터 찾아와 서로 만날 수 있는 ‘만나는 마당’을 만들어 항상 열어놓도록 하자. 이전의 상봉행사로부터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풀린 매듭을 보통 사람들이 함께 자연스럽게 풀어가도록 기회를 마련하여야 한다. 물론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생각해야 할 가닥이 많을 것이다. 우리의 소원이 과연 통일이었음을 확인한다면,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물꼬가 트인 대화와 협력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라며 사회의 가장 기초단위인 ‘가족’의 하나됨을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반도가 정치적으로 건강하며 경제적으로 통합되고 사회적으로 유연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하나가 되는 새로운 광장으로 거듭나기를 소원하는 것이다.2박3일은 그만, 통일이 보인다.

2018-08-23

미투혁명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미투운동(Me Too Movement). 여성들에게 음성적으로 가해져 온 성희롱과 성추행의 적나라한 모습을 그 피해를 입은 여성 당사자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알려내기 시작한 사회운동. 미국에서 지난해 말에 시작된 이 운동이 온라인에서 사회관계망 sns를 통하여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주로 직장 내 불평등한 계급구조 안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남성들이 여성 동료들을 상대로 하여 벌이는 성적추태는 직업과 직군을 가리지 않고 매우 폭넓게 나타나는 현상인 것으로 보인다. 한 달 여 전 한 여성 검사의 폭로와 고발로 싹이 트는가 했더니 어느 틈에 연극계와 문화계, 대학가와 종교계 등을 돌아 급기야 정치권의 한 가운데에도 성폭력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확인하고 말았다. 아직도 드러내지 못한 수치와 고통을 안고 힘들어 하고 있을 더 많은 여성들이 분명히 있을 것으로 보여 이 운동의 이후 향배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인구의 절반이 여성일 것인 바, 아직도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인식 가운데 여성을 성적 대상물로 여기며 가벼이 생각하는 습성이 있다면 이는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나 자신의 존재가 소중한 만큼, 그 누구든 타인의 인격이 적어도 나 자신만큼의 무게와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서로서로 존중하고 인정하기로 한 것이 현대사회의 기본질서가 아니었던가.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부당하게 이용하여 여성의 몸을 탐하고 평생토록 참아내기 어려울 짐을 지우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러고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둥 변명을 늘어놓는 당신은 과연 오늘을 함께 살아갈 가치를 한 자락이라도 소유했다고 생각하는지.아직도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동료 피해자들에게 용기를 내라는 뜻으로 미투운동에 동참했다는 어느 여인의 숨가쁜 호소 뒤에도 그리 쉽사리 응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보통 사람들은 또 얼마나 숨죽이며 기대하게 되는지. 미투운동이 또 하나의 사회혁명으로 높은 가치를 드러내길 바라는 바이다. 말로는 양성평등을 표방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남성은 사회의 거의 모든 면에 우월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가진 능력으로 보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 전반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아온 여성들이 이제야말로 본연의 위치를 확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당연하여야 할 그 위치를 확인함에 있어, 가장 먼저 해결해야, 거두어내야 할 과제가 바로 이 `여성을 성적 대상물로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같은 부적절하고 부질없는 시선과 욕심을 거두게 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이렇게 권하여 보지만, 한가지 걱정거리가 있다. 아직도 남성위주 질서의 뿌리깊은 현실이 있다는 것. 그래서, 혹 이 미투운동의 결과로 남성들이 그동안 쌓아올린 사회질서에 빗장을 가하여 여성들에게는 아예 그 문을 열어주지 않게 되면 어쩌나 싶은 것이다. 미투운동의 진정한 지향점이 남성과 여성을 격리하는 것은 아닐 터. 함께 일하며 어울려도 어려움이 없는 사회질서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함께 일하면서도 부적절한 행태가 없이 조화롭게 굴러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미투운동이 성공하려면, 피해입은 여성들이 더욱 용기를 내어주어야 하고, 이들의 목소리와 고통을 거울삼아 남성들이 생각과 태도를 바꾸어야 하며, 그런 후에 남성과 여성이 서로 조화롭게 존중하며 차별없이 존재하는 공동체가 만들어 져야 하는 것이다.21세기 현대는 문명의 화려함으로만 성취되지 않는다. 서로 배려하고 인정하는 덕스러운 인성이 발현되지 않으면, 인간은 또다시 착취와 폭력에 시달릴 뿐일 것이다. 미투운동은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그 어느 변화 못지않은 `변혁`을 가져올 사회운동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미투운동이 우리 `사회`를 정말로 바꾸어가는 그 첫걸음으로 기억되길 기대해 본다.

2018-03-08

변화의 힘, 여성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유리천장(Glass ceiling)`이라는 표현이 있다. 투명한 유리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천장처럼 막혀 있어서 절대로 그 위로는 올라갈 수 없는 장벽. 즉, 충분한 능력을 가진 조직의 구성원 특히 여성들이 사회적 또는 제도적 장벽에 막혀 어느 정도 이상은 절대로 성장할 수 없는 구조를 일컫는 말이다. 작년 가을에 방한하였던 크리스틴 라가르데 국제통화기금 IMF총재는 한국 경제의 심각한 문제로서 여성의 경제참여율이 매우 저조함을 지적하였다. 즉, 우리나라에서 여성에 대한 `유리천장` 현상이 더욱 심각함을 언급한 것이었다. OECD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일할 수 있는 한국여성 가운데 겨우 58%만 경제활동에 참여하여 OECD 참가국 35개국 가운데 31위라는 것이다. 또한, 남녀간 임금격차도 거의 36%이상 차이가 난다고 한다. 즉, 똑같은 능력을 가졌어도 여성이라는 단 하나 이유 때문에 봉급을 3분의 2 정도 밖에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반드시 극복하여야 할 과제인 것이다.유리천장은 사실 경제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불거져 나오는 각계의 성희롱, 성추문, 성폭행 문제는 사실 매우 오래된 사건들이었으며 가해자들이 버젓이 `업계의 관행`이었다고까지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그렇게 참담한 피해를 입어왔던 여성들에게는 참으로 뚫고 솟아오르기 힘들었던 또 하나의 `유리장벽(Glass Barrier)`이 아니었을까. 일상을 지탱하기 위하여 그 같은 폭력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고 오히려 숨겨가면서 치욕과 고통을 겪어온 세월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래서 그 사건이 오래된 일일수록 오히려 그 고통의 무게가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그저 관심을 모으는 뉴스거리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사회와 문화가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걷어내고 진정으로 동등하고 공평한 마당을 만들어 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는 `성차별퇴치를 위한 국민운동`이라도 일어났으면 하는 심정이다.이에 비하면, 평창의 마당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운동선수라면 그 어떤 정치적, 인종적, 사회적 차별을 경험하지 않으면서 공정하게 겨룰 수 있는 텃밭을 만들어 낸 올림픽정신이 그래서 새삼 위대해 보이는 것이다. 그동안 닦아온 모든 기량을 다하여 당당하게 경쟁하고 이기든 지든 그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며 또 그 다음의 겨룸을 준비하기 위해 돌아서는 일. 우리 세상이 궁극적으로 지향하여야 할 모습을 스포츠에서만이라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이런 모습을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에도 구현해야 하지 않을까.도대체 남녀라는 성별의 차이가 어떻게 이처럼 불공정하다 못해 지극히 폭력적인 현실까지 만들어 내었는지 우리는 모두 함께 반성하고 고민하여야 하지 않을까. 여성들 본인에게도 권하고 싶다. 당신들 삶의 현실에서 여성이라는 까닭으로 겪는 불공정과 불평등에 대하여 더 이상 침묵하지 마시기를. 우리의 딸들이 같은 노력과 투자를 기울이고도 동등한 능력을 가진 남성들에 비하여 차별적으로 덜 대접받는다면, 그런 일은 이제 참아내지 마시라. 나이든 지위든 그 어떤 압력을 행사하며 당신의 육체를 탐하는 숫컷이 있다면 그 버릇을 고칠 사람이 바로 당신임을 명심하시라. 그런 상황들을 참고 이겨낸들 그 과실이 당신에게 절대로 아름답지 못할 것임도 명심하시라. 경제는 능력에 상응하여 굴러가야 한며, 사랑은 힘으로 획득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사회가 건강하려면 차별적 시각을 분명히 거두어야 하며 음험한 흑심을 반드시 도려내어야 한다. 기왕에 뉴스도 되고 관심을 모은 김에, 이제 여성들이 우리 사회 변화의 중심에 당당하게 나서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나라와 지역이 한 계단 올라서기 위하여, 우리는 오늘 겪는 차별과 폭력을 반드시 극복하여야 한다.

2018-02-22

유전무죄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1994년 여름, 미국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미식축구 스타의 실패와 몰락을 목격하였다. 오제이 심슨은 한 때 모든 미국인들이 열광하였던 미식축구의 영웅이었는데, 이혼한 아내를 무자비하게 살해한 것으로 의심되어 법정에 세워졌다. 살인 사건의 현장으로부터 자동차로 도주하였을 뿐 아니라 산더미같은 증거들이 확보되어, 미국인들은 거의 그가 살인자인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사건을 맡았던 검사들은 사뭇 자신있는 케이스를 맡은 것으로 알려졌던 것이다. 그러나 긴 법정 공방 끝에 그는 형사재판에서 배심원단의 무죄평결을 받아내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석방되었다. 사건 발생으로부터 무죄평결이 있기까지 16개월 동안 전 미국인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언론미디어를 통하여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미국인들은 지금까지 이 사건을 전형적인 유전무죄의 케이스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이 거의 1년에 달하는 법정공방 끝에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아 석방되었다. 물론, 아직 대법원의 최종심이 남아있어 단정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기는 이르다고 하겠다. 그리고 여러 면에서 저 심슨 케이스와는 확연하게 다른 맥락이 있어 두 사건을 직접 비교하는 일도 그리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보통 사람들의 인식 가운데 `유전무죄`의 그림자를 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심슨의 경우, 그의 재력을 동원하여 고용하였던 최고의 변호인단이 이끌어 낸 무죄평결이 과연 보통 사람들에게도 가능했을까 싶은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경우, 삼성의 배경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미 목격한 바 다른 사람들이 실형선고를 받았음에도 그가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일이 가능했을까 싶은 것이다. 세세한 법적 논리가 가능할 것이겠지만, 보통 사람들이 이 판결을 바라보는 느낌에는 `유전무죄`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음을 부인할 길이 없다.미국이든 한국이든 `유전무죄`의 상황이 발생하면 보통 사람들에게는 씁쓸한 감상을 가지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편 생각해 보면, 어차피 자유경제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시스템에서 가진 이들이 그들의 재력을 십분 활용하여 무엇인가 본인에게 유리한 고지를 획득하는 일을 어떻게 잘못이라 탓할 수 있겠는가 싶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일이 불법이 아니었으며 정해진 법질서와 제도에 어긋남이 없었다면, 더욱이 이를 어떻게 비난할 것인가 싶은 것이다. 차라리 이런 경우, 시스템이 가진 오류의 가능성을 일정 부분 인정하고 그런 가운데에도 사회의 질서가 그래도 적절하게 운용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심슨은 석방되면서 자신의 결백함을 재차 힘주어 주장하더니만 이후 또 다른 범법행위로 지금껏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 부회장은 석방되면서 `그동안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고 하였다. 그의 언급이 그저 영혼없는 공적 메시지가 아니라 그의 진정을 담은 사적 고백이었기를 바라는 바이다. 실로 그가 지난 시간의 어려움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변화를 위한 다짐을 새로이 하여 기업의 경영에 진정한 개혁이 확인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아직 최종심이 남아있으므로, 법을 다루는 이들은 심리와 평결에 있어서도 법적인 논리에 충실할 뿐 아니라 참으로 공평(公平)하고 무사(無私)한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국민들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연속에 시달릴 때,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비열하고 저급한 금전적 논리에 휘둘릴 것인가를 숙고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사회의 정의와 질서를 세워가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워 질 것인지를 명심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유전과 무전에 상관없이 공평하고 정의롭게 운용될 때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좋은 세상이 펼쳐지지 않을까. 더불어 겨루는 `공정한` 경쟁이 존중받고 이웃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늘어갈 때에 나라와 지역이 한 계단 더 올라설 것으로 믿는다.

2018-02-08

평창, 평화의 창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올림픽이 일주일 남짓 남았다. 올림픽의 공식 슬로건은 `Citus, Altius, Fortius`라고 한다. `더 빠르게, 더 높게, 더 강하게.` 전세계 모든 스포츠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인류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바라며, 운동을 통하여 건강한 경쟁의 한 마당을 만들어 보자는 정신. 그래서 올림픽 기간에는 모든 전쟁을 멈추고 모든 다툼은 잠시라도 그 갈등과 싸움을 멈추며 참된 스포츠 정신으로 공정하고 아름다운 한 판의 겨룸을 해 보자는 것이 올림픽 정신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팽팽한 긴장 가운데 거의 전쟁의 그림자마저 드리웠던 한반도에도 모처럼 평화로운 나눔과 평화의 기운이 물씬 스며있는 것이 아닌가. 한반도는 이제 지구상에 거의 홀로 남은 분단의 상징인 것이다. 세계인의 마음에 한반도는 어떻게 그려져 있을까. 같은 민족이면서 물리적으로 나뉘어져 대치와 긴장을 거듭하면서 전쟁의 가능성을 떠올려야 하는 운명. 상징처럼 차갑고 얼어붙은 이 겨울에 온 세계가 한반도로 모여드는 풍경은 더없이 포근하고 따뜻한 기대를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닌가. 마침, 평창올림픽의 슬로건은 `하나된 열정`이라고 한다. 온 세계가 하나가 되고, 모든 세대가 하나가 되며, 기술과 인간도 하나로 어울리는 광경을 만들어 보겠다는 마음의 표현으로 보인다. 갈등과 다툼으로 가득한 한반도에도 평화와 화합의 한 마당을 얼마든지 펼칠 수 있다는 우리의 의지와 세계인의 기대가 평창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다.平昌은 평화롭고 번창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대한민국이 여러 의미에서 평화롭고 번창해 가는 나라가 되어가는 동시에, 이제는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고 평화의 기운을 앞당기는 `평화(平和)의 창(窓)` 역할을 맡았으면 하는 것이다. 다툼을 잠시 멈추고 스포츠로 하나가 되지만, 그 동안에 누리는 평화와 화합의 기운을 보다 영구적인 다짐과 실천으로 만들어 가는 첫 걸음이 되었으면 한다. 동계올림픽의 무대가 마침 한반도이며 평창이기에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자칫 핵전쟁의 그림자마저 넘실거렸던 한반도가 인류의 항구적인 평화를 노래하는 첫 무대가 된다는 그림은 참으로 멋지지 아니한가.올림픽에 전 세계가 평화를 희구하며 어우러질 뿐 아니라 갈등의 직접 당사자인 남과 북이 함께 하는 기회가 만들어진 것도 참으로 다행이라 하겠다. 북한이 이 기회를 올림픽정신에서 벗어나는 기대를 가지고 접근하거나 이를 그 외의 목적에 이용하려는 듯한 모습을 다소 보이는 것은 우려되는 바이다. 북한이 진정한 올림픽정신으로 돌아가 한반도에 긴장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이 땅에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게 하는 데에 함께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한, 정치권 일각에서도 이를 오히려 의심과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아 역대 올림픽이 추구하여 온 정신에 반하는 언급이 이어지는 것도 걱정이 되는 것이다.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하여 한 마음으로 노력하였던 초심과 진정성으로 돌아가 평창올림픽이 성공할 수 있도록 기대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남과 북이 서로 화합할 뿐 아니라, 전 세계를 향하여 한반도가 새 희망의 근원지가 되어갈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날들이 되기를 기대하여 본다.평창올림픽 슬로건 `하나된 열정`의 영문표기는 `Passion. Connected.`라고 한다. 나라와 문화를 연결하고,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열정. 차별과 차단을 극복하고, 다양성과 풍성함에 기대를 거는 열정. 21세기는 혐오와 차별을 떨쳐내고 모두가 어우러지며 함께 하겠다는 의지. 이제 올림픽정신을 올림픽에만 가둘 것이 아니라 평창올림픽을 넘어 나라와 세대를 품어내는 더 높은 희망으로 만들어 갔으면 하는 것이다. 평창이 `평화의 창`이 되길 기원하는 바이다. 단절과 분열은 이제 설 자리가 없어야 한다. 갈등과 다툼은 이제 그 고집을 내려놓아야 한다. 세계와 우리 모두는 평화에 목이 마르지 않은가.

2018-02-01

한파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춥다. 움츠리며 아랫목으로만 파고들게 하는 날씨. 살을 에는 듯 물리적으로 추운 만큼, 우리에게는 마음을 어렵게 하고 생각을 복잡하게 만드는 소식들과 상황들이 여럿 펼쳐져 있다. 함께 벌어지고 있지만 둘 가운데 어느 하나도 실패할 수 없는 일들. 먼저, 평창올림픽의 개최를 앞두고 이를 참으로 세계인들의 평화와 화합의 잔치로 만들어야 하는 일. 그리고, 적폐청산에 나선 우리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지 않으면서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 여러 다양한 의견들을 잘 듣고 생각을 지혜롭게 모아서 이들 상황들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한 마음을 끼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일을 맡아 진행하는 이들에게는 날씨가 살을 에는 만큼 마음고생이 심할 터이다.먼저 올림픽. 북한이 참여하게 되어 생각거리가 많아지기는 하였지만, 올림픽정신이 본질을 살피면 의외로 그 지향점과 대처방안은 그리 어렵지 않게 정리되는 것이다. 즉, 평화와 친선, 그리고 도약을 기본정신으로 하는 올림픽은 어려움이 가득한 세상이 스포츠를 통해 평화와 화합을 떠올리며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다짐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평화를 기대하는 마음들이 모아진 까닭에 세계대전을 가로지르면서도 열린 바 있었으며, 지금은 한국과 북한의 긴장관계도 씻은 듯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닐까. 당장 벌어지고 있는 해빙의 무드와 평화의 기운도 주목거리이기는 하지만, 올림픽이 지난 다음에도 이 같은 분위기가 이어질 수 있을 것인지 사뭇 기대도 되고 우려도 쌓이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어떻게 잘 승화시켜 한반도에 항구적인 평화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인지 깊은 고뇌와 함께 관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평창올림픽을 평화올림픽으로 치러 내는 것이 중요한 만큼,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시작되는 그 첫 계단으로 만들어 낼 필요가 간절한 것이다.둘째, `이게 나라냐`는 구호와 함께 기대하였던 적폐청산의 길목에는 자칫 국민의 마음들이 나누어지고 갈등이 피어날 싹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도 우리가 바라던 나라와 사회의 모습이라는 그 본질에 초점을 부단히 맞추면서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정부는 불필요하고 부적절한 오해와 다툼이 발생하지 않도록 잘 관리해야 할 것이며, 이를 바라보는 정치권은 상식에 근거하여 반응하고 건설적으로 비판하며 조언해야 할 것이다. 여러 차례 변화를 겪은 우리 국민들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기본적인 지향점에 관하여 이미 잘 알고 있다. 그 어떤 주장에도 들리는 대로 흔들리기 보다는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는 간절함이 뿌리내려 있는 것이다. 과도한 선동이나 이념적 수사에는 휩쓸리지 않을 지혜도 축적하고 있는 것이다. 도를 넘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국민이 바라는 바 본질을 흐리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한파가 깊을수록 봄이 멀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올림픽을 통해 이 땅에 평화의 기운이 싹을 틔우고 새 봄에는 그간의 긴장을 극복하는 진정한 남북대화의 장이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평화요 통일이었음을 증명할 기회가 당기는 평창올림픽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또한 몇 번의 오르내림을 통해 국민이 경험한 바 진정으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의 싹을 이제는 제대로 틔워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 지배받거나 통치되는 국민이 아니라,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존중받으며 그 인권이 살아나는 사회로 나아가는 새 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이 겨울 한파를 이기고 새 순이 돋아날 무렵에는 이 땅에 진정한 평화의 기운이 넘치고 우리 사회는 나라다운 나라를 누리며 국민의 자리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파가 매섭기는 하지만 봄 기운을 막아서지 못할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2018-01-25

두 마리 토끼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영화 `1987`을 보았다. 뼈아픈 희생들이 있었지만, 힘없는 시민들의 함성은 모두에게 마침내 가슴벅찬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직선제 개헌을 시민의 힘으로 일구어 내었고 이로써 한국현대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그런 기억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우리는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88올림픽`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세계적 위상은 그야말로 쑥 자랐던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2017년의 기억이 뚜렷하다. 이번에도 시민의 힘으로 가슴벅찬 일을 해 내었다. 구습에 찌든 정권을 몰아내었으며 시대정신과 함께 할 나라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여러 모로 아직 그 평가는 이르겠으나 국민의 기대는 아직 살아있는 셈이다. 이같은 기억과 기대가 아직도 생생한 지금, 우리는 `평창동계올림픽`을 코 앞에 두고 있다. 1987년의 기억을 배경으로 펼쳤던 서울올림픽과 2017년의 기억을 배경으로 펼쳐질 평창올림픽이 절묘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이 평창올림픽에는 `남북관계`라는 또 하나의 시금석이 더하여 졌다. 북한의 김정은은 `평창동계올림픽이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며 대회가 성과적으로 개최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면서 북한선수단이 참여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그간 얼어붙었던 관계를 당장이라도 녹여줄 듯한 일들이 연일 벌어지고 있다. 이로써 평창올림픽을 해빙의 계기로 만들고 `평화올림픽`으로 성사시켜 갈 일을 고심하며 남북이 머리를 맞대는 일들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은 대한민국이 삼수 끝에 유치한 것이라 올림픽 그 자체로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하며 국가적 위상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절호의 기회이지만, 북한의 참여를 순조롭게 잘 이끌어 내면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에도 매우 의미깊은 기여를 하게 될 것이라서 새로운 기대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야말로 올림픽과 남북관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잘 몰아가야 하는 형국인 셈이다. 올림픽도 성과있는 결과를 만들어 내려면 특단의 노력을 들여야 하겠지만, 북한이라는 어려운 상대가 있는 남북관계의 새로운 설정을 통하여 동북아지역이 평화로운 기운을 회복하게 하려먼 참으로 지난한 수고가 더해져야 할 일인 것이다.우리가 바라는 바가 있을 것이며 북한의 계산이 또한 있을 터이다. 그리고 국내외에서 이를 두고 던지는 우려의 시선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이들을 지혜롭게 극복하며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올림픽과 남북관계를 모두 잘 치러낼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올림픽을 유치한 주인으로서 대한민국의 위치와 이를 함께 축하하며 동반자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며 참여하는 북한의 자리를 함께 존중하면서 나라와 국민이 이 좋은 기회를 잘 살려 주기를 기대하는 바이다.평창올림픽은 운영하기에 따라서는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2020년 하계올림픽이 일본 도쿄에서 열리며, 2022년 동계올림픽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다. 이들 세 번의 올림픽들이 연이어 동북아시아에서 열리는 일을 두고, 이번 평창동계올림픽을 이 지역에 새로운 평화의 기운과 발전의 기틀을 불러오는 기회로 만들어야 할 터이다. 그 일의 선두주자로 나선 대한민국이 그 첫 관문을 잘 열어주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참여로 그런 기운이 더해질 확률도 높아진 셈이다. 이제 우리는 1988년의 기억을 새롭게 불러와 2018년의 성공을 이끌어 내어야 한다. 나라 안의 새로운 기운을 만들어 내었던 국민의 힘과 열정을 다시 살려내어 또 한번의 국운상승의 토대를 가꾸어가야 하는 것이다.서울올림픽이 세계인들에게 이 나라를 더욱 기억하게 하였다면, 평창올림픽은 그들에게 다시 한번 놀라움과 상상력으로 가득한 대한민국의 이미지를 각인하게 하여야 한다. 이 일에 북한이 함께 하므로, 보다 깊은 의미가 새겨지기를 기대하여 본다.

2018-01-18

조선의 어우동과 현대의 성범죄

▲ 강희룡 서예가현대사회에서의 성추문은 연예계는 물론 계층이나 대상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 민감한 사회적 이슈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국회의원부터 대학교수, 고위공직자를 비롯해 기업의 오너나 직장 내에서까지 성범죄 사건이 전 방위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연예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배우나 단역배우들의 성폭행 또는 성추행 사건에 대한 관련기사만 보더라도 그 규모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는 경향이 크다. 이에 따라 그간 야기하지 못했던 억압된 경험들이 계속해서 꼬리를 이어 공개되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 새롭게 불거진 대표적인 성추문 사건은 고(故) 장자연씨 사건이다. 소속사 대표로부터 방안에 감금되고 페트병으로 손과 머리를 수없이 맞으며 온갖 욕설로 구타를 당했다는 등의 폭행 정황이 발견됐다고 한다. 고 장자연씨는 지난 2009년 강제적으로 여러 분야의 유력인사들에게 성상납을 강요받고 수차례 폭행당했다라는 내용의 유서와 유력인사 리스트를 남기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해당 리스트에는 연예기획사 관계자를 비롯해 언론사 관계자, 대기업 및 금융업 종사자 등의 이름이 담겨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다수가 혐의 없음 처분을 받는 등 부실수사 논란이 일었었다.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성추문은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에게서 나왔다. 어우동(於于同)이 그 주인공이다. 조선조의 공식기록인 `성종실록`에는 어우동 사건의 전말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서 어우동이 당시 사회의 뜨거운 감자였음을 알 수 있다. 어우동은 승문원지사 박윤창의 딸이다. 그녀는 집에 돈이 많고 자색이 있었으나 성품이 방탕하고 바르지 못해 종실 태강수의 아내가 된 뒤에도 태강수가 막지 못했다. 은그릇을 만드는 장인을 불러 내실로 끌어들여 음탕한 짓을 하다가 남편이 자세한 사정을 알고 마침내 내쫓아 버렸으나 이로부터 방자한 행동을 더욱 거리낌 없이했다 한다.`성종실록, 성종 11년(1480) 8월 5일` 사헌부 대사헌 정괄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 등은 생각건대, 어을우동이 사족(士族)의 부녀로서 귀천을 분별하지 않고 친소(親疏)를 따지지 않고서 음란함을 자행했으니, 명교를 훼손하고 더럽힌 것이 막심하니, 마땅히 사통한 자를 끝까지 추문해 엄하게 다스려 국문하도록 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유소, 노공필을 비록해 수많은 관리들이 연유되어 있었다. `성종실록 성종 11년(1480) 10월 18일` `어을우동을 교형에 처했다. 어을우동은 바로 승문원 지사 박윤창의 딸인데 처음에 `태강수 동(仝)에게 시집가서 행실을 자못 삼가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어우동은 음행이 문제가 되어 결국에는 교형으로 생을 마감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활약한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에도 당대에 겪었던 어우동 사건의 시말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조관(朝官)이나 유생으로서 나이 젊고 무뢰한 자를 맞아 음행하지 않음이 없으니 조정에서 이를 알고 국문 혹은 고문을 받고, 폄직되거나 벽지로 귀양 간 사람이 수십 명이었고, 죄상이 드러나지 않아서 면한 자들도 또한 많았다. 의금부에서는 법으로서 죽일 수는 없고 먼 곳으로 귀양 보냄이 합당하다고 했으나 임금이 풍속을 바로잡자 하여 형에 처하게 했다. 본격적으로 성리학의 이념을 전파하려고 하던 시대에 발생한 성추문사건은 성리학의 이념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캐릭터였다. 때문에 시범적으로라도 처형해서 모든 조선의 여성들에게 반면교사로 삼게 하자는 임금의 뜻이 피력돼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전방위적으로 발생되고 있는 각종 성범죄와는 내용면에서는 좀 다를지 몰라도 사회를 혼란으로 빠트리는 범죄행각에는 다를 바 없다. 국민 모두가 이러한 범죄행위를 척결시켜야 하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

2018-01-12

대학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초기엔 `상아탑(tour d`ivoire)`이었다. 속세에 물들지 않고 현실과는 거리를 두면서 자연을 벗삼으며 예술을 사랑하고 지적이며 심미적인 안목과 능력을 기르는 장소로서 대학은 많은 지성인과 지도자들을 길러 내었다. 그리고는 근대를 맞은 대한민국에서 대학은 `우골탑(牛骨塔)`이 되었다. 사회에서 성공에 이르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하는 대학에 자녀를 보내려면 시골의 부모는 소를 팔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시절, 대학은 기회의 통로이자 명성을 위한 간판이었다. 그러면서 대학의 청년문화는 일정부분 사회의 엘리트들을 길러내는 문화적 표징으로서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변되곤 하였다. 이제 곧 사회로 진출하여 여러 분야에서 리더로서 자리를 잡을 젊은 세대는 우리 사회의 문화도 맨 앞에서 만들어 가고 있었다. 이제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80%가 넘게 대학에 간다고 한다. 오늘 우리 대학의 모습은 어떠한가. 21세기 우리 대학생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대학은 어떤 사람을 길러야 하는가. 미국의 사회학자인 앤드루 델방코(Andrew Delbanco)는 대학의 본질이 `젊은이들을 민주시민으로 길러내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어찌 보면 그의 목소리는 대학에 가는 개인적이며 현실적인 필요를 도외시한 생각처럼 들린다. 그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이제 곧 성인이 될 즈음해서 가게 되는 대학에서 자신의 실력을 닦아 그 이후의 삶이 안정되도록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는 것이 사회와 이웃에 대한 태도와 역할이라는 것이다. 성인으로 접어들면서 개인적인 흥미와 관심 분야가 생기고 정치적 안목과 세계관이 자라나며 사랑과 우정의 깊이가 더해가고 스스로 헤쳐 갈 지평이 어슴프레 보이기 시작할 무렵, 사람의 개성이 본격적으로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바로 이럴 즈음에 우리는 개인의 생존을 위한 기술에만 집중하기 보다 보다 폭넓은 인성과 특히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대학에서의 담론은 할 수 있는 대로 제한없이 자유롭게 확장적으로 진행될수록 좋다. `표현의 자유`가 가능한 대로 허용되어 젊은 지성들이 마음껏 받아들이고 충분히 고뇌하며 독립적으로 결정해 가는 너른 지평이 바로 대학의 광장이었으면 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물건의 질이 좋지 않으면 결국 잘 팔리지 않아 시장에서 도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담론의 지평에도 `생각의 시장(Marketplace of Ideas)`이 있다고 한다. 던져진 생각과 개진된 의견이 공동의 선에 부합하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도태되어 갈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의 존재 이유는 지성적 문화를 기르는데 있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더 많이 알아내고 인문학적으로 더욱 폭넓게 이해하며 그리고 이를 보다 아름답게 표현하는 공부를 심도있게 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결과 개인의 성장이 담보될 뿐 아니라 총체적으로 소양깊고 책임있는 인성들이 길러지는 곳이 대학이어야 한다. 만약 그저 취업이나 돕고 기술이나 가르치려 했다면 대학은 그 들이는 비용에 비하여 매우 비효율적인 투자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대학에서 받은 교육이 대학 이후의 삶에서 진정으로 그 진가를 발휘하게 하려면 우리는 대학에서 무엇을 어떻게 나누고 함께 배워야 할 것인지 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학생들에게 일방적인 주입과 전달은 이미 그 힘을 잃었다. 다음 세대 대학생들과 이전 세대 교수들이 공유하고 상생하며 더불어 배우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대학에서 진정한 시민역량이 길러지는 환경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대학의 강의실이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만남과 배움이 일어나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우리 사회는 여전히 대학이 세상을 바꾸어 가는 일의 중심에 서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다음 세대와 함께.

2018-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