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설날생각

장규열한동대 교수새 해를 맞는다. 신정을 보내고 다시 맞는 설이라 낯익고 반갑다. 날마다 똑같은 날들이었을 것을, ‘새 해’라 부르며 매듭을 짓고 새롭게 시작할 생각을 어떻게 하였을까. 살아가는 동안 세파에 쌓여가는 주름과 시름을 훌훌 떠나보내고 새 날을 맞는 다짐으로 다시 시작하는 일은 얼마나 지혜로운가. 개인도 나라도 회사도 학교도 설 명절 몇 날을 보내며 새 기운을 다지고 싱싱한 각오를 새롭게 채운다.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네 삶이 기름져 가고 풍성해 지기를 모두 기원하며 새 해를 맞는다. 서로서로 다들 모든 일들이 잘 풀려가기를 소원하며 덕담을 나눈다. 나라가 잘 되고 개인이 행복하며 사업도 번창하기를. 적폐라 부르며 딛고 일어서기를 원했고 새 날이 오면 모든 게 잘 돌아갈 것으로 기대하였다. 올 한 해도 무엇이든 잘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은 누구나 한결같을 터이다. 하지만, 왠지 자신이 없다. 왜 그러는 것일까,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갈수록 나아져야 하는데, 갈수록 서 있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 그런 것일까. 우리 집만 그런 것일까. 이게 나라냐 물으며 밝혔던 촛불이었는데, 바로 잡혀 모든 게 좋아졌는가 물으면 돌아오는 답들이 신통치 않다.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수많은 사람들을 묶어서 부를 적에 ‘대중’이라 표현하였다. 큰 무리의 사람들을 통칭하여 부르면서 좋은 리더 한 사람이 멋진 생각을 던지면 모두 함께 따라올 것으로 기대하였다. 실제로 한 때는 그러기도 하였다. 일치단결과 국민총화를 던지고 많은 사람들이 화답하기도 하였으니까. 하지만, 그 시절 그들이 놓쳤던 생각은 ‘민중’이었다.대중을 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사이에 희생하고 억눌리며 빼앗기고 힘든 백성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민주주의’를 새기면서, 천천히 가도 모두 함께 가자는 생각으로 ‘민중’을 떠올리지 않았던가. 소수의 행복을 추구하기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이 나아져 가기를 기대하였다. 더불어 잘 살아본다는 생각이 뿌리내릴 것으로 설레기도 하였다. 다시는 소외와 차별을 겪지 않으며 함께 성과와 결실을 나누기를 꿈꾸었었다. 이끄는 리더들이 민중을 섬기며 낮은 자리로 내려올 것이었다. 덜 가진 사람들을 향한 배려와 나눔이 풍성해 질 터이었다. 보통사람들이 어깨를 펴는 날이 가까워질 것으로 기대하였다. 조급해서 그런 것일까 그런 세상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새 해는 나아질까 기대도 하고 혹 희망고문이면 어떻게 하나 우려도 된다. 이념의 방향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세상의 좋은 생각들을 폭넓게 담을만한 큰 그릇이 필요하다. 지극히 소수의 극우와 극좌를 빼고 나면, 보통 사람들은 모두 오른켠과 왼켠 사이의 어디쯤에 있다. 안보에 관해서는 지극히 보수적인 사람이 교육에 관해서는 매우 진보적일 수 있지 않은가. 아니, 그 한 사람도 한 가지 이슈에 대하여 한 때는 보수적이었다가 시류에 따라 얼마든지 진보적으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정치권이 사람들을 이념의 틀 안에 가두는 일은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그래서 쓰이는 표현이 다중(Multitude). 끈끈하고 든든한 연결고리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SNS 등의 약한 연결을 가진 사회집단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대중 또는 민중처럼 구심점을 공유하지 않으며 특정한 이슈들에 대해서는 함께 행동하면서, 개인의 특성을 인정하며 존재한다. 촛불에 동참했던 이들은 다중이 아니었을까. 적폐와 구습을 몰아내는 일에 불꽃처럼 함께 하였지만, 이제는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그러니 쉽지 않을 터이다. 평등과 자율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다중을 우리의 리더들은 어떻게 섬겨야 할까. 새 해에는, 이념으로 재단하지 말고 능력으로 증명하시라. 탕평(蕩平)과 대동(大同)은 오늘 필요한 생각이 아닌가.

2019-02-06

역사의 기억

장규열한동대 교수‘평생 누구에게도 정을 주어보지 않았어.’ 김복동 할머니가 한 인터뷰에서 토로했던 고백이었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영문도 모르고 따라나섰던 길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존재마저 부정당하는 경험을 했었을 것이니 어찌 그러지 않았을까. 세상에 누구를 믿으며 누구와 살가운 정을 나눌 수 있었을까. 그가 살아온 세상이 얼마나 미웠을까. 그의 하루하루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랬던 그가 한 자락 소원도 풀어보지 못하고 끝내 돌아가고 말았다. 함께 아픔을 나누었던 이들에게 마지막 남긴 한 마디가 ‘끝까지 싸워주시게.’였다고 하니, 남은 우리는 모두 숙연해 질 수밖에 없다.1970년 12월 7일, 폴란드의 무명용사 묘지를 방문했던 서독수상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예정에 없었던 이 돌발행동을 두고 시사지 슈피겔(Spiegel)은 ‘무릎꿇을 필요가 없었던 그가 정작 무릎을 꿇어야 할 용기없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무릎을 꺾었다’고 적었다. 2차대전에서 독일이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나라를 대표하여 진심어린 사과를 전한 것으로 기억되고 있지 않은가. 이후 독일 내부에도 여러 목소리가 있었겠지만 유럽 각국 간 분위기는 오늘 일본을 대하는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생각에는 여전히 전쟁과 폭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 입에는 “미국을 믿지 말고 로씨아에 속지마라. 일본은 일어난다”가 아니었던가.목포로 간 손혜원 의원 덕이었을까, 아니, 탓이었을까. 도시에 일본 사람들이 남기고 간 흔적이 즐비함을 알게 되었다. 우리 지역 구룡포에도 일본사람들이 살다간 집들이 여러 채 보존되어 ‘근대문화역사거리’가 조성되었다. 들리기로는 군산과 인천, 그리고 서울에도 유사한 건물들이 많다고 한다. 나전칠기가 목포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몰라도 그보다는 저 일본식 옛 집들을 어찌 할 것인지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구룡포의 옛 모습을 우리가 되새기는 의미는 무엇인가 다시 살펴야 하지 않겠는가. 이들 옛 공간을 그저 물리적인 존재로만 바라보고 그리움과 향수를 자아내기만 할 것인가. 아니 그들이 남기고 간 흔적으로부터 과거 일본의 기억을 다시 새기고 오늘 일본의 모습을 잘 살필 수 있도록 적절한 긴장과 경계심을 만들어 내는 장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견제와 균형은 국가 간에도 필요한 것이다.일본 정부와 아베 수상은 일본 내 보수여론을 결집해 가면서 ‘일본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남북과 북미가 대화와 외교를 통하여 평화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일을 일본은 위험한 진보라고 본 모양이다. 과거 힘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면서 새롭게 일어설 기회를 만들어 갈 틈을 엿보는가 싶다. 일본 초계기가 우리 함정 주변을 낮게 비행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보아도 전에 없이 위협적이며 우리를 시험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한반도의 운명과 미래는 우리 안에서 너끈히 세워갈 것임을 반듯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일본은 우리에게 영원히 갚지 못할 무거운 빚이 있음을 분명히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들도 일본이 그리 진솔하지 못함을 자각하여야 한다.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이었으면 한다. 역사의 기억을 말끔히 씻을 때에 그리 될 수 있을 터이다. 역사는 상처깊은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둘러보면 어두움으로부터 일어선 좋은 기억도 함께 새기고 있다. 일본에게 무릎꿇을 용기가 없다면 독일 역사에서 배우길 바라고, 어린 소녀들에게 가한 고통을 혹 잊었다면 김복동 할머니 영전에 가 보길 바란다. 우리는 일본이 남기고 간 흔적에서 역사를 기억하여야 한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

2019-01-30

대한민국과 베트남

장규열한동대 교수아시안컵 축구가 1월의 추위를 녹인다. 우승을 목표로 투혼을 불사르는 대한민국 축구팀에 높은 기대가 걸린다. 우리가 이 대회에서 우승했던 기억이 반세기가 넘는다니 이번에는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한편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가 못지않게 관심을 끈다. 오늘 우리는 베트남 축구경기에도 거의 한 마음으로 응원하며 지켜보는 것이다. 박 감독의 리더십에는 성실한 준비와 냉철한 분석은 물론 넉넉한 이해와 따뜻한 감성이 엿보인다. 선수들이 감독을 거의 아버지로 여길 만큼 때로는 매섭게 그러나 언제나 정겹게 지도한다는 것이다. ‘박항서매직’이라 불릴 정도로 베트남 축구에 신명나는 기억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 해를 훌쩍 넘기며 지속되는 것으로 보아, 한국의 히딩크열기는 이미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베트남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남의 싸움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내어 대신 전쟁을 겪었던 역사의 그늘이 드리운 땅이 아닌가. 그 덕에 우리 경제가 나아졌다고 하는 소리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월남패망을 되뇌이며 색깔논리를 풀어놓기에도 이제는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베트남은 모든 외세를 물리친 위대한 기억을 간직하며 새로운 시대를 역동적으로 열어가는 나라인 것이다. 그들의 기억 가운데에는 한국군대가 저지른 잘못들도 분명히 있다. 꽝응아이(Quang Ngai)성에 서 있는 한 ‘한국군 증오비’는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우리는 이를 영원토록 뼛속깊이 새길 것이다’라고 적었다.이성(理性)의 힘으로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였던 20세기가 참혹한 전쟁들과 수많은 희생만을 남겼던 근현대의 부끄러움이 있다. 이제 펼쳐가는 21세기는 그 같은 수치(羞恥)를 반복하지 않을 것인가. 오늘도 그칠 줄 모르는 전쟁과 기근, 난민과 장벽 뉴스들은 그런 세상이 과연 올 것인지 우려하게 만든다.박항서 감독은 자신의 실력과 소양으로 성실하게 베트남 축구를 돕고 있다. 그들 축구에 승전보를 하나씩 더할 때마다 베트남 국민들에게 흥분이 쌓이고 즐거움을 더할 터이다. 그러는 사이 과거의 아픈 기억도 한 겹씩 씻기어 가기를 기대해 본다. 뼛속깊이 새겼을 만행의 상처가 조금씩이라도 벗겨졌으면 한다. 동시에 우리 정부와 국민은 베트남 전쟁 중에 우리 군이 자행한 잘못에 대해서 진중하게 되새기고 진솔하게 사과하며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는 다짐을 분명히 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하여 보다 단호하게 무엇을 요구하기 위해서도 베트남 역사에 우리가 끼친 실수를 바르게 짚어야 할 것이다. 유대인학살 등에 대하여 독일이 공식적인 사과를 거듭 진지하게 하는 모습도 바로 이런 노력이 아니었을까. 대한민국과 베트남, 이제는 역사의 기억을 딛고 함께 일어서야 한다. 부끄럽고 어두운 기억을 망각하기 보다 내일을 겨냥하는 새로운 지평을 열면서 그 기억의 의미를 새기고 살펴야 한다. 분명한 사과와 배려, 협력과 상생의 길을 열어가야 한다. 오늘 베트남은 역동성과 젊음으로 가득하여 우리 청년들에게도 함께 호흡할 여지와 가능성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경험과 걸어온 스토리도 베트남에게는 큰 교훈이 될 터이다. 박항서 감독의 실력과 진정성이 베트남에서 통하고 베트남 청년 선수들의 기백과 용기가 만난 저 ‘매직’은 앞으로 다른 여러 가닥에서 더 많이 펼쳐져야 한다. 핑퐁외교가 거대한 중국을 열었듯이, 축구 이야기가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하고 함께 열어가는 지평의 단초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앞으로 또 몇 날, 양국 대표팀이 아시안컵에서 더 오래 이겨주었으면 한다. 한국과 베트남의 국민 간 우정이 더욱 든든해지도록.

2019-01-23

나무와 숲과 미세먼지

장규열한동대 교수사람이 값없이 누리는 혜택을 이야기할 적에 늘 꼽던 ‘물과 공기’가 아니었던가. 봉이 김선달을 떠올릴 것도 없이, 이제 물은 이미 공짜가 아니다. 국내 생수시장의 규모는 곧 1조 원대에 육박할 정도로, 물은 누구나 사먹는 상품이 되었다. 그렇다면 공기는 어떤가. 수년 전 중국을 방문하면서 도심의 공기가 잿빛으로 변한 것을 보고 안타까웠더니, 이제 그런 하늘을 우리가 가지게 되었다. 문제가 심각하므로 그 까닭을 찾아 원인부터 해결하면 좋겠지만, 이제는 이미 닥친 현상에 대처하는 일에도 상황이 급하게 생겼다. 미세먼지. 홍수와 지진, 태풍과 가뭄 등 자연재해와는 다르게 미세먼지 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문제가 아닌가. 기술의 진보와 산업의 발전이 초래한 대기오염이 그 주범인 것이다.문명의 발달과 생활의 도시화가 빚어낸 환경파괴와 자연붕괴가 급기야 생존의 기본이 되어야 할 공기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를 작은 분진인 미세먼지는 현대 인류에게 심각한 과제를 던진다. 특히 노인, 임산부, 어린이, 그리고 태아 등 미세먼지에 취약한 인구계층을 만들어내어 보건당국을 긴장하게 한다. 노인사망률이 급격하게 높아지는가 하면, 기형아 출산과 사산의 원인이 된다. 사람의 폐 속에까지 들어와 쌓이는 미세먼지는 각종 호흡기질환을 발생시키며 인체의 면역기능을 약화시킨다. 천식, 두통, 아토피 등의 질병들과 노년층의 인슐린 저항성을 높이게 하여 당뇨병과 심장병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미세먼지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의 발전과 함께 꾸준히 축적되어 온 인자들이 대기의 질에 악영향을 끼치면서 지속적으로 생겨온 문제라고 한다. 이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면서 이루어 온 인류문명의 습속을 되짚어 보며 자연과 인간이 다시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뉴욕의 센트럴파크, 도쿄의 우에노공원, 런던의 하이드파크, 밴쿠버의 스탠리파크, 슈투트가르트의 그린유숲 등 세계 여러 도시들은 녹지공원과 도시숲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시민들을 위한 휴식공간을 제공하면서 공기의 질을 순화시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최근 미세먼지 문제와 관련하여 도시에 숲을 조성하면 미세먼지 저감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고 있다. 숲이 가지는 기능 가운데 대기오염물질 저감효과가 탁월하다는 것이다. 나무는 흡수, 흡착, 침강, 차단을 통해 미세먼지를 줄인다고 한다. 도시에 더 많은 녹지공간이 확보되고 숲이 만들어 질 수 있다면, 도시의 미세먼지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6년 국립산림과학원의 연구 결과, 도시에서 발생한 미세먼지의 42%는 숲이 흡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나무와 숲이 미세먼지의 도전에 효과적인 해결방안이 될 수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관련하여 경북교육청이 점차적으로 ‘학교숲’을 만들어 교육환경에 숨길을 틔우고 환경보호도 돕겠다는 발상은 매우 좋은 발상으로 보인다. 미세먼지에 특별히 취약한 아동, 청소년들이 배우는 현장에 나무와 자연을 당겨놓겠다는 생각도 소중하다. 학교 담장을 콘크리트 벽보다 아예 나무을 심어 만들면 어떨까. 지역의 도시들은 어떤가. 도심의 녹지공간을 살피며 보존하기 보다는 훼손하거나 파괴한 일은 혹 없었는지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길게 보아 자연보호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미세먼지 저감을 위해서도 나무와 숲은 살려가면서 도시를 계획하고 도로를 조성하였으면 한다. 짧은 안목에 갇힌 물질문명에 집중하기 보다 긴 호흡으로 지구를 살리고 지역이 숨쉬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 잘라 없애고 지워버리는 일은 쉽다. 하지만, 그 바람에 날아가 버릴 우리 모두의 숨통은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나무와 숲으로 공기를 살리자. 공기도 사 마셔야 할 것인가.

2019-01-16

문화의 힘

장규열한동대 교수중국의 지도자들은 이념적으로는 공산사회주의 기본질서를 유지하면서 나라를 이끌고 일으켜 가는 정책의 방향은 글로벌 시장의 흐름과 시대적 지향성을 살펴가면서 운용해 오고 있다. 1968년에는 상업창부(商業創富)라 하여, 나라의 부를 전통적 상인 기질을 발휘하여 부강하게 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876년에는 과기창신(科技創新), 즉 과학과 기술의 힘으로 나라의 위상을 한 단계 올려놓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2002년부터 문화창의(文化創意)라 외치면서 문화를 기반으로 나라의 뜻을 세우며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즉, 21세기에는 문화가 주도하는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한 것이며, 실제로 다양한 방면에서 풍성한 문화정책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경제와 정치, 국방과 외교가 나라를 운용하는 수단이지만, 문화의 그루터기가 든든해야 새로운 시대를 자신있게 열어갈 것임을 알았던 것이 아닐까.혼란의 해방 정국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이렇게 적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그는 그토록 어지러웠을 정치현실의 한 가운데에서 어떻게 문화를 떠올렸을까. 그리고 그것을 ‘힘’으로 표현하였을까. 김구 선생은 사람이 푯대로 삼아야 할 여러 지향점들 가운데 문화가 가장 높은 경지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것이라 자랑할 만한 문화가 우리에게 과연 있는가. 오늘 우리는 문화를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일에 얼마가 생각을 기울이는가. 정치와 경제로만 사람의 삶이 해결되지 않으며, 국방과 외교로 지켜내는 나라의 정체성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에게만 독특하고 분명한 문화적 색깔을 찾아야 하고 길러야 한다. 우리들 스스로 이를 살피고 발견하고 우리의 것으로 다듬어 가야한다. 중국이 문화창의를 외칠 즈음에 한국도 나름 문화를 주요 정책지표의 하나로 세웠었다. 하지만, 어느 틈에 문화는 정책의 중심에서 도외시된 듯하다. 조선의 세종과 정조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문화가 나라와 사회의 한가운데 기둥이 되어 튼실하게 버틸 공간을 제공하여 줄 때에 백성의 운명과 국운이 함께 펼쳐졌던 기억이 있다. 이제라도 한 때 되새겼던 ‘문화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 문화로 강한 나라를 만들어 가는 일에 나서야 한다.지역은 어떠한가. 문화는 그를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소중하여 빼놓을 수 없는 무엇이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똑같을 것을 찾아볼 수 없을 때에 비로소 그 지역의 ‘힘있는 문화자산’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에 이를 토대로 차별화도 가능하고 특성화도 시작될 것이다. 우리에게만 있어 ‘문화원형’이라 부를 만한 소재들을 발굴하여야 한다. 나라와 지역에 고유한 문화원형들을 앞으로 전개할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적극 활용할 때에 우리만의 문화의 힘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문화는 모두 옛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고루하다. 문화는 지극히 자연발생적이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언제든 자생적으로 피어나고 저절로 변화해 간다. 오늘 우리의 모습에서 남들과 다른 문화자산을 찾아야 한다.문화로 승부하고 상상력으로 승부하여야 한다. 이전과 다르고 남들과 다른 나라가 되고 지역이 되어, 문화가 힘이 되는 내일을 열어가야 한다. 어려울수록 문화를 떠올렸던 까닭을 다시 새겨보아야 한다. 문화가 힘이다.

2019-01-09

생각의 지평

장규열 한동대 교수지난 해 11월 미국의 우주탐사선 인사이트(Insight)호가 화성에 착륙하였다. 화성은 고사하고 달에도 못 가봤을 뿐 아니라, 겨우 발사체 개발의 초기단계를 지나고 있는 우리에게 ‘우주개발’ 또는 ‘우주여행’은 머나먼 이야기이다. 하지만, 달을 정복하고 화성에 도달하며 우주를 넘나드는 일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는 미국인들의 마음이 궁금하다. 당장 그 어떤 이득도 보이지 않는 일에 어쩌면 그렇게 집착하는 것인지 그리고 열광하는 것인지. 자율주행자동차 테슬라(Tesla)의 CEO인 일란 머스크(Elan Musk)는 ‘화성으로 이주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그 정도면 지구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터에, 스스로 기대하기에도 70%가 넘는 사망에 이를 확률을 감수하고라도 화성에 가 살겠다고 한다. 저 무모해 보이는 도전의식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우선, 생각의 끄트머리가 길다. 우리는 교육을 백년대계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에 옮길 때에는 시선의 끝이 늘 턱없이 짧다는 걸 연거푸 목격하지 않는가. 나 죽은 다음에 벌어질 일에 관해서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인지상정이라고 여기지 않는가. 그러다 보니, 망가져 가는 지구와 무너져 가는 환경은 보통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낼 방법이 없다. 미래 뿐 아니라 과거를 되짚는 태도도 길어야 내가 살아있었던 시간 정도만 의미가 있다. 그러니, 오늘 적용할 교훈을 역사로부터 찾아 새기는 일에 서툴고 어색하다. 미국 언론인 스티븐 페트라넥(Stephen Petranek)은, 화성을 인간이 가서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내는 데에 대략 천 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하였다. 태연하고 진지하게, 천 년이 걸릴 일이라고 하였다. 천 년. 우리들 가운데 누구라도 천 년이 걸릴 일에 진심으로 착수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도 보다 길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또 하나, 생각의 테두리가 넓다. 대개 우리들은 일상에서 나 한 사람을 지탱하기에도 버거운 삶을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기껏해야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 가족과 친지 정도가 되지 않는가. 우리 사회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 어려운 이웃들과 눈에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에는 시선이 좀처럼 가 닿지 않는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Bill Gates)는 전 세계 60억 인구 가운데 적어도 40억은 문명의 혜택을 덜 누리며 어려운 환경에 살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들이 시선을 보다 넓고 따뜻하게 가질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배려와 관심의 테두리가 ‘나와 우리’로부터 ‘이웃과 지구’로 펼쳐질 때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지 않을까. 그런 끝에, 지구의 위기에 시선이 닿아 우주개발과 화성이주로까지 생각이 펼쳐지지 않았을까.새 해가 되었다. 그동안 가졌던 생각의 끄트머리와 그 테두리를 살펴보았으면 한ㅂ다. 다음세대를 생각하며 보다 긴 생각으로 교육의 미래를 열어갔으면 한다. 70년 분단의 역사를 올바로 극복하기 위해서 민족의 긴 미래를 품고 생각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생각의 끄트머리가 길면 길수록 더욱 든든한 내일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새 해에는 나와 내 주변 뿐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을 향한 시선이 살아났으면 한다. 생각의 테두리가 보다 넓어져 따뜻한 배려와 정 깊은 나눔이 살아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생각의 테두리가 넓어질 때, 이웃과 함께 온 세상과 우주를 담는 너른 시야가 생겨날 것이다.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 뿐 아니라 세계를 조화롭게 만드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새 해 2019년에는 생각지평의 끄트머리가 길어지고 그 테두리가 넓어져서 이전보다 그릇이 커지고 깊어지는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하여, 포용과 화합을 당겨오는 돼지해가 되길 기대한다.

2019-01-02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장규열한동대 교수임중도원(任重道遠). 대학교수들이 우리나라의 모습을 생각하며 올해 선정한 사자성어다.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저 생각은 나라 뿐 아니라 각자의 삶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할 일들이 늘어가며 나날이 쌓이는 책임은 버겁도록 무겁다. 돌아보는 마음도 한가득인데 앞길을 내다보면 그 끝이 가마득하게 멀어 보인다.해마다 이즈음이면 10대 뉴스를 생각해 보지만, 올해처럼 새롭고 가슴이 설레는 뉴스들이 풍성하기도 드물 터이다. 평창올림픽으로 힘차게 열어제낀 2018년은 남북정상회담을 세 차례나 일구어 내고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북미정상회담마저 한 차례 성사시키며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을 한껏 불러 일으켰다. 이제 남북철도연결에 시동을 걸고 새해에는 더욱 가까워지는 역사가 펼쳐지길 기대해 본다. 우리 사회도 ‘갑질’과 ‘미투’를 겪으며 보다 성숙한 인권의식을 가지게 되었으며, 우리 국민들은 변화와 개혁에 대한 갈증을 지방선거를 통하여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경제적으로 ‘최저임금’과 ‘주52시간근무제’는 정책적 기대와는 다르게 잡음과 혼선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정치적 비리와 사법부 적폐를 청산하는 일은 새해에도 지속적으로 이어가야할 숙제를 안겨주었다. 문화의 길에는 방탄소년단(BTS)과 베트남축구 박항서 감독이 새롭게 겨레의 우수함과 국민적 자긍심을 일깨워 주었다.촛불의 열망과 국민적 기대를 안고 출발했던 정부가 이제 집권 3년차를 맞게 되었다.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절반이나 내려앉았으며, 진보적 상상을 품은 젊은 세대의 마음이 돌아섰다고도 한다. 경제를 두고 지나치게 이념적 접근을 하였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하며, 민생의 그늘은 어디에 존재하는지 보다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통일과 평화를 모두 기대하고 바라지만, 나날이 힘들어만 가는 서민경제가 함께 나아져야 한다. 평화를 이룬들 삶이 힘들다면 행복할 국민이 어디에 있을까. 찾아오는 평화라도 내 삶을 희생하며 환영할 국민이 어디에 있을까. 민생과 복지, 그리고 평화와 통일담론 사이에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경제가 살아야 평화도 빛이 난다. 서민이 살만할 때에 통일도 함께 바랄 것이 아닌가.새해에는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기를 모두 바라지 않을까. 전쟁을 모르는 이들이 더욱 많아진 오늘, 같은 민족이 나뉘어져 있는 현실은 부자연스럽다. 지난 세대가 겪은 고난과 갈등의 기억을 이제는 씻어야 하지 않을까. 100년 전 독립만세를 부르고 임시정부를 세웠던 뜻 가운데, 이 민족이 흩어질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이념이 다르면 죽어도 함께 하지 못하는 습성을 이제는 극복할 때도 되지 않았을까. ‘스스로 다스리는’ 민주의 틀 안에서 나누고 견주며 보듬고 일으키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하지 않을까.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길은, 우리가 간절히 바란다 해도 주변이 돕지 않으면 요원해 보인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이 두 팔 벌려 반기지는 않을 것이다. 열강의 이해와 우리의 국익을 균형있게 조절하며 지혜롭게 헤쳐갈 길은 기대보다 멀지 모른다.나라의 경제를 물흐르듯 흐르게 하여 민생이 안정되고 서민이 행복하려면 할 일은 많고 갈 길이 멀다. 남북이 분단을 극복하고 진정으로 하나가 되려면 할 일이 많고 갈 길이 멀다. 정부에게 물론 할 일이 많고 갈 길이 멀지만, 국민 각자에게도 할 일이 많고 갈 길이 멀다. 올해의 사자성어를 택한 대학교수들도 이 정부를 비난하기보다는 굳센 의지로 잘 해결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임중도원(任重道遠)’으로 결정했다는 것이 아닌가.정부와 국민이 한 마음이 되어 경제의 가닥을 풀어내고 평화의 주춧돌을 놓는 새해가 되었으면 한다. 박항서 감독이 시인하듯,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으면 한다.2019년 돼지해에는 가슴뛰는 뉴스들이 보다 풍성하게 찾아오지 않을까

2018-12-26

수능과 졸업 사이

장규열한동대 교수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여럿 사망하고 다치는 사고를 당하였다. 수능을 마친 지 한 달, 이제는 몸도 마음도 조금 쉰다는 생각으로 친구들과 함께 자기체험학습에 나선 길이었다고 한다. 도대체 건물들은 어떻게 지었는지 도무지 안심하고 잠들기도 틀렸는 모양이다. 황망하게 세상을 달리한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한없는 안타까움과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안전에 관하여 이처럼 취약한 사회가 또 있을까 싶다.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우리는 걱정없이 하루하루를 이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다음 세대에게 든든한 공동체를 물려줄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이다.우선 학교. 수능을 마친 고3 교실은 어떤 모습일까. 법정출석일수를 지키느라 등교는 하는가 본데, 정상적인 수업과 교과의 진행은 되고 있는지. ‘자기체험학습’이라는 이름으로 학교 밖 여행에 나서는 일은 혹 고3의 교육에 잠시라도 손을 놓는 마음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을까. 이제는 더 가르칠 무엇이 없다는 메시지가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닌가. 대학입시를 위한 수능을 마치면 우리 공교육이 그 소임을 다했다는 착각을 하는 것은 아닌지. 학사일정에 따라 졸업을 하고 교문을 떠날 때 까지는 학교가 책임있게 학생들의 앞날을 위해 가르치고 준비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수능과 졸업 사이 고3 교육시스템에 관하여 우리가 더욱 심도있게 고심하여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대학에서 가르치다 보니, 해마다 맞는 신입생들에 대하여 동료 교수들이 걱정하는 소리를 제법 듣는다. 갈수록 학력이 저하되어 간다는 느낌이 있다는 것은, 혹시라도 저 수능 후 고3 교육이 학생들이 ‘배움’에 관한 긴장이 풀어진 탓은 아닐까 싶다. 수학과 물리를 비롯한 기초학력이 날이 갈수록 내려가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초중고 12년 공교육을 잘 받아온 끝에 수능이 지나고 나면, 새로운 것을 더 배우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혹 이미 배워온 것들도 심대한 손상 또는 망각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다. 대학입시제도와 관련하여 그리고 학생들의 지속적인 교육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학교와 교육계는 ‘수능 이후 고3 교실’에 대하여 보다 속 깊은 연구와 분명한 개선을 구상하여야 한다. 수능과 졸업 일정을 조정하는 일도 고려해 볼 일이 아닐까.그리고 학생들. 현실을 아프도록 꼬집고 풍자하는 ‘SKY캐슬’ 등의 드라마가 있지만, 여러분에게 열릴 미래는 절대로 대학 간판으로만 해결될 단순한 세상이 아닐 것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본인이 성실하게 갈고닦은 실력과 능력으로만 승부하여야 할 것이며 이는 당신이 다닌 대학이 그 이름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를 그동안 물어 왔다면, 앞으로는 당신이 정말로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인가를 물을 것이다. 물론, 그간 수능준비를 위하여 온갖 노력을 경주한 수고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배움의 긴장과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호기심을 놓지는 말아야 한다. 이제는 오히려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더 많이 읽고 익히며 폭넓게 배워야 할 때가 아닌가.마지막으로 우리 사회. 사고가 터지면, 책임의 소재를 가리느라 분주하다. 하지만 그 목적은 결국 내 책임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이 땅의 청춘들이 채 피어보기도 전에 스러져 가도록 집을 짓고 방을 제공하는 사회는 실로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한다. 적어도 다음 세대를 해치는 일이 이제는 없도록 안전과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남의 문제로 치부할 게 아니라, 모두 각자 주변의 안전부터 세심하게 살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새 것을 만들기도 하지만, 있는 것을 지키는 일도 만만치 않다. 교육의 진정성이 살아나고 사회 안전망이 견고하여야 자신있게 미래를 꿈꾸고 오늘 편안하게 살아갈 것이 아닌가. 운명을 달리 한 젊은 영혼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새로운 다짐과 각오가 절실한 아침이다.

2018-12-19

지역의 飛上을 위하여

▲ 장규열한동대 교수해외여행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미국을 간다면 날씨 좋은 로스앤젤레스로 가고 최첨단을 만끽하러 뉴욕으로 가며 새로운 풍광의 플로리다로 간다. 수도권이라 하여 모두 워싱턴으로 가지 않는다. 일본을 가도, 전통의 교토와 남국정취의 후쿠오카 그리고 설국 삿포로를 찾는다. 물론 초행길로는 도쿄를 찾기도 하지만. 중국을 가도 북경을 한번 거친 다음에는 삼지사방 여러 지역들을 찾는 것이 여행하고 방문하는 이들의 꿈이며 로망인 것이다. 한국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은 어떨까. 관광하러 이 나라에 도착하는 그들은 무엇을 보러오며 어디를 찾아가고 있을까. 아니, 우리들 자신에게 물어보자. 대한민국을 처음 찾는 사람들에게 ‘서울’ 말고 자신있게 권할만한 또 다른 모습은 어디에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우리에게는 어째서 서울과 수도권 말고는 얼른 떠오르는 곳이 없는 것일까. 나라를 경영하면서 수도권 중심으로 구상하고 기획한 탓도 물론 있겠지만 지역은 지역대로 빛나게 만들지 못한 책임이 혹 없을까. 그리고 그 책임은 지방 정부에만 있는 것일까. 최근, 에어포항이 경영난과 재정난으로 개업한 지 일년도 못 되어 어려움에 처했다고 한다. 포항시는 새로운 지역항공사를 유치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어차피 같은 조건이라면 새로운 항공사가 들어선들 뾰족한 돌파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사라질 항공사를 대체하는 일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 지역에 항공사가 맡을 소임에 관해서 뿌리부터 다시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 지방 정부의 지원으로 그 명맥을 겨우겨우 유지하는 항공사는 지역 재정에 부담이 될 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어찌 해야 하는가.포항공항을 본격적인 국제공항으로 사용할 수 없을까. 문화와 관광 자원으로서 인근 경주는 손색이 없다. 대한민국을 찾을 해외 관광객들에게 ‘또 다른 대한민국’으로 알려내고 초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라 왕경의 전통이 그렇고 넘치도록 풍성한 관광자원이 그렇다. 해외 관광객들이 도착할 포항도 머물러 즐길만한 배경을 제공한다. 멋진 바다가 있고 아담한 운하도 있다. 아기자기한 도심도 가꾸어 볼만 하고 구룡포의 정취도 나름 매력적이다. 경주와 포항을 묶어, 대한민국 관광의 ‘두 번째 중심’으로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해외 관광객들이 그렇게 새롭게 일구어 낼 ‘포항·경주’로 들어오는 관문으로 포항공항을 삼으면 되지 않을까. 일본을 가면서 전통의 쿄토를 찾듯이 한국에 오면서 문화의 포항·경주를 찾도록 만들어 낼 수 없을까.서로 인접한 경주와 포항이 미래 비전의 한 방향으로 경제적, 행정적 통합의 가능성을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서로의 정체성을 최대한 살리고 유지하면서 상생의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문화와 관광’을 통로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동시에, 이 나라의 다양한 관광자원을 폭넓게 활용하는 새로운 단초를 제공하면서 또 다른 입국 포인트(entry point)의 기능을 포항공항이 담당하게 하면 썩 훌륭한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두 도시가 머리를 맞댈 뿐 아니라, 경상북도가 지원하고 중앙정부도 함께 할 까닭이 충분하지 않을까. 해외로부터 이 나라를 찾는 손님들이 서울만 보고 돌아가는 일은 대한민국의 미래가치로 보아도 식상하고 재미없다. 이 나라를 다시 찾을 까닭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그들이 이전보다 더욱 즐길 대한민국을 준비하여야 한다.에어포항이 주저앉는다고 함께 가라앉을 포항이 아니다. 지역과 함께 손잡고 더불어 호흡하며 상생의 기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포항과 경주 뿐 아니라 경북과 대한민국 관광의 스토리를 새롭게 일구어 갈 텃밭으로 만들어 보았으면 한다. 역경을 기회로 활용하면서 상상과 창의로 솟아오르는 지역이 되었으면 한다. 있었던 정도로만 복구하는 게 아니라, 이전보다 더 높이 날아오르는 지역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2018-12-13

지구, 하나 밖에 없는

▲ 장규열 한동대 교수끝없이 펼쳐져 있는 우주 공간의 한 가운데 지구라는 별, 그 자체가 기적이 아닌가.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이곳에 60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신비롭다. 인간의 지식과 과학의 힘으로 지구의 신비를 알아간다고 하지만 이 땅에 인류가 자연과 함께 존재하는 일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지 경계하고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정복한다는 생각으로 사람들이 함부로 다루어온 자연, 이제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것이라는 것이다. 마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폴란드 카토비체에서 열리고 있다. 기후변화협약은 지난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첫 모임을 가진 이래 교토의정서와 파리협정을 거치면서 참여하는 국가들이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각종 온실 기체의 방출을 제한하고 지구 온난화를 방지하는 데에 힘을 모으고 있다. 24번째로 모인 이번 당사국총회가 열리는 도시 카토비체는 폴란드의 석탄생산 중심지로서 협약의 취지로 볼 때 매우 상징적이기도 하다. 세계 7위의 온실가스 배출국가인 대한민국은 2030년까지 전망치 대비 37%의 온실가스를 감축하기로 목표를 설정하면서 협약에 참여하고 있다. 인류가 훼손하면서 무너뜨려 온 자연과 환경을 보존하고 지구를 생존 가능한 곳으로 유지하기 위한 노력에 많은 나라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이 노력에 적극적이지 않으면서 기후변화협약으로부터 탈퇴한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총회의 개막연설에서 영국의 자연사학자이며 영화제작자인 데이빗 애튼버러 경(Sir David Attenborough)은 ‘지구가 수천년만에 맞는 중대한 위협에 처해 있다’면서 ‘우리가 함께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인류문명의 몰락과 자연계의 황폐화가 눈 앞에 와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또한 미국도 기후변화협정에 동참하여 기후변화에 맞서는 인류의 노력에 함께 하여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안토니오 구테레스(Anto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도 ‘기후변화와 지구온난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미 지구상의 많은 국가들에게 생존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진단하였다.여러 나라들이 우주 개발에 나서면서 지구가 아닌 다른 곳에 인류가 살만한 곳을 탐험하고 개척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탐사선 ‘인사이트’를 성공적으로 화성에 안착시킨 미국의 노력에도 눈길이 간다. 하지만 아무리 빠르게 새로운 개척지를 발견하고 만들어 간다고 해도 매우 긴 시간이 소요되며 실현되기까지는 참으로 먼 미래의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가 발딛고 사는 지구를 더 이상 훼손하거나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인류의 생존과 발전을 구현해 가는 일이 훨씬 빠른 길일 것이다. 이를 도외시하고 자연과 환경을 마구 대하고 무너뜨린다면 제 아무리 짧은 안목의 성공과 진전을 본다고 한들 길게 보아 지구의 수명을 단축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환경을 보호하고 지구를 보존하는 일은 기업이나 국가에만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경제소비생활의 주체로서 개인들이 보다 배려깊고 책임감있는 소비와 생활에 임할 때에 뿌리깊은 시민의식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는 ‘지구를 살리는 운동’이 가능할 것이다. 지역의 시민단체들도 이를 보다 보편적인 시민운동으로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뜻을 모아야 할 것이다. 학교는 지구의 소중함을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지구는 하나다. 나비효과, 한 마리의 나비가 심대한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고 하였다. 한 사람의 관심과 노력이 지구를 살리고 인류의 생존을 담보할 것이다. 내일 지구가 젊어지기 위하여 오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지구는 하나 밖에 없으므로.

2018-12-06

오, 화성!

▲ 장규열 한동대 교수미국이 쏘아올린 화성탐사선 ‘인사이트(Insight)’호가 장장 8억4천800만㎞를 날아 206일만에 목적지 화성에 착륙하였다. 미 항공우주국(NASA)의 연구원들은 착륙의 순간을 중계하면서 모두 숨을 죽였다. “600m, 300m, 100m, 50m, 37m, 20m, 17m…. 착륙확인!”을 외치는 순간, 하나같이 환호하였다. 온 미국이 환호하였다. 우주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을 이어가는 저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자본주의와 무한경쟁의 맨 앞에 서서 국익에만 몰두하는 듯 보였던 그들이 아니었던가. 탐사선 ‘인사이트’는 화성의 핵에 주목하면서 탐사자료들을 보내올 것이라고 한다. 화성의 내부, 토질, 공기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가 도대체 오늘 우리에게 가져다 줄 이익은 무엇일까. 미국인들은 어떻게 저토록 공허해 보이는 탐사와 연구에 몰두하는 것일까. 그들이 꾸는 꿈은 얼마나 긴 시간대를 아우르고 있는 것일까. 저들이 살아있는 동안 가 닿지도 않을 이런 일에 열광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우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가진 상상력의 지평선은 얼마나 먼 곳을 보듬고 있을까.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쓴 이규태는 ‘빨리 더 빨리 많이 먹어야’하는 우리네의 조급함을 꼬집고 있다. 짧은 안목의 성급함이 지나치면 긴 호흡의 지평을 가지기 어려울 것임을 경계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경쟁사회를 가르쳐 준 미국이 오늘도 저런 긴 시각으로 새로운 도전을 이어 간다면, 그들에게 배운 우리는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 것일까. 목전의 이익과 미래 가치 가운데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우리는 그동안 ‘모방과 추격’으로 숨가쁘게 달려왔다. 나라는 산업화를 통하여 남부럽지 않는 경쟁력을 쌓아올렸으며, 국민은 민주화를 거듭하며 온 세계가 주목하는 터전을 만들어 내었다. 이제 우리가 겨냥하여야 할 지평은 그간 익숙해진 태도로는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미국도 그런 변곡점을 겪지 않았을까. 우리가 새롭게 갖추어야 하는 시선의 끝점은 어디쯤인지 사뭇 궁금해 진다. 쿠바의 혁명지도자 체 게바라는 어려움에 처한 동지들과 그를 지원하는 시민들에게 ‘불가능한 꿈을 꿀 것’을 요청하였다. 앞뒤로 꽉 막힌 처지에서도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불가능한 그 무엇을 향하는 상상력을 발휘하자는 제의가 아니었을까. ‘상상(想像)’은 원래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었던가.둘러보아 새 것이 별로 없다. 세상이 넉넉하고 풍족하여져서 새로운 것을 꿈꾸어야 할 까닭도 그리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앞서 가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가능한 일들에만 몰두해서는 안 된다. 학교는 다음 세대들이 ‘불가능한 것을 꿈꾸도록’가르쳐야 한다. 파사데나의 미국인들은 화성에 간다는데,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달에도 가보지 못하였다. 누구도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지평을 겁없이 열어 가는 다음 세대를 길러야 하지 않겠는가. 이미 있는 것을 배우고 나누는 것이 소중한만큼, 끝없이 상상하고 꿈꾸는 젊은이들을 길러야 한다. 세상이 넓은 것을 가르쳐야 하지만, 우주에는 끝이 없음도 일깨워야 한다. 일상에서는 감히 생각도 못해볼 위험한 발상에 박수쳐 주는 분위기도 만들어야 한다. 안전하고 가능한 일들만 반복하기보다 불안하고 불가능한 도전에도 박수쳐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성공에 박수치는만큼 실수도 환영하여야 한다. ‘인사이트’호의 화성착륙을 알리면서 박수치고 껴안으며 환호하는 저들이 부럽지도 않은가.‘모방과 추격’을 뛰어 넘어 ‘상상과 창의’로 날아오를 대한민국을 기대해 본다. 누구도 밟아보지 못한 새로운 지평을 겨냥하고 열어 가는 나라가 되고 지역이 되길 기원해 본다. 화성을 겨냥했던 저들이 소스라치게 놀랄만큼 새로운 우리만의 도전에 나서 보기로 하자. 상상과 창의로 열어 가는 내일이 오늘 벌써 기다려진다.불가능한 꿈을 꾸어야 한다.

2018-11-29

학교폭력과 다문화

▲ 장규열한동대 교수계절이 건너간다. 가을을 거쳐 겨울로 건너간다. 열매와 결실에 감사하면서 한 해를 마감하며 백설의 겨울을 맞을 채비에 나선다. 가을처럼 늘 풍성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겨울을 알리는듯 마음을 춥게 하는 뉴스가 지면을 채운다. 인천의 중학생이 그의 생을 마감했다. 상세한 사연이야 더 밝혀질 일이지만, ‘학교폭력’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동급생이면 친구들이 아닌가.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고 마을에서 그 또래 시절을 즐겁게 누려야 하지 않았겠는가. 어쩌다 우리의 10대는 우정을 쌓기보다 폭력으로 그늘지는가. 이걸 놓고 이 사회는 바로잡을 생각을 하고나 있는가.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피해 중학생은 러시아 출신 어머니를 가졌다고 한다. 다문화 가정의 자녀였던 것이다. 러시아 사람처럼 생겼다는 탓에 따돌림과 구타, 외로움과 폭력에 시달렸다는 게 아닌가. 어머니가 혹 ‘나그네’였을지언정 그 중학생은 분명 ‘한국사람’이었을 터이다. 그처럼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는 엄마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아니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자신의 문제는 스스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것. 이걸 두고 이어지는 지옥같은 일상은 감내하기가 얼마나 버거웠을까. 혹 그래서 뛰어내린 것일까. 아 그 어머니가 짊어질 회한과 자책은 어찌해야 하는가. 그들 중학생들은 이토록 비뚤어진 심사를 어디서 배운 것일까. 학교는 책임이 없는가, 사회는 책임이 없는가. 이 나라는 이미 ‘다문화사회’가 되어가고 있는데, 우리에겐 이를 잘 담을 방법이 있는지 궁금하다. 해결할 다짐은 서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한국교육개발원의 발표에 따르면, 교육현장에서 다문화 학생은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학교생활의 적응과 차별 등에 의한 문제도 조금씩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다문화 학생들이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64.7%가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서’를 꼽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 차이나 사회적 관계 형성의 문제가 심각하다. 즉 따돌림과 차별에 시달리고 있어 정상적인 친구 관계가 어려운 것이다. 외톨이가 되는 처지를 이겨내기 위해서 부적절한 행태가 벌어지는가 하면 끝내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심각한 폭력에 노출되기도 한다. 교육이 나라의 미래를 세우는 길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 학교폭력과 다문화의 등장을 보다 깊이 자각해야 하며 지혜롭게 대처하여야 한다.우선 폭력은 범죄다. 그 종류, 가해자의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폭력은 파괴적이며 비정상적인 결과를 낳는다. 폭력의 장소가 학교라 해서 그 폭력에 대한 대응을 유연하게 하는 일은 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나이가 어릴수록 오히려 단호하게 막아내고 예방해야 한다. 교육적 효과를 생각해서 처벌을 경감한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교육적 효과를 기대하므로 처음 발생했을 때 분명하게 지적하고 차단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다문화는 다른 문화인가. 다르게 보이지만, 이제는 ‘우리 문화’가 되어가지 않는가. 사회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관대하게 바라보고 폭넓게 감싸 안아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 교육 당국이 선생님들과 함께 다문화교육에 정성을 기울였으면 한다. 세상은 저렇게 풍성하게 어울리며 돌아가는데 우리가 아직도 지방색을 고수하고 문화적 울타리를 고집한다면, 겉으로만 풍요롭고 안으로는 편협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 않을까.겨울이 다가와 그런 것일까. 마음마저 얼어붙게 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학교 안 폭력이 안타까운만큼, 그 배경이 되었다는 다문화 차별과 혐오는 부끄럽기 그지없다. 다문화 배경을 가진 우리의 자녀들이 마음껏 웃으며 배우는 학교를 상상해 본다. 적어도 다문화가 까닭이 되어 자행되는 학교 폭력이 사라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폭력은 범죄다. 다문화는 우리 문화다.

2018-11-22

대학은 무엇인가

▲ 장규열 한동대 교수2018년 수능의 날이 밝았다. 해마다 어김없이 수능은 전 국민의 관심사이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수능의 기억이 있다. 모두들 수험생이었거나 가족이었거나 선생이었거나. 18년 동안 닦아온 실력을 이 하루 한 판 승부에 거는 일, 수능은 모두에게 버거운 연례행사인 것이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힘겹고 고단하지만, 채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온 인생을 거는 양 긴장이 되고 가슴이 졸인다. 매년 11월이면 치러야 하는 의례처럼 되어 버린 수능이 올해는 어딘가 새롭다. 숙명여고. 나름 전통의 깊이가 느껴지는 그 이름이 이번에는 ‘대학입시제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친구도 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경쟁적 구도 앞에 아버지의 마음마저 비뚤어지게 하고 말았을까. 점수의 유혹 앞에 쌍둥이 딸들은 무너질 수 밖에 없었을까. 오늘같은 대입제도 앞에 저들처럼 흐트러지지 않을 사람은 또 누가 있을까. 상피제도 있으면 도움이 되겠고 철저한 관리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비정한 경쟁과 끝없을 탐심이 스며들 수 밖에 없는 제도와 시스템은 어찌할 것인가. 이 모든 구도를 이대로 두고 사람만 탓해도 되는 것일까. 아빠와 두 딸만 처벌하고 정리하면 대학입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일까. 대학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우리 모두의 인성마저 망가뜨리는 괴물이 되어 버렸을까.대학. 큰 배움이 일어나는 곳. 어른으로 사회를 만나기 전에 생각을 가다듬고 다짐을 만들어내는 곳. 살아가는 의미를 찾고 세상을 바꿀 지혜를 갈고닦는 곳. 한 사람 인간으로 홀로 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실력을 기르는 곳. 좋은 말을 아무리 많이 가져다 붙여도 모자랄만큼 대학의 사명은 가볍지 않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이 첫걸음마 교육을 맡아 그 책임이 무거웠다면, 공부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학의 사명은 막중하다. 대학은 젊은이들이 사회에서 한 몫을 너끈히 담당할 수 있도록 길러야 하며, 그 교육의 결과로 우리 사회가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런 대학으로 가는 길이 이 나라에서는 왜 이렇게 힘든 과정이 되었을까.서구에서 대학은 신학과 철학을 중심으로 했던 ‘교회의 대학’에서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인간을 길러내던 ‘국가의 대학’을 거쳐 성공과 이익을 위하여 달리는 ‘기업의 대학’이 되었다. 시카고 대학의 총장이었던 로버트 허친스는 그의 책 ‘미국의 고등교육’에서 대학이 고전과 지성의 공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학장이었던 해리 루이스도 오늘날 미국 대학이 ‘교육’을 잃어버렸다고 탄식하면서 대학이 학생들의 지성과 정신을 다듬을 권위를 회복하여야 한다고 경고하였다.교육을 통하여 개인의 성공과 함께 기업과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는 일을 어찌 나쁘다할 수 있을까. 대학은 새로운 학문과 지식을 전수함으로 우리 사회가 발전적으로 변화하여 가는 데에 반드시 기여하여야 한다. 하지만 경쟁과 성공에 심취한 나머지 인성과 지성, 도덕과 철학을 배우고 나누며 토론하는 일을 멈춘다면 이 땅은 지속적으로 퇴화해 가는 나락에 서게 될 것이다.오늘 수능을 마주할 청년들에게 한 자락 권하고 싶다. 새롭게 만날 대학의 광장에서 최고의 실력을 갈고닦아 성공하고 발전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하지만 바로 그 성공과 발전의 의미가 내게만 머무르는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건너야 할 험한 계곡이 많고 넘어야 할 높은 산들이 즐비하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고 아픈 가슴에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하여 대학에 가고 성공에 이르기를 바란다. 혹 어른들이 잘못 만들어 놓은 그 무엇을 발견하거든 고치고 바꾸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드는 당신들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그런 일을 하기 위하여 대학에도 가고 반드시 성공하길 바란다. 그동안 수능을 위하여 수고 많았다. 앞으로는 세상을 위하여 생각하고 수고하는 여러분이 되길 기원하는 바이다.

2018-11-15

포항은 무엇인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사람은 어떻게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우리는 보통, 주변의 조건과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행복은 결국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많은 경우에 생각하기에 따라서 같은 조건을 가지고도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을 터이다. 행복이 정말로 마음에만 달렸다면, 우리는 외부 환경을 더 좋게 만들거나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아도 그만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수고를 끊임없이 하고 있지 않은가. 왜 그러는 것일까. 이 물음에, 오스트리아 출신 건축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가 그의 책 ‘영원의 건축’에서 답하고 있다. “개인이 처한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이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개인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므로, 조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도시는 우리의 삶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이 도시에서 살아가는 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현대 도시가 성공에 이르기 위하여 고심하여야 할 문제는 복잡하고 다양하다. 도로와 교통, 생태와 환경, 범죄와 치안, 복지와 문화, 경제와 세수, 산업과 자연, 개발과 보존…. 이 모든 과제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현대 도시를 경영하고 관리하는 일은 가히 종합예술의 경지인 것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운영하고 조절하는 일은 경영적 마인드 뿐 아니라 사회심리적인 배려도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생각해야 하는 이들 가닥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성공에 이른 도시들은 무엇 때문에 사람들을 그렇게 끌어모으는 것일까. 그런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까닭으로 그 곳에 사는 일에서 자부심과 행복을 느끼는 것일까.금방 떠오르는 좋은 도시들에는 ‘그 한가지’가 있다. 파리에는 ‘문화적 분위기’가 있으며 뉴욕에는 ‘현대적 감각’이 있다. 싱가포르에는 ‘깨끗한 질서’가 있으며 바르셀로나에는 ‘가우디’가 있다. 카사블랑카에는 ‘이야기’가 있으며 예루살렘에는 ‘성스러움’이 있다. 우리 나라의 수도, 서울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 있다. 그렇게 다 있는 게 오히려 문제라는 생각이다. 그 한 가지로 다른 모든 것들을 꿰어낼 초점이 있어야 하는데, 서울에는 그런 게 없다. 조금씩 다 차려놓은 밥상에는 정작 먹을 게 없다. 먹고 나서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조차 없다.포항은 어떤가. 아주 조금씩 또 다 있다. 이 나라의 도시들은 서로서로 보고 배워 조금씩 다 가져다 놓는 일에는 선수들이다. 이 도시만의 ‘그 한 가지’가 보이지 않는 만물상 도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고장의 문화는 사라지고 전통은 뭉개지며 조금씩 다 보이지만 눈에 잡히는 것은 하나도 없다.포항시는 최근 도시 행정의 난맥상이 지적되고 있다. 도시계획의 수립과 운영, 도시 주민과의 소통과 조절 등에 있어 돌아보아야 할 가닥들이 보이는 것이다. 권한과 책임의 소재를 살피고 밝혀서 적절하게 처리하고 대응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도시는 어떤 도시로 만들어 갈 것인지 ‘그 한 가지’를 찾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만들어 가야하며, 그럴 때에 도시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다시 찾을 것이다. ‘그 한 가지’가 도시의 지향점이 되어야 하고 철학이 되어야 한다. 그 하나를 한 가운데 두고 나머지 모든 것들과 조화로움을 만들어 가야 한다. 너무 많은 주제들을 담으려 하다가 어느 것 하나도 주지 못하는 도시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 한 가지’를 찾아낸 다음, 이를 그 모든 다른 것들에도 보이도록 새겨 넣어야 한다.이 도시를 한 가지로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데에서는 찾을 수 없는 그 한 가지만 이야기해야 한다. 그 하나로 포항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해야 한다. 그 하나로 포항의 시민들이 행복해야 한다.서울은 무엇인가.포항은 무엇인가.

2018-11-08

달라진 미디어, 변해가는 소비자

▲ 장규열한동대 교수미디어 환경이 변했다. 뉴스를 비롯한 다양한 콘텐츠를 신문과 잡지,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매체들이 일정한 주기를 두고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던 시절이 있었다. 디지털 소통혁명을 거치면서, 보통 사람들이 그렇게 수동적으로 반응하던 미디어시대는 이제 역사가 되었다. 기자와 PD, 아나운서와 편집인들이 위기를 느낄만큼 콘텐츠의 생산과 유통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쉬워졌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를 통하여 디지털 미디어환경에 익숙해진 소비자들은 이제 유튜브와 1인미디어를 통하여 스스로 자기만의 콘텐츠를 만들어 전세계와 직접 소통할 수도 있게 되었다. 콘텐츠 소통의 구조도 전통적인 일방향 소통이 아니라, 자유로운 피드백과 평가가 자유로운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 졌다. 새로운 미디어환경에서 주도권이 신문사나 방송국으로부터 보통 사람들에게 넘어간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콘텐츠를 어렵지 않게 만들어 유통할 수도 있게 되었다. 콘텐츠의 내용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반응하고 비평할 수 있게 된 것이다.좋아졌지만 좋아만 진 것은 아니다. 공익을 우선에 두고 전문적 미디어윤리와 공적 책임을 살펴가며 콘텐츠를 만들고 유통하던 미디어 전문가들에게는 안타깝고 불편한 상황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현실을 힘들게 바라보아야 하며, 악성 댓글이 불러오는 사회적 문제를 연일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미디어 전문인들 뿐 아니라 보통 소비자들에게도 불편함은 있다. 이념성향에 따라 같은 뉴스를 두고도 전혀 다른 보도를 접하는 일이야 어느 정도 익숙해 졌지만, 읽고 시청했던 뉴스가 ‘가짜’일지 모른다는 의혹을 접하면 사뭇 혼돈스럽기까지 하다. 한 가지 사안을 두고 얼마나 많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인지 생각해야 하며, 누구의 말이 진정성과 팩트를 담은 것인지 판단하여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하염없는 거짓 주장과 허위 선전의 바다에 노출될 위험이 뻔히 보이는 것이다.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여러 나라의 교육시스템을 비교하는 PISA시스템으로 학생들의 수학, 과학, 그리고 읽기 능력을 평가해 왔다. 앞으로는 각국의 교육이 어느 정도의 ‘국제경쟁력’을 가르치는지, 그리고 특히 학생들의 ‘디지털 리터러시(Digital Literacy)’수준을 평가할 것이라 한다. 즉, 급변하는 미디어환경에서 다음 세대 청년들이 얼마나 적절하게 반응하며 지혜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는지를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나라들 사이 비교를 통하여 새로운 미디어환경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방식에 대하여 국제적으로 지혜를 모아보려는 시도로도 읽히는 것이다. 그만큼 환경이 바뀌었다. 아니 지금 이 시각에도 끊임없이 바뀌어 간다. 변화를 분석하여 긍정적인 부분은 극대화하고 부정적인 구석은 적절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우리는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교육에 관하여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미래세대가 새로운 미디어환경에 혼돈없이 적절하게 적응하며 물밀듯 쏟아지는 다양한 콘텐츠에 지혜롭게 반응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경북교육청은 향후 정책변화 지향점을 구상하면서, 바로 이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에 주목하기로 하였다. 미래의 미디어가 보통 사람들에게 변함없이 긍정적인 소식통과 지혜의 샘이 되려면 보통 사람들이 변하여야 한다. 미디어콘텐츠에 관하여 수동적 소비자에서 능동적 주권자로 바뀌어야 하며, 시청하고 관람하는 이용자가 아니라 참여하고 반응하는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 미디어환경의 또 다른 변화도 이제는 보통 사람들이 이끌어가야 한다. 우리네 삶이 변해 가는 데에 따라 미디어도 함께 변모하여 가지 않을까. 콘텐츠에 실릴 가치와 방향, 그리고 형식과 규모도 결국 보통 사람들의 바람에 따라 움직여 갈 것이다.

2018-11-01

답은 인성이다

▲ 장규열한동대 교수입에 담기도 흉악한 폭력이 춤을 춘다. 세상이 경악하도록 슬프거나 충격적이어야 하는 것이 뉴스의 속성이 되어 버렸다. 미디어로 전해지는 폭력 장면이 사람들의 폭력성을 부추기는지 아니면 억제하는지 아직도 논란거리다. 사건과 사고로 이어지는 언론보도를 통해 사람들이 폭력을 미워하고 멀리하게 된다는 측이 있는가 하면, 아니 그 같은 폭력에 노출되는 일이 잦을수록 사람들은 폭력에 대해 둔감해져서 오히려 더욱 폭력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즉,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거나 모방하게까지 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을까. 언론과 미디어가 보여주는 장면들이 폭력을 예방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부추기게 될 것인지. 전달되는 내용 가운데 독자 대중이 어떤 부분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디어가 취재하고 보도하면서 어떤 면을 도드라지게 알릴 것인가도 생각거리인 것이다. 우리는 연거푸 벌어지는 폭력적 살인사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하며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무슨 까닭에 이 같은 병리현상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것일까. 개인적인 폭력성향이 만들어낸 우발적 사고로 볼 것인지, 아니면 여러 구조적 과제들이 쌓여온 끝에 나타나는 사회적인 문제로 볼 것인지도 사뭇 다른 시각과 접근, 그리고 해결책으로 유도할 것이다. 청와대를 향한 청원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였다. 사람들 마음에는 폭력을 추방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심리학적으로는 충동조절장애 현상 가운데 분노조절장애라고 한다. 그 가운데 특별히 간헐적 폭발장애(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는 분노와 관련된 감정을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공격 충동이 억제되지 않아 주어진 자극의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파괴적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겨우 천원을 돌려받지 않은 까닭이 무참한 살인을 초래하였다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런 병리적 현상이 저렇게 가능하다는 것이 아닌가. 심리적 불안정과 상대적 박탈감 등이 정상적으로 조절되고 정리되지 못한 결과로는 너무나 처참하지 않은가. 어떻게든 더 이상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적인 관심과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원인으로 가당치 않아 보이는 그의 우울증 병력도 관련이 있다고는 하며, 정신을 차린 후에도 우울감과 허망함을 느낄 뿐 직접적인 죄책감은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쯤 되면, 우리에게는 이를 예방할 방법이 혹 없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무거워진다.개인적인 마음 속 어려움을 적절히 조절하고 긍정적으로 정돈하지 못하여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면,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이 도울 방법은 혹 없을까 싶다. 학생들이 학교와 가정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학교가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 학교의 상담기능을 강화하고 학생과 선생님 사이 그리고 학생들 간에 대화와 소통이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유도할 수는 없을까. 학교가 학생들의 학력을 길러 경쟁에 능한 사람을 만드는 데에만 집중하기보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훈련의 마당이 될 수는 없을까.교육의 결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야 하는데, 우리 교육은 혹 머리만 키우려 하는 것은 아닌지. 누구를 이겨 세상을 잘 살 것인가. 남들을 꺾고 올라가 행복해지는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진정한 경쟁은 결국 ‘나’를 이겨내야 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면, 내게 닥친 문제와 어려움을 조절하고 극복하는 지혜도 생겨나지 않을까. 문제는 인성이다. 온갖 지식과 재주를 다 가져도, 인성이 무너지면 그 결과는 무섭다.인성이 바로서야 사회가 산다. 폭력이 사라져야 나라가 산다.

2018-10-25

아, 유치원!

▲ 장규열한동대 교수처음엔 어리둥절했었겠지. 엄마의 치맛폭에서 늘 행복했었는데, 어느 날 아침 이끌려 나가 따뜻했던 엄마의 손을 놓으며 헤어져야 하는 일은. 아빠는 기특하게 보았을까, 엄마는 부서질까 싶었을까. 겨우 혼자 걸었을까 하는데 무엇인가 배우러 보내야 하는 심정은. 유치원(幼稚園). 글자의 뜻마저 ‘어리고 또 어린 아이들의 동산.’ 그 곳에 아이들을 보낸다.친구들 사귀기, 어울려 놀기, 싸우지 않기, 때리면 안 돼, 깨끗이 치우기, 내 것과 남의 것 가리기, 밥먹기 전에 손 씻기, 화장실 물 내리기,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 인사하기, 안녕, 헤어지기, 쓰다듬기, 또 만나기, 낮잠자기, 책읽기, 노래하기, 춤추기, 그림그리기, 일기쓰기, 병아리, 잠자리, 다람쥐, 금붕어, 어 근데 다 죽더라, 웃기, 울기, 기쁨과 슬픔, 허전함과 외로움, 반가움과 놀라움, 길조심, 차조심, 사람조심. 너무나 많다. 그 때쯤 경험하고 배우고 익혔을 일들이. 그래서 누군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을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했을까. 그 제목 책을 쓴 로버트 풀검(Robert Fulgum)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사실은 모두 유치원에서 배운다’고 했다. 또 그는 ‘온갖 지혜는 대학원 도서관 안에서 배우는 게 아니라 유치원 모래성 위에서 익힌다’고 했다. 아슬아슬하면서도 물가에 보내는 심정으로 아이 손을 놓아주는 까닭도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유치원에서 사고가 났다. 이렇게 깊고 넓게 멍들었을 줄이야! ‘정부가 도와주느라 지원해 준 것인데, 우리 마음대로 쓰면 어떠냐’ 라든지 ‘공립도 아니고 사립인데 왠 간섭이냐’라는 반응은 엄마아빠들이 듣기엔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우리의 걱정은 ‘돈이 어디에 쓰였을까’도 있지만, 그보다 ‘돈을 그렇게 멋대로 쓰는 정신으로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었을까’인 것이다. 질문에도 답변에도 ‘아이들’이 없다. 교육을 하겠다는 것인지 돈을 벌겠다는 것인지. 정부의 고민과 대책에도 ‘관리와 통제’가 강조되고 있을 뿐 ‘교육과 가르침’이 보이지 않는다. 교육부인가 경리담당인가. 온통 관심과 이목이 ‘돈’에 몰려 있는 것이다.교육에 있어 대학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닥이 유아교육이다. 교육은 대상이 어릴수록 그 책임이 무겁다. 태어나서 다섯 살쯤에 이르기까지 인성의 기본 틀은 모두 다 자란다. 아이들은 들은 대로 배우지 않고 본 대로 배운다고 하지 않는가. 돈에 휘둘리느라 진심으로 가르치지 못하는 선생님을 아이들이 혹 눈치채지 않았을까. 어른들의 저 못난 악다구니와 아귀다툼의 심사가 혹 한 자락이라도 아이들에게 옮지 않았을까 부모들은 두렵고 무섭다. 아이들을 믿고 맡길 유치원 교육의 참모습을 혹 오늘의 유치원들이 망각하지나 않았을까 걱정인 것이다.문제를 해결하려면,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아이들’걱정으로 돌아가고 ‘교육’으로 돌아가야 한다. 유치원은 무엇 때문에 거기 있어야 하는지, 선생님은 무얼 하러 거기 계시는지 그것만 다시 잡아올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 엄마아빠들의 마음을 다시 살펴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서 밤새워 준비하고 종일토록 수고하는 선생님들에게 힘이 솟아야 한다. 불거진 문제를 분명히 짚은 다음, 사사로운 계산은 제발 내려놓았으면 한다. 교육을 위하여 아이들을 위하여. 엄마아빠들도 생각을 모아야 한다. 아이들이 살아가는 동안 필요할 모든 것을 배워 올 유치원에서 바로 그런 가르침이 일어나는지 잘 살펴야 한다. 잘하고 계시는 유치원들에 불필요한 피해가 없기를 바라고, 유아교육을 맡은 모든 분들이 마음을 새롭게 하고 다짐을 분명히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어릴 적 다녔던 유치원이 다시 그립다. 성당 부설 유치원의 ‘난초반’ 이수녀 선생님은 혹 아직 살아 계실까,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선생님이 보고 싶은 아침이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유아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18-10-18

도전과 응전, 변화와 적응

▲ 장규열한동대 교수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문명이 ‘도전과 응전의 역사’를 이어왔다고 하였다. 안으로든 밖으로든 어려움을 겪을 때에 사회를 구성한 사람들이 지혜를 발휘하고 응집력을 형성하여 대처해 왔다는 것이다. 그런 결과, 응전에 성공한 집단과 문명들이 살아남아 있다는 것.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맞닥뜨린 도전적 과제를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느냐에 존폐 여부가 달렸다는 것이다. 극복하지 못하면 스러져 갈 것이며 딛고 일어선다면 생존과 발전을 이어갈 터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표현되는 디지털 기술의 습격이야말로 오늘 인류가 만난 기술적 진보임과 동시에 문명적 도전과제가 아닐까. 정보통신과 소통방식에 있어 디지털기술은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정보의 양과 그 전달되는 속도는 이전 세기에는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인 것이다.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일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언론과 미디어가 만들어 보급하여 오던 뉴스와 분석도 이제 보통사람들의 손으로 넘어오고 있는 것이다. 가짜뉴스는 그런 맥락의 끄트머리에서 발생하고 있다. 누구나 소식을 만들어 전달할 수 있고 또 보통 사람들은 별다른 방어기제 없이 수용하고 이해하며 설득된다. 게다가 사람에게는 ‘보고 싶은’ 것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본능이 있지 않은가. 출처도 분명하지 않고 내용도 논리적이지 않으며 그 파급효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도 않을 가짜뉴스들이 창궐하고 있다. 그런 쪽에서는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를 들며 오히려 당당하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최근 ‘21세기를 위한 21가지 교훈들’을 쓴 유발 하라리는 ‘이제 시간이 없다’고 하였다. 학교에서 교사들이 새로운 시대에 제대로 적응할 교육 시스템을 얼른 마련하여야 하는데,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물밀 듯 다가오는 디지털기술의 공격 앞에 지금처럼 손놓고 있어서는 개인도 언론도 사회도 문명도 스러져 갈 일만 남았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그는 또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기량으로 비판적 사고능력, 소통하는 능력, 협력하는 기량, 그리고 창의성을 들고 있다. 밀려드는 정보들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분석적으로 이해하여 진실을 담고 있는 정보인지를 가늠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가르쳐야 하겠지만, 오늘을 사는 보통사람들에게도 이 ‘비판적 사고능력’은 필수 덕목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전해지는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개인 각자가 보다 날카롭고 분석적인 안목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허위로 조작된 정보를 걸러내는 공적 시스템을 마련하는 한편, 개인 독자들도 새로운 정보환경에 경계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정보의 생명은 그 진실성에 있지 않은가. 거짓 정보와 조작된 내용은 이를 수용하는 시민들을 오도할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적인 신뢰를 무너뜨리는 악영향을 끼치게 될 뿐이다. 새로운 정보환경에 익숙해 질 시민들이 당신이 퍼뜨린 정보가 거짓이었음을 알게 될 때, 당신의 목소리를 누가 계속 들어줄 것인가. 이는, 어느 개인의 각성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여 대처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를 슬기롭게 대응하지 못하면 ‘언론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무너져 우리 사회에 꼭 있어야 할 ‘소통시스템’이 와해되는 결과를 빚을 수도 있을 것이다.표현의 자유는 소중하다. 소중할수록 잘 지켜야 한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거짓과 허위, 기만과 조작은 표현의 자유를 위태롭게 할 뿐이다. 저지르는 이들 본인들이 잘 알고 있지 않을까. 21세기에 보다 빛나는 문명이 꽃피울 수 있도록, 디지털기술의 도전에 경계심과 정보윤리로 맞서 보기로 하자.토인비 선생은 인류가 역사를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으로 지켜왔다고 하였다. 디지털 신문명의 내일을 우리의 응전으로 넉넉하게 지켰음을 확인하고 싶지 않은가.

2018-10-11

진짜언론 가짜뉴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사회가 건강하면 모든 것이 상식에 맞고 논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한다. 반대로 사회에 병이 들면 많은 것들에 비상식이 똬리를 틀고 논리에 일탈이 생긴다. 존속살인, 학교폭력, 부부강간. 효와 예가 바로 선 집안에 어떻게 부모를 해하는 일이 가능하며, 배움의 즐거움이 가득한 학교에 어떻게 폭력이 발생하며, 사랑이 가득할 부부 사이에 강간이 말이 되는가.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는 이 같은 비상식과 탈논리가 여럿 목격되고 있다. 디지털 세상이 되어 좋아졌다 했더니, 오히려 더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비정상이 생겨나고 있다. ‘가짜뉴스.’언론이 무엇인가. 정부는 입법, 행정, 사법의 3부로 구성되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한다. 민주사회의 이런 제도적 장치가 충분하지 않다고 본 사람들이 ‘제4의 권력’으로 만들어 온 것이 ‘언론’이 아닌가. 언론을 통하여 보통 사람들이 정보를 제공받아 힘있는 이들을 견제하여, 그 결과로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발전하는 것이다. 언론에 거는 시민의 기대가 그렇다면, 언론이 전하는 내용은 당연히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짜뉴스’는 본질적으로 뉴스가 아니다. 언론이 아닌 것이다.수년 전부터 해외로부터 가짜뉴스에 대한 우려가 전해지더니 급기야 우리 사회에도 문제가 되었다. 최근, 가짜뉴스를 지적하며 각성을 촉구하는 보도가 있자 이에 대하여 반박하며 그렇게 알린 보도내용이 오히려 가짜라고 주장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누가 ‘진짜로 가짜냐’는 논란이 생긴 것이다. 국무총리가 ‘신문의 날’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우려를 담아 언급한 대로, 뉴스 전체가 신뢰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그는 가짜뉴스를 공동체 파괴범이자 민주주의 교란범으로 지목하였다. 민주주의를 언론으로 바로 세우고자 하였더니, 그 뉴스가 가짜를 전하고 있다면 과연 민주질서는 어지러워질 수밖에. 이를 어찌할 것인가. 우리 언론은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상황을 바라보는 독자는 또 어떻게 인식하고 대처할 것인가.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OECD는 전세계 학생들의 역량을 평가함에 있어, 수학, 과학, 읽기 능력에 더하여 이제는 ‘글로벌역량’을 측정하면서 ‘미디어리터러시(Media Literacy)’능력을 함께 평가하기로 하였다. 즉, 보통 시민들이 언론 보도에 관하여 이전보다 깨어있어야 하며 그 내용의 진위에 대하여 가늠하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이 가짜뉴스 현상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글로벌한 과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누구나 정보를 생산하고 공유하며 유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악용하는 이들이 있으므로, 이제는 보통 사람들이 이런 위험을 직시하고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시민도 언론도 슬프지만 지혜로와야 한다.독자는 기사 내용에서 인용한 출처가 분명한 지를 먼저 확인하여야 하며, 가능하면 같은 사안에 대하여 복수의 기사를 대조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의도적이며 악의적인 가짜뉴스가 번져가지 않게 하려면, 독자가 먼저 깨어있는 시민의식을 발휘하여야 한다. 정부와 힘있는 자들을 견제하라고 언론을 만들었더니, 이제는 시민들이 언론을 견제해야 하는 것이다. 가짜뉴스에 대한 경각심은 어느 곳보다 언론 사회에 더욱 클 것이다. 언론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보다 면밀히 살피면서, 초심과 본연으로 돌아가 진실만을 보도하고 가짜를 경계하는 언론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정부는 정부대로 책임을 통감하고 언론이 제 기능을 발휘하도록 가짜와 일탈을 제어하여야 한다.가짜뉴스 문제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상식의 문제이며 민주의식의 과제이다. 언론이 진실을 전하지 못하면 이미 언론이 아니다. 시민도 언론도 정부도 함께 경계심을 발휘하여야 한다.언론은 진실만을 말하여야 한다.언론이 살아야 민주주의가 산다.

2018-10-04

나의 목소리

▲ 장규열한동대 교수‘부러우면 지는 거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살고 있다. 부럽다는 건,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게 아닐까. 부러워할 뿐 아니라 사실은 흉내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 하긴, 따라해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뭘 해도 멋있는 사람이 있고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며 잘 버는 사람이 있다. 어차피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 거라면, 나도 한번 그렇게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다. 비결이 궁금하고 그걸 알기만 한다면 따라 해 보고 싶다. 그런데. 따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비결이 과연 있을까?애플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어렸을 적에 주변을 둘러보고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사람들이 만들었네!’라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나도 무엇인가 새로운 무엇을 스스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 그래서 들었다는 것이다. 학생에 불과했던 그 자신과 하나도 다르지 않을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단순하고 평범한 생각. 그런 생각이 비범한 결과를 낳았다는 건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에게도 부러웠을 사람이 많았을 가운데 정작 스티브 잡스는 그만의 세계를 만들고 떠나지 않았는가.아무리 부러워도 그냥 그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다가 간다면, 우리가 여기 살아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겨우 복사본같은 인생을 살려고 태어났을까. 당신이 살고 간 자리가 그 이전과 무엇 하나 다를 게 없다면, 그거야말로 허무한 놀음이 아닐까. 내가 이곳에 있었던 덕에 무엇이라도 새로운 일이 생기고 처음 보는 사건이 벌어지며 더 나은 물건이 나타난다면. 그렇게 한번 살아볼 수 없을까.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것일까?아이돌그룹 BTS가 바람몰이를 하고 있다. 그들은 과연 남다르지 않은가. 음악을 선율과 리듬이 만드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이제 그 생각을 바꾸어 달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들은 음악인으로만 존재하기 보다, 이제 의미와 그 깊이로 세계인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당신 스스로를 사랑하자’는 메시지와 ‘당신의 목소리를 찾으시라’는 요청을 UN총회 연설에서만 아니라 그들이 만드는 음악에도 힘있게 싣고 있다. 남들이 만들어준 생각을 따라 사는 동안 힘들고 피곤했지만, 스스로의 발걸음을 내딛으면서 드디어 즐겁고 의미있는 세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이를 접한 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의 젊은이들이 그들이 던지는 생각에 감동하며 크나큰 격려와 힘을 얻는다고 한다.세기의 과학자로 알려진 아인슈타인도 ‘상대성이론’이 상상력의 결과였다는 놀라운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열심히 공부하고 치밀하게 계산한 결과로 그런 업적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오히려 마음 가는대로 느낌과 감흥을 펼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상상력’이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물론,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정확하게 계산하는 일이 따라왔겠지만, 그것은 ‘생각의 틀’을 상상 가운데다 만들어 낸 이후에 진행된 일이라는 것이다.지난 세기는 우리에게 ‘모방과 추격’의 시간이었다. 뒤처지고 낙후한 처지에서 잘 나가는 세상을 따라잡기에 급급하였다. 이제는 상황이 바뀐 것이다. 누군가 따라갈 대상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돌아보니 이제는 우리가 끌고 가야할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경제, 사회, 문화, 정치, 그리고 국제관계. 그 어느 곳에든 우리가 설 자리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올곧게 세워야 할 책임이 이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이제는 맨 앞자리에서 ‘창의와 상상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그걸 저렇게 어린 친구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이 만든 세계’를 부러워 하고 따라가기 보다, 이제 어깨를 펴고 ‘당신의 목소리’를 찾으라는 저 요청은 바로 나에게 하는 소리가 아닐까. 세상은 ‘상상력’으로 바뀐다는 걸 이미 알았던 아인슈타인과 이제라도 ‘나의 목소리’를 찾으라는 저 일곱 청년이 던지는 생각을 오늘 한 번 되짚어 보자. 자신있게 내게로 옮겨 보기로 하자.

2018-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