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오피니언

멀리 높고 깊게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2018년이 시작되었다. 높은 기대로 시작하는 새 한 해에 모든 이들이 바라는 대로 꿈과 희망을 실현하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많은 것들이 더욱 발전하고 개발되어 우리들의 삶이 편리하여 지고 풍성해 졌지만, 생각 밖으로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 각박하여 지고 다툼과 갈등이 늘어가며 공동체적 일체감이 옅어져 간다는 지적이 함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는 사회문화적으로 여러 까닭들이 있겠지만, 현대 디지털 문명이 가져다 준 그림자 한 자락이 특별히 눈에 띈다. 디지털, 온라인, 사이버 공간으로 불리는 인터넷 세상은 모두에게 세상을 한 순간에 바라보는 창을 제공하였다. 그것도 이제는 모든 이들의 손 위에 들린 전화기 위에서 가능하게 되어 참으로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문명의 이기와 함께 다가온 새로운 지평에 치명적인 약점 한 가지가 발견되는 것이다. 글을 몰라 읽을 줄 몰랐던 문맹(Illiteracy)의 세상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가 되었지만, 글은 모두 읽을 줄 알지만 더 이상 읽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말로는 아직 뚜렷하게 새길 표현조차 없는 Aliteracy. 정보의 홍수라고는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무엇이든 인터넷 공간에서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독서`는 이제 구시대적 생각 쯤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많이 알고 있는 듯 하지만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이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다.자연히 생각의 지평은 그리 멀리 바라보지 않으며, 상상의 차원이 또한 그리 높지 못하다. 교육은 백년대계라면서 고작해야 다음 세대를 아직도 대학입시 경쟁에나 몰아넣고 있으며, 정치권의 이슈와 담론은 날마다 벌이는 말다툼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제 우리는 교육의 현장에서 학생들이 보다 멀리 바라보고 오늘보다 높은 생각을 키우며 무엇이든 깊게 이해하고 실제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있도록 길러야 할 것이다. 정치의 현장에서 사회와 나라의 미래를 더욱 멀리 가늠하고 높은 이상을 토대로 법과 정책을 만들며 깊고 정교한 분석에 기초한 정치활동을 기대하는 것이다.세상은 저렇게 넓고 할 일은 참으로 많은데 우리의 교육은 언제까지 나만의 성공에만 집착하도록 다음 세대를 기를 것인가. 좋은 대학에 가야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 세상을 함께 일으키는 일에 보람을 찾는 폭넓은 인성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정치는 언제까지 정당 이기주의에만 몰입하여 하염없는 논쟁과 다툼에만 머무를 것인가. 보다 높은 인식과 보다 치밀한 분석으로 국민을 위하여 일하는 정치인을 우리는 언제나 만날 것인가. 지난 한 해 격동의 시간을 통하여 변화의 기틀을 놓았다면, 올 한 해는 모두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키우고 현실감있는 실천에 이르도록 우리 사회가 변화하여 가기를 바란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세상을 품고 이웃을 돌아보는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며, 정치는 정당의 이해를 넘어 너른 지평을 향하여 나아가는 진정한 개혁에 임해야 할 것이다.이 같은 실천적 변화를 위하여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디지털문명도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디지털 세상의 위험요소에 착안하여, 보다 멀리 바라보고 더욱 높게 꿈꾸며 한층 깊이 생각하기 위하여 관심 분야에 따라 `책읽기`에도 관심을 두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멀리 바라보지 않고는 이기적 욕심에 빠지기 쉽고, 높은 꿈을 꾸지 않으면 날마다의 질곡에서 헤어나기 어려우며, 깊게 생각하지 못하면 의미있는 일을 해 내지 못할 것이다. 지난 해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던 희망의 불씨를 더욱 살려 내어, 실수없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하여 올 한 해에는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할 것이다.멀리 보고 높은 꿈을 꾸며 깊게 생각하는 지역이 되고 나라가 되어, 진정으로 새로운 교육과 기대높은 정치의 싹을 키우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018-01-04

칭찬과 비난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아마도 과연 그럴 것이다. 칭찬은 이를 듣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하던 일에 더욱 열심을 내게 하고 춤추듯 일하게 하여 그런 결과 이전보다 더 나은 결실을 보게 할 것이다. 남들로부터 칭찬의 소리를 듣게 되면 나 자신부터 신이 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칭찬이 모든 경우에 매우 효과적일 것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칭찬을 얼마나 잘 하면서 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오랜 외국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후 필자는 아이들을 국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런데 하루는 둘째 아이가 달려와서는 시무룩한 얼굴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는 아무리 아무리 열심히 해도 선생님으로부터 `잘 한다`는 소리를 좀처럼 듣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덧붙이기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태어나서 자랐던 외국에서는 선생님으로부터 `못 한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긍적적인 격려가 아니라 부정적인 지적만 경험하다 보니 한국에서의 학교생활이 힘들고 재미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 교육의 현장에는 좋은 선생님들이 매우 많으실 것으로 믿는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겪어온 치열한 경쟁적 환경에 생각이 미치면 아이가 겪었다는 `부정적 지적`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닌 것이다. 남들보다 얼른 배워 그 누구보다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야 하는 강박에 시달리다 보면, 학생도 교사도 그리고 학부모도 얼른 틀린 것을 고치고 맞는 답을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더 좋은 학교, 더 나은 직장, 그리고 더욱 보장된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같은 경쟁만이 우리 사회가 다음 세대에게 던져온 삶의 모델이었다. 사회적 관성이 함께 작동하여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변화하였는데도 우리는 교육의 현장에서 아직도 경쟁모델 중심의 가르침이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생각을 조금 바꾸어야 한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물론 선생의 눈으로 보면 학생은 늘 부족한 게 사실이다. 바로잡아 주어야 하고 틀린 것을 알려 주어야 학생에게 발전이 있을 것임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교사의 시선이 부정적이기만 하다면 교육적 태도와 방향 역시 부정적인 경향성을 가지게 되어 학생에게는 물론 교사 자신에게도 퇴행적 교육이 거듭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학생의 오늘 모습은 내일을 향한 교육이 시작되어야 할 출발점이 아닌가. 학생은 어쨌거나 오늘 그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교사가 먼저 믿어주고 격려하고 끌어올려 줄 때에 학생에게는 진정한 변화가 시작되지 않을까. 끊임없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선생의 따뜻한 시선에 학생은 자연스럽게 긍정적으로 반응하지 않을까.우리 사회의 부정적 경향성이 어찌 교육에서만 그럴 것인가. 우리 정치가 지향하는 내일의 모습이 긍정적이라는 것은 슬로건에 머물 뿐 현실 정치는 하염없는 부정적 언사와 행태의 연속이 아닌가. 그리고 우리 문화와 문화상품들이 담고 있는 스토리와 담론들에는 또 얼마나 긍정적 요소를 담고 있는 지 한번 돌아보았으면 하는 것이다.갈등과 분열, 슬픔과 고통이 이미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으로도 한스러울 터에, 서로를 향한 시각과 태도마저 부정적이라면 우리는 서로 무엇을 기대하며 살 것인가 말이다. 서로를 향한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도록 노력했으면 한다. 선생은 학생을 향하여 긍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정치인은 국민을 향하여 진정으로 따뜻한 시선을 가질 때 이 사회는 더욱 건강하게 움직여 갈 것이다. 학생도 선생을 향하여 그리고 국민도 정치를 향하여 수용하고 인정하게 되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살아날 것이다.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비난은 영웅도 잠자게 할 것이다. 다사다난하였던 2017년을 보내면서, 이제 칭찬으로 더욱 성숙해 갈 것을 다짐해 보았으면 한다. 남을 향한 배려와 섬김, 그리고 칭찬으로 가득한 새 해를 열어갔으면 한다.

2017-12-28

`한 사람도 놓고 가지 않는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겨울이 빨리 찾아왔다고 한다. 기온도 예년보다 낮은가 하면 지역에 따라서는 눈도 벌써 많이 내린다고 한다. 매서운 한파가 닥치면 그제야 우리는 조금씩 어려운 이웃을 떠올리곤 한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혹 겨울준비가 부실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고 돕는 마음도 일어나는 것이다. 춥지 않았을 적에는 그러면 그런 어려운 이웃들이 우리 주변에 없었을까? 아니 늘 있었을 것이다.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족함과 어려움을 이기며 지내는 이웃들이 우리 사회에는 언제나 있었을 터이다. 그러면, 평소에는 우리가 왜 그들을 잘 떠올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들의 삶이 혼자도 버티기 힘들 만큼 쉽지 않는 탓이 아닐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모두들 힘들고 버거운 판국에 어려운 이웃을 떠올리고 찾아 살피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무한경쟁`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개인과 사회의 발전과 유지를 위하여 물론 필요한 덕목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경쟁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성공에만 집착하게 할 때에 이 사회는 얼마나 냉정한 싸움터가 되고 말 것인지 생각해 봐야하지 않을까.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전달할 메시지로서 이제는 `함께 잘 살아가는 따뜻한 공동체`를 지향하여야 하지 않을까. 필자가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만 해도 치열한 입시경쟁 속에서 고3 교실은 우반과 열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받곤 하였다. 그 땐 그저 그러려니 했던 그 광경을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기형적인 부끄러운 모습이었는지. 전교 몇십 등 안에 들지 못하면 거의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 교육을 교육이라 부를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조금 더 잘 한다고 하여 옆자리의 친구를 돌아보지 않게 하는 교육이 정말 교육이라 불리울 자격이나 있는 것일까. 한 학급에 앉아 있어도 끊임없이 동료를 밟고 이겨내는 기술만 가르치는 교육이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오늘 우리 교육의 모습은 혹 아직도 그런 모습을 하고 있을까 섬뜩해 지는 것이다.핀란드의 교육이 자주 언급되곤 한다. 학생들에게 그 어떤 압박도 가하지 않는 것 같은데 학생들의 실력과 인성의 발달이 매우 바람직한 모델로 알려져 있다. 그들 교육에 있어 가장 중요한 지표는 `한 사람도 놓고 가지 않는다`라는 지향점. 모든 학생들이 소기의 교육목표에 이를 때까지 함께 가도록 지켜본다는 것이다. 물론 학생들 간에 개성과 성향의 차이가 있어 지향하는 방향이 다를 수는 있지만, 그 차이를 될수록 조기에 구별하여 학생 모두가 적정 수준 이상의 `성공`에 이르도록 교육 시스템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즐겁고 행복한 학교환경을 만들어 낸 결과, 교육의 효과가 최적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생 각자의 `사람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데, 그깟 시험 성적에 따라 취급을 받고 못받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그가 거둔 성적이 어떠하든지 바로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내일의 발전을 기할 수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교육은 바로 그런 과정을 격려하며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교회들은 마침 겨울의 한 가운데에서 성탄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인간이 쳐놓은 분열과 단절의 벽을 넘어 모두 `화합하고 사랑하거라`는 메시지가 바로 이런 계절에 나누어지지 않는가. 한 사람도 놓고 가지 않겠다는 생각을 교육의 현장에 나누고 새롭게 다짐할 때에 우리 교육에도 참된 희망의 단초가 보이지 않을까 한다. 그래야 비로소 모두가 입시경쟁에 내몰리는 사회적 폐습도 해소되기 시작할 것이며, 경쟁 일변도의 구시대적 학습 기준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한 해 새로운 사회를 향한 정치적 토대가 놓였다면, 새 한 해에는 나라의 백년을 향한 교육적 토대가 새롭게 태동하기를 기대해 본다. 한 사람도 놓고 가지 않는 교육, 그래서 모두 행복한 사회가 지역과 나라에 찾아오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2017-12-21

무엇을 배울 것인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종강을 앞둔 강의실에서 마지막 질문삼아 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대개 답들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가지고 싶은 직업`으로 돌아온다. 언론인, 영화감독, 교수, 의사, 법관, CEO…. 하고 싶은 일이 먼저 있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가지는 것이 직업인데, 어떻게 우리 학생들은 장래 희망이 직업이 되었을까? 그렇다면, 이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 직업을 여러 번 바꿀지도 모르는 상황을 기대하면서 `장래희망`도 그에 따라 또 여러 차례 바뀌어 갈 것인가. 혹 그게 아니라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을 우리가 다시 생각해야 한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보람있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교육의 현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배움터에 모인 학생들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도록 도울 것인가.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일정부분 기술을 가져야 하는 것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사람으로 공동체 구성원으로 또 세계시민으로 의미있는 삶을 영위하는 데에 그리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현대 사회에 이렇게 교육을 많이 받고 현명한 지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살아가면서도 온갖 사회적 문제들이 가득한 것을 보면, 우리의 교육이 그저 먹고살기에 충분할 정도의 `개인적 기술습득`에만 치중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개인의 습득과 성공에 초점을 두느라 추격과 경쟁의식으로 가득한 배움이 이전의 교육모델이었다고 하면, 이제는 우리가 `공동체의식`을 배우고 가르쳐야 할 터이다.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고 더불어 행복한 질서를 세워가야 하는 것이다. 유네스코(UNESCO)가 정의하는 교육의 지향점을 보아도, 학생 개인이 알차게 배워 `사회가 조화롭게 발전하여 가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이끌어 내는 것이라 한다. 즉, 교육의 목표는 공동체의 조화와 성공이어야 하는 것이다.배운다는 일의 또 하나의 요체는 `즐거움`이다. 무엇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자만 못하다고 하지 않는가. 즐겁지 않으면 배울 수 없고, 즐겁게 배우지 못하면 제대로 익힐 수 없다. 배울수록 즐거워야 하고 그 즐거움이 동력이 되어 더 배우게 되는 것이다. 배우고자 하는 일이 나를 즐겁게 하지 않으면 이를 배우러 나서지 말 일이며,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은 학생이 배움터에 즐겁게 나아오도록 이끌어야 할 터이다. 호기심도 즐거워야 생길 것이며, 무언가 배운 다음 느끼는 성취감도 바로 즐거움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학교는 학생이 즐거운 곳이 되어야 하고, 선생은 즐기며 배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는 즐겁게 배우고 있는가. 우리는 즐겁게 가르치고 있는가. 학교가는 것이 즐거운 학생과 선생이 되어야 하고, 이를 바라보는 부모와 사회가 즐거워야 할 일이다.배우면서 즐기는 일은 `내`가 하는 것이다. 나 가진 것으로 배우고 즐겨야 하는 것이다.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이 나의 목표가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오늘 나의 이 모습으로 배우는 것이며 내일 내가 만들어 낼 것도 새로운 나 자신인 것이다. 나로 시작하여 내가 배운 끝에 보다 나다운 나를 탄생시키는 일이 바로 배우는 일인 것이다. 나다운 공부를 하기 위하여, 공부도 나 가진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무엇인가 내가 배워 나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하고 싶은 일`이 발견될 터이다. 의사가 되어, 작가가 되어, 교수가 되어, 음악가가 되어···. 그 어떤 직업을 가져도 그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일이 보일 터이다. 그러니 무엇을 하느냐 보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바꾸어야 할 일이 넘치는 세상에 내 욕심만 채워서는 될 일이 없다. 할 일 많은 우리 사회를, 새롭게 만드는 `배움`으로 채워야 하지 않을까.

2017-12-14

도시의 경쟁력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1994년 1월 17일, 우리에게는 LA지진으로 알려졌던 강도 6.6의 강진이 도시의 새벽을 강타했다. LA 북쪽의 교외도시인 노스리지(Northridge) 지역을 진앙으로 했던 이 날의 지진은 그 지역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학교와 병원 등 공공건물들이 파괴되었음을 물론이고 지역을 관통하는 주요 고속도로들도 여기저기 끊어졌는가 하면 수천채의 가옥들이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노스리지 지역은 거의 전쟁터처럼 변하였으며 그 곳은 한동안 지진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만큼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누구도 다시는 그 지역에 이사하거나 보금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 지역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마음들이 팽배하였다. 미국인들이 회피하는 지역이 되었으며 그 지역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우울해 지는 도시가 되었다. 지진이 거칠게 쓸고 간 자리에 도무지 그 무엇 좋은 일이 생길까 의심스러웠다. 그랬던 지진도시 노스리지는 지금은 오히려 더욱 평온하고 쾌적한 교외 도시로 거듭나 미국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지역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포항이 지진의 습격을 받았다. 지진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도시가 강진의 충격으로 입은 피해는 말로 다 형언하기 어려울 지경이다.인명피해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수많은 가옥들, 학교와 건물들이 언제 복구가 끝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다한 이재민들이 생겼으며 지역주민들 사이에는`포항탈출`을 생각해 본다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이다. 물리적인 피해도 컸을 것이지만, 지진으로 입은 마음의 상처, 도시 이미지의 손상도 생각보다 심각할 것이다. 외지인들도 이제`포항`이라면 지진을 떠올리는 도시가 되었다고 하며 이 도시를 다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려면 앞으로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지진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이 도시에 대한 지극히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를 누가 할 것이며, 어떻게 할 것인가?진정으로 새롭게 솟아오르려면 차라리 무너지는 것이 좋다.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설 기회를 찾아야 한다. 이제 적어도 포항을 모르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없다. 한동대도 과메기도 넘치도록 알려졌으며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 지켜보는 마음도 생겼을 터이다.지구 상에 자연재해로부터 완벽하게 안전한 지역이 어디에 있을까. 지진으로 잠시 흔들렸을 뿐 이 도시 포항과 이 지역의 시민들이 건재함을 보여 주어야 한다. 도시의 경쟁력은 어디 바깥으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며 외부의 누군가가 만들어 줄 수도 없는 일이다. 최근에 죽도시장에 활력이 돌아왔다는 보도가 있다. 이 지역의 운동력은 지역이 책임질 수 밖에 없으며 시민들 스스로의 하는 일과 노력 여하에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잦아들기도 할 것이다.전 국민의 관심과 걱정을 받아든 김에 우리 도시 포항은 보란듯이 새로운 기운을 만들어야 한다. 시장은 이미 포항을 가장 안전한 도시로 만들겠다고 선포하였다. 안전 뿐 아니라 사회와 경제, 문화와 국제화 등 그 어느 모로 보아도 손색없는 도시로 다시 태어날 기회가 바로 지금인 것이다. 포항을 그동안 경북의 대표도시로 인식하며 지내왔다면, 이제는 이 도시 포항이 대한민국에서 맨 앞에 기억되는 지역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한다.지진과 관련하여 발견되는 문제들을 차분히 정리해야 하며, 앞으로 생길지도 모르는 자연재해에도 예방책 마련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지역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일이다. 빼어난 자연환경과 손색없는 경제적 터전을 새롭게 바라보고 다시 일으키는 노력에 모두 나서야 한다. 노스리지가 큰 지진 후 20여 년 만에 미국인들의 보금자리로 다시 환영받는 이상으로 이 도시 포항은 끝없는 가능성으로 넘실대는 곳이 아닌가. 20년 후 포항에 가 보고 싶다.

2017-12-07

대학입시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우리에게 있어`대학입시`는 가히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단어다. 한 사람을 성공하게 하거나 실패에 이르게 하는 듯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면, 사회적으로도 온 나라가 대학입시에 매달리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다. 초겨울 보통 추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필 `수능한파`이며, 대학입시 정부정책의 향배는 온 국민의 관심사일 뿐 아니라 모든 언론의 특급 기사거리인 것이다. 입시날 아침에는 교통이 통제되며 심지어 항공기 이착륙도 관리대상이 되는 것이다. 수험생들을 위하여 백일 기도도량이 펼쳐지고 특별 새벽기도가 올려진다. 대한민국 고교생의 대학진학률이 80%를 넘어, 미국의 60%나 일본의 45%, 독일의 35%는 명함도 못 내미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1970년에는 한국의 대학진학률도 27%에 불과했다고 하니 격세지감도 이만저만이 아니다.우리는 어떻게 이처럼 독특한 국민이 되었을까. 어째서 대학입시에 목을 매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를 혹 완화하거나 해소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나라의 고령화저출산 세태에 따라 인구절벽이 곧 닥친다는데, 그에 따라 청소년 인구도 줄어든다면 대학에 들어가기는 점점 쉬워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째서 아직도 수능은 우리의 톱뉴스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무엇 때문에 좋은 대학 들어가기에 운명을 거는 것일까. 좋은 대학. 이해는 하면서도 아리송한 것은, 이제 시대가 바야흐로 대학의 간판보다는 당신이 실제로 무엇을 할 줄 아느냐가 점점 더 중요할 것인데, 어째서 아직도 우리에게는 출신대학의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이제는 대학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바뀌어야 하고 대학 자신들도 바뀌어야 하며 대학정책도 환경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대학졸업생을 신입직원으로 받을 기업들은 이미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엘리트 또는 최고급지성을 길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였던 중세의 대학모델은 이제 대학의 옛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20세기 초반 고등학교를 High School로 불렀던 까닭이 낡은 생각이 되었듯이, 오늘의 대학이 특급지성을 길러내는 기관일 것이라는 생각도 퇴화해 가는 것이다. 그보다는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반적인 지성과 실력을 갖춘 청년인재를 배출하는 기관쯤으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가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청년인구가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현재의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대학들이 속출할 터인데 대학들이 지금처럼 20대 초반의 학생들을 교육하는 모델만 고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대학은 그 문을 전 세대에 개방하여 `평생교육`모델을 적극 수용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이를 불문하고 새로운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 시민들이 언제든지 대학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폭넓은 배움의 현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편, 우리에게 필요한 연구와 개발의 역할은 이미 발전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연구중심 대학들과 대학 외 연구기관들이 그 소임을 맡아 주어야 할 것이다.우리가 생각하는 `대학입시`에 대한 생각도 바뀌어야 한다. 한 사람이 책임있는 성인으로 자라 지녀야 할 기본 소양과 자질, 그리고 능력과 실력을 습득하기 위하여 진학하는 교육기관 정도로 생각하면 어떨까. 그래서, 진학하려는 대학의 선택도 대학의 이름에 좌우되기 보다는, 과연 그 곳에서 그같은 교육을 효과적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인지를 살피며 가늠했으면 하는 것이다.대학입시. 그 한 판의 승부가 인생 전부를 절대로 좌우하지 않는다. 대학입시 이후에도 삶에 있어 중요한 결정의 고비는 수없이 많을 것이며, 그 때 마다 우리는 오늘 `대학입시`보다 오히려 더 큰 무게로 다가올 굽이굽이를 맞을 것이다. 자녀들과 함께 대학입시 현장에 선 학부모님들에게도 일러주고 싶다. 자녀들의 성공은 `대학입시`에 절대로 달려 있지 않으며, 그들이 어떤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라고. 지난 시절 경험이 내일 그대로는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2017-11-30

수능생각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포항 지진의 여파로 수능이 한 주간 연기된 끝에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정부의 발표와 사회부총리의 다짐에 따르면, 오늘 수능은 더 이상 취소되거나 연기되지 않을 것이며 수험생들의 안전을 최우선순위에 두고 시행된다고 한다. 포항지역이 겪은 충격이 매우 컸으며 또한 이어진 여진의 공포도 극심하기는 하나, 수능은 전국적인 대사이며 전국의 모든 수험생들에게 큰 영향이 미치는 일이다. 소수의 아픔을 위하여 다수가 이해해야 하는 상황이 빚어진 것이며 이를 모든 국민들이 큰 무리없이 품고 수용하여 준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을 위하여 자신의 불편함을 감내하여 준 전국의 수험생들과 가족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이제 우리나라는 `마음이 넓은 나라`로 `남을 생각하는 사회`로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행복한 것이 소중한 만큼, 모두 함께 편안한 사회로 움직여 가는 일만큼 귀중한 소득이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지진이 우리에게 불행만 안겨준 것은 아닌 것이다.그런데, 수능에 관해서는 한가지 생각거리가 있다. 우리 수능은 일 년에 딱 한번 치르는 일이다. 그래서 수능의 아침은 운명의 아침이 되었으며, 전국뉴스의 필수 소재가 되었다. 이 날의 날씨가 초미의 관심이며 이 날을 위해 백일기도 도량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한 날의 수능에 실수라도 하게 되면 꼬박 일 년을 기다려야 하며, 필자도 바로 그런 탓에 대학입시 재수의 고배를 들어야 했다. 이미 수십년 쌓아온 전통이라 우리의 감각이 무뎌진 것일까, 어째서 우리는 이런 시스템이 이제는 적절하지 않음을 아무도 묻고 있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럴까. 수일 전 사회부총리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를 묻는 질문에 `다른 나라에 있어 유사한 형태의 시험이 1년에 몇 차례 있는 것은 그들의 시험이 자격시험과 같은 성격이고, 우리의 수능은 실력을 가늠하는 시험이라서` 다르다고 하였다. 과연 그런가.수능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시행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준말로, 대학교육에 필요한 수학능력을 측정하는 시험으로 정의되고 있다. 그렇다면, 학생이 대학교육을 받기 위한 기본적인 수학능력을 갖추었는지를 검증하는 시험인 것을 1년에 단 1회 응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그리고, 이것이 실력평가를 위한 시험이라고 해도 꼭 1년에 단 1회 치르도록 규제해야 할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미국의 경우, 우리의 수능과 비슷한 SAT는 거의 두 달에 한번 꼴로 치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학생들이 준비가 되었을 때 자유롭게 선택적으로 몇 번이라도 응시할 수 있도록 하고 이들의 평균점을 입시사정에 활용하고 있다.초유의 사태로 `수능연기`의 결과까지 빚었던 까닭은 우리가 1년에 단 한번 시행한다는 그 중압감이 너무 무거웠던 탓이 아니었을까. 수차의 기회가 우리에게 있었다면 이번과 같은 자연재해에 대응할 때에도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기회에 우리 대학수학능력시험을 1년에 몇 차례 시행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조정할 필요에 대하여 숙고하여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물론, 실행하려면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수험생들의 안정적인 학습을 보다 폭넓게 제공하고 수능 날의 불필요한 긴장을 줄여줄 수 있으며 가족들의 마음에도 더욱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질 수 있다면,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오늘 수능으로 수고할 모든 수험생들이 오늘 하루의 시험에서 그간 갈고 닦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 날 `하루`가 아니라 몇 차례의 응시기회가 제공되어 이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에도 유연함이 생겨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수험생 여러분, 일 년 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2017-11-23

무엇을 가르칠까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수능.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전국의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시행하는 대학수학능력시험. 이날 이전에 받아온 모든 교육에 대한 평가가 이 한 날의 시험결과에 달려있는 참으로 중요한 시험이다. 십수년 교육의 결과를 어떻게 단 하루의 시험으로 평가하느냐는 반문이 물론 가능하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두를 집중하고 긴장하게 하는 이 날 하루 수능의 날이 밝았다. 마음마저 스산해 지는 수능의 아침에 우리는 우리의 교육이 다음세대에게 정말로 가르쳐야 하는 것을 잘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최근 언론보도들과 교육현장에서 전해오는 목소리들에는, 우리가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기 보다는 아직도 `대학입시`라는 사회적 코드에만 머물러 있는 교육을 하고 있다는 자성과 각성이 물씬 배어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 되었으며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 것일까.오늘 수능의 날이 지나고 나면, 고3 교실에는 교육이 실종된다고 한다. 그동안 노력해 온 것을 보상이라도 하는 듯 학생들에게 갑자기 여유로 가득한 시간들이 허용되고 학교에서 누려야 할 내실있는 교육이 그 수레를 멈추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에도 학생들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실 터이지만, 막상 수능을 마치고 돌아서는 수험생들이 겪는 허탈함과 해방감은 수능 전후 교육현장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들 청소년들에게 우리 교육의 목표가 `대학입시`였음을 시인하고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중등교육이 도달하고자 했던 지향점이 고작 대학입시였는가. 인성교육, 시민교육, 민주교육, 소양교육, 인권교육 등, 교육이 담고자 했던 가치와 덕목들은 참으로 폭이 넓은데, 어쩌다 우리는 달달 외워 토해내는 교육에만 매몰되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나라의 교육이 이렇게 흘러가도록 보고만 있을 것인가.지식의 전문화가 심화됨에 따라 사람이 무엇을 배워 어떤 능력의 소유자가 되느냐는 매우 중요한 결정이며 또한 매우 현실적인 고려사항이다. 하지만, 고도의 전문적 지식만 가지고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조화로운 공동체를 함께 이루어갈 인간을 길러내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자칫 개인의 성공과 영달에만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더불어 살아가는 건강한 사회를 구현해 가는 일에는 오히려 어려움을 끼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기를 수도 있는 것이다. 업무능력은 출중하나 인간적 조화에는 실패하는 인성을 만들어낼 위험이 다분하다. 경쟁에서 이겨낼 수 있는 실력을 갈고 닦도록 격려함과 동시에 다른 이들과 어울려 일하는 관계형성에도 손색이 없는 인간을 길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방과 추격으로 이 나라가 20세기에 성공적인 궤적을 그려왔다면, 21세기에는 안정과 화합으로 더욱 서로 믿으며 신뢰하는 공동체로 나아갔으면 하는 것이다. 끊임없는 경쟁으로 지쳐가고 있는 글로벌 공동체에도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우리의 교육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실력과 인성이 비로소 조화롭게 길러지는 교육을 기대하는 것이다.이 나라 교육의 앞날을 위하여 `국민대토론회`라도 제안하고 싶다. 교육이 `백년대계`라는 슬로건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한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로 우리의 교육은 수십 년째 고정된 틀 안에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이를 바꾸어 가는 방식도 그 어떤 증상에 일일이 대증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정말 `교육의 의미`를 시대적으로 잘 분별하여 참으로 미래지향적인 교육의 지평을 가늠해 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다음세대가 이 나라와 우리 사회를 보다 든든하게 만들어 가려면, 그들이 오늘 받을 교육에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겸허하게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2017-11-16

손님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미국 대통령이 다녀갔다. 우리나라에게는 오랜 친구의 나라이자 전쟁을 통하여 피를 나눈 국가의 대통령이기에 그의 방한에는 많은 이들의 관심과 기대가 함께 하였다. 우리 대통령도 그를 영접하는 모습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따뜻하고 품격있게 맞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품새가 역력하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진심과 정성을 모아 환대하고 일정 가운데 진정을 다하는 모습이 우리 국민들에게도 다감하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단 우리는 귀한 손님을 훌륭하게 맞아 편안하게 돌아가게 한 것으로 생각한다. 양국의 대통령은 물론 함께 방한한 일행에게는 나름 흡족한 일정이었을 것이다. 드물게 보는 미국 대통령의 한국 국회연설을 지켜보는 우리 국민들의 마음도 그런대로 흡족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몇 가지 생각거리가 없지는 않다. 먼저 미국 대통령의 중상주의. 그의 이력과 현재 미국 내에서 낮은 지지도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그것도 반복적으로 상업적 이익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듯한 발언을 이어가는 것이 대통령 자신과 미국을 위하여 긍정적일 것인지는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국익이라고 부르는 이익에는 경제적 이익 뿐아니라 국가 간 관계와 국민 간 조화, 공동체 형성과 가치관 공유 그리고 안보적 공조와 문화적 교류까지 매우 다각적이며 폭넓은 범주의 고려사항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일본방한에서도 일본의 적극적인 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 간 무역관계가 공정하지 않다는 등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였다고 한다. 한국 방문 중에도 어김없이 미국 내 일자리와 무역적자, 그리고 미국의 무기판매 등을 강조하였다.이들 국익과 관련된 각론 사항들은 함께 동행한 그의 일행과 우리측 인사들 사이에서 얼마든지 협의하고 조율할 수 있었을 터인데, 이를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강조하는 모습은 그의 조급함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여 매우 안타까운 부분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미국 내 미국인들에게는 긍정적으로 작동할 것인지도 사실은 미지수인 것이다. 이미 미국 내에서는 대통령이 보다 높은 수준에서 국가운영과 국제관계를 관리해 줄 것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통령은 이들 발언에 나름 의연하게 대처한 것으로 보이며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면서도 나라의 품위를 잃지 않는 반응태도를 유지한 것으로 보여 매우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한국정부는 앞으로도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는 태도와 가치를 존중하는 품격을 유지하며 국제관계에 임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이제 미국 대통령이 떠난 자리에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미래지향적인 국제관계를 정돈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리 편안하지 않은 갈등의 요소들을 품고 있는 대일관계와 어딘가 400여 년 전 청나라를 떠올리게 하며 부상하는 중국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자세로 우리의 앞길을 닦아가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이 모든 국제관계가 우리의 입장만으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위치와 반응을 살펴가며 조화롭게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므로 더욱 흥미롭고 긴장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같은 관계형성의 과정에서 우리 지역은 어떤 역할을 담당할 것이며 또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인지도 사뭇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가까운 일본은 물론 중국 여러 지역과의 협력과 공조는 우리 지역의 지속적인 발전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우리 지역의 항만과 연결되는 러시아와의 관계형성에도 보다 전문적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손님이 떠난 자리를 돌아보면 오히려 생각거리가 많아진다. 미국 대통령이 지나간 흔적과 함께 우리는 우리의 앞날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을 모아야 한다. 나라와 지역의 미래는 외부와의 관계가 결정하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2017-11-09

입동(立冬)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겨울이 선다.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오묘함이 수다하지만, 그 가운데 계절이 바뀌면서 느끼는 변화와 그 오묘함은 기가 막힐 지경이다. 우리는 이제 겨울의 문 앞에 와 있는 것이다. 입춘과 입하, 그리고 입추는 대개 피부로 느끼는 계절을 한참 앞서 다가오더니, 입동은 올해도 실제 `겨울느낌`과 거의 동시에 찾아오는가 싶다. 우리는 겨울채비를 잘 하고 있는가.시간과 계절이 어느 때를 시작과 끝이라고 할 것인가. 그래서 하루 스물네 시간과 일년 사계절도 사람이 만들어낸 단락이며 단위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고 자연이 흘러가는 저 모습에는 일정한 순서와 패턴이 있음이 분명히 보인다. 즉, 봄에 싹을 틔운 자연의 기운이 여름을 통하여 숙성하여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안겨준 다음 겨울을 맞아 스러지며 다가올 봄을 다시 기대하는 것이다. 이제 겨울을 지나며 웅크리고 침잠하는 가운데 새로운 다짐과 준비,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을 통하여 다시 피어오를 찬란한 봄을 상상할 것이다. 지난 시간 가졌을 겨룸과 다툼, 갈등과 고뇌의 응어리를 마음으로 다시 견주며 새 봄에는 어떠한 새로움으로 부활할 것인지 준비하는 것이다.이 나라와 우리 지역은 겨울로 들어가며 마무리와 기다림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나라는 지난 수개월 동안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겪은 셈이다. 아직도 발견되는 부끄러운 옛 모습을 따라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자신의 뒷모습과 그림자를 마주하고 있다. 겨울을 지나며 우리는 어둡고 처연한 그런 생김새를 참으로 신선하고 새로운 모양으로 다시 지어낼 다짐과 기대로 마주서야 하지 않을까. 부끄러운 지난 모습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노라는 `사회적 약속`을 확인하는 이 겨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새 봄이 되면 청년들과 다음 세대에게 이제는 당당하게 이 나라의 내일을 함께 그려가자고 말을 건네는 어른들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역에는 아직도 해결이 요원해 보이는 문제들로 한가득이다. 겨울을 지나며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 곳을 어떤 모습으로 물려줄 것인지 진정으로 마음을 모아 함께 고심하여야 한다. 새 봄이 되면 그래도 갈등과 등돌림으로부터 분명히 달라진 지역 공동체가 태어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기대와 변화도 우연히 찾아오는 법은 절대로 없다. 이 공간에서 이 시간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스스로 한 자락씩 거들며 생각을 모을 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새 모습이 조금씩 드러날 것이다. 나라에도 그러했듯이 지역의 내일을 상상하며 지혜를 모으는 `시민참여포럼`이 지역에도 한번쯤 시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겨울은 춥다. 무더위의 기억이 아직도 살갗에 남아있지만 이제 곧 살을 에이는 찬 바람과 눈보라도 닥칠 것이다. 휘몰아칠 한파와 폭설이 다가오기 전에 우리는 무엇인가 튼실한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겨울 추위를 지나면서도, 우리는 긴장의 고삐를 풀 겨를이 없을 터이다. 쌓여온 문제들과 풀어야 할 매듭들을 마주 대하며 겨울을 지나면서도 오히려 새로운 생각으로 이겨내는 혜안을 발휘하여야 한다. 입동(立冬)은, 어째서 入冬이라 적지 않았을까. 그저 그 곳에 있는 계절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겨울을 세우고 일으켜 보겠다는 기개어린 다짐이 혹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에게 다가올 겨울 동안에도 새롭게 세우고 다시 일으키는 다짐과 노력이 가득했으면 한다.차가운 겨울바람이 옷깃에 힘들어 지기 전에, 우리는 이 나라와 우리 지역이 저 건너 새 봄에 오히려 더욱 건강하게 `함께 사는 공동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다짐하며 준비하여야 한다. 나라든 지역이든 당신이 하기에 달린 것이 아닐까. 또 그래야 보람도 있고 자신감도 생길 것이 아닌가. 나라와 지역에는 그래서, 겨울이 없다. 뜨거운 열정과 꿈꾸는 기대가 가득할 것이므로.

2017-11-02

숙의(熟議)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우리 사회 정치적 지평에 최근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숙의민주주의.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의 재개여부를 놓고 공론화위원회가 설치되고 시민참여단이 구성되어 숙의를 거쳐 정책대안이 제안되고 이를 대통령이 수용한 일이다. 이를 두고 여러 갈래의 생각들이 나타나고 있다. 먼저, 시민의 참여를 보장하고 보다 진지한 토의가 가능하게 되어 우리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하게 만드는 과정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이미 우리가 가진 대의민주주의 즉 국회의 존재와 역할이 희석되어 삼권분립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골간에 혼란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 생소하지만 매우 중요해 보이는 이 숙의민주주의에 대하여 생각을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공론화 시민참여단이 회의를 하는 강당에는 연단 좌우에 `경청`과 `숙의`라는 커다란 현수막을 걸고 있었다. 경청(傾聽), 즉 다른 사람의 말과 생각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여 잘 듣겠다는 다짐이 걸려 있는 셈이고, 숙의(熟議)는 사안에 관련된 생각들을 무르익을 만큼 샅샅이 살피며 나누어 보겠다는 또 하나의 의지를 걸어놓은 것이다.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는 서구 민주사회에도 그리 오래되지 않은 개념으로 1980년대 정치현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새로운 의사결정개념으로 다루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정치적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 단순한 표 대결에 의존하기 보다는 진지한 토론을 통하여 이해와 존중의 지평을 넓혀가는 과정으로서, 대의민주주의의 틀 안에서도 당연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즉, 참여자들이 다루는 사안에 대하여 보다 진지하고 심도있는 토론을 벌여 이해와 합의의 저변을 넓혀 가려는 노력인 셈이다. 숙의민주주의 의사결정과정에서 표결 또한 있을 수 있지만, 상반되는 입장에 선 이들이 표결의 결과로서 가지게 되는 앙금과 갈등의 불씨를 최대한 줄여 보자는 의도도 엿보이는 것이다. 즉, 대립에 따르는 표결이 목표라기보다는 서로 간의 이해가 지향점인 셈이다.우리의 정치 상황에서 시도된 이번의 공론화위원회 시민참여단의 토론회는 그 첫 시도로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정책결정에 있어 이 토론회가 가지는 정당성의 문제, 시민참여단이 과연 우리 사회를 대변하는가의 질문과 그 구성의 문제, 의제선정과 결정과정의 타당성 확보의 과제, 그리고 국회로 대변되는 대의민주주의와의 상충 또는 조화의 문제 등 숙고해야 할 생각거리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동안 거의 모든 정치적 의사결정에 있어 극심한 의견대립의 과정 끝에 표결로 의사결정을 마무리하는 기계적 과정만 보아왔던 보통 시민들은 상당히 신선하고 의미있는 정치적 현상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토론에 참여한 이들이 각자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하고 진지한 토의과정을 거치게 되면 사안에 대한 실질적 이해 뿐 아니라 상대방의 의견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게 되어 최종 결정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게 되든 갈등과 대립의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갈등과 대립의 불씨가 잦아들게 되면, 우리 사회의 조화와 화합에도 크게 도움이 되어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사회발전 또한 가능해 질 것이 아닌가.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여러 과제들에 대하여 `숙의민주주의`의 사회적 토론 모델이 폭넓게 적용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이번 공론화과정에 참여하였던 모든 구성원들의 수고와 노력에 감사드리는 마음이며, 앞으로 참여하게 될 모든 이들도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잘 개진할 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대변하여 그 자리에 임하였음을 명심하여 `민주주의`의 본래 취지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대하여 본다.정치가 생물이라지만, 우리 사회도 살아있는 게 분명하다. 우리 사회의 성숙과 진정한 발전을 위하여 시민의 관심과 참여의 폭을 넓혀가야 한다. 숙의민주주의는 그 방법의 하나인 것이다.

2017-10-26

실력유감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우리 사회에는 가끔씩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절대로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어야 하는 일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도 이제는 `가끔씩`이 아니라 제법 `흔하게` 발생하는 걸 보면, 우리 사회가 갈 데까지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너지곤 한다. 수개월 전, 지금은 구속되어 법정의 심판을 받고 있는 최여인의 따님께서 `돈도 실력이다`라고 일갈하였을 적에 우리는 모두 분노하였다. 그 생각은 정상적이고 공정하여야 할 대학입시의 관문을 `돈`으로 뚫고 나아간 일이 무엇이 잘못 되었느냐는 식으로 읽혀져서 국민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였던 것이다. 오늘 대학을 다니거나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는 안 그래도 이 사회는 이미 `취업지옥`이다. 수백대 일의 경쟁은 이제 어디에나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으며, 실력을 닦은 끝에 사람 몫이라도 한번 해 보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낙타의 바늘귀` 같은 관문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소식은 `빽도 실력이다`라는 것인가.강원랜드와 우리은행. 듣기만 해도 취업준비생들에게는 그럴듯한 이름이 아니었던가. 꿈의 직장까지는 몰라도 이들 업체들이 사람을 뽑는다고 하면 아마도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모였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들이 가려 뽑았다는 신입직원들을 다시 살펴보니 누군가 힘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이 청탁한 결과라는 것이 아닌가. 우리 젊은이들은 해도 해도 펼쳐지지 않는 `취업의 꿈`에 시달리며 날밤을 새운다. 이들 청년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들이 쌓은 실력은 도무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사회는 이 일을 놓고 어떻게 할 것인가.먼저, 그렇게 뽑혀 비교적 쉽게 일자리를 잡았을 그 청년들에게 한번 물어 보기로 하자. 지금도 당신은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가. 당신들 탓에 기회를 빼앗긴 수많은 다른 청년들에게 과연 당신은 `빽도 실력이다`라고 우겨댈 작정인가. 당신의 배경이 얼마나 멋진 것이었든, 그것이 정말로 당신 자신이 갈고닦은 결과인가. 이를 당신의 실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당신과 당신을 도와준 그 분은 이제도 당신들이 저지른 일이 정당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평생, 당신이 빼앗아간 그 누구의 소중한 꿈을 무거운 짐으로 여기며 살아야 할 터이다.이 소식을 접한 전국의 취업준비생 여러분에게도 한마디 건네기로 하자. 저들이 저렇듯 불의와 부정의로 이 사회를 멍들이고 있는 동안, 미안하지만 당신은 그래도 `실력`을 쌓아가도록 하자. 옳지 않은 일과 부도덕한 소위는 반드시 드러나 평가받게 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이 사회가 조금씩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결국 이념의 문제라기 보다는 상식의 문제였다는 것이 밝혀질 수 있도록 당신은 오늘 당신의 진짜 `실력`을 길러 내기로 하자. 나아가는 길이 험할수록 그 끝에 얻어낼 열매에서 느낄 행복과 환희가 눈부실 것임을 믿기로 하자.이 일을 들추어내 알려준 이들의 노력에도 감사하지만, 이런 일은 드러내는 것으로만 그쳐서는 안 될 것으로 보인다. 그저 놓아두었으면 이 사회에 끝없는 해악을 끼쳤을 이 정도 문제에는 시민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지도 구체적으로 짚어주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두운 소식에 무너지는 마음이지만, 오히려 다짐을 새롭게 하여 굽은 것을 바로 세우는 수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를 지적하는 국회의원의 질문에 `면목없다`고 답할 일이 아니라, 이를 어떻게 고쳐갈 것인지 반듯하게 고민하는 당신이 되었으면 한다.내일을 열심히 준비하는 젊은이들에게 공정하고 투명한 경쟁시스템을 제공하는 이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들 젊은이들이 그 다음 백년을 또 준비할 것이므로. 취업준비생 여러분, 그래도 파이팅!

2017-10-19

가을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맑고 높고 푸르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며 한결같이 드는 마음이다. 어떻게 자연은 이렇게나 싱싱하고 깨끗한 계절을 선사하는 것일까. 사람이 살아가는 일상에서 저만큼 상쾌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일까. 한 겨울 모진 눈보라를 견디고 새 봄에 싹을 틔운 자연이 한여름 무더위를 돌아 풍성한 결실을 거두게 하는 계절에 하필 이토록 우아하고 감미로운 바람과 공기를 가져다 주는 것이다. 마치 모진 날들과 수많은 구비들을 견뎌 왔으니 이제는 그 수고와 노력에 상이라도 주는 듯 말이다. 그런데 자연은 그렇다 치고 사람은 과연 이같이 과분한 상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자연은 우리에게 이런 모습을 다시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마다 한 번씩 이 계절을 허락하는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높고 오늘보다 맑으며 앞으로는 늘 깨끗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우리 지역에 말도 많고 탈도 많다고 한다. 아니 딱히 이 지역 뿐 아니라 세상 어디라고 갈등과 분열의 소지가 없는 데가 그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이 어려운 문제를 놓고 다투는 모습을 보면, 늘 아슬아슬하고 불안불안하다. 저러다가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세상을 맞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엔 어찌해야하는 것일까. 저처럼 꽉 막힌 대화의 물꼬를 어떻게 틀어낼 것인가. 천혜의 계절 가을이 건네주는 힌트를 한번 열어 보기로 하자. 먼저, 높아야 한다. 지금보다 높은 수준의 대화와 담론이 만들어 져야 한다. 오늘 다투고 있는 자리에서 같은 주장만 반복하는 일은 나의 이익에만 함몰되게 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결국 성토가 되고 규탄이 되고 말아, 서로에게 한없는 상처를 안기면서 등을 돌리게 할 뿐이다. 서로가 합의할 수 있는 사안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지 먼저 살필 일이며, 나의 주장에서 양보할 구석은 또 없는지 들여다볼 일이다. 그래서, 대화와 토론의 물길이 높아져야 한다.둘째, 맑아야 한다. 투명해야 한다. 나의 주장 뒤에 혹 그 어떤 말 못할 욕심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 보아야 한다. 이 일이 우리 뿐 아니라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에게도 모두 득이 되고 덕이 되는 방법은 혹 없을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맑기 위하여는 나의 생각하고 주장하는 바에 대하여도 다시 헤아려 보는 아량과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이 무엇을 위하여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지도 겸허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오늘의 사익도 중요하지만 내일의 공익이 더 중요하다. 함께 잘 살아가는 지역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사심 없이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셋째, 하지만 가을은 짧다. 오래오래 누렸으면 싶은 계절이 어느 틈에 금방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이제 곧 혹독한 겨울이 다가올 것이고 우리는 힘든 계절을 맞을 채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담론과 대화도 끝없이 이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주장이 더 많이 반영되면 더없이 좋겠지만, 함께 나누고 결정하여 진행할 일이라면 적정한 수준에서 생각을 모으고 합의를 도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갈등의 골짜기를 하염없이 파헤칠 일이 아니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하여 결론을 얼른 만들어 가야 한다. 비난과 비방으로 속절없이 날들을 허비할 일이 아니며, 하루라도 바삐 대화의 틀을 만들고 담론의 장을 열어야 한다.새 길을 닦고 통로를 만드는 일에 대화가 끊기고 소통이 어렵다는 건 그 자체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매우 구체적이며 기술적인 일이라서 대화가 어렵다는 주장도 납득하기 어렵다. 모든 일에는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 본질을 다시 살피고 지역의 미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생각을 새롭게 모아 원만한 해결방안을 찾아보았으면 한다. 모든 계절 가운데 빼어난 계절, 가을을 닮은 도시를 만들기 위하여.

2017-10-12

경청도시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경청(傾聽). 기울여 듣는다. 귀를 기울이고 자세를 기울이며 마음을 기울여 듣는 일을 경청이라 부른다. 우리에게 경청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는가. 도무지 선언이고 주장이며 물러설 수 없으며 양보할 수 없는 일만 수두룩해 보인다. 상대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의 처지를 돌아보아 귀담아 들으려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내 주장만 옳으며 상대는 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도 쉽게 풀어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충돌하니 구상과 계획이 다를 수 밖에. 하지만, 함께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견주며 서로에게 덕이 되는 만큼씩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공동체의 선을 만들어 내는 미덕을 어째서 우리는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서 나만 이야기하고 결론지어야 하며 남의 목소리는 수용할 수가 없어서 무시해야만 하는 것일까. 조금씩 덜 주장하고 조금씩 더 기울여 들어줄 수는 없는 것일까. 급기야 서로가 서로에게 의견을 전하려 해도 돌아선 골이 깊어진 나머지 아예 들으려 하지 않게 된다면, 그 다음 논의는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포항시의 동빈대교 건립구상과 관련하여 나날이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양상이다. 포항시는 행정력을 활용하여 얼른 결론을 짓고 추진하고자 하며, 주민들과 시민단체는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며 포항시의 재고를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포항시는 그동안 여러 행정단계를 정상적으로 밟아온 일이므로 시민들이 이제는 이해하고 수용해 주었으면 하고, 주민들과 시민단체는 본인들의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며 도시미관에 심대한 부작용이 예견되는 일이므로 보다 효과적인 구상과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양 측 모두에게 까닭이 있고 명분도 있다. 다만, 서로의 다른 의견이 적절히 나누어지지 못하고 조화롭게 어우러지지 못한 결과만 놓고 보면 갈등의 골짜기만 두드러진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이제는 절차상 최종 결정권이 경상북도로 넘어가 포항시와 주민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결론에 이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포항시가 섬겨야 하는 대상은 누구이며 주민들이 걱정해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포항시는 이제라도 공복(公僕)의 위치를 새롭게 하여 시민의 목소리를 기울여 듣는 경청의 지혜를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시민들은 오늘 나 자신의 이익과 권리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이 도시의 미래와 다음세대가 누릴 포항의 모습에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행정주체로서 포항시의 지위만 생각하다가 시민의 행복과 신뢰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라며, 주민들 자신의 오늘 누리는 권리만 주장하다가 도시의 미래를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이 일이 분초를 다투는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이므로, 지역이 오히려 화합과 소통의 미덕을 발휘하여 시민들과 포항시가 함께 머리를 맞대는 `시민포럼`을 만들어 운영해 보면 어떨까 싶다. 하지만,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서로를 향한 성토와 비난은 하지 않기로 하자. 상대를 신뢰하고 기대하는 기본을 모든 참가자들이 명심하기로 하고, 서로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여 만나기로 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을 다리 하나 놓는 일로 생각하기 보다, 이 도시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고 푸른 청사진을 함께 그려보는 기회로 삼으면 어떨 것인가. 이를 위하여 세대를 가로지르는 지역 주민들의 폭넓은 참여를 유도할 방법은 혹 없을 것인가. 지역의 역량은 결국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수려하고 풍성한 천혜의 자원을 지닌 우리 지역은 포항시와 시민들이 서로를 향한`경청의 덕`을 발휘하도록 토대를 마련할 때에 더욱 발전하고 융성하여 갈 것이다. 지역의 앞날은 지역의 지혜로 일구어 가는 `경청도시`가 되기로 하자. 이 나라의 또 하나 자랑이 되는 도시로 거듭나기 위하여.

2017-09-28

갈등은 기회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칡넝쿨과 등나무. 어떤 일이나 사람의 생각 또는 관계가 어지러이 얽혀있어 풀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이를 갈등이라 부른다. 칡넝쿨은 다른 식물을 왼쪽으로 꼬면서 감싸며 자라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꼬아 올라가기 때문에 이 칡과 등나무가 한 곳에서 함께 자라면서 사물을 꼬아 버리면 도저히 풀 수 없는 지경을 만들어 버리는 것을 보고, 이같은 상태를 갈등(葛藤)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우리 지역에도 여러 사안에서 갈등의 싹이 보이거나 갈등이 이미 불거져서 풀어내기 어려운 상태에 빠진 경우들이 더러 보인다. 갈등의 소지를 미연에 예견하여 방지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갈등의 골이 깊어진 나머지 당사자들 간에 소통의 어려움을 겪게 되고 관계가 틀어져 원만한 해결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는 것이다. 이들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들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또 사안의 당사자들은 이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갈등은 사실 도처에 존재한다. 지역사회는 물론, 회사든 학교든 사람이 함께 활동하는 공간에는 생각과 의견의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갈등은 오히려 `공동체의 조건`이라고 부를만큼 흔한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을 무조건 없어야 하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터부시하는 태도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갈등을 지혜롭게 이겨낸 공동체는 그 이전보다 오히려 더욱 성숙하고 든든한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모든 당사자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갈등을 보다 나은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기회의 통로로 기대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에 갈등의 실마리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둘째, 칡넝쿨과 등나무도 함께 자라기 시작하는 초반에 정리했다면 어렵지 않게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생기는 갈등 요소들도 이들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초반에 대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누구든 불편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퍼져 나갈 것이며, 그 불편한 마음이 공동체 일반에 퍼져나간 다음에는 수습이 어려운 국면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안의 당사자들은 상대의 생각과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이 모든 갈등의 골짜기 안에서 그 어떤 해결의 실타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지 찾아보는 지혜를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위기에는 언제나 타이밍이 관건인 것이다. 혹 실기하였다면, 이를 알아차린 순간이 가장 빠른 때라는 것을 명심하여 보다 적극적이며 전향적인 접근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셋째, 사안이 어려울수록 당사자들은 더욱 자주 만나야 한다. 소통이 어려워 지고 관계가 틀어지면서, 서로의 주장이 더욱 강하여 지는 반면 더 이상 한자리에서 생각과 의견을 나누는 기회를 만들기가 점점 더 어려워 질 것이다. 때로는 제삼자나 언론매체 등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수단을 통하여 의견을 전달하고 주장을 관철하려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욱 `직접` 자주 만나야 한다. 주장만 던지고 귀를 막으며 입을 닫아 버리면 더 이상 문제를 다룰 동력마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힘들수록 직접 만나는 용기를 내어야 하고 어려울수록 면대면으로 생각을 나누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칡넝쿨과 등나무의 줄거리들을 잘 관리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먹거리와 나무그늘을 제공하여 주는 게 아닌가. 지역사회가 가진 갈등의 요소들을 찬찬히 잘 들여다 보아, 사안의 당사자들 모두에게 덕이 되고 득이 되는 해결책을 찾아내는 지혜를 발휘하였으면 한다. 당장은 길이 보이지 않는 듯 하지만, 우리는 이미 수많은 난관과 과제들을 헤쳐오지 않았는가. 지역은 이들 갈등을 딛고 일어서 지역과 시민사회가 더욱 자라나고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지역은 좌절과 비난 속에 머물 수 없으며, 우리는 용기와 기대를 안고 일어서야 한다. 갈등은 기회이므로.

2017-09-21

과학과 종교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어쩌다 지구의 나이가 문제인 모양이다. 학교에서 과학시간에 배워온 대로 최소 수십 억년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과 일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신의 창조역사는 6천 년 정도일 것이라는 믿음이 충돌하는 것이다. 45억 년과 6천 년이라면, 서로 비교가 불가능한 길고긴 시간의 차이인 것이다. 이를 한 사람이 둘 다 과학으로 인정하면서 또 신앙으로 믿는다고 하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가설을 세우고 객관적 검증을 통하여 입증해 가는 과학의 눈을 신뢰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신에 대한 경외와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토대로 한 종교의 눈을 믿을 것인지 보통사람들에겐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과학이 설명하는 바를 믿고 주관적으로는 신앙적 이야기를 따른다고 해도 이를 함께 담는 이율배반은 견디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생각하는 힘과 이성의 능력을 발견하고 자각하면서 르네상스 문화운동이 유럽에서 14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 인간의 개성과 창의성이 존중되고 객관적 사고의 중요성이 일깨워져 과학의 발달로 이어지고 이후의 문명 발달에 지극히 큰 영향을 끼쳐왔다. 하지만, 인간 자신의 운명과 거대한 자연을 대하게 되면 여전히 피하기 어려운 수많은 질문들과 어려운 난관들 앞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이웃을 섬기며 선하게 살고자 하는 신앙적 태도도 떨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해 보면, 오늘을 산다고 하여 과학과 신앙을 함께 담는 사람의 모습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나이는 그래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일까.중용(中庸). 극단 혹은 충돌하는 결정을 대할 때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평상을 유지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과학으로 치우쳐 신앙을 비하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며, 종교에 치우쳐 객관을 경시한다면 그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과학으로 신앙을 재단할 수 없으며, 종교로 객관을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신앙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방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을 신앙적으로 설명할 길도 없는 것이다. 둘은 인간의 서로 다른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아우르며, 인간이 조화로운 인성을 만들어 가도록 돕는 것이다. 과학은 종교를 보다 넓게 이해하도록 노력할 일이며, 종교는 과학을 더욱 너그럽게 바라보아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도록 할 일이다. 서로의 자리를 나의 것으로 판단하고 결론지어,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어색한 충돌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혹시라도 과학이 종교를 과도하게 가벼이 대하였거나 종교가 과학을 비이성적으로 판단하였던 일이 있었다면, 다시 잘 생각하여 정리해 보았으면 한다. 과학이 해내야 할 분명한 역할이 있으며, 종교가 맡아야 할 소중한 영역이 있는 것이다.마침,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지 500년이라고 한다. 긴 시간 동안 개혁의 전통을 이어온 종교에 감사하는 마음이며, 끊임없이 객관적 사고의 틀을 만들어 오며 문명의 진전을 이끌어 온 과학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서로의 소임과 위치를 잘 가늠하면서, 중심을 잃지 않으며 평정을 유지하는 중용의 미덕이 발휘되기를 기대해 본다. 서로 다른 승부처에서 최고의 기량과 최선의 노력으로 사람들이 더욱 행복한 자리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우리 사회에는 끊이지 않는 진전을 이루기 위하여 과학이 필요하며, 인간의 마음 세계에 평화로움과 자애로움이 숨쉬듯 깃들게 하기 위하여 종교가 필요하다. 우리는 과학과 종교가 불필요한 마찰을 빚는 일이 불편하며, 이 사회와 모든 이들에게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안겨주는 당신들이 되었으면 한다. 지난 오백년 동안 지나온 것보다, 오늘 우리는 오히려 더욱 과학과 종교가 필요하므로.

2017-09-14

행동하는 개인이 세상 바꾼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발전과 성장을 거듭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어두운 그늘과 어려운 이웃들은 우리들 곁에 늘 존재하고 있다. 북한이 우리에게 드리우는 핵 위험의 그림자가 우리는 물론 한반도 주변의 정세마저 어지럽게 하고 있어 나라와 국민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대처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깊숙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멀스멀 벌어지는 힘들고 어려운 사건들 또한 소식을 접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매우 힘들게 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할 것인가는 거대담론의 공론화와 더불어 이 나라의 건강을 회복함에 있어 매우 긴급을 요하는 사회적 과제인 것이다.최근 학교 폭력 또는 십대 폭력이 그 하나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언론을 통하여 전해지는 그 내용들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어서, 동료 학우들을 향한 이 같은 폭력행태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면서도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제시하는 목소리가 그리 들리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언론이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소식들은 대개 이렇게 충격적이며 파괴적이거나 눈물과 한숨을 자아내는 기사들인 것이다. 이를 언론의 속성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언론의 역할이 `전달`에 그쳐야만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어둡고 힘든 뉴스들을 끊임없이 접한 시민들은 이 같은 소식들을 너무 흔하게 들었던 나머지 오히려 문제들에 대해 둔감해 지고 전해지는 이야기들에 오히려 등을 돌리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안전불감증`도 이런 현상의 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언론이 하는 일은 물론 소식을 전하는 일이다. 그렇게 여러 소식들에 대해서 알게 된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자유롭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하지만 언론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일만 하는 가운데 여러 사회문제들의 본질과 해결책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민의식을 충분히 일깨우지 못한다면 언론은 그 해야 할 역할을 절반 정도만 성취하는 것이 아닐까.최근에 미국 언론계에는 언론이 `해결책언론(Solutions Journalism)`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즉, 뉴스를 접하는 시민들이 소식들이 전하는 과제에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할까지 언론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뉴스가 전하는 갈등과 고통을 보여주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이들 상황과 문제들을 시민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반응하며 해결하는 방법까지도 궁리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이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안들에 반응하며 스스로 행동하게 하는 사회구조를 만들게 되면, 언론이 구현하고자 했던 민주주의 즉 `시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사회`에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문제가 복잡하고 그 해결책이 어려워 보일수록 언론의 역할이 크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들을 접하고 바라보는 시민들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언제까지 들려오는 소식들에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고 혀만 끌끌 찰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조금만 생각하면 곧 나의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이다. 시민들도 이제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들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사는 백성들이 돼야 한다. 그래서 보다 성숙한 시민사회, 민주사회를 시민들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그 누구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만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회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인식해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민들이 돼야 하는 것이다.십대 폭력도 북핵 문제도 이들 뉴스를 접하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 깊어지고 적절하게 반응할 때에야 조금씩 분명하게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내가 사는 세상을 어떻게 남들이 바꾸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2017-09-07

가을에 거는 기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가뭄과 폭염으로 시달렸던 여름이 드디어 물러가는지, 아침에 들이마시는 기운에 이미 가을의 맛이 배어있다. 분주함과 변화로 가득한 우리네 삶이지만, 계절이 바뀌어 가는 일은 참으로 신통하고 감사한 것이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이 한결같이 같은 모양으로 찾아오는 변화로부터 우리가 깨달을 바는 무엇일까. 더 나은 것을 향하여 바뀌어 가되, 바로 그 변화의 흐름 가운데 일정한 패턴을 찾아내고 유지해야 하는 일이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깨우침이 아닐까. 더 좋은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나아가는 향상심(向上心)을 가지면서도, 언제나 변하지 아니하며 지켜내는 중심 즉 항상심(恒常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자연은 우리에게 사계(四季)의 서로 다른 아름다움과 오밀조밀함을 보여주면서도 일정한 주기와 패턴을 어김없이 선사함으로 소리없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계절이 바뀌는 바로 이 때에 우리는 과연 향상과 항상을 조화롭게 유지하고 발휘하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원시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발전의 과정과 다양한 문명의 발현을 통하여 인류는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다. 그 모든 변화의 몸부림 속에는 아마도 사람이 `행복`하고자 하는 한결같은 지향점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향점의 목적지가 `개인`이었는지 아니면 `공동체`였었는지에 따라 오늘 우리의 모습이 과연 행복한 것일까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행복을 위하여 사는 삶이 있을 것이고, 함께 어울리며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공동체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어차피 사회적 동물이라면, 내가 행복해야 하는 만큼 사회도 행복하여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 `나`의 행복과 `우리`의 행복 가운데 적절한 조화점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향상과 항상의 또다른 균형을 추구하는 일이 아닐까.달걀값이 너무 떨어졌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이 살충제달걀 파동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 닭들이 더 많은 달걀을 낳아 더욱 효율적이며 보다 생산적인 경영을 하기 위하여 공장식 양계를 한 끝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양계업자들도 소비자들도 그리고 정부기관들도 어느 누구 하나 행복하지 못한 결과를 맞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지기 위하여 노력한 끝에 모두 불행해 졌다면,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역설(Paradox of civilization)`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이 어차피 모두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면,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공동체적 행복을 위한 항상심이 어떤 것들을 향해야 할 것인지 이제 우리는 생각해 볼 일인 것이다.전통적으로 기업경영의 목표가 `이윤의 창출`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사회와 공동체의 행복을 통한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경영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추격과 경쟁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는 그 효율경영과 가치경영 사이의 조화점을 적극적으로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소비자들도 이제는 값싸고 질높은 상품만 찾겠다는 `경제적 소비`로부터, 좋은 기업이 선한 뜻으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만들어 낸 상품을 구입하겠다는 `윤리적 소비`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아니 이미 소비자는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값이 떨어져도 달걀을 선뜻 구입하지 않고 있는 소비자들에게서 우리는 이미 가치경영과 윤리적 소비로 향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향상의 욕망으로 우리가 발전하여 간다면, 항상의 마음으로 우리는 중심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변하여 가는 것을 반기고 누리는 만큼,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한결같음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이 가을에 삼라만상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변하지 말아야 하는 우리의 덕스러움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기대하므로.

2017-08-31

지역의 내일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포항의 인구가 지난 몇 년 사이에 감소하여 52만 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지역의 위기로서 그 대책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인구가 더 줄어들면 중앙정부의 지원도 감소하게 되고 그에 따라 지역의 경제활동을 비롯한 역동성에 제동이 걸려 지역의 쇠퇴를 앞당길 악재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이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도시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포항시는 물론 지역의 구성원들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를 헤쳐감에 있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최근 중국 알리바바 그룹의 마윈(馬雲) 회장은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보통 우리는 문제에 봉착하면 주변에 같은 문제를 만나 해결하였던 경험을 가진 이들로부터 지혜를 구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를 벤치마킹(Benchmarking)이라 부르며 실제로 많은 경우에 좋은 참고가 되고 유효한 해결방안이 더러 도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유사한 경우에 봉착한 사람이 주변에 많다고 해도 그 문제의 성격이 모두에게 생소한 경우이거나 또는 누구도 그리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였던 경우라면 어찌할 것인가. 마윈 회장은 그래서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찾아내라는 것이다. 중국이 발전을 거듭해 오면서 그동안은 미국이 기준점이 되고 목표점이 되어 `추격과 복사`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 중국도 거의 맨 앞에 함께 서게 된 이상 벤치마킹 할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추격을 아예 생각도 하지 말 것이며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인구문제도 포항만 겪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전국의 거의 모든 도시들과 지역들이 함께 앓는 문제이며, 글로벌 환경을 둘러보아도 개발도상국 이상의 경제발전단계에 놓인 국가들이 태반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2013년 UN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선진개발국가들의 거의 절반이 인구증가정책에 골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인구문제야 말로 그 누구의 본을 찾아 따라가며 해결할 일이 아니라 우리 지역의 개성과 특장점을 살펴 우리만의 해결방안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포항은 다른 어느 지역도 가지지 못한 개성과 장점들을 여럿 가지고 있다.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천혜의 자연환경은 물론이며, 산업도시로서의 물적 경제적 경험이 풍부하고 우수한 대학들도 함께 담고 있어 인적 성장잠재력으로 보아도 남부럽지 않은 것이다. 철강도시로서 이미지도 이를 섣불리 벗으려 하기 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더하여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기간 지역에서 일하고 은퇴하는 분들과 그 가족들이 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유도하려는 정책은 매우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하여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에게 기회와 일자리를 지역에서 만들어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도 고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포항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도록 이끄는 것은 포항시만의 일이 아니다. 포항시는 물론 지역의 기업들과 시민단체, 그리고 대학들이 모두 지혜를 모아 방안을 도출하여야 한다. 인구대책마련을 위한 시민포럼이 지역에서 생겨나 시민들의 생각을 모으는 노력도 해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지역에 제법 살다가 떠난 이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하였을까 알아보는 일도 매우 의미있을 것이다.인구문제를 놓고 남을 따라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은 거의 의미가 없다. 포항이 가진 나은 점에 주목하고 부족한 점은 극복하면서 이미 포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지역을 떠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도록 다져가는 길이 우선인 것이다.우리 안에 행복이 있으면 밖으로 저절로 알려지게 되고 우리가 굳이 알리려 하지 않아도 남들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지역의 내일은 지역이 만들어야 한다.

2017-08-24

청년이 살아야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새 정부에게 정책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문제들 가운데 우선순위 첫 번째가 `일자리문제`라는데, 들려오는 뉴스는 아직 그리 시원하지 않다. 우리 사회의 실업자 중 6개월 이상 구직활동을 하였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장기백수`의 비중이 매우 높다고 한다. 최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이런 장기백수 상태의 실업자가 18만명에 이른다고 하며 이는 전체 실업자의 19%에 육박하는 숫자라는 것이다. 외환위기 당시 가장 심각했을 때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라고 한다. 물론, 나라의 전반적인 경기침체와 사회적 분위기 탓도 있겠으나,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함에 있어 수도권의 동향이나 중앙정부의 움직임에만 의존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역의 경제계와 정치권, 대학과 청년 본인들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분석하며 미래지향적으로 대안을 만들어 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전국적인 현상임에 틀림없으나, 같은 문제로 지역에도 고통받는 젊은이들이 존재한다면 지역은 당연히 문제의 한 가닥에라도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 지역의 상황에 맞는 대안이 찾아지고 진정한 지역의 발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지역이 배출하는 청년대학생들이 가진 실력과 지역의 기업들이 신입직원들에게 기대하는 능력이 서로 걸맞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이는 지역의 발전과정에서 산업구조와 기업형태면에서 특정부문에 치우진 성장을 기하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지역에 유치하는 기업군의 다변화를 기하여야 할 것이지만, 지역의 기존 기업들도 업무의 다양성과 전문화에 주목하고 글로벌 기업환경에 어울리는 업무환경을 만들어 간다면 이 같은 업무형태나 근무업종의 미스매치(mismatch)는 줄여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지역이 길러내는 청년인재를 지역의 기업들이 보다 자연스럽게 채용하기 위하여, 기업과 대학의 소통과 협력을 보다 강화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이 그들의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기간은 비단 졸업에 임박한 시기만은 아닌 것이다.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며 학창을 구가하는 내내 지역의 기업들에서 관심을 가지고 일자리를 제공한다면, 대학생들의 지역에 대한 인식과 애정이 살아날 것이며 기업은 기업대로 청춘의 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대학들은 `자유학기제` 등의 유연한 제도들을 마련하여 놓고 지역의 기업들과 교류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지역의 기업들이 대학생들에게 보다 너른 기회를 제공하면서 젊은 두뇌를 활용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지방에서 일자리를 아예 찾지 않는 것이다. 까닭을 물어보면, 지방에는 취업의 기회가 적을 뿐 아니라 문화적 역동성과 다양성이 수도권에 비하여 턱없이 못 미치므로 그들의 삶을 이어갈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는 지역 구성원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며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문화재단이나 청소년재단이 본래 목적에 맞게 지역의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며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기획을 끊임없이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중앙정부도 수도권 중심의 성장정책에서 과감히 벗어나 지역마다의 특성을 살리면서 사회, 경제, 문화적 분위기를 독특하게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정책적인 배려를 하여야 할 것이다. 지원방향도 대기업중심에서 중소기업배려로 새로운 지향성을 만들어 내어, 청년들이 작은 회사에서도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일자리문제는 더 이상 청와대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역에서 상상력과 집중력을 발휘하여 지역에는 `장기백수`가 없도록 만들어 보았으면 한다. 지역의 기업, 대학, 시민단체,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청년들 본인들이 모두 나서야 한다. 청년이 살아야 내일이 있으며, 지역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2017-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