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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경청도시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경청(傾聽). 기울여 듣는다. 귀를 기울이고 자세를 기울이며 마음을 기울여 듣는 일을 경청이라 부른다. 우리에게 경청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는가. 도무지 선언이고 주장이며 물러설 수 없으며 양보할 수 없는 일만 수두룩해 보인다. 상대의 심정을 헤아리고 그의 처지를 돌아보아 귀담아 들으려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다. 내 주장만 옳으며 상대는 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는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도 쉽게 풀어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의견이 충돌하니 구상과 계획이 다를 수 밖에. 하지만, 함께 마음을 나누고 생각을 견주며 서로에게 덕이 되는 만큼씩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공동체의 선을 만들어 내는 미덕을 어째서 우리는 발휘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서 나만 이야기하고 결론지어야 하며 남의 목소리는 수용할 수가 없어서 무시해야만 하는 것일까. 조금씩 덜 주장하고 조금씩 더 기울여 들어줄 수는 없는 것일까. 급기야 서로가 서로에게 의견을 전하려 해도 돌아선 골이 깊어진 나머지 아예 들으려 하지 않게 된다면, 그 다음 논의는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포항시의 동빈대교 건립구상과 관련하여 나날이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양상이다. 포항시는 행정력을 활용하여 얼른 결론을 짓고 추진하고자 하며, 주민들과 시민단체는 자신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며 포항시의 재고를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포항시는 그동안 여러 행정단계를 정상적으로 밟아온 일이므로 시민들이 이제는 이해하고 수용해 주었으면 하고, 주민들과 시민단체는 본인들의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끼치며 도시미관에 심대한 부작용이 예견되는 일이므로 보다 효과적인 구상과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양 측 모두에게 까닭이 있고 명분도 있다. 다만, 서로의 다른 의견이 적절히 나누어지지 못하고 조화롭게 어우러지지 못한 결과만 놓고 보면 갈등의 골짜기만 두드러진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이제는 절차상 최종 결정권이 경상북도로 넘어가 포항시와 주민들의 의견을 참고하여 결론에 이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문제의 본질은 무엇일까. 포항시가 섬겨야 하는 대상은 누구이며 주민들이 걱정해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포항시는 이제라도 공복(公僕)의 위치를 새롭게 하여 시민의 목소리를 기울여 듣는 경청의 지혜를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시민들은 오늘 나 자신의 이익과 권리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이 도시의 미래와 다음세대가 누릴 포항의 모습에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행정주체로서 포항시의 지위만 생각하다가 시민의 행복과 신뢰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길 바라며, 주민들 자신의 오늘 누리는 권리만 주장하다가 도시의 미래를 그르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이 일이 분초를 다투는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이므로, 지역이 오히려 화합과 소통의 미덕을 발휘하여 시민들과 포항시가 함께 머리를 맞대는 `시민포럼`을 만들어 운영해 보면 어떨까 싶다. 하지만, 중요한 조건이 하나 있다. 서로를 향한 성토와 비난은 하지 않기로 하자. 상대를 신뢰하고 기대하는 기본을 모든 참가자들이 명심하기로 하고, 서로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하여 만나기로 해야 할 것이다. 이 일을 다리 하나 놓는 일로 생각하기 보다, 이 도시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고 푸른 청사진을 함께 그려보는 기회로 삼으면 어떨 것인가. 이를 위하여 세대를 가로지르는 지역 주민들의 폭넓은 참여를 유도할 방법은 혹 없을 것인가. 지역의 역량은 결국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서 구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수려하고 풍성한 천혜의 자원을 지닌 우리 지역은 포항시와 시민들이 서로를 향한`경청의 덕`을 발휘하도록 토대를 마련할 때에 더욱 발전하고 융성하여 갈 것이다. 지역의 앞날은 지역의 지혜로 일구어 가는 `경청도시`가 되기로 하자. 이 나라의 또 하나 자랑이 되는 도시로 거듭나기 위하여.

2017-09-28

갈등은 기회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칡넝쿨과 등나무. 어떤 일이나 사람의 생각 또는 관계가 어지러이 얽혀있어 풀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이를 갈등이라 부른다. 칡넝쿨은 다른 식물을 왼쪽으로 꼬면서 감싸며 자라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돌아가며 꼬아 올라가기 때문에 이 칡과 등나무가 한 곳에서 함께 자라면서 사물을 꼬아 버리면 도저히 풀 수 없는 지경을 만들어 버리는 것을 보고, 이같은 상태를 갈등(葛藤)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우리 지역에도 여러 사안에서 갈등의 싹이 보이거나 갈등이 이미 불거져서 풀어내기 어려운 상태에 빠진 경우들이 더러 보인다. 갈등의 소지를 미연에 예견하여 방지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갈등의 골이 깊어진 나머지 당사자들 간에 소통의 어려움을 겪게 되고 관계가 틀어져 원만한 해결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는 것이다. 이들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들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또 사안의 당사자들은 이를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갈등은 사실 도처에 존재한다. 지역사회는 물론, 회사든 학교든 사람이 함께 활동하는 공간에는 생각과 의견의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갈등은 오히려 `공동체의 조건`이라고 부를만큼 흔한 것이다. 그러므로 갈등을 무조건 없어야 하는 것으로 치부하거나 터부시하는 태도도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갈등을 지혜롭게 이겨낸 공동체는 그 이전보다 오히려 더욱 성숙하고 든든한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모든 당사자들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갈등을 보다 나은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기회의 통로로 기대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에 갈등의 실마리도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둘째, 칡넝쿨과 등나무도 함께 자라기 시작하는 초반에 정리했다면 어렵지 않게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생기는 갈등 요소들도 이들이 인식되기 시작하는 초반에 대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이다. 누구든 불편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퍼져 나갈 것이며, 그 불편한 마음이 공동체 일반에 퍼져나간 다음에는 수습이 어려운 국면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사안의 당사자들은 상대의 생각과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이 모든 갈등의 골짜기 안에서 그 어떤 해결의 실타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지 찾아보는 지혜를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위기에는 언제나 타이밍이 관건인 것이다. 혹 실기하였다면, 이를 알아차린 순간이 가장 빠른 때라는 것을 명심하여 보다 적극적이며 전향적인 접근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셋째, 사안이 어려울수록 당사자들은 더욱 자주 만나야 한다. 소통이 어려워 지고 관계가 틀어지면서, 서로의 주장이 더욱 강하여 지는 반면 더 이상 한자리에서 생각과 의견을 나누는 기회를 만들기가 점점 더 어려워 질 것이다. 때로는 제삼자나 언론매체 등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수단을 통하여 의견을 전달하고 주장을 관철하려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욱 `직접` 자주 만나야 한다. 주장만 던지고 귀를 막으며 입을 닫아 버리면 더 이상 문제를 다룰 동력마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힘들수록 직접 만나는 용기를 내어야 하고 어려울수록 면대면으로 생각을 나누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칡넝쿨과 등나무의 줄거리들을 잘 관리하기만 하면, 우리에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먹거리와 나무그늘을 제공하여 주는 게 아닌가. 지역사회가 가진 갈등의 요소들을 찬찬히 잘 들여다 보아, 사안의 당사자들 모두에게 덕이 되고 득이 되는 해결책을 찾아내는 지혜를 발휘하였으면 한다. 당장은 길이 보이지 않는 듯 하지만, 우리는 이미 수많은 난관과 과제들을 헤쳐오지 않았는가. 지역은 이들 갈등을 딛고 일어서 지역과 시민사회가 더욱 자라나고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지역은 좌절과 비난 속에 머물 수 없으며, 우리는 용기와 기대를 안고 일어서야 한다. 갈등은 기회이므로.

2017-09-21

과학과 종교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어쩌다 지구의 나이가 문제인 모양이다. 학교에서 과학시간에 배워온 대로 최소 수십 억년은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과 일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신의 창조역사는 6천 년 정도일 것이라는 믿음이 충돌하는 것이다. 45억 년과 6천 년이라면, 서로 비교가 불가능한 길고긴 시간의 차이인 것이다. 이를 한 사람이 둘 다 과학으로 인정하면서 또 신앙으로 믿는다고 하니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가설을 세우고 객관적 검증을 통하여 입증해 가는 과학의 눈을 신뢰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신에 대한 경외와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토대로 한 종교의 눈을 믿을 것인지 보통사람들에겐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과학이 설명하는 바를 믿고 주관적으로는 신앙적 이야기를 따른다고 해도 이를 함께 담는 이율배반은 견디기가 힘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가진 생각하는 힘과 이성의 능력을 발견하고 자각하면서 르네상스 문화운동이 유럽에서 14세기 후반에 시작되었다. 인간의 개성과 창의성이 존중되고 객관적 사고의 중요성이 일깨워져 과학의 발달로 이어지고 이후의 문명 발달에 지극히 큰 영향을 끼쳐왔다. 하지만, 인간 자신의 운명과 거대한 자연을 대하게 되면 여전히 피하기 어려운 수많은 질문들과 어려운 난관들 앞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며 이웃을 섬기며 선하게 살고자 하는 신앙적 태도도 떨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해 보면, 오늘을 산다고 하여 과학과 신앙을 함께 담는 사람의 모습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나이는 그래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일까.중용(中庸). 극단 혹은 충돌하는 결정을 대할 때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평상을 유지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과학으로 치우쳐 신앙을 비하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며, 종교에 치우쳐 객관을 경시한다면 그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과학으로 신앙을 재단할 수 없으며, 종교로 객관을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신앙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방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을 신앙적으로 설명할 길도 없는 것이다. 둘은 인간의 서로 다른 부분을 다른 방식으로 아우르며, 인간이 조화로운 인성을 만들어 가도록 돕는 것이다. 과학은 종교를 보다 넓게 이해하도록 노력할 일이며, 종교는 과학을 더욱 너그럽게 바라보아 조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도록 할 일이다. 서로의 자리를 나의 것으로 판단하고 결론지어,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어색한 충돌은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동안 혹시라도 과학이 종교를 과도하게 가벼이 대하였거나 종교가 과학을 비이성적으로 판단하였던 일이 있었다면, 다시 잘 생각하여 정리해 보았으면 한다. 과학이 해내야 할 분명한 역할이 있으며, 종교가 맡아야 할 소중한 영역이 있는 것이다.마침,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지 500년이라고 한다. 긴 시간 동안 개혁의 전통을 이어온 종교에 감사하는 마음이며, 끊임없이 객관적 사고의 틀을 만들어 오며 문명의 진전을 이끌어 온 과학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서로의 소임과 위치를 잘 가늠하면서, 중심을 잃지 않으며 평정을 유지하는 중용의 미덕이 발휘되기를 기대해 본다. 서로 다른 승부처에서 최고의 기량과 최선의 노력으로 사람들이 더욱 행복한 자리에 이를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다.우리 사회에는 끊이지 않는 진전을 이루기 위하여 과학이 필요하며, 인간의 마음 세계에 평화로움과 자애로움이 숨쉬듯 깃들게 하기 위하여 종교가 필요하다. 우리는 과학과 종교가 불필요한 마찰을 빚는 일이 불편하며, 이 사회와 모든 이들에게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안겨주는 당신들이 되었으면 한다. 지난 오백년 동안 지나온 것보다, 오늘 우리는 오히려 더욱 과학과 종교가 필요하므로.

2017-09-14

행동하는 개인이 세상 바꾼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발전과 성장을 거듭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어두운 그늘과 어려운 이웃들은 우리들 곁에 늘 존재하고 있다. 북한이 우리에게 드리우는 핵 위험의 그림자가 우리는 물론 한반도 주변의 정세마저 어지럽게 하고 있어 나라와 국민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대처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깊숙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멀스멀 벌어지는 힘들고 어려운 사건들 또한 소식을 접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매우 힘들게 하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결할 것인가는 거대담론의 공론화와 더불어 이 나라의 건강을 회복함에 있어 매우 긴급을 요하는 사회적 과제인 것이다.최근 학교 폭력 또는 십대 폭력이 그 하나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언론을 통하여 전해지는 그 내용들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어서, 동료 학우들을 향한 이 같은 폭력행태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면서도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제시하는 목소리가 그리 들리지 않아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언론이 시민들에게 전달하는 소식들은 대개 이렇게 충격적이며 파괴적이거나 눈물과 한숨을 자아내는 기사들인 것이다. 이를 언론의 속성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 언론의 역할이 `전달`에 그쳐야만 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어둡고 힘든 뉴스들을 끊임없이 접한 시민들은 이 같은 소식들을 너무 흔하게 들었던 나머지 오히려 문제들에 대해 둔감해 지고 전해지는 이야기들에 오히려 등을 돌리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는 `안전불감증`도 이런 현상의 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언론이 하는 일은 물론 소식을 전하는 일이다. 그렇게 여러 소식들에 대해서 알게 된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을 자유롭게 그리고 만족스럽게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하지만 언론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일만 하는 가운데 여러 사회문제들의 본질과 해결책에 대하여 생각하는 시민의식을 충분히 일깨우지 못한다면 언론은 그 해야 할 역할을 절반 정도만 성취하는 것이 아닐까.최근에 미국 언론계에는 언론이 `해결책언론(Solutions Journalism)`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 즉, 뉴스를 접하는 시민들이 소식들이 전하는 과제에 어떻게 반응하여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할까지 언론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뉴스가 전하는 갈등과 고통을 보여주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이들 상황과 문제들을 시민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반응하며 해결하는 방법까지도 궁리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대중이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사안들에 반응하며 스스로 행동하게 하는 사회구조를 만들게 되면, 언론이 구현하고자 했던 민주주의 즉 `시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사회`에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이 아니겠냐는 것이다.문제가 복잡하고 그 해결책이 어려워 보일수록 언론의 역할이 크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들을 접하고 바라보는 시민들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언제까지 들려오는 소식들에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고 혀만 끌끌 찰 것인가.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조금만 생각하면 곧 나의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이다. 시민들도 이제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들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사는 백성들이 돼야 한다. 그래서 보다 성숙한 시민사회, 민주사회를 시민들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를 그 누구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만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회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인식해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민들이 돼야 하는 것이다.십대 폭력도 북핵 문제도 이들 뉴스를 접하는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 깊어지고 적절하게 반응할 때에야 조금씩 분명하게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내가 사는 세상을 어떻게 남들이 바꾸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2017-09-07

가을에 거는 기대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가뭄과 폭염으로 시달렸던 여름이 드디어 물러가는지, 아침에 들이마시는 기운에 이미 가을의 맛이 배어있다. 분주함과 변화로 가득한 우리네 삶이지만, 계절이 바뀌어 가는 일은 참으로 신통하고 감사한 것이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이 한결같이 같은 모양으로 찾아오는 변화로부터 우리가 깨달을 바는 무엇일까. 더 나은 것을 향하여 바뀌어 가되, 바로 그 변화의 흐름 가운데 일정한 패턴을 찾아내고 유지해야 하는 일이 또한 매우 중요하다는 깨우침이 아닐까. 더 좋은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나아가는 향상심(向上心)을 가지면서도, 언제나 변하지 아니하며 지켜내는 중심 즉 항상심(恒常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자연은 우리에게 사계(四季)의 서로 다른 아름다움과 오밀조밀함을 보여주면서도 일정한 주기와 패턴을 어김없이 선사함으로 소리없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계절이 바뀌는 바로 이 때에 우리는 과연 향상과 항상을 조화롭게 유지하고 발휘하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원시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발전의 과정과 다양한 문명의 발현을 통하여 인류는 끊임없이 변화하여 왔다. 그 모든 변화의 몸부림 속에는 아마도 사람이 `행복`하고자 하는 한결같은 지향점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향점의 목적지가 `개인`이었는지 아니면 `공동체`였었는지에 따라 오늘 우리의 모습이 과연 행복한 것일까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만의 행복을 위하여 사는 삶이 있을 것이고, 함께 어울리며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공동체가 있을 것이다. 인간이 어차피 사회적 동물이라면, 내가 행복해야 하는 만큼 사회도 행복하여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 `나`의 행복과 `우리`의 행복 가운데 적절한 조화점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향상과 항상의 또다른 균형을 추구하는 일이 아닐까.달걀값이 너무 떨어졌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이 살충제달걀 파동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다. 닭들이 더 많은 달걀을 낳아 더욱 효율적이며 보다 생산적인 경영을 하기 위하여 공장식 양계를 한 끝에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양계업자들도 소비자들도 그리고 정부기관들도 어느 누구 하나 행복하지 못한 결과를 맞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지기 위하여 노력한 끝에 모두 불행해 졌다면,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역설(Paradox of civilization)`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이 어차피 모두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면,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공동체적 행복을 위한 항상심이 어떤 것들을 향해야 할 것인지 이제 우리는 생각해 볼 일인 것이다.전통적으로 기업경영의 목표가 `이윤의 창출`이었다면, 이제 우리는 `사회와 공동체의 행복을 통한 기업의 가치`를 높이는 경영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추격과 경쟁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는 그 효율경영과 가치경영 사이의 조화점을 적극적으로 찾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소비자들도 이제는 값싸고 질높은 상품만 찾겠다는 `경제적 소비`로부터, 좋은 기업이 선한 뜻으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만들어 낸 상품을 구입하겠다는 `윤리적 소비`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아니 이미 소비자는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값이 떨어져도 달걀을 선뜻 구입하지 않고 있는 소비자들에게서 우리는 이미 가치경영과 윤리적 소비로 향하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는 것이다.향상의 욕망으로 우리가 발전하여 간다면, 항상의 마음으로 우리는 중심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변하여 가는 것을 반기고 누리는 만큼,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한결같음을 끊임없이 되새겨야 하는 것이다. 이 가을에 삼라만상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변하지 말아야 하는 우리의 덕스러움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를 기대하므로.

2017-08-31

지역의 내일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포항의 인구가 지난 몇 년 사이에 감소하여 52만 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지역의 위기로서 그 대책 마련이 시급해 보인다. 인구가 더 줄어들면 중앙정부의 지원도 감소하게 되고 그에 따라 지역의 경제활동을 비롯한 역동성에 제동이 걸려 지역의 쇠퇴를 앞당길 악재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이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도시의 활력을 회복하기 위해 포항시는 물론 지역의 구성원들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를 헤쳐감에 있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최근 중국 알리바바 그룹의 마윈(馬雲) 회장은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고 한다. 보통 우리는 문제에 봉착하면 주변에 같은 문제를 만나 해결하였던 경험을 가진 이들로부터 지혜를 구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를 벤치마킹(Benchmarking)이라 부르며 실제로 많은 경우에 좋은 참고가 되고 유효한 해결방안이 더러 도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유사한 경우에 봉착한 사람이 주변에 많다고 해도 그 문제의 성격이 모두에게 생소한 경우이거나 또는 누구도 그리 적절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였던 경우라면 어찌할 것인가. 마윈 회장은 그래서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찾아내라는 것이다. 중국이 발전을 거듭해 오면서 그동안은 미국이 기준점이 되고 목표점이 되어 `추격과 복사`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 중국도 거의 맨 앞에 함께 서게 된 이상 벤치마킹 할 대상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추격을 아예 생각도 하지 말 것이며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인구문제도 포항만 겪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전국의 거의 모든 도시들과 지역들이 함께 앓는 문제이며, 글로벌 환경을 둘러보아도 개발도상국 이상의 경제발전단계에 놓인 국가들이 태반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2013년 UN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선진개발국가들의 거의 절반이 인구증가정책에 골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인구문제야 말로 그 누구의 본을 찾아 따라가며 해결할 일이 아니라 우리 지역의 개성과 특장점을 살펴 우리만의 해결방안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포항은 다른 어느 지역도 가지지 못한 개성과 장점들을 여럿 가지고 있다. 산과 바다를 아우르는 천혜의 자연환경은 물론이며, 산업도시로서의 물적 경제적 경험이 풍부하고 우수한 대학들도 함께 담고 있어 인적 성장잠재력으로 보아도 남부럽지 않은 것이다. 철강도시로서 이미지도 이를 섣불리 벗으려 하기 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더하여 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랜 기간 지역에서 일하고 은퇴하는 분들과 그 가족들이 지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유도하려는 정책은 매우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더하여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에게 기회와 일자리를 지역에서 만들어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도 고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포항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이 가능하도록 이끄는 것은 포항시만의 일이 아니다. 포항시는 물론 지역의 기업들과 시민단체, 그리고 대학들이 모두 지혜를 모아 방안을 도출하여야 한다. 인구대책마련을 위한 시민포럼이 지역에서 생겨나 시민들의 생각을 모으는 노력도 해보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지역에 제법 살다가 떠난 이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하였을까 알아보는 일도 매우 의미있을 것이다.인구문제를 놓고 남을 따라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은 거의 의미가 없다. 포항이 가진 나은 점에 주목하고 부족한 점은 극복하면서 이미 포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지역을 떠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도록 다져가는 길이 우선인 것이다.우리 안에 행복이 있으면 밖으로 저절로 알려지게 되고 우리가 굳이 알리려 하지 않아도 남들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지역의 내일은 지역이 만들어야 한다.

2017-08-24

청년이 살아야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새 정부에게 정책적으로 해결하여야 할 문제들 가운데 우선순위 첫 번째가 `일자리문제`라는데, 들려오는 뉴스는 아직 그리 시원하지 않다. 우리 사회의 실업자 중 6개월 이상 구직활동을 하였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장기백수`의 비중이 매우 높다고 한다. 최근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이런 장기백수 상태의 실업자가 18만명에 이른다고 하며 이는 전체 실업자의 19%에 육박하는 숫자라는 것이다. 외환위기 당시 가장 심각했을 때와 거의 맞먹는 수준이라고 한다. 물론, 나라의 전반적인 경기침체와 사회적 분위기 탓도 있겠으나,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함에 있어 수도권의 동향이나 중앙정부의 움직임에만 의존하지 않았으면 한다. 지역의 경제계와 정치권, 대학과 청년 본인들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분석하며 미래지향적으로 대안을 만들어 내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전국적인 현상임에 틀림없으나, 같은 문제로 지역에도 고통받는 젊은이들이 존재한다면 지역은 당연히 문제의 한 가닥에라도 해결방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 지역의 상황에 맞는 대안이 찾아지고 진정한 지역의 발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지역이 배출하는 청년대학생들이 가진 실력과 지역의 기업들이 신입직원들에게 기대하는 능력이 서로 걸맞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이는 지역의 발전과정에서 산업구조와 기업형태면에서 특정부문에 치우진 성장을 기하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지역에 유치하는 기업군의 다변화를 기하여야 할 것이지만, 지역의 기존 기업들도 업무의 다양성과 전문화에 주목하고 글로벌 기업환경에 어울리는 업무환경을 만들어 간다면 이 같은 업무형태나 근무업종의 미스매치(mismatch)는 줄여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지역이 길러내는 청년인재를 지역의 기업들이 보다 자연스럽게 채용하기 위하여, 기업과 대학의 소통과 협력을 보다 강화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이 그들의 미래를 위하여 준비하는 기간은 비단 졸업에 임박한 시기만은 아닌 것이다. 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며 학창을 구가하는 내내 지역의 기업들에서 관심을 가지고 일자리를 제공한다면, 대학생들의 지역에 대한 인식과 애정이 살아날 것이며 기업은 기업대로 청춘의 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대학들은 `자유학기제` 등의 유연한 제도들을 마련하여 놓고 지역의 기업들과 교류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지역의 기업들이 대학생들에게 보다 너른 기회를 제공하면서 젊은 두뇌를 활용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지역에서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지방에서 일자리를 아예 찾지 않는 것이다. 까닭을 물어보면, 지방에는 취업의 기회가 적을 뿐 아니라 문화적 역동성과 다양성이 수도권에 비하여 턱없이 못 미치므로 그들의 삶을 이어갈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는 지역 구성원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며 특히 지방자치단체의 노력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다. 문화재단이나 청소년재단이 본래 목적에 맞게 지역의 문화를 풍성하게 만들며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기획을 끊임없이 개발하여야 할 것이다.중앙정부도 수도권 중심의 성장정책에서 과감히 벗어나 지역마다의 특성을 살리면서 사회, 경제, 문화적 분위기를 독특하게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정책적인 배려를 하여야 할 것이다. 지원방향도 대기업중심에서 중소기업배려로 새로운 지향성을 만들어 내어, 청년들이 작은 회사에서도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일자리문제는 더 이상 청와대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역에서 상상력과 집중력을 발휘하여 지역에는 `장기백수`가 없도록 만들어 보았으면 한다. 지역의 기업, 대학, 시민단체,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청년들 본인들이 모두 나서야 한다. 청년이 살아야 내일이 있으며, 지역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2017-08-17

청소년, 지역의 미래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UN은 오는 12일에 맞는 `국제 청소년의 날(International Youth Day 2017)`의 주제를 `평화를 만드는 청소년(Youth Building Peace)`으로 정하고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행사와 이벤트를 통하여 청소년들이 세계평화와 갈등해소에 주역이 될 것임을 확인하고 다짐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 하나 밖에 없는 지구를 물려받아 평화와 안정을 구현해 가는 일에 청소년들의 관심과 이해, 그리고 각오와 다짐이 함께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를 위해서도 이 나라 청소년들에게 보다 구체적으로 상황을 인식하게 하고 미래지향적으로 구상하고 계획하도록 이끄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어찌 하루를 특정해 그 날에만 마음을 쓸 일일까. 우리는 이 나라의 청소년들이 긴 안목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희망에 찬 앞날을 열어갈 뿐 아니라 사회적, 국가적으로도 소망과 결실이 가득한 내일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하자.첫째, 모든 담론과 계획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추상적인 구호와 한 낱의 외침으로는 그 어떤 실증적인 열매를 보기 어려운 것이다. 청소년들이 실제로 활용하며 토대로 삼아 꿈과 비전을 실현해 갈 구체적인 나침반과 로드맵이 제공돼야 하며 구체적인 시설과 기획이 마련돼야 한다. 행사와 캠페인만으로는 아무 것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구체성이 드러나는 실체가 보이는 `청소년정책`이 필요한 것이다.둘째, 청소년정책의 기획과 입안 과정에 있어 그 주인공인 청소년들이 알아야 하고 구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제 아무리 멋진 구상과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하여도 정작 주인공들이 이를 알지 못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일이 되는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청소년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그들의 꿈 속에는 어떤 소망들이 들어있는지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정책의 입안단계로부터 청소년들이 폭넓게 참여하며 기획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셋째, 청소년정책은 미래를 향한 기획인 것이다. 오늘 어느 누구의 실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내일을 바라보며 지극히 미래지향적인 구상을 해야 할 것이다. 십년이 아니라 백년을 내다보는 혜안을 모아야 할 것이며 지역 뿐아니라 이 나라와 글로벌 환경의 변화를 담아내는 기획을 해야 할 것이다.지면을 빌어 청소년 당사자들에게도 몇 가닥 당부를 드린다. 여러분이 이어 가야할 21세기에는 절망과 낙담만 있는 시간이 절대로 아닌 것이다. 할 일이 많은 시대이며 바꾸어야 할 구석으로 차고 넘치는 시간인 것이다. 주변으로부터 들리는 그 어떤 실패감과 좌절감을 안기는 소리에 희망을 꺾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은 여러분을 필요로 하는 문제가 널려 있는 곳이며,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바로 청소년 당신이 아닌가. 오히려 세상을 더 높게 더 넓게 보며 당신이 풀어낼 바로 그 과제를 찾아보기 바라는 것이다. 21세기는 당신의 시간이며 디지털 문명은 당신의 도구인 것이다.청소년의 날은 해마다 찾아올 것이다. 이 날을 맞아 평화를 만드는 청소년을 기대함과 동시에 풍요로움과 자유로움, 그리고 정의로움도 앞당기는 여러분 청소년들을 기대하는 것이다. 당신이 있는 바로 그 자리, 우선 이 지역에서 당신이 기여할 몫을 찾아보기로 하자. 그 곳에서 당신의 손으로 바꾸어 갈 숙제를 찾든지 만들어 보시라. 지역에서 닦은 실력이 밑거름이 되어 글로벌 환경에도 써먹을 그 날이 오고야 말 터이다.구체적이며 미래지향적인 청소년정책을 주인공 청소년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지역이 되고, 일년 365일을 청소년이 마음껏 숨쉬고 약동하는 지역이 돼 `청소년의 날`을 따로 챙기지 않아도 되는 지역이 돼 가기를 기대해 본다. 청소년은 우리 모두의 미래이므로.

2017-08-10

축제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포항국제불빛축제가 한여름의 열기를 가득 담아 지역을 뜨겁게 달군 끝에 막을 내렸다. 축제장에서 목격한 수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모습에는 기대와 소망이 가득했다. 해를 거듭하며 새로운 모습을 가지려 노력하는 지역의 축제를 바라보면서 시민들이 가졌을 것으로 여겨지는 생각 몇 가닥을 나누고자 한다. 축제를 표현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카니발(carnival)은 초기 기독교 전통 가운데 금식하고 절제하며 지내야 하는 사순절 직전에 보통 사람들이 신나게 먹고 마시며 즐기는 기간을 두었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교리와 전통에 따라 시민들이 사뭇 제한되고 억압된 분위기를 만나기 전에 보통 사람들이 자유롭고 해방된 분위기를 한껏 만끽할 수 있는 며칠 동안의 기간으로 삼은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축제의 주인은 시민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만나는 고단한 삶 가운데 이렇게 만나는 축제 기간은 근심과 시름을 씻어 내리는 한바탕 놀이마당이자 열정의 분출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평소에는 누리기 어려웠던 일탈과 파격이 허용되며 시민들의 상상력과 지역의 생동감을 회복하는 기간인 것이다. 그래서 축제가 지나간 후에는, 그렇게 다시 찾은 에너지를 일상에 기울이게 하여 우리의 날들이 새로운 활력을 찾도록 이끄는 것이 우리가 축제 마당을 여는 까닭일 것이다. 우리의 축제가 그런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지 한번 돌아볼 필요가 그래서 있는 것이다.축제는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높고 낮은 사람이 없으며 귀하고 덜 귀한 사람이 없다. 남자와 여자의 경계는 물론 노년과 청년을 가르는 일도 없어야 한다.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흠뻑 즐길 수 있는 마당이 펼쳐져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축제이벤트 가운데 진행되는 `내빈` 소개와 인사는 어딘가 생경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물론, 축제가 가능하기 위해 수고한 손길들과 노력들을 십분 이해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만, 축제의 순간에는 이를 즐기려 모인 시민들에게 축제의 본모습을 한시라도 당겨 선사하는 배려가 아쉬운 것이다.축제장에 놓인 의자들은 축제가 가져야 할 자연스러움과 자유분방함을 오히려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같은 모습으로 잔디밭이든 모래사장이든 삼삼오오 어우러지는 모습을 연출할 수는 없었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의자들이 놓인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 사이에 생기는 야릇한 이질감과 미묘한 분위기는 우리가 극복하여야 할 숙제인 것이다. 우리의 축제가 진정으로 모든 이들의 한마당이 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평소에는 덜 가졌거나 소외되었던 시민들이 축제 마당의 한 가운데로 초대되어 한껏 즐기는 모습을 만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이다.올해부터는 포항문화재단이 축제를 맡아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수고한 포항시와 축제위원회에도 감사한 마음이며, 새롭게 출범한 포항문화재단이 소기의 전문성을 돋보이게 하고 진정한 독립성을 확보해 해가 갈수록 의미있고 재미있는 축제를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한다. 시민들이 상상력을 발휘하고 숨겨진 기량들을 쏟아내어 시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축제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 축제를 통해 시민들의 활력이 회복될 뿐 아니라 지역의 자부심이 더욱 끌어올려지고 결속력이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되는 우리 지역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어딘가 예산의 낭비가 아닌지 하는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면서 오히려 다음 축제를 손꼽아 기다리게 되는 지역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축제를 멋지게 만들어 주신 모든 분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전하며 우리 지역이 축제를 통해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한층 풍요로워 질 것을 믿는다. 시민은 아직도 축제에 배가 고프다.

2017-08-03

허니문 대한민국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이제 여름절기를 모두 지나 가을이 멀지 않았다. 아직 뜨거운 늦여름 더위자락이 남았을 터이지만 계절이 바뀌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겨울, 뜨거운 열정과 분명한 소망을 담아 새로움을 향한 변화의 토대를 만들어 냈다. 보통 사람들이 만들어 낸 역사치고 이처럼 치열하였으나 또한 이처럼 비폭력적인 사건도 없었을 것이다. 지난 봄, 그 토대 위에 실제로 변화를 만들어 낼 그릇을 쓸 만해 보이도록 준비하였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지켜보며 이 나라에 실제로 변화다운 변화가 나타나는지 그래서 정말로 나라다운 나라에 살게 될 것인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누구는 이것을 `허니문(honeymoon)`이라고 부른다던가. 막 사랑의 단잠으로부터 결혼을 이루어낸 새 부부가 꿀처럼 달콤한 꿈을 꾸며 지내는 처음 몇 달. 바로 그런 신랑신부처럼, 우리는 과연 새 술이 새 부대에 담겨질 것인지 한껏 기대하면서 지내는 이즈음인 것이다. 그런데 허니문이 과연 꿀처럼 달디단 시간이기는 해도, 자칫 그리 길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도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 허니문, 밀월(蜜月)인 것이다. 한 달, 아니 그래봤자 몇 달. 달은 차고나면 반드시 기우는 법. 요즘은 신혼여행을 아예 깨버리고 헤어지는 젊은 부부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뜨거운 사랑과 열정 뿐 아니라 치밀한 준비와 노력이 함께 할 때에야 성공적인 결혼이 가능할 것임을 저 허니문은 소설 속의 복선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우리는 어떠한가. 이 나라는 오늘 과연 또 한번의 허니문을 잘 지나가고 있는가. 이미 몇 번의 좋은 기회들을 덧없이 흘려보낸 기억이 생생한 우리 국민들은 지금 지나고 있는 이 허니문이 우리를 성공적인 결혼에 이르게 할 것인지 사뭇 궁금해지는 것이다. 힘을 모아주며 응원하고 격려하는 사람들이 잘 해주길 바라지만, 우리 시민들 각자는 지켜보면서 준비를 잘 하고 있는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지나갈 이 허니문의 끝자락에는 행복한 결혼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아슬아슬한 개봉박두의 심정인 것이다.최근의 일들 몇 가지만 짚어보자. 우선 저 최저임금 행진. 일단 모든 대선주자들의 공약이었음을 기억한다 하더라도, 우선 일 년쯤 해보고 평가해 보자는 대통령의 표현에는 그리 후한 믿음이 실리지 않는다. 경제적 실익은 고사하고 실패가 확인된다면 그 때는 어찌할 것인지 보다 더욱 면밀하게 분석하여야 하지 않았을까.교육을 맡은 이들에게는 특수목적고와 자율형사립고 등 기존 시스템을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이다. 생각들을 모으고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 가는 일에 우리는 아직도 턱없이 못미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부분인 것이다. 원자력발전에 대한 평가와 분석, 그리고 군복무기간에 대한 기준와 결정에 있어서도 사회적 담론과 합의를 만들어 내는 데에 어딘가 서툰 솜씨가 엿보이는 것이다.서툴고 어설픈 솜씨와 진행에 우리 국민은 어떻게 적절하게 반응하고 참여하며 이를 바로잡아 갈 것인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정부는 정부대로 국민의 목소리를 더욱 폭넓게 들어야 하며 최종결정을 만들어 가는 길을 보다 치밀하게 닦을 일이다. 결정을 먼저 하고나서 담론을 형성해 가는 일은 앞뒤가 바뀐 느낌이다.허니문. 이제 곧 반드시 끝나게 될 밀월의 끝자락에 좋은 결혼생활이 기다리고 있도록 지금 우리 모두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국민이 지금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분명히 보아야 한다. 한번 지나고 나면 더는 되돌리기 매우 힘들 것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지난 겨울과 봄, 그리고 바로 이 여름에도 역사는 국민이 만드는 것이다.

2017-07-27

청소년재단에 바란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한국의 젊은세대는 그들의 미래에 관하여 그리 낙관적이지 못하여 부모세대보다 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한다는 것이다. 한 회계법인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80년에서 2000년 사이에 태어난 27개국의 밀레니엄 세대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경제낙관지수가 평균 11점이었던 데 비하여 한국의 젊은이들은 겨우 1이었다고 하며 이는 27개국 가운데 20위라는 것이다. 즉, 오늘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그들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하여 사뭇 비관적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해 가려면 기성세대가 행복해 지는 것이 중요한 만큼, 다음 세대 즉 청년과 청소년이 행복해야 한다. 그들의 미래를 기대 가운데 준비하며 꿈과 희망을 그려갈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미래가 있는 공동체`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 조사결과는 그와는 반대로 보이는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우리가 무엇을 하면, 이 땅의 청소년들이 꿈을 회복하고 미래를 기대하며 오늘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지역에서 `청소년재단`을 만들어 보고자 하는 담론이 있다고 한다. 청소년들이 `미래의 주인`으로서 제 자리를 보게 하여 그들의 어깨에 드높은 긍지와 든든한 자신감을 실어주고 지역의 희망으로 자라나게 한다는 기본 취지에는 어느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칫 이같이 좋은 생각을 가지고 태어나는 청소년재단이 본연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생각의 가닥들을 짚어보고 싶다.첫째, 청소년재단은 청소년을 위한 재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소리 같지만, 타 지역의 유사한 단체들이 청소년재단을 통하여 어른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일들이 더러 있는 것을 볼 때에 우리가 `청소년재단`을 시작하면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를 정돈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청소년의, 청소년에 의한,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재단이 되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태동기를 거치며 본 궤도에 오르기까지 준비과정을 통하여 어른들의 관심과 기획이 필요할 것이다. 그 준비기간을 가급적 짧게 하고 가능한 대로 청소년 본인들의 참여와 구상이 재단을 이끌어 가는 데에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야 할 것이다.둘째, 타 지역의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고 글로벌 트렌드를 참고하면서 우리 지역의 특성에 맞는 청소년재단을 만들어 내어야 할 것이다. 청소년, 즉 다음세대를 역동적으로 길러내는 일은 모든 지역들의 관심사일 것이다. 이들 지역의 청소년재단들이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프로그램들을 적극 참고하여야 할 것이며 세계 어느 지역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청소년 개발과 육성이 구현될 수 있도록 할 일이다.셋째, 지역의 청소년정책이 주민들을 위한 정주여건 개선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이 청소년이었을 시절에만 지역에 머무르다가 성인이 되어 다른 지역을 향하여 떠나가는 일을 최소로 하는 일에 청소년재단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시민과 청소년을 위한 정주여건이 사회, 경제, 문화 어느 면에서도 타지역에 뒤지지 않도록 하는 일은 청소년정책 뿐 아니라 지역문화와 지역경제의 활성화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지역사회 그리고 지역의 청소년 관련 단체들과의 소통에도 관심을 기울이며 꾸준히 협력적 파트너십을 만들어 간다면, 지역의 청소년들이 지역의 새로운 모습에 이끌리어 청소년재단이 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게 될 것이다. 청소년재단은 청소년에게 새로운 기회와 끝없는 가능성을 만들어 주는 텃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지역의 청소년재단이 이같은 성과를 거두게 되면, 지역은 `청소년도시`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며 청소년들은 또 하나 새로운 희망을 보게 될 것이다. 지역의 미래는 청소년이 열어가야 하는 것이다.

2017-07-20

대추가 익어갑니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혼사를 막 치르고 이제는 우리집 식구임을 새삼 확인하는 폐백의 자리에서 시부모는 새 며느리의 치마폭에 대추와 밤을 던져주며 아들딸 많이 낳고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기원한다. 하필 왜 대추와 밤이었을까. 정석주 시인은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고 하지 않았는가. 한 알의 대추가 태풍과 천둥과 번개로 상징되는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고 겪으면서 끝내 이기고 견뎌내어 붉디붉은 빛깔을 선사하듯이, 새색시와 새신랑도 바로 그런 삶을 살아내기를 기원하면서 한 줌 대추를 던져주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태풍과 천둥과 번개가 찾아오지 않는 삶이 어디 있을까. 어려움과 시련이 없는 삶을 살아내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 것인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이의 살아가는 길 위에는 시련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침, 태풍과 천둥과 번개는 주로 여름날에 만나는 손님들이 아닌가. 계절 가운데 여름은 특별히 `만들어 내는` 몇 달인 것이다. 풍요함을 빚어내는 일을 하느라 여름은 삼라만상에 태풍과 천둥과 번개를 안겨주는 것이다. 시련과 어려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면, 이들을 차라리 지혜롭게 견디고 슬기롭게 이겨내어 보다 나은 결실이 가능하도록 삶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이 여름, 장마와 무더위가 우리에게 흐르는 땀과 지친 마음을 가져다주는 일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우쳐야 할 것인가. 지나가야 할 수많은 어려움들 가운데 이같은 모습으로 찾아온 태풍과 천둥과 번개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할 것인가. 오늘 우리가 가진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나면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인가를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 청와대가 정부조직 구성과 추경예산 문제로 어려움 투성이다. 정치권이 거짓 선거전의 후폭풍을 만나 수습에 두려움과 걱정이 한가득이다. 관세청과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들은 물론 유수한 대표기업들도 부정과 비리로 얼룩졌던 과거가 드러나면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이들이 가진 문제들을 어떻게 이겨내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해 갈 것인지 모두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대추는 또한 몸을 따뜻하게 하며 심신을 젊게 해 준다고 한다. 대추에는 특별한 약성보다는 조화와 영양의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시련을 이겨낼 뿐 아니라 그런 결과 주변까지 맑고 밝게 하며 따뜻한 화합의 기운마저 보듬어 내라는 의미로 새색시는 대추를 한 아름 받아들었던 것이다. 태풍과 천둥과 번개를 이겨낼 뿐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빼어난 빛깔로 변화해 가는 모습은 대추나무에 달린 열매에서 관찰도 가능하지 않을까.청와대와 정치권도, 국가기관들과 재벌기업들도 이 여름이 몰고 온 시련과 어려움으로부터 깨우칠 일이다. 견디고 이겨낼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그 자리에서 사라져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국민들은 더 이상 당신들이 말하는 대로만 듣지 않는다. 당신들의 모습을 어쩌면 당신 자신들보다 더욱 선명하게 보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속아줄 어리석은 국민이 이제는 없다. 밥하는 동네 아줌마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멍한 시골 노인네도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대추 한 알에서 태풍과 천둥과 번개를 찾아내었던 시인은 같은 시의 마지막 줄을 `대추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로 맺고 있다. 과연 세상은 시련과 어려움으로 가득한 곳이 아닌가. 그 같은 세상에 살아가도록 던져진 인생은 차라리 복받은 것이 아닐까. 이처럼 아픔과 고난이 가득한 세상을 한 가닥 한 가닥 바꾸어 가는 일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당신은 어떤 대추를 거둘 것인가.

2017-07-13

장마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그동안 목이 타도록 바라던 빗줄기가 시원하다. 청청한 초록이 싱싱한 기운을 흠뻑 들이킨다. 신기하게도 장마는 한반도를 오르내리며 나름 골고루 물줄기를 대면서 오랜 가뭄에 쌓인 간절함을 거센 빗줄기로 씻어 내린다. 또 하나 신통한 것은 장마가 지나간 자리에는 백발백중 폭염이 찾아오는 것이다. 물씬 적신 대지를 익히기라도 하듯이 뜨거운 햇발이 쏟아져 내린다. 정성으로 심은 곡식들이 장마 뒤 폭염 속에 푹푹 익어가는 것이다. 장마를 통해 논밭의 농작물이든 들판의 잡초든 쑥쑥 자라는 것을 보고 옛 사람들은 `장마에는 돌도 큰다`고 하였다. 아무렴 돌이 자라겠는가 싶지만 이렇게, 자연은 소리없이 인간을 돕는다.농작물이 장마를 거치며 바라던 대로 풍성한 결실을 내려면, 장마 전에 여러 가닥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장마를 홍수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려면 치수에도 미리 손을 써야 할 것이다. 이처럼 기다리던 장마가 온다고 해서 저절로 모든 것이 좋아지는 것이 아닌 것은, 인간에게 장마를 대비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려는 것일까. 자연이 도울 테니까, 사람은 준비하라는 소리가 거의 들리는 것이다.윤흥길의 소설 `장마`는 마침 이즈음에 맞았던 한국전쟁의 모습을 여러 갈래로 그리고 있다. 준비없이 맞았던 민족의 비극이어서 그랬을까, 작가는 글 속에서 어둡고 지겨운 어려움으로 다가온 전쟁을 마침 함께 찾아왔을 긴긴 장마 빗줄기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삶의 어려움이 지나가면서 장마가 그친다는 복선에는 작가가 장마를 바라보는 시선도 보이는 것이다. 기다림의 소망이 기대만큼 열매를 거두려면, 장마가 오기 전에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그려지는 것이다. 혹 미리 준비하지 못하였다면 장마가 지나는 동안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그동안 이 나라가 겪어온 경험과 좌절을 통하여 이제는 한번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보겠다는 간절함이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 아닐까. 수개월을 지나며 밝혔던 촛불을 그래서 누구나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가뭄을 지나며 지녔던 목마름처럼 촛불을 지나며 가졌던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장마로 다가온 빗줄기를 떠내려만 가도록 버려두지 않아야 하듯이, 희망으로 다가온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기회도 절대로 헛되이 흘려 보내서는 안 될 것이다. 장마가 모든 곳에 골고루 찾아오듯이, 희망도 국민 모두에게 차별없이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만 했으면, 이제는 좌우로 갈라 세우는 일이 그리 의미없다는 것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념이란 결국, 더 나은 내일을 만나기 위한 지향성과 방법론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그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은 더욱 나라다운 나라를 당기기 위한 다른 모습의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좌우로 갈라서서 생각없이 손가락질만 퍼부을 일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마음의 가닥들을 모아가면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반목과 비난으로만 아까운 날들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싶다. 다가온 장마가 뒤이을 폭염 속에 온갖 과실을 맺는 것처럼, 찾아낸 희망이 모든 이들의 열정과 함께 진정한 나라다움을 일구어 내도록 해야 할 것이다.기다림이 장마로 이어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간절함이 희망으로 이어진 것이 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장마가 결실을 이루듯이 희망이 나라다움을 찾아내기를 바란다. 장마 후 결실을 위해 무더위가 찾아오듯이, 희망과 함께 나라다움을 건져 올리기 위해서는 열정으로 가득한 담론과 비평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목표가 `나라다움`이었음을 잊지만 않는다면, 차근차근 나아가는 일이야 거뜬히 이룰 것이다.장마를 홍수로 보내지 말 일이며, 희망을 다툼으로 까먹지 말 일이다. 기다리던 비가 내린다. 기다렸던 희망이 찾아왔다.

2017-07-06

결과, 경쟁, 이 나라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옛 말이 있었다. 서울을 가는 게 목표라면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좋다는 뜻이었을까. 도달해야 할 결과를 위해서라면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묻지 않고 인정하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과정이 혹 정당하지 않더라도 뜻하는 바는 무조건 이루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정말 그럴까.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선거에 나섰던 정당에서 상대 후보의 흠결을 조작하여 선거운동을 진행하였던 일이 드러났다고 한다. 이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선거에 나선 이가 가진 목표는 물론 당선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이라 해도, 그 과정에 이 정도의 거짓과 조작이 자행되고 또 작동된다면 이 나라 민주주의에 우리는 희망을 걸 수 있을까.결과지상주의.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결과로만 이야기하자는 태도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숨가쁘게 살아 오느라 목표에만 집착하였던 지난 날을 이제는 찬찬히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우리들 뿐 아니라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이제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것인지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결과가 아무리 좋아 보인다 한들 과정이 정당하지 않다면 부끄러워할 줄도 아는 인성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결과지상주의를 삶의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과정에 진정과 정직을 담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정직하여 나는 혹 손해를 보더라도 누구에게라도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함께 살아가는 성실`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경쟁. 그것도 무한경쟁.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 내기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경쟁의 의미를 되새기곤 한다. 남보다 더 잘 살기 위하여, 누구에게도 지지 않기 위하여 긴장하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남을 이기면 나는 행복하여 지는 것일까. 경쟁한다는 것이 과연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이겨내야만 하는 일일까. 빌게이츠(Bill Gates)는 `나는 남들이 아닌 나 자신과 끊임없이 경쟁하며 산다. 쉬지 않고 나를 바꾸어 가는 일에 집중한다`고 했다. 정말 그런 것이 아닐까. 남들을 이겨내는 일에 매달리기 보다, 날마다 나를 이겨내 어제보다 나은 나 자신을 만들어 가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경쟁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다른 정당을 밟고 올라서기 위하여 증거를 조작하기 보다, 자신의 정당이 가진 정책들이 국민의 마음을 끌어당기도록 했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한없이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말았지만, 차리리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나라가 보다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하여 새롭게 바뀌어 갈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결과지상주의를 이제는 벗고 과정에도 진정과 정직을 심는 오늘이 되었으면 한다. 남들을 경쟁의 목표로 삼아 이겨내려 하기보다, 나 자신을 진정한 경쟁 상대로 알아 부단히 새롭게 나아가는 첫 날들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이번 일은 철저하게 살펴야 한다.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지 그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가려 국민 앞에 소상히 밝혀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 정치가 거짓과 위선의 굴레를 떨쳐내는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정치뿐 아니라 경제와 문화, 교육과 사회 전반에 뿌리깊게 박혀 있는 결과지상주의의 폐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결과가 소중한 만큼, 과정도 정당하도록 우리 모두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저 정당만 부끄럽고 말 일이 아니라, 온 나라가 함께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각자에게 물어보았으면 한다. 목표를 위하여 뛰는 당신의 그 과정을 다른 사람들도 인정할 것인지. 오늘 내가 이겨내야 할 사람은 과연 누구인지.

2017-06-29

토론과 협상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 토론이란 무엇일까. 일정한 논제를 가운데 두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차이를 발견하며 그 간극을 좁혀 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 어떻게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으며 인간이 기계가 아닌 바에야 어떻게 모두 같은 마음일 수 있을까. 이처럼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조화롭게 어울리게 하여 덕스럽게 어우러지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면 토론이 필수인 것이다. 당신과 나의 생각을 견주며 조율하여 일정 수준의 합의를 만들어 가면서 사회의 시스템이 적절하게 작동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민주사회 리더십의 기본 중의 기본인 것이다. 그런데 국민들이 보기에 그 기본이 불안하고 그 바탕이 턱없이 허술해 보인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우리 사회가 토론에 약하다는 것을 이야기할라 치면 늘 우리가 받아온 `교육`을 탓하곤 한다. 주입식 교육으로 선생은 말하고 학생은 듣기만 하는 교육방식에 문제가 있다. 주제가 무엇이 되었든 학생은 그저 읽고 들어 담기만 할 뿐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인식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은 바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적 가치를 구현함에 있어 토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절감한다면 우리 교육은 어째서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 이제라도 우리는 교육의 현장에서 이를 어떻게 바꾸어 갈 것인지 먼저 고민하여야 한다.둘째, 토론에는 늘 상대가 있다. 내 생각이 옳은 만큼 상대도 분명 그가 옳다고 생각하는 진정성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는 데에 늘 인색하지 않은가. 상대의 생각을 잘 새겨 타당한 경우에는 나의 생각도 바꿀 준비와 용기가 있어야 할 터이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음을 전제하고 하는 토론은 이미 토론이 아닌 것이다. 서로 조절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토론은 시작부터 어려운 것이다. 상대의 의견에 `비판`적인 태도로 견주어 보는 일이 분명 필요하지만, 옳은 생각에는 손을 들어 주어 내 생각을 바꾸어 가는 `타협`의 태도야말로 토론에 없어서는 안 될 덕목인 것이다. 우리는 이를 변절이나 굴복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반성할 부분인 것이다.셋째, 토론의 생각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사안인 것이다. 우리는 종종 사람과 사안을 혼동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정인사 또는 특정집단이 가지고 오는 생각거리는 그 내용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불문하고 모두 틀렸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 사안에 대한 대화와 협상을 어렵게만 하는 편견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다루어야 할 주제에 관하여 상대도 나름 해결방안을 가지고 나아오는 것이므로, 상대는 그 주제에 관한 한 사실상 나의 파트너인 셈이다. 사람을 이겨야 할 적수로 볼 것이 아니라, 사안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삼아 열심히 마음을 모아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사람과 사안을 잘 구분하여 사람과의 관계는 긍정적으로 살려내면서 사안에는 분석적이면서 비판적이어야 할 것이다.`이 나라를 살려내기 위하여 우리는 서로를 향해 윽박지르며 고함칠 것이 아니라, 시민의 건전한 토론을 더욱 키워가야 한다.` 미국 언론인 한 사람의 고백이라고 한다. 우리가 듣기에 저들 나라에는 토론문화가 자리잡혀 있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아직 저런 고백이 있다고 하면 진정한 토론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보다 나은 토론과 성숙한 민주주의를 향하여 우리는 누구나 `공사중`인 셈이다. 이제 그 지향점을 분명히 보게 된 이상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더는 후퇴하지 않도록 다시는 돌아가지 않도록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하며 나라의 리더쉽은 각성하여야 한다. 서로 물고 뜯을 일이 아니라, 나라를 살려야 한다.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2017-06-22

다음 세대가 살아야 한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뉴스가 어둡다. 대학교수가 가르치던 학생에게 테러를 당하였으며, 고층건물 창을 닦던 인부가 주민에 의해 생명줄이 끊겨 사망하였다. 세상이 왜 이럴까. 윤리와 도덕, 그리고 종교적 가치로 오늘 세상을 견주어 보면 이전 그 어느 시대보다 조금도 나아졌다고 부르기가 어렵게 되었다. 물론, 그 학생과 교수 간에 시빗거리가 있었을 것이며, 그 건물 외벽을 사이에 두고도 다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테러나 살인에 이르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쳤다 할 것이다.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경제적으로 이 민족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화려한 시절을 살고 있다는데, 우리 사회는 이처럼 어두운 뉴스에 날마다 시달리는 것일까? 잘 살기 위하여 달려온 끝에 이렇게 무너지는 결말을 보는 일은 세상 누구에게도 자랑이 아닌 것이다. 이를 해결할 열쇠는 무엇일까.교육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다음세대를 기르는 우리의 태도가 혹 문제는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이 나라 교육의 틀을 처음 만들던 시절, 교육의 목표는 아마도 `살아남기`, `버텨내기` 또는 `이기고 올라서기`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한 평가도 모든 것에 등수를 매기고 그에 따라 우열이 판가름 났을 터이다. 그러므로, 교육은 치열한 경쟁의 장이 되었으며 평가는 사실상 떨어뜨리기 위한 제도가 되고 말았던 것 아닌가. 그런데, 오늘 교육에 성공했다는 여러 다른 나라들의 사례들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교육의 목표를 `경쟁`이 아니라 `협력`에 두고 있다고 한다. 어차피 함께 살아야 할 이웃들을 밟고 올라간들 그 끝에 내게 무슨 영광이 있을 것인가. 풍성한 결실을 만들기 위해 함께 애쓰며, 그런 열매도 함께 나누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누르고 올라가기보다 돌아보며 배려하기를 가르쳐야 한다.바꾸어야 할 세상은 과목별로 문제를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가닥들은 모두 통합적인 어려움들인 것이다. 경제적 문제인가 하면 사회적 가닥이 얽혀 있으며 문화적인 장애물도 함께 품고 있는 것이다. 문과나 이과의 구분도 사실은 덧없는 울타리일 뿐이다. 교육에 있어 기본 소양이 어느 정도 든든하게 길러진 것을 확인한 다음, 우리는 교과운영의 틀을 조정하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터이다.암기력으로 승부하는 오래된 교육을 벗어야 할 것이며, 이해력으로 충분하다 생각하는 오류에서도 얼른 탈피하여야 한다. 암기하고 이해하는 일은 기계가 거뜬히 해내고 마는 세상이 빠르게 다가온 것이다. 이제는 뭉게뭉게 상상력으로 승부하여야 하며 새로운 세상을 그려내는 창의력으로 맞서야 한다. 상상력과 창의력을 가르칠 수 있는가는 토론거리이겠으나, 교육과 훈련의 현장에서 상상과 창의를 얼마든지 체험하고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암기한 정답을 토해내어 좋은 성적을 받는 교육은 이제 버려야 한다. 무엇을 조금 더 아는 일이 자랑이 되는 세상도 이미 아닌 것이다. 주변에 널린 문제들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가는 `문제해결형` 교육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멀쩡해 보이는 현실에서도 문제를 찾아낼 줄 아는 `비판적 사고`가 그래서 필요할 것이다. 세상의 문제들을 다른 사람의 몫으로만 생각하기보다, 스스로 문제를 인식하고 찾아내어 도전하며 해결해 내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일에 가치를 두는 사람을 길러야 하며, 세상에 가득한 문제들을 찾아내어 해결해 낼 줄 아는 다음세대를 만들어 가야 한다. 배려하고 협력하는 기본 인성을 일구어야 하며 통합비판적 사고에 능숙한 문제해결형 인재를 길러야 한다.그동안 교육이 우리를 여기까지 잘 이끌어 준 일이 다행스럽지만, 이제는 새로운 교육으로 보다 나은 내일을 맞아야 한다. 다음 세대가 살아야 이 나라가 산다.

2017-06-15

미래, 현재, 과거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것일까. 어느 생명보험회사의 웹사이트에서 신비한 경험을 하였다. 첫 페이지에서 나이와 키, 몸무게 등 간단한 정보를 묻는다. 그러면, 사고를 당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을 마치는 경우 어느 해 몇월 며칠에 죽을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정확한 날짜가 아니겠지만, 그런 날짜를 구체적으로 대해 본 것이 처음이었다. 동시에 드는 생각은 `아, 저런 시각이 있겠구나!` 싶은 자각이 새삼 드는 것이었다.시간은 어떻게 흐를까. 우리는 시간이 아득한 `과거`에서 시작하여 지금 이처럼 누리고 있는 `현재`가 되었다가 알지 못하는 `미래`가 되어 흘러간다고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그렇게 시간이 과거-현재-미래의 순서로만 흐른다면, 그런 시간은 나의 의지와는 별로 상관이 없어지는 것이다. 가만히 두어도 흘러가는 시간, 그에 대하여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다만 객체가 되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어차피 모르는 과거였으며, 그냥 언제나 곁에 있는 현재이며, 아무 것을 하지 않아도 어차피 다가올 미래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늘 시간을 놓치며 사는 것은 혹 아닐까. 어찌어찌 흘려버린 세월에 아쉬움이 쌓이고, 갑자기 다가온 오늘에 당혹스러우며, 손님처럼 다가올 내일을 생각하면 불안하기도 한 것이다.질문이 생긴다. 과연 시간은 그렇게 흐르는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흘러가느라 사람은 정말로 시간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과거는 아득한 옛날이며 겨우 현재에 살고 있을 뿐 미래는 정말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일까. 미래는 그냥 기다려야 오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그 미래는 눈 앞에 펼쳐지지 않았을 뿐 이미 시작된 것은 아닐까 싶다. 그 미래 어느 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라져 갈 그 시간은 이미 시작되지 않았을까. 이미 시작한 그 시간이 우리를 향하여 넘실넘실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이미 시작한 시간이 `미래`이고, 우리를 향하여 한 순간 한 순간 다가와서는 `현재`가 되어 우리를 만났다가, 그 시간을 넘어 끝내 `과거`가 되어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은 미래-현재-과거의 순서로 흐르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맞는 모든 중요한 시간들은 이들을 상상하며 생각하는 순간 이미 시작되었다.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시험들이 그렇고 청년들에게는 결혼이나 취업이 그럴 것이며 장년들에게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의 순간들이 모두 그럴 것이다. 시간은 이렇게 미래로부터 시작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현재가 되었다가 과거가 되어 사라져 가는 것이다.시간의 순서가 이렇게 뒤바뀌고 보면, 우리가 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내게로 다가오고 있는 시간에 관해서 우리는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이 바뀌는 것이다. 그냥 흘려보낼 시간이 아니라 이제 맞이할 시간이 되어 신중함이 더해질 터이다. 미래는 아무렇게나 흘러올 시간이 아니라 생각깊게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어차피 다가올 내일에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빛나게 찾아올 미래를 알차게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순간 불현듯 찾아오게 할 것이 아니라, 넘실대며 다가오는 그 시간을 맞을 차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흐르는 시간에 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다가오는 시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부정적인 미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미래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 나라의 미래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이미 시작되었으며, 우리들 개인들의 미래도 이미 어디선가 시작되었다. 나라와 개인에게 이미 시작된 그 미래에 대하여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잘 생각해 볼 일이다. 이에 어떤 준비를 하여 그 미래가 어느 모습의 현재로 다가오게 만들어 낼 것인가는 우리의 태도에 달린 것이다. 미래는 이미 시작되었다.

2017-06-08

소통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조금씩 나아진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소통이 아직도 문제라는 인식이 있다. 나라의 리더십에서 가정의 부모들까지 소통을 잘 하지 못해서 국민들로부터 가족들로부터 믿음을 잃어버리기 일쑤인 것이다. 왜 그러는 것일까. 무엇이 문제일까. 소통이란 정말 어찌 해야 하는가. 疏通.(소통) 글자가 어렵다. 어려운 것이니 쉽게 풀리지 않는다. 영어로는 Communication, 그 본래 말뜻에 `나누는 일`, `함께 하는 일` 그리고 `공동체 만들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퍽 쉬워진 느낌이다.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 소통을 해야 한다는 것 아닌가.서양 속담에 `입으로 망하는 사람보다 귀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내 생각을 펼치기에 분주하여 남의 생각을 듣지 않는 일을 빗대어 하는 소리일 것이다. 내 생각이 틀린 사람이 어디 있을까. 마음에 담은 생각을 정연하게 잘 표현할 일이지만, 또 다른 사람이 담고 있을 진정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말하기만 하고 듣지 않겠다는 심보는 무엇인가 함께 하기 싫다는 고집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경영의 대가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상대방이 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하였다. 소리높여 외치는 소리도 듣지 않는데, 하지 않는 소리는 도대체 어찌 들을 것인가.소통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하지 않는 소리까지 챙겨 들으려면, 소통에는 공감이 필수라는 것이다.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리더가 공동체를 어떻게 세울 것인가. 나의 생각에 진심이 담겼듯이, 상대도 간절함으로 오고 있다는 걸 어찌 모른다는 말인가. 어째서 당신 혼자만 이야기하고 남들은 듣기만 하라는 말인가. 마음과 마음이 오고 갈 때에야 공동체도 서지 않을까.편가르지 말기. 이 소리를 해서 듣는 이들이 편갈라 질 것인지 아니면 편안해 질 것인지는 말하는 사람이 안다. 털끝만큼이라도 편갈릴 생각을 나눌 터이면 극도로 조심해야 할 것이다. 생각은 나만 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늘 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던지는 소리가 공동체에 덕이 되는지 독이 되는지 살펴야 하는 것이다.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실수가 어찌 없을 것인가. 뱉어낸 말이 의도와 다르게 공동체에 독이 되었을 때, 우리는 간혹 소통에 있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상대가 입은 상처가 보이면 다가가 위로할 일이며, 나의 표현에 실수가 있었다면 얼른 인정하고 돌아설 일이 아닐까. 당황스럽고 불편하다고 소통의 문을 닫아 버리면 거듭 실수의 늪으로 빠져들곤 하는 것이다. 소통의 진정한 승리는 저질러진 실수를 인정할 때에 거두는 것이다.조선의 왕 세종은 국사를 다루면서도 `우리가 이렇게 결정하고 결론을 내렸을 때 혹시 억울한 사람이 없겠는지 다시 한번 찾아보고 확인하라`고 했다지 않는가.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나의 생각을 관철함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우리`의 생각을 정하는 일은 나만 옳아서 정리되지 않는다. 거듭 살피고 확인하여 덕이 되는 방향을 찾아보아야 한다. 일사천리로 나아가는 일만이 반드시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역사와 함께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함께 살아가는 일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으며, 민주주의는 그래서 불편한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생각을 나누게 하여 아우르며 어울리는 공동체로 나아가야 할 터이다.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생각 한 자락을 깊이 새겨볼 일이다. `무엇인가 이야기했을 때 우리의 가장 위험한 착각은, 소통을 이미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니, 이제 겨우 시작인데 말이다.` 소통으로 공동체를 살릴 일이다.

2017-06-01

내일이 궁금하다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알파고가 또 이겼다. 기계가 인간에게 내리 패배를 안기고 있는 중이다. 이세돌이 한 판 이겼던 기억을 이제는 어쩌면 인간이 기계를 이겼던 마지막 한 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예언마저 번지고 있다. 인간이 만든 기계가 인간을 이기고 있는 것이다. 자, 이제 인간은 기계를 어찌 할 것인가. 기계와의 싸움은 이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만 물러설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새로움을 향하여 나아갈 것인가.4차산업혁명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에게 다가왔던 녹색성장과 창조경제가 이 나라에 즐거운 성과를 안겨주기보다 의심스러운 이력만 남기고 사라져간 기억이 있다. 그래서일까, 지금 번지고 있는 저 `4차산업혁명`에 대해서도 뭐 그리 크게 믿음이 가지 않는다. 실제로 작년과 올해, 해를 거듭하며 전 세계의 경제지도자들이 만나 인류경제의 미래를 내다보며 지혜를 모았다는 다보스포럼에서도 화두는 `4차산업혁명`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것이 무엇인지 분명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현상적으로 새로운 물결이 이미 다가와 있으며 우리는 이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여 이렇게 높은 관심을 두는 것일까. 이전의 기술혁명과 무엇이 다르기에 두려움에 가까운 경계를 하는 것일까.`탁월함을 찾아서(In Search of Excellence.)`를 쓴 탐 피터스(Tom Peters)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앞으로 사람을 뽑을 때, 학점 4.0 이상은 절대로 선발하지 마시라. A학점 졸업생은 B학점 졸업생 아래에서 일할 것이고, B학점 졸업생은 C학점 졸업생 회사에 고용될 것이며, D학점 졸업생이 자기 이름이 붙은 빌딩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물론, 과장이 섞인 농담처럼 들리지만, 나름 경영의 현장을 들여다보는 지혜가 담긴 생각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동안 정답을 잘 찾는 사람을 대접하여 왔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며 틀린 답을 인정하지 않았다. 정해진 길에 충실한 역군들이 그동안 수고하여 이만큼 나아왔다면, 이제는 새로운 도전과 창의에 그 길을 내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재구성과 역발상으로 이전과는 다른 무엇을 만들어 낼 사람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하지 않을까. 실수와 실패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낼 기본이 없는 것이다. 차근차근 정답에 몰두하며 찾아낸 것이 오늘이었다면, 좌충우돌 우답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내일을 열어갈 것이다. 알파고를 경험한 이세돌의 선언은 그래서 놀랍다. `인간이 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인간이 만들지 않았던가. 끊임없이 더 나은 기계로 만들어 가는 일도 사람들이 해야할 것이 아닌가.그간의 산업혁명들을 통해서 인간이 기계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발전해 왔다면, 인간과 기계가 함께 생각하고 만들어가며 하나가 되어가는 숙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모습이 어떠하든지, 결국 인간이 더 좋은 세상을 구현해 가는 또 하나의 노력이 아닐까. 특별히 놀라거나 두려워하기보다 이 파도를 어떻게 잘 타고 넘을 것인가 즐거운 창발성을 발휘할 때인 것이다. 늘 100점을 받아내는 암기력으로 승부하기보다 할 때마다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가는 상상력으로 맞설 때인 것이다.이제 겨우 시작인 것이다. 그동안 대상이요 객체였던 기계에게 이제는 인간과 함께 호흡하며 생각하는 가능성이 열렸을 뿐이다. 인터넷과 사이버 세상이 현실의 체험과 어우러지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만나서 함께 활약하는 날들이 열려가는 것이다.교육의 현장에서도 이전과는 분명히 다르게 다음 세대를 만나야 할 것이다. 일방적으로 가르칠 일은 세상에 없다. 함께 배우고 함께 만들어 가는 내일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배울 것인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내일이 궁금하다.

2017-05-25

지역을 젊게

▲ 장규열 한동대 교수·언론정보문화학부지역에 나이든 사람들만 남고 젊은이들은 떠난다고 한다. 지역에 아이들 울음소리가 그치면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역의 내일을 맡을 `다음 세대`가 지역에 없는데 어떻게 지역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인가. 젊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만 향하는 것도 분명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어렵사리 지역까지 찾아와 몇 년을 지내면서 공부를 마친 젊은이들이 졸업과 함께 지역을 떠나가는 일이다. 지역에는 제법 괜찮은 대학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하지만 이들 대학을 다니는 청년들은 이곳에서 그들의 삶을 펼칠 상상도 하지 않는다.그들에게 지역은 단지 그들의 내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몇 해를 견디는 `방문처`같은 곳일 뿐, 지역에서 무엇인가 꿈을 펼치고 삶을 이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졸업을 준비하면서 그들은 이미 지역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여 떠날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재학 중에도 그들의 관심 속에 지역은 없다. 분명 이 곳에 살지만, 투명인간이자 방문객이며 오래 머물기는 하지만 지나가는 통과여객일 뿐이다. 무엇인가 열심히 갈고 닦지만 그들이 배우는 무엇으로 지역에서 발휘하지 않는다. 마음이 끌리지 않는 곳에 그들의 수고를 들이지 않으며 흔적을 남기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이들 소중한 젊은이들은 그냥 잠시 왔다가 사라지는 손님들인 것이다. 늘 지역에 있는 것 같아도, 해마다 신입생들이 채워지는 일이 반복될 뿐 졸업이라는 뒷문은 늘 열려있는 것이다.이렇게 젊디젊은 청년인재들을 지역에서 가르쳤다는 것만으로 지역은 위로를 삼을 것인가. 그들이 졸업 후에도 지역에 머무르게 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들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게 하여 바로 그 젊고 싱싱함으로 지역을 일으키게 하려면, 지역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젊은이들이 그냥 떠나가는 일을 두고 그들 탓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닌 듯하다. 지역이 보다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대학은 대학대로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힘들어 하는 젊은이들로 한가득이다. 지역의 기업들이 이곳에서 공부한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할 수 없을까. 졸업생 뿐아니라 재학생들에게도 보다 전향적으로 다양한 문호를 개방하여 지역과 대학이 함께 숨쉬는 분위기를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인턴십도 있고 자유학기제도 있는데, 지역의 기업들과 대학들은 서로 오가는 일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지역의 기업도 살고 대학도 근심을 더는 상생의 마당을 펼쳐보았으면 하는 것이다.지역의 자치단체도 젊은이들이 지역을 스치듯 다녀만 가는 일이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청년 인재들이 지역에 머무는 동안 이 곳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모양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으면 한다. 교수들도 분명 좋은 통로이지만, 청년들이 지역에서 활약할 수 있으면 지역은 젊어지지 않을까. 기업들과 단체들과 대학들이 연합하여 만들어 낼 `젊은 도시`가 이미 눈에 선해 오는 것이다.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기려 하는 새 정부에게도 바란다. 국가의 균형발전을 위해서도 청년정책의 중요한 한 축으로, 청년인재들이 지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격려하고 유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기를 바라는 것이다. 수도권 밀집현상을 막으려 하기보다, 비수도권매력창출에 나서길 바라는 것이다. 균형있게 발전하는 일은 모든 지역이 하나같이 살 만한 곳으로 바뀌어 갈 때 가능할 것 아닌가. 지역에 젊은이들이 돌아오게 하는 일은, 지역에 이미 있는 젊은이들이 떠나지 않도록 하는 일로 시작하기로 하자.지역은 이미 젊다. 그 젊음을 유지하는 열쇠는 지역에 있는 것이다. 떠나지를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지역에 머물고 싶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들의 내일이 지역에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2017-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