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담기도 흉악한 폭력이 춤을 춘다. 세상이 경악하도록 슬프거나 충격적이어야 하는 것이 뉴스의 속성이 되어 버렸다. 미디어로 전해지는 폭력 장면이 사람들의 폭력성을 부추기는지 아니면 억제하는지 아직도 논란거리다. 사건과 사고로 이어지는 언론보도를 통해 사람들이 폭력을 미워하고 멀리하게 된다는 측이 있는가 하면, 아니 그 같은 폭력에 노출되는 일이 잦을수록 사람들은 폭력에 대해 둔감해져서 오히려 더욱 폭력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즉,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거나 모방하게까지 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맞을까.
언론과 미디어가 보여주는 장면들이 폭력을 예방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부추기게 될 것인지. 전달되는 내용 가운데 독자 대중이 어떤 부분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 효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미디어가 취재하고 보도하면서 어떤 면을 도드라지게 알릴 것인가도 생각거리인 것이다. 우리는 연거푸 벌어지는 폭력적 살인사고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하며 어떤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무슨 까닭에 이 같은 병리현상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것일까. 개인적인 폭력성향이 만들어낸 우발적 사고로 볼 것인지, 아니면 여러 구조적 과제들이 쌓여온 끝에 나타나는 사회적인 문제로 볼 것인지도 사뭇 다른 시각과 접근, 그리고 해결책으로 유도할 것이다. 청와대를 향한 청원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였다. 사람들 마음에는 폭력을 추방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심리학적으로는 충동조절장애 현상 가운데 분노조절장애라고 한다. 그 가운데 특별히 간헐적 폭발장애(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는 분노와 관련된 감정을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공격 충동이 억제되지 않아 주어진 자극의 정도를 훨씬 넘어서는 파괴적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겨우 천원을 돌려받지 않은 까닭이 무참한 살인을 초래하였다니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런 병리적 현상이 저렇게 가능하다는 것이 아닌가. 심리적 불안정과 상대적 박탈감 등이 정상적으로 조절되고 정리되지 못한 결과로는 너무나 처참하지 않은가. 어떻게든 더 이상 이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적인 관심과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원인으로 가당치 않아 보이는 그의 우울증 병력도 관련이 있다고는 하며, 정신을 차린 후에도 우울감과 허망함을 느낄 뿐 직접적인 죄책감은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고도 한다. 그쯤 되면, 우리에게는 이를 예방할 방법이 혹 없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무거워진다.
개인적인 마음 속 어려움을 적절히 조절하고 긍정적으로 정돈하지 못하여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면,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이 도울 방법은 혹 없을까 싶다. 학생들이 학교와 가정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학교가 감지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낼 수는 없을까. 학교의 상담기능을 강화하고 학생과 선생님 사이 그리고 학생들 간에 대화와 소통이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유도할 수는 없을까. 학교가 학생들의 학력을 길러 경쟁에 능한 사람을 만드는 데에만 집중하기보다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훈련의 마당이 될 수는 없을까.
교육의 결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해져야 하는데, 우리 교육은 혹 머리만 키우려 하는 것은 아닌지. 누구를 이겨 세상을 잘 살 것인가. 남들을 꺾고 올라가 행복해지는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진정한 경쟁은 결국 ‘나’를 이겨내야 하는 것임을 일깨워 주면, 내게 닥친 문제와 어려움을 조절하고 극복하는 지혜도 생겨나지 않을까. 문제는 인성이다. 온갖 지식과 재주를 다 가져도, 인성이 무너지면 그 결과는 무섭다.
인성이 바로서야 사회가 산다. 폭력이 사라져야 나라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