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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름값하는 국회를 기대한다

장규열 고문 총선이 지나갔다. 떠들썩한 몇 달 동안 정권심판을 떠올리고 국정안정을 기대하며 새 국회가 선출되었다. 이모저모로 세상의 이목을 끌면서 민주주의의 잔치는 한 자락 역사가 되었다. 국민은 살아 움직이는 정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목격하였다. 한 표의 가치가 얼마나 육중한지 절감했으며 정치의 지향성을 설정하는 시민의 힘을 다시 보았다. 당선의 기쁨을 누렸거나 낙선의 쓴잔을 들었어도 국민의 결정 앞에 모두 겸허해야 한다. 우리의 모습이 거울이 되어 새 국회는 나라와 국민에게 희망과 격려가 되는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국민은 ‘일하는’ 국회를 기대한다. 진영으로 편을 갈라 정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모습, 볼 만큼 보았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우리 국회가 발맞추어 정책과 제도로 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릴없이 좌와 우로 가르며 허장성세로 세월을 보낼 일이 아니라 실속있게 민생경제를 살려야 한다. 실력과 의지가 함께 드러나는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국민은 ‘하나가 되는’ 국회를 바란다. 생각의 차이와 의견의 다름을 인정하고 치열하게 헤아리고 견주어 나라와 국민을 위한 최적의 해결방안을 만들길 기대한다. 방법이 다르고 이념에 다소 차이가 있을지언정, 의원들은 모두 국민을 위한 ‘한 편’이었음을 확인해야 한다. 온갖 어려움 앞에 하나가 되는 국민들에게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을 국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국민은 ‘품위있는 국회’를 기대한다. 선동과 막말을 수다하게 겪은 국민은 실체있는 담론과 결실맺는 토론을 기다린다. 사이다 말펀치가 간혹 속시원했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끌어냈던 기억이 없다. 당신을 뽑아준 지역유권자를 부끄럽게 하고 국가의 의정단상을 욕보이는 행태를 더는 안 보았으면 한다. 다음세대에게 본이 되는 국회가 되어주시라.물론 국민도 바뀌어야 한다. 임기 내내 감시와 견제를 게을리 아니하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유권자를 우습게 보게 하며 선거 때만 큰절을 받는 구태를 끊어내야 한다.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는 국회의원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되 끊임없이 결실과 성과를 요청하는 적극성을 길러야 한다. 국회를 통해 민의가 구체적으로 반영되도록 소통하여 아이디어를 던지고 제안에도 나서야 한다. 정치가 긴장하여 열매를 맺으려면 국민이 부지런해야 할 모양이다. ‘국민이 스스로 다스리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실현하려면, 국회의 임기 4년을 국민의 목소리로 채워야 한다.세상이 달라졌다. 새 국회가 만나는 나라가 새로운 나라이며,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놀라운 국회를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던 신선한 국회의원이 되어 주시라. 세상을 바꾸는 기대로 가득한 길 위에 당신의 노력과 성과가 분명히 보이는 민의의 전당을 만들어 주시라. 국민의 요청에 국회가 귀를 기울이고 국회의 노력에 국민이 화답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가슴 뿌듯한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

2024-04-10

4월은 잔인한 달인가

장규열 고문 영국 시인 엘리어트(T.S. Eliot)는 이렇게 적었다.‘사월은 잔인한 달, 죽었던 땅에 라일락이 싹을 틔우고, 기억과 소망이 뒤엉키며, 잠자던 뿌리가 봄비로 잠을 깨지만.’ 시인은 왜 그렇게 노래했을까. 모든 게 살아나는 멋진 사월을 그는 어째서 잔인하다고 노래했을까. 벚꽃이 피고 목련이 올라오는 사월은 아름답지 않은가. 따듯한 햇살 아래 서 있기만 해도 행복하지 않은가. 동면에서 벗어나 만물이 소생하는 기적을 목격하는 사월은 신비롭지 않은가. 그럼에도 시인은 사월을 잔인하다고 못을 박는다.시의 제목이 ‘황무지(The Waste Land)’였다. 돌아온 새봄이 눈부시겠지만 황무지의 입장에선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다. 모든 게 상대적이다. 봄이 온다고 한들 풀 한 포기 올라올 턱이 없는 황무지로서는 한겨울 찬바람이 차라리 공평했던 터이다. 사방이 모두 죽어버려 다시 살아날 기미조차 없는 곳에서는 겨울 눈밭이 오히려 포근했을지도 모른다. 봄이 되어 사방이 모두 기지개를 켜는데 아직도 황망하게 먼지만 날리는 땅에게는 잔인할 뿐이었던 모양이다. 황무지의 입장은 누구의 모습이었을까. 시인은 무엇을 빗대어 그렇게 이 시를 썼을까.시인의 눈에 봄이 잔인했을지언정 돌아온 사월은 여전히 아름답다. 포근하고 따사로운 햇볕이 고향의 들판을 생각나게 하고 꽃향기 봄기운은 마을어귀 시냇물 소리를 들리게 한다. 세상은 총선판. 누군가는 꿈을 안고 출사표를 던졌겠지만 세상살이는 아직도 고단하다. 확성기가 노랫가락을 길거리에 뿌려대지만 보통사람의 하루하루는 나아질 기미가 없다. 사거리 후보자의 구십도 인사가 오늘만 굽신대는 헛수작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외치는 구호 가운데 일상을 실제로 나아지게 할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언가에 홀리듯 내 한 표를 던져야 하는 시민들에게 사월은 어떤 달인가. 마지막 몇 날이라도 진정이 실린 선거판을 만나고 싶다. 찾아온 사월이 잔인하지 않으려면 후보들은 어떤 마음으로 선거전에 나서야 할지 헤아렸으면 싶다.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데 길거리에서 외쳐본들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학교는 허물어진 교권과 쉽지 않은 학교폭력으로 무너져 가는데 선거가 좋은 대책을 찾아올 수 있을까. 세상은 빛처럼 달아나는데 선거판은 지난 세기 모습으로 저러고 있는지. 과거를 들추면서 악다구니를 하는 사이에 우리의 내일은 누가 살피고 헤아릴 것인지. 출사표를 던진 이들에게 생각이 없다면, 표를 쥔 유권자라도 정신을 차려야 할 터. 마지막 며칠이라도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한다. 무슨 생각으로 선거판에 나섰는지 가늠해야 한다.나라살림이 바로 서고 서민경제에 숨통이 트이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헤아려야 한다. 다음세대 교육과 보통사람 일상에 희망이 보이고 기대가 실리려면 누구를 세워야 하겠는지 들여다 보아야 한다. 생각없이 거수기처럼 던지는 한 표는 이제 멈추어야 한다.우리의 사월이 그래도 잔인하지 않으려면, 총선의 민심이 어떻게 일해야 할 터인지 생각해야 한다.

2024-04-03

선거, 집단지성의 발현

장규열 고문 역사 속 민중은 어리석기도 하였다. ‘우민(愚民)’은 위정자에게 늘 속기만 하고 살았던 백성의 부끄러운 이름이었다. 교육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깨우치고 민주의식의 전개는 국민들의 인식 수준을 바꾸어 놓았다.한두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기만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집단지성센터(Center for Collective Intelligence)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연결되어 공통된 지향점을 가지고 사고(思考)를 이어갈 때 개인이 생각하여 결정할 때보다 뛰어난 이성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어놓고 있다.총선이 코 앞이다. 선거는 민주주의 제도에 있어 국민들이 집단지성을 발휘할 기회이다. 집단지성의 두 가지 기본조건인 ‘여러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지성을 발휘하여 국정의 흐름을 놓고 지역의 대표를 결정하면서 나라 살림의 전반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제도적 장치인 셈이다. 정치학자 렉스 폴슨(Lex Paulson)은 동물들 가운데 그리 강하지 못한 인간이 가장 탁월하게 발달한 데에는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집단행동적 두뇌’가 열쇠였다고 밝혔다.인간은 집단적으로 지식을 축적하고 사회적으로 학습할뿐 아니라, 습득한 지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습성으로 대자연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꼭대기에 올라서게 되었다는 것이다.인간사회의 규모가 커갈수록 중앙집권적인 권력은 부패하게 되어있음을 알게 되어 정치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하여 집단지성이 효율적으로 나타나도록 시스템을 구축하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의 규모가 팽창하고 기능이 복잡해질수록 집단지성은 더 나은 의사결정의 기본요소가 되어간다고 하였다.개인으로서 국민이 집단지성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방법은 선거와 투표가 아닌가. 선거에 임하여 선거의 구도와 표방하는 정책, 후보의 면면을 살피고 사회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면서 시대정신을 참고하고 전달되는 메시지를 헤아려 투표 의사를 결정하는 개인적인 과정을 물론 거친다. 개인이 던진 표들이 집적되어 선거의 결과를 확인하면서 사회구성원들의 집단지성이 지향하는 방향을 걸정하게 된다. 선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결과를 받아들여 제도로서 민주주의를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므로 복잡하지만 국민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로서는 매우 훌륭하다. 개인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서도 상당히 효과적이며 효율적인 시스템이다.개인의 투표의사가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집단의 최종 의사를 확인하면서 모두가 수긍하는 결과물을 낳는다는 의미에서도 탁월한 의사결정 방식이다. 문제는 국민의 참여의식이다. 참여 여부도 물론 개인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인 과제에 함께하는 의미가 적지 않음을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은 사적인 행복을 추구하며 살지만 공적인 책임으로서 사회적 지향성을 함께 고민하고 결정 과정에 참여했으면 한다. 총선이 공정하고 유익한 결과를 빚어내기를 기대한다.

2024-03-27

정치, 흐르는 물처럼

장규열 고문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사건 이후로 물은 공공재라기보다 소비재가 되었다.공적으로 공급되는 수돗물이 있지만 병물을 사다 마신다. 홍수가 일면 물이 무섭다가도 평소엔 아직도 가벼이 생각하는 게 또 물이다.지구표면이 71퍼센트가 물이라거나 사람 몸무게의 70퍼센트 가량이 또 물이라면 놀랍기도 하다. 천체물리학자들도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평가할 적에 그곳에 물이 있는지를 먼저 살핀다고 한다.물은 과연 생명의 원천쯤 되는가 싶다. 대기오염과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 파괴와 문명 훼손은 급기야 물을 오염하게 만든다. 산업화와 물질문명은 물길을 자연스럽게 놓아두지 못하였다. 물이 망가진 결과 그 물을 인공적으로 가공하고 다시 만들어 병물로 사다 먹는 꼴이 된 게 아닌가.3월 22일은 ‘세계 물의 날(World Water day 2024)’이다. 국제연합(UN)이 제정하고 선포한 올해의 슬로건은 ‘물은 평화를 위하여(Water for Peace)’라고 한다. 물이 오염되고 부족해 지면 나라와 공동체 간에 갈등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난다.기후변화가 극심하고 인구문제가 격화되면서 나라 안팎에서 물이 가장 중요한 자원임을 인식하고 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가 분명해진다. 공공보건, 환경보전, 식품과 에너지 시스템의 안정적 관리 등에 있어 깨끗한 물을 확보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물은 이제 사용하고 확보해야 할 자원일 뿐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임을 자각하고 인권보호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게 국제사회의 공통된 시각이다. 물은 국가 간 분쟁의 씨앗이기도 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물이 성장과 번영을 가져오기도 하고 갈등과 파괴를 초래하기도 한다.총선 정치로 접어들면서 물의 날을 맞는 감회가 있다. 물 흐르듯 놓아두었으면 자연스러웠을 터에 억지로 구부려 화를 맞는 미련함을 우리 정치가 피해야 한다. 곧 후보 등록을 마치고 본격 선거전에 돌입하면 유권자들에겐 혼돈의 시간이 찾아온다.공약이 남발되고 확성기가 동원되면서 선심과 회유가 춤을 춘다. 물같이 흐르던 일상이 멈추고 흐트러지며, 억지춘향 악수세례와 믿지못할 약속공세가 쏟아진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뜬히 건너온 국민들을 아직도 우습게 보는 후보들에게는 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민심을 보여주어야 한다.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과 겪어온 날들을 차분히 평가하는 날카로움을 드러내야 한다. 헌법에 적힌 대로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었음을 확인하는 자랑스런 총선이 되어야 한다.경쟁을 화합으로 이끌며 갈등을 협력으로 몰아가는 정치가 되었으면 하는데, 정치의 실상은 늘 반대로만 치닫고 있어 국민이 걱정하고 염려한다. 국민이 편안하고 민생이 안정되는 일상을 만나고 싶은데, 정쟁과 다툼만 파도치는 정치를 너무 오래 보고만 있다. 유권자의 표심이 평정한 수심으로 나타나 정치인들이 크게 각성하는 이번 총선이 되었으면 한다. 물처럼 흐르는 정치를 만들어 주시라.

2024-03-20

총선에 교육이 안 보인다

장규열 고문 곧 총선이다. 나라의 내일을 가늠할 중요한 선거임에 틀림없다.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도 첩첩산중이다. 경제와 일자리, 산업과 과학기술, 복지와 의료, 외교와 국방, 도시와 건설, 지방정책과 균형발전, 안전과 치안 등 국정 전반에 손을 보아야 할 가닥이 차고넘친다. 최근 들어 우리 모두를 압박하는 과제가 있다.저출산. 젊은이들에게 물으면, 결혼과 출산에 대하여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경제적 여건이 턱없이 부족하고 사회적 전망이 밝지 못한데 아이를 낳아 기를 자신이 없다고 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쁨과 즐거움을 설명하려 해도, 자신과 아이가 겪어야 할 어려움이 불을 보듯 확연한데 어떻게 그런 모험을 하겠느냐는 반응이다.출산을 가로막는 까닭들 가운데 심각한 장애물이 바로 교육이다. 아이들을 반듯하게 기르는 일이 너무 힘들다. 출산과 동시에 다가오는 돌봄과 육아를 비롯하여 초등학교에도 밀려든 사교육의 압박과 대학입시의 그림자, 학교폭력과 교권수호 사이에서 힘을 잃어가는 교육과정과 교육환경의 피폐함은 신혼부부들의 자신감을 앗아갈 뿐이다. 총선이 다가오지만, 정당과 후보자들이 교육에는 관심이 없다. 유권자가 아닌 학생들에게 표가 없어서 그런지 총선 이슈로는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다.교육부와 교육청으로 나뉘어진 정책 수립과 책임 소재의 구조적인 과제도 있다. 교육이 가진 실질적 내용을 뿌리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젊은 학부모들이 안심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맡길 분위기부터 자리를 잡아야 하고, 경제적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녀들이 공교육 과정을 지날 수 있도록 교육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부적절한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 과정을 손을 보아야 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대입제도도 크게 수정해야 한다.정당들이 훌륭한 후보들을 영입한다지만, 교육과 관련하여 적절한 선택이 그리 보이지 않는다. 교사노조와 관련하여 선생님들의 교권과 복지에 관심있을 인사가 보인다거나 특정한 교과목을 전공한 인사가 영입된다고 하여 교육을 둘러싼 기본적인 담론이 나아지지 않는다. 교육은 ‘아이들을 기르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어떤 인성을 길러낼 것인지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떠들썩한 늘봄학교 정책도 따지고 보면 시간활용을 놓고 줄다리기가 있을 뿐 교육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즐겁고 안전한 학교를 아이들에게 제공해야 한다.학교만 다녀도 훌륭한 성인으로 자라날 든든한 교육의 과정과 내용이 살아나야 한다. 대학은 전문적인 소양을 심화할 장소가 되어야 할 뿐, 사회적 위신을 위한 간판으로 역할은 그만 내려놓아야 한다. 대입제도는 더 이상 학생들과 부모들을 압박하지 말아야 한다. 학교폭력이 사라지고 교권이 적절하게 보호되는 행복한 학교가 돌아와야 한다. 학생과 선생님이 모두 즐겁게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교육직은 충분하게 존중되어야 하며 아이들을 기르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총선에 나선 정당과 후보들은 관심 정책 담론에 교육을 반드시 반영하여 유권자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4-03-13

세상은 누구의 작품인가

장규열 고문 프랑스 작가 시몬 등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세상은 남자들의 작품이다’라고 비꼬았다. 중요한 권력은 모두 남자들이 쥐고 있으며 구체적인 경제 실천과 사회 운영도 거의 모두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그리된 까닭을 이모저모 들어보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미사여구일 뿐 그 어떤 적절한 설명도 가당치 않다고 꼬집었다.미국 작가 캐롤라인 페레즈(Caroline Perez)도 저서 ‘보이지 않는 여성(Invisible Women)’에서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의 입안과 수립 과정이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에 점령당했다고 지적했다. 기초자료로 사용되는 통계자료들도 ‘여성의 존재’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아서 여성이 거기에 있었음조차 도외시되곤 한다는 것이다. 도시계획과 디자인의 과정, 사회문화정책의 논의와 입안 등에 있어 여성의 시각이 누락되지 않아야 할 것을 지적한다.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Inter national Women’s Day 2024)’이다. 올해의 슬로건으로 ‘여성을 위한 투자(Invest in women: Acc elerate progress)’에 방점을 둔다. OECD가 발표한 성별 간 임금격차는 평균 12퍼센트에 달한다. 잘 산다는 나라들에서조차 아직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12퍼센트를 덜 받고 있다는 것이다.한국은 그 격차가 무려 31퍼센트로 회원국 가운데 꼴찌가 아닌가. 우리의 누이들이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남자들에 비해 31퍼센트나 덜 받고 지낸다는 발견은 놀랍지 않은가.여성의 존재가 무시될 뿐 아니라 가치마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는 현실은 우리가 21세기를 살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성경은 이미 2천 년 전에 ‘신 앞에서 남자와 여자는 같은 존재임’을 선포하였다. 그럼에도 아직껏 우리 기독교 일부 교단은 ‘여성이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한다. 남자만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은 누가 지어냈는지 모를 일이다. 세상이 저렇게 변했는데, 남자 목사들끼리 모여앉아 저따위로 결정하는 배포가 놀랍지 않은가.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어찌할 것인가. 남성이 지배하면 당연하고 여성이 들어서면 이상하다 여기는 발상부터 잘못된 것이 아닌가. 남녀 간에 물리적으로 다른 것을 인정하더라도 인격과 인권 면에서 무시되고 소외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남성과 평등하게 여겨지며, 아예 성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무시당하고 값싸게 취급되며 폭력까지 감내할 양이면, 우리의 누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아니다. 관련 과제들이 갈 길이 멀지만, 이제는 여성만의 몫이 아니다. 그동안 누리면서도 몰랐거나 무심했던 남성들이 나서야 할 차례가 아닌가. 인류의 나머지 절반이 세상을 함께 구하도록 소매를 걷어야 하지 않을까.올해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을 위한 투자, 정책과 실행에 실천적인 제안과 역할이 논의되었으면 한다. 보부아르의 지적이 매서운 나침반이 되어 여성의 존재와 하는 일에 모두의 관심이 살아나야 한다. 여성이 살아야 세상이 일어선다.

2024-03-06

끔찍한 새 학기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2월은 늘 왠지 흐지부지하다. 한 달 삼십일을 채우지 않고 끝나면서도 늘 같은 날수가 아니다. 28일이었다가 29일이었다가. 그렇게 마치는 한 달을 보내면 봄이 온다. 봄소식을 기다리면서 학교가 열린다. 아이들이 돌아오고 선생님이 돌아온다. 친구들을 만나면서 아이들은 신이 나겠지만, 교실을 지켜야 하는 선생님들은 삼월 개학이 천근만큼 무겁다. 교육이 본래 가볍지 않은 일이라서 마음이 무겁다면 격려하고 끌어도 올리겠지만, 요즘 선생님들에겐 교육이 아니라 존재가 무겁다고 한다. ‘왜 교사가 되었을까.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 그만두면 무엇을 해야 하나. 계속한다면 무엇에 기대를 걸어야 하나.’ 월요일이 끔찍한 직장인들처럼 선생님들에겐 끔찍하다.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두렵다. 부모들에게 떳떳해야 하는데 부모들 앞에만 서면 쪼그라든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하는지 누구도 답을 모른다. 순진한 아이들이야 그렇다해도, 학교를 다녀 본 부모들은 사실은 조금 안다. 교육이란 건 본디 아이들을 선생님에게 믿고 맡겨야 겨우 돌아간다는 것을. 무섭고 때로는 가혹했던 선생님이 계셔서 그래도 우리가 모두 이만큼 자랐다는 것을. 호랑이 선생님 덕분에 질서를 익히고 예절을 배웠다. 매섭던 눈초리로 지켜주신 선생님이 무서워서 한 자라도 더 배우지 않았을까. 오늘 교실은 어떤가. 선생님이 구겨진 자부심을 붙들고 존재를 의심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이들과 학부모가 두려워 교실 문을 열기가 끔찍해진 교실에 진심어린 교육이 살아있을 턱이 없다.교육이 부끄럽다. 개학을 앞두고 교실이 걱정이다. 학교의 문을 열면서 교육의 내일을 염려한다.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이대로 좋을까. 처음에는 ‘나라의 미래를 기른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을 젊은 선생님들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할만한 직업이 의사밖에 없는 듯이 시끄러운 세상에 교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가르치고 사람을 만드는 일에 어려움이 태산같고 박봉도 견디겠지만, 교육이 살아있는 교실을 지키지 못하면 거기 서 있을 까닭을 잃게 된다. 정상적인 수업이 펼쳐지고 온당한 교육이 진행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교육과정이 중요하고 교육 효과가 중요하지 않을까. 오늘 교육정책을 위한 담론들에는 왠지 누군가 이익집단을 챙겨주려는 저의가 숨어있는 듯하여 불편하기 짝이 없다. 교육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새로운 다짐으로 새 학기를 열어야 한다.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는 기대로 가득해야 한다. 학기가 쌓이면서 쑥쑥 커가는 아이들이 교사들의 보람이 되어야 한다. 철없는 아이들의 비뚤어진 요청에 반듯하게 교육적으로 반응하는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교육의 테두리를 함부로 생각하는 학부모가 사라져야 한다. 믿고 맡길만한 교사가 되어 교육의 질서를 바로잡는 건 선생님 본인의 몫이 아닐까. 직장인의 월요일이 즐겁고 선생님의 삼월이 즐거워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마음껏 가르치고 배우는 일로만 신이 나는 새 학기가 되었으면 한다. 선생님이 살아야 교육이 산다.

2024-02-28

선거는 누구의 것인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봄 소식이 머지않았다. 매화가 피고 벚꽃이 올라오면 새봄이 펼쳐질 터이다. 계절과 함께 빠르게 다가오는 정치 일정이 총선. 50일도 남지 않았다. 우리는 이번 선거에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가. 봄은 서서히 올라오는데 정치는 이미 뜨겁다. 막말과 주장 가운데 누구 말이 맞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말에 진심과 성실, 공감과 배려가 실렸으면 좋겠는데 실제로 그런 지를 알 길이 없다, 오늘은 진정이었다지만 선거가 지난 후에 겪었던 배신과 혼돈을 생각하면 오늘도 안심할 수가 없다. 이번에는 잘 뽑아야 한다고 다짐해 보지만 그게 생각처럼 간단치가 않다.정치에 무관심하여 선거를 무시하고도 싶지만 플라톤의 한 마디가 섬칫하다.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덜 떨어진 사람을 당신의 대표로 선출하게 된다.’ 실제로 일이 그렇게 벌어지면 모두에게 고통이 아닐까. ‘한 표’들이 모여 나를 대변할 이를 선출한다면 모른 척 할 수도 없다. 링컨(Abraham Lincoln)도 ‘선거는 보통 사람의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선거가 특별한 출마자를 위한 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위한 것임을 확인한다. 동화작가 달(Roald Dahl)도 ‘세상을 바꿀 힘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하였다. 오늘이 마땅치 않은 사람일수록 선거에 임해야 한다. 바꾸어야 할 구석이 많이 보이는 사람일수록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정치가 춤추지만 국민은 힘이 든다. 총선에 참여하되, 판단은 내가 해야 한다. 구호와 선동이 아니라 정책과 사람됨을 살펴야 한다. 남의 소리에 솔깃하기보다 내가 내리는 판단을 신뢰해야 한다. 정당들이 총선에 그 어떤 정치적 의미를 건다고 해도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 누가 국민의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는지 헤아려야 한다. 국민의 갑갑한 일상과 어려운 처지가 후보의 마음에 존재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일정에 따라 치르는 형식적인 선거보다는 진정으로 세상이 나아지는 그 한 판이 되어야 한다. 이번 총선이 그런 축제를 몰고 올 것인지 의심스럽다.화려한 말솜씨로 당신의 ‘생각없음’을 감출 수 없다. 거친 세월을 건너온 오늘의 유권자에게 텅 빈 철학과 빈껍데기 비전이 드러날 뿐이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정치가 언제쯤이면 정말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면서 말하고 행동하게 될까.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건 오히려 보통 사람들이 깨끗한 한 표로 해야 할 터이다. 변화와 혁신을 가져올 힘은 특별한 정치인이나 엄청난 지도자가 가진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게 아닌가. 총선판에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야 한다. 여론조사에 응답하고 후보자에게 당신의 의견을 전달해야 한다. 온라인으로 간섭해야 하고 오프라인에서 외쳐야 한다, 당신의 생각이 들리도록 온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백마타고 오는 초인은 없다. 내일을 생각하는 당신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총선이 뜨거운 까닭은 나라의 미래를 치열하게 고심하는 나를 기대함이 아닐까. 총선은 나의 것이다.

2024-02-21

공부에 때가 따로 있을까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인공지능 AI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앞서 이끌어가는 첨병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소외와 고통에 더욱 그림자를 드리울 흉물이라는 부정적인 예측이 함께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알아야 한다는 것. 제대로 배워 깨우친 다음에야 분석과 예측이 가능하고 활용이든 거부든 결정이 된다.사람은 언제까지 배워야 할까. 6세에 시작하는 교육과정을 16년 정도 거치며 어른이 된다고 이해하였다. 초-중-고-대로 이어지는 교육모델은 충분했을까. 근대적 교육개념이 정리되기 시작하던 아주 초반에 만들어졌다. 구한말 교육개혁을 시도했던 이래 일제를 거쳐 해방 후 1951년에 이 학제가 교육당국에 의해 정책적으로 결정되었다. 여러 논의가 있었으나 기본골격은 아직껏 그대로다. 그러는 사이 세상은 변하였고 우리 사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대학을 나오는 청년들은 어떤 미래를 기대하는가. 획득한 학사학위는 그들의 삶에 어떤 약속을 하고 있을까. 20대 초중반에 대학교육을 마치면 앞으로 펼쳐질 60년도 넘을 여정에 충분한 준비가 된 것일까. 무엇인가 더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당연히 더 배워야 한다.빌게이츠(Bill Gates)는 그의 책 ‘The Road Ahead(미래로 가는 길)’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투자는 바로 ‘교육’이라면서 ‘교육의 목표를 학위를 받는 것으로부터 평생 배우는 일(Lifelong Learning)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유네스코(UNESCO)는 통합적 평생교육을 21세기 교육의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아 산하에 평생교육원(UIL)을 두고 성인 교육에 방점을 둔 국제적인 재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독일 시민들은 이미 평생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다양한 교육적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미국은 지역 대학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시민들이 끊임없이 교육의 기회를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중국은 ‘정교한 평생교육제도의 구축’을 핵심 교육정책 목표로 삼고 국민 모두를 위한 평생교육을 구현하려 시도하고 있다.우리는 어떤가. 지역에는 평생교육을 지원할 어떤 자원들이 있는가. 평생교육은 이제 정부 교육당국에만 의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지역에서 실질적인 평생교육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대학이 나서야 한다. 대학이 해야 할 일들이 여러 가닥이지만 소재 지역과 함께 호흡하며 지역의 발전을 가져올 가장 좋은 통로는 평생교육이다. ‘지역협력’ 슬로건을 슬기롭게 구현할 방법도 평생교육이 아닌가. 언제까지 지역에 존재하면서 정부의 지원만 바라보며 지낼 것인가. 소규모로 진행하는 문화교실 성격의 연성(軟性) 평생교육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본격적인 지식습득이 일어나고 실질적으로 다시 배우는 경성(硬性) ‘평생교육’이어야 한다.대학이 지역사회와 공존상생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지역 발전에 기여하며 함께 성장하는 모델을 만들어 낼 열쇠는 ‘평생학습’에 있다. 대학이 언제까지 20대 청년들만 가르칠 것인가.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하는데.

2024-02-14

청년을 어찌해야 하는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세대를 포위했었다. 지난 대선을 이긴 보수여권이 청년의 표를 끌어모았다. 기존 60대 이상과 신규 30대 미만 유권자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했다.청년들의 표심은 이념이 기준이었을까. 그렇지 않아 보였다. 실용에 뿌리를 두고 현실에 밝은 젊은이들의 시선을 살펴야 했다. 가르치려 하기보다 배워야 했고, 말하려 하기보다 들어야 했다.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골칫거리로 생각하지 말고 한 세대의 성난 몸부림으로 해석해야 했다. 진보도 보수만큼이나 기득권력이 되어버린 이상 새롭게 나타난 경보가 아니었을까. 다시 생각하라는 경고장이며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독촉장이었다. 트럼프가 다시 대세가 됐다는데, 우리 보수는 잘하고 있었는지. 미국의 인종갈등이야 경계선이 분명하지만, 한국에서 세대차이는 구분선이 모호하다. 표심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 청년들은 그만큼 절박했던 터였다.혜안과 통찰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빛나는 법이다. 명철과 지혜도 위기를 만나야 번득인다. 케케묵은 이념을 고집하기보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으로 나서야 한다. 이론보다 현실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어야 하고 하루하루의 삶에 보탬이 되는 결정이어야 한다. 젊은 세대가 일상으로부터 용기를 회복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꿈과 용기만 있어도 회복과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줘야 한다. 세상만 바뀐 게 아니었다. 사람이 더 많이 바뀌었다. 그들이 당신을 지지하려면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갈등과 혐오가 들끓는 세상에 ‘청년’이 열쇠로 등장하였다. 이번에는 누가 젊은이의 마음을 획득할 터인지 귀추가 주목된다.가벼운 구호로는 부족하다. 진심이 통해야 하고 진정이 보여야 한다. 성과가 있어야 하고 생활이 나아져야 한다. 기대만 높일 게 아니라 실질로 승부해야 했다. 정권을 심판한다는 총선의 표심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떠올랐던 청년들의 마음이 이번에는 누구를 지지하게 될까. 실용이 가라앉고 이념이 떠오르는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과거에 혹 껍데기와 겉치레가 통했다면 미래로 건너가는 다리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야 한다. 모호한 외침은 수명을 다했으며, 분명한 길이 느껴져야 한다. 세대는 흐른다. 어제의 60대가 아니고 과거의 20대가 아니다. 결정의 방향이 다른지 몰라도, 모든 세대는 똑똑하고 현명한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 거짓말과 현수막에 쉽게 현혹될 국민이 이제는 없다.정치가 달라져야 한다. 선거판도 바뀌어야 한다. 민심을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국민은 저 앞에서 달리는데 정치는 구태만 반복하는 모습이 아닌가. 국민의 갈급함이 어디에 있는지, 청년의 절박함이 무엇에 달렸는지 헤아리고 살펴야 한다. 낡은 이념과 해묵은 지방색은 벗어야 하고, 새로운 세대와 변화하는 시대의 표심을 획득해야 한다.청년은 오늘도 지켜보고 있다. 한 번은 몰라도 연거푸 속일 수 없다. 진심으로 겨루고 실질로 승부해야 한다. 젊은이의 표심이 궁금해진다.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사니까.

2024-02-07

우리는 잘살고 있을까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미국 작가 마크맨슨(Mark Manson)이 도발적인 유튜브영상을 공개했다. 제목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다녀왔다(I traveled to the most depressed country in the world.)’인데, 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게 아닌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최상급의 경제수준에 이르렀으며 사회문화적으로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장을 경험하지만, 한국인들이 동시에 겪는 우울현상의 그림자가 길어보인다고 했다.전쟁을 겪으며 바닥에 떨어졌던 한국사회가 급성장을 해오면서 익힌 과도한 일등주의와 경쟁문화가 한국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들었을까 짐작한다고 했다. 심층적인 분석이 아니라 표면적인 관찰에 따른 내용이긴 하지만,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부분을 들킨듯 싶어 멈칫 하게된다.실제로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들 가운데 우울증발병율과 청소년자살율에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열심히 살면서 이렇듯 성장했는데, 외국인의 시선에 처절하도록 우울한 나라로 발견되는 건 어찌해야 하는지. 한 해 동안 자해와 자살시도로 응급실에 들어온 4만여 환자들 가운데 46퍼센트가 10대와 20대였다고 한다.교육부 자료에 의하면, 전체 학생들 가운데 25만명 이상이 정신적 문제가 있어 심리치료 대상으로 추계된다고 한다. 꾸준히 열심히 달려오면서 스스로 대견하고 칭찬할 만한 수준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한켠에는 이처럼 드러내기 부끄러운 그늘이 있었다. 치열한 경쟁 가운데 일등만 대접받는 문화가 있었고 극소수만 칭찬받는 문화가 번져가면서 뒤처지는 아픔에 힘들어하는 다수가 있었다.동영상에서 마크맨슨은 우리나라를 우울한 나라로 고발하는 데에 멈추지 않는다. 놀라운 회복력(resilence)를 가져 ‘(어려움 속에서) 늘 길을 발견해 왔다’고 했다. 태안반도에 기름을 청소하러 달려갔으며 IMF 사태에도 금모으기로 반응했다. 나라와 공동체에 위기가 닥치면 문제의 본질을 찾아 해결해 내는 건 언제나 국민의 몫이 아니었던가.정치권과 정부가 우물쭈물하는 상황에도 소매를 걷어 올려 마침내 위기를 극복하는 열쇠를 찾아내는 사람들이었다. 도전과 응전, 변화와 적응에 능하기에 어려움이 닥쳐도 겁내기보다 맞상대하여 끝내 이겨내는 ‘습관적 회복유전자’를 장착하였다. 우울의 그늘이 오늘 깊어 보이지만, 이 또한 국민적 내공과 공동체의 저력으로 헤어나갈 것으로 기대한다.끝없는 경쟁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는 공동체적 배려와 공감으로 우울현상을 극복했으면 싶다. 오늘까지 거둔 성과와 성공이 있다고 해도, 그 길을 완전히 혼자 걸어온 사람은 없다. 도와주고 거들어준 사람이 분명히 있을 터이며 혹 나로 인해 뒤처지거나 힘들어진 이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잘 났더라도 혼자만 잘 살지 말라’는 어느 학자의 충언이 있었다. 이웃을 돌아보는 배려심과 남의 어려움에 귀기울이는 공감능력을 길러야 한다. 회복탄력성을 다시 한번 집단적으로 발휘해 오늘의 우울현상을 내일을 향한 기대효과로 바꾸었으면 한다. 남들은 몰라도 대한민국은 할 수 있다고 본다.

2024-01-31

흩어 놓는가, 모아 내는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1992년, 미국을 뒤흔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L.A. Riot)’. 백인경찰들이 흑인운전자 한 사람을 사정없이 폭행했던 동영상이 알려지면서 시작되었던 도시 소요. 흑인, 아시안계와 히스패닉계를 포함하는 유색인종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고, 한국교포들에게도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하였다. 피해 당사자 로드니킹(Rodney King)은 법정에서 증언하면서 모든 소란에 혼란스러운 심경을 한마디로 요약하였다. “우리 그냥 어울려 살 수 없을까요? (Can we just get along?)”피부색이 다르다는 외적 차별조건을 극복할 방법이 정말로 없겠냐는 그의 안타까움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끊임없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해 내는 능력은 인간이라면 거의 본성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출신이 다르고 피부가 다르며, 성씨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며, 키와 몸무게 그리고 혈액형이 다르다. 겉으로도 다르고 속으로도 다르다. 느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며 사상이 다르고 이념도 다르다.하나의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다른 겉모양과 속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이상 어울려 살아야 한다. 피해자 흑인 한 사람의 저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가. 우리는 어울려 살아낼 수 있는가.‘다르다’는 데서 시작해서 ‘틀리다’는 생각에 이르면 구별을 넘고 차별에 이르러 질시와 혐오, 폭력과 불공대천의 경지에 이른다.파국으로 치닫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 조절하며 견제하도록 우리에게는 ‘정치’라는 장치가 있다.정치는 권력을 획득해 행사하는 활동이지만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이해를 조정해 질서를 바로잡는 일을 하도록 국민이 위임한 행위인 것이다. 정치인들은 그렇게 하고 있는가. 정치인이 쏟아낸 한마디 말이 질서와 조정을 불러오기는커녕, 오히려 단절과 불화의 도화선이 되고 분열과 등돌림의 단초가 된다면 그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싸움꾼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정치인 당신은 화목의 씨앗을 찾아내는가, 아니면 분열의 기운을 조장하는가.사회가 조정과 타협을 통해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돕는 또 하나의 기제가 ‘언론’이다.사실을 밝혀 알려 여론을 형성하면서 민주주의가 구현되도록 사회적 공론의 장과 소통의 텃밭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흥미를 끌거나 충격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 머물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기초가 될 접점을 찾아내고 대화의 토대를 불러와야 한다. 사실과 문제를 알려내는 데 기여해 왔지만, 앞으로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에도 집중해야 한다.다른 나라의 언론계는 ‘해결책 저널리즘’이라 부르는 새로운 시도에 나서고 있다. 사람은 어차피 모두 다르다. 다른 모습과 다른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며 보듬고 포용할 때 민주주의로 가는 싹이 튼다. 갈등이요 분열이었을 다른 존재들을 정치가 조절하고 언론이 담아내야 한다. 흩어놓는 정치와 언론은 그만 보았으면 한다.

2024-01-24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대한민국이 사라진다. 2750년이면 지구상에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통계적 예측이 있다. 모든 상황이 지금과 같을 경우, 일본이 3000년이면 소멸할 것이며 우리나라는 그보다 일찍 지도에서 없어질 것이라 한다. 옥스퍼드대의 인구학자 데이비드 콜먼(David Coleman) 교수의 실증적 예측에 따르면, 인구소멸로 인해서 사라지게 될 최초의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 한다. 출산율은 이미 세계 최저일 뿐 아니라 OECD 국가들 가운데 합계출산율이 1.00 아래로 떨어진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저출산과 고령화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한다지만 분명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심각한 사회현상이 주목받는다.청년들이 결혼하지 않는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15년 147만쌍에 달했던 신혼부부 숫자가 2022년에 103만으로 떨어져 30%나 감소하였다. 아직 신혼일 적에 출산을 미루는 경향도 두드러져서 초혼 신혼부부 가운데 자녀가 없는 부부가 46.4%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출산을 두려워하고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은 날이 갈수록 대책 마련이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국토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출산율을 결정하는 주요 원인으로 주택가격, 전년도출산율과 사교육비를 들었다. 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는 까닭은 결국 ‘돈’이라는 셈이다. 물론 타당하다. 경제적 여건이 인간활동을 추동하기도 하고 제약하기도 하지만 돈 때문에만 출산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지나친 부분이 없지 않다. 거꾸로 보아, 돈이 많으면 아이를 많이 낳을까. 그렇게만 보이지도 않는다.데이터로 해결해 보자는 주장도 있다. 그동안의 관찰과 논의도 자료와 근거, 즉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경제적 문제와 사회적 고민을 떠올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데이터 없이 의견에만 기대어 내어놓았던 적이 없다. 뜬금없이 ‘데이터’를 들먹이는 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잘못 짚은 게 아닌가 싶다. 즉, 경제여건과 데이터만으로 오늘의 저출산과 결혼기피 현상을 해결할 수 없다.어쩌면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숨어있지 않을까. 돈으로 해결한다지만, 제시되는 해결책을 아무리 들어보아도 그리 흡족한 수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신혼부부에게 경제적으로 무엇을 얼마나 도와주면 걱정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결혼을 기피한다 하여 결혼식 비용과 혼수 일체를 지원하자는 주장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자는 기본 전제는 그리 적절하지도 타당하지도 않아 보인다.결혼과 출산을 경제적 결정 과정으로만 볼 수 있을까. 육아와 돌봄을 돈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가. 꿈과 사랑이 잉태되고 무르익어야 하고, 삶을 바라보는 비전과 희망에 싹을 먼저 틔워야 한다. 선배 어른들이 돈이 많아 오늘의 청년들이 태어났던 게 아니다. 경제적 기본여건을 고민은 하되, 미래를 향한 꿈이 자랄 수 있도록 사회문화적 토양을 길러내는 게 중요하다. 돈 때문에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다. 내일을 열어갈 소망과 꿈이 영글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사회현상을 경제문제로만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2024-01-17

이기고 돌아오라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아시안컵 축구대회의 막이 오른다. 카타르에서 열리는 대회에 출전한 대한민국 대표단은 역대 최강의 전력이다. 토트넘홋스퍼의 손흥민을 주장으로 파리생제르맹의 이강인, 울버햄튼 원더러스의 황희찬, 바이에른뮌헨의 김민재, 츠르베나즈베즈다의 황인범 등이 함께 뛴다. 실력으로만 보면 흠잡을 데 없이 강한 팀이다. 선수들이 모든 경기를 다치지 않고 거뜬히 치러주길 기대한다. 바라기는 물론 우승컵을 들어올렸으면 한다. 아시안컵대회에서 우리는 겨우 두 번 우승했었으며 그것도 64년 전이라 한다. 오랜 숙원을 시원하게 풀어내는 우리 대표팀이 되었으면 한다. 거의 전 국민의 기대가 아닌가 싶다.놀랍게도, ‘대한민국 대표팀이 우승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사람이 둘 있다. 손흥민의 소속 팀 토트넘 홋스퍼의 포스테코글루 감독, 그리고 손흥민의 부친 손흥정 감독. 우선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까닭은 익살스럽다. 호주 출신인 그는 ‘호주가 우승했으면 좋겠다’면서 대한민국이 준우승하라고 했다는 게 아닌가. 호주의 국가대표 감독도 역임했던 그로서는 거의 당연한 주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손흥정 감독의 까닭에는 의미가 있다. 아들이 뛰는 경기에서 우승하지 말라는 그의 속셈은 무엇일까. 우선 객관적인 전력에서 일본에 뒤진다고 했다. 선수 개개인의 축구실력을 모두 모으면 한국이 일본에게 절대적으로 밀린다는 것이다. 이번에 우승하면 한국이 자만하게 되어 대한민국 축구의 미래가 어두워진다고 했다. 실력뿐 아니라 경기력 향상을 위한 투자에도 한국은 중국이나 일본에 턱없이 못 미친다고 한다. 우승이 선수들의 자만뿐 아니라 축구계의 타성과 게으름을 초래할 것을 경고한 표현으로 보인다.손 감독의 지적은 옳다. 실력보다 나은 성과를 거두면 사람은 게을러진다. 그의 아들이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 수준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는데도 그는 ‘손흥민은 월드클래스가 아니다’라고 선언하였다. 잘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하듯, 그는 아들이 더 나은 경지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대한민국 대표팀도 마찬가지다. 이전 어느 때보다 가장 든든한 실력을 갖추었다지만 방심은 금물이다.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하여 우승에 가까이 가 주길 기대한다. 마지막 한 경기까지 승리하여 우승컵을 거머쥐길 바란다. 손흥정 감독의 걱정어린 한 마디처럼 ‘이후에도 자만하지 않으며 조련의 고삐를 느슨하게 하지 않는 대한민국 축구’가 되어주길 소망한다.쓴소리는 약이다. 경기에 임하여 어느 순간에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모습으로 보여주길 바란다. 국내 상황이 여러모로 어지럽고 복잡하지만, 시원한 경기력으로 사이다처럼 이기는 축구를 해주길 바란다. 이번에는 부친의 소망을 어기는 아들이 되어주길 바란다. 60년도 넘게 못 들어본 아시안컵을 들어올리는 건각들을 기대한다. 우승하였지만 자만하지 않는 축구계의 모습을 보여주어 대한민국 축구의 앞날도 환하게 해 밝혀주길 바란다. 오랜만에 축구로 하나가 되는 몇 날이 되었으면 한다. 대한민국 축구, 파이팅!

2024-01-10

특별한 기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새해가 밝았다. 흐린 하늘 탓에 수평선을 박차고 오르는 해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달력은 어김없이 용띠해로 접어들었다. 새날을 맞으며 거는 목표와 다짐이 한가득이지만, 올해는 유난히 사회와 나라에 바라는 바가 먼저 떠오른다. 개인적인 성취와 보람이 벅찰 터이지만, 공동체가 오늘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다.먼저, 폭력이 사라져야 한다. 새해를 스산한 칼부림으로 시작하였다. 상상조차 끔찍한 폭력이 자행되는 오늘은 정상이 아니다. 누구를 미워하여 세상이 나아질 수 있을까.생각을 폭력으로 제압할 수 있을까. 남을 해치며 내가 이기는 게임을 오래 할 수 있을까. 칼이든 돌이든 물리적인 수단으로 거두는 성취는 보람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보복이든 반격이든 폭력은 곱절로 번지게 마련이다. 신체적인 위해만 폭력도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어 마음에 병을 깊게 들게 할 수 있다. 학교폭력이 그렇고 사이버폭력이 그렇고 성폭력도 그렇다. 폭력은 범죄다. 무겁고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폭력을 물리치는 각성과 다짐을 새로이 하는 사회적인 캠페인이라도 일었으면 한다.새해는 정치판이다. 곳곳에 현수막이며 쉬지도 않고 전화벨이 울린다. 진심인지 빈말인지 헤아리기도 버거운 구호와 외치는 소리가 벌써부터 소란하다. 좋은 정치가 일어나 더 나은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요란하기만 하고 공허한 세상이 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출사표를 던진 이들은 바뀔 것 같지 않으니, 깨끗한 한 표를 지닌 유권자들이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대한민국을 질곡에서 건져낼 사람을 찾아야 한다.거짓과 선동에서 나라를 구해야 하고 폭력과 협박에서 사회를 건져야 한다. 희망과 기대를 다시 찾아야 하고, 상상과 창의를 다시 올려야 한다. 멈춰선 오늘에 시동을 걸 사람을 뽑아야 하고, 어제보다 내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 비난과 욕설에 솔깃하지 말고 비전과 계획을 말하는 사람에 주목해야 한다.새해에는 진짜 문제가 조금씩이라도 풀리는 모습을 만나고 싶다. 정략과 술수로만 시끄러운 정치권은 담론의 주제를 바꾸어야 한다. 공천과 탈당이 문제가 아니라 저출산과 고령화가 진짜 문제다. 당신들 개인 욕심이 문제가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하루하루 민생이 진짜 문제다.정치판의 구도가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경제와 사회의 안녕이 진짜 문제다. 정치인의 이합집산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안녕과 국토의 수호가 진짜 문제다. 다음세대 교육과 미래는 누가 챙기는가. 지구온난화와 기후문제는 돌아보고 있는가. 미래를 향한 비전과 계획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고, 해결책의 실마리라도 붙들고 씨름하는 정치를 만나고 싶다. 개인적인 소망도 여러 가닥이지만, 2024년에는 사회적인 진전이 조금씩이라도 꾸준하게 벌어지는 모습을 보았으면 한다. 봄에 있을 총선이 단초가 되어 나라와 사회에 좋은 일이 겹겹이 생기는 새해를 기대하고 기대한다. 2024년, 파이팅!

2024-01-03

문과와 이과부터 사라져야 한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사람은 사람을 모른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에 관해서 늘 궁금하다. 나는 사람들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다 보니, 사람을 유형별로 나누는 습관이 생겼다.혈액형으로 사람을 제 종류로 구분하더니, MBTI는 인간의 성향을 열여섯 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대학입시와 관련하여 문과와 이과로 나눈다. 공교육의 문턱을 나서는 어린 학생을 두 가지 성향으로 나누어 오가지 못하게 설정하는 게 옳은 일일까. 다행히 최근에 수능은 문이과를 구분하지 않는 통합형으로 치른다.그러면서도 수학과목에 통계와 확률을 선택하면 ‘문과’로 이해하고 기하와 미적분을 선택하면 ‘이과’로 본다.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는 뿌리깊은 인식구조가 아직 살아있는 셈이다.문과와 이과 구분을 없앤다는 정책이 저 ‘선택’ 탓에 오히려 왜곡되고 있다. 고등학교에서 문과가 사라지고 있어 교육계는 학교교육이 뒤틀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과를 선택하면 대학입시에 유리하여 문과 성향 학생들마저 이과 수학을 선택한다고 한다. 이과적 또는 문과적 성향의 구분이 과연 가능할까.학문과 전공분야에는 이과와 문과 구분을 모호하게 하는 선택지가 넘치도록 많다. 직장사회와 직업구조도 문이과를 구분하기보다 오히려 문과와 이과적 사고와 태도 가운데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기를 기대한다. 문과적으로만 생각하거나 이과식으로만 사고하는 세상이 이미 아니다. 문과와 이과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누구나 겸비해야 하는 소양성향쯤으로 이해해야 한다. 개인의 기호와 성향에 따라 상대적으로 더 가질 수도 있고 덜 가질 수도 있지만, 누구나 문과와 이과적 이해와 태도를 버무려 장착해야 한다.문제는 유형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기업경영은 문과인가 이과인가. 가정살림은 이과인가 문과인가. 상황은 언제나 복합적으로 발생한다. 통합적이며 균형잡힌 사고가 날마다 필요하다. 상황을 분석해야 하고 사람을 읽어야 한다. 숫자에 밝아야 하고 느낌을 짚어야 한다.배경지식도 필요하고 미래예측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문과와 이과라는 벽을 치고 칸을 만들어 서로 오가는 일마저 불편해져 버렸다. 문과와 이과는 함께 나눌 이야기마저 궁핍해져서 사회는 또 다른 양극화를 겪는다. 넘나들기 어려운 섬들이 생겼다. 문과적 소양과 이과적 능력을 따로 구분해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학생들이 균형잡힌 인성을 형성해가도록 이끌어야 한다. 문학과 역사, 수학과 과학을 넘나들며 폭넓게 배우도록 도와야 한다.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유네스코(UNESCO)는 네 가지 영역을 든다. 분석적 사고 (Critical Thinking), 상상과 창의(Creativity), 협력과 상생(Collaboration), 소통과 교류(Communication)라 한다. 문과나 이과의 구분은 보이지 않는다. 과목의 이름도 없다. 통합적으로 균형잡힌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를 바라보며 정상적으로 발전하기 위하여 우리 교육이 문과와 이과라는 케케묵은 구분부터 실질적으로 없애야 한다.

2023-12-27

문화가 살아야 지역이 산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2023년 대한민국 인구포럼에 참여했던 미국 위스콘신대 카렌 보겐슈나이더 교수는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절망적이다’라 하였다.그가 희망이 섞인 대안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현재 우리가 가진 인구위기는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사회적인 문제들이 속속 나타난다.이대로 가다가는 20년쯤 후는 나라의 경제, 사회, 문화가 총체적으로 가라앉지 않을까 싶다. 인구문제는 나라의 문제이면서 지역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구는 얼핏 머리 숫자 문제처럼 보이지만, 보다 넓은 영역의 생활여건을 마련해야 하는 과제이기도 하다. 내가 살기 힘든 곳에 아이들까지 낳아 고생시킬 부모는 없다. 살기 좋은 환경이 살아나려면 무엇을 먼저 고민해야 할까.대학을 졸업하는 청년들이 거의 모두 서울로 달려갈 꿈을 꾼다. 몇 년을 머물러 살면서 공부하고 생활했던 지역에는 왜 관심이 없을까. 청년들이 말하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는 일자리와 문화다. 경제력을 이어갈 일터가 부족하고 재미있고 신나게 즐길 문화텃밭이 척박하다는 것.일자리가 서울이라고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생각하면 진짜 문제는 문화인 셈이다. 돈도 필요하지만 즐길 거리가 필수라는 것. 살기 좋은 도시를 공표하는 해외 자료들에도 문화적 배경이 경제적 여건보다 우선순위 앞자리를 차지한다.마을과 지역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야기와 자랑거리. 외지 사람들마저 마력처럼 끌어들이는 흥미와 매력.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곳만의 독특한 그 무엇. 평범해 보여도 스토리텔링의 힘이 번득이는 홍보와 마케팅. 지역이 가진 문화의 힘 덕에 살아나는 지역시민의 자긍심. 솟아오른 긍지는 지역을 자랑스럽게 만들어내고야 만다.문화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발굴하여 나누면서도 오늘의 감각에 맞추어 새롭게 다듬어야 한다. 문화콘텐츠를 멋지게 ‘현재화’할 때 어른들만이 아니라 자라나는 어린이들도 함께 즐기며 누리게 될 터이다. 담긴 의미를 그대로 두면서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재미있고 알기 쉽게 새롭게 만드는 지혜를 키워야 한다. 세상이 우리와 함께 호흡하도록 ‘글로벌화’하는 일도 반드시 필요하다. 지역이 가진 소중하고 풍성한 이야기 소재들을 다시 돌아보아 오늘의 문화, 세계의 이야기로 새롭게 만들어내는 노력이 있었으면 한다. ‘옛것’으로서 문화를 넘어 오늘의 ‘일상’을 풍성하고 즐거우며 재미있게 만드는 문화의 텃밭을 가꾸어야 한다.문화가 살아나 지역민의 일상이 되면 지역의 자긍심이 올라가고 주변으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 터이다.지역의 품격과 매력에 끌려 찾아올 관광객의 발걸음과 함께 경제적 발전은 지역의 안정적인 인구정책과 관리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믿는다. 지역소멸을 두려워하기 보다 문화와 이야기의 힘에 승부를 걸었으면 한다. 우리만의 이야기를 살펴 발굴하고 오늘의 트렌드에 맞추어 새롭게 창조하여 문화와 예술이 넘실대는 지역으로 만들어야 한다. 문화가 살아야 지역이 산다.

2023-12-20

이제는 문화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60년대에 상업창부(商業創富)라 하였다. 장사로 얼른 돈을 벌어야 했다. 80년대가 되자 과기창신(科技創新)이라 외쳤다.과학기술로 새로운 걸 만들자고 했다. 21세기로 들어오면서 문화창의(文化創意)의 기치를 걸었다. 이제는 문화로 뜻을 만든다는 것이다. 중국 이야기다. 중국이 공산사회주의롤 기조로 하면서도 시대마다 유연성을 유지하면서 국가를 경영해 오는 기조를 그렇게 바꾸어왔다. 지난 세기를 건너오면서 상업과 과학기술에 운명을 걸었고 이제는 문화로 승부하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실제로 중국정부는 문화산업을 핵심산업으로 지정하고 국민총생산(GDP)대비 5퍼센트 정도를 문화로 채우고 있다. 그런 가운데, 동북공정(東北工程)이 문화확장정책의 한 가닥으로 눈에 뜨이고, 유럽과 아프리카,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연결하겠다는 일대일로(一帶一路)사업에도 문화가 적지않은 부분을 차지한다.21세기는 문화가 이끄는 시대임을 선포한 것이며, 여러 방면에서 풍성한 문화정책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정치와 경제, 외교와 국방이 나라를 운용하는 기본수단이지만, 문화의 텃밭이 넉넉해야 새로운 시대를 자신있게 열어갈 것임을 알아챈 것이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문화의 중요성에 눈을 돌리는 세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혼란했던 시절에 고국으로 돌아온 김구 주석이 이렇게 적었다.‘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그토록 어지러웠을 국가현실의 한 가운데에서 어떻게 문화를 떠올렸을까. 어떻게 문화를 ‘힘’이라 적었을까. 그는 사람이 푯대로 삼아야 할 여러 지향점들 가운데 문화가 가장 높은 경지임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의 것이라 내세울 문화가 우리에게 있는가. 문화를 힘으로 만들어 내는 일에 얼마가 생각을 기울이는가. 정치와 경제로만 사람의 삶이 행복하지 않으며, 국방과 외교에도 한계가 있다. 독특하고 분명한 문화적 품격을 길러야 한다. 우리 스스로 이를 살피고 발굴하며 다듬어야 한다.지역은 어떠한가. 지역에 고유한 문화원형(文化原形)을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활용하여 지역만의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문화는 모두 옛날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고루하다. 문화는 지극히 자연발생적이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언제든 새롭게 피어나고 저절로 변화해 간다. 오늘 우리의 모습에서 남들과 다른 독특한 문화자산을 찾아야 한다. 이제는 문화다. 문화로 승부하고 상상력으로 겨루어야 한다. 이전과 다르고 남들과 다른 나라가 되고 지역이 되어, 문화가 힘이 되는 미래를 열어가야 한다. 어려웠을 때 문화를 떠올렸던 까닭을 새겨야 한다.

2023-12-13

포항은 사라지는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최근 외신은 대한민국이 인구격감으로 곧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하였다. 합계출산율이 1 아래로 떨어진 나라가 세계적으로 드문 가운데, 우리나라는 놀랍게도 0.78을 기록하였다. 이는 한 세대 30년이 지나면 인구가 오늘의 39퍼센트 정도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숫자다. 5천만 대한민국이 2063년 경이면 2천만이 되고 2093년에는 1천만도 안 되는 작은 나라가 된다. 인구가 국력의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이웃 일본이 합계출산율 1.3 이상을 버티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인구정책에 있어 우리가 큰 문제에 봉착했음에 틀림이 없다. 포항은 어떤가. 작년 통계는 합계출산율 0.88이다. 국가평균보다는 낫지만 안심할 수준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포항인구는 30년 안에 22만, 60년이면 10만 아래로 쪼그라든다.100년쯤 지나면 포항은 지도 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을 살리고 포항을 살릴 수 있을까. 인구동향에 지혜를 모아 대처해야 한다.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논설은 대한민국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까닭으로 두 가지를 들었다. 극심한 교육경쟁 문화가 젊은 부모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에 더한 극심한 불안을 안겨주는 문제가 우선 크다. 그리고 문화적 보수성향과 문화경제적 현대화 사이에서 생기는 사회적 갈등의 문제가 극심하다. 교육경쟁은 심각하다. 인구의 감소로 대학정원이 급격히 줄어드는 데도 대학입시를 정점에 둔 교육정책의 결과로 수험생과 부모들에 대한 압박은 오히려 늘어난다. 자녀양육과 교육을 편안하게 대할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낼 정책적 배려가 시급하다.유교문화에 뿌리를 둔 우리의 가부장적 문화기반이 현대적 가족질서로 나아가는 길에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문화적 갈등을 빚고 있다는 지적도 따끔하다. 남성위주였던 노동시장의 질서는 양성이 모두 참여하는 새로운 길로 들어섰는데 가족관계와 자녀양육 등의 역할과 의무는 아직도 전통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가 아닌가.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모두 맡아야 하는 육체적 정신적 부담에서 탈피하려는 게 당연하다 싶다. 새 생명이 가정에 찾아오는 기쁨을 함께 누리고 다음세대의 성장을 즐겁게 도우며 미래를 가꾸어가는 보람을 만끽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고려가 있어야 한다. 가부장적 태도가 엿보이는 ‘여성중심’의 생각을 벗어나 ‘양성이 함께 참여하고 더불어 누리는’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가정으로 이끌어야 한다.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룬 결과 오늘의 인구수준을 유지하려면 합계출산율은 2.0이 되어야 한다. 두 사람이 만나 두 사람을 남기는 일. 선진국들의 추세는 1.50 정도로 보인다. 합계출산율 0.78은 낮아도 너무 낮은 수준이다.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순전한 기쁨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 가정의 행복이 나라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국가정책의 입안과정에서 인구문제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하고 나라의 미래를 위하여 특단의 조치들이 따라야 한다.아이를 더 낳고싶은 터전을 만들어 미래의 대한민국을 앞당겨야 한다. 아기 울음소리로 가득한 포항을 만들어야 한다.

2023-12-06

선거문화, 문제있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정치의 계절이다. 총선이 다가온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데, 국민은 혼란스럽다. 300명 국회 구성원을 바꾸는 절차일 뿐인데 온 나라가 어지럽다. 아직은 지역구도 획정해야 하고 비례대표 선출방법도 오리무중이라 국민은 마음이 산란하다. 국민은 그저 평온하고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안심하고 살아가는 나라를 만나고 싶은데, 정치판은 그들만의 리그에 빠져 소용돌이를 친다. 지역의 일꾼을 뽑는 잔치가 이벤트 행사판이 되어 사방이 확성기 소음으로 시끄러울 예정이다. 지역이 바뀌고 살림이 나아질 기대는 저만치 가고 후보 간 표 싸움만 그득할 셈이다. 무엇이 어찌 바뀔지는 제대로 가늠도 못 하고 표를 던져야 하니, 선거가 정말 국민과 지역을 위한 결과를 낳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후보의 입장에서도 정책이나 능력으로 승부하기 보다 인기몰이나 세 과시가 최우선이 아닌가. 새로운 일을 만들고 지역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며 나라에 미래비전을 제시해야 하지만, 표심몰이와 포퓰리즘에만 집중하는 선거는 또다시 그렇고 그런 결과를 낳을 터이라 유권자가 이제는 선거에 특별한 기대를 걸지도 않는다. 민주주의 발전은 그만 두고 제자리걸음만 반복한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현수막과 확성기, 악수세례와 허리인사로 치르는 선거를 하염없이 거듭하는 선거판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겠는지. 희망과 비전을 실은 정책을 만들고 토론과 홍보를 통해 겨루며 언론이 정상 작동하면서 검증되고 확인되는 진짜 민주주의를 실현할 길은 없는가.정책입안 과정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홍보전략의 진행이 체계적으로 정돈되며 언론 소통과 전달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일은 우리 민주주의에서 불가능한 일일까. 정책은 국정과 지역의 현안을 치밀하게 분석한 결과로 토론과 조율을 거쳐 정교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홍보는 유권자의 생각과 의견을 반영하면서 진심을 담아 진행되어야 한다. 언론은 지역과 유권자의 현상을 가늠하고 후보자들의 정책을 비교하면서 균형있는 소통을 이끌어야 한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소란스럽고 현란하기만 할 뿐, 정책과 비전은 뒷전이고 표심만 구걸하는 모습이 아닌가. 막걸리와 고무신이 판을 치던 그 옛적 선거와 무엇이 그리 다른지 알 길이 없다. 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미래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책, 홍보, 언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전문교육기관이 필요하다.소란하나 공허한 ‘빈수레 선거방식’은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엄청난 비용을 치르고도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는 선거방식은 사회적 합의를 거쳐 기필코 수정해야 한다. 제자리 걸음은 사실상 퇴보다. 민주주의의 껍데기를 쓰고 인기 영합에만 집중하는 선거는 실패한 시스템이다. 뽑아놓고 후회하는 습관이 이대로 좋은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책, 홍보, 언론이 선진화되지 않고는 선거가 제자리를 잡을 길이 없다.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정책, 홍보, 언론의 전문화가 시급하다. 선거는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빚고 있는가.

2023-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