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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환경위기, 지구위기, 인간위기

장규열 고문 백년 전,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주로 유럽으로부터 이민자들이 몰려왔으며 그 가운데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인들도 섞여있었다. 거친 바다를 건너 뉴욕에 도착한 이민자들이 처음 만나야 하는 일은 입국심사와 함께 부여된 소독과 방역. 화생방훈련이라도 하듯이 검역관이 쏘아대는 디디티(DDT) 연기를 뒤집어써야 했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도착한 첫날, 화학살충제의 짙은 연기를 만나야 했다. 그런 연기의 폐해를 고발한 사람이 있었다.레이철 카슨(Rachel Carson)이 1962년에 저서 ‘침묵의봄(Silent Spring)’을 발간하였다. 살충제 속에 들어있는 화학물질이 곤충과 조류, 어류와 포유동물에게까지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점을 고발하였다. 먹이사슬을 통해 동식물체 생태환경에 축적되어 결국은 지구환경과 인간생태계가 무너질 것이라 경고하였다. 그런 결과, 이민국에서 DDT 사용을 방역과정에 사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환경의식이 싹트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새들이 사라지고 들판이 황폐하여 동식물은 물론 사람도 살 수 없는 무섭게 삭막한 봄이 찾아올 터이라고 예고하였다. 카슨은 그야말로 선각자(先覺者)였다.오늘 우리는 어떤가. 산업화와 도시화를 겪으며 지구를 해치고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중단없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위기에 경고음이 떠오른 지도 십수년이 되었지만 뾰족한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는다. 일상생활 가운데 플라스틱 제품과 일회용 편의품의 사용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사회경제적 배경을 둔 인구고령화와 저출산현상과 연합하여 인류의 전성기는 지구상에서 저물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현실 정치는 그들만의 리그에 심취하여 정쟁을 반복하느라 지구와 환경 따위는 우선순위에 올라오지 않는다. 60년 전 세상은 그래도 양심바른 저자의 책 한 권에 마음을 돌렸었는데, 21세기 세상은 오늘 코앞의 이익 말고는 생각이 가 닿지 않는다.6월 5일은 유엔이 선포한 ‘세계 환경의 날(World Environment Day)’이다. 올해 주제는 ‘세대회복(Generation Restoration)’이다. 환경을 긍정적으로 돌이켜 무너져 내리는 세대를 회복하자는 게 목표라고 한다. 즉, 환경회복을 통하여 인구위기의 돌파구까지 모색하자는 것이다. 땅의 힘을 회복하게 하고, 지구표면의 사막화를 방지하며 가뭄을 극복하는 데 일차적인 전략목표를 둔다고 한다. 농업을 지속가능한 산업으로 육성하고 식수자원과 해양환경을 보호하며 도시개발에 있어 자연환경을 균형있게 보존하는 데 역점을 둔다고 한다. 지구환경을 위한 경각심을 전 지구적으로 일으키기 위하여 세계 각국이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기로 권하겠다고 한다.우리 정부는 어떤가. 자연환경과 지구자원을 보호하여 자연생태계와 인간문명의 균형적인 상호작용을 확보하고 사람이 살기 좋은 환경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새소리와 물소리로 가득하여 자연과 인간이 함께 숨쉬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지구를 만들어야 한다. 지구는 하나 밖에 없다.

2024-05-29

흘려보낸 부부의 날

장규열 고문 함께 오래도 살았다. 달콤하게 찾아왔던 사랑을 지키기로 다짐하며 둘이서 건너온 날들은 어디로 다 가버렸을까. 만나고 헤어진 수다한 얼굴들 가운데 아직도 곁을 지키고 있는 당신과 나는 어쩐 영문일까. 헤아릴 수도 없을 이야기들 가운데 늘상 등장하는 당신은 내게 누구란 말인가. 살을 부비고 살아도 속속들이 다 안다고 할 수도 없는 당신은 누구인가. 사람이 생겨난 것도 신기한 일이었는데, 생각할수록 신통한 것이 부부라는 사람들이 아닐까. 아이들마저 있고 보면 둘이서 만들어온 세상이 신묘막측하다. 울고 웃으며 놀라고 화도 내지만, 얽히고설킨 이야기들 가운데 빚어온 시간의 흔적은 부정할 방법이 없다. 내 탓이고 당신 덕이며 함께 걸어온 발자욱이 고맙고도 미안하다.둘이서 만들지만 하나인 듯 살아야 하는 게 부부라 한다. 부부의 날이 21일인 것도 둘이서 하나를 만들라는 뜻이라는데, 그게 정말 가능한가. 박자가 맞기는커녕 갈수록 엇나가기만 하는 당신과 내가 아닌가. 하나가 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게 아니었을까. 하나는 어차피 못 이룰 것이니 참고 견디며 살아가겠노라는 소박한 다짐이 현실적이지 않을까. 적당히 포기하고 이제는 거울 앞에 돌아와 선 심정으로 체념하고 그냥 일상을 대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공연히 부딪히지 않고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며 남도 아니지만 하나도 아닌 듯 그렇게 그렇게 지내는 게 서로에게 이롭지 않을까. 다그치지 말고 침범하지도 않으며. 사랑은 꺼져버리고 관심도 전혀 주지 않으며 한 울타리에 사는 당신과 나는 부부인가 아닌가.‘부부’인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아이들 탓에 산다는 건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다. 함께 사는 김에 뭐라도 만들어가는 시간이어야 하지 않을까.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도 끈끈한 마음이 있지 않은가. 넘치는 열정이야 식었겠지만 샘솟는 호기심은 그래도 있지 않은가. 치열한 시샘은 잊었더라도 잔잔히 흐르는 관심은 살려 두었겠지. 핏대어린 싸움을 이제는 못하겠지만 마음에 담지못할 미움도 이제는 없다. 부부가 되어 함께 바라보며 불쌍히 여길 이웃이 저기 있지 않은가. 부부가 되어 마음모아 일으켜 세울 다음 세대가 거기 있지 않은가. 뜨겁게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정겹게 나누어줄 넓은 아량이 이제는 생겨야 한다.서로만 바라보기보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마음이 되어. 부부의 날을 한 번쯤 기억했으면 한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어 이제 서로에게 무엇을 선사할 것인지 새겨보았으면 싶다. 받으려고만 하며 살아오지 않았는지, 나누기에는 인색하지 않았는지. 당신의 목소리를 이제는 들어주는 내가 될 수는 없겠는지. 세상에 완벽한 당신은 어디에도 없었음을 어째서 애써 모르는 척하며 살아왔는지. 어차피 부족하여 도우며 살아야 했음을 왜 이제야 깨닫게 되는지. 격려하고 북돋우며 응원하고 일으키는 당신이 되고 부부가 되시길. 늦었지만, 부부의 날을 축하합니다!

2024-05-22

성년의 날을 생각한다

장규열 고문 수능은 그냥 시험이다. 대입을 위한 최소조건을 견주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그걸 놓고 점수발표날이면 온 나라의 언론이 만점자를 찾아 인터뷰를 하고 공부 비결과 장래희망을 물으며 촌극을 빚어왔다. 그래서 어찌 되었는가. 의과대학에서 배운 의술로 여자친구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히포크라테스가 들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의술은 살리는 기술이다. 물론 의술로 죽일 수도 있다. 그래서 윤리가 있고 히포크라테스가 외친 게 아닌가. 선서의 첫머리에 ‘인류를 위한 봉사에 나의 삶을 바친다’고 새긴다. 그런데 나의 삶을 고사하고 남의 생명을 빼앗았다는게 말이 되는가. 또, ‘인간의 생명을 가장 소중하고 생각하겠다’면서 타인의 목숨을 끊은 의술이었다면, 수능 만점은 실패한 점수가 아닌가.의정갈등이 최고조다. 의대입학이 인기 만점이다. 의사가 돈을 많이 벌기는 하는가 본데, 의사가 되어 지켜야 할 윤리와 품격은 누가 가르치는가. 솜씨좋은 의사를 명의라 한다면, 품성 높은 의사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의학교육이 지식과 기술을 정교하게 하도록 매진하면서 생명을 높이 존중하여 의술을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꼭 의술만 그런 것도 아니다. 경제학을 배워 나라경제를 일으킬 수도 있고 망칠 수도 있다. 정치가가 되어 국민에게 수다한 유익을 끼칠 수도 있지만 정략에 매몰되어 나라를 가라앉게도 하지 않는가. 모든 지식을 가르치는 길에 윤리와 품성을 가장 먼저 강조해야 하는 까닭이 보이지 않는가.마침 ‘성년의 날’이 다가온다. 5월 셋째 월요일을 기념하는 의미는 이제 성인의 나이가 되었음을 기억할뿐 아니라 성인이 되어 지녀야 할 책임과 태도를 새겨주려 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일에 상관없이 어른이 되면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소양을 깨우치게 하고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도록 기대함이 아니었을까. 사회의 구성원이 되어 자신의 이익뿐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의 유익을 함께 돌아보는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을까. 대입현장에서 의과대학의 인기가 치솟는 현실은 윤리와 품성을 잊게 만드는 세태를 떠올리게 하여 씁쓸하다. 자본주의 세상에 돈이 필요하지만, 돈만 따라가는 성공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 아닌가 하여 우려가 앞선다. 갓 스무살 청년에게 꿈을 길러주어야 하지만 꿈을 돈으로만 계산하도록 가르친다면 문제가 아닐까.상상과 창의를 떠올리면 세상에는 할 일이 너무나 많다. 대학에 펼쳐진 전공분야의 숫자만 보아도 누군가 열정과 열심을 품고 일으켰을 분야가 수두룩하다. 세상과 이웃을 조금만 둘러보아도 도움의 손길과 관심의 눈길이 필요한 대목이 수두룩하다. 성년의 날을 맞은 청년들에게 의학은 물론 그 밖에도 평생을 던져 건져야 할 세상의 굽이 굽이가 너무나 많다는 걸 일깨워 주어야 한다. 수능만점이 신기하지만 누구에겐가 가능했을 점수쯤으로 여기는 여유를 가르쳐야 한다. 어렵고 힘든 세상의 온갖 문제를 해결할 넉넉한 인격체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2024-05-15

스승의날을 생각한다

장규열 고문 불가능했을 일이 벌어졌었다. 직장생활 끝에 뜻을 정해 떠나기는 했지만, 모든 게 서툴렀다. 그가 아니었으면 오늘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지도교수 미라클(Gordon E. Miracle) 선생은 낯설었을 한국 유학생에게 수많은 도움을 주었다. 직장을 잡아 학교를 떠나기 전날, 교수님과 마지막으로 마주 앉았다. ‘교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나 깊으므로, 오늘은 제가 무엇이라도 갚아드리고 싶습니다.’ 뜻밖의 제안이었을까.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는 ‘내가 자네를 위해 선생으로 뭘 특별히 했는지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그래도 자네가 굳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제부터 만나는 학생들에게 그렇게만 하게나.’라고 했다.참으로 충격이었다. 받은 생각을 마음에 새기고 돌아서 살아온 수십 년이지만, 그 말씀을 실천했는지 창피하기 짝이 없다. 스승과 제자. 그는 선생이라는 내색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일상과 일과 가운데 선생이자 동료였다. 온 힘을 다해 함께 하였고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만났던 학생들에게 그리 했을까. 어느 한 순간 받은 큰 도움이 아니라 유학생활 칠 년을 건너며 날마다 받았던 스승의 은혜는 갚을 길이 없다. 나를 기억하는 제자들에게 나는 흉내라도 내어보았는가. 제자가 퇴직한다니까, 구순을 훌쩍 넘기신 선생께서 축하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선생이 학생을 생각하는 마음은 끝나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만나는 선생님과 아이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배려와 진심으로 만났던 선생님이 그리워진다.다시 스승의 날. 박제된 구호처럼 글자만 그럴싸하다. 마음에 짐만 쌓으며 슬그머니 지나가는 날이 아닌가. 어느 하루를 잡아 어색하게 챙길 일이 아니다. 교육의 마당에서 날마다 만나는 ‘선생과 학생’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삶을 나누고 믿음을 쌓으며 가르치고 배우는 사이에 끈끈해지는 게 스승과 제자의 관계다. 학생이 인권을 외치고 선생이 교권을 주장하는 곳은 이미 학교가 아니다. 교육과 성장이 일어나는 곳일 수가 없다. 교육이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학교가 그 가치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가르침의 의미를 새롭게 살려야 하며 배움의 큰 뜻을 들어올려야 한다. 받을 것을 따지기보다 나눌 것을 헤아려야 한다. 학생들은 내일을 품었을 터이다. 선생은, ‘내가 가르쳐 내일이 열린다’는 흥분으로 살아야 한다.진심은 통한다. 학생과 부모들이 인정하고 따라와 주는 일도 선생에게 달리지 않았을까. 정성을 쏟으면 식물도 반응한다는데, 온 마음을 쏟아 만나는 아이들이 바뀌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선생님은 그래서 ‘가르치는 일이 정신적 업무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육체적 노동이었다’고 하였다. 마음과 몸을 던져 세상을 바꾸시는 선생님들이 아직도 많다. 대학입시에서 교대가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학생 숫자가 줄어 걱정이라지만, 학교에는 똘망똘망한 아이들이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다. 기억도 다 못하는 선생님들 덕분에 오늘 내가 여기에 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당신은 기적입니다.

2024-05-08

어린이날을 생각한다

장규열 고문 그런 생각을 어떻게 떠올렸을까. 나라를 잃었던 시절에 소파 방정환은 ‘우리의 미래는 어린 꼬맹이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작고 어린 아이들을 부르는 이름이 따로 없다고 생각해 ‘어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와 생각을 같이 했던 어른들이 모여 어린이를 위한 활동을 한 끝에 우리 정부는 1957년에 ‘어린이헌장’을 제정했다. 7개 조로 만들어진 헌장은 전문에 ‘모든 어린이가 차별없이 인간성을 지니고, 나라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 사람으로 존중되며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함을 길잡이’로 삼겠다고 했다. 1922년에 처음 생겼던 5월 5일 어린이날이 다가온다. 정치가 혼탁하고 환경이 무너지며 사회가 어지러운 오늘, 우리는 어린이날을 어떻게 맞고 있는가. 세상만사에 묻힌 나머지, 어린이가 우리의 내일임을 잊은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필자는 한때, 우리에게 ‘어린이날’이 따로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겼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한 미국인 친구의 한 마디에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한국은 일 년에 단 하루를 정해 어린이날로 삼는가, 우리는 날마다 어린이날인데….’ 우리에게 어린이는 정말로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사람’인가. 어린이헌장은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된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그들의 안전을 놓고 흥정하는 꼴을 보지 않았는가. 어린이가 안심하고 즐겁게 자라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잃었던 나라를 찾기 위해서도, ‘어린이가 잘 자라야 한다’고 했던 그 어른들의 간절한 마음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사회가 달라지고 문화도 달라졌다. 어린이날을 맞으며 드는 아쉬움은 ‘동요’가 사라진 안타까움에 있다.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밝고 맑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배우면서 자라야 한다. 그 많던 어린이들만의 노래들은 어디로 사라지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음악을 함께 들으며 지낸다. 올해는 한국의 첫 동요로 인정받는 윤극영의 ‘반달’이 탄생한지 100년 되는 해라고 한다.‘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 마리/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쓰인 낱말들과 표현방식이 옛스럽기는 해도 아이들만 가지는 상상의 날개를 한껏 달아주었던 동요가 아닌가. 2절 가사는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고 불러 어린이들이 가슴에 희망을 품고 자라나기를 기대하고 있다.어른의 삶이 팍팍할수록 어린이의 내일을 기억하는 일상이었으면 한다. 어린이들의 처지와 나날을 배려깊게 살피면서 나라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놀며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충분히 마련해 주어야’ 하고 어린이는 ‘위협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하고 안전을 지켜주어야’한다. 미래를 향한 확실한 투자로서 어린이들을 잘 가르쳐야 하며, 경쟁과 다툼보다 상생과 협력의 묘미를 일깨워 내일의 대한민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린이헌장은 놀랍게도 어린이를 ‘세계인’으로 키워야 한다고 적고 있다.

2024-05-01

교육이 민생이다

장규열 고문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마주 앉는다. 만시지탄이지만 반갑다. 두 사람 모두에게 국민과 나라를 위한 진정과 진심을 기대한다.시대정신과 역사담론은 차차 살피더라도, 급한대로 민생을 돌아보는 공감과 배려가 나타났으면 한다. 시장이 한산하고 가게에 사람이 없다. 도시마다 도심이 사라졌고 마을마다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 시내버스가 빈 차로 달리고 지역공동체가 활력을 잃었다. 경제적으로 힘이 빠지고 문화적으로 생기가 없다. 누구 탓이라 할 것 없이 사회 일반이 가라앉는 느낌이다.대통령과 정부가 심기일전의 각오로 경제와 민생을 살피고, 야당과 비판세력은 실질적 대안과 담론을 이끌어야 한다. 생각이 조금씩 다르겠지만 모두가 한 팀이 되어야 한다.국민은 기대한다. 여와 야가 공감대를 발견하여 국민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빚어내길 바란다. 들어설 적에 소통을 강조했던 대통령이 초심으로 돌아가 귀를 열길 바란다.오래 기다린 야당 대표는 국민을 향한 진심을 담아 제의하길 바란다. 만남에서 결실이 컸으면 좋겠지만 그간의 분위기로 보아 국민은 거기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반목과 대결이 대화와 소통으로 바뀌기만 해도 환영할 터이다. 어려움을 올려놓고 함께 고민하는 테이블이 마련되길 바란다.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할 까닭이 없고 불화를 자초하며 목소리를 키울 명분도 없다. 국민의 하루하루가 처절한 난관에 봉착한 오늘, 두 사람은 절체절명의 각오로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 대화의 기회가 정쟁과 분란의 빌미가 된다면 현명한 국민은 그 책임의 소재를 눈치채고 말 터이다.무엇을 나눌 것인가. 야당이 대국민 사과, 채 상병 특검, 거부권 자제와 25만원 국민지원금을 포함한 3+1을 주장하겠다고 한다.야당으로서는 그간의 아쉬움과 기대를 엮어 요청할 만한 대목들이다. 총선이 보여준 국민 과반의 생각으로 보인다. 대통령은 국가수반다운 모습으로 나서야 한다.우선, 소통의 창구를 상시화하겠음을 천명하여 국민이 안심하도록 했으면 한다. 구시대적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겠음을 밝혀 미래를 향한 나라의 지향성을 알렸으면 한다. 어느 진영에 묶이지 않고 국민 모두의 대통령임을 확인하면서 선이 굵은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면 좋겠다. 세세한 입씨름 거리에 묶이지 않고 큰 획으로 나라의 어려움을 헤쳐가는 장수의 모습으로 나섰으면 한다.누구도 말하지 않는 가닥이 있다. ‘교육’을 돌아보는 지도자를 기대한다.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매일 겪어야 하는 민생은 바로 교육이다. 만5세 초등교육과 유보통합의 가능성을 말했던 정부가 아닌가.의정갈등 소용돌이에도 대학입시와 고등교육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디지털과 온라인이 폭주하는 현실에서 백년대계 교육의 현장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 국가교육위원회의 역할이 상징적인 협의체를 넘어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대안을 도출하도록 바꾸어야 한다. 나라의 내일이 바뀌려면 교육이 오늘 바뀌어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는 두 지도자의 현명한 통찰이 교육을 소재로 드러났으면 한다.

2024-04-24

세상은 상상력에 목숨을 건다

장규열 고문 세상이 먹먹해 보였던 1970년대 끝 무렵, 소설가 이병주는 ‘행복어사전’에 이렇게 적었다.“파사데나의 젊은이들은 우주정복을 꿈꾸는데, 꽃은 한 번밖에 피지 않는다.” 암울한 현실을 지나고 있었던 당시의 우리 젊은이들에게 바다 건너 청년들은 저 먼 우주를 겨냥하고 있음을 일러주었다. 동시에 꽃은 딱 한 번 필 것임을 경고하였다. 일상이 어둡고 답답하다 하여 코앞의 현실에 파묻힐 게 아니라 상상력을 발동하여 멀리 보면서 내일을 꿈꿔야 한다는 권고가 아니었을까.상상과 창의. 4월 21일은 ‘국제 창의와 혁신의 날(World Creativity and Innovation Day)’이다. 세계인들에게 창의와 혁신을 통하여 지구가 처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밝은 내일로 나아가자는 요청과 염원을 담아 유엔이 지정한 날이다. 공식적인 교과과정이 물론 존재하지만, 이제는 형식적인 교육내용을 뛰어넘는 상상력과 창의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올해는 사람들에게 창의적 영감을 불어넣으며, 그런 사람들을 연결하고 함께 행동하는 마당을 만들어 보자는 목표를 테마로 삼았다고 한다.나라의 미래는 어디로 가는가. 내일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다음세대’에게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백년대계(百年大計)를 말하지만, 누구도 교육에 진정을 싣지 않는다. 민생을 돌본다면서 정치는 교육을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세대에게 꼭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험한 세상을 헤쳐가기 위해 반드시 길러야 하는 소양은 무엇인가.상상과 창의. 지난 세기 모방과 추격을 거듭하며 격차를 줄이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는 상상과 창의로 앞자리를 유지해야 하고 차이를 드러내야 한다.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실현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운 무엇으로 승부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향해 비판적 시선을 던지며 참신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누구도 가보지 않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야 한다. 기존 틀을 깨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도전을 거듭해야 한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결과물을 내어놓아야 한다. 교육은 다음세대를 상상과 비전의 바다로 이끌어야 한다.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국내만 생각하면 답답하고 협소하지만 다음세대가 걸어갈 활동 무대는 세계시장이다. 시선을 확장해 세상을 바라보도록 도와야 한다. 나라 안 다툼에 매몰되어 낙심하지 않도록, 나라 밖 환경과 협력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세상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다음세대가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상을 바꿔 내도록 부추겨야 한다. 이념의 낡은 틀도 극복해야 한다. 좌와 우로 나뉘어 다투는 구태를 벗어야 한다. 건강한 보수를 충분히 이해하고 진보의 발걸음을 자신있게 내딛도록 일깨워야 한다. 보수와 진보 모두를 끌어안는 넓은 가슴을 가르쳐야 한다.이미 열린 21세기를 자신있게 걸어가는 다음세대를 길러야 한다.앞으로 백년을 준비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기르는 다음세대가 세상을 바꿀 터이다. 교육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대한민국이 살아야 세상이 바뀐다.

2024-04-17

이름값하는 국회를 기대한다

장규열 고문 총선이 지나갔다. 떠들썩한 몇 달 동안 정권심판을 떠올리고 국정안정을 기대하며 새 국회가 선출되었다. 이모저모로 세상의 이목을 끌면서 민주주의의 잔치는 한 자락 역사가 되었다. 국민은 살아 움직이는 정치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목격하였다. 한 표의 가치가 얼마나 육중한지 절감했으며 정치의 지향성을 설정하는 시민의 힘을 다시 보았다. 당선의 기쁨을 누렸거나 낙선의 쓴잔을 들었어도 국민의 결정 앞에 모두 겸허해야 한다. 우리의 모습이 거울이 되어 새 국회는 나라와 국민에게 희망과 격려가 되는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국민은 ‘일하는’ 국회를 기대한다. 진영으로 편을 갈라 정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모습, 볼 만큼 보았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우리 국회가 발맞추어 정책과 제도로 대응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릴없이 좌와 우로 가르며 허장성세로 세월을 보낼 일이 아니라 실속있게 민생경제를 살려야 한다. 실력과 의지가 함께 드러나는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국민은 ‘하나가 되는’ 국회를 바란다. 생각의 차이와 의견의 다름을 인정하고 치열하게 헤아리고 견주어 나라와 국민을 위한 최적의 해결방안을 만들길 기대한다. 방법이 다르고 이념에 다소 차이가 있을지언정, 의원들은 모두 국민을 위한 ‘한 편’이었음을 확인해야 한다. 온갖 어려움 앞에 하나가 되는 국민들에게 이제는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을 국회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국민은 ‘품위있는 국회’를 기대한다. 선동과 막말을 수다하게 겪은 국민은 실체있는 담론과 결실맺는 토론을 기다린다. 사이다 말펀치가 간혹 속시원했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끌어냈던 기억이 없다. 당신을 뽑아준 지역유권자를 부끄럽게 하고 국가의 의정단상을 욕보이는 행태를 더는 안 보았으면 한다. 다음세대에게 본이 되는 국회가 되어주시라.물론 국민도 바뀌어야 한다. 임기 내내 감시와 견제를 게을리 아니하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 유권자를 우습게 보게 하며 선거 때만 큰절을 받는 구태를 끊어내야 한다. 우리를 대신하여 일하는 국회의원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되 끊임없이 결실과 성과를 요청하는 적극성을 길러야 한다. 국회를 통해 민의가 구체적으로 반영되도록 소통하여 아이디어를 던지고 제안에도 나서야 한다. 정치가 긴장하여 열매를 맺으려면 국민이 부지런해야 할 모양이다. ‘국민이 스스로 다스리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실현하려면, 국회의 임기 4년을 국민의 목소리로 채워야 한다.세상이 달라졌다. 새 국회가 만나는 나라가 새로운 나라이며,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놀라운 국회를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던 신선한 국회의원이 되어 주시라. 세상을 바꾸는 기대로 가득한 길 위에 당신의 노력과 성과가 분명히 보이는 민의의 전당을 만들어 주시라. 국민의 요청에 국회가 귀를 기울이고 국회의 노력에 국민이 화답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가슴 뿌듯한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

2024-04-10

4월은 잔인한 달인가

장규열 고문 영국 시인 엘리어트(T.S. Eliot)는 이렇게 적었다.‘사월은 잔인한 달, 죽었던 땅에 라일락이 싹을 틔우고, 기억과 소망이 뒤엉키며, 잠자던 뿌리가 봄비로 잠을 깨지만.’ 시인은 왜 그렇게 노래했을까. 모든 게 살아나는 멋진 사월을 그는 어째서 잔인하다고 노래했을까. 벚꽃이 피고 목련이 올라오는 사월은 아름답지 않은가. 따듯한 햇살 아래 서 있기만 해도 행복하지 않은가. 동면에서 벗어나 만물이 소생하는 기적을 목격하는 사월은 신비롭지 않은가. 그럼에도 시인은 사월을 잔인하다고 못을 박는다.시의 제목이 ‘황무지(The Waste Land)’였다. 돌아온 새봄이 눈부시겠지만 황무지의 입장에선 그게 꼭 그렇지가 않다. 모든 게 상대적이다. 봄이 온다고 한들 풀 한 포기 올라올 턱이 없는 황무지로서는 한겨울 찬바람이 차라리 공평했던 터이다. 사방이 모두 죽어버려 다시 살아날 기미조차 없는 곳에서는 겨울 눈밭이 오히려 포근했을지도 모른다. 봄이 되어 사방이 모두 기지개를 켜는데 아직도 황망하게 먼지만 날리는 땅에게는 잔인할 뿐이었던 모양이다. 황무지의 입장은 누구의 모습이었을까. 시인은 무엇을 빗대어 그렇게 이 시를 썼을까.시인의 눈에 봄이 잔인했을지언정 돌아온 사월은 여전히 아름답다. 포근하고 따사로운 햇볕이 고향의 들판을 생각나게 하고 꽃향기 봄기운은 마을어귀 시냇물 소리를 들리게 한다. 세상은 총선판. 누군가는 꿈을 안고 출사표를 던졌겠지만 세상살이는 아직도 고단하다. 확성기가 노랫가락을 길거리에 뿌려대지만 보통사람의 하루하루는 나아질 기미가 없다. 사거리 후보자의 구십도 인사가 오늘만 굽신대는 헛수작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외치는 구호 가운데 일상을 실제로 나아지게 할 낌새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무언가에 홀리듯 내 한 표를 던져야 하는 시민들에게 사월은 어떤 달인가. 마지막 몇 날이라도 진정이 실린 선거판을 만나고 싶다. 찾아온 사월이 잔인하지 않으려면 후보들은 어떤 마음으로 선거전에 나서야 할지 헤아렸으면 싶다.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데 길거리에서 외쳐본들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학교는 허물어진 교권과 쉽지 않은 학교폭력으로 무너져 가는데 선거가 좋은 대책을 찾아올 수 있을까. 세상은 빛처럼 달아나는데 선거판은 지난 세기 모습으로 저러고 있는지. 과거를 들추면서 악다구니를 하는 사이에 우리의 내일은 누가 살피고 헤아릴 것인지. 출사표를 던진 이들에게 생각이 없다면, 표를 쥔 유권자라도 정신을 차려야 할 터. 마지막 며칠이라도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한다. 무슨 생각으로 선거판에 나섰는지 가늠해야 한다.나라살림이 바로 서고 서민경제에 숨통이 트이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헤아려야 한다. 다음세대 교육과 보통사람 일상에 희망이 보이고 기대가 실리려면 누구를 세워야 하겠는지 들여다 보아야 한다. 생각없이 거수기처럼 던지는 한 표는 이제 멈추어야 한다.우리의 사월이 그래도 잔인하지 않으려면, 총선의 민심이 어떻게 일해야 할 터인지 생각해야 한다.

2024-04-03

선거, 집단지성의 발현

장규열 고문 역사 속 민중은 어리석기도 하였다. ‘우민(愚民)’은 위정자에게 늘 속기만 하고 살았던 백성의 부끄러운 이름이었다. 교육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깨우치고 민주의식의 전개는 국민들의 인식 수준을 바꾸어 놓았다.한두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기만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매사추세츠공대(MIT)의 집단지성센터(Center for Collective Intelligence)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연결되어 공통된 지향점을 가지고 사고(思考)를 이어갈 때 개인이 생각하여 결정할 때보다 뛰어난 이성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어놓고 있다.총선이 코 앞이다. 선거는 민주주의 제도에 있어 국민들이 집단지성을 발휘할 기회이다. 집단지성의 두 가지 기본조건인 ‘여러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지성을 발휘하여 국정의 흐름을 놓고 지역의 대표를 결정하면서 나라 살림의 전반적인 방향을 결정하는 제도적 장치인 셈이다. 정치학자 렉스 폴슨(Lex Paulson)은 동물들 가운데 그리 강하지 못한 인간이 가장 탁월하게 발달한 데에는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집단행동적 두뇌’가 열쇠였다고 밝혔다.인간은 집단적으로 지식을 축적하고 사회적으로 학습할뿐 아니라, 습득한 지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습성으로 대자연의 먹이사슬에서 가장 꼭대기에 올라서게 되었다는 것이다.인간사회의 규모가 커갈수록 중앙집권적인 권력은 부패하게 되어있음을 알게 되어 정치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하여 집단지성이 효율적으로 나타나도록 시스템을 구축하였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의 규모가 팽창하고 기능이 복잡해질수록 집단지성은 더 나은 의사결정의 기본요소가 되어간다고 하였다.개인으로서 국민이 집단지성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방법은 선거와 투표가 아닌가. 선거에 임하여 선거의 구도와 표방하는 정책, 후보의 면면을 살피고 사회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면서 시대정신을 참고하고 전달되는 메시지를 헤아려 투표 의사를 결정하는 개인적인 과정을 물론 거친다. 개인이 던진 표들이 집적되어 선거의 결과를 확인하면서 사회구성원들의 집단지성이 지향하는 방향을 걸정하게 된다. 선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결과를 받아들여 제도로서 민주주의를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므로 복잡하지만 국민이라는 거대한 집단의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로서는 매우 훌륭하다. 개인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서도 상당히 효과적이며 효율적인 시스템이다.개인의 투표의사가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다 해도 집단의 최종 의사를 확인하면서 모두가 수긍하는 결과물을 낳는다는 의미에서도 탁월한 의사결정 방식이다. 문제는 국민의 참여의식이다. 참여 여부도 물론 개인이 결정할 문제이지만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적인 과제에 함께하는 의미가 적지 않음을 자각해야 하지 않을까. 개인은 사적인 행복을 추구하며 살지만 공적인 책임으로서 사회적 지향성을 함께 고민하고 결정 과정에 참여했으면 한다. 총선이 공정하고 유익한 결과를 빚어내기를 기대한다.

2024-03-27

정치, 흐르는 물처럼

장규열 고문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을 팔아먹은 사건 이후로 물은 공공재라기보다 소비재가 되었다.공적으로 공급되는 수돗물이 있지만 병물을 사다 마신다. 홍수가 일면 물이 무섭다가도 평소엔 아직도 가벼이 생각하는 게 또 물이다.지구표면이 71퍼센트가 물이라거나 사람 몸무게의 70퍼센트 가량이 또 물이라면 놀랍기도 하다. 천체물리학자들도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평가할 적에 그곳에 물이 있는지를 먼저 살핀다고 한다.물은 과연 생명의 원천쯤 되는가 싶다. 대기오염과 기후변화에 따른 환경 파괴와 문명 훼손은 급기야 물을 오염하게 만든다. 산업화와 물질문명은 물길을 자연스럽게 놓아두지 못하였다. 물이 망가진 결과 그 물을 인공적으로 가공하고 다시 만들어 병물로 사다 먹는 꼴이 된 게 아닌가.3월 22일은 ‘세계 물의 날(World Water day 2024)’이다. 국제연합(UN)이 제정하고 선포한 올해의 슬로건은 ‘물은 평화를 위하여(Water for Peace)’라고 한다. 물이 오염되고 부족해 지면 나라와 공동체 간에 갈등이 생기고 분쟁이 일어난다.기후변화가 극심하고 인구문제가 격화되면서 나라 안팎에서 물이 가장 중요한 자원임을 인식하고 물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제가 분명해진다. 공공보건, 환경보전, 식품과 에너지 시스템의 안정적 관리 등에 있어 깨끗한 물을 확보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물은 이제 사용하고 확보해야 할 자원일 뿐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임을 자각하고 인권보호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게 국제사회의 공통된 시각이다. 물은 국가 간 분쟁의 씨앗이기도 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물이 성장과 번영을 가져오기도 하고 갈등과 파괴를 초래하기도 한다.총선 정치로 접어들면서 물의 날을 맞는 감회가 있다. 물 흐르듯 놓아두었으면 자연스러웠을 터에 억지로 구부려 화를 맞는 미련함을 우리 정치가 피해야 한다. 곧 후보 등록을 마치고 본격 선거전에 돌입하면 유권자들에겐 혼돈의 시간이 찾아온다.공약이 남발되고 확성기가 동원되면서 선심과 회유가 춤을 춘다. 물같이 흐르던 일상이 멈추고 흐트러지며, 억지춘향 악수세례와 믿지못할 약속공세가 쏟아진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뜬히 건너온 국민들을 아직도 우습게 보는 후보들에게는 물처럼 도도히 흐르는 민심을 보여주어야 한다.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과 겪어온 날들을 차분히 평가하는 날카로움을 드러내야 한다. 헌법에 적힌 대로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었음을 확인하는 자랑스런 총선이 되어야 한다.경쟁을 화합으로 이끌며 갈등을 협력으로 몰아가는 정치가 되었으면 하는데, 정치의 실상은 늘 반대로만 치닫고 있어 국민이 걱정하고 염려한다. 국민이 편안하고 민생이 안정되는 일상을 만나고 싶은데, 정쟁과 다툼만 파도치는 정치를 너무 오래 보고만 있다. 유권자의 표심이 평정한 수심으로 나타나 정치인들이 크게 각성하는 이번 총선이 되었으면 한다. 물처럼 흐르는 정치를 만들어 주시라.

2024-03-20

총선에 교육이 안 보인다

장규열 고문 곧 총선이다. 나라의 내일을 가늠할 중요한 선거임에 틀림없다.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도 첩첩산중이다. 경제와 일자리, 산업과 과학기술, 복지와 의료, 외교와 국방, 도시와 건설, 지방정책과 균형발전, 안전과 치안 등 국정 전반에 손을 보아야 할 가닥이 차고넘친다. 최근 들어 우리 모두를 압박하는 과제가 있다.저출산. 젊은이들에게 물으면, 결혼과 출산에 대하여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경제적 여건이 턱없이 부족하고 사회적 전망이 밝지 못한데 아이를 낳아 기를 자신이 없다고 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쁨과 즐거움을 설명하려 해도, 자신과 아이가 겪어야 할 어려움이 불을 보듯 확연한데 어떻게 그런 모험을 하겠느냐는 반응이다.출산을 가로막는 까닭들 가운데 심각한 장애물이 바로 교육이다. 아이들을 반듯하게 기르는 일이 너무 힘들다. 출산과 동시에 다가오는 돌봄과 육아를 비롯하여 초등학교에도 밀려든 사교육의 압박과 대학입시의 그림자, 학교폭력과 교권수호 사이에서 힘을 잃어가는 교육과정과 교육환경의 피폐함은 신혼부부들의 자신감을 앗아갈 뿐이다. 총선이 다가오지만, 정당과 후보자들이 교육에는 관심이 없다. 유권자가 아닌 학생들에게 표가 없어서 그런지 총선 이슈로는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다.교육부와 교육청으로 나뉘어진 정책 수립과 책임 소재의 구조적인 과제도 있다. 교육이 가진 실질적 내용을 뿌리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젊은 학부모들이 안심하고 아이들을 학교에 맡길 분위기부터 자리를 잡아야 하고, 경제적 부담을 느끼지 않으면서 자녀들이 공교육 과정을 지날 수 있도록 교육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부적절한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 과정을 손을 보아야 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대입제도도 크게 수정해야 한다.정당들이 훌륭한 후보들을 영입한다지만, 교육과 관련하여 적절한 선택이 그리 보이지 않는다. 교사노조와 관련하여 선생님들의 교권과 복지에 관심있을 인사가 보인다거나 특정한 교과목을 전공한 인사가 영입된다고 하여 교육을 둘러싼 기본적인 담론이 나아지지 않는다. 교육은 ‘아이들을 기르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어떤 인성을 길러낼 것인지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떠들썩한 늘봄학교 정책도 따지고 보면 시간활용을 놓고 줄다리기가 있을 뿐 교육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즐겁고 안전한 학교를 아이들에게 제공해야 한다.학교만 다녀도 훌륭한 성인으로 자라날 든든한 교육의 과정과 내용이 살아나야 한다. 대학은 전문적인 소양을 심화할 장소가 되어야 할 뿐, 사회적 위신을 위한 간판으로 역할은 그만 내려놓아야 한다. 대입제도는 더 이상 학생들과 부모들을 압박하지 말아야 한다. 학교폭력이 사라지고 교권이 적절하게 보호되는 행복한 학교가 돌아와야 한다. 학생과 선생님이 모두 즐겁게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교육직은 충분하게 존중되어야 하며 아이들을 기르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총선에 나선 정당과 후보들은 관심 정책 담론에 교육을 반드시 반영하여 유권자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4-03-13

세상은 누구의 작품인가

장규열 고문 프랑스 작가 시몬 등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는 ‘세상은 남자들의 작품이다’라고 비꼬았다. 중요한 권력은 모두 남자들이 쥐고 있으며 구체적인 경제 실천과 사회 운영도 거의 모두 남성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고발하였다. 그리된 까닭을 이모저모 들어보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미사여구일 뿐 그 어떤 적절한 설명도 가당치 않다고 꼬집었다.미국 작가 캐롤라인 페레즈(Caroline Perez)도 저서 ‘보이지 않는 여성(Invisible Women)’에서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의 입안과 수립 과정이 남성 중심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에 점령당했다고 지적했다. 기초자료로 사용되는 통계자료들도 ‘여성의 존재’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아서 여성이 거기에 있었음조차 도외시되곤 한다는 것이다. 도시계획과 디자인의 과정, 사회문화정책의 논의와 입안 등에 있어 여성의 시각이 누락되지 않아야 할 것을 지적한다.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Inter national Women’s Day 2024)’이다. 올해의 슬로건으로 ‘여성을 위한 투자(Invest in women: Acc elerate progress)’에 방점을 둔다. OECD가 발표한 성별 간 임금격차는 평균 12퍼센트에 달한다. 잘 산다는 나라들에서조차 아직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12퍼센트를 덜 받고 있다는 것이다.한국은 그 격차가 무려 31퍼센트로 회원국 가운데 꼴찌가 아닌가. 우리의 누이들이 같은 일을 하면서도 남자들에 비해 31퍼센트나 덜 받고 지낸다는 발견은 놀랍지 않은가.여성의 존재가 무시될 뿐 아니라 가치마저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는 현실은 우리가 21세기를 살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성경은 이미 2천 년 전에 ‘신 앞에서 남자와 여자는 같은 존재임’을 선포하였다. 그럼에도 아직껏 우리 기독교 일부 교단은 ‘여성이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한다. 남자만 교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은 누가 지어냈는지 모를 일이다. 세상이 저렇게 변했는데, 남자 목사들끼리 모여앉아 저따위로 결정하는 배포가 놀랍지 않은가.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어찌할 것인가. 남성이 지배하면 당연하고 여성이 들어서면 이상하다 여기는 발상부터 잘못된 것이 아닌가. 남녀 간에 물리적으로 다른 것을 인정하더라도 인격과 인권 면에서 무시되고 소외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남성과 평등하게 여겨지며, 아예 성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세상이 되어야 한다.무시당하고 값싸게 취급되며 폭력까지 감내할 양이면, 우리의 누이들에게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아니다. 관련 과제들이 갈 길이 멀지만, 이제는 여성만의 몫이 아니다. 그동안 누리면서도 몰랐거나 무심했던 남성들이 나서야 할 차례가 아닌가. 인류의 나머지 절반이 세상을 함께 구하도록 소매를 걷어야 하지 않을까.올해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을 위한 투자, 정책과 실행에 실천적인 제안과 역할이 논의되었으면 한다. 보부아르의 지적이 매서운 나침반이 되어 여성의 존재와 하는 일에 모두의 관심이 살아나야 한다. 여성이 살아야 세상이 일어선다.

2024-03-06

끔찍한 새 학기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2월은 늘 왠지 흐지부지하다. 한 달 삼십일을 채우지 않고 끝나면서도 늘 같은 날수가 아니다. 28일이었다가 29일이었다가. 그렇게 마치는 한 달을 보내면 봄이 온다. 봄소식을 기다리면서 학교가 열린다. 아이들이 돌아오고 선생님이 돌아온다. 친구들을 만나면서 아이들은 신이 나겠지만, 교실을 지켜야 하는 선생님들은 삼월 개학이 천근만큼 무겁다. 교육이 본래 가볍지 않은 일이라서 마음이 무겁다면 격려하고 끌어도 올리겠지만, 요즘 선생님들에겐 교육이 아니라 존재가 무겁다고 한다. ‘왜 교사가 되었을까.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 그만두면 무엇을 해야 하나. 계속한다면 무엇에 기대를 걸어야 하나.’ 월요일이 끔찍한 직장인들처럼 선생님들에겐 끔찍하다.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제는 아이들이 두렵다. 부모들에게 떳떳해야 하는데 부모들 앞에만 서면 쪼그라든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어디서부터 고쳐야 하는지 누구도 답을 모른다. 순진한 아이들이야 그렇다해도, 학교를 다녀 본 부모들은 사실은 조금 안다. 교육이란 건 본디 아이들을 선생님에게 믿고 맡겨야 겨우 돌아간다는 것을. 무섭고 때로는 가혹했던 선생님이 계셔서 그래도 우리가 모두 이만큼 자랐다는 것을. 호랑이 선생님 덕분에 질서를 익히고 예절을 배웠다. 매섭던 눈초리로 지켜주신 선생님이 무서워서 한 자라도 더 배우지 않았을까. 오늘 교실은 어떤가. 선생님이 구겨진 자부심을 붙들고 존재를 의심하는 처지가 되었다. 아이들과 학부모가 두려워 교실 문을 열기가 끔찍해진 교실에 진심어린 교육이 살아있을 턱이 없다.교육이 부끄럽다. 개학을 앞두고 교실이 걱정이다. 학교의 문을 열면서 교육의 내일을 염려한다.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이대로 좋을까. 처음에는 ‘나라의 미래를 기른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을 젊은 선생님들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할만한 직업이 의사밖에 없는 듯이 시끄러운 세상에 교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가르치고 사람을 만드는 일에 어려움이 태산같고 박봉도 견디겠지만, 교육이 살아있는 교실을 지키지 못하면 거기 서 있을 까닭을 잃게 된다. 정상적인 수업이 펼쳐지고 온당한 교육이 진행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교육과정이 중요하고 교육 효과가 중요하지 않을까. 오늘 교육정책을 위한 담론들에는 왠지 누군가 이익집단을 챙겨주려는 저의가 숨어있는 듯하여 불편하기 짝이 없다. 교육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새로운 다짐으로 새 학기를 열어야 한다.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는 기대로 가득해야 한다. 학기가 쌓이면서 쑥쑥 커가는 아이들이 교사들의 보람이 되어야 한다. 철없는 아이들의 비뚤어진 요청에 반듯하게 교육적으로 반응하는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교육의 테두리를 함부로 생각하는 학부모가 사라져야 한다. 믿고 맡길만한 교사가 되어 교육의 질서를 바로잡는 건 선생님 본인의 몫이 아닐까. 직장인의 월요일이 즐겁고 선생님의 삼월이 즐거워야 한다. 아이들과 함께 마음껏 가르치고 배우는 일로만 신이 나는 새 학기가 되었으면 한다. 선생님이 살아야 교육이 산다.

2024-02-28

선거는 누구의 것인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봄 소식이 머지않았다. 매화가 피고 벚꽃이 올라오면 새봄이 펼쳐질 터이다. 계절과 함께 빠르게 다가오는 정치 일정이 총선. 50일도 남지 않았다. 우리는 이번 선거에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가. 봄은 서서히 올라오는데 정치는 이미 뜨겁다. 막말과 주장 가운데 누구 말이 맞는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말에 진심과 성실, 공감과 배려가 실렸으면 좋겠는데 실제로 그런 지를 알 길이 없다, 오늘은 진정이었다지만 선거가 지난 후에 겪었던 배신과 혼돈을 생각하면 오늘도 안심할 수가 없다. 이번에는 잘 뽑아야 한다고 다짐해 보지만 그게 생각처럼 간단치가 않다.정치에 무관심하여 선거를 무시하고도 싶지만 플라톤의 한 마디가 섬칫하다. ‘선거에 참여하지 않으면 덜 떨어진 사람을 당신의 대표로 선출하게 된다.’ 실제로 일이 그렇게 벌어지면 모두에게 고통이 아닐까. ‘한 표’들이 모여 나를 대변할 이를 선출한다면 모른 척 할 수도 없다. 링컨(Abraham Lincoln)도 ‘선거는 보통 사람의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선거가 특별한 출마자를 위한 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위한 것임을 확인한다. 동화작가 달(Roald Dahl)도 ‘세상을 바꿀 힘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하였다. 오늘이 마땅치 않은 사람일수록 선거에 임해야 한다. 바꾸어야 할 구석이 많이 보이는 사람일수록 한 표를 행사해야 한다.정치가 춤추지만 국민은 힘이 든다. 총선에 참여하되, 판단은 내가 해야 한다. 구호와 선동이 아니라 정책과 사람됨을 살펴야 한다. 남의 소리에 솔깃하기보다 내가 내리는 판단을 신뢰해야 한다. 정당들이 총선에 그 어떤 정치적 의미를 건다고 해도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 누가 국민의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는지 헤아려야 한다. 국민의 갑갑한 일상과 어려운 처지가 후보의 마음에 존재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일정에 따라 치르는 형식적인 선거보다는 진정으로 세상이 나아지는 그 한 판이 되어야 한다. 이번 총선이 그런 축제를 몰고 올 것인지 의심스럽다.화려한 말솜씨로 당신의 ‘생각없음’을 감출 수 없다. 거친 세월을 건너온 오늘의 유권자에게 텅 빈 철학과 빈껍데기 비전이 드러날 뿐이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정치가 언제쯤이면 정말로 나라와 국민을 생각하면서 말하고 행동하게 될까. 그런 날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건 오히려 보통 사람들이 깨끗한 한 표로 해야 할 터이다. 변화와 혁신을 가져올 힘은 특별한 정치인이나 엄청난 지도자가 가진 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게 아닌가. 총선판에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야 한다. 여론조사에 응답하고 후보자에게 당신의 의견을 전달해야 한다. 온라인으로 간섭해야 하고 오프라인에서 외쳐야 한다, 당신의 생각이 들리도록 온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백마타고 오는 초인은 없다. 내일을 생각하는 당신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총선이 뜨거운 까닭은 나라의 미래를 치열하게 고심하는 나를 기대함이 아닐까. 총선은 나의 것이다.

2024-02-21

공부에 때가 따로 있을까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인공지능 AI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앞서 이끌어가는 첨병이라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가 하면 인간의 소외와 고통에 더욱 그림자를 드리울 흉물이라는 부정적인 예측이 함께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그게 무엇이든 알아야 한다는 것. 제대로 배워 깨우친 다음에야 분석과 예측이 가능하고 활용이든 거부든 결정이 된다.사람은 언제까지 배워야 할까. 6세에 시작하는 교육과정을 16년 정도 거치며 어른이 된다고 이해하였다. 초-중-고-대로 이어지는 교육모델은 충분했을까. 근대적 교육개념이 정리되기 시작하던 아주 초반에 만들어졌다. 구한말 교육개혁을 시도했던 이래 일제를 거쳐 해방 후 1951년에 이 학제가 교육당국에 의해 정책적으로 결정되었다. 여러 논의가 있었으나 기본골격은 아직껏 그대로다. 그러는 사이 세상은 변하였고 우리 사회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대학을 나오는 청년들은 어떤 미래를 기대하는가. 획득한 학사학위는 그들의 삶에 어떤 약속을 하고 있을까. 20대 초중반에 대학교육을 마치면 앞으로 펼쳐질 60년도 넘을 여정에 충분한 준비가 된 것일까. 무엇인가 더 배워야 할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당연히 더 배워야 한다.빌게이츠(Bill Gates)는 그의 책 ‘The Road Ahead(미래로 가는 길)’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상의 투자는 바로 ‘교육’이라면서 ‘교육의 목표를 학위를 받는 것으로부터 평생 배우는 일(Lifelong Learning)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유네스코(UNESCO)는 통합적 평생교육을 21세기 교육의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아 산하에 평생교육원(UIL)을 두고 성인 교육에 방점을 둔 국제적인 재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독일 시민들은 이미 평생교육이라는 틀 안에서 다양한 교육적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미국은 지역 대학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시민들이 끊임없이 교육의 기회를 가지도록 유도하고 있다. 중국은 ‘정교한 평생교육제도의 구축’을 핵심 교육정책 목표로 삼고 국민 모두를 위한 평생교육을 구현하려 시도하고 있다.우리는 어떤가. 지역에는 평생교육을 지원할 어떤 자원들이 있는가. 평생교육은 이제 정부 교육당국에만 의존할 수도 없게 되었다. 지역에서 실질적인 평생교육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대학이 나서야 한다. 대학이 해야 할 일들이 여러 가닥이지만 소재 지역과 함께 호흡하며 지역의 발전을 가져올 가장 좋은 통로는 평생교육이다. ‘지역협력’ 슬로건을 슬기롭게 구현할 방법도 평생교육이 아닌가. 언제까지 지역에 존재하면서 정부의 지원만 바라보며 지낼 것인가. 소규모로 진행하는 문화교실 성격의 연성(軟性) 평생교육은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본격적인 지식습득이 일어나고 실질적으로 다시 배우는 경성(硬性) ‘평생교육’이어야 한다.대학이 지역사회와 공존상생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지역 발전에 기여하며 함께 성장하는 모델을 만들어 낼 열쇠는 ‘평생학습’에 있다. 대학이 언제까지 20대 청년들만 가르칠 것인가. 사람은 평생 배워야 하는데.

2024-02-14

청년을 어찌해야 하는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세대를 포위했었다. 지난 대선을 이긴 보수여권이 청년의 표를 끌어모았다. 기존 60대 이상과 신규 30대 미만 유권자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했다.청년들의 표심은 이념이 기준이었을까. 그렇지 않아 보였다. 실용에 뿌리를 두고 현실에 밝은 젊은이들의 시선을 살펴야 했다. 가르치려 하기보다 배워야 했고, 말하려 하기보다 들어야 했다.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골칫거리로 생각하지 말고 한 세대의 성난 몸부림으로 해석해야 했다. 진보도 보수만큼이나 기득권력이 되어버린 이상 새롭게 나타난 경보가 아니었을까. 다시 생각하라는 경고장이며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독촉장이었다. 트럼프가 다시 대세가 됐다는데, 우리 보수는 잘하고 있었는지. 미국의 인종갈등이야 경계선이 분명하지만, 한국에서 세대차이는 구분선이 모호하다. 표심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 청년들은 그만큼 절박했던 터였다.혜안과 통찰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빛나는 법이다. 명철과 지혜도 위기를 만나야 번득인다. 케케묵은 이념을 고집하기보다 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용으로 나서야 한다. 이론보다 현실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어야 하고 하루하루의 삶에 보탬이 되는 결정이어야 한다. 젊은 세대가 일상으로부터 용기를 회복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꿈과 용기만 있어도 회복과 성공에 이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줘야 한다. 세상만 바뀐 게 아니었다. 사람이 더 많이 바뀌었다. 그들이 당신을 지지하려면 당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 갈등과 혐오가 들끓는 세상에 ‘청년’이 열쇠로 등장하였다. 이번에는 누가 젊은이의 마음을 획득할 터인지 귀추가 주목된다.가벼운 구호로는 부족하다. 진심이 통해야 하고 진정이 보여야 한다. 성과가 있어야 하고 생활이 나아져야 한다. 기대만 높일 게 아니라 실질로 승부해야 했다. 정권을 심판한다는 총선의 표심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떠올랐던 청년들의 마음이 이번에는 누구를 지지하게 될까. 실용이 가라앉고 이념이 떠오르는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과거에 혹 껍데기와 겉치레가 통했다면 미래로 건너가는 다리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혀야 한다. 모호한 외침은 수명을 다했으며, 분명한 길이 느껴져야 한다. 세대는 흐른다. 어제의 60대가 아니고 과거의 20대가 아니다. 결정의 방향이 다른지 몰라도, 모든 세대는 똑똑하고 현명한 방향으로 움직여 간다. 거짓말과 현수막에 쉽게 현혹될 국민이 이제는 없다.정치가 달라져야 한다. 선거판도 바뀌어야 한다. 민심을 따라가려면 아직도 멀었다. 국민은 저 앞에서 달리는데 정치는 구태만 반복하는 모습이 아닌가. 국민의 갈급함이 어디에 있는지, 청년의 절박함이 무엇에 달렸는지 헤아리고 살펴야 한다. 낡은 이념과 해묵은 지방색은 벗어야 하고, 새로운 세대와 변화하는 시대의 표심을 획득해야 한다.청년은 오늘도 지켜보고 있다. 한 번은 몰라도 연거푸 속일 수 없다. 진심으로 겨루고 실질로 승부해야 한다. 젊은이의 표심이 궁금해진다.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사니까.

2024-02-07

우리는 잘살고 있을까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미국 작가 마크맨슨(Mark Manson)이 도발적인 유튜브영상을 공개했다. 제목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를 다녀왔다(I traveled to the most depressed country in the world.)’인데, 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게 아닌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최상급의 경제수준에 이르렀으며 사회문화적으로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장을 경험하지만, 한국인들이 동시에 겪는 우울현상의 그림자가 길어보인다고 했다.전쟁을 겪으며 바닥에 떨어졌던 한국사회가 급성장을 해오면서 익힌 과도한 일등주의와 경쟁문화가 한국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들었을까 짐작한다고 했다. 심층적인 분석이 아니라 표면적인 관찰에 따른 내용이긴 하지만,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부분을 들킨듯 싶어 멈칫 하게된다.실제로 대한민국은 OECD 회원국들 가운데 우울증발병율과 청소년자살율에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열심히 살면서 이렇듯 성장했는데, 외국인의 시선에 처절하도록 우울한 나라로 발견되는 건 어찌해야 하는지. 한 해 동안 자해와 자살시도로 응급실에 들어온 4만여 환자들 가운데 46퍼센트가 10대와 20대였다고 한다.교육부 자료에 의하면, 전체 학생들 가운데 25만명 이상이 정신적 문제가 있어 심리치료 대상으로 추계된다고 한다. 꾸준히 열심히 달려오면서 스스로 대견하고 칭찬할 만한 수준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한켠에는 이처럼 드러내기 부끄러운 그늘이 있었다. 치열한 경쟁 가운데 일등만 대접받는 문화가 있었고 극소수만 칭찬받는 문화가 번져가면서 뒤처지는 아픔에 힘들어하는 다수가 있었다.동영상에서 마크맨슨은 우리나라를 우울한 나라로 고발하는 데에 멈추지 않는다. 놀라운 회복력(resilence)를 가져 ‘(어려움 속에서) 늘 길을 발견해 왔다’고 했다. 태안반도에 기름을 청소하러 달려갔으며 IMF 사태에도 금모으기로 반응했다. 나라와 공동체에 위기가 닥치면 문제의 본질을 찾아 해결해 내는 건 언제나 국민의 몫이 아니었던가.정치권과 정부가 우물쭈물하는 상황에도 소매를 걷어 올려 마침내 위기를 극복하는 열쇠를 찾아내는 사람들이었다. 도전과 응전, 변화와 적응에 능하기에 어려움이 닥쳐도 겁내기보다 맞상대하여 끝내 이겨내는 ‘습관적 회복유전자’를 장착하였다. 우울의 그늘이 오늘 깊어 보이지만, 이 또한 국민적 내공과 공동체의 저력으로 헤어나갈 것으로 기대한다.끝없는 경쟁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는 공동체적 배려와 공감으로 우울현상을 극복했으면 싶다. 오늘까지 거둔 성과와 성공이 있다고 해도, 그 길을 완전히 혼자 걸어온 사람은 없다. 도와주고 거들어준 사람이 분명히 있을 터이며 혹 나로 인해 뒤처지거나 힘들어진 이들이 있을 지도 모른다. ‘잘 났더라도 혼자만 잘 살지 말라’는 어느 학자의 충언이 있었다. 이웃을 돌아보는 배려심과 남의 어려움에 귀기울이는 공감능력을 길러야 한다. 회복탄력성을 다시 한번 집단적으로 발휘해 오늘의 우울현상을 내일을 향한 기대효과로 바꾸었으면 한다. 남들은 몰라도 대한민국은 할 수 있다고 본다.

2024-01-31

흩어 놓는가, 모아 내는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1992년, 미국을 뒤흔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폭동(L.A. Riot)’. 백인경찰들이 흑인운전자 한 사람을 사정없이 폭행했던 동영상이 알려지면서 시작되었던 도시 소요. 흑인, 아시안계와 히스패닉계를 포함하는 유색인종에 대한 미국인들의 태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고, 한국교포들에게도 미국과 미국인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하였다. 피해 당사자 로드니킹(Rodney King)은 법정에서 증언하면서 모든 소란에 혼란스러운 심경을 한마디로 요약하였다. “우리 그냥 어울려 살 수 없을까요? (Can we just get along?)”피부색이 다르다는 외적 차별조건을 극복할 방법이 정말로 없겠냐는 그의 안타까움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끊임없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발견해 내는 능력은 인간이라면 거의 본성에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출신이 다르고 피부가 다르며, 성씨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며, 키와 몸무게 그리고 혈액형이 다르다. 겉으로도 다르고 속으로도 다르다. 느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며 사상이 다르고 이념도 다르다.하나의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두 다른 겉모양과 속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이상 어울려 살아야 한다. 피해자 흑인 한 사람의 저 외침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가. 우리는 어울려 살아낼 수 있는가.‘다르다’는 데서 시작해서 ‘틀리다’는 생각에 이르면 구별을 넘고 차별에 이르러 질시와 혐오, 폭력과 불공대천의 경지에 이른다.파국으로 치닫는 일이 발생하지 않고 조절하며 견제하도록 우리에게는 ‘정치’라는 장치가 있다.정치는 권력을 획득해 행사하는 활동이지만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이해를 조정해 질서를 바로잡는 일을 하도록 국민이 위임한 행위인 것이다. 정치인들은 그렇게 하고 있는가. 정치인이 쏟아낸 한마디 말이 질서와 조정을 불러오기는커녕, 오히려 단절과 불화의 도화선이 되고 분열과 등돌림의 단초가 된다면 그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싸움꾼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정치인 당신은 화목의 씨앗을 찾아내는가, 아니면 분열의 기운을 조장하는가.사회가 조정과 타협을 통해 조화롭게 어울리도록 돕는 또 하나의 기제가 ‘언론’이다.사실을 밝혀 알려 여론을 형성하면서 민주주의가 구현되도록 사회적 공론의 장과 소통의 텃밭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흥미를 끌거나 충격적 사실을 전달하는 데 머물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의 기초가 될 접점을 찾아내고 대화의 토대를 불러와야 한다. 사실과 문제를 알려내는 데 기여해 왔지만, 앞으로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일에도 집중해야 한다.다른 나라의 언론계는 ‘해결책 저널리즘’이라 부르는 새로운 시도에 나서고 있다. 사람은 어차피 모두 다르다. 다른 모습과 다른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며 보듬고 포용할 때 민주주의로 가는 싹이 튼다. 갈등이요 분열이었을 다른 존재들을 정치가 조절하고 언론이 담아내야 한다. 흩어놓는 정치와 언론은 그만 보았으면 한다.

2024-01-24

진짜 문제는 무엇일까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대한민국이 사라진다. 2750년이면 지구상에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통계적 예측이 있다. 모든 상황이 지금과 같을 경우, 일본이 3000년이면 소멸할 것이며 우리나라는 그보다 일찍 지도에서 없어질 것이라 한다. 옥스퍼드대의 인구학자 데이비드 콜먼(David Coleman) 교수의 실증적 예측에 따르면, 인구소멸로 인해서 사라지게 될 최초의 국가가 바로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 한다. 출산율은 이미 세계 최저일 뿐 아니라 OECD 국가들 가운데 합계출산율이 1.00 아래로 떨어진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저출산과 고령화를 사회적 문제로 인식한다지만 분명한 대책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심각한 사회현상이 주목받는다.청년들이 결혼하지 않는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15년 147만쌍에 달했던 신혼부부 숫자가 2022년에 103만으로 떨어져 30%나 감소하였다. 아직 신혼일 적에 출산을 미루는 경향도 두드러져서 초혼 신혼부부 가운데 자녀가 없는 부부가 46.4%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출산을 두려워하고 결혼을 기피하는 현상은 날이 갈수록 대책 마련이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국토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출산율을 결정하는 주요 원인으로 주택가격, 전년도출산율과 사교육비를 들었다. 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는 까닭은 결국 ‘돈’이라는 셈이다. 물론 타당하다. 경제적 여건이 인간활동을 추동하기도 하고 제약하기도 하지만 돈 때문에만 출산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지나친 부분이 없지 않다. 거꾸로 보아, 돈이 많으면 아이를 많이 낳을까. 그렇게만 보이지도 않는다.데이터로 해결해 보자는 주장도 있다. 그동안의 관찰과 논의도 자료와 근거, 즉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경제적 문제와 사회적 고민을 떠올리고 대안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데이터 없이 의견에만 기대어 내어놓았던 적이 없다. 뜬금없이 ‘데이터’를 들먹이는 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잘못 짚은 게 아닌가 싶다. 즉, 경제여건과 데이터만으로 오늘의 저출산과 결혼기피 현상을 해결할 수 없다.어쩌면 문제의 본질은 다른 데 숨어있지 않을까. 돈으로 해결한다지만, 제시되는 해결책을 아무리 들어보아도 그리 흡족한 수준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신혼부부에게 경제적으로 무엇을 얼마나 도와주면 걱정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결혼을 기피한다 하여 결혼식 비용과 혼수 일체를 지원하자는 주장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모든 걸 돈으로 해결하자는 기본 전제는 그리 적절하지도 타당하지도 않아 보인다.결혼과 출산을 경제적 결정 과정으로만 볼 수 있을까. 육아와 돌봄을 돈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가. 꿈과 사랑이 잉태되고 무르익어야 하고, 삶을 바라보는 비전과 희망에 싹을 먼저 틔워야 한다. 선배 어른들이 돈이 많아 오늘의 청년들이 태어났던 게 아니다. 경제적 기본여건을 고민은 하되, 미래를 향한 꿈이 자랄 수 있도록 사회문화적 토양을 길러내는 게 중요하다. 돈 때문에 결혼하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다. 내일을 열어갈 소망과 꿈이 영글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사회현상을 경제문제로만 바라보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2024-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