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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수능 다음 교육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지나갔다, 수능이. 한 해 내내 속을 태웠던 그날이 흘러간 지 벌써 일주일이다. 수험생에겐 1년이 아니라 살아온 평생을 깎아 넣었을 그 하루를 살아낸 지금, 당신의 소감은 어떠신가. 고3 교실의 오늘 풍경은 어떨 것인지 궁금하다. 대학입시에 모든 걸 걸은 듯 보이는 우리 교육의 모습은 처연하다. 공교육의 목표가 대입은 아니라지만 현실은 언제나 같은 자리가 아니었을까.성패의 비결이 그날의 시험으로부터였음을 아는 청년들은 수능을 여전히 무겁게 만난다. 수험생뿐인가. 자녀들의 장래가 걸린 수능 날에는 부모와 온 가족이 비상이다. 고3 담임교사와 학교도 긴장하긴 매한가지. 그런 하루를 보낸 지금, 모두들 어떤 날들을 보내고 있을까.교육의 진정한 모습을 발휘할 시간이다. 수능의 긴장에서 풀려난 오늘, 20대를 눈앞에 둔 청년들이 이제야말로 미래를 생각할 시간이 아닌가.시험과 점수의 압박을 벗은 오늘, 살아갈 내일을 상상하며 비전을 세우고 꿈을 만들어야 한다. 세상에 눈을 뜨고 이웃을 살피기 시작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어깨를 펴고 어른이 될 준비에 나서야 한다. 학교와 교실에 묶였던 시선을 넓혀야 하고, 남들과 함께 사는 어른의 일상을 배우기 시작해야 한다. 체험의 폭을 확장하고 만남의 범위도 넓혀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가 비로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품을 단초를 깨우쳐야 한다. 공교육의 틀을 벗어나 스스로 공부할 준비에 나서야 한다. 읽고 묻고 의심하고 토론하는 환경에 익숙해야 하고, 정답을 찾기 보다 질문을 지어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수능이 지나간 오늘, 수험생 개인뿐 아니라 학교와 가족은 자녀의 미래에 시동을 걸 출발점에 선다. 고교졸업과 대학입학이 형식적인 과정이지만, 준비를 위한 태도의 조율은 지금부터 작동해야 한다. 풀어진 긴장에 익숙해진 나머지 준비없이 대학생활로 접어들지 말아야 한다.온라인과 SNS가 대세라지만, 지식과 트렌드의 핵심은 여전히 책 속에 있다. 교과서를 벗어나 폭넓은 독서에 나서야 한다. 지식인 선배들이 먼저 깨우친 발견과 생각 가운데 내게 필요한 가닥을 얼른 챙겨 익혀야 한다. 주변의 국내 소식도 알아야 하지만 이제는 멀리 나라 밖 환경에도 다가가야 한다. 가까운 이슈들도 챙겨야 하지만, 기후와 인구 등 거대담론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수능 다음 교육’에 관하여 우리 학교는 잘 준비하고 있을까. 통합교과와 생활교육에 교육계가 분발해야 한다. 청년들이 미래환경에 익숙하도록 이끄는 일을 학교가 맡아야 한다.수능이 지났다고 교육이 할 일을 다한 게 절대로 아니다. 공교육이 누려야 할 ‘유종의 미’를 ‘수능 다음 교육’으로 거두어야 한다. 자칫 풀어졌을 학생들의 긴장을 흥미로운 주제와 관심으로 다시 잡아내야 한다. 학생들이 학교에 머무는 마지막 날까지 교사의 할 일이 남아있어야 한다.수능과 함께 모든 고삐를 던져버리는 실수는 학생도 교사도 피해야 한다. 수능이 지나가도 교육은 자리를 지켜야 한다.

2023-11-22

수능날 다시 생각하는 교육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어김없이 수능의 날이 밝았다. 날씨와 상관없이 마음이 추워진다. 해마다 겪으면서도 이날은 새삼 스산하다. 청년들의 내일은 수능보다 훨씬 넓고 깊고 높다. 그럼에도 오늘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쌓은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길 바란다. 실력도 답안지 위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오늘은 후회없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수능과 대학입시. 이거 너무 오래 되지 않았을까. 입시제도에 문제가 있다거나 바꾸어야 한다는 논의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수능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가 바뀌고 저출산고령화로 인구추이도 바뀌어 학생숫자가 급격하게 줄었다는데 수능은 그대로다. 이제는 미래지향적이며 글로벌한 교육을 생각한다면서 수능은 수십년 째 같은 모양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우리가 기르고자 하는 사람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문과와 이과. 문과형 인간과 이과형 인간. 책 제목에도 등장한다. 모방하고 추격하며 겨우겨우 헤쳐왔던 시절에는 그런 구분이 필요했다. 과학과 기술에 능한 인재와 문화와 역사에 집중하는 사람을 길러내어 얼른 우리도 잘 살아야 했다. 사회 각계에 분야마다 권위자들과 실력자들이 있어야 했다. 세월이 바뀌었다. 이제는 다르다. 공교육이 문과와 이과를 가르는 건 거의 위험하다. 사람을 이과형 또는 문과형으로 길러내면, 사회적 불균형을 초래하고 문화적 갈등을 깊게할 터이다. 수학적 논리와 과학적 사고를 하면서도 문화와 역사와 철학을 이해하는 인간을 길러야 한다. 세상을 과학기술의 눈으로만 보면서 역사에 무지한 인간을 길러야 할까. 문화적 상상력만 넘치고 논리적 사고에는 맹탕인 사람을 상상할 수 있을까. 사람마다 특성이 다를 수 있겠지만 교육이 나서서 차이를 넓힐 필요는 없다. 문과와 이과를 구분하는 태도를 탈피해야 한다.유네스코(UNESCO)도 교육이 관심가져야 할 덕목으로 네 가지 소양을 설정한다. 협력(Collabora tion), 소통(Communication), 창의(Creativity)와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더 이상 홀로 존재하는 사람도 없고 고립되어 존재하는 직업도 없다. 세상은 모두 ‘협력’을 바탕으로 움직이는데 독야청청 뛰어난 실력은 의미가 없다. 대면하여 나누는 소통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소통방식이 다양해 졌다. 효과적으로 효율성 높게 ‘소통’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다. 새롭게 바라보고 다르게 연결하는 상상력을 길러야 한다. 정답제시를 위한 기억력보다 문제해결을 위한 ‘창의’가 요청되는 까닭이다. 새로운 무엇을 쌓으려면 우선 존재하는 것들에서 문제를 발견해야 한다. 매사를 분석적으로 바라보고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으로 승부해야 한다.문제는 과목별로 발생하지 않는다. 문과적 소양과 이과적 덕목을 균형있게 버무려 통합적 사고와 획기적 돌파를 해낼 수 있는 인간을 길러야 한다. 상상과 창의로 승부하는 다음세대를 길러야 한다. 고작 문과와 이과의 차이를 발견하는 미시적 접근에서 탈피해야 한다. 과학적 사고에도 능하면서 문사철(文史哲)에도 이해가 깊은 통합적 인성을 길러야 한다. 교육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2023-11-15

정치의 계절, 국민의 다짐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정치권이 뜨겁다. 국민을 생각이나 하는지 정치의 진심은 헤아릴 길이 없다. 주권은 어차피 국민의 몫,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든 눈치를 볼 까닭도 없다. 국민은 소중한 한 표로 차갑게 평가하고 분명하게 심판한다. 국민이 선거를 앞두고 가져야 할 자세를 간추려 본다.첫째, 열린 사고. 나만 옳다는 생각을 이제는 벗기로 하자. 나의 주장만 옳다는 독선이 우리에게 얼마나 어려운 시간을 가져다주었는지 우리는 모두 기억한다. 내가 맞다고 믿는 만큼 남들 생각에도 가치와 의미를 인정하기로 하자. 함께 고심하고 다 같이 만들어 가는 나라로 나아가기로 하자. 협상과 타협 없이는 늘 같은 자리에 맴돌 뿐임을 확인하고 명심하기로 하자. 둘째, 참여하는 마음. 투표로 참여하지만, 지켜보며 나의 권리를 지키는 민심을 살려야 한다. 이미 선출한 권력이 실패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하였다. 더 이상 권력의 오만과 편견, 독주와 욕망의 질주를 방관하거나 용서하지 않아야 한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국민을 무서워하는 정치권이 되도록 길들여야 한다. 당신들이 잘못하는 날, 국민은 언제라도 바꾸어 낼 것임을 가슴에 새기게 하자. 투표 이후에도 제안도 하고 쓴소리도 하여, 정치에 나선 이들이 긴장하게 하자. 셋째, 공감과 배려. 나라와 사회가 잘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운명 공동체임을 명심해야 한다. 추격과 경쟁으로 치열하게 살아왔으니, 이제는 모두가 잘 살아가는 상생공동체를 한번 만들어 보기로 하자. 지역갈등도 부끄럽고 세대갈등도 이겨내야 한다. 온갖 차별을 넘어 화합으로 일어서야 한다. 사람이 모두 사람으로 존중받도록 하고, 다음세대 청년들을 더욱 세워 주어야 한다. 어려운 이웃들에 눈길을 돌리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 흩어 버리지 않고, 모으고 모아 함께 잘 어울리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권력은 국민에게 있음을 확인한다. 세계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대한의 국민에게 손색이 없다. 더없이 높은 자긍심으로 더욱 싱싱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지키고 이루어 낼 사람은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 각자임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들은 국민을 섬기고 국민은 나라를 성심으로 섬겨야 한다. 정치는 최선을 다하고 국민은 끊임없이 지켜보아야 한다. 정치는 더 이상 실족하지 않고, 국민은 더 이상 실수하지 말아야 하자.정치를 바라보는 국민이 시선은 불안하고 초조하다. 정치의 담론과 정치인의 대화 속에 나라가 안 보이고 민생이 안 들린다. 국격이 가라앉고 민심이 멀어진다. 정치는 욕망을 담아 공천과 표심을 바라겠지만, 국민은 일상이 답답하고 오늘 장바구니가 힘이 든다. 조금이라도 나은 내일을 기대하지만, 나아질 기미는 추호도 보이지 않는다. 정치의 성공은 공천에 달린 게 아니라 국민의 하루하루를 챙기는 진심에 달렸음을 기억해야 한다. 좌우 이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일상의 고단함을 누가 덜어줄 것인지가 관건이 아닐까. 국민은 더 이상 속지 않는다. 이번엔 다르게 펼쳐야 나라도 살고 국민이 산다.

2023-11-08

한국교회에 묻는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506년 전 엊그제, 약관 34세 독일 청년이 세상을 바꾸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은 교회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세상의 물줄기를 소용돌이치게 하였다.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교황의 부당한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개신교의 출발을 알렸다. 루터 자신은 ‘종교개혁’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본인의 소신과 하나님의 이끌림에 따라 하는 수 없이 한 일이라고 술회하였다. 1517년 10월 31일 아침에 95개의 문장으로 적어 교회 정문에 내걸었던 선언문에도 그의 다짐과 경고는 물론 누구와도 토론하겠다는 의지를 함께 담았다. 개신교가 태동했으며, 사회와 역사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오늘 우리 교회는 어떤가. 웬일인지 교회는 권력과 금력 앞에 무릎을 꿇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루터의 개혁은 교회를 ‘돈’의 그림자로부터 떼어내지 않았는가. 당시 면죄부로 상징되는 교황의 금권을 반성경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 우리 교회가 권력을 탐하고 돈을 좇는 모습을 언론에서 만날 때, 목사님과 교회를 믿고 따르는 착한 교인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걱정이 된다. 교회는 개인의 복락만을 추구하는 기복(祈福)의 구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렵고 힘든 민생을 이어가느라 지치고 고단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을 찾아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전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적으로 부당하고 문화적으로 왜곡된 이슈들에 대하여도 윤리적 도덕적으로 반듯한 목소리를 만들어 전해야 하지 않을까.우리가 목격하는 한국교회는 사회적 담론 형성의 권위를 스스로 잃어버렸다. 오늘 들리는 교회의 목소리는 누구보다 앞서 돈과 힘을 따라 세상에서 성공하여 행복하길 바라는 욕망을 전할 뿐이 아닌가.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정치적으로 건강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교회로부터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오백 년 전 독일 청년이 꿈꾸었던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전의 교회로 다시 돌아간 모습이 아닌가. 사람과 이웃을 섬기는 목사가 아니라, 교인들과 주변으로부터 대접받는 목사. 동네의 여느 집들보다 화려하게 우뚝 선 교회 건물들. 힘없는 이들을 보살피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힘있는 자들을 따르는 교회. 사회의 건강을 돌보기 보다 개인의 행복에만 천착하는 메시지.구석구석에서 선한 목회를 펼치는 목사님들도 많을 것으로 기대한다. 싱싱한 포부와 멋진 믿음으로 신학에 도전하는 젊은이들도 많을 터이다. 16세기 독일 청년의 용기와 도전을 21세기에도 만나보고 싶다. 저렇듯 무너져 내리는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 앞에 든든한 믿음으로 무장한 기개와 다짐을 목격하고 싶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두 번째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는 없을까. 이대로는 안 된다. 착한 교인들이 불쌍하고 수렁에 빠진 사회가 심각하다. 마지막 보루 한국교회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 나라에 치유와 회복이 깃드는 날이 어서 찾아왔으면 한다.

2023-11-01

누구와 겨루는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학교폭력의 그늘이 짙다. 하필이면 권력의 주변에서 자녀들이 가해자로 발견되는 모습은 절망스럽다. 신체적으로 가해지는 폭력도 무섭고 두렵지만, 마음을 병들고 무너지게 하는 게 학교폭력이다. 몸에 입은 상처는 곧 아물겠지만, 마음에 입힌 상흔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가해자는 장난이었기 때문에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일을 피해자는 수십 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떠올리곤 한다. 피해자 본인도 힘들지만, 부모와 가족이 겪는 고통은 또 어떤가. 정상적인 대인관계를 이어가기 힘들어지고 긍정적인 관계형성이 어려워진다. 학교폭력은 반드시 사라져야 하지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가해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것일까.남보다 힘이 세다는 걸 증명하려고 그러는 게다. 상대방을 제압하고 올라서는 방법이 폭력이 아닌가. 남들이 무서워하는 게 통쾌해서 그럴 것이고, 힘으로 누구든 무찌르면 세상을 가진 듯하여 그런다. 하지만 그들은 틀렸다. 남들을 괴롭힌다고 해서 나의 모습이 한 치도 자라지 않는다. 남을 딛고 일어서 내가 성장하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력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지만 폭력은 진정한 우위를 증명하지 않는다. 비겁함과 졸렬함을 드러내면서 가해자의 인성적 가치는 곤두박질친다. 남들과 다투어 이기는 일을 ‘경쟁’이라 가르친 학교가 잘못한 게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겨야 한다는 강박은 폭력까지 동원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진정한 경쟁은 ‘나를 이겨내는’ 일이다. 부단히 실력을 닦아 성장에 이르는 길은 나 자신과 싸움의 연속이다.대한민국 헌법 34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적는다. 헌법이 보장하는 행복추구권을 학교폭력이 막아서는 꼴이 아닌가. 학교에서 더는 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미국 학교에서는 행복한 가르침과 즐거운 배움을 확보하기 위하여 세 가지를 다짐한다. ‘나는 학폭을 저지르지 않으며, 주변에서 학폭이 눈에 띄면 신고하고, 내가 학폭을 당하면 가만히 있지 않는다.’ 배움의 공동체여야 할 학교가 폭력에 물들게 할 수 없다. 학교폭력도 폭력이다. 발생하는 학교폭력을 보다 엄정히 대처하여 아침마다 등교하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야 한다. 가해자를 처벌하고 선도함은 물론, 피해자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법적인 처리방법도 강구해야 하지만, 학교폭력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고 교육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무한경쟁’이라 부르며 끝없이 남과 다투도록 내몰았던 교육방식의 공허함을 직시해야 한다. 나도 자라면서 남도 행복한 배움의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 남을 해치면서 내가 성장하는 길은 없다는 걸 깨우치게 하고, 끊임없이 나를 이겨내며 거뜬히 일어서는 보람을 가르쳐야 한다. 생각으로 겨루고 토론하며 다투지만, 물리적인 폭력은 절대로 부르지 않는 행복한 교육을 회복해야 한다. 학교폭력으로 물든 어두운 교실은 시급히 바꾸어야 한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즐겁게 가르치며 배우는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2023-10-25

무너지는 사회, 일으키는 교육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마음이 무너지는 일들이 발생한다. 중학생이 40대 주부를 성폭행했다고 하고, 60대 의사가 병원 간호사 탈의실에 몰카를 설치했다는 게 아닌가. 동방예의지국을 들먹일 까닭은 이제 무너져버린 것일까. 사회의 맨 앞에 선 정치와 언론은 정치놀음과 정략다툼으로 날이 새는데, 건강한 사회를 향한 담론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있는 것일까.나라에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 경제, 안보, 문화, 산업 등 수다한 과제들 가운데 우리가 쉽게 놓치는 명제가 있다.교육. ‘백년대계(百年大計)’는 먼 앞날을 내다보며 일으키는 일인데, 오늘 우리는 어떤가. 국가 공동체는 지금 교육으로 다져야 할 내일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이들에게 넘겨줄 다음세상에서 ‘다음세대’가 자신있게 살아가도록 가르치는가. 내일을 고심하는 교육이 오늘 우리에게 있는가. 무엇을 어떻게 다르게 가르쳐야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까.경쟁. 끝도 없는 경쟁.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으로 세상을 배웠다. 남을 이겨야만 성공하는 세상. 반목과 다툼이 일상이 되고 끝없는 비교만 넘치는 세상. 그런 끝에 만난 세상은 아름다운가. 이긴 자들이 과연 좋은 세상을 만들었는가. 주변의 모습에는 상처만 가득할 뿐, 행복한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경쟁’의 본 뜻을 바꾸어야 한다. 진정한 경쟁의 의미는 남보다 나를 이기는 게 아닌가. 남을 밟고 일어서는 영광이 아니라 나를 이겨 거뜬히 서는 보람이 아닐까. 진짜 성공은 나 자신을 이겨내는 데 있음을 깨우쳐야 한다. 부족함과 게으름을 스스로 이겨내는, 나 자신을 이기는 경쟁이야말로 거친 세상을 이기고 다음 세상을 준비하는 첩경이 아닐까.선생님은 학생에게 누구인가. 끊임없이 응원하고 격려하여 더 나은 내일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날마다 부추기는 이가 아닌가. 반면, 실수를 지적하고 점수와 등수를 매기며 부족함을 드러내고 부끄럽게 만들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학생이 오늘 무엇을 해도 ‘오늘의 최선’을 던졌음을 인정하고 그보다 더 잘하도록 이끌어주는 선생님이 그립지 않은가. 오늘 학생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당겨다 주는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 배우려고 다가온 아이에게 모자란 부분만 탓하며 비난으로 가득한 하루를 만나게 한다면, 아이는 그날 무엇을 배우게 될까. 부정적 인성이 되어 자신과 주변을 어둡게하지 않을까. 교육은 함께 사는 공동체를 키워야 한다. 일등만 대접받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니다. 잘난 사람만 득을 보는 문화도 공평하지 못하다. 함께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서로를 포용하는 정신을 길러야 한다. 세상은 힘들고 거친 다툼의 장소가 아니라, 친절하고 따뜻하여 함께 사는 마음이 가득한 곳임을 가르쳐야 한다. 한 사람도 놓고가지 않는 학교를 구현해야 하며 모두 함께 즐거운 교육을 실천해야 한다.나라의 백년을 준비하는 교육이 돼야 한다.

2023-10-18

대추와 정치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혼사를 치르고 우리 집 식구임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시부모는 새 며느리 치마폭에 대추를 던져주며 아들딸 많이 낳고 건강하게 살도록 기원한다. 하필 대추였을까. 장석주 시인은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라 하였다. 한 알의 대추가 마치 태풍, 천둥, 번개와 같은 시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끝내 이기고 견디어 검붉은 빛깔 멋진 대추를 선사하듯이, 새색시와 새신랑도 삶을 잘 헤쳐가기를 기원하면서 한 줌 대추를 안겼겠지.태풍과 천둥과 번개가 없는 삶은 없다. 어려움과 시련이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이의 살아가는 길 위에는 시련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 스콧펙(Scott Peck)도 ‘삶은 어렵다(Life is difficult.)’고 간단명료하게 정리하였다. 개인의 삶이 어렵다면 사람이 모인 집단과 사회가 걷는 길도 쉬울 수는 없다. 무엇이라도 거두고 이루기 위하여 우리네 살아가는 여정은 힘들고 어렵다. 시련과 어려움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지혜롭게 견디고 슬기롭게 이겨내어 보다 나은 열매가 열리도록 길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지치고 힘든 마음을 가져다주는 일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우쳐야 할 것인가. 지나가야 할 수많은 어려움들 가운데 찾아온 태풍과 천둥과 번개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할 것인가. 오늘 우리가 가진 어려움을 잘 이겨내고 나면 우리는 또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인가를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나라가 어느 모로 보아도 어려운 일로 한 가득이다. 허리띠를 졸라맬 여유도 없을 만큼 일상이 어렵다는데 정치는 선거 놀음에 여념이 없다. 교육이 무너져 사방에서 아우성인데 정치는 표밭갈이에만 심취해 있다. 미래가 안갯속처럼 도통 보이지 않는데 정치는 과거로만 치달리고 있다. 나라 밖은 저만큼 달려가는데 나라 안은 시간이 멈춘 듯 갑갑한 마음. 왠지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느낌은 필자에게만 드는 생각일까. 아시안게임에서 돌아온 젊은 선수들에게서나 겨우 힘을 얻는 국민은 하루하루가 태풍이고 천둥이며 번개가 따로 없다. 구청장 보궐선거가 결판이 나면 무엇이 조금 바뀌려나 기대해 보지만 정치가 지나온 길을 되짚어 보면 그것도 그리 기댈 것이 되지 못한다.대추는 또한 몸을 따뜻하게 하며 젊게 해 준다고 하였다. 특별한 약성보다는 조화와 영양의 효능이 있다는 것이다. 시련을 이겨낼 뿐 아니라 그런 결과 주변까지 맑고 밝게 하며 따뜻한 화합의 기운마저 보듬어 내라는 의미로 새색시는 대추를 한아름 받아들었던 것이다. 태풍과 천둥과 번개를 이겨낼 뿐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나은 빛깔로 변화해 가는 모습은 한 알 대추에서도 관찰도 가능하다. 우리 정치도 오늘 만난 어려움에 빠져있을 일이 아니다. 견디고 이겨낼 뿐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 바에야 차라리 그 자리에서 사라져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익어가는 대추를 바라보며 정치가 나라를 살릴 것을 기대해 본다.

2023-10-11

우리 글엔, 자존심도 없나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여기서부터 원스푸드(Once Food)거리입니다’. 무슨 말일까. 관광지로 제법 이름난 국내 어느 도시 사거리에 걸린 현수막이다. 한글로 또박또박 적힌 글이라 읽을 수는 있었지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군민 플로깅챌런지’라 큼지막하게 적은 현수막도 보인다. 영문자의 도움도 없어 아예 그 뜻을 가늠조차 못하겠다. 어느 병원은 아예 ‘Moocheok Joeun Hospital’이라 상호를 내걸었다. 찬찬히 읽어 ‘무척좋은병원’이라 새기겠지만, 이래도 되나 싶은 떨떠름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한글인가 영어인가. 한국인가 미국인가. 민족의 명절 추석을 지내면서, 우리는 ‘우리의 것들’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아연해 졌다.‘Special Live Dinner Buffet’라고 광고를 하거나 ‘Forest Camping BBQ’라 버젓이 적어 알린다. ‘프레시랍스터’와 ‘핑크새먼디쉬’가 맛있는 집이라며 손님을 모은다. 그런 표현을 보면서도 별 생각없이 이해하고 넘기는 소비자들도 문제가 아닐까.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우리글과 우리말이 무너져 내린다. 언젠가 로스앤젤레스 등 외국의 거리를 한국말 간판으로 물들인다더니, 이제는 우리나라 길거리에서 우리말이 사라져 간다. ‘원스푸드’가 음식점에서 음식물을 두 번씩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니 그 뜻은 오히려 고맙다. ‘플로깅’도 운동을 하면서 쓰레기도 줍는 캠페인이었다니 곱지않게 보았던 마음이 오히려 미안하다. 관광지라지만 이왕 한글로 적을 거였다면, 보다 새기기 쉽게 표현할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한가위 명절을 지나며 우리는 우리를 얼마나 구체적으로 보듬고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한글날이 다가오는데, 중국글자 한자(漢字)를 힘들어 했던 백성들을 위해 글자를 만들었던 세종 임금의 마음도 다시 새겨본다. 우리가 우리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우리말과 한글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 우리 스스로를 업수이 여길 때 남들은 우리를 또 얼마나 하찮게 여길까. 멋진 우리말을 버젓이 두고 외래어와 외국표현에만 익숙해지면, 우리말과 우리글은 또 얼마나 빠르게 사그라들까. 때로 습관과 태도는 의지적으로 지켜야 한다. 대상이 우리만의 것이었을 때, 그걸 지킬 사람은 우리 밖에 없다. 세계화와 글로벌이 대세라 해도, 우리만의 고유한 멋과 맛은 소중하게 간직하며 지켜낼 때 빛이 나지 않을까.한가위 보름달은 어디에도 떴지만, 온겨레가 명절로 섬기기는 우리뿐이 아닐까. 정겹고 아름다운 전통은 지켜야 하고, 몸에 배어 습관이 된 문화는 키워야 한다. 밖으로부터 흘러든 문화와 영향도 어렵지 않게 받지만, 우리의 모습과 부딪힐 땐 잘 생각해야 한다. 때로 우리보다 나은 무엇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문화 안에 깃든 정서와 흐름은 소중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무엇이라도 함부로 가벼이 여겨 쉽사리 팽개치는 잘못은 없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작은 나라지만 문화적 정체성과 경제적 영향력은 간단하지 않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소중히 여기고 다루어야 한다.

2023-10-04

우리 말이 위태롭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우리 말이 위태롭다. 생각을 담아 표현하는 도구로서 우리는 언어를 사용한다. 글로 쓰고 말로 전한다. 마음에 품은 생각과 느낌을 말에 실어 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 세상에 배울 일이 많지만, 말하기와 글쓰기만 제대로 습득한다면 필요한 교육의 절반쯤은 이미 성취한 게 아닐까.품은 생각을 조리있게 정리하고, 남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새롭게 구성하며, 품격을 싣고 안정감있게 표현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필요한 소양이었다. 사회와 국가가 다양한 의견들을 조율하여 균형있게 발전해 가기 위해서도 공동체 구성원의 건설적인 제안과 아이디어가 풍성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모든 표현은 말로 해야 한다.그처럼 중요한 말이 흔들린다. 우선, 표현에 논리를 잃어간다. 조리있는 표현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게 논리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논리적으로 표현해야 하며 조직적으로 구성해야 한다.말에 논리가 정연하면, 듣는 사람에게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쉽게 이해하고 정리된 응답도 가능하다.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하여 말을 사용하면 논리보다 ‘한 방’을 찾게되어 정연한 표현구조는 힘을 잃는다.‘사이다’라 불리우는 공격포인트를 올리기 위하여 논리쯤은 쉽게 무시하고 만다. 말은 논리를 잃고 논리가 빠진 표현은 질서를 잃는다. 심각해야 할 사회적 담론을 단답형 공격형 어조로만 응대하다 보니 누구든 일방적 외침에만 의지할 뿐 의사소통에서 배우거나 얻어가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말이 품격을 잃었다.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소통과정에서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하여 사용하는 언어에는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수다한 정책적 아젠다에서 실패를 거듭하는 정치권은 우리 말을 훼손하고 격식을 잃게 만든다는 면에서도 책임이 크다.정치에도 공격 뿐 아니라 조정과 숙고, 협상과 타협의 묘를 기해야 할 가닥이 있어야 한다. 정치적 언사를 직선적인 공격으로만 채우다 보니 우리 정치인의 언어는 품격을 잃고 허공을 헤매고만 있다. 말이 격식을 잃어가면서 국민의 마음도 잃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국민 앞에 노출이 빈번한 정치인의 언어는 시급히 그 품격을 가다듬어야 한다.말이 안정감을 잃었다. 보수도 진보도 자신들의 생각조차 안정감있게 전하지 못한다. 공격의 다급함과 수비의 분주함에 쫓기다 보니 차분하게 안정적으로 생각을 다듬고 의견을 표현하는 방법을 잊어 버렸다.정치권의 불안정하고 일회적인 언어의 난무를 날마다 만나는 국민도 의견을 조리정연하게 간추릴 기회를 빼앗겨 버렸다. 공동체의 언어가 논리와 품격, 그리고 안정감을 회복하기 위하여 우선 정치권이 책임감을 느끼고 돌이켜야 한다. 우리 말의 높은 격조와 아름다움을 다시 찾기 위하여 국민적인 캠페인이라도 벌였으면 싶다.정치, 사회, 문화, 경제가 모두 중요하지만, 언어의 품격과 자존심만큼 우리의 바탕을 확인하게 하는 소양이 다시 있을까.

2023-09-20

정치, 그 책임의 무거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탄핵의 위기를 맞았다. 아들의 사업에 부적절하게 관련된 혐의가 제기되었다. 하원의장 케빈 맥카시(Kevin McCarthy)는 대통령이 권한을 남용하고 공권력을 방해하였으며 권력을 부패하게 한 흔적이 짙다면서 의회가 탄핵 소추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또한, 그는 대통령이 가족이 부당하게 연루된 일에 대하여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대통령의 심각한 일탈에 동조하며 방관하는 백악관 당국에도 심각하게 경고하면서, 미국 의회가 즉각 대통령 탄핵 절차에 돌입할 것을 요청하였다. 바이든 대통령 측은 직접적인 증거가 제시되지 않은 정치적 공세에 대처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반응했지만, 미국 시민의 절반 정도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있다고 전해진다.국내의 한 도지사가 국민소환의 위기에 처했다. 최근 있었던 수해 상황에서 있었던 지하차도 사고에서 그가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여 인명의 손실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해당 지역에서 주민소환의 요건인 서명인 확보가 시작되었으며,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를 정치에 적극적으로 반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다. 소환을 주장하는 측은 ‘도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책임져야 할 지사가 참사 당시 직무를 유기하고 부적절하고 무책임한 언행으로 일관해 도정의 신뢰가 사라졌다’고 한다. 물론, 안정적인 도정의 지속적인 진행을 위해 소환을 반대하는 시민들도 있다. 뽑아준 유권자의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 선출직 공직자의 업무수행은 크나큰 도전을 받는다.선출직 공직자는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의 눈길을 피할 길이 없다. 시민들의 소환압박은 물론, 매서운 언론의 눈초리는 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공인으로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정직해야 하고 투명해야 한다. 충분한 전문성을 가지고 성실하고 유능하게 매사에 임해야 하며, 모든 일의 진행과 결과는 한 치도 빠짐없이 공개되고 공정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주어진 임기 내내 비판과 평론이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겉으로는 균형을 잃지 않는 공직자의 모습을 지켜야 한다. 세평에 휘둘리지 않고 이념에 따라 편파적이지 않으며 국민과 시민만을 위하여 봉사하며 섬기는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국민의 혈세를 봉급으로 받으며 일하는 공직자의 가치를 날마다 증명해야 한다. 실로 어려운 일이지만, 국민은 때가 되면 다시 누군가를 뽑아 세워 일을 맡긴다.철학자 플라톤(Platon)은 지도자의 무지(無知)가 공동체 건설에 있어 최악의 조건이라 하였다. 무식한 지도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지도자, 알아야 할 사항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지도자가 가장 나쁜 지도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인간인 이상 실수가 있을 수 있지만, 실정(失政)의 책임(責任)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지도자가 되면 위험하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사회에서, 더 많은 국민이 인간다운 삶과 행복한 일상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문제는 심각하다. 정치는 그 책임의 무거움을 알고나 있는가.

2023-09-13

초고령사회, 위기일까 기회일까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대한민국은 곧 ‘초고령사회’로 접어든다. 2025년이면 65세 이상이 인구의 20퍼센트를 넘기게 된다. 나이가 많아도 경제생활을 지속해야 하지만 일자리에서 물러난 노인들은 길을 잃는다.정부가 짊어질 복지정책 부담도 재정적인 면에서 가볍지 않다. 고령화는 저출산과 맞물리면서 전반적인 인구구조의 변화를 초래하면서, 지역에는 급격한 인구감소를 빚어내 지역소멸의 위기감마저 가지게 한다. 인구위기는 남북한을 가리지도 않는다.2070년이 되면 남한은 3천600만, 북한은 2천400만 인구로, 2021년 대비 각각 70%와 90% 수준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고령화되고 출산율은 가장 낮은 나라가 될 것이라고 한다.위기의 그림자는 반드시 기회의 가능성을 품는다. 오늘 65세로 접어드는 사람들은 이전의 노령층과 어떻게 다를까. 그들은 한국전쟁 후 사회적 경향을 타고 태어난 사람들로 베이비붐세대(baby boom generation)라 불리운다. 급격하게 초고령화로 접어든 느낌이 드는 데에도 까닭이 있는 셈이다. 그들은 사회문화적 격동기를 거치면서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혼란을 모두 겪었다. 나라가 가장 어려웠을 시절에 때어났지만 눈부신 발전을 경험했으며, 정치적 변동을 체험하면서 거친 들판을 지나온 세대가 아닌가. 다양한 사회문화현상에 대한 체험적 이해가 깊고 여러 정치적인 이념성향도 겪을 만큼 겪었다. 이전 세대의 경제적 어려움을 보며 배운 바가 있어 노후대비에도 무심하지 않았다. 이전 어느 노인세대와는 판이하게 다른 ‘신개념고령층’이 출현하고 있다.한국사회에 처음 나타난 세대가 아닐까. 역사상 처음으로 체력(體力), 지력(智力), 재력(財力)을 겸비한 세대라고도 한다. 의학과 과학의 눈부신 진보로 인간수명 백세를 바라보는 세상이 되지 않았는가. 전후 부모들의 뜨거운 교육열 덕분에 가장 많이 배운 세대가 아닌가. 국가경제 발전을 몸소 견인해 온 어른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은퇴한 다음 일로부터 손을 놓고 뒷방 늙은이로 자조적인 삶을 유지하던 노인층이 아니다. 건강과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와 다짐을 불태우는 세대로 보아야 한다. 서구사회에서도 액티브시니어(active seniors)를 대상으로 하는 실버산업이 블루오션이라는 게 아닌가. 인구 초고령화는 사회의 위기인 동시에 기회를 제공한다.초고령화를 위기요소가 아니라 기회인자로 보아야 한다. 정책적으로도 복지예산에 대한 재정적 부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세대의 문화적 유연성과 경제적 소비성향을 진작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정년연장이 뜨거운 이슈가 되었지만, 이를 세대 간 갈등요소로 볼 것이 아니라 인구고령화를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피할 수 없는 미래로서 ‘초고령화현상’은 사회문화적으로 새로운 생각의 틀을 마련하여 준비해야 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맞게 될 고령사회를 슬기롭게 대비하는 지혜를 준비해야 한다. 재정압박을 핑계로 회피하려 하거나 세대갈등의 빌미로 보아 배척하려는 태도는 버려야 한다.

2023-09-06

기후변화, 기후위기, 기후재난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처서(處暑). 여름을 지나 더위가 꺾이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했다. 예년에는 늘 그랬다. 처서를 지나 백로가 코앞인데 기온은 아직 고공행진이다. 2차 장마 소리도 들린다.세계기상기구(WMO) 발표에 따르면, 지난 7월은 역사상 가장 더운 한 달이었다. 가장 뜨거웠던 계절이 아직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어느덧 8월의 마지막 날이지만 가을은 더디 오는가 싶다. 기후변화를 기후위기라 부르더니 이제는 기후재난이라 적는다고 한다.폭염과 홍수, 폭우와 가뭄, 폭풍과 한파, 산불과 허리케인 등 기후가 초래하는 이상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각하다. 올해 7월 캘리포니아 데스밸리국립공원에서 섭씨 53도를 기록했는가 하면, 이란은 8월 초에 50도를 넘으면서 임시휴일을 선포하였다. 한겨울이어야 할 남반구 아르헨티나도 여름처럼 더웠다는 게 아닌가.기후가 재난이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미항공우주국 NASA는 인간이 주도한 지구온난화가 오래 지속된 결과라는 것이다. 기후가 자연현상 같지만, 실은 사람이 만든 결과일 수 있다.탄소방출에 따른 대기오염, 에너지 과다사용에 따른 환경훼손 등이 초래한 인재(人災)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기후위기의 여파는 날씨와 기온에 머물지 않는다. 식품가격 상승이 불러오는 인플레이션을 푸드플레이션(Food flation)이라 부르는데 그 근본원인을 따져보면 기후변화라는 게 아닌가.식량농업기구(FAO) 쌀가격지수는 7월에 전월대비 2.8% 올라 129.7을 기록하여 22년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쌀 세계수출량 40%를 맡았던 인도가 최악의 가뭄으로 수출제한 조치에 들어갔다.극심한 고온 기후는 인류에 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온열질환의 가능성은 잼버리야영장에서 이미 목격하였다. 실제로 더워서 사망에 이르는 숫자가 홍수나 산불에서보다 많다고 한다. 일사병과 말라리아 등 심각한 질환에 인류는 다시 노출될 판이다.미국의 대표적인 휴양지 하와이의 마우이섬은 올여름 엄청난 산불로 관광, 여행, 레저산업은 생각도 못했다. 오랜 가뭄과 고온다습한 대기에 지나가던 허리케인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빚은 자연재해라고 하지만 그런 규모의 복합적인 기후재난이 다른 장소에서 재발할 확률은 점점 높아져 간다고 한다. 연례행사처럼 발생하는 홍수로 인한 재난에도 국가와 지방자치제 차원에서 더욱 집중적으로 살피고 대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이미 발생한 자연재해를 맞아 대처하는 수준의 경각심으로는 앞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기후재난에 효과적으로 대비하기 어려울 터이다. 사전에 감지하고 대비해야 하고 자연재해를 맞아도 안전한 제반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건축관련 규정과 치수관련 시스템 등을 근본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계절을 가리지 않고 발생할 기후관련 재난에 국민도 더 이상 수동적일 수는 없다. 주변에 산재한 위험에 경계를 늦출 수 없으며 물과 공기 등 자연자원의 이용과 소비에 예민한 시민의식을 발동해야 한다.가을은 오고야 말겠지만, 걱정은 깊어만 간다.

2023-08-30

힘든 청년, 병든 나라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나라가 병들었다. 무고한 사람을 까닭도 없이 죽이고 해치는 일이 기승을 부린다. 이를 바라보는 정부의 대책은 또 어떤가. 문제의 근본부터 뿌리를 뽑겠다는 대통령의 생각이 ‘엄정한 처벌’에 머물고 있다. 장갑차가 등장했었고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논한다. 벌어진 폭력은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 엄정하게 대처하여 사회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생각도 틀리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범죄를 두고 형벌로 다루겠다는 건,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생각 가운데 하수(下手)다. 하필 이 여름에 이런 일들이 줄을 이어 발생하는지 그 까닭을 살펴야 한다. 날이 덥거나 기분이 가라앉는 건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을 해친다고 자신의 처지가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는 바보가 있을까.온오프라인을 불문하고 ‘미움과 욕설’로 가득한 세상이다. 국회가 들려주는 언어의 패턴은 혐오와 조롱으로 가득하지 않은가. 편가르기와 등돌리기가 정치행위의 상식이 되었다. 멋진 정치에서 경청과 타협, 토론과 양보를 기대했던 국민은 이제 누구를 만나도 ‘어느 편’인지 살피는 게 일상이 되었다.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만 어울리겠다는 생각은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모든 면에서 나와 생각이 똑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슈에 따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제거한 끝에 인간은 결국 홀로 남지 않을까. 다양하고 풍성한 ‘생각의 시장(marketplace of ideas)’이 존재해야 건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투표와 다수결이 소중한 까닭이다. 혐오와 차별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국가와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나라 안에 가득한 혐오분위기와 차별 정서는 젊은 세대에게도 전염되었다. 인정하고 포용하기보다 밀어내고 미워하는 기운에 익숙해진 청년들은 점점 더 ‘외로운 늑대’로 내몰리고 만다. 기회가 보이지 않고 기대할 것도 사라진 세상은 그들에게 등을 돌린듯 여겨질 터이다. 출처가 어딘지 분명치 않은 미움을 상대가 누군지 모르는 대상에게 퍼붓는 게 아닐까. 무엇 때문인지 모를 자신의 힘든 처지를 그렇게라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게 아닐까. 사회적 병리현상은 공동체가 ‘사회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개인적 일탈현상으로 여겨 처벌로만 대처하다가는 사회적 골든타임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사회적 각성이 일어야 하고 문화적 노력이 있어야 한다. 비뚤어진 정치가 바뀌어야 하고, 편가르기의 폐해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후대에 좋은 나라를 넘겨주기 위하여 사회적인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병든 줄 뻔히 알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끝내 죽음에 이르지 않을까. 묻지마범죄가 동시다발로 벌어지는 오늘, 사회적으로 차분히 문제의 뿌리를 살펴야 한다. 미래세대가 중요하지만, 오늘의 청년세대가 든든한 허리로 받쳐주지 않으면 다음세대도 기대하기 어렵다. 20대와 30대에 건강한 사회환경을 실현해 주어야 하고, 비전을 가지고 미래를 닦아낼 꿈을 심어주어야 한다. 청년에게 기대와 소망을 안기지 못하면, 사회와 국가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2023-08-23

스카우팅, 누구의 일인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지나갔다. 낯선 이름의 국제행사에 대통령까지 관심을 보이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정부가 깊이 관여하였다. 스카우트운동은 민간사회운동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세계적인 수련활동이기는 하지만, 본질은 여전히 보통사람들의 자발적인 사회운동이다. 주로 야외활동에 방점을 두고 진행되는 다양한 운동의 결과로 청소년들이 스스로 생존능력을 확인하고 적극적으로 활동역량을 증진하며 공동체를 위한 봉사정신을 함양하게 된다. 필자의 오랜 해외경험에 비추어도 스카우트운동에 정부조직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은 그리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다만, 스카우트운동을 지켜보면서 지원하는 방식은 얼마든지 가능할 터이다.새만금잼버리에는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운영에 참여한 결과, 부정적인 부분에 대하여 책임소재를 놓고 시끄러울 판이다. 더욱 혼돈스러운 일은 책임 시비를 두고 정권이나 이념의 향배에 따라 편을 가르고 지방색을 극도로 드러내는 비난이 들리는 부분이다. 대한민국은 정부가 바뀌어도 같은 나라이어야 하며 지방정부에 책임이 있다면 이를 밝혀 시정하면 될 일이다. 어느 나라의 문제와 책임은 그 나라의 것일 뿐 ‘특정한 정권의 나라’에 귀속하지 않는다. 사회공동체의 사안을 어느 집단의 사안으로 바꾸어 시비와 정쟁을 일삼으면, 해결책의 도출은 고사하고 논쟁과 싸움의 이전투구만 거듭하게 되어있다. 실익과 결과가 보이지 않는 아귀다툼은 멈추어야 한다.길에서 새만금잼버리에 참가하였던 유럽 국가 청년들을 만났다. 생생한 느낌과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들 사이에도 생각과 의견이 달랐다. 전반적으로, K-콘서트가 인상적이었던 반면 스카우팅 본질에는 미흡하였다는 인상을 전해 주었다. 더위는 견딜 수 있지만 그늘이 없었던 건 힘들었다고 했다. 자연적인 난관은 얼마든지 이겨낸다는 스카우팅 운동의 실체를 엿들은 느낌이었다. 조금만 더 잘 준비하였더라면 그리 실패할 것도 없는 잼버리였을 모양이었다. 그르친 책임을 묻고 새롭게 만들어 갈 다짐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과도한 정쟁으로 혼돈스런 광경이 연출되지 않았으면 한다. 스카우트운동의 본질을 다시 찾아가도록 지원하여야 한다. 민간운동을 정권다툼으로 퇴색시킬 수는 없지 않을까.‘준비하라.’ 스카우트운동의 슬로건이라고 한다. ‘무엇이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몸과 마음으로 늘 준비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다음세대 청소년들에게 어려움을 이겨내고 난관에 미리 대비하는 마음가짐을 가지도록 이끄는 셈이다. 세계잼버리 행사가 늘 여름 한가운데 벌어지는 까닭이 아니었을까. 폭염과 태풍 등 기후조건에 대하여 사전에 보다 치밀하게 준비하고 대처하였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운동의 본질을 잘 이해하였다면 행사의 운영에 보탬이 되었을 터이다. 국민은 정치권의 끝모르는 아귀다툼에 지쳐간다. 정치권이 진정성있는 돌파구와 해결책을 찾아내는 정치적 효능감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청소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

2023-08-16

남들이 바라보는 대한민국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세계는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스위스의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세계 각국의 인재유치매력도 순위를 발표하였다. 어디서 공부하고 준비하였든 젊은 인재들이 소양과 재능을 펼치며 일하고 싶은 나라의 순위를 매겼다. 대한민국은 조사대상 63개국 가운데 49위에 그쳤다. 나름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같은 조사에서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점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2022년 결과인데, 이전보다 여덟 계단이나 떨어졌다고 한다. 미국이 4위, 일본이 27위, 호주가 14위라 하고, 그나마 중국이 우리보다 아래쪽에 보인다. 썩 괜찮은 나라인줄 알았던 대한민국이 젊은 인재들의 눈에는 아직도 멀었다는 셈이다. 그마저 해를 거듭하며 내려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여러 나라들이 인구감소를 힘들어 하는 가운데, 유독 캐나다가 한 해에 이민인구 유입 100만 명을 돌파하며 인구를 획기적으로 늘이고 있다. 비결은 역시, 가 살고 싶은 나라를 만드는 게 아닐까. 우리는 대한민국을 얼마나 그런 나라로 만들고 있을까. 정부는 위기를 맞은 인구정책을 가다듬으면서 양질의 고급인력을 끌어들이는 고급인력 유입을 효과적으로 유도할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저출산과 고령화를 문제로 인식하여 국내인구를 늘이는 일도 중요하지만 점차 확연해지는 글로벌 환경에서 해외의 인재들을 대한민국으로 맞아들이는 정책이 필요하다. 유학 떠난 인재들이 세계시장에서 활약하는 일도 소중하지만, 고국으로 다시 불러들일 만한 여건을 만들어 내는 일도 정책적으로 고민해야 한다.세금과 연금제도, 환경적 정주여건, 2세를 위한 교육환경, 문화적 다양성과 수성, 일상생활에서의 불편제거 등 인재들을 대한민국으로 모으기 위한 과제들이 즐비하다. 그동안 경제적 집적효과에 방점을 두고 국가경쟁력을 생각해 왔다면, 이제는 보다 다각적이며 심층적인 시각에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야 한다.‘세계 10위권’ 타이틀이 세계인의 마음속에 단단하게 자리잡기 위해서 우리에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치안과 안전이 우리의 자랑이었는데 그마저 무너진 듯 보이는 오늘의 현실 앞에 혹 나라의 경쟁력 관리를 위한 길을 잃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세계스카우팅잼보리에 참여했던 대원들이 다소 실망하여 속을 끓였겠지만 국가이미지를 다시세울 방법을 얼른 찾아 끌어올려야 한다. 스카우팅의 본질과 젊은이들의 심장을 함께 두드릴 방도를 찾아야 하고 그들이 돌아간 후에도 잊지않고 교감을 이어갈 관심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 좋은 생각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남들이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 앞에 겸손해야 한다. 생각은 금방 바뀌지 않는다. 진심과 공감을 실어 태도와 방법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세계인이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오늘보다 나아지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세계10위권’ 허상을 붙들고 자만해 봐야 아무도 이 나라를 곱게 봐주지 않는다. 꿈에서 깨어나 우리의 실상을 보아야 하고, 거기서부터 쌓아올려야 한다.

2023-08-09

둘로 나눌 수 있을까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문과와 이과는 누가 갈라놓았을까. 문과형 인간과 이과형 인간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초중고 공교육 과정을 지나면서 우리는 문과와 이과 가운데 선택을 한다. 그 기준은 무엇이엇을까. 대체로 수학을 좋아하는지가 자기 판별의 기준이었다. 수학적 사고능력이 소위 이과적 인간이 되기 위한 절대적 기준이 되는 지도 사실은 그리 분명하지 않다. 수학적이며 논리적인 표현 능력은 인문사회, 정치경제 영역에서도 대단히 필요한 소양임이 밝혀지고 있다.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예로 들어보자. 이과적 성향이 다분한 직종으로 여겨지지만, 수학적 기능만으로는 절대로 부족하다. 실제 현장에서는 고도의 상상력과 스토리텔링 소양이 필요하고, 분석적 사고능력은 물론 구성원 간 인화적 소통능력을 함께 갖추어야 한다. 사람의 소양과 품격을 문과와 이과로 단순하게 둘로 나누어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으로 이해하는 일에서 이제는 탈피해야 한다.오늘날 문제들이 유형별로 생기지 않는다. 기업경영은 문과인가 이과인가. 가정살림은 문과인가 이과인가. 상황은 언제나 복합적으로 발생하며 균형잡힌 통합적 사고가 언제나 필요하다. 사람을 읽어야 하고 상황을 분석해야 한다. 느낌을 짚어야 하고 손익에도 밝아야 한다. 배경지식도 필요하고 미래예측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사람들 사이에 칸을 치고 벽을 만들어 서로 오가는 일마저 막는다. 문과와 이과는 함께 나눌 이야기 소재마저 궁핍해 져서, 사회는 또 다른 양극화를 겪는다. 넘나들기 어려운 섬들이 생긴다. 문과적 소양과 이과적 능력을 따로따로 구분해서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이제 접어야 한다. 공교육을 받는 우리 학생들이 폭넓고 균형잡힌 인성을 형성하도록 도와야 한다. 문학과 역사, 수학과 과학을 넘나들며 유연하게 배워야 한다.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유네스코(UNESCO)는 21세기에 가르쳐야 할 네 가지 필수영역들로 분석적 사고(Critical Thinking), 창의(Creativity), 협력(Collaboration), 소통(Communication)을 들었다. 문과나 이과의 구분은 어디에도 없다. 개별 과목의 이름도 적지 않았다. 전통에 따라 구분된 과목의 이해를 넘어 통합적으로 균형잡힌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는 게 아닐까. 대학에서도 지나친 세부 전공영역의 구분을 경계해야 한다. 전문지식 심화의 필요를 인정하더라도 인성의 널푼수를 지향해야 한다.다음세대가 창의와 혁신으로 가득한 내일을 만나려면 다르게 가르치고 새롭게 배워야 한다. 문과와 이과 구분에 길들여진 습관을 벗어야 한다. 과학자가 문학에 능하고 역사가가 과학에 밝은 날들이 와야 한다. 새로운 상품개발에 인문학적 경험과 불편함이 스며들고 철학자의 논변에 과학의 발자취가 녹아들 때 비로소 학문 간 균형과 인성 간 조화도 가능해 진다. 인성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도 넓어지지 않을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해 지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회에는 배려와 상생의 기운이 돌지 않을까. 포용과 협력이 시대의 기운이라면, 문과와 이과의 구분부터 사라져야 한다.

2023-08-02

교실은 누가 책임지는가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젊은 선생님이 유명을 달리하였다. 과중한 업무와 부당한 압력에 못 이긴 결과로 보인다. 선생님은 누구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사가 하는 일은 무엇이고 어디까지 맡겨야 하는가. 학교와 가정, 사회와 국가 가운데 교육의 궁극적인 책임은 누구의 몫인가. 학부모는 학교 교육에 관하여 어떻게 어느 만큼 개입할 수 있을까. 평소에도 궁금했던 질문들이 한 선생님의 극단적인 선택 앞에 불쑥 올라온다. 교사와 부모 사이의 관계를 우리는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갈등이 빚어져 회복할 수 없었다면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유사한 상황이 지금도 발생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까.믿고 맡겨야 한다. 교직은 성직이었다. 선생님 그림자도 밟지 않았을 만큼 높은 신뢰의 대상이었는데, 언제부터 선생님이 감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을까. 수십 년 전 학교의 모습에서 교사가 자행했던 폭력과 오만의 그늘을 기억한다. 불신과 경계가 일부 교사들의 악행에서 비롯했던 부분도 부인하기 어렵다. 선생님들이 우선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첫 다짐을 회복해야 하고, 학부모는 젊은 선생님의 진심을 받아주어야 한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교육과 관련한 모든 결정과 진행에 학부모의 믿음을 실어야 한다. 교사와 부모가 한마음이 되어 자녀교육을 쌓아야 한다.교사는 을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언제나 갑과 을의 관계로 인식하려는 우리 문화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나이와 성별, 직책과 소속, 업무와 직종에 따라 갑과 을을 판정한 다음, 그 비대칭적인 관계에 따라 나머지 모든 일을 진행하는 방식을 이제는 버려야 한다. 필요에 따라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고 자신이 선택한 업무에 임하는 만큼, 누구든 전문인의 지위를 인정받아야 한다. 비대칭의 갑을문화가 교육에 들어서 있는 한, 교육의 전문성이 살아날 방법이 없다. 교사와 학부모가 각기 학교교육과 가정교육에 대한 전문적인 인식과 태도를 견지하고 자신있게 본연의 업무에 당당하게 임해야 한다. 서로를 향한 관심과 기대는 각자의 전문적인 소양을 진작시키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되어야 한다. 교사와 학부모의 관계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 자녀교육을 위하여 서로를 믿고 격려하며 소통하고 공유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아이는 온 마을이 기른다. 선생님과 학부모뿐 아니라 아이들이 자라나는 주변의 사람들과 사물들이 모두 교육에 함께 한다. 교육정책을 만드는 정부와 교육청은 교사가 교실 안에서 가르치는 일에 던지는 과도한 감독과 감시의 눈길을 거두어야 한다. 교사가 전문적이며 자율적인 판단에 따라 긍정적인 교육을 자유롭게 진행하도록 신뢰하고 격려해야 한다. 선생님들이 처음 가졌던 순수와 열정을 회복하고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캠페인이라도 벌였으면 싶다. 공교육의 근간은 학교에서 찾아야 하며, 교실은 학교 교육의 현장이다. 교실은 선생님의 가르침과 자녀들의 배움으로 가득해야 한다. 선생님이 살아야 교육이 선다.

2023-07-26

빗줄기 속에서 생각한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기다렸던 비가 내렸다. 목이 타도록 고대하던 빗줄기가 시원했다. 청청한 초록이 싱싱한 기운을 흠뻑 들이켰다. 신기하게도 장마는 한반도를 오르내리며 나름 고르게 물줄기를 대었다. 더욱 신통한 것은 장마가 지나면 폭염이 찾아올 터이다. 흠씬 적신 대지를 익히며 뜨거운 햇발이 쏟아질 것이다. 정성으로 심은 곡식들이 장마 뒤 폭염 속에 푹푹 익어갈 참이다. 그래서 ‘장마에는 돌도 큰다’고 했을까. 자연은 이렇게, 소리없이 인간을 돕는다. 장마를 지나며 바라던 대로 풍성한 결실을 내려면, 장마 전에 여러 가닥 준비를 해야한다. 장마를 홍수로 까먹지 않으려면 치수에 미리 손을 써야 한다. 기다리던 장마가 왔다고 저절로 모든 것이 좋아지는 것이 아닌 것은, 인간에게 장마를 대비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려는 것일까. 하늘이 도울 테니 사람은 준비하라는 소리가, 거의 들린다.윤흥길의 소설 ‘장마’는 마침 이즈음에 맞았던 한국전쟁의 모습을 여러 갈래로 그리고 있다. 준비없이 맞았던 민족의 비극이어서 그랬을까, 어둡고 지겨운 어려움으로 다가온 전쟁을 마침 함께 찾아왔을 긴긴 장마 빗줄기에 빗대고 있다. 삶의 어려움이 지나가면서 장마가 그친다는 복선에 장마를 바라보는 시선이 보인다. 기다림이 기대만큼 열매를 거두려면, 장마가 오기 전에 가져야 할 태도를 가다듬어야 한다. 혹 준비하지 못했다면 퍼붓는 빗줄기 속에라도 다음엔 어떻게 할 것인지 다짐해야 한다.전국 각지에서 물난리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목마름이 애통함으로 바뀐 뉴스는 안타까울 뿐이다. 애타게 기다리면서 준비하지 못한 결과를 보는 참이다. 더이상 빗줄기가 재난이 되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데 나라는 무엇을 했을까. 해마다 어려움을 겪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각오와 다짐을 새롭게 해야한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모두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물난리에서조차 좌우로 갈라서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념이란 결국 더 나은 내일을 만나기 위한 지향성과 방법론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그 바라보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은 더욱 나라다운 나라를 당기기 위한 또다른 모습의 간절함이 아니었을까. 진영으로 갈라서 생각없이 손가락질만 퍼부을 일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마음 가닥들을 모아가야 하지 않을까. 더이상 반목과 비난으로 아까운 날들을 허비하지 않아야 한다. 다가온 장마가 뒤이을 폭염 속에 온갖 과실을 맺는 것처럼 다른 생각들 속에 숨은 모든 이들의 열정을 묶어 진정한 나라다움을 일구어야 한다.기다림이 장마로 이어진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간절함이 기다림을 건너 빗줄기를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사람을 도우려는 자연의 마음에 화답하지 못한 인간의 미련함을 다시 보았다.이제 다시 하는 다짐 속에는 간절했던 기억을 반드시 함께 심어야 한다. 장마 후 결실을 위해 무더위가 찾아오듯이 희망과 함께 공동체를 건져 올리려면 열정 가득한 담론과 비평과 함께 구체적이며 실증적인 준비가 있어야 한다. 장마를 홍수로 까먹지 말아야 한다.

2023-07-19

교육으로 세상을 건지게 하라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장 교수의 선친은 바보였다. 경부고속도로와 영동고속도로의 입지를 선정하고 실제 도로디자인을 손수 하였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집에는 한 꼭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남들은 떼돈을 번다는데 아내에겐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80년대 초 서슬이 시퍼런 군사정권이 들어서 숙정의 바람이 불었다. 숱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그는 멀쩡히 일했었다는 게 그의 자랑이었다. 어머니 눈에는 그야말로 ‘바보 아버지 인증’이었다. 필자도 한 때는 어머니와 같은 심정이었지만,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오늘 저 혼란한 세상을 보니 그게 아니었다. 깨끗하고 당당하게 부끄럼 한 점 없이 공직자의 길을 지켜낸 아버지가 자랑스럽다.세상이 어지럽다. 공약을 지키지 않는 정치와 끝없이 힘만 드는 경제. 약속을 저버리는 정치를 어떻게 믿으며 나아지지 않는 경제에 무엇을 기대할까. 약속을 지키는 성실함과 차곡차곡 모으는 꾸준함이 민생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일까.다음세대를 기르는 교육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세상 모습 그대로 거짓과 혼돈을 가르칠 수는 없지 않은가. ‘바르고 성실하며 착하고 아름답게’ 자라도록 가르쳐야 하는 학교는 날마다 무너진다. 교실에서 이야기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을 매일 만나는 선생님들은 오늘도 힘들다. 아이들은 눈치채지 않았을까. 교육은 학교만 하는 게 아니다. 집과 동네에서 만나고 스치며 세상을 배운다. 미디어와 언론은 아이들에게도 제한없이 열려있다. 숨길 수가 없고 숨겨지지도 않는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일과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이 전혀 딴판이라면, 그런 교육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아이들은 왜 학교에 가는가.교육적 견지에서 사회적 각성이 일어야 한다. 사회적 가치가 바로 서지 않고는 정상적 교육이 불가능하다. 선동과 기만으로만 가득한 세상에서는 성실과 정직을 가르칠 수 없다. 혼돈과 주장만 그득한 일상에서 안정과 평화를 이야기할 수가 없다. 꿈과 비전이 야심과 욕심이 되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용기와 상상력이 술수와 기만으로 해석되는 가르침은 교육이 아니다. 사람을 기르는 게 교육이지만, 고르지 못한 텃밭에 바른 교육이 설 자리는 없다. 사람을 도구화하는 교육은 부적절하다. 교육은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야 한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키워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도록 이끌어야 한다.교육이 바로 서야 한다. 세상이 어지러워도 흔들리지 않을 용기를 가르쳐야 한다. 눈속임이 가득한 세상에 진정어린 정직을 길러내야 한다. 다음세대의 시선이 넓은 세상을 향하도록 길러야 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우리는 좁은 우물에 갇히지는 않았을까. 세상을 등진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는 교육이 되어야 하고, 무너진 세상을 바로잡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어두운 세상에 빛을 던지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비뚤어진 정치와 어지러운 세상에는 교육이 희망을 던져야 한다. 교육이 살아야 세상이 선다.

2023-07-12

국가브랜딩, 살려야 한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미국의 한 일간지 US News World Report가 세계국가순위를 발표한다. 삶의 질, 사회적 역동성, 문화적 자산, 기업친화성 등 10개 분야에서 객관적으로 취합한 자료를 합산하여 해마다 공표한다. 작년에는 스위스, 독일, 캐나다에 이어 미국이 4위, 일본은 6위, 중국이 17번째에 올라있었다. 최근 여러 분야에서 괄목한 발전을 보여온 대한민국은 20위였다. 기업이 물건을 잘 만들어야 하지만, 업체와 상품의 이미지를 효과있게 긍정적으로 알려내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오늘처럼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할수록 마케팅과 브랜딩이 점점 각광을 받는 까닭이기도 하다. 국가도 마찬가지다.해외에서는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대한민국은 어디쯤 자리잡고 있을까. 경제력이 성장하였다고 평판이 그대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세계무대에서 선진국의 위치에 근접했다는데, 세계인이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는 어디쯤 와 있을까. 세상은 한국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기업이 좋은 물건을 팔아도 업체가 하는 일과 상품의 가치를 알리는 일은 특별한 경영수단을 필요로 한다. 이름하여, 브랜딩(Branding). 대한민국이 여러 가닥에서 좋은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인의 마음에 다가가는 일에는 또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도 브랜딩에 나서야 한다. 나라들 사이에서 교류와 통행이 활발해지면 관광과 여행은 국가경영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산업영역이 된다. 대한민국을 세계인에게 효과적으로 알리고 마음을 사로잡을 ‘국가브랜딩’이 더없이 긴요해진다.우리에게도 법정 ‘국가브랜드위원회’가 있어 지구인들이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에 대한 인식과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들어가는 데에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세월이 흐르면서 위원회가 명맥을 간직하고 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아 국가가 나라를 효과적으로 알려내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궁금할 뿐이다. 외형적인 국가경쟁력과는 또 다르게 나라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일은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사이몬앤홀트(Simon Anholt)가 개발한 ‘좋은나라지표(Good Country Index)’는 나라들이 다른 나라들을 위하여 끼친 기여도를 평가하여 순위를 매긴다. 2022년 발표에 일본이 34위, 한국 37위, 미국 46위, 중국 69위 등이었다. 세계와 함께 호흡하며 상생과 공존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우리의 모습이 세계인의 인식 가운데 긍정적이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새겨질 수 있도록 전문적이며 적극적인 브랜딩에 착수해야 한다. 효과적인 이미지 개발을 위하여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국가브랜드위원회의 취지와 기능을 살려내어 제 역할을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나라가 더 많을 일을 하여 좋은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한 만큼, 세계인들에게 이를 잘 알리고 전하여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를 올려내는 게 중요하다. 어떻게 만드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알리느냐가 성패를 가른다. 대한민국이 더욱 발전하고 성장해야 하지만, 더없이 멋진 나라로 알려내야 한다.

2023-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