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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권인가 영업권인가

등록일 2025-11-12 17:26 게재일 2025-11-1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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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규열 본사 고문

서울시의회가 고등학생 대상 학원 교습시간을 자정까지 연장하는 조례안을 상정했다. 표면적으로는 ‘학생의 학습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이다. ‘학습권’이란 말은 허울뿐이다. 실제로 보호하려는 것은 학생이 아니라 학원이다. 아이들의 권리가 아니라, 사교육 시장의 ‘영업권’을 지키려는 시도다.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공부하는 집단이다. 한국 청소년의 하루 평균 학습시간은 10시간이 넘는다. OECD 평균(6.5시간)을 훌쩍 웃돈다. 수면시간은 반대로 가장 짧다. 2023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의 주중 평균 수면시간은 5시간 29분이었다. ‘자정학원’이 허용되면 이는 더 줄어들 것이다. 아이들은 자정에 귀가해 다음 날 새벽 다시 학교로 향해야 한다.

삶의 리듬은 무너진 지 오래다. 조례안은 ‘공부하고 싶은 학생의 자유를 막지말자’고 주장한다. 이것이 자유인가. 실제로는 학원 경쟁이 치열해지고 학생과 학부모가 경쟁의 수요자로 내몰릴 뿐이다. 어느 학원이 문을 열면 옆집 학원도 열 수밖에 없다. 모두 자정을 향해 달리게 된다.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강요된 참여이며, ‘학습권’이라는 미명 아래 시장의 논리가 아이들의 시간을 빼앗는 구조다. 가정은 설 자리를 잃었다. 늦은 퇴근길, 아버지는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본다. 어머니는 학원 일정표를 붙들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밥상은 공허하고 대화는 짧아졌다. ‘가족 단위의 시간’은 기억과 기대로만 남았다. 주말마다 아이들은 모의고사를 보고, 부모는 피곤에 지쳐 침묵한다. 어느새 ‘함께 저녁을 먹는 가족’은 어디에도 없는 사치스러운 표현이 되었다.

정치권은 이런 현실을 바꾸기보다 제도적으로 굳히려 한다. ‘더 공부할 수 있게 하자’는 구호는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실상은 학원업계의 이익을 보장하는 결정이다. 학원은 매출을 늘리고, 정치인은 ‘교육기회 확대’를 자화자찬할 것이다. 그런 대가로 사라지는 것은 청소년의 수면과 가족의 저녁, 사회의 휴식과 공동체의 건강이다. 교육은 인간을 지키고 키우는 일이어야 한다. 지금 교육정책은 아이들을 끝없는 경쟁의 도구로만 기르려 한다. 학교도, 학원도, 정치도 ‘더 오래, 더 많이’만 외친다. 아이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더 오래 공부할 권리’가 아니라 ‘편안하게 쉴 권리’다. 생각할 틈과 멈출 여유, 가족과 함께 즐길 시간이다.

다른 나라들은 반대로 움직인다. 일본은 ‘야간학원학습’를 엄격하게 규제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도시의 치안과 청소년의 수면권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미국이나 핀란드 등 나라에는 사교육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공교육을 충분히 신뢰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오후 3시 이전에 학교를 마치고, 가정에서 가족과 함께 온 저녁을 보낸다. 그런 결과, 학력 격차는 오히려 줄고 청소년 우울증 등 부정적인 통계수치는 OECD 평균의 절반에 못 미친다.

자정까지 불을 밝히는 도시에서 아이들은 언제나 꿈을 꿀 수 있을까. 상생과 경쟁 가운데,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는 어느 켠일까. 교육의 본질이 살아나려면, 학원의 문이 아니라 가정의 품이 열려야 한다. 나라의 품위가 올라가려면, 가정에서 쌓이는 교육적 가치에 꽃이 피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건강해 지는 첫 걸음이다.

/장규열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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