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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어제와 다른 오늘

김규종 경북대 교수 하루가 다르게 태양이 일찍 떠올라 창천에서 오래 빛난다. 아침 여섯 시 무렵 동창은 환하게 빛나기 시작하고, 저녁 일곱 시가 지나야 사방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생명의 환희와 약동(躍動)이 찬란하게 작동하는 눈부신 시절이다. 이런 날이 이어지면 누구나 들뜨고 조금은 흥분되기 마련이다. 접촉사고에 조심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반면에 봄날은 아주 변덕스러워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이를테면 지난 목요일 내가 사는 고장 청도에는 온종일 비가 뿌렸다. 아침나절부터 오기 시작한 비가 한밤중까지 그칠 줄 모르는 것이다. 결국 그날 온종일 나는 잠과 벗하는 선택 말고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하되, 대체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렸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기상청도 민간 기상업체도 묵묵부답이다.그러다 금요일 아침나절에 피식, 하고 혼자 웃는다. 일일 누적 강수량 41.8mm라는 표기가 일기예보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정보가 차고 넘치는 때에 이토록 늦게 강수량 표기를 한다는 사실이 좀체 납득(納得)하기 어렵다. 나처럼 수량(數量)으로 현상을 이해하는 인간에게 가장 요긴한 것은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이기 때문이다.금요일 아침 경북대 교정에는 기다리던 반가운 손님이 단체로 몰려들었다. 하얗고 발그스레한 벚꽃이 무더기로 하늘을 향해 몸을 연 것이다. 그것도 맹렬한 봄바람의 기세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무더기 개화를 시작한 게다. 매몰차게 불어닥치는 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화사하게 꽃잎을 열어젖힌 봄의 무수한 전령이 일제히 고함치는 장면은 실로 장관이다.온종일 비가 내려 두문불출(杜門不出)해야 했던 어제와 찬연(燦然)한 하늘과 드센 바람과 놀라운 개화가 공존하는 오늘의 차이를 현저하게 실감하는 실존의 봄날! 어쩌면 이런 까닭에 인간은 죽음을 경원하고, 생의 마지막 그날까지 살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삶을 향한 끈질긴 소망은 또 얼마나 처연한 것인가?!플라톤이 남긴 ‘소크라테스의 변론’ 말미(末尾)에 독배를 마셔야 하는 소크라테스의 소회가 눈길을 잡는다. “이제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입니다. 나는 죽으러 가야 하고, 여러분은 살러 가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나 가운데 누가 더 축복받은 것인지는 오직 신만이 아실 것입니다.” 이 대목은 대단한 무게로 우리를 덮쳐온다.누구나 삶이 죽음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달리 생각한다. 그는 신의 가호를 받는 인간에게는 삶도 죽음도 차이가 없다고 확언한다. 죽음은 아주 깊은 잠을 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1601년의 햄릿의 독백을 그는 기원전 399년에 이미 선취(先取)하고 있다.어제를 어제로 보내고, 오늘은 오늘로 맞이하는, 삶은 어제로 보내고, 오늘은 삶이 아닌 죽음과 대면하면서도 전혀 흔들리지 아니하는 소크라테스. 그에게는 이토록 화려하고 눈물겨운 봄날이 북풍한설 몰아치는 겨울과 다르지 않은가 보다. 하되, 어쩔 것인가, 이 찬란한 봄날을!

2024-03-31

이호우의 ‘개화’를 생각하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 청도가 자랑하는 시조 시인 이호우(1912∼1979)와 이영도(1916∼1976)는 남매 사이다. 몇 년 전 여름 그들의 생가를 찾았다가 모기와 각다귀 패거리에 쫓기다시피 한 처참한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요즘 그분들 생가를 복원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처음 생가를 찾았을 당시엔 청도 군정(郡政)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약간의 인연만으로 문학관을 짓는 비용과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 지자체와 너무도 비교되는 나른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일례로 구상 시인은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본적이 칠곡군 왜관읍이고, 그곳에서 20년 시작(詩作)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칠곡군은 2002년에 ‘구상 문학관’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왜관에 갈 때마다 부러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요즘 여러 가지 풀과 나무에 꽃이 피어나고 있다. 사람들의 눈길은 오직 나무에 피어나는 꽃에 집중된다. 벌써 시들어가는 매화와 산수유, 이제 절정을 맞은 개나리와 진달래, 살구꽃, 명자꽃, 목련, 성급한 몇몇이 꽃망울을 터뜨린 벚꽃이 주요 대상이다. 하지만 눈을 내리뜨면 곳곳에 풀꽃이 앙증맞게 피어나고 있다.지난 2월부터 지치지 않고 얼굴을 내밀고 있는 봄까치풀, 요즘 한창인 광대나물, 민들레, 잔디꽃, 아슬아슬하게 피어나 여린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꽃다지, 꽃인 듯 아니듯 피어나는 머위꽃, 화사한 유채꽃, 흰색의 냉이꽃과 황새냉이꽃, 너무 작아서 색깔 먼저 보이는 제비꽃! 이 어린 중생 풀꽃들이 곳곳에서 피어나 들판을 화사하게 수놓고 있다.의상 대사가 ‘법성게(法性偈)’에서 갈파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 세계가 우리 주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는 경이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작은 티끌 하나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는 ‘화엄경’의 정수를 불과 일곱 글자로 통찰한 선지식(善知識)의 탁견에 무릎을 칠 따름이다. 크고 작음의 경계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겠는가?!이런 정황을 이호우 시조 시인은 ‘개화’(1940)에서 기막히게 그려낸다. 스물여덟 살의 패기 넘치는 청춘 이호우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심성과 기막힌 눈길이 포착하는 개화의 순간!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지막 남은 한 잎이 마침내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빛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하늘 향해 온몸을 열어젖히고 있는 여리고 작은 꽃송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손에 땀을 쥐는 시인. 모든 꽃잎이 피어나고, 드디어 마지막 잎이 개화에 돌입하는 순간, 시인은 차마 눈을 감아버린다. 시인이 눈을 감기 전에 확인하는 정경은 시인과 함께 개화를 대면하는 바람과 햇빛마저 숨죽이는 것이다. 이런 도저한 시적 인식 혹은 감수성을 어쩔 것인가?!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게 당연하고, 여름엔 열매가 익어 가을에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게 당연하다 여긴다. 그러나 당연한 사이사이에 우리가 놓치는 숱한 고비와 난관이 있다. 북풍한설과 모진 강추위에 건조함까지 견디고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현대시조 ‘개화’를 떠올린다.

2024-03-24

봄꽃 피어나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 20대 창창한 시절엔 여름이 제일 좋았다. 청년 시절 누구나 그렇듯 관념론에 빠져 있던 터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있는 ‘부패는 만상의 본질’이란 구절에 마음을 뺏긴 까닭이다. 열렬한 속도로 생장하는 것도 있지만, 그만큼의 빠르기로 부패와 소멸이 진행되는 계절이 여름인 까닭이다. 양극단의 두 얼굴의 계절, 여름을 찬양하라!중년에 접어들자 겨울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한여름의 눅진한 습기와 극복 불가능한 열기, 그것들이 자아내는 무기력과 타락의 분위기가 현저히 역겨워진 것이다. 그러나 겨울은 어떤가?! 피부를 뚫고 스며드는 한기(寒氣)가 내장을 서늘하게 인도하고, 이마를 때리는 설한풍은 영혼을 맑게 정화한다. 공부 좋아하는 학자들이여, 겨울을 찬미하라!다시 세월이 흐르고 귀밑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자 사정이 달라진다. 누가 뭐래도 봄을 기다리게 된 터다. 10년 전부터 촌으로 이주한 후에는 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부쩍 깊어진다. 10월 말 11월 초에 누렇게 변색한 잔디와 곳곳에 나부끼는 낙엽이 전하는 처연함과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초로의 인간이여, 봄을 목청껏 노래하라!지난 1월 초에 마주한 후배가 네덜란드 출신 알뿌리 서른 알을 넘겨준다. 봉투에는 튤립, 히아신스, 크로커스, 무스카리의 네 가지 이름이 적혀 있다. 매서운 칼바람 부는 시절에 땅을 파고 알뿌리 심는 일은 차일피일 미뤄진다. 그러다가 후배 전화를 받고 심는 작업에 착수한다. 물까지 듬뿍 준다. 그 이튿날부터 기온이 급강하한다.그때부터 2월 하순까지 달포 가까이 속앓이를 했다. 미숙한 주인 만나 유럽에서 건너온 네 종류의 어여쁜 구근(球根)이 얼어 죽은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몹시 괴로웠다. 그러던 차에 녀석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게다. ‘청도 인문학’을 시작한 2월 20일 무렵 일곱 개의 초록 초록한 얼굴이 나를 향해 웃는다.날이면 날마다 녀석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수효를 헤아리는 게 일상이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환희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3월 14일 녀석들 전방에 자리한 수선화가 노란 꽃망울을 화사하게 터뜨리더니, 히아신스와 크로커스가 뒤를 따라 하늘로 몸을 연 것이다. 눅눅하던 마당의 분위기가 일신(一新)한다. 몇 송이 꽃의 개화가 전해주는 생동감과 환희라니!한겨울 추위를 겪지 않으면, 줄기는 자라나지만, 꽃은 피어나지 않는다 한다. 뉴질랜드에 사는 교민이 개나리가 그리워 옮겨 심었으나 결국 꽃은 보지 못했다 전한다. 그곳의 겨울이 우리의 겨울보다 온화한 까닭에 몸체는 생겨나 자라났지만, 꽃은 피우지 못했다는 얘길 듣고 생각나는 게 적잖았다. 가혹한 시련이 사람도 꽃도 만드는 모양이다.이번에 피어난 크로커스와 히아신스를 보면서 봄이 깊어지면, 튤립과 무스카리도 여기저기서 환하게 피어나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환해진다. 만상을 보는 계절 ‘봄’을 화려하고 은성(殷盛)한 축제로 만들어주는 봄꽃을 보면서 저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시절이다.

2024-03-17

만남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살아가면서 우리는 만남과 별리(別離)를 경험한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일생에서 가장 중대한 일대사(一大事)다. 불가(佛家)에서는 그것을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로 명쾌하게 풀이한다. 인연이 생겨나면 만나는 것이요,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는 것이다. 고로 만남과 헤어짐에 특별한 의미와 희로애락을 부여할 까닭도 없는 셈이다.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의 장편소설 ‘죄와 벌’(1866)에 등장하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은둔 생활자 혹은 러시아판 ‘히키코모리’다. 돈 때문에 휴학생으로 지내는 그는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돈은 많지만, 사회적 이(蝨)에 불과한 전당포 노파 알료나를 살해하고자 한다. 타인의 돈을 부당하게 갈취해 부를 축적한 노파를 죽여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려고 기획하는 그는 러시아판 홍길동이나 임꺽정처럼 보인다.라스콜리니코프가 그런 기괴하고 낯선 사유에 빠져드는 계기는 사회적 고립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노파를 살해할 동기를 부(富)의 사회적 불평등과 공정한 분배에서 구하지만, 실제로 그의 사유와 인식에는 초인의식이 자리한다. 나폴레옹은 수많은 인명을 죽음으로 몰고 갔지만, 그는 범죄자가 아니라, 영웅이라 불린다. 사회적 불의와 악행의 표본인 전당포 노파를 죽임으로써 초인의 대열에 합류해보자는 계산이 그의 흉중에 깊이 자리 잡는다.그가 부조리하고 흉악한 범죄를 꿈꾸고 실행하는 배경은 고립무원(孤立無援)한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 그의 사회적 관계는 매우 협소하다. 오랜 친구 라주미힌과 여동생 두냐 그리고 어머니 정도가 고작이다. 그는 온종일 다락방에 틀어박혀 완전범죄를 실행할 계책과 구체적인 방도에 골몰한다. 미침내 그는 노파와 그녀의 여동생 리자베타를 무참하게 살해한다.여기서부터 우리는 주인공의 급변하는 내면세계와 만난다. 살인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죄의식이 어느샌가 그를 찾아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섬망(譫妄)의 형식으로 밤마다 그를 괴롭히는 잠재의식의 심연에서 그는 조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그가 대면하는 구원의 손길은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한다.여주인공 소냐가 살인자의 내면 깊은 곳으로 틈입한다. 혼자였던 그가 자신의 왜곡되고 굴절된, 억압받고 학대받은 영혼을 하나둘씩 털어놓을 대상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소냐에게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고, 자발적으로 예심판사 포르피리를 찾아간다.라스콜리니코프를 칠흑 같은 사회적 고립과 은산철벽(銀山鐵壁) 같은 견고한 격절(隔絶)에서 구해낸 것은 소냐였다. 의붓어미와 동생들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마르멜라도프의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위해 제 한 몸을 거리에서 팔아야 했던 소냐. 하지만 소냐는 그런 사회-경제적 모순과 침탈을 원망하지 않으며, 그 어떤 저항도 시도하지 않고 순응하는 인물이다.소냐와 만남으로써 라스콜리니코프는 회개하는 인간으로 거듭 태어난다.고립무원으로 파괴된 자아를 타자와 만남으로써 구원하려는 그의 행로는 우리에게 ‘만남’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2024-03-10

혼자인 삶은 없다

김규종 경북대 교수 달포 전에 이장님이 전화한다.“김 교수, 집에 땔나무 충분한가?!”몇 차례 구들방에 불을 넣으면 나무는 바닥이었다. 어차피 겨울도 끝나가는데, 대충 넘어가야겠네, 하던 참에 걸려온 반가운 전화였다. 엔진 톱 가진 이가 산에 널브러진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주기로 했다면서 환하게 웃는 목소리로 전화는 끊겼다.날이 가고 달이 바뀌어도 어찌 된 영문인지 소식은 없다. 답답한 마음에 내가 전화한다. 톱 임자가 과수원 전지(剪枝)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조만간 그이를 만나 일정을 잡아보리라는 언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소득이었다. 마침내 그날은 오고 말았다.3월 초하루 바람이 매섭고 기온이 뚝, 소리 나게 떨어진 날 오전에 구들방에 마지막 나무를 넣고 있는데, 대문이 소란스럽다. 경운기에 나무를 가득 싣고 이장님이 등장한 것이다. 오전 10시도 되기 전인데 어디서 저리 굵은 나무를 가져온 것일까?! 칠순이 넘은 이장님 내외가 이웃 마을에서 우리 집까지 손수 나무 배달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는가?!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지나지 않는다. 오후 1시에 이장님 경운기 뒤에 타고 뒷산에 오른다. 장발에 붉은 얼굴을 한 풍류남아가 엔진 톱을 들고 우리를 기다린다. 문제의 톱 주인이다. 그가 나무를 잘라낼 때 우리는 복숭아나무 전지로 잘려 나온 크고 작은 나뭇가지를 경운기에 한가득 싣고 집으로 내려온다. 벌써 두 대의 경운기 분량 나무가 마당에 부려진다.여기 더하여 다시 두 대 분량의 경운기에 소나무와 감나무 둥치가 차례로 실리고, 나의 발길은 한층 더 분주해진다. 전화기가 웅, 소리를 낸다. 옆 마을에서 나를 도와주러 강 농부가 출동한 것이다. 그 역시 엔진 톱을 가지고 왔다. 집 마당에서는 그가 차분하게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그사이에 나와 이장님은 뒷산을 오르내린다.마침내 경운기 네 대 분량의 나무가 마당에 몸을 푸니 마음이 뿌듯하고 온몸에 온기가 도는 듯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던 이장님이 총총히 귀로에 오르고, 강 농부가 바지런하게 손을 놀려 톱질을 계속한다. 읍내 근처에 자리한 횟집에 광어회를 주문하고, 서둘러 장을 봐서 조촐한 상을 마주하고 강 농부와 마주 앉는다.“촌에서는 절대 혼자 못 삽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삶은 농촌에서는 상상할 수 없지요.” 강 농부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화양(華陽)에 스며든 지 어언 10년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 동안 나는 실로 여러 사람의 신세를 지고 살아오고 있다. 만약 그분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안온한 삶은 정녕 불가능했을 터였다.요즘 세상에는 잘난 사람들이 참 많고, 그들은 하나같이 혼자 잘 나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며 우쭐댄다.‘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덕으로, 누군가에 힘입어, 누군가에 의지하여 살아간다. 이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도리를 상실하고 육축(六畜) 수준으로 전락한다. 그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면 좋겠다. 봄 시샘 바람이 제법 차다!

2024-03-03

공포와 분노

김규종 경북대 교수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대표적인 묘비명 주인공은 필시 니코스 카잔차키스일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그의 고향 크레타섬에 시멘트 묘지와 나무 십자가로 수수하게 꾸민 무덤의 묘비명은 그야말로 비상하기 짝이 없다. 자유를 향한 그의 등정에 걸림돌은 바람과 공포였다.죽기 직전까지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바라고,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다.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두려워하고 바라는 대상은 천차만별이겠으되, 카잔차키스는 그 둘을 훌훌 뛰어넘는다. 사랑도 돈도 명예도 바라지 않고, 노년과 죽음의 두려움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목청껏 외칠 수 있었다. “나는 자유다!”얼마 전 우연히 맞닥뜨린 방송에서 한국 사회를 추동하는 두 가지 심리적 기제가 공포와 분노라는 말을 듣고 전율했다. 사태의 핵심을 찌르는 통찰과 절제된 단어가 전하는 진실의 뼈저린 아픔이 온몸을 관통해버린 까닭이다. 한국인과 한국 사회가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두 가지 감정이 두려움과 분노라는 기막힌 현실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 것인가?!요즘 의대생 증원 문제를 두고 논쟁이 한창이다. 이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어 또한 공포와 분노다. 상당수 의대생과 전공의 그리고 개원의들은 우리나라 의사들의 숫자가 모자라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정부가 의대생 정원을 늘리면, 의료수준이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하는 것은 의사의 특권 상실 가능성에서 오는 뜨거운 분노다.현대사회에서 의사는 최고의 전문직 가운데 하나로 상층권위와 높은 수임료로 타자(他者)를 압도한다. 그들이 상층권위를 누릴 정도로 실력이 있는지, 도덕적으로 대단한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많은 명문대생이 재수-반수를 해가며 의대로 돌진하는 까닭을 생각해보시라. 특권과 부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그들을 분노로 결집한다.반면에 다수 국민은 의대생 증원을 반긴다. 늘어가는 노령인구와 저출산 문제가 한국 사회의 걸림돌로 작용한 지 오래다. 소득수준이 오른 만큼 그에 합당한 의료지원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몇몇 대도시를 제외하면 성에 차지 않는다. 의대생 숫자를 늘려 소외지역에서도 마음 놓고 병원에 가고 싶은 것이다. 국민 다수는 현재 상황이 두려운 것이다.경남 어느 지역에서 고액 연봉을 제시했음에도 의료 인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보도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은산철벽(銀山鐵壁)’을 실감한다. 서울과 경기도가 독점하는 중앙의식, 대도시가 석권하는 도회지 중심주의가 한국 사회를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고 있다. 넓지 않은 나라를 다시 세분하여 떼지어 몰려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공포와 분노가 만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주 보며 질주하는 두 대의 거대 기관차의 충돌은 영화에서는 멋지게 보일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국민 건강증진과 건전한 의료체계 정립을 위해 공포와 분노가 적정 시점에 슬기로운 결론에 도달했으면 한다.

2024-02-25

밤하늘의 비행기를 보면서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봄기운이 완연하다. 경북대의 성질 급한 홍매와 백매(白梅)가 환하게 세상과 만나고 있다. 화양(華陽) 들판 마당에도 영춘화(迎春花) 노란색이 화사하다 못해 화려하다. 춘하추동 사계 가운데 유독 봄이 기다려지는 것은 분명 까닭이 있는 셈이다. 대상을 본다는 행위, 즉 봄은 우리를 전연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정령인지도 모른다. 하되, 무엇을 본다는 말인가?!저녁 산보(散步) 나갔다가 천상에서 세 대의 비행기가 삼각 편대를 이루고 남쪽 창녕으로 날고 있음을 본다. 드문 현상이기에 더욱 아름답고 새삼스러운 장면으로 남는다. 그럴 즈음, 남산 하늘 한편에 작은 불꽃이 미세하게 움직인다. 다른 비행물체가 천상을 가르며 질주하고 있다. 비행체는 망설임 없이 신속하게 하늘을 주름잡고 내게 날아온다.비행기는 서둘러 오리온자리 사각형 좌측(左側) 상단(上端) 모퉁이를 직선으로 관통하여 나의 정수리 위를 지나간다. 나는 손을 흔들며 비행기를 전송한다. 비행기의 좌측 위쪽으로 상현(上弦)의 환한 월광이 천상을 감싼다. 여기서 궁금증이 솟구친다. ‘저 비행기 승객 가운데 누가 오리온자리와 반달과 지상의 나를 보고 있는가?!’지상의 낮은 곳에서 비행기와 별과 달의 세 가지 대상을 보면서 나는 사유를 진척하고 있는데, 훨씬 높은 고도의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과 나 사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를 생각하다가 문득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나가르주나(용수 보살)의 인식과 사유로 생각이 달려간다. 아, 삶이란 얼마나 신비한 것이냐?!양자 물리학 연구자이자 서책의 지은이 카를로 로벨리는 인도의 중관(中觀) 사상 대표자 나가르주나를 인용하여 사유와 인식의 지평을 확장한다. 나가르주나의 ‘공(空)’을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물은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덕분에, 다른 것의 결과로, 다른 것과 관련하여, 다른 것의 관점에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비어 있다.”양자 물리학자의 설명으로 나는 지난 4년 나를 결박한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족쇄에서 벗어난다. 관자재보살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五蘊)이 왜 모두 공하다고 했을까, 하는 미해결의 과제를 하나의 문장으로 풀어낸 나가르주나를 소개하는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라니! 일상적인 행위에 담긴 비자립성과 상호의존성 그리고 인과율과 상호 연관성으로 오온의 실체에 담긴 ‘공’의 본질을 포착하고 깨우치는 아름답고 절제된 문장!여기서 나아가면 아인슈타인의 물음이 문득 유치해진다. “내가 달을 보고 있지 않다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당연한 이야기다! 달을 보고 있는 나는 우주를 구성하는 숱한 사물 가운데 하나일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나와 달 사이의 인과성과 의존성 그리고 연관성을 뛰어넘는 대승적인 철학적-인간학적 통찰이 슬며시 다가온다.관계와 역사적 맥락을 제외하면 우리는 우주의 먼지와 다르지 않다. 고로, 우리는 이미 공한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을 밤하늘 비행기가 전해주며 날아가고 있었다!

2024-02-18

몸과 마음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이며 반전 반핵을 앞장서 주창하고 실천한 행동파 지식인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의 ‘종교와 과학’(1935)을 읽노라면 흥미로운 사실에 이르게 된다.호모사피엔스라 불리는 인류가 맨 처음 주목한 대상이 별이라는 것이다. 칠흑처럼 아득한 밤하늘에 홀로 애처롭게 빛나는 별을 바라본 인간이라니!까마득한 옛날, 밤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갔고, 가야만 했던 고대인(古代人)을 부러워했던 게오르크 루카치(1885∼1971)의 ‘소설의 이론’(1920)에서 별은 얼마나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그려졌던가! 가혹한 생존 조건에서도 직립보행자의 특권이자 의무로써 하늘을 우러렀던 인류는 그에게 부여된, 거룩하되 고단한 숙명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다.지구에서 달까지 거리가 약 38만km, 지구와 화성의 근일점이 약 5천500만km, 원일점이 3억8천000만km인 점을 고려한다면, 은하계에 떠 있는 깨알 같은 별까지 거리는 얼마나 멀겠는가?! 그렇지만 인간은 머나먼 하늘을 우러르면서 점성술과 천문학을 발전시키며 과학의 길로 접어든다. 그런 인간이 가장 늦게 들여다본 대상은 우리의 몸과 마음이다.에테르를 이용한 최초의 마취 수술이 시연된 해가 1846년이니, 불과 180년 전이다.알렉산더 플레밍(1881∼1955)이 페니실린을 발견한 것이 1928년이며, 플로리와 체인이 페니실린을 약으로 만들어 임상에 투여한 해가 1941년이다. 1943년부터 상용화된 페니실린은 제2차 대전에서 숱한 인명을 구했으니, 불과 80년 전의 일이었다.인간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천착한 지기스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꿈의 해석’을 출간한 1900년 이후 우리는 칼 융(1875∼1961)과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 같은 심리학자들 덕분에 인간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무의식과 잠재의식과 만난다. 태곳적부터 아스라한 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던 인간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장 늦게 들여다본 이유는 무엇일까?!살아가면서 몸과 마음이 몹시 아프고 고단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나의 마음과 육신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론을 서두르면, 아는 바 없다는 사실이다. 아침에 깨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언제나 함께하는 영혼과 육신을 알지 못한 채 장구한 세월을 살아왔다는 사실에 아득해지곤 하는 것이다.여기저기 아프고 괴로우면 병원에 들러 의사에게 진단받고 처방전 얻어 약국에 들르는 것이 고작이다. 대체 어떤 이유로, 어떤 구조적인 문제로 육신과 마음이 무너져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는 게 더욱 심각한 일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학교만 다닌 나 같은 인간의 완전한 무지와 완벽한 무능함에 화가 치밀어오를 지경이다.건강기능식품이 설 명절 선물 1위라는 전갈에 화들짝 놀란다. 다들 건강에 신경을 쓰고는 있지만, 어디가 어때서 건강기능식품이 필요한지, 알고 있을까! 국민 전부가 ‘건강병 환자’가 되어버린 2024년 우리 현실이 조금은 뜨악하게 다가온다. 창밖에 겨울의 찬비 내린다.

2024-02-04

공(空)과 색(色) 사이에서

김규종 경북대 교수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첫 번째 문장인 것 같다.“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깊게 행하실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함을 밝게 깨우치시어 모든 고액(苦厄)을 뛰어넘으셨다.”여기서 ‘오온’이라 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섯 가지를 일컫는다. 대상을 보고, 받아들이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판단하는 다섯 가지가 오온이다. 이 문장을 통찰할 수 있다면, 이후의 모든 내용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온이 어째서 모두 공한지, 그것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첫 문장이 막히기 때문에 이후의 전체 이해가 불가능해진다. ‘반야심경’에서 세간에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은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무상정등각자(無上正等覺者)는 그 앞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이란 전제를 제시한다.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고 한 연후에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란 명쾌한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3년 넘어 4년이 가깝도록 나는 이 문장에서 꽉 막혀 멈춰 서 있다. 몇몇 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유튜브를 보기도 했으나, 딱히 명료한 깨우침은 구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근자에 ‘양자 물리학’에 관한 책을 읽다가 암시와 만난다. 뉴턴이 대표하는 고전 물리학과 달리 현대 물리학은 미시세계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현대 물리학의 꽃이라 할 양자역학은 무엇보다도 빛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속성, 입자성과 파동성에 주목한다. 하나의 물질에 두 가지 속성이 있다는 것은 고전역학의 근본체계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영의 이중슬릿 실험으로 빛에 두 가지 속성이 있음은 200여 년 전에 확인되었으나, 20세기 20년대에 이르러 서로 상충하는 속성이 밝혀진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가 폭넓게 수용되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발원하는 이른바 ‘슈뢰딩어의 고양이’는 아직도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중첩과 관찰자란 개념이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예를 들어보자. 초저녁 하늘을 보면 보름달이 뜰 무렵 동남쪽 하늘에 오리온자리가 환하고, 북쪽으로는 카시오페이아자리가 선명하다. 카시오페이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북극성이 환하게 빛난다. 이들은 날마다 밤하늘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지만, 우리가 보지 않을 때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와 관계가 없을 때는 별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아인슈타인의 물음, 즉 “내가 저 달을 보고 있지 않다면, 달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는 사태의 핵심을 찌르는 구절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상호관계함으로써 존재하는 셈이다. 관찰자인 내가 없다면, 이 세상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다는 모순적인 결론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본체가 환하게 드러난다.김춘수 시인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일갈은 양자역학과 ‘반야심경’의 핵심을 관통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2024-01-28

사람을 보낸다는 일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오고 가는 것이 인생사 필연의 불가피한 과업이라 하지만, 심성이 여린 사람에게 이것은 극한의 과제일 수 있다.어느 시인은 나에게 오는 사람은 그 하나가 아니라, 온 우주가 온다고 기막히게 노래했지만, 그것은 축복일 경우에 한한다. 내게 오는 그나 그녀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재앙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극히 이기적인 인간이기에 그러하다!“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 (去者不追 來者不拒)”는 옛말이 있다.멋진 말이다. 하지만 이것을 실천할 사람은 많지 않다.떠나려는 사람은 한사코 막고자 하고, 마음에 없는 사람이 들이닥칠라치면 끝까지 거부하려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 때문이다. 하되, 삶의 근간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누구에게나 좋은 이치나 결말은 없다!한 주일 전, 불귀의 객이 된 사람 하나를 보내는 자리에 함께했다. 강원도 양양 어느 촌구석에서 마지막 자리를 한 것이다. 아침 7시가 되기도 전 캄캄한 새벽녘에 다섯 사람이 승용차 편으로 고속도로를 달린다. 여섯 시간 가까운 여정을 동행한 것은 겨울비와 진눈깨비였다. 마른 날씨보다 우리의 심사를 달래주는 천상의 진객(珍客)이 고마웠던 하루!그를 추억하는 가족과 우리와 그의 또 다른 지인들이 모여서 끓인 한겨울의 얼큰한 섞어찌개가 눈과 비와 눈물과 서정으로 끓어 넘친 하루를 새삼 돌이킨다. 산골(散骨) 자리 전에 맞은 곰치국과 차가운 소주 한 잔은 먼 길 달려온 우리를 위한 소박한 잔칫상! 그래, 다시 올 수 없는 길 떠나는 이를 위한 술 한 잔 어찌 아끼겠는가?!길지 않은 생을 투박하고 정직한 육체노동으로 일관한 그이의 웃는 얼굴이 벽면에 붙어있고, 그 앞에 정갈한 제상(祭床) 준비돼 있다. 그를 추모하는 글 읽노라니, 돌연 말문이 막히고 눈물이 앞을 가려 종잡을 수 없다. 그렇다! 사람은 타자의 운명이 아니라, 근본 제 운명의 가혹한 손길에 말문과 숨길이 막히는 법이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나니.눈과 비가 잦은 올해, 우리의 장엄한 강원도의 깊은 산골엔 곳곳에 짙은 눈이 흔적을 남기고, 그곳 어디선가 고라니와 멧돼지의 숨길마저 느껴지는 것 같다. 삶은 근본 죽음을 매개로 성립하나니, 가고 옴은 근본 정해진 이치 아니던가. ‘가기만 하고 오지 않는 것은 없다(無往不復)’는 주역 ‘계사편’의 말씀은 얼마나 따사로운 위로인지!그날 홀린 사람처럼 온종일 꾸역꾸역 무엇을 입으로 자꾸만 처넣는 낯선 자아를 보면서 이건 또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람 하나 보낸다는 일은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러나 그가 떠난 길을 언젠가 모든 우리가 따를 것은 명약관화한 것! 시간의 빠르고 늦은 차이를 뺀다면, 그 본질은 불변 아니던가!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를 새삼 확인하면서, 13시간이 넘는 여로(旅路)를 마치고 돌아온 촌집의 적막은 새삼 깊고 너른 것이어서 쉽게 잠들지 못하였던 바다. 하되, 삶이란 본디 불가사의한 것 아니더냐! 이튿날 큰소리로 외친다. “편히 쉬시게. 다시 만날 그날까지!”

2024-01-21

시인과 최면술

김규종 경북대 교수 20대 청춘일 때 시인이 되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리되지 못했다. 세월이 더 흐른 다음에는 혁명가가 되기를 꿈꾸었으나, 그 또한 헛된 망상이 되고 말았다. 시인과 혁명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어휘인가?! 그래서 이육사 시인을 무척 좋아하는 것이다. 시인이되 혁명가였던 이원록(1904∼1944)을 어찌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언젠가 안동에 있는 이육사 문학관을 찾은 일이 있었다. 대구 동부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이육사 시인의 생애와 문학을 조명하는 것이었다. 어쩌다 그 일을 맡게 되었기로 대구에서 안동을 오가는 전세버스와 이육사 문학관 앞마당에서 시민들과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다. 지금까지 기억에 있음은 흐뭇한 추억이었던 모양이다.각설하고, 시인을 동경하던 나는 문학을 업으로 하는 일에 평생 종사했지만, 여전히 시인을 향한 꿈은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래선지 시인을 만나면 언제든 유쾌하고 살아있다는 느낌이 가득하다. 가깝게 지내는 국문과 교수이자 시인인 친구를 보면 부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시인으로 평생을 산다는 일은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일까, 생각한다.그런 시인이 가까이 있으니 나 또한 복 많은 삶을 부여받은 것이다. 어느 날 그가 최면술 이야기를 하길래 귀 기울여 듣는다. 호기심이 아주 많은 그가 서울에 가서 최면술 대가(大家)에게 적잖은 비용을 들여서 최면술을 배웠다는 게다. 그리하여 시인의 아내에게 시험 삼아 해보았더니, 여러 가지 전생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더라는 흥미진진한 얘기를 내놓는다.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에게 최면을 부탁했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무려 30분이 넘도록 시도했으나, 최면은 끝까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분별심이 강하거나, 자아가 고집스러운 사람에게는 최면이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게 시인의 설명이다. 말을 듣고 보니 상당히 설득력 있다. 나는 분별심이 승하고,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 돋는 것처럼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전생도 궁금하거니와 최면에 걸린 자아가 속속들이 털어놓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못내 궁금했으나, 도무지 먹혀들지 않는 최면 때문에 아쉬움만 커진다. 물론 나는 십수 년 전에 인터넷으로 전생을 확인한 적이 있기로, 전생이란 것이 낯설지 않으나, 최면으로 풀릴 오래전 지난날의 봉인이 무척이나 궁금한 것은 필지의 사실이다.시인과 혁명가의 공통점은 역사에 투철하고 지적인 호기심과 일상적인 실천에 앞장서는 것이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끝까지 파헤치고, 올바른 대의를 위한 이론과 실천에 앞장서며, 그것을 위한 토대인 지적 호기심을 생의 끝자락까지 가져가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런 점에서 최면술을 배우러 서울까지 왕복하면서 배워온 시인의 투지가 놀랍고 가상한 것이다.그 같은 왕성한 호기심 실행은 아닐지언정, 호기심 충족마저 온전히 하지 못하는 알량한 분별심과 자의식을 돌아보노라면 아쉬움이 크게 다가온다. 엄청나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면 내려놓고 대붕처럼 자유롭게 날아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백일몽을 꾸는 아침이다.

2024-01-14

꿈의 도돌이표?!

김규종 경북대 교수 연말연시를 맞으면 찾아오는 생각이 있다.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에 관한 상념이다. 연초에는 누구나 야심 있게 몇 가지 기획을 구상한다. 건강과 부 혹은 명예를 향한 갈망을 실현하려는 의지를 불태우는 것이다.‘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는 허망한 생각이지만, 기획안을 구상할 때 우리는 웅대한 기획자로 거듭나는 순간을 경험한다.사정이 이렇다 보니 혹자는 신년 기획을 아예 일정표에서 제외해버린다. 훗날 찾아드는 허망함과 무기력증을 원천봉쇄하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아쉬운 점이 많다는 게 나의 소감이다. 인생사에서 우리가 충분히 실천하여 본래의 기획을 만족시킬 정도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얼마 전 본 서책의 제목이 인상적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된다(We become what we think about)’. 이런 부류의 서책은 다채롭게 출시돼 있는데, 이른바 ‘끌어당김의 법칙’에 속하는 책자들이 그것이다. 비슷한 내용이지만, 지은이들의 경험과 주장이 이채롭게 기술되어 있기에 숱한 독자를 거느린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독일 출신의 정치학자이자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세 가지 무능(無能)에 관해 설파한다. 그런 생각을 하도록 그녀를 인도한 전범(戰犯)이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이었다. 자신이 서명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죽음으로 직행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아이히만은 맡은 직무에 기계적으로 충실한다. 깊은 사유와 인식이 결여(缺如)된 국가 공무원 아이히만을 질책하면서 아렌트는 세 가지 무능을 지적한다.‘생각의 무능(inability of thinking)’과 ‘언어의 무능(inability of speaking)’ 그리고 ‘행동의 무능(inability of acting)’. 참으로 통렬한 지적이다. 아렌트는 생각의 무능이 언어의 무능을 낳고, 언어의 무능이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아렌트의 명제에서 우리는 인간 행동의 바탕에 생각이 자리한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말이 씨가 된다는 표현이 있는데, 말의 근원을 파고들면 거기 생각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잠재의식이라 부른다.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는 수가 있는데, 그것이 잠재의식에 각인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되어 나온다. 그 말은 다시 타자와 대화하는 과정에도 부지불식간에 흘러나오고, 그것이 다시 우리의 행동과 직결되는 것이다.일상적으로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하는 생각이 오늘의 우리를 만든 주재자이며, 앞으로도 우리는 만들어갈 근저에 자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연말연시에 깊이 있게 돌아보면서 새로운 결심과 단호한 결기를 가지고 실천할 방도를 구한다면, 우리 인생은 풍요롭게 인도될 것이다. 실패할 것이 두려워서 기획조차 시도하지 않음은 비겁한 일이다.게으르고 무능하며 타협하기 좋아하는 생각에 대못을 박고, 강력하게 경고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인생 항로를 기획하고 실천해보는 용감하고 웅혼한 새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2024-01-07

‘네모난’ 나사못

김규종 경북대 교수 사노라면 뜻밖의 행운이 찾아들 때가 종종 있다. 그것을 가리켜 ‘망외(望外)의 소득’이라 한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굴러들어온 행운이라고나 할까!똑똑한 전화기 ‘스마트폰’ 덕분에 나도 청춘들처럼 유튜브와 친해지고 있다. 양자역학과 천문학 같은 자연과학 분야와 영성(靈性)과 관련된 영상 그리고 인문학이 나를 끌어당긴다.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다가 문득 귓전을 때리며 지나가는 구절이 있다. “그는 동그란 구멍과 맞지 않는 네모난 나사못 같은 사람이었다.” 19세기 말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만연한 천편일률적인 사회 분위기를 ‘동그란’ 구멍으로 일반화하고, 그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 찰스 스트릭랜드를 ‘네모난’ 나사못으로 표현한 것이다.주지하듯이 서머셋 모옴(1874∼1965)은 ‘인간의 굴레’와 ‘달과 6펜스’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이자 극작가다. 자전적 요소에 기댄 ‘인간의 굴레’와 달리 ‘달과 6펜스’는 프랑스 후기 인상파와 원시주의를 대표하는 폴 고갱(1848∼1903)의 삶에서 소재를 발굴했다고 알려져 있다. 40살 나이에 다섯 아이와 아내,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화가의 길에 들어선 낯선 사내 고갱.화가들이 대개 열여덟 살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너무 늦은 시기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인간. 그는 무엇 때문에 세간(世間)의 비웃음과 의혹을 뒤로 한 채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에 들어섰을까! 그를 인도한 등대는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은 재능이 아니라, 그림을 하고 싶다는, 그림을 해야 한다는 내면의 강렬한 목소리였다.불과 15년의 생을 그림에 투척한 고갱의 작업은 훗날 앙리 마티스를 대표로 삼는 야수파와 파블로 피카소를 선두주자로 보는 입체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그의 인생이 흥미로운 까닭은 머나먼 미지의 남태평양에 외롭게 떠 있는 섬 타히티에서 열렬하게 타올랐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지도를 보면 타히티는 호주의 시드니와 칠레의 산티아고,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를 잇는 삼각형 가운데에 자리한다.서머싯 몸은 타히티의 고갱을 그저 그런 유럽인들과 확연히 다른 인간으로 그려낸다.그는 내 남 할 것 없이 누구나 ‘거기서 거기’ 가는 삶을 살아간 유럽인들과 달리 자신만의 고유한 생을 천착한 특별한 인간으로 고갱을 묘사하고 있다. 당대를 풍미한 지배적인 삶의 풍조를 비웃으며 ‘마이 웨이’를 외친 인간이 고갱이라고 몸은 주장한 것이다.소설 제목이 주는 엇박자가 낯선 독자를 위한 몸의 친절한 서한(書翰)이 있다. “땅에 떨어진 6펜스를 찾다 보면 하늘의 달을 보지 못한다.” 6펜스는 지상적(地上的)인 것, 물질적인 것, 현세적인 것, 일상적인 것, 무상한 것 그리고 지금과 여기를 의미한다. 달은 천상적(天上的)인 것, 정신적인 것, 영원한 것, 추상적인 것, 불멸하는 것과 영원무궁한 것을 뜻한다.날이면 날마다 땅만 보고 사는 인간이 아니라, 천상의 달과 천체를 보며 영원을 꿈꾼 인간 폴 고갱이 ‘네모난’ 나사못이 된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리라. 오늘 밤에는 무슨 달이 뜨려는가?!

2023-12-17

나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김규종 경북대 교수 겨울인데 한낮 기온이 18℃까지 올라간다. 이래도 괜찮은가, 생각하며 커피나무를 마당에 내놓고 화분에 흙을 북돋우고 한껏 물을 준다. 일주일 내내 거실에 있어서 답답하기도 한 것처럼 너른 이파리를 한껏 흔들어댄다. 커피나무는 그나마 운이 좋아 잠시나마 밖에서 외기(外氣)와 만나는 행운을 누리지만, 거대한 덩치의 길상천은 꼼짝할 수 없다. 남들보다 크고 무겁다는 게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닌 셈이다.얼마간 미뤄둔 마당 정리를 마치고 훌훌 들로 나선다. 어느새 다가온 해거름이어서 멀리 서녘으로 길지 않은 겨울 해가 꼴깍, 소리 내고 사라지고 있다. 여름의 태양은 오래도록 하늘가에 흔적을 남기는데, 겨울 햇빛은 인색하다 못해 심술궂은 느낌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천체의 작동과 운동에 인간의 의지나 바람이 개입할 여지는 없으니 군소리 없이 바라보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는 것이다.따사로운 햇살과 달리 사납게 몰아닥치는 바람이 목덜미에 선선한 흔적을 남긴 후에야 미뤄둔 문제가 머리를 쳐든다.‘그대 마음은 어디 있는가?’ 가슴인가, 머리인가, 육신 어느 다른 곳인가! 어느 양자물리학자는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육신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인간의 뇌에 고작 0.0001%의 마음이 있을 뿐, 나머지 99.999%의 마음은 우리의 육신 바깥에 있다는 것이다. 아니,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탄식이 절로 나온다.두 손을 휘휘 저으면서 바람 속을 걷다 속삭인다. 그래, 나의 마음아, 너는 지금 나의 육신과 함께 가고 있느냐?!그렇다면 마음아, 너는 나의 앞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옆이냐, 위냐, 좌냐 우냐, 너의 위치를 알려다오. 하지만 나의 마음은 묵묵부답 고요하다. 마음은 그런 나의 질문이 귀찮은 것인지, 성에 차지 않아서 그런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상냥하게 다시 묻는다. 나의 마음아, 나와 대화하는 게 귀찮지는 않은 것이냐?!그래도 마음은 대꾸하지 않는다. 이윽고 붉게 소멸해가는 햇살과 바람에 버티고 서서 태양과 작별하는 작은 구름장과 윙윙 소리 내며 질주하는 바람과 비어버린 들판과 대지의 수호신인 양 의연히 서 있는 전봇대를 사진기에 담는다. 세 장의 사진을 찍는 데 소요된 시간은 불과 10여 초, 하지만 사진에 담긴 풍경은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그 사진을 찍는 나의 마음이 사진 영상에 비친 피사체인 겨울 풍경을 변화시킨 것이다.내가 무엇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나의 눈과 시각중추가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전권은 오직 마음이 가지고 있다. 마음이 어디를 어떻게 볼 것인지 결정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양자물리학자들이 만들어낸 용어가 ‘관찰자 효과’다. 전자는 인간이 관측하지 않으면 파동(波動)으로, 관측하면 입자(粒子) 형태로 ‘슬릿(slit)’을 통과하는 이른바 ‘이중 슬릿 실험’에서 나온 용어가 관찰자 효과다.아주 미소한 입자인 전자가 관측 행위로 인해 빛의 영향을 받으면, 파동의 성질이 입자의 성질로 바뀌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나나 당신의 마음은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2023-12-10

국립대 교수 봉급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얼마 전에 유쾌하기도 하고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 내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이 ‘변리사(辨理士) 시험’에 합격했다는 글을 보내왔다. 참 잘 됐구나, 생각하면서 학생에게 답신을 보냈다. 12월 초부터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 학생의 졸업을 막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이 골자다. 더욱이 1년에 고작 200명 선발하는 어려운 시험에 붙었다는 말에 나 역시 힘이 솟고 기분도 좋아지는 것이다. ‘경북대 파이팅!’ 하고 속삭인다.나는 그에게 변리사와 변리사 시험에 관해 10분 정도 후배들에게 말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백면서생(白面書生)인 나도 변리사가 어떤 직종인지 알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는 A4용지에 발표 자료를 빼곡하게 준비해왔다. 거기서 느낀바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을 이 글에서 독자 제현께 전하고 싶다. 돈 얘기라서 유쾌하진 않지만, 그래도 나라를 생각하는 애국 독자들은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는다.변리사 초임 연봉은 6천500만원에서 7천만원 사이라 한다. 해마다 1천만원 정도 연봉이 오르기 때문에 몇 년 안에 억대 연봉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요즘 적잖은 청춘들의 욕망이 돈에 쏠려 있는 형편이어서 변리사 초봉 자료는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러다 문득 경북대 신임 교수들의 연봉이 떠올라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독자 여러분은 국립대 교수 초봉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는지 모르겠다.주지하듯이 교수가 되려면 적어도 20년 가까이 공부해야 한다. 외국 어문학이나 철학 혹은 역사학을 전공하는 학생이라면 해당 국가에 유학을 다녀와야 하는 것은 불문율(不文律)이다. 당연히 유학에 들어가는 비용은 거의 자부담이다. 유학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고 시간강사를 거쳐서 마침내 전임 자리를 얻기까지 몇 년 시간이 다시 흐른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경제 형편이 어려운 학생은 처음부터 교수직을 아예 포기하는 실정이다.40대 초중반에 교수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50이 넘어서 교수로 초빙되는 경우도 심심찮다. 문제는 그들이 받는 경제적 처우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라는 사실이다. 경력이 많지 않고, 군에도 다녀오지 않은 여교수나 면제를 받은 교수 초봉은 연 4천에서 5천 사이가 대다수다. 실수령액이 월 350만 원 안팎이라는 얘기다. 이런 정도의 봉급을 받고 무리 없이 가정을 꾸리고, 연구와 강의, 사회봉사를 할 수 있는 교수는 많지 않다.교수와 교수직에 대한 사회적 신뢰와 책임 의식은 날로 강조되고 있지만, 실질적인 처우개선은 이뤄지지 않은 편이다. 31년 전인 1992년 도이칠란트의 중견 인문학 교수가 월봉 450만원을 받을 때, 나는 100만원이 되지 않는 봉급을 받았다. 당시 도이칠란트의 국민소득은 오늘날 대한민국보다 적었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의 장래를 짊어진 청년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들에게 최고의 경제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를 보장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모든 것을 미국 표준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게 우리나라지만, 선진국으로 제2의 도약을 꿈꾸려면, 이제라도 국립대 교수들의 경제적인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고 믿는다.

2023-12-03

자유에 관한 짧은 생각

김규종 경북대 교수 ‘자유(自由)’를 말할 때 나는 한자(漢字)를 가지고 먼저 생각한다. 자유는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말이다. 말미암는다는 것은 원인 제공자가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자유란 나로 인해 생겨나는 온갖 사건과 인연의 원인과 결과를 스스로 감당한다는 말을 뜻한다. 남에게 구속되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한다는 사전적인 의미의 자유는 좁고 단순하다. 그것보다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의미를 통찰하고 싶은 것이다.‘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의 말을 빌려서 자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원하는 만큼 처넣는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조르바는 버찌가 무척 먹고 싶었다. 그는 아버지의 돈을 훔쳐서 엄청난 분량의 버찌를 사다가 배가 터질 만큼 쑤셔 넣는다. 그리고 먹은 버찌를 모조리 게워낸다. 그리고 난 후에 그는 비로소 버찌로부터 놓여난다. 조르바에게 자유란 처넣고 토해낸 다음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만화의 주인공 같은 조르바는 시종일관 경험론자다. 그가 토로하는 뱀과 새의 비유는 민중과 지식인을 은유한다. 온몸을 대지에 밀착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뱀은 경험으로 배우고 실천하는 민중이다. 반면에 텅빈 공중을 휙, 하고 날아가는 지식인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다. 조르바는 그런 지식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대하는 20대 청춘에게 조르바는 경이로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나는 조르바와 생각이 다르다. 길지 않은 세월을 살아가는 인간이 경험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21세기 과학기술문명이 불러온 혁명적 변화를 그 이전의 경험과 인식체계로 수용함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식인이든 아니든 어느 정도 책을 읽음으로써 최소한의 지적·정신적 소양을 축적해야 한다. 그러나 자유에 관한 그의 경험칙은 어느 정도 교훈적이다. 자신의 한계치를 처절하게 극복함으로써 도달하는 경지!자유는 애착(愛着)을 버림으로써 획득할 수 있다. 인과율의 출발지점과 최종지점의 책임을 자신에게 부여하되, 인과율 자체의 성립을 원천 봉쇄한다면 더욱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에 속박되는 까닭은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원한다. 만일 그런 마음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유나 속박, 원인 제공자나 결과 따위는 애초부터 무의미하다. 문제는 애착하고 욕망하는 마음이 언제나 우리를 사로잡는 데 있다.아끼고 사랑하며 갈망하는 마음과 작별하는 일은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은산철벽(銀山鐵壁)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을 풍미하는 유튜브를 볼라치면 돈과 건강, 인생의 행복과 정신적 안녕에 관한 내용으로 차고 넘친다. 나이 든 사람치고 노후(老後) 자금과 육체적·정신적 건강 그리고 무병장수에 무심한 사람이 있는가?! 문제는 그런 것에 지나치게 매달리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돈과 건강과 장수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이다.나이 들어서도 품위 있고 우아하며 매력적인 인간으로 남고 싶다면, 애착과 거리 두면서 자신을 자유로운 경지에 노닐게 하는 여유로움을 가질 일이다.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다!

2023-11-26

길상천(吉祥天)을 아시나요?!

김규종 경북대 교수 며칠 전에 울산에 사는 친구가 단톡방에 낯선 식물 사진을 올린다. 단톡방 참가자들은 서울과 청도 그리고 울산에 산다. 궁금한 두 사람이 ‘뭐야?’ 했더니 ‘길상천’이란 답변이 돌아온다. 길상천이란 글자를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는 청송(靑松) 인근의 ‘길안천(吉安川)’이 떠오른다. 언젠가 청송에 살던 선배 교수를 찾았다가 만난 길안천이 기억난 것이다. 그래서 ‘청송’ 부근에 갔는지 물었더니, 친구에게는 대꾸가 없다.나와 서울에 사는 친구는 길상천이 당연히 어디 ‘지명(地名)’일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꽤 늦게 돌아온 답변은 ‘용설란’이었다. “거대하고 보기 힘든 놈이라 사진으로 보낸 것”이란 해설이 추가된다. 폭과 높이가 각각 75에 40년 정도 묵었다는 설명도 보탠다. 나는 그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해서 “어디 있는 길상천인데?” 묻는다. ‘멕시코’라는 답변이 날아든다. “시방 멕시코 갔나?” 했더니 마음만 갔다 왔다는 전갈이 온다.다시 사진을 보니 두툼한 어른 손바닥 크기의 식물 이파리가 겹겹이 엉켜있고, 날카로운 가시가 하늘로 향해 있다. 어찌 보면 거대한 초록 연꽃이 하늘을 향해 벙그는 것 같기도 하다. 참, 이상하게도 생겼군, 하고 혼잣말하는데, 휴대전화가 ‘웅~’ 하고 울린다. 울산 친구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아는 화원(花園)에 2년 넘도록 방치된 길상천이 보기 좋아서 내게 선물하고 싶다는 것이다.실물로 보면 훨씬 더 대단한 녀석이어서 일찍이 보지 못한 ‘대물(代物)’이라는 말도 덧댄다. 울산에서 청도까지 어떻게 하려고, 했더니 마음만 정하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결국 지난 목요일(11월 16일)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뿌리는 가운데 문제의 길상천을 싣고 그의 거대한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이 도착한다. 후진해서 가까스로 마당 안으로 들어온 차 안에서 길상천은 유유자적인 자태로 앉아 있었다.굵어지는 빗줄기 속에서 1시간 반 넘도록 나와 친구는 길상천의 오랜 뿌리를 잘라내고, 거기 덕지덕지 달라붙은 낡은 흙을 털어내면서 악전고투를 거듭한다. 다행히 마당이 넓고, 작업하기에 편리하게 수도가 비치돼 있고, 두 사람의 손발이 착착 맞았기에 분갈이 작업은 착착 진행된다.젖어가는 청바지와 웃옷은 물론, 모자를 쓴 얼굴에도 빗물과 땀이 뒤섞인다. 마침내 길상천을 새 화분에 앉히고, 거실로 집어넣는 데 성공한다.이어지는 ‘은성(殷盛)’한 뒤풀이 자리에서 우리는 입을 모아 오늘의 성공적인 작업을 자축한다. 어떻게 그런 거대한 화분을 선물할 생각을 했느냐, 하는 내 물음에 그는 멋쩍게 웃으며 예술 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창의적인 생각 아니겠어, 화답한다. 듣고 보니 그렇다. 나 같으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을 천연덕스럽게 해내는 그의 담대함과 실행력에 새삼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길하고 상서로운 식물, 길상천!죽기 전에 딱 한 번 꽃피우고, 행운과 복락을 가져다준다는 길상천을 우중(雨中)에 가져와 작업해준 친구의 말처럼 대운이 들어올 모양이다. 길상천과 나라의 안녕을 함께 기원한다!

2023-11-19

사마귀를 추모하며!

김규종 경북대 교수 입동(立冬)이었던 11월 8일 된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올해 들어 처음 내린 서리였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마당에 나선다. 휴대전화 사진기로 루드베키아 노란 꽃과 이파리, 망초와 머위 큰 잎에 내려앉은 서리를 담는다. 불과 며칠 전 반바지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던 청년들이 적잖았는데, 순식간에 일기(日氣)가 급변한 것이다.지구 온난화의 폐해가 세계 전역을 휘감고 있는 시절의 난맥상을 우리도 확연하게 경험하고 있다. 늦가을에도 모기가 극성을 부리고, 오래전에 사라진 빈대까지 출몰한다. ‘팬데믹(pandemic)’에서 따온 ‘빈데믹’이란 신조어가 나왔으니, 한국인들의 응용력은 그야말로 세계 최고다. 특허 능력은 없지만, 실용신안 면(面)에서는 명불허전(名不虛傳) 최고다.마침내 겨울이 오긴 온 것이다. 입동 당일에 된서리가 왔으니, 24절기 가운데 하나는 멋지게 맞췄구나, 하는 생각이 찾아든다. 사흘이 지난 11일 아침에도 된서리가 내려 초록의 잔디가 하얗게 채색된다. 시절의 변화에 가속이 붙는 양상이다. 차가운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불원초(不願草)를 하나둘씩 뽑다가 아연 놀라고 만다.잔디 위에 사마귀가 잠자듯 고요하다. 미동도 없기에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려 본다. 그래도 움직임이 없기에 살펴보니 엎드린 채 죽어 있다. 간밤에 부쩍 내려간 냉기를 견디지 못해 이 세상과 작별한 것이다. 집이 없는지, 혹은 집으로 가는 길에 죽었는지 모르지만, 사마귀는 푸르른 하늘과 새털구름과 햇빛과 바람 아래서 생을 마감한 게다.사마귀의 마지막을 동행한 것은 무엇이며, 그 순간 사마귀를 찾은 상념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당랑거철(螳螂拒轍)’이란 고사성어로 친숙한 사마귀가 겨울 초입에 허무하게 세상과 작별하니 마음이 제법 쓸쓸하다. 한여름에 당당한 자세로 나를 향해 앞다리를 곧추세우던 녀석들의 자태가 눈에 밟힌다. 제 분수를 알게 되면 녀석들은 우울증에 걸릴지도 모른다.죽음과 소멸에는 허전함과 아쉬움과 쓸쓸함이 동반한다. 지금부터 53년 전 오늘 1970년 11월 13일 대구 출신의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이 청계천에서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외치면서 분신(焚身)을 감행한다.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 살면서 동료 노동자들의 비인간적인 처우를 개선하고자 싸웠던 전태일! 그는 자신의 외침에 아무런 반향도 보이지 않은 정부와 업주들에게 가장 처절한 형식의 죽음으로 항거함으로써 부당함을 고발한 것이다.그가 세상을 버린 지 반세기가 가까워진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숱한 정치적 격변과 예기치 못한 경제위기를 극복하면서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기에 이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1천100만에 이르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엄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가까스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20:80의 사회에서 1:99의 부도덕한 사회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사마귀의 죽음이 불러온 상념이 전태일과 노동자들 그리고 사회 전반의 부조리와 모순에 이른다. 언제나 우리는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을 환하게 맞이할 수 있을까?! 그날이 오면!

2023-11-12

안동 가는 길

김규종 경북대 교수 지난 10월 28일 노문과 졸업생 초대로 포항에서 하루 묵고 왔다. 포항에 간 김에 구룡포에 있는 일본인 거리와 구룡포항 그리고 횟집에 들렀다. 자연산 횟감과 신선한 안주를 푸짐하게 내오는 인심 좋은 주인을 졸업생이 잘 알고 있었다. 이래저래 눈도 마음도 육신도 풍요롭고 넉넉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귀로(歸路)에 오른 것이다.구룡포항과 포항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이어주는 신작로가 돌아오는 길을 상쾌하게 동반한다. 불과 25분 만에 고속도로에 들어서서 달리다 보니 ‘안동’으로 연결되는 도로 표지판이 얼굴을 내민다. 그 순간 무엇인가 가슴을 ‘쿵’ 소리 나게 두드린 것 같다. 삽시간에 가슴이 아프고 곧이어 눈시울이 따뜻해지는 것이다. 대체 이건 뭔가?!그것은 지나간 날들의 상념과 장면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까닭이다. 큰아이가 어느 대학 무슨 과를 갈 것인가, 고민할 때 나는 안동대 민속학과를 추천했다. 21세기는 동아시아의 세기이며, 그 중심에 우리나라가 자리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것은 나의 확신이자 예감이며, 어떤 강렬한 계시 같은 확증이 심중을 관통했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어리석고 무능한 군왕과 서글픈 사대부들과 한심한 신료(臣僚)들 때문에 숱한 고초를 겪어야 했던 조선 백성은 민주주의 시대에 제대로 빛을 보기 시작한다. 신분 제약의 사악한 족쇄(足鎖)가 풀리자 민초(民草)들은 하늘로 비상(飛翔)했다. 독재자들과 학살자들의 등쌀을 뚫고 21세기 20년대 우리는 세계의 빛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하지만 16년 전 큰아이는 내 결정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런 아들을 다독여 민속학을 공부하도록 하면서 틈나는 대로 안동대를 찾았다. 언젠가 안동대 정문에서 아이를 만나서 즉시 영덕 강구항으로 차를 달렸다. 대게를 먹는 철도 아니었지만, 둘이 한 상 푸짐하게 받아들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를 했다.그 당시 나는 맛난 걸 먹게 되면 모친에게 택배로 부쳐드리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먹은 것보다 많은 양을 서울 모친댁으로 부쳤다. 그래야 속이 편하고 유쾌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나와 출장을 가는 동료 교수들은 안절부절도 유만부동이다. 제주도에 가면 갈치나 돔, 여수에 가면 말린 생선을, 장흥에 들르면 돼지고기를 부친 까닭이다.그래봐야 10만원이면 충분하다. 그 정도 돈은 있다가도 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런 마음의 선물을 보낼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 얘기를 동료들에게 하곤 했고, 몇몇 사람은 나와 함께 택배 행렬에 동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나의 택배를 받아줄 어머니는 이 세상에 아니 계시다. 그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안동 가는 도로 표지판을 보았을 때, 큰아이와 어머니 그리고 나의 16년 전 모습이 동시에 떠올랐다가 사라져간다. 그래서다. 내 마음과 눈시울이 순간 커다란 변화와 마주했던 까닭은 그래서다. 저 멀리 떠나간 시공간과 언어와 인연이 하얀 일광(日光)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2023-11-05

시간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교수 2023년이 두 달 정도 남아서 그런지 얼마 전부터 ‘시간’이란 어휘가 주위를 맴돈다. 몸도 생각도 자꾸 시간을 둘러싸고 돌아간다. 그러던 차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영화관에 도착한다. 무려 10년 만에 신작을 가지고 돌아온 스튜디오 지브리의 영원한 얼굴이자 노장(老壯) 미야자키 하야오의 투혼에 경의를 표한다.‘그대들은….’에서 다뤄지는 시간은 2차 대전 혹은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 말기(末期)다. 당시 중학생 마히토가 겪는 신비로운 사건이 영화의 고갱이다. 마히토는 물론 하야오의 분신이다. 전화(戰禍)인지 또는 자연적인 발화(發火)인지 모르지만, 마히토는 불길 속에서 사라지는 엄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나이 어린 마히토가 거대한 불길 앞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예민하고 감수성 풍부한 마히토의 내면에는 무기력한 자아를 향한 원망이 자리 잡는다. 아버지가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시골로 이사하면서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된다. 신비롭고 수수께끼 같은 사건과 장면이 이어진다. 독자 여러분이 몸소 ‘그대들은….’을 감상하시기 바란다.영화에서 흘러간 2년 동안의 시간이 의미심장하다는 사실은 덧붙이고 싶다. 마히토는 그 시간에 내면과 육신의 성장, 자신과 가족 그리고 현실 세계와 저승 세계 같은 복합적이고 추상적이며 비논리적인 것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마히토는 사람이 놓치고 살아가는 수많은 빛과 그림자, 그림자의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새로운 1년이 시작하고, 그 1년이 우리와 작별함으로써 또 다른 1년이 얼굴을 내밀면서 우리는 나이를 먹는다.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새해 전날 많은 사람이 승용차에 몸을 싣고 마치 전장(戰場)에라도 나가는 전사(戰士)처럼 비장한 얼굴로 해맞이를 하러 장도에 오른다. 왜 그러는지, 물어도 신통한 답변을 들은 적은 없다. 남들이 하니까, 뭔가 새로운 의지를 다지러,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는 군색한 대답 일색이다.하지만 거기에는 분명 특별한 의미가 들어있을 것이다. 사라진 1년에 조의를 표하고, 새로운 1년을 향한 굳은 각오와 결의를 다지기 위함이 해맞이 행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론에 보도되는 수많은 차량 행렬이 똑같은 목표와 방향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언제나 놀랍고 경이로울 따름이다.요즘엔 시간 흐름이 예전과 달리 완만하고 여유로우며 넉넉하다는 느낌이 날로 강해진다. 평생 한 번도 감촉하지 못한 푸근하고 자유로운 감상을 뭐라고 정의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언제나 쫓기듯 열렬하게 살았던 지난날의 나와 그것을 조용히 반추하는 거울 바깥의 내가 서로 어색하여 남산만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그래서 아주 좋다. 서둘지 않아서 좋고, 작은 일에도 진심이어서 좋고, 강연 준비도 차분하고 내실 있게 할 수 있어 좋다. 그래서 나직하게 속삭인다. ‘시간아, 정말 고맙구나!’

2023-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