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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도끼질

등록일 2025-01-19 18:09 게재일 2025-01-2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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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1904년 1월 17일 초연된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장막극 ‘벚나무 동산’의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86세 먹은 늙고 병든 하인 피르스가 벤치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 있다.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멀리서 소리가, 끊어진 현(絃)의 구슬픈 소리가 들린다. 정적이 다가온다. 그리고 동산 먼 곳에서 도끼로 나무 패는 소리만 들려온다.’

살아있지만, 물화(物化)돼 버린 늙은이는 미동도 없어서 무대는 텅 비어버린 것 같다. 인간이 사라진 무대를 채우는 것은 소리뿐이다. 현악기의 줄이 끊어진 듯한 소리를 뒤이어 정적이 찾아들고, 정적을 이어서 나무를 베어내는 도끼질 소리가 들린다. 무대는 점차 어두워지고, 서서히 막이 내린다. 극작가 체호프의 최후 대작 ‘벚나무 동산’은 그렇게 끝난다.

백과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거대한 벚나무 동산을 장사꾼 로파힌에게 팔아넘긴 귀족 여성 류보피 안드레예브나는 도망치듯 파리로 떠난다.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지만, 그녀에게는 동산을 지킬 능력도 그럴 의지도 없다. 한시바삐 이곳을 떠나 애인이 기다리는 파리로 가려는 마음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충성스러운 하인 피르스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자랑스러워했던 벚나무 동산은 다차로 만들어질 것이어서 속물적인 로파힌은 서둘러서 벚나무를 베어내고자 한다. 여기서 도끼질 소리는 귀족이 대표하는 토지 자본이 상인이 대표하는 상업자본으로 이동하는 상징적 기호다.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가 몰락하고, 신흥 부르주아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는 의미도 도끼질 소리에 담겨 있다.

시대와 체제의 변화 양상을 체호프는 소리 하나로 단출하게 표현하는 놀라운 능력의 극작가다. 이 장면에서 연구자들은 부조리극의 단서를 찾아낸다. 인간과 인간의 언어가 소멸하고, 오직 사물의 소리가 지배하는 공간. 인간의 갈등과 대립이 완전히 사라짐으로써 무대의 본질이 소멸한 그곳에 도끼질 소리만 들리는 부조리한 상황을 포착한 것이다.

그렇게 하나의 시대는 생명을 다하고, 전혀 이질적인 시대가 다가온다. 해마다 겨울이면 나는 장작을 만들 요량으로 도끼질을 한다. 3∼40분 도끼질을 하노라면 온몸이 땀에 젖는다. 물성(物性)이 다른 까닭에 숱한 도끼질에도 끝까지 저항하는 끈질긴 나무도 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우리 속담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임을 확인한다.

공든 탑도 때로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의 집념으로 묵직한 쇠도끼로 질긴 등걸을 내리친다. 어떤 나무는 끝까지 버티며 자신의 모양새를 끝내 유지한다. 이런 때에는 도끼질을 멈추고 나무에 축하 인사를 건넨다. ‘그래, 네가 이겼구나.’

50일 가까이 진행되는 내란 사태를 보면서 민주주의의 도끼질이 어설픈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총력을 다해 저항하는 내란 수괴와 졸개들의 저급하고 추악한 행악질에 우리가 너무 관대한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악의 본산과 잔당은 뿌리까지 뽑아 척결해야 하는데, 우리 도끼날이 무딘 것은 아닌지 성찰하는 시간이 더디게 흘러간다. 맵고도 통렬한 도끼질을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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