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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힘

등록일 2024-10-20 18:58 게재일 2024-10-2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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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지난 10월 10일 목요일 저녁 경북대 교수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큰 경사가 났음을 안다. 한강 소설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됐다는 놀라운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몇몇 단톡방이 그 소식으로 시끌벅적하고, 나도 늦게나마 축하 대열에 합류한다. 오래 살다 보니 정말 좋은 일이 생기는구나, 하는 소회(素懷)가 절로 일어난다.

한강의 수상을 축하하는 많은 댓글 가운데 “노벨 문학상을 번역 없이 읽을 수 있다니 참 기쁩니다!” 하는 문구가 인상적이고 유쾌하게 다가온다. 내가 진행하는 청도 인문학 화요(火曜) 강연회에 오랜만에 얼굴을 내보인 참가자는 환한 얼굴로 말한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함께 기뻐하고 싶은데, 여기가 제일 좋은 곳 같아서 왔어요.”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인문학 강연 초기에 빠지지 않고 나오다가 영어 회화 공부 시간과 겹친다는 이유로 장기간 결석한 인물이다. 그날은 영어 회화 수업도 빠진 채 우리와 동석한 것이었다. ‘21세기 한국 대학의 문제점과 대응 방안’에 관한 강연을 마치고 뒤풀이하는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러던 차 어느 날인가 한국 교육 방송(EBS) 유튜브에 반가운 얼굴이 나온다. 1996년 만 26세 앳된 얼굴의 한강 소설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과 청바지 차림의 청춘 한강이 ‘문학기행-한강의 여수의 사랑’이란 제목의 주인공으로 나온다. 나는 ‘그래, 역시 기록은 대단한 거야!’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1994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한강은 1995년 3년 정도 여수에 머물면서 창작에 전념했다고 한다. 그 당시 나온 한강의 첫 번째 소설집 제목이 ‘여수의 사랑’이며, 표제작의 제목 역시 ‘여수의 사랑’이다. 한강은 ‘여수’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포착한다. 문자 그대로 물이 아름다운 고장 ‘여수(麗水)’와 여행자의 우수인 ‘여수(旅愁)’를 떠올렸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런 점에서 ‘여수의 사랑’에 등장하는 두 여인 가운데 ‘자흔’이란 이름에 한강이 부여한 자취와 흔적이란 의미도 단순하지 않다. 어린 시절에 부모에게 버려진 기억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인간의 쓸쓸한 내면 풍경을 적절하게 드러내는 이름 자흔. 이미 이 지점에서 스물댓 살 난 젊은 작가의 인식과 사유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교육 방송 ‘문학기행’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한강의 소설 ‘여수의 사랑’이 아니라, 거의 무명에 가까운 앳된 소설가의 처녀작에 눈길을 주고 그녀와 소설을 기록으로 남긴 대목이다. 우리는 지금과 여기, 그리고 미래를 향한 열렬(熱烈)한 욕망으로 나날을 살아가기 일쑤다. 돌아봄이 불가능해진 광속(光速)의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이 돼버린 게 아닌가?!

그런데 교육 방송이 만든 28년 전 기록으로 우리는 시간 기계(타임머신)라도 탄 것처럼 과거의 여수와 한강을 만나는 것이다. 오늘의 한강을 가능하게 한 지난날의 한강을 돌이켜보면서 시간과 기록의 힘을 재삼재사 확인한다. 기록을 우리 일상의 일부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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