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의 누옥(陋屋)에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찾아왔다. 상당히 격조(隔阻)했던 터라 이야기가 여러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지난 2월 20일 청도에서 시작한 나의 인문 강연으로 화제가 옮아갔다. ‘문명과 인간’을 주제로 한 강연이 거의 30회에 이르고 있는데, 두 차례 강연을 마치고 나면 ‘논어’함께 읽기로 방향을 전환할 요량이다.
강연이나 강의할 때 내가 취하는 태도가 이내 도마 위에 오른다. 나는 정해진 시각에 강의를 시작하여, 예정된 시각에 어김없이 강의를 마치는 습관을 오래도록 지켜왔다. 사적(私的)인 얘기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함구한다. 한 시간 강의나 강연을 위해서 나는 곱하기 3의 법칙을 준수하고자 애쓴다. 1시간 강연을 위해 최소 3시간 이상 준비한다는 얘기다.
언젠가 ‘가락 스튜디오’에서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명민한 청중에게 따끔한 충고를 듣게 되었다. 너무 많은 정보를 너무 빠른 속도로 듣는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서 쏟아내는 나의 강의 방식에는 낭비되는 측면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듣는 사람이 생각을 정리하고, 나름의 호흡으로 정보를 소화할 시간 여유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 비판의 골자였다.
나의 강의 방식은 이른바 ‘최대 강령 주의’에 기초하는 것이다. 반대로 대중의 반응을 살피고, 그들의 지적-정신적 수준에 맞춰서 최소한의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도 있는데, 그것을 일컬어 ‘최소 강령 주의’라 한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최대 강령 주의에 기반하여 강의를 진행한다. 그것이야말로 대중을 향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강연에서 강연자가 제공해야 하는 최대한의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지 않은 채 어정쩡한 상태로 대중과 작별한다는 것은 직무유기라 생각한다. 귀중한 시간과 정성,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강연에 참석한 대중의 교양과 지식을 고양하지 않을라치면 무엇 때문에 강단에 선다는 말인가?! 강연자의 농담과 헛헛한 개인사 혹은 허언(虛言)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내게 충고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청중의 심사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정신적-정서적-지적인 용량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강연에 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편으로는 지당하다는 생각도 든다. ‘쇠귀에 경 읽기식’의 강연이 된다면, 그 또한 난감한 일 아니겠는가?! 쉽고 재미있게 강연을 인도하는 것 역시 강연자의 기초적인 소양(素養)이므로!
그러하되 내 생각은 결이 아주 다르다. 강연에 참여하는 청중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그들 하나하나의 눈과 마음을 통찰하여 강연의 난도(難度)와 속도를 조절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요구에 가깝다. 따라서 단 한 사람의 청중이 나의 강연에 몰입하여 무엇인가 깨우침이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를 만족시킬 방도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나의 강연으로 자신의 부족한 지식과 교양의 보완이 매우 절실하다는 사실을 각성하는 청중이 하나라도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믿는다. 적정 수준에서 만족하는 강연자와 청중의 어설픈 공존은 오히려 인문 강연의 심각한 질적 저하를 초래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