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 보면 깜짝깜짝 놀라는 수가 있다. 수많은 개미가 사람들의 발밑을 태평하게 지나다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은 운동화나 구두가 언제 생명을 앗아갈지 모를 판국인데 개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간다. 이런 일은 어제도 한 달 전에도 10년 전에도 일어났으리라. 어떻게 개미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유유자적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일까?!
개미를 들여다보다 문득 인간의 생명과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만일 우리 머리 위로 거대한 공룡 무리나 매머드 코끼리가 지나간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궁금하다. 혹은 사악한 악마나 잔인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우리를 덮친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다. 개미와 인간, 인간과 초자연적이고 숙명적인 존재의 관계를 유추해보는 것이다.
정착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인간은 문명을 일구었고, 그 결과 자연과 대립하는 담장을 만들었다. 인간들이 모여 사는 담장 안의 안온한 사회와 담장 밖의 황막한 자연이 구별되기 시작한다. 자연에서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정글 법칙이 진행되었지만, 인간 세계에서는 유소년과 노인 그리고 병자 같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배려와 실천방안이 마련되기 시작한다.
산업혁명과 궤를 함께한 19세기의 악랄하고 병리적인 자본주의와 극단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들 때문에 장시간 노동에 내몰린 어린아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노동자가 산업재해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코난 도일(1859-1930)의 추리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런던의 끔찍한 스모그와 그 속에 방치된 시민들의 일상은 당대의 가혹한 사회상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도록 한다.
최소한의 치안과 국방을 제외한 모든 영역에서 무제한의 자유를 보장한 사회·경제정책에 따른 폐해를 사람들은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최우선에 두는, 인간의 얼굴을 한 국가가 나타난다. 이것은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국민 개개인이 돈과 권력을 위한 일회용 소모품이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받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사회는 아직도 대형사고의 그늘에 자리한다. 우리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대참사와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기억만이 또 다른 참사를 예방하는 토대로 작용한다. 대형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좀먹는 것이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 사고다. 해마다 반복되는 산재를 예방하는 것이 중차대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다.
최근 3년의 산업재해 사망자는 2022년 2223명, 2023년 2016명, 2024년 2098명이다. 해마다 2000명 이상의 노동자가 산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있다. 하루 평균 5~6명의 귀한 생명이 노동 현장에서 덧없이 스러지고 있는 셈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 주권 정부’는 산업재해로 인한 사망 사고를 최대한 줄이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고 한다. 참 좋은 일이다.
빨리빨리 문화와 안전 불감증을 산재 원인으로 보았던 언론도 사태의 핵심을 치밀하고 면밀하게 들여다볼 때다. 광고 수주를 위해 재벌과 대기업 고용주의 눈치만 볼 게 아니라, 노동자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깊이 있는 접근과 인간적인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