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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매일 2L 콜라 마시고도 장수?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콜라로 대표되는 탄산음료가 ‘건강의 적’으로 지목된 지는 이미 오래. 마실 때 느끼는 잠깐의 청량감과 달콤함이 주는 만족보다 몸에 미치는 악영향이 훨씬 크다는 이야기는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 상식처럼 자리했다. 많은 양의 설탕과 카페인, 화학첨가물이 함유된 탄산음료를 오랜 기간 습관처럼 마시면 혈당 수치가 높아지고, 치아가 상하며, 만성 피로와 집중력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콜라를 포함한 탄산음료는 중독성 탓에 쉽게 멀리하기가 어렵다. 꽤 많은 사람들이 대사 장애를 겪게 될 걸 예상하면서도 탄산음료를 완전히 끊지 못하는 이유다. 최근 콜라와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미국 경제신문에 보도됐다. 세계 최고 부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투자전문가 워런 버핏이 얼마 전 94세 생일을 맞았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그 정도면 ‘장수(長壽)’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헌데, 기사의 제목이 재밌다. ‘버핏의 장수 비결은? 코카콜라와 캔디, 그리고 삶의 기쁨’. 워런 버핏은 하루에 콜라를 2L 가까이 마신다. 기름에 튀긴 감자와 사탕도 그가 좋아하는 음식과 군입거리다. 콜라, 감자튀김, 사탕…. 세간의 상식으론 건강에 좋은 음식과 거리가 먼 것들이다. 그럼에도 아흔을 넘겨 일백 살로 달려가는 그는 돈만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축복받은 사람일까? 그러나, 비밀이 있었다. 워런 버핏은 하루 8시간 수면을 실천하며 살았고, 일주일에 두어 번은 친구들과 머리를 쓰는 카드게임을 즐긴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돈이 아니라 ‘인간관계’라고 한다. 이쯤 되면 워런 버핏의 장수 비결이 무엇인지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9-02

망령 안개

강길수 수필가 요즘, 짙은 ‘망령 안개’가 나라를 스르르 덮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햇살 내리꽂히면 사라질 존재인데도 말이다. 예전에 안개가 많이 낀 새벽길을 길게 달렸던 기억이 있다. 조금만 멀어도 앞이 안 보였다. 아는 길이어서 다행이지, 모르는 도로였다면 더 고생했을 것이다. 운전자도 일행도 안절부절못하며 안갯길이 끝나기를 빌었다. 해가 솟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모두가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안개는 빛을 가려 앞을 못 보게 하거나 흐릿하게 한다. 가까운 사물도 실루엣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실체가, 진실이 어떤 것인지 안개 속에서는 분간하기가 어렵다. 햇살이 돋으면 이내 없어질 것이 사람을 난감하게 한다. 목숨이 오가는 사고의 원인이 안개인 경우도 있다. 망령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엔 두 뜻을 밝힌다. 우선, 죽은 이의 영혼이고 다음, 혐오스러운 과거 잔재를 비유로 이르는 말이다. 무속이나 종교적인 사용을 빼면, 대부분 둘째 의미로 쓰일 것이다. 즉, 혐오의 잔재는 물론, 사기, 오류, 왜곡, 거짓, 비리, 폭력, 전쟁 등 악에 물든 상태도 포함될 것이다. 어떤 망령 안개가 나라를 덮을까. 첫째, 전체주의 망령 안개다. 틈만 나면 입으로 국민과 민주주의를 팔면서 정작 행동은 일극 체제니 하면서 왕같이 으스대는 정치꾼들이 있다. 입법 독재로 정부 발목을 묶는 게 민주주의인가. 정론 직필, 진실 보도라는 본연의 임무를 잃은 언론은 편파 및 선택적 보도로 국민의 알 권리를 짓밟는 언론독재를 한다. 몇 비주류 언론과 애국적 유튜브가 아니면 국민은 진실을 모른 채, 개돼지같이 살지도 모른다. 둘째, 외면 망령 안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자기와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것은 외면하는 모습이 흔하다. 2020년 4·15 총선 이후, 자유민주주의의 보루인 선거를 지켜내려는 부정선거 척결 운동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한 음모론 몰이와 주류언론의 외면이 대표적 망령 안개다. 국가의 많은 부문과 여러 국민도 이를 외면한다. 이러다가 온 국민이 적극 참여해야 할 사태라도 닥치면 나라 공동체가 제대로 유지될지 걱정이다. 셋째. 이성(異性)과 양심 상실 망령 안개다. 나라의 리더 급 사람들이 이성과 양심에 따라 일하지 않는 현상이 많다. 대장동 사건, 대법관 50억 클럽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의 처리 과정들을 보면 이성과 양심을 버린 사회가 아닐 수 없다. 뿐만아니라 ‘개딸들’로 대변되는 특정 정치인과 세력에 대한 막무가내 지지도 그렇다. 넷째, 황금만능 망령 안개다. 자본주의하에서 황금만능은 당연하다 할 지 모른다. 하지만 황금이 정치, 사회, 문화, 학술, 교육, 종교 등 온 사회를 지배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입으론 민주화 운동, 민주주의 국민의 뜻 같은 말을 한다. 하나, 속으론 법과 제도를 바꾸어 전체주의 나라로 만든 다음, 대대로 나랏돈을 빼먹으려고 신 황금 귀족이 되려는 정치꾼들의 행태가 뻔히 눈에 보인다. 이젠, 국민이 두 눈 부릅뜬 햇살이 되어 망령 안개를 없애버려야 할 때다.

2024-09-02

나만의 속도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이 년 전 지역의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고 달리기 연습을 몇 번 하다 간신히 완주하고 오랫동안 뛰지 않았다. 올해 4월 다시 같은 대회에 참석하고 무슨 이유인지 습관처럼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을 뛰다가 주위를 살펴보니 러닝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국적인 러닝센터가 생겨나고 지역별 러닝 크루도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내가 달리는 진주의 강변에서도 함께 모여 뛰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고프로를 들고 뛰면서 유튜브에 러닝 영상을 올리는 사람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각자의 이유로 많은 사람이 뛰고 있다.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누구나 고민하는 것이 속도이다. 종목의 특성상 더 강하게 오래 뛰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빠르게 긴 거리를 뛰는 일은 쉽지 않다. 빠르게 뛰면 숨이 차고, 천천히 긴 거리를 달리면 다리가 아프다. 누군가의 코치를 받아서 시행착오를 줄이면 좋겠지만 대도시가 아닌 지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을 바탕으로 러닝을 했다. 처음에는 보통의 러너처럼 빠르게 달리기에 초점을 두었다. 기록은 단축되었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다. 탄성이 좋다는 굽이 높은 카본화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곧바로 구매하여 신고 달리다가 발목에 부상이 왔기 때문이다. 일주일 정도 러닝을 중단하며 내가 왜 달리는지 질문했다. 마라톤 대회 우승이 목표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했다. 보통 혼자 뛰는 나는 크루원과 어울리며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상황이다. 그제야 나는 달리면서 사용하는 근육의 움직임과 사점(死點)을 견디며 넘어가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멈추고 생각하자 달리기의 목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카본화는 삼분 대 페이스를 뛰는 사람에게 최적화된 러닝화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최근 러닝 붐의 이유를 크루 문화에서 찾는 사람이 많다. 인터넷에서 러닝 브랜드의 엠버서더 혹은 러닝 인플루언서의 영상과 사진이 공유되며 달리기의 유행이 확산하였다. 브랜드의 이름이 걸린 마라톤 대회도 제법 생겨났다. 이쯤에서 러닝을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유행이 브랜드 마케팅과 미디어에 의해 기획된 정황을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러닝 유행에 깃든 상업성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달리기 위해서 나의 달리기, 나의 시간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한다. 20대에는 빠르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지나치게 속도를 높이면 오버 페이스에 걸려서 30대 이후의 삶에서 나의 페이스를 찾지 못할 수 있다. 긴 거리를 빠르게 뛰는 선수도 있지만 중간에 멈추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달리는 선수도 있다. 주위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각자 자신의 속도로 건강하게 오랫동안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만의 페이스를 찾기 위해서는 잠시 멈추어 레이스의 목적과 방향을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카본화를 벗고 조깅화를 신자 편안한 조깅이 가능해졌고 자연스럽게 나만의 페이스로 달리게 되었다.

2024-09-02

실행력 없으면 외고집 된다

김진국 고문 “저는 쉬운 길을 가지 않겠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29일 국정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4대(연금·의료·교육·노동) 개혁을 반드시 이뤄내는 것이 소명을 완수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개혁은 필연적으로 저항을 불러온다”라는 윤 대통령의 말은 일리가 있다. “정치적 유불리만 따진다면, 하지 않는 것이 훨씬 편한 길”이라는 말도 이해가 간다. 저항을 돌파해 개혁에 성공하라고 응원하고 싶다. 힘든 길에 국민의 동참을 요구할 수도 있다. 영국의 처칠이나 미국의 링컨도 고난의 길에 함께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려면 국민과 함께 가야 한다. 이해하지 못하면 설득해야 한다. 그런데 여론조사를 보면 윤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나 대국민 브리핑을 한 뒤에는 지지율이 더 떨어진다. 결기에 찬 그의 연설을 들을 때 왜 ‘역사와 대화하겠다’는 과거 대통령들의 말이 생각날까. 그들은 임기 말 우군마저 등을 돌려 고립됐을 때 ‘역사와의 대화’를 꺼내곤 했다. 국민 여론도, 같은 당 동지도 돌아서면 마지막으로 기댈 언덕이 ‘역사’다. 동지는 ‘배신’했지만 역사는 내가 옳았다고 평가해 줄 것이라는 오기(傲氣)다.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어려움을 감수하고 밀어붙일 줄도 알아야 한다. 윤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역대 정부가 실패한 개혁 과제들은 저항이 만만치 않다. 박수를 보내고, 응원한다. 하지만, 의지만으로 안 된다. 정확하게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4월 1일 의대 증원 관련 대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의대 증원을 지지하던 여론이 오히려 나빠졌다. 4·11 총선 패배의 중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6월 3일 윤 대통령은 또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탐사 결과가 나왔다”라고 직접 발표했다. 1975년의 비슷한 촌극이 오버랩됐다. 대통령이 직접 발표했는데, 여론이 시큰둥했다. 사람들은 그걸 대통령이 왜 직접 발표했나 갸우뚱했다. 윤 대통령은 ‘상식’과 ‘공정’을 강조해 왔다. 그런데 시중의 ‘상식’과 너무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번 국정 브리핑과 이어진 기자회견은 굉장히 낙관적이다. 언론 반응은 냉랭하다. 한겨레가 “‘국민 눈높이’와 동떨어진 인식 드러낸 윤 대통령 회견”, “‘김건희 의혹’ 국민 의구심에 철저히 눈감은 윤 대통령”, 경향신문이 “‘뉴라이트·채 상병’ 궤변 연발한 윤 대통령, 국민이 바보인가”라고 비판적 사설을 쓴 것을 논외로 하자. 보수성향의 조선일보도 “대통령은 ‘블록버스터급’으로 경제가 좋다고 했는데”라는 사설에서 “대통령의 경제 발언은 이런 현실을 얼마나 정확히 판단하고, 정책 대응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게 한다”라고 비판했다. 중앙일보는 “대통령의 상황 인식, 민심과는 거리 멀다”고 지적했고, 동아일보는 기명칼럼에서 “다수 국민의 인식과는 달라도 한참 다른 인식”이라며 “구름속에 묻힌 구중궁궐이냐”라고 물었다. 다른 신문도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없이 거의 일치한다. “국민과 동떨어진 대통령 인식 재확인한 국정브리핑”(한국일보) 대통령이 한번 결론을 내리면 뒤집기 어렵다. 대통령이 귀가 얇아 오락가락하면 안 되지만, 귀를 닫고, 입만 열어도 큰일이다. 대표적 친윤인 권성동 의원 말대로 대통령의 권력이 더 강하다. 설득하지 못하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에게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윤 대통령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어쨌든 국정의 최고 책임자는 윤 대통령이다. 방향이 좋고, 의지가 굳건해도, 거대 야당 협조가 없으면 공수표다. 집권당 대표, 그것도 최측근으로 알려졌던 한 대표 한사람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야당 협조는 끌어낼 수 있나. 대통령은 고독한 자리다. 역사가 평가할 훌륭한 국정 방향을 세상 사람이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고 한탄할 수도 있다. 바닥인 줄 알았는데 또 추락하는 지지율을 애써 외면해도, 그게 현실이다. 한탄만 하며 임기를 허송세월할 수는 없다. 더 궁금한 게 있다. 차기 정권 재창출은 할 수 있나. 다음 총선에서는 다수당을 차지할 비책이 있는가.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09-01

주위의 모두가 기고 있다

이희정시인 몸 다 내주고 나서 전복 껍데기는 오색빛 내뿜지. 몸 없어진 곳에 가서도 노래하시게. 더 낭비할 것이 사라진 순간 몸 있던 자리 훤히 트이고 뵈지 않던 삶의 속내도 드러나겠지. 좋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어디엔가 붙어 기고 떨어져서 기는 아프면 누워 기고 실수로도 기는 기느라 몸 없어진 것도 모르고 계속 기고 있는 몸 드러나겠지. 마음먹고 다시 둘러보면 주위의 모두가 기고 있다. 저기 날개 새로 해 단 그도 기고 있다. 뵈든 안 뵈든 묵묵히 기는 몸 하나하나가 오색빛 새로 두르게 노래하시게. -황동규,‘오색빛으로’전문 (‘봄비를 맞다’, 문학과지성사) 일상의 모든 것들이 시가 된다. 사람들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강렬한 기적의 현실이 아니라 사실은 작고 소박한 꿈의 충족일 뿐이다. 진정성이란 일상성의 외부에서 초월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일상적 삶이야말로 구원에 전념한다”는 레비나스의 역설적 관점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황동규의 시를 현시점에서 주목하는 이유다. 올봄 발간된 시인 황동규(86)의 신작 시집은 김나정이 설명한 파라 텍스트(paratexte)에 우선하게 한다. 책은 종이 뭉치를 표지로 감싼 물질이다. 내용이 몸뚱이라면, 표지는 그 몸뚱이를 감싼 외투이다. 이 외투를 ‘파라 텍스트’라고 한다. 그리스어 ‘para’는 ‘~을 넘어’, ‘반대쪽에’를 의미하는 접두사다. 그러니까 책의 본문 여기서는 시편들 이외에 책을 둘러싼 모든 정보가 파라 텍스트로 묶인다. 예를 들면 표지, 출판사, 저자 이력, 띠지, 뒤표지의 추천사 등 다양한 정보를 아우르는데 이런 파라 텍스트는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준다.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파라 텍스트를 ‘대기실’이라 불렀다.” 시집의 접힌 날개를 펼쳐보라. 시인의 대기실에는“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도정에도 여전히 삶과 현실의 한가운데서 세상 살기의 의미와 진실에 이르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며 여전한 시인의 여전한 안부를 전하고 있다. 머무는 시간이 길었다. 왜냐면 이 시가 대상화하고 있는 사물‘전복 껍데기’이 바로 시의 화룡점정인 제목‘오색빛으로’을 연결하는 징검돌이 되기 때문이다. “몸 다 내 주고 나서 전복 껍데기는 오색빛 내뿜지.” 전복의 몸을 파낸 자리 어슴푸레 번지는 오색빛을 본 적 있는가. 물빛에 반사되어 몸을 내어 주고도 스러지지 않는 오묘한 그 빛을 말이다. 시인의 다짐만큼 누구나 열망하지만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여유와 온기를 다감한 눈빛으로 누구에게든 깊은 마음의 울림을 줄 것이기에. “몸 없어진 곳에 가서도 노래하시게. 더 낭비할 것이 사라진 시간 몸 있던 자리 훤히 트이고 뵈지 않던 삶의 속내도 들어나겠지.” 시인의 이 예사롭지 않은 깨달음을 더듬어 보라. 기실 노년의 쉽지 않은 삶에 대한 기록임에도 그런 유형의 기록에 으레 드리워져 있을 법한 우수의 그늘도 자기 연민의 그림자도 짚이지 않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외려 환한 눈으로 속세를 응시하는 밟음과 맑음의 정신이 실감으로 전해올 뿐이니 말이다. “기느라 몸 없어진 것도 모르고 / 계속 기고 있는 몸 드러나겠지.” 시인의 몸을 빠져나오며 기어이 떠오르는 것은 오랜 시간을 경유하며 시인의 심연을 들여다 보았을 때 시인의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볼 것이라는 믿음이다. 황동규 시인은 무가치하게 산포된 일상의 파편 같은 사물‘전복 껍데기’에서 인간이라는 심연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밝고 맑은 심연을 오래오래 응시함으로써, 그동안 여정에 새로운 장을 열어젖힌다. “좋은날, 굳은 날 가리지 않고 / 저기 날개 새로 해 단 그도 기고 있다.”

2024-09-01

여러분, 이사가고 싶으신가요

김장호 구미시장 이사는 새로운 시작이다. 새로운 집으로의 이동이라기엔 단순히 집을 옮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새로운 지역사회와의 만남이 그것이고, 이사를 고려할 때 중요한 것도 지역 정주여건일 것이다. 다소 착잡한 심경으로 떠나는 도시와 돌아오는 도시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는 그 긴 시간동안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기에 떠나가는 도시가 되었는가. 안타깝게도 내가 사랑하는 도시, 구미 역시 현재 두가지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저출생과 지방소멸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지금, 구미 역시 그 가운데 서있다. 중앙정부를 포함한 모든 도시가 경쟁하듯 다양한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과연 해법은 무엇인가. 해법을 생각하며, 무엇이 가장 불편한가를 모든 고민의 중심에 두었다. 시민들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였다. 고민 끝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부터 먼저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필수의료체계를 촘촘히 채워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구미형 보건의료체계가 전국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개소한 ‘365소아청소년진료센터’에는 올해 7월말까지 총 1만3079명이 찾아왔다. 월평균 689명이 센터를 이용한 셈이니 그 필요성은 충분히 입증된 셈이다. 도내 아동청소년 비율이 19.2%로 가장 높은 도시인 구미에 소아응급실이 없어 다른 도시를 찾아 헤매서야 되겠는가. 지난 3월에는 ‘신생아집중치료센터(NICU)’도 문을 열었다. 2023년 구미시 출생아 1832명 중 251명은 미숙아 출생아로 집계됐다. 그동안 응급상황에 처한 많은 신생아들이 갈 곳 없어 애태웠다는 이야기다. 도내 미숙아 출생아 추정치도 연간 960명이나 되는 상황에서 경북 유일 신생아 집중치료실은 반드시 필요한 의료시설이었던 것이다. 다음은 ‘달빛어린이병원’이다. 밤 12시까지 진료하는 병원인데,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이다. 전국 94개소나 지정돼 있는데, 경북에는 ‘0개소’, 지정된 병원이 없다. 현재 ‘구미시 달빛어린이병원 및 공공심야약국 지원조례’를 제정해 놓은 상태이고 내년부터 병원과 약국의 참여를 통해 반드시 정상운영되도록 할 계획이다. 달빛어린이병원까지 운영하게 되면, 소아 응급환자와 경증환자 모두 진료가 가능한 촘촘한 의료안전망을 구축하게 된다. 두 번째로 찾은 해답은 저출생 극복의 핵심이기도 한 구미형 온종일 완전돌봄체계이다. 특히, 지난해 11월 전국 최초로 운영을 시작한 ‘구미24시 마을돌봄터’가 시민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개소 이후 현재까지 야간연장 이용인원만 1787명이다. 월평균 224명이 야간연장 서비스를 이용했다. 9월부터는 6개소로 확대하고 평일 24시, 휴일 18시까지 운영해 더 탄탄한 완전돌봄체계를 구축하게 된다. 이밖에도 일터의 부모를 대신해 아픈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돌보는 ‘아픈 아이 돌봄센터’와 ‘야간연장 어린이집’도 돌봄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다소 희망적인 것은 이 모든 노력들이 ‘인구감소율 개선’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취임 전 월 400명 가까이 감소했던 인구가 올해 월평균 97명 수준으로 개선되며 2022년 대비 인구감소율이 73% 이상 완화됐다. 이러한 인구감소 완화추세를 지속하기 위해 고삐를 더 당겨야 했다. 더욱 속도감 있는 추진을 위해 이번 추경에 국도비 100여 억원을 포함한 총 177억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청년들의 지역 정착부터 임신·출산·돌봄까지 든든하게 지원할 계획이다. 얼마 전 너무나 기쁜 소식이 있었다. 그간 수없이 관계기관을 방문했던 노력에 대한 선물처럼, 구미-군위 간 고속도로 건설사업이 예비타당성조사 대상사업에 선정된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개통 반세기 만에 이룬 쾌거이다. 구미-군위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 기존 교통망과 신공항이 연결돼 경북 중서부권의 중요한 교통축으로 자리잡게 된다. 노선의 대부분이 구미를 통과하고 지역에 IC 2개소가 설치되면, 구미지역 어디서든 통합신공항까지의 접근시간이 20분 이내로 단축된다. 41만 구미시민과 경제계 모두가 환호할 일이다. 도시는 스스로 지속가능한 발전시스템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다음 10년 후 구미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 우리가 하는 준비에 따라 미래의 모습이 결정될 것이다. 여러분, 이사가고 싶으신가요? 다시, 구미로! 구미,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2024-09-01

‘시절 인연’에 관하여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감수성이 예민했던 학창 시절에 읽은 글 가운데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이었다. 선생과 아사코의 세 번에 걸친 만남에 관한 글은 마치 잘 만들어진 영화의 장면처럼 뇌리에 새겨져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세 번째 만남을 깊이 후회하는 선생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명징하게 확인하고 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혼자 생각하곤 했다. 화사하고 가슴 뛰는 두 번의 만남만 간직한 채 망연히 세월을 보내고 나이 먹어간다면, 그 아쉬움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생각한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선생은 낭만주의자 기질이 농후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선생이 경험한 인연을 흉중(胸中)에 하나라도 품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늠해본다. 백에 하나나 혹은 둘?!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 방송을 듣다가 인연과 관련해 기억나는 게 하나 있다. 60줄에 접어든 여성이 아끼는 친구의 장례식에 갔다가 늘그막에 홀로 살아가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한다. 80대에 부인과 사별한 다음 요리며 빨래며 청소 따위를 혼자 해나가며 씩씩하게 생활하는 90줄의 친정아버지를 찾은 딸이 아버지에게 말한다. “60대에 하지 못해서 아쉬운 게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시절 인연에 너무 연연(戀戀)해한 것, 피부 관리 잘하지 못한 것, 외국어 하나 새로 시작하지 못한 것, 걱정 너무 많이 한 것, 젊은 나이에 요리 배우지 않은 것.” 피부 관리만 빼놓으면 상당히 공감 가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시절 인연에 매달려 전전긍긍했던 60대를 담담하게 회상하는 노인의 심중이 무엇보다 깊이 다가왔다. 아무리 싫어도 다가오는 인연이 있고, 참으로 아쉽고 안타깝지만, 끝내 떠나가는 인연이 있기 마련이란 것이다. 내가 원한다고 붙들거나, 내가 싫다고 뿌리칠 수 없는 것이 시절 인연이다. “가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는 한자 성어가 있다. ‘거자불추(去者不追) 내자불거(來者不拒)’가 그것이다. 가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으면 가려는 사람의 의지를 꺾어 두 사람의 아름다운 인연마저 퇴색하기 마련이다. 그로 인해 또 다른 의미 있고 새로운 인연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버리거나 지체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불가(佛家)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이면 인연이 생겨나고, 사대가 흩어지면 인연이 끝났다고 여긴다. 생로병사의 근본도 인연에서 시작하여 인연으로 끝난다. 사정이 이럴진대, 우리가 의지나 고집으로 이미 끝난 인연을 고집하거나, 불가능한 인연을 강제하려 든다면, 그 결과는 자명하다. 갈 사람은 가야 하고, 올 사람은 와야 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는 우울하게 썼지만, 그는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과 작별했다. 그래서 그는 잃고 얻음의 양면성,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상호보완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랑을 잃으면, 다른 사랑이 오고, 그 사랑마저 떠나면, 제3의 사랑이 찾아온다는 이치를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여러분도 시절 인연과 만났으면 한다.

2024-09-01

싱크홀 공포

우정구 논설위원 2007년 2월 중앙아메리카 과테말라시티에서는 깊이 100m의 싱크홀이 생기면서 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2010년에는 2007년 사고가 난 곳에서 불과 2km 떨어진 곳에서 집 4채가 또다시 땅속으로 함몰되는 사고가 일어나 충격을 주었다. 전문가들은 과테말라 싱크홀 현상에 대해 화산이 많은 지형적 특성을 이유로 든다. 화산재, 화산퇴적물, 석회암 등과 같이 단단하지 않은 과테말라의 토양이 열대성 폭풍우 등의 영향을 받아 침식된 때문이라는 것. 그 외 과테말라시티의 노후한 하수관과 부실한 관리가 싱크홀 사태를 부추겼다는 지적도 있었다. 땅꺼짐 현상으로 표현되는 싱크홀은 물이 지하로 스며들면서 토양이 약해지거나 지하수가 부족해 땅이 허물어지는 것이 보통의 이유다. 전 세계적으로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다. 2012년 중국 어느 마을의 할머니가 싱크홀로 무너진 옆집을 구경하러 갔다 오니 자신의 집도 무너져 내린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한다. 동일본지진 후 일본에서는 2000개가 넘는 지하공동화 현상이 발생해 비상이 걸린 적도 있다. 콘크리트 건물과 아스팔트 도로가 많이 들어선 현대 도시에선 지하수 유입량이 감소하거나 혹은 고갈되면서 땅속에 빈공간이 생겨 부분 침하하는 현상이 잦다. 자연적 현상보다 인공적 이유로 싱크홀이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지난달 서울 연희동 한 도로에서 차량 1대가 통째로 함몰되는 싱크홀 사고가 영상으로 공개되면서 싱크홀에 대한 공포감이 커졌다, 만에 하나라도 나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면 아찔하다. 당국의 대책이 필요하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09-01

즐거운 추석 가스 알고 사용하면 충분히 사고 예방

오정렬 차장 한국가스안전공사 경북동부지사 홍보담당 곧 추석이 다가오는데 예전만큼 설렘과 기대가 느껴지지 않는다. 고유의 명절 추석이라 전통시장, 대형마트를 가보면 그나마 추석이 다가옴을 직감할 수 있다. 그래도 추석은 오랜만에 가족과 친지를 만날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만남을 통해 모두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멀리 오고 가는 길도 안전하게 잘 다녀왔으면 한다. 특별히 좋은 연휴기간 동안 가스사고가 없었으면 한다. 따라서 가스안전에 대해서 몇 가지 알려드리고자 한다. 최근 크고 작은 가스 사고가 전국 몇 곳에서 안타깝게 일어났다.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고인데도 불구하고 사고가 발생하였다. 가스사고는 평상시 아무리 잘 사용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쯤은 괜찮겠지’라고 방심하면 큰일이 일어날 수 있다. 최근 5년간 가스사고 통계을 살펴보면 전체 480건 중 사용자취급부주의 130건, 시설미비 110건, 제품노후가 83건, 타공사 54건, 공급자취급부주의 33건, 기타 70건이 발생하였으며 인명피해는 83명이 발생하였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 가운데 사용자취급부주의 사고가 가장 많다. 사용자취급부주의는 말 그대로 사용자가 가스를 잘 못 취급해서 일어난 사고이다. 가스를 사용 또는 취급할 때는 반드시 안전 수칙을 준수해야 함에도 나의 짧은 생각 잘못된 습관으로 사용하면 큰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 이번 추석에 맛난 음식, 가족동반 캠핑 등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은 반드시 가스의 위험성을 생각하고 안전 수칙을 꼼꼼히 숙지하여 사용했으면 한다. 특히 조리할 때 휴대용가스레인지 과대불판기구 사용금지, 캠핑할 때 텐트안 즉 실내에서 조리 금지 및 춥다고 텐트 안에서 가스난로는 사용하지 않았으면 한다. 이런 경우가 부탄캔 파열사고 일산화중독사고 산소결핍사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휴기간 출타할 때는 반드시 가스밸브를 잠그고 다시 귀가 했을 때는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충분히 시킨 다음 사용했으면 한다. 행여 가스 냄새라도 난다면 절대 전열기구나 점화원은 일체 사용을 금하고 바로 공급자에게 연락하여 안전하게 조치를 받고 사용하길 당부드린다. 최근 평창 LPG충전소 폭발사고, 부산 CO중독사고가 우리에게 아픔을 더해 주고 있다. 사고는 없어야 한다. 한번의 실수 한번의 잘못으로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번 추석 연휴 기간에는 모두가 가스의 위험성을 충분히 숙지하고 안전 수칙을 잘 지켜서 가스 사고 없는 즐겁고 행복한 추석연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2024-09-01

미래세대 환경권을 위한 첫걸음

유영희 작가 22년 쓴 작은 에어컨이 올해 이상이 왔다. 작년까지는 한여름 며칠 잠깐씩 틀었지만, 올여름은 너무 덥고 습해서 2주 이상 매일 켰더니 과부하가 왔나 보다. 에어컨 실외기 열기가 기온을 더 올릴 것이라는 걱정도 지구 역사상 최고라는 올해 무더위에는 너무도 무기력했다. 기후변화 앞에서 개인의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고 자책하던 중 한 신문 기사를 읽고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난 8월 29일 헌법재판소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제8조 제1항이 ‘미래에 과중한 부담을 이전’하여 ‘청구인들의 환경권을 침해한다’고 판결했는데, 그런 판결을 이끄는데 청소년과 어린이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탄소중립이란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 배출량을 0으로 만들자는 국제 선언으로 탄소제로라고도 한다. 우리나라도 탄소중립을 실천하기 위한 법을 제정했으나, 우리의 탄소중립기본법 제8조 제1항에는 2030년까지 정부는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배출량 대비 35% 이상의 범위에서 감축해야 한다고만 되어 있고, 2031년부터 2049년까지의 감축목표에 관해서는 제시하지 않았다. 이에 청소년 19명이 이 조항에 대해 2020년에 헌법소원을 냈고, 2021년에는 시민기후소송, 2022년에는 ‘아기기후소송’, 그리고 2023년 ‘탄소중립기본계획 헌법소원’ 등 4년에 걸쳐 다양한 연령의 시민과 어린이가 헌법소원을 냈는데 이것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 판결 기사에 처음 눈길이 간 것은 ‘동생 사진 손에 쥐고 눈물 쏟은 초등생’이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읽어 보니, 2년 전 아기기후소송을 냈던 서울 흑석초 6학년 한제아 어린이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기자가 한제아 어린이에게 2년 전과 지금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질문하자, 어릴 때는 키가 작아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더 더웠는데, 그때보다 키가 많이 큰 지금도 여전히 덥다고 대답한다. 두 살짜리 사촌 동생은 키가 엄청 작아서 자기보다 더 더울 것이라며 마음 아팠다는 대답도 있다. 이날의 판결에 정말 적절한 대답이었다. 이 대답은 어린이다운 감수성을 보여주어서 인상 깊기도 했는데, 실제로 8월 14일 한 일간 신문에 실린 서울 보라매공원 특별 관측 결과를 보면, 아이 발밑은 ‘성인 키’ 기온보다 덥다고 한다. 특히 햇볕에 노출된 아스팔트 도로의 지면 온도는 지상 1.5m보다 11.2도나 높다니, 키가 작으면 확실히 더위를 더 느낄 것이다. 게다가 지면 가까이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도 많으니, 도시에 사는 어린이의 고통은 더 심할 수밖에 없다. 인공지능에도 물어보니, 몸이 작으면 체적에 비해 체표면적이 더 크고 근육도 적어서 기온에 민감하다고 한다. 미래세대에 이런 걱정을 끼치니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린이의 야무진 활동에 안심이 되기도 한다. 다만, 어른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 운동이고,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알게 되면서 우울증에 걸렸었다니, 한제아 어린이에게 밝고 즐겁게 활동하기를 바란다는 당부를 전하고 싶다.

2024-09-01

세상을 변화시키는 지혜 : 최소의 법칙

신일철 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최소량 법칙은 생물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이다. 작물이나 생물체의 성장과 생존은 특정한 환경 요소 중에서 가장 제한적인 요소가 전체적인 성장과 생존을 결정하며, 특정 영양소가 부족하면 그 영양소가 성장을 좌우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19세기 독일의 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식물의 성장과 생물학적 프로세스에서 어떤 인자가 생장에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이를 증명하였다. 그는 실험을 통해 어떤 식물이 생장하는데 필요한 다양한 요소들을 제공하면서 각각의 요소의 양을 달리 조절한 후 생장이 느리게 일어나는 경우를 발견하였다. 질소, 인산, 칼륨, 석회 중 어느 하나가 부족하면 다른 것이 많이 있어도 식물은 제대로 자랄 수 없다는 설명이다. 가장 제한적인 인자가 생장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단일적으로 존재하는 제약요소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극복함으로써 생태적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최소의 법칙에 해당되는 사례가 많이 있다. 추석명절이 되면 고속도로는 병목 구간이 발생하여 북새통을 이룬다. 이를 회피하기 위해 역 귀성이나 출발 일자 및 시간을 변경하는 나름의 지혜를 발휘하기도 한다. 우리 주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터넷 검색 속도는 컴퓨터, 회선, 모뎀 중 가장 성능이 떨어지는 요소에 의해 결정되며, 오디오 소리는 가장 성능이 떨어지는 기기에 의해 결정된다.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팀 내에서 10명이 함께 근무하고 있다. 팀의 수준은 가장 성과(Performance)가 낮은 팀원에 의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부족한 부분이 넘치는 부분의 잠재력을 저해시키고 있는 것이다. 제조공정에서도 가장 생산성이 낮은 병목 공정이 공장 전체의 생산수준을 결정하므로 이를 모니터링하고 적절한 관리를 해나가는 것이 관리자의 최우선 과제이다. 산업 현장에서의 안전 관리도 최소량 법칙이 적용된다. 모든 안전 장비와 절차가 완벽하더라도, 한 가지 작은 위험 요소가 존재하면 전체 안전이 그 요소에 의해 좌우될 수 있으므로 작은 위험 요소까지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기업에서 인재육성에 전력을 다하는 것은 다양한 경영 요소들 중 임직원들의 수준이 기업의 성정과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최소의 법칙 관점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신체 기능적 영역과 심리적 영역에서 취약한 영역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보완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넉넉하게 만드는 길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정기 또는 비정기적으로 병원 진단을 받는다. 나쁜 결과에 대한 막연한 걱정 속에 진단을 받고 얼마 뒤에 그 결과를 받는다. 중요한 것은 전체 신체 건강에 나쁜 영향을 주는 제약요소를 발견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삶의 방식에 적극적인 변화를 주는 것이라 판단된다. “행복한 사람은 모든 행복의 요소가 충족되었을 때이지만 불행한 사람은 전반적으로 부족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요소에 의해 불행을 느낀다”라고 한 톨스토이 표현에서도 최소의 법칙을 공감할 수 있다.

2024-09-01

글로컬대학30 선정 마냥 반길 일인가?

심한식 경북부 28일 교육부가 글로컬대학30 사업의 2차 본 지정 결과를 발표했다. 글로컬대학30 사업은 대학 내·외부 벽을 허물고 지역과 산업계 등과 동반관계를 기반으로 대학과 지역의 동반성장을 이끌어 갈 대학 30개를 2026년까지 지정해 집중적으로 지원하며 국비 1000억 원을 지원한다. 지정대상이 소재지가 비수도권인 일반재정지원대학 또는 국립대학으로 지역에서는 대구한의대가 본 지정을 받아 2028년까지 경북도 250억 원, 경산시 500억 원, 청도군 100억 원, 영덕군 100억 원의 지방비를 부담해야 한다. 대구한의대는 글로컬대학30 사업선정으로 대학 강점 분야인 한의학의 과학화와 산업화, 세계화를 토대로 지역의 새로운 성장 동력 산업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를 위해 경계 없는 교육혁신과 한의학 초 산업화 허브 조성, K-MEDI 글로벌 가치 창출 등의 3개의 혁신 과제를 추진한다. 하지만, 500억 원이란 지방비를 부담해야 하는 경산시민들의 입장은 글로컬대학30 지정이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다. 현재 경산시의 재정자립도는 19.79%에 그치며 당장 지방비로 건설하기로 한 진량하이패스IC 등에 앞으로 선정될 공모사업에 따른 지방비 매칭으로 지방비를 지출해야 한다. 특히 10개 이상의 대학에 지금까지 많은 예산을 투입한 경산시민들은 대학들이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혜택은 아주 미약하다고 느끼고 있어 글로컬대학30 선정은 대학에는 축하할 일로, 주민들에게는 시민들이 낸 세금을 먹는 하마로 다가온다. 특히 중앙정부가 추진해야 할 일을 지방에 일정 금액의 예산만 던져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는 식의 스타일은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는 글로컬대학30에 1차 선정된 대학들에 아직 제대로 된 국비를 지원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계획도 중요하지만, 실천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담당자들이 깨닫기를 바란다. 사업을 추진하는 대학도 세계화도 중요하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지역민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 세금만 먹는 하마로 인식되는 현실을 타개하길 바란다. /shs1127@kbmaeil.com

2024-08-29

모함의 정치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정치판에서 정적(政敵)을 제거하는데 모함(謀陷)을 하는 것만큼 손쉬운 수단은 없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모함으로 정적을 제거한 예는 무수히 많을 것이고, 그로 인해 역사의 흐름이 바뀐 것도 부지기수일 터이다. 특히나 공산주의혁명처럼 일거에 정세를 장악하기 위해서 수많은 정적들을 한꺼번에 숙청할 때 가장 유효하게 쓰이는 것이 모함전략이다. 소련의 스탈린이나 중공의 마오쩌둥, 북한 김일성의 정략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모함을 하고 누명을 씌우면 해를 입지 않을 인물이 없다는 걸 역사가 잘 말해준다. 성인(聖人)으로 손꼽히는 소크라테스와 예수도 사실이 아닌 모함으로 죽임을 당했다. 소크라테스는 신성모독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사약을 받았고, 예수는 유대 당국에 의해 로마에 대한 반역의 주모자로 고소를 당해 십자가형을 받았다. 성웅으로 불리는 이순신도 원균의 모함으로 파직을 당했고 프랑스를 구한 잔다르크도 마녀이자 역적으로 몰아 화형에 처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좌파 세력들에 의해 모함의 정치가 판치고 있다. 그들은 오랜 학습과 경험으로 국민들을 선동하고 대세를 장악하는데 모함만큼 쉽고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작은 꼬투리만 있어도 침소봉대하거나, 사실을 왜곡·조작하여 가짜뉴스로 만들어 내고, 자신의 죄를 적반하장으로 상대에게 뒤집어씌우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상당수 국민들은 ‘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며 휩쓸리기 마련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큰 모함은 이승만과 박정희를 친일 반역자이자 독재자로 몰아간 것이다. 물론 그분들에게도 공과가 있겠지만, 과가 둘이면 공은 팔이라는 게 국내외 양식 있는 논자들의 평가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거나 적으로 간주하는 세력들이 사회 곳곳에 침투하여 활동하는 바람에 국민 대다수가 좌경화 되어 대한민국의 근간을 훼손하고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함의 정치가 판을 치는 나라가 위태롭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상식과 분별을 상실한 대다수 국민들이 모함과 조작과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온갖 반국가적이고 파렴치한 범죄자들이 대거 국회에 몰려들어 나라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특히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할 세대가 전교조에 의한 좌편향 교육을 받고 잘못된 역사관과 가치관을 가진 세력이 되었다는 것은 여간 심각한 노릇이 아니다. 그들이 가담한 사법부와 언론과 교육계가 국가의 기강을 흔들고 민심을 어지럽힌 과오는 이미 뿌리가 깊다. 결국 새로운 세대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다. 그들이 올바른 역사관과 가치관을 갖도록 교육 현장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 창궐해 있는 몰상식과 비이성, 반지성, 비윤리, 불순한 사상이 청소년들에게 침윤되지 않도록 교육을 바로 잡는데 민의를 모으고 국력을 기울여야 한다. 시대착오적인 망상에 사로잡힌 불순분자들이 교육현장을 오염시키는 걸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2024-08-29

변학도 재판과 지방자치

정태옥 ​​​​​​​​​​​​​​경북대 데이터사이언스 대학원장 유럽이나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한적한 시골에도 꽤 크고 아름다운 성 (城)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이 있었다는 것은 살아있는 권력(귀족)이 살았다는 뜻이다. 서울을 벗어나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산사(山寺)를 제외하고 변변한 역사문화재를 찾아보기 힘들다. 양반의 고장이라고 자랑하는 경북에도 류성룡 가(家) 외는 판서댁 하나 없다. 몇몇 서원이 남아 있지만 벼슬길 끊어진 선비가 낙향하여 주변 농민들 힘으로 세운 것들이다. 요약하면 우리 역사에 지방에는 변변한 권력(권한)이 제대로 없었다. 필자가 지방시대위원회 토론회를 갔을 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왜 지방분권이 잘 안되느냐’는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봉건제를 비롯한 지방자치의 경험도 개념도 없었다. 지방은 그저 중앙에 예속된 존재였고, 중앙에서 파견된 벼슬아치가 생처녀를 잡아다가 ‘네 죄는 네가 알렸다’하면 머리를 조아려야하는 존재였다. 그 해결책도 중앙에 가서 출세하고 중앙권력에 의지한 이도령에 의해서 한풀이가 가능했다. 21세기 지금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나라가 거두는 500조쯤 되는 세금 중 국세가 80%, 지방세가 20% 정도 된다. 그런데 실제 집행은 지방자치단체를 통하여 집행되는 것이 전체 예산 중 60% 정도다. 즉 중앙정부가 거두는 세금 중에서 40%는 지자체에 주어서 집행된다는 뜻이다. 중앙정부가 거두어 지자체에 나누어주는 세금은 용도와 사용 대상을 모두 중앙정부가 정해서 내려보내준다. 예를 들어 지방자치단체 예산 중에서 70% 정도가 복지 예산인데 거의 100% 중앙정부가 정해주는 용도기 때문에 지방에는 재량권이 하나도 없다. 나머지 30% 예산도 중앙정부가 하고자 하는 사업에 소위 매칭펀드로 다 들어간다. 지방자치단체는 인건비 빼고는 거의 한푼도 쓸 돈이 없다. 문제는 이와같은 제도 뿐 아니라 우리 국민의 무의식도 지방을 차별하고, 열등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TV에 지방이 나오는 것은 시골 할머니들이 서울서 온 연예인이나 손주에게 토속 음식 만들어주는 장면 외는 없다. 서울 외는 모두 시골이고 그저 토속 음식이나 해서 서울 손님 대접하는 곳으로 인식된다. ‘춘향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구 경북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와서 소위 출세하여 서울에 사는 선후배들조차 무심코 하는 말이 차별적이다. ‘우리나라 같이 작은 나라에 지방마다 공항이 필요한가’한다. 서울에서는 한시간만에 공항가서 외국 가고, 지방에서는 새벽부터 네시간 다섯시간 허겁지겁 인천공항 가야 된다는 말인가. 소득 3만불이 넘는 인구 500만인 대구경북에 국제공항 하나 가지는 것이 그렇게 국가적 낭비인지 모르겠다. 대구경북 통합하자고 하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도청사 어디 두는지, 대구 경북 누가 이득인지만 관심이다. 대구경북 통합의 핵심은 통합할 테니 예산 더 나누어 가져오고, 중앙정부가 가진 과도한 권한 나누어 달라는 것이다. 그냥 가져오는 것이 아니고 수도권과 경쟁 가능한 규모로 키우고 기획 기능도 대폭 살려서 지방도 좀 자율적으로 잘 살아보자는 뜻이다. 힘 좀 모으자.

2024-08-29

프로야구가 좋아

우정구 논설위원 한국 프로야구가 역대급 관중몰이로 최고조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난 18일 기준 한국 프로야구 누적 관중 수는 573경기 동안 847만명을 기록해 신기록을 수립했다. 역대 가장 많았던 2017년의 720경기 840만명 기록을 완벽히 깼다. 경기 수에서 147경기나 앞당겨 신기록을 수립해 경기장은 매경기마다 관중열기로 가득하다.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시즌 관중 1000만명 돌파도 가능할 것으로 예측한다. 지난달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시민 2006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프로야구 흥행은 남성보다 여성, 40∼50대보다 20대, 기혼자보다는 미혼자가 주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말하자면 20대. 미혼, 여성이 새로운 주도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경기장 분위기를 화끈하게 달구고 있다는 것. 삼성라이온즈도 올 시즌 선두 다툼을 이어가면서 대구시민의 뜨거운 응원을 받고 있다. 지난 14일 대구 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경기를 기점으로 삼성은 한 시즌 총 관중 100만명을 돌파했다. 1982년 구단창단 후 42년만에 처음이다. 잠실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두산베어스에 이어 두 번째 기록이다. 선수는 관중의 함성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닐까. 관중들의 열화같은 응원이 있으면 선수들의 사기가 절로 올라가고 경기도 잘 풀리는 게 순리다. 요즘 대구에서는 프로야구 홈경기 표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프로야구가 인기가 대단히 높다. 삼성의 약진 때문인지 응원문화가 재미있어선지 모르나 즐길 곳이 있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08-29

균형발전 저해하는 예타, 무엇이 문제인가

구자근 국회의원 (국민의힘, 구미갑) 최근 구미~군위 고속도로 사업이 예비타당성조사 대상 사업에 선정됐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이후 54년 만에 구미시를 동서로 관통하는 고속도로가 생기는 것이다. 추정사업비 1조4965억원으로 대구경북신공항과 함께 경북 발전의 시대를 열기 위한 필수 사업이다. 대규모 도로·철도·항만 등 사업의 당락을 결정짓는 예비타당성조사는 재정투자의 효율성을 높이고, 우선순위와 사업효과 등을 사전에 검증한다는 취지로 운용되는 제도로 1999년 시작되어 25년을 맞았다. 불필요한 사업을 방지한다는 효과도 있지만, 경제성 논리에 치우쳐 지역균형발전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에 정부는 2019년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구분하고, 경제성 비중을 낮추고 정책성과 지역균형발전 항목 비중을 높이는 개편을 시행 한 바 있다. 효과는 어땠을까? 올해 국책연구원인 국토연구원이 발표한 분석결과에 따르면, 오히려 비수도권보다 수도권에 유리하게, 낙후지역보다 발전지역에 더 유리하게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비수도권의 사업이어도 경제성 비중이 여전히 최대 45% 차지할 수 있고, 평가위원마다 그 비중을 30~45% 범위 내에서 재량으로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몇 가지 사업들의 예타조사결과보고서를 확인한 결과, 똑같은 사업을 두고서도 평가위원마다 경제성을 30%, 35%, 40%, 45% 제각각 매기고 있다. 지역마다 형평성, 공정성 문제까지 생길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혹자는 경제성이 가장 중요한 기준인 것이 맞지 않냐고 지적할 수 있다. 경제성 논리 위주의 예타는 정책적 시각을 더 멀리, 넓게 보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2022년 11월 예타를 통과한 중부내륙철도 문경~김천 단선전철사업의 예를 보자. 당초 예타 조사 진행 도중 경제성이 나오질 않아 위기를 맞았었다. 국토부는 조사 도중 김천~동대구 간 연결이 포함된 사업계획변경을 제출했고, 이를 통해 타당성을 확보해냈다. 국토부는 현재 기본계획 용역 등 절차를 진행 중에 있고, 서울 수서와 구미, 대구를 연결(편도 7회)하는 편성안이 사업에 포함됐다. 올 12월 개통하는 대구권 광역철도와 신공항 배후도시의 이점 등 KTX-이음 김천역, 구미역 정차 효과 시너지는 상상 그 이상이 될 것이다. 당초 사업대로 중부내륙철도 노선만 놓고서 경제성 위주 심사로만 끝났다면, 이 사업은 예타의 벽에 막혀 지금도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용 대비 편익(B/C)가 0.11이었으나, 지금은 연간 500만명이 이용하는 KTX 강릉선, B/C가 0.39에 그쳤지만 지금 역사 증축까지 하고 있는 호남고속철도 등 경제성 논리만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업들이 있다. 예타 주무부처인 기획재정부는 2019년 개편 시행 5년을 맞아 효과와 한계를 살펴보고, 추가로 개선해야 할 점들을 적극 발굴해야 한다. 특히 경제성 논리로 인한 지역 차별과 격차 문제, 수치·계량화로 인해 지역 특성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 점, 평가위원에게 과도하게 부여된 재량 등은 개선이 시급하다. 국회에서도 공론화에 적극 앞장서겠다.

2024-08-29

고시엔, 장훈, 교토국제고

장규열 고문 장훈(張勳) 선수가 있었다. 한국인이었지만 일본 야구인들은 그를 영웅이라 부른다. 생애 홈런 504개와 안타 3085개를 치는 등 기록적인 선수생활을 했다. 재일한국인으로 어쩔 수 없었던 멸시와 홀대를 받으면서도, 치욕적인 한계상황에서 인내와 끈기로 자신의 분노를 실력으로 이겨내며 삭였다고 했다. 그랬던 그가 오사카 나니와상고에서 어렵게 어렵게 야구를 시작했던 무렵, 당시 프로선수 등용문인 고시엔(갑자원)대회에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하였다. ‘조센징’이 고시엔에 나가면 대회가 더러워진다고 놀려대는 바람에 밤새 울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장훈 선수는 이후 놀라운 성장을 거쳐 1990년 일본 ‘야구의 전당’에 입성하는 멋진 마무리를 일구었지만, 한국인으로 받았던 상흔은 늘 가슴깊이 남아있지 않았을까.고시엔(甲子園). 전 일본고등학교야구대회. 2024년 고시엔대회는 한국계 고등학교인 교토국제고(京都国際高)가 우승배를 거머쥐었다. 1947년에 한국계 고등학교로 시작하였지만, 이제는 딱히 한국학교라기보다는 일본 내 국제고 정도로 이해된다. 전교생 160명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한국학생이며 나머지는 일본인 학생들. 그럼에도, 학교의 뿌리를 간직하고자 한국말로 적힌 교가를 부른다. 고시엔대회 결승토너먼트에서 매 경기를 이기면 교가를 불렀다. 일본에서 한국말 교가가 일곱 번이나 우렁차게 흘러나왔다. 장훈 선수는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소년 장훈은 초등학교 시절 일본인 급우들에게 둘러쌓여 구타를 당하거나 싸움에 휘말리곤 하였다. 학교에서 경고를 받고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한국인은 우수하고 용감하며 성실한 민족’이라고 자랑하였다. 어머니의 높은 긍지와 세심한 격려 덕에 굽히지 않고 일본 생활을 이어갔다고 한다.‘동해바다 건너서 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로 시작하는 교토국제고 교가의 4절을 읽으면 가슴이 더욱 웅장해 진다.‘힘차게 일어나라 대한의 자손 새로운 희망 길을 나아갈 때에 불꽃같이 타는 맘 이국 땅에서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 되자.’누구였을까. 척박했을 여건으로 사면초가 환경에서 학교를 짓고 두고 온 나라 대한을 생각하며 아이들을 가르쳤을 그 사람들은. 역사를 되짚다 보면 뜻이 깊었을 사람들을 수없이 만난다. 눈앞의 이익에 목이 말랐다면 절대로 할 수 없었을 일들을 누군가 해낸 덕에 오늘 세상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필자가 어렸을 적에 들은 경고가 있다. ‘한국인 개인들은 우수하지만 그들을 모으면 힘을 잃는다.’ 이도 어쩌면 일본인들이 한국사람을 비하하느라 만들어낸 표현일지도 모른다. 고시엔의 고지를 점령해 내고야 만 학생선수들의 기개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힘들어도 우리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을 살려야한다. 오늘처럼 나라 안에 뒤엉킨 문제들 앞에도 우리만의 긍지와 지혜로 돌파구를 열어내는 발걸음을 기대해 본다. 일본쯤이야 넘고도 남는 기백을 되살려야 하고, 오대양육대주로 뻣어가는 디아스포라의 정신을 일으켜야 한다.

2024-08-28

계좌 이체된 위자료 20억 원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위자료란 ‘불법 행위로 인해 생기는 손해 가운데 정신적 고통이나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부당한 짓을 했을 때 이를 보상하라고 요구해 받는 돈이다.혼인 관계가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의 잘못으로 파국에 이르렀을 때, 그 원인을 만들거나 제공한 이는 상대에게 위자료를 지급하게 된다. 그러니, 일종의 ‘금전적 단죄’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서울가정법원은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동거인 김희영 씨는 노소영(최태원의 전처)씨에게 위자료 20억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김희영 씨와 최태원 회장의 부정행위, 혼외자 출산, 최 회장의 일방적인 가출과 별거 등이 노소영 씨와 최 회장 사이의 신뢰를 훼손하고 혼인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한 것으로 인정된다”는 이유에서였다.이혼이 흔해진 세상이니 단순히 이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신문과 방송에 오르내리는 일은 드물어졌다.하지만, 최 회장과 노씨의 이혼은 재벌과 전 대통령의 딸이란 그들의 신분과 천문학적이라 할 거액의 재산 분할 소송, 복권 당첨금에 육박하는 위자료 액수 탓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1조3800억 원에 이르는 재산 분할 소송 소식에 이어 며칠 전 김희영 씨가 20억 원의 위자료를 ‘가볍게’ 계좌로 이체했다는 뉴스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을 놀라움에 빠지게 했다.김씨가 노씨에게 보낸 20억 원은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이 한 푼도 쓰지 않고 80년을 모아야 손에 쥘 수 있는 돈이다. 이혼도 부자가 하면 ‘핫 이슈’가 되는 모양. 놀라움과 함께 상대적 열패감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을 듯하다./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8-28

달달한 자궁

피귀자 수필가 칼 맛을 보더니 더 독해진 걸까. 날 선 칼을 튕기며 길을 내주지 않는 단 호박. 남반구의 강렬한 햇빛이 키운 완강한 근육을 진작부터 알아봤지만 이리 돌 같을 줄이야. 칼의 길을 더 이상 용납 않는 호박과의 씨름이 낭패스러웠다.겉가죽이 검푸른 단 호박 한 덩이를 샀다. 작은 크기에 비해 묵직한 뉴질랜드산 호박이다. 깨끗한 공기와 끝없이 푸른 들판을 머금은 환경은 직접 보기도 했지만 숨긴 속내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먼 길을 돌았어도 상처 하나 없이 암팡지게 내려앉은 모습이 유장하기까지 하다.말쑥하게 목욕시키고 식초 단장까지 마친 후 자르려고 칼을 넣었다. 처음부터 이가 약한 세라믹 칼을 들고 설친 게 실수였다. 칼끝을 날리고서야 겨우 빼낸 후 무쇠 칼로 바꾸었다. 쇠 칼날을 물고도 완강하게 버티는 호박을 도마에 대고 탕탕 치며 이리 돌리고 저리 흔들다 보니 겨우 한쪽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철옹성 같은 짙푸른 초록의 속이 샛노랗다 못해 주황빛이다. 드러난 속살에 옛 추억이 소환된다. 낡은 창고 지붕이 위태로울 정도로 큼지막하게 자리 잡았던, 늙은 호박 속과 닮았기 때문이다.할머니의 칼 아래 누르스름하게 골진 단단한 껍질이 벗겨지고 쫙 갈라지던 거대한 호박 속. 처음으로 자세히 본 호박 속은 어린 마음에 금화 가득한 흥부의 박 속처럼 신기했다. 늙은 호박은 겉도 누런 색깔로 골이 깊게 패이고 높이보다 옆으로 넓게 자리 잡은 모습과 달리 단 호박은 작고 껍질이 검푸른 탓일까 늙은 호박 속보다 더욱 붉게 보이니.환한 빛 내뿜는 단 호박 구멍 속에 손을 넣었다.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호박씨를 손가락에 힘을 주어 긁어내자, 미끌미끌한 실끈에 달린 호박씨들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근육을 키운 자양분 주황 물이 끈끈한 피 마냥 손을 적신다.오글오글 모여 있는 호박씨들이 곧 깨어날 개구리알 같다. 코끝에서 싱싱한 야생의 기운을 내뿜는 입김이 달착지근하다. 달달한 향이 솔솔 흘러나온다. 잘 익은 과일의 농익은 달콤함과 제철 과일의 싱싱함까지 품은 호박 향이 저절로 가을 들판을 달리게 한다.씨가 빠져나가자 움푹한 구덩이가 드러났다. 입김 달달한 경이로운 동굴이 옹골차다. 완강한 근육 속 고백, 단단한 몸이 만든 샛노란 자궁이다. 몸 전체가 자궁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으니 몸의 크기에 비한다면 아마 가장 큰 자궁이리라. 산도를 따라 피어난 저토록 야무진 둥근 방, 눈부시도록 환한 속은 계절을 삭힌 여백일까. 한 발 한 발 넓혀나가느라 운 울음의 깊이일까.반백년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자궁을 잃어버렸다.정확히는 수술대 위에서 의사의 시술로 어쩔 수 없이 빈 궁마마가 되어 버린 것이다. 헛꽃 물혹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비록 생산의 소임을 다했다지만 여성으로서의 상징 같은 자궁을 상실한다는 의미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여성성을 도려내는 듯 상실감도 밀려왔지만 겉으론 쿨 한 척 이 또한 가볍지 않겠느냐고 너스레를 떨었던 기억이, 알알이 영근 씨를 가득 품은 호박 속을 보며 되살아났다.그 일로 수혈을 많이 한 까닭인지 수족냉증이 와서 겨울마다 오랫동안 고생했던 일도 이젠 추억이 되었다. 원래 피가 모자란다는 소리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수혈 양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있던 피가 텃세를 한 탓일까. 들어온 피와의 화합이 그리 어려웠던 것인지. 아무튼 찬물에 넣으면 손과 발이 빨개지고 따가울 정도여서 괴로웠는데 세월이 약이었다.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되듯, 모진 비바람과 땡볕과 가뭄을 이겨내고 익어서 제 소임을 다하는 호박 앞에서, 지금 이 시점이 내 인생의 어디쯤인가도 다시 가늠해 보게 된다. 언젠가 해는 서산으로 넘어갈 것이고, 나도 저물어 갈 것이니까. 지금은 품을 자궁이 없는 나, 저 달달한 자궁의 농익은 문장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저리 붉게 활활 토하는 저 문장을.

2024-08-28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물을 주다

나무들은 뿌리가 깊으니까 아래에 있는 흙에서 물을 당겨올 수 있지만 꽃이나 풀들은 뿌리가 얕아서 조금만 비가 안 와도 힘들다며,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물었다. /언스플래쉬 상사화 꽃대가 잘렸다. 하루에 한 뼘 이상 솟아오르던 꽃대의 허리가 두 동강이 났다. 자줏빛 꽃을 기대하던 K는 아연실색.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오늘 아침에 동네 전체에 약을 쳤거든. 약 치시던 분이 가지치기를 해 주겠다 하더라고. 고맙다 했지. 그런데 저렇게 해뒀더라고. 뭐라고 말도 못하겠고.”작년에는 황칠나무의 몸통을 자른 분이다. 다행히 옆으로 새 가지가 나오기는 했지만.“이 땡볕에 약 친다고 고생했을 텐데 뭐라 할 수도 없고.”K는 바닥에 널브러진 꽃대를 들고 서서 또 다른 이상은 없는지 주위를 살펴보았다.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 해서 상사화라 부른다지. 꽃과 K가 만나지 못하는 여름이 되어 버렸다.“이리 줘.”S는 내 손에서 꽃대를 빼내 집으로 들어갔다. 긴 유리잔에 물을 받고 꽃대를 담았다.다행히 꽃이 피었다. 하루 이틀의 간격으로 봉오리들이 자줏빛 꽃잎을 펼쳤다.“고마운 일이네.”“얘가 조금 빨리 나왔어. 조금 있으면 옆에서 다른 애들이 올라 올 거야. 너무 마음아파 하지마.”S가 위로를 했고 K는 가만히 상사화를 들여다보았다.며칠 뒤부터 한동안 비가 왔다. 이 비는 언제 그칠까? 이 정도 비면 땅 속 깊이까지 충분히 젖겠지. 처마 아래에서 비를 피해 서 있던 K는 이제 막 영글기 시작한 단감의 개수를 헤아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땡볕 더위가 이어졌다. 2주? 3주? 내일이면 조금 시원해질까 싶었지만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살은 이른 아침부터 초저녁까지 이어졌다. 축 늘어지고 말라가는 잎을 보며 물을 줘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너무 더운 탓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해가 있을 때 물을 주면 잎이 다 타버린다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핑계 삼아 저녁에 물을 주겠다 다짐했지만 그저 변명일 뿐이었다. K는 약속이 많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물을 주는 것은 S였다.일요일 아침이었다. 밤새 더위로 뒤척였지만 K는 평소처럼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묵직한 두통과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일어나 앉았다. 멍하니 있다가 지난 밤 남겨놓은 수박을 찾아내 몇 조각 먹고는 믹스 커피를 탔다. 커피 잔을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잔디는 아직 견디고 있는 듯 보였고 국화와 나팔꽃 잎은 바싹 쥐면 바스락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될 것 같았다. 늘어지고 말라비틀어진 고추 줄기와 잎 사이로 천천히 오가는 벌레들이 보였다. 약을 줘도 소용이 없네. 하지만 K는 호스를 끌어와 물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일쯤 비가 오면 좋겠는데. 비가 온다 하지 않았나? 생각만 하고는 돌아서는데, 상사화 꽃대 두 개가 보였다. 저건 언제 올라왔지? 그런데 힘이 없어 보였다. 꽃봉오리도 마찬가지 끝부분이 말려들어가고 생기가 없었다. 물을 없나? 올해는 제대로 된 상사화를 보기 힘들겠네. K는 남아있는 커피를 홀짝거리며 처마 아래 그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바람은 조금 시원해진 듯 했다. 이제 곧 가을인가? 그런데 왜 이리 더운 거야. K가 혼잣말을 하는 사이 S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침 일찍 운동을 나갔던 S였다.“상사화 꽃대가 올라왔어. 두 개나”K는 일어나 S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그런데 말라가네. 힘도 없어 보이고.”“물을 주지 그랬어.”S는 상사화를 살피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지친 꽃들, 풀들은 이제야 제 주인을 만났다는 듯 바람을 따라 살랑거렸다.“지금 물 줘.”“해가 있을 때는 물주면 안 된다고 했는데.”“다 죽을 판인데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도 주고 저기도 주고. 돌단풍도. 봐봐. 여기 정상인 게 있어.”K는 감나무와 소나무, 단풍나무를 가리키며 재들은 그래도 괜찮아 보이는 것 아니냐고 대꾸했고 S는 나무들은 뿌리가 깊으니까 아래에 있는 흙에서 물을 당겨올 수 있지만 꽃이나 풀들은 뿌리가 얕아서 조금만 비가 안 와도 힘들다며,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물었다. K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다 물 호스를 쥐었다.“돌단풍, 상사화, 나팔꽃, 고추, 국화만 주면 되는 거지?”“이왕 주려고 마음먹었으면 다 줘. 근근이 버티고 있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니잖아. 알면서 왜 이래?”K는 괜한 고집을 부렸다. 나무 밑 그늘에 있는 애들은 괜찮아 보이지 않냐고, 잔디는 잘 견디고 있는 것 같고, 돌단풍은 원래 낮이면 저렇게 풀이 죽어 있지 않았냐고.“물을 너무 많이 줘도 안 되는 거잖아. 필요한 아이들만 주면 안 돼?”K가 볼멘 목소리로 말을 했다. S는 기가 찬다는 듯 K를 보다 한 마디 내뱉고는 집으로 들어갔다.“아, 마음대로 해.”K는 집으로 들어가는 S의 뒷모습을 보며 잔에 남은 커피를 마신 후 한숨을 잠깐 내쉬고는 따라 들어갔다. S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고 K는 거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지금 뭐하는 거야? 거부권이야? 자기도 누구처럼 거부권이라도 행사하려는 거야?”주방에 들어갔다 나온 S가 말했다.“아니야. 하려고 했어.”K는 현관으로가 긴 팔 작업복을 꺼내 입었다. 모자까지 찾아 썼다.“다 주란 말이지?”“그래,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거야? 정이 많은 사람이 왜 그래? 다 쓰러지고 말라비틀어진 뒤에 물을 주면 뭣해. 거름 만들 거야? 큰 나무들은 괜찮다 쳐. 우리 정원에 큰 나무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럴 거면 전부 벽돌이나 시멘트로 발라버리면 되지. 그렇게는 안 된다고 한 게 자기잖아. 정원이란 것이 나무도 꽃도 풀고 돌도, 심지어 벌레도 있어야 한다고 한 게 자기 아니야? 그런데 왜 그래? 한 두 시간 물주고 와서 샤워 한 번 하면 될 것을.”“알겠어. 알겠다고.”K는 신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수도꼭지를 열고 호스에 있던 더운 물을 모두 빼낸 후 물을 주기 시작했다. 반쯤 주었을 때 S가 물이 담긴 유리컵을 들고 왔다. 시원한 물이었다. K는 땀을 훔친 후 컵을 받아들었다.“물주니까 좋잖아. 집도 시원해지고.”“나무도 줘? 그 아래 그늘에 있는 팔팔한 놈들도?”“뭐라고?”K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은 S가 컵을 받아들며 말했다.“자기도 참, 이럴 땐 애 같아. 어휴. 정말 힘들면 나무는 안 줘도 돼. 재들이야말로 잘 견딜 수 있을 테니까. 지난번에 내린 비로 아직까지는 아래 흙은 촉촉할 테고, 또 다른 것들에게 물을 충분히 주면 그 물이 아래까지 가겠지. 그늘도 그래. 이 땡볕에 나무들이 만들어주는 그늘은 소중하기는 하지. 하지만 그게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더운 날씨를 모두 감당하지는 못해. 잘 알면서. 오늘 자기 좀 이상하다.”물을 다 주고 들어온 K는 샤워를 했다. S와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었고 담배 한 개비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뜨거운 햇살에 금방 땀이 배어나오기는 했지만 바람은 조금 더 시원해진 듯 했다. 늘어져있던 나팔꽃 잎이 조금은 펴졌고, 색을 되찾은 고춧잎 사이 매달린 초록 고추가 반짝였다. 상사화 꽃대는 힘을 찾았는지 내일은 십 센티미터는 더 올라올 듯 보였다. 덩달아 감나무 잎도, 소나무 잎도 더욱 푸르렀다. 끝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08-27

한동훈 리더십은 ‘용산’이 좌우한다

심충택 논설위원 취임 한 달을 넘긴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정치력과 리더십 성적은 어느 수준일까. 나는 비교적 빠른 시간에 친정체제를 구축했고, 거대야당의 입법공세와 친윤(윤석열)계 견제에 맞서 ‘민생이슈’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우수한 점수를 주고 싶다. 정치 입문 8개월밖에 안 된 데다 원외 당대표라는 취약한 입지에서 ‘뇌관’이었던 당 지도부 구성을 속도감 있게 마무리한 것은 정치력과 리더십이 없으면 불가능했다.한 대표는 취임 이후 정치공학적 이슈보다는 정책에 올인했다. 정쟁(政爭)과는 일정부분 거리를 두고 우리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격차 해소’를 비롯해 민생문제에 이슈를 집중시킨 것은 ‘이재명 정치’와 차별화된다. 한 대표가 내건 민생이슈는 모두 시의성과 관심도가 높았다. 금융투자소득세 폐지와 반도체특별법 제정, 간첩법 개정, 취약 계층 전기료 감면, 청년 고독사 문제, 티메프사태 대책, 전기차 안전 대책 등은 모두 민생문제라는 공통분모가 있다. 각종 특검법과 탄핵에 몰두한 민주당과 대비된다.한 대표를 비롯해 국민의힘 지도부가 오는 30일 윤석열 대통령과 만찬을 하면서 다양한 현안을 논의한다니 기대가 크다. 최대 민생현안인 의료공백 사태에 대해 당정이 어떤 해법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한 대표는 지난 20일 박단 전공의협의회 비대위원장과 장시간 면담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지금 추석연휴를 앞두고 대구·경북을 비롯해 전국 대형병원 응급실은 의료진 부족으로 언제 ‘셧다운’ 될지 모르는 상태에 있다. 만약 간호사·의료기사 등이 실제 총파업을 단행하면, 응급실 의료공백 사태는 어떤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정부가 대형병원 응급실 위기를 지금처럼 내버려두면, 자칫 정권위기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 현재 정부의 의대증원 방침에 반발한 전공의(인턴, 레지던트)들이 병원을떠난 지 6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이번 당정회의는 반드시 의료공백 사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 국민은 응급환자가 늘어날 추석 연휴를 앞두고, 끔찍했던 2020년 코로나 악몽을 되살리고 있다.한 대표가 풀어야 할 또 다른 숙제는 윤 대통령과의 관계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은 곳곳에 지뢰가 널려 있다.대표적인 지뢰는 민주당이 ‘제3자 추천 채상병 특검법’을 고리로, 한 대표와 윤 대통령의 갈등을 조장하는 것이다. 민주당이 ‘한동훈 특검안’을 수용하겠다며 압박강도를 높이는 것도 여권분열을 노리는 포석이다. 한 대표로선 윤 대통령과 친윤계가 특검법 발의 자체를 거부하고 있어 운신의 폭이 그리 넓지 않은 상태다.한동훈 특검안에 대한 국민의힘 내부의 부정적 기류는 한 대표가 자신의 리더십으로 해결해야 한다. 한 대표의 리더십과 정치력은 윤 대통령의 신임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대표로선 용산과 소통을 자주하면서 현안을 풀어나가는 방법밖에 없다. 윤 대통령도 건전한 당정관계를 위해 한 대표의 위상을 존중해 줘야 한다. 채상병 특검법으로 인해 윤 대통령과 한 대표 간 갈등이 더 커지면 양측 모두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

2024-08-27

확대되는 교통복지

우정구 논설위원 경북도내 최고 오지인 청송군은 지난해 1월부터 농어촌버스 무료운행을 전국 최초로 도입했다.연령과 소득, 주소지 등 조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청송에서 운행되는 시내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군은 무료버스 전면 시행과 관련, 군민의 대중교통 편의 증진과 줄어드는 농촌지역 인구 감소에 대응하고자 한다고 했다.청송군의 농어촌버스 전면 무료운행이 알려지면서 전국의 많은 지자체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남 완도군은 청송군의 제도를 상세히 벤치마킹한 후 곧바로 시행에 들어가기도 했다.경북에서는 봉화군이 올해부터 관내 농어촌버스 전면 무료운행을 실시했다. 군은 주민의 이동권을 개선하고 공공교통 활성화가 목적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경북 의성군이 내년 1월부터 시내버스 무료 승차제를 시행키로 하고 준비 작업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경북에서는 청송군, 봉화군에 이어 의성군이 세 번째로 전면 무료승차제도를 도입하면서 무료승차제 도입 군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청송군은 무료버스 운행으로 지역민의 시내버스 이용률 증가와 더불어 경제적 성과도 커 긍정적 측면이 많다고 했다. 이용객이 20% 이상 늘고 버스회사 지원금보다 더 많은 경제적 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분석했다.대중교통을 활용한 복지정책은 65세 이상 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대도시 지하철 무임승차제도가 대표적이다. 지하철 없는 농촌의 시내버스 무료승차는 교통복지 측면에서 보면 자연스런 현상일지 모른다.광역단체 중 처음으로 세종시가 내년부터 시내버스 무료화에 도전한다고 하니 교통복지의 범주가 갈수록 커진다. 다만 교통복지 확대에 따른 예산이 얼마나 뒷받침될지는 숙제로 남는다./우정구(논설위원)

2024-08-27

생각의 힘과 성과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인공지능의 탁월한 역량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시대, 역설적으로 인간 고유의 사고력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 최고의 IT 기업과 제조업에서는 면접 자리에서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오곤 한다. ‘맨홀 뚜껑은 왜 둥근가’ ‘뉴욕에 있는 신호등은 모두 몇 개인가’ 등과 같은 물음이다. 지원자의 생각하는 힘을 가늠하기 위함이다. 생각하는 능력, 창의적인 사고력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최고의 경쟁력이라 할 수 있다. 생각의 역량을 기르고 품격을 높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방법 6가지는 첫째, 질문을 바꿔본다. 질문은 생각의 새로운 차원을 여는 효과적인 도구가 된다.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다른 차원, 다른 관점, 다른 관심사를 바탕으로 차별적인 질문을 해본다. 질문의 각도가 달라지면 생각의 각도가 달라지고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생각의 길이 열린다. 둘째, 대상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을 기른다. 통찰력은 대상의 전후, 깊이와 넓이를 한 눈에 굽어보는 고도의 사고력이다. 오랜 경험이 농축되어야 도달하는 경지이지만 적절한 사고력 훈련을 통해서도 연마 할 수 있다. 전체를 파악하는 프레임워크 사고력, 복잡한 구조를 하나로 압축하는 추상적 사고력, 결론을 예견하는 가설적 사고력을 두루 기르고 발휘한다. 셋째, 섬세함과 단순함을 기른다. 섬세함과 단순함은 동시에 추구할 수 없는 미덕으로 보이지만 생각의 실제에서는 함께 발현되곤 한다. 세밀한 관찰과 분석은 실제적 정보를 명확히 파악하게 만들고, 이 과정에서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디테일하면서도 심플한 사고가 생각의 격을 정한다. 넷째, 역 발상의 지혜를 발휘한다. 기발한 아이디어는 보통의 생각을 파괴하고 뒤집고 비트는 의식적인 과정에서 탄생한다. 세상을 바꾼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거꾸로 생각하기’에서 나왔다. 다섯째,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휘한다. 부정적인 사고는 염려와 절망으로 이어진다. 부정적 감정이 압도 할 때는 생각이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사고력은 정지된다. 긍정적인 에너지를 바탕으로 한 플러스 발상법의 유무에 따라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 부자와 빈자의 운명이 나뉜다. 여섯째, 생각의 근육을 키운다. 다양성을 확장시키는 훈련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수용함으로써 사고력의 지평을 확장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습관으로 생각의 근육을 단련한다.기업에서 보면, 구성원의 생각과 성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생각하거나 기존의 정보를 재구성하는 과정이 효과적일 때 좋은 성과를 도출 할 수 있다. 또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여 조직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기회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러한 생각은 제품 개발, 프로세스 개선, 마케팅 전략 등 다양한 분야에서 더 나은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사람의 생각에서 조직의 문화가 달라지고 구성원 생각 수준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한다.

2024-08-27

붓으로 다듬는 먹빛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여름이 길어지고 있다. 더위를 마감한다는 처서(處暑) 지난 지도 한참이고 태풍도 한 두 차례 올라왔지만, 여전히 한낮으로는 노염(老炎)의 기세가 만만찮은 것 같다. 여름날의 끝자락을 잡고 매미는 막바지 울음을 여기저기서 스테레오로 울리는데, 이에 뒤질세라 가을을 마중하는 풀벌레들의 합창은 옥양목을 자르는 가위질 소리마냥 나날이 또렷해지고 있다. 산업의 고도화와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계절의 변곡점도 갈수록 모호해지는 것 같다.유난히 무더웠던 여름날이 무색하리만치 자신의 의지를 불태우며 집념과 몰입으로 자신의 기량을 꾸준히 가꿔온 사람들이 있다. 20대의 청순한 대학생에서부터 80대 노익장의 작가지망생까지 남녀노소 실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붓끝에서 쓰여지고 그려진 한판 작품 겨루기가 펼쳐진 것이다. 이들은 지난 봄, 아니 어쩌면 연초부터 새로운 계획과 목표를 세워 숱한 나날 먹을 갈고 붓을 다듬어 습작과 교정을 거듭한 끝에 자신의 작품세계를 당당히 내보이며 경쟁과 평가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즉, 지역에서 펼쳐진 서예작품 공모전에 출품하여 자신의 노력과 기예를 시험해 본 것이라 할 수 있다.포항지역의 서예가들이 두루 참여하여 서예인구의 저변확대와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을 도모하는 포항서예가협회가 주최한 ‘제32회 전국공모 포항시서예대전’의 작품접수와 심사가 관심과 기대 속에 지난 주 열렸다. 신진작가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서예 공모전은 그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붓글씨 솜씨 발휘와 작품 인정을 받으며 조금씩 서예작가의 면모를 갖춰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예대회를 통해 한글·한문·문인화·캘리그라피 등 다양한 부문의 서예작가가 배출되고 아울러 서예문화의 확산과 발전의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이다.‘마음의 뜨락에 서(書)의 창을 드리워/먹 갈고 붓 잡기 위안으로 삼은 나날/무채색 끝 모를 깊이에 솟아나는 빛 줄기//순백의 설원에 그리움의 점을 찍고/마르고 거친 맥박 애환의 획을 그어/들끓듯 뿜어진 먹빛/눈부신 침묵이어라//잡힐 듯 멀어지는/보일 듯 사라지는/불가해(不可解)의 숨결인가 미몽(迷夢)의 필화(筆花)인가/또 한 겹 껍질 벗기며/먹빛 순수 솎는다’ -拙시조 ‘먹빛 솎기’전문모든 예술과 창작행위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육신의 고단함과 마음의 척박함에도 애써 붓을 잡아 먹물을 찍어 획을 긋고 점을 찍는 이유는 좀더 순수와 궁극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 자신을 가다듬는 곡진한 노력이 아닐까 싶다. 한 발짝 파고들수록 벽에 부딪치고 타성에 사로잡혀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먹빛의 번뜩임을 향해 외롭고도 쉼없는 걸음을 옮겨 나갈 때, 필묵의 메아리가 비로소 기운생동으로 굽이치리라. 눈물을 이겨낸 자만이 인생의 눈부신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뜨거운 여름날에 후끈한 열정으로 서예삼매(?)에 빠져 무수한 붓질과 숱한 파지(破紙)를 쌓으며 전심전력한 결과가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서예농사라는 것이 어찌 일희일비에 그치랴. 필묵의 밭을 일구는데는 부지런함이 지름길이요, 배움의 바다는 끝이 없기에 배를 노저어 가듯이 인내하고 극복하며 꾸준히 나아가야 하리라.

2024-08-27

공무원들 안일한 업무대처로 수해복구 부실 공사 우려

정안진 경북부 지난해 7월 예천군은 기록적인 폭우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수해복구 공사가 시공 중인 가운데 공무원들의 안일한 대처로 부실시공 우려가 높다는 지적이다.당시 산사태 등으로 15명이 사망하고 2명이 실종됐으며 도로(지방도 포함) 66곳, 하천(지방하천 포함) 83곳, 수도시설(지방상수도 등) 34곳, 주택 피해 253동, 농경지 침수 1108㏊ 등의 피해를 입었다. 사유시설 피해도 컸다. 주택 전파·유실 40동을 포함한 주택 피해 253동, 농경지 침수 및 유실 등 1108㏊, 비닐하우스 침수 및 유실 13.9㏊, 각종 농작물 피해 등이 집계되었다.채상병 사망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추석을 앞두고 있지만 아직 많은 이재민들이 컨테이너 생활을 하고 있다.올해 예천군 지역 내 수해복구공사가 252건, 소요예산 1922억 원 정도(예천군 168곳 예산 766억885만6000원, 경상북도 84곳 예산 1155억9285만5000원)를 투입해 공사가 진행 중에 있다. 유례없이 많은 공사가 발주되자 건설업체들은 즐거운 비명소리가 높다. 이때 예천군 일부 기술직 공무원의 현장 관리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8월 초 부실시공 논란이 발생한 대왕보 공사는 감독관청의 안일한 업무대처로 재시공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민이 수차례 지적하였으나 담당공무원은 확인하겠다고 답을 해놓고 공사현장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사이 공사는 진행되었고 마무리 단계까지 왔다. 또 해당공무원은 제보자 개인정보를 업체에 알려줘 말썽의 소지를 남겨두고 있다.현대인들의 정신은 공직자들보다 한 발 앞서고 있다. 예천군 기술직 공무원들의 노고가 많다고 하지만 맡은 일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작품을 만든다는 신념으로 공무수행에 임하는 것이 혈세 낭비를 막는 길이다.특히 각 언론사에서 군 홍보 기사가 게재되면 행정 내부망 게시판에 기사를 공유하여 공무원들에게 홍보를 하지만, 군정의 비판기사가 게재되면 게시판에 올리지 않고 빼는 것으로 알려져 공무원들의 알권리를 묵살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안전재난과, 건설교통과, 농촌활력과, 도시과, 건축행정 등 각 부서에서 수해복구공사가 진행 중에 있어 각 실과 기술직 공무원이 행정 내부망 게시판을 함께 공유해 잘못된 점을 지적한 기사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반성하면서 현장을 다시 한번 점검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군수와 부서장들은 기술직 공무원들이 주인의식을 가졌을 때 예산낭비와 부실공사를 막는다는 것을 직시하고, 다시 한 번 수해복구 공사 현장을 관리 감독하는 기술직 공무원들에게 책임의식 소양교육을 강화시켜야 한다./ajjung@kbmaeil.com

2024-08-26

정치의 존재이유를 명심하라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정치인은 ‘정치의 존재이유’를 제대로 인식하고 정치를 해야 한다. 정치는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기 때문에, 그 존재이유는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이해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해 나가는데 있다. 정치인에게는 특별히 균형감각과 책임의식이 요구되는 까닭이다.그럼에도 정치인들은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진영정치·부족정치·팬덤정치·방탄정치 등 특정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는 ‘패거리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행정권력과 입법권력을 나눠 가진 여야가 상대를 죽이고 나만 살겠다고 야만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정치인들이 ‘한 나라 두 국민’을 만들어놓고서도 잘못을 모르니 어이가 없다.‘정치의 실종’은 ‘진정한 정치인(statesman)’의 부재를 의미한다.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무엇보다 ‘권력만 탐하는 정치꾼(politician)’들의 성찰과 반성이 시급하다.권력은 마약이다. 마약에 중독되면 초심을 잃고, 초심을 잃으면 정치괴물이 된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항상 자신의 정치행태를 성찰·반성·혁신해야 한다. 자기성찰에는 인색하고 상대비판에만 열을 올리는 ‘정치꼰대들’은 결코 정도정치를 할 수 없다.정치인에게 중요한 것은 ‘확고한 소명의식’이다.베버(M. Weber)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에게는 ‘열정·책임의식·균형감각’이 필수라고 했다.‘열정’은 대의(大義)에 대한 헌신이고, ‘책임의식’은 권력의 통제와 조절에 필요하며, ‘균형감각’은 열정과 책임의식 사이의 균형을 말한다.‘서로 다름을 인정’하는데 필요한 ‘관용과 자제’, 그리고 ‘갈등의 통합’에 필요한 ‘대화와 타협’이 민주정치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정치인이 국민에 대한 ‘책임윤리’는 없고 자신의 ‘신념윤리’만 고집하면 ‘정치가 전쟁’이 된다.정치인에게 권력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된 정치꾼들은 권력이 ‘국민을 위한 정치의 수단’이 아니라 ‘자신이 누려야 할 힘’이라고 착각한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은 ‘자기 멋대로’가 아니라 ‘국민 뜻대로’ 행사되어야 한다. 물론 이때의 국민은 ‘내편 국민’이 아니라 ‘전체의 다수 국민’이다. 권력에 연연해서 비굴하게 패거리정치에 줄서지 않았던 정병국(5선)·김세연(3선)·표창원(초선)의 경우처럼, 아니라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물러나 후배에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진정한 정치인은 ‘가물에 콩 나듯’하고, 권력에 혈안이 된 정치꾼들만 득실거리니 정치가 실종된 지 오래다. 정치를 하지 않는 국회의원들에게 1억5000만원의 연봉에 180여 가지의 특혜를 주고 있으니 말이 되는가.무노동 무임금을 적용해야 마땅하다. 말기암 투병 중인 팔순 투사 장기표가 “정치가 도덕성과 인간성을 상실하면 나라는 망한다”고 한 충고를 명심하라. 정치를 잃어버린 정치인들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은 왜, 무엇을 위해 정치를 하는가? 권력 때문에 정치를 잃어버린 당신이 정말 쪽팔리지 않는가?

2024-08-26

김정은의 흡연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화기(火氣)로 한담(寒痰)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안온하게 잘 수 있었다.”담배는 조선 중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조선 22대 왕 정조의 ‘담배 사랑’은 대단했다. 가슴을 답답하게 만드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위와 폐를 편안하게 해 불면증을 없애주는 게 담배라고 믿었다.당시 담배는 ‘남령초’라 불렸다. 담배의 유래와 활용법이 과거시험 문제로 출제됐고, 흡연에는 반상(班常)의 구분도, 남녀노소도 없었다.그로부터 수백 년이 흘렀다. 오늘날 담배는 ‘공공의 적’ 수준으로 그 지위가 추락했다. 흡연자가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진다.게다가 거의 ‘공포스럽다’ 할 수준의 흉물스런 사진이 담뱃갑마다 새겨졌다. ‘이런 끔찍한 꼴이 될 텐데, 그래도 피울래?’라며 끽연자를 겁박한다.만약 사무실이나 버스, 식당 안에서 담배를 꺼내 문다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가 예닐곱 살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실에서 담배를 피운다면? 애들 부모에게 몰매 맞을 일이다.남한에선 불가능한 흡연 형태가 북한에서 벌어진 모양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평양에서 수재민 아이들의 수업을 참관했는데, 그 자리에 담배와 재떨이가 있었다고. 그는 열 살 안팎으로 추정되는 딸 곁에서도 담배를 피운다고 알려졌다.지난 2020년 북한은 금연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큰 권력을 가진 자들은 중세의 왕들처럼 법 위에 군림하려는 행태를 보인다. 법은 힘없는 자들이나 지키는 것인가? 김정은 위원장은 전제국가(專制國家)의 통치자 정조 흉내를 내는 걸까?/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08-26

‘탄소정보공개 프로젝트’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8월 25일 현재 기상청 기상자료개방포털에 따르면 이달 1~24일 전국 폭염일수는 14.8일로 집계되었다. 최근 10년간 전국의 8월 폭염일수 집계결과 순위는 2016년이 16.6일로 1등이고 올해가 2등이다. 1등과 차이가 불과 1.8일인데 아직도 8월이 1주일이나 남아있어서 아마도 올해가 1등으로 올라설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전국이 폭염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최근 그린피스 동아시아가 발표한 국내 주요 25개 도시의 최근 50년(1974~2023) 동안의 여름철 폭염 발생일수, 지속도 등의 분석결과는 놀랄 만하다.지난 50년간 25개 도시 평균 폭염일수(5~9월)는 계속 증가하여 최근 10년(2014~2023) 51.08일로 20년 전(2004~2013)의 20.96일보다 2배 이상 증가했다. 2일 이상 연속 폭염발생 일수도 최근 10년이 40.56일로 20년 전 14.68일에 비해 무려 3배 정도 증가했다. 압권은 도시별 통계인데 최근 10년간 폭염일수가 가장 많았던 도시는 구미(106일)이며, 그 뒤를 이어 광주(105일)와 대전(96일), 대구(83일), 포항(81일) 순이었다.전국 분석 대상 25개 도시에 포함된 대구시와 경북도의 구미, 포항 등 3개 도시 모두 5위 이내 순위에 포함된 것이다. 그린피스 동아시아는 이번 폭염 리서치 결과가 폭염이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안토니우 쿠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말을 인용하여 전세계 정부가 즉각적인 탄소감축을 위한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고 경고했다.그래야만 지금까지 ‘지구온난화(Global Warming) 시대’에서 상상하기 싫은 ‘끓는 지구(Global Boiling) 시대’로의 변화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모든 지방정부와 도시가 이제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해야만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최근 글로벌 기후에너지 시장협약(GCOM, Global Covenant of Mayors for Climate Energy)으로 시행하는 ‘탄소정보공개 프로젝트’(CDP, Carbon Disclosure Project)가 주목받고 있다.‘GCOM’은 기후변화 대응 및 에너지 전환에 대한 세계 최대 지방정부 공동 기후행동 추진계획(이니셔티브)으로 2017년부터 시작되었다. 2024년 8월 기준 세계 140여 개국 1만3500여 개의 지방정부가 참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서울, 대구, 경기도 등 7개 광역지자체와 서울 도봉구, 수원시, 포항시 등 20개 기초지자체가 참여하고 있다. 대구시는 2021년부터 ‘CDP’에 참여하여 2022년에 최고 등급인 A점수를 획득하였고, 2023년과 2021년에는 바로 아래 단계인 A- 점수를 획득하였다. 이렇게 대구시는 ‘CDP’를 통해 온실가스 감축과 폭염적응 정책의 글로벌 리더십 단계를 계속 유지하여 최대 폭염도시에서 물러나고자 하며, 실제로 그러한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구미시를 비롯한 대구경북의 많은 기초지자체들도 GCOM ‘탄소정보공개 프로젝트’와 같은 지방정부 주도의 탄소감축 행동에 적극 동참할 필요가 있다.

2024-08-26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

김규인 수필가 지난해 경남 김해에서 여중생을 집단 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중학교 재학생과 졸업생들인 가해자가 2주 넘는 기간 폭행했다. 담뱃불로 지지거나 오물을 먹이는 행위로 사회의 우려를 자아냈다. 범죄 연령은 낮아지고 폭행 장면이나 신체를 촬영하여 유포하는 등 죄질마저 나쁘다.50대의 사회인이 허위 예약하여 음식점에 해를 끼치는 일도 발생했다. 붙잡힌 후에 단순히 골탕을 먹이고 싶어서 했다는 변명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다른 여성은 음식을 엉터리 주소로 배달시키고 배달되지 않는다고 항의 전화까지 한다. 모두가 힘든 시기에 장사하는 사람의 아픔은 보이지도 않는지.사는 게 힘들다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라면 하나 산다고 무시하는 것 같아서, 감옥에 가고 싶어서, 아무 이유 없이 남에게 해를 가하거나 사람을 죽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60대 남성이 6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도 뚜렷한 이유도 없다. 어쩌면 우리의 일이 아니라고 방치하는 사이 폭력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비슷한 여건에 처한 사람들이 따라 하는 듯한 느낌마저 지울 수가 없다. 나라가 경제적으로 더 부유해지는 건 맞는데 우리 사회는 왜 이렇게 삭막해지는 걸까.사회는 급속도로 발전한다. 인공지능의 발달은 사람들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많은 사람이 하던 일을 인공지능이 대신한다. 같이 모여서 일하거나 회사에 출근하기보다 재택근무 하는 사례가 늘어난다. 직장인이 사회의 구성원임을 느끼기보다는 개인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어디 일만 그런가. 밥을 먹는 일도 노는 것도 혼자 하는 것을 사회는 부추긴다. 회사는 끊임없이 1인용 식사 거리를 제공하고 게임 업체는 집에 틀어박혀서 혼자 노는 상품을 수도 없이 개발한다.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일도 식사하는 일도 택배회사는 상품으로 만들어 개인의 삶을 돈으로 바꾼다. 시장에서 사람을 만나고 에누리를 하고 다양한 삶을 만나는 기쁨을 우리 사회는 상품화하기에 바쁘다.살아가는 데 과정은 없고 결과만 남는 일상이 계속된다. 사람을 네모난 공간에 가두어 사람 사이의 정이 사라지는 시대다. 이런 과정에서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은 겪는 힘든 시기에 사람을 붙잡아 주는 안전장치는 우리 사회에 이미 없다. 따뜻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도 어머니의 젖꼭지를 빨며 인간의 정을 느끼는 시간도 사라졌다.그런 가운데 우리는 스스로 괴물이 되어간다. 정녕 방법이 없는 것일까. 사람이 사람의 따스한 손을 잡고 희망을 이야기할 수는 없는가. 지금도 찾아보면 세상은 따뜻하고 착한 일을 하는 사람도 많은데 말이다. 왜 따스한 이야기는 자꾸 사라지는 것일까. 사람의 삶마저 자극적인 뉴스로 돈을 벌려는 사람들 때문은 아닐까.정치인들이 국민의 삶은 모른다고 자기네들만의 다툼을 벌이더라도 우리는 달라야 한다. 우리는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고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기회를 자주 만들고 손에서 손으로 따스함을 전할 수도 있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우리를 위한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 인간의 체온을 느낄 수 있도록.

2024-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