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시절을 어느 장소로 기억하기도 한다.
2002년부터 2004년까지의 시간은 빨간 벽돌건물과 그 외벽을 타고 올라가던 담쟁이덩굴이 있던 고등학교 교정으로 기억한다. 그 다음 몇 년은 취하고 휘청이다 토하고 소리치던 대학교 앞 술집 골목으로 기억하고, 또 어떤 시절은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 나던 어느 지하 공연장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마 꽤 긴 시간, 그러니까 2012년 봄부터 약 십 년 동안의 시절은 내게 ‘토끼굴’이라는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토끼굴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할까. 술을 주로 팔았다는 이유로 ‘바’라고 하자니 분명 누군가는 커피를 주문해서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고, 때로는 재즈부터 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라이브 연주가 이루어지기도 했던 그곳을 말이다. 토끼굴은 2012년 초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나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 해 5월. 토끼굴의 사장 수진이 누나와 서로 인사를 나누다, 나는 시를 쓰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한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무척 반가워하던 기억이 난다. 누나는 그때부터 마지막까지 토끼굴을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예술가들이 드나들며 서로를 존중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말이 시인이고 싱어송라이터이지 시집 한 권, 정규앨범 한 장 없었던 내게 예술 하는 친구는 언제든 환영이라며 언제든 놀러오라던 그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날부터 토끼굴은 내게 단골집을 넘어서 집이었고 학교였고 놀이터였다. 토끼굴에는 크고 멋진 바 테이블이 하나 있는데 언제 가도 거기에는 수진이 누나와 정겨운 얼굴 몇몇은 꼭 있었다. 모르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자주 있었는데 그들 역시 예술가이거나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예술을 모르더라도 최소한 예술과 인간에 대한 존중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쉽게 말을 트고 친해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예술과 인간에 대한 존중조차 없는 사람은 수진이 누나가 반드시 쫓아내곤 했으니까. 거기서 만난 멋진 사람들 하나 하나가 다 삶의 교과서였고, 누나와 그들이 걸어둔 플레이리스트도 내겐 음악 교재였다.
언젠가 내가 드디어 끝내주는 노래를 한 곡 썼다며 달려가 거기 있던 기타를 부여잡고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방금 쓴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바로 지금까지 내 대표곡으로 사랑받고 있는 ‘타임머신’이었다. 첫 책이 나왔을 때 책을 받자마자 단숨에 달려갔던 곳도 토끼굴이었다. 출간일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책을 토끼굴의 책꽂이에 꽂아두는 대신 축하주를 얻어먹었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만큼 내게 특별했던 공간이었던 토끼굴은 시간이 지나 은근히 입소문을 타게 되었고, 모두에게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가수 강산에 형님 앞에서 타임머신을 부르고 칭찬을 받는 바람에 밤잠을 설쳤던 일, 술에 잔뜩 취해 형은 진짜 최고라고 내가 술 한 잔 사야겠다고 기어이 하림 형님에게 술을 사고 나중에 다시 만나 훨씬 비싼 답례주를 얻어먹었던 일, 장기하 형님과 시에 대해 이야기 했던 마법같은 일들이 모두 토끼굴에서 일어났다. 어느 밤엔가는 해외 뮤지션인 Damien Rice가 술을 마시다 가기도 했고, 또 언젠가는 토끼굴에 놀러 온 Rachael Yamagata가 연주를 한다는 다급한 연락을 받기도 했다.
10년 정도 화려하게 빛나던 토끼굴의 불빛은 2022년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으로 인해 꺼지게 되었다. 영업을 종료한 후 수진이 누나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방치되었던 그 공간을 뒤늦게 정리하게 되었다는 연락을 며칠 전에 받았다. 누나는 내게 기타를 가져가라고 했다. 오래 전 술값이 없던 어느 날 공짜 술을 얻어먹기 미안해서 토끼굴에 내가 기증했던 그 기타. 거기 머물면서 수많은 뮤지션들과 노래하던 그 기타를 돌려받게 된 것이다. 누나는 기타 뿐 만 아니라 몇몇 음향장비, 그리고 개봉하지 않은 술들까지 선물해주었다. 짐을 챙기면서 횡재했다는 기분보다 정말로 토끼굴과 이별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사는 동네에서, 그리고 어딘가로 여행을 가서도 항상 괜찮은 바를 검색하곤 한다. 그러나 어디에도 내 마음에 쏙 드는 그런 공간은 없다. 사실 나는 오랫동안 또 다른 토끼굴을 찾고 있지만 토끼굴 같은 곳은 토끼굴 밖에 없었고 이제 그곳은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있고 그런 장소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인정하게 되었다. 이 글은 내가 사랑했던,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 장소에 대한 마지막 선물이다. 더 오래, 잘 기억하기 위해 몇 자 적어보았다. 참 많이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