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켜는 일이 이렇게 피로한 줄 몰랐다. 나는 단지 쉬고 싶을 뿐이었다.
언어와 씨름하느라 정신이 쏙 빠진 끝에 숨을 고르기 위해 화면을 열었는데, 쏟아지는 뉴스가 밀물처럼 덮쳤다. 누군가의 죽음, 누군가의 추락, 누군가의 분노. 정치는 혼란스럽고 범죄는 쉴 틈이 없다. 이 모든 일이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젠 지겹다고 혀를 찰 법도 한데, 번번이 걸려 넘어지고 만다.
뉴스를 읽다 보면 슬픔보다 피로가 먼저 찾아올 때도 잦다. 하나하나가 고통의 파편처럼 느껴지지만 낯설지 않은 충격이다. 언제나 고통은 타인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그것은 멀리서 벌어지는 국지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 뿌리는 보이지 않는 구조의 가장자리에서 조용히 이어져 있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그 앞에서 어떠한 빚을 느낀다. 누군가 내게 책임을 강요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 정말 책임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나와 무관해 보이지만 무관하지 않은 일. 어쩌면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고요가 누군가의 침묵과 상처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닐까?
예소연 소설, ‘영원에 빚을 져서’는 이런 부분을 매만진다. 이야기는 친구의 실종 사건을 접한 이들이 그를 찾아 나서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들은 대학 시절 캄보디아 프놈펜이 있는 바울 학교에서 봉사 단원으로 만나 친해진 사이다. 세 명의 친구는 타국에서 생활하며 도움이라는 명목 아래의 타자성을 느낀다. 나아가 함께 있는 행위 자체가 반드시 이해나 연대와 같지는 않다는 사실, 삶의 조건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은 때때로 끝까지 공유되지 않는다는 감각을 경험하게 된다.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그들은 자신이 보았던 것들과 끝내 마주하지 못했던 것들을 되짚기 시작한다. 이러한 질문은 그들을 다시 움직이게 한다. 지나갔다고 여겼던 슬픔은 어딘가에 남아 있으며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부채로 삶에 스며 있었다. 소설은 바로 그 잔류하는 감정의 흔적을 섬세하게 포착해 낸다.
소설 속 인물들이 인터넷 뉴스로 세월호 참사를 접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이 비극적인 소식에 참담함을 느끼는 이들 앞에서 캄보디아 학생은 꺼뻑섬에서 벌어진 압사 사건에 관해 말한다. 물축제에서 너무 많은 인파로 사람들이 다리에 끼여 죽은 사건이었다. 그들의 죽음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고 애도를 공유하려는 순간, 한 친구가 말한다.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뭐 그런 죽음이 다 있어.”
소설이 은밀하게 건드리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무수한 고통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에 경계를 둔다. 어떤 죽음은 우리를 멈춰 세우고 어느 죽음은 스쳐 지나간다. 나와 얼마나 가까운지, 얼마나 자극적인지, 또 얼마나 자주 보았는지에 따라 경중을 나누게 된다. 바라보는 일은, 그래서 더 조심스럽다. 본다는 것은 누군가의 고통을 알아주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 끊임없이 묻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는 일은 불가능하다. 매일 벌어지는 사건에 일일이 응답하기는커녕 바라보는 일조차 때로는 벅차다. 우리 일상은 그 자체만으로 숨 가쁘고 삶을 꾸려가는 일만으로 충분히 위태롭다.
인터넷을 종료하고 눈앞에 까만 화면이 떠오른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라면 얼마나 편할까. 뉴스 기사의 마침표를 보고도 나는 끝내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 기억하는 방식으로 조금이나마 빚을 갚는다는 생각 때문일까.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라도 응답하자는 다짐. 그것은 죄책감이라기보다는 어떤 의무에 가깝다. 인간으로 최소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증거이자 바라보는 일부터 출발하는 작고 조용한 윤리.
정말 두려운 것은 무시무시한 사건이 벌어지는 세계 자체가 아니라, 그 반복에 익숙해진 마음이다. 고통 앞에서 더 이상 멈추지 않을 때, 우리는 가장 깊은 윤리적 위험 속에 있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가 자신의 연인에게 말한 것처럼. “가장 끔찍한 게 뭔 줄 알아? 그건, 사람의 마음을 찢어놓는 게 아니라-마음은 찢어지라고 있는 것이니까-돌로 만들어버린다는 거야.”
숨을 고르고 멈춰 선다. 스쳐 지나가는 고통 앞에, 너무 늦게 도착한 슬픔 앞에, 끝까지 닿을 수 없는 고통일지라도 잠시 머무는 일 정도는 가능하니까. 그렇게 조용히 바라볼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그 응시가 빚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유일한 행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