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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탄소중립 피할 수 있는 기업은 없다

위현복 (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정부는 지난 3월 21일 ‘제1차 국가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2023~2042)’을 발표하면서,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 달성을 위한 세부 이행 방안도 제시했다.지난 2021년 문재인 정부가 2030년 국내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기준 40% 줄이겠다고 발표한 NDC의 실행계획이다. 핵심내용은 우리나라가 줄여야 하는 국가 온실가스 감축 총량은 40%로 유지(IPCC 협정상 한번 설정한 NDC는 후퇴할 수 없다) 하되, 기존 산업부문 탄소 감축 목표(14.5%·3천790만t)를 11.4%(2천980만t)로 줄이는 것이다. 2021년 NDC 발표 당시에도 에너지, 건물, 수송 등 6개 분야에서 산업부문 감축률이 가장 낮았었는데 이번에 다시 3.1%나 줄인 것이다. 산업계는 이번에 5% 감축을 ‘현실적인 감축량’이라고 주장했는데, 국무총리가 설득해서 그나마 11.4%로 합의했다는 후문이다. 산업계에서 줄여준 810만t은 에너지(전기)분야에서 400만 t, 해외부문과 CCUS(탄소 포집 활용, 전장기술) 등에서 410만t을 줄일 계획이다.기후경제학자인 서울대 홍종호 교수는 “2030년이 되면 국제무역규범이 기존의 ‘전통적 WTO 자유무역규범’에서 ‘탈탄소 무역규범’으로 완전히 옮겨질텐데 이러한 국제 추세에 맞춰 기업 경쟁력 재고를 위해서라도 최소한 14.5% 감축으로 원상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지난 3월 20일 정부의 기본계획 발표 하루 전날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6차 종합보고서에서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지금 당장 행동하라”는 긴박한 메시지를 내놓았다. 글로벌 기업 구글은 벌써 전력 100%를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여 RE100을 달성했는데, 한국 기업 네이버는 0.64%만 재생에너지로 조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글로벌 기업과 토종 기업 간의 재생에너지 경쟁력 수준이다. 국내 대기업들은 ‘탈탄소 무역규범’에 대비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이제 본격적으로 투자를 해야 하는데 정부의 산업부문 온실가스 감축 후퇴 정책은 재생에너지 투자를 축소해도 된다는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것이어서 심히 우려된다.RE100 달성은 글로벌 기업들간의 피해 갈 수 없는 국제적 약속이다. 국가에 따라 에너지 믹스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산업계에 대한 탈탄소 부담이 달라질 수 있지만, 글로벌 기업 경쟁력에서는 기준이 다를 수는 없다. 나라에 따라 NDC에 원자력이 포함되기도 하고 포함 안 되기도 하지만 RE100에 원자력 에너지는 포함되지 않는다. 순수 재생에너지만 포함된다. 2025~2026년부터 시행되는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도 눈앞으로 다가왔다. 탄소국경조정제도는 철강제품, 유기화학물, 플라스틱 등 9가지 고탄소 배출 제품에 부과하는 일종의 탄소세다.무역이 국가 경제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제조업 강국 대한민국’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장벽이다. RE100은 우선 자체 재생에너지 생산으로 충당하고 부족한 소비전력은 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REC)를 구매해서 채워나가야 한다. 원활한 국제 교역을 위해서는 산업계가 최대한 재생에너지 사용 비중을 높이도록 해야 하는데도 정부가 잘못된 신호를 산업계에 보냄으로써 산업계의 경쟁력을 후퇴시키고, 재생에너지 기반 제조업 강국으로 도약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라는 조바심도 든다.필자가 대구, 구미 지역 기업들을 대상으로 RE100 컨설팅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대구의 3공단에 있는 수출 중심의 안경 공장이나 애플에 납품하는 IT기업은 RE100에 굉장히 적극적이다. 50KW, 100KW 정도라도 태양광 설치를 한다.하지만 성서산업단지의 내수용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태양광을 설치하면 RE100을 달성하고도 남는데도 필요성을 못 느껴 미적거리는 것이 현실이다.구미산업단지의 삼성, LG에 납품하는 기업들은 재생에너지 생산 여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태양광 설치를 거부하고 있다. 외관도 안 좋고, ‘정부가 어떻게 해주겠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이런 상황에서 산업부문 온실가스 감축을 후퇴시키는 정부 정책에 대해 기업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기업들은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재정부 로비 대신 당장 공장 지붕이나 공터, 주차장에 태양광을 설치해서 현재 가능한 20~30% 정도라도 재생에너지 공급에 앞장서야 한다.탄소 감축과 재생에너지 확대는 거창한 계획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곳에서 실천하면 된다. 실천캠페인에는 가장 급한 산업계가 선두에 서야 한다. 국민들도 내 집 옥상이나 내가 다니는 회사 옥상 등에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하는 운동에 적극 나서야 한다. 정부는 세금 감면 등 각종 인센티브 제공을 통해 캠페인을 독려해야 한다.탄소 감축은 어차피 맞아야 할 매다. 지속 가능한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인 것이다. 피해 갈 길은 없다. 정부는 좀 더 타이트한 로드맵과 더 적극적인 정책을 수립해서 산업계가 속히 RE100 달성을 이행하도록 해야 한다.

2023-04-09

어깨 통증 잡는 맞춤형 운동 치료

박성률 트레이닝과학연구소장동국대 의과대학 연구초빙교수 요즘같이 일교차가 심한 환절기에는 관절 통증이 자주 나타나거나 악화하기 쉽다. 관절 통증 가운데 어깨 통증은 우리나라 성인의 60% 이상이 평생 한 번 이상 경험할 정도로 흔한 근골격계 증상이다. 하지만 잘못된 정보와 이해부족, 막연한 견관절의 통증에 대한 두려움으로 적절한 시기에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십상이다.어깨는 우리 몸에서 유일하게 360도 회전하는 관절이다. 그만큼 불안정한 부위이며 손상되기도 쉽다. 나이가 들면서 힘줄이 약해지고, 운동이나 컴퓨터, 스마트폰 등 전자 기기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잘못된 자세 등 다양한 요인으로 어깨 통증이 생긴다. 나이가 들어 어깨 통증이 심해지면 자연스럽게 오십견으로 단정하지만 같은 어깨 통증이라도 회전근개 파열, 석회화 건염 등 다른 질환일 수 있다.회전근개 파열은 어깨 통증의 70% 정도를 차치할 정도로 흔한 질환이다. 최근에는 골프 등 스포츠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환자가 증가하는 추세다. 회전근개는 어깨를 감싸고 있는 극상근, 극하근, 소원근, 견갑하근과 같이 4개의 힘줄을 말하는데, 어깨 안전성, 운동성, 유연성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이 힘줄이 여러 원인에 의해 약해지거나 찢어지면서 발생하는 것이 회전근개 파열이다.대개는 과도한 어깨 사용으로 인한 힘줄 파열이 원인인데, 증상은 본인 스스로 아픈 팔을 움직여 보거나 정상적인 팔의 도움을 받아 아픈 팔을 앞으로나 옆으로 들어 올릴 때 극심한 통증과 운동 제한을 보이는 오십견과 다르다. 회전근개 파열은 팔을 움직여 보면 억지로 움직여지는 어느 한순간 심한 통증을 느끼거나 어디엔가 걸리는 듯한 소리나 느낌을 받는다. 또 팔을 벌릴 때는 힘이 없는 것을 느끼게 된다.회전근개가 완전히 끊어졌다면 찢어진 힘줄을 관절에 붙여주는 수술적 치료가 불가피하지만, 회전근개 파열이 생겼다고 무조건 수술할 필요는 없다.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부분 파열이라면 적절한 약물 치료와 스트레칭이나 근력 운동으로 증상이 호전될 수 있다. 운동 치료는 비수술적 요법 중 부작용이 가장 적게 나타나며, 근육 상태의 회복이 운동의 목표가 되므로 근본적인 치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어깨 통증 완화를 위한 운동 치료는 운동 유형, 빈도, 시간, 강도 설정이 중요하다. 운동 유형은 약으로 치면 성분과 같다. 운동의 종목일 수도 있고, 동작일 수도 있다. 크게는 유산소, 유연성, 근력 운동이 있고, 각 운동은 신체 부위와 근육에 따라 종목과 동작, 기구 등이 있다. 빈도는 약의 복용 횟수다. 하루 몇 번 또는 일주일에 몇 번인지를 의미한다. 시간은 약의 총 복용량이다. 운동에서는 지속시간을 의미하여 보통 분 단위로 설명한다. 강도는 약 성분의 함량이다. 운동을 얼마나 힘들게 또는 편하게 할 것인지를 말한다.어깨 통증 완화를 위한 운동 유형으로는 스트레칭 등 신전운동과 근력 운동이 좋다. 스트레칭을 몸풀기로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유연성은 체력요인 가운데 중요한 항목이다. 특히 재활에서는 아픈 부위가 정상적인 부드러움이나 가동범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스트레칭이 필요하다. 그리고 벽 밀기나 팔굽혀펴기 등 자기 체중을 이용하거나 고무밴드로 하는 근력 운동도 함께하는 것이 효과적이다.다양한 매체에서도 어깨에 좋은 운동 방법은 추천되지만, 얼마만큼 자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는 부족할 때가 많다. 운동을 통해 치료 효과를 얻기 위해서 똑같은 형태의 운동을 한다면 운동 빈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스트레칭 운동은 하루에 3회 이상을 해야 하며, 근력 운동의 경우 본인 체중이나 고무밴드를 이용한 운동은 하루 1~2회 정도가 적합하고, 바벨 등 무거운 중량으로 하는 웨이트 트레이닝은 주 2~3회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근육의 양을 늘리기 위해서는 중량은 비교적 높이고 횟수는 적게 하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하지만 통증 완화 등 재활에는 다르다. 무겁게 하는 근력운동은 주로 표면의 큰 근육의 발달을 유도하지만, 심부근육의 발달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통증은 주로 심부근육에서의 문제이며, 심부근육은 사이즈도 작고 상대적으로 적은 힘을 낸다. 통증으로 인해 힘을 잘 못 쓰는 상태라면 더욱 무게를 낮출 필요가 있다.스트레칭도 강하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완시키고자 하는 부위가 당기기 시작하는 각도에서 멈추어 날숨과 들숨을 4~5회 길게 반복하며, 2~3셋트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러므로 신전운동이든 근력운동이든 가늘고 길게, 그리고 자주하되 통증이 없는 범위에서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어깨 통증은 잘못된 진단과 처치로 어깨 힘줄이나 관절 손상을 부추길 수 있기에 전문가의 검사와 진단이 중요하다. 특히 어깨 근력과 관절 운동 능력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 치료가 동반돼야 효과적인데, 재발 가능성이 있는 만큼 정기 검사를 받으며 본인의 건강과 체력 상태에 맞는 운동을 꾸준히 하는 게 바람직하다.

2023-04-09

TK 신공항 특별법 드디어 13일 처리되나

국회 법사위 문턱에 걸린 대구경북(TK) 신공항 특별법이 오는 13일 열리는 국회 본회의에서 마침내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 여야가 동시 처리하기로 약속한 광주 군공항 이전 특별법이 지난 5일 국방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TK신공항과 광주신공항 특별법은 다음 주(10~12일) 열리는 법사위에 상정된다. 두 특별법 모두 쟁점사항에 대한 여야 조율작업을 거쳤기 때문에, 국회 본회의 통과는 무난할 것으로 예측된다.TK신공항 건설사업은 군위 소보면과 의성 비안면 일원에 중·남부권 항공물류 중심공항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전부지인 대구시 동구 지저동 일대 K2부지를 대대적으로 개발하는 사업도 포함된다. 신공항 사업비는 12조8천억원으로 추산되며, 2025년 착공해 2030년에 완공된다. 대구시와 경북도는 그동안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TK신공항이 지역 균형발전과 국가안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국비지원을 담은 특별법이 꼭 제정돼야 한다는 논리를 펴왔다. 수도권에서는 ‘영남과 호남 공항 바꿔먹기’라는 비판이 나오지만, TK신공항과 가덕도·무안 신공항은 유사시 인천공항을 대신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지역격차를 해소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TK신공항 특별법에는 ‘기부 대 양여’의 특례에 따라 신공항을 건설하되 초과한 비용은 국가 재정을 투입한다는 내용과 함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종전 용지 개발 사업의 조세 및 부담금 감면 등의 핵심 내용이 담겨 있다. 신공항 사업이 계획대로 추진되면 신공항 주변과 종전부지(K2)에 새로운 대규모 경제권이 형성된다. 대구시와 경북도는 공항 주변에 200만평 규모의 물류산업단지를 조성하고 이곳에 반도체, 인공지능 등 첨단산업을 유치할 계획이다. 그야말로 초광역 신공항 경제권이 새로 조성되는 것이다.홍준표 대구시장이 TK신공항을 두바이처럼 24시간 운항이 가능한 공항으로 건설한다는 목표를 정한 것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시차가 많이 나는 미국이나 유럽의 수출입 물류를 확보하려면 ‘잠들지 않는 공항’이라는 차별화 전략이 꼭 필요하다.

2023-04-06

연금개혁, 하기 싫어도 해야

홍석봉 대구지사장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많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또 배움의 즐거움을 떠나 일단 너무 싫어한다. 아이들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 동기 부여가 중요하다. 그래야만 스스로 공부한다. 싫다고 안 할 수 없는 것이 공부다. 개인의 장래와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그렇다.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참모들에게 “국민을 위해 싸울 때는 싸워야 한다”는 말을 했다. 기득권 혁파 및 노동·교육·연금 등 3대 개혁 완성을 언급하면서 한 말이었다. 집권 2년 차에 들어선 윤 대통령이 저항 세력에 굴하지 않고 국민과 약속한 주요 개혁 과제를 흔들리지 않고 추진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됐다.윤 대통령은 “국민을 약탈하는 이권 카르텔과 일전불사의 각오로 싸워야 한다. 그것이 국민을 위한 길”이라고도 말했다. 방해 세력과는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다짐이다.지난달 말 예정됐던 2분기 전기·가스 요금 인상 발표가 전격 취소됐다. 국정 지지율 하락에 놀란 여당이 발표 선언 이틀 만에 전기·가스 요금 인상을 뒤집었다. 요금 인상을 정치가 막았다.문재인 정부의 포퓰리즘을 비난할 때가 언제인가 싶다. 빚더미에 올라선 한전이다. 정상화는 점점 멀어져간다. 요금을 인상해야 한다. 그냥 뒀다간 더 큰 부담으로 돌아온다.한일 관계 정상화는 북핵 등 동북아 정세에 대처하기 위한 결단이었다. 국내외의 부정적 여론을 무릅쓰고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론은 좋지 않다. 현 정부의 딜레마다. 거기다가 일본 측의 ‘독도’ 발언으로 일이 더욱 꼬였다. 다시 키를 잡고 가야한다. 기왕에 빼든 칼이다. 후퇴는 곤란하다.국민연금 개혁 방치는 대표적인 포퓰리즘으로 꼽힌다. 국민연금은 정치가 개입하면서 수익률 세계 꼴찌라는 터무니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연금제도를 개혁하지 않으면 국민연금 제도는 지속될 수 없다. 우리의 미래가 불안해진다. 출산율과 국민연금 기금투자 수익률을 대폭 올려도 2060년 이후 기금 소진을 막을 수 없다는 분석도 있다. 정부는 국민연금을 더 많이 오래 내고, 적게 받는 방식으로 개혁을 추진 중이다. 필요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여론의 반발이 적잖다.모두 전 정부의 유산이다. 표가 떨어질까 두려워 방치하거나 미뤄둔 것들이다. 이젠 빼도박도 못할 상황이 됐다. 지금 바꾸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달 연금 수령 시점을 2년 늦추는 연금개혁안을 하원 표결 없이 입법하는 초강수를 뒀다. 야당이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노동계는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였다. 프랑스가 시끄럽다. 마크롱은 자칫 레임덕에 빠질 수 있는 상황에서 정치생명을 걸었다. 미래를 위해 승부수를 던졌다.어차피 모든 국민을 100% 만족시킬 수는 없다. 불만이 없을 수는 없다. 정치권은 정치생명을 걸고 연금개혁을 밀어붙인 마크롱을 배워야 한다.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다.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그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외통수다.

2023-04-06

봄비와 단비

우정구 논설위원 봄비는 봄철에 내리는 비를 이르는데, 국어사전에는 조용히 가늘게 오는 비로 정의하고 있다. 여름비는 기온과 습도가 높아 소나기처럼 빗방울이 굵게 내리나 봄비는 대지와 새순을 살짝 적시는 보슬비처럼 내린다.그래서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어느 시인은 봄비 내리는 것을 송홧가루 날리듯 내린다고 표현했다. 봄비는 추운 긴 겨울 끝에 찾아온 비여서인지 정감도 있다. 봄비를 주제로 한 시와 노랫말이 많은 이유다.가뭄 끝에 전국에 걸쳐 많은 비가 내렸다. 모두가 단비라 불렀다. 꼭 필요한 시기에 알맞게 맞추어 내린 비란 뜻이다. 한자말로는 단비를 감우(甘雨)라고 부른다. 고마운 뜻의 단비는 순수 우리말인 데다 어감도 좋아 사람의 이름으로도 잘 쓰인다.이틀에 걸쳐 전국에 내린 비는 제주도 산지에는 300㎜ 이상 비를 뿌리는 등 대구와 경북에도 약간의 비를 내렸다. 가뭄으로 애를 태웠던 농민들이 가장 먼저 반겼다. 또 전국에 걸쳐 동시다발로 일어나던 산불로 고생하던 소방수들도 잠시나마 숨을 돌렸다. 국립산림과학원은 5㎜ 정도의 비가 내리면 25.1시간 즉 하루 정도 산불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2015년 3월 기상청은 봄비의 경제적 가치를 환산해 발표한 적이 있다. 대기질 개선효과, 가뭄해소, 산불예방 효과 등 약 2천400억 정도 라 했다. 어떤 셈법으로 나온 계산인지 알 수 없으나 지금과 같은 시기에 내리는 비는 그야말로 금비다.농업을 천직으로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비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다. 특히 봄비를 쌀비라 불렀다. 봄비가 농사에 끼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아쉽지만 고마운 봄비 소식이 있어서 다행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3-04-06

달성군 문화예술허브 추진, 대구발전 기폭제로

대구시가 당초 경북도청 후적지에 조성하려던 문화예술허브를 달성군 대구교도소 후적지로 바꿔 추진한다고 밝혔다. 국립근대미술관과 국립뮤지컬콤플렉스 등이 포함된 문화예술허브 조성사업은 윤석열 대통령의 지역공약사업이다. 현 대통령 임기 내 추진되는 것이 사업의 성과를 봐서라도 가장 바람직하다.그러나 당초 대구시가 계획한 도청 후적지는 현재 대구시 공무원의 65%가 근무하고 있고, 예정된 대구시 신청사 건립은 아직 구체화된 게 없다. 게다가 도청 후적지 일부는 국토부의 도심융함특구 대상지로 겹쳐져 있어 문화예술허브 사업을 조속히 시행하기에는 부적절하다.반면에 달성군 대구교도소는 올해 중 달성군 하빈면으로 이전한다. 부지 면적도 충분하다. 일부 접근성을 문제 삼으나 대구시민의 41%가 거주하는 서부권의 부족한 공연전시 문화 해소를 위해선 바람직한 측면도 많다. 무엇보다 국정과제에 포함된 문화예술허브 조성사업을 빠른 시간내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대구시는 이 문제와 관련, 문체부를 방문해 협의했고 문체부도 “협의해 나가겠다”는 답변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 공약사업인 문화예술허브 조성에는 모두 6천억원이 넘는 국비가 투자된다. 국립근대미술관과 국립뮤지컬콤플렉스를 조성해 대구를 글로벌 문화예술의 중심도시로 키우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대구는 15년간 국제뮤지컬페스티벌을 개최한 도시다.또 이쾌대, 이인성 등의 뛰어난 화가들이 활약한 근대미술의 발상지다. 달성군에 들어설 문화예술허브 조성사업을 계기로 대구가 국제적 문화예술 중심도시로 성장하는 발판을 만들어가야 한다. 스페인의 작은 도시 빌바오시가 구겐하임미술관 건립으로 세계적 관광지로 떠오른 사례를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앞으로 세계는 문화예술 분야가 국가 경쟁력으로 떠오르는 세상이 된다. 달성군의 문화예술허브 사업은 소외된 지방도시의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수준을 넘어 국제적 교류를 통한 세계화에 앞장서야 한다. 대구 성장의 기폭제로 삼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

2023-04-06

청명 날 봄비, 산불을 끄다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이번 주는 청명·한식에 식목일까지 몰려있다. 청명은 ‘하늘이 맑아진다’는 날이라 날씨가 좋으면 그해 농사가 잘되고 고기도 많이 잡힌다고 한다. 그러나 올봄은 유난히 가뭄이 심하고 산불이 잦아 걱정이었는데 마침 단비가 내려 크고 작은 산불도 끄고 산과 들도 물기를 머금게 하였으니 오히려 농사가 잘될 것이 아닌가.오동나무 꽃 피우고 종달새 나타나고 첫 무지개가 뜬다는 청명 절기에 예년처럼 되풀이된 식목일의 산불을 각인시키려는 듯, 지난 2일 오전 충남 홍성을 시작으로 전국 34곳에서 동시다발로 발생한 산불은 강풍에 힘을 얻어 4일까지 58곳으로 확산해 그 발화원인에 야릇한 의심을 사게 만들기도 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피해가 심한 10개 시·군·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주택과 공공시설의 피해복구 등 후속 조치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산불 피해 면적이 10ha 이상인 곳만 5곳, 그중 4곳이 충남 호남이다. 경북은 최근 3년 동안 청명 한식 전후로 10건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이번 전국적 산불 사태에서 경북지역 피해가 적은 것은 올해 1월 출범한 경북소방본부 소속 ‘119산불특수대응단’이 24시간 진화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이다.그동안 계속되어 온 가뭄 현상으로 전국의 산천은 거의 말라버렸고 이에 따라 화재위험이 크다는 우려에 3월 말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은 산불위험지수 4단계 중 ‘높음’으로 예측하며 4일 비가 내리기 전까지 지속될 전망이라고 예보한 바 있다. 자료를 보면 희한하게도 식목일날 산불 발생이 2000년 50건, 2002년 63건 등 청명·한식에 많이 발생했다.옛날 임금이 고을 수령들을 통해 백성들에게 내려주는 불을 받으려고 ‘묵은 불을 끄고 새 불을 기다리는 동안 밥을 지을 수 없어 찬밥을 먹었다’고 한식이라고 했지만, 불을 금했다는 이날 요즘 산불이 많다 보니 그 의미가 묘하다. 이제 산불도 다 꺼졌으니 한식에 약밥, 쑥떡을 먹으며 무병을 빌고 또 윤달이니 조상묘를 찾아가서 풀 베고 잔디 입혀 성묘하며 마음을 달래보는 것은 어떨까.지금껏 강원과 경북이 산불 주요 발생지역이었던 것은 태백산맥의 영서에서 영동으로 불어오는 양간지풍(襄杆之風) 탓이라 하며 이번처럼 충남 호남지역에서 많이 발생할 것은 예상치 못했다. 다행히 청명 날부터 전국적으로 단비가 내려 산불은 껐지만, 평균 이하 강수량으로 50년 만의 가뭄 해갈에는 부족할 것 같다. 그런데 제주와 남해 지역에서는 호우주의보, 강풍특보 등이 내려 항공편 결항사태를 빚었으니 참 이상한 기후 현상이다.요즘은 식목일 행사도 뜸하다. 그러나 ‘청명에는 부지깽이를 꽂아도 싹이 난다’고 했으니 비록 산림복구엔 100년이 걸린다지만 잿더미가 된 축구장 4천400개 넓이의 산에 힘을 모아 나무를 심어야겠다. 산불 피해로 마음 둘 곳 없는 이재민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봄갈이하는 들판에도 계속 비가 내렸으면 한다. 이상 고온으로 서둘러 핀 벚꽃이 이번 단비로 모두 떨어져 ‘벚꽃 없는 벚꽃축제’가 될 것 같아 마음이 아프지만 시원한 메밀국수 한 그릇 훌훌 말아먹고 진달래술 한잔하며 정녕 아름다운 4월을 만들어 가자.

2023-04-06

지성인(知性人)의 사명과 역할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바람직한 문명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지성인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해박한 지식과 합리적인 사고, 도덕적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지성인의 역할이다. 또한 지성인은 뛰어난 지식과 인격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술과 발명을 창출하며, 예술과 문화, 철학 등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증진하기도 한다. 이러한 활동은 문명사회의 성장과 발전을 가능케 하며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인류의 진보를 촉진한다. 요즘 우리사회에 횡행하고 있는 반지성적 행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뒷골목 불량배들의 얘기가 아니라, 사회 지도층에 만연해 있는 폐단을 말하는 것이다. 반지성이란 정략적 의도나 개인적인 감정, 불의한 이념을 쫓는 편견 등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반지성적인 시각과 행동이 생산한 편견과 거짓정보는 언론과 인터넷매체 등을 통해 삽시간에 확산될 수 있다. 그로 인해 일반 국민들은 진상을 호도하게 되고 민심이 왜곡되는 것이다.반지성적 풍조의 발원지는 정치권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보니 합리성이나 진실성, 도덕성 따위를 무시한 거짓과 왜곡, 억지와 모함이 판을 치는 것이다. 거기에 각종 언론매체들이 선정적으로 가세해서 일반 국민들은 물론 청소년들까지 거짓과 천박함을 당연시 하게 되었다. 정치세력을 형성하는데 편 가르기 만큼 손쉽고 유용한 것이 없다. 이념이든 계층이든 젠더든 일단 편을 갈라서 저들끼리 싸우게 해 놓으면 절반은 거저먹는 게 정치세력이다. 그 한 쪽 편에 힘을 실어주고, 거기다 포퓰리즘과 선전선동으로 민심을 잡으면 집권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치공학적 계산이다.편 가르기 정치의 대표적인 수단이 ‘내로남불’이다. 무슨 짓이든 내가 하면 정의롭고 상대방이 하면 불의와 적폐라는 논리다. 이런 억지 주장을 관철하려면 당연히 얼굴이 두꺼워야 한다. 아무리 비리와 거짓이 드러나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후안무치가 지지 세력을 공고히 하는 필수 조건이다. 그리고 후안무치의 결정판은 적반하장이다. 공격이 곧 최선의 방어라는 것이다. 궁지에 몰리면 자신의 비리와 부정 혐의를 오히려 상대편에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어수룩한 국민들에게 사건의 본질을 흐려 양비론 정도만 끌어내도 성공인 것이다. 패거리정치판의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 진영논리를 강화할 수밖에 없고, 진영논리의 추진력은 확증편향에서 나온다. 반지성적 풍조에 휩쓸려 천박해지고 황폐해진 민심은 사회를 병들게 한다. 언론과 교육과 종교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그 역시도 편이 갈리고, 부정과 비리를 공정하게 단죄해야 할 사법부조차도 진영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지성이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지성이 오히려 적폐로 몰린다. 무조건 자기 패거리를 지지하지 않으면 저주와 혐오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 지성의 역할이고 사명이다. 악조건일수록 오히려 더 분발하여 정의로운 언행으로 맞서야 한다. 건강한 사회와 국가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인 지성인의 역할이 절실한 현실이다.

2023-04-06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장규열 전 한동대 교수 나라가 좁다. 우리나라 면적은 세계 108위에 인구 숫자로는 세계 29위라서 인구밀도가 세상에서 네 번째로 높다. 좁은 땅에 복닥거리느라 늘 경쟁과 다툼이 화두다. 모든 게 좁은 문이고 일상이 긴장과 투쟁의 연속이다. 웬만한 시험은 몇십대 일 경쟁이 다반사가 아닌가. 기회가 없지는 않지만 늘 제한적이고 바늘구멍이다. 다음세대에게 우리는 어떤 내일과 비전을 가르칠 수 있을까. 사회는 늘 복잡하고 치열하며 힘든 싸움만 부추기는데, 청년들은 무엇에 희망을 걸고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지 답답하지 않을까.호연지기(浩然之氣).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 큰 기운이라 하였다. 호연지기를 품고 내일을 설계할 때 인물이 나고 세상이 바뀐다 하였다.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과 땅 사이에는 한반도만 있는게 아니다. 시선이 가 닿는 지평이 넓어야 한다. 세상 저 끝까지 호기심과 상상력의 경계를 넓혀야 한다. 나라 안에서 우리끼리만 바라보며 이기고 질 생각을 하니 긴장과 고난의 연속이 아닐까.정치와 사회, 문화와 경제도 국내로만 시선을 고정하면 모든 게 정체되고 탈출구가 좁아 보인다. 생각을 넓히고 세상을 바라보면 뜻 밖에 할 일과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글로벌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 담장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부터 길러야 한다. 우리와 다른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고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경계를 허물어 다른 점을 발견하고 닮은 가닥을 찾아야 한다. 세상의 모습을 글로벌하게 알아야 하고,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을 깨우쳐야 한다. 저 밖을 향한 관심과 궁금증을 키워야 하고 조금씩이라도 날마다 세상을 생각해야 한다. 어울려 일하고 겨루며 ‘널푼수’를 키워야 한다. 더 넓게 생각하고 더 멀리 바라보며 더 깊이 느껴야 한다.국내만 바라보며 답답했던 심사가 글로벌한 지평을 내다보며 넓어져야 한다. 나아진 국격과 함께 자신감도 한층 높여야 한다.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도 자신있게 익혀야 한다. 세상을 만날 준비부터 쌓아 올려야 한다.글로벌은 이미 현실이다. 펼쳐진 마당을 알아채야 한다. 경쟁과 다툼으로 소중한 에너지를 소진할 게 아니라 글로벌 환경을 깨우쳐 앞서가야 한다. 다음세대는 글로벌호연지기를 장착해야 한다. 좁은 국내를 벗어나 광활한 세상을 열어가야 한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좁은 한반도 갇힐 수가 없다. 상상과 창의로 세상과 겨루어야 한다. 무엇을 바꿀까, 누구와 일할까, 어디에서 펼칠까, 넓고 깊게 생각하는 다음세대를 길러야 한다. 우리의 다음세대들이 글로벌호연지기를 펼칠 때 대한민국의 운명과 국격도 더욱 상승할 터이다.경북교육을 세계교육의 표준이 되도록 하겠다는 경북교육청의 교육비전이 새롭게 보인다. 구호에 그칠 일이 아니라 실천적이며 구체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어린이들이 어릴 적부터 세상을 느끼고 배우고 익혀 세상을 바꾸어낼 인재로 길러야 한다. 좁은 땅에서 경쟁으로 시들어 갈 일이 아니라, 넓은 텃밭에서 마음껏 날아다니도록 길러야 한다. 글로벌은 교육으로 실천해야 한다.

2023-04-05

회전교차로의 효과

홍석봉 대구지사장 예전에 로터리로 불렸던 원형 교차로가 회전교차로로 재탄생, 주목받고 있다. 회전교차로를 설치한 도로의 교통사고와 인명피해가 크게 준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회전교차로 설치효과를 단단히 보고 있는 셈이다. 행정안전부 분석 결과 2020년 대구 3곳과 경북 13곳 등에 회전교차로를 설치한 후 사고현황 분석결과 대구는 3개 지점에서 지난해 단 1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해 시행 전 7건에 비해 85.7%가 감소했다. 인명피해는 사망자 없이 3명의 부상자가 발생해 72.7%의 감소율을 보였다고 한다. 경북은 13곳의 회전교차로에서는 지난해 총 7건의 사고가 발생했다. 인명피해는 부상자 10명에 그쳐, 시행 전에 비해 사고와 인명피해가 각각 27.6%와 25% 줄었다.교차로 통행시간도 회전교차로 설치전보다 평균 4.3초(20.8%) 단축돼 원활한 교통 흐름에 도움이 된 것으로 조사됐다.회전교차로는 1960년대 영국이 개발한 원형 교차로다. 차량이 한쪽 방향으로 돌아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십자 교차로 대신 도로가 만나는 중심부에 교통섬을 만들어 차량이 이 교통섬을 돌아가도록 했다. 일반 교차로와 달리 신호등이 없고 교차로에 먼저 진입한 순서대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신호대기가 필요 없어 차량 흐름이 원할해지고 정면 충돌 우려가 없어 교통사고도 줄어든다.반면 교통량이 많은 곳과 도심 지역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다. 기존 교차로에 비해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대형차량이나 특수차량은 통과하기 어렵다는 점도 단점으로 꼽힌다. 하지만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크다. 통계로 입증됐다.적절한 곳에 회전교차로를 확대 설치할 필요가 있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4-05

대구 미분양 적체, 정부차원 특단조치 나와야

대구시가 대구지역 미분양주택 해소 대책을 국토부와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에 건의했다. 이는 심각한 수준에 이른 대구지역 미분양주택 물량 해소를 위해선 지방정부로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밝히는 동시에 정부 차원의 특단 대책을 긴급히 요구한다는 뜻이다. 2월 말 현재 대구지역의 미분양 물량은 1만3천987가구로 국내 전체 물량의 18.5%다. 입주 예정물량도 3만6천여 가구다. 이런 미분양 주택 증가세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측된다고도 한다. 미분양 사태 장기화로 주택건설회사와 관련업계의 경영난은 물론이거니와 꽁꽁 얼어붙은 부동산 경기로 실수요자들이 제때 이사를 할 수 없는 등 부작용도 심각하다. 지역경제에 미칠 파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대구시의 입장이다.지난달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발표한 ‘KB부동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주택매매 가격은 1.8%가 떨어졌다. 특히 대구지역은 ·5.2%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하락률을 기록했다. 전국 인구의 절반이 사는 수도권(서울, 인천, 경기)보다 더 많은 미분양 물량을 안고 있는 데다 시중의 집값마저 폭락하니 가뜩이나 어려운 지역의 경기는 설상가상격이다.급등했던 집값이 떨어진 것은 집값이 안정된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미분양 사태가 빚을 경제적 불안감 등 후유증을 더 걱정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대구시가 이번에 중앙정부에 건의한 내용 가운데 조정대상지역 지정 및 해제 등 주택정책 규제 권한의 일부를 지자체로 이양해 달라는 것은 설득력 있는 부분이다. 지방마다 다른 부동산 시장을 두고 중앙정부가 일률적으로 정책을 펴는 것은 상대적 불평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지방정부가 지방사정에 맞게 권한을 행사하도록 하는 것이 지방화 시대와도 맞는 정책 흐름이다.대구시는 지난 1월 신규 주택사업 승인을 보류하고 후분양 유도, 임대주택 전환 등으로 미분양 안정화 대책을 펴고 있다. 그럼에도 미분양분 해소는 여전히 부진하다. 대구시 건의를 살펴보고 정부는 미분양 후폭풍이 생기지 않게 선제 대응책을 내놓아야 한다.

2023-04-05

내 머리 속의 지우개

나선택 포항 행복한의원장 한의원 내원 환자의 상당수가 국가에서 노인으로 인정하고 치료비를 줄여주는 65세 이상의 노인이다. 20년 넘게 한 자리에서 진료를 하다 보니, 건강한 중년으로 처음 만난 분들이 몸과 마음이 모두 쇠약해진 노인으로 변하는 것을 보게 된다. 가끔 환자의 인지기능에 문제가 확인되어 치매 검사를 권하게 되는 경우는 내 마음도 많이 불편해진다.100여 년 전 알츠하이머 박사가 치매로 사망한 사람의 뇌를 해부해보고 베타아밀로이드라는 이상 단백질이 침착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이후 거대 제약 회사들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치매를 치료하는 기적의 약을 만들려고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100년이 지난 2021년이 되어서야 미국에서 아두카누맙, 레카네맙 등의 약이 개발되어 치매 증상의 일부분을 호전시키고 있을 뿐이다. 아직까지 치매는 치료보다 예방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치매 예방을 위한 방법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유산소 운동이다.일본 국립장수의료연구센터에서 경도의 인지 장애가 있는 65세 이상 308명을 대상으로 10개월간 진행한 연구에서도 유산소 운동의 효과가 나타났다. 주 1회 걷기, 계단 오르내리기 등의 유산소 운동을 한 그룹은 인지 기능이 유지되거나 향상됐고, 뇌의 위축이 멈췄다. 그러나 운동을 하지 않은 그룹의 인지 기능은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뇌가 위축된 사람이 많았다.유산소 운동을 하면 뇌세포의 에너지원인 뇌유래신경영양인자(BDNF)가 활발하게 만들어진다. 나이가 들면 이 물질이 점점 줄어드는데, 치매에 걸린 사람은 줄어드는 속도가 훨씬 빨라진다.유산소 운동은 무리한 시간과 강도로 하기보단, 일정한 심박수로 꾸준히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걷기, 조깅, 수영, 등산 등 우리 몸에 지속적으로 산소를 공급하는 운동을 매일 30분 이상하면 긍정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동의보감에서는 치매를 癡呆(치매) 呆病(매병)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대의 한의학에서는 치매를 3종류로 분류한다. 아직은 치료법이 없는 진행성 치매인 알츠하이머(노인성 치매), 뇌경색과 뇌출혈의 예방과 치료를 통해 발병을 막을 수 있는 혈관성 치매, 우울증, 약물, 내분비 이상, 감염 등 기타의 원인으로 생기는 치매로 분류한다. 우울증이나 내분비 이상 등으로 생기는 치매는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치료하면 발병을 예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상당한 호전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억간산, 반하백출천마탕 등의 처방이 신경세포 보호, 기억과 학습 능력 개선, 베타밀로이드 독성 완화 등의 효과를 보이고 있다. 전침, 약침 등을 활용하여 뇌신경의 활성화에 도움을 줄 수도 있다.일생을 성실히 살고 마지막이 아름답기를 꿈꾸는 것이 보통 사람의 희망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건강한 음식을 먹고,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여유로운 산책을 자주 하고, 잠을 충분히 자는 습관을 만들자.

2023-04-05

또 한 마리 강아지 아키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손주들은 나를 아키 할머니라 부른다. 원래 손주들 집에 있다가 우리집으로 온 강아지 아키 때문이다. 아들이 결혼 전 동물보호센터에서 아기때 입양한 후 10년을 기른 갈색 푸들, 그래서 이름도 아키(일본어로 가을)라 지어 잘 지낸 놈이었다. 몇 년 전 고양이가 들어오게 되는 사정이 생겼다. 아키가 베란다로만 숨어 나오지 않았다 한다. 우리집에 데려올 때 울며불며 이별을 서러워하던 손주들이었다. 집이 가까우니 자주 보러오면 된다고 겨우겨우 달래느라 진땀깨나 흘렸다. 아키가 온 후론 할머니 집에 오는 걸 아키집에 간다고 하며 좋아하더니 급기야 우리 부부는 아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버렸다. 뭐 어떠랴….아키는 까도녀 베리를 배려해 뭐든 스스로 기꺼이 이순위를 자처한다. 먹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 곁자리조차도 베리보다 후순위다. 순위매김을 해야 다툼이 없다지만 아키는 스스로 양보하는 것이 제 몸에 익숙한 듯보인다. 산책할 땐 어쩜 그리도 보폭을 잘 맞추는지, 한두 발자국 걷고는 쳐다보며 눈을 맞추고, 몇 발자국 걸은 후 또 올려다 쳐다본다. 집안에서도 늘 나만 따라다닌다. 나는 종종 그런 아키를 다정아키라고 부르곤 한다. 잠잘 때도 내 곁에 오려고 틈만 나면 침대에 올라 내 발치에 자리를 잡곤 한다. 거실로 쫓으면 제 전용 의자에 올라누워 세상 불쌍한 포즈로 잠을 청하곤 하는 아키다. 우리가 소파에 자리 잡으면 베리가 먼저 제 자리를 정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빈 옆자리로 말없이 와 앉는다. 차를 탈 때도 그렇다. 같이 뒷자리에 앉히면 베리는 어김없이 냉큼 앞자리의 조수석으로 뛰어와 내 무릎에 앉는다. 베리가 부러운가 낑낑대던 아키는 이내 잠잠해진다. 말없이 얌전히 쓸쓸하고 고독한 뒷자리의 시간을 혼자서 감내한다.베리가 아픈 후엔 베리에 대한 배려가 더 애틋해졌다. 베리의 기저귀를 갈 때면 안쓰러운 듯 가까이 와서 냄새 맡고 몸을 핥아준다. 까칠한 베리도 싫지 않은 듯 몸을 내어주는 것 같다. 베리가 입원했을 땐 식음을 전폐하여 병원에 면회다녀온 후에야 식욕을 되찾은 정말 다정도 병인 아키였다. 그런 아키가 지난 주 몹시 화가 났다. 실제 화가 난 건진 모르겠으나 난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 모두의 집에 가서 풀뽑고 꽃씨 뿌린다고 하루를 머물다 왔다. 이름을 불러도 꼼짝않고 반기지를 않았다. 늙은 베리는 그렇다치고 아키가 이상했다. 고개를 외로 꼬고 쳐다보질 않아 몸에 이상이 생겼나 걱정했다. 지난밤 돌아오지 않은 걸 후회할 정도였다.아키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내 발치께에 뉘였다. 밤새 같이 잤다. 이튿날 아침 아키는 평소의 발랄함을 되찾았다. 잠에서 깨는 나를 기다렸다는 듯 덥석 안긴다. 앞다리를 어깨에 얹고 얼굴엔 제 얼굴을 갖다대어 마구마구 혀를 내민다. 눈을 마주치고 짧은 꼬리를 격렬히 흔든다. 역시 다정한 아키는, 정에 약한 아키는, 그놈의 정 때문에 마음 상해 삐쳤던 거였다. 그 후로는 모두의 집에 갈 때마다 둘 다 데려간다. 비록 뒷자리의 고독일지언정 함께 있는 것이 아키에겐 더 좋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2023-04-05

살구나무에 재미가 열리고

양태순 수필가 텃밭에 갔다. 겨울 동안 뜸했던 발길에 밭이 엉망이다. 펄럭이는 비닐 쪼가리와 도착지를 잃은 종이와 떠나기 싫어 뭉그적거린 낙엽이 바람에 휩쓸려 수없이 굴러다닌 자국이 지천이었다. 가져온 커피를 홀짝이며 혼자서 적적했을 밭에게 무심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옷을 갈아입고 호미를 들었다. 쓰레기라는 이름으로 묶인 것을 긁어모으니 큰 더미가 되었다. 나중에 분류를 해야겠지만 우선은 모아 두고 흙을 살폈다. 호미질을 해보니 흙이 부슬부슬하다. 아마도 얼었던 흙이 봄기운을 받아 살을 풀어헤치고 있었던가 보다. 무너진 두둑을 새로 흙을 돋우어 다듬고 물고랑을 만들고 흙 뒤집기를 했다. 손바닥만 한 텃밭이라 한나절 호미질로 그럭저럭 태가 났다. 다음 주에 상추를 비롯한 채소를 심기로 하고 호미를 놓았다.봄나물을 캐러 들에 갔다. 밭이 많아서 냉이나 달래, 쑥이 있을 것 같아 조금만 캐서 봄을 먹으리라 생각했다. 밭둑을 살피며 쭉 갔는데 냉이만 보였다. 시력이 나쁜지 봄나물이 살길을 찾아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봉지 안에 든 냉이가 한 끼는 될 것 같아 그만하고 들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묵정밭 둑에 두어 그루 나무에 튀밥 같은 꽃이 피어 있었다. 벌들이 잉잉 꿀을 빨고 있다. 꽃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나는 무슨 꽃인지 몰라 곁에 있던 이에게 물었다. 살구꽃이란다. 살구꽃, 입 안을 맴도는 아릿한 향기가 찌르르 운다.어릴 적, 살구나무는 친구였다. 흔히 마당 귀퉁이나 대문 주위에 있었건만 친구집 살구나무는 대밭에 있었다. 시누대로 울을 겸한 것인데 중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앞에는 배꼽마당이 있어 우리는 자주 나무에 오르곤 했다. 좁은 마당에서 숨바꼭질, 딱지치기가 지루해지면 나무에 매달려 시시거리며 놀았다. 살구를 따준다, 매미를 잡는다, 너보다 높은데 올랐다는 둥 갖가지 이유로 나무를 오르내렸다. 나무와 어울려 노는 어린 날은 여물어갔고 나무는 쑥쑥 품을 넓혔다.그런 어느 날, 나는 나무에서 미끄러져 발바닥이 대꼬챙이에 찔렸다. 이쑤시개만 한 것이 살에 박혔다. 절름거리면서도 야단맞을까 두려워 울지도 못했다. 부모님은 꾸중 한마디하고 의사에게 데려갔다. 의사 앞에서 나는 아프다는 핑계로 엉엉 울었다. 내게만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서러웠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이사를 했고 그곳에는 살구나무가 없었다. 그렇게 살구나무는 내 놀이 테두리 밖으로 밀려났고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그 살구나무는 어땠을까. 우리가 수피가 맨들맨들하도록 못살게 구는 것이 싫었을까, 찾아와서 놀아주는 것이 좋았을까. 우리 때문에 괴로웠다면 시들시들했을 텐데. 매해 잎을 무성하게 피우고 튼실한 열매를 맺은 것으로 보아 우리의 웃음소리와 재잘거림이 반가웠던 듯싶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눈앞의 살구나무를 들여다본다. 가지마다 매달린 옅은 분홍 꽃이 보러 와 달라 부르는 손짓 같다. 나무를 만지며 손끝에 감각을 모은다. 우둘투둘 무늬가 꿈틀거린다. 꽃과 잎을 통해 자유로이 숨을 쉬던 통로를 일제히 오므리고 한겨울 추위를 막아내던 자리, 두꺼운 껍질도 끝내 견디지 못하고 거칠게 갈라졌던 흔적이다. 온몸으로 겨울을 건너 봄을 피웠다. 홀로 거친 시간을 견뎌내고 이토록 환하게 웃어주니 애썼다, 꼬옥 안아주고 싶다.사람도 혼자 걸어가야 하는 삶이고 나무도 홀로 커가는 생이다. 그렇더라도 가끔은 넘어졌을 때 일으켜주는 손이 의지가 되듯이 숲에 사는 나무는 뿌리나 가지, 잎이 알게 모르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외진 곳에 터를 잡은 나무는 바람도 우박도 빗줄기도 고스란히 혼자의 몫이다. 살구나무가 만개한 꽃으로 가지를 살랑거리는데 짠한 마음이 든다. 나무가 쓸쓸해서 더욱 열심히 꽃을 빚었을까 싶어서, 한때 나무를 찾았던 소년 소녀를 기다렸을까 싶어서.먼 기억 속에 머물러 있는 살구나무를 불러온다. 너를 생각하면 가지마다 조롱박처럼 열렸던 친구들의 얼굴과 재미를 찾아 못살게 굴었던 어린 날의 시간이 참 그립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행복했던 시절이 살구나무에 재미나게 매달려 있다.

2023-04-05

갑오(甲午)

육십갑자 중 서른한 번째에 해당하는 갑오(甲午)다. 천간(天干)의 갑목(甲木)은 우뚝 선 나무처럼 강직하고 바르다. 지지(地支)의 오화(午火)는 6월의 태양이며, 동물로는 달리는 야생마다.갑오일주는 큰 나무가 햇빛에 빛나듯 당당하고 시원한 모습이다. 우뚝 선 나무처럼 강직하고 바르며 안전감이 있다. 갑목(甲木)이 오화(午火)를 생하여 주위를 밝혀준다. 총명하며 공부를 잘하지만, 열기가 쉽게 사그라지듯이 끈기가 부족하다. 이상이 높고 개성이 강하여 지도자로 실력을 발휘하려는 욕구가 많은 편이다.갑오의 말은 역마의 기운이 있어 자유롭고 분주하게 여러 장소를 다니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이사도 자주하고, 여행도 자주하고, 많은 환경과 접할수록 강한 상승의 운이 있다. 젊어서 타향에 가면 일찍 성공하기도 한다. 창조적이고 개척정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갑오일주는 삶의 기복이 많은 일주다. 눈치가 빠르고 재치가 있는 반면, 성격이 급해 일처리는 속전속결이다. 오화(午火)의 열기가 과일을 성장시켜 열매를 맺게 하지만, 결과 위주이기에 이해타산적이다. 모든 면에서 득실을 따져보면 소탐대실이다. 모든 일이 늦게 이루어지니 기다림이 중요하다. 또한 지나치게 아무 일에나 끼어들어 구설수가 따르니 조심해야 한다.말솜씨로 자신을 표현하는데 최적화된 일주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언변이 화려하고, 떠벌이는 것을 좋아한다. 직설적인 표현으로 남의 일에 간섭하여 미움을 받기도 한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잦아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을 통제하려는 성향이 강해 자신만의 의견을 강요하다보니 꾸지람이 되기도 한다. 자존심이 세어 최고가 되어야 직성이 풀린다. 허풍 또한 심하여 내실을 다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맹자’ 등문공 하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매일 이웃의 닭을 훔쳤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그러한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라고 충고하였다. 그러자 닭을 훔친 사람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한 달에 한 마리만 훔치다가 내년에 가서 그만두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만약 그러한 것이 도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았으면 즉시 그만 두는 것이 옳지, 무엇 때문에 내년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인가?아무리 능숙하게 거짓을 말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혀끝으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말투로, 표정으로, 완벽하게 거짓말을 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갑오일주는 남녀 상관없이 본인을 가꾸고 꾸미기를 좋아해서 이성에게 어필이 잘 된다. 주변에 이성이 끊이지 않는 것은 남녀 공통이다. 특히 여자의 경우 홍염살(紅艶殺)이 있어 미모가 뛰어나고, 눈웃음을 치기 때문에 주변에 항상 사람이 끊이질 않는다.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성향이며,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매력을 지녔다. 사회활동을 하면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가 있지만, 가정에 소홀해서 부부가 화목하기 어려운 단점도 있다.홍염살은 붉은 홍(紅)에 고울 염(艶)이다. 마치 6월부터 피는 붉은 칸나와 같다. 꽃말은 정열, 존경이다.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며, 꽃은 참으로 예쁘고 매혹적이다. 미인초로도 부린다. 키가 크고 넓은 잎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커서 풍만함이 느껴지며, 넘치도록 붉은 꽃은 야해 보인다.칸나에 대한 전설이 있다. 아주 먼 옛날 인도에 ‘네와다드’라는 질투 많은 악마가 있었다. 어느 날 붓다가 유명해지자 질투가 났다. 질투에 사로잡힌 네와다드는 붓다를 해치려고 마음을 먹었다. 붓다가 지나갈 때 큰 바위를 굴러 붓다를 죽이려 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네와다드는 때마침 지나가는 붓다를 향해 큰 바위를 굴렸고, 굴러온 바위는 붓다 발 아래서 부서졌다. 깨진 바위의 파편이 붓다의 발등을 때려 피가 흘렀고, 피가 떨어진 땅에 붉은 색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칸나다.1894년 조선말 갑오년에 갑오개혁으로 백성을 위한 민권이 성문화되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도 갑오년에 완성되었다. 조선 성종5년(1474년)인 갑오년에 개정하여 시행된 경국대전을 갑오대전이라고 칭한다. 성종은 즉위한 1470년 경국대전을 수정하게 하였는데 이때 나온 것이 신묘대전(辛卯大典)이다. 여기에도 누락된 조문이 있어 이를 보완하여 개수한 것이 성종5년 2월 1일부터 시행된 갑오대전이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쉽게 말하면, 고려와 조선의 차이는 법치주의의 구현 및 실현이었다. 갑오(甲午)의 특징이 서민적이고 타인을 위한 이타심이나 봉사심이 온 세상에 가득하기 때문에 이러한 파격적인 법도 만들어냈다. 예를 들면 여자 관노비가 임신한 경우에는 출산 전 30일, 출산 후 50일 등 총 80일 휴가를 준다. 그래서 갑오(甲午)는 ‘한여름 땡볕의 나무 그늘’이라고도 한다.사람들을 쉬게 해주고, 괴로움을 덜게 하고, 남을 도와주고픈 마음은 본성이 발동해 영적인 힘이 최고조에 이른다. 갑오년도 갑오월도 갑오일도 갑오시도 그러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적인 욕심은 내려놓으면 된다. 우리가 숙고하고 주목해야 할 것은 목적이 아니라 방법이다. 어떤 방법에 의해 법과 질서를 바로잡을 것인지 숙고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법을 제정해도 집행하는 사람의 도덕기준에 따라 파급 효과가 다르게 나타나 피해가 민생과 직결되기 때문이다.그 어떤 목적도 없이 자신을 가진 것 이상으로 내세우는 사람은 멸시받아 마땅하다. 허풍을 떠는 사람이 아니라면 거짓을 좋아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나쁜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허풍쟁이 같아 보인다. 그러나 어떤 목적이 있어서 큰소리를 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세상의 호평이나 명예 때문에 큰소리치는 자는 허풍쟁이로서 그다지 크게 비난할 것이 못되지만, 재물이나 재물로 바꿀 수 있는 것들 때문에 큰 소리 치는 자는 허풍쟁이보다 더 추악한 인간이다.

2023-04-05

공공형 택시앱 ‘대구로’, 시장독점 구조 깨야

지난해 12월 공공배달앱을 달고 출발한 ‘대구로 택시’가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대구시에 따르면 대구형 택시 호출앱 ‘대구로 택시’가 출시 100일을 맞은 가운데 가입 택시 수가 전체 운행 택시의 67.4%를 기록한 것으로 집계됐다는 것이다. 하루 호출 건수도 1만건을 넘어 택시 한 대당 4.5콜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대구로 택시 앱가입 회원수도 출시 당시 30만명에서 42만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대구로 택시는 기존의 대형 플랫폼 기업인 카카오택시의 시장 지배적 구조에 대응하고, 과도한 수수료로 어려움을 겪는 지역택시업계를 지원하기 위해 출시한 공익적 사업이다. 대형 플랫폼 기업의 시장지배적 구조 속에 출발함으로써 성장 속도가 더딜 것으로 예측했으나 생각보다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는 것으로 파악돼 다행스럽다. 대구시는 당초 올해 말까지 4천명 가입을 목표로 했으나 출시 한달 만에 이를 추월하고 지금은 전체 택시의 70%에 육박할 정도다. 물론 공공형 택시앱의 출시에 맞춰 초기에 주어지는 수수료 면제나 쿠폰 제공 등의 각종 인센티브 효과도 있겠으나 공공형 택시에 대한 이용객의 만족도가 그만큼 크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대구시가 대구로 택시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만족도 조사에서도 이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응답자의 95%가 만족을 표시했고, 만족 이유로 30%가 ‘친절’을 꼽았고 ‘안전 운전’과 ‘최적 코스’가 각각 22%와 18%로 집계됐다고 한다. 대형 플랫폼 기업의 시장지배 구조는 지역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역자금의 역외유출이 가속화되고 독점적 위치에 따른 과도한 수수료는 시민의 발인 택시의 이용료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의 많은 지자체가 공공앱의 출시를 지원하는 것도 택시의 공공성 때문이다. 공공앱의 대구로 택시가 순항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시민들은 공공형 택시가 제대로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이 이용하고 택시업계도 공공형 택시로서 시민이 100% 만족할 수 있게끔 만반의 준비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대구시는 공공형 택시의 경쟁력 강화에 더 힘을 보태야 한다.

2023-04-04

느닷없이 날벼락 맞은 포스코 정비협력사들

포스코가 정비분야 자회사 설립을 위해 오는 10일부터 직원채용에 나섬에 따라, 그동안 관련 업무를 맡아왔던 협력사들이 사실상 폐업 위기에 놓였다. 자회사 채용규모는 포항과 광양제철소별 2천300여 명이며, 채용이 마무리되면 오는 6월부터 회사를 출범시킨다는 계획이다. 자회사 직원은 공개채용절차를 거치며, 협력사 직원들을 우선 채용한다. 포스코 소속의 대형화된 자회사를 만들어 체계적인 정비기술 역량을 축적해 전문성을 확보하겠다는 명분이다.문제는 협력업체의 향후 진로다. 포스코는 지난달 그동안 설비 정비와 유지보수를 해오던 25개 협력사(포항 12곳) 대표에게 자회사 설립 계획을 통보했다. 포스코는 협력사가 희망하면 자회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지만, 협력사들로선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서 있다. 자회사에 참여하더라도 기존 직원들의 포스코 행을 막을 방법이 없어 문을 닫든가, 헐값에 회사를 포스코에 넘겨주든지 해야 한다.현재 지방의회를 비롯해 포항과 광양 지역사회는 포스코의 정비자회사 설립 추진에 반발하고 있다. 협력사 폐업위기뿐만 아니라 협력사에 작업복이나 안전화, 사무용품 등을 납품하는 업체들도 거래처가 사라져 지역경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포스코의 경우 정비 자회사가 설립되면 계열사인 엔투비 그룹의 전자상거래 플랫폼을 통해 일반 자재, 원부자재 및 공사설비 등을 의무적으로 구매해야 한다. 포항지역 8개 협력업체 대표들은 최근 모임을 갖고 법률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일방적인 자회사 설립이 공정거래법과 노동시장질서를 위반했다는 것이다.이와관련 더불어민주당 서동용 의원(전남 순천광양곡성구례을)도 “포스코의 자회사 설립추진이 지난해 대법원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 판결 취지에 부합하는지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포스코가 정비자회사 설립을 추진하면서 협력업체나 지역사회와 적극적인 소통이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지금부터라도 긴밀한 협의를 통해 수십년간 같이 일해온 협력업체들이 억울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최선의 방안을 찾아봐야 한다.

2023-04-04

대구도 항공사를 보유한 도시가 됐다

심충택 논설위원 저비용항공사(LCC)인 티웨이항공이 지난 주말(3월 31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본사 소재지를 서울 강서구에서 대구로 이전하는 정관변경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대구도 이제 하늘길을 여는 개척자 역할을 할 항공사를 식구로 맞이하게 됐다. 지난해 7월 대구시와 업무협약을 통해 본사 이전을 약속한 지 8개월여 만의 성과다.지방공항은 본래 국제선보다는 국내선 위주로 노선이 편성됐는데다, 수익성이 낮아 항공사들이 모기지(母基址)로 삼는 것을 꺼려 왔다.지난 2010년 출발한 티웨이항공은 2014년부터 ‘대구공항 허브화’ 전략을 펴면서 급격히 성장했다. 앞으로 대구경북(TK)신공항을 허브공항으로 해서 운항하며, 이 지역 여객·물류이동의 핵심역할을 수행하게 됐다.티웨이항공은 2030년 TK신공항 개항 일정에 맞춰 MRO(유지보수·수리·정밀검사), 운송, 화물, 물류 등의 본사 기능을 단계적으로 이전하며, 중·장거리 노선(미주와 유럽) 개설과 사업확대를 추진해 나간다.티웨이항공은 현재 국내선은 대구, 국제선은 대구와 인천을 중심으로 운항하고 있다. 매일 대구발 국내선은 제주 12회, 대구발 국제선은 나리타와 간사이, 후쿠오카는 각 주 7회, 신치토세는 주 14회, 타이베이는 주 7회 운항하고 있다. 원래 보잉 737-800 NG 기종이 단일 기단이었지만, 지금은 중대형기인 A330-300기종 3대를 운용하고 있다. 향후 추가로 17대를 도입할 계획이다.정홍근 티웨이항공 대표는 주주총회에서 “중대형기 도입을 통해 LCC의 중장거리 노선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겠다”고 했다.티웨이 항공은 현재도 인천~시드니를 시작으로 경쟁사들이 가지 못하는 장거리 노선을 취항하고 있으며, A330기를 통해 부가적인 화물 수입 창출도 노리고 있다. 티웨이항공의 대형기 도입은 시점 자체가 항공업계에서는 화제였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전 세계 항공업계가 생존을 걱정하던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한 것이다. A330은 항속거리가 약 1만㎞로 호주와 동유럽까지 갈 수 있다.올 들어 LCC 항공업계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항공권 가격이 치솟으면서 역대급 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LCC 4총사’의 올해 탑승률을 보면, 제주항공 95.8%, 티웨이항공 95.1%, 진에어 91.1%, 에어부산 90.2% 순으로 모두 90%를 넘어섰다.티웨이항공은 지난해 대구시와 업무협약을 하면서, TK신공항을 중남부권 관문공항으로 성장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려면 적극적인 국내외 노선개설을 통해 여객과 물류 수요를 창출하고, 항공기정비 사업 등을 확대해야 한다. 완전한 본사 기능 이전을 위해서는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금부터 노선 확충과 항공 수요 창출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정부도 티웨이항공이 ‘24시간 잠들지 않는’ TK신공항을 만드는데 주요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필요가 있다.티웨이항공의 대구 본사이전은 윤석열 정부가 추구하는 지방시대를 여는데도 주요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2023-04-04

식목일 다시보기

우정구 논설위원 청명(淸明)은 24절기의 다섯 번째 절기다.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무렵부터 날씨가 풀리고 완연한 봄이 시작된다. 농민들의 손길이 바빠질 시기다.청명은 음력으로 3월이며, 양력으로는 4월 5일이나 6일 무렵에 든다. 한식(寒食)과는 같은 날이 되거나 아니면 청명 다음이 한식날이 된다. 한식날에 약밥이나 쑥떡, 찬밥을 먹으면 일년내내 병이 없다는 속설이 있다.올해 청명은 식목일과 겹쳤다. 한식은 다음날인 6일이다. 식목일은 본래 조선 성종 때 음력 3월 10일(양력 4월 5일)에 맞춰 임금이 동대문 밖 선농단에서 직접 농사를 짓는 친경(親耕) 행사를 벌인 데서 유래됐다고 한다. 농사의 중요성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농업을 장려하는 행사였으나 나무심기도 했다고 한다.이날을 기념해 1946년 4월 5일 처음으로 식목일이 지정되었고 올해가 78번째 되는 해다. 1949년 공휴일로 지정됐으나 2006년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서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식목일은 1962년부터 50년간 국토에 110억 그루 나무를 심는데 원동력이 됐다는 중요한 평가가 항상 뒤따른다.기후이상 변화로 4월 5일이 식목일로 적합지 않다는 얘기가 나온 지도 꽤 됐다. 전국 묘목시장은 기온상승으로 2∼3월이면 이미 대목장이 서기에 4월 식목일을 3월로 당겨야 한다는 여론이다. 한 여론조사에서도 56%가 식목일을 3월로 당기자고 응답했다.그러나 일각에서는 국토 녹화사업이 성공한 지금 4월 5일을 나무 심는 날로 국한하지 말고 탄소중립의 시대정신을 살리는 날로 삼는 것도 의미 있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지구온난화를 생각하면 나무 심는 일,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우정구(논설위원)

2023-04-04

여전히 우리는 삶이 서툴러서

삶에 익숙해지는 나이가 있을까? /Pixabay 한 대학에서 수업을 하는 친구가 전화로 하소연을 해왔다. 아이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아 속상하다고. 수업이야 당연히 지루한 거고, 아이들이 집중하지 않는 거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이번엔 유독 아이들이 무시하는 것 같다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아이들은 쳐다보질 않는 것 같다고. 분명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마치 화면보호기가 켜진 모니터처럼, 그런 눈빛으로 자기를 보는 것 같다고. 속상할 일도 아니고 직업이니 익숙해져야 하는 일인데도, 아이들이 자꾸만 자기를 헛것처럼 바라보는 것 같아 너무 속상하다고.친구의 목소리는 조금 격앙되긴 했지만 딱히 떨리지도 않았고, 울먹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담담했다. 마치 오래전 안 좋았던 일을 말하는 것처럼, 차분하게 ‘속상하다’는 말을 반복했을 따름이었다. 미안했다. 해줄 얘기가 딱히 없어서, 그런데도 그게 어떤 기분인지 너무 잘 알아서. 이야기를 오래도록 들어주다가, ‘최소한 너라도 편했으면 좋겠어. 수업을 좀 대충하더라도 말야’라는, 말 같지도 않은 대답을 위로인 척 건네주었다.나를 아는 사람들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겠지만, 수업을 한 날 밤이면 좀처럼 잠들지 못한다.수업은 이미 끝이 났는데도, 내 머릿속은 계속 수업을 하던 상태 그대로다. 개념을 설명하고, 개념에 맞는 예시를 들고, 예시에 맞는 농담을 던지고, 아이들이 웃던 안 웃던 혼자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고, PPT를 어떻게 고치고, 어떻게 손동작을 하고, 그런 생각들이 끊이지 않고 흘러넘친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새벽 2시고, 내일은 9시에 수업인데 하는 부담감까지 더해져 부정적인 생각들이 샘솟기 시작한다.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나는 이름과 얼굴을 외운 학생이 참 드물었다. 간간이 떠오르는 학생들 이름이야 있지만, 얼굴과 함께 외운 학생은 거의 없었다. 수업 시간이면 늘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과장된 목소리와 억양으로 크게 떠들며 학생들을 일일이 바라보는 척 했지만, 사실 내가 바라보는 건 늘 아이들 사이의 빈 공간이나 시계, 벽, 창문, 교실 바닥, 그런 것들이었다. 아이들 눈을 제대로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이 졸고 있을 때면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나를 평가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내가 누구를 가르쳐도 되는 걸까, 난 선생으로서 아이들에게 애정을 못 느끼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들이 자꾸만 떠오르곤 한다.친구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사실 학생들이 그 친구를 바라보듯 학생들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학생들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는 날들도 있곤 하니까. 마치, 내 과장되고 거짓되고 부풀려진 자아를 아이들이 늘 꿰뚫어 볼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으니까. 늘 수업을 할 때면 학생들에게 미안해진다. 나는 너희에게 좋은 선생님은 아닐 것 같구나. 좋은 선생이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너무 부담스럽구나. 그냥, 가까스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버티는 아저씨 한 명에 불과한 것만 같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얼마 전 10년째 회사 생활을 하는 친구에게 토로한 적이 있다.물론 술김에.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이야기들 배부른 소리인 것만 같고 못할 소리인 것만 같으니까. 헌데 친구는 진지하게 들어주곤 이런 말을 했다. 너 그거 딱 소포모어 징크스(Sophomore jinx)라고. 원래 회사 다니는 애들도 2년차에 딱 너 같은 소리 한다고. 처음 1년은 멋모르고 지나가고, 2년차 돼서 일이 좀 익숙해지니 내가 잘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라고. 익숙해지는 과정이고, 자연스러운 거라고 답해줬다.우리는 종종 익숙해지는 과정이 선형적이고 안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하지만 어쩌면 익숙해지는 과정이라는 건 그렇게 선형적이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을 지 모르겠다. 익숙함의 과정에는 종종 이런 시기가 있을 지도 모르는 셈이다. ‘잘 해나가다가도 한 번씩 꼬꾸라지기’, ‘어처구니없는 실수 한 번씩 저지르기’, ‘자신감을 모두 잃어버리기’ 등등. 어쩌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의 일을 지속하는 것, 그것 자체가 익숙함이라는 걸 지도 모르겠고. 나도, 친구들도, 모두 그 과정 속에 놓여있다 보니, 아직은 삶에 익숙하지 않은 나이니까. 그러니 마음이 꺾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끔 속상해지더라도, 늘 속상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2023-04-04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

시인이 보내는 밤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언스플래쉬 시는 언어로 이루어진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언어로 설명될 수 없다. 박연준 시인은 자신의 시 ‘밤의 식물원’에서 말한다. ‘시 쓸 때 내 얼굴엔/밤/비/뱀이 내리고/층층나무 열한 그루 사이를/옮겨 다니며 숨는 사람’이라고.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시는 ‘밤의 머리카락’처럼 ‘묶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시는 ‘작고 굵은 것을 잉태’하며 ‘비탈길을 타고 도망가’기 쉽고 ‘모든 것에 스민 후 재빨리 사라지’는 모양일지도 모른다.나는 시인들이 좋다. 시보다 시인이 좋을 때도 있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은 늘 시인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고뇌하는 밤. 빈종이 위로 채워지는 낯선 언어. 그것을 쓰는 손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부지불식간 사랑에 빠지고 만다.시인에 관한 일방적인 짝사랑은 꽤 오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은 나의 아버지로부터 기인하였을 테다. 아버지는 시를 썼다. 썼다는 말은 이미 종결된 사건으로 느껴지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물론 그는 지금도 시를 쓴다. 이따금 그것을 내게 보여주기도 하는데 세상 밖으로 내보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사그라지지 않는 예술적 불씨를 감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겐 그런 내색을 드러내지 않는다.나의 아버지는 멋을 아는 사람이다. 외적으로 자신을 꾸미는 일에도 능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인생의 가치를 안다. 삶의 유한함을 이해하고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고 놓쳐서는 안 될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예리함이 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 지금까지도 부단히 노력한다.돌이켜보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어딜 가도 멋지게 차려입는 것은 물론이었고 유려한 말솜씨로 사람들 사이에서 늘 중심을 차지했다. 언젠가는 뒷머리를 말꼬리처럼 길러서 보라색으로 염색하기도 했었다. 보라색 머리카락과 백석의 시집이 잘 어울린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의 손을 잡고 동네를 걸어 다니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봐, 우리 아빠는 이렇게 멋진 사람이야.’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도 유효해서 여전히 나는 나의 아버지를 여기저기에 자랑하고 싶다.아버지는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색소폰을 연주했으며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교사를 꿈꾼 것은 아니지만 교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는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으므로 그런 불행이 지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 때문에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그로 인해 꿈이 좌절되는 순간을 맛보기도 했다.나는 나와 닮은 어느 청년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제대로 된 삶을 손에 쥐기 위해서 부단히 발을 구르던 한 남자를. 어느덧 나는 그의 나이와 비슷해지고 그의 몸짓을 어렴풋이 이해할 것도 같다. 낭만에 매몰되는 순간 무너지는 현실적 삶이 있다. 이상만큼 중요한 건 먹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나는 알고 있다. 책상 앞에 앉은 시인의 밤이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자기 의심과 불안으로 가득한 시간을 견디면 모든 걸 마주했다는 생각과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자각이 동시에 떠오를 것이다. 낯선 언어를 쓰는 손은 현실과 뒤엉켜 생채기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니 그 밤을, 그 손을, 어떤 본질을 끝끝내 움켜쥐려는 애달픈 마음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어떤 고민이 찾아오면 나는 주저 없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다. 그가 내어주는 답은 늘 명쾌하고 선명하다. 그는 현실을 살면서 낭만을 꿈꿨던 어른이다. 내가 글 쓰는 삶을 택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신춘문예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떠올렸던 사람도 아버지였다. 내가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위경련이 일어났다던 아버지. 나의 예민함과 날카로운 기질까지 작가적 영역으로 치환시켜준 아버지. 그는 내 인생을 긍정할 수 있게 만들어준 가장 고마운 조력자다.감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버지의 언어로 만들어진 인간이다. 그가 내뱉었던 문장으로 구성된 딸이다. 세상의 유려한 문장에 마음이 요동쳐도 중요한 순간엔 내 안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보일 리 없지만 분명하게 보이는 마음. 그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 건네준 것이다.

2023-04-04

다시, 나무심기를…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대지의 기운이 왕성해지는 4월이다. 이상고온현상으로 개화시기가 빨라져서 일찍 꽃이 진 자리마다 잎새들이 일제히 돋아나며 생명의 등불을 켜고 있다. 나무에 물이 오르면서 꽃이 피거나 잎사귀가 앞다투어 드리워지니, 산과 들은 나날이 연둣빛과 초록빛의 융단을 펼쳐 가는 듯하다. 낭창한 나뭇가지마다 앙증스럽게 움이 트고 잎차례가 연이어 벌어져서 그야말로 4월은 연초록의 잔치가 열리는 잎새달이기도 하다.바람이 불 때마다 여린 잎새들은 저마다 손을 흔들어 살랑거리면서 많은 얘기를 전해주는 듯하다. 햇살이 스며들고 바람이 스쳐가며 별빛이 내려앉는 잎새들은 저마다 나무의 일원으로서 소임을 다하기 위해 차분하면서도 잔잔하게 나부끼거나 보채기도 할 것이다. 새들의 놀이터가 되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가는 구름도 쉬어 가게 하는가 하면, 빗물을 받아들이고 신선한 공기를 머금으면서 점차 하늘빛을 닮아 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서 나무의 둥치가 커지고 가지를 튼실하게 하는데 한 잎 아끼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나무는 온갖 사연을 품고 다독이며 거목으로 우뚝할 수 있는 것이리라.잎새의 온갖 사연이 켜켜이 나이테마다 스며든, 나무로 만든 책이기에 책장마다 나무의 결이 느껴지고 나무냄새가 나는 걸까? 그래서 ‘어느 시인은 책이 무거운 이유가/나무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던 것일까? 사계절의 변화무쌍함과 누세월의 응축된 풍진이 쟁여져 나무의 무게감과 책의 웅숭깊음이 배어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무와 책은 예나 지금이나 경외스럽고 위중(威重)한지도 모를 일이다.“그럴수록 나무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하루하루를 채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주었다//내게 지금 책이 무거운 이유는/눈물조차 보이지 않고 묵묵히 뿌리 박고 서 있는/그 나무 때문이다” -맹문재 시 ‘책이 무거운 이유’ 중아련한 초·중등시절, 식목일에 등교하거나 또는 마을단위의 부락에서 나무심기를 의무적으로 실시했는가 하면, 봄에 심은 나무에 비료를 주거나 가지치기, 잡목솎아내기 등으로 나무가꾸기 분위기를 조성한 ‘육림(育林)의 날’도 있었다. 국민 식수와 산림녹화를 위한 인식을 높이고 산림사업의 중요성을 부각시켜 국민운동처럼 일어나 나무를 가까이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다. 예전에 딸이 태어나면 시집보낼 밑천으로 장롱을 만들기 위해 집 주위에 오동나무를 심었을 정도로 나무는 유익함이 많았다. 필자는 꼭히 그런 심산은 아니었지만, 30여년 전 딸 아이 태어난 기념으로 고향집 언덕에 ‘동갑내기 자두나무’를 심어 자식을 나무처럼 키운다며 한동안 주위에 회자되기도 했었다.그러나 식목일인 오늘, 격세지감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소회일까? 나무심기는 고사하고 식목일 무렵에 전국적으로 발생되는 크고 작은 산불로 인해 애써 심고 가꿔놓은 산림이 훼손되고 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나무가 사라짐은 책장이 찢기는 것과 진배없다. 숲과 나무에서 들리고 보이는 이야기와 평온함이 책으로 고스란히 담겨서 모두에게 울림과 가르침을 주기 때문이다.

2023-04-04

자율주행의 출현: 기회와 위기

김정현 한동대 교수·AI융합교육원 2022년 12월 15일 필자는 경기시청자미디어센터의 초대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인공지능 관련 기조 강연을 진행한 경험이 있다.당시 인공지능의 역사, 인공지능의 최신기술, 인공지능의 응용사례, 인공지능의 교육 방법 등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청중들과 함께 많은 토론을 진행하였는데 그 중의 가장 기억에 남는 토론은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에 의해 운영되는 비행기가 만약 사고를 일으키게 된다면 해당 사고는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라는 주제였다.사실 위에서 언급한 질문은 비행기 이전에 자율자동차의 출현과 함께 여러 차례 반복되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가령, 인공지능 기술에 의해 작동되는 자율주행차가 도로에서 스스로 주행하다가 사고를 유발하게 되었을 경우 운전자, 자동차 제조사, 아니면 인공지능 프로그램 개발사 중 어디에 책임소재를 해야 할지에 관한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이러한 자율주행 차 사고의 법적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미국 자동차공학회(Society of Automotive Engineers, SAE) 에서는 통용되는 자율주행 기능의 단계를 레벨0에서 레벨5까지 총 6단계로 구분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운전자의 주행을 지원하는 수준인 레벨2 까지는 운전자가 책임을 지는 것에 무게가 실리고 있는 반면 운전자의 개입 없이 주행이 가능한 레벨4부터는 제조사가 책임을 지는 것으로 원칙을 세우려는 움직임들이 보이고 있다.그렇다면 과연 자율주행과 관련한 기술, 법, 제도 등의 준비가 완벽해진다면, 비행기 혹은 자동차에 적용되는 인공지능 기반 자율주행 기술과 관련된 문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해당 질문에 답하기 위해 필자는 2014년 인공지능의 윤리적 딜레마(Dilemma) 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엠아이티미디어랩(MIT Media Lab) 의 연구원들이 설계한 광차 문제(Trolley problem) 를 예로 들고 싶다.해당 문제는 인간의 도덕적 윤리관을 묻는 문제로 설정된 조건은 다음과 같다. 빠른 속도로 선로를 달리는 광차가 있고 해당 광차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통제 불능에 빠져 있는 상태이다. 불행하게도 광차의 현재 선로에 저 멀리 5명의 사람이 서 있는 상황이며, 만약 5명의 사람을 살리고자 한다면 기관사는 기존 선로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그러나 변경된 선로에 저 멀리에도 1명의 사람이 서 있는 상황이다. 5명의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기존 선로를 변경하여 무고한 한 명을 희생시킬 것인가? 아니면 기존 선로로 그대로 운행할 것인가?광차 문제는 어떤 이들에게는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분명 자율주행 기술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다양하고 유익한 기회들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자율주행으로 인한 위기 또한 존재한다. 변화는 기회를 가져온다. 그 변화가 기술 혁명일 때는 그 효과가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 기회가 때로는 위기를 동반한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023-04-04

‘복수’ 우리를 위로하는 서사의 상쾌함

바야흐로, 복수의 시대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자기가 겪었던 부당한 상처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결국 복수하고야 마는 이야기가 넘쳐 나고 있다.어느새 드라마 ‘더글로리’가 다루는 복수는 우리 모두의 욕망이 되었다. 일찍이 이청준은 소설 ‘벌레이야기’에서 복수와 용서의 역설을 다뤘고, 이창동 감독은 ‘밀양’에서 이를 곱씹었다. 박찬욱 감독은 복수에 대한 영화 3부작을 통해 복수라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행위에 대해 이성적이고 지적인 성찰을 행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 눈앞에 나타나는 복수의 서사는 좀 더 직접적으로 욕망을 자극한다. 나도 모르게 손을 꾹 쥐고 몰입하게 된다.모든 사람이 복수를 꿈꾸어야 만큼 실제적으로 비인간적인 폭력이나 부당한 대우를 당했던 것은 아닐 테니까, 그 복수에 대한 감정은 우리가 이야기를 볼 때 늘 그러하듯 상상적인 감정이입에 해당한다. 철학자 니체가 말했던 르상티망(ressentiment), 즉 약자가 강자에게 갖기 마련인 정의롭지 못한 세계에 대한 시기심이나 질투 같은 원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니체는 이러한 원한의 감정은 노예의 것이고, 이를 통해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지만, 우리는 인간이라면 사회 속에서 누구나 겪기 마련인 질투나 원한, 열등감 등을 통해 나도 모르게 복수의 서사에 빠져들고 만다.사실, 원한과 복수에 얽혀 있는 이야기는 인류가 생겨나면서 동시에 나타났다고 해도 좋을, 어쩌면 인류의 유전자 속에 새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과 인간이 얽혀 살아가는 과정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과정이고, 그 속에서 저질러지는 폭력과 증오는 누군가의 기억에 씻을 수 없는 공포를 만들어낸다. 실제로는 전혀 불가능하지만 이야기로나마 시원하게 복수하는 상상을 해보는 것, 그것이 인류가 만들어낸 복수 이야기의 요체이다.16세기 말에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햄릿’에서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클라우디스에게 복수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살아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지만, 알렉상드르 뒤마가 1844년에 쓴 작품 ‘몽테크리스토 백작(Le Comte de Monte-Cristo)’에서 에드몽 당테스는 자신을 배신하고 모함해서 감옥에 가둔 자신의 친구들에게 불같은 복수를 행한다. 프랑스 작가로 가장 많은 외국어로 번역되어 가장 많이 읽힌 신문 연재 소설을 썼던 알렉상드르 뒤마는 언론 미디어가 발달해 점차 고양되기 시작했던 당대 독자들의 욕망을 예민하게 파악하여 머뭇거림이나 망설임을 남기지 않는 훌륭한 복수극의 고전을 남겼던 것이다.이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보여준 복수의 플롯은 그것이 지금 쏟아져 나오는 이른바 복수의 전형이 되었다. 14년 간 감옥에 갇혀 복수심을 키워왔던 당테스는 감옥 안에서 ‘미친 신부’인 파리아를 만나 원수에 대한 진상과 복수를 위한 지식을 배우고, 그의 시체 가방에 숨어 탈출한다. 그리고 복수에 필요한 재산을 형성하고 백작의 지위를 산다. 그리고 프랑스에 돌아와 이제는 적이 된 옛 친구들에 대한 복수를 시작하는 것이다.당테스가 행했던 복수는 배신자들이 갖고 있는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돈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는 이들에게는 경제적 파탄의 복수를, 명예를 중시하는 이들에게는 부정의 폭로를 통해 명예를 타락시키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도록 하는 복수를, 그리고 법을 왜곡한 이에게는 재판정에서 그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복수를 행한다. 세상에 대해 그릇된 마음과 폭력으로 대하는 이들에게 그대로 돌려주는 복수란 얼마나 상쾌한가. 복수의 실현가능성이나 효용이나 부작용 같은 걱정은 접어두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에만 마음을 써볼까 한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상상은 그렇듯 자유로이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가.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3-04-03

조선 시대 선비가 봄꽃을 즐기는 법

전국이 봄꽃 축제로 들썩이고 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4년 만이다.3월 초순 매화 축제로 시작하더니 진달래 축제, 벚꽃 축제로 이어지면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까지 오픈했다.지난 주말에는 활짝 핀 꽃에 날씨까지 가세해 상춘객의 마음을 자극했다. 전국 각지 이곳저곳에서 열린 봄꽃 축제에는 꽃 구경하겠다고 몰려든 사람으로 가득했다.4월 한 달은 산에 들에 핀 꽃들이 일상에 지친 우리의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김광계(金光繼·1580~1646)는 경상도 예안현(현재 안동)의 외내(烏川) 마을에서 태어났다.오랜 기간 과거 시험을 준비했지만, 인조반정 이후 과거를 통한 입신출세의 꿈을 버리고 오직 성리학 공부에 골몰했던 인물이다.뒷날 경상감사로 부임했던 인물들이 그의 학덕을 높이 평가해 관직에 천거했지만 모두 응하지 않고 끝까지 처사형 선비로 살았다.김광계는 23세인 1603년(선조36) 1월 1일부터 65세인 1645년(인조23) 9월 30일까지 약 43년 동안 일기를 기록했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대략 28년의 기록이다.20대의 일기에는 과거시험에 대한 관심과 준비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김광계는 과거를 단념하고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일상을 영위했다.일기에는 지속적인 독서 기록과 꾸준한 학문 활동이 잘 나타나 있으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전쟁 체험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김광계는 꽃을 좋아했다. 해마다 음력 3월만 되면 산에 들에 핀 꽃들에 눈길을 주었다.그의 일기에서 봄꽃에 대한 첫 기록은 24세이던 1605년(선조38) 3월 4일의 일기에 나타난다.“할머니가 제천 할머니 등 여러 명의 부녀자들과 함께 근시재(近始齋)에서 꽃구경을 했다. 제천 할아버지도 우리와 함께 봄 산에 놀러 가고 싶어했으나 찾아온 손님 때문에 놀러 갈 수 없었다. 나는 친구와 함께 일휴당(日休堂)에서 술을 마셨다.”봄이 오고 꽃이 피니 남녀노소 막론하고 꽃구경에 마음이 들떴나보다. 할머니를 비롯한 부녀자들은 집 주위에 핀 꽃을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김광계를 비롯한 남성들은 봄꽃을 보기 위해 산으로 나가려했으나 손님 때문에 마음을 접었다. 이루지 못한 봄꽃 구경 때문에 아쉬웠던 그는 친구와 술을 마시며 마음을 달랬다.이후에도 김광계는 음력 3월 꽃이 만발할 때면 어김없이 그 광경을 기록했다.어느 해는 이른 봄에 매화 꽃술을 발견하고 은근한 설렘을 담아내기도 했고, 어느 해는 비를 맞아 떨어지는 산꽃을 보며 애석해하기도 했다. 또 아온 날도 있었다. 이 계절에 김광계의 시선은 온갖 꽃에 머물렀다. 매화, 진달래, 살구꽃, 모란꽃, 장미꽃 등 피었다 지는 꽃에 기뻐하고 또 애석해하며 봄꽃들과 어울렸다.꽃에 대한 김광계의 마음은 보통 사람보다 유난했다. 65세이던 1645년 음력 3월 6일의 일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또 몸을 조리하였다. 젊은 종에게 산에 올라가서 산꽃이 피었는지 보고 오라고 시켰더니, 한참이 지난 뒤에 무수히 많은 꽃떨기를 꺾어 가지고 왔기에 산꽃이 크게 피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꽃을 병에 꽂아두고 감상하였다. 밤사이에 몸을 뒤척이며 잠을 자지 못했다.”아픈 와중에도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종을 시켜 산꽃이 피었는지 보고 오라 시켰을까.마침 그 종은 산에 핀 꽃을 한가득 따서 가져왔고 김광계는 그 꽃들을 병에 꽂아두고 감상했다. 최은주 한국국학진흥원책임연구위원 밤에 잠도 쉽게 이루지 못할 만큼 아팠던 것 같은데, 그는 꽃을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일기의 마지막이었던 이 해의 봄꽃은 김광계에게 즐거움보다 슬픔을 배가시켰다. 보름이 지난 음력 3월 20일에는 며느리도 전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있었기에 근심이 더욱 깊어진 즈음이었다.“들으니 며느리가 땀을 흘리고 나서 열이 내렸다고 한다. 필시 전염병일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반석(盤石) 위로 나아가니 호숫가 산에는 온갖 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때가 바로 일 년 중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근심과 걱정이 겹친 상황인 데다 전혀 함께 할 형편이 안되니 더욱 한탄스럽다.”며느리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김광계는 호숫가로 나갔다. 지팡이에 아픈 몸을 의지한 채 둘러본 풍경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계절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사방팔방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의 경치 속에서 김광계는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근심거리가 덮치고 걱정이 겹쳐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봄꽃들을 느긋하게 감상할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다.김광계는 생애 끝자락 시간 속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마주하고 있었다.

2023-04-03

논·밭두렁 태우기

홍석봉 대구지사장 농촌에서 봄철 영농채비에 들어가기 전에 논·밭두렁 태우기가 성행했다. 농촌 곳곳에 연기가 자욱했다. 이맘때쯤이면 관행적으로 행해지던 일이다. 병해충 방제에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농민들이 논·밭두렁에 일삼아 불을 질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논·밭두렁 태우기가 봄철 산불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범죄 행위의 하나로 치부되고 있다. 자칫 논·밭두렁을 태우다가 불씨가 바람에 날려 인근 산으로 옮겨붙으면 산불로 번져 전과자가 될 수 있다.산림청은 최근 산불 발생 위험이 높아짐에 따라 산림 인접지에서의 영농폐기물 및 부산물 불법소각 행위에 대한 집중단속을 실시한다고 밝혔다. 올해 3월말 현재 발생한 산불은 365건으로 예년(240건)에 비해 125건 이상 늘었다. 이중 상당수가 논·밭두렁을 태우다가 발생했다.영농부산물은 생활폐기물에 해당한다. 영농부산물·폐비닐·생활 쓰레기 등을 노천에서 소각하는 것은 불법행위다. 적발 때는 1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받는다.지자체도 농촌지역 불법소각 합동점검단을 구성해 단속 활동을 벌이고 있다. 불법소각에 대한 단속·계도 및 홍보 활동도 한다. 불법소각하다가 적발돼 과태료를 무는 사례도 빈발한다. 전문가들은 논·밭두렁 태우기가 병해충 방제에 별로 효과가 없으며 되레 이로운 벌레를 많이 죽여 농사에 불리할 수도 있다며 자제를 당부한다. 불법 소각은 미세먼지의 원인도 된다.고온 건조한 날씨 속에 청명·한식을 앞두고 산불 위험이 커졌다. 산림 부근에서의 소각, 흡연, 취사 등 불씨는 절대 삼가야 한다.한때 정겨운 풍경으로 여겨지던 논·밭두렁 태우기가 어느덧 천덕꾸러기가 됐다. 4일 비 예보가 희소식이 되길 기다린다./홍석봉(대구지사장)

2023-04-03

축제장 바가지요금, 경북관광 이미지 망칠라

국내 대표 벚꽃 축제인 진해군항제 축제장의 바가지요금이 전국적 논란이 된 가운데 경북도내 각종 축제장에서도 바가지요금이 등장,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는 소식이다.본사 취재팀 보도에 따르면 지난주 주말 동안 안동, 경주 등 도내 벚꽃 축제장을 찾은 많은 관광객이 축제장 주변 음식점의 바가지요금에 불만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안동을 찾은 한 관광객은 “축제장 부스 음식점의 형편없는 음식 질과 가격에 모처럼의 상춘 분위기를 망쳤다”고 했다. 또 경주 벚꽃축제장을 찾은 한 관광객은 “벚꽃의 화려한 풍경에 놀랐고, 질 떨어진 음식과 가격에 세 번 놀랐다”고 말했다고 한다.손바닥만한 파전 1개에 1만5천원, 오징어 무침이 2만원, 통돼지 바비큐 한접시가 4만원 수준으로 일반식당보다는 모든 음식이 20∼30%정도 비쌌고, 그나마 내용이 빈약해 “누가 보더라도 바가지를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고 한다. 행사장를 찾은 관광객은 행사철을 맞아 임시로 마련된 장소인 점 등을 감안하더라도 “속보이는 얄팍한 상술에 실망했다”고 말할 정도이니 지역마다 대표 축제 이미지에 나쁜 인상을 안겨 준 셈이다. 특히 관광객이 바가지요금에 실망을 느껴 다시 찾지 않을까 걱정이다. 지금은 비슷한 축제가 전국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열리고 있어 축제장 이미지가 곧 관광으로 이어진다. 축제 내용뿐 아니라 음식 물 관리에도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진해군항제 바가지 물가를 경험한 사연이 온라인 상으로 퍼지면서 군항제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됐다. 행사 주관기관인 군항제위원회가 곧바로 사과문을 내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서 추락한 축제 이미지 개선에 나섰지만 한번 훼손된 이미지가 고쳐지기는 쉽지 않다.코로나 사태로 축소되거나 취소됐던 각지역의 축제가 4년만에 기지개를 펴고 있다. 이에 맞춰 많은 사람들도 코로나로부터 해방된 기분으로 바깥나들이에 나서고 있다. 축제장에서 스트레스를 풀고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축제공간을 잘 만드는 것은 행사기관의 역할이다.전국 최고 수준의 경북관광을 위해서는 축제 내용뿐 아니라 바가지요금 시비도 잘 챙기는 것이 행정의 기능이다.

2023-04-03

‘신산업혁신’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연구본부장 1인당 GRDP는 Gross Regional Domestic Product의 약자로, 지역 내 총생산에서 인구수를 나눈 값이다. 이는 해당 지역의 경제 규모를 나타내는 지표 중 하나이다.그런데 대구의 1인당 GRDP는 1993년 이후 약 30년간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특광역시 중에서는 1987년까지는 부산과 광주의 1인당 GRDP가 대구보다 낮았지만, 1988년 광주에, 그리고 1991년에 부산에 역전되었다. 민선 8기 들어 과거 3대 도시의 번영을 되찾고자 하는 대구는 1인당 GRDP를 상위권으로 끌어 올려야 하며, 이를 위해 고부가가치 신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재편하여야 한다.신산업은 기존 산업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혁신적인 산업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취업 기회를 제공한다. 대구가 ‘신산업혁신’을 추진해야 하는 이유는 생산성 향상과 함께 기존 산업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경제성장 동력의 다각화를 추진하기 위해서이다.또한, 기존 산업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의 기술력과 창의력이 필요한 신산업은 대구의 기술 역량과 경제 인프라 강화를 통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대구는 1999년부터 중앙 주도의 지역산업육성정책을 추진하여, 신산업(의료, 에너지, ICT 등) 육성의 마중물로 활용하였다. 2017년부터는 물, 미래형자동차, 의료, 로봇, 에너지, ICT융합 등의 5+1 미래 신산업으로 산업 패러다임 전환을 추진하였다.2022년 민선8기부터는 5대 신산업 전국 최고 도약을 위해 ①UAM(도시항공교통), ②반도체, ③로봇, ④디지털헬스케어, ⑤ABB산업을 집중 육성하고 있다. 5대 신산업의 핵심 키워드로 UAM은 기반구축, 로봇은 서비스로봇, 디지털헬스케어는 선도기업 육성, 반도체는 센서, ABB는 산업생태계 조성 등이다.2021년 기준 대구지역내 신산업 관련 기업수를 파악해본 결과 UAM 1천827개, 반도체 5천636개, 로봇 4천132개, 헬스케어 9천201개, ABB 1만1천591개 로 파악되었다. 기업당 종사자수는 UAM분야가 13명으로 가장 많으며, ABB분야는 2.1명으로 가장 적고 대부분 중소기업이다.따라서 대구 ‘신산업혁신’의 성공은 해당분야 중소기업의 경쟁력 강화에 달려있다.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 개발, 비용 절감 및 효율성 향상, 고객 중심의 마케팅 전략, 전략적 파트너십 구축, 인적 자원의 개발과 활용, 그리고 글로벌 시장 진출 등 다양한 경쟁력 강화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세계적인 산업 클러스터 우수사례 지역으로는 스위스 제네바 금융클러스터, 미국 샌프란시스코 실리콘 밸리, 덴마크 오덴세 로봇 클러스터 등이 있다.대구정책연구원은 이 지역들처럼 대구 중심의 5대 신산업 대표 클러스터를 구축하고, 글로벌혁신특구 등 국가적 지원체계와의 연계를 강화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또한 연구개발, 창업 및 기술이전, 맞춤형 인재양성 등 지역 대학의 역할을 강화하고, 5대 신산업을 주도할 앵커기업과 기관을 유치하는 방안을 연구하여 ‘대구 신산업혁신 전략’을 제안할 예정이다.

2023-04-03

학폭 당하고도 달라질게 없어 신고 안한다?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중 지난해 통계를 보면, 학폭 피해를 당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답한 초·중·고생 8천370명에게 그 이유를 묻자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라는 응답이 각각 30%, 32.9%, 29%로 높게 나타났다. 고등학생의 경우에는 ‘학교폭력 피해를 알려도 해결이 안 되거나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신고하지 않는다’는 응답 비율이 초·중학생에 비해 높았다. 학폭 신고에 대한 학생들의 기대가 고학년으로 갈수록 낮은 이유는 신고 이후 피해 회복이 이뤄지지 않고 소송전이 벌어지는 등 부작용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게 원인이라고 한다.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포항시내 한 학부모의 글을 본지기자가 취재한 내용을 보면, 학교폭력을 당하고도 신고하지 않은 이유를 여실히 알 수 있다. 그 학부모는 아이가 매일 학교에서 폭력을 당한다는 소리를 듣고 담임교사에게 두 차례에 걸쳐 전화 통화로 설명했지만, 교사는 ‘증거를 직접 수집하라’, ‘기다려 달라’는 등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 속이 상한다는 글을 올렸다. 학폭사태 처분을 놓고 학교 당국이 피해자나 학부모에게 신뢰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우리사회가 아직도 학교폭력의 심각성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답답하다. 학교폭력은 피해 학생과 가족은 물론이고 공동체에 두고두고 상처를 안기는 사회병리현상이다. 교육부는 당초 지난달 내놓기로 했던 학교폭력근절대책 발표를 이달 중순으로 미뤘다.국가수사본부장에서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 학폭 문제를 둘러싼 청문회(3월 31일)가 정 변호사의 불출석으로 연기된 게 원인인 모양이다. 교육부는 과거에도 학폭사건이 사회이슈가 될 때마다 수습책을 내놓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대책의 핵심은 피해 학생들이 고통을 당하면서도 신고를 꺼리는 현상을 막을 방안을 찾는 것이다. 그러려면 가해자 관리를 더 엄격하게 하고 피해자 보호를 확대할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학폭대책의 근본적 방향은 가해자는 엄벌을 받고 피해자는 보호돼야 한다는 것이다.

2023-04-03

‘펀 마케팅’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홍덕구포스텍 소통과공론연구소 연구원 편의점에 자주 들르는 사람이라면 음료 진열대에서 밀가루 포대나 구두약 디자인의 캔맥주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가 협업하는 것을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이라고 한다. 유명 연예인이 직접 디자인한 의류, ‘포켓몬 빵’처럼 게임이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식품과 조합한 상품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구두약과 맥주처럼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조합하는 것이 유행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상품에 의외성을 부여함으로써 기업은 시장의 관심을 끌고, 소비자는 이를 소비하며 즐거움을 얻는다.이처럼 대중의 재미와 관심을 공략하는 마케팅 기법을 ‘펀 마케팅(Fun Marketing)’이라고 부른다. 최근에는 재미를 구매의 기준으로 삼는 소비자를 가리키는 ‘펀슈머(fun+consumer)’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어떤 상품이 일단 펀슈머들의 관심을 끄는 데에 성공하면 SNS를 통해 그 상품의 이미지가 순식간에 확산된다. 펀슈머는 단지 재미를 위해 상품의 이미지를 공유할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해당 상품에 대한 호감도 함께 공유되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마케팅 효과를 거두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때 콜라보레이션의 대상이 되는 브랜드 간의 거리가 멀수록 대중의 관심을 끌기에 유리할 수 있다. 구두약 디자인의 흑맥주라니, 어떤 맛일지 궁금하지 않은가.그러나 이질적인 브랜드를 조합하는 과정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한 유명 빵집에서 인기 메뉴인 ‘튀김 소보로’ 모양 비누를 출시했다가 아이들이나 노인들이 음식으로 착각하고 먹을 위험이 있다는 항의를 받은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은 콜라보레이션 상품을 기획할 때 문화적 리터러시(literacy·이해력) 격차에 대한 배려가 필요함을 잘 보여준다.몇 년 전 시멘트 제조업체가 출시한 ‘○○표 시멘트 백팩’은 시멘트 포대의 디자인과 질감을 실감나게 구현하여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고, 금세 품절되어 온라인에서 정가의 두 배가 넘는 금액으로 거래되기도 하였다. 업체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건설현장 작업자 차림으로 ‘시멘트 백팩’을 매고 있는 이미지를 광고로 내보내고, 이 상품에 ‘내 삶의 무게’라는 이름을 붙였다.이 상품은 ‘펀 마케팅’을 통해 성공적으로 시장에 받아들여졌다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시멘트 백팩’은 동료 시민과 노동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지금도 소규모 건설 현장에서는 개당 40kg에 달하는 시멘트 포대를 작업자들이 몇 개씩 등에 지고 나르는 일이 드물지 않으며, 이는 대단히 고된 노동이다. 우리가 이용하는 건물들, 시설들 모두 이러한 노동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노동에 대한 존중과 고마움을 잃어간다는 데에 있다. ‘시멘트 백팩’이라는 상품과 시멘트를 ‘곰방치는(건축자재 등을 나르는)’ 건설노동자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인가. 관심경제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상품화해도 괜찮은가?

2023-04-03